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모차르트와 쇼스타코비치는 친숙한 이름이다. 이 두 '천재 음악가'에 대한 칼럼을 아침 신문에서 읽었다. 한국일보에 연재되는 '조윤범의 파워클래식'. 특히 초점이 맞춰진 것은 두 사람이 남긴 현악사중주 수작들. 내가 곡의 번호까지 기억할 리는 없지만, 필시 우리 귀에 익은 연주곡들일 터이다. 이들의 선배 음악가인 하이든은 83개의 현악사중주를 남겼다고 하는데, 양적으론 거기에 미치지 못해도, 이 두 후배 또한 상당 수의, 그리고 상당한 수준의 현악사중주를 작곡했다 한다.

 

  

 

 

우리의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의 경우 전체 23개의 현악사중주를 남기고 있는며, 그 중 '불협화음 사중주' 를 포함하여 그가 하이든에게 헌정한 여섯 곡, 즉 '하이든 현악사중주'가 유명한 듯(<사냥>이란 곡이 특히 유명하다고). 이후의 작품 가운데는 연주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음표들이 가득차 있다고 하는데, 특히 마지막 21번과 23번이 압권이라고. 필자가 소개하는 영화 <아마데우스>(1984)의 일화: (황제 왈) "음... 뭐랄까, 다 좋은데 음표가 너무 많아." (모차르트)"전 필요한 만큼만 썼는데요. 그렇다면 정확히 어디가 많았나요?" 이에 황제는 더듬거려지만, 실제로 연주해보면 황제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영화 <아마데우스>의 사운드트랙이 내가 산 몇 안되는 모차르트 음반 같다. 그 영향이겠지만,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모차르트의 음악은 레퀴엠이다.

 

 

 

 

참고로,  모차르트의 천재에 대한 살리에리의 질투라는 테마를 극화한 작품으로 푸슈킨의 소비극 중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있다(<아마데우스>의 시나리오 작가는 참조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우리말로는 푸슈킨 전집 중 희곡 파트에 들어 있는데, 가령 <보리스 고두노프>(열린책들, 1999/2001) 같은 책을 참조할 수 있다. 이 짤막한 작품은 러시아에서 TV용 영화로도 만들어져 있으며 나는 그 비디오CD를 소장하고 있다. <아마데우스>와 마찬가지로, 살리에리의 아주 긴 독백으로 시작한다.  

 

 

 

 

모차르트의 또 다른 영화음악으로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에서의 클라리넷 연주가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데우스>는 고등학교 때 단체관람을 했던 듯하고, 아이작(이자크) 디네센 원작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요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학력고사를 보고 난 고3 시절에 종로에 있던 명보아트홀에서 본 기억이 생생하다(디네센의 책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바베트의 만찬>에 국내에 소개돼 있다. *거기에 <일곱 개의 고딕이야기>가 더 보태졌다). 강수연 주연의 <씨받이>가 예고편이었다.   

모차르트와의 기억할 만한 또 다른 만남은 1990년 여름에 TV에서 본 프랑스 뒤세네 남매(Isabelle & Paul Duchesnay)의 아이스댄싱이었다. 그들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한 대목에 맞추어 춤을 추었는데, 비록 러시아 팀에 이어 2위를 차지했지만, 이들의 춤은 내가 이제껏 기억하는 최고의 아이스댄싱이었다(춤추는 걸 보며 눈물을 흘린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단편적 이미지가 운동으로서의 춤을 전달할 수는 없겠지만, 아쉬운 대로 옮겨본다. 여하튼 그런 게 내가 기억하는 모차르트이다. 아니 '모차르트 이펙트'라는 게 더 있긴 하다. 딸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태교에 좋다고 해서 구입한 건지 어떤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하여간에 <모차르트 이펙트>(황금가지, 1999)도 나의 장서 중의 한권이다. 그렇다고 물론 모차르트가 집안에 넘쳐흘렀던 건 전혀 아니고 책은 어디 박스에나 들어가 있는 듯하다.

 

 

 

 

모차르트 관련서로 내가 한번 읽고 싶은 책은 최근에 나온 <모차르트와 함께 한 내 인생>(문학세계사, 2005)이다. 작곡가 모차르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에세이인데, 저자인 프랑스작가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가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 모차르트의 음악 중 16곡을 직접 선곡하고 각각의 곡에 대한 추억을 들려준다"고. 본문에 소개된 16곡을 한 장의 CD에 담아 부록으로 실었다고 하니까 초심자들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될 듯하다. 그리고 역시나 프랑스의 작가이나 비평가 필립 솔레르스의 <모차르트 평전>(효형출판, 2002). 책은 필립 솔레르스의 '진정한 모차르트를 찾아 떠난 여행'의 기록이라는데, "모차르트의 흔적을 찾아 곳곳을 순례하고 그가 남긴 편지들의 어구를 되새기며 끝없이 그의 음악들을 철학적, 시적으로 해석한다." 전방위 지식인인 저자는 그 유명한 쥴리아 크리스테바의 남편이기도 하다.

다시 칼럼으로 돌아가서 이어지는 대목을 읽어본다:  "현악사중주 역사에 뚜렷한 획을 그은 모차르트는 다음 세대를 이어갈 무뚝뚝한 꼬마에게 확실한 바톤을 넘겨주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베토벤이 그 위대한 곡들을 남길 수 있었으랴. 그 후에도 많은 작곡가들이 돈벌이도 별로 안 되는 사중주를 쓰며 자신의 숭고한 작품집을 완성시켜나갔다. 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천재는 20세기에 들어서야 그 빛을 드러내었다. 바로 쇼스타코비치다."

 



 

쇼스타코비치(1906-1975)란 이름이 제일 먼저 떠올려주는 이는 몇 해 전 세상을 버린 한 친구이다. 클래식 애호가였던 그가 가장 좋아했던 러시아 작곡가가 쇼스타코비치였고, 덕분에 나는 그의 교향곡이나 협주곡 등에 대해서 귀동냥을 할 수 있었다. 기억에 그는 LP음반으로도 쇼스타코비치 컬렌션을 가지고 있었고, 몇 번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혁명'이란 제목이 붙은 교향곡을 그의 방에서 틀어주기도 했었다.

그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을 15개나 쓴 작곡가이지만, 현악사중주도 딱 15개를 남기고 있다(한 연구자에 따르면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이 두 양식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모차르트를 의식한 듯한 간결한 1번을 쓰자마자 2, 3번부터 교향곡에 버금갈 정도의 웅장한 현악사중주들을 써내려갔다. 그의 초기 현악사중주들은 초기작인지 후기작인지 헷갈릴 정도로 기가 막힌 스타일들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11번부터 14번까지는 그의 작품들을 초연했던 ‘베토벤 사중주단’ 멤버에게 하나하나 헌정했다. 11번은 제2바이올린에게, 12번은 제1바이올린, 13번과 14번은 각각 비올라와 첼로 주자에게. 이토록 현악사중주에 애착을 가진 이가 또 있을까. 다 듣기엔 너무 많으니 한 곡만 추천해 달라고? 역시 제목 없는 2번의 마지막 악장을 들어보라.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이 저리 가랄 정도로 멋지다." 그 멋진 음악을 나도 한번 구해서 들어봐야겠다.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두번째 기억은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1999)의 주제가와 관련된다. 오래전 영풍문고 종로점에 들렀을 때 주제가로 쓰인 쇼스타코비치의 재즈모음곡 2번 중 왈츠가 반복해서 들려왔는데, 아마도 음악 담당자가 당시에 좋아했던 곡인 모양이었다(서점에 머물던 시간 내내 반복해서 들려왔다). 당시엔 누구의 음악인지도 몰랐지만, 왠지 러시아 음악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고,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게 쇼스타코비치였다. 나는 영화의 비디오CD와 사운드트랙을 모두 갖고 있기에 수시로 들을 수 있는데,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곡이 아닌가 싶다. 

 

 

 

 

쇼스타코비치 관련서로 나온 건 두 권인데, 그 중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이론과실천사, 2001)은 이 작곡가에 대한 많은 자료와 증언을 제시해준다. 하지만, 전문가의 의견을 들으니 대부분은 신빙성이 없다고 한다. 볼코프는 러시아의 망명 음악가이지만 프리랜서 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시인 브로드스키와의 대담집도 갖고 있다), 그의 '증언'에는 각색된 픽션도 가미돼 있어서 러시아  음악학자들이 아주 싫어한다고(볼코프는 페테르부르크 문화사에 대한 책,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책 등도 갖고 있으며 러시아어로 다 소개돼 있다).

그럼에도 <증언>은 우리말로 접해볼 수 있는 가장 상세한 문헌이므로 그런 점을 얼마간 감안하고 읽으면 되겠다. 쇼스타코비치는 1928년 약관 22세에 당대 최고시인 마야코프스키의 풍자 드라마 <빈대>의 음악을 맡기도 했었는데, 두 걸출한 예술가가 조우하는 장면도 <증언>에는 기록돼 있기 때문에 전공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책이긴 하다. 내년에 좀더 정평있는 전기가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그런 기대를 가질 만한 것이 "내년 2006년은 이 두 천재 작곡가의 해다. 모차르트는 탄생 250주년이며, 쇼스타코비치는 탄생100주년이다." 이것이 사실 내가 굳이 이런 내용의 페이퍼를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 2006년이 이제 한달 남았다!..

05.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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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1-30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차트르 레퀴엠 제가 강추하는 음반이 있습죠.

1996 Digital
HARMONIA MUNDI



Requiem in D minor KV 626
MOZART
Philippe Herreweghe (conductor)
Orchestre des Champs Elysees



 

 

 

 

 

 

함 들어보시면 좋을 듯.


비로그인 2005-11-30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club.nate.com/classicalmusic 네이트 고전음악 동호회
이 사이트에 가면 저작인접권이 말소된 음반 (녹음된지 50년이 넘었거나 연주자가 사망한지 30년이 넘은 음반 등.) 200여 장을 공짜로 다운 받을 수 있더군요. 참 좋습니다.

로쟈 2005-12-01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제가 음악보단 역시 책을 더 좋아하지만, 둘이 안 친할 이유도 없겠죠.^^
 

로이 잭슨의 <30분에 읽는 니체>(램덤하우스중앙, 2003)을 읽었는데(내가 읽은 건 2005년판 3쇄이다), 충실한 내용이고 좋은 번역이다. 이런 류의 책들 가운데에서는 '동급 최강'이 아닐까 싶다.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니체>(문예출판사, 2003)와 나란히 읽으면 좋을 듯싶다. 자프란스키의 책은 독일에서 2000년 니체 사망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된 책이며 내가 읽은 대목들에서 번역도 막힘이 없다.  

