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의 성탄절'이란 제목을 달았다가 '브로드스키의 성탄절'로 고친다. 아래에 옮겨온 글은 원래 재작년, 그러니까 2004년 성탄절에 쓴 것인데, 러시아의 시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의  시 '성탄-1963'에 대한 '읽기'이다. 제목 그대로 성탄을 기념하는 시인데, 씌어진 것은 1964년 1월이다.  러시아에서는 축일을 구력에 따르기 때문에 1월 7일, 그러니까 내일이 성탄절이며,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이다(메리 크리스마스!). 어느 새 '재작년'이 돼 버린 기억을 잠시 떠올리며, 성탄시를 옮겨놓고 이미지들을 띄워놓는다(아래의 사진은 역시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데릭 월코트와 브로드스키. 월코트의 수상작은 <오메로스>(고려원, 1994)이다).

1987년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1940-1996)는 성탄절에 관한 시들만으로 시집 한 권 분량을 썼기 때문이다. 그는 거의 해마다 성탄을 기념하는 시들을 썼으며, 그가 쓴 성탄시들이 대략 20편 정도 된다. 17세 때부터 시 번역(주로 영시 번역)을 하면서 습작을 겸했던 이 마지막 러시아 시인이 (노동을 하는 대신에) 시를 쓴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게 되는 것이 1964년이다(예외는 예외로서 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는 것이 1972년이며, 거기서 그는 러시아어와 영어로 시를 쓰고(짐작에 영시인으로서의 그는 존 단과 T. S. 엘리엇 계보에 속한다) 강단에서 시를 강의한다(나보코프가 러시아 망명문단의 가장 탁월한 소설가였다면, 브로드스키는 가장 재능있는 시인이었다).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1988년에서야(그러니까 노벨상 수상 이후에서야) 비로소 그의 시집들이 러시아에서도 공식 출간되며, 1992-97년 사이에 4권짜리 전집이 출간됐고, 현재는 2권에서 7권짜리까지의 다양한 전집들이 나와 있다. 그리고, 뛰어난 에세이들과 두꺼운 인터뷰집들도. 한국에서 그가 소개된 것도 물론 노벨상 수상 직후이다. 기억에 두 권의 번역 시선집, <소래 없는 노래>(열린책들), <겨울물고기>(정음사)가 (부랴부랴) 나왔고, 나중에<아름다운 시대의 종말>(문학사상사)인가란 또 다른 시집이 번역/소개됐다(제목에 20세기가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안정효가 옮긴 그의 에세이집<하나 반짜리 방에서>(고려원)도 나왔는데, 이 책이 노벨상 수상 이전에 나왔는지 이후에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번역시집들이야 대개 그렇듯이 독서용이라기보다는 장서용이기 때문에(겨울 물고기란 시 정도만 인상에 남는다. 우리말로도 시였기 때문에), 브로드스키가 우리에게 소개는 되었지만, 데리다의 표현에 따르면 정말로 전달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다만, 노벨상 작가/시인으로, 고상한 상품으로 잠시 우리에게 다가왔다가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지나가버렸던 건 아닐까? 이젠 브로드스키를 전공한 러시아문학도들도 없지 않으므로(두엇 된다) 그의 작품세계가 보다 본격적으로 소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물론 읽기가 쉬운 건, 인터뷰와 에세이, 그리고 시집 순이다).

 

브로드스키에 대한 문단들을 쓰면서 CD로 나와 있는(국립문학박물관에서 제작한 것으로 16편의 시를 시인이 직접 낭송하고 있는데, 1시간이 좀 안되는 분량이다) 그의 시낭송을 오랜만에 들었는데, 얼핏 들으면 독일시를 낭송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약한 비음이 많이 섞여 있는데, 호흡기쪽에 문제가 있지 않았던가 싶다). 하여간에 그의 시들을 읽을 때는 그의 목소리를 참조하여, 그의 목소리로 읽게 될 것이다(이게 포노센트리즘음성중심주의이다. 형이상학에서뿐만 아니라 시 읽기에서 음성중심주의는 불가피하다). 그렇게 한번 시험 삼아 읽어본다. 그가 23살의 성탄절을 기념하여 쓴 시<1963년의 성탄절>(1964년 1월에 완성한 걸로 돼 있다)인데, 제목을 직역하면 그냥<성탄 1963>이다. 그러니까 이때의 성탄(聖誕)은 해마다 찾아오는 성탄절이 아니라, 기원 1년, 아기 예수의 탄생일을 가리킨다. 데리다의 표현을 빌면, 성탄절은 이 성탄의 반복(불)가능성에 근거한다. 아래는 1960년대말의 브로드스키.

 


전체 12행 중 마지막 4행은 이렇게 돼 있다(첫 4행을 반복/변주하고 있는데, 시 분석 시간이 아니므로 이런 자세한 내막은 생략한다. 그러니까 이 시의 1/3만 읽도록 한다. 일종의 맛보기로). 물론 (러시아어의) 키릴 알파벳으로 읽힐 수는 없기 때문에, 로만 알파벳과 우리말로 음역한다(굵은 글씨에 강세를 주어 읽으면 된다).


Volkhby prishli. Mladenech krepko spal.

Krutye svody jasli okruzhali.

Kruzhilsja sneg. Klubilsja belyj par.

Lezhal mladenech, i dary lezhali.

 

발흐 쁘리슐리. 믈라제네츠 끄렙까 스.

끄루띄예 즈슬리 아끄루좔리.

끄루쥘샤 스. 끌루샤 벨르이 르.

믈라제네츠, 이 다리.


이게 일단 무슨 뜻인가를 보이기 위해서 (대충 직역해본) 영역과 우리말 번역을 제시한다.


Magicians had come. A Baby was sleeping fast.

Round arches surrounded the trough.

Snows were swirling. White vapor was whirling.

The Baby was lying, and the gifts were laid.

 

동방박사들이 왔다네. 아기 예수는 곤히 잠들어 있었네.

둥근 아치의 기둥들이 구유를 둘러싸고 있었네.

눈들이 원무(圓舞)를 그리고, 하얀 입김이 맴돌았네.

아기 예수는 누워 있고, 선물들이 놓였다네.

 


세 명의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점치고서 예루살렘으로 찾아와 요셉과 마리아에게 선물을 증정했다는 얘기는 성탄과 관련하여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바이다. 그 동방박사가 러시아어로는 볼흐브(Volkhv)인데, 마법사/점성술사라는 뜻이다(물론 이 경우는 좋은마법사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magician이라고 옮겼는데(실제로는 어떻게 옮겨지는지 알지 못한다. 영어 성경을 읽은바 없기 때문에), 이게 우리말로 박사인 것이 재미있다. 이런 용례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면, 박사는 모름지기 별점도 볼 줄 알고, 제법 마법도 부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하니, 우리 주변엔 엉터리박사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가!).


 

 

 

 

 

 

 

 

옆길로 잠시 새는 얘기지만, 사실 박사(博士)란 말의 어의(語義)는 널리 아는 사람이다(넓을 박이니까). 그런데, 그 박사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1)대학에서 수여하는 가장 높은 학위. 또는 그 학위를 딴 사람. (2)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이런 박사의 줄임말이 이다. 내가 어제 김박, 이박하고 저녁을 먹었지.에서 김박’‘이박이 거기에 해당한다. 그럼, 쿠웨이트 박도?). 그러한 제도적인/비유적인 정의에서 나는 넓을 박의 원형을 발견하지 못하겠다. 어떤 일의 전문가를 박사라고 칭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요즘의 박사들은 밤하늘을 쳐다보는 대신에 한 우물만 판 사람들을 가리킨다(해서,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가 그러했듯이, 별만 쳐다보고 다니다가는 그런 우물에 빠지기 십상이다. 요즘은 철학 전공자들도 밤하늘을 쳐다보기보다는 우물이나 파지만).


그러니까 요즘 쓰는 박사라는 말에는 어떤 아이러니가 들어가 있다. 널리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한 주제에 대해서) 깊이 아는 사람, 다르게 말하면, 좁게 아는 사람박사이니까 말이다(가령 협사(狹士)가 아니라). 해서 이러한 추세에 따르자면, 널리 아는 박사는 박사로서 의심스러운 사람이며, 척척박사는 사이비-박사의 별칭이다. 좁게 아는 사람으로서의 진짜 박사들은 보통 자신의 무지를 용맹정진에의 표식 혹은 부산물로 간주하는바, 이들이 주로 내세우는 것이 전공 타령이다(이 전공에는 내 전공남의 전공이 있으며, 서로간에 간섭을 안 하는 것이 예의이다).

 


전공(專攻)이란 말의 어의는 오로지 (하나만) 친다이다(더 리얼하게 말하면, 한 놈만 족친다). 여기서 친다(攻)란 말을 보다 친근한 말로 바꾸면 물고 늘어지다가 될 것이다. 즉, 전공이란 자기가 물고 늘어지는 한 가지를 가리킨다. 가령, 연애가 전공인 사람은 연애만을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다. 연애(戀愛)가 뜻하는바, 밤낮으로 사모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즉, 사모/사랑에 눈먼, 연애에 눈먼 사람이다. 거기서 알 수 있는바, 오로지 하나만을 물고 늘어지기의 가능조건은 눈멂이다. 한 우물 파기의 전제조건 또한 눈멂이다. 오호, 두더지들! 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진짜 박사들, 곧 두더지-박사들이 주로 하는 일이란 자기 앞가림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들은 자기 앞가림을 위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을, 세상을 근심하며 살피는 눈을 찌른 이들이다. 보고 있지만 보지 않기 위해서, 알고 있지만 모른 체하기 위해서, 혹은 알아야 하지만 알지 않기 위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 이 두더지-박사들과 대조되는 것이 마법사/점성술사로서의 동방박사들이다. 그들은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고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감하고 사막의 먼 길을 찾아온다. 예루살렘의 한 허름한 마구간까지(우리는 흔히 마구간이라고 하는데, 러시아에서 알게 된 거지만 동굴이라고도 있다. 마구간이 동굴에 있었다고 하면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특별한 탄생, 곧 성탄(聖誕)을 축하하기 위해서 말이다. 인용한 브로드스키의 바로 앞 시구에 따르면, 바로 이 날 밤부터 삶의 계산이 시작되었다(쥐즈니 스트 나취짜 스 에또이 취). 여기서 삶의 계산(zhizni schet)라는 건 브로드스키의 고유한 표현인데, 영어로 하면 account of life정도가 될 듯하다. 그건 무슨 뜻일까?


