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딸에게'는 '목마와 숙녀'로 잘 알려진 박인환(1926-1956)의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이지만, 언젠가 그의 평전을 읽으면서 그래도 가장 인상에 남았던 시이다(이미지에는 윤석산 교수의 평전이 올라와 있지만, 내가 읽은 건 이동하 교수의 평전 <박인환>(문학세계사, 1993)이다. 대표시들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책인데, 요절한 시인인지라 작품집이 한권으로 카바된다). 흔히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하는 시와 노래(박인희)대표작의 감상성에 기대어(과거 음악다방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었던 시인이 박인환과 (성산포의 시인) 이생진이었다. 혹 이런 시의 낭송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 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 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 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움이 없어질때까지

(...)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했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 놓아 주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하여간에 이름은 카페로 돼 있는 다방에 앉아 있으면 누굴 기다리거나 말거나 들려오는 건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아니면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이었다(거의 유사한 목소리의 성우가 낭송했던 듯하다. 언제였던가? 스무살이 되던 무렵?). 아, 하나 더 있긴 했다. 서정윤의 '홀로서기'.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로 시작되는. 내가 살던 소도시에는 카페를 겸하던 서점의 이름조차 '홀로서기'였다(그 시를 내게 또박또박 적어서 보내준 여학생도 지금은 다 학부모가 되었겠군).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해서 연배는 다 제각각이지만 박인환, 이생진, 서정윤은 내게 한국시의 센티멘탈리즘 3인방이다('센치멘탈리즘'이라고 읽어야 한다). '어린 딸에게'는 그런 박인환이 남긴 몇 안되는 '리얼리즘' 시이다(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수록돼 있다).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죽음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3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의 비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별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哀訴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금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데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내가 시를 다 암송하지는 못하는 대신에 자주 중얼거렸던 구절은 "엄마는 너를 껴안고 3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이다. 딸아이가 생기기 훨씬 이전의 일인데, 얼마전 딸아이의 방을 만들어주려던 '혁명'이 불발로 그친 뒤에 간혹 떠올리게 된다. '혁명'이 아니라 '전쟁'인 셈인가?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얼마전부터 집사람과 자주 '냉전'에 돌입하는 까닭에 나는 자주 딸아이의 '행복'에 (디딤돌이 아닌) 걸림돌 노릇을 하고 있지만(덕분에 딸아이는 '스트레스'란 단어를 내 방에 와서 써놓고 가기도 한다. '아빠 미워'란 말과 함께), 그런 상황이 달가울 리는 없다. 

20대 총각시절 나의 소망은 나중에 딸아이가 7살이 되면 한방 가득 도서관을 차려주는 것이었다. 딸아이도 한때는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요즘은 '아빠처럼 책 좋아하는 남자는 안 만날 거야'라고 미리 선언을 한다. 적어도 한 여자에게서만큼은 존경받는 남자이고 싶었고, 딸이라면 아빠를 존경해주지 않을까 라는 게 나의 '얄팍한' 계산이었는데, 일이 만만치 않게 됐다(이러다간 인생 헛사는 게 시간문제겠다). 그 아이의 가장 최근 모습이다.

'조작' 시비가 있을까 하여 사이즈는 그대로 놔두었다. 스스로 발가락만 아빠를 닮았다고 하니까(더 추궁해야 입술도 닮았다는 정도의 얘기를 듣는다) 내가 기여한 바는 별로 없어 보이지만, 하여간에 아이는 나의 DNA정보를 1/2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동료 인간이다. 참고로, 아이가 언젠가 그린 아빠 얼굴은 아래의 모습이다(거의 닮은 바가 없어, 옆집 아빠를 그려놓은 게 아닌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나마 웃는 모습이어서 다행이다).

아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갖게될 무렵 사람의 손가락을 다 그려놓는다고 한다. 그러니 아이는 이미 '자기'에 대한 주관과 고집과 땡깡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며칠전 책정리 기념으로 내 방에 들어와서 찍은 사진(사진은 모두 엄마가 찍어준다).

하필이면 의자도 아닌 애매한 박스 위에 앉아서 찍었는데(그것도 잠옷만 입고) V자에 좀 어정쩡한 미소가 아이의 전형적인 포즈이다. 우리 부부가 싫어하는 포즈이기도 한데, 이건 어떻게 살아남은 사진이군. 서재의 한쪽 벽면에는 주로 철학책들이 꽂혀 있다(교양과학과 정신분석학쪽도 포함해서). 이 방면이 지난번 '쓰나미'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생존률이 높다. 아직 안 읽은 게 많다는 얘기이고, 니체 등과 관련해서는 계획중인 글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이기도 하다. '쓰나미' 이후엔 상당히 깨끗해져서 요즘은 '들어갈 수 있는' 서재의 전경이다(사진이 흐릿하게 나와서 무슨 책들이 꽂혀 있는지는 다 염탐이 안 되실 듯하다). 눈밝은 이라면 왼편 상단에 프로이트 전집 몇 권이 꽂혀 있는 걸 알아보실 수 있을 듯. 그 아래로는 대개 정신분석학 관련서들이고, 가운데 서가는 대부분 현대 프랑스 철학책들이다. 하단부엔 벤야민과 손택, 아렌트의 책들도 몇 권 보이는데, 읽기 위해서 혹은 쓰기 위해서 가까이에 배치해 놓은 것들이다. 전공서적이나 문학관련서들은 대부분 다른 방에 가 있다(아이의 방으로 꾸며주지 못한 방).

아이와 언제나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아니다. 어린이집에 다니던 4살 때는 엄마가 시기할 정도로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래서 아이가 거의 최초로 무슨 '어린왕자' 같은 그림을 그려놓았을 때도 나는 혹시 '아빠'를 모델로 한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아직 손가락도 그려넣지 않았던) '좋았던 시절'에 관해 가끔 얘기가 나오면, 아이는 "옛날에, 내가 4살때..."라고 말한다. 옛날이라! 하긴 여섯 살 평생을 살아온 아이에게 재작년의 일들은 먼 옛날일 법하다. 내가 20대 초반을 회고적으로 기억하듯이 말이다. "이젠 내 곁을 떠나간 아쉬운 그대이기에..."

그리고 이건 아이가 옛날에, 그러니까 4살 때 한글을 처음 배우면서 연습장에다 처음으로 써놓은 한글 모음들이다. 그렇게 배운 한글로 작년엔 모스크바로 '아빠 사랑해요'라고 또박또박 적은 생일 축하카드를 보내오기도 했었다(이젠 그렇게 배운 한글로 '아빠 미워'라고 써놓는다!). 해서, 나는 루소나 레비스트로스처럼 이 야만적 문명, 혹은 문자의 폭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순수했던 시절, 그러니까 옛날에, 4살때, '성스런 야만인' 시절 아이는 이런 모습이었다. 겨울이었고 눈이 많이 왔었나 보다. 아, 옛날이여, 이젠 다시 돌아올 수 없나, 그으날, 그날이여!..

05. 1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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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5-12-14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너무너무 귀엽네요! 저 깜찍한 브이 하며... 허허. 앞으로는 더 존경받는 로쟈님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

깍두기 2005-12-14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공주님과 디엔에이 1/2을 공유하고 계시다면 로쟈님도 상당한 미모이실 듯^^

외로운 발바닥 2005-12-1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이쁜 공주님이네요. ^0^
20대 총각인 저도 로쟈님과 같은 꿈을 꾸어보야야 겠네요.

stella.K 2005-12-15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따님이 정말 귀티나네요. 저만하면 딸래미를 위한 훌륭한 도서관 아닌가요? 딸에게 박인환의 시를 읽어주면 정말 멋질 것 같군요. 그렇다면 로쟈님은 멋쟁이신가요?
송구합니다. 사실은 오래전에 즐찾해놓고 인사드릴 기회가 없었습니다.
소개하시는 책들이 저 보단 세수쯤 위라 섣불리 아는 척했다 민망한 일 당할까봐 도둑처럼 드나 들었습니다.
그나마 따님 얘기하시는 이 수준이 저에겐 딱 좋군요. 반갑습니다.^^

yoonta 2005-12-15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봐도 울집에 있는 책이 벌써 여러권 눈에 띄는군여..진리와 방법..저 영어본은
꽤 오래된 판본인가보군녀..

지나간 일이지만 정말 아깝슴당...로쟈님 책 2500여권..ㅠ.ㅠ

로쟈 2005-12-15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저보다는 제 딸내미에게 더 관심들이 있으시군요. 그나마 책에 먼저 눈길이 가는 yoonta님이 예외이시듯한데, 필시 아직 미혼이실 듯하고 (제 전철을 밟으실 듯한) 장차의 부녀지간이 눈에 보일 듯합니다(말씀하신 <진리와 방법> 영역본은 89년쯤에 산 거 같군요. 번역 세미나를 두어 달 한 거 같습니다).^^

로쟈 2005-12-15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09님/ 어젯밤에 '헨젤과 그레텔'을 읽어주는데(제가 읽은 것만 두번째), 아이가 미리 선언을 하더군요. 언젠가 자기한테 물려줄 거라고 한 아빠 책들은 나중에 다 갖다 버릴 거라고. 지금은 책읽는 거 좋아하지만, 크면 안 좋아 할 거라고. 해서, 제가 아빠 책들은 나중에 도서관에 기증하면 된다고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아이의 도서관'은 물건너 간 거 같습니다...

이럴수록 2005-12-15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속에 그대를 못잊어 그리워한다..........

이네파벨 2005-12-15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이 정말 이쁘네요....
동그란 이마랑 뽀얀 피부랑 웃는 눈이랑...

아빠에게 상처주는 미운 말 하는 모습이 상상이 안되지만...
미운 일곱살이라는 말이 달리 있는게 아니라는걸 저 역시도 실감하고 있답니다
(제 아들내미도 일곱살이거든요.)



기인 2007-05-18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글도 벌써 햇수로 2년 전이니.. '먼 옛날'의 일이군요 ^^
따님은 이제 또 어떻게 변했을지.. :)
 

한파(寒波)라고 하기엔 포근한 감이 없지 않지만 예년보다 내려간 기온을 핑계로 겸사겸사 외출을 포기했다(외출이라고 해야 학교에 나가는 거지만). 그럼 집에서 뭐하는가? 빨래하고 대충 청소도 하고 라면 끓여먹고 신문 본다. 화요일이라 편의점에서 한국일보를 사들고 와 본다. 로버트 러플린 카이스트 총장의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를 고개를 끄덕이며 읽는다. 199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면서(1950년생이니까 비교적 젊은 나이에 '정상'에 올랐다) "그는 작곡에도 관심이 많으며 그림그리기도 좋아"한다고(올해 피아노 연주회도 가진 적이 있다).

