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월 5일자 <씨네21>에는 슬라보예 지젝의 기고문 "내부로부터 온 괴물(The Thing from the Inner Space)"이 실렸었다. 최근에 그 글을 다시 읽기 위해서 지젝의 원문을 인터넷에서 찾았는데(영문 제목을 치면 '구글'에서 바로 검색할 수 있다), 뜻밖에는 기고문과 원문은 절반만 일치하고 있었다. 어떤 것이 먼저 씌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부로부터 온 괴물"과는 달리 지젝의 "The Thing from the Inner Space"는 온전하게 타르코프스키론에만 집중돼 있었고(주로 <솔라리스>와 <잠입자>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주중 며칠간 나는 집에 가는 길에 그 글을 읽으며 즐거웠다(지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바, 그 글은 최고의 '타르코프스키론'의 하나로 꼽힐 만하다). 여기서는 <씨네21>에서 지젝의 '타르코프스키론'과 겹쳐지는 대목만을 일단 따라가본다(번역이 다소 거칠고 오역도 없지 않으므로 타르코프스키론 전체만 따로 다시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주로 <솔라리스>에 대한 분석이다(가장 결정적인 오역은 굵은 글씨로 표시해 놓았다). 

자크 라캉은 ‘정신분석의 윤리’라는 세미나(1959∼60)를 진행하며 예술이란 언제나 불가능한, 즉 실제의 사물이 만들어내는 중심적 공백을 중심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 진술은 아마도 릴케의 ‘미(美)란 두려운 것을 가리는 최후의 베일이다’라는 오랜 명제에 대한 변주로 읽혀야 할 것이다. 라캉은 이 공백의 주변이 시각예술과 건축에 있어 어떠한 기능을 하는지 암시한다. 여기서 (영화적 예술 역시 포함하는) 시각장(場), 재현의 장이 중심적이면서도 구조적인 공백과 그 공백에 고착되어 있는 불가능성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는지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리하여 결국 영화이론에서 봉합이라는 개념으로 부를 만한 부분을 설명하려는 것 또한 아니다). 나는 좀더 나이브하면서 비약적인 무언가를 하려 한다. 즉 실제적 사물이 영화 내러티브의 디제시스 공간 속에서 드러나는 방식을, 좀더 짧게 말하자면 그 내러티브가 SF호러영화들에서 나타나는 외계의 사물들과 같이 불가능한/외상적 사물에 대해 다루고 있는 영화에 대해 말하겠다는 것이다.   

JACQUES LACAN DEFINES ART itself with regard to the Thing: in his Seminar on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he claims that art as such is always organized around the central Void of the impossible-real Thing - a statement which, perhaps, should be read as a variation on Rilke's old thesis that "Beauty is the last veil that covers the Horrible" (1). Lacan gives some hints about how this surrounding of the Void functions in the visual arts and in architecture; what we shall do here is not provide an account of how, in cinematic art, the field of the visible, of representations, involves reference to some central and structural Void, to the impossibility attached to it - ultimately, therein resides the point of the notion of suture in cinema theory. What I propose to do is something much more naive and abrupt: to analyze the way the motif of the Thing appears within the diegetic space of cinematic narrative - in short, to speak about films whose narrative deals with some impossible/traumatic Thing, like the Alien Thing in science-fiction horror films. 

<스타워즈>의 첫 번째 신이 이러한 사물이 내부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처음에 보이는 것은 한없이 어두운 하늘, 불길할 정도로 고요한 우주의 심연이다. 그 우주에 흩뜨러져 빛나는 별들은 물질적인 대상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점들이고, 조화로운 우주를 보여주는 표식이며, 가상적 대상일 뿐이다. 그러던 중, 돌연 돌비 서라운드 음향에 따라 우리의 뒤에서, 우리의 가장 깊숙한 내면으로부터 진동이 들려오고, 잠시 뒤 타이태닉호의 우주 버전이라고 할 만한 거대한 우주선이 의기양양하게 스크린 안으로 등장하여 그 진동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 밝혀진다. 이렇게 대상으로서의 사물은 우리가 리얼리티로 쫓아내는 우리 자신의 일부분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거대한 대상이 침입해 들어오는 것은 우주의 한없는 공백을 바라보는 두려운 공허를 피해 어떤 안도감을 가져다주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침입이 그와는 정반대의 효과가 있다면 어떻겠는가? 진정한 공포란 우리가 그 무엇도 바랄 수 없는 어떤 과잉되고, 거대한 실제의 침입과도 같은 것에 대한 공포라면 어떻겠는가? ‘무(無) 대신 (실제의 얼룩과도 같은)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것은 아마도 ‘어째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의 근원에 위치한 경험일 것이다.(*이 질문은 하이데거가 <형이상학 입문>에서 물고 늘어지는 질문이다.) 

What better proof of the fact that this Thing comes from Inner Space than the very first scene of Star Wars? At first, all we see is the void - the infinite dark sky, the ominously silent abyss of the universe, with dispersed twinkling stars which are not so much material objects as abstract points, markers of space coordinates, virtual objects; then, all of a sudden, in Dolby stereo, we hear a thundering sound coming from behind our backs, from our innermost background, later rejoined by the visual object, the source of this sound - a gigantic space ship, a kind of space version of Titanic - which triumphantly enters the frame of screen-reality. The object-Thing is thus clearly rendered as a part of ourselves that we eject into reality... This intrusion of the massive Thing seems to bring relief, canceling the horror vacui of staring at the infinite void of the universe - however, what if its actual effect is the exact opposite? What if the true horror is that of Something - the intrusion of some excessive massive Real - where we expect Nothing? This experience of "Something (the stain of the Real) instead of Nothing" is perhaps at the root of the metaphysical question "Why is there something instead of nothing?" 

 
(그와 함께) 난 이 실제적 사물의 특정한 버전들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공간으로서의 사물(성스러운/금지된 지역)에서 상징계와 실제계 사이의 거리가 사라진다. 다시 말해,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물질화된다는 것이다(혹은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의 용어를 쓰자면, 우리의 직관이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생산하는 지대로, 무한히 신성한 이성을 나타낼 뿐인 사물들의 상태가 되는 지대이다).

I want to focus on the specific version of this Thing: the Thing as the Space (the sacred/forbidden Zone) in which the gap between the Symbolic and the Real is closed, i.e. in which, to put it somewhat bluntly, our desires are directly materialized (or, to put it in the precise terms of Kant's transcendental idealism, the Zone in which our intuition becomes directly productive - the state of things which, according to Kant, characterizes only infinite divine Reason).

실제적 사물이 우리의 내밀한 판타지를 직접 물질화시키는 메커니즘을 지닌 이드-기계(id-machine)로 나타나는 것은 훌륭할 것까지는 없지만, 오랜 계보가 있다. 영화에서 그 계보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의 기본 이야기 구조를 머나먼 행성으로 옮겨놓은 프레드 윌콕스의 <금지된 혹성>으로 시작한다. 즉, 다른 남자라고는 만나본 적 없는 딸과 외딴섬에서 홀로 살고 있는 아버지가 있는데, 탐험대가 침입해 들어오면서 그 평화는 깨진다. <금지된 혹성>(사진)에서 미치광이 천재 과학자는 그의 딸과 단둘이 살고 있는데, 우주 여행자들이 그 행성에 도착하며 평화가 깨지는 것이다. 곧, 보이지 않는 괴물이 공격하기 시작하고, 영화의 끝부분에 이르러서 이 괴물은 근친적 평화를 깨뜨린 침입자들에 대한 아버지의 파괴적 충동이 물질화된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소급적으로 말하자면,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의 템페스트 또한 부권적 초자아의 분노가 물질화된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This notion of Thing as an Id-Machine, a mechanism that directly materializes our unacknowledged fantasies, possesses a long, if not always respectable, pedigree. In cinema, it all began with Fred Wilcox's The Forbidden Planet (1956), which transposed onto a distant planet the story-skeleton of Shakespeare's The Tempest: a father living alone with his daughter (who has never met another man) on an island have their peace disturbed by the arrival of a group of space-travelers. Strange attacks by an invisible monster soon start to occur, and, at the film's end, it becomes clear that this monster is nothing but the materialization of the father's destructive impulses against the intruders who disturbed his incestuous peace. (Retroactively, we can thus read the tempest itself from Shakespeare's play as the materialization of the raging of the paternal superego...).

아버지 스스로는 알지 못하지만, 파괴적인 괴물을 만들어내는 이드-기계는 이 머나먼 행성의 표면 아래 작동하는 거대한 메커니즘이며, 그 메커니즘은 자신의 생각을 곧바로 물질화할 수 있는 기계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고, 바로 그 기계 때문에 자멸한 어떤 문명의 신비로운 잔여물이다. 여기서 이드-기계는 프로이트적인 리비도의 문맥에 자리잡는다. 이드-기계가 만들어내는 괴물들은 원시 아버지가 딸과의 공생을 위협하는 다른 남자들에 대해 갖고 있는 근친적 파괴 충동을 실현한 것이다.

The Id-Machine that, unbeknownst to the father, generates the destructive monster is a gigantic mechanism beneath the surface of this distant planet, the mysterious remnants of some past civilization that succeeded in developing such a machine for the direct materialization of thoughts and thus destroyed itself... Here, the Id-Machine is firmly set in a Freudian libidinal context: the monsters it generates are the realizations of the primordial father's incestuous destructive impulses against other men who might threaten his symbiosis with the daughter. 

이드-기계라는 모티브의 궁극적 변주는 논쟁적이기는 하지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사진)가 될 것이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에 기초한 이 영화에서 실제적 사물은 성적 관계라는 교착상태와 연관되어 있다. <솔라리스>는 새로 발견된 행성인 솔라리스에 보내진 우주선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과학자들이 미쳐버리거나, 환각에 빠진 채 자살하는 등)들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우주국 심리학자 켈빈의 이야기이다. 솔라리스라는 행성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때론 정교한 기하학적 구조뿐만 아니라 거대한 아이의 몸이나 인간의 건축물 등과 같이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을 흉내내어 만들기도 하는 액체 표면을 지녔다. 행성과 의사소통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실패하기는 하지만, 과학자들은 솔라리스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어내는 거대한 두뇌라고 가정한다.

The ultimate variation of this motif of the Id-Machine is arguably Andrei Tarkovsky's Solaris, based on Stanislaw Lem's novel, in which this Thing is also related to the deadlocks of sexual relationship. Solaris is the story of a space agency psychologist, Kelvin, sent to a half-abandoned spaceship above a newly-discovered planet, Solaris, where, recently, strange things have been taking place (scientists going mad, hallucinating and killing themselves). Solaris is a planet with an oceanic fluid surface which moves incessantly and, from time to time, imitates recognizable forms, not only elaborate geometric structures, but also gigantic children's bodies or human buildings; although all attempts to communicate with the planet fail, scientists entertain the hypothesis that Solaris is a gigantic brain which somehow reads our minds. 

켈빈이 도착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켈빈은 자신의 침대 옆에 누워 있는, 자신의 사별한 부인 하리를 발견한다(하리는 몇년 전 켈빈이 그녀를 떠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켈빈은 하리를 떼어내려 온갖 시도를 하지만 비참히 실패하고 만다(로켓에 하리를 태워보내지만, 그 다음날 다시 물질화되어 돌아와 있다). 켈빈은 그녀의 조직을 검사하던 중, 그녀가 보통의 인간과 같은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정한 미시적 레벨 이하로 보자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공백일 뿐인 것이다. 결국 켈빈은 하리가 자신의 가장 내밀한 외상적 판타지가 실현되어 나타난 것임을 깨닫는다. 이로써 하리의 기억에 존재하는 이상한 갭에 대한 수수께끼가 설명된다. 물론 하리는 실제 사람이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그녀는 실제 사람이 아니라, 켈빈이 그녀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환상적 이미지가 그 모든 모순 속에서 물질화된 것에 불과하다. 

Soon after his arrival, Kelvin finds at his side in his bed his dead wife, Harey, who, years ago on Earth, killed herself after he had abandoned her. He is unable to shake Harey off, all attempts to get rid of her miserably fail (after he sends her into space with a rocket, she rematerializes the next day); analysis of her tissue demonstrates that she is not composed of atoms like normal human beings - beneath a certain micro-level, there is nothing, just void. Finally, Kelvin grasps that Harey is a materialization of his own innermost traumatic fantasies. This accounts for the enigma of strange gaps in Harey's memory - of course she doesn't know everything a real person is supposed to know, because she is not such a person, but a mere materialization of HIS fantasmatic image of her in all its inconsistency.

여기서 문제는 하리가 자신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않기 때문에 영원히 자신의 자리를 고집하고, 그 자리로 되돌아오는 실제의 위치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린치의 극장판 <트윈픽스>(Fire Walk with Me)에서 나타나는 불처럼, 그녀는 영원히 ?주인공과 함께 걷고?, 그에게 들러붙어, 결코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 가녀린 유령이며, 순전히 외관에 불과한 그녀는 결코 지워질 수 없다. 그녀는 두개의 죽음 사이에서 영원히 되돌아오며, 죽었지만 죽지 않은(undead)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여성은 남성의 증상이며, 남성의 죄책감이 물질화된 것이며, 죄로 타락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남성은 오직 여성의 자살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바이닝거식의 반(反)페미니즘적 개념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The problem is that, precisely because Harey has no substantial identity of her own, she acquires the status of the Real that forever insists and returns to its place: like fire in Lynch's films, she forever "walks with the hero", sticks to him, never lets him go. Harey, this fragile specter, pure semblance, cannot ever be erased - she is "undead", eternally recurring in the space between the two deaths. Are we thus not back at the standard Weiningerian anti-feminist notion of the woman as a symptom of man, a materialization of his guilt, his fall into sin, who can only deliver him (and herself) by her suicide?

