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출간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 번역과 관련한 논란을 참고삼아 옮겨놓는다. 첫번째 글은 한국일보 8월 19일자 '책과세상'란에 서평으로 게재됐던 노명우씨(미디어문화연구소장ㆍ독일 베를린대 박사)의 글이고, 두번째 글은 그에 대한 반박으로  지난 8월 27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역자 조형준씨의 글이다. 번역과 관련한 '전문가' 논쟁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듯해서 시사적이다. 이 번역본에 대한 나의 소견은 책이 도서관에 들어온 이후에나 검토후에 제시해볼 계획이다.

***

발터 벤야민(1892~1940)의 삶은 불행했다. 살아 있는 동안 학문적으로 인정 받지 못했던 그는 나치의 위험을 피해 파리에서 스페인으로 피신하던 중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벤야민은 현재 그 누구보다 행복한 ‘이후 삶’을 누리고 있다. 그는 가장 많이 인용되고 연구되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벤야민의 글은 여전히 ‘현재성’으로 가득 차 있다.

벤야민은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서 성장했으며,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했고, 마지막 삶을 그가 “19세기의 세계 수도”라 불렀던 파리에서 보냈다. 벤야민은 열정적으로 도시에 관해 글을 썼다. 그는 베를린에게 ‘일방통행로’와 ‘베를린의 유년시절’이라는 책을 헌정했고, 모스크바 여행을 통해 ‘모스크바 일기’를 남겼다.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벤야민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도시는 파리다. 그는 파리에 대한 관상학적 연구를 통해 자신이 평생 몰두했던 모든 주제를 완성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벤야민의 이러한 계획이 이른바 ‘파사쥬(아케이드) 프로젝트’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대신 그는 파리에 관한 엄청난 분량의 메모를 남겼다. 벤야민이 파사쥬 프로젝트에 관한 유고를 남겼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난 후, 사람들은 벤야민의 유고 출간을 고대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벤야민을 해독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파리 연구 원고더미 속에 있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고가 1982년 벤야민 전집 제5권 ‘파사젠베르크’(한국어 번역 제목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출판되어 세상에 선보였을 때, 이 파리연구 모음집을 보고 사람들은 당황했다. 책이 기대와는 달리 체계를 갖춘 완성된 연구서가 아니라,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된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주제어에 따라 분류한 자료 모음집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책은 독자들의 적극적인 해석 없이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벙어리’에 가깝다. 벤야민은 파리 연구를 위한 재료만을 남겼다. 독자들은 그 재료를 갖고 벤야민이 완성하지 못했던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 그렇기에 벤야민의 미완성 저작은 독자들의 창조적인 해석에 따라 보물도 될 수 있고, 그저 두꺼운 자료 모음집에 불과할 수도 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모르는 한국의 독자들이 전혀 접근할 수 없었던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어 번역은 ‘사건’이다. 하지만 이 ‘번역 사건’은 마냥 즐거운 소식만은 아니다. 번역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문제점 때문이다. 번역판은 먼저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정확성 면에서 문제점을 드러낸다. 한국어 번역자는 일러두기에서 독일어판과 더불어 프랑스어판, 영어판, 일본판을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어판을 참조한 영향 때문인지, 번역서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본식 한자가 등장한다. 독일어판 묶음 A만을 대조했을 뿐인데, 오역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묶음 12, 4에서는 벤야민의 중요한 방법론인 관상학(Physiognomie)이란 단어가 아예 빠져있다.

한국어 번역판은 텍스트 편집에서도 문제점을 드러낸다. 이 저작은 벤야민이 직접 쓴 논평과 연구를 위해 모아둔 직접 쓰지 않은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번역판은 상이한 성격을 지닌 이 두 가지 텍스트를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도록 편집하였다. 벤야민의 유고집이 일반 독자를 위한 파리 연구서라기 보다 전문 연구자를 위한 자료 모음이기에 세심한 편집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한국어 번역판에는 ‘용어 해제’라는 납득하기 힘든 제목으로 벤야민이 사용한 중요한 개념의 독일어, 프랑스어, 한국어 대조표를 실어 놓았다. 이는 과잉 친절일 뿐만 아니라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다. ‘용어해제’를 통해 벤야민의 고유한 언어에 대한 한국어 표준 번역을 제시하고 싶었다면, 번역자는 번역어를 선정할 때 한국에서 벤야민을 번역하기 위해 노력했던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참고해야 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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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쓸까말까 많이 망설였다. 어떤 논쟁을 위한 글도, 그렇다고 어떤 발전적인 제안을 위한 글도 아닌 해명성의 글을 쓴다는 것이 고역처럼 느껴졌다. 더 중요하게는 나의 졸역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보아야 하며 ‘20세기 최대의 서사시’라는 평대로 강호의 온갖 고수들의 날카로운 혜안을 기다려 계속 수정하고 가다듬어나가야 하리라는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 도박, 백화점, 철도, 매춘까지 온갖 분야를 다루는 이 책을 한 명의 역자가 감당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역부족일 수밖에 없으리라. 게다가 저자가 13년 동안이나 매달리는 바람에 개념과 용어상의 통일성, 서지상의 정확성 등은 또 얼마나 문제적이란 말인가. 역자가 아무런 주석도 없는 독일어판 원서와 함께 프랑스어판과 영어판, 잘 읽지도 못하는 일어판을 참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서평자는 먼저 번역판의 텍스트 편집이 문제라며 “상이한 성격을 가진 두 가지 텍스트를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도록 편집하였다”고 지적한다. 과연 그러할까? 독일어본에서는 발터 벤야민이 쓴 글과 자료로 발췌해둔 인용문을 글자 크기로 구분한 반면, 불어본과 영어본에서는 서체를 달리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후자의 방법을 따라 ‘활자 크기는 동일하되 서체와 농도’를 달리하는 방법을 택했다. 게다가 벤야민 본인의 글은 문장을 들여 쓰기로 시작하는 동시에 가로 길이를 길게 한 반면, 인용 부호로 시작되는 인용문들은 가로 길이를 짧게 처리했다. 따라서 적어도 다섯 가지 방식으로 양자를 구분해놓았는데, 다른 외국어판보다 훨씬 더 진일보한 방식을 택한 셈이다.

두 번째로 서평자는 ‘Physiognomie’를 ‘골상학(骨相學)’으로 번역하지 않았다며 이를 단적인 오역의 예로 들었다. 이것을 보면서 한 영문학 전공자가 영남대 법대의 박홍규 교수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동양학’이라 번역하지 않았다며 비판한 기억이 떠올랐다. 문제의 대목은 이렇다. “아케이드의 ‘모습’은 보들레르의 ‘너그러운 노름꾼’의 시작 문장에 나와 있다.” 이어지는 보들레르의 글은 거꾸로 이 대목에서 ‘Physiognomie’를 ‘모습’이 아니라 ‘골상학’으로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오역이라는 것을 입증해주지 않는가? 예를 들어 마르크스 책에 나오는 똑같은 ‘부르주아’라는 용어도 만약 중세적 맥락이라면 ‘성 안 사람’이, 그리고 다른 맥락에서라면 ‘시민’이나 ‘부르주아’가 정확한 번역일 것이다.