 

 

 

 

지난 여름에 나온 <새로운 우주 - 다시 쓰는 물리학>(까치글방)이 바로 그의 책이며 그 삽화들을 직접 그리기도 했단다. 역시나 노벨화학상 수상자이면서 '시인'인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까치글방, 1996)의 저자 로얼드 호프만만큼이나 다재다능한 석학인 듯하다. 러플린의 기고문은 그 자신의 교육 체험담이면서도 우리의 교육관을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데, 후반부를 잠시 옮겨오겠다(인터넷판에서 가져오는데, 실제 지면에 실린 것보다 몇 문장이 보태져 있다. 아마도 분량상 지면에는 누락됐던 모양).

-위대한 과학자들이나 발명가들은 어른이 되어가는 길목에서 다른 사람들이 겪는 창조성에 대한 장애물을 만나지 않는 사람들로 보인다. 때로는 괴팍함과 결합한 덕분에. 그들은 스스로 게걸스럽게 배우는 자들이기도 하다. 토마스 에디슨은 교사가 산만하다고 평가해서 어머니가 집에서 교육을 시켰다. 그는 대학에 가지 않고 대신 문학책이나 과학책을 호기심 가는대로 읽었다. 빌 게이츠는 엄마가 공부하라는 것을 거절하고 마이크로 소프트를 만들기 위해 하버드를 중퇴했다. 아이작 뉴튼의 선생은 그를 매우 공부 못하는 학생으로 평가했으나 그의 끊이지 않는 공상과 그의 관심사를 꾸준히 기록한 것이 큰 일을 해냈다. 뉴튼은 혼자서 유클리드의 '원리'와 데카르트의 기하학을 숙독한 끝에 미적분을 창안했다.(*이 단락은 전체가 지면에서 누락돼 있다.) 

-불행하게도 이런 지적인 독립성은 현대 한국에서는 장애물이 많다. 우선 학교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부담스러운데다 국제어인 영어까지 익혀야 한다. 이것은 작은 나라들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창의성 세금' 이다. 만일 국제언어를 습득하는데 실패하면 어린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수입이 적다. 그래서 북동아시아에는 뉴튼과 에디슨이 드물다. 문화 때문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에너지를 언어를 배우는데 가장 많이 써야 하는데 따른 부작용이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아, '창의성 세금'이여!)

 

 

 

 

-대신 북동아시아의 예술가들은 언어습득에 많이 투자하지 않고도 성공한다. 작곡가 가와이 겐지는 '공각기동대'에 음악을 맡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일본에서는 그만의 텔레비전 쇼를 갖고 있다. 오모토 가츠히로는 '아키라'가 서양에서 인기를 끌면서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이 소개되는 문을 열었다. 몇 년 전 나는 '아키라'의 한 장면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 썼다가 반응이 좋길래 코단샤 출판사에 오토모씨와 서명본을 교환하자고 제안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시장에서 노벨상 수상자와 젊은 예술가의 값 차이를 알게 됐다.(*이 단락도 지면에는 누락돼 있다.) 

-이런 걸 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의 교육열은 좋은 것만은 아니다. 경제활동에는 좋겠지만 다른 것에는 나쁘다. 기술과 창의적인 독창성을 필요로 할수록 나쁘다. 금융이나 반도체 연구와 같은 복합적인 업무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영화나 첨단과학 같은 예술적인 활동에는 불리하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고등학생들은 오직 최고의 대학에 입학하려고 공부를 하고 대학생은 오로지 시험을 잘 치려고 공부를 한다. 지적인 내용은 점수나 등수보다 덜 중요하다. 좋은 시험성적과 등수는 첫번째 직업은 보장해주겠지만 40년 동안의 경제생활을 지탱해주지는 않는다. 특히 가족부양을 위한 재정적인 책임이 최고조에 이른 후반생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경제는 너무 빨리 변해서 익힌 기술은 금새 쓸모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는 일생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데 성실하고 꾸준하게 투자를 해야 한다.

로버트 러플린 KAIST총장 

-비행기는 자리를 잡기까지 그 둔한 몸을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매우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바퀴가 땅을 박차는 순간 비행기는 행복해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늘을 나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두뇌와 몸도 이와 같다. 젊었을 때는 매우 이상하지만 어른으로 가는 시기가 오면 행복해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두뇌와 몸도 배우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뉴튼과 에디슨 같은 이들에게는 성공은 멋진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니 보기에도 참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공부와 창조도 역시 중요한 것이니 우리들의 끈기있는 노동이 경제를 만들기 때문이다. 뉴튼도 에디슨도 그것은 못했다.(*강조는 나의 것이며, '뉴튼과 에디슨' 이하의 문장들은 지면에서 누락돼 있다.) 

 

 

 

 

마지막 단락의 비유가 아주 시적이며 인상적이다. '배우는 인간은 비상하는 비행기처럼 행복하다'란 큼지막한 타이틀은 거기에서 뽑은 것이겠다. 활주로에서만 뭉개고 있는 사람들에겐 그래도 좀 위안이 되겠고(관제사들이 파업이라도 하는 건가?).  

이어서 읽은 연재가 '강정의 나쁜 취향'이다. 43번째니까 거의 1년이 돼 가는 이 연재의 이번호 타이틀은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하고도 폭넓은 사생활'이다. 이전에 한국일보 지면의 문학기사를 따다놓고 '요즘 시 어떻습니까?'란 페이퍼를 만든 인연도 있고 해서 강정의 글이 더 눈에 끌렸다. 이번에 사진과 함께 그가 거명하고 있는 네댓 명의 젊은 시인들, 혹은 젊은 '바퀴벌레들'은 흔히 '엽기시적' 경향의 대표 주자들이다.

 

 

 

 

김민정, 김근, 황병승, 유형진, 이민하 등이 그들, '바퀴벌레들'이다. 강정의 설명: "몇 달 전 어느 매체에 ‘시인공화국의 젊은 바퀴벌레들’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젊은 시인들에 관한 생각을 짤막하게 밝힌 적이 있다. ‘시인공화국’이란 말이 매주 수요일 본 지면에 연재되는 소설가 고종석의 연재 타이틀을 빌린 것이라는 건 새삼 밝힐 필요도 없을 테지만, ‘바퀴벌레’라는 표현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을 듯싶다. 그다지 좋은 뉘앙스가 아닐지 몰라도 내 본의는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바퀴벌레’를 상찬의 용어로 쓰는 것도 썩 어울려 보이진 않지만, 해명컨대 내가 쓴 ‘바퀴벌레’엔 최근 젊은 시인들이 가지고 있는 차가운 개인성과 예측불허의 감각적 주파능력 및 그들을 바라보는 문단 안팎의 전반적인 시선 등이 포괄적으로 겹쳐 있다."

그러니까 표현은 '바퀴벌레'이지만 거기엔 '상찬'의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 이들이 요즘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 "올 한해 불현듯 방생된 물고기떼처럼 득시글거린 바퀴벌레들의 공통된 특징을 찾자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어 지우고 있다는 점이다. 20세기 초반 위대하시고 저명하신 프로이트 박사님께서 ‘빙산의 일각’이라 아슬아슬하게 표현하신 그 지점이 바퀴벌레들에겐 별다른 강박으로 다가오지 않는 듯하다. 통상적으로 무의식은 존재의 내부에 잠재된 외부적 존재라 여겨지지만, 인간의 이성과 감성의 영역을 본원적으로 분리할 수 없듯 무의식을 의식의 대자(對自)적 영역으로 파악하는 건 보다 총체적이고 근원적인 인간 이해를 방해하는 선험적인 금 긋기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바퀴벌레들은 기존의 인문학이 도구함 정리하듯 배치시켜놓은 인간 개념으로부터 일탈하여 자유롭게 날뛰거나 오로지 그 자신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자기만의 사적 신화에 골몰한다. 소위 영상세대니 인터넷 세대니 하는 말들은 그들을 수식하는 가장 손쉽고도 책임 없는 분류법에 불과하지만, 바퀴벌레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정의하고 명명할 줄 안다는 데 있다."(강조는 나의 것)

요컨대, '나는 내가 명명한다' 혹은 '내 이름은 내가 불러준다'는 것. 뭐라고? '고슴도치'(김민정)라고, '뱀소년'(김근)이라고, '여장남자 시코쿠'(황병승)라고, '피터래빗'(유형진)이라고, 그리고 '환상수족'(이민하)이라고. 강정이 예로 들고 있는 시는 이민하의 '사진놀이'인데, '엽기'의 사례로선 너무 얌전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아무튼 이런 종류이다: “사진을 찍었다 필름을 화분에 심었다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화분을 내놓았다 화분 속에서 주렁주렁 사진들이 익어갔다 너무 익은 사진은 바닥에 떨어져 짓물렀다 방안 가득 단물이 고였다 물컹물컹 사진들이 내 발목을 핥았다 한 달 전에도 사진을 찍었다 어제도 찍었다 난간에 매달려 찍었다 화분에서 흘러넘친 필름은 창을 향해 넝쿨처럼 뻗었다”(야콥슨에 근거하면, 시인들이란 인접성 장애를 앓는 실어증 환자들과 유사한데, 가령 그들은 '강낭콩' 대신에 '필름'을 언어의 화분에 심고 '사진놀이'하는 자들이다.)

 

 

 

 



비록 사진놀이하는 바퀴벌레는 다소 귀엽게 보이지만, 이 '바퀴벌레'들이 거북하고 불쾌하며 혐오스러운가? '한 쇠잔한 바퀴벌레'로서 강정이 옹호에 나선다(그는 한때 <처형극장>의 영사기사였다): "시에 대한 유구한 상식과 편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에겐 여전히 곤혹스럽고 위험천만하게 여겨지기도 하겠지만, 시를 특정한 언어적 형식과 문학적 불문율 아래 가둔 채 공허한 자기위안만을 반복하는 거짓된 물아일체(物我一體)에의 환상이 내겐 더 곤혹스럽고 위험천만한 시적 무사안일주의라 여겨진다. 내가 아는 한, 대상은 결코 주체에 편입되지 않고 주체 또한 그 자체로 완벽한 통일체로서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다. 시가 궁극적으로 노래할 수 있는 건 그 통합되지 않는 자아와 대상 사이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모종의 에너지덩어리로써의 불가능성뿐이다."

이 노땅 바퀴벌레께서 입은 쇠잔하지 않았는지 어려운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만약 당신이 '바퀴벌레들의 사생활'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시적) '무사안일주의자'라는 얘기라는 것이다. 들뢰즈식으로 거들자면, 자신의 존재/거처에서 복지부동, 무사안일 만땅으로 안주하는 당신은 모든 (가면적) '생성'의 거부자이며 따라서 반동 꼴통이다! 그러니 받아들여라! "시적 자아란 그 불가능성을 잠정적으로 지시하는 순간적이고도 영원한 가면에 불과하다. 시인에게 시는 늘 삶의 저편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자기 자신의 불분명한 미래이자 수시로 시간 경계를 초과하며 재생성되는 과거일 뿐"이라는 걸.

