베이컨: 회화의 괴물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84
크리스토프 도미노 지음 / 시공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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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이란 이름을 듣고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이라면 돼지 뱃살을 훈제한 바로 그 베이컨일 것이다. 거기에 인문학적 소양이 좀 있고 약간 배가 부른 사람이라면 영국의 경험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나는 오래 전에 '아는 것이 힘!'이라는 붉은 고딕체 페인트 글씨가 흰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고등학교를 3년 동안 다닌 적이 있다. 그 학교 또한 한국의 대부분의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베이컨 계열의 학교였던 것...

자, 여기까지가 '베이컨'이란 기호가 가지고 있는 외연적 내포적 의미들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나에겐 돼지고기 베이컨을 물리치고 '베이컨'의 외연적 의미(디노테이션)를 차지하고 있는 강적이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회화의 괴물' 프란시스 베이컨(1909-1992)이다. 철학자 베이컨과 동명이인이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베이컨 가문의 후손이고, 프란시스란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일부러 붙여 주었다고 한다. 이 베이컨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에 셰익스피어가 있는데, 한때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철학자 베이컨이 쓴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 있었던 만큼 그의 셰익스피어 선호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유도 있는 셈이다...

아일랜드 태생으로 한번도 미술교육을 받아보지 못했던 베이컨은 엄마의 속옷을 입어 봤다가 열여섯 살에 집에서 쫓겨난다.(나중에 그는 동성연애자가 된다.) 그리고 전전했던 여러 직업 가운데는 요리사도 포함돼 있다고 하니 그의 생활고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1927-1929년 사이의 파리 생활을 통해 그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고 자수성가한 화가가 된다(그는 20세기에 가장 잘 팔린 화가의 한 사람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 바로 파블로 피카소(정확히는 그의 그림들). 미술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처음 그의 그림들을 보고(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에서 처음 보았는데) 입체파라고 해야 하나, 표현주의라고 해야 하나 헷갈렸는데, 그건 좀 무식한 생각이었고, 그의 비틀린 육체의 형상들은 좀더 고차원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면, 그는 형상적인 것에서 '형상'(Figure)을 빼내고자 한다. 더 쉽게 말하자면, 그는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외침 그 자체를 그리고자 한다. 한 대목을 인용하자면:

'베이컨에게 이 고통받는 육체는 보편적 존재의 체험과 자기 자신의 삶의 경험을 뒤섞어준다. 너무나 자주 그려진, 고통의 보편적 상징으로서의 예수의 이미지와 푸줏간의 도마 앞에서, 그리고 쉽게 부패하는 고기 앞에서 느끼는 구체적 감각이 그 안에 섞여 있다. 가죽이 벗겨지고 피 흘리고 퍼렇게 멍든 그 육체를 그려 베이컨은 고집스럽고 친절하게 이를 일깨우려 한다. 베이컨의 잔혹함은 모든 애정이나 감정뿐 아니라 혐오스러움마저 초월한 바로 이 급진적인 유물론에서 나온다.'(90-93쪽)

다시 들뢰즈의 말을 빌면, 현대 회화는 두 가지 조건에 직면해 있다. 우선 사진이 회화적이고 자료적인 기능을 떠맡게 되었고, 다음으로 작품에 회화적 의미를 부여했던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처럼 종교적 감정을 거부하고 사진에 포위당한 현대 미술은 회화에 잔존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비참한 영역인 '구상성'과의 관계를 끊어야'(121쪽) 했으며 추상회화는 그 사례이다. 그리고 베이컨이 제시하는 건 그 또다른 사례이다. 그 또다른 사례에 대한 입문서로서 이 책은 더할 나위없다. 134개의 각종 도판과 사진이 그 증거이다. 그래서 아쉥보와의 대답집 <화가의 잔인한 손>과 더불어 적극 추천할 만하다. 그 대담집에 있는 거지만, 베이컨은 영화감독도 되고 싶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베이컨의 그림들은 강렬한 몰입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느끼는 것이 힘!'이란 걸 정말 느끼게 해준다. 이것이 내가 돼지고기 베이컨이나 철학자 베이컨보다 화가 베이컨을 더 좋아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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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황홀 - 우리시대의 지성 5-014 (구) 문지 스펙트럼 14
송상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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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한 평론가 김현의 글 어디에선가 송상일이란 이름을 본 적이 있다. 퍽 상찬했던 거 같고, 종교적이라는 얘기도 붙어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는 한 세기가 지났다! 김현이 작고한 지도 10년이 넘었고! 아주 드물게 보는 송상일의 이번 에세이집은 그런 기억들을 떠올려 주었다. 아주 황홀하게!...