또 ‘과잉 친절’로 지적한 독일어-프랑스어 용어 해제는 실제로는 역자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 프랑스어판에서 원용한 것이다. 또 역자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것을 감히 ‘한국어의 표준 번역’으로 제시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다만 산책자, 만보객, 산보자 등 아직도 ‘한국어의 표준 번역’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해 ‘나는 이렇게 번역하니 별다른 오해가 없길 바란다’는 자진 신고에 가까운 것이었다. 서평자의 지적대로 전문가들의 선행 연구를 참조해야겠지만 오히려 전문가들의 의견 자체가 갈리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제도권 밖에 있는 역자로서는 제도권 안의 따뜻한 시선은 언감생심이지만 이런 식의 거친 ‘전문가’의 조언은 정중히 사양하고 싶다.(끝)

*참고로, 조형준씨의 글 가운데 'Physiognomie'는 '골상학'이 아니라 '관상학'이다. 노명우씨가 문제삼은 역어가 그렇다. 노명우씨는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현대성"(2004)이란 논문에서는 '인상학'이라고 옮겼다가 자신이 번역한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에서는 '관상학'으로 옮기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관상학'이란 역어가 적절하다고 본다(이전에 지적한 대로 질로크의 책은 좀 무성의한 번역서인데, 이에 대한 지적은 바쁜 일들이 마무리되면 올리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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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신간 <들뢰즈 커넥션>을 읽고 있지만, 아직 다른 책들이 다 차지 않은 까닭에 이 신간 소개 연재를 미루어두고 있었는데, 드디어 반가운 책이 한 권 나왔고 그걸 빌미로 50번째 '책 수다'를 시작한다(대개 너무 말이 없다는 얘기를 듣는 내가 유일하게 수다스러울 때가 책얘기들을 늘어놓을 때이다). 호기심에 언제 이 연재를 시작했는지 찾아봤더니 2002년 12월 20일로 돼 있다(*다시 확인해보니 10월이다). 대략 2년 8개월만에 50회를 채우는 건데, 작년 러시아 체류 기간을 제외한다면, 실질적으로는 1년 9개월 정도만이다. 이를 스스로 기념하여 맨처음 소개했던 책 다섯 권을 다시 꼽아본다.

 

 

 

 

지젝의 <향락의 전이> 개역판(인간사랑, 2002),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푸른숲, 2002), 에른스트 마이어의 <이것이 생물학이다>(몸과마음, 2002), 김상환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창비사, 2002),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동식 <프래그머티즘>(아카넷, 2002)가 그 다섯 권의 책들이다. 이 다섯 권의 책을 나는 모두 소장하고 있고, <이것이 생물학이다>와 <프래그머티즘>을 제외한 세 권의 책을 읽었다. <향락의 전이>의 원서는 내가 '지젝'에 빠져들도록 만든 책이면서, 동시에 그 번역본은 오역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만든 책이다(오역의 진창에서 살아남는 일은 마치 전장을 방불하게 한다. 나를 단련시키지 않으면 살아남을/읽어낼 수 없었는바, 나의 독해력을 키워준 건 8할이 오역서들이다. 나의 친애하는 적들인 셈). 나머지는 모두 훌륭한 책들이다. 그런 책들과의 '첫'만남을 나는 이런 누추한 자리에서나마 기억해두고자 한다. 그것이 이 연재의 소임이다.

 

 

 

 

이번에 다룰 첫번째 책은 <이기적 유전자>로 잘 알려진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신간 <악마의 사도>(바다출판사)이다. 언젠가 드나들던 도킨스의 홈피에서 이 책이 출간된 2003년쯤에 이와 관련한 얘기를 얼핏 본 듯하다. 하지만, 러시아에 1년 가 있으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새 우리말 번역본이 '알아서' 출간된 것. 마치 생일선물을 받은 듯이 반갑다. 번역도 전문번역가의 작품이라 신뢰가 간다. 책은 일종의 에세이집인데(우리의 경우 최채전 교수가 잘 쓰는) 소개에 따르면 "지난 25년간 리처드 도킨스가 썼던 기고문과 연설문, 회고록과 논설문, 서평과 헌사 가운데서 정수만을 가려 뽑아 엮은 책"으로서 "다윈주의나 과학 전반을 다룬 글, 도덕을 다룬 글, 종교와 교육 및 진리와 과학사를 다룬 글, 개인적인 이야기를 쓴 글 등 종횡무진한 32편의 에세이가 담겨있다."

나는 <확장된 표현형>(을유문화사, 2004)를 제외한 그의 책들을 모두 읽었으며, 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의 책 <풀리는 무지개(Unweaving the Rainbow)>는 원서로 갖고 있다. 그러니 애독자로서의 자격은 충분하다고 본다(<이기적 유전자>의 경우 나는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초판 번역과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개정판 번역을 모두 읽었다). 그런 자격으로 도킨스 입문서를 들자면, 물론 <이기적 유전자>부터 읽어나가는 게 제일 간편한 지름길이지만, 분량이 많다 싶은 독자는 에드 섹스턴이 쓴 <도킨스와 이기적 유전자>(이제이북스, 2002)를 먼저 읽어볼 수도 있겠다. 그보다 좀더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독자라면 킴 스티렐리의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몸과마음, 2002)도 유익하다. 책의 원제는 '도킨스 vs. 굴드'이니까 이 두 스타과학자에 대한 예비지식을 갖고서 읽는 게 좋겠지만(곁말을 덧붙이지면, 이 책은 알라딘에서 '도킨스'란 검색어로 뜨지 않는다. 어정쩡한 우리말 제목이 책의 성격을 드러내주지 못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책이 안 팔려도 당연한 일). 잠시 홍보를 하자면, 이 책은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와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라는 두 석학의 주장을 통해, 지난 수십 년 동안 현대 진화생물학계에서 벌어진 논쟁을 다룬다." 읽어볼 만하다. 

反도킨스를 표나게 내세운다는 점에서 굴드와 한편에 서고 있는 이가 그의 동료 닐스 엘드리지인데, 도킨스가 못마땅한 이라면 그의 책  <우리는 왜 섹스를 하는가>(조선일보사, 2004)을 참조할 수도 있다(나는 아직 못 읽어봤다). 책의 부제는 '이기적 유전자의 성이론에 대한 반박'으로 노골적이다. 내 기억에 굴드와 엘드리지는 단속평형론이라는 진화론을 공동으로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대한 도킨스의 반박은 <눈먼 시계공>(민음사, 1997)이 강력하다. 도킨스에 대한, <이기적 유전자>에 강력한 옹호로는 최재천 교수의 해제(동아일보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 해제)가 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 권의 책 때문에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내게는 <이기적 유전자>가 바로 그런 책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인생관, 가치관을 조금 바꿔준 책 몇 권을 꼽아본다. 나대로의 대학 신입생 추천도서 목록인데(신입생이 제일 먼저 알아야 할일은 자신이 얼마나 '밥통'인가라는 사실이며,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비스듬히 고개를 숙여서 돌자갈 같은 관념들을 말끔히 비워내는 것이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 듀란트의 <철학이야기>(문예출판사), <장자>(현암사) 등이 그것이다(장자의 경우는 특히 '내편'). 물론 이 목록은 들뢰즈식의 '연결접속'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같은 책들이 그 추가적인 접속의 대상들이다. 주체로서의 '나'는 그 책들이 통과해간 어떤 '자리'를 지칭할 따름이다. 이러한 목록에 한국책들이 앞자리에 놓이지 않은 것은 나의 '편식' 탓이겠다.  뭐하면, 대학 1학년때 제일 처음 읽은 책 중 하나인 정진홍 교수의 <종교학 서설>(전망사, 1984)을 슬쩍 올려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절판된 책이라 이미지는 비슷한 성격의 책 <종교문화의 이해>(청년사, 1995)를 가져왔다). 그런 책들을 읽었고, 읽고 있으며, 읽을 것이다.

    

 

 

  

두번째 책은 이미 언급한, 라이크만의 <들뢰즈 커넥션>(현실문화연구)이다. 역자의 기준대로 하자면, 저자 라이크만과의 인연은 나름대로 '깊은' 편이다(여기에 이어서 어제 한시간 반쯤 쓴 글이 날아갔다. 그때그때 '등록'을 안해둔 탓이니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다시 쓴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절반으로 줄여서 쓸 작정이다). 그가 쓴 <미셸 푸코: 철학의 자유>(인간사랑, 1990)을 (비록 원서는 아니었지만) 나도 읽었기 때문이다. 그 책은 드레피스/라비노우의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나남, 1989)와 함께 가장 좋은 푸코 입문서로 꼽히던 책이다. 게다가 라이크만의 <진리와 에로스: 푸코, 라캉, 윤리의 문제>와 <들뢰즈 커넥션>의 원서를 진작부터 복사해서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다시 <들뢰즈 커넥션>의 번역서를 마주하게 되니 '감회가 남다르다.' 비록 들뢰즈의 사상에 대한 적절한 입문서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역자에 따르면 "이 책은 한국에서 중요한 입문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특히 예술과 미학을 다루는 6장은 이 책의 백미다. 들뢰즈의 철학은 바로 미학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6장까지 다 읽지 못했기 때문에(나는 현재 3장까지 읽었다) '백미'를 읽어본 소감은 아직 적을 수 없겠다. 하지만, 경험론과의 관계를 다룬 2장(실험), 3장(사유)은 충분히 읽을 만했다. 물론 역자의 '독자적인' 역어들에 먼저 익숙해져야 하는 애로사항은 감수해야 한다. '들뢰즈 전공자'의 번역으로 책의 표지도 훌륭하지만 책의 편제는 그닥 '프로'답지 않으며(너무 많은 외국어 병기가 오히려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군데군데 오역(실수)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도 아쉬운 점. 이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나중에 다른 자리에서 다루겠지만, 일례를 지적하자면 이런 식이다.

