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저자로부터 <나의 우울한 모던보이>(창비, 2005)를 선물받고 가장 먼저 읽어본 건 3부에 실린 '구름과 장미의 나날'이란 글이다('술과 장미의 나날'이 아니다!). 김춘수(1922-2004)의 처녀시집 <구름과 장미>(1948)의 표제작인 '구름과 장미' 읽기인데, 작년 11월에 타계한, 한국시의 이 대표적 시인 한 분을 기억하는 겸해서 그의 글을 읽었고 이 글을 쓴다. 시인의 죽음에 기대어 그의 처녀작을 읽는다?

 

 

 

 

그게 억지스러운 일은 아닌 게 시인의 대담을 포함하고 있는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민음사, 2001)에는 (이전에 지적한 바 있지만) 김춘수의 데뷔시집 <구름과 장미>가 <죽음과 장미>로 오기돼 있다(233쪽). 이러한 예기치 않은 우연/은유에 기대어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장미 되어 오는 것"이라고 시작되는 시 '구름과 장미'의 후렴은 '죽음과 장미 되어 오는 것'으로 다시 읽을 수도 있는 것.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 릴케를 떠올린다면, '죽음과 장미'는 한편 그럴 듯한 커플이 되기도 한다.

해서, 작년에 나온 시인의 유고시집 <달개비꽃>(현대문학)이 이어서 김춘수의 시와 에세이 선집들이 올해에도 연이어 출간되었으나 거기에 동참한 바 없는 나는 나대로의 애도의 뜻을 이 자리에서 표하고자 한다. 그건 모든 시는 결코 아니지만 김춘수의 어떤 시들이 나를 즐겁게 했던 기억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애도의 뜻을 담고 있는 페이퍼이지만 이 글은 '즐거운 책읽기'로 분류된다. 하긴 친구의 책을 읽는다는 건 살짝 흥분되면서도 즐거운 일 아니겠는가?   

1948년이면 김춘수의 나이 26살 때이고 청마 유치환의 서문을 달고 있는 이 처녀시집은 자비로 출판된 시집이다. 그러니까 이 글의 대상은 '원로 시인' 김춘수가 아니라 '새파란' 김춘수, 반세기가 넘어갈 그의 시의 여정을 이제 막 시작한 '풋풋한' 청년시인 김춘수이다. 나 자신도 더듬어보아야 할 그런 시절의 시인. 그때 그는 이런 걸 써놓았다.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구름과 장미>의 맨앞에 실려 있다는 이 시는 시 자체보다는 제목의 상징성 때문에 자주 회자되는 시이다. 그 출처는 바로 김춘수 자신이며 이장욱도 곧장 인용하고 있는 대목에서 시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구름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말이지만, 장미는 낯선 말이다. 구름은 우리의 고전 시가에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장미는 전연 보이지가 않는다. 이른바 박래어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구름을 보는 눈이 장미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이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인용한 대목은 이장욱의 책에서 재인용하지 않고 <김춘수 문학앨범>(웅진출판, 1995), 187쪽에서 인용했다('이른바 박래어다'라는 한 문장이 더 들어간다). 이 책은 김춘수 시의 독자라면 필히 소장할 만한 책인데, '앨범'인 만큼 연대기와 작품론, 자선 대표작들은 물론이고 시인과 관련한 사진자료들을 다수 싣고 있다. 시인의 서문에 따르면, "사진을 중심으로 한 이런 따위 문학앨범은 나 자신에게는 하나의 좋은 기념물이 되겠고, 나의 독자들께는 하나의 참고물 또는 흥밋거리가 되어 주리라고 기대해" 볼 만한 책이다. 이른바 종합선물세트 유형이다.   

이 인용에 대해서 이장욱은 시인의 발언을 시인 자신에게 되돌리고자 하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이 시가 미당의 구름이나 릴케의 장미를 환기시킨다는 식으로 얘기하려는 게 아니라고 밝히면서 그가 원하는 건 '텅 빈 오독'이며, "이 잘못읽기로 그의 시적 편력을 은유하는 것"이라고 미리 단서를 단다. 요컨대, "구름과 장미의 나날. 이것은 그의 기나긴 시적 편력을 요약하고 있는 표현일는지도 모른다"(287쪽)는 것. "이 기나긴 시적 편력은 구름과 장미의 '사이', 혹은 구름과 장미의 '너머'에서 한 시인의 필생이 거쳐온 고투에 다름아니다"(288쪽)라는 것. 그의 생각을 조금 따라가보고, 나는 나 대로의 '오독'을 제시해보겠다.

"보편적 세계의 저 헛것으로 떠도는 관념(구름)들과 구체적 세계에 피고 지는 이 부질없는 실존(장미)에 대해서라면, 하긴 세상의 어느 시인이 하염없지 않았을 것인가. 그가 한때 머물렀던 무의미, 혹은 비대상의 시학이란 이 하염없는 자유에 다름아니었을는지도, 혹시 모른다. 이 하염없음에 자유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가 말했듯 허무의 산물이어서 역설적이다. 그것은 구름(관념)과 장미(세계) 어느 쪽에도 온전히 귀의하지 못했던 자의 비애일 터이다."(287-8쪽)

데뷔작이라 할 만한 한편의 시 읽기를 통해서 이렇듯 한 시인의 시적 편력 전체를 읽어내는 건 '오독'이란 전제하에서도 과감하며 경탄스럽다. 비록 그 시적 편력이 거의 완료된 시점(2001년)에 씌어진 글이어서 예언적이라기보다는 사후적인 성격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나에게 흥미로운 건 사실, 이러한 과감한/경탄스런 결론이 아니라 '잘못읽기'의 과정이다(어차피 죽음으로 마무리될 거라는 점에서 모든 생애는 '비애'의 정조를 지우지 못한다. 해서, 내 생각에 '비애'는 시인 김춘수만의 것은 아니다). 이장욱은 2연부터 읽어나간다(1연은 전제이지만 3연에서 반복되기에 뒤에 읽어도 무방하겠다).

눈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밤엔 뜰 薔薇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시 속으로 바람은 불고 구름은 흘러간다. 구름은 눈뜨면 물 위에 담기는 부드러운 가상(假象)이다. 그것은 형태를 지니지 않아 만져지지 않으며, 그것은 수면에 스스로를 비추며 흘러갈 뿐이어서 인간의 규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구름은 드러냄과 사라짐의 경계를 스스로 지우며 저 하늘에 유구하다. 그래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님은 구름이 되어 온다."

 

우선 1-2행에 대한 읽기인데, 공감할 만하지만, 구름과 장미에 대한 시인 자신의 규정과는 다소 어긋나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구름/장미를 낯익음/낯섬, 감각/관념의 짝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데 이장욱은 구름을 '일부러' 가상관념으로 읽어낸다. 그건 물론 예고된 바대로의 '잘못읽기'이다(한데, 그는 어째서 이 '잘못읽기'를 통한 결론을 시인의 시적 편력에 대한 요약으로 제시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어지는 3-4행 읽기.

 

"장미는 밤의 뜰에 피어 그의 울음을 받아준다. 그것은 제 구체적인 아름다움으로 어둠속의 그를 위무하며, 그것은 그의 밤 그의 뜰에 피어 있는 바로 그 장미인 것이어서 허허로울 수 없다. 장미는 꽃 지는 계절에 지는 꽃잎들 속으로 흩어질 유한(有限)을 제 운명으로 지니지만, 그래도 님은 장미가 되어 온다."

 

앞에서 구름을 '부드러운 가상'으로 읽은 이장욱은 이번엔 '장미'를 '구체적인 아름다움'으로 읽는다. 한데, 내가 읽기에 이 시에서 장미는 '그 장미'의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어서 "그의 밤 그의 뜰에 피어 있는 바로 그 장미"라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책에 실린 다른 글 '단 하나의 장미'에서 그가 적어놓은 바를 참조하면, 보통명사로서의 장미에 대해서 우리는 아름답다거나 아름답지 않다고 판단할 수 없으며,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것은 '장미 일반'이 아니라 '바로 이 장미'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술'이라는 것은 삶과 세계를 끊임없이 '고유명사화'함으로써만 존속한다. 대상을 '고유명사화'하는 능력이야말로, 시인의 자질이다."(97쪽)

 

 

 

 

 

 

 

 

 

그 '고유명사화'가 '이미지화'가 환치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면, 내 생각에 김춘수는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현저하게 결여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는 '이 장미'가 아니라 '장미'에 대해서 노래하며, 더 나아가 '꽃'에 대해서 노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유명사화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과 동의어이다"란 이어지는 단언에 기대어 말하자면, 김춘수는 사랑을 현저하게 결여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실, 시에서 '의미'까지 배제하려고 했던 시인이 사랑타령을 늘어놓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쨍한 사랑노래'야말로 反김춘수적이지 않을까? 유일한 예외라고 할 만한 것이 먼저 사별한 아내에게 바치는 시들을 모은 시집 <거울 속의 천사>(민음사, 2001)일 듯싶은데, 그런 경우에도 내 기억에 시인은 단 한번도 아내의 이름(고유명사)를 시에서 호명하지 않았다. 아내는 '거울 속의 천사'로 이미지화되면서 오히려 일반화/추상회되었을 뿐이다.

 

해서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이장욱의 읽기가 그의 약속대로 '잘못읽기'라는 것.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장미로서의 님은 나와 더불어 구체적으로 울고, 구름으로서의 님은 물 위에 가상으로 떠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구름과 장미의 대비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름을 물위에 담고 밤뜨락의 장미와 마주앉아 우는 자의 자세이다. 그가 기다리는 님은 구름과 장미가 되어 올 것이지만, 이것은 예정이나 필연 혹은 당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슬프고 한량없으니, 그 슬픔과 한량없음을 서술하는 동사들은 온전한 능동형으로 스스로를 견뎌내고 있다. 그는 하염없는 나날을 지나며 물위에 구름을 '담고' 장미와 '마주앉아 운다.'"(286-7쪽, 강조는 나의 것)

 

나는 장미의 구체성과 구름의 가상성이라는 대비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중요한 건 그러한 대비가 아니며 '우는 자의 자세'라고 하니까 굳이 더 캐묻지는 않도록 한다. 대신에 구름과 장미의 관계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자. 1연에서 '임은 구름과 장미 되어 오는 것'이라고 명료하게 전제돼 있지만, 이때 구름과 장미를 연결시켜주는 등위접속사 '과'는 연의 구조에 있어서도 병렬성을 낳는다. 해서 2연의 내용을 산문적으로 풀면, 이렇게 될 것이다.

 

(아침에) 눈뜨면 나는 (눈)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했다.

밤엔 뜰 장미와 마주앉아 울었다/울곤 했다.