단순하게 말하면, 우리가 쓰고 있는 서력(西曆)의 시작이 바로 이 기원년, 즉 애노 도미나이(A.D.; Anno Domini)로부터가 아닌가. 그러니까 아기 예수가 탄생한 바로 그날, 바로 그 해로부터 삶의 카운트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말은 틀린 얘기가 아니다. 그 카운트가 시작된 것이 바로 2004년 전이고 오늘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시간을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관습을 고려해본다면(이건 거의 관습법이다), 성탄일이 갖는 에포크(epoch)적 의미를 간취할 수 있을 것이다. 성탄절은 그런 에포크적 계기의 반복(불)가능성을 표시한다.


일상적으로도 성탄절인 25일부터 31일까지는 한 해의 마지막 한 주이다. 해서 한 해의 계산(=어카운트)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한 해의 손익을 계산하고(무얼 잃고 건졌는가? 누굴 차고 누구한테 채였는가?), 몇 점짜리 한 해였는가를 가늠해보는 것이다. 그걸 좀 좀스런 차원이라고 한다면, 좀 거창하게는 인생/인류의 구원에 대해서 계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지나온 나/우리의 생애가 구제/구원 받을 만한 것인가, 아닌가. 이런 식으로 삶의 계산은 복합적이며 복잡하다(왜 아니겠는가? 하나부터 세기 시작했지만, 벌써 2004이고, 곧 2005가 되는데!). 성탄일이 갖는 이러한 에포크적 계기는 현상학적 에포케(epoche), 곧 판단중지의 계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간의 원점이면서 계산의 영점이기 때문이다. 그걸 브로드스키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그의 시구를 다시 읽어보자. 이번엔 반복되는 소리에 주의하면서.


발흐븨 쁘리슐리. 믈라제네츠 끄렙까 스빨.

끄루띄예 즈보듸 야슬리 아끄루좔리.

끄루쥘샤 스녝. 끌루빌샤 벨르이 빠르.

리좔 믈라제네츠, 이 다릐 리좔리.


여기서 반복되는 소리인 끄루(끌루)이란 뜻의 러시아어 끄룩(krug)과 어원을 같이한다. 그러니까 기의(시니피에)상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기표(시니피앙)/소리상으로는 원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백코러스나 백댄서처럼). 그걸 나는 둥근(아치), 원무(를 그리고), (돌았네)라는 식으로 옮겨봤지만(원무를 그리다, 맴돌다는 원래 소용돌이치다란 동사를 옮긴 것이다), 그것은 소리의 번안일 뿐이지 번역은 아니다. 시에서는 음향적인 내용이 논리적인(=로고스적) 내용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시의 번역가능성은 동시에 번역불가능성이다. 아니, 그 불가능성을 옮기는 것이 시의 번역이다. 다행히, 시에는 그런 음향적인 내용 외에도 논리적인 내용이 가미가 되며, 그걸 옮기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인용한 대목의 중간 두 행을 보자.


둥근 아치의 기둥들이 구유를 둘러싸고 있었네.

눈보라가 원을 그리고, 하얀 입김이 맴돌았네.


여기서 둥근 아치와 (마구간의) 구유는 의미론적으로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들이다(즉 8월의 크리스마스같은 것이다). 둥근 아치가 사원/성당(聖堂)의 배경이라면 구유는 마구간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치들이 구유를 둘러싸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시인은 아기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을 성당화한다. 이것이 소위 성체화(聖體化; transubstantiation)이다.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변화되는 것이 바로 성체화이다(성체화는 나의 번역이고, 신학에서 뭐라고 번역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이 기적아닌가? 마구간이 성소(聖所)가 되는 것 말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이 가져온 이 기적은 바다를 가르는 식의 모세의 기적과는 다르다. 모세의기적이 반복적인 일상에 날벼락을 가져오는/내리는 것이라면, 예수의 기적은 그냥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즉 무의미한 삶이 어느 순간 의미 있는 삶으로 전도되는 것이다(즉, 땡전 한푼 없던 삶이 뭔가 의미깨나 있는/있을 삶으로 카운트되기 시작하는 것). 이를 테면, 그것은 기적 없는 기적(miracle without miracle)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그리고 그의 삶은 그러한 기적, 기적 없는 기적의 가능성을 지시한다.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니.라는 식의 포교 문구를 나는 그냥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참고로 말하자면, 불경스럽게도 나는 신도 내세도 구원도 믿지 않지만, 시는 믿는다. 브로드스키가 보여주듯이 시에서도, 그리고 문학에서도 성체화의 기적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구원 없는 구원 말이다. 여보게, 예수 가라사대, 이 마구간 같은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군! 여기가 성당이요, 천국이래. 아니, 궁전이고, 타워 팰리스래! 그래요? 거기도 마구간이래요?

 

이어지는 행에서 시인은 눈들이 원무를 그리고, 하얀 입김이 맴돌았네.라고 쓰는데, 눈들은 아마도 천사들을 대행하는 듯하다(하얀 입김은 아기 예수의 여린 입김일까?). 그런데, 어인 눈일까? 원래의 배경에서라면, 즉 예루살렘에서라면 눈보라 대신에 몰아쳐야 할 것은 모래바람 아닌가? 여기서 힌트를 주는 것은 제목의 1963이다. 즉 1963년에 젊은 (자칭) 시인 브로드스키가 놓여있는 공간, (눈보라 치는) 레닌그라드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참고로, 1960년대 러시아시는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옙투센코나 보즈네센스키 등의 체육관 시인들이 한쪽에 위치하고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레닌그라드파라 불린 언더그라운드 시인들이 있었는바, 안나 아흐마토바가 이들의 대모(大母)였으며 브로드스키는 이 후자에 속한다. 그는 전자의 시인들을 혐오했다).


해서, 마구간 바깥에 눈들이 원무를 그린다(눈보라의 소용돌이가 일어난다)는 배경설정은 공간적인 오버랩이면서 시간적인 오버랩이다. 그것은 1963년이란 시간을 기원년의 시간으로 성체화한다. 그런 식으로 고작 두 행을 가지고서 시는 마구간을 성소로, 그리고 1963년을 그리스도의 시간(in the year of our Lord)으로 전환시킨다. 이것이 시의 기적이며, 이 기적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기 예수의 탄생이다. 그러니, 브로드스키가 해마다 성탄에 관한 시를 쓰고자 했던 것은 이해할 만하지 않은가? 인류 역사상 그만한 이벤트를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는가?


예수의 탄생을 축하/축복했던 우리의 동방박사들은 그런 의미에서 브로드스키의 선조(先祖)이자 시인들이다. 그들이 어떤 축원의 말을 남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시에서는 그들이 남긴 선물이 기록돼 있다. 시의 마지막행이다.


아기 예수는 누워 있고, 선물들이 놓였다네.

 


원시에서 누워 있다’‘놓여 있다는 같은 동사이며, 이 시행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구문적으로도 동일하다. 그것이 암시적으로 뜻하는 바는 아기예수=선물이라는 것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이라는 사건이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뜻하는 선물이었다면, 동방박사들은 인간을 대표해서 거기에 답례를 했던 것이다(그러니까 동방박사들이 먼저 선물한 것이 아니다). 이 선물의 교환이 신과 인간 사이의 비대칭적 교환이다. 그것이 비대칭적인 것은 아기 예수(단수)와 선물들(복수)의 교환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마지막 시행을 다시 읽어보자.


리좔 믈라제네츠, 이 다릐 리좔


이 시 전체가 원환적인 구조로 돼 있다고 언급했지만, 이 마지막 시행도 원환적이다. 같은 소리로 열리고 닫히기 때문이다. 보통 원(환)은 완전성과 영원성의 상징이다. 그러니 성탄에 관한 시가 그러한 원환적 구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반면에 이 시에서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내 생각에) 아기 예수의 부모, 즉 요셉과 마리아가 등장하지 않는 점이다(앞부분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건 좀 특이한 일이다(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이게 왜 그럴까를 캐기 위해서는 아마도 브로드스키의 다른 시들과 함께 성탄과 관련한 시와 그림들을 좀더 뒤적여봐야 할 것이다. 그런 게 ‘공부’이긴 하지만, 내가 당장에 해치울 수 있는 공부는 아니다. 그런 공부를 하기에는 돈깨나/시간깨나 부족하다. 현재의 나로선 말이다...

 

 

06. 0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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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07 0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1-07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사람의 운명이란 게 그렇죠? 저 같은 경우는 지도교수님의 '재미있는' 강의에 빠지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게 '경지'인지 '지경'인지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돌바람 2006-01-10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한 편의 조각을 이리 감상하는 것도 참 특별한 경험입니다. <겨울 물고기>랑 <하나도 채 못되는>(성원, 한벙운 옮김, 1987)만 맛보고 드는 단순한 생각 하나.
브로드스키는 1972년 미국으로 망명한 후의 자신을 이렇게 보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나는 분명하고 명확하게 그들을 볼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이 얘기는 내 어린시절의 향수 때문이 아니라 내가 떠나온 모국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 지금이 아닌 그 당시 그들의 생활 속에는 지금의 내가 어린 나이로 기억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나를 잘 기억하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 그러나 지금의 나,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글을 쓰고 있는 나를 그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더우기 지금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지 않은가? 아! 지금이 미국과 나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는데, 그리고 이것이 내가 그들과 우리의 방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

인용한 부분에서 '그들'은 시를 쓴다는 이유로 그를 감옥에 쳐넣은 그의 조국일 수도 있고 직접적으로는 그를 기억하는 부모이자 페테르부르크인들(레닌그라드인이 아닌.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일 수도 있겠지요. 포커스를 맞춰서 본다면, 브로드스키는 예수를 부모의 기억과 예수가 예수로서 자신을 바라보는(1973년 이후의 브로드스키처럼) 공동의 기억 공간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그러니까, 예수가 예수가 되려면 예수가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저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끼워넣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것이 내(예수)가 그들(요셉과 마리아)과 우리의 방(성탄??)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

이건 좀 위험한 생각이지만, 예수가 예수가 되려면 그의 탄생은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동방박사에게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깨달은 이후(브로드스키에게는 1973년 이후가 되겠지요) 바라보는 자신의 탄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참 인간적인 예수이지요. 위의 인용구는 브로드스키가 그의 에세이에서 꾸준히 강조하는 맥락이라는 점에서 인용한 것이어요.^^

*에세이만 보고 끼워맞추다 보니 기냥 억측이 난무합니다. 시집이 없으니 으그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어요. 아, 하나 더. 안나 아흐마토바의 시도 쬐끔 맛보여주심 안 되나요?