그런 식으로 당신의 입을 틀어막음으로써 언어의 세상은 바퀴벌레의 온상이 된다: "지구가 망해도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바퀴벌레들처럼 시인이 추구하는 불가능성의 추구는 그 불가능성 덕분에 영원히 유효하다. 그리고 그 유효성은 모든 공식적인 말들을 궁극의 무효로 환원하는 언어의 이중성과 파탄성을 통찰할 때에야 비로소 유효해진다." 만세, 우리의 시인들이여, 우리의 따라깐 따라까노비치여!('따라깐'은 러시아어로 '바퀴벌레'란 뜻이다.) 

 

 

 

 

이상에서 젊은 '바퀴벌레들' 얘기를 소개한 건 공연한 일이 아니다. 내 생각에 그 비유는 제법 적절해 보이며, 한편으론 고전적인 시인관과 분명한 대조를 이룸으로써 시대의 변화를 징후적으로 드러내준다. 어떤 시인관인가? 얼마전에 <김종삼 전집>(나남, 2005)이 새로 나왔지만, 이전까지 김종삼(1921-1984) 문학의 최고 독본은 장석주 편집의 <김종삼 전집>(청하, 1988)이었다. 그의 시 전부와 대표적인 김종삼론을 망라해서 실은 책인데, 소설가 강석경의 인물 스케치는 '문명의 배에서 침몰하는 토끼'란 제목을 갖고 있다('잠수함 속 토끼'는 한때 유행이었으며 박범신은 소설집 제목을 아예 <토끼와 잠수함>이라 붙이기도 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인에 관한 말 중 인상적인 것이 하나 있는데 시인을 토끼에 비유한 말이다. 잠수함에는 늘 토끼가 승선해 있다 한다. 산소량을 측정하기 위해서이다. 산소 희박을 인간이 알아챌 정도면 더이상 손쓸 수 없는 악화된 상태여서 토끼의 호흡으로 그 경계선이 측정된다. 산소가 모자랄 때 토끼가 먼저 질식하기 때문이다. 시인을 잠수함의 토끼에 비유한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일 것이다. 하나는 문명이나 그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은 본질의 생명을 시의 몫으로 돌려왔던 고전적 해석에 다름 아니고 또 하나는 속죄양의 측면에서이다. 시인이 삶의 높이, 그 척도가 된다는 것은 큰 은총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또한 형벌이기도 하다. 오염된 현실에서 시인은 누구보다 먼저 고통의 제물이 될 것이므로..."

그런 토끼들은 어떤 시를 썼었나? 김종삼의 '서시'이다(학부 1학년때 국문과에 다니던 한 친구가 기숙사 자기방 관물함에 붙여놓은 시여서 특히 인상에 남았던 시이다. 황동규 시인의 의하면 김종삼의 시들은 '잔상의 미학'으로 수렴되는데, 이 시 또한 그러하다).

헬리콥터가 지나가
밭이랑이랑
들꽃들일랑
하늬바람을 일으킨다
상쾌하다
이곳도 전쟁이 스치어갔으리라.

얼마전, 그러니까 지난달 말쯤에 강정의 글에도 언급된 고종석의 '시인공화국 풍경들'(39)에서는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민음사, 1979)를 다루었다(황동규의 '잔상의 미학'은 이 시선집의 해설이다). 고종석은 '정신적 귀족주의자의 세계'로 김종삼 문학을 요약하는데, 그것은 달리 '북치는 소년'의 시구처럼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이다.

-차라리, 김현의 짐작과는 반대로, 김종삼이 추구한 것 자체가 바로 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이 시의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만이 아니라 김종삼의 시세계 전반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으로, 다시 말해 무구한 아름다움으로 반짝인다. 그 아름다움은 무구한 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다. 김종삼의 육체는 남한 땅에 발을 딛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늘 이 땅에서 떨어져 있었다. 이따금 그 마음은 두고 온 북녘 고향 땅을 향했고, 자주 위대한 예술가들의 고향인 유럽 땅을 향했다. 아니, 유럽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 그의 마음은 그 예술가들의 상상된 마음에 들려 거기 갇혀있었다.

-아니, 이 말도 옳지 않다. 그의 마음은 예술의 세계에 갇혀 있으려 애썼으나, 그는 오르페우스가 되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만든 얘기다// 나는 죽어서도/ 나의 직업은 시가 못 된다/ 우주복처럼 월곡(月谷)에 둥둥 떠 있다/ 귀환 시각 미정”(‘올페’ 전문). 김종삼은 시의 세계에서조차 둥둥 떠 있었다. 그러니까 김종삼을 실향민이라고 할 때, 그가 잃어버린 고향은 황해도 은율이 아니었다. 그의 고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본적이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그는 (거의) 단독자였고, 무적자(無籍者)였다. 사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깨닫지 못할 뿐, 단독자와 무적자는 우리 모두의 처지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슈만의 노래도, 조반니 팔레스트리나의 미사곡도 들어보지 못한 독자가 김종삼의 시에 푹 빠져들기는 어렵다. 어쩌면 시인은 그것을 의도했을지도 모르고, 그런 젠체하기는 얄팍한 속물근성이라 비판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 외롭고 가난했던 시인의 속물근성에는 좋은 의미의 댄디즘(당디슴)이, (부르주아의 반의어로서) 진정한 예술가의 정신적 귀족주의가 버무려져 있었다.(*참고로, 김종삼의 생업은 음악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한 '귀족주의'에 상응하는 것이 남들보다 일찍 죽을 토끼들의 운명이다. 해서 시인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태도는 바로 그들을 (잠수함 속) 토끼로 간주하는 것이다. 젊은 바퀴벌레들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갖게 된 시인의 모델은 전통적인 '토끼로서의 시인'과 새로운 세대의 '바퀴벌레로서의 시인'이다. 전자는 가장 먼저 고통의 제물이 되길 감수하는 자들이며, 후자는 지구가 망해도 유일하게 살아남을 자들이다. 이들이 시인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서로 다른 종족들이고 부락민들이다. 장차 공화국의 패권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당신도 나처럼 혹 그런 게 궁금하다면 좀더 오래 살아두어야겠다...  

05. 12. 13.

P.S. 강석경 선생의 글이 에피그라프로 쓰고 있는 것은 에밀 시오랑의 단장이다. 대화체의 이 단장은 이런 내용이다."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나 자신을 견딥니다." 오늘 하루도 남은 시간, 마저 견디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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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10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이 포스트로 오게 돼서 읽었는데요... 여전히 궁금해 하시는 거 맞나요?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세계사)는 1994년초에 나온 진이정(1959-1993)의 유고시집이다. 시인은 그 전해 가을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등졌고, 나는 그해 가을에 그의 시집을 읽고 일기에 몇 마디 독후감을 남겼다. 지난주 책정리, 복사물 정리를 하다가(대부분 갖다버리기 위해) 이젠 파일도 남아있지 않은 그 독후감의 프린트를 발견했다. 글의 말미엔 94. 10. 20.이라고 씌어 있다. 그 독후감의 제목이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의 세계 혹은 허망한 나라'이다. 그 덕분에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10여년 전 기억의 저편이지만, 그날 하루만큼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겠다. 다시, 10년쯤 후에 돌이켜보기 위해서 이 또한 '창고'에 넣어두기로 한다('즐거운 책읽기'로 분류하기엔 내용이 너무 우울하다).

진이정의 유고시집, 아니 그냥 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를 읽는다. 도서관에서 비려온 책이라 오늘 반납해야 한다. 엄정화의 노래 '눈동자'를 들으면서. 생각해보니 유하의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1993)에 삽입된 노래이고(*음악은 신해철이 맡았다), 그 영화를 소개하는, 아니 영화보다는 젊은 감독을 소개하는 무슨 '인간시대' 같은 프로에서 나는 진이정을 보았다(*진이정은 유하의 스승이자 친구였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다. 그가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지난봄이던가 아니면 작년 어느때이다(*작년 어느때이고 사인이 폐결핵인지 영양실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는 뛰어난 시인은 아니다. 몇 사람이 그의 유고 특집까지 만들어 책을 냈지만 시에서만큼은 대단하지 않다. 가장 쉬운 말로 하면 절제되어 있지 않고, 가장 뻔한 말로 하면 시적 언어의 밀도(재미)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걸 요설적이라고도 하고 너무 풀어져 있다고도 한다. 건성으로 읽은 바에 기대면 기지촌에서의 어린시절과 불행한 가족사 따위에 그는 너무 억눌려 있다. 시적 소재로서 그가 다만 그러한 기억들을 가져온 것이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상상력의 비약이랄까 자유 같은 것이 그에게는 위축돼 있다. 그래서 너무도 직설적으로 허무하다고 말한다: "아트만이 무너진 마당에/ 인생이 꿈이란 건, 그 얼마나 뻔한 비유인가/ 이제부터 나의 우파니샤드는/ 거꾸로 선 현실이다"('아트만의 나날들') 그 '거꾸로 선 현실'이란 아마도 시일 것이며 그것은 그의 말대로 '허망한 나라'(!)이다. 그는 그 '허망한 나라'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의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연작 10편을 차례로 읽는다. 읽으면서 나의 눈길을 붙잡는 부분들만을 옮기겠다. 먼저, '거꾸로 선 꿈의 세상'이 시의 세상이라는 걸 밝히고 있는 부분: "나는 운수를 믿는다 바다 없이 항해할 때처럼/ 눈물도 없이 운다 울었다/ 너무 팔아먹을 것이 없었으므로/ 거꾸로 선 꿈의 세상에서, 가끔 나는 바로 선다/ 깜빡 꿈이란 걸 잊은 채 말이다/ 허나 고런 때래야,/ 겨우 시가 되는 것이다"('거꾸로 1')

시인은 제대로 된 세상에서는 팔아먹을 것이 없다. 팔아먹을 것이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존능력이 결핍되어 있다는 걸 말한다. 이 결핍을 그는 꿈으로 보충하지 않는다. 결핍을 보충하는 꿈이란, 나도 언젠가는 남보란 듯이 폼잡고 살 때가 오리라는 믿음을 혹은 갈망을 바탕에 깔고 있는 꿈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꿈조차 포기한다. 그는 그 꿈을 거꾸로 세운다. 그리하여 그 꿈이 가리키는 방향은 이젠, 보다 나은 현실이 아니라 그저 시이다. 시일 따름이다. 그것은 겨우! (너무 팔아먹을 것이 없어서 꿈을 품팔이하려는 시인에게, 그러나 시는, 우리의 잘난 시는 얼마나 냉정한 것이랴!)