 

'밤엔'이란 시간부사가 전제로 하는 것은 '아침에'이며 그것은 전제되는 것이기에 생략 가능하다. 그리고, 구름을 '물 위에' 담아본다라고 돼 있지만, 이때의 2행 문두의 '물'은 1행 문두에 나오는 '눈'과 호응하면서 쉽게 '눈물'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물 위에 담기는/비치는 구름이면서 나의 눈물에 맺히는 구름이기도 한 것. 그리고 그렇게 '눈물'을 떠올릴 때 우리는 4행의 '울었다'는 동사와 자연스럽게 조우할 수 있다. 3행에서 '뜰에 핀 장미' 대신에 왜 ('뜰장미'도 아닌) '뜰 장미'를 고집했을까? 나는 그것이 '눈면'의 '뜨'와 호응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시어의 경제를 위해서 공통되는 내용들이 생략되긴 했지만, 1-2행과 3-4행은 구문적으로, 의미론적으로 반복이며 이 경우 구름과 장미는 말 그대로 등가적이다(즉, '구름이거나 장미'가 아니라 '구름과 장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구름은 뭐고 장미는 뭔가? 시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구름은 우리의 고전 시가에 많이 나온다. 그럼 장미는? 서양의 현대시에 많이 나온다(특히 릴케의 시). 이런 식의 설명이 암시하는 것은 소재로서의 '구름'과 '장미'가 막바로 우리시와 서양시를 제유하고 있다는 것. '구름과 장미' 자체가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시인-화자의) 임으로서의 구름과 장미는 바로 '시' 혹은 시의 뮤즈이며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고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임을 가졌으나 시인으로서 나의 임은 시, 즉 구름과 장미이다, 라는 게 내가 읽는 이 시의 1연이다. 여기서, 이장욱이 의도적으로 배제한 바이긴 하지만, "미당의 구름이나 릴케의 장미"가 다시 환기되는 건 불가피하다. 물론 이 경우 미당과 릴케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시인의 제유이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시의 2연은 낮이나 밤이나 임(=시) 생각을 했다는 것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우는 자의 자세'를 이장욱은 강조했지만, 김춘수의 초기시들에서 '울다'란 동사는 마치 상투어처럼 빈번하게 등장한다. 가령 '부재'라는 시에서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나 '길바닥'이란 시에서 "언덕에는 전봇대가 있고/ 전봇대 위에는/ 내 혼령의 까마귀가 한 마리/ 종일을 울고 있다" 같은 연, 그리고 잘 알려진 시 '꽃을 위한 서시'에서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無名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같은 시구들을 대하자면, 이 '울음'은 서양시에서 "새들이 노래한다"를 "새들이 운다"라고 우리말로 옮길 때의 그 울음인 것이어서 '한량없긴' 하지만, '슬픈' 것은 아니다(그것이 슬픈 경우엔 "슬픈 소리로 울었다"라고 명시된다). 즉, 김춘수 시의 '울다'란 동사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건 어떤 태도이지 정조가 아니다. 이제 3연이다.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이장욱의 해설: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그는 중얼거린다. 저마다 사람은 님을 가졌으나, 참으로 누가 제 님을 보았을 것인가? 그는 저 온전한 님을 온전히 볼 수 없어서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망연할 것이지만, 결국 그 기다림의 자세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에서, 하늘'만'의 그 '만'이 비교급의 조사인지 유일함을 표시하는 조사인지를 우리는 확정할 수 없다. 다만 그와 더불어 50여년 전의 저 구름과 장미에서 오늘의 구름과 장미에까지 흘러갈밖에."(287쪽)

 

1행의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에서 생략된 것은 목적어이다. 이장욱은 "참으로 누가 제 님을 보았을 것인가?"(=아무도 님을 보지 못했다)로 풀고 있지만,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님을 그들 자신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라는 건 다소간 모순되는 진술이다. 내 생각에 이 '보다'란 동사의 목적어는 2연이고 2연의 '나'이다. 밤낮으로 님(=시)을 그리워하며 눈물짓고 울고 있는 '나'를 참으로 누가 보았을 것인가, 라는 것.

 

이어서 "(그리움이) 염없는 일수록/ 하늘만 하였[다]"는 건 이장욱의 지적대로 문법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모호한 표현이지만, 음성학적으론 '하-날'/'하늘'로 호응하기에 정당화된다. 즉, 그건 동어반복이다. '하늘만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은 단호하게 "구름과 장미 되어" 온다. 이건 사실의 확인이면서 시적 화자의 결의이다(시집 맨처음에 왔다면, 이 시는 '서시'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렇게 읽을 수 있는 건 이미 충분히 암시되었지만 내가 이 시를 일종의 시에 대한 시, 즉 메타시로 읽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쯤에서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김춘수가 우리시사에서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가장 강하면서도 분명한 자의식을 평생 유지했던 시인이라는 점이다. 내 견문으로 그는 가장 많은 분량을 '시론'들을 써낸 시인이다(낱권으로 7권이고 전집 2권 분량이다. 페이지수로는 1,200쪽 가량). 25살 이후에도 시론을 갖지 않고 시를 쓰는 시인들을 그는 '아마추어'라고 부르며 신뢰하지 않았다. 해서 내가 보고 읽기에 그는 이성적인 통제에 매우 능한 대표적인 지성파 시인으로서 감상성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평생 견지했다.

 

비록 이 시에서 '장미'란 시어가 등장하지만, 그때의 장미는 구체적인 꽃이라기보다는 '장미'라는 기표이고 추상이다(김춘수는 생화(生花)를 싫어한 조화(造花) 예찬론자였다). '하염없다'란 표현도 나오지만, 나는 그것이 '울다'와 마찬가지로 시적 상투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하염없는 날들이 흘러가고 그의 님은 아직도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형체 있는 것과 형체 없는 것, 만져지는 것과 만져지지 않는 것, 구체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그리고 결국에는 죄와 구원 사이."(290쪽)라는 이장욱의 지적에 유보적이다. 분명 '구름과 장미 사이'에 김춘수는 놓여 있지만, 그때 '구름과 장미'가 의미하는 바는 시의 전통이자 시의 테크닉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시인 자신의 해설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건 바로 이 문장이다. 그 금은 구름(=감각=전통)과 장미(관념=서양) 사이의 금이며, 김춘수라는 시인의 주체를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가져오자면) '빗금쳐진 주체'로서, 그러니까 진정한 주체로서 정립시켜주는 금이다. 알려진 바대로, 그가 시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39년 일본에 유학을 가서 대입을 목적으로 학원에 다니던 시절 한 고서점에서 구해 읽을 일역판 릴케 시집을 발견하고서이다. 그리고, 이어서 만난 일본인 교수의 시론 강의에 매혹되어 그는 시인으로의 길에 들어선다(2002년에 나온 <쉰 한편의 悲歌>(현대문학)는 그가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를 모델로 하여, '마침내' 그와 대결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그의 첫시집이 나온 것이 (그는 '의미에서 무의미까지'란 글에서는 1947년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1948년이니까 대략 9년만의 일이다. 릴케의 시에 영감을 받아 시를 쓰게 됐지만(=의식) 한국어로 시를 써야 한다(=언어)는 자의식, 그것이 흔한 해석대로. '장미'와 '구름'이 의미하는 바이다. 나는 이러한 사정이 정서적으로 '비애'의 함축을 갖는다고 보지 않는다(비록 그가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를 견지했지만, 이때의 허무는 분명 비애와 구별된다). '구름과 장미의 나날'은 무의미시만큼이나 그리고 형이상학만큼이나 테크니컬하고 건조하다. 적어도 김춘수의 경우에는.

 

05. 12. 22.

 

P.S. 김춘수의 '구름과 장미'란 시에 대해서 나는 한번도 주목해 본 적이 없다(이 시에 대한 시인의 언급은 물론 유의미하지만). 따라서, 이장욱의 글이 아니었다면 이 글은 씌어지지 않았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씌어졌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춘수의 초기시는 따로 있는데, 그건 'VOU'이다(아마도 내 친구와 나는 시에 대한 취향이 많이 다른 듯하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VOU라는 음향은 오전 열한시의 바다가 되기도 하고, 저녁 다섯시의 바다가 되기도 하다. 마음 즐거운 사람에게는 마음 즐거운 사람에게는 마음 즐거운 한 때가 되기도 하고, 마음 우울한 사람에게는 紫色의 아네모네가 되기도 한다.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김춘수답지 않은 이런 시에는 다른 시들과 비교할 때 특별한 테크닉이 구사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한때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내게는 좋아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시이다. 그러니 '구름과 장미'보다 나는 '자색의 아네모네'를 기꺼이 더 사랑해마지 않는 것이다...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눈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밤엔 뜰 薔薇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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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분석론'이란 부제를 가진 <세미오티케>(동문선, 2005)는 줄리아 크리스테바(1941- )의 '처녀작'이다. 1969년에 책이 나왔으니까 1965년 그녀가 불가리아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지 4년만이며 그녀의 나이 28살 때의 일이다. 자신의 소설 제목대로 파리 지성계의 기라성 같은 '사무라이들' 틈에서도 그녀의 존재는 돋보이는데, 그걸 가능하게 했던 '필살기'가 바로 미하일 바흐친(1895-1975)이었다(올해는 바흐친 탄생 110주년이자 서거 3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토록 조용히 지나갈 수가!). 

<세미오티케>에는 바로 그녀가 바흐친을 서구 지식계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유명한 논문 '말, 대화, 소설(Le mot, le dialogue, et le roman)'(1966-7)이 실려 있다.(이 텍스트의 우리말 번역은 2종이며 각각 <세미오티케>와 <바흐친과 문학이론>에 실려 있다. 전자는 불어 번역이고, 후자는 영역본의 중역이다. 나열된 이미지 중 세번째는 불어본이고, 네번째는 이 논문이 실려 있는 영어본 크리스테바 선집 <언어 속의 욕망(Desire in Language)>이며, 마지막은 작년에 나온 러시아어본 크리스테바 선집이다. 이 다섯 가지 버전의 텍스트에 근거하여 이 글을 쓴다). 해서, 그것은 바흐친 입문 텍스트이지만 크리스테바 입문 텍스트이기도 하다. 젊은 날에 씌어진 탓에 패기만만하며 제법 난삽하다는 예비지식을 갖고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하지만, 무엇을?