로쟈 2006-01-10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미하며 읽으셨군요.^^ 브로드스키의 에세이까지 소장하고 계신 분은 드물게 만나는지라 반갑습니다. 제가 분석한 시는 청년 브로드스키의 소품이고, 같은 테마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두루 살펴봐야 종합적인 의견을 제출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아흐마토바의 시도 읽으신 듯한데,'푸슈킨과 아흐마토바'란 주제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아흐마토바 시 읽기가 언제 가능할는지는 미지수입니다. 돌바람님의 주문을 한켠에 담아두고 있겠습니다...

돌바람 2006-01-11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청년 시절의 시로군요. 헛다리 짚었네요.
아흐마토바의 시는 브로드스키를 통해 부분 인용된 것들만 보았답니다.
 

2006년의 여정을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 대부분은 지난해 12월에 '막차'로 출간된 책들이다. 그래도 새해의 기분을 좀 내기 위해 첫번째 책만큼은 2006년에 나온 책으로 꼽는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의 <자서전>(미메시스, 2006)이 그것이다. 원저는 'An Autobiography'(1943).

건축 분야에 문외한인지라(나는 아직 전세집에 산다) 나로선 저자의 이름이 생소한데,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구겐하임 미술관'이 그의 작품이란 소개를 보고서야 대충 지명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위의 사진 참조). 그는 "70여 년 동안 천여 점에 달하는 건축 작품을 남긴 라이트는 많은 건축가들이 20세기 최고의 건축가로 손꼽는 인물"이며, "이러한 평가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현재 그에 관련된 논문과 저작만도 2천여 편에 달한다"고 한다.

소개를 좀더 따라가보면, "그는 살아 있을 때부터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탁월한 디자인과 독창적인 이론에 있어서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인생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처럼 파란만장하였기 때문이다. 책은 이 위대한 건축가가 자신의 삶과 사랑, 그리고 건축에 관한 모든 것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적어나간 기록으로, 건축이 자연과 소통하고 융합해야 한다는 그의 '유기적 건축 이론'과 혁신적인 양식들이 과연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라이트 자신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그의 건축과 생애와 관련된 다양한 사진 자료가 함께 실려 있으며, 라이트의 작품들을 연도순으로 정리한 별책을 첨부하여 그의 작품 세계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설명보다 사실, 나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위대한 건축가는ㅡ필연적으로ㅡ위대한 시인이다. 그는 자신이 속한 순간과 나날과 시대의 독창적인 해설가여야 한다"는 라이트의 말이다. 자신이 '건축업자'나 '건축기술자'가 아니라 '건축가'라는 걸 단 두 문장으로 압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도면 '저자'로서의 자격도 충분하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그의 자서전은 3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1장이 '가족과 친구들', 2장이 '일', 그리고 3장이 '자유'이다. 92세의 장수를 누리기도 했지만, 그만하면 남부럽지 않은 생애이다.

Annunciation Greek Orthodox Church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하나 정도만 잠시 감상해보자. 수태고지 그리스 정교사원(Annunciation Greek Orthodox Church)이라고 돼 있는데, 1956년작이고 위스콘신주의 와우와토사(Wauwatosa)에 있다고 한다. 세상은 넒고 사람뿐만 아니라 건축도 가지가지라는 걸 새삼 알게 해준다.

 

 

 

 

로이드 라이트에 대해서는 작년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자연을 품은 공간 디자이너>(살림)라는 문고본 소개서가 이미 나와 있다. 검색해 보면 품절된 책이지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태림문화사, 1998)란 소개서도 있고. 교양을 조금 더 확대하자면, 20세기 건축에 대한 안내서들을 몇 권 꼽아볼 수 있겠다. 클라시커 시리즈의 <20세기 건축>(해냄, 2002)부터 김석철의 <20세기 건축>(생각의나무, 2005)까지. 나는 주로 '사유의 건축'에 관심이 있지만, 언젠가 전세살이를 좀 면하게 되면 이런 건축'작품'들에 대한 견문도 넓혀보아야겠다.

 

 

 

 

한편, 로이드 라이트가 미국 최고의 건축가라면, 스페인이 자랑하는 최고의 건축가는 단연 안토니 가우디(1852-1926)이고, 이 가우디만큼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이름이다. 그의 건축들만큼이나 특이한 '가우디'란 이름부터가 기억을 용이하게 할 뿐더러 이미 그에 관한 다수의 책들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건축관련서를 읽는다면, 가장 먼저 손에 들어볼 만한 책들인데 이 분야 번역서들의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평은 들은 바 있어서 미뤄두고 있었다. 건축 분야에도 주변에 전문 리뷰어가 있었으면 싶다.

  

 

 

 

한편, 철학이란 게 '생각의 집짓기' 혹은 '개념의 건축술'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만큼 '건축과 철학'이란 주제는 유구한 주제이다. 보드리야르의 <건축과 철학>(동문선, 2003), 데리다 등이 쓴 <공간의 논리>(현대건축사, 2001), 그리고 라이크만의 <들루즈건축>(접힘과펼침, 2004) 등이 그것인데, 공통점은 모두 번역이 미덥지 못하다는 것. 그간에 건축 분야의 책들에 선뜻 손이 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생각의 집짓기'란 표현을 처음 본 건  김윤식 문학선으로 나온 <작은 생각의 집짓기>(나남, 1985)에서였다. 대학 1학년 때 읽은 듯한데, 그맘때 읽은 책들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건 박이문의 <시와 과학>(일조각, 1975). 철학과 사르트르에 대한 열정을 나는 그에게서 배웠다(이를 테면, '이문유치원' 혹은 '이문초등학교'?). 

지난 연말에 읽은 박이문 선생의 '자서전격' 저작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미다스북스, 2005)에 실린 저작 목록을 보니까 시집을 제외한 30여권의 책들 가운데 적어도 20권 이상의 책들을 사서 읽었다(나중에 박이문론을 써도 되겠다). 그런데, 이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철학적 여정의 피날레는 '둥지의 철학'이 될 거라고 한다. 아직 저자의 구상이 최종적인 형태로 구성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경우에 '둥지로서의 철학'이 실용주의적 처세술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혹은 우리는 철학을 하기 위해서 모두 '새'가 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새-되기? 새됐어?). 혹은 (애독자로서) 우려된다. 허무주의자의 '행복'이 부럽지 않은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  

어쨌든 건축가의 자서전을 제일 처음 꼽은 것은 새해를 설계하는 시기에 세기의 건축가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설계했었나 들여다보는 것도 유익한 참고가 될 듯해서이다.

그리고 두번째 책은 미국 철학자 알폰소 링기스의 <낯선 육체>(새움, 2006). 아직 알라딘에는 책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올라와 있지 않지만, "알폰소 링기스는 현상학과 실존주의, 현대철학, 윤리학에 관한 다수의 저서를 발표하고 있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작가이다." 이 사실을 내게 알려준 건 책을 간행한 새움출판사쪽이다(표지만 봐서는 무슨 '사진집'류가 아닌가 착각하겠다). 보도자료를 보내주셨는데, 반갑게도 나의 관심분야와 맞아떨어지는 책이기도 해서 주저없이 이 자리에서 소개한다.

'알폰소 링기스'란 이름이 다소 생소한데, 조금 검색해보다가 나는 무릎을 쳤다. 레비니스의 <전체성과 무한>(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등의 영역자인 것이다! 소개에 따르면 그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미국에 소개하고 탁월하게 주해한 선구자로 그의 사유를 계승 발전시킨 학자이다. 링기스는 또한 메를로-퐁티, 클로소프스키 등의 주요 저서들을 영역하고, 그들의 이론을 심화시키는 한편 비판적으로 경쟁하면서, 현대를 사는 육체의 문제를 입체적으로 사유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낯선 육체>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되는 링기스의 저서로 삶정치(biopolitics)에 대항하는 정체성에 대한 면밀한 탐구를 담고 있다."(나는 '생체정치'라고 옮기는 'biopoltics'에 관한 책으론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도 근간 예정인 걸로 안다. 조만간 '생체정치'는 국내 인문학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를 것이다.) 그러니 한번 읽어봄 직하지 않은가.

 

 

 

 

세번째 책은 베른트 하인리히의 <까마귀의 마음>(에코리브르, 2005). 지난 연말에 나온 책들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책인데(표지가), 600쪽이 넘는 분량이니까 '까마귀'를 제목에 달고 있는 책들 가운데 가장 두껍지 않을까 싶다(일단 그게 마음에 든다). 저자는 미국의 저명한 동물행동학자라고 하며, 책은 그의 대표작이라고(그의 책으론 <숲에 사는 즐거움>, <동물들의 겨울나기>가 더 소개돼 있다). 

소개를 잠시 옮겨본다: "하인리히는 미국 동북부 메인 주 숲속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면서 동물들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연구하고 사색하며 지내는 현장 학자이다. 특히 이 책의 주인공인 '도래까마귀'는 1980년대부터 근 20년간 저자가 여러 개체들을 자식처럼 길들이며 함께 지내왔던 새이다. 저자는 인간의 기준으로 동물의 생태를 섣불리 몇몇 개념으로 추상화하기보다는 자기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일궈나가는 동물들의 생활상과 행동 하나하나를 충실히 묘사해간다. 600쪽에 달하는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은 그런 실증적인 관찰과 체험의 기록이다. 그런 단단한 기초 위에서 저자는 비로소 조심스럽게 자신이 관찰한 한 숭고한 새의 마음의 세계, 즉 그들의 의식과 지능, 다른 포식동물과의 공생, 놀이, 인간과의 우정, 가족애를 긍정한다." 요컨대, 까마귀란 종의 '평전'쯤 되겠다.

저자가 동물행동학자'라고 돼 있는데, 사실 '동물행동학'의 역사가 그리 오래된 건 아니다. 197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수상한 콘라트 로렌츠, 니코 틴버겐, 폰 프리슈가 그 원조들이기 때문이다. 이 중 대중적으로  저명한 과학자는 역시나 <야생거위와 보낸 일년>(한문화, 2004)의 저자 로렌츠이며(창가시고기 연구로 유명한 틴버겐은 저명한 동물행동학자이자 저술가 데즈몬드 모리스의 스승이기도 하다. 프리슈의 전공은 꿀벌들의 의사소통 수단인 춤, 즉 벌춤), '야생거위'에 대한 그의 연구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조류의 '각인' 행동을 발견함으로써 유명해졌는데, 그걸 이용해서 그는 거위들의 '어미' 행세를 했다. 사진은 '자녀들'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있는 '어미' 로렌츠). 한편, <핀치의 부리>(이끌리오, 2002)는 생태학과 진화론에 걸친 저작이지만, 새를 다룬 책들 가운데 가장 명망이 높은 책이므로 같이 되새겨둔다.