52쪽에서 "들뢰즈의 독창성은(...) 철학에서 개념들의 고름이나 정합성이 있기 위해서는 문제들에 의존하게 되고, 이 문제들은 사물들이 동의에 '정착'해서 그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르기 전에 도래하는 '바깥'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말해다는 데 있다."고 돼 있는데, 원문은 이렇다: "An originality of Deleuze is (...) to say that the consistency or coherence of concepts in philosophy owes its existence to the problems introduced by an 'outside' that comes before things 'settle' into agreements and persists within them."(20쪽) 내용은 단순한데, 다만 역자는 'persists'의 주어를 '바깥(outside)'이 아닌 '사물들(things)'로 잘못 보았다. 다시 옮기면, "들뢰즈가 독창적으로 주장하는바, 철학에서 개념들의 일관성 혹은 정합성은 (철학의)'바깥'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에 빚지고 있다. 이 '바깥'은 문제가 동의점들로 고정되기 전에 도래하여 거기에 계속 존속한다." 

<들뢰즈 커넥션>과 함께 나온 책이 대담집 <디알로그>(동문선)이다. 라이크만의 책의 들뢰즈 저작 약어표에 보면, D(='Dialogues')로 돼 있는 책인데, 불어본은 1977년에 나왔고 나도 갖고 있는 영역본은 1987년에 나왔다. 기존에 번역돼 있는 <대담 1972-1990>(솔, 1994)과는 다른 책이며 분량도 얇다. 영미문학쪽 얘기가 많이 나왔던 걸로 기억된다. 이로써 들뢰즈의 책은 흄을 다룬 들뢰즈 최초의 저작 <경험론과 주체성>(1953)을 제외한 거의 모든 책이 번역돼 나온 듯하다(이 가운데 최악은 <비평과 진단>인데, 거기에 견줄 만한 책이 더 있는지 모르겠다).  

 

 

 

 

세번째 책은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아카넷). 나는 분량으로 보아 <도덕 형이상학>이 출간된 줄로 알았으나 목차를 보니 흔히 <도덕형이상학의 정초>로 불리던 그 책이다.  이 책은 물론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놓기>(책세상, 2002)로 번역돼 나온바 있다. 일반독자로선 <실천이성비판>의 다이제스트 정도로 이해하는 게 좋겠다. '다이제스트'란 말 그대로 보다 이해하기 쉽고, 소화하기 쉬운 책. 더구나 두 권에는 모두 자세한 '해제'가 붙어 있으므로 칸트 도덕철학에 대한 입문서로서 적격이라 할 만하다. 아마 '윤리형이상학'의 원어는 'Metaphysik der Sitten'이며, 흔히 'metaphysics of morals'로 영역된다. 그런데, 칸트에게서 '도덕'이란 게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과는 달리 실질적으론 '윤리'의 뜻을 갖는다(도덕과 윤리의 차이에 대해선 고진의 견해 참조). 역자인 백종현 교수는 그런 의미에서 아예 (기존의 번역관행과는 달리) '윤리형이상학'이라고 '의역'한 듯하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니나, 그 또한 칸트식의 어법이므로 나름대로 존중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게 내 생각이고, 나로선 보다 친숙한 제목인 '도덕형이상학'에 더 애착을 갖는다. 이러한 칸트 윤리학에 대한 가장 '자극적인' 입문서는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고진의 <윤리21>(사회평론, 2001)과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도서출판b, 2004)이다. 후자의 부제는 '칸트와 라캉'이다.

 

 

 

 

네번째 책은 터키문학의 거장이라는 아샤르 케말의 작품집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문학과지성사)이다. 케말의 다른 작품이 번역된 것 같지 않으므로 최초로 소개되는 게 아닌가 싶다. 소개에 따르면, "표제작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는 납치혼과 명예살인이라는 전통에 희생되는 여인의 삶을 아이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어머니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아이의 복잡한 심정과 처절한 가족사, 사람들의 질투와 증오가 간결한 문체로 그려진다. 치밀한 심리 묘사와 추진력 있는 전개가 돋보이는 작품." 명예살인, 혹은 복수를 다룬다는 점에서 당장에 연상되는 소설은 알바니아의 거장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문학동네, 1999)이다. 역시나 "알바니아 북부 고원 지대에 남아 있는 관습법(카눈)의 전통을 소재로 인간 실존의 비극을 형상화한 장편 소설"로서 "소설의 중심 소재는 알바니아의 북부 고원 지대에 남아 있는 옛 관습법(카눈)의 전통이다. 카눈이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알바니아 고유의 관습법으로 피는 피로써 갚는다는 것이 주내용이다." 문학작품을 많이 읽는 박찬욱 감독이 복수 3부작을 찍으면서 이 '변방'의 소설들을 참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복수의 색깔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해본다(<올드보이>에서 이물감이 두드러지지만, '복수'는 한국적인 정서가 아니다. 그닥 '독한' 민족이 아니어서).


 

 

  

마지막 책은 '휴식' 같은 책으로 골랐다. 이란 영화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바람이 또 나를 데려가리>(디자인하우스). 소개에 따르면, "197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 영화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직접 촬영한 사진과 시를 수록"한 책이다. "흑백의 간결한 프레임 안에 그의 영화를 통해 익숙해진 이란의 다양한 자연경관을 담아"냈고, "시적인 정취를 드러내는 사진들 사이사이로 짧고 담백한 시들이 아련하게 등장한다"고 한다. 그의 영화들이 그렇지만, 고상하고 고답적인 '문자들'에 멀미가 날 무렵 마음을 비우는 의미에서 한번쯤 뒤적여볼 만하겠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3부작에서 <체리향기>(이 영화를 아직 안 봤군)까지의 '소박한' 그의 영화세계는 한때 영화의 '오래된 미래'란 평을 듣기도 했다. 아마도 영화는 박찬욱의 복수 3부작과 키아로스타미의 이란 3부작 사이에서 좀더 진동하겠지만... 

05. 8. 24-25.  

P.S. <바람이 또 나를 데려가리라>의 영어제목은 'Walking with the Wind'이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바람이 우리를 또 어딘가로 데려갈 때까지 오늘도 나한테 주어진 책들을 읽어가야겠다...

P.S.2. 케말과 관련하여 나귀님의 서재에서 퍼온 자료.

<메메드>(홍진주 옮김, 학원사, 1988 중판)

야사르 케말의 책으로는 아마도 국내 "최초" 번역본인 듯한 <메메드>. 모두 4부로 구성된 작품 가운데 제1부이다. 본래 이 책은 1982년에 주우(학원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한 권으로 출간되었다. 지금 사진에 보이는 것은 훗날 단행본으로 "방법"해서 다시 만든 것이다. 이번에 나온 <독사를>의 작가 연보에는 "메메드"가 아니라 "메흐멧"으로 되어 있었다.
 
SEAGULL, (tr. by Thilda Kemal, NY: Pantheon Books, 1981)

터키에서는 1976년에 나온 소설이라는데, <메메드>와 <독사를>의 작가 연보에는 원제인 Al Gozum Seyreyle Salih 에 해당하는 작품이 없는 듯했다. 과연 무엇일꼬. (여기서 Salih 는 주인공 이름인 듯.) 표지에 US Army Young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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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8-24 23:04   좋아요 0 | URL
지금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데리다"를 읽고 있는데 수능만 끝나면 진화생물학(사회생물학)서적들도 좀 손을 봐야겄습니다. 로자님 책 소개는 늘 유익하네요.

비로그인 2005-08-24 23:04   좋아요 0 | URL
아참 저 그리고 질문이 하나 있는데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알려면 무엇을 읽는게 좋은가요? 박병철 교수의 개론서는 읽었는데 좀 아쉬운 점이 많아서...

