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한겨레신문의 '책과 사람'에서는 지난해 정년은퇴한 백낙청 교수의 사진과 함께 창비에서 정년기념논총으로 나온 <지구화시대의 영문학>을 소개하고 있다(나는 책을 그제 서점에서 봤지만 그다지 주의하지 않았다). 책은 후학들의 글모음인데, 백교수의 소위 '주체적 영문학 연구'에 대한 권두논문인 윤지관 교수의 "분단체제하에서 영문학하기"가 리뷰에는 잠깐 소개돼 있다. 요컨대, "영문학 연구는 민족문학 운동의 일환"이며, "민족의 구체적 현실, 특히 분단체제 아래서 고통받는 민중의 현실에서 영문학을 연구할 때 새로운 사유전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백 교수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문학관은 민족문학을 지지하는 (영문학뿐만 아니라) 외국문학 연구자들에겐 '중핵'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영문학 연구가 '분단체제하에서 일문학하기"보다 얼마만큼 더 실제적이고 생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민족/민중의 현실'이 걸려 있으므로, 모더니즘이 배격되고 리얼리즘이 맹신되는 것은 당연한 논리인데, 그 리얼리즘은 사실, 문학이 아니어도 고전이 아니어도 무방하며, 아니 오히려 굳이 문학이 아니고 고전이 아닐 때 더욱 생생한 것이지 않을까? 이것은 '위기' 이후에 톨스토이가 러시아민중을 위한 (문학을 넘어선) '문학행위'를 주장할 때 부딪쳤던 것과 마찬가지의 곤경, 곧 아포리아이다.

 

 

 

 



사실, 백교수는 러시아 작가로는 유일하게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도 아니고) <부활>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서양 명작의 주체적 이해를 위하여'란 식의 부제를 달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같은 톨스토이라 하더라도, '문학주의'에 속하는(그래서 톨스토이가 부정하게 되는) <안나 카레니나>는 '주체적'으로 다루기가 힘들 것이다. 이러한 사정이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이라는 시리즈를 통해서, 영문학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비평을 부분적으로 시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영문학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는지. 로렌스 전공자이지만, 아직도 로렌스 문학의 '주체적 읽기'는 미래의 것으로 남아있는 이유가 아닐는지(개별 논문은 있지만, 아직 단행본을 내지는 않았다).

사실 '주체적 영문학 연구'라는 것은 그간에 어떤 이념형으로서 잘 기능해오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실행가능한 일은 아니다. 먼저, 제도적으로. 과연 영미에서 '주체적 영문학 연구'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까? 한국 민족과 민중을 위한 영문학 연구로 말이다. 하다못해 영미의 노동자/민중이나 피억압 유색인종들이 고통받는 현실 속에서, 그러한 현실을 고려하면서 영문학 작품들을 읽고 이해하고 그에 대한 '논문'을 과연 얼마나 실감나게 쓸 수 있을까? 탈식민주의가 있지 않느냐고?

고작 탈식민주의와 백교수의 문학론을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요한 것은 백교수가 영문학의 작품들을 해체하고 부정하는 탈식민주의적 독해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영문학 작품들이 이루어낸 성과는 성과대로 수용하면서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백교수가 말하는 주체적 독법"이라니까. 사실 이 정도면, 영문학 연구의 끝 아니가? 더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이 뭐가 또 있을까? 이러한 탁월한 안목과 성취가 세계 영문학계에 수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그들의 옹졸하고 편협한 시야 탓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방법으로서의 '독법'은 있지만 '읽기'는 빈곤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건 그럴 수밖에 없다. 작품의 성과는 수용하면서 그 한계는 극복하는 지혜로운 읽기, 그리하여 한 작품을 종결짓는 읽기가 어떻게 현전할 수 있겠는가? 거기서 작품은 '지혜'가 개입하기 위한, 그리고 '지혜'에 의해서 지양되어야 할 어떤 매개로서, 올라간 후에 버려져야 할 사다리로서, 소위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한 읽기의 현전은 그리스도의 재림만큼이나 강렬한 열망과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바, 단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족문학론이 이론으로서 질긴 생명력은 유지하며 모든 담론 위의 담론으로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마치 '정의'처럼 도달할 수 없는 이념이기에 그러하다.