이솝우화의 단골손님이기도 하지만, 문학에서 '까마귀'와 관련해서 내게 떠오르는 이름은 카프카와 포우, 두 작가이다. 카프카란 이름이 체코어로 '까마귀'를 뜻하기도 한다는 카프카(그 경우엔 '까프카'라고 해야겠다)와 "Nevermore!"란 후렴구가 유명한 시 '까마귀(The Raven)'(1848)의 저자 포우 말이다. <까마귀>의 마지막 연은 이렇다.  

And the raven, never flitting, still is sitting, still is sitting
On the pallid bust of Pallas just above my chamber door;
And his eyes have all the seeming of a demon's that is dreaming,
And the lamp-light o'er him streaming throws his shadow on the floor;
And my soul from out that shadow that lies floating on the floor
Shall be lifted - nevermore!

그러고도 갈가마귀는 날아가지 않고 아직도 앉아 있었네.
나의 침실문 바로 위 팔라스의 창백한 흉상 위에 아직도 앉아 있었네.
그의 두 눈을 꿈꾸고 있는 악마의 온갖 표정을 담고-
새를 흝어내리고 있는 등잔불빛이 마루 위에 그의 그림자를 던져주는데
마루 위에 누운 채 떠돌아다니는 나의 영혼은 그 그림자를 떠나서는
두 번 다시 들리우지 못하리라- "이젠 끝이야"




 

 

한데, 책소개는 아직 덜 끝났다. 포우 얘기도 나온 김에 꼽는 책은 '미국 정신의 르네상스를 이끈 우정'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이레, 2005). 두 사람의 이름은 지난주에 정현종 시인의 글들을 읽다가도 만날 수 있었는데, 사실 나는 <자연>의 저자이면서 초월주의/초절주의 운동가/철학자 에머슨과 <월든>과 <시민 불복종>의 저자 소로우 간에 어떤 생각의 차이가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신간의 제목이 눈에 띈 건 그런 배경 때문이다.   

소개에 따르면,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초월주의 운동을 이끌던 에머슨은 1837년 자신보다 열네 살이나 어린, 하버드 대학에 다니던 스물한 살의 고학생 소로우를 만난다. 서로의 환경은 매우 달랐지만 소로우와 에머슨은 곧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소로우가 마흔네 살에 죽을 때까지 우정을 지켰다. 에머슨은 소로우가 탁월함을 발휘할 수 있게끔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에머슨과 소로우 간의 25년에 걸친 '비밀스런 우정'이 탄생하게 되었고, 책은 그걸 기록하고 있다고.

"지은이는 소로우와 에머슨의 교우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미국정신사의 두 영웅의 모습을 추적한다. 그가 밝히는 이 둘의 관계는 보통의 친구관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경쟁과 협력이 있는가 하면, 사랑과 질투의 시선도 교묘하게 교차한다. 언제나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했던 에머슨이 소로우의 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일화, 에머슨이 영국강연 여행을 떠난 9개월 동안 그의 집에서 리디안과 아이들을 돌보는 에머슨의 역할을 하면서 소로우가 겪었던 심리적 갈등도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니까 시간이 나면 일독해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꼽는 책은 저명한 SF작가 아서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옹기장이, 2005). 원저는 'Rendezvous with Rama'(1973)이며, 발표 당시 휴고상, 네뷸러 상, 존 캠벨 기념상, 주피터상 등 주요 SF 문학상을 모두 수상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갖고 있는 소설이라고 한다(번역본은 이번에 재출간되었다). 그렇긴 하나 '장르소설'을 잘 읽지 않는 그의 소설들을 나는 읽어본 바 없고, 다만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았을 뿐이다.

사실 아서 클라크의 책을 꼽은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는데, 그건 그가 <스타십 트루퍼스>의 저자 로버트 하인라인과 함께 3대 과학소설 작가로 꼽힌다는 아이작 아시모프를 떠올려주었기 때문이다. 아시모프의 대표작은 <파운데이션>이라고들 하지만, 내가 재미있게 읽은 건 그의 자서전, 즉 <아이작 아시모프 자서전>(작가정신, 1995)이다. 1995년 연말에 출간된 그 책을 나는 딱 10년전, 그러니까 1996년 정초에 읽었다(2권짜리를 읽었는데, 미진하게 끝나길래 출판사에다 '이게 끝이냐, 혹 잘라먹은 거 아니냐?'란 항의성 전화까지 한 적이 있다. 출판사 답변은 '그게 다예요'였고, 관심에 감사하다며 다른 책을 한권 보내왔었다.) 그 자서전이 현재는 절판된 듯하여 아쉽다(내 책은 아직 버리지 않았으니까 어디 박스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여하튼 시간이 되시는 분들이라면 이 '3대 작가'들의 세계에 한번쯤 빠져보시길.

 

 

 

 

하지만, SF로 죽일 시간은 부족하면서 한편으론 '진지함'은 남아도시는 분들은  수전 그린필드의 <미래>(지호, 2005)나 에드워드 윌슨의 <생명의 미래>(사이언스북스, 2005)를 일독해보시길. 전자는 원제가 'Tomorrow's People'(2003)이고(부제는 "내일의 과학은 우리의 삶과 정신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 후자는 원제가 'The Future of Life'(2002)이다. 한해의 시작때면, 올 한해뿐만 아니라 더 먼 장래까지도 한번쯤 내다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게 인지상정인데, 그런 인지상'정(情)'에 '지(知)'를 보태는 데 참고할 만한 책들이겠다. 비슷한 성격의 책으론 보다 중립적인 것으로는 존 브록만(브로크만)이 엮은 <앞으로 50년>(생각의나무, 2002)도 있다.

오늘자 한겨레 책-지성 섹션에는 이 브로크만과 관련한 기사가 표제를 장식했는데, '새해 아침의 생각'으로 던져진 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위험한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란 질문이고, 이건 <디제라티, 디지털 시대의 파워엘리트>(황금가지, 1999), <제3의 문화>(대영사, 1996)의 저자/편집자로 유명하다는 과학저술가이자 편집자, 그리고 '세계물음센터'(www.edge.org)의 운영자인 브로크만이 1997년부터 연례행사로 벌이고 있는 연말 이벤트의 일환이라고 한다. 올해가 10번째인데,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몇몇 스타 과학자들의 대답을 옮겨와본다(*최근에 책으로 출간됐다. <위험한 생각>(갤리온, 2007)이 그것이다).

Q. 당신이 생각하는 위험한 생각이 있다면?  

브라이언 그린(이론물리학, <엘리건트 유니버스>·<우주의 구조>(승산))=여러 우주들이 존재한다는 생각, 우리는 ‘우주들’(multiverse)이라 불리는, 광대한 우주(universe)의 집합 가운데 하나일 뿐일지 모른다는 생각.

 

 

 

 

리처드 도킨스(생물학,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조상 이야기>(까치))=차가 고장나면 차를 탓하는 것처럼 잘못된 비난과 책임 덮어씌우기는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더 진실에 가깝게 분석하는 일을 그만두고 지름길로 가는 수단으로 만들어낸 의도적 허구라는 게 나의 위험한 생각이다.

 

 

 

로드니 브룩스(로봇공학, <로봇 만들기>(바다출판사))=내가 가장 우려하는 바는 비생명체가 생명체로 바뀌는 자발적 변형이 극히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그것이 (지구에서) 단 한번 일어났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수십년 안에 그것이 매우 희귀하게 일어나는 것이라는 여러 증거들을 얻는다면 어찌될까. 우리는 우주에서 완전히 외톨이 생명체일까.

 

 

 

 

다니엘 데넷(과학철학, <다윈의 위험한 생각>)=우리는 정보 홍수 속에서 익사하거나 익사하지 않을 것이다. 익사한다면, 우리는 정보 과식에 의해 심리적으로 압도돼 희생될 것이며, 상상할 수 없는 정보 과잉 앞에서 삶의 질을 높이는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될 것이다. 익사하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선조들과는 아주 아주 다른 존재가 돼 있을 것이다.

 

 

 

 

로렌스 크라우스(물리학, <외로운 산소 원자의 여행>(이지북))=세계는 근본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

 

 

 

 

제레미 번스타인(물리학, ·<오펜하이머>(모티브북))=가장 위험한 생각은 우리가 플루토늄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왜 작용하며 얼마나 안정적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이 무한한 미래에 안전하게 저장될 수 있다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셰리 터클(심리학, <스크린 위의 삶>(민음사))=컴퓨터 문화 안에서 살며 몇 세대 지나고 나면 시뮬레이션은 완전히 자연스런 일이 될 것이다. 전통적 의미의 진정성은 가치를 잃어 한 시대의 흔적으로 남는다.

 

 

 

 

하워드 가드너(심리학, <체인징 마인드>(재인) <다중지능>(김영사))=나의 위험한 생각은 (인간의) 도덕 정신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생각, 즉 권력욕이나 즉흥적 만족, 적의 절멸 같은 다른 동기들에 의해 도덕정신이 동원되거나 압도될 수 있다는 것.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심리학, <몰입의 즐거움>(해냄) <플로>(한울림))=정치경제가 다른 어떤 가치에 앞서 자유시장을 만능해결책으로 지니고 있다는 생각. 그게 위험한 것은 자유시장이 일부엔 해택을 주지만 대다수엔 대가를 치르도록 요구하는 지성적이고 정치적인 사기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핀커(심리학, <빈 서판-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사이언스북스))=평균 능력과 기질이라는 측면에서 인간마다 집단마다 유전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다음 십년 동안 위험한 생각이 될 것이다.

 

 

 

 

리처드 리스벳(심리학, <생각의 지도>(김영사))=우리가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존 앨런 파울로스(수학, <수학자, 증권시장에 가다>(까치)·<수학 그리고 유머>(경문사))=‘초자연적 존재는 있을까’ 하는 의문은 진부하다. 더 근본적인 의문은 ‘우리는 존재할까’ 하는 물음이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지닌 약간 통일적 실체, 그 이상의 어떤 존재일까.

 

 

 

 

린 마굴리스(생물학, <생명이란 무엇인가>(지호))=섬모를 이용해 박테리아는 먹이를 향해 헤엄치고 유해한 가스를 피해 헤엄친다. 뜨거움을 피하고 불빛을 좇는다. 그래서 우리 감수성은 박테리아 조상의 감각 섬모에서 직접 진화했다는 생각, 그래서 박테리아는 우리의 친구나 적이 아니라 바로 우리라는 생각.

 

 

 

 

다니엘 힐리스(물리학, <사이언스 북>(공저, 사이언스북스))=우리 모두가 가장 위험한 생각들을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 그 자체.