<솔라리스>는 여성이란 남성 판타지의 물질화에 불과하다는 개념을 그저 물질적인 사실로 제시하기 위해, 리얼리티 내부에서 작동하고 있는 SF 규칙에 기대어 선다. 하리가 점하는 비극적인 위치는 오직 자신은 타자의 꿈으로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에 어떠한 본질적 정체성도 없으며, 자신 스스로가 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윤리적 행위는 자살이 되는 것이다. 하리는 자신이 영속적으로 현존하기 때문에 켈빈이 받을 고통을 알고서, 결국 자신의 재생을 불가능하게 할 화학약품을 삼켜 스스로를 파괴한다(이 영화에서 가장 두려운 장면은 유령과 같은 하리가 최초의 자살 시도에서 실패하고 다시 깨어나는 장면이다. 액체 산소를 들이마시고서는 완전히 얼어붙은 채 바닥에 눕지만, 에로틱한 아름다움과 비천한 공포가 섞인 가운데 그녀의 육체가 경련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영화에 계속 나타나는 외설적인 물질덩어리로 환원되고 말 때, 자기소멸의 시도마저도 실패하는 것보다 더욱 비극적인 순간이 있겠는가?). 소설의 끝부분에서 켈빈은 솔라리스 대양의 신비로운 표면을 응시하며 홀로 우주선에 남는다. 

Solaris relies on science-fiction rules to enact in reality itself, to present as a material fact, the notion that woman merely materializes a male fantasy: the tragic position of Harey is that she becomes aware that she is deprived of all substantial identity, that she is Nothing in herself, since she only exists as the Other's dream, insofar as the Other's fantasies turn around her - it is this predicament that imposes suicide as her ultimate ethical act: becoming aware of how he suffers on account of her permanent presence, Harey finally destroys herself by swallowing a chemical stuff that will prevent her recomposition. (The ultimate horror scene of the movie takes place when the spectral Harey reawakens from her first failed suicide attempt on Solaris: after ingesting liquid oxygen, she lies on the floor, deeply frozen; then, all of a sudden, she starts to move, her body twitching in a mixture of erotic beauty and abject horror, sustaining unbearable pain - is there anything more tragic than such a scene of failed self-erasure, when we are reduced to the obscene slime which, against our will, persists in the picture?) At the novel's end, we see Kelvin alone on the spaceship, staring into the mysterious surface of the Solaris ocean...

주디스 버틀러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그 둘 사이에 감추어진 계약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한다. 즉 ‘노예에 대한 명령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구성된다. 너는 나의 육체이나, 너의 것인 그 육체가 나의 육체라는 것은 내게 알려서는 안 된다’. 따라서 주인의 측면에서 일어나는 부인은 이중적이다. 우선 주인은 자신의 육체를 부정하며, 탈육화된 욕망으로 남고자 하며, 노예가 자신의 육체로 행하기를 강요한다. 둘째, 노예는 마치 주인을 위해서 행하는 자신의 육체적 노동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활동이라는 듯 주인의 육체로 행동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자율적인 행위자로서 행동해야만 한다.

In her reading of the Hegelian dialectics of Lord and Bondsman, Judith Butler focuses on the hidden contract between the two: "the imperative to the bondsman consists in the following formulation: you be my body for me, but do not let me know that the body that you are is my body".(2) The disavowal on the part of the Lord is thus double: first, the Lord disavows his own body, he postures as a disembodied desire and compels the bondsman to act as his body; secondly, the bondsman has to disavow that he acts merely as the Lord's body and act as an autonomous agent, as if the bondsman's bodily laboring for the lord is not imposed on him but is his autonomous activity.

이러한 이중적(이며 자신을 지워내는) 부정의 구조는 남성과 여성관계의 부권적인 기반을 그려내기도 한다. 첫째, 여성은 단지 남성의 비본질적인 그림자이며 투사/반영으로 위치할 뿐이다. 그래서 신경증적으로 남성을 모방하려 하지만 결코 완전히 구성된 자기동일적인 주체성이라는 도덕적 고매함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반영일 뿐인 이 상태는 부정해야만 하는 것이고, 여성은 마치 여성이 (여성은 태생적으로 복종적이며, 동종적이며, 자기희생적이라는) 자신 스스로의 자율적인 논리에 따라 가부장제의 논리 내에서 행동한다는 식의 거짓된 자율성을 부여받을 뿐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역설은 노예가 더욱 노예가 될수록 자신의 위치를 더욱 자율적인 작인으로 (잘못)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논리가 여성에게도 적용된다. 여성의 궁극적인 노예상태는 그녀가 ‘여성적’인, 즉 순종적이며 동정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때, 스스로 자율적인 행위자가 된다고 (잘못) 인식할 때이다.

This structure of double (and thereby self-effacing) disavowal also reveals the patriarchal matrix of the relationship between man and woman: in a first move, woman is posited as a mere projection/reflection of man, his insubstantial shadow, hysterically imitating but never able really to acquire the moral stature of a fully constituted self-identical subjectivity; however, this status of a mere reflection itself has to be disavowed and the woman provided with a false autonomy, as if she acts the way she does within the logic of patriarchy on account of her own autonomous logic (women are "by nature" submissive, compassionate, self-sacrificing...). The paradox not to be missed here is that the bondsman (servant) is all the more the servant, the more he (mis)perceives his position as that of an autonomous agent; and the same goes for woman - the ultimate form of her servitude is to (mis)perceive herself, when she acts in a "feminine" submissive-compassionate way, as an autonomous agent.

이러한 이유로 여성을 단지 남성의 징후일 뿐이고, 남성 판타지의 체현이며, 진정한 남성 주체성에 대한 신경증적 모방으로 보았던 바이닝거의 존재론적 명예훼손은 그 자체를 넓게 수용하고, 충분히 전유하자면 훨씬 전복적인 측면이 나타날 수도 있다. 즉, 여성적 자율성에 대한 거짓된 주장, 아마도 최종적인 페미니즘 진술이란 ‘나는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타자의 환상이 체화된 것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임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For that reason, the Weiningerian ontological denigration of woman as a mere "symptom" of man - as the embodiment of male fantasy, as the hysterical imitation of true male subjectivity - is, when openly admitted and fully assumed, far more subversive than the false direct assertion of feminine autonomy - perhaps, the ultimate feminist statement is to proclaim openly "I do not exist in myself, I am merely the Other's fantasy embodied"...  

결국 우리가 <솔라리스>에서 취한 것은 하리의 ‘두 가지’ 자살이다. 첫째, 실제로 켈빈의 아내로 살았던 시절의 자살과 둘째, 죽었으나 죽지 않은 유령과도 같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소거하려 한 영웅적 행위이다. 첫 번째 자살 행위가 삶의 짐을 벗어내기 위한 도피에 불과한 반면, 두 번째 자살 행위는 윤리적 행위이다.

What we have in are thus Harey's TWO suicides: the first one (in her earlier earthly "real" existence, as Kelvin's wife), and then her second suicide, the heroic act of the self-erasure of her very spectral undead existence: while the first suicidal act was a simple escape from the burden of life, the second is a proper ethical act.

다시 말해, (지구에서 자살하기 이전의) 하리가 '보통 인간 존재'였다면, 두 번째 하리는 그녀가 본질적 정체성의 흔적을 박탈당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가장 급진적인 의미에서의 주체가 된다(영화에서 하리는 이렇게 말한다. ‘아냐. 이건 내가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나는 하리가 아니야/…/말해봐요… 말해봐요… 지금 나라는 존재가 역겹나요?’). 켈빈에게 나타난 하리와 우주선의 동료인 기바리안에게 나타난 괴물 같은 아프로디테의 차이는 기바리안의 유령이 실제 기억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순수한 판타지로부터 왔다는 것이다(영화가 아니라 소설의 경우이다. 타르코프스키는 괴물 같은 아프로디테를 작고 순결한 금발 소녀로 바꿔넣었다). ‘거대한 흑인 여인이 경쾌하고, 빠른 걸음으로 내게 조용히 다가왔다. 난 그녀 눈의 흰자위에서 미광을 보았고, 그녀의 벗은 발이 내는 부드러운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풀로 엮은 노란 스커트만 입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의 커다란 가슴은 자유롭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녀의 검은 팔은 종아리만큼이나 두꺼웠다.’ 기바리안은 원시적 모성 환상과의 대면을 견디지 못하고 수치심에 자살한다.

In other words, if the first Harey, before her suicide on Earth, was a "normal human being", the second one is a Subject in the most radical sense of the term, precisely insofar as she is deprived of the last vestiges of her substantial identity (as she says in the film: "No, it's not me... It's not me... I'm not Harey. /.../ Tell me... tell me... Do you find me disgusting because of what I am?"). The difference between Harey who appears to Kelvin and the "monstrous Aphrodite" who appears to Gibarian, one of Kelvin's colleagues on the spaceship (in the novel, not in the film: in the film, Tarkovsky replaced her by a small innocent blonde girl), is that Gibarian's apparition does not come from "real life" memory, but from pure fantasy: "A giant Negress was coming silently towards me with a smooth, rolling gait. I caught a gleam from the whites of her eyes and heard the soft slapping of her bare feet. She was wearing nothing but a yellow skirt of plaited straw; her enormous breasts swung freely and her black arms were as thick as thighs".(3) Unable to sustain confrontation with his primordial maternal fantasmatic apparition, Gibarian dies of shame.

이 행성은 사유하는 듯이 보이는 신비로운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가? 라캉이 말하는 외설적 덩어리로서, 상징적 거리가 붕괴하며 언어, 기호가 아무런 소용없는 지점, 즉 외상적 실제인가? 이 거대한 두뇌, 타자는 일종의 심리적 단락(short circuit)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질문과 답변의, 요구와 만족의 변증법을 단락화하며 우리가 질문을 제기하기에 앞서 우리의 욕망을 지탱하는 가장 내밀한 판타지를 직접적으로 물질화하여 답변으로 내놓는다(오히려 부과한다, 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솔라리스는 비록 우리의 심리적 삶 전체가 그 판타지 주위를 맴돌기는 하지만, 결코 현실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궁극의 환상적이며 대상적인 파트너를 생성하는 기계이다. 

Is the planet around which the story turns, composed of the mysterious matter which seems to think, i.e. which in a way is the direct materialization of Thought itself, not an exemplary case of the Lacanian Thing as the "Obscene Jelly" (4), the traumatic Real, the point at which symbolic distance collapses, the point at which there is no need for speech, for signs, since, in it, thought directly intervenes in the Real? This gigantic Brain, this Other-Thing, involves a kind of psychotic short-circuit: in short-circuiting the dialectic of question and answer, of demand and its satisfaction, it provides - or, rather, imposes on us - the answer before we even raise the question, directly materializing our innermost fantasies which support our desire. Solaris is a machine that generates/materializes, in reality itself, my ultimate fantasmatic objectal supplement/partner that I would never be ready to accept in reality, although my entire psychic life turns around it. 

자크-알랭 밀레는 여성의 비존재, 구성적 결핍(‘거세’), 다시 말해 주체성의 공백을 가정하는 여성과 거짓 여성을 구분한다. 거짓 여성은 자신의 본래 매력을 믿지 않고, 아이를 기르고, 남편을 섬기고, 집안을 돌보는 등의 사명을 버리며, 유행하는 옷과 메이크업, 타락한 난교파티에 빠져드는 여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의 여성이다. 거짓 여성은 그녀 주체성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공백으로부터, 그녀의 존재를 특징짓는 '결핍'으로부터 도피하여 (가정을 지키고, 아이를 지키며 참된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거짓 확신에 빠져드는 여성이다. 이러한 여성은 확고히 고정된 존재이며 자기완결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남편이 바쁘게 뛰는 동안, 자신은 고요한 삶을 이끌며, 남편이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항구와도 같이 봉사하며) 일상생활에 만족해 있는 듯이 보인다(그러나 여성에게 '소유'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은 물론 아이를 갖는 것이며, 그래서 라캉은 여성과 어머니 사이의 궁극적 대립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즉 존재하지 않는 여성에 비해, 어머니는 명백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Jacques-Alain Miller (5) draws the distinction between the woman who assumes her non-existence, her constitutive lack ("castration"), i.e. the void of subjectivity in her very heart, and what he calls la femme à postiche, the fake, phony woman. This femme à postiche is not what commonsense conservative wisdom would tell us (a woman who distrusts her natural charm and abandons her vocation of rearing children, serving her husband, taking care of the household, etc., and indulges in the extravaganzas of fashionable dressing and make-up, of decadent promiscuity, of career, etc.), but almost its exact opposite: the woman who takes refuge from the void in the very heart of her subjectivity, from the "not-having-it" which marks her being, in the phony certitude of "having it" (of serving as the stable support of family life, of rearing children, her true possession, etc.) - this woman gives the impression (and has the false satisfaction) of a firmly anchored being, of a self-enclosed, satisfied circuit of everyday life (her man has to run around wildly, while she leads a calm life and serves as the safe protective rock or save haven to which her man can always return...). (The most elementary form of "having it" for a woman is, of course, having a child, which is why, for Lacan, there is an ultimate antagonism between Woman and Mother: in contrast to woman who "n'existe pas", mother definitely does exist).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남성 정체성에 심각한 위협을 주는 쪽은 공백을 가리면서 신경증적이 되며, 자신의 결핍(‘거세’)을 과시하는 여성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 정체성에 위협이 되는 여성들이란 가부장적 남성 정체성에 위협이 되지 않을 뿐더러 가부장제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결핍을 부인하는 ‘소유’한, 즉 자기만족적인 거짓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역설은 여성이 공백 주위의 허울을 구성하는 비본질적이고, 모순된 존재로 모욕당하고, 환원되면 될수록, 그녀는 확고한 남성의 본질적 자기동일성을 더욱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오토 바이닝거의 전체 작업은 이러한 역설에 집중하고 있다). 반면, 여성이 확고하고, 자기완결적인 실체가 되면 될수록, 그녀는 더욱 남성 정체성을 확고하게 해준다.(*굵은 글씨로 표시한 대목이 오역이다. 좀 어이없게도 남성 정체성에 위협이 되는 여성상을 거꾸로 옮겨놓았다. 남성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은 자기만족적인 '거짓 여성'(=가짜 여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결핍'(=거세)을 티내는 여성들이다). 