그의 인생: "미안해, 나는 성욕을 딱 잃고 말았다/ 왜 사람들은 날 걱정할까/ 순두부처럼 살고 싶었다/ (...)/ 몽정의 나날이여, 꿈의 정액이여: 어디 마땅한 질을 찾아가거라."('거꾸로 2') 거꾸로 선 세상의 시민이 되기로 작정한 시인에게 현실에서의 성욕이란 생존에의 욕구 만큼이나 부질없다. '순대 먹기 위해서' 살아가는 현실이 싫고, '똥폼과 장난 속에서 교살되는' 현실의 예술'(=제대로 된 꿈)이 싫다. 그는 그런 일들에 속아서 결국 그의 인생이 '소위 보람있다는 일로 낭비되었다'는 걸 이제 누구보다도 잘 간파한다. 그는 그래서 투덜거린다: "진짜 연애, 진짜 아이, 진짜 인생에서 나는 멀리 떨어져 있다/ 나는 구호식품에 의존해 있으므로, 시인이다."('거꾸로 4')

그는 환멸과 자조에 의지하여 삶을 버틴다. 아니 그런 삶을, 그러나 그는 진짜 시인의 삶이라고 우긴다. 자신의 무지와 무기력을 변명하면서: "나, 걸어가리라, 허망을 딛고, 낯선 인연을 따라서/ 백과사전도 없이, 나는 지식인 노릇을 한다/ 나를 가르친 건 휘중당의 담쟁이 덩쿨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참기만 해왔어/ 그게 인생이란다; 개 같은/ 나의 무지와 무기력에 혐오를 느끼는 분들께,/ 나는 변하지 않으렵니다"('거꾸로 5') 그리고 그는 정말로 변하지 않았다! "엇박으로 돌아가고 있"는 그의 인생. 그는 그저 대책 없는 횡설수설로 시간을 죽인다. 그리고 자주 운다: "눈물의 성분엔 미량이나마 진리가 들어 있는 듯해/ 울고 나면, 천국에 들어온 느낌"(그의 죽음이 몇 사람을 천국에 보냈는지?)

그의 종말: "음식이 들어가면, 내 몸이 화를 낸다/ 사실은 마음의 분노이리라". 의학적으로는 신경성 거식증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자해(自害)를 시인은 묵인한다. 이제 그의 인생이 바야흐로 종말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마음의 세 허씨("허전해, 허무해, 허망해")가 한몫 거든다(*5공때 잘나갔던 '쓰리 허'를 떠올리게 한다. '허전해, 허무해, 허망해'는 '허문도, 허삼수, 허화평'들이 만든 세상의 이면, 즉 '그늘'이기도 하다). 왜 세상이, 삶이 허전하고 허무하고 허망한가? 그것은 자존심의 근거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것이 나의 유일한 자존심이었는데/ 이제는 믿을 게 없다"('거꾸로 9') 대개의 자존심이 그러하듯 시인의 자존심도 제법 유치한 것이지만, 그러나 인생이란 게 너무 자주 유치해지곤 하니까 시인을 탓할 수는 없다. 어쨌든 그는 자진하여 윤회의 길을 떠났다: "날 말려줘, 날 때려줘, 날 눕혀줘"라고 시인은 애원했지만 아무도 귀답아 들어주지 않았다. 세상 또한 시에 못지 않게 냉정한 것이니까...

진이정의 시 읽기를 끝낸다. 59년생. 34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들은 건성으로나마 읽으며 뒤늦게 느껴지는 것은, 시인이 지닌 여성 콤플렉스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정결 콤플렉스. 그의 시이에는 타락한 여성의 이미지가 빈번하게 나온다. '포르노의 진리' 앞에서 위축된 시인은 장가를 가라는 주위(특히 어머니)의 요구에 "저 이제 여자의 맛을 잃었나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도피'는 그 안에 뜨거운 갈망을 숨기고 있는 것이 예사이다. 그의 비논리적인/요설적인 연상들에 의거한 시들은 한편으로 이러한 갈망을 드러내면서 감추는 전략일지도 모른다. 이런 방향에서 그를 읽은 글이 있나 찾아봐야겠다.(*아래 사진은 플라스틱 포르노 전시회를 알리는 러시아의 광고 포스터)

기억에, 이후에 내가 그런 글을 더 찾아본 것 같지는 않다. 이 글을 옮겨두기 위해 자료를 검색하다가 알게 된 건데, 올해 부산일보의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이 진이정론이다. '실존적 헤르메스의 탄생: 경계의 시학 -진이정의 시세계'(박대현). "모리스 블랑쇼가 예술가를 일컬어 '죽음을 자기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라고 했을 때,예술가는 죽음을 '낯선' 것이 아닌 '고유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죽음을 통해 삶을 사는 자로서의 질적 전환을 이룬 존재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블량쇼는 문학에서 죽음이란 주제의 문지기이다), 나의 독후감보다는 '본격적인' 이 평문의 결론만을 여기에 옮겨둔다. 혹 얻을 것 없는 나의 글에 허기진 독자들이 계실 듯하므로(괄호안의 숫자는 시집의 쪽수일 것이다).


진이정은 해탈욕망의 경계에서 다시 실존의 그리움을 뿌리치지 못하고,'옛 장의사 자리엔 무지개 룸살롱이 들어와 있'고,'잠자는 죽음의 코털을 건드린 줄도 모르는'(105) 자본주의 문명의 속악한 진창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 진창이란 '짜장면 젓는 폼만 보아도 양갈보 똥갈보를 용케 구분하던 양민들'(115)과 '일용할 봉지쌀과 함께 퇴근하던 외삼촌'이 살았으며,'외국군대에게 언제까지 의지해야 하'(66)고 '민족반역자들이 출세하'(78)는,'개같은/ 나의 무지와 무기력에 혐오를 느'(78)낄 수밖에 없는 '식민지' 현실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거지가 강남 중산층보단 행복'(44)할 만큼 비참한 현실이다.

죽음을 한껏 체험한 자에게 진창의 현실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죽음으로 인한 실존의식과 초월(해탈)의 욕망은 현실에 대한 무관심으로 귀착되는 것일까? 그러기엔 진이정의 사회과학적 상상력은 그의 실존적 상상력 속에서 너무나 치열하게 살아 숨쉬고 있으며,그 자신을 생생한 현실의 환부 한가운데 서 있게 한다.

데뷔작 '일터에서 보낸 편지'(주:진이정은 '민중시대의 문학적 실천'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이 사실은 진이정이 해탈이라는 관념의 세계를 처음부터 지향했던 것이 아니라,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개혁과 구원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죽음과 맞물려 현실과 해탈이 뒤얽히는 실존적 상상력이라는 독특한 시세계를 형성하였음을 보여준다)에서 알 수 있듯이, 진이정의 시세계는 현실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출발하여 육체적인 유한성에서 비롯된 실존적 자각과 해탈의 관념까지 아우르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가 관념적으로 흘렀다는 비판적 논의보다는 보다 폭넓은 세계관으로 확대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와 죽음,그리고 근원에의 절망적인 탐구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세계는 관념성을 극복하고 시적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해탈의 상상력과 죽음의 감수성을 치열하게 보여준 진이정이지만,그가 지닌 시세계의 근저에는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자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단전호흡은 우리 사장님의/비술입니다/할딱거리면서/간신히 횡경막을 위아래로 오르내리는/저희들의 숨쉬기와는 질적으로 다르지요/지난번 조회시간에 사장님은/고맙게도 자신의 호흡법을/저희들에게 소개를 했는데요/(…중략…)/그 때부터 우린 감히 사장님과 마찬가지로/단전호흡을 시작했는데요/우리 공장에 있던 분진,카바이트,납,소음,악취가/어느새 기가 되어/이제 우리들의 단전 속으로 모두 들어와 있고/언젠가 심부름 가는 길에 보았던 사장님 댁의/안뜰같이/세상은 다시 청정해진 것처럼 우리들의 눈에는 비쳤답니다 안녕('일터에서 온 편지' 중,<실천문학>, 1987)

단전호흡을 매개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선명한 계급적 대립구도를 보여주는 위 시에서 진이정이 등단 초기에 가지고 있었던 시적 세계관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의 나머지 데뷔작 '사슴목장에서 온 편지''무허가 시장''상도동 무당집에서'에서도 노동자가 시적 화자로 등장하거나 시의 제재로 쓰이고 있다. 죽음이 그의 육체에 스며들기 전,그는 민중 문학적 실천을 통해 사회변혁과 개조를 이루어 내고자 하는 민중시인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가 병들어 가면서,개조되어야 할 이 현실은 점점 추억의 공간으로 전화된다. 죽음과 가까워질수록 이 생생한 현실은 추억이 되고 마는 것이다. 폐질환으로 인해 죽음을 서서히 확신하던 그는 '어둡고 초라한 이국의 병사들 틈에서'(19)에서 '딱딱한 미제 사탕을 입에 물고 예배당을 두리번거리던'(20) '유년의 기지촌'(18)을 추억한다.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현실이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생하게 되살아나며,더 나아가 '아아 이 몸은 그 진창의 아들일 터이니'(115)라고 절규한다. 자신의 다가오는 죽음으로 인해 해탈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했던 그가 다시 되돌아보는 이 현실의 추억은 그를 '감전'(57)되게 한다.

그의 추억은 너무 생생하다. 너무 생생해서 '악몽이다'. '크레용의 햇님이 고향을 북북 문대'(17)던 진창 속의 연꽃 같은 어린 시절까지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추억실조'(16)에 걸려 있다고 엄살을 떠는 걸까? 그의 추억은 그의 사회과학적 상상력 속에서는 더 이상 아름답지 못한 '진창',죽은 추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추억 다오/나는 추억 거지/나는 추억 부랑자'(17)라고 절규한다.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고 말했던 기형도나 '나는 사라진다/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라는 종시를 남겼던 박정만과는 달리,해탈의 관념에서 다시 현실의 '진창'으로 되돌아온 그는 '남자인 희망의 입 속으로 혀를 들이'밀고 '희망을 아직 그녀라고 부르'는 '희망의 호모'(51)가 되어 '슬픔의 화폐개혁'(36)을 꿈꾼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지만,그의 죽음조차 그 꿈을 걷어 들일 수 없었다.