 

 

 

여기에 나의 가장 위험한 생각을 덧붙이자면, 끔찍한 일이지만 이런 소개를 올해도 계속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06. 01. 05 - 06.

 

 

 

 

P.S. 연말에 나온 '고전'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재출간된 <아미엘 인생일기>(동서문화사, 2005)이다. "19세기 스위스의 문학자이자, 철학자인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이 40년동안 쓴 일기를 엮은 책"으로 "수양서 성격을 띠고 있는 일종의 사적인 에세이"이며 "인간과 역사에 대한 고민, 개인과 사회에 대한 통찰, 인간 내면에 대한 반성과 고뇌를 받아들이는 한 개인의 치열한 모습을 담고 있다."

"1883년에 처음 출간되었으며, 1923년 프랑스에서 다시 발간되어 식민지 쟁탈과 영토분쟁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인간과 생명, 윤리와 도덕에 대한 존엄성이 퇴색되어 가던 혼란기의 유럽에 큰 반향과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완역되어 선보인다"니까 관심을 두어봄 직하다. 1,000쪽이 넘는 분량이기 때문에, 대충 1월부터 슬슬 읽기 시작하면 연말쯤 다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이의 인생 40년을 1년 동안 압축해서 살아보는 한 가지 방식이겠다.

그게 좀 지겨우신 분이라면, 새로 나온 입문서 <사드>( 김영사, 2005)로 워밍업을 하신 다음에 <소둠 120일>(고도, 2000)로 빠지시거나 '규방'(<규방철학>)에 묻히시면 되겠다. 요컨대, '맑고 순수한 영혼' 아미엘과 함께 '타락한 영혼' 사드를! 이게 내가 특별히 알려드리는바, 2006년을 또 '갉아먹는' 두 가지 비법이다. 아미엘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지만, 사드에 대해서는 간간이 '보고'를 드릴지도 모르겠다. 소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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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6-01-06 01:20   좋아요 0 | URL
건축은 잘 아는 분야라고 할 수 없지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예전부터 좋아하던 건축가에요. 스타.라는 말이 어울리는 건축가라고 할까요.
좋은 책 소개받고 갑니다 ^^

로즈마리 2006-01-06 02:15   좋아요 0 | URL
퍼갈게요..^^

Tamino 2006-01-06 03:29   좋아요 0 | URL
부럽습니다. 책을 좋아한다면 로자님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로그인 2006-01-06 08:21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잘 읽고 갑니다.

이네파벨 2006-01-06 18:54   좋아요 0 | URL
멋집니다.

로쟈 2006-01-07 19:18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2006년 새해의 목표로 세운 것 중 하나는 매주 꾸준히 시를 한두 편씩 읽는 것이다(연말에 책 한권 분량을 묶는 게 멋쩍지 않은 한해를 보내기 위한 한 가지 계획이다). 우연이긴 하지만, 첫주에 내가 읽고자 하는 것은 <성경>의 '시편'(1편)과 20세기 최고 시인으로 꼽히기도 하는 칠레의 거장 파블로 네루다(1904-1973)의 초기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이다.

 

재작년이 그의 탄생 100주년이어서 이를 기념한 평전이 출간됐었고, 그게 작년에 우리에게도 번역/소개된 애덤 펜스타인의 <빠블로 네루다>(생각의나무, 2005)이다. 이왕이면 이전에 소개됐던 네루다의 회고록 <추억>(녹두, 1994)도 재출간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듯하다(정현종 시인에 따르면, "그렇게 재미있고 신나며 감동적인 회고록을 나는 본 일이 없"다고. 물론 우리 번역본도 그렇게 재미있고 신나며 감동적으로 옮겨졌는지는 확인해보지 못했다).

 

 

또 연말에는 그리스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네루다의 시에 곡을 붙인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알레스뮤직)도 출시되어 막판 분위기를 띄웠다. 경향신문의 소개 기사에 따르면,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남긴 최고의 걸작 ‘모두의 노래’. 그리스의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네루다의 시 13편에 웅장하고 애수 넘치는 선율을 입힌 오라토리오 ‘모두의 노래’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시됐다. ‘예술’과 ‘혁명’이라는 두 깃발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았던 거인들이 조우한, 기념비적 음반이다. 테오도라키스는 1973년에 망명지였던 프랑스 파리에서 이 음악을 작곡했고,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초연해 환호를 받았다. 지금 우리가 듣는 ‘모두의 노래’는 초연 당시의 음악을 다시 다듬어 완성한 것이다." 

 

그럼 (내겐 생소한) 테오도라키스는 누구인가? "국내 음악팬들은 아그네사 발차의 음반 ‘조국이 내게 가르쳐준 노래들’로 테오도라키스의 선율과 친해졌다. 이 음반에 담긴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의 멜로디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도 그의 음악들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이는 테오도라키스 음악에서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는 민중가곡 1,000여곡, 교향곡 5곡, 발레음악 2곡, 오라토리오 2곡, 오페라 4곡 외에도 다수의 영화음악을 작곡해낸 그리스의 음악적 ‘국보’(國寶)다. 이 음반은 테오도라키스가 직접 지휘하고, 그리스를 대표하는 가수 마리아 파란두리와 페트로스 판디스가 성야곱합창단과 호흡을 맞춘 실황이다. 웅장한 서정미. 특히 마리아 파란두리의 영성(靈性) 넘치는 목소리는 가슴을 파고 든다. 70여쪽에 달하는 해설지에 네루다의 서사시 ‘모두의 노래’가 국내 최초로 번역돼 실려 있다."

 

<모두의 노래>가 번역돼 실려 있다는 얘기에, 그리고 <빠블로 네루다> 평저도 끼워준다는 얘기에 솔깃하여 나는 이 음반(과 책)을 올해의 첫 구입품으로 골랐다. 그런 만큼 스무 살의 청년 네루다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다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새해에 읽은 첫번째 시로 고른 것이 억지스럽거나 근거없는 것은 아니겠다. 네루다의 시집에는 '사랑의 시' 20편과 '절망의 노래' 1편, 도합 21편이 수록돼 있는데, 일단 먼저 읽을 것은 첫번째 사랑의 시(Poema 1)이다(이 첫번째 시의 영역본들은 대개 첫 구절인 '한 여자의 육체'란 제목을 달고 있다).(*이후에 30분 정도 쓴 분량을 날려먹었다. 자주 '등록'을 해도 왜 이 모양인지! 다시 쓸 기운/시간이 없는 까닭에 본론으로 바로 들어간다.)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20살의 청년시인 네루다에게 전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의 시작은 아주 '관능적'이다(아주 노골적으로 에로틱하다). 그가 '에로스의 시인'이고 '디오니소스의 시인'이란 걸 여실히 보여주는 것. 이 시들을 쓸 때의 네루다의 모습이 평전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한 가운데 사진이다. 맨 왼쪽 사진이 그가 3살 때, 그리고 두번째 사진은 사춘기인 16살 때의 모습이다. 오른 편의 사진들은 장년과 노년의 네루다를 보여준다(노년의 네루다는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필립 느와레가 연기했던 그 네루다이다). 

 

 

 

 

 

 

 

 

 

<사랑의 시>는 (적어도 책자 형태로 출간된 걸 기준으로 한다면) 내가 알기에 3종의 우리말 번역이 있다. 이 중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정현종 시인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 1989/2007)이다. 하지만 네루다 시선집 형태의 이 중역본 시집에는 <사랑의 시> 4편만이 다른 시들과 함께 번역돼 있다('정현종과 네루다'에 대해서 따로 페이퍼를 쓸 계획이다. 그는 2004년에도 <100편의 사랑의 소네트>(문학동네)를 번역/출간한 바 있다. 탄생 100주년인가를 기념해서 칠레정부로부터 전세계 100명의 시인에게 주어진 네루다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고. 차후에 정현종 연구자들이 논문을 쓴다면 가장 자주 들먹이게 될 이름이 아마도 바슐라르와 네루다가 될 것이다).

 

두번째 번역은 영역본이 아닌 스페인어본을 직역한 것으로 추원훈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청하, 1992)가 있다. 절판된 책이라 요즘은 구하기 어려운 시집. 원시집의 시 21편이 고스란히 옮겨져 있는 게 장점이다. 그리고 세번째 번역은 김남주 시인의 옥중 번역시집 <은박지에 새긴 사랑>(푸른숲, 1995)에 포함돼 있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 특이하게도 김 시인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뺀 스무 편의 말 그대로 '사랑의 시'들만을 옮겨 놓았다. 정현종, 김남주 두 시인의 번역은 영역본에서 옮긴 중역본이다(시 번역에서 원어역이 특별한 권위를 갖는 건 아니다. 번역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면 특히나).

 

이제 이 시를 읽기 위해서 스페인어 원문과 영역, 그리고 3종의 우리말 번역을 아래에서 나열해놓겠다.

Cuerpo de mujer, blancas colinas, muslos blancos,
te pareces al mundo en tu actitud de entrega.
Mi cuerpo de labriego salvaje te socava
y hace saltar el hijo del fondo de la tierra.

 

Fui solo como un túnel. De mí huían los pájaros
y en mí la noche entraba su invasión poderosa.
Para sobrevivirme te forjé como un arma,
como una flecha en mi arco, como una piedra en mi honda.

 

Pero cae la hora de la venganza, y te amo.
Cuerpo de piel, de musgo, de leche ávida y firme.
Ah los vasos del pecho! Ah los ojos de ausencia!
Ah las rosas del pubis! Ah tu voz lenta y triste!

Cuerpo de mujer mía, persistirá en tu gracia.
Mi sed, mi ansia sin limite, mi camino indeciso!
Oscuros cauces donde la sed eterna sigue,
y la fatiga sigue, y el dolor infinito. 
 

***

Body of a woman, white hills, white thighs,

you look like a world, lying in surrender.

My rough peasant's body digs into you

and makes the son leap from the depth of the earth.

I was alone like a tunnel. The birds fled from me,

and night swamped me with its crushing invasion.

To survive myself I forged you like a weapon,

like an arrow in my bow, a stone in my sling.

But the hour of vengeance falls, and a love you.

Body of skin, of moss, of eager and firm milk.

Oh the goblets of the breast! Oh the eyes of absence!

Oh the pink roses of the pubis! Oh your voice, slow and sad!

Body of my woman, I will persist in your grace.

My thirst, my boundless desire, my shifting road!

Dark River-beds where the eternal thirst flow

sand weariness follows, and the infinite ache.

***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나를 내맡길 때, 너는 세계처럼 벌렁 눕는다.

야만인이며 시골사람인 내 몸은 너를 파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다.