 

 

 

 

대부분의 우리말 크리스테바는 요령부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대개 불어본이나 영어본 등과 대조하지 않고서는 읽어나가기 힘들다). 그건 전문가의 번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데, 완독한 것은 아니지만 <반항의 의미와 무의미>, <여성과 성스러움> 정도가 독해가능한 수준이지 않을까 싶다. <세미오티케>에 실린 '말, 대화, 소설'도 마찬가지인데, 나로선 국내에서 이 텍스트를 완독한 이가 손에 꼽을 정도이지 않을까라고 짐작해본다. 사실, 내가 읽은 것도 얼마전 이 텍스트에 대해 강의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기회'라기보단 내가 자발적으로 '강제'한 것이지만).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느낀 거지만, 출간소식에 반가움보다는 의혹을 더 많이 갖게 했던 <세미오티케> 역시 출간되지 않은 것만 못한 오역서이다. 이런 책을 내 돈 주고 산 이상 뒤늦게나마 그에 대한 대가를 두고두고 지불하도록 하겠다(돈주고 또 지불한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각주1)(국역본의 각주2)의 내용을 읽어본다(영역본은 이 각주의 내용이 약간 다르다. 영어권 독자들을 고려해서일 것이다) . 텍스트의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 텍스트는 미하일 바흐친의 저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시적 문제>(모스크바, 1963)와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모스크바, 1965)을 출발점으로 씌어졌다."(<세미오티케>, 105쪽) 여기서는 바흐친의 저작명부터가 오역인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시적 문제>는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문제>가 원제이며 우리말로는 같은 번역본이 <도스또예프스끼 시학>(정음사, 1989), <도스또예프스끼 창작론>(중앙대출판부, 2003)이란 제목으로 두 차례 출간된 바 있다. 하지만 모두 품절된 상태(읽어야 할 책을 구할 수 없는 나라는 문명에 가까운가, 야만에 가까운가?). 해서, 이미지는 영역본을 띄워놓았다. 참고로 이 영역본 <도스토예프스키> 1984년판에 나왔다. 영어권에서 바흐친학을 선도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 1968년에 나온 <라블레>이며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불역본 <도스토예프스키>는 크리스테바의 주도하에 1965년에 처음 소개됐다. 

그나마 우리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아카넷, 2001) 정도이다(불역본의 제목이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이고, 영역본의 제목은 <라블레와 그의 세계>이다). 여하튼, <도스토예프스키>와 <라블레>가 바흐친의 주저이며 각각 20년대말과 30년대에 씌어졌지만, 1960년대 중반에서야 모스크바의 세계문학연구소(고리키연구소) 젊은 연구자들에게 '재발견'되어 (다시) 출간되기에 이른다. 그 젊은 연구자들이란 S. 보차로프와 V. 코쥐노프 등을 말하는데, 바흐친 사후에 두 사람이 갖고 있던 바흐친 저작권은 코쥐노프의 사망으로 현재는 보차로프가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세르게이 보차로프가 러시아 바흐친학의 좌장이며 전집의 책임 편집자이다(바흐친 전집은 아직도 두어 권이 더 출간되어야 한다). 이 전집의 한국어판이 출간기획중인 것으로 알며, 초기 문학론 모음집인 <말의 미학>(길)은 근간 예정으로 돼 있다.

어쨌든 이어지는 문장: "그의 작업은 1930년대 소련의 언어와 문학 이론가들의 저작에 명백한 영향을 미쳤다(볼로쉬노프, 메드베제프). 그들은 담론의 여러 장르를 논한 새로운 책을 내놓았다(전자는 <도스토예프스키론>, 후자는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여기까지가 각주의 내용인데, 첫번째 문장은 맞는 번역이지만 크리스테바의 원문 자체가 약간 부정확하다. 아마도 글이 씌어진 1960년대 중반에 바흐친과 그의 저작에 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볼로쉬노프의 이름으로 나온 책 두 권 <프로이트주의>(1927)과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1929), 그리고 메드베제프의 책 <문예학의 형식적 방법>(1928)은 모두 1920년대의 저작이기 때문이다(이 시기에 출간된 바흐친의 저작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시학> 초판뿐이다). 하니 1930년대 언어학/문학 이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언급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언급한 책들은 모두 국역본이 나와 있다).

사실 이 저작들의 저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논쟁은 바흐친학의 한 파트를 차지할 정도로 분분하지만 최근엔 바흐친의 저작으로 간주하거나 바흐친/볼로쉬노프, 바흐친/메드베제프 하는 식으로 병기해주는 게 보다 일반적이다. 바흐친은 보차로프와의 대담에서 이 책들의 저작권에 대해 명확한 언급을 회피했다(그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단 바흐친의 저작으로 간주할 경우에 고려해야 할 사항은 바흐친이 볼로쉬노프나 메드베제프의 이념적 입장(마르크스주의)를 감안하여 책을 썼다는 것. 해서 러시아에서는 '가면을 쓴 바흐친'이란 표제로 책이 나와 있으며 바흐친 전집과는 별권이다.   

그런데, 내가 굵은 글씨로 처리한 "그들은 담론의 여러 장르를 논한 새로운 책을 내놓았다"는 괄호안의 부연설명과 함께 전혀 뜬금없다. 불어본의 문장은 "Il travaille actuellement a un nouveau livre traitant des genres du discours."(강세부호 생략)이 전부이다. '그'(=바흐친)는 현재 담화(담론) 장르에 관한 새로운 책을 쓰고 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들'은 어디에 있으며, 언제 '내놓았다'는 말인가? 번역에도 '조작'이 있다면 이런 경우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여기서부터 역자는 이미 이 번역의 수준에 대해서 충분한 암시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본문의 첫 문장을 읽어보자: "'여러 인문과학'의 연구에서 과학적 방법의 유효성을 인정한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과학적 논리가 아닌 다른 논리를 밝혀줄 연구 구조의 층위 자체에서, 그러니까 인문과학 분야에서 과학적 방법의 유효성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105쪽) 한마디로 '놀라운', 놀랍도록 뻔뻔한 문장이다. 요컨대, 인문과학의 연구에서 과학적 방법의 유효성을 인정한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인문과학 분야에서 과학적 방법의 유효성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경우엔 차라리 영역본에 중역한 번역문이 상대적으로 정확한데, 옮겨보면 이렇다: "'인문'과학에서 과학적 접근의 실효성이 항상 도전을 받아왔다면, 그러한 도전이 연구 대상의 구조들, 즉 과학적인 것과는 다른 논리에 상응한다고 생각되는 구조들의 차원에서 최초로 제기되었다는 것은 더욱 놀랍다."(<바흐친과 문학이론>, 234쪽) 여기서 '도전하다'란 동사는 영역본의 'challenge'를 옮긴 것인데, 불어본에서는 영어 'contest'에 해당하는 'contester'란 동사이다. 즉, '이의를 제기하다', '반대하다'란 뜻의 동사가 쓰이고 있는 것인데, 이게 어떻게 '인정하다'란 정반대의 뜻으로 옮겨질 수 있는지?(이 정도는 이제 '놀라운' 오역이 아니라 '익숙한' 오역인 것인가?)  

크리스테바가 여기서 과학과는 '다른 논리'로 지시하는 것은 시적 언어(=시어)의 논리이고 '역동적 그람(gramme dynamique)'의 논리이다. '그람'은 '글자들'을 생각하면 된다(기호로 다 환원되지 않고 남아있는 어떤 물질성이 그람이고 글자들이다). 이건 전문적인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어서 넘어가기로 한다. 얼마 안 넘어가서 나오는 문장을 보라. 두 가지 국역본을 영역본과 함께 제시한다(사실 이 대목은 영역본만으로는 모호했고 러시아어본을 참조하면서야 비로소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1)"구조분석이 그 대안으로 삼고 있는 러시아 형식주의가 쇠퇴할 때도 그 연구에 있어 문학이나 과학을 벗어난 문제 때문에 양자택일의 위기에 몰린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는 계속되었고, 최근 미하일 바흐친의 분석을 통해 그 연구가 결실을 보았다."(<세미오티케>, 106쪽)

(2)"현대 구조주의적 분석이 연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러시아 형식주의도 문학과 과학을 넘어서서 추론이 노력을 멈추었을 때 그 자신 동일한 선택에 당면했다. 그래도 연구는 계속되었고, 최근에 그것은 미하일 바흐친의 업적에서 드러나고 있다."(<바흐친과 문학이론>, 235쪽)

(3)"Russian Formalism, in which contemporary structural analysis claims to have its source, was itself faced with identical alternatives when reasons beyond literature and science halted its endevors. Research was nonetheless carried on, recently coming to light in the work of Mikhail Bakhtin."(64쪽)

바로 앞 대목에서 크리스테바는 문학기호학의 두 가지 선택지(침묵하거나 다른 논리, 즉 시적 언어의 논리 모델을 세우거나)를 제시했었는데, 러시아 형식주의도 외압에 의해 이론적 작업이 중단될 때 그러한 동일한 선택지에 직면했었다는 게 대략적인 내용이다. (1)에서 (현대의) 구조분석이 '그 대안으로 삼고 있는'이란 표현은 불어본에서도 찾을 수 없는 내용이며 (2)처럼 '그 연원을 두고 있는' 정도의 뜻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1)'문학이나 과학을 벗어난 문제 때문에' (2)'문학과 과학을 넘어서서(beyond literature and science)'는 불어본의 'extra-literaires et extra-scientifiques'의 번역인데, '문학 외적, 학문(과학) 외적'이란 뜻이다. 1920년대 중후반 러시아 형식주의가 '문학 외적, 학문 외적인 이유들'로 탄압받음으로써 중단된 사태를 가리키는 것. 그러니 (2)에서도 'reasons'를 '추론'으로 옮긴 것은 잘못이며, 'its'가 받는 것은 '추론'이 아니라 '러시아 형식주의'이다. 간단한 문장이지만, 러시아 형식주의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예비지식이 필요한 대목이며, 두 가지 국역본은 모두 정확한 이해에 미달하고 있다...

하여간에 이런 식으로 또 '부지하세월'의 읽기를 시도해야 한다. '말, 대화, 소설'의 끝장을 보려면 말이다(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거짓말'에 더 익숙해질 것이다). 대략적으로 보자면, <바흐친과 문학이론>의 중역이 <세미오티케>의 원어역보다는 낫지만 그 또한 꼼꼼한 읽기를 버텨낼 수 있는 수준은 아니며 줄거리 정도만을 알아챌 수 있게 해주는 정도이다(238쪽 각주8)에서 '러시아 방언의 역사를 위하여'가 '러시아적 변증법의 역사를 위하여'란 식으로 거창하게 오역된 것도 희극적이다). 그러니 과연 누가 크리스테바를 읽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05. 12. 21.

 

P.S. 겸사겸사 우리말 바흐친 입문서 두어 권을 적어둔다. 먼저, K. 클라크와 M. 홀퀴스트가 쓴 전기 <바흐친>(문학세계사, 1993). 두 공저자는 부부 학자인 걸로 안다. 알라딘에는 클라크가 미술학자 '케네스 클라크'로 기재돼 있는데 엉뚱한 오류이다. '카테리나 클라크(Katerina Clark)'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 연구자로 유명한데 홀퀴스트와 함께 바흐친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원저는 1984년에 하바드대학 출판부에서 나왔으며 1980년대 영어권 학계의 바흐친 열풍을 대변하는 책 가운데 하나이다. 유감스러운 건 국역본이 완역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분량 때문인지는 몰라도 몇 개의 장이 누락돼 있다. 책도 이미 품절된 상태인데, 제대로 된 완역본이 다시 나왔으면 싶다(바흐친은 이미 지나간 '유행'인가?).  