 

자프란스키는 독일어권 최강의 철학자 전문 전기작가인데, <쇼펜하우어>, <하이데거> 등의 저작을 갖고 있고(이 모두는 영역돼 있으며 나는 <하이데거>를 영역본으로 갖고 있다), 올해는 <쉴러>도 출간한 걸로 안다. 모두가 번역되어 마땅한 책들이다(그러기 위해서는 <니체>가 좀 팔려줘야 한다!).  

그의 에세이로는 <인간은 얼마만큼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지호, 1998), <악 또는 자유의 드라마>(문예출판사, 2002)가 국내에 출간돼 있는데, 후자는 아직 안 읽었지만 전자는 내용 좋고 번역도 좋다. 해서 자프란스키를 읽자! 

한편, 영어권을 대표하는 니체 개론서로서 홀링데일의 <니체>(이제이북스, 2004)도 유용해 보이지만, 니체가 사랑했던 여인 '루 살로메'를 '루 잘로메'로 옮긴 탓에 눈밖에 나버렸다(명품은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 거기에 무슨 '신념'이 걸려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러권의 철학서를 낸 출판사의 작품 치고는 부주의해 보인다. 국내에서 나온 가장 종합적인 책은 백승영의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책세상, 2005)이다.

그건 그렇고, 잠시 짬을 낸 김에 <30분에 읽는 니체>에 대한 밑줄긋기를 해본다. 내가 관심있어 하는 대목은 112-117쪽인바, "새로운 철학을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와 "과연 진정한 세계가 있을까?"라는 두 개의 절로 돼 있다. 저자를 따라가 본다(나는 대부분의 책의 경우 읽기-따라가기가 그냥 모든 걸 말해준다고, 이해가능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사상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거의 대부분이 신이나 내세, 영원한 영혼 등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그런 개념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며 연대기적으로 아주 짧은 시간만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세계관이 그런 것처럼 우리의 언어도 그렇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그러니까 언어의 '자명성'에 대해서 의심해보아야 하다는 것. 즉, 언어에 대해서도 현상학적 판단중지가 필요하다.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는 문법을 없애기 전에는 신도 없앨 수 없다'는 유명한 주장을 한다. 이런 견해는 후에 모든 언어가 석기 시대의 형이상학을 유지하고 있다고 본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 러셀에 의해서도 제기된다. 우리가 보다 나은 철학을 원한다면 반드시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니체의 이러한 통찰은 거듭 음미될 만한데, 언어(문법)과 형이상학(신) 간의 내적 커넥션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가령 (하이데거에 따라) '3인칭 단수동사 현재형'에 모든 것이 걸려 있는 서구 '형이상학'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러한 동사 형태를 갖고 있지 않은 언어, 가령 한국어와 같은 교착어의 경우에는 문제의식이 온전하게 공유될 수 없다. 즉, 그건 '당신들의 형이상학'인 것. 그리스적 기원의 형이상학과 다른 형이상학이 구성될 수 있는 것은 아주 실제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언어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러시아어의 경우만 하더라도 존재동사(be동사)의 현재형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is/ist/est 대신에 아무것도 쓰지 않는 무(zero)형이다.

해서, 언어에 근거하자면, 러시아에는 서구와는 다른 종교, 다른 형이상학이 성립가능하며,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그건 한국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He is a student'를 '그는 학생이다'로 옮기고, 거기서 계사 'is'의 대응항으로 '이다'를 분석하는데, 그러한 대응의 불완전성만큼 서구의 계사존재론과 한국어의 존재론은 거리를 갖는다.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만큼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이 가능하다.

-"우리는 언어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그 언어가 만들어내는 허구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 니체는 심지어 물리학의 언어조차도 인간의 필요에 부합하는 허구이며 해석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니체는 원자와 같은 이론적 개념뿐만 아니라 모든 개념이 허구라고 말한다. 물체, 선, 표면, 원인과 결과 혹은 운동과 같은 개념은 모두 믿음의 산물이지 그 자체로는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니체의 원근법주의(관점주의)이다. 모든 것의 믿음의 문제이며 따라서 개종의 문제이다. 여기서 문득 니체는 흄을 떠올려주지 않는가? 

-"인과관계에 대한 니체의 생각은 흄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흄은 인과관계가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통해 하나의 사건을 다른 사건에 연결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인과관계는 정신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주 필요한 것이다. 니체가 보이게 그것은 의사소통을 위해 유용한 관습적 허구이다."(강조는 나의 것) 들뢰즈가 흄(1953)에서 니체(1962)로 건너뛰는 데에는 9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지만, 내가 보기엔 거기에 어떤 단절/비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이 있다. 적어도 이 인과의 문제와 경험론적/실용주의적 태도를 흄과 니체는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습관적인/관습적인 믿음과 개종의 문제 역시.    

 

 

  

 

 

 


 

-"니체는 어떤 경우에도 철학적 관념론을 채택하지 않았다. 즉 정신의 바깥에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 말이다. 왜냐하면 니체는 정신의 바깥에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그 세상은 질서 있고 구조화된 우주를 갈구하는 인간의 희망에 결코 부응하지 않는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 세상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고사하고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니체는 칸트 철학의 유산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특히 나이가 들면서 '진정한' 세계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했다."

마지막 문장에 대해서만 나는 좀 유보적이다. 설사 '칸트 철학의 유산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니체 철학의 독창성을 구성하는 것은 (들뢰즈를 따라서) 칸트 철학과의 변별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잘 잃어버린 세계'를 제안하는 니체-로티의 관점이 보다 더 니체답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로티가 니체의 철학을 높이 평가하면서 듀이의 실용주의(프래그머티즘)과 등가의 것으로 간주하는 이유도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들은 모두 관념 대신에 망치를 들고서 철학을 한 대장장이들이었던 것이다...

05. 11. 29. 

 

P.S. 참고로 데이비드 흄(1711-1776) 철학에 대한 기본사항 혹은 '교양상식'을 정리해둔다. 독일 사람 에드문트 야코비가 쓴 <클라시커50 철학가>(해냄, 2002)의 내용이다. 24세의 나이의 흄은 프랑스에서 <인성론>(<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세 권으로 된 이 책은 1739-40년에 간행되었다(그러니까 그의 나이 서른이 되기 전이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최대의 업적으로 간주된다.

-"흄은 인식의 근거로서 오직 경험만을 인정한다. 그는 로크의 경험론을 출발점으로 하여 로크와 마찬가지로 직접적 '인상들'과 고정된 인상들에서 생겨난 '관념들'을 구분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물들의 실체를 감각들의 '묶음'일 뿐이라고 했던 버클리를 따름으로써 로크의 경험론을 극단으로 몰고간다. 버클리에게 있어 실체는 오직 지각하는 자아뿐이었다. 그러나 흄은 이 지각하는 자아조차도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자아의 내용이 변화무쌍한 감각 지각들일 뿐이라면 이것 역시 감각 지각들의 연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개념은 그저 사유의 유용한 보조 도구일 뿐이다."(151-2쪽, 강조는 나의 것)

이러한 흄의 자아관은 곧바로 니체의 자아관과도 연결되며 들뢰즈의 철학에서 가장 세련된 반향을 얻는다. 이른바 '흄-니체-들뢰즈 커넥션'이다. 인격체로서의 자아나 주체에 대한 들뢰즈의 공격은 젊은 시절 흄에 대한 그의 읽기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오이디푸스에 대항하여 안티오이디푸스를 내세우듯이, 그는 인칭적 사유에 대항하여 비인칭적 사유(혹은 4인칭적 사유)를 철학의 새로운 무대이자 역량으로 제시한다(들뢰즈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쉬운 길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인과 관념에 대해서도 흄은 같은 입장을 취한다. 우리는 결코 경험을 통해 사건 A가 사건 B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없으며 단지 A 다음에 B가  나타났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다. 섭씨 100도로 가열하면 물이 끓는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해서 이것이 인과 관계를 증명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제 태양이 졌기 때문에 태양이 떠오르리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일 뿐이다... 지금까지 태양이 매일 떠올랐다고 해서 이것이 내일도 태양이 떠오르리라는 절대적 보장이 되지는 못한다. 따라서 모든 것이 필연성에 따라 연속해서 생겨나는 창조의 질서라는 것도 증명될 수 없다. 그리하여 결국 이러한 질서를 창조한 자의 존재도 증명될 수 없다."(152쪽)

즉, 'A이므로 B'가 아니라 언제나 'A 그리고 다음에 B'라는 식이다. 여기서 A와 B를 묶어주는 것은 인과적 관계(논리)가 아니라 우연적인/습관적인 '접속'(커넥션)일 뿐이다. 이러한 회의론이 니체에게서 반복되고 있다는 건 앞에서 인용한 대로 로이 잭슨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전면적인 회의주의를 갖고 있었기에 영국에서는 니체가 그다지 반향을 얻어내지 못했던 것. 흄 자신의 평가는 이렇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공적은 이성과 감성 사이에 존재하는 기존의 권력 관계를 바꿔놓은 데 있다고 흄은 생각했다. 그가 이성을 '감각의 시녀'로 만든 것은 한편으로는 극단적 경험론의 입장에서 그렇게 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소위 '이성적인' 도덕률에서 감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인간과 육체에 보다 더 가까운 관계에 있는 감성의 우위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흄은 철저한 에피쿠로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에피쿠로스처럼 유물론을 이론적 토대로 하지 않고 감성의 실증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쾌락주의로 나아갔다."(154쪽)

하면, 그가 미학이나 예술론 저작을 남기지 않은 것이 의아할 정도이다. 그의 만년의 저작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울산대출판부, 1998)인데, 들뢰즈는 그 '재담'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참고로 '문필가'로서의 흄은 플라톤, 니체와 함께 서양 철학사를 통틀어서 톱클래스에 속한다. 이 레이스에서는 칸트가 중간 정도이며 그게 독일어인지 헤겔어인지 헷갈리는 헤겔이 꼴찌를 다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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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5-11-29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자프란스키의 책은 정말정말 좋아요. 저는 또마님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답니다. 그의 다른 책이 번역되지 않는 건 참으로 유감스럽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저기, 로쟈님이 번역해 주시면 안될까요.☞☜

Joule 2005-11-29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나중에 두 권은 저도 아직 안 읽어본 책이라 정신없이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말씀 안해주셨으면 모르고 있었을 뻔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땡쓰투 눌러드릴게요. :)

yoonta 2005-11-30 0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의 is/ist/est를 중심으로한 계사존재론이 문법적인 환각을 통해 실체론적 존재론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한 사람은 니체였지요..그런데 <흄은 인과관계가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통해 하나의 사건을 다른 사건에 연결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라는 님의 글을 통해서도 알수있듯이 계사존재론의 문법적 환각현상을 니체보다 먼저 인식한 사람은 흄이라고 볼수도 있을듯.