그리고 밤은 그 막강한 군단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내 활의 화살처럼, 내 投石器의 돌처럼 벼렸다.

허나 인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피부의 육체, 이끼의 단호한 육체와 갈증나는 밀크!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放心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둔덕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끝없는 내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河床이 흘러내리고,

피로가 흐르며, 그리고 가없는 슬픔이 흐른다.(정현종, 1989)

***

여자의 몸, 하얀 구릉, 하얀 허벅지,

너를 내어주는 모습은 꼭 이 세상을 빼어 닮았구나.

우악스런 농사꾼 내 몸뚱이는 너를 파헤쳐

대지의 밑바닥에서 아들놈이 튀어나오게 한다.

터널처럼 나는 홀로였다. 새들은 내게서 도망쳤고

밤은 엄청난 침략으로 내게 쳐들어왔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너를 벼리었다 무기처럼,

내 활에 재어진 화살처럼, 내 투석기(投石機)의 돌멩이처럼.

그러나 복수의 시간은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

가죽의, 이끼의 갈증나고 단단한 젖의 몸.

아 젖가슴의 사발들! 아 넋나간 눈동자!

아 음부(陰部)의 장미들! 아 너의 느릿한 슬픈 음성!


내 여인의 몸이여, 나는 네가 상냥하길 고집하리라.

나의 목마름, 끝없는 나의 번민, 막막한 나의 행로여!

영원한 목마름이 계속되는 어두운 수로(水路)들,

끊이지 않는 피로, 그리고 한없는 고통.(추원훈, 1992)

***

여자의 육체, 하얀 언덕, 하얀 허벅지,

몸을 맡기는 네 모습은 이 세계를 닮았다

거칠기 짝이 없는 농부의 육체가 너를 파헤쳐

땅 속 저 깊은 곳에서 아이 하나 세차게 솟아나오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고독했다 새들은 도망치듯 날아가버리고

침략처럼 밤은 그 막강한 힘으로 나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나는 살아남기 위해 너를 단련시켰다 무기처럼

화살처럼 투석기의 돌처럼


이제 복수의 시간이 다가오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피부와 이끼와 우유로 만들어진 갈증과 욕망의 육체여

오 가슴의 두 컵이여! 오 딴전을 부리고 있는 두 눈이여!

오 불두덩의 장미여! 오 느리고 슬픈 목소리여!


나는 너의 매력에 사로잡히리라, 오 여자의 육체여

이 목마름, 이 끝없는 욕망, 이 정처 없는 나의 길이여!

영원한 갈증이 흐르고, 피로가 흐르고

밑 모를 고통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이여(김남주, 1995)

 

***

 

그럼, 이제 시를 읽어보도록 하자. 이 시는 전체 4연 16행으로 이루어져 있고(각 연의 2, 4행이 각운을 맞추고 있는 행이다), 의미상으로도 네 개의 마디로 돼 있다. 시제상으론 '현재-과거-현재-미래' 순으로 진행된다. 그러니까 1연과 3연이 현재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면, 중간에 끼인 2연은 일종의 플래시백이다. 그럼 1연의 내용은 무엇인가? 청년 네루다는 비유적으로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한 여자의 육체'에 대해서. 

 

이 육체에 대한 묘사를 세 번역본은 각각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여자의 몸, 하얀 구릉, 하얀 허벅지," "여자의 육체, 하얀 언덕, 하얀 허벅지,"로 옮겼는데(영역은 "Body of a woman, white hills, white thighs,") 이 대목의 경우 나로선 정현종의 번역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여기에선 '여자' 일반이 아니라 내 앞에 누워있는 '한 여자'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 여자의 육체'는 여기서 지형학적인 비유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것은 3-4행의 비유를 예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1연의 묘사를 따라가자면, 흰 언덕들(아마도 가슴 혹은 엉덩이)과 흰 넓적다리(허벅지)를 가진 한 여자가 지금 마치 '세계(=대지)'처럼 누워있고('세계로서의 한 여자'라는 비유는 흔한 듯해보이지만 대담한 것이다), 그 '대지'를 이제 파고들어가 새로운 생명을 싹튀우게 하려는 '나'는 농부에 비유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야만인이며 시골사람'(정현종)보다는 '우악스런 농사꾼'(추원훈)이나 '거칠기 짝이 없는 농부'(김남주)가 '나'에 대한 기술로서 보다 타당하다. 1연에서 핵심이 되는 비유는 '대지(=한 여자): 농부(=한 남자로서의 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3-4행의 번역으로는 추원훈의 것을 고르고 싶다. 그런 식으로 1연을 재조합해 보면 이렇게 된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 흰 허벅지,

네가 나를 내맡길 때, 너는 이 세계처럼 벌렁 눕는구나.

우악스런 농부인 내 몸뚱이는 너를 파들어가고

대지의 밑바닥에서 아들놈이 튀어나오게 한다.

 

 

원시의 1행은 "꾸에르뽀 데 무헤르, 블랑까스 꼴리나스, 무슬로스 블랑꼬스(Cuerpo de mujer, blancas colinas, muslos blancos)" 정도로 읽히는 듯한데, 여기서 주된 리듬을 만들어내는 건 '-아스 -아스, -오스 -오스'라는 유사운의 반복이다. 시번역에서 메시지의 전달 못지 않게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리듬의 전달이다(사진은 'blancas colinas'나 'muslos blancos'로 검색된 이미지).

 

" 여자의 육체, 덕들, 적다리"라는 정현종의 번역은 '한 - 흰 -흰'이라는 유사운의 반복과 '언/넓'에서 '어'운의 반복 등으로 리듬감을 살리고 있지만, '언덕들'의 조사 '들'이 '산문적'이고(이에 따르자면 '넓적다리'도 '넓적다리들'이 돼야 한다), '넓적다리'는 육감적인 시어이지만 리듬상 다소 튄다. "여자의 몸, 하얀 구릉, 하얀 허벅지"라고 옮긴 추원훈의 번역에서는 '블랑꼬스'라는 형용사를 '하얀'이라고 반복해줌으로써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지만, '구릉'과 '허벅지' 간의 리듬상의 연관성이 좀 약하다.

 

"여자의 육체, 하얀 언덕, 하얀 허벅지"라고 한 김남주의 번역이 이 1행에 한정하자면 리듬을 가장 잘 살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얀'의 반복 외에도 '언덕' '허벅'에 쓰인 유사운들이 리듬을 만들어내기 대문이다. 때문에 '여자의 육체'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여기서 '블랑꼬스'의 역어로 '하얀'과 '흰'은 선택적이라고 보지만, 나는 좀더 무표적인(unmarked) '흰'을 골랐다.     

 

 

이제 2연. 2연은 이미 지적한 대로 플래시백의 과거시제이다. '너'를 만나기 전의 '나'의 모습에 대한 되새김인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홀로였다/고독했다"라는 것. 나는 '터널처럼'이란 비유가 스페인어 시에서 어느 정도 상투적/독창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의미상으론 '텅 비어있었다' 정도의 뜻을 전달하는 게 아닌가 싶다. "새들이 나한테서 날아갔다"는 표현에 이어지는 것은 '밤의 엄습'이다. 논리적으론 '밤의 엄습'을 피해서 새들이 날아간 것이 되는데, '밤'은 혼자라는 외로움이 극대화되는 시간으로 짐작에 혼자서 밤을 보내야 하는 괴로움이 "막강한 힘으로 나를 엄습하는 밤"이란 이미지를 낳은 게 아닌가 한다. 이러한 엄습을 맞이하여 '내'가 필사적으로 하던 일은 '너'를 무기처럼 벼리는 것이었다. 이때 2인칭 대명사 '너'는 다른 연들의 '너'와는 지시대상이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1, 3, 4연에서의 '너'는 현재에 비로소 실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따라서 과거에 '너'를 벼렸다는 건 '너'가 비유가 아니라면 논리상 모순된다).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이란 이어지는 비유에 적합하게 읽으려고 한다면, '너'를 '나'의 '남성(男性)'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정현종의 번역을 근간으로 해서 2연을 정리해본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다.

그리고 밤은 그 막강한 군단으로 나를 엄습했으니.

나는 살아남기 위해 너를 무기처럼 벼렸다.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요는 내가 벼르고 별렀다는 얘기. 그리고 드디어 "복수의 시간이 왔다"!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3연의 내용은 관능적인 성애의 묘사와 영탄적인 환희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너를 사랑한다(te amo)'란 표현은 여기서 비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직설적이며 현재진행형인 사랑과 애무를 뜻한다. 국역본에서 2행의 번역이 "피부의 육체, 이끼의 단호한 육체와 갈증나는 밀크!"(정현종) "가죽의, 이끼의 갈증나고 단단한 젖의 몸."(추원훈) "피부와 이끼와 우유로 만들어진 갈증과 욕망의 육체여"(김남주)로 각기 다른데, (1)피부 (2) 이끼 (3)갈증나고 단단한 젖이 모두 '육체'에 걸리는 걸로 보인다(정현종의 번역에서는 '갈증나는 밀크'를 따로 취급했다. 밀크?).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대상이 '한 여자의 육체'인 걸 고려하면, '피부' '이끼'(이건 '대지'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단단한 젖'이 무얼 지시하는지 아는 건 어렵지 않다. 그건 이어서 영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가슴과 눈동자, 둔덕과 목소리에 대한 묘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3연을 정리해보면 이렇게 된다(나는 2행을 좀 의역했다). 이 3연에서는 김남주 시인의 번역을 가장 많이 참조했다(정현종 시인의 '에로티시즘'은 그의 시구를 빌면 '헐벗은 가지의 에로티시즘'이다. 그는 도취적이지만 한편으로 경건하다. 비록 네루다의 시를 열애한다고 해도 그는 '육체파' 시인은 아닌 것이다).     

 

허나 인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 육체의 피부, 이끼, 그리고 갈증이 난 단단한 젖. 

오 젖가슴의 두 사발이여! 오 넋나간 눈동자여!

오 불두덩의 장미여! 오 느리고 슬픈 너의 목소리여!

 

이제 마무리인 4연이다. 이제 1연의 '한 여자의 육체'는 '내 여자의 육체'가 되었다(김남주 번역에서는 이 점이 드러나지 않는다). 1-3연까지 서술된 것은 그러한 의미전이의 과정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번역번들로는 가장 의미파악이 어려운 게 이 4연이다. 당장 1행만 하더라도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정현종), "내 여인의 몸이여, 나는 네가 상냥하길 고집하리라."(추원훈), "나는 너의 매력에 사로잡히리라, 오 여자의 육체여"(김남주)라는 세 번역은 제각각이어서 의미를 종잡을 수가 없게 돼 있다. 