두번째 책은 츠베탕 토도로프의 <바흐찐: 문학사회학과 대화이론>(까치, 1987)이다. 불문학자 최현무 교수(소설가 최윤)의 번역이다. 불어본 원저 <미하일 바흐친: 대화주의 원칙>은 1981년에 나왔고 영역본은 <도스토예프스키 시학>, <미하칠 바흐친> 등과 함께 1984년에 나왔다(이미지는 영역본의 것이다. 한편으로 1984년은 영어권 바흐친 수용에 있어서 기념해 둘 만한 해이겠다). 국역본은 번역어 선택 등에서 이견의 여지를 남기지만 읽을 만하다.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은 분량이 아주 얆다는 것. 어느 해 여름인가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카테리나 클라크의 연구서와 함께 토도로프의 영역본을 동네 독서실에서 읽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아마도 국역본 바흐친 중에서 가장 많이 읽혔을 법한 <장편소설과 민중언어>(창비, 1988). 영어권의 바흐친 열풍 덕분에 출간되었던 책인데, 1981년에 출간된 M. 홀퀴스트 편역의 바흐친 선집 <대화적 상상력(The dialogic imagination: Four Essays)>를 저본으로 하고 있다(국역본은 4편의 에세이 중에서 3편을 옮겨놓고 있다). 러시아어 원저는 1975년에 출간된 (보다 방대한) <문학과 미학의 문제들>이다. 이 책의 불역본은 <소설의 미학과 이론>이란 제목으로 1994년에 나왔다. <장편소설과 민중언어>는 중역본이지만(중역본이기 때문에?) 가독성이 좋았던 책이었는데, 요즘도 구할 수 있는 것인지? 여하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런 정도가 바흐친에 입문하기 위해서라면  읽어두어야 할 책들이다. 러시아의 바흐친학에 대해 소개하는 책은 현재 기획중인 걸로 아는데, 아마도 1-2년쯤 후에 나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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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12-21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기대에 미달할 듯하군요. 이 일에만 매달릴 형편이 아니라서...

로쟈 2005-12-22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흐친 관련서들이 두어 권 더 나오면 바흐친 냄비가 다시 끓을까요?..

poiein 2010-10-06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테바에 대해서 알려고(이제사?) 왔는데 오히려 바흐친에 대해서 정보를 더 얻은 셈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소개로는 올해의 마지막 연재가 될 듯하다(그러길 바란다). 지난 3월에 31번째를 썼으니까 10개월 못되는 기간에 30편의 페이퍼를 썼다. 그 정도면 어지간하다고 생각한다(내년까지 100회 정도를 채우고 방향전환을 모색하든지 해야겠다).

가장 먼저 꼽을 책은 단연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이다. 2월초 러시아에서 돌아오자 마자 한 지인에게 물어본 것이 <트랜스크리틱>의 번역 유무였을 정도로 나로선 손꼽아 기다리던 책이다. 작년에 나온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에 이어서 거르지 않고 올해도 그의 주저가 번역/소개된 것이 반갑다. 일어본은 저자가 여러 차례 개작을 했으며, 영역본도 올 5월에야 MIT출판사에서 나왔다(정확하게는 2003년에 나왔다. 올 2005년에 나온 건 페이퍼백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 당연이 이 페이퍼백이고. 한편, 영역자는 <은유로서의 건축>과 마찬가지로 사부 고소이다. 내가 알기에 고진의 책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포함해 3권이 영역돼 있는 듯하다). 그 책을 나는 지난 가을에 주문해서 서가에 꽂아두고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트랜스크리틱>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책이다. 지금껏 이렇게 두꺼운 책을 쓴 적이 없으며, 또 이렇게 시간을 들여 쓴 적도 없다. 나는 거의 10년 동안 이 책에 몰두했다. 고치고 또 고치기를 거듭한 결과, 40년 전부터 생각해왔던 문제에 결론을 낼 수 있었다." 해서, 이 책은 그가 '납득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어찌 독서를 주저할 수 있으랴!

부제가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인 데서 알 수 있지만, 고진의 책은 칸트로부터 마르크스를 읽어내고 마르크스로부터 칸트를 읽어내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는 "모든 고정관념(외형)이나 과거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마르크스의 텍스트(주로 <자본론>) 속에서 마르크스를 읽는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직접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가 마르크스에게서 발견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투철한 통찰이고, 그 통찰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쉽게 극복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소개의 말을 좀더 옮겨오면, "그는 경제학자들이 <자본론>을 단지 경제학 책으로만 본다는 사실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다. <자본론>에서의 '비판'이 자본주의 고전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자본의 욕동(欲動, drive)과 한계를 밝히는 것이고, 나아가 그 근저에서 교환행위에 불가피하게 따라다니는 난점들을 찾아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론>은 자본주의로부터 손쉽게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제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쉬운 출구가 있을 수 없는 까닭을 밝힘으로써 오로지 자본주의에 대한 실천적 개입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형이상학을 비판하기보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냄으로써 실천 가능성을 시사하려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인데, 이것이 바로 가라타니가 마르크스와 칸트를 결부시킨 이유이다."

즉, 그는 "자본주의 경제나 국가에 대한 계몽적 비판이나 문화적 저항에 머물러 있는 데 만족할 수 없었고, (...) 마르크스를 칸트적 '비판'에서 다시 생각하는 일"에 나선다. 우리의 슬라보예 지젝에 따르면, "이 놀랄 만한 책은 현대 자본 제국에 대한 대항의 철학적/정치적 기초를 다시 주조하는 가장 독창적인 시도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대한 '문화적' 저항이라는 꽉 막힌 상황을 타파하고,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의 현실성을 주장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지젝의 종종 과장하는 버릇을 감안하더라도 고진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한 셈이다(참고로, 올해엔 '문화이론의 엘비스' 지젝에 관한 영화도 만들어졌다. 이미지는 영화의 포스터이다. 조만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고진 자신이 밝히고 있는 바이지만, 이것은 모험/실험을 감행하는 주장이며 그러한 '위험' 자체에 의의가 있기도 하다(오직 하이에나류의 비평가들만이 '안전한' 말들만을 늘어놓는다). 그가 책에 만족감을 표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위험'과 관련될 것이다. 여하튼 고진 비평의 진수를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니 연초의 휴가를 물건너가서 라운딩하며 보낼 수 없는 이들에게도 진정한 '트랜스'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선사해줄 책이겠다.   

 

 

 

 

물론 이 책은 고진의 우려대로 일반독자가 읽기엔 좀 어렵다. 해서, 사전에 예비적으로 몇 권 읽어두는 게 좋겠다. 내가 고진에 입문하게 된 책은 <탐구1>(새물결, 1998)이었는데, 역시 <트랜스크리틱>의 역자 송태욱씨의 작품이다(그는 최강의 고진 번역자이다). 아주 쉽고 재미있는 책이다. 그리고 <윤리21>(사회평론, 2001)을 권하겠다. '트랜스크리틱'의 아이디어가 이미 제안되고 또 시험되고 있는 책이다(이 역시 역자는 송태욱). 물론 난해하지 않으며 죽 읽어나갈 수 있다. 두 가지 책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트랜스크리틱>을 바로 손에 집어들어도 좋겠다. <일본 정신의 기원>(원제는 <일본정신분석>),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은유로서의 건축> 등은 옵션이다(<마르크스>만을 아직 나는 안 읽었다. 참고로, 고진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윤리21>과 <일본정신의 기원>을 같이 참조해줄 것을 권했다).

만약에 이런 책들이 너무 난해하여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면, 게다가 재미마저 없다고 하면 당신은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걸출한 비평가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해야겠다(너무 크게 유감스러울 건 없다. 덕분에 지출이 많이 줄어드니까). 하지만 그럴 경우에라도 <트랜스크리틱>을 '소장용'으로 구입해서 서가에 꽂아두시길 바란다(그래야 양서들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다).

 

 

 

 

이상에서 이미지로 나열한 책들은 번역자 송태욱씨가 올해 <트랜스크리틱>을 제외하고도 낸 번역서들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오사와 마사치의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그린비)뿐이지만(저자는 고진 사단에 속한다), 이러한 번역량 또한 경탄에 값한다. 내가 무슨 권한이 있다면 올해의 인문서 번역가상이라도 주고 싶다. 교양과학서에서 이에 견줄 만한 번역자는 이한음씨이다. 그가 올해 번역한 책들이 알라딘에서 12종 가량이 검색된다(얇은 책들이 포함돼 있긴 하지만). 주요한 책들을 나열해보면 이렇다.

 

 

 

 

도킨스의 책 <악마의 사도>와 <조상 이야기> 두 권을 옮긴 것만으로도 이한음씨 또한 올해의 번역가로서 손색이 없다. 나의 격려가 무슨 보탬이 되지는 않겠지만, 연말에 즈음하여 올 한해 두 번역자의 활약과 업적을 기리고자 한다. 내가 좋아하는 저자의 책들이 신뢰할 만한 역자들의 솜씨로 번역돼 나오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흔하진 않다(반대로 그런 책들이 엉터리 역자들을 만날 경우의 끔찍함이라니!).


 

 

 

두번째 책은 윤성우 교수의 <해석의 갈등>(살림). 부제는 '인간 실존과 의미의 낙원'이다. 알다시피 올해 타계한 철학계의 최고 거물이 폴 리쾨르(1913-2005)인바, 해석학의 권위자로서 그의 주저라 할 만한 <해석의 갈등>(아카넷, 2001)의 해설서가 출간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해석의 갈등'은 '해석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란 뜻이다). 리쾨르 전공자인 저자는 리쾨르의 삶과 <해석의 갈등> 전후 시기의 철학을 정리줌으로써 리쾨르 입문서를 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리쾨르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제자이기도 한 프랑수아 도스의 <폴 리쾨르>(동문선, 2005)를 참조할 수 있다. 윤교수에 따르면, "번역상의 몇몇 혼란이 옥의 티로 남았지만 리쾨르의 자전적 삶과 학문적 삶에 대한 연구서로는 더 이상의 책은 기대하지 않아도 좋을" 책이다. 이와 함께 읽어볼 만한 입문서로는 윤교수의 <폴 리쾨르의 철학>(철학과현실사, 2004)가 있다고.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1969)은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1960)과 함께 현대 해석학의 최고 업적으로 간주되는 고전이다(비록 논문집이긴 하지만). 이럴 때마다 아쉬운 건 <진리와 방법>이 아직 우리말로 완역되지 않은 사실이다(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거지만, <진리와 방법>의 불어본 출간을 주도한 사람이 리쾨르이다. 불역본도 완역본은1996년에야 나왔다고 하니까 한국어본이 지체되는 건 얼마간 이해가능하다. 참고로, 영역본은 두 차례 나왔다). 거기에 비하면 10권 가까이 번역돼 있는 리쾨르의 경우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교수의 번역 용례에 따라) <생생한 은유>나 마지막 주저 <기억, 역사, 망각>(2000) 등은 곧 번역되었으면 싶다(이미지들은 영역본의 것이며 후자는 일부가 올해 계간 <세계의 문학>에 소개된 적이 있다. <기억, 역사, 망각>의 러시아어 완역본은 작년에 출간됐다). 리쾨르 스스로가 "자신의 모든 철학적 작업의 결산 내지 종합"이라고 규정했다는 <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1990;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 제목으론 'Oneself as another')도 조만간 소개되었으면 싶고.