로쟈 2005-08-25 12:26   좋아요 0 | URL
수능도 보기 전에 '데리다'를 읽는다구요? 천재신가 봅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선, 저도 아직 안 읽었지만, 전기 <천재의 의무>(문화과학사)가 평판이 좋은 책입니다. 번역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주니다 2005-08-25 16:45   좋아요 0 | URL
다음부턴 꼭 '등록'을 수시로 하시길...업데이트가 늦었던 사정이 있었군요.^^ 전 인터넷 게시판에 긴글을 쓸 때는 워드 프로그램에서 문서를 작성한 후 따다 붙이는 방법을 씁니다. 힘들여 쓴 글 날아가면 대책없이 슬퍼집니다.ㅜ.ㅜ 더군다나 이젠 기억력도 신통찮고...동문선에서 나온 '디알로그'는 이제 거의 본능적으로 걱정이 앞서는군요. 책값도 만만치 않습니다. 대단한 동문선...

로쟈 2005-08-25 17:12   좋아요 0 | URL
이미지 등록 때문에 알라딘에 바로 쓰는데, 가끔 그런 일을 당하게(!) 되네요.^^

armdown 2005-08-26 02:43   좋아요 0 | URL
지적하신 부분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잘못되었다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더 정확시 지적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들뢰즈 커넥셕' 역자 올림.

yoonta 2005-08-26 02:44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스캔에 김재인님의 실수가 또 잡혔군요.. 번역의 꼼꼼함을 늘상 주장하시는 그분으로써는 상당히 뭐 팔리는 일이겠네요..^^ 내용상으로도 개념의 외부가 가지는 중요성을 말하는 부분인 것 같은데..김재인씨의 번역은 무슨 선문답같아서 도무지 알아 먹을수 없는 문장이 되어버렸군요..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사소하지 않은 부분에서 실수한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저런 문장들이 책 읽다가 가끔씩 튀어나와 버리면 돌아버리죠..(읽는 내가 머리가 나쁜줄 알고) ^^

yoonta 2005-08-26 02:46   좋아요 0 | URL
앗..그사이 역자께서 댓글을 다셨군요..로쟈님의 댓글을 기대하면서...^^

로쟈 2005-08-26 11:58   좋아요 0 | URL
역자께/ 제가 지적한 것은 아주 단순한데, "...'outside' that comes before things 'settle' into agreements and persists within them."에서, 반복하자면 persists의 주어가 번역하신대로 things가 아니라(그렇다면 동사가 3인칭 단수가 될 수 없겠죠) outside여야 하고, 문맥상으로도 그게 맞습니다. 사실, 오역은 번역의 '필요악'이며 다만 우리로선 언제나 긴장하는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다른 대목들은 책을 마저 읽은 다음에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armdown 2005-08-28 21:53   좋아요 0 | URL
지난번에 술먹고 써서 보이지 않았었군요. 명백한 오류네요. 번역을 수정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들뢰즈의 독창성은(...) 철학에서 개념들의 고름이나 정합성이 있기 위해서는 문제들에 의존하게 되고, 이 문제들은 사물들이 동의에 '정착'하기 전에 도래하여 그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는 '바깥'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말해다는 데 있다." 번번히 신세(?)를 지게 되네요. 앞으로도 많은 질정 부탁드립니다.

einbahnstrasse 2005-08-29 03:13   좋아요 0 | URL
케말의 '메메드'가 80년대 초반에 번역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로쟈 2005-08-29 11:39   좋아요 0 | URL
암다운님/ 신세(?)는 더 좋은 번역으로 갚으시면 되겠죠. <안티 오이디푸스>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앙겔루스 노부스님/ 케말의 다른 번역에 대해서는 몇 분이 지적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5-08-29 18:03   좋아요 0 | URL
오타 났네요.^^ 이스마엘 카다레는 "알바니아" 사람입니다.

로쟈 2005-08-29 18:16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테렌티우스 2006-12-09 15:21   좋아요 0 | URL
네 맞지요. 우리말 들뢰즈의 '디알로그'는 일단 다음을 번역한 책이고요
초판 Dialogues avec Claire Parnet. Paris, Flammarion, 1977, 184 p. ;
2판 2e éd. 1996, coll. « Champs », 187 p. ('L'actuel et le virtuel'에 대한 부록이 추가).

이전 솔 출판사의 '대담 1972-1990'은 다음을 번역한 것인데 잘 아시다시피 완역이 아니지요. 아래에 각 불어원본 및 우리말 번역본을 보시면 잘 알 수 있고요...

Pourparlers 1972 - 1990, Les éditions de Minuit, Paris, 1990.

‑‑‑‑‑ Table des matières ‑‑‑‑‑

I. De L’Anti-Œdipe à Mille plateaux :
1. Lettre à un critique sévère –
2. Entretien avec Félix Guattari sur L’Anti-Œdipe –
3. Entretien sur Mille plateaux

II. Cinéma :
4. Trois questions sur Six fois deux (Godard) –
5. Sur L’Image-mouvement –
7. Doute sur l’imaginaire –
8. Lettre à Serge Daney : Optimisme, pessimisme et voyage

III. Michel Foucault :
9. Fendre les choses, fendre les mots –
10. La vie comme œuvre d’art.
11. Un portrait de Foucault

IV. Philosophie :
12. Les intercesseurs –
13. Sur la philosophie.
14. Sur Leibniz –
15. Lettre à Réda Bensmaïa, sur Spinoza

V. Politique :
16. Contrôle et devenir –
17. Post-scriptum sur les sociétés de contrôle.

1. '반-외티푸스'에서 '천개의 세트'까지
1) 어느 가혹한 비평가에게 보내는 편지
2) '반-외티푸스'에 관한 이야기
3) '천개의 세르'에 관한 이야기

2. 영화
1) 상상에 대한 의혹
2) 세루쥬 다네에게 보내는 편지 : 낙관, 비관 그리고 여행

3. 미셸 푸코
1) 푸코의 초상화

4. 철학
1) 조정자들
2) 철학에 관하여
3) 라이프니츠에 관하여
4) 레다 벤마이아에게 보내는 편지 : 스피노자에 관하여

5. 정치
1) 통제와 생성
2) 추신 : 통제 사회에 대하여

로쟈 2006-12-09 12:16   좋아요 0 | URL
저도 두 책의 영역본을 따로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작년 연말부터의 개인적인 인연 때문에 벤야민 얘기를 자주 하게 된다(<모스크바 통신>에 그런 내용들이 좀 들어가 있다). 또 자주 얘기하다 보니 남들에게는 어느새 유사-전문가처럼 비치기도 하는 모양이다(물론 나는 벤야민에 관한 유사-전문가적 ‘에세이’이라면 웬만큼은 쓸 수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자면, “벤야민의 매력 앞에서는 자석처럼 끌리거나 몸서리치며 거부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니 벤야민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독자가 벤야민이란 이름을 자주 들먹이며 벤야민 읽기에 나서는 것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자연현상’에 가깝다. 마치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비록 몸서리치며 거부하기보다는 ‘대세’를 따르기로 작정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벤야민 읽기가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벤야민에 대한 짤막한 글을 한편 쓰기 위한 필요 때문에 최근에 몇 권의 벤야민 책을 뒤적거렸는바(“웰컴 투 벤야민베가스!” 참조), 물론 재미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나로선 곤욕이었다. 이유는 물론 다소간 부적절하고 무성의해 보이는 번역들 때문. ‘벤야민’이란 원(原)텍스트 자체도 난해하다고 하지만, 거기에 ‘우리식 번역’의 불가해성까지 겹쳐지게 되면 웬만한 지력(知力)으로는 감을 잡거나 읽어내기 힘든 수준이 된다. 남들 수준의 웬만한 지력만을 소유한 나로선 당연히 버벅댈 일인 것이고. 해서, 그런 하소연을 담게 될 이 편지는 유감스럽지만 ‘즐거운 편지’가 아니라 ‘괴로운 편지’가 될 것이다. 