The interesting feature to be noted here is that, contrary to the commonsensical expectation, it is the woman who "has it", the self-satisfied femme à postiche disavowing her lack, who not only does not pose any threat to the patriarchal male identity, but even serves as its protective shield and support, while, in contrast to her, it is the woman who flaunts her lack ("castration"), who poses as a hysterical composite of semblances covering a Void, who poses a serious threat to male identity. In other words, the paradox is that the more the woman is denigrated, reduced to an inconsistent and insubstantial composite of semblances around a Void, the more she threatens the firm male substantial self-identity (Otto Weininger's entire work centers on this paradox); and, on the other hand, the more the woman is a firm, self-enclosed Substance, the more she supports male identity.

타르코프스키의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구성 요소인 이러한 대립은 <노스탤지아>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난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살았던 19세기 러시아 작가의 원고를 찾아 여행 중인 주인공 러시아 작가는 성적 만족을 얻기 위해 그를 유혹하는 결핍된 존재이며, 신경증적인 여성인 유지니아와 그가 러시아에 남겨두고 떠나온 부인의 모성적 모습에 대한 기억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 타르코프스키의 세계는 매우 남성 중심적이며, 여성/어머니 대립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적으로 활동적이며, 도발적인(<노스탤지아>의 유지니아처럼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과 같은 기호화된 신호로 유혹하는) 여성은 거짓되며 히스테릭한 존재로 거부당하며, 단정하게 빗어 묶은 머리를 하고 있는 모성적 형태와 대조를 이룬다. 타르코프스키에게 있어, 여성을 성적으로 욕망하게 되는 순간, 그녀는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 그녀 존재에 있어 영혼의 정수를 희생하고, 그 때문에 스스로 황폐해지며, 척박한 존재가 되고 만다. 타르코프스키의 세계는 도발적 여성에 대한 구토를 겨우 가리고 있을 뿐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신경증적인 불안에 걸리기 쉬운 이러한 여성보다, 확실하며 안정적인 어머니라는 존재를 택하고 있다. 이 구토는 유지니아가 주인공을 버리고 떠나기 전에 내뿜는 길고 신경증적인 비난에 대한 주인공(과 감독)의 태도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This opposition, a key constituent of Tarkovsky's universe, finds its clearest expression in his Nostalgia, whose hero, the Russian writer wandering around northern Italy in search of manuscripts of a 19th-century Russian composer who lived there, is split between Eugenia, the hysterical woman, a being-of-lack trying desperately to seduce him in order to get sexual satisfaction, and his memory of the maternal figure of the Russian wife he has left behind. Tarkovsky's universe is intensely male-centered, oriented on the opposition woman/mother: the sexually active, provocative woman (whose attraction is signaled by a series of coded signals, like the dispersed long hair of Eugenia in Nostalgia) is rejected as an inauthentic hysterical creature, and contrasted to the maternal figure with closely knit and kept hair. For Tarkovsky, the moment a woman accepts the role of being sexually desirable, she sacrifices what is most precious in her, the spiritual essence of her being, and thus devalues herself, turning into a sterile mode of existence: Tarkovsky's universe is permeated by a barely concealed disgust for a provocative woman; to this figure, prone to hysterical incertitudes, he prefers the mother's assuring and stable presence. This disgust is clearly discernible in the hero's (and director's) attitude towards Eugenia's long, hysterical outburst of accusations against him which precedes her act of abandoning him.

타르코프스키가 정적인 롱숏들(혹은 느린 패닝이나 트래킹 이동만을 할 뿐인 숏들)을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이러한 숏들은 두 가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는데, <노스탤지아>에서는 두 가지 모두 잘 드러난다. 그 숏들은 지구의 중력장으로부터 거양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중력장에 완전히 굴복하는 지점에서처럼 갈망하던 영적 조화를 발하며 그 내용과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고 있거나(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긴 숏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데, 러시아인 주인공이 불붙여진 초를 들고서 텅 빈 수영장을 걷는 장면이다. 죽은 도미니코가 구원받기 위해 완수해야 한다고 말한 사명으로, 결국 한번 실패한 뒤에 주인공은 수영장의 다른 편 끝에 다다른다. 이때 그는 환희에 충만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숏들이 유지니아가 주인공에게 퍼붓는 (성적으로 도발적이고 유혹적인 제스처와 경멸적인 관찰이 한데 섞여 있는) 신경증적 폭발을 담은 롱숏과 같이 형식과 내용 사이의 대조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It is against this background that one should account for Tarkovsky's recourse to static long shots (or shots which allow only a slow panning or tracking movement); these shots can work in two opposite ways, both of them exemplarily at work in Nostalgia: they either rely on a harmonious relationship with their content, signaling the longed-for spiritual Reconciliation found not in Elevation from the gravitational force of the Earth but in a full surrender to its inertia (like the longest shot in Tarkovsky's entire opus, the Russian hero's extremely slow passage through the empty cracked pool with a lit candle as the path to his salvation; significantly, at the end, when, after a failed attempt, he does reach the other border of the pool, he collapses in death, fully satisfied and reconciled), or, even more interestingly, they rely on a contrast between form and content, like the long shot of Eugenia's hysterical outburst against the hero, a mixture of sexually provocative seductive gestures with contemptuous dismissing remarks.

이 숏에서 유지니아는 지친 주인공이 보여주는 무관심함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그녀의 이러한 격발에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을, 길고 정적인 숏 그 자체에 대해서도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여성적이며) 신경증적인 격발들을 피사체에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간 채 핸드헬드 카메라로 잡아내고 있는 카사베츠와 정반대에 위치한다. 이러한 카사베츠의 작업은 격분한 여성들의 얼굴을 형태변화시키며 시점의 안정성을 잃는다.

In this shot, it is as if Eugenia protests not only against the hero's tired indifference, but, in a way, also against the calm indifference of the long static shot itself which does not let itself be disturbed by her outburst - Tarkovsky is here at the very opposite extreme to Cassavetes, in whose masterpieces the (feminine) hysterical outbursts are shot by a hand-held camera from an over-proximity, as if the camera itself was drawn into the dynamic hysterical outburst, strangely deforming the enraged faces and thereby losing the stability of its own point-of-view...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라리스>는 비록 부인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규범적인 남성 시나리오의 주요 특징들을 보충한다. 여성을 남성의 증상으로 보는 구조는 남성이 그의 타자적 사물, 즉 그의 가장 내밀한 꿈을 읽고 그에게 증상과 그 자신의 메시지로 되돌아오는 탈중심화되었으며 불투명한 타자적 대상과 대면했을 때에만 작동가능한 것이다(그러나 남성 주체는 그 증상, 메시지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융의 방식을 따라 <솔라리스>를 단순히 (남성) 주체의 부인된 내적 충동의 투사나 물질화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만일 이 투사가 일어난다면, 불가해한 타자적 사물이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진정 수수께끼로 삼아야 할 것은 이 실제적 사물이라는 존재이다. 타르코프스키의 문제는 그 스스로 외적 여행이란 단지 한 개인의 내밀한 심리로 떠나는 여행의 외화인 동시에 (혹은 외화이거나) 투사일 뿐이라는 융식의 해석을 택했다는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한 인터뷰에서 “켈빈이 솔라리스에서 행할 임무는 아마도 오직 하나일 것이다. 사랑을 잃은 남자는 더이상 남자가 아니다. 이 ‘솔라리스적’인 전체의 목표는 휴머니티란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Solaris nonetheless supplements this standard, although disavowed, male scenario with a key feature: this structure of woman as a symptom of man can be operative only insofar as the man is confronted with his Other Thing, a decentered opaque machine which "reads" his deepest dreams and returns them to him as his symptom, as his own message in its true form that the subject is not ready to acknowledge. It is here that one should reject the Jungian reading of Solaris: the point of Solaris is not simply projection, materialization of the (male) subject's disavowed inner impetuses; what is much more crucial is that if this "projection" is to take place, the impenetrable Other Thing must already be here - the true enigma is the presence of this Thing. The problem with Tarkovsky is that he himself obviously opts for the Jungian reading, according to which the external journey is merely the externalization and/or projection of the inner journey into the depth of one's psyche. Apropos of Solaris, he stated in an interview: "Maybe, effectively, the mission of Kelvin on Solaris has only one goal: to show that love of the other is indispensable to all life. A man without love is no longer a man. . . . "(6)

렘의 원작소설은 이와 매우 대조적으로 행성 솔라리스, 이 ‘사유 존재’(res cogitans)의 비활성적인 외적 현존에 초점을 맞춘다.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솔라리스는 우리와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 불가해한 절대적 타자로 남는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내밀한 부인된 판타지로 되돌아오긴 하나, 이러한 회귀 아래에 놓여진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문제는 완전히 불가해한 것으로 남는다(그것은 어째서 그러한 일을 하는가? 순수한 기계적 반응일 뿐인가? 우리와 악마의 게임을 하자는 것인가? 우리를 도와 (혹은 강제로) 우리가 부인한 진실을 대면하도록 하려는 것인가?). 그러한 점에서 타르코프스키를 할리우드에서 영화화하기 위해 소설을 상업적으로 각색하는 작업과 유사한 위치에 놓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가장 질 낮은 할리우드 프로듀서들이 하는 바로 그런 일을 했다. 즉 수수께끼 같은 타자성과의 만남을 커플을 만들어내는 틀 안으로 다시 써넣은 것이다.

In clear contrast to this, Lem's novel focuses on the inert external presence of the planet Solaris, of this "Thing which thinks" (to use Kant's expression, which is fully appropriate here): the point of the novel is precisely that Solaris remains an impenetrable Other with no possible communication with us - true, it returns us to our innermost disavowed fantasies, but the "Que vuoi?" beneath this act remains thoroughly impenetrable (Why does It do it? As a purely mechanical response? To play demonic games with us? To help us - or compel us - to confront our disavowed truth?). It would thus be interesting to put Tarkovsky in the series of Hollywood commercial rewritings of novels which have served as the base for a movie: Tarkovsky does exactly the same as the lowest Hollywood producer, reinscribing the enigmatic encounter with Otherness into the framework of the production of the couple...

<솔라리스>의 소설과 영화 사이의 거리는 각기 다른 엔딩장면에서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다. 소설에서 켈빈은 솔라리스 대양의 신비스러운 표면을 응시하며 우주선에 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영화는 주인공이 내던져진 타자성(솔라리스의 혼돈스러운 표면)과 그가 돌아가길 갈망하는 다차(러시아식 나무집)를 하나의 숏 안에 조합해 넣는, 원형적이며 타르코프스키적인 환상으로 끝맺는다(여기서 다차는 솔라리스, 즉 극단적 타자성의 내부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가장 내밀한 갈망의 잃어버린 대상을 발견한다).

Nowhere is this gap between the novel and the film more perceptible than in their different endings: at the novel's end, we see Kelvin alone on the spaceship, staring into the mysterious surface of the Solaris ocean, while the film ends with the archetypal Tarkovskian fantasy of combining within the same shot the Otherness into which the hero is thrown (the chaotic surface of Solaris) and the object of his nostalgic longing, the home dacha (Russian wooden countryhouse) to which he longs to return, the house whose contours are encircled by the malleable slime of Solaris' surface - within the radical Otherness, we discover the lost object of our innermost longing.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시퀀스는 모호한 방식으로 촬영되었다. 이 숏 바로 직전에 우주 정거장의 살아남은 동료 가운데 하나가 켈빈에게 집에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물속의 수초를 보여주는 타르코프스키 스타일의 숏이 두어컷 지나가고 나면, 다차 안에서 켈빈과 그의 아버지는 화해한 채 서 있다. 그리고는 점차 우리가 본 그 다차가 실제의 고향 집이 아니라, 여전히 솔라리스가 만들어낸 비전이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다차와 다차를 둘러싼 풀밭은 혼돈스러운 솔라리스의 표면 한가운데 홀로 외딴섬으로 나타난다. 즉 솔라리스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물질화된 비전인 것이다.

More precisely, the sequence is shot in an ambiguous way: just prior to this vision, one of his surviving colleagues on the space station tells Chris (the hero) that it is perhaps time for him to return home. After a couple of Tarkovskian shots of green weeds in water, we then see Chris at his dacha reconciled with his father - however, the camera then slowly pulls back and upwards, and gradually it becomes clear that what we have just witnessed was probably not the actual return home but still a vision manufactured by Solaris: the dacha and the grass surrounding it appear as a lone island in the midst of the chaotic Solaris surface, as yet another materialized vision produced by it . . . 