그리고 그들간의 유사성을 간파하고 계사에 의해 상상되어지는 허구적인 존재론에서 벋어나 계사를 "사건과 사건을 연결"시키는 접속사로 대체함으로써 초월론적 경험론을 구축하려한 들뢰즈에 의해 흄과 니체가 하나로 연결되었다고나 할까요..어쨋든 다시금 들뢰즈로 귀결되는군요..

이제 슬슬 님의 페이퍼가 들뢰즈의 흄에서 (들뢰즈의) 니체로 이동하시는것 같네요..^^

로쟈 2005-11-30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쥴님/ 저도 자프란스키의 책들이 더 나왔으면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광고도 하고 있구요.^^ 검은비님/ 30분이면 크로키하시는 시간보다는 오래 걸릴 듯.^^ yoonta님/ 들뢰즈의 경험론에 대한 페이퍼도 곧 쓰긴 해야겠네요. 그렇다고 너무 목빼진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책임 안 집니다.^^
 

 

 

 

 

최근에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 과정에 대한 윤리적 논란이 사회적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직접 참견할 형편은 아니기에, 나는 나대로 그냥 '니체와 여성'이란 주제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권장할 만한 책들은 니체의 저작들 이외에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린비, 2003)과 신경원 교수의 <니체, 데리다, 이리가레의 여성>(소나무, 2004), 그리고 데리다의 <에쁘롱>(동문선, 1998) 등이다. 이리가레(이리가라이)나 사라 코프만 등의 책들은 아직 번역돼 있지 않다.  영어권에서 이 주제에 관한 책들은 여럿 나와 있지만, 내가 맘에 들어하는 책은 켈리 올리버(Kelly Oliver)의 <니체를 여성화하기('Womanizing Nietzsche : philosophy's relation to the "feminine")>(Routledge, 1995)이다. 저자의 <크리스테바 읽기>(시와반시사, 1997)가 국내엔 소개돼 있다.

물론 이 책들을 이 자리에서 모두 다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시간을 내보려고는 하지만, 알다시피 시간은 여성만큼이나 붙잡기 어려우며 변덕스럽다), 여기서는 다만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의 한 장 "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192-208쪽)를 따라가보기로 한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문제의 윤곽을 잡아주고 있어서 유용하다. 일단 시작은 여성에 대한 니체의 '마초적' 언명들이 여성 독자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전제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문제제기: "하지만 니체가 정말 마초였을까? 전통적 서구문화에 그토록 급진적인 비판을 가했던 그도 여성에 대해서는 전통적 견해를 반복했던 것일까? 노예이기를 거부하라고 외쳐댄 그가 여성에게만은 노예로 머물 것을 강요한 것일까?.. 혹시 니체가 여성을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 우리가 니체의 '여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193-4쪽) 

이후에 검토되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초반에 나오는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 대하여'란 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도 지난 여름 모스크바 통신에서 자세하게 다룬바 있다(이 참에 다시 읽어봤는데, 읽어볼 만하다). 복습을 겸하여 다시 좀 따라가보기로 한다. 내가 그때 참조한 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전집13권, 책세상, 2003 개정1판)이다. 거기에서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 대하여”(109-112쪽)를 ‘그냥’ 옮겨놓고 읽어보는 방식이었다(여성에 대한 니체의 편견을 보여준다는 ‘악명 높은’ 장이기도 하다). 약간 발췌하겠다. 

-“차라투스트라여, 어찌하여 그대는 누가 볼세라 그토록 조심스레 어스름 속을 걷고 있는가? 그리고 외투 속에 무엇을 그리도 정성스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가 그대에게 선물한 보물이라도 되는가? 아니면 그대에게서 태어난 아이라도 되는가? 그대, 사악한 자의 벗이여, 그것도 아니라면 도둑의 길에 들어서기라도 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진실을 말하거니와, 형제여! 그것은 내게 선물로 주어진 보물이다. 내가 지금 갖고 다니는 것, 그것은 작은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는 어린아이처럼 버릇이 없다. 그 입을 막지 않으면 너무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대니 말이다.”(그러니까 이 장의 이야기는 차라투스트라가 조심스레 잘 싸고 감추고 있는 물건, 즉 ‘작은 진리’가 무엇이며, 그가 어떻게 선물 받았는지를 설명해주는 내용이다.)

-오늘 해질녘, 혼자서 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어떤 늙은 여인이 다가와서는 내 영혼에다 대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 여인들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여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늙은 여인에게 대답했다. “여인에 대해서라면 사내들에게나 이야기할 일이다.” “내게도 좀 이야기해달라. 너무 늙어 듣자마자 잊고 말 터이니.” 그 여인의 말이었다. 나는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했다.

-“여인은 어느 모로 보나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여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하나의 해결책을 갖고 있으니, 임신이 바로 그것이다. 여인에게 사내는 일종의 수단일 뿐이다. 목적은 언제나 어린아이다. 그렇다면 사내에게 여인은 무엇인가? 진정한 사내는 두 가지를 원한다. 모험과 놀이가 그것이다. 그래서 사내는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놀잇감으로 여인을 원하는 것이다. 사내는 전투를 위해, 여인은 전사에게 위안이 될 수 있도록 양육되어야 한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그러니까 "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라는 장제목은 여기에서 얻은 것이다. 이하는 나의 주석이다.)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일삼았지만, 그의 사고는 상당히 생물학적이고 진화론적이다(그는 ‘위버멘쉬’로의 ‘당위적’ 진화를 제창한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지만, 생물체로서의 여성(=암컷)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임신’이며(누구의 아이를? 얼마나?), 그것이 여성의 거의 모든 수수께끼를 해결해준다(그녀의 히스테리, 그녀의 자존심, 그녀의 어리석음, 그녀의 아줌마다움, 그녀의 행복 등등). 그런 여성에게서 사내(=남자)들이란 일종의 수단에 불과하다. 즉, 정자의 제공자이면서 성실한 부양자(모든 여성이 바라는 ‘사내’란 밖에서는 ‘능력 있고’ 안에서는 ‘자상한’ 사내이다). 만약에 어떤 여성이 ‘임신’에 관심이 없었더라면(여성은 ‘임신 기계’가 아니다!), 비록 임신과 어린아이들이란 굴레로부터는 자유로웠겠지만, (지극히 당연하게도) 우리의 조상(=이브들)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더불어 그 ‘수수께끼’로부터도 소외되었을 것이다.

그럼 남자(=사내)에게 여자란 무엇인가? 니체가, 아니 차라투스트라가 주장하는바, 남자가 원하는 건 모험(=위험)과 놀이(=게임)이다. 그런데, 여자야말로 그 둘의 결합체라는 것. 즉 위험한 놀잇감! 그때의 위험(=모험)이란 건, 다르게 말하면, ‘책임’이다. 남자에게 여자는 놀잇감이고 장난감이지만, 즉 유희에 대상이지만 까딱하면 다 뒤집어써야 하는 것. 왜 있지 않은가? 하룻밤 불장난의 대가라는! 진화생물학에서는 상식적으로 하는 얘기지만, 남녀간의 성적 계약에 있어서, 쌍방의 초기 조건이 동일하지 않다. 두 사람이 관계를 갖고 아이(=2세)를 얻을 경우 쌍방이 얻을 수 있는 유전적 이익은 똑같이 1/2이지만, 초기 투자 지분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단도직입적으로, 난자와 정자의 상대적 크기를 비교해 보면 된다.

 

 

 


흔히 정자경쟁에서(혹은 ‘정자전쟁’에서) 3억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수정에 성공했다는 얘기를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난자는 산술적으로 말해서 최소한 정자의 3억 배 이상에 해당하는 가치를 갖는 것이며, 이걸 경제학 버전으로 바꿔서 말하면, 여자는 남자보다 초기에 3억 배 이상의 투자를 한다는 것이 된다(정자는 수정시 세포핵만 제공하며 모든 영양분(=세포질)은 모두 난자로부터 공급된다). 게다가 아이가 태어나도 수유/양육 기간으로 최소한 2-3년은 아이에게 매달려 있어야 한다(그러니 섣부른 임신은 여자의 인생을 때로 망치기에 충분하다).



 

 

 

경제학에서의 ‘숏다리 법칙’에 따르면 언제나 짧은 쪽이 유리하다('숏다리 법칙'은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에서 얻어온 것이다). 즉 사업에서는 같은 이익을 얻을 경우 적게 투자한 쪽이 유리하다. 때문에, 관계(=수정)를 갖기 이전에는 투자자(=여성)에게 별이라도 따다 줄 것 같던 남자도, 그 이후에는 간혹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여성이 보다 신중한 건 당연한 일이다. 여성의 성전략은 자신의 난자를 선뜻 내주기 전에 자신의 초기 투자 지분을 상쇄할 만한, 최대한의 정서적, 경제적 투자를 이끌어내는 것이다(달랑 정자만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이 남자가 다른 데 또 한눈을 파느라 정서적, 경제적으로 부담을 무릅쓰느니 그냥 한 우물이나 파자고 눌러앉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즉, 사소한 일이다. 해서, 니체는 너무도 생물학적이다! 계속 읽어보자.

-“너무나도 달콤한 열매를 전사는 좋아하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전사는 여인을 좋아하는 것이다. 아무리 달콤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쓴맛을 내기 때문이다. 사내보다는 여인이 어린아이를 더 잘 이해한다. 그러나 사내와 여인 가운데 더 어린아이다운 것은 남자다. 진정한 사내 내면에는 어린아이가 숨어 있다. 그 아이는 놀이를 하고 싶어한다. 그러니 여인들이여, 사내 안에 숨어 있는 어린아이를 찾아내도록 하라! 여인은,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계의 여러 덕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처럼 순수하고 섬세한 놀잇감이 되어야 한다.”(그러니까 남자는 어린아이이고, 여자는 그 놀잇감이다.)