<책머리에서> 저자는 '시간의 틈새들을 훔치듯 낚아채며 썼다. 그래서 천식 앓는 문장이 되었다.'고 미리 겸양조(혹은 변명조)의 문장을 쓰고 있지만, 가끔 천식을 앓는 나는 아직 그와 같은 문장, 천식 앓는 문장(!)을 쓰지 못한다. '천식 앓는 문장'이란 표현에서도 짐작되는 바이지만, 책은 산문(어떤 논변)이라기보다는 시이다. 그리고 저자가 줄곧 국가와 대응시키면서 옹호(?)하고 있는 것도 역시 시이다. 그는 시로써 시를 옹호한다. 일종의 동어반복인데, 그의 말을 빌면, 시는 동어반복의 운명으로써 모든 '있는 것들'에 저항한다. 아니 본때를 보여준다. 마치 논개의 낙법처럼...

<국가와 황홀> <존재와 무> <제유> 세 개의 장과 보탬말, 그리고 부록(<똥 이야기>)으로 돼 있는 이 책을 지난 한주 아주 아껴서 읽으며 나는 한 가지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간혹 왜 시도 때도 없이 (허)무에 직면하는가, 혹은 그에 포박당하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저자에 의하면 나에겐 아무래도 '시인'될 기질이 있는 모양이다!

그에 의하면, 시는, 그리고 시인은 존재가 아닌 (허)무에 들려 있는 존재(또 존재?)이다. 시인은 미래를 가늠하지 않으며(계산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떠한 생산적 활동과도 무관하다. 에로스(생식적 섹스)와 무관한 에로틱(생식 없는 섹스)이 그러하듯이. 그리하여 생식 없는 섹스에 몰두할 때, 즉 에로틱에 몰입할 때, 그리고 시를 쓸 때, 우리는 얼빠진 존재들이다. 저자는 이 얼빠진 존재의 위엄에 대해서 아주 우아하면서도 튼튼한 문장들로 말한다. 그 점이 맘에 든다...

황홀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것이니, 이 책에서 국가/황홀이란 이분법이 결국 무얼 생산했느냐고 묻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리라. 다만, 읽고 기뻐하며 가까이 둘 일이다. 이런 문단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제값을 다하고 있으니까...

'정액을 소비하는 동물은 시를 쓰는 동물밖에 없다. 정액의 낭비는 유별나게 인간적인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금욕주의는 동물적인 데가 있다.'(34쪽) 우리 주변엔 부자 동물과 가난한 동물 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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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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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콜.. 한동안 오증자 교수의 절판된 <고도를 기다리며>를 찾으러 다녔었는데, 민음사에서 '예쁘게' 책이 나왔다. 무엇보다도 한국어로 안심하고(!)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고작 네 명의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이 무채색의 희비극을 읽으며 나는 베케트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에 놓인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도 '부질없는(혹은 어이없는) 기다림'이란 표현이 그 경계를 표시하는 말이 될 수 있을까? 어떤 궁극적 의미에 대한 기다림이 모더니즘과 배를 맞대고 있다면, 그것의 부질없음을 늘어놓는 수다는 포스토모더니즘의 정신과 손잡고 있다.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는 거야.'(134쪽)라는 똑똑한 블라디미르의 말이 이 극 전체를 잡아두고 있지만, 확실한 건 기다림의 대상이 아니라 기다림 자체일 뿐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지루하다고 말한다.

2막의 끝에 이르러 그는 '이 모든 게 어느 정도나 사실일까?'(152쪽) 회의하며, 무덤 위에서 아이를 낳는 산모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일시적인 깨달음이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이 이상은 버틸 수가 없구나'까지 가 보지만, 고도의 전갈을 전하는 소년이 등장하자, 이 모든 일들이 되돌이표처럼 '다시 시작'된다는 걸,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는 걸 그는 체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체념으로부터 우리가 과연 얼마나 도주해 왔는가를 점검해 보는 것이다.

마치 시지프의 신화처럼 반복되는 (부조리한) 일상 속에서 어떠한 신화적 기다림에도 의탁하지 않은 채 과연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이 단속순환적인 세계의 문밖으로 외출할 수 있는가? 그럴 준비를 하고 있는가? 이어지는 작품인 <승부의 종말>에서 베케트는 그 외출(떠남)의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이지만, 과연 우리는 어떠할까? 과연 우리의 게임도 끝난 것일까? 베케트의 깊게 패인 주름을 들여다 보면서 나는 아직도 그 해답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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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심리학 하룻밤의 지식여행 4
딜런 에반스 지음, 이충호 옮김, 오스카 저레이트 그림 / 김영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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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심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독자가 있을까? 그러한 관심이 정작 프로이트나 라캉을 읽는 일에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하더라도, 하여간에 자신의 '생짜' 겸험을 토대로 우리는 적당한 민간심리학 정도는 들먹일 수 있다. 걔는 그런 콤플렉스야라든가, 쟤는 그런 심보(심사)였던 거지, 하는 식으로. 하지만 별로 믿을 거 없어 보이는 이런 심리학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니 우리는 타고난 심리학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심리적 상태라는 것은 우리가 임의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장구한 세월에 걸쳐 우리의 DNA 속에 각인돼 있는 것이다.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어 논리적으로 객관화시키는 것이 바로 진화심리학의 작업이 아닌가 싶다.