눈물도 없이 나는 운다 울었다/너무 팔아먹을 것이 없었으므로/거꾸로 선 꿈의 세상에서, 가끔 나는 바로 선다/깜빡 꿈이란 걸 잊은 채 말이다/허나 고런 때래야,/겨우 시가 되는 것이다('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1' 중)

이미 죽어버린 그는 '눈물도 없이' 운다. 살아생전 이미 죽음에 깊숙이 침잠해 버린 그의 어조는 죽음 이후의 생에 대해서 말하는 듯하다. '거꾸로 선 꿈의 세상'이란 이미 죽어버린 그가 꿈꾸는 이 세상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깜빡 꿈이란 걸 잊은 채') 가끔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가끔 나는 바로 선다') 그런 때라야,겨우 시가 되는 것! 죽음을 체험한 자만이 이 세상을 제대로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전언! 이 전언은 그의 다른 시구를 통해서도 암시되고 있다.

나는 건넌다,다리는 곧 없어질 터이다/사라진 다리로 돌아올 테다/그림자 다리를 건너 빛의 나무에 오르겠네('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8' 중)

삶 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계의 신이지만,이미 죽음을 체험한 '실존적' 헤르메스의 모습으로 그는 돌아온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면서 이 세계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진이정은 헤르메스를 닮았다. 하지만,그는 속악하고 추악한 이 현실을 이해할 수는 없으되 버릴 수 없는 실패한 헤르메스이며,삶의 경계를 넘어 '영원'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한 실존적 헤르메스다. 그는 실존의 피가 뜨겁게 살아 숨쉬는 현실의 우리에게,'살아있던' 그가 듣고 싶어 했던 '시인의 목소리',즉 '이미 저승에 가버린 시인들의 목소리'(51)를 이미 '죽어버린' 그가 들려준다. 그리고 '그림자 다리를 건너 빛의 나무에 오르'며 비로소 삶과 죽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죽었다. 하지만,'구토를 걱정할' 만큼 '시인의 기침은 너무 상투적이'고,'기계로 쓴 시를 읽는 사람들,뜬소문처럼 우주에 떠 있'(70)는 삭막한 시대이기에 '거꾸로 선 꿈' 속을 헤매는 그의 목소리는 우리의 귓전을 내내 울릴 것이다. 다만,유하의 말대로 '이 추억의 저녁을 지나,마침내 울음이 나를 버릴 때,/세상의 병을 다 앓고 난 마음이/내 안의 그대를 영영 데려'(유하 '상수리나무숲에서')간다면,우리는 더 이상 '다시 인생이라는 중고시장에서 마치 새것처럼'(19) 인생을 앓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죽은 시인의 전언은 무섭다. 진이정이 남긴 시편들은 무섭고 눈물겹다. 그의 죽음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오랜 공명을 가지고 폐부를 울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사소한 그림자 하나하나에도 '꽃이라고 별이라고 그대라고 잎이라고 눈이라고 풀씨라고'(14)라고 명명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진이정의 시편들은 그가 가진 이 세계의 눈물겨운 사랑이 어떤 것이었나를 보여준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검은 강물에 서서히 가라앉는 자만이 토해 낼 수 있는 육성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가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의 탄생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진이정이 남긴 시편들이 (무섭지는 않지만) 눈물겹다는 데 동의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가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을 진이정과 비슷한 연배이면서 조금 먼저 보여준 이가 그보다 몇 해 전에 세상을 뜬 기형도이다. 이젠 나보다 한참(?) '젊은' 시인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05.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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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의 번역 트렌드(인문학)에 이어지는 글이다. 역시나 12월 02일자 교수신문에 게재된 이은혜 기자의 기사를 옮겨놓고 몇 마디 보태도록 하겠다.  

 

 

 

 

-자연과학은 각 분과뿐 아니라 과학철학도 포함하는 매우 방대한 영역이지만, 몇몇 이론들로 편중돼 트렌드를 이루고 있다. 우선 국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이는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다. 올해에만 <조상 이야기>(이한음 옮김, 까치글방), <에덴의 강>(이용철 옮김, 사이언스북스), <악마의 사도>(이한음 옮김, 바다) 등 세 권이 출간됐다. <이기적 유전자> 이후 계속되는 ‘도킨스 붐’이라 할 수 있다. 같은 계열로 <인간본성에 대하여>의 저자 에드워드 윌슨과 <빈 서판>의 저자 스티븐 핀커가 있다. 윌슨 역시 올해 <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최재천 외 옮김, 바다)와 <통섭>(최재천 외 옮김, 사이언스북스)이 번역됐는데, 이들 모두는 ‘인간의 사고나 행동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분야 역시 전공자들이 부지런히 발벗고 나선 탓에 널리 읽히고 있었다.

도킨스나 윌슨의 책들은 나 자신도 즐겨 읽으니 그들의 책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게 전혀 유감일 리는 없다. 하지만, 도킨스나 윌슨이 '유전자 결정론자'로 지목되는 것은 유감이다(왓슨이라면 모를까). 기자의 관심분야의 인문학(특히 종교학) 쪽이어서 다소 편향된 의견을 제시한 게 아닌가 싶다(그러니 우리는 좀더 계몽될 필요가 있다!) 이전에 언급한 바 있지만, <에덴의 강>은 이전에 출간된 것이 재출간된 것이니까 올해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번역자는 이한음, 최재천 등이다. 특히 최재천 교수는 도정일 교수와 <대화>(휴머니스트)도 책으로 펴냈으니 그 부지런함이 더욱 돋보인다(이 책은 연말에 내가 꼽꼬자 하는 '올해의 책'의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지난 주말에 <대화>를 좀 읽으며 떠올린 책은 존 브로크맨이 기획한 <제3의 문화>(대영사, 1996)이다. 23명의 저명한 과학자 글쟁이들이 참여하여 C. P. 스노우의 <두 문화>(민음사, 1996; 사이언스북스, 2001)에 (게으론 인문학자들과는 달리) 자연과학자 23명이 적극적으로 화답하고 있는 모양새를 과시하고 있는 책이다(내용은 아주 훌륭하지만 만듦새는 미적 감각을 결여하고 있는 좀 부실한 책이다. 재출간되었으면 싶다. 편자의 말대로 임의적이긴 하나 23명의 책들과 함께).  "<두 문화>는 1959년에 5월 7일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전통적인 연례 리드 강연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사이언스북스판은 "당시 강연 제목은 <두 문화와 과학 혁명>이었다. 이 강연의 내용을 1부로 싣고, 2부는 4년 뒤인 1963년의 시점에서 앞의 강연과 관련하여 그때까지 제출된 논평과 반응, 비판들을 지은이가 직접 정리하고 해명하고 추가한 글을 실었다. 또 마지막 3부에는 90년대의 시점에서 스노우의 강연을 바라본 스테판 콜리니의 해제가 실려 있다."

 

 

 

 

<두 문화>를 나는 오래전에 박영문고판으로 읽었었는데, 줄기세포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시점과 맞물려 한번쯤 다시 들춰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지적 사기>(민음사, 2000)니 '과학의 사기'니 하는 논란의 틈새에서 문제를 원론적으로 재고해보는 일인 듯싶어서이다. <악마의 사도>에서의 도킨스처럼 인문학의 '지적 사기'에 대한 비판에 통쾌해 하는 만큼, 한편으론 <기술, 의학, 윤리>(솔출판사)에서 한스 요나스가 의학/기술의 윤리에 대해 윤리적 반성을 요청하는 만큼, 아니 그보다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이 서로에 대한 이해이고 교양인 듯싶다. 해서, 우리의 뇌는 '원론적으로' 다시 단련될 필요가 있다. 다윈을 읽지 않는 문학도를 나는 신뢰하지 않으며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지 않는 과학도를 나는 (비록 좋아할 수는 있지만) 존경하지 않는다. 전공이 있지 않느냐고? '밥벌이의 지겨움'은 '교양'과 구별되어야 한다('교양'이란 밥먹을 때 서로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는 깜냥을 뜻한다. 먹는 건 도그나 카우도 한다).   

 

 

 


 

-하지만 최근 유독 같은 계열의 이론만 과도하게 소개되는 것 아닌가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이상원 포항공대 교수는 “진화생물학자들과 반대의 입장인 로우즈나 굴드, 르원틴 같은 이들을 함께 접해야만 균형적 입장을 취할 수 있다”라고 조언한다. 로우즈의 저서는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가, 굴드는 <인간에 대한 오해> 등이, 르원틴은  등이 번역돼 나왔다.(*로우즈, 굴드, 르원틴의 책들도 '우려'를 씻어줄 만큼은 출간됐다. 도킨스의 맞수인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만 하더라도 10여 권이 번역/출간돼 있다. 그러니 균형을 잡는 데 별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과학철학 쪽에선 교과서나 다름없는데 올해에야 출간된 것이 이언 해킹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이상원 옮김, 한울)다. 언어철학쪽 저서가 소개된 바는 있지만, 그의 과학철학서가 이제야 빛보게 된 데엔 여러 이유가 있다. 번역을 감당할 이가 적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과학철학 분야가 철학에서 다뤄야 하는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인문학과 자연학과의 거리감 때문에 전문번역가나 또는 한정된 과학철학자들이 소화해야만 한다”는 지적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탓에 해킹의 주요 저서 중 하나인 ‘The Social Construction of What?’도 향후 과제로 남아 있다.(*해킹의 책에 대해서는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나도 소개한 바가 있다. 그의 다른 책들도 물론 언제든 환영이다.) 

 

 

 

 

-해킹 뿐 아니라, 과학철학 쪽에 파이어아벤트나 라카토스 등의 번역도 학문적 중요성에 비해 번역성과는 썩 좋지 않은 편이다. 그래도 라카토스의 경우 지난 2002년 <수학적 발견의 논리>와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이 출간된 반면, 파이어아벤트는 1987년 <방법에의 도전>(Against Method)이 번역된 후 절판됐고 그 이래 역서가 단 한권도 나오고 있지 않는 현실이다. 

라카토스의 주저들은 번역된 듯한데, 더 번역되어야 하는 책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 헝가리 출신의 과학철학자에 대해서는 지난 8월에 이상욱 교수가 한겨레 지면에 소개한 바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흔히 '포퍼와 쿤 사이'로 입장이 규정되는 라카토스(라카토슈)가 '현대과학철학 논쟁'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특별하다(이들의 포지션은 '파이어아벤트--쿤--라카토스--포퍼'로 정리하면 된다). 이상욱 교수에 따르면, "라카토슈는 파이어아벤트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포퍼주의자로 출발했지만 역시 파이어아벤트와 마찬가지로 점차 포퍼의 견해가 지닌 여러 문제점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 지적으로 훨씬 자유분방했던 파이어아벤트는 포퍼와 쿤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길 원했지만, 라카토슈는 쿤을 따라 과학의 역사적인 실제 전개과정에 충실하면서도 포퍼를 따라 여전히 과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견해를 제시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전히 포퍼식의 개인주의적 자유를 강조하면서 쿤보다 훨씬 급진적으로 상대주의 과학관을 밀고나간 파이어아벤트와 죽을 때까지 좋은 맞수이자 친구로 지냈다."