같은 리뷰에서 "백낙청의 사유의 또다른 특징은 평론가 임규찬씨의 말대로 초기에 만들어놓은 이론적 틀이 견고하게 지속되는 보기드문 경우에 속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진단되는데, 당위성의 자리에 놓여 있는 이론이 백전불패일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이미 완벽하기에 변증법적 지양과 자기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보완될 뿐이고, 업그레이드될 뿐이다. 그래서, 1960년대말의 '시민문학론'에서 70년대의 민족문학론, 그리고 90년대의 근대극복론까지 "그의 생각의 근본틀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런 거까지 굳이 나쁘다고 비판할 일은 아닐지 모른다. 보기에 따라선 아주 대단한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러한 당위로서의 ‘주체적 영문학’이나 ‘민족문학론’이 결국엔 ‘말하기에 좋은 것(good to talk)’ 정도가 아닐까라는 의혹을 갖는다. 그리고 그건, 진정한 행위가 아니라 행위를 가장한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한동안 논란거리가 됐지만, 창비는 조선일보와 사이가 나쁘지 않다. 창비 편집위원들이 조선일보와 자연스레 인터뷰도 하고, 조선일보에선 간접 책광고도 해주고 하는 식이다.

이번 논문집 발간을 주도한 영문과 교수들이 주축이 된 영미문학연구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윤지관 교수가 지난번에 번역평가사업 발표와 관련하여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고, 이로 인해서 내부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윤교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것이 한국사회에서의 세상사(the way things go)이다. 그래서, 대학교수들의 ‘진보적 문학이론’과 ‘문학행위’란 건, 내가 보기에, 대학 혹은 학문이라는 사이버공간에서의 ‘오버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강준만이 맨날 하는 얘기지만, 그런 의미에서라도 강단 좌파를 신뢰하는 데에는 대단한 주의가 필요하다(그건 일종의 '모험'이다).

흔히 386세대로 80년대 후반 대학가 시위를 주도했던 많은 ‘친구들’(동창들이 다 친구라면) 가운데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이번에 한나라당 공천을 받기 위해서 줄서 있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지만, 이 액티브한 ‘녀석들’은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는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지혜론’을 주창하는 백낙청 교수에 따르면(그걸 정리한 고명섭 기자에 따르면) “지혜야말로 지식과 과학이 넘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의 전망을 열어줄 수 있으며, 문학과 예술은 그 최고의 수준에 이를 경우, 심미적 쾌락이나 개인적 만족을 넘어 그 진리의 세계를 체험하게 해준다. 그 진리 체험이 현실변혁과 내적으로 연결돼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의 전망’은 꿈도 못 꾸면서 여전히 지식과 과학이나, 그리고 철학이나 넘겨다보는 나로선 그러한 ‘진리의 세계’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는다(나는 ‘상식주의자’이다). 다만, 나도 가끔은 삶의 지혜를 터득하곤 하는데, 행위와 행동과 제스처가 다르다는 것을 터득하는 것은 그런 지혜의 하나이다...

 

 

 

 

덧붙임: 인터넷서점에서 제공하는 목차에 따르면, 책에서는 D. H. '로렌스'를 '로런스'로 표기하고 있다. 이미 창비에선 로렌스의 <목사의 딸들>까지 백낙청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한바 있는데, 웬 난데없는 '로런스'인가? 로렌스에 대한 주체적인 이해의 결실이 '로런스'인가? 혹은 로렌스에 대한 현실변혁의 결과가 '로런스'인가? 인터넷서점에서 잘못 타이핑한 게 아니라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왜 쓸데없는 데 시간낭비들을 하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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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3-04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근래 읽은 글 중 가장 유쾌한 글입니다.

로쟈 2004-03-04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시 읽어보니 유쾌하군요...
 

 

 

 

 

최근에 나온 교양과학서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 스티븐 핀커의 <빈 서판 Blank Slate>(사이언스북스) 이다. 로버트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에 이어서 '사이언스 클래식' 시리즈의 두번째 권이다. 시리즈의 이름이 말해주는 바대로,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이 책은 무려 9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다(원서도 500쪽 가량된다). 

 

 

 

 

촘스키만큼 유명한 이 언어학자 혹은 인지과학자의 책들은 <언어 본능>(그린비, 1998)이 번역돼 있지만, 더 많이 번역소개될 필요가 있다. 다니엘 데넷과 함께 '핀커의 모든 책'이라 할 만큼 그의 책들은 수준있는 지식과 교양, 그리고 유익한 문제의식으로 넘쳐난다. 이런 교양서들은 우리를 똑똑하게 만들거나, 적어도 똑똑해진 것 같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러니 읽을 도리밖에(물론 분량에 대해선 할말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책이 번역중이라는 소식을 접한바 있기 때문에 책의 출간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출간소식이 반갑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좀 찜찜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건 책값(40,000원)보다는 책제목 때문이다. 물론 책값이 원서보다 두배 가까이 비싼 건 부담스럽지만(원서의 경우 핀커의 모든 책은 염가본이 나와 있고, 또 중고로는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로크의 tabula rasa를 의역했다는 blank slate를 꼭 '빈 서판'으로 옮겨야 했는지는 아쉬움이 남는다(제목은 책의 얼굴이거늘).