그 진화심리학에 대해 저자는 '미래에는 그것을 더이상 진화심리학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심리학이라고 부르게 되겠지요'(172쪽)이라고 결론적으로 자신있게 말한다. 그리고 그 자신감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게 아니라는 걸 독자들은 이 책을 '하룻밤'만에 읽어가면서 깨닫게 된다. 원리는 단순하다. '유전적 이득'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하여 잘 계산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왜 잘 생기고 예쁜 남자/여자를 좋아하며 배우자를 선택하기 위해서 어떤 점들을 고려하는가 하는 것이 일목요연하게 계산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구체화된 게 불과 10년 정도의 기간이라는 게 놀랍다. 아마도 진화심리학은 다윈의학, 사회생물학과 함께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지적 자극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결말 부분에서 저자는 진화론과 진화심리학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 간단하지만 요령있게 해명하고 있다. 문제의 원흉은 다윈이 아니라 허버트 스펜서를 대표로 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이라는 것. 그런 점에서 보면 나치에 의해 곡해되었다는 점에서 다윈은 니체를 빼닮았다. 이젠 그들에게 들씌어진 오해의 거죽들을 들춰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진화심리학을 비판한 사람들이 진화심리학을 유전자 결정론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틀린 것이지만,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170쪽) 이젠 그 비판하는 사람들이 이해해야 할 차례가 아닐까? 한편으로 이러한 류의 교양 시리즈들은 구미의 출판역량을 한없이 부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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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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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나 <성>을 읽고서 도대체 이 작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졌던 독자라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는 더없이 요긴한 자료이다. 작가가 육성으로 고백하고 있는 아버지와의 관계(나는 이것이 그의 문학의 기원이라고 생각하는데)는 너무나 적나라해서 그의 '벌거벗은 영혼'을 훔쳐보는 듯한 죄의식(!)마저 느끼게 한다. 거기에 비하면 카프카 문학의 온갖 해설서들은 왜소하고 초라하게 보일 지경이다.

그의 문학이 부조리한가? 그의 '원체험'으로 제시되고 있는 이런 장면은 어떤가. 아주 어린 나이의 카프카는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달라고 칭얼거린다. 하지만, 엄한 자수성가형 아버지는 그를 파블라취(복도)로 끌고 나가 혼자 세워두는 벌을 준다. '한밤중에 물을 달라고 졸라댄다는 것이 터무니없게도 보이지만 저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만한 일로 집밖으로 내쫓겨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다는 것, 저로서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까지도 저는 고통스러운 관념 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26쪽) 바로 여기에 <법 앞에서>의 카프카, <성> 앞에서의 K의 모습이 아른거리지 않는가. 이러한 체험의 제시는 너무도 노골적이어서 얼핏 그의 문학 전체를 싱겁게 만들어버린다(적어도 덜 신비롭게 만든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카프카가 할 수 있었던 일이란 자신이 아버지가 되든가 가능한 멀리 아버지로부터(아버지란 자리로부터) 도주하는 것이었으리라.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애가 생기면 낳고, 그애들이 이 험한 세상 속에서 잘 건사하고, 나아가 바른 길로 좀 이끌어주기도 하는 등의 일은 한 인간이 대체적으로 해낼 수 있는 최대한'(130쪽)이라고 그는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의 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결혼을 하고 가장이 되는 일은 '아버지가 이루신 최고의 것'이었기 때문이고, 그 자신은 그 아버지를 결코 능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결혼은 '아버지의 고유한 영역'(148쪽)이므로 그에게는 막혀 있는 것이다. 그의 가슴 저미는 상상을 보라.

'때때로 저는 세계 지도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아버지가 사지를 쫙 뻗고 누워 계신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러면 마치 저한테는 아버지가 가리고 계시지 않거나 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않는 지역만이 저의 생활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져요. 그런 지역을 결코 많을 수 없으며 무엇보다 결혼은 그런 지역에서 벗어나 있습니다.'(148쪽) 그리고 그 많지 않은 지역이 바로 문학의 공간이었으며, 그 공간을 방어하기 위해 카프카는 전력을 기울이고 많은 것을 희생한다. 이러한 고백을 담고 있으니 일컬어 '카프카 문학의 기원'이라 하여도 결코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일은 저의 의무입니다. 아니 그 일을 지키고, 제가 막아낼 수 있는 어떠한 위험도, 나아가 그런 위험의 기미조차 그 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제 인생의 성패가 걸려 있다고 할 수 있지요.'(151쪽) 그의 일기들도 곧 완역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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