"라카토슈는 파이어아벤트가 런던정경대학에 잠시 머물며 강의할 때 강의실 바로 앞에 위치한 자신의 연구실에서 나와 파이어아벤트에게 난처한 질문을 던져대곤 했고, 두 숙적의 눈부신 토론을 지켜보는 것으로 수업을 대신할 수 있었던 당시 학생들은 너무나 즐거워했다고 한다. 파이어아벤트에 따르면 어느 날 라카토슈가 자신은 과학적 방법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쓰고 파이어아벤트는 왜 쓸모없는지를 써서 함께 묶어 책을 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과학방법론을 위하여 그리고 반대하며(For and Against Scientific Method)>라는 책을 함께 내기로 했다. 그러나 라카토슈가 1974년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파이어아벤트는 결국 자신의 부분만 홀로 출판하게 되고 이 책이 파이어아벤트를 일약 유명하게 만든 <반 과학방법론>이다."

<방법에의 도전>(한겨레, 1987)은 그 <반과학방법론>의 우리말 번역본이다. 방법론적 '무정부주의자'로도 불리지만, 파이어아벤트(1924-1994)에게 보다 적합한 호칭은 누군가의 말대로 '다다이스트'이다. 말년에 쓴 자서전의 제목이 <킬링 타임>인 것도 그답다. 그의 책들이 좀더 소개되었으면 한다. 비록 학부때 사둔 <방법에의 도전>은 아직도 완독하지 않았지만 <킬링 타임>만큼은 단번에 읽어볼 용의가 있다(우리의 시간을 죽이는 데 혹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

 

 

 

 

-가장 유명한 과학철학자로 꼽히는 토머스 쿤 역시 이름값에 비례하는 저술들은 소개되지 않고 있다. 다행히 올해 쿤에 대한 연구서 <토머스 쿤>(웨슬리 샤록 외 지음, 김해진 옮김, 사이언스북스)이 소개됐지만, 저서는 <과학혁명의 구조> 외엔 없다. 최소한 ‘The Essential Tension’, ‘The Road since Structure’ 정도는 번역돼야 한다는 게 학계의 의견이다. 이 외에도 과학 쪽에선 우주에 관한 물리학 저서들이나 아인슈타인과 관련한 책들, 생명윤리에 관한 책들이 활발히 출간됐다.(*그러고 보니 기자가 언급하고 있는 책들이 대부분 과학철학쪽이다. 이건 유사-자연과학 아닌가?! 더불어, '학계의 의견'은 어느 학계의 의견인지? 번역을 담당해야 할 당사자들 같은데...) 이어지는 건 사회과학 분야이다.

-사회과학 쪽 번역상황은 시의성과 관련해 팔리는 책 중심으로 과도하게 시장이 형성된다거나, 이데올로기적 지형 내에서 이뤄지는 번역들, 나아가 몇몇 출판사들이 저항담론 위주로 출판을 집중하고 있는 까닭에 그리 풍부하지 않은 출판상황에서 번역구도는 단순하게 그려지는 편이다. 특히 공급이 수요를 결정짓는 게 아니라, 수요가 공급을 결정짓는 상황이라, “학문의 저변을 확대시키기 위한 필독서 수준의 번역보다는 일부 인기 사상가들의 번역이 과도하게 치중돼 번역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게 몇몇 전공자들의 지적이다.

 

 

 

 

-그중 최근에 가장 많이 빛을 봤던 게 촘스키의 저서들이다. 올해엔 <지식인의 책무>(강주헌 옮김, 황소걸음 )와 <중동의 평화에 중동은 없다>(송은경 옮김, 북폴리오) 등 두 권이 출간됐지만, 지난해 촘스키에 대한 번역서가 7권 나왔던 걸 보면 ‘촘스키 시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이상돈 중앙대 교수는 한 신문칼럼에서 “촘스키는 병적인 반미주의자로 미국의 진보진영도 멀리하고 있는 인물”이라며 한국 출판계의 기이함(?)을 지적한 바 있다.(*'두 권'이 나왔다는 건 이달초까지의 얘기이고, 12월에도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3권이 한꺼번에 나왔기 때문에, '촘스키의 시대'는 여전하다고 해야겠다. 비록 '미국의 진보진영'도 멀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전 네티즌들이 뽑은 '세계의 지성'에도 1위에 오른 걸 보면, 그의 '영향력'은 인정해줘야겠다. '촘스키의 시대'와 맞물려 있는 것이 국내에서는 '강준만의 시대'이다. 그는 올해도 6권 이상의 책을 펴냈다.

 

 

 

 

-물론 이 역시 동일선상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에서 나온 발언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국내 출판계에서 저항담론의 출판이 우세한 건 사실이다. 그중 몇몇을 살펴보면, 네그리의 <혁명의 만회>(영광 옮김, 갈무리), 하워드 진의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윤길순 옮김, 당대), 마이클 만의 <분별없는 제국>(이규성 옮김, 심산)이 출간됐다. 또 <새로운 제국의 도전>(레오 파닛치 지음, 진보저널읽기모임 옮김, 한울)이나 아룬다티 로이의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정병선 옮김, 시울) 등도 마찬가지 위치에 놓여질 것이다. 

이 중 하워드 진의 책은 모노드라마이다. 드라마를 써도 그의 책은 '사회과학'으로 분류되는 것!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반미 지식인으로 꼽히는 하워드 진 관한 글로 올해 내가 흥미롭게 읽은 건 그의 이 아니라 대담이다. 지난 11월 문화일보 지면에 실린 것인데, 대담자는 'Global Talk'란을 연재하고 있는 이미숙 워싱턴 특파원이다(이 연재 때문에 나는 다른 특파원들이 얼마나 게으른가를 알 수 있었다. 동료들에게 원망을 듣지는 않을는지).

 

 

 

 

국내에 자서전 <다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포함해 여러 권의 책들이 번역/소개돼 있는 이 걸출한 좌파 지식인의 대담에서 흥미로운 대목 몇 가지. 먼저 83세인 그의 건강 비결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나는 기본적으로 기분좋게 살아왔다. 많이 웃고, 인생을 즐겼다.”고 답한다. 조금 더 설명을 들어보자.

 ―당신이 그간 써온 글과 책은 하나같이 진지하고, 무거운 것들 인데, 인생을 즐겁게 살았다니 믿기지 않는다.

“내가 인생을 진지하게 살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인생은 원 래 진지한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즐겨야한다. 친구와 세계문제에 대해 대화하고, 많이 웃고, 젊은이들의 생각을 접하고 함께 생 활하는 것, 이것이 내가 말하는 인생의 즐거움이다.”

―건강유지를 위해 특별히 선호하는 음식이나 운동이 있는가.

“토마토와 바나나 등 과일을 많이 먹고, 굴, 새우, 조개, 그리고 파스타를 아주 좋아한다. 테니스를 오랫동안 해왔는데, 요즘엔 산책으로 바꿨다.” 그는 음식얘기를 하다가 빼먹은 게 있다는 듯이 ‘참’ 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좋은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면서 부인 로즐린과 60년 이상 함께 살아왔기에 오늘의 자신이 있을 수 있었다고 은근히 부인자랑을 했다. 그는 22세가 되던 지난 19 44년 결혼했는데, 당시 로즐린은 21세였다. 두 사람은 남매를 낳 아 키우며 61년째 함께 살고있다.(*그러니까 오래 '운동'을 하려면 굴, 새우 등을 많이 먹고 배우자와 해로해야 한다는 것.)

―한국의 사회운동가들이나 지식인들은 지나치게 무겁게 삶을 접근하는데.

“물론 정의를 위한 싸움은 진지하게 해야하지만, 그런 와중에서 도 늘 인생을 즐겨야한다. 만약 삶의 즐거움을 도외시한채 사회 운동만 하려든다면 그런 인생은 너무 무미건조한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할 경우 젊은이들을 새롭게 사회운동에 끌어들일 수 없다.”

 ―진지함과 즐거움을 어느정도로 조화시켜야하나?

“누구나 100% 진지하게 살수는 없다. 굳이 수량화하라면, 9대 1 정도로 진지함과 즐거움을 배합해야하지 않을까.”

조금 건너뛰어서 한국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그에게 기자는 한국에서의 반미정서에 관해 질문했다.

―미국의 진보주의 역사가로서, 한국의 반미정서를 어떻게 보는 가.

“한국 젊은세대의 반미감정에 대해 정서적으로 공감한다. 그런 데 알아둬야할 것은 미국정부에 대한 비판과 미국사람들 일반에 대한 비판을 혼동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미국정부를 변화시키기 위해 싸우고있다. 반미정서를 가진 한국 젊은이들은 이런 건강한 미국인들과 연대해 함께 싸웠으면 좋겠 다.”

―한국에서는 당신의 책들이 반미주의 교과서로 읽히는데.

“한국 젊은이들에게 내 책이 반미주의 도구로 쓰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내 생각을 잘못 읽는 것이다. 나는 미국을 좀 더 살기좋은 나라로 바꾸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지 미국자체를 부 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반미주의와 친북적 사고의 친화력이 아주 강하다.

“한국의 반미정서는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북한을 우호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북한은 사회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는 부패한 이념의 관료독재 국가일 뿐이다. 국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여행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나라가 어떻게 사회주의국가인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주고 싶은 충고는?

“세계 역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보고 자신의 생각을 정립해야 한 다. 이게 내가 평생 젊은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쳐온 이유이고, 미 국의 부끄러운 과거사에 대해 책을 써온 이유다. 한국의 젊은이 들에게 정말 말하고 싶다. 반미시위를 하는 대신 북한 인권개선을 위해 싸우라고.”(*'북한의 인권개선'이란...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인 하워드 진도 한국식 기준에 따르면 '수구우파' 정도 되겠다. '북한인권' 문제만을 잣대로 한다면 말이다. 한국의 좌파는 세계 최강의 좌파인가?) 다시 번역 트렌드로 넘어간다.

 

 

 

 

-물론 보수주의 쪽 견해도 반짝 기운을 입었다. 잘 팔리는 사상가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강한 국가의 조건>(안진환 옮김, 황금가지)뿐만 아니라 <더 라이트 네이션>(존 미클레스웨이트 외 지음, 박진 옮김, 물푸레) 등과 같이 네오콘의 붐은 지난해에 이어 좀 남아 있다.(*네오콘 관련 역서로 <미국의 힘>을 추가해놓는다.)