 


 

 

 

 

 

 

“웰컴 투 벤야민베가스!”에서 벤야민 읽기의 길잡이로 내가 제시한 텍스트들은 아도르노의 <발터 벤야민의 초상>과 아렌트의 <발터 벤야민>, 그리고 숄렘의 <한 우정의 역사>인데, 이 중 아도르노의 텍스트는 (물론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깊이 있으면서도 상당히 난해하다(아렌트와 숄렘의 텍스트는 상대적으로 읽기 편하다). 짧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역본을 참조하여 반나절 이상을 꼬박 투자해야 했다. 아도르노 전공자의 번역인 만큼 아도르노의 난해성은 십분 전달하고 있는 번역인데, 그런 만큼 좀더 읽기/이해하기 편한 번역은 될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대로 읽기 편하게 고쳐 읽으려면 상당한 견적이 나오는지라 여기서는 그냥 한 대목만 지적하기로 한다.


국역본 <프리즘>의 276쪽. “이러한 강령은 그의 미완성 대표작에 대한 논평에서 다음과 같이 공식화되었다. ‘영원한 것은 아무튼 어떤 이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옷에 달린 한 조각의 레이스다.’” ‘미완성 대표작’이라는 건 <파사젠베르크> 곧,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인용문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대한’ 논평이 아니라 <아케이드 프로젝트> ‘안에 들어 있는’ 벤야민의 메모/노트이다. 일부러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관련한 대목을 꼽았는데, 이런 식으로 조금씩 틀어지는 대목들이 국역본에는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


가령, 288쪽에서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볼 수 있듯이 먼지나 플러시천 같은 최소한의 객체 혹은 초라한 객체들을 편애하는 그의 태도는 관습적 개념망의 그물코 사이로 빠져달아나는 것들, 혹은 지배정신이 너무도 도외시 하여 성그한 판단 이외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모든 것들에 매료되는 기술과 상호보완적이다.” 흔히 ‘대상(들)’로 번역될 단어가 왜 ‘객체(들)’로 옮겨졌는지는 의문이다(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객체들’? 물론 ‘사소한 대상들’을 뜻할 것이다. 283쪽에서는 ‘사물화(reification)’을 ‘대상화’로 옮겨놓았는데,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상식적이지 않다. 프루스트에게서의 ‘비의지적 기억(involuntary memory)’을 ‘본의 아닌 기억’(289쪽)으로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역시나 불가능하지 않지만 촌스럽다. 가뜩이나 복잡해서 각도가 잘 나오는 아도르노의 문장들을 독해하는 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식으로 ‘갠세이’해서야 되겠는가?(해서 아도르노의 텍스트는 따로 브리핑을 필요로 한다.)

 

 

 

 

아도르노에 비하면 <맑스주의의 향연>의 저자 마샬 버먼은 아주 친절하며, 번역 또한 깔끔하다(‘맑스주의의 모험(Adventures in Marxism)’이란 원제가 ‘맑스주의의 향연’으로 바뀐 것은 이해할 만한 조처이다. ‘모험’이란 표현이 혹시나 反맑스주의적 함의를 전달하지 않을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런 ‘모험’을 감수하지 않은 것이 바람직한 선택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비록 벤야민을 다루고 있는 12장에서 서평대상으로 삼고 있는 3권의 책 가운데 두 권은 국내에 소개돼 있지 않지만(한 권은 하버드대학에서 새로 나온 선집의 1권이다) 신뢰할 만한 저자 버먼은 능숙한 솜씨로 벤야민에 관한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가령, 벤야민의 ‘유별난’ 파리(프랑스) 애호증에 대해서 버먼은 (벤야민 자신은 소원한 관계로 간주했지만) 아버지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본다. “벤야민의 인자한 아버지는 파리에 산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베를린 집에서도 늘 파리에서 사는 것처럼 지냈다. 그 결과 벤야민은 별다른 노력 없이 프랑스의 언어와 문화에 통달했다.”(335쪽) 그리하여 “하이네 이후 프랑스 문화 속에서 이처럼 철저하게 편안함을 느낀 독일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런 개인사적 맥락 외에 버먼은 독일과 프랑스 간의 역사적 맥락 또한 짚어준다. “프랑스 계몽운동 이후 프랑스혁명 이전까지 적어도 두 세기 동안, 파리는 조상 대대로 독일의 다른 한 쪽이었다.” 마지막은 구절은 “Paris has been Germany's ancestral Other.”를 옮긴 것인데, “파리는 조상 대대로 독일의 타자였다.” 정도가 낫겠다. 여기서 ‘타자(Other)’란 쉽게 말하면 “나에게 없는 걸 갖고 있는 놈”을 뜻한다: “독일인들은 언제나 파리를 자기들에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 두 가지의 주요한 근원으로 여겨왔는데, 섹스와 유행이 그것이다.”(336쪽) 여기서 ‘섹스와 유행’은 ‘Sex and Style’을 옮긴 것이다(하긴 독일은 자동차는 잘 만들지만, 우리 생각에도 포르노나 란제리와는 인연이 없어 보인다).


해서 “수많은 독일 고유의 정치학(독일 사상에서 창조적이며 풍성한 것, 그리고 망상적이며 위험한 것)은 섹시하고 멋들어진 친구 바로 옆집에 사는 고상한 얼간이라는 독일 국민의 집단적인 불쾌감에서 생겨난다.”(참고로, 이와 유사한 지적은 <낭만주의의 뿌리>에서 이사야 벌린도 반복하는데, 벌린은 역사적 낭만주의의 발상지가 독일이며 그 뿌리는 독일 국민의 집단적인 열등감이라고 주장한다.)


거기서 다시 벤야민으로 돌아오면, 자, “자신을 독일 토박이 얼간이로 여기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독일인답지 않은 멋쟁이로 인정받는 벤야민이라는 사람을 상상해보라. 이 독일인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 따르려 했다고 생각한 독일 문화와 왜 조화하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내내, 벤야민은 독일 문화를 독일인보다 더 잘 아는 유태인이며, 또한 ‘계몽의 도시’(=파리)에 훌륭하게 적응하고 자기 집처럼 너무 편하게 지낸 멋쟁이라고 미움을 샀다.”(336쪽) 자주 언급되는 벤야민의 양가성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비록 눈이 휘둥그래지는 파리에서는 촌뜨기/얼간이였지만, 베를린에서는 멋쟁이로 통할 수 있었던 것. 그런 의미에서도 그는 ‘걸어다니는 모순덩어리(a walking contradiction)’였다.


버만이 벤야민의 전기에서 또 한 가지 강조하는 것은 젊은 시절 가장 절친했던 친구이자 시인이었던 프리츠 하인레의 자살과 그에 대한 벤야민의 (찬양적) 태도이다. 이것을 그는 1940년의 자살과 연관지어 생각한다(벤야민은 이전에도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다). 흥미로운 건 자살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하여 벤야민과 루카치를 비교해볼 수 있다는 버만의 제안이다: “벤야민과 루카치를 비교해볼 만한 한 가지 방법은 둘 다 젊은 시절에 자살을 모면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에게 대단히 소중한 사람이 죽었을 때 몹시 좌절했다. 하지만 루카치는 자신이 늘 자책했던 첫사랑의 자살을 조금도 현명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반면 벤야민은 가장 친한 친구의 자살을 언제나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것으로 본다.”(349쪽 각주1) 이러한 지적은 매우 시사적인데, 나는 그런 관점에서 루카치와 벤야민을 비교하는 글을 구상중이다(더 잘 쓸 수 있을 버만이 아직 쓰지 않았다면).

 


이런 유익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는 <맑스주의의 향연>의 번역은 별로 흠잡을 구석이 없다(다른 번역들이 이 정도만 되더라도 ‘읽을 만한’ 세상이다!). 옥의 티라면 ‘문학 상식’이 약간 부족한 것. “도대체 어떻게 벤야민이, 그 사람들은 자신을 자기들의 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체스판의 기사 이상으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341쪽) 원문은 “How could Benjamin have thought that these people would see him as any more than K. trying to break into their Castle?”(246쪽) 여기서 암시적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은 카프카의 소설 <성>이고, K는 그 소설의 주인공 건축기사이다. 역자는 아마도 K를 Knight(기사)의 약자 정도로 보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break into'는 ‘무너뜨리다’가 아니라 ‘침입하다’란 뜻이다.