(1) See Chapter XVIII of Jacques Lacan,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London: Routledge 1992.

(2) Judith Butler, The Psychic Life of Power,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p. 47.

(3) Stanislaw Lem, Solaris, New York: Harcourt, Brace & Company 1978, p. 30.

(4) The formula of Tonya Howe (University of Michigan, Ann Arbor) on whose excellent seminar paper "Solaris and the Obscenity of Presence" I rely here.

(5) See Jacques-Alain Miller, "Des semblants dans la relation entre les sexes", in La Cause freudienne 36, Paris 1997, p. 7-15.

(6) Quoted from Antoine de Vaecque, Andrei Tarkovski, Cahiers du Cinema 1989, p. 108

05. 0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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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짧은 역사"는 로도윅의 <들뢰즈의 시간기계>(그린비, 2005) 1장 제목이다. 들뢰즈의 영화론을 읽어야 할 필요가 생겨서 다른 책들과 함께 로도윅의 책을 들춰보게 되었고(이 얼마나 '유익한' 번역인지!), 나는 며칠 전에 이 1장을 읽었다(2장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에 대한 사전독해를 요구하기에 잠시 미뤄두었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면 들뢰즈의 <시네마> 읽기는 상당한 견적을 자랑한다). '짧은 역사'인 만큼 이야기도 짧은 편이지만, 그걸 요령있게 정리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이다. 나는 중요한 대목에 밑줄긋고, 오역이나 착오는 교정하면서 잠시 자리를 데우도록 하겠다.

먼저 들뢰즈의 두 책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는 영화사 연구가 아니며 따라서 연대기적으로 배치되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에는 (1)뵐플린이 <예술사의 원리>에서 피력하고 있는 역사관이 스며 있다(미학 형식의 역사는 그러한 형식이 역사적으로 통용될 수 있었던 시대/문화와 짝지어질 수 있다는 얘기). 그리고 (2)일리야 프리고진과 이사벨 스텐저스의 과학철학/과학사 연구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특히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와 관련해서인데, 자연을 모델로 하는 개념화 전략은 들뢰즈에게 많은 통찰을 제공한 것으로 돼 있다. 참고로, 러시아의 경우 들뢰즈는 이러한 과학철학자들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요컨대, <예술사의 원리>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를 먼저 읽으라는 것(나는 후자만을 읽었다). 뵐플린의 책은 <미술사의 기초개념>(시공사)으로 번역돼 있고(그러니까 '예술사'라기보다는 '미술사'라고 해야 맞겠다),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정음사/고려원)도 국역본이 있는 책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을 전유해서 사유가 본질적으로 시간적이며 운동과 변화의 소산임을 주장한다. 또한 그는 퍼스의 재독해를 통해 이미지가 통일되거나 닫힌 전체가 아니라 연속적 변형 상태에 놓인 논리적 관계들의 집합이라고 논증한다."(36쪽) 사실 이런 대목은 사례를 직접 '봐야' 이해가 용이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 아무튼 들뢰즈는 "소쉬르에 연원하는 영화기호론에 반대해 퍼스의 기호학을 선호"한다. 여기서 소쉬르 계보의 대표적인 영화기호학자를 든다면, 단연 크리스티앙 메츠를 꼽아야 할 것이다(사실 메츠는 영화광 언어학자였다. 들뢰즈가 영화광 철학자였던 것과 비기는 셈. 메츠가 소쉬르 등의 언어학을 영화에 가져온다면, 들뢰즈는 퍼스의 논리학과 베르그송의 철학을 영화에서 발견한다). 

메츠와 들뢰즈의 차이? "메츠의 경우, 영화적 언표에 대한 개념, 거대 통합체에서 파생된 내러티브 이론을 제시하여 이미지의 가장 가시적 속성인 운동을 제거하면서 이미지의 의미를 언어적인 것으로 제한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경우, 영화의 이미지 구성성분이 움직이는 '기호적 질료'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변조 가능한 특징들, 즉 감각적인 것, 운동적인 것, 강도를 띠는 것, 정서적인 것, 리듬적인 것, 음조적인 것, 심지어 언어적인 것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대비 또한 예비적인 지식을 요구하지만, 메츠의 경우 영화가 비록 '랑그'(이중분절이 가능한 언어체계)는 아니더라도 '언어'로 규정될 수 있다고, 즉 '언어'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본 반면에 들뢰즈는 그러한 가능성을 부정한다고 정리해둔다.

이어지는 대목: "에이젠슈테인은 처음에 이를 이데올로기소에, 다음에는 좀더 심오하게도 전-언어 또는 원시 언어체계에 해당하는 내적 독백에 비유한다."(37쪽) <시간-이미지>에 인용하고 있는 부분인데, 이 대목은 오역을 포함하고 있기에 국역본 <시간-이미지>를 참조하는 게 좋겠다. '이데올로기소(ideologram)'라고 옮긴 것은 '표의문자(ideogram)'를 잘못 본 것이다('ideologram'이란 '신조어'는 어디에서 왔는지?). 들뢰즈가 퍼스 기호학을 참조하는 것은 그것이 "언어학이 아니라 논리학이며, 따라서 기호작용을 일련의 과정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기호론이 언어적 모델을 영화 바깥에서 부과함으로써 영화적 기호를 정의하려 하는 반면, 들뢰즈는 영화 자체가 역사적으로 생산해온 질료에서 기호이론을 연역하기 위해 퍼스의 논리학을 적용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들뢰즈의 유명한 '영화기호학 비판'이 제기되는 것.

 

 

 

 

참고로, 찰스 샌더스 퍼스의 기호학(퍼스는 'Semiotic'이라고 불렀다)에 관한 번역은 아직 없으며 최근에 퍼스의 사상 전반에 대한 안내서가 나왔을 따름이다. 정해창 교수의 <퍼스의 미완성 체계>(청계, 2005). 현재까지는 움베르토 에코 등이 지은 <논리와 추리의 기호학>(인간사랑, 1994)이 퍼스 기호학에 대한 가장 요긴한 참고문헌이다(물론 에코의 기호학 이론서들을 덧붙일 수 있지만, 재미에 있어서는 '추리'가 '이론'보다 한 수 위이이기에).  

이어서, "들뢰즈는 이미지 실천(image practices)이 사회적/테크놀로지적 자동기계라고 주장한다. 이 자동기계에서 각 시대가 특정한 사유의 이미지를 생산함으로써 스스로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한 시대의 사유 이미지는 곧 사유의 본질, 사유의 쓰임 및 사유하고 있는 주체의 위치를 스스로 사유하는 이미지다."(38-9쪽) 이 대목은 <철학이란 무엇인가>로부터의 인용인데, 거기서 들뢰즈/가타리는 "영화를 일종의 인공지능, 데카르트의 잠수인형, 개념의 직조를 위한 기계로 간주한다." 여기서 상응관계에 놓이는 것은 특정한 이미지와 각 시대의 사유 전략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로도윅이 설명하는 것은 시간을 공간적으로 그려내는 방식의 차이로서 규정되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의 구분이다. 운동-이미지는 시간에 대한 간접적 이미지를 제공하고, 시간-이미지는 직접적 이미지를 제공하다. "들뢰즈는 간격, 즉 포토그램, 쇼트, 시퀀스 사이의 공간이나 경계를 재고찰하는 한편, 영화가 시간을 공간적으로 표상하기 위해 이 간격들을 어떻게 조직하는지를 살피면서 이 비범한 발상을 이끌어낸다."(40쪽) 여기서 간격 개념은 러시아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에게서 차용하여 확장한 것인바, 베르토프는 <운동-이미지>에서 에이젠슈테인과 함께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감독이다(당연한 얘기지만, 시간-이미지를 대표할 수 있는 러시아 영화감독은 타르코프스키이다).

그리고 물론 베르그송을 읽은 독자라면, 들뢰즈의 '비범한' 발상 자체가 얼마만큼 베르그송에게 빚지고 있는지 헤아려볼 수 있을 것이다(특히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에 관한 시론>). 이참에 겸사겸사 읽어야 할 '베르그송' 목록을 나열해 보자.

 

 

 

 

이미지상으로는 세 권이 뜨는데,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아카넷, 2001 ), <창조적 진화>(아카넷, 2005) 외에 절판된 책이지만 <물질과 기억>(교보문고, 1991)이 필독서이다(<시론>의 영역본 제목은 <시간과 자유의지>인데, 이 제목이 내용파악에 더 적합하다. 판매량에도 더 긍정적이었을 테고. 기억에 베르그송이 동의했던 제목이다). 거기에 들뢰즈 자신의 <베르그송주의>(문학과지성사, 1996)를 덧붙여야 할 것이고. 들뢰즈에게서 베르그송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 사상의 진화>(갈무리, 2004)가 친절하다(이런 식으로라면 '독서'라기보다는 '프로젝트'이지만).

<운동-이미지>에서 들뢰즈는 에이젠슈테인과 고전 헐리우드 영화를 별개로 다루지 않는다(이건 이상한 일이 아닌 게, 에이젠슈테인 자신이 고전 헐리우드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그리피스). 그들은 운동을 '열린 총체성'으로 설명하고자 했는데, 다르게 말하면 연속적인 운동을 단면으로 분할해서 미분하고 적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소비에트 학파와 할리우드 영화의 실천은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소비에트 학파와 할리우드 영화가 본성상 서로 다르지 않은 운동-이미지의 두 가지 변별적 표명이라고 본다."(44쪽)

이들의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은 간격들로 환원되며, 이 간격은 운동 및 (몽타주를 통한) 운동의 연결로 정의된다. 그런 점에서 운동-이미지는 시간의 간접적 이미지만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1920년대 아방가르드 영화는 시간보다는 공간 및 운동에 대한 매혹을 천명한다. 시간의 조직화는 몽타주를 통한 운동의 재현에 귀속된다. 내러티브 영화와 아방가르드 영화 모두 운동의 문제에 강박적으로 집착했고, 바로 그 지점에서 기억과 지각에 대한 나름의 이론을 도출했다."(46쪽)

이것은 "운동-이미지의 산물인 정신기호도 마찬가지"인데, "한편으로는 연합(=연상)을 통한 연결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합-분화를 통해 표현되는 팽창하는 전체가 있다."('통합-분화'는 '미분과 적분'(differentiation and integration)'이란 뜻도 포함하는 것으로 봐야 할 듯하다.) 여기서 "간격들과 전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행동주의적이다. 이 관계를 분절하는 것은 갈등, 대립, 해결로 조직되는 '작용->반작용' 도식이다."(46쪽) '행동주의'는 심리학에서의 행동주의를 말하는 것이겠다. 즉, 반복과 강화 등에 의해서 조건화(conditioning)된다는 얘기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운동은 미국적인 의지의 이데올로기, 즉 환경에 대한 지배와 이를 방해하는 장애물의 연결이 필연적이며 무한히 연장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문장은 중요해서가 아니라 오역이 포함돼 있어서 인용한다. 원문은 "This movement of action and reaction derives from an American ideology of will, a belief that the mastery of environments and opponents is inevitable and infinitely extendable."(12쪽)이다. 미국식 '의지의 이데올로기'란 "환경과 적대자들에 대한 지배는 불가피하며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는 신념"을 말한다.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서 힌트를 얻고 있는바, 에이젠슈테인의 사유 도식에는 '운동중인 열린 총체성'(the changing whole of the open totality)이 무한한 확장과정을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함축돼 있으며, "부분들에서 집합들로의 통합, 그리고 집합들에서 전체들로의 통합은, 이미지와 세계와 관객이 진리를 재현하는 거대한 이미지 속에서 하나가 될 때 절정에 달한다."(47쪽) 그리고 그런 점에서 에이젠슈테인은 "시네마토그래프의 헤겔인 양 이 개념의 거대한 종합을 표현했다(=제시했다)."

그리고는 시간-이미지로의 이행이다. "들뢰즈가 유기적 운동-이미지를 '고전 시기'(=고전주의 영화)에, 그리고 시간-이미지를 '모던 시기'(=모더니즘 영화)에 대응시킬 때, 이는 전자가 자연적으로 진전해서 후자가 도출됐다는 말도 아니고, 모던 형식이 고전 시기 영화에 대한 비판으로서 반드시 그에 대항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전이(=이행)는 사유의 가능성 및 믿음의 본성에서 일어나는 점진적 변형을 뚜렷이 재현한다." 즉, "운동-이미지가 유지하는 유기적 체제는 유리수적인 나눔들을 열결함으로써 진행되며, 궁극적으로 총체성과의 연관 속에서 진리의 모델을 투사한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유럽 영화계에 몰아치면서 이에 대한 변화가 생겨났고, 그 결과로 이전과는 다른 '상상적 관찰' 형식이 나타났다... 그 결과 운동-이미지의 작용-반작용의 도식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지각과 정서의 본성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다... 혹자는 즉각 안토니오니의 영화 <정사>(1960)와 같은 영화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결국 지속으로서의 시간이 경과하는 것만을 목격하는 인물들이 남는다." 시간-이미지가 탄생하는 장면쯤 될까?