 

 

 


-그래도 이론쪽에서도 역시 틈을 두지 않고 출간되는 건 사회주의나 노동계급에 관한 번역이다. 올해 이들 관련 번역서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존 몰리뉴 지음, 최일붕 옮김, 책갈피), <소련의 역사와 계급이론>(스티븐 레스닉 외 지음, 신조영 옮김, 이후), <노동의 힘>(비버리 실버 지음, 백승욱 외 옮김, 그린비) 이 출간됐다.(*모처럼 소장하고 있는 책 두 권이 나와서 반갑다. <소련의 역사와 계급이론>에 대해선 나도 소개한 적이 있다.)

-보수건 진보건 사회과학계열은 시장논리와 이론적 입장이 상당한 작용을 하는 곳이다. 이에 대해 한 정치학과 교수는 “제3세계적 취향을 만족시켜준다는 차원에서 계속해서 저항담론 쪽만 번역이 되고 있는데, 일반 학생들은 이런 비주류적 사상들을 주류로 오해할 수 있다”라며 비판한다. 이기홍 강원대 교수도 “촘스키를 어떻게 해석하건 간에 그가 계속 번역되는 이유는 우리시장에서 팔리기 때문이다”라면서, “한국의 시장은 기묘하게 짜여져 있다. 제도적 장치가 없다면 사회과학의 기반을 다지는 게 아닌 아주 기형적인 형태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라고 강조한다. 이충훈 뉴스쿨대 박사과정생의 의견도 귀담아들을만하다. 이 씨는 “사회과학에서 번역은 이슈 중심이어야 하지만, 이것은 시류 편승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라면서 “예전에 국가의 검열을 받았던 것처럼 지금은 시장의 검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라고 꼬집는다.

-이씨는 ‘이슈중심의 번역’이란 “시장 상황에의 종속이 아니라 사회과학적 문제에 대한 공적 여론에 구성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라면서 이를테면 시장의 시선 때문에 번역되지 않는 예로서 젱하스의 ‘The Clash within Civilizations’나 식민지시대 과거청산에 실패했을 때 사회가 어떤 파국을 맞을 수 있는가를 르완다 학살을 통해 탁절하게 분석한 맘다니의 ‘When Victims become Killers’ 역시 그런 맥락에서 우리 사회에서 번역되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고 덧붙인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근 방법론 쪽에서 로이 바스카의 <초월적 실재론과 과학>, <비판적 자연주의와 사회과학>(이기홍 옮김, 한울) 등이 나왔고, 정치사상 쪽에서 조지 세이빈 등 옛날의 정치사상 개론서와는 좀 달리 씌어진 <정치사상의 이해 I>(폴 슈마커 외 지음, 양길현 옮김, 오름) 등이 나왔다.

<초월적 실재론과 과학>의 저자는 (역시나 저명한 실재론자인) '로이 바스카'가 아니라 '마가렛 아처'이다(기자의 착오인 듯). 정치사상 관련서로는 스티븐 엔릭 브론너의 <현대 정치와 사상>(원제는 Ideas in action)도 올해 나온 책이다. 정치사상과 정치철학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이상이 올 2005년의 번역 트렌드였다고 한다. 비교적 덜 관심을 갖고 있는 사회과학 분야의 책들을 일별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역시나 마음을 움직이는 책은 없군!).

05. 12. 12.

 

 

 

 

P.S. 날짜를 적어놓고 보니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 지 26년째 되는 날이군.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세월 같지도 않은 한 세월을 살아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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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5-12-12 14:03   좋아요 0 | URL
로쟈님, 이 글 제 서재에 퍼가도 될는지요/

로쟈 2005-12-12 18:29   좋아요 0 | URL
완결된 후에는 언제든지 무방합니다.^^

가을산 2005-12-12 23:28   좋아요 0 | URL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nemuko 2005-12-13 10:33   좋아요 0 | URL
저도 좀 퍼가겠습니다..

이네파벨 2005-12-13 13:29   좋아요 0 | URL
퍼갔습니다. 감사...감사...

겨우살이 2005-12-16 15:23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morris 2006-01-02 06:59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참 정리 잘 하시네요. 부럽네요(?) 새해 복많이~~

로쟈 2006-01-02 11:53   좋아요 0 | URL
morris님도 복많이 받으시길. 다른 분이 정리한 걸 저는 퍼왔을 뿐입니다(그냥 퍼오기 뭐해서 몇 자 덧붙이며)...
 

한 해를 정리하는 12월에 들어서 교수신문(www.kyosu.net)에서는 '학문분야별 번역트렌드 점검'이라는 기획특집기사를 냈다. 인문학과 자연/사회과학으로 나누어 두 차례 기사가 게재되었는데, 시의적절한 내용이어서 옮겨놓고 몇 마디 보태본다. 먼저 옮기는 '인문학' 트렌드는 이은혜 기자의 12월 02일자 기사이다.   

 

 

 

 

-서양철학 쪽의 올 한해 번역물들을 훑어보면, 그간 해당전공자들이 전집, 선집번역을 비롯 한 사상가의 사상을 모두 번역해내겠다는 의지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작업들이 많았다. ‘니체 전집’의 완간(2, 6, 9, 12, 19권은 올해 출간)이 대표적인 예이고, 하이데거의 번역(<이정표>, <사유란 무엇인가>)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베르그손 저서도 두권(<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번역됐고 헤겔(<정신현상학 1~2>, <청년헤겔의 신학론집>) 역시 시장에서 인기가 별로 없는 것과는 별도로 꾸준히 번역되는 중이며, 칸트(<윤리형이상학 정초> 외)도 마찬가지로 전공자들이 나서서 완성된 그림을 위해 내달리는 중이다.

이 원전 번역서들의 특징은 기사에서의 지적대로 '해당전공자'들의 노작이라는 점이다. 칸트, 헤겔, 니체, 하이데거, 베르그손(베르그송) 등 사유의 거장들의 주저들이 계속 한국어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추세는 말할 것도 없이 반가운 일이다. 다만, <정신현상학>의 경우, 노학자가 세 차례나 개정 번역서를 내는 동안에 젊은 전공자들이 한번도 손을 거들지 못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면서 의아한 일이다. 우리는 아직 우리 세대의 정신현상학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기에 그러하다(가질 필요가 없는 것일까?).   

 

 

 

 

-그런 가운데, 최근 붐을 이루려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 발터 벤야민의 저술 번역이다. 올해 드디어 그의 주저인 <아케이드 프로젝트>(조형준 옮김, 새물결) 1차분 2권이 번역되어 나온 것. 벤야민은 1980년대 초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소개되면서 국내에서 연구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현대사회와 예술> 등 몇 권의 역서가 출간된 바 있다. 하지만 중역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얼마 후 이러한 번역작업도 뚝 끊겼다. 이후 벤야민의 저서보다는 2차 연구서들이 소개되기에 바빴다. 즉 국내에선 미국을 통해 들어온 벤야민을 맛봐야 했으며, 모더니티 담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에도 신비스럽고 난해한 이론가로 취급됐었다. 그러던 차에 올해 벤야민이 “나의 투쟁, 나의 모든 사상의 무대이다”라고 말한 13년간의 역작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나온 것. 더불어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김남시 옮김, 그린비)와 2차 연구서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효형)도 출간됐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번역의 質이다. 사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번역자는 벤야민 전공자가 아니며, 영어전공자라는 점에서 연구자들의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하다. “영어중역의 혐의가 제기되며 향후 번역 논쟁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라는 게 몇몇 전공자들 견해다. 어쨌든 논쟁의 불씨를 안고 있는 가운데, 벤야민의 다른 주 저서들의 번역에 전공자들의 박차가 가해지고 있다. 현재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 윤미애 중앙대 강사, 김영옥 한국여성개발원 연구원이 뜻을 모아 주어캄프판 10권을 출간계획하고 있는데, 늦어도 내년 1월 내에 <일방통행로>와 <사유이미지> 등 3권이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될 예정이라 한다. 이들은 아포리즘에 관한 벤야민의 주저로 파격적인 실험을 보여주고 있고 국내엔 처음 소개된다. 앞으로 1년에 3권씩 벤야민 번역서가 출간될 계획이다. 

벤야민에 대해서라면 한 해 동안 남못지 않게 주절거린 터여서 군말을 덧붙이기가 쑥쓰럽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경우 아직 나머지 절반이 출간되지 않았지만 올해의 '사건'이라고 할 만한 번역이다. 중역본 논란은 전공자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일 텐데(원전역이라고 해서 무조건 '질'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내년에 출간예정이라는 벤야민 전집에 기대를 걸어본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건 번역의 문제점을 제기한 '전공자'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번역이 그만한 수준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영어를 직접 옮길 게 아니라 독역본을 중역했어야 했을까?).  


 

 

  

-고대철학 부문에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번역 역시 국내 학계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애초에 플라톤전집을 번역하려고 모였던 정암학당 멤버들이 우선 단편선집부터 선보인 것. 워낙 번역이 쉽지 않은 분야임에도 김재홍 서울대철학사상연구소 연구원 등 3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 원전번역을 진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2006년 학술진흥재단 번역과제로 김남두 서울대 교수가 플라톤의 마지막 대화편 <법률(Nomoi)편>을, 조대호 연세대 교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맡게 됐다. 하지만 몇몇 아쉬움을 나타내는 목소리도 있다.

-김주일 성균관대 강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피지카(Physica)>도 중요 저작인데 아직 번역서가 없으며, <정치학>의 재번역이 나오지 않는 것도 아쉽다”라고 말한다. 롱 앤 새들리(Long & Sedley)의 것도 “교양적 수준’에서 반드시 번역되어야 할 책들”이라는 의견들이 제기된다. 이들 역시 헬레니즘 철학을 위한 증언과 단편 모음들인데, 유럽에는 포켓판으로 널리 공급되고 있다는 것. 그 외 장 볼락(Jean Bollack)의 엠페도클레스 단편 모음 및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에 대한 개괄서인 <엠페도클레스(Empedocle 1~3)> 역시 “번역됐으면” 하는 저서로 꼽히기도 한다. 어쨌든 현재 플라톤 전집조차 완간되지 못한 서양고대철학계의 부끄러운 현실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플라톤의 <국가>만 십 수종 번역된 데서 알 수 있듯이 특정 인기종목에만 번역이 편중된 탓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조대호 교수의 <형이상학> 번역은 작년에 나온 발췌역을 가리키는 것인가? 한가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연초에 나온 <범주론/명제론>(이제이북스)이다. 어쨌거나 서양 고대철학 분야에서도 전공자들이 분발하고 있다는 소식이니 고무적이다. 현재 나와 있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나 <정치학>을 업그레드한 번역서의 등장은 나 또한 고대하고 있고. 더불어 문학 전공자로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또한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 입문서로 추천할 만한 만화책이 최근에 출간됐다. 루퍼트 우드핀의 <아리스토텔레스>(김영사). 이 역시 전공자의 번역이므로 믿을 만하겠다.  