-“별의 광채가 너희들의 사랑 속에서 빛나기를! ‘나 위버멘쉬를 낳고 싶다!’ 이것이 너희들의 희망이 되도록 하라. 너희들의 사랑 속에 용기가 깃들여 있기를! 너희들은 사랑으로 무장, 너희들에게 공포심을 불어넣고 있는 자에게 덤벼들어야 한다. 너희들의 사랑에 너희들의 명예가 깃들어 있기를! 그렇지 않을 경우 여인은 명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언제나 받는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할 일이며, 사랑을 하는 일에서 결코 둘째가 되지 말 일이다. 이것이 너희들의 명예가 되도록 하라.”(*아이를 낳되, 니체가 요구하는 바는 위버멘쉬, 즉 초인을 낳는 것이다.)

-“사내여, 여인이 사랑할 때 여인을 두려워하라. 사랑하는 여인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 때문이며, 그 밖의 모든 것들은 그에게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사내여, 여인이 미워할 때 여인을 두려워하라. 사내는 그 영혼의 바탕에서 사악할(bose) 뿐이지만 여인은 바로 그 바탕에서 열악하기(schlecht) 때문이다. 여인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쇠붙이가 자석에게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나 너를 더없이 미워한다. 너는 잡아당기긴 하면서도 이미 잡은 것을 놓지 않을 만큼 강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사내의 행복은 ‘나는 원한다’는 데 있다. 여인의 행복은 ‘그는 원한다’는 데 있다.”

 

 

 



남성은 사악하지만, 여성은 열악하다고 하는데, ‘열악하다’란 말은 보통 매우 빈궁한 처지를 일컫는 말이다(‘열악한 환경’에서 어쩌구저쩌구). 여기서 ‘사악한’과 대비되는 용어로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여성은 바탕이 열악하니까 두려워해라?(그럴 경우, 보통은 안쓰러워 해야 정상이다.) 문맥상으로는 ‘사악한’보다 더 나쁜 말이 와야 하는데, 나는 ‘악질적’이나 ‘멍청한’ 중 어느 말이 거기에 더 합당한지 잘 모르겠다(*다른 번역서들을 보니까 '저열한'이라고 옮겨져 있다. 그게 타당하다). “사내의 행복은 ‘나는 원한다’는 데 있다. 여인의 행복은 ‘그는 원한다’는 데 있다.”에서는 주격 조사가 ‘는’에서 ‘가’로 바뀌어야 할 것 같다(*찾아보니까 그렇게 옮겨진 번역서들도 있다). 해서, “사내의 행복은 ‘내가 원한다’는 데 있다. 여인의 행복은 ‘그가 원한다’는 데 있다.” 이건 세상의 속설과도 일치하면서, 정신분석학적으로도 음미해볼 만한 문구이다. 말하자면 남성과 여성의 비대칭성에 대한 주장인 것이다. 그리고 이 비대칭성에 대한 최적의 문헌들은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 2005)에 실려 있다.

-“‘보라, 방금 세계는 완성되었다!’ 온 마음으로 사랑하여 순종할 때 여인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여인은 순종해야 하며, 그 자신의 표면에 대해 어떤 깊이를 찾아내야 한다. 표면은 여인이 정서, 일종의 얕은 물위에서 요동치는 격한 살갗이다. 이와 달리 사내의 심정은 깊다. 그리하여 그의 강물은 지하의 동굴 속으로 좔좔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여인이 이러한 사내의 힘을 짐작은 하겠지만 이해는 못한다.”(러시아어에서는 ‘정서’와 ‘심정’을 모두 ‘영혼’ 혹은 ‘넋’이라고 옮기고 있다. 이 경우 마지막 문장의 ‘사내의 힘’은 ‘그 영혼의 힘’이 된다. 어쨌든 여자의 정서, 혹은 영혼이 표면적이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사소한 일들에도 어찌나 요동을 치는 것인지! 참고로, 다른 번역서들은 '마음'이라고 옮기며 나는 그게 더 마음에 든다.)

-이에 그 늙은 여인이 내게 대답했다. “좋은 말이다. 누구보다도 그런 말들을 받아들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젊은 여인들을 위해서는. 기이한 노릇이다. 여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인데도 그의 이야기는 옳으니! 그것은, 여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닌가? 자, 감사의 표시로 이 작은 진리를 받아라! 그 진리를 터득하고 있을 만큼은 나 늙어 있으니! 그것을 천으로 감싸라. 그리고 그 입을 막아라. 그렇지 않으면 이 작은 진리는 너무도 크게 소리치게 될 것이다.”(*이 대목엔 사소한 오역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여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아니라, “아는 여자가 별로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산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대신에 그는 여인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다. 늙은 여인이 인정하는 바대로.)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건 그 다음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가 옳은 것은 “여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반문이다(러시아어본의 주석에는 이 말이 누가복음 1장 37절을 패러프레이즈한 것이라고 돼 있다). 늙은 여인의 이 말은, 내가 읽기에는, 여인들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모든 말을 ‘심연처럼’ 집어삼키고 있다. 여인들에겐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규정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다 해도(=무어라고 규정하든 간에) 맞는 말이 된다는 얘기.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여성이라는 ‘바다’에서 고작 헤엄치고 있었던 게 된다. 즉 그는 여인들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있지만,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닌’ 것이다. 이제 마지막 문장.

-“여인이여, 내게 그 작은 진리를 다오!” 나는 말했다. 그러자 그 늙은 여인이 말했다. “여인들에게 가려는가? 그러면 채찍을 잊지 말라!”

이 채찍에서 다시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으로 돌아간다. "채찍 이야기나 나왔으니 말인데, 니체와 여성, 채찍이 함께 등장하는 사진이 하나 있다. 서로 미묘한 감정을 지녔던 니체, 살로메, 레 세 사람이 찍은 것인데, 니체와 레는 마차 앞에 말처럼 서 있고, 살로메는 채찍을 들고 마부 자리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마도 니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연출한 것일 텐데, 어떻든 채찍을 든 건 여성인 살로메고, 니체는 채찍을 맞을 말처럼 서 있다. 이건 또 뭔가? 그는 여성에게 휘둘러 달라고 채찍을 가져간 건가?"(195쪽)

이 물음에 대한 나의 견해는 지난 여름에 제시한 것과 같다. “여인들에게 가려는가? 그러면 채찍을 잊지 말라!”는 늙은 여인의 말을 다시 음미해본다면, 먼저 흥미로운 건, 이게 차라투스트라(혹은 니체)의 말이 아니라, ‘늙은 여인’의 말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진리’가 아니라 ‘작은 진리’라는 것이다. ‘작은 진리’라는 건 달리 말하면, 아직 (어린아이처럼) 미성숙한 진리이고, 부분적인 진리이며, ‘전부는 아닌’ 진리이다. 다시 이 단장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을 말하거니와, 형제여! 그것은 내게 선물로 주어진 보물이다. 내가 지금 갖고 다니는 것, 그것은 작은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는 어린아이처럼 버릇이 없다. 그 입을 막지 않으면 너무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대니 말이다.” 이때 그가 말하고 있는 ‘작은 진리’가 “여인들에게 갈 때는 채찍을 잊지 말라!”는 진리이다. 이 진리가 하도 요란하게 떠들어대기(혹은 빽빽거리기) 때문에 그는 이 진리의 입을 틀어막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5) 바로 이후에 발표한 <선악의 저편>(1886) 서문에서 니체는 “진리가 여성이라면, 어쩔 텐가?”(책세상 번역은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떠한가?”)라는 도발적인 물음으로 시작하고 있다(독어로는 모르겠지만, 진리란 뜻의 러시아어 ‘이스찌나’의 문법적 성은 여성이다). 그러면서 철학의 모든 (남성적) 독단론은 “여전히 고상한 어린아이 장난이거나 신출내기의 미숙함에 불과하다고 단언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남성이 갖고 있는 (독단적) 진리는 어린아이의 진리이며, ‘작은 진리’이다. 그것은 고작 “여인들에게 갈 때는 채찍을 잊지 말라!”는 충고(그것도 자신이 발견한 진리가 아니라, 늙은 여인이 일러준 진리이다. 즉 그것은 늙은 여인에게 부탁해서 합법적으로 ‘도둑질한’ 진리이다)를 마치 ‘보물’처럼 모시고 다니는 자의 진리이다. 그 작은 진리(=어린아이)는 대문자 진리(=여성) 앞에서 안절부절이며 속수무책이다.

니체가 “진리란 무엇인가?”를 물을 때, 그 물음은 동시에 “여성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이며, 그것은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란 프로이트의 물음과 정확히 겹친다. 니체의 연보에 따르면, 아버지의 이른 사망(목사였던 그의 아버지 칼 루드비히 니체는 맏아들 프리드리히가 다섯 살 되던 해인 1849년에 사망한다)에 따라 여자들로만 둘러싸인 가정에서 양육된다. “아버지의 부재와 여성들로 이루어진 가정, 이 가정에서의 할머니의 위압적인 중심 역할과 어머니의 불안정한 위치 및 이들의 갈등 관계, 자신의 불안정한 위치의 심적 대체물로 나타난 니체 남매에 대한 어머니의 지나친 보호 본능 등으로 인해 그는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며 이런 환경에서 아버지와 가부장적 권위, 남성상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된다.”(560쪽) 그런 니체에게서 압도적인 자기규정은 ‘어린아이’이며, 그가 하는 모든 말은 ‘어린 진리’ 즉 ‘작은 진리’이다. “우리 프리드리히가 이런 말을 다 하네!”

그런 의미에서, 여성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가 <프리드리히 니체, 바다의 연인>에서 니체에게 던지는 충고는 좀 잔인하다. “당신은 생산력이 하늘에서만 내려올 줄 알고 계속 위로만 올라간다. 정상인이여! 이것이야말로 주변 경관에 전혀 무관심한, 놀라울 정도로 순진한 모습이 아닌가!”(신경원, <니체, 데리다, 이리가레의 여성>, 162-3쪽, <텍스트>(2004, 4월호), 43쪽에서 재인용) 산의 정산에서 심연(=바다)을 들여다보는 차라투스트라, 혹은 니체는 이제껏 여자들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육지에 발을 딛고서 산으로 올라간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나이 서른이 되던 해에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속으로 들어갔다.”(12쪽) 그러니 주변 경관(=바다)에 대한 그의 무관심은 적극적인 관심의 결과이며, 필사적인 관심의 결과이다. 그런 그에게, 너는 ‘바다’를 잊고 있으니 다시 내려오라고?!