거듭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밝히자면, "들뢰즈가 시간-이미지의 비유기적 체제 또는 결정체적 체제라고 일컫는 것은 전후 재건이라는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출현한다. 그러나 모던 영화(=모더니즘 영화?)가 시간의 직접적 현시라고 할 때, 시간-이미지의 출현이 반드시 운동-이미지의 진화에 따른 결과인 것은 아니다. 들뢰즈에게 있어 영화사는 더 완전한 시간의 재현을 향한 진보의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미지의 출현이 시사하는 것은, 사람들이 시간과 사유의 관계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새로운 기호로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는 시간에 대한 각기 다른 사유방식과 연관되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통시적임과 동시에 공시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새로운 기호는 확률물리학의 도입에 따라 시간 이미지에 발생한 변화와 생명과학의 발전을 통해 사유의 이미지에 발생한 변화의 결과다." 에이젠슈테인이 유기적 운동-이미지를 대표했다면, 알랭 레네는 결정체적 시간-이미지를 대표한다. 러시아 영화사에서라면, 에이젠슈테인과 타르코프스키가 각각을 대표하겠다. 상식적인 대립쌍을 가져오자면, 두 사람의 대립은 '과학과 시'의 대립인데, 이걸 이미지 유형학에 적용하여 운동-이미지는 과학적이고 시간-이미지는 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설명은 시간-이미지의 대표적인 감독인 레네의 작품들과 또다른 탁월한 사례로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디아 송>(1975)에 대한 분석이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탈속적 목소리'가 들어가 있다고 하는데, 'intemporal voices'를 국역본 <시간-이미지>에서는 '비시간적 목소리'로 옮기며, 나로서도 그게 더 적절하다고 본다. 상대적으로 규정되어 있고(=규정적이고) 예측가능한 관계를 형성하는 유기적 운동-이미지와는 달리, 이(런) 영화(들)의 시간-이미지는 개연적이다. "시간-이미지가 산출하는 간격의 자율성은 모든 쇼트를 자율적인 것으로 그려낸다... (이때) 모든 간격은 확률물리학이 말하는 분기점, 즉 어디로 선회할지 예측할 수 없는 지점이 된다. 운동-이미지의 연대기적 시간은 불확실한 생성의 이미지로 파편화된다."(52쪽)

물론 이러한 시간-이미지가 '불확실성의 시대'와 관련돼 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모던 영화에서 만들어진 시간의 이미지가 무질서와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문화적 감각에서 피어났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이미지는 다양한 것, 여러 가지의 것, 비동일자를 수용함으로써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충전시킨다." 더불어 현대물리학과의 관련성: "들뢰즈가 시간-이미지에서의 간격을 무리수적인 나눔이자 공약 불가능한 관계로 정의했을 때, 그는 프리고진의 '분기점'과 맞먹는 주사위를 이미지와 사유의 관계에 던진 셈이다."(53쪽) '분기점'이란 어디로 튈지 예측 불가능한 지점이다. 시간-이미지는 그러한 '비결정성'에서 비롯한다.

정리해보자. "들뢰즈에게 있어 시간의 영화는 두 가지를 생산한다. 하나는 총체화할 수 없는 과정인 사유의 이미지이며, 다른 하나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인 역사에 대한 감각이다... 운동 이미지가 사유와 이미지의 관계를 동일성과 총체성의 형태로 파악하는 지점에서 시간-이미지는 이 관계를 비동일성의 형태로 상상한다. 시간-이미지에서 사유는 탈영토화된 유목적 생성이다."(55쪽) 마지막에 두 단어가 누락됐는데, "사유는 탈영토화된 유목적 생성이며 창조적인 행위이다."로 정정하면 된다. 들뢰즈는 이를 '희소식'이라고 부른다(이 '희소식(good news)'은 '복음'으로 옮겨지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하여간에 이상이 "영화의 짧은 역사"에 대한 짧지 않은(!) 브리핑이었다.

05. 07. 27-8.

P.S. 들뢰즈는 한국의 영화비평가나 영화학도들에게 가장 애용되는(더러는 남용되는) 이름이다(요즘은 거기에 지젝이 도전장을 내민 형국이다). <문학판>(05년, 봄호)에 실린 "한국영화평론, 어디로 갈 것인가"란 정승훈의 글도 예외는 아니다(들뢰즈와 지젝으로 가야 한다?). 거기서 적용되고 있는 들뢰즈의 이미지론을 잠시 따라가 본다. 

"유기적인 전체 구조 속에 현실을 지속적으로 재현하는 '운동-이미지'는 모든 영화의 연대기와 서사를 이끄는 현행적 이미지다. 그것은 재인 가능한 하나의 시간 덩어리로 통합되는데, (임권택의) <하류인생>이 단숨에 주파하는 한국사회를 재현하는 균질적이고 비가역적인 시간이 그러하다. 그 안에서 오이디푸스화된 개인과 사회는 결핍된 욕망을 좇아 허덕이며, 그 바깥에서 아버지 임권택을 내셔널 시네마의 한 전범을 반복한다."

"반면 현실이나 진리를 재현하지 않는 '시간-이미지'는 운동-이미지의 밑바닥에 순서 없이 뒤섞이고 분열하는 시간, 곧 현실의 잠재태를 보여준다. (홍상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순수한 첫사랑은 이미 더럽혀진 백지고 계속 덧씌워지는 흔적이며 결코 도래하지 않는 미래다... 그 안에서 오이디푸스는 끝내 집에 돌아가지 않으며, 그 바깥에서 아들 홍상수는 내셔널 시네마의 한 전범을 해체한다."

그러므로 "이처럼 당대를 상징하는 임권택/홍상수가 근대/탈근대의 맥락과 더불어 오이디푸스/탈오이디푸스, 운동-이미지/시간-이미지를 대략 암시할 수 있다면, 한국영화 전체의 내재적인 평면을 그러한 단절적인 계기를 통해 새롭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도식화에 따르는 유보: "물론 한국영화를 억지로 두 이미지 유형을 따라 서구식 고전영화/현대영화로 쪼갤 순 없고, 엄밀하게 시간-이미지를 보여주는 영화도 없다. 이런 접근이 또 한 판의 서구이론 빌려쓰기에 그칠 우려도 크다. 하지만 지젝과 들뢰즈가 학술적 권위로만 포장된 채 저널 비평에선 무시되거나 미미한 지적 액세서리로 전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어지는 두 문장은 내가 따라가기 어려운 문장들이다: "그간 한국영화는 로컬리티의 산물이었고 세계화 추세도 지시적 맥락에서 논의됐지만, '한국'영화기 이전에 '영화'로서 그것은 비사유/비감각의 영역을 사유하고 감각케 하는 이미지의 힘을 품고 있다. 점점 확산되는 초국가성(transnational)은 지시성 층위뿐 아니라, 정신분석과 이미지 존재론을 가로지르는 '실재' 차원에서도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내 사유/감각으로는 쫓아갈 수 없으므로 건너뛰기로 한다.

"꼭 지젝이나 들뢰즈가 대안적 방법론이라는 게 아니라, 임권택과 홍상수 간의 간격 등을 통해 한국영화라는 동일성에 잠복한 영화 이미지 일반의 이질성을 고고학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영화와 한국영화 평론이 함께 진화하는 길도 여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앞으론 '저널 비평'을 읽는 데도 상당한 지력('지적 액세서리')이 동원되어야 할 듯하다. 지젝이나 들뢰즈는 기본으로 읽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게 '기본'이라면, 비평가들은 곧 다른 걸 빌려올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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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7-28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서 훗날 공부해 볼려고 합니다.
이미 퍼갔어요.
항상 제게 공부할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05-07-28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만에요.^^

palefire 2005-07-29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기계]의 1장 '영화의 짧은 역사'에 대한 알찬 브리핑의 꼬리말로 [문학-판]에 실린 정승훈의 시론적 글을 몽타주한 건 흥미롭군요. 하나는 [시간기계]의 로도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동아시아 내셔널 시네마를 시간-이미지의 새로운 국지적(그리고 동시에 전지구/초국가적) 발원지로 보고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사소한 우연의 일치지만) [시간기계]의 역자후기에 나오듯 역자와 정승훈씨가 절친한 친구라는 점이죠. 들뢰즈는 한국의 영화학도나 영화비평가들에게 '충분히 말해지고 사유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시네마]를 어느 정도 다룬 국내 논문들은 몇 있지만 영화학과 계열에서 나온 건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적어도 들뢰즈의 영화적 사유에 대한 논의는, 한국의 영화학이라는 지형에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 그러나 서서히 생성될 가능성이 있는 - ' 논의라고 봅니다. 지젝의 경우는 비단 영화학만의 유행은 아니겠죠(최근의 문학평론들, 특히 [문학동네] 최근호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젊은 평론가들의 글은 후기라캉-지젝적 독해를 적용시키기 위해 분투하더군요). 암튼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저널비평에는 아무리 들뢰즈와 지젝이 외삽되더라도 '남용되고 오용될 수 있는' 점은 인정하지만(그런 글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특히 정신분석학은 정말 그렇죠), [문학 판]의 정승훈씨의 글은 저널비평의 틀에서 단순히 비평적 분석의 메스로서 지젝과 들뢰즈가 유효하다는 식의 단순한 메타비평을 넘어선다는 점입니다. 거칠고 산발적이고 때로는 '오버'하는 흔적이 있지만, 그 글은 Korean New Wave 이후의 한국영화의 무의식과 이미지 모두를 지도그릴 수 있는 이론적 틀 - 저널비평의 굴레에 안주하지도 않고, 그 안에서는 충분히 소화될 수도 없는 - 을 모색하려는 글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로쟈 2005-07-29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로선 <시네마>가 '영화'에 대한 독창적인 사유, 혹은 영화'의' 독창적인 사유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인가, (영화학 전문지가 아닌) '저널 비평'에서 다루어질 만큼 '대중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선 회의적입니다(평론가 김영진씨도 그런 류의 의견을 피력하더군요. 라캉-지젝의 용어들이 '저널'지에 마구 들어오는 경향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예컨대, 상상계니 상징계니 하는 용어들을 <씨네21> 같은 잡지에서 남용해도 되는가 하는). 그건 <시네마> 같은 책을 영화를 관람하는 대중이 읽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아시다시피, 전공자들조차도 오역/오해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게 들뢰즈의 책들입니다).

해서, 정승훈씨의 주장을 저는 좀 오버하고 있는 것으로 읽었습니다(그가 '저널 비평'을 예로 들었기 때문에). 원론적인 것이긴 하지만, 영화비평과 영화학, 영화연구가 동일시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죠. '저널'이란 게 얼마만큼의 고급한(대중이 보기엔 난해한) 담론들을 소화할 수 있는 것인지, 그런 담론들을 다루면서도 여전히 '저널'(잡지)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인지 등등. 더구나 영화저널 같은 경우는 문학잡지만큼 충분한(?) 지면을 이론적 담론에 할애하지도, 할애할 수도 없는 형편인데 말입니다. 해서, 제가 기대하는 건 들뢰즈식의 비평이나 철학을 담지한 단행본입니다(비평의 장소로 저널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겠죠. 더구나 저널 비평에서 다 '소화될 수도 없는' 문제의식이므로). <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 같은 수준이 아닌, 보다 본격적인, 보다 고급스러우면서도 갖은 궁상들을 돌파할 수 있는...

palefire 2005-07-29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널비평과 이론은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고 후자의 진지전이 더욱 중요한 것이죠. (정승훈씨의 주장은 저널리즘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저는 읽었습니다.) 그래서 국내에도 다양한 쿼털리가 필요한 것이고, 영화학뿐 아니라 교차학제적([Journal of Visual Culture], [October], [Boundary 2] 등)인 쿼털리들이 많이 나와야 하는 것이죠. 이 점에 대해 저는 향후 몇 년간은 회의적이라고 봅니다. 그렇더라도 긴 시간과 긴 호흡을 요하는 작업들이 결국은 나중에 말을 하게 되죠. 영화학에도 그런 때가 분명히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yoonta 2005-08-09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의 사상을 보면 느끼는 인상이 지나치게 계열과 질서로부터 도피하려는 인상이 강하다는 점입니다. 데카르트나 헤겔철학의 전통에 대한 반기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 같기는 하나..그 반대편 극으로 향함으로써 또다른 편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 말이죠..소위 그의 유목적 사유라던가..영화론에서 이야기하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 사이의 도식적 구분들도 마찬가지 편향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는 어떤 대상을 보는 서로다른 시각의 차이일 뿐이고..양자가 서로 상보적인 관계인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운동-이미지가 시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거나..시간-이미지는 시간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표현자체가 운동이 가지는 공간적 특성의 의미들을 축소하고 시간은 그자체를 직접적으로 현시함으로써만 올바르게 인식 가능한 것처럼 간주하는 편향이 느껴지기 때문이지요..다시말하면 공간-이미지를 단지 데카르트적 인식방법으로서의 국소적 사유방식(유리수적 연결혹은 분할들)로..시간-이미지를 비국소적 사유(무리수적 나눔)로 본다는 것은 또하나의 편향이라는 것이죠..
베르그송의 지속의 개념에서 나온 운동과 이미지 그리고 물질과의 동일성의 장점들을 시간-이미지로 변형시킴으로써 시간을 공간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사유...
물리학에 비유하자면..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이 가지는 공간적 국소성을 양자역학이 가지는 공간적 비국소성으로 대체하려는 경향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양자역학적 비국소성과 시간의 가역성들이 보다 통합적 차원으로 설명되는 끈이론과 같은 현대물리학의 세계에서는 공간과 시간의 상보성..그리고 극소와 극대를 밀접한 연관으로 설명하는 방식들을 생각해볼 때..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지속에서 파생된 운동-이미지의 혁명적 측면을 데카르트혹은 헤겔이 가진 낡은 시각으로 또다시 바라보는 오류를 공간-이미지 와 시간-이미지를 도식화하는 과정속에서 발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군요...