 

 

 

 

여하튼 <해석의 갈등>에 포함된 논문 몇 편을 나는 겨울방학에 읽어볼 듯하다(나에겐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이 있는데, 러시아어본은 완역본이 아니다). <해석의 갈등>과 함께 리쾨르의 후기 주저로 꼽히는 건 1983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시간과 이야기>(전 3권) 시리즈이다. <존재와 시간>이 20세기의 책이라면, <시간과 이야기>는 21세기의 책이 될 것이란 예언도 있을 정도인데,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후설 현상학에서 출발한 리쾨르의 여정이 '이야기(내러티브)'에 이른 것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두 저작의 커넥션을 '존재-시간-이야기'로 묶고, 하이데거의 못다한 이야기가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상상하길 좋아한다. 시간이 곧 이야기인 이상 존재의 해명은 궁극적으로 이야기를 매개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경우 문학은 철학에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건 먼 장래를 위해 남겨놓은 나의 숙제이다.

 : Imagination and Chance: The Difference Between the Thought of Ricoeur and Derrida (Suny Series in Intersections : Philosophy and Critical Theory)

여담 한마디. 작년에 타계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는 1960년대 초반 소르본 대학 철학과에서 리쾨르의 강의 조교를 했었다(윤성우 교수의 책에는 데리다의 생년이 1925년으로 잘못 표기돼 있다). "리쾨르보다 일 년 먼저 세상을 떠난 데리다는 고등사범학교 학생이던 1953년에 <에스프리>지가 주관하던 세미나에서 리쾨르를 처음 만났다. 데리다의 회고에 따르면, 이 세미나에서 '역사와 진실'이라는 주제로 리쾨르의 발표가 있었는데, '명확하고 우아하고 논증력이 있고 권위적이지 않으면서도 권위가 있었으며,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사유의 참여를 보여주는' 발표였다고 한다."(69쪽) 데리다의 '제자' 박이문 선생의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미다스북스, 2005)에는 이 시절 '강의조교' 데리다의 지도를 받던 시절의 에피소드가 '나의 스승 데리다'란 추모의 글에 실려 있다. 영어권에서 나온 연구서들 가운데는 두 사람의 철학을 비교한 <상상력과 우연: 리쾨르와 데리다 철학 간의 차이>(1992)도 출간돼 있다.

 

 

 

 

세번째 책은  들뢰즈와 레비나스 철학의 전문가인 서동욱 교수의 <일상의 모험>(민음사). 저자도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책은 <차이와 타자>에 실려 있는 '아이와 초월' '일요일이란 무엇인가?' 두 편의 글의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즉 일상적인 것들에 철학적 담론의 육체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읽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보다 적합한 제목은 '일상의 철학적 구원'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붙인 부제 자체가 '태어나 먹고 말하고 연애하며, 죽는 것들의 구원'이기에 더욱 그렇다(책에 실린 몇 편의 글들을 나는 이미 여러 잡지들에서 읽었었는데, 본문의 장들 가운데서 제목을 고르자면 '셰익스피어의 유령학' 정도가 어떨까 싶다. '일상의 모험'이란 제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소리지만, 주제를 알자면 나는 저자가 아니라 그저 한 독자일 뿐이다!).

저자가 '모험'이라고 이름붙인 건 내가 보기엔 일상성 자체가 갖는 모험성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범박한/세속적 일상을 철학적으로 담론화하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거기에 이 책의 의의가 있다. 그러한 시도를 '모험'으로 간주할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한편으론 저자는 모범적인 철학적 담론 바깥으로의 모험은 결코 시도하지 않는다. 그의 문장들은 단정하고 정연하다. 그래서 결코 '탈'나지 않는다. 가령 니체 전공자인 김진석 교수의 문장들과 비교해 보라).

그러한 시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일상(quotidien, Alltaglichkeit)'라는 식으로 우리말 '일상'에 불어와 독어의 일상을 병기해놓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저자의 작업이 일상에 대한 독어와 불어식의 철학적 사유를 우리식 일상에 번역해오는 과정이라는 걸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럴 때 우리의 일상은 '보편적' 일상으로 격상되는 것이기도 하고. 당연히 책은 철학논문 못지 않은 각주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가장 먼저 나오는 각주는 M. Heidegger, Zein und Ziet, 그러니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독어본의 쪽수이다. 두번째 각주는 메를로-퐁티의 <눈과 정신> 불어본 쪽수이고. 자신의 '일상'이 궁금한 독자에게 이 책은 별 매력을 주지 못하겠지만(그 일상이 '철학적 일상'이 아닌 이상), 자신의 '교양'이 궁금한 독자라면 기꺼이 읽으며 경탄해볼 일이다. 저자는 동시대 젊은 철학자들 가운데 최고의 철학적 교양을 자랑하므로.

 

 

 

 

레비나스(과거엔 '엠마누엘 레비나스'로 표기됐었으나 '에마뉘엘 레비나스'로 표기가 바뀌었다. 이 또한 '교양'에 속한다) 전공자로서 서동욱 교수는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 2003)란 역서를 갖고 있는데, 우연찮게도 그의 은사이자 <시간과 타자>(문예출판사, 1996)의 역자인 강영안 교수의 레비나스 연구서도 이번에 출간됐다. <타인의 얼굴>(문학과지성사)이 그것이다. 책에 실린 몇 개의 논문을 역시나 잡지들에서 읽은 바 있는데, (레비나스 철학의 강력한 소개자이자 옹호자인) 저자의 레비나스 연구를 한번 결산하는 의미가 있는 듯하다. 전문서 범주에 속할 듯하지만, 레비나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일독해 볼 만한 책. 부록으로 레비나스의 저작과 2차문헌, 그리고 국내의 연구현황 등을 개관하고 있기에 연구자들에게는 아주 요긴할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론 레비나스에 관한 책들을 준-전공자 정도의 수준으론 갖고 있는데, 입문서로서 가장 추천하는 책은 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를 향한 욕망>(다산글방, 2001)과 알랭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이다. 두 권 다 어렵지 않으며 읽기 편한 책이다. 레비나스의 대담으론 <윤리와 무한>(다산글방, 2000)이 번역돼 있고, 리처드 커니의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 1998)도 참조할 수 있다.  

 

 

 

 

네번째 책은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러시아문학 연구자이자 비평가 이장욱의 첫 비평집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창비사)이다. 그가 올해 낸 책들이 이로서 이론서 <혁명과 모더니즘>(랜덤하우스중앙),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문학수첩)을 포함해 세 귄이 된다. 이런 부지런한 저자를 친구로 둔 덕에 나는 지난 주말 한 모임의 뒷풀이 자리에서 저자로부터 사인된 책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시, 소설, 비평, 연구 가운데 가장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우문에 그는 '시'라고 답했다. 그는 내 기억에 언젠가 현대시 동인상을 받은 '유력한' 시인이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책은 '이장욱의 현대시 읽기'란 부제를 달고 있으니 '시인의 시읽기'인 셈인데, 저자에 따르면 비평적이라기보다는 에세이적인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책은 요즘의 추세와는 다르게 단 한 개의 각주도 달고 있지 않다). 나는 몇 편의 글을 잡지나 시집 해설 등에서 읽어본 적이 있는데, 한데 모아놓으니까 보기에 즐겁다(제목과는 달리 결코 우울하지 않다!). 책에 대한 리뷰는 다른 자리를 마련해야겠지만(김춘수의 시 한편을 다룬 '구름과 장미의 나날들'에 대한 글이 가장 먼저 씌어질 듯하다) 얼핏 받은 인상은 그의 비평 혹은 에세이들이 매우 몽타주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라는 지시 형용사나 '이것'이라는 지시대명사를 아주 자주 사용한다. 그걸 종합하여 말하자면, 그의 글들은 산책자 혹은 여행자의 즉물적인 인상들의 기록처럼 읽힌다. 그 인상들이 개념어들을 통해 반추될 경우에도 그 과정은 산책자/여행자의 보폭과 리듬을 유지한다. 그는 멀리 지나가면서 지금 여기에 있는 시와 시구들을 말하고 있는 것(책갈피에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찍은 저자의 스냅사진이 실려 있다). 그게 내가 받은 인상이다.     

 

 

 

 

시인 이장욱만큼 다재다능한 시인이자 비평가 권혁웅 교수가 '신화에 숨은 열여섯 가지 사랑의 코드'란 부제를 단 신간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문학동네)를 출간했다(친구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권혁웅의 가장 좋은 책이다). 지난번에 낸 비평집 <미래파>를 내가 아직 다 읽어보기도 전의 일이다(내가 읽는 속도보다도 더 빨리 책을 써내는 이들이 나는 싫다!). 비평가 이장욱이 '다른 서정'이라고 부르는 최근 시의 경향들에 대한 비평가 권혁웅의 호칭이 '미래파'이다. 그런데, 거기에 이어지는 책은 '태초에'라니!

저자에 따르면, "내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 모든 신화는 사랑이다. 한 사람의 꿈을 움직이는 힘, 한 편의 시를 추동하는 힘도 그렇다. 이것은 사랑의 산화가 아니라 신화의 사랑에 관한 책이다. 신화에 숨은 몸의 논리를 분석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을 신화에 관한 정신분석이라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간은 '정신분석서'로 분류되어야 하겠다. 서동욱 교수의 책과 같이 나란히 서재에 꽂아놓으면 '일상과 신화'라는 그럴 듯한 풍경이 완성될 듯하다. 정신분석이란 말이 나온 김에 참고로 지적하자면,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정신분석>(민음사, 1999)의 원제가 'Au Commencement E'tait L'amour', 즉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이다. 신간의 제목을 거기서 빌어왔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지막 다섯번째 책은 강유원의 서평집 <주제>(뿌리와 이파리)이다. 소개에 따르면, "'회사원 철학박사'로 잘 알려진 강유원이 그간 써온 서평들을 여섯 주제로 묶어 펴낸, 본격적인 주제서평집이다. 저자의 세 번째 서평집이기도 한 이 책은 다른 일반 서평집들과 달리 단순한 서평에서 그치지 않고,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길 안내에 특히 중점을 둔 서평집이다."  