하지만, 니체가 정말로 바다를 잊은 건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의 삶에 각인돼 있는 것인데! 때문에, “심연으로 한없이 내려가길 두려워한, 여성의 육체를 심연에 매장해 둔 채 산의 정상으로만 오르려 한 우리의 초인은 조금 외롭지 않을까.”(<텍스트>, 43쪽)란 추정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산으로 올라간 자의 책이 아니라, 산에서 내려온 자의 책이기 때문이다. 즉 ‘몰락’을 자청한 자의 책이며, 다시 어린아이가 된 자의 책이다(“차라투스트라가 변하여 어린아이가 되었구나.”).

인간이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정의하면서 그가 내세우는 것이 초인, 즉 위버멘쉬인바, 그는 무어라고 덧붙이는가? “보라,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이 위버멘쉬가 바로 너희들의 크나큰 경멸이 그 속에 가라앉아 몰락할 수 있는 그런 바다다.”(19쪽) 어떤 경멸인가? 행복에 대한, 이성에 대한, 덕에 대한 정의에 대한, 그리고 연민에 대한 경멸이다. 그 모든 크나큰 경멸이 가라앉아 몰락할 수 있는 그런 바다가 바로 위버멘쉬라는 것. 그리고 바다란, 여성이고 생명(의 고향)이지 않은가? 생명의 연쇄이지 않은가?..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 대하여"와 함께 '니체와 여성'의 기본 문헌은 <즐거운 학문>(<즐거운 지식>)의 제2판 서문이다. 고병권의 인용을 재인용하면 이렇다: "어쩌면 진리란 그녀의 이유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해 이유를 가지고 있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말하자면 바우보(Baubo)가 아닐까? 아, 그리스인들! 그들은 정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생각이 깊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피상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 보아야 할 점이 아닌가?"(199쪽)

이에 대한 해설을 따라가본다: "여성들은 표면이 심층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니라, 심층에 대한 열망이 표면의 다양성을 가리고 있음을 이해한다. 여성들은 표면에 얼마나 다양한 진리들이 반짝이고 있는지 이해한다. 아마도 여성들이 화장을 잘하는 것은 무엇보다 표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표면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들만이 '화장발에 속았다'고 분개한다. 남성들은 무언가를 벗겨야 진실이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여성들은 그런 남성들의 기이한 욕망을 다스릴 줄 안다. 여성들은 저 깊은 심층까지도 껍질로 위장한 양파처럼 되는 것이다."(롤랑 바르트-라캉의 정의를 비틀면, 남성은 문체(style)를 갖고 있고, 여성은 문체 자체이다.)

 

 

 

 

그리고 바우보. "원래 바우보는 음란한 여신으로 여성의 생식기를 신격화한 것이다(*즉 버자이너이다). 어떤 학자들은 여성 생식기에서 어떤 규정으로도 좁힐 수 없는 '거리'의 개념을 발견한다. 그들에 따르면 여성은 자궁과 같다. 그것은 모든 것들을 발생시키는 비어 있는 공간이고, 일종의 거리이다. 여성은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즉 공간 속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 거리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여성은 어떤 고유의 본질을 갖고 실존하지 않는다. 철학자들이 찾는 진리가 없듯이 고유한 여성성도 없는 것이다."(200-1쪽) 정신분석학에서의 명제를 반복하자면, "여성은 없다!(There's no such a thing like Woman!)"

계속. "하지만 바우보는 달리 이해될 필요가 있다. 자궁에서 강조될 것은 결핍이나 공허가 아니라 생산이나 창조이다. 자궁은 결핍의 공간이 아니라 넘침의 공간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궁이 임신기관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게 불가능한 이유는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빈틈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막아도 태어나는 새로운 아기들 때문이다. 임신한 여성에게는 하나의 정체성이 부여될 수 없다. 진리가 바우보인 이유도 그것이 임신한 여성이기 때문이다."(201쪽, 강조는 나의 것)

여기서 저자는 니체에게서 '임신한 여성'의 중요성과 임신 테마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에게도 임신은 중요한 테마이다... 인간은 위버멘쉬를 낳을 수 있는가? 아마도 이 물음들은 이렇게 변형될 수도 있을 것이다. 너에겐 여성이 있는가? 너는 자궁을 갖고 있는가?(*요즘 어법에 따르면, "너는 난자를 갖고 있는가?") 너는 여성-되기를 할 수 있는가?" 정리하자면, 두 가지가 핵심이다. 차라투스트라-니체는 (1)임신과 관련해서 여성을 이해한다는 것과, (2)여성성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문제가 된다는 것. 니체는 한 메모에서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고: "무엇이 내 삶을 유지시키는가? 그것은 임신이었다."(202쪽)



 

 

 

여기서 음미해볼 대목은 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바로 ‘몰락하는 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규정. 책세상판의 번역을 여기에 옮기면,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뒤돌아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며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21쪽)

우리들(=사람들)은 과거의 인간(=짐승)와 미래에 도래할 인간(=위버멘쉬) 사이를 연결하는 밧줄이고 교량이다.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과정일 뿐이고 몰락일 뿐이며,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자들이다. 처음에 지적한 바대로, 이것은 지극히 생물학적이고 진화론적인 존재 규정이다. 보다 확증적인 건 “아이와 혼인에 대하여”(116-9쪽)에서 읽을 수 있다(결혼과 출산을 앞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음미해 보아야 할 단장이다!).

-형제여, 여기 너만을 위한 물음 하나가 있다. 다림추를 내리듯 나 네 영혼 속에 그 물음을 내려본다. 네 영혼이 얼마나 깊은가를 알아내기 위해다. 너는 젊다. 그리하여 아이를 원하고 혼인을 원한다. 그러나 묻노니, 너는 한 아이를 원할 자격이 있는 그런 자인가? 너는 무적의 강자, 자신을 제압한 자, 관능의 지배자, 네 자신의 덕의 주인인가? 그것은 나 네가 묻노라. 그것이 아니라면 네 안에 짐승이 있고 절박한 욕구라는 것이 있어 그 같은 소망을 갖도록 하는 것인가? 아니면 외로움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네 자신과의 불화 때문인가?(*너는 한 아이를 원할 자격이 있는 그런 자인가!?)

-나, 네가 거두어들인 승리와 네가 쟁취한 자유가 아이를 갈망하기를 바라노라. 너는 너의 승리와 해방을 기리기 위해 살아있는 기념비를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너는 지금의 너를 뛰어넘어 저 위에 네 자신을 세워야 한다. 그럴려면 너의 신체와 영혼이 먼저 반듯하게 세워져 있어야 할 것이다. 앞을 향해서뿐만 아니라 위를 향해서도 생식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혼인이라는 동산이 너를 돕기를 바란다! 너는 더욱 고상한 신체를 창조해내야 한다. 최초의 운동,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를 창조해야 한다. 창조할 자를 창조해야 한다는 말이다.(*네가 승리한 자라면, 너의 아이는 너의 승리를 기리는 ‘살아있는 기념비’가 될 것이다. 그러니, 삶에 복수하기 위해서 아이를 낳으면 안된다! 역설적이지만, 생물학에서는 거꾸로 규정된다. 아이를 낳은 자가 승리한 자, 즉 성공한 자이다. 성공한 자가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혼인. 그것을 나는 당사자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 하나를 산출하기 위해 짝을 이루려는 두 사람의 의지라고 부른다(*이것이 결혼에 대한 니체의 정의이다). 이와 같은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으로서 서로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그것을 나는 혼인이라고 부른다(*그러니까 혼인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의지, 혹은 정념과 서로에 대한 존경이다. 나는 그걸 ‘사랑과 존경’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것이 네가 하는 혼인의 의미가 되고 진실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많은 너무나도-많은-자들(=어중이떠중이들),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 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아, 그것을 나는 어떻게 부를까?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저 구차함이여!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저 더러움이여!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저 가엾은 자기만족이여! 이런 것 모두를 저들은 혼인이라고 부른다. 그러고는 말한다. 저들의 혼인은 하늘이 맺어준 것이라고. 좋다, 나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 떠벌리고 있는 그 하늘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같은 천상의 그물에 걸려든 짐승들도 좋아하지 않고! 자기가 맺어준 것이 아닌데도 축복을 하겠다고 절름거리며 다가오는 신 또한 먼 곳에 물러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이러한 혼인을 비웃지는 말라! 어버이로 인하여 통곡할 까닭을 갖고 있지 않은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을 것인가!)

-여기 이 사내, 품위 있어 보였고 또 대지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성숙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를 보자, 이 대지는 정신병원처럼 보이지 않던가. 그렇다. 성자와 거위의 결합, 나는 그때 이 대지가 경련을 일으켜 부르르 떨기를 바랬다. 그 성자는 원래 영웅과도 같이 당당하게 진리를 찾아 나섰었다. 그러나 결국은 화려하게 치장한 작은 거짓 하나를 노획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신의 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원래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신중했으며 선택에서도 까다로웠다. 그런 그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자신의 교제를 망쳐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고는 그것을 자신의 혼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화장한 거위들을 주의해야 한다!)

-그는 원래 천사의 덕을 갖춘, 그런 계집종을 찾고 있었다(*간단히 말해서, ‘천사 같은 하녀’가 모든 남자의 이상형이다). 그러던 그가 졸지에 여자의 종이 되고 만 것이다(*“예, 부르셨습니까요, 마님!”). 이제 그는 그것을 넘어서 천사가 되어야 한다(*이건 좀 이상한 번역이다. 내용은 “이제는 그가 천사가 되어야 한다.”이다. ‘천사 같은 머슴’으로서의 남편!).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신중하기 마련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같이 교활한 눈을 갖고 있다. 그러나 더없이 교활한 자조차도 아내를 사들일 때는 자루를 열어보지도 않는다. 그 흔한 한때의 어리석음. 그것을 너희들은 연애라고 부른다. 그리고, 너희들은 혼인이라는 하나의 ‘긴 어리석음’으로써 그 흔한 한때의 어리석음에 종지부를 찍는다.(*제일 좋은 건 자루를 열어보고도 사지 않는 것이다.)