로쟈 2005-08-09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들뢰즈에 대한 책들을 남못지 않게 갖고는 있지만, 제가 두루 꿰고 있는 편이 아니어서 yoonta님의 평을 다 따라가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한물간' 베르그송주의가 들뢰즈 덕분에 얼마나 때깔있는 모습으로 되살아나는지 간혹 경탄하게는 됩니다(들뢰즈가 아니라 베르그송이 한턱 내야 하지 않을까도 싶고). 들뢰즈 철학을 저는 니체 철학과 마찬가지로 아티스트 철학 정도로 분류하고 싶습니다. 그럴 경우 '진위'보다는 얼마나 멀리 가느냐가 더 문제일 거 같고, 그런 점을 평가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맞는 소리야?"라고 따지는 건 분석철학쪽에서 능수능란하게 하겠지만(그래서 들뢰즈 정도는 철학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가령 탁석산씨나 강유원씨의 평가), 그런 두 갈래 길이라면, 저는 들뢰즈의 길을 선택할 거 같아요. 소위 '꼰대'들보다는 '아티스트'를 선호하는 취향이라서...

니브리티 2005-08-10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기론 yoonta님이 말씀하신 것(로쟈님의 글에서 따온 것이지만, 맥락상)처럼 <운동-이미지가 시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거나..시간-이미지는 시간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라는 표현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운동-이미지(구체적으로는 행동-이미지)의 위기를 통해 새로운 시지각적, 음향적 기호가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를 제공하는 한편 '직접적인 시간-이미지'가 나타난다...는 말을 독해할 때 전자의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와 <직접적인 시간-이미지>의 구분은 전자가 감각-운동 도식을 통해 시간을 운동에 종속시키는 반면 후자는 그에 대한 반작용이거나 운동과 대립하는 시간이 아니라(이 경우는 여전히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일 뿐이고 감각-운동 도식에 의한 해석일 뿐이겠죠) 시간 그 자체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결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가 대립되거나, 발전된 형태의 이미지거나 보다 나은 이미지, 혹은 시간-이미지로만 이뤄진 영화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사실 모든 영화는 이 두 이미지가 서로 혼재되어 있는 건데(고전영화에서도) 어떤 관점이 변화하는 것일 뿐이죠. 하여튼 들뢰즈의 분류법이 종종 둘 아니면 셋의 도식화로 내비칠 염려가 있긴 한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대립/상보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도 말했지만, 들뢰즈에게서 분류는 '개념의 창안'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들뢰즈의 사상이 계열과 질서로부터 도피하는 인상을 받으셨다면, 정반대라고 말해야 할 듯 싶습니다. 오히려 들뢰즈는 계열이란 말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특히 <의미의 논리>는 전체가 계열에 대한 얘기라고 해도 무방하죠. <시간-이미지>에서도 세 가지 시간-이미지에 대해 얘기하면서 마지막 세번째의 이미지를 "시간의 계열로서의 시간-이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시네마> 전체에서 하고 싶은 말도 결국은 두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라기보다는, 그것들이 "사유를 사유하게 만드는 (폭력적인)기호"로서, 즉 사유의 이미지인 "뇌"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하는 거겠죠.

yoonta 2005-08-10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계열이란 단어는..제가 무심코 댓글쓰다보니 오타비슷하게 나온 단어라..
수정할까 하다가 걍 냅둔건데요..nivritti님 때문에 수정해야 겠네요.
계열은 위계의 오타라고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nivritti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들뢰즈는 계열을 위계나 (위계적)질서가 아닌 차원에서 중요하게 여기죠..시간-이미지에서도 님말씀대로 계열이란 말이 나오죠...니체적 순환 혹은 원환이라는 방식으로 자주 언급되다는 점도 알고 있고요..그리고 운동-이미지의 간접적 성격과 시간-이미지의 직접적 성격에 대한 저의 표현은 님이 지적하신 맥락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시간-이미지가 운동-이미지에 대해서 "반작용이거나 운동과 대립하는 시간"이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단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이미지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를 들뢰즈가 했던 것처럼 "개념의 창안 혹은 개념의 역사"의 차원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네요...들뢰즈 철학의 개념적 특이성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문제이긴 하지만요...

제가 위에서 간략히 이야기했던 것은 운동-이미지라고 하는 베르그송적 개념 내부에 이미 시간-이미지적 요소들을(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차원에서)내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지속"이라는 개념으로 물체와 운동 그리고 이미지의 동일성을 주장한 베르그송적 '개념의 창안"속에 이미 시간-이미지의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죠..따라서 들뢰즈가 시간-이미지속에서 발견하고자 했던..소위 크리스탈적 묘사의 "특이성" 혹은 무리수적 무한성에 근거한 "잠재성"의 사유들은 베르그송적 사유혹은 개념들로부터 자신의 시간-이미지개념의 "특이성"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편향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겁니다..

이부분에 대한 자세한 논증은 저도 아직 공부중이라 유보중입니다만..그 하나의 방법으로 제가 위에 제시한 현대물리학의 초끈이론적 통합이 하나의 실마리가 되지않을까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보았던 것이고요...그러한 관점들이 들뢰즈의 사유의 비판적 독법의 하나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것입니다.

니브리티 2005-08-10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미지는 운동-이미지에서 이행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관점이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기호와 이미지는 구분은 있지만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죠. 즉 우리의 관점이 바뀌는 것--우리를 사유하게 하는 것은 이 이미지의 폭력적인 기호의 성격 때문인 겁니다. 그리고 들뢰즈는 베르그손에 대한 네 개의 주석을 통해 논의를 전개해내고, 덧붙여서 라이프니츠를 참고하고 있습니다. 베르그손에 대한 사유를 조금 더 밀고 나갔다고 해야지, 범박하게 베르그손과 다르게 보이려는 편향적 사고를 가졌다고 말하는 건 편견이겠죠. 그리고 앞에서 <간접적인 시간-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라고 한 점을 주목해주세요. 후자는 <시간의 직접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직접적인 시간-이미지>입니다.... 초끈이론에 대한 언급은 어떤 철학하시는 분 사이트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요.....그것이 들뢰즈에 대한 비판적 독법으로 가능하기 위해선 들뢰즈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와 접근이 필요할 듯 합니다...

yoonta 2005-08-10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습니다..베르그송의 사유를 더 밀고 나간것이죠..^^ 그것이 편향이냐 아니냐하는 것은 저의 개인적 판단이기 때문에 다른 분들의 경우에는 각자가 들뢰즈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따라 달라지는 문제겠죠..
그리고 "시간의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이미지"라고 들뢰즈가 강조한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초끈이론이야기야 뭐 제가 자세히 이야기한것도 아니니 스킵하셔도 무관합니다.
들뢰즈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접근 물론 필요하죠..그러나 정확한 이해를 위한 비판적 접근이란 방법도 존재한다는 점도 이야기하고싶네요..

palefire 2005-08-10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새 이토록 풍요로운 이야기들이 오갔군요. 요즘은 하고싶은 공부와 동떨어진(정확히 말하면 하고싶은 공부를 더 하기 위해 하지 않을 수 없는) 공부하느라고 정신이 없기에 이런 곳에 종종 들리면서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정도인데 심화시켜 생각해 볼 가닥들이 여러 개 있는 듯합니다. yoonta님의 현대과학과 들뢰즈의 사유와의 새로운 대면에 대한 시도도 그렇고, (초면은 아닌) nirvitti님의 다이제스트한 답글도 유익해 보입니다.

yoonta 2005-08-10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의 운동-이미지, 시간-이미지와 관련해서..특히 알랭바디우의 비판은 상당히 풍요로운 논점들을 제공하는 것 같은데요..국내에서는 바디우의 들뢰즈비판에 대해 너무 소홀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개인적으로는 바디우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이리스 2005-08-22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토록 긴 댓글들이 어우러진것은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ㅠ.ㅜ 어흑..
 

지난달 4일자 <가디언>지에 유럽헌법 찬반투표에 대한 지젝의 기고문이 실렸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일단 원문을 여기에 옮겨놓는다(우리말 번역도 어디에 돌아다닐 듯싶은데 찾지 못했다). 내용 브리핑은 요즘 바쁜 일들이 마무리 된 이후에 하도록 한다(아마도 8월 이후가 될 것이다). 성미가 급하신 분들은 원문을 참조하시길(더 급하신 분들은 번역문도 올려주시면 고맙겠다). 

The constitution is dead. Long live proper politics 

Like Amish teenagers, Europe's voters were not offered a truly free choice

Slavoj Zizek
Saturday June 4, 2005
The Guardian

Amish communities practise the institution of rumspringa. At 17 their children, until then subject to strict family discipline, are set free. They are allowed, solicited even, to go out and experience the ways of the modern world - they drive cars, listen to pop music, watch TV and get involved in drinking, drugs and wild sex. After a couple of years they are expected to decide: will they return to be full members of the Amish community or leave it forever and become ordinary American citizens?

But far from being permissive and allowing the youngsters a truly free choice, such a solution is biased in a most brutal way. It is a fake choice if ever there was one. When, after long years of discipline and fantasising about the illicit pleasures of the outside world, the adolescent Amish are thrown into it, of course they cannot help but indulge in extreme behaviour. They want to test it all - sex, drugs and drinking. And since they have no experience of regulating such a life they quickly run into trouble. There's a backlash that generates unbearable anxiety, so it is a safe bet that after a couple of years they will return to the seclusion of their community. No wonder that 90% of Amish children do exactly that.

This is a perfect example of the difficulties that always accompany the idea of a "free choice". While the Amish adolescents are formally given a free choice, the conditions they find themselves in while they are making that choice make the choice itself unfree. In order for them to have an effectively free choice they would have to be properly informed on all the options. But the only way to do this would be to extract them from their embeddedness in the Amish community.

So what has all this to do with the French no to the European constitution, whose aftershock waves are now spreading all around, immediately giving a boost to the Dutch, who rejected the constitution with an even higher percentage? Everything. The voters were treated exactly like the Amish youngsters: they were not given a clear symmetrical choice. The very terms of the choice privileged the yes lobby. The elite proposed to the people a choice that was effectively no choice at all. People were called to ratify the inevitable. Both the media and the political elite presented the choice as one between knowledge and ignorance, between expertise and ideology, between post-political administration and the old political passions of the left and the right.

The no was dismissed as a short-sighted reaction unaware of its own consequences. It was charged with being a murky reaction of fear of the emerging new global order, an instinct to protect the comfortable welfare state traditions, a gesture of refusal lacking any positive alternative programme. No wonder the only political parties whose official stance was no were those at the opposite extremes of the political spectrum. Furthermore, we are told, the no was really a no to many other things: to Anglo-Saxon neoliberalism, to the present government, to the influx of migrant workers, and so on.

However, even if there is an element of truth in all this, the very fact that the no in both countries was not sustained by a coherent alternative political vision is the strongest possible condemnation of the political and media elite. It is a monument to their inability to articulate the people's longings and dissatisfactions. Instead, in their reaction to the no results, they treated the people as retarded pupils who did not understand the lessons of the experts.

So although the choice was not a choice between two political options, nor was it a choice between the enlightened vision of a modern Europe, ready to embrace the new global order, and old, confused political passions. When commentators described the no as a message of befuddled fear, they were wrong. The real fear we are dealing with is the fear that the no itself provoked within the new European political elite. It was the fear that people would no longer be so easily convinced by their "post-political" vision.

And so for all others the no is a message and expression of hope. This is the hope that politics is still alive and possible, that the debate about what the new Europe shall and should be is still open. This is why we on the left must reject the sneering insinuations of the liberals that in our no we find ourselves with strange neo-fascist bedfellows. What the new populist right and the left share is just one thing: the awareness that politics proper is still alive.

There was a positive choice in the no: the choice of choice itself; the rejection of the blackmail by the new elite that offers us only the choice to confirm their expert knowledge or to display one's "irrational" immaturity. Our no is a positive decision to start a properly political debate about what kind of Europe we really want.

Late in his life, Freud asked the famous question " Was will das Weib? ", admitting his perplexity when faced with the enigma of female sexuality. Does the imbroglio with the European constitution not bear witness to the same puzzlement: what Europe do we want?

To put it bluntly, do we want to live in a world in which the only choice is between the American civilisation and the emerging Chinese authoritarian-capitalist one? If the answer is no then the only alternative is Europe. The third world cannot generate a strong enough resistance to the ideology of the American dream. In the present world constellation, it is only Europe that can do it. The true opposition today is not between the first world and the third world. Instead it is between the first and third world (ie the American global empire and its colonies), and the second world (ie Europe).

Apropos Freud, Theodor Adorno claimed that what we are seeing in the contemporary world with its "repressive desublimation" is no longer the old logic of repression of the id and its drives but a perverse pact between the superego (social authority) and the id (illicit aggressive drives) at the expense of the ego. Is not something structurally similar going on today at the political level: the weird pact between the postmodern global capitalism and the premodern societies at the expense of modernity proper? It is easy for the American multiculturalist global empire to integrate premodern local traditions. The foreign body that it cannot effectively assimilate is European modernity.