‘문학 상식’ 운운하는 것은 내가 읽은 다른 장들에서도 그런 류의 오역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기병대>의 러시아 작가 ‘이삭 바벨(Isaac Babel)’을 ‘아이작 바벨’로 옮긴 것도 그렇고, 루카치를 다룬 장에서 <죄와 벌>에 등장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친구 ‘라주미힌(Razumikhin)’을 ‘라주미킨’으로(각주에서는 한술 더 떠서 두 번이나 ‘라추미킨’으로) 옮긴 것도 사소하지만(?), 인명(人名) 경시의 사례들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정도면 ‘괴로움’을 말할 수 없다. 애초에 내가 ‘괴로움’이란 표현으로 염두에 둔 책은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이다. 전공자가 옮긴 데다가 외견상 아주 얌전해 보이는 책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내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이 번역의 ‘무지함’이라기보다는 ‘무성의함’인데, 그 ‘무성의함’이라는 게 어떤 걸 말하는 것인지 좀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시간상/분량상 다른 자리를 마련하겠다...

 

05. 0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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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불우했던 천재 비평가 발터 벤야민(1892-1940) 붐이 일고 있다. 그의 미완의 주저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 2005)가 ‘드디어’ 번역/출간됐고(최근에 절반이 나온 이 책의 나머지 절반은 11월에 나온다고 한다), 곧 10권짜리 우리말 벤야민 선집도 연말부터는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벤야민의 세기’가 준비되는 것인가?

 

 

 

사실, 이러한 벤야민 붐은 서양이나 일본 등지에서는 진작부터 시작된 것이므로 특별히 한국적인 현상은 아니다. 우리도 이제 그러한 물결에 발을 담글 수 있게 된 것일 뿐. 해서, 자신이 즐겨썼던 말이지만, 그의 ‘사후의 삶’(afterlife)은 더 이상 불우해보이지 않는다. 비록 “수줍음 많고 숫기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의 바람대로 20세기 독일 최고의 문학비평가로 평가되는 한편, ‘도시맑스주의’의 선구적 이론가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싱긋 미소를 지을 만도 하지 않을까.

 

 

 

입소문이 아니라 본격적인 번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처음 벤야민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0년 차봉희 교수 편역의 <현대 사회와 예술>, 그리고 1983년 반성완 교수 편역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이 출간되면서부터이다(1985년엔 베르너 풀트의 전기 <발터 벤야민>(문학과지성사)이 소개되었다). 이제 25년쯤의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인데, 이 시기 ‘벤야민’의 간판 노릇을 한 것은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논문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었다. 해서, ‘벤야민=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등식이 통용되던 이 시기의 우리에게 벤야민은 친구인 아도르노에게 영감을 준 문학비평가이자 동시에 매체(미디어) 이론가였다.


벤야민 수용사의 두번째 단계는 1992년 벤야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박설호 교수의 편역으로 <베를린의 유년시절>(솔출판사)이 출간되면서 시작된다(거기에는 벤야민의 박사학위논문인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예술비평의 개념>이 포함돼 있었다). 이를 통해서 벤야민의 예술론을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는 마련되었지만, ‘새로운 벤야민’, 즉 도시 이론가 혹은 도시 ‘관상학자’로서의 벤야민의 모습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단계이다(<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는 물론이고,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실린 ‘발터 벤야민 연보’에도 ‘파사젠베르크’, 곧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관한 내용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전설로만 남아 있다가 뒤늦게 발견되어 독일에서도 지난 1982년에서야 전집에 묶여 출간될 수 있었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우리말로도 소개됨으로써 우리의 벤야민 수용사는 세번째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근년에 나온 벤야민 관련서들이 조명하고 있는 것도 대부분 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관련되는바, 한마디로 “발터 벤야민, 도시를 산책하다”를 주제로 하고 있다.


어떤 도시들인가? 나폴리, 마르세유, 모스크바, 베를린, 그리고 파리 등이 그가 산책하면서 읽고/쓰고 있는 주요 도시들, 아니 도시-텍스트(city-as-text)들이다. 현대성의 상징인 이 도시-텍스트들을 재료로 하여 그가 계획했던 것, 하지만 미완으로 남겨놓은 것이 텍스트-도시(text-as-city)라는 ‘유례없는’ 텍스트로서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이다. 우리의 책상머리에 놓여 있는 것 말이다. 이렇게 말을 건네면서: “웰컴 투 벤야민베가스!”(Welcome to Benjamin Vegas!)


여기서 나의 몫은 아직 다 둘러보지도 못한 벤야민베가스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벤야민베가스로 떠나기 위한 간단한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다(나는 ‘가이드’가 아니라 ‘스토커’다). 무작정 떠나보는 것도 여행의 한 가지 방법이긴 하지만, 뭐라도 한 장 들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하기 때문이다. 혹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벤야민의 유태인 세 친구의 ‘보고서’를 길잡이 삼아 미리 훑어볼 수도 있겠다.


아도르노가 쓴 <발터 벤야민의 초상>(<프리즘>, 문학동네, 2004)과 한나 아렌트가 쓴 <발터 벤야민>(<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1983), 그리고 게르숌 숄렘이 쓴 <한 우정의 역사: 발터 벤야민을 추억하며>(한길사, 2002)가 그것들이다(아렌트의 글은 벤야민 선집 <일루미네이션>의 영역본 서문으로도 수록돼 있는데,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은 <문학비평과 이론>(문예출판사, 1987)이다). 물론 이들을 참조하는 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참고로 말하자면, 아도르노의 글은 꽤 난해하다. 아도르노와 숄렘은 1955년에 나온 최초의 <벤야민 전집>(2권)을 편집하기도 했으니 벤야민 생전에나 사후에나 ‘최측근들’이라 할 만하다).

 


 

 

 

 

 

내가 나름대로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샬 버먼의 <발터 벤야민 - 도시의 천사>(<맑스주의의 향연>, 이후, 2001)부터이다. 1996년에 영어로 발간된 벤야민 관련서 세 권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씌어진 이 글은 짤막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의 전기적/사상적 맥락을 잘 짚어주고 있다. 그러면서 1999년에 발간된 영어본 <아케이드 프로젝트>(하버드대출판부)를 예고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벤야민에 대한 버만의 평가: “나치와 자기 자신의 파멸의 느낌이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때조차 벤야민은 독자들에게 길거리에서 춤추는 법과 현대 세계에 대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결론: “벤야민이 센트럴 파크에서 춤추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우리가 춤을 추면서 벤야민을 기억하는 것은 그다지 늦지 않았다.”(348쪽)


‘19세기 세계수도로서의 파리’를 베를린보다도 사랑했던 벤야민이 1940년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하지 않고 미국으로의 망명에 성공했더라면 이후에 ‘20세기의 세계수도 뉴욕’도 사랑하게 됐을까? 자본주의적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는?(라스베가스에 처음 카지노가 들어선 것은 1941년이라고 한다.) 그런 의문은 ‘도시맑스주의’(Metromarxism)란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지리학자 앤리 매리필드도 던지고 있는데, 그가 짐작하기에 “벤야민이 20세기 후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그 역시 전(前) 뉴욕 시장인 줄리아니의 보도(步道) 개혁을 혐오했을 것이고, 노숙자와 노점상, 무단횡단자, 그리고 뉴욕의 노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거주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161쪽)


당연한 일이지만, 매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시울, 2005)의 한 장은 “자본주의 도시를 세속적 계몽이나 혁명 속의 혁명적인 것인 것으로, 또한 신뢰할 만한 빛의 도시로 평가한 최초의 맑스주의자”, 아니 “아마도 20세기 가장 위대한 도시맑스주의자”, 벤야민에게 바쳐지고 있다(유감스럽게도 우리말 번역본은 많은 오역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맑스주의 연구를 통해 도시를 연구했던 엥겔스와는 달리 도시 연구를 통해서 맑스주의를 연구했던 벤야민의 ‘도시맑스주의’를 그의 전기적 맥락 속에서 명쾌하게 해명하고 있다.   


 

 

 

 

 

각각 ‘도시의 천사’ 벤야민, ‘도시맑스주의자’ 벤야민을 화두로 하고 있는 버먼과 매리필드의 글이 말하자면 워밍업이 되겠다. 거기에 이어서 ‘벤야민과 도시’란 주제에 대해서 보다 포괄적이면서도 자세한 안내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건 그램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2005)이다. 특히, 서론과 결론은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는 데 아주 유용한데, 마치 63빌딩의 전망대 같은 역할을 해준다(유감스럽게도 우리말 번역본은 몇 군데 부정확한 대목을 포함하고 있다).