 

네루다의 이 사랑의 시편들에 대한 저명한 연구자, 레네 데 코스타의 해설은 추원훈 번역본에 발췌되어 실려 있다('The Poetry of Pablo Neruda', 하바드대출판부, 1979, 제1장). (번역돼 있지는 않지만) 꼬스따의 책 서론에 따르면, 이 연작 시집은 당초 1923년에 출간될 예정이었으나 너무 '열정적인' 내용이 포함된 탓에 출판사측으로부터 출간을 거부당했다고 한다. 청년 네루다는 여러 문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페드로 프라도란 중견 시인이 '보증'을 서 준 덕분에 1924년 출간될 수 있었다고. 어쨌든 이 밀리언셀러 시집의 대성공으로 '시인'으로 인정받은 네루다는 23세 때, 젊은 시인들에게 외교관의 자격을 부여하던 남미식 전통에 따라 극동 주재 영사로 임명 받는다. 해서 이후 5년 동안 그는 미얀마, 타이, 중국, 일본, 인도 등지에서 살았다고(하지만, 아주 외롭고 고립되었던 시기였다고).

 

맨마지막 시행과도 관련되는 것이지만, 내가 읽은 한 국내 논문에서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정서는 우울(멜랑콜리아)이라고 한다. 네루다 자신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시집은 "가장 고통스러웠던 청춘기의 열정과 칠레 남부의 황폐한 자연이 혼합된 목가적 시들이 망라된 '고통의 책'"이었다고도 하고. 그 고통, 우울은 어쩌면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이 갖게 되는 필연적인 정서가 아닌가 싶다(곽지균 감독의 영화 <그 후로도 오랫동안>(1989)의 대사. 강수연: "육체는 슬퍼요." 김영철: "슬픈 건 섹스지").

 

 

"육체는 슬퍼라, 나는 모든 책을 읽었노라"라고 말라르메는 노래했지만, 책으로도 모자라고 정사(情事)로도 모자란 우리의 '무량의 슬픔'은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하는 것인지? 네루다의 나머지 시편들에서는 알아볼 수 있을까?.. 

 

06. 01. 02 - 04.

 

 

 

 

 

 

 

 

P.S. 네루다 평전의 '옮긴이의 말'을 읽고 알게 된 것인데, 네루다를 처음으로 만나본 한국 작가는 상허 이태준이며(1951년 베이징에서 개최된 아시아문학좌담회), 본격적인 번역소개는 1969년 김수영의 번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물론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직후 네루다가 활발하게 소개되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바톤을 이어받은 사람은 김남주 시인으로 그의 네루다 번역은 정현종 시인보다 한 해 빠르다. 나는 1995년판 <은박지에 새긴 사랑>에서 인용하였지만, 이미 1988년에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남풍)가 출간되었던 것. 하이네와 브레히트, 네루다 등의 시 번역서인데, 푸른숲에서 다시 나온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1995)와는 편제가 다르다. 해서, 본문에서의 시 인용은 김남주-정현종-추원훈 순이어야 했다. '사랑의 시'만을 놓고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참고로, 네루다 시에서의 '사랑'의 테마를 분석하고 있는 한 논문에서의 번역을 여기에 옮겨둔다. 원어 번역의 또 다른 사례가 될 것이기에 비교해봄 직해서이다. 1, 3, 4연만의 번역이긴 하지만.

 

여자의 몸, 하얀 언덕, 흰 허벅지,

그대는 몸을 맡기는 행위에서 대지를 닮았구나.

거치른 농부, 내 육신이 그대를 파헤치면,

땅의 밑바닥으로부터 아들이 뛰쳐나오니까.

(...)

그러나 복수의 시간이 덮치지만, 나는 그대를 사랑하오.

이끼의 피부에다 탐욕스런 탄탄한 가슴을 가진 몸.

아아, 우유의 잔들이여! 아아, 딴전부리는 눈들이여!

아아, 내밀한 곳의 장미여! 아아, 느리되 구슬픈 그대의 음성!


내 여인의 몸이여, 그대의 매력을 지탱하리.

나의 갈증, 끝없는 나의 갈망, 내 정처없는 길이여!

영원한 목마름이 이어지고 피곤이 계속되고,

또 무한의 고통이 여울져가는 어두운 강바닥이여!

 

일단 스페인어 'gracia'에 해당하는 영어 'grace'를 정현종, 김남주 두 시인은 '경이로움'과 '매력'으로 각각 옮겼고(흔히는 '우아함'이나 '세련미'를 지칭하는 단어), 추원훈은 '상냥함'으로 옮겼다. 그리고 스페인어 동사 'persistirá', 혹은 영어의 'persist (in)'를 두 시인은 '살아가리', '사로잡히리라'라고 옮긴 데 반해서 추원훈은 '고집하리라'로 옮겼다. '보기 나름'이 아니라면 어느 한 편은 오역인 셈이 된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것은 '내 여자의 육체'와 등가어로 제시되고 있는 2행의 내용이다. 이 2행의 경우는 세 번역본이 대동소이한데, 대략 "나의 갈증, 나의 끝없는 욕망, 나의 정처없는 길이여!"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너의 상냥함'은 이러한 2행과 조화를 이루기에는 너무 미약하다. 반대로 가장 시적인 표현은 정현종의 '경이로움'이며, 나는 이에 따르도록 하겠다. 3행에서 '검은 하상(河床)'이 받는 것은 문맥상 앞에 나온 '나의 길'이겠다. 그러니까 '나의 길'이란 이러이러한 하상이다, 라는 게 3-4행의 내용. 이 '검은 강바닥'에 흐르는 건 영원한 갈증과 피로, 그리고 무한한 고통(슬픔)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본다.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살아가리라.

나의 갈증, 끝없는 나의 욕망, 나의 정처없는 길이여!

검은 강바닥을 따라 영원한 갈증이 흘러내리고,

피로와 무량(無量)의 슬픔이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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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from 오선지위의 딱정벌레 2008-10-28 12:55 
    그린비의 네루다에 관한 세상의 모든 까칠이들에게 추천합니다! - 파블로 네루다를 보고 다시금 그의 시집을 꺼내 보았다. 단지 네루다를 꺼낸것이 아니라 고 김남주 시인을 보았다. 88년 김남주 시인의 번역으로 에서 네루다를 처음 알게되었다. 하이네, 브레히트, 네루다 3인의 번역시집이다. 김시인이 투옥 중에 번역한 것으로 많은 곳에 나와있다. 하지만 투옥되기 전에 번역한 것으로 나와 있다. 시기로 보면 78, 79년 즈음..
 
 
이리스 2006-01-3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루다를 처음 만난분이 이태준 선생이었는지 몰랐습니다. 세가지 버전의 번역, 잘 보았습니다. ^^; 추천 누르고 갑니다.

로쟈 2006-01-31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길죠?^^

김도마 2006-02-1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투한번더~~로쟈님지금처럼좋은글많이올려주세요~~
몰래몰래읽고가는거..죄송해서요~

섬나무 2007-10-23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고에 묵은 물건들 뒤지는 중입니다. 썩지 않아서 참으로 고마운 것들이군요.ㅎㅎ
 

 

 

 

 

 

 

 

필요 때문에 연말연초 며칠간을 정현종 읽기에 할애하고 있다(덕분에 정현종에 관한 페이퍼를 몇 개 쓸지 모르겠다). 주로 그의 회갑을 맞이하여 출간되었던 <정현종 깊이 읽기>(문학과지성사, 1999)와 작년 그의 정년을 맞아 출간된 <영원한 시작>(민음사, 2005)에 실린 글들과 함께 <상상력과 인간/시인을 찾아서>(문학과지성사, 1991)에 실린 김현의 글들을 읽는 건데, 물론 그의 시집들을 읽는 것도 포함해서이다(강의의 가장 좋은 점은 책읽기에 대한 '강제적 의지'를 수반한다는 데 있다. 게으른 천성을 알기 때문에 나는 종종 자발적 등떠밀리기에 나서는데, 그걸 '적극적 수동성'이라 불러야 하나, 아니면 '수동적 적극성'이라 불어야 하나?).

 

어쩌다 보니 정현종의 시들을 많이 읽게 되었지만, 나는 역시나 1999년에 출간된 2권짜리 <정현종 시전집>은 안 갖고 있다. 그건 1972년에 나온 첫시집 <사물의 꿈>(1972)를 제외하고는 이후에 출간된 거의 모든 시집을 갖고 있어서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아직 '현역'인 그의 시작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기에 '전집'이 갖는 의미가 불충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가장 적절하지 못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시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이미 있는 것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시는 우리에게 오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시 속에서 살고 또 시는 우리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나무가 공기나 햇빛 또는 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지만 나무는 그것들 속에서 그것들에 의해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이 그 속에서 수많은 작은 태(胎)와 씨앗을 품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태이듯 시의 공간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태이며 씨앗입니다. 특히 시의 언어는 다른 종류의 언어에 비해 이러한 태의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감동한다는 것, 시를 읽을 때 우리의 감정과 의식이 팽창한다는 것은(아이를 밴 배에 대한 연상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지각할 수 있듯이) 시적 언어의 공간이 우리를 뱄다는 이야기이며 그리하여 우리가 새로 태어난다는 말에 다름아닙니다. 시는 새로운 존재의 모태입니다. 그리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니 오늘날에는 더욱더, 사람의 새로운 탄생에 대한 요구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요구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세계가 살 만한 과정이며 살 만한 자리이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꿈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와 우리의 접촉양상을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말은 무엇일까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시를 숨쉰다고. 우리는 시를 읽는다기보다는 시를 숨쉽니다. 시를 숨쉰다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체험으로는 그 말 이외의 다른 말로 설명될 수 없는 말입니다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까닭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마치 무용가가 높이 뛰어올라 용약(踊躍)의 정점에 이를 때 중력으로부터 해방되듯이 시는 우리의 마음에 숨을 불어 넣어 정신으로 하여금 용약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무거움에서 해방합니다. 모든 예술이 다 그렇겠지만 시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해방이나 열림의 순간을 체험케 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자유의 숨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숨이란 또 활기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사실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은유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만 오늘날 우리는 세계의 도처에서 죽음을 봅니다. 실제 죽음은 물론 산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도 미만해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감수성이 충분히 신선하고 민감할 때 우리가 정말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시는 이러한 신선함과 민감성을 회복시키는 숨결입니다. 시는 우리를 마비시키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또한 생명의 숨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는다기보다는 시를 숨쉰다고 말하는 것도 위와 같은 연유에서이며 그래서 시를 산다는 말도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숲이 산소의 원천이듯이, 시의 숨의 원천, 따라서 우리의 숨의 원천이 꿈입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동안 꿈이라는 말을 되풀이해서 써왔습니다. 약 10년전 나는 <사물의 꿈>이라는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그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에세이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나의 믿음은 사물이 꿈이 곧 나의 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나의 시적 대상들, 내가 노래하는 것들은 나를 통해서 그들의 꿈을 실현한다는 것입니다.(...) 시의 언어를 유추적 언어라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만, 내가 나이면서 동시에 나무일 수 있는 공간이 시의 공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와 나 아닌 것, 이것과 저것, 서로 다른 것들이 자기이면서 동시에 자기 아닌 것이 될 수 있는 공간이 시의 공간입니다. 시를 가리켜 예술과 역사, 인간과 자연, 성(聖)과 속(俗)을 연결하는 다리라고 하는 까닭도 그런 데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 사이의 긴장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있어야 하는 것은 있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때 그것은 있어야 하는 것을 낳기 시작합니다.(...) 꿈은 그러니까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 사이에 있는 어떤 공간이며, 시가 꿈의 소산이라고 할 때 그것은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을 연결하는 운동이며 접합의 현장입니다.