데뷔 서평집인 <책>(야간비행, 2003) 이후 이제 2년 남짓 가량 되었지만,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지식인 혹은 '교양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그에 대한 군더더기의 말은 불필요하겠다. 한데, 이번에 나온 <주제>가 세번째 서평집이라면, 두번재 서평집은 <책과 세계>인가(아니면 <몸으로 하는 공부>)? 사정을 정확히는 모르겠다. 분명히 내 돈 주고 산 책인 <책>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 러시아에 다녀온 이후로 보지 못한지라 나는 <책과 세계>(살림, 2004)에 대한 몇 마디 적어본 전력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주제> 또한 읽을 만할 거라고 짐작한다(몇몇 글들은 그의 블로그 등에서 읽은 듯하다).

다시 소개의 글을 옮기자면, "저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교양이란 '앎과 삶의 일치'에 있다.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진리로 간주되는 앎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끊임없이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교양인의 자세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쓴 주제서평의 '주제'는 '지금, 여기'에 있는 구체적인 우리의 삶을 천착하고 있다." 즉, 그의 저작 혹은 작업이 지향하는 바는 '진정한 교양인' 되기이며 그 권고이다.

 

 

 

 

'앎과 삶의 일치'라고 했지만, 그건 다른 말로 앎(머리)과 몸의 일치이기도 하겠다. '몸으로 하는 공부'가 뜻하는 바가 그게 아닐까? 이때 '몸'은 추상적인 몸이 아니다. 그가 '근육질적인' 문체를 갖고 있다고 언젠가 적었지만, 그의 사유를 담고 있는 문장들은 잘 단련된 바디빌더의 몸을 연상시킨다. 주로 뼈와 물렁살로 이루어진 나와는 다른 차원의 글이고 몸인 것. 한데 이로써 형성되는 '교양인의 자세'는 김규항의 'B급 좌파적 자세'이면서 동시에 영화 <공공의 적>에서 뱃살 늘어진 형사 설경구가 아닌 근육질의 냉혈한 이성재를 더 닮은 자세이기도 하다. 그 또한 자본주의의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진리로 간주되는 앎(=Money talks!)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끊임없이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철저하게 견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류적' 앎이고 진리라면, 그와의 차별화를 위해서 당연히 요청되어야 하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다. 결단코 타협 따위를 허용하지 않는. 그게 근육질의 교양이며 혁명적 교양이다(강유원의 글쓰기가 고압적인 태도를 동반하는 것은 그러한 '교양'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비록 강유원의 서평들에 눈길을 주기도 하지만 바탕이 물렁한 데다 평소 운동과 인연이 없는 나로선 그냥 <말랑말랑한 힘>과 <물렁물렁한 책>들에 더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말랑말랑한 빵들을 나는 좋아한다. 언젠가는 그 '말랑말랑한 빵에게' 바치는 시도 썼으니 이런 식이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바짝 구워지면 빵은 딱딱해진다. 그건 딱딱한 빵이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바짝 구워지면 빵은 딱딱해진다. 그건 딱딱한 빵이다.

그건 말랑말랑한 빵과는 다른 빵이다. 정말 다른 빵이다. 먹어보면 안다.

그것이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살짝, 그렇다, 살짝 구워진다는 !

그것이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비밀은 부드럽게 혀끝에서 녹는다, 살살 녹아난다. 비밀은 사랑스럽다.

우리는 공공장소에서도 빵을 먹는다, 말랑말랑한. 세상은

오랜 관습의 사원이며 존재의 빵집이다.


여기저기서 주무르고 달군다. 더러는 태우기도 한다.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 말랑말랑한 형이상학과 말랑말랑한 세계평화가

여기저기서 반죽되고 구워진다. 밤낮이 없다.

살짝, 그렇다, 살짝 미쳐간다는 !

그것이 또한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마침내 말랑말랑한 빵이 구워졌다. 정말인가는 먹어보면 안다.

 

 

 

 

내가 아직까지 믿는 것은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이다. 가령 티베트의 수도이자 라마교의 성지 라싸의 사원을 향해서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며, 그러니까 몸의 다섯부분(五體) 즉 이마, 오른쪽 팔꿈치, 왼쪽 팔꿈치, 오른쪽 무릎, 왼쪽 무릎이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수 개월에서 몇 년이 걸리는 여정을, 하지만 환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감내하며 걸어가던/던져가던 티베트 어린아이들의 발걸음 같은 것 말이다. '앎과 삶의 일치'라고 하지만, 삶은 앎의 극한이다. 앎은 삶의 궁극적인 모순에 가닿기엔 너무 체계적이고 논리적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비논리적이고 비체계적인 것을 앎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해서, '진정한 교양인의 자세'는 이래저래 멀고도 멀다. 강유원의 길이든, 티베트 아이들의 길이든 말이다. 그저 오늘도 읽고 또 읽을 따름이다...  

05. 12. 20.  

 

 

 

 

P.S. 올해의 마지막, 더불어 최악의 스캔들은 물론 현재 진행중인 '황우석 스캔들'이다. 조만간 그가 과욕을 부린 국민 과학자였는지 희대의 사기꾼이었는지는 밝혀질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사태 때문에 눈길을 끄는 책이 있다면, 단연 <골렘>(새물결)이다. 원제는 'The Golem: What You Should Know about Science'(1993), 그러니까 '과학에 대하여 당신이 알아야만 하는 것'. 소개에 따르면, "골렘은 유대 전설에 나오는 괴물로, 온순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언제라도 미쳐 날뛸 수 있는 존재이다. 저자들은 과학은 골렘 같은 것이라고 말하며, 흥미진진한 일련의 사례들을 통해 이런 구축 - 관측과 실험 - 이론의 확증이라는 전통적인 과학상의 허구를 낱낱이 파헤친다."

보다 구체적으로 "책은 과학적 연구 결과의 수용과 검증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던 7가지 사례들을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사례 중에는 상대성 이론 검증 실험 같은 유명한 연구에서부터, 상온 핵융합처럼 신문의 과학면에서 봤음직한 연구 등 다양한 사례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 과학의 '뒷골목'에서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흥미진진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인문학의 '지적 사기'를 크게 떠들어댄 과학자도 있었지만, 돌이켜보건대 인문학의 사기는 '과학적 사기'에 비할 바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래저래 인문학은 과학에 미달이다. 모자란 것들 같으니라구!.. 

 

 

 

 

P.S.2. 내친 김에 개인적으로 꼽은 2005년의 책 다섯 권을 골라둔다. 기준은 기억해 둘 만한 책들 가운데 내가 갖고 있는 책으로 읽었거나 읽고 있는 중인 책으로 한정했다. 도정일, 최재천 교수의 <대담>, 가라티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은 최근에 내가 '지지'를 표명했던 책들이다. 김윤식 교수의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이나 프랑수아 도스의 <폴 리쾨르>는 내가 좋아하는 '생애전'들이다. 두 사람의 생애는 각각 문학과 철학으로 변형되었다. 문학으로서의 삶, 철학으로서의 삶. 한 해를 마무리하며 그걸 새삼 한번 더 기억해두고자 한다. 그리고 루소의 자전적 <고백>. 물론 한번 언급한 바 있듯이 복간본 번역이다. 많은 고전들이 올해 번역돼 나왔지만 지금 가장 먼저 머리속에 떠오르는 건 이 <고백>이다. (어줍잖은) '픽션'에 대한 선호가 점점 줄어드는 걸 보면(하물며 판타지라니요!) 확실히 늙어가는 모양이다(곧 가속도가 붙을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그런가?..

P.S.3. 거기까지 쓰고 집에 가는 길에 <트랜스크리틱>의 서문을 읽었는데, 부실한 교정이 눈에 띄어 적어둔다. 역시나 생몰연대에 관한 것. 16쪽에서 아나키스트 프루동의 생몰연대가 '1908-65'로 돼 있는데, '1809-65'의 오타이다. 오타야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왜 체크가 되지 않은 것인지? 그리고 19쪽에서 프랑스 철학자 리오타르의 생몰연대가 '1924- '라고만 돼 있는데, 그는 이미 지난 1998년에 세상을 떠났다(일어본에 오기돼 있는 걸까?). 좋은 번역은 좋은 교정을 수반할 때 더욱 빛이 난다. 좀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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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12-20 11:00   좋아요 0 | URL
<탐구1>은 품절이군요. <윤리21>부터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소장용으로 구입해서 서가에 꽂아두란 말씀에 좀 웃었습니다. ^^

blowup 2005-12-20 11:30   좋아요 0 | URL
저두요. 소장용으로라도 구입해서 출판 문화에 기여할까 싶습니다.

딸기 2005-12-20 16:52   좋아요 0 | URL
소장용 책 리스트에 올려놓을께요.

페일레스 2005-12-20 18:29   좋아요 0 | URL
<탐구 1>은 절판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재빨리 구입해 두었는데, 다른 것들을 읽다보니 늦어지고 있네요. 로쟈님 페이퍼에 힘입어 고진의 책을 독파해 보고자 합니다. <트랜스크리틱>도 소장용이 아닌 독서용이어야 할텐데... 음.

로쟈 2005-12-21 13:02   좋아요 0 | URL
그럼, 그게 다 바람구두님이?^^

니브리티 2005-12-21 15:32   좋아요 0 | URL
옆길로 새는 얘기지만 최승호의 <물렁물렁한 책> 뒤의 해설(누가 썼더라)에서 물렁물렁하다...를 '끈적끈적하다'와 같은 의미로 쓰더라구요. 근데 어감상으로도 그렇고, 실제 사용하는 어의로도 그렇고 전혀 통용되지 않는 단어였는데...

세밑 잘 보내세요....

2006-01-01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sVida 2010-09-18 23:36   좋아요 0 | URL
일상의 모험 읽고 있는데 리뷰가 로쟈님꺼 밖에 없네요~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이데거 책 제목 "존재와 시간" 독어 철자가 "Sein und Zeit" 로 고쳐져야 할 것 같아요~
 
천개의 고원 - 사용자 가이드
브라이언 마수미 지음, 조현일 옮김 / 접힘펼침(enfold)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이미 품절된 책인지라(자체 품절?) 굳이 이런 자리에서 다룰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없지는 않지만, 언젠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지라 일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정리해둔다. 마수미(B. Massumi)는 <천 개의 고원>의 영역자이며, 당연히 영어권의 대표적인 들뢰지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가이드'의 원제는 'A User's Guide to Capitalism and Schizophrenia'(1992)이다. 그러니까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 가이드북인 셈이다. 가이드북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개성적이며 따라서 그닥 친절하지는 않다. 친절한 걸 원한다면 우리식 가이드북인 <노마디즘>(휴머니스트)를 참조해야 할 것이다(물론 이 가이드북의 대상은 <천 개의 고원>이 아니라 <천의 고원>이지만).