 

 

 

 

-들뢰즈 서거 10주년을 맞아 올해 들뢰즈 관련 번역도 화려했다. 저서로는 <중첩>(허희정 옮김, 동문선), <비물질노동과 다중>(서창현 외 옮김, 갈무리)이 번역됐고, <들뢰즈와 맑스주의>(니콜래스 쏘번 지음, 조정환 옮김, 갈무리), <들뢰즈와 정치>(폴 패튼 지음, 백민정 옮김, 태학사), <들뢰즈 커넥션>(존 라이크만 지음, 김재인 옮김, 현실문화연구), <싹트는 생명-들뢰즈의 차이와 반복>(키스 안셀 피어슨 지음, 이정우 옮김, 산해),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데이비드 노먼 로도윅 지음, 김지훈 옮김, 그린비) 등 2차 연구서도 번역돼 들뢰즈 연구가 풍부해진 한해였다. 원래 ‘10주년’이란 타이틀이 그러하듯 때맞춰 준비해뒀다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것이지만, 사실 국내 철학계는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가 과도한 트렌드를 이루고 있다”라는 일부 학자들의 우려를 염두에 둔다면 과도한(?) 붐을 이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출간된 책들의 종수로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디알로그>(동문선, 2005)가 리스트에서 누락됐다) 국내에서 들뢰즈는 '트렌드 중의 트렌드'이다. 내 기억에, 90년대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마르크스주의 이후, 혹은 또다른 마르크스주의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알튀세르-푸코-들뢰즈는 차례로 한국의 지식분자들 사이에 '냄비'가 되었다(니들이 들뢰즈를 알어?). 그 긍정적인 효과는 이들의 책들이 단기간에 대거 소개된 것이며 그 부정적인 결과는 상대적인 편식에 따른, 사회적 관심의 불공정한 분배이다('과유불급'은 동양의 오랜 격언이다).

<들뢰즈 커넥션>을 읽은 걸 계기로 해서 (아직 미뤄둔 페어퍼들이 많지만) 나도 들뢰즈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참견을 해왔다. 그리고 <중첩>을 빼고는 올해 나온 책들은 모두가 몇 장이라도 책장을 넘겨본 책들이다. <비물질노동과 다중>은 편역서로서 '정동(affect)'에 대한 들뢰즈의 강의를 포함하고 있지만 들뢰즈의 '저작'은 아니다. <들뢰즈 맑스주의>와 <들뢰즈와 정치>는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이며, <들뢰즈의 시간기계>는 물론 올해 2권이 마저 출간된 <시네마>와 같이 읽어야 하는 책이다. <싹트는 생명>은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책. 해서, 들뢰즈를 읽는 것만으로도 한 해가 모자랄 지경이다. 어쩌다가...   

 

 

 

 

-한나 아렌트의 저서들 역시 번역의 물살을 꾸준히 타고 있다. 올해에는 <과거와 미래사이>(서유경 옮김, 푸른숲)가 출간됐는데, 이로써 아렌트 저서가 8권이 번역출간 됐다. 곧이어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정치(학)의 약속> 등도 번역될 예정이라 하는데, 아렌트 주저가 거의 완간을 눈앞에 둘만큼 번역이 활발한 수 있었던 건 1995년 즈음 아렌트 재조명이 해외에서 이뤄지면서 국내에서도 관심을 끌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이들이 곧 아렌트 번역에 부지런히 뛰어들었던 것. 물론 서유경 경희대 교수 등은 “일본은 아렌트 학회도 있고 저술도 1970년대 이미 다 번역됐다”라면서 국내 상황이 매우 뒤쳐졌음을 질타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2차 연구서번역에는 전공자들도 손길을 뻗치지 못하고 있다. <아렌트와 하이데거> 등 주요 연구서 한둘은 나왔지만, 그 외 중요한 연구가인 벤하비브, 번슈타인, 카노반 등의 연구물들이 국내에 소개돼 아렌트 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면 시간을 좀더 두고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작년에 <혁명론>과 <정신의 삶>(1권)이 출간된 데 이어서 아렌트 번역은 "물살을 꾸준히 타고 있다." 개인적으로 반갑다(나는 아렌트의 책들을 준-전공자 수준으로 갖고 있다). 아렌트에 대해서도 많이 주절거린 바 있으므로 새삼 소개하는 건 번잡스럽다. 그녀의 주저들이 곧 마저 출간된다고 하니까 기다려볼 일이다. 주요 연구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언급된 번슈타인은 '리처드 번스타인'을 말하며, <현대정치사회이론>(나남, 1988), <존 듀이 철학 입문>(예전사, 1995),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보광재, 1996) 등의 저작이 번역돼 있다(<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번역도 아주 훌륭한 책이다).

 

 

 

 

-철학 쪽에선 재탕삼탕 번역돼 출판시장을 불균형하게 만드는 단골메뉴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쇼펜하우어의 저서들도 그에 속할 테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상록>은 올해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역서(숲 刊)가 나옴으로써 “오랜만에 제대로 된 번역이 나왔다”는 평을 얻고 있다.(*천병희 교수는 올해만 해도 여러 권의 역서를 출간했다. 후학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한편, 알려진 명성에 비해 정작 저서들은 별로 소개되지 않아 연구자들의 아쉬움을 사는 사상가들도 있다.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예다.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는 “비트겐슈타인 논문이나 해설서는 많은데 정작 저서들이 많이 번역되지 않고 있다”라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또 프랑스 철학자 중 “자크 랑시에르나 필립 라부-라바르트의 책들이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는 건 이상하다”라는 의견도 있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책들은 댓 권 정도가 번역돼 있다. 물론 많은 수는 아니지만('노트'들을 제외하면 그가 많은 책들을 썼나?), 소위 '주저'라는 책들은 소개돼 있는 형편이다. 연구서들은 더 많이 나와 있지만. 무엇이 더 번역되어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자크 랑시에르나 라쿠-라바르트('라부-라바르트'는 오타이다) 알랭 바디우, 장-뤽 낭시와 더불어 '데리다 이후'의 프랑스 철학을 이끌고 있는 철학자들이며,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랑시에르의 책들은 대개가 짧기 때문에 번역/소개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듯하다.

 

 

 

 

-신화학에선 드디어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임봉길 옮김, 한길사) 1권이 번역돼 나왔다. 총 4권인데 내년에 2권이 출간될 예정. 그간 레비-스트로스는 <슬픈열대>, <야생의 사고> 등이 널리 읽혀왔지만, 사실 이들은 그의 사유과정 중에 나온 저서들이며,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이 집약된 가장 중요한 책은 <친족의 기본구조>와 <신화학>이다. <신화학>은 아직 일본에서도 번역되지 못했으며, <친족의 기본구조> 역시 너무 어려운 작업이라 국내에선 번역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 올해 레비-스트로스의 사유들이 담긴 <보다-듣자-읽다>(고봉만 외 옮김, 이매진)도 번역돼 나왔는데, 어쨌든 이러한 주변적 저서들을 맛보며 주요 저서 번역은 좀 기다려야 할 상황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이 모두 출간된다면 이 또한 '사건'이 될 것이다. 그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인 <친족의 기본구조>가 그의 주저이긴 하지만, 김형효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에 잘 정리돼 있으며, 일반 교양서로 읽힐 수 있는 건지는 의문이다. 제대로 레비스트로스를 읽자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부터 읽어야 한다. 이 또한 상당한 견적을 자랑하는 일이다. 일반 독자들로선 대담 자서전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2003)로 대강 카바하는 수밖에.  

  

-종교학에서는 엘리아데의 역작 <세계종교사상사 1~3>(이용주 외 옮김, 이학사)가 빛을 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종교학계의 거장 엘리아데의 사상은 국내에 거의 다 소개된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사상의 ‘다양성’을 맛보여줘야 한다는 것. 그간 국내에선 엘리아데가 우뚝 솟아있었고, 그 주위로 윌리엄 페이든과 니니안 스마트 정도의 저서만이 번역 소개됐을 따름이다. 그러던 차, 올해 처음으로 반갑게 접한 얼굴이 브루스 링컨이다. 그의 <거룩한 테러>(김윤성 옮김, 돌베개)가 출간됐는데, 엘리아데의 제자이면서 그와는 다른 이론적 입지를 구축한 저명한 종교학자임에도 그간 국내에선 번역된 바가 없었던 것. 김윤성 한신대 교수는 “종교학과 학부생들이나 대학원생들에겐 기본 커리큘럼에 속하며, 인문학적 관심사에서도 읽어봐야 할 책인데 그동안 번역상황이 너무 척박했다”라고 덧붙인다. 사실 그의 이론적 입지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주저로는 ‘Discourse and the Construction of Society’와 ‘Authority’를 꼽을 수 있는데, 이는 향후 종교학계가 해결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엘리아데의 <세계종교사상사> 출간은 물론 '사건'에 속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기사에서 개인적으로 유익했던 건 브루스 링컨에 대한 정보. 그가 엘리아데의 제자였다는 것. 확인해보니 링컨은 시카고대학 종교학과에서 학위를 받고 현재 교수로 일하고 있다. 엘리아데는 종교학에 있어서 '시카고 마피아'의 대부였다. 링컨의 책들도 더 번역되기를 기대해본다.  


 

  

 

 

한편, 엘리아데와 마찬가지로 루마니아 출신의 걸출한 염세주의자 에밀 시오랑의 책들이 올해엔 소개되지 않은 게 유감이다(작년엔 <독설의 팡세>가 나왔었다. 원제는 <고난의 삼단논법> 혹은 <고뇌의 삼단논법>). 올해는 들뢰즈 사망 10주년이기도 하지만, 시오랑(1911-1995) 사망 10주년이기도 하다. 이 해가 가기 전에 시오랑에 대해서 몇 마디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05.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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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5-12-11 12:40   좋아요 0 | URL
와우! 나를 위한 페이지이군요. 플라톤의 법률은 조만간 나오겠군요. 한나 아렌트는 여기저기서 봤지만, 여기서 다 볼 수 있겠군요. 이제는 책만 읽으면 되겠어요.
잘 보았습니다. 내공이 상당하시군요^^

로쟈 2005-12-12 20:25   좋아요 0 | URL
아렌트를 "여기서 다 볼 수 있"으시겠다니요? 아렌트 콘텐츠라도 있는 건가요?..

승주나무 2005-12-19 15:09   좋아요 0 | URL
아렌트의 번역서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여기 가지런히 모아놓은 것을 보고 한 말이었습니다. 대답이 늦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