질로크가 셈하고 있는 벤야민의 도시풍경 연작들은 1924년에 씌어진 <나폴리>를 기점으로 <모스크바>(1927), <바이마르>(1928), <마르세유>(1928), <파리, 거울 속의 도시>(1929), <산 지미냐노>(1928), <북해>(노르웨이의 베르겐시에 대한 스케치, 1930) 등을 포함하며 이들은 ‘사유이미지’로 통칭된다. 물론 19세기 파리에 바쳐진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이 ‘사유이미지’의 총결산이다. 질로크는 이러한 도시풍경을 관상학, 현상학, 신화, 역사, 정치, 텍스트라는 6개의 범주, 혹은 키워드로써 갈무리한다. 

 

그가 보기에 벤야민의 도시풍경은 “맑스주의적 전통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벤야민만의 아주 독특한 방식이다. 벤야민은 현대성과 현대적 삶의 중핵으로서의 도시를 사랑했고 또한 혐오했다. 도시는 그에게 매혹의 대상이자 동시에 구원의 대상이었으며, 천국이자 지옥이었다. 질로크의 표현을 빌면, 벤야민은 ‘걸어다니는 모순’이었는바, 현대성의 비판과 구원이라는 벤야민 텍스트의 힘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그러한 모순 속에서이다.  


질로크의 책을 통해서 벤야민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윤곽에 대한 브리핑을 제공받았다면, 이제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벤야민베가스’를 직접 거닐어볼 차례이다. 여기부터는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를 지참하는 게 좋겠다. 그녀는 벤야민의 프로젝트가 나폴리(남쪽)와 모스크바(동쪽), 베를린(북쪽), 파리(서쪽)라는 네 개의 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나폴리에 관한 짧은 텍스트인 <나폴리>는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지만(이에 대한 해설은 질로크와 매리필드를 참조), 모스크바에 관한 텍스트 <모스크바 일기>(그린비, 2005)는 올해초에 소개된바 있다. 베를린 텍스트를 구성하는 것은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베를린 연대기> 등이며(전자가 번역돼 있다),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파리 텍스트가 바로 <아케이드 프로젝트>인 것.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수집가’ 벤야민이 마지막 열정을 다 바쳐서 모아놓은 자료들의 거대한 묶음이자 몽타주 재료들이다. 요컨대, 도시 자체이다(그래서 ‘텍스트-도시’이다). 벤야민이 사랑했던 파리의 아케이드는 현대성의 환상(판타스마고리아)이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매혹의 장소이며, 또한 그러한 환상으로부터 우리가 깨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횡단)해야 하는 공간이다. 벤야민이 보기에 이 도시의 바깥, 현대성의 바깥에서는 현대성에 대한 비판도 구원도 가능하지 않다. 오직 우리를 찌른 창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도시의 ‘경험’만이 우리를 도시의 환상으로부터 구제해줄 수 있다. 이것이 벤야민의 변증법이며, 그가 우리에게 텍스트-도시의 경험을 제안하는 이유이다. 자, 저것이 우리에게 손짓하는 텍스트-도시, 벤야민베가스의 입구이다. 판돈과 배짱이 충분하다면 한번 들어가 보시라! 나의 동행은 여기까지이다...  

 

 

 

 

 

 

 

05. 08. 20-22.

* 이 글은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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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8-2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국이자 지옥이었던...
저에게 공부할 한 가지 일이 더 늘었군요.

여울 2005-08-2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오늘 도서관에서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들었다 놓았다하며 결국 빌리지 못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쯧~. 벤야민 가지치기가 많군요. 이거 어쩐다. 까이거 대충 글을 따라 설명글 많은 것....몇권 꼭 훑어야 쓰것네요. ..ㅎㅎ

로쟈 2005-08-22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충, 까이거 읽어야 할 게 좀 많습니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독일의 20세기 최고비평가로 꼽히는 벤야민의 '주저'이자 미완성 수고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이다. 일찍부터 '소문'은 무성했던 책인데, '드디어' 출현한 것. 지난주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구내서점에 책이 들어온 걸 보고 잠시 놀랐는데, 한국어판은 4권으로 분권돼 나올 예정이라고(4권이 양장본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면 분권으로 나오는 반양장본은 8권이 될 것이다). 아마도 최근 몇 년간 출간된 인문학 번역서로서는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지 않을까 싶다. 하니, 의당 친절한 안내서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그런 도우미로 정평있는 책이 수잔 벅 모스의 <시각의 변증법>이고, 알다시피 이건 이미 작년에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그만하면 풍성한 식탁이다.

간혹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번역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하는 이들이 내 주변에도 있는데, 인문서 번역의 평균적인 '실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투정'에 불과하지 않나 싶다. 원저와 대조해서 읽어본 이라면 알겠지만, 번역하기 까다롭지만 역자가 나름의 수완을 발휘한 대목들을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내가 100여 쪽을 읽으면서 발견한 가장 두드러진 오역은 다음의 한 대목뿐이다(나머지는 사소하다). 91쪽의 맨마지막줄, "테크놀로지가 약속하는 '새' 자연에 대한 극단적 낙관 그리고 역사의 흐름에 대한 총체적 비관 - 이것이 없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결코 선사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이것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모든 단계를 특징짓는 중요한 경향이다."(강조된 부분이 오역이다) 

내용상으로도 아주 '중요한' 대목인데, 원문은 이렇다: "Extreme optimism concerning the promise of the 'new' nature of technology, and total pessimism concerning the course of history, which without proletarian revolution would never leave the stage of prehistory - this orientation characterizes all stages of the Arcades project."(64쪽, 강조는 나의 것) 내용은 '극단적인 낙관주의'와 '총체적 비관주의'가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모든 단계를 특징지어준다는 것인데(도시 혹은 아케이드에 대한 벤야민의 매혹은 언제나 양가적이다), 역자는 'which without' 'without which'로 잘못 봄으로써 엉뚱한 오역을 범하고 말았다. 다시 옮기면, "'새로운' 성격의 테크놀로지가 약속하는 바에 대한 극단적인 낙관주의와 역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총체적인 비관주의(역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없다면 내내 선사적 단계에 머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전 단계를 특징짓는 방향성이다." 이건 물론 사소한 실수이지만, 결과는 좀 문제가 되는 오역이다. 다행스러운 건 그래도 이런 오역이 거의 드물다는 것이고, 우리의 번역 현실에서 이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현실' 말인가? 가령, 작년에 재판 5쇄까지 찍고 있는 리처드 커니의 <현대유럽철학의 흐름>(한울) 같은 책을 보자(나는 이 조잡한 번역서가 아직까지 유통되는 까닭을 모르겠다). 벤야민에 관한 장이 어떻게 번역되고 있는가? "보들레르는 벤야민에게 도시를 방황하는 일이 공간적 변화보다는 순간적 진보의 문제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177쪽; 내가 갖고 있는 책은 1995년 초판 5쇄이지만, 그 사이에 번역이 수정됐을 리는 만무하다) 보들레르가 벤야민에게 얼마나 중요한 '영웅'인지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벤야민이 보들레르에게 배운 것이 '공간적 변화'가 아닌 '순간적 진보'의 문제인가?

원문은 이렇다: "Baudelaire taught Benjamin that stray through a city was to discover how meaning is less a matter of temporal progress(chronos) than of spatial placement(topos)."(1994년, 2판, 152쪽) 그러니까 정확히 정반대, 즉 파리의 산책자 보들레르가 가르쳐준 것은 '시간적 진보(크로노스)'가 아니라 '공간적 배치(토포스)'가 갖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 점은 벤야민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를 매혹시킨 것은 '시간의 공간화'이기 때문이다(오죽하면, 벤야민 자신이 '관상학'을 얘기하고 '정지의 변증법'까지 말하겠는가?). 여하튼, 인용문과 같은 오역문들로 아주 범벅이 돼 있는 책이 대학가에서 내내 교양 철학서로 팔려나가고 있는 현실은 개탄스럽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이런 책을 철학강의의 참고문헌으로 올려놓는 강사/교수들도 없지 않은데,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파렴치한들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애꿎은 학생들의 머리는 왜 혹사시킨단 말인가?..