마수미의 책은 상당히 오래전에 복사해두었었는데, 이처럼 번역돼 나왔길래 반가웠다, 라고 쓰면 좋겠지만, 사실 반갑지 않았다. 역자의 전력에 비추어볼 때 제대로 된 번역서일 확률이 지극히 낮았기 때문이다. 해서, 미덥지 않은 마음에 도서관에 주문이나 해두었었는데, 얼마전에 대출가능해졌고 내가 첫 대출자였다(궁금함보다는 주문에 대한 '책임감'에 떠밀려 대출했다). 고급스런 장정의 하드카바이긴 하지만, 역시나 읽어보는 시간이 아까운 오역서. 한데, 이건 역자 자신이 "이 책도 예외는 아니어서 수많은 오역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243쪽)라고 태연하게 밝혀놓고 있는 터여서 지적하기도 쑥스럽다(보통은 '혹 있을지도 모르는 오역은 역자의 책임이다'라고 적는다). 아아, 역자의 말은 겸양이나 아이러니가 아니라 액면 그대로인 것이니!('오역의 희열'이 아니라면 굳이 이런 번역을 감행하는 이유가 설명/이해되지 않는다.)

몇 걸음 뗄 것도 없이 첫 페이지부터 오역의 퍼레이드이다. 마수미의 책은 서문과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국역본은 네 개의 장으로 재구성하면서 'Pleasures of Philosophy'란 제목의 서문을 '희열'이란 장으로 옮겨놓았다. 해서,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은 고스란히 빠져있으면서 오역의 '희열'을 유감없이 제공해주는 번역문들을 약간만 맛보기로 한다(어차피 이해못할 철학이라면 즐기기라도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라는 식으로 좋게 생각한다면, 번역에 대해서 툴툴대는 나의 태도는 제법 옹졸한 것이 된다. 그러니 이런 얘기를 길게 늘어놓음으로써 나의 그 옹졸함을 굳이 더 과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원서의 첫 페이지 세번째 문단이 국역본의 두번째 페이지에는 이렇게 옮겨져 있다(문단이 나뉘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신분열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집니다. '철학'이 그 여러 이름 중 하나입니다. 그저 일반적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출(bastard)로서의 철학입니다. 서출이 아닌 합법적 철학은 '전제군주의 그늘'에서 말하는 순수이성의 '관료주의'가 낳은 아들이며 제도(the state)의 역사적 복잡성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이러한 관료주의와 복잡성은 우리 정신의 내부에서 실제적으로 기능하는 절대 제도(the State)를 생산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석은 주권적 판단의 담론이며, '건전한 논리'에 의해 합법적으로 인정된 안정적인 주체로서의 담론이며, 바위와 같이 견고한 담론이자, 백인우월주의적이며 '일반(universal)' 진리의 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를 실재적 제도((the State)의 목적과 동일시하여 혹은 지배적 기호와 동일시하여 기존의 질서의 요구사항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프로세스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8쪽, 강조는 나의 것)

들뢰즈 철학에 대한 단정적인 서술이므로 밑줄긋기를 해볼 만한 대목처럼 읽히지만, 문제는 제멋대로의, 보다 정확히는 정반대로의 번역이라는 것. 원문은 이렇다: "Schizophrenia, like those 'suffering' from it, goes by many names. 'Philosophy' is one. Not just any philosophy. A bastard kind. Legitimate philosophy is the handiwork of 'bureaucrats' of pure reason who speak in 'the shadow of the despot' and are in historical complicity with the state. They invent 'a properly spiritual... absolute State that... effectively functions in the mind." Theirs is the discourse of sovereign judgment, of stable subjectivity legislated by 'good' sense, of rocklike identity, 'universal' truth, and (white male) justice. 'Thus the exercise of their thought is in conformity with the aims of the real State, with the dominant significations, and with the requirements of the established order."(1쪽)

처음 네 문장은 국역본의 번역도 오역에 속하지는 않는다. 나라면, "분열증은,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처럼, 여러 가지 이름으로 행해진다. '철학'은 그 중 하나이다. 그건 여타의 일반적인 철학이 아니다. 아주 개 같은 철학이다." 정도로 옮기겠다. '개 같은 철학'(A bastard kind of philsophy)은 철학에서의 분열증, 혹은 분열증적인 철학이 갖는 이름이고 양상이다. 이 '잡종 개' 같은 철학과 대척점에 놓이는 것이 '합법적 철학'이고 '국가 철학'이다(State를 역자는 '제도'라고 옮겼는데, 납득이 가지 않는다. 비록 '제도권 철학' 정도라면 '국가 철학'과 의미가 통할 수는 있지만). 이 합법적 철학은 순수이성의 '관료들'이 만들어낸 고안품이다(역자는 'bureaucrats'을 '관료주의'라고 옮김으로써 이후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도록 해놓았다. 그럴 경우 이후에 나오는 'they'가 무얼 받는 건지 오리무중이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결과적으로 개 같은 번역이 돼 버렸다). 

다섯번째 문장부터 다시 옮기면 이렇게 된다: "합법적인 철학이란 순수 이성의 '관료들'이 만들어낸 고안품이다. 그들은 '전제군주의 그늘' 속에서 말하며 역사적으로 국가 체제와는 공모관계에 있다. 그들은 '그러한 체제에 걸맞게 우리의 마음 속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정신의 절대 왕정(국가)을  발명해낸다.' 그들의 담론은 주권적 판단의 담론이며, '양식'에 의해서 합법화되는 안정된 주체성의 담론이고, 바위같이 확고한 자기동일성, '보편적' 진리, 그리고 (백인 남성적) 정의의 담론이다. '따라서, 그들의 사유를 실행한다는 것은 실제 국가의 목적들과 지배적인 대의들, 그리고 기존의 질서가 요구하는 사항들에 순응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합법적인 철학과 그로부터 분열증적으로 도주/탈주하고자 하는 들뢰즈/가타리의 '개 같은 철학'은 정반대의 철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를 실재적 제도(the State)의 목적과 동일시하여 혹은 지배적 기호와 동일시하여 기존의 질서의 요구사항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프로세스"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는 오직 역자만이 알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류의 오역이 국역본에는 모든 페이지에 걸쳐 출몰하며, 나로선 이 '희열들'을 다 감당할 자신이 없다. 맛만 보는 정도에서 다시 역자의 말로 넘어가는 이유이다.

"역자는 번역하는 다이어그램 기계입니다. 텍스트의 본질과 심오한 이해가 선행하지 않더라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개념의 전이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죠. 가장 좋은 예가 바로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종이다발입니다."(242쪽) 한 대목만 지적했지만, 이 '종이다발'과 '텍스트의 본질과 심오한 이해'는 서로 무관하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암시되었을 것이다. 쑥쓰러운 것은 이 또한 역자의 계획(손바닥) 안에 다 포함돼 있다는 것. 그러니 '기계 번역'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이빨만 아픈 일이다.  

마지막 역주에서의 충고: "이미 우리나라에 출간된 <천 개의 고원>, <안티오이디푸스>, <이성의 논리> 그리고 <차이와 반복> 등의 번역본의 페이지번호는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수정본의 출간여부가 정해지지 않았기도 하거니와 독자들은 우리말 번역본으로 돌려보내기보다는 영역본으로 돌려보내거나 불어원본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원본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통한 독자들의 즐거움을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덱스의 키워드를 사용하여 번역본이 아닌 토종 철학자들의 저서로 돌아가는 방법을 적극 추천합니다."(244쪽)

역자가 <이성의 논리>라고 한 건 <의미의 논리>를 가리킨다. 역자가 언급하고 있는 국역본들이 비록 미흡한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역자가 논할 수준은 넘어선다(그러니 적반하장이다). 그럼에도 역자의 충고는 적어도 이 마수미의 책에서만큼은 절대적으로 유효하다. 나는 독자들이 원본(영어본)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원본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통한 독자들의 즐거움을 존중하기 때문"이다(이 비문은 나의 것이 아니며 오타도 아니다. 역자의 문장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 역자가 풀서비스로 제공하는 희열에 어느 정도 몸을 푼 독자라면, 이제 '철학의 즐거움'은 다른 자리에서 맛보아야겠다. 이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다간 희열의 '괴물'이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길('괴물monstrosity'은 마수미의 책 마지막 장의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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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 2005-12-21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괴물스러운 번역본이로군요!!

dasein-x 2005-12-30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마 두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짜증이 밀려들어 책을 덮을 수 밖에 없었다. 굳이 원서와 대조해보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철학적 소양만 있다면 이 번역서의 오역을 발견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대한 해설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번역들이 곳곳에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로쟈님의 리뷰를 보기 전에, 서점에서 급하게 사들고 온 나자신의 성급함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autobalance 2006-01-02 0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천개의고원사용자가이드'를 번역했던 조현일입니다. 먼저 제가 번역한 글에 실망하셔서 몸둘바모르게 죄송하다는말씀을 드리고싶어요. 애초에 번역을 기획하는단계에선 여러분께 짜증을 드리기위해서 시작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만... 어쨌건 오역이 많고 수정되지않은상태로 출판되어 공부하시는분들께 제가 큰죄를 저지른것같습니다. 건축대학원재학시 교과서로사용하던 책이라 너무 감명깊게읽었고 번역본이나오면 독자들이 제가 읽은것처럼 재밌게 읽었으면좋겠다는 짧은생각에 성급하게 추진되었던것같습니다. 애초에 전문가분들께 의뢰를드리고싶었지만 여러분들이 이런책은 번역해도 표도안난다며 거부하시길래 짧은실력에 직접덤빈것이 화를 자초한것같습니다. 로쟈님께서지적하신대로 번역본에 문제가많았거니와 감수를통해서도 제대로걸러지지못해 공부하시는분들께 혼란만가중시킨점 사죄드립니다. 단순히 제 능력이 모자라서입니다.진작에 로쟈님같은분께 번역을 의뢰했더라면 좋았을텐데..책을 출판하고나서 재정적손해도 컸지만 오역을충분히거르지못한 회한이 더크네요.하지만제가좋아했던책을 번역하는동안은 너무행복했습니다.무책임한발언일지몰라두요..주제넘는요구인지몰라도(수정본을다시내지못하더라도) 오역을수정하고싶은데,로쟈님,다자인엑스님,도와주세요.대강 오역부분이라도 지시해주시면 정말감사하겠습니다.사례를 할 용의도있습니다.오역을수정할 가치조차없다생각하시면 무시하셔도 좋구요.어쨌건로쟈님이 오역을언급해주셔서 정말감사합니다.