결핍은 괴로움이고 충족은 기쁨입니다. 우리의 삶과 역사가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뭔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 터인데, 이 결핍은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꿈꾸게 하고 노래 부르게 하며, 여기에 노래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가난하더라도 꿈은 가난한 법이 없으며 그것이 노래인 한 그것은 슬픔의 꿈을 충족시키며 기쁨의 아늑함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모든 창조행위가 그렇겠습니다만, 시를 쓰는 일은 어렵고 괴로운 일입니다. 이 괴로움은 사물의 꿈이 곧 나의 꿈이고자 할 때 오는 것입니다. 또 달리 말해보자면 예컨대 우리가 자유를 그리워하고 평화를 그리워하고 사랑과 정의를 그리워할 때 그리고 시인이 그 그리움을 노래할 때 시인 자신이 다름아니라 자유요 사랑이요 평화이어야 하기 때문에 시를 쓰는 일은 괴로운 일입니다. 또 달리 말해보자면 시는 모순과 갈등이 부딪쳐서 화해하는 현장이며 이것과 저것,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이 만나는 현장입니다. 부딪치면 아프고 화해하면 기쁩니다. 시인의 고통은 ‘이상한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과 역사는 끊임없이 우리의 꿈의 실현을 유예하면서 미래화하지만 지복(至福)의 순간을 허락하는 시는 우리의 현재를 탈환하고 회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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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1월 1일에 "시편 1편에 대한 읽기"라고 운을 떼고서 한참 늑장을 부린 글을 대충 정리하도록 한다. 어느덧 1월의 중순이다. 딸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같이 안 가면 혼자만 지옥에 간다고 아이가 엄포를 놓는다) 얼떨결에 주일마다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또 놀면 뭐하겠느냐고 가서 하는 짓이 영한 성경을 펼쳐놓고 '고전'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건 코란이건 불경이건 마찬가지이다.

특별한 신앙심을 갖고 있지 않은 탓에(참고로 나는 '신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나는 그냥 '신이 있으나 없으나'를 믿는다. 더불어 내가 존중하는 팩트는 신이 존재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의 존재는 확실하다는 점이다. 모든 팩트는 존중되어야 한다), '성경'을 읽으며 감동을 받는 일은 좀처럼 없지만, 인류의 한 '고전'으로서만큼 언제든지 읽어볼 용의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 <성서 이야기>를 읽은 지도 오래된 만큼 이 참에 '시편' 정도는 읽어두는 게 도리일 것 같기도 하고.

 

 

 

 

겸사겸사 구한 책은 지난 여름에 출간된 이원우의 <성서>(살림, 2005). "서양문화의 뿌리이자 원류인 고전, <성서>"라고 규정해놓은 것이 일단 마음에 든다(한데, 책은 그다지 많이 팔린 것 같지 않다). 400쪽 정도의 분량이므로 '부피'에 대한 나의 요구도 얼마간 충족시키고 있다. 다만, '관련서'라고 참고문헌을 나열해 놓은 대목에서 '허걱'했는데, 모두가 영문으로 된 신학 원서였던 것. 한국어 참고문헌이 왜 하나도 없는 것일까, 의아했는데, 저자가 미국의 한 대학 종교학과 교수였다. 그러니 한국어 책을 읽어볼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 사정은 이해할 만하지만, 참고문헌에 대한 실제적인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다는 건 유감이다. 이전에 사놓고 읽다 만 <인간을 옷을 입은 성서>(책세상, 2001)을 다시 들춰봐야겠다.

참고로, 내가 갖고 있는 관련서는 디스커버리 총서의 <성경>(시공사, 2001)이 거의 유일하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성서의 기호학적, 정신분석학적 해석에 대한 책들도 갖고 있고, <예수는 신화다>(동아일보사, 2002)나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현암사, 2001) 등도 소장도서이다. 지젝 덕분에 바울에 관한 책들도 몇 권 되고. 하니 엄살을 부릴 일은 아니고 게으름이나 탓해야 할 일이겠다.

 

 

 

 

하지만 욕심은 또 욕심 나름이니, 더 여유가 된다면 클라시커 시리즈의 <성서>(해냄, 2002)와 <아시모프의 바이들>(들녘, 2002) 정도를 서가에 꽂아두고 싶다. 2권짜리 <기독교 죄악사>(평단문화사, 2001)도 읽어두고 싶은 책이고. 비록 종교학 강의들은 몇 과목 들은 바 있으나, 기독교에 대해서는 '문외한' 수준이니만큼(보다 정확하게는 '무관심'이었지만) 나머지 책들은 대개 리뷰 등을 참조해야 하는 형편이다. 내가 '관련서'나 '참고문헌'에 민감한 이유이다. 

  

 

 

 

낮에 아서 단토의 책을 구하기 위해 구내서점에 들렀었는데, 아가페출판사에서 나온 <쉬운성경>(2004/2005)이 눈에 띄었다. 실상은 공동번역 성경의 고답적인 어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성경 읽기를 미루어두기도 했는지라(비슷한 이유에서 나는 우리 법전들을 읽지 않으며 의학서적들을 읽지 않는다. 모두가 어휘나 통사 모든 면에서 아직 일본어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 경우, 아버지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고시 공부를 하지 않은 이유는 6법전서의 '문장들'이 맘에 들지 않아서이다. 최근에 나오고 있는 '순한글' 법전들의 경우 얼마만큼 개선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번쯤 훑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읽고자 했던 시편 1편은 이렇게 번역돼 있었다.    

A

1 행복한 사람은 나쁜 사람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죄인들이 가는 길에 함꼐 서지 않으며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2 그들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깊이 생각합니다.
3 그들은 마치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새가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입니다.
4 나쁜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바람에 쉽게 날아가는 겨와 같습니다.
5 그러므로 나쁜 사람들은 하나님꼐서 내리시는 벌을 
   견뎌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죄인들은 착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6 착한 사람들이 가는 길은 여호와께서 보살펴 주시지만
   악한 사람들이 가는 길은 결국 망할 것입니다.

이와 비교해 볼 것은 기존의 성경 번역이다.  

 

 

 

 

B

1.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걸 우리말답게 약간 푼 번역도 있었다.

C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 지 아니하며,

2.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4.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

5.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다.

6.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그리고 영역본(그밖에 러시아어본도 참조했지만, 여기에 옮겨놓지는 않겠다). 물론 영역본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며 아래에 옮겨온 것은 그 중 한 가지일 뿐이다. 시편 1-2편에는 따로 제목이 붙어 있지 않으며 영역에 붙은 제목은 주석상의 필요 때문에 달려 있는 것이다. 1편의 내용인즉슨, '의인의 길과 악인의 종말'이라는 것.

PSALM 1: The Way of the Righteous and the End of the Ungodly

1. Blessed is the man
   Who walks not in the counsel of the ungodly.
   Nor stands in the path of sinners,
   Nor sits in the seat of the scornful;

2. But his delight is in the law of the LORD,
   And in His law he meditates day and night.

3. He shall be like a tree
   Planted by the rivers of water,
   That brings forth its fruit in its season,
   Whose leaf also shall not wither;
   And whatever he does shall prosper.

4. The ungodly are not so,
   But are like the chaff which the wind drives away.

5. Therefore the ungodly shall not stand in the judgment,
   Nor sinners in the congregation of the righteous.

6. For the LORD knows the way of the righteous,
   But the way of the ungodly shall perish.

 

 

여기까지 옮겨놓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애초에 가졌던 글에 대한 '열정'도 식어버렸다(아무래도 나는 '쭉정이'인 모양이다). 그간에 시편 1-2편에 대한 제법 많은 분량의 (영어)주석을 읽어본 것이 그냥 나대로의 수확이다. 하고픈 이야기의 '알곡'은 제시한 번역들을 세심하게 비교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태신자'의 성경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진행하기로 한다.

06. 01. 01 -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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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01-01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성경까지..-_- 다음편은 코란인가여? ^^

지난 한해동안 좋은글 많이 읽을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6-01-01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 억지로(?) 교회에 잡혀갔다가 들은 설교 말씀이 시편 1편이었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제 딴에는 성에 차지 않아서 제 식으로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이 주제인데,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덕담을 건넬 때 그 '복'과 어떤 관련이 있을지 생각해보려는 것뿐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몇 안되는) 관련서들이 흩어져 있어서 짤막한 글 한편 쓰는 것도 불편하네요...

Viator 2006-01-22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글번역 중에서는 200주년 기념성서가 가장 희랍텍스트에 충실한 것 같더군요. 개신교쪽에서는 표준새번역 개정판이 괜찮은 것 같고요. 비교해서 읽으실때 참고하시면 좋을듯 싶습니다.

로쟈 2006-01-22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변처녀 2006-04-15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성경을 오랫동안 접해와서인지 쉬운성경은 매우 낯설군요.
우선 "복"이라는 의미가 매우 다르게 다가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무슨일이든 다 잘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복이라고 말하고, 때로는 고난이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죠... 개역개정판 3판을 읽고있는데, 그 편이 낫게 여겨지네요^^(시편 1편에 한해서~^^다른 부분은 못 읽어봐서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완전히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도움이 될수 있겠어요!
믿는 사람들도 어려운 단어가 많이 쓰인 보편적으로 쓰이는 개정판 또는 개역개정판과 비교해가면서 읽으면 도움이 많이 될것 같아요. 한번 사서 보아야겠네요!
좋은 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