잘 아는 바대로, 타불라 라사(혹은 창비식 표기로 '타불라 라싸')는 '백지(상태)'란 뜻이고, 모든 철학교양서 및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다. 그러니 그냥 '타불라 라사'라고 하든가(이게 차라리 '서판'이란 말보다는 친숙하다), '백지(상태)'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서판'은 글씨를 쓰는 판이 아니라, 글씨를 쓸 종이를 깔아놓기 위한 판을 말한다. 이게 원의에 맞는 것인지도 좀 의심스럽지만, 그럴 경우에라도 '글씨판' 같은 말 대신에, 잘 쓰지 않는 '서판'을 번역어로 선택한 것은 아쉽다.

영한사전에 slate는 글쓰기용 '석판'으로 돼 있는데, 이럴 경우 이 '석판'은 '서판'과는 다른 것이다(전자는 글씨를 쓰는 판이고, 후자는 글씨를 쓰기 위한 판이다). 요컨대, 오역의 범주에 들어갈 소지가 있다. 이것이 내가 이 제목에 대해 찜찜해 하며 유감스러워하는 이유이다. 앞으로 이 책을 거명할 때 매번 '빈 서판'이라고 해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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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 - 9.11과 그에 관련된 날짜에 관한 다섯 가지 논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종주 옮김 / 인간사랑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9.11과 이후의 국제정세를 다룬 책들은 제법 나와 있지만, 내가 읽은 최고의 책은 지젝의 것이다. 하지만, 이 국역본은 대개의 지젝 번역서들과 마찬가지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책이어서, 유감스럽게도 지젝의 고뇌와 만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책읽기의 고난 속에서 허우적거리게만 할 뿐이다.

잠시 그 몰염치를 추궁해 보면, 먼저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에서 따온 책의 제목부터가 잘못 번역되었다. '실재라는 사막으로의 초대'란 뜻인데, 풀어쓰면, (영화에서처럼)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도이다. 제목의 '환대'란 말은 우리말 문법에 맞지 않는데, ‘환대’는 '누구누구를 환대하다'나 '어디어디에서의 환대'라는 표현으로 쓰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어디로의 환대’라니?

책의 서문은 또 어떤가? 25쪽에서, 체스터튼을 인용하면서 지젝이 자유의 역설을 얘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우리는 자유사상이 자유를 지켜내는 가장 안전한 보호물이라고...'로 돼 있는 부분은 '우리는 자유사상이 자유에 대항하는 가장 안전한 방어벽이라고...'의 오역이다. 역자는 'safeguards against freedom'를 '자유를 지켜내는 보호물'이라고 정반대로 옮겼다. 그렇게 되면, 자유사상과 자유간의 역설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런 건 시작에 불과하다. 1장의 제목을 역자는 '실재계에 대한 열정, 모사에 대한 열정'이라고 옮기고 있는데, 지난번 지젝 초청강좌에서의 제목처럼 ‘모사’보다는 '가상'이라고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하며 이해하기에 쉽다. 또, 37쪽의 '외관'은 전부 ‘semblance’의 번역인데, 1장에 제목에서처럼 '모사'라고 했으면, 아예 일관성 있게 ‘모사’라고 하든가, 아니면 '가상'이라고 옮겨줘야 한다. 그것이 외관/외양을 뜻하는 ‘appearance’와 동일하게 번역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리고 'cutters'를 '자르는 자'로 번역했는데, 면도날 등으로 자기 신체에 상해를 입히는 자(대개 여성)를 가리키므로, '면도날 자해자'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8쪽의 ‘심신상관학설’은 ‘holistic’을 옮긴 것인데, holistic이란 건 기계론적(mechanical) 자연관과 대비시켜서 쓰는 말로서, ‘전일론적’ 혹은 ‘전체론적’이란 뜻을 갖는다('심신상관학설'이란 건 영한사전의 것을 그대로 가져온 번역이다).