로쟈 2006-01-02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께서 친히 방문해주셨군요. 오역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신다니까 저로선 더 덧붙일 말은 없습니다. 아마도 접힘과펼침에서 판권을 갖고 있는 듯하므로,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번듯한 개역본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가능하시면, 번역하신 3권의 책 모두). 국내에 들뢰지안들이 많기 때문에 적합한 역자나 교정자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충분한 비용만 투자하신다면). 앞으로는 좋은 책으로 대면했으면 좋겠습니다...
 

연말이면 으레 그렇지만 할일은 많고 마음은 바쁘다(그렇지만 손은 더디다!). 정리할 일들 가운데는 좋은 일들도 있지만 궂은 일들도 있다. 가급적이면 연초부터 인상을 구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지겨운 책읽기'도 몰아서 해보도록 한다(좀 하다 보면 지치겠지만).

 

 

 

 

제일 먼저 브라이언 마수미의 <천 개의 고원 사용자 가이드>(접힙과펼침, 2005). 이미 품절된 책인지라(자체 품절?) 굳이 이런 자리에서 다룰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없지는 않지만, 언젠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지라 일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정리해둔다. 마수미(B. Massumi)는 <천 개의 고원>의 영역자이며, 당연히 영어권의 대표적인 들뢰지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가이드'의 원제는 'A User's Guide to Capitalism and Schizophrenia'(1992)이다. 그러니까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 가이드북인 셈이다. 가이드북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개성적이며 따라서 그닥 친절하지는 않다. 친절한 걸 원한다면 우리식 가이드북인 <노마디즘>(휴머니스트)를 참조해야 할 것이다(물론 이 가이드북의 대상은 <천 개의 고원>이 아니라 <천의 고원>이지만).

마수미의 책은 상당히 오래전에 복사해두었었는데, 이처럼 번역돼 나왔길래 반가웠다, 라고 쓰면 좋겠지만, 사실 반갑지 않았다. 역자의 전력에 비추어볼 때 제대로 된 번역서일 확률이 지극히 낮았기 때문이다. 해서, 미덥지 않은 마음에 도서관에 주문이나 해두었었는데, 얼마전에 대출가능해졌고 내가 첫 대출자였다(궁금함보다는 주문에 대한 '책임감'에 떠밀려 대출했다). 고급스런 장정의 하드카바이긴 하지만, 역시나 읽어보는 시간이 아까운 오역서. 한데, 이건 역자 자신이 "이 책도 예외는 아니어서 수많은 오역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243쪽)라고 태연하게 밝혀놓고 있는 터여서 지적하기도 쑥스럽다(보통은 '혹 있을지도 모르는 오역은 역자의 책임이다'라고 적는다). 아아, 역자의 말은 겸양이나 아이러니가 아니라 액면 그대로인 것이니!('오역의 희열'이 아니라면 굳이 이런 번역을 감행하는 이유가 설명/이해되지 않는다.)

몇 걸음 뗄 것도 없이 첫 페이지부터 오역의 퍼레이드이다. 마수미의 책은 서문과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국역본은 네 개의 장으로 재구성하면서 'Pleasures of Philosophy'란 제목의 서문을 '희열'이란 장으로 옮겨놓았다. 해서,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은 고스란히 빠져있으면서 오역의 '희열'을 유감없이 제공해주는 번역문들을 약간만 맛보기로 한다(어차피 이해못할 철학이라면 즐기기라도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라는 식으로 좋게 생각한다면, 번역에 대해서 툴툴대는 나의 태도는 제법 옹졸한 것이 된다. 그러니 이런 얘기를 길게 늘어놓음으로써 나의 그 옹졸함을 굳이 더 과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원서의 첫 페이지 세번째 문단이 국역본의 두번째 페이지에는 이렇게 옮겨져 있다(문단이 나뉘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신분열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집니다. '철학'이 그 여러 이름 중 하나입니다. 그저 일반적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출(bastard)로서의 철학입니다. 서출이 아닌 합법적 철학은 '전제군주의 그늘'에서 말하는 순수이성의 '관료주의'가 낳은 아들이며 제도(the state)의 역사적 복잡성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이러한 관료주의와 복잡성은 우리 정신의 내부에서 실제적으로 기능하는 절대 제도(the State)를 생산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석은 주권적 판단의 담론이며, '건전한 논리'에 의해 합법적으로 인정된 안정적인 주체로서의 담론이며, 바위와 같이 견고한 담론이자, 백인우월주의적이며 '일반(universal)' 진리의 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를 실재적 제도((the State)의 목적과 동일시하여 혹은 지배적 기호와 동일시하여 기존의 질서의 요구사항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프로세스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8쪽, 강조는 나의 것)

들뢰즈 철학에 대한 단정적인 서술이므로 밑줄긋기를 해볼 만한 대목처럼 읽히지만, 문제는 제멋대로의, 보다 정확히는 정반대로의 번역이라는 것. 원문은 이렇다: "Schizophrenia, like those 'suffering' from it, goes by many names. 'Philosophy' is one. Not just any philosophy. A bastard kind. Legitimate philosophy is the handiwork of 'bureaucrats' of pure reason who speak in 'the shadow of the despot' and are in historical complicity with the state. They invent 'a properly spiritual... absolute State that... effectively functions in the mind." Theirs is the discourse of sovereign judgment, of stable subjectivity legislated by 'good' sense, of rocklike identity, 'universal' truth, and (white male) justice. 'Thus the exercise of their thought is in conformity with the aims of the real State, with the dominant significations, and with the requirements of the established order."(1쪽)

처음 네 문장은 국역본의 번역도 오역에 속하지는 않는다. 나라면, "분열증은,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처럼, 여러 가지 이름으로 행해진다. '철학'은 그 중 하나이다. 그건 여타의 일반적인 철학이 아니다. 아주 개 같은 철학이다." 정도로 옮기겠다. '개 같은 철학'(A bastard kind of philsophy)은 철학에서의 분열증, 혹은 분열증적인 철학이 갖는 이름이고 양상이다. 이 '잡종 개' 같은 철학과 대척점에 놓이는 것이 '합법적 철학'이고 '국가 철학'이다(State를 역자는 '제도'라고 옮겼는데, 납득이 가지 않는다. 비록 '제도권 철학' 정도라면 '국가 철학'과 의미가 통할 수는 있지만). 이 합법적 철학은 순수이성의 '관료들'이 만들어낸 고안품이다(역자는 'bureaucrats'을 '관료주의'라고 옮김으로써 이후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도록 해놓았다. 그럴 경우 이후에 나오는 'they'가 무얼 받는 건지 오리무중이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결과적으로 개 같은 번역이 돼 버렸다). 

다섯번째 문장부터 다시 옮기면 이렇게 된다: "합법적인 철학이란 순수 이성의 '관료들'이 만들어낸 고안품이다. 그들은 '전제군주의 그늘' 속에서 말하며 역사적으로 국가 체제와는 공모관계에 있다. 그들은 '그러한 체제에 걸맞게 우리의 마음 속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정신의 절대 왕정(국가)을  발명해낸다.' 그들의 담론은 주권적 판단의 담론이며, '양식'에 의해서 합법화되는 안정된 주체성의 담론이고, 바위같이 확고한 자기동일성, '보편적' 진리, 그리고 (백인 남성적) 정의의 담론이다. '따라서, 그들의 사유를 실행한다는 것은 실제 국가의 목적들과 지배적인 대의들, 그리고 기존의 질서가 요구하는 사항들에 순응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합법적인 철학과 그로부터 분열증적으로 도주/탈주하고자 하는 들뢰즈/가타리의 '개 같은 철학'은 정반대의 철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를 실재적 제도(the State)의 목적과 동일시하여 혹은 지배적 기호와 동일시하여 기존의 질서의 요구사항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프로세스"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는 오직 역자만이 알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류의 오역이 국역본에는 모든 페이지에 걸쳐 출몰하며, 나로선 이 '희열들'을 다 감당할 자신이 없다. 맛만 보는 정도에서 다시 역자의 말로 넘어가는 이유이다.

"역자는 번역하는 다이어그램 기계입니다. 텍스트의 본질과 심오한 이해가 선행하지 않더라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개념의 전이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죠. 가장 좋은 예가 바로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종이다발입니다."(242쪽) 한 대목만 지적했지만, 이 '종이다발'과 '텍스트의 본질과 심오한 이해'는 서로 무관하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암시되었을 것이다. 쑥쓰러운 것은 이 또한 역자의 계획(손바닥) 안에 다 포함돼 있다는 것. 그러니 '기계 번역'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이빨만 아픈 일이다.

 

 

 

 

마지막 역주에서의 충고: "이미 우리나라에 출간된 <천 개의 고원>, <안티오이디푸스>, <이성의 논리> 그리고 <차이와 반복> 등의 번역본의 페이지번호는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수정본의 출간여부가 정해지지 않았기도 하거니와 독자들은 우리말 번역본으로 돌려보내기보다는 영역본으로 돌려보내거나 불어원본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원본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통한 독자들의 즐거움을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덱스의 키워드를 사용하여 번역본이 아닌 토종 철학자들의 저서로 돌아가는 방법을 적극 추천합니다."(244쪽)

역자가 <이성의 논리>라고 한 건 <의미의 논리>를 가리킨다. 역자가 언급하고 있는 국역본들이 비록 미흡한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역자가 논할 수준은 넘어선다(그러니 적반하장이다). 그럼에도 역자의 충고는 적어도 이 마수미의 책에서만큼은 절대적으로 유효하다. 나는 독자들이 원본(영어본)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원본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통한 독자들의 즐거움을 존중하기 때문"이다(이 비문은 나의 것이 아니며 오타도 아니다. 역자의 문장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 역자가 풀서비스로 제공하는 희열에 어느 정도 몸을 푼 독자라면, 이제 '철학의 즐거움'은 다른 자리에서 맛보아야겠다. 이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다간 희열의 '괴물'이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길('괴물monstrosity'은 마수미의 책 마지막 장의 제목이다)... 

05. 12. 19.

P.S. 귀가해야 하는 탓에 오늘은 여기까지만(마수미의 책은 내일 반납할 것이다). 조만간 몇 권의 '지겨운 책읽기'가 이어질 것이다(이 얼마나 지겨운 희열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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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2-19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번역을 하는 건지...? 그리고 그 접힙펼침이라는 출판사와 역자와의 관계는 무엇일지.ㅎㅎㅎ

로쟈 2005-12-20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겹게 읽으시진 않겠지요?^^

palefire 2005-12-20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법한 오역시리즈군요. 저 책의 원전이 얼마나 녹록지 않은데요. 다른 누군가 개정판을 내면야 좋겠지만 마수미의 그 다음책인 [Parables for the Virtual]은 정말로 번역 잘하는 사람이 해야 할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