The message of the no to all of us who care for Europe is: no, anonymous experts whose merchandise is sold to us in a brightly coloured liberal-multiculturalist package will not prevent us from thinking. It is time for us, citizens of Europe, to become aware that we have to make a properly political decision about what we want. No enlightened administrator will do the job for us.

· Slavoj Zizek is the international director of the Birkbeck Institute for the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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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한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시작됐다는 게 이맘때 쓰게 되는 표현이지만, 올해는 '지리한 장마'가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무더위가 시작된 듯하다. 밤마다 잠깐씩 짬을 내어 아파트 단지 사잇길을 왕복으로 걸어다니는 '걷기 운동'을 지난주부터 시작했는데, 비 때문에 거른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장마가 이름값을 하지 못한 지는 좀 됐다고 봐야겠다. 장마 스스로가 지레 지리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장마란 무엇인가, 혹은 나는 무엇으로 장마인가, 나는 이대로 장마여도 좋은가, 등등의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는지도.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 건 그때부터이다(물론 그 전에 일이 꼬였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는 진단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일의 변주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왜, 나는 장남인가, 어쩌다 나는 가장이 됐는가, 에서부터 세상은 어째서 이 모양인가, 에 이르기까지. 대답없는 질문을 던지는 건 (하이데거 말대로) 현존재의 특권이다. 그리고 여름에 피서는커녕 책읽을 시간도 감지덕지하는 인간은 그런 특권을 좀 남용해도 좋겠다(그런 소리가 피서지에까지 들릴 리는 만무하니까). 이왕이면 이런 엄포도 놓아가면서. "책, 내가 너 아니면 읽을 게 없을 줄 알아?!"

 

 

 

 

그런 엄포 때문은 아니겠지만, 책들은 휴가를 반납한 듯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그런 책들 가운데, 새로이 맘에 드는 얼굴, 그러니까 '뉴 페이스' 몇을 꼽아보기로 한다. 첫번째로 꼽는 건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즘의 기능>(그린비). 얼마전에 나왔던 두툼한 전기 <빌헬름 라이히: 세상을 향한 분노>(양문)가 함께 읽어볼 만한 라이히 컬렉션이 되겠다(알라딘에는 6권의 책이 뜨는데, 이미지가 제공되는 건 위의 3권이다. 물론 거기에 적어도 두 권쯤은 더 추가되어야 한다.). 80년대에 출간됐었던 <파시즘의 대중심리>(현상과인식, 1986)도 조만간 재번역되어 출간된다고 하니까 기다려볼 일이고. 흔히 '프로이트 좌파'로 분류되는 라이히 입문서로서 내가 추천할 만한 것은 <프로이트 급진주의 : 빌헬름 라이히, 게자 로하임, 허버트 마르쿠제(The Freudian left)>(종로서적, 1981)이다. 내가 '라이히'란 이름을 처음 접해본 책이고 나에게 그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준 책이다(덕분에 만화로 된 라이히 전기도 읽었다). 

프로이트 좌파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주의를 접목시켜보고자 한 이론가들을 가리키며, 라이히와 함께 거명된 이름들 중(로하임의 저작이 번역돼 있는가?) 마르쿠제를 떠올려보면 이들의 구상이 어떤 것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 각자의 진로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성해방과 계급투쟁을 연관지어 사고하고자 했던 것이고, 이들은 주류 마르크스주의로부터는 모두 찬밥의 대우를 받았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물론 라이히의 경우가 가장 유별나지만(그는 말년에 '오르곤 에너지' 연구에 몰두하다가 학계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미국 식품의약국에도 제소되어 복역하다가 감옥에서 죽었다). 그 유별난 사람의 유별난 생각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라면, 라이히의 책 두어 권쯤 들고 피서지로 향하면 되겠다(물론 연인과 동행하면서 <오르가즘의 기능>을 들고갔다간 라이히 이상으로 따돌림 받을 수 있다. 그 점은 주의하시압).

 

 

 

 

두번째로 꼽고 싶은 건 신간 들뢰즈 연구서로서 키스 안셀 피어슨의 <싹트는 생명(Germinal life)>(산해)이다. 부제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인데, 들뢰즈 연구서를 좀 뒤적여본 사람이라면 피어슨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니체와 베르그송 연구서를 갖고 있는 소장 학자인데, 언젠가 한번 그의 논문을 읽고 믿음직 하다 싶어서 그의 연구서라면 모두 복사해둔 적이 있다. 그런 그의 책이 최초로 우리말 번역을 얻은 것(책의 원서는 내 책상 머리에 몇 년째 꽂혀 있는 중이다). 번역은 국내의 대표적인 들뢰지안의 한 사람인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가 맡았다. 같은 역자가 이전에 옮긴 <들뢰즈의 생명철학>에 이어지는 것일 텐데, 생명철학은 들뢰즈에 대한 나의 세 가지 관심사 중 하나이다. 다른 두 가지는 언어철학과 영화철학(국내에 소개가 좀 빈약한 건 언어철학쪽이다. 해서 르세르클의 <들뢰즈와 언어> 같은 책도 번역되어야 구색이 맞다고 본다).

역자는 후기에서 들뢰즈 철학의 요체로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는데, 그 '잠재적인 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나로선 '배아줄기세포'가 아닌가 한다(그건 '기관없는 신체'이기도 하다). 들뢰즈의 생명철학이 윤리학적 함축도 가질 수 있는 건 그런 때문일 것이다. 역자는 또다른 빼어난 들뢰즈 연구서로서 마누엘 데 란다의 저작을 거명하고 있는데, 이쯤에서 내가 기대하는 책은 지젝의 들뢰즈론 <신체 없는 기관>이다. 이에 대해서는 재작년 내한 강연의 한 주제로 지젝이 다루기도 했다(<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 참조).

 

 

 

 

세번째 책은 엔디 매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Metromarxism)>(시울)로 '도시 맑스주의'란 새로운(?) 분야를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맑스가 살았던 18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도시와 맑스주의의 관계를 맑스를 포함한 엥겔스, 벤야민, 레페브르, 드보르, 카스텔, 하비, 버먼 등과 같은 일련의 맑스주의자들의 견해를 도시문화학이라는 필터에 맞추어 전기적이면서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서술한 도시맑스주의 개괄서." 최근의 관심사 하나와 맞아떨어지기에 구미를 당기는 책이다. 이 '도시맑스주의'라는 건 적어도 나에겐 '사이버맑스주의'보다는 흥미로운 주제이다.  


      

 

 

 

네번째로 꼽을 책은 오규원 신간 두 권이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301번째 책으로 나온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가 그의 시집이고, <날 이미지와 시>가 그의 시론이다. 아마도 지난주에 신간 소개를 했더라면 이 책들을 제일 먼저 꼽고 좀 장황한 얘기들을 늘어놓았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그 사이에 바람이 좀 빠져버렸다. 시집과 시론집은 내가 아는 '오규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시집의 해설을 쓴 정과리에 따르면 그 '오규원'은 '절대 관념의 탐구자'로서의 오규원이었다(흔히 김춘수와 비교되는). 그리고 그런 한에서 그는 한국시의 현상학자이며, 후설이다(한국시의 하이데거는, 릴케와 횔덜린은 누구인가?).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몇 마디 하려면 좀더 많은 지면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정과리만큼은 아닌데, 그는 70쪽 분량의 시집에 60쪽이 넘는 해설을 붙여놓았다.

그가 '독자'라는 주어로 그런 '민폐'를 독자 일반에게 떠넘기려는 건 좀 볼썽사나운 수작이다. 그는 오규원 시에 대해서 '안에서 안을 부수는 공간'이라고 이름붙인바 있는데, "하지만 독자는 얼마 전 <르몽드>의 기자가 케르테스의 소설에 대해 똑같은 명칭을 쓰는 걸 읽고는 혼자 즐거워한다."에서 혼자 즐거워한 주체(주어)는 정과리이지 독자 일반이 아니다. 그가 독자라는 제유를 통해서(라도) 독자의 자리를 독점하는 건 주제에 넘는 일 아닌가? 그는 마치 자신만이 오규원 시에 대해서 샅샅히 해부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그는 시집의 첫 시편들을 차례대로 분석해나가는데, 그런 방식으로 분석이 다 갈무리될 리 없다. 해서 숙제가 남는바, "그러나 시집 전체, 즉 모든 시편들의 구성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차후로 미루기로 하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더 바람직했던 건 이 해설 자체가 '다른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지 않았을까? 오규원 시집에 걸맞는 해설은 투명하고 담백한 글이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처럼.).   

 

 

 

 

다섯번째 책은 오랜만에 고른 미술책이다. 할 포스터의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 )>(아트북스). 부제는 "포스트모던 시각으로 본 초현실주의와 프로이트"이다. 저자는 프린스턴대 교수로서 저명한 미학지 <옥토버>의 편집자이고, 현대미술의 철학적 해명을 다룬 여러 저서를 갖고 있다. 그 중 <실재의 귀환(The Retun of the Real)>(경성대출판부, 2003 )가 번역돼 있고, 편저로 <반미학(Anti-Aesthetic)>(현대미학사, 2002), <시각과 시각성(Vision and Visuality)>(경성대출판부, 2004) 등이 소개돼 있다(이 중 <반미학>은 읽을 만한 번역이 아닌 걸로 알고 있다. 나머지 책에 대해서도 장담하진 못하겠다. 내용 자체가 쉽지 않은 면도 있고.) 

소개에 따르면 이 책에서 "저자는 '초현실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게 해줄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초현실주의 시대의 것'이어야 하고, 또 '그 분야 내부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존의 범주로는 초현실주의에 나타난 이질적인 작업들과 심리적 갈등, 사회적 모순 따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책은 프로이트의 '언캐니(the uncanny)' 개념을 불빛삼아 초현실주의 텍스트와 이미지의 동굴을 탐사한다." '언캐니'란 건 흔히 '기괴함' 섬뜩함'으로 번역되는 프로이트의 용어이다(국역본 프로이트 전집에서는 '기이한 낯설음'이라고 옮기고 있다). 문학작품 분석에서도 자주 사용되는데, 초현실주의 회화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한번 읽어봄 직하다.

 

 

 

 

한편, 저명한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이데아>(예경)도 출간됐다(곰브리치와 쌍벽을 이루던가?). "도상해석학의 창시자이자 '독일 태생의 유태인으로 나치 시절 미국으로 망명한 저명한 미술사학자이자 예술철학자', 파노프스키의 초기 연구 성과를 집약하고 있는 책이다. 파노프스키는 책을 통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조형 예술 이론에 끼친 결정적인 영향과 시대에 따른 변화상, 한 마디로 "미의 이데아란 개념의 역사적 운명"을 추적한다."고 소개돼 있다. 그의 책으론 이미 <도상해석학 연구>(시공사, 2002)가 소개돼 있다.

05. 07. 18.


 

 

 

 

P.S. 소개에서 빠진 책은 저래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사이언스북스). 이전에 동아사이언스 북스 시리즈로 나오던 책들이 이번에 재출간됐는데, 그때 빠졌던 책으로 내가 가장 아쉬워했던 게 이 책 <섹스의 진화>이다. 이미 저자의 책을 한두 권 읽어본 독자는 알겠지만, '다이아몬드의 모든 책'이다. 그 다이아몬드의 최신간은 <붕괴(Collapse)>이다(아직 번역되지 않았는데, 알라딘에서 원서 구입이 가능하군). 575쪽의 방대한 분량인데, 어떤 사회가 왜, 어떻게 망하고 안 망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한국이란 나라가 망조가 든 나라인지(그래서 얼른 이민가는 게 상책인지), 기대를 걸어볼 만한 나라인지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한번 읽어봄 직하다. 물론 얼른 번역되었으면 더 좋겠다. 500쪽이 넘는 원서를 턱없이 읽어나가다간 사회생활 망가지기 십상이다...    

 

 

 

 

P.S.2. '들뢰즈 책'에 신간이 더 있다. 브라이언 마수미가 쓴 <천개의 고원 -사용자 가이드>(접힘펼침)이 그것이다. 말 그대로 매뉴얼인데, 별로 두껍지 않았던 걸로 기억되는 책이 331쪽으로 나왔다. '매뉴얼'을 자임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전위적인' 매뉴얼을 시도한 책이라 친절한 주석서와는 거리가 멀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 전에 같은 출판사, 같은 역자에 의해 나왔던 책은 <프로이트의 거짓말>(접힘펼침, 2004)로 유진 홀랜드가 쓴 <안티 오이디푸스> 가이드북이다. 보다 친절한 쪽은 이 책인데, 문제는 '전위적인' 책의 판형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Deleuze and Guattari's anti-Oedipus)>란 원제가 뜬금없이 <프로이트의 거짓말>로 옮겨진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트북 같은 판형을 고집한 탓에 161쪽 짜리 책이 539쪽으로 둔갑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이미 나온 걸 어쩌랴만). 이런 '전위적인' 책이 많이 팔렸을 리 없는 건 당연하므로 출판사쪽의 '계산'을 짐작할 도리가 없다(나는 책 갖고 장난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책은 좋은 번역만 가지고도 충분히 튄다. '예술'은 다른 데 가서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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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07-19 00:22   좋아요 0 | URL
소개해주신 지젝을 읽고 있답니다. 쉽지 않군요. 오선생의 시집을 들고 좀전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정과리 선생의 뒷글은 주례사비평을 넘어 지독히 정치적이라는(좀 치사하다 싶을 만큼 자신의 해석을 늘어놓는) 뉘앙스가 짙더군요.