-여인을 향한 너희들의 사랑, 그리고 사내를 향한 여인의 사랑. 아, 이것이 고뇌하는, 감추어진 신들에 대한 연민이라면! 그러나 대개의 경우 두 마리의 짐승이 서로를 알아볼 뿐이다.(*‘신들의 교제’라면 좋겠지만, 혼인은 대개 ‘두 마리 짐승의 교미’로 마무리된다.) 너희들이 말하는 최상의 사랑이란 것도 하나의 황홀한 비유일 뿐이며 고뇌에 찬 열화일 뿐이다(러시아어 번역은 ‘병적인 격정’). 그것은 너희에게 좀더 높은 길을 비추어주도록 되어 있는 횃불이다(러시아어 번역은 “사랑이란 (그런 게 아니라) 횃불이어야 한다”는 식이다). 언젠가는 너희들 자신을 뛰어넘어 너희들 이상의 것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먼저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배우도록 하라! 그러기 위해 너희들은 사랑의 쓴잔을 마셔야 했던 것이다.(*언제나 쓴잔만 마시는 사람은 뭔가?)

-더없이 감미로운 사랑의 잔 속에도 쓴맛은 있다. 그리하여 그런 사랑은 위버멘쉬를 동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너 창조하는 자를 목타게 하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의 목마름, 위버멘쉬를 향한 화살과 동경. 말하라. 형제여. 이것이 바로 너로 하여금 혼인하도록 만드는 의지인가? 나 이와 같은 의지와 혼인을 신성시하노라.(*즉 혼인에의 의지는 위버멘쉬에 대한 동경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을 창조하기 위한 과정이고, 수단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진리가 여성이라면, 어쩔 텐가?”라고 니체는 물었다. 나는 그때의 진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여성의 수수께끼로서의 임신과 출산이다. “창조의 근원적인 힘의 원형이며 그것 자체인 여성의 출산을 대치하기 위해 고심한 끝에 위버멘쉬가 탄생했다”(<텍스트>, 43쪽)고 이리가레는 주장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엔, 위버멘쉬는 출산에 대립하거나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이리가레와 데리다의 니체론을 아직 본격적으로 읽지 않았지만), 그것에의 전면적인 투항이다(니체 철학은 ‘아줌마 철학’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의 철학은 또 얼마나 유미적인가! 덧붙여 말하자면, 윤리학에서의 ‘아줌마 철학자’에 레비나스가 있다. 그에게서 궁극적인 타자의 모델 또한 ‘신생아’이다).

“여인들에게 가려는가? 그러면 채찍을 잊지 말라!”로 큰소리친 걸로 돼 있는 니체이지만(그마저도 늙은 여인이 일러준 말이었다!), 오히려 길들여진 건 여인들이 아니라 니체이다(그는 채찍을 들고 가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를 길들여 주세요!”). 해서, 내 생각에 그가 말하는 위버멘쉬란 오직 남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즉, “남자들이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Superman이나 Overman도 다 마찬가지이다. 삶이 다른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라는 동경과 모험 속에서 아직도 장난치면서 놀이하는 어린아이-남자들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Superwoman이나 Overwoman은 불필요한바, 이미 그들은 ‘거기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즉 Wo-man으로 충분하다. 그러니까 Man과 Woman이 있는 게 아니라, Woman과 Woo-man(졸라대는 남자, 궁시렁대는 남자, 우둔한 남자)이 있을 뿐이다. 여자들의 목적은 이미 언제나 어린아이였기 때문. 그 핏덩이, 혹은 살덩이!


 

 

 

서양철학의 전통은 그 피와 살로부터의 고상한 거리두기였다(소크라테스는 “삶은 질병”이라고 말했다). 삶에 대한 부정과 이데아에 대한 동경(이건 무성(無性)의 철학이자 동성애 철학이다)은 언제나 어린아이에 대한 억압, 어린아이로부터의 도피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니체는 이걸 거꾸로 세운다. 진리란 여성이고, 바다이고, 위버멘쉬의 창조라는 것. 그 위버멘쉬를 낳을 때까지 우리의 삶의 과정은, 몰락의 과정은 영원히 지속되고 반복될 것이다. 하여, 카뮈를 패러디해서 말하자면, “참으로 진지한 생-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임신(=출산)이다. (이 남자의) 아이를 (또) 낳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생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밖에 다른 것들은 다 애들 장난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바, '바다의 연인'이자 아줌마 철학자 니체의 메시지이다.

고병권의 결론은 조금 다르다. "차라투스트라에서 여성성은 영원회귀와 같다. 그러나 '여성성'이라는 말조차 그리 적합해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차라투스트라의 여인은 생물학적 여성도 아니고, 특정한 어떤 정체성을 가진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여성은 영원한 생성을 의미할 뿐이다.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여성이 되는 것', '여성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가장 나쁜 것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불임증'에 걸린 인간이다."(208쪽, 강조는 나의 것)

 

"진리는 여성(바우보)이다"와 "진리가 바우보인 이유도 그것이 임신한 여성이기 때문이다"에서 얻을 수 있는 논리적 귀결은 "진리는 임신한 여성이다"이다(이것이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을 구분해줄 수 있는 준거이다). 나는 이러한 구체적/직설적 메시지와 "여성은 영원한 생성을 의미할 뿐이다"라는 다소간 추상적/비유적 메시지 사이에는 얼마간의 간극이 있다고 보며, 이 간극은 우리가 여전히 '니체의 진리'에 밀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내게 더 매력적인/파괴적인 철학자는 '영원한 생성'을 말하는 철학자 니체가 아니라 '진리는 임신한 여성'이라고 말하는 아줌마 니체이다. 이 문제는 '영원회귀'와 관련하여 나중에 한번 다루도록 하겠다...

 

05.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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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1-29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로쟈 님 스타일의 티저 광고군요.^>^

로쟈 2005-11-29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시간쯤 쓰던 페이퍼를 한번 날려버린 이후로는 수시로 저장하게 됩니다. 광고효과까지 겸한다면야.^^

2005-11-30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2-0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한 논문을 읽으니 당대 진보적인 여성들은 저마다 자신을 '초인'이라고 생각했기에 니체의 '마초적' 발언들에 괘의치 않았다더군요...

아리 2009-06-03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30분에 읽는 도스토예프스키>(랜덤하우스중앙, 2005)를 읽었다. 이 '30분 시리즈'에서 <니체>와 함께 지난주에 구입한 책인데, 비록 만만한 분량이긴 하나 30분은 족히 더 걸리고 아마 1시간 정도는 투자해서 읽어야 할 분량. 물론 이런 가이드북에 큰 기대를 걸어서는 곤란하지만, 책은 기대보다는 잘 짜여져 있으며 저자 로즈 밀러의 식견 또한 여간한 수준은 아니다. 그는 주로 영어권 연구서들을 참조하고 있는데, 이래저래 알려주는 정보도 요긴하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모출스키의 <도스토예프스키>(책세상, 2000)와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공부 요령이기도 한데, 어떤 주제나 인물에 대해서 좀 두꺼운 책과 얇은 책을 나란히 읽으면 '정리'와 '부연설명'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데, 번역 자체가 비교적 만족스러운 <니체>에 비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몇 가지 오류가 눈에 띈다. 주로 러시아 인명과 관련된 것들인데, 직접적으로는 역자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은 그닥 참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어서 씁쓸하다(교정자도 안 읽었다는 얘기이고). 비근한 예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맏형 드미트리의 애칭이다. 영어 표기로는 'Mitya'가 되는데, 이걸 '미챠(미쨔)' 대신에 '미트야'로 옮긴 것. '카테리나'의 애칭 'Katya'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카챠(까쨔)' 대신에 '카트야'가 돼 버렸는데, 좀 우스운 해프닝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친구였던 비평가 '스트라호프(Strakhov)'가 '스트라코프'로 옮겨진 것도 부주의하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사전>(열린책들, 2002)도 출간돼 있기 때문에 굳이 우리말 번역본을 직접 읽어보지 않더라도 고유명사 표기에서의 오류들은 피해갈 수 있었을 텐데, 그마저 참조하지 않은 것은 오만이거나 객기일 터이다.

또 그런 태도는 꼭 그 이상의 실수들을 낳게 된다. 책에서 여러 차례 인용되고 있는 연구서로 <도스토예프스키와 문학 창조과정>이 있는데, 역자는 그 저자를 '장 콕토'라고 옮겨 놓았다(86쪽 등). 터무니없는 오류인데, 'Dostoevsky and the Process of Literary Creation'란 연구서의 저자는 저자는 자크 카토(Jacques Catteau)이다. 원저는 불어이며, 저자 로즈 밀러는 영역본(캠브리지대 출판부, 1989)에서 인용하고 있다(원저는 불어권에서 나온 가장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서이다). 또 135쪽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읽기(Reading Dostoevsky)>의 저자이자 저명한 러시아문학 연구자인 'V. 테라스(Victor Terras)'를 'V. 테릿'이라고 옮긴 것도 오류이다. 아울러 본문에서 거명된 연구문헌들의 국역본이 참고문헌란에서 많이 누락돼 있는 것은 아쉽다. 요즘처럼 정보검색이 편리한 시대에 이런 누락이 발생하는 것은 그저 성실성의 문제일 뿐이다.

이런 류의 가이드북을 읽으면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만약에 내가 이런 책을 쓴다면'이다. 물론 관건은 분량이며, 얼마만큼 핵심을 압축해서 전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라면 훨씬 두툼한 분량의 책을 써야하겠지만(나의 장기적인 목표는 2021년이다. 작가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 거기에 힌트가 될 만한 사항 하나. 92쪽에서 '자크 카토'를 인용하고 있는 대목: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고상한 인물들 중에서도 돈키호테는 가장 완성된 인물이다. 하지만 돈 키호테의 고상함은 그가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동시대 작가 투르게네프에게서 돈키호테가 햄릿과 함께 인물의 두 전형이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돈키호테의 짝은 그리스도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상함'과 돈키호테의 '우스꽝스러움'을 동시에 구현하고자 했던, 세계문학사에서 아마 유례가 드문 작가이다. 물론 <백치>의 주인공 미슈킨(므이슈킨) 얘기이다. 사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자체가 진지함과 우스꽝스러움의 결합체이긴 하다. 그런 의미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세르반테스 이래의 산문문학 전통을 계승하고 있기도 하다. 그 전통을 가까이로는 고골로부터 이어받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나는 그러한 전통을 '파토스(pathos)의 문학'에 견주어 '바토스(bathos)의 문학'이라고 부르길 좋아한다.  