40쪽에서 '그것을 해내지 못했고'는 '테러(그것)를 한 것이 아니라'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전형적인 포기자(disclamer)'는 '전형적인 부인 문구'의 오역이다. 즉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실제와는 무관하다'는 식의 문구를 말한다. 이어지는 41쪽의 '리얼리티 소프(reality soap)'는 '리얼리티 비누'라고 안 옮긴 게 그나마 다행인데, 이건 그냥 우리식의 드라마이다(TV연속극). ‘soap’는 TV용 연속극이나 멜로드라마를 뜻하는 ‘soap opera’의 약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여자(participants)'는 '출연자'라고 옮겨야 할 것이다. 같은 쪽에서 '생물발생학설(biogenetics)'는 물론 '생물유전학'의 오역이다. 이걸 '생물은 생물에서만 발생한다는 학설('biogenetic'이 그런 뜻이다)'이라고 역자주까지 달아놓은 건 좋게 봐줘도 코미디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이다. 그러니, 아무리 원저가 좋은 책이라 하더라도 이 번역본을 추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대로 된 번역본이 다시 나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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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06-03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s a translator, he is one of the worst!...

비로그인 2004-07-22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엇, 쿤데라 카페의 로쟈 님이시다ㅇ_ㅇ 알라딘에서 뵈어서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일반 교양서로 이 책을 구입하고 싶었습니다만 로쟈님의 말에 따르면 번역가로서 최악인 분께서 옮긴 책인데, 글읽기에 미숙한 제가 제대로 읽어낼런지 시작 전부터 두렵군요.;

2005-04-18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04-18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지 싶습니다'가 아니다, '맞습니다'. 작년 6월이면 제가 모스크바에 있을 때이고, 한글 쓰는 요령도 알지 못할 때라서 어줍잖은 영어로 댓글을 달다 보니까 오타가 났군요. 다른 지적들도 마음놓고 해주시길...

jo 2013-01-17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안보실거 알지만 흔적을 남깁니다.
책러브에 저희 어머님이 다니시는뎅.......
저도 교보문고에서 하시는 강의도 보러 간 적있고요....
인기가 많으셔서 댓글이 통제되어 있나봐요. ㅎㅎ
아, 2012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2013-01-18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텔레비전에 대하여 동문선 현대신서 9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현택수 옮김 / 동문선 / 1998년 11월
평점 :
절판


부르디외의 책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그런 만큼 가장 많이 팔린 이 책은 내가 읽은 바로는 가장 쉬운 책이기도 하다. 심지어 책을 읽기도 전에 대충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고, 그게 읽은 후의 소감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잘 읽히는 책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같은 역자의 <강의에 대한 강의>를 읽고 느낀 것이지만, 부르디외는 아직 적합한 번역자를 만나지 못했다. 불쌍한 부르디외!...

오역의 몇 가지 사례만 지적한다. 서문에서 저자가 매스미디어들의 부추김 때문에 일전을 불사할 뻔했던 터키와 그리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 “그리스 병사의 섬 상륙, 함대의 이동, 그리고 전쟁은 정의를 피했을 뿐이었습니다.”(12쪽) 여기서 “전쟁은 정의를 피했을 뿐”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 영역본이 “war was only just avoided.'(전쟁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인 걸로 봐서 역자는 불어의 justesse(혹은 justice)가 들어가는 숙어(‘가까스로’)를 잘못 옮긴 것이다. 문제는 왜 그런 오역/실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 역자는 그렇다 쳐도(역자의 실력이 그렇다면) 교정자는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단순한 오역을 놓친다면, 다음과 같은 대목은 어떻게 읽고 이해할 수 있을는지? “저는 말하자면 과거의 온정주의 교육적 텔레비전을 바라는 향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향수가 대중의 취향과 대규모 방송 수단의 민주적인 이용을 위한, 대중의 자발적 혁명과 선동 정치적 복종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48족) 읽으면 읽을수록 머리가 아파오는데, 이유는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역자는 아무런 고통없이 번역했을까?).

두번째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과거의 가족주의적-교육적 텔레비전이야말로 제가 보기엔 (로자 룩셈부르크식의) 대중적 자발주의나 대중적 취향에 대한 선동적인 투항 못지않게 대중매체의 진정한 민주(주의)적 사용에 대립됩니다.” 즉 부르디외는 매중매체에 대한 순응이나 전면적인 부정이 아닌, 민주적인/비판적인 활용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문제의 번역문을 그런 뜻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인지?