릴케 현상 2005-07-18 22:17   좋아요 0 | URL
딴 건 모르겠지만 정과리가 저러는 건 소문이 날 만큼 난 것 같아요-_-

poptrash 2005-07-19 01:59   좋아요 0 | URL
정말 잘 읽고 있어요. 제가 요즘 하는 일이 신간들 들여다보는 일이라서, 또 소개해주시는 분야가 제가 다루고 있는 책들이라서 관심 갖고 보고 있습니다. 아, 저는 뭐 학술적인 일이 아니라 그냥 '기계적인' 일을 하는 '알바생' 이랍니다. 책 좀 많이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 나오는 책들 다 재미있게 보이는데, 막상 어느것 하나도 읽기가 쉽지 않네요 저로서는.

로쟈 2005-07-19 09:24   좋아요 0 | URL
저도 실질 소득면에서는 '알바생'입니다. 나오는 책들을 다 재미있게 보고 계시다니 부럽네요.^^ (저는 대개 구경만 합니다.)

palefire 2005-07-19 09:55   좋아요 0 | URL
언제나 충실한 책소개 해주시는 로자님. 안셀 피어슨의 책은 일부 Deleuzeguattarrian들에게 보이는 성급함과 경박함이 없어서 좋습니다. Germ/Milieu의 관계부터 들뢰즈-베르그송을 풀어가려는 노력도 깊이가 있고요.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는 바로 보관함에 등록해놔야겠네요. 올려주신 목록중 관심분야상 제일 반가운 건 역시 할 포스터의 [Compulsive Beauty]입니다. 조금 훑어본 바로는 번역이 나쁘지 않습니다. [실재의 귀환]은 역어와 문장이 난삽한 편. MIT/October라인의 치밀하고 꼼꼼한 미술/시각문화비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포스터의 책이 원서로만 방기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가장 최근 저서인 [Prosthetic Gods]를 더 꼼꼼히 봐야겠다는 열망을 주는 책)

palefire 2005-07-19 09:56   좋아요 0 | URL
그리고, [몸체 없는 기관]은 역시 번역중입니다. 라캉 관련 전공자 들뢰즈 공부한 사람 하나가 공역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로쟈 2005-07-19 12:11   좋아요 0 | URL
포스터의 책이 괜찮은 번역이라니 다행이군요. <실재의 귀환>에서 별로 재미를 못본 터라... <신체 없는 기관>은 도서출판b에서 근간으로 예고돼 있습니다...

주니다 2005-07-19 15:04   좋아요 0 | URL
<오르가즘의 기능>은 집에 놀러온 사람들에게 괜한 오해를 살만한 제목이군요.^^ <실재의 귀환>도 아직 다 보지 못했는데, 신간이 나왔더군요. 저도 서점에서 잠깐 살펴 봤는데, 일단 한국말이 잘 안되는 <실재의 귀환> 보다는 훨씬 문장이 매끄러웠습니다.(내용의 오역 여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ps.2에서 소개하신 책 2권의 상태는 어떤지요? 일전에 서점에서 <프로이트의 거짓말>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들루즈와 과타리'(과메기가 떠올랐습니다.)라는 말에 이 무신 해괴한 책인고 했답니다. 역자가 미국에서 공부했던 것 같은데, 그 동네에서는 '들루즈, 과타리'라고 발음하나부죠? 그나저나 장마가 지지부진 끝나고 무척 덥네요. 방학이지만 아마도 학교에 매일 출근하실터,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늙으니 안나던 땀도 줄줄입니다) 언제 함께 시원한 생맥주라도 한잔 해야할텐데....

로쟈 2005-07-19 15:16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시원한 생맥주는 모스크바에서 마셔본 기억이 마지막입니다.^^;) '과타리'는 좀 이상한 표음인데(u가 묵음이므로), '가따리'를 고집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의 '프라이드'인 걸 어쩌겠습니까? 마수미의 책은 번역본을 제가 직접 보지 못했고, <거짓말>은 폼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대출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장식용 책이지 독서용 책이 아니더군요...

테렌티우스 2006-12-09 12:29   좋아요 0 | URL
이미 절판되었지만 아마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라이히의 책은 다음의 책일 것 같아요: "프로이트와의 대화:, 빌헬름 라이히 편저, 황재우 역, 종로서적, 1982.

그리고 이 역자 황재우씨는 바로 시인 황지우씨입니다...^^ 황재우가 바로 시인의 본명이지요. 지우는 본인 이름의 오식이던가 오타였는데, 시인은 이게 오히려 마음에 들어 필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말을 어느 인터뷰에선가 읽은 기억이 나네요...

테렌티우스 2006-12-09 12:32   좋아요 0 | URL
그리고 위 책의 내용은 프로이트와의 대화가 전혀 아니라... 라이히가 한 대담자와 프로이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내용이지요... 아마도 당시 82년에 라이히가 너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출판사에서 제안한 제목일 듯 싶네요...

로쟈 2006-12-09 15:54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책은 저도 완독하진 않았지만 들춰본 적이 있습니다. 요즘 분위기로는 다시 나와도 좋은 듯한데요. 황재우(^^) 역의 <변증법적 상상력>과 함께...

테렌티우스 2006-12-09 23:28   좋아요 0 | URL
<변증법적 상상력> 박사학위 논문으로 최상급이지요. 푸코나 벤야민 혹은 크리스테바의 것들보다는 한 급 아래라 할지라도 기존의 문제의식을 너무도 일목요연하게 자기만의 시각으로 - 혹은 논쟁적으로 - 잘 정리해 놓았지요. 더구나 호르크하이머가 서문을 써주었지요. 저도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저자가 당사자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미출간 자료들을 섭렵하는 등 당시의 분위기를 파악하기엔 아주 그만인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천할 만한 책이지요.
 
문학에 대하여 동문선 문예신서 255
J.힐리스 밀러 지음, 최은주 옮김 / 동문선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도서관에서 몇 달 전에 주문해두었던 책으로 힐리스 밀러의 <문학에 대하여>를 대출해왔다. 저자의 지명도를 봐서는 그냥 사서 읽어도 좋겠지만(힐리스 밀러는 폴 드 만, 해롤드 불름, 제프리 하트만과 함께 예일 '마피아'의 4인방을 구성했던 비평가이자 자크 데리다의 절친한 친구이다. 데리다가 폴 드만 보다도 더 오래 교우한) 출판사가 또 워낙에 못믿을 출판사인지라 (애꿎은)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해놓았던 것이다(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동문선은 프랑스 현지에서도 악명이 높다고 한다. 인세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아서. 아마도 동문선은 단일 출판사로는 프랑스어 저작에 대한 판권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가진 출판사일 것이다).

대출해 오면서 나는 루틀리지에서 나온 원서도 절반쯤 복사를 했다. 원서(2002)는 Thinking in Action 시리즈의 한 권인데, 이 시리즈가 동문선에서 '행동하는 지성' 시리즈로 몇 권 나와 있다. <믿음에 대하여>, <종교에 대하여>, <영화에 대하여>, <인터넷상에서> 같은 책들이 같은 시리즈이다(<인터넷에 대하여On the Internet> 대신에 제목이 <인터넷상에서>가 된 것은 출판사나 역자나 도대체 자신들이 무슨 책을 내는 건지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내가 읽어본 한도 내에서 이 시리즈는 허무하다(<종교에 대하여>와 <인터넷상에서>는 다 읽지 않았지만).

지젝의 <믿음의 대하여>에 대해서는 이미 리뷰도 쓴바 있지만, <영화에 대하여>만 하더라도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제목도 모르는 역자가 옮겨놓았다(역자는 영화제목 <2001>을 순수하게 연도로 옮겨놓았다). 물론 이런 류의 '문화의 오역'은 무지의 소치로 떠넘길 수 있다. 문제는 말 그대로 '문장의 오역'이다. 가령 <문학에 대하여>에서 '문학'(literature)'에 대한 옥스포드영어사전(OED)의 (세번째) 정의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대목.

"대체로 문학 산출은 이렇다; 글쓰기의 전신은 특별한 국가나 시기 혹은 대체로 전 세계에서 나왔다. 이제 훨씬 더 엄격한 점에서 글쓰기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형식미나 감정적 효과에 기반에서 고려될 것이 요구된다."(14쪽)

이게 '문학'의 정의란다. 영문학 박사라는 역자가 어떻게 영어 사전의 정의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지 정말로 미스테리하다. 책의 서두에서부터 이런 걸 한국어라고 옮겨놓은 역자에게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줘야 하나? 이런 걸 읽으면서 진도가 빠지길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나는 몇 쪽 읽다가 책을 덮었다). 이게 얼마나 '저질스런' 번역인지는 원문과 대조해보면 알 수 있다:

"Literary production as a whole; the body of writings produced in a particular country or period, or in the world in general. Now also in a more restricted sense, applied to writing which has claim to consideration on the grounds of beauty of form or emotional effect."(p.2)

역자는 'as a whole'이 뭔지도 'body'가 이 문맥에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며, 'restricted sense'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역자는 '의미'란 뜻의 'sense'를 여기서는 '(어떤) 점'이라고 옮겼는데, 다른 곳에서는 전부 '감각'이라고 옮겼다. 가령, '현대적 의미의 문학'을 '현대적 감각의 문학'이라고 옮기는 식이다. 역자의 그 '감각'을 좀 살리느라고 독자들은 애꿎게도 전혀 '의미없는' 문장들을 읽게 되었다). 나대로 다시 옮기면 이렇다: "문학적 생산(창작) 일반. 특정한 시대나 지역에서, 혹은 세계 전역에서 산출된 글들의 총체. 현재는 보다 제한적인 의미에서, 형식적 아름다움이나 정서적 효과를 고려하여 씌어진 글들을 가리킴."(약간 의역했다.)

대개의 동문선 번역서들과는 달리 이 책에는 역자 후기가 '당당히' 들어가 있는데, 한 대목을 옮겨보면 이렇다: "문학비평가로서 제네바학파와, 후에 예일학파의 해체주의자들과 함께 이론을 펼쳐나갔던 밀러는 시적 언어와 수사에 관심을 두면서 '이해'한다는 정의에 대한 모든 인식력 있는 주장들을 해체하여, 세계를 반복하는 단어를 이해하는 바로 그 행위 속에서 독자는 의미의 미궁을 밝히려 하지만, 그 미궁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로부터 다른 어떤 것이 나타나 실제로는 텍스트의 '의미'를 파괴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175-6쪽)

이 대목은 번역서 전체의 '증상'으로도 읽힌다. 놀랍게도 전체가 한 문장인데, 내가 보기엔 이것도 역자 자신의 말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말을 옮겨온 말이다(그게 아니라면 '인식력 있는'이란 엉터리 표현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여간에 독자는 이 번역서에서 '의미의 미궁'을 밝혀보려고 하지만, 그 때마다 '다른 어떤 것', 즉 말도 안되는, 무책임하고 황당한 번역어들이 튀어나와서 텍스트의 의미를 '파괴'하고 있음을 지켜보게 된다.(그러니 역자가 '게을러지는 순간마다 용기를 주셨던' 이들을 어찌 탓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종말의식'에 동참하게 된다(이런 번역서는 언제 종말을 맞는가?).

"그런 점에서 지금 새로운 매체가 인쇄된 책을 점진적으로 대체하듯이 문학이 종말에 이르게 된 것이다."(14쪽)

이 또한 "Literature in that sense is now coming to an end, as new media gradually replace the printed book."(p. 2)의 번역인데, 여기서 'as'는 '-하듯이'가 아니라 '하게 됨에 따라'란 뜻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in that sense'가 번역에서 누락됐다. 저자 밀러는 근대 이후에 발생한 문학에 대한 정의를 소개한 이후에 바로 '그런 의미의 문학'이 현재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 이후에 이어지는 번역문들은 ('뜰'은 커녕) 내리 '잡초밭'이다. 이윤기 선생의 바람처럼 나도 번역자들에게는 되도록 '저주에 가까운 비아냥'은 삼가하고 싶지만, 이런 경우들에서는 그렇게 되질 않는다. 감히 말하건대, 이런 엉터리 번역서를 낸 데 대하여 저자에게 사죄할 일이며, 이런 쓰레기 같은 번역서를 내는 데 동원된 종이들과 잉크들에게 부끄러워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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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7-12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참을 수 없는 수준이네요. 그런데, 참을 수 없는 번역하는 분들도 다들 공부 많이 하셨던데....대체. 쩝.

로쟈 2005-07-12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에 있어서만큼은 매트릭스 같은 세상입니다(그 공부란 게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그래서 가끔을 볼을 꼬집어 보기도 합니다...

주니다 2005-07-1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문선 앞에서 피켓들고 1인 시위라도 해야되는 것인지...이런 부실한 번역서를 내는 간큰 역자는 또 무슨 배짱인 것인지...어쨌건 양식(양심)의 문제인듯 합니다.

사량 2005-07-12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나오자마자 손에 쥐었는데... 스무 쪽 읽고 포기했습니다.--; 역시 번역에 문제가 있었네요.

로쟈 2005-07-12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을 돈주고 사셨다니 제가 다 속이 쓰리네요...

사량 2005-07-12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히.도. 사서 읽진 않았습니다. ^^

Capitalist 2006-01-24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식적 아름다움이나 정서적 효과를 고려하여 씌어진 글들'이 아니고 그런 점 때문에 관심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되는 글들이겠죠. 원래 사전이 옮기기 가장 어려운 법이잖아요.

로쟈 2006-08-1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