내가 '바토스'란 단어를 처음 본 건 나보코프의 <러시아문학 강의>에서였던 듯한데, 그는 고골 문학의 특이한 정서를 '바토스'란 말로 표현했다. '돈강법'이라고 옮겨지는 바토스는 "점차로 끌어올린 장중한 어조를 갑자기 익살스럽게 떨어뜨리기"란 (음악)기법을 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파토스'에 상응하는 폭넓은 뜻으로 새기며, 그때 바토스는 고양된 정념과 익살의 혼종을 뜻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경애해마지 않는 것이 세르반테스에서 고골로, 도스토예프스키로 이어져오는 바로 그러한 '바토스의 문학'이다.   

세르반테스와 같은 스페인어권에서 그러한 바토스를 가장 숭고하게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 멕스코 영화의 거장 아르투로 립스테인의 <짙은 선홍색>(1996)이다(나는 지난 세기에 한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이 영화가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는 것은 상당히 미스테리한 일이다). '내 인생의 걸작' 중 한편인데, 내용을 살짝 퍼오면 이렇다.

"뚱뚱하고 볼품없는, 게다가 입에서는 심한 구취까지 나는 간호사 코랄은 두 아이를 가진 과부다. 누군가의 관심이나 호감을 끌지 못하는 코랄. 그렇지만 누구 못지 않은 열정과 낭만을 내면에 갖고 있는 욕구불만의 여자다. 잘생긴 영화배우 샤를르 브와이에를 연모하는 코랄은 어느날 잡지에 실린 사교란에 자칭 샤를르 브와이에를 닮은 남자라는 니콜라스의 광고를 보고 가슴이 부풀어 편지를 쓴다. 샤를르 브와이에처럼 우아하고 매력적인 스페인 신사 니콜라스의 방문을 받은 코랄, 그녀는 한눈에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러나 실상 그의 정체는 빈털터리에다가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가발을 쓰고, 엉터리 스페인 억양을 흉내내어 돈많고 홀로사는 여자들을 꼬셔 돈을 뜯어내는 삼류 제비였다."

"뚱뚱하고 못생긴데다가 재산도 없고 두 아이의 엄마인 코랄은 당연히 니콜라스의 표적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갈 차비마저 없는 빈털터리인 니콜라스는 코랄과 하룻밤을 보내고는 그녀의 지갑을 훔쳐서 달아난다. 그리고는 이내 그녀에 대해서는 잊는다. 그러던 어느날, 코랄이 두 아이를 데이고 니콜라스를 찾는다. 당황한 니콜라스는 그녀의 청혼을 단호히 거절하고 코랄에게 엄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한다. 실망한 코랄은 니콜라스가 자신의 아이들 때문에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길로 두 아이를 고아원 앞에 버리고 니콜라스의 집으로 돌아온다."(코랄이 엉엉 울면서 사랑을 위해 두 아이를 고아원에 버리는 장면은 압권 중의 하나이다.)

"니콜라스가 외출한 빈 집에서 코랄이 발견한 것은 자신과 똑같이 수많은 여자들에게서 온 편지와 사진, 그리고 NO가 그려진 자신의 편지였다. 코랄은 니콜라스의 과거의 의문스러운 약점을 잡아 니콜라스를 꼼짝 못하게 하고는 진심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아이까지 버리고 자신만을 사랑한다는 코랄의 광적인 사랑에 감동받은 니콜라스는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제 둘은 동업자가 된 것이다. 코랄은 니콜라스의 사업이 번창하도록 돕기로 하고 표적이 될 여자들을 직접 고른다. 그러나 사업이 무르익어 갈때마다 질투심에 눈이 먼 코랄은 순간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곤 한다. 이제 그들은 단순한 동업자가 아닌 피로 맺어진 불안하고 광적인 사랑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결국은 형장에까지 이르게 되는 이 커플의 엽기 살인행각을 따라가는 로드무비가 <짙은 선홍색>이다. 그리고 그런 게 내가 말하는 '바토스의 영화'이다.

 

 

 

 

또 다른 사례로 가령 낭만적 동경의 상징인 '푸른 꽃'의 경우는 어떤가? 나는 그 동경의 대상을 '푸르죽죽한 꽃'으로 변형시킨 시를 써보기도 했는데, 이런 식이다.    

  푸른 꽃향기에 나는 중독 되었구나 나는 눈이 멀었구나

  그대 살을 맞댄 자리에 이렇듯 깊이 박힌 대못이여, 내 몸의 가시여, 횡재여

  어느 입에 발린 사랑이 또한 나를 놓고 통곡을 하랴, 가슴을 치며, 물 말아먹으며

  마음의 일용할 양식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바대로 다 가져가리니

  가시를 묻은 자리에 피어나는 꽃들이여, 가시나무 꽃들이여

  너희의 다복한 일상에 어찌 찔리는 바 없지 않으랴

  우리가 서로를 아파하고 아프게 하며 이렇게 살아가는 음풍농월에 지화자,

  언젠가 햇빛 짱짱한 날에 백마 타고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우리를 

  개 패듯이 패리니

  그날에 마치 짙푸른 깻잎처럼 다시 푸르게 피어날

  목숨의 향연이여, 인과(因果)의 향연이여, 푸르죽죽한 꽃향기여!

 

여기엔 물론 노발리스의 '푸른 꽃', 이육사의 '광야', 니체의 '초인'의 어구나 이미지들이 혼종돼 있으며 그러한 혼종을 통해서 의도하는 효과가 '바토스'이다. 이 바토스는 파토스를 부정하면서도 보존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적 지양의 한 문학적 등가물이기도 하다. 언젠가 보다 체계적인 '바토스의 시학'에 바탕을 둔 도스토예프스키론을 쓰고자 한다. 그것이 내 인생의 한 목표, 즉 '푸르죽죽한 꽃'이다...

 

05.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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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29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1-29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한때는 제 별명이 '개그맨'이기도 했습니다. 실없이 웃긴다고...

토마스 2005-12-07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짙은 선홍색>은 국내에서 개봉된 바 있습니다^^
 

'나의 고전'이란 제하의 원고를 청탁받고 작성한 글을 옮겨놓는다. 내가 고른 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사르트르'였는데, 문학작품은 가급적 피해달라는 주문이 있었기 때문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란 강연 팜플릿을 골랐다. 내가 아는 한,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올해 <문학과 사회> 여름호와 <현대문학> 10월호에서 특집이 꾸며졌다. 하지만, 이 '과거의 영웅' 철학자에 대한 주목은 소략한 편이다. 말년의 주저 <변증법적 이성비판>이 번역돼 나올 거라는 얘기가 있었지만, 올해 책이 나오는 건지는 의문이다. 하물며 <집안의 백치> 같은 걸 기대하기는 현상황에서라면 더더욱 어려울 듯하다. 그런 게 아무튼 작금의 '상황'인 듯하다. 나는 그냥 나대로 그러한 상황에 편승하거나 거스르면서 내가 치러야 할 빚을 까나가도록 하겠다(연말까지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2-3편의 페이퍼를 더 쓸 계획이다). 무슨 빚? 청년시절의 우상에 대한 빚 말이다...

일반적인 고전들과는 달리 ‘나의 고전’에는 ‘이 나’라는 단독성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아무나의 고전’이 아닌 ‘나의 고전’이란 의미에서 ‘왜’란 물음 대신에 ‘왜 하필’이란 물음을 수반한다. ‘왜 고전인가?’가 아니라 ‘왜 하필 나에게?’란 물음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우연찮게도 그 물음은 어떤 고유한 죽음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과 상동적이다. 어떤 죽음에 대해서 ‘왜 하필 그가?’라고 묻는. 그러한 물음에 대하여 나는 아직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하필 그때 그가 그렇게 죽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내게 하나의 ‘고전적인’ 생애로 각인되었다는 것이다. 그 죽음은 1980년 4월 15일에 일어났으며, ‘장-폴 사르트르의 죽음’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사진은 사르트르의 장례 행렬).

바로 전해 10월 26일에도 매우 충격적인 죽음이 있었다. 나는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죽음이 몰고 온 충격적인 정황들 때문에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처럼 한 죽음의 간접적인 목격자이자 경험자가 되었다(TV에서는 며칠 동안 장송곡이 흘러나왔다). 분단국의 한 독재자가 연회장에서 부하의 흉탄에 맞아 숨진 것인데, 그 비극적인 죽음은 그러나 성대한 장례식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죽음’으로서의 아우라를 거느리지 못했다. ‘흔한 죽음’이었기에(대개의 독재자들은 그렇게 죽지 않던가?).

해서 어린시절,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까운 사람들 중 아무도 죽어주지 않던 내게 먼 이방인 철학자의 죽음과 성대한 장례행렬에 대한 자세한 보도는 그 죽음을 가장 매혹적인 어떤 것으로 각인시켜주었다(나는 신문의 일면 전체를 장식했던 이 장례식 보도와 사진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신문지를!). 정치 대신에 문학을 인생을 걸 만한 일로 간주하면서 내가 작가로의 길을 꿈꾸게 된 건 아마 그 이후였던 듯하다(비록 아무런 작품도 아직 쓰지 않았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작가이면서 철학자, 혹은 철학자이면서 작가. 나는 그런 저자가 되고 싶었다(‘저자의 죽음’이란 유행어가 떠돌 때는 나도 따라 죽고 싶었다). 그 고유한 죽음의 주인이었던 그 사람 사르트르처럼 말이다.