이런 식의 오역들이 책에는 드물지 않다. 부르디외의 번역이 쉬운 작업은 아니겠지만, 부르디외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번역이 이 정도 수준에 머문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로서는 하여간에 오역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는 수밖에 없겠다. 좋은 책을 읽을 권리는 그냥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불성실한 번역서들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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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4-0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구해서 읽어야 하는 ... 저는요....흐흐
 
믿음에 대하여 - 행동하는 지성 동문선 현대신서 136
슬라보예 지젝 지음, 최생열 옮김 / 동문선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올가을에 방한할 예정이기도 한 지젝으로서 불행한 것은 그 번역서들이 대부분 오역의 진창이라는 사실이다. 비교적 읽을 만한 그의 ‘영화책’들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주의해서 읽어야 하거나 차라리 안 읽는 게 더 나은 번역서들이다. 그간에 압권은 <향락의 전이>였는데, 그보다 더한 ‘향락’을 선보이는 책이 바로 <믿음에 대하여>이다.

책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오역으로 가득 차 있다. '모세의 형상'을 '모자이크한 모습'으로 옮기기 시작하더니 '인도'를 전부 '인디언'으로 탈바꿈시키고,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난데없이 '실존성'으로, '뉴에이지'는 '신시대'로 옮겼다(뉴에이지는 신시대가 아니다!). '진리의 정치'를 전부 '진실의 정치'로 옮기고, '대상 a'는 ‘대상’ ‘물질’ ‘사물’ 등 갈피를 못잡고 옮긴 걸로 봐서 역자는 라캉/지젝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읽어본 적도 없어 보인다(무슨 사명감으로 번역에 나선 것인지?).

정말 경악스러운 대목. “라캉의 관심은 지배자에 관한 강좌로부터 당시 사회에서 주도적 논의 대상이었던 우주에 대한 강좌로의 이전에 있었다. 논점이 우주로 바뀐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38쪽) 전후좌우가 다 오역으로 도배돼 있지만, 이 대목은 정말 하이라이트이다. 믿기지 않을까봐 원문을 인용한다. “Lacan's interest is focused on the passage from the discourse of the Master to the discourse of University as the hegemonic discourse in contemporary society. No wonder that the revolt was located in the universities.”(30쪽)

중학생도 해독할 수 있는 단순한 구문이다. 라캉의 네 가지 (강의가 아니라) 담론(discourse)에 대한 약간의 배경지식만 갖고 있다면 말이다(라캉 입문서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해서 다시 옮기면, “라캉의 관심은 주인의 담론에서 현대 사회의 지배적 담론인 대학의 담론으로의 이동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 반란이 대학들에서 일어났던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여기서 ‘반란’은 아마도 68혁명을 가리키는 듯하다.)

역자는 무슨 생각에서인지(대문자라서?) ‘대학(University)’을 ‘우주’로 옮긴다. 라캉이 천문학자였단 말인가? ‘대학’이 ‘우주’로 바뀐 것이 역자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몰라도 독자로선 놀라 자빠질 일이다. 게다가 이 놀라운 번역서에서 역자는 엄청난 누락도 서슴지 않는다. 번역서 52쪽(원서 45쪽) 밑에서 6행 ‘그러나’ 앞에는 2/3쪽(20행)이 누락돼 있다. 정말 집어던지고 싶은 책이다!

해서 책을 더이상 읽어나갈 수가 없다. 역자나 출판사측의 책임있는 해명을 요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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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7-15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niverse가 우주 아닌가요? 와하하. 이건 정말 우습네요. 출판사에 항의 하셔도 되겠습니다. ^^;;; 이런 책은 리콜해야 한다고 봅니다. 네.

이온서가 2005-02-12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통쾌합니다. 동문선에서 나오는 책들은 대부분 이 수준입니다.
문제는, 동문선에서 좋은 책들을 미리 죄다 선계약 해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범죄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동문선에 항의하는 모임이라도 만들어야 될 듯....

로쟈 2005-03-05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마슈레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를 살펴보았는데, 정말 무슨 생각으로 번역하고 책을 냈는지 알 수 없는 물건이더군요. 동문선은 '동문악'으로 개명이라도 해야겠습니다...

Dieyoung 2005-11-22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라보이 지젝'은 이 책의 번역에 대한 하나의 증상으로 보이는군요(웃음).

해줘 2008-12-26 0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동문선 오역본 시리즈. 개인적으로 동문선은 대한민국 인문학의 적과 같은 출판사라고 생각. 공감합니다.

카니발 2011-01-15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동문선의 불어번역사 가운데 제대로 끝까지 읽어본 책들이 없어요. 개론서 조차도 읽기 어렵게 번역이 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