  

 

 

 

성질을 부려봐야 건강에 좋지도 않으므로 다른 책 얘기로 넘어가자. 이언 해킹의 과학철학서 <표상하기와 개입하기>(한울)가 출간됐다(또 한울출판사로군. 요컨대 이 출판사가 엉터리책만 내는 건 아니다). 부제는 '자연과학철학의 입문적 주제들'이고, 말 그대로 과학철학 입문서이다. 하지만, (적어도 역자의 의견을 참고해보건대) '최고의' 입문서이다. 구내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됐는데, 나에게 '이언 해킹'이란 이름은 <왜 언어가 철학에서 중요한가>(서광사, 1989)의 저자로 각인돼 있다. 즉, '언어철학자'로. 그런데, 웬걸, 이 양반이 어느새(!) '과학철학'의 대가가 돼 있지 않은가?

게다가 영어권 학자로는 아주 드문 일일 텐데, 현재 콜레주 드 프랑스의 '과학적 개념의 철학과 역사'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것!  짐작에 그 자리는 푸코의 스승이기도 했던 캉키옘(캉킬렘) 같은 이가 맡았던 자리 아닌가? 어쨌든 저자의 '포지션' 하나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책일 텐데, 이 신간은 해킹의 대표작이면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와 비견될 만한 저작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는 우선은 '두 번' 놀라면서 책을 손에 들 일이다. 읽는 건 나중에 '천천히' 읽더라도(역자의 서문 정도 읽어놓고)... 참고로, 역자는 신뢰할 만한 전공자이다. 훌륭한 저자와 역자가 패키지로 묶인 이런 류의 책을 만나는 건 행운이다...

 

 

 

 

참고로, 토마스 쿤 덕분에 '대중화'된  과학철학에 대해서 입문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최근 목요일판 한겨레 책/지성 섹션에 연재되고 있는 '과학속 사상, 사상속 과학'을 죽 훑어보시는 게 좋겠다. 그럼 대략의 개념/구도가 잡힐 것이다. 거기서 좀더 나아가고자 하는 독자라면, 쿤이나 포퍼, 라카토스('라카토슈' '러커토시'), 파이어아벤트 등을 읽으면 되는데, 자세한 서지는 '과학철학'을 검색하거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의 역자 서문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둘러싼 논쟁을 다룬 <현대과학철학논쟁>(아르케, 2002)이 좀 어렵지만 기본서이고, 국내 필자들의 쓴 것으론 <현대 과학철학의 문제들>(아르케, 1999)이 있다. 물론, 이렇게 두꺼운 책들만 읽어야 하는가란 푸념이 나올 수 있겠다. 요령이 없지는 않다. 지아우딘 사르다르의 <토마스 쿤과 과학전쟁>(이제이북스, 2002)은 '분량대비' 최고의 입문서(내가 읽은 아이콘북스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읽을 만했던 책).

사실인즉, 그 유명한 <과학혁명의 구조>도 읽기에 쉬운 책은 아니다(요즘은 고등학교 논술주제로도 자주 등장하지만). 내가 열아홉살, 대학 1학년때 읽기에 가장 어려웠던 책 두 권이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과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였다. 해서, 두 책에 대한 나의 이해는 대부분 2차 문헌들에 근거한다. 요즘은 두 책의 요지에 대해서 30분 정도씩은 강의라도 할 수 있지만, 정작 책을 펴놓고 한 구절씩 막힘없이 읽어나가는 건 별개의 문제이다(두 책을 덮은 지 10년도 더 됐기 때문에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졌을 테지만). 해서, 리라이팅 시리즈(그린비)나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살림)에서 다루어짐직하다(<과학혁명의 구조>는 목록에 들어가 있는바, 책이 나오면 한번 다시 읽어봐야겠다).   

 

 

 

 

세번째는 역사분야의 책으로 먼저, 프랑스의 혁명가 로베스 피에르의 평전,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교양인). 저자는 장 마생이고, 책은 로베스피에르 평전이 고전이라고. 물론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로베스피에르 평전"이다. 752쪽의 분량도 어느 정도 신뢰감을 준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프랑스 혁명의 중심 인물이자 프랑스 혁명 자체와 동일시되는 인물, 로베스피에르를 통해 바스티유 함락에서 국왕 처형, 혁명의 몰락에 이르는 프랑스 혁명의 숨가쁜 과정을 생생하게 재구성했다." 요컨대, 로베스피에르란 문제적 인물을 통해서 프랑스혁명사를 읽고자 하는 것(지난주 한겨례의 서평은 밑도 끝도 없이 시작부터 '최교수' 운운하고 있었는데, 책의 머리말은 서울대 서양사학과의 최갑수 교수가 썼다). 

비단 역사를 읽을 때, 반드시 '문제적 인물'의 시선과 행적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어제가 광복절이었지만, 해방 6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여러 종의 책 가운데 <8.15의 기억>(한길사)을 꼽아두고 싶다. "책은 KBS 광복 60주년 프로젝트팀이 '8.15의 기억 - 우리는 8.15를 어떻게 기억하는가'를 제작하면서 채록한 구술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마침 나는 그 프로그램을 TV에서 봤다. 인상적이었다(특히 일본군 포로들과 함께 시베리아에까지 끌려가 3년간 수용소 생활을 한 분들도 있었다). 형식상으론 일종의 '구술사'인데, 이러한 살아있는 증언들은 (진리뿐만 아니라) 역사도 '구체적'이라는 걸 새삼 말해준다.

 

 

 

 

네번째 책은 오사와 마사치의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그린비). 저자에 대해서 나는 아는바 없지만, '언어'나 '화폐' '커뮤니케이션' 등을 키워드로 삼고 있는 걸로 봐서 가라타니 고진의 자장권 안에 있는 학자인 듯싶고, 그런 경우 대략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제목의 '선정성'에 기대를 건 독자라면 실망할 테지만. 역자는 고진의 <윤리11>, <일본정신의 기원> 등을 번역한 송태욱씨이다. 책은 출판사의 안목을 따른 것인지 역자의 안목을 따른 것인지 모르겠지만, 믿을 만한 역자라는 게 일단은 안심. 박해일, 강혜정 주연의 영화 <연애의 목적>이 지난주에 비디오로 출시됐던데, 조만간 '연애의 목적'을 주시하면서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해 숙고해봐야겠다...

 

 

 

 

 

마지막 책은 아옌데와 함께. 칠레 작가 이사벨 아옌데의 신작 <세피아빛 초상>(민음사)이 번역돼 나왔다. "<영혼의 집>, <운명의 딸>을 잇는 3부작의 마지막 편으로, 여섯 세대에 걸친 여성들의 역사를 완성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칠레의 대표적인 작가로 군림하고 있지만, 아옌데의 작품을 나는 아직 읽은바 없고, 다만 안토니오 반데라스 주연의 영화 <영혼의 집>(1993)을 10년도 더 전에 보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신작을 꼽은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책의 역자가 친구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나는 그(녀)가 아옌데의 소설을 한 권 번역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간혹 만날 때마다 일의 진행상황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다. 알고 보니 이 책이었던 것이다(생각보다는 두껍군!). 개학을 하게 되면, 점심 한끼 사주고 책을 건네받아야겠다(이렇게 홍보까지 하고 있으니 점심도 얻어먹을까?). 그나저나 책이 좀 팔려야 나중에 한 턱 내라고 할 텐데...

05. 0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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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5-08-16 18:06   좋아요 0 | URL
책 소개를 볼 때마다 감탄사가.... 대단하세요.

로쟈 2005-08-16 18:33   좋아요 0 | URL
대단한 건 제가 아니라 책들이죠...

galapagos55 2005-08-17 07:28   좋아요 0 | URL
헉. "세피아빛 초상"은 개인적으로 몇년동안 언제 번역판이 나오나 싶어 끊임없이 민음사를 들락거리게 했던 책인데요; 역자가 친구분인데다가 진행상황에 대해 중간보고까지 받으셨었다니, 부럽습니다!^^ 얼른 읽으러 가야겠네요.

로쟈 2005-08-17 10:49   좋아요 0 | URL
아옌데 '마니아'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