 

 

 

  

장-폴 사르트르(1905-1980).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사망 2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흔히 그의 데뷔작 <구토>(1938)나 철학적 주저 <존재와 무>(1943), 혹은 자서전 <말>(1963)이 그가 남긴 ‘고전’으로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러한 ‘일반적인’ 고전들 대신에 ‘나의 고전’으로 꼽을 만한 책은 1945년 10월에 있었던 강연을 책으로 묶어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이다(그러니까 이 ‘팸플릿’은 내년에 환갑을 맞는다). 대학 초년생들도 읽을 수 있는 가장 쉽고, 가장 얇은 책!(<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2종의 국역본이 있다. 하지만, 마음놓고 인용하기에는 미덥지 않은 면이 있다. 새 정역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대중강연의 원고였던 만큼 가장 확실하고 일목요연하게 자기 철학의 핵심을 짚어주고 있는 이 저작은, ‘공적인 교수들’과 대비되는 ‘사적인 사상가’로서 사르트르를 자신의 ‘스승’으로 경외했던 들뢰즈 또한 연극 <파리떼>의 초연, <존재와 무>와 함께 ‘사건’으로 간주했던 작품이다: “이들은 오랜 밤들을 지나온 우리가 사유와 자유의 동일성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던 작품들이다.”(Deleuze, "Desert Islands and Other Texts, 1953-1974", 77쪽)

  

참고로, 들뢰즈의 글모음집인 이 책은 불어본이 2002년, 영어본이 2004년에 편집돼 나왔으며, 단행본에 묶이지 않은 들뢰즈의 글 대부분을 카바한다. 1975-1995까지 발표된 글모음집이 될 제 2권은 "Regimes of Madness and other texts"란 제목을 갖고 있으며 근간 예정이다. 국내의 '들뢰즈 열기'를 감안하면 곧 번역/출간되어야 할 책이다. 책에는 1964년 11월 28일, 그러니까 사르트르의 노벨문학상 수상 거부 파문 한달 뒤에 들뢰즈가 'Arts'지에 투고한 글이 실려 있는데, "그는 나의 스승이었다(He Was My Teacher)"란 제목이다. 

 

 

  

 

한편, <문학동네>(2004년 겨울호)에 실린 실린 가라타니 고진의 평문 "근대문학의   종말"은 서두에서 "문학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영구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주관성)"이라는 사르트르의 정의를 인용하고 있는데,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결미에 나오는 이 구절을 그는 들뢰즈의 텍스트로부터 재인용하고 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사르트르와 들뢰즈 두 철학자간의 연계성을 떠올려볼 수 있다.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한 들뢰즈의 평가를 직접 옮겨보면 이렇다.

"그의 철학 전체는 재현이란 관념, 재현이라는 질서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변적 운동이었다. (그에게서) 철학은 그 자신을 '선(先)판단적인', '전(前)-재현적인' 보다 생생한 세계에 정초하기 위해서 판단의 영역을 떠나 그 활동 무대를 바꾸었다."(His whole philosophy was part of a speculative movement that contested the notion of representation, the order itself of representation: philosopy was changing its arena, leaving the sphere of judgment, to establish itself in the more vivid world of 'pre-judgmental,' the 'sub-representational,')(78쪽) 이러한 평가는 들뢰즈 자신의 철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때문에 사르트르와 들뢰즈의 차이보다 더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 그들간의 접점과 연속성이다).  

본론으로 돌아와보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경우 나는 2종의 국역본 외에 불어본(신아사, 1973)과 영역본을 갖고 있다. 영역본은 월터 카우프만이 편집한 <도스토예프스키에서 사르트르까지의 실존주의>(1972/1988)에 실려 있다. 니체 번역자이자 전문가로 잘 알려진 카우프만의 책으론 국내에는 <헤겔: 그의 시대와 사상>(한길사, 1995), <인문학의 미래>(미리내, 1998)가 소개돼 있다. 하지만 역시나 그의 주저라 할 <니체: 철학자, 심리학자, 반그리스도>(1975)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예전에 니체학도들에게는 필독서였다). 

사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내용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선언적으로 제시돼 있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실존주의’에 대한 오해와 비난들에 맞서서 실존주의는 무엇이 아닌가, 반대로 실존주의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휴머니즘인가를 논변해 간다. 거기에 대전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절대적인 자유이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란 명제이다(사르트르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읜바, 그것을 행운으로 간주한 ‘후레자식’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자유를 죽었다”고 그는 자서전에서 말했다.)

사르트르가 예로 들고 있는바, 종이칼이나 망치 같은 것을 제작할 경우에는 그 제작에 앞서서 어떤 개념 혹은 디자인이 먼저 요구된다. 머릿속으로 만들고자 하는 물건의 개념(본질)을 떠올리고 그에 따라 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 실존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보다 일관성 있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따를 때(사르트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마르셀과 야스퍼스 등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이다), 신이 부재하는 세계에서 인간에겐 어떠한 본질도 사전에 주어져 있지 않다. 즉 실존은 아무런 사전 개념이나 계획 없이 존재하기에 본질에 앞선다.

따라서 ‘보편적 인간성’이란 없으며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 인간은 이끼나 토마토나 양배추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이어나가는 ‘지향적 존재’이다. 요컨대, “나는 내가 만들어!”라는 것이며(“사랑은 내가 해!”란 드라마 대사는 사랑에 대한 사트르르적 태도를 잘 집약해준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즉 “나는 나 자신과 모든 사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윤리이며, 이러한 책임으로부터의 도피가 ‘자기기만’이고 ‘불성실’이다. 자유에 처형된 존재로서의 우리는 언제나 자유로우며 따라서 언제나 선택할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의 실존과 주체성을 우주의 한복판에, 초월적 중심에 갖다놓는 ‘오만한’ 철학이 어찌 휴머니즘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렇게 큰소리 칠만 했던 것이 대략 <현대>지를 창간하던 1945년부터 10여 년간이 철학자이자 사상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르트르의 전성기였다. 해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는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당당한 한 지적 거인의 목소리가 육성으로 배여 있다. 그리고 그러한 목소리에 매혹되어 나는 청춘의 한 시절을 보냈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생각은 좀 바뀌었다.

과연 인간이 어디까지 자유로운가란 물음을 던지면서, 사르트르적인 ‘낭만적 합리주의’(아이리스 머독)에 대해 얼마간 거리를 두게 되었고, 이후에 구조주의나 정신분석학 책들을 읽으면서는 이 사팔뜨기 철학자의 ‘영웅주의’ 철학이 갖는 유효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도 됐다(영국의 저명한 여성 작가 아이리스 머독의 'Sartre, romantic rationalist'(1953)은 영어권 최초의 사르트르 연구서이기도 하다. 머독의 평가는 적절해 보이는데, 나는 사르트르와 들뢰즈 모두 '낭만적'이란 수식어를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한 건 그가 나의 ‘영웅’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이때의 영웅성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참고로, <현대>지 창간사는 1966년 <창작과 비평> 창간호에 번역/소개된다. 사르트르의 시대정신은 <창작과 비평>의 창간사도 겸하고 있었던 것.)  

   

가령 사르트르의 전사(前史) 혹은 사르트르 이전의 사르트르.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던 8개월간의 유학생활에서 돌아온 사르트르에게 곧 30세 남자의 위기가 들이닥쳤다. 그는 거울 앞에서 생전 처음으로 대머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오랫동안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마사지해야 했다. 1934년 겨울이었고, 그는 르 아브르에서 키가 작고 뚱뚱한, 그저 늙어가는 시골 교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부풀어오른 코담배갑처럼 혐오감을 일으키는 구제불능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한 친구는 그에게서 비곗살을 빼준다고 스웨터를 입은 그의 배를 두 손 가득히 움켜쥐고서 짓궂게 괴롭히기까지 했다! 이것이 내가 읽은 두툼한 전기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대목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 년 만에 그는 자신을 우리가 아는 ‘사르트르’로 만들었다. 그리고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였다. 그는 실존주의가 ‘행동과 앙가주망의 모럴’이라는 걸 직접 몸으로 실천하며 보여주었던 것. 해서, ‘나의 고전’은 적어도 사르트르의 경우에는 그의 책들이 아니라 그의 생애라고 말해야 온당할 듯싶다. 문학에 대한 사르트르의 언명을 조금 비틀자면, “고전은 그 본질상 영구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자 ‘자기-되기(becoming-Self)’의 행동/사건이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05. 11. 28.   

 

 

 

 

P.S. 글의 제목은 (보다 관례적인) '사르트르의 삶과 철학'을 비튼 것이다. 내게서 그의 철학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닥터 지바고>에서 주인공의 삶이 어머니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되었던 것처럼(2002년판 TV용 <닥터 지바고>는 반대로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한다). 데이비드 린의 영화(1965) 시작 장면은 오늘처럼 비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던 저녁 무렵으로 기억된다. 집에 가서 두 명의 지바고를 다시 보고 싶은 저녁이다. 러시아어 '지바고'의 어원적 의미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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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르트르를 발가벗기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01 23:45 
    '지식인의 지식인'을 다룬 기사를 옮겨놓고 나니 20세기 원조 지식인이라고 할 사르트르에 관한 평전 소식도 빼놓을 수 없겠다. 사르트르 세대 이후 가장 '대중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인 베르나르 알리 레비가 쓴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 2009). 역자는 사르트르 전문가인 변광배 교수다. 968쪽에 달하니까 얼추 안니 코헨 솔랄의 세 권짜리 평전 <사르트르>(창, 1993)에 이어서 가장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는
 
 
이네파벨 2006-01-12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사르트르의 "파리떼"라는 단편을 읽어보셨는지요...
중학교 1학년때 집에있는 세계문학전집에서 그 단편을 읽고..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엘렉트라의 오빠)의 복수를 소재로 한...햄릿과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카뮈의 이방인....등등의 이야기를 한데 섞어놓은 듯 한 그런 이야기......)
망치로 머리를 맞는거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살면서 몇 번 경험하기 힘든 진정한 epiphany의 순간이었다고 할까요.....

아마...그 책이 저에게 특히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건...

절대 도덕, 절대적 사랑, 절대적 힘, 완전하고 단단하게 느껴졌던 어린시절의 알에서 막 깨어나오던 시절이어서 더욱 그랬을 거예요.

그 이후로 사르트르를 저의 우상으로 삼고...저 위에 언급된 그의 많은 저서들을 사놓고 읽어보았으나...까만건 글씨 하얀건 종이.....수준으로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이후 사르트르는...
좀 더 approachable한 까뮈나 보봐르로 건너가는 징검다리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파리떼>가 담겨있던 그 책은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렸는데...언젠가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하지만 그 감동은 되찾을 수 없을것 같아요. 한번 흘러간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그지 못하듯....

로쟈 2006-01-12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문문고본으로 갖고 있었는데 가물가물합니다. 드라마 아니었던가요?.,

이네파벨 2006-01-12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연극 대본 형식이었어요.
사르트르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데...역시 로쟈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