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학기 강의계획서를 올리기 위해 PC방에 왔다가(비가 온다는 핑계로 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예전의 쓴 글들의 '편집' 작업만 하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학의 학사정보 화면이 로그인 되지 않아 그냥 죽치고 않아 있는 신세가 돼버렸는데, 또 놀면 뭐하겠는가? 창고 정리라도 해야지. 역시나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인데,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과 레르몬토프의 시 '나홀로 길을 나선다'에 대한 몇 마디 코멘트이다. '고독에 대하여'란 제목을 그냥 새로 붙여보았다. 아래의 글을 쓴 건 재작년 가을이고 러시아 TV에서 방영되던 <아비정전>을 보면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려가며 쓴 것이다.  

갑자기 ‘회고적’ 정서에 물든 건, 지금 STS채널에서 왕가위의 <아비정전>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에는 <열혈남아>가 나왔고, 그 전에는 <타락천사>가 나왔었는데, 당분간 왕가위의 영화들이 나올 예정인가보다, 하고 다음주 TV프로그램을 보니까, 아니다. 다음주에는 리안의 <와호장룡>이다.

<아비정전>은 내가 최초로 본 왕가위의 영화이며, 내가 단번에 매혹된 영화이다. 아주 옛날 대학가에서 하숙하던 시절에 동네 비디오점에서 주말이면 비디오와 함께 테이프 5편을 한꺼번에 빌려다가 밤새 보곤 했었는데, 어느 주말에 빌려온 테이프 중 하나가 바로 <아비정전>이었다. 나는 영화를 두 번 연거푸 봤는데, 이후엔 ‘왕가위의 모든 영화’이다. 그리고도 매년 생일쯤 되면 ‘청승맞게도’ 비디오방에 혼자 가서 이 영화를 봤다. 어떤 때는 동행이 있기도 했지만, 곧 다시 혼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이 테이프를 아예 집에 소장하고 있다(아이러니컬하게도 소장한 이후에는 한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열혈남아>는 <아비정전> 이후에 찾아 본 영화이다.

<중경삼림> 이후에 왕가위는 ‘대중화’되었기 때문에, 그래도 상대적으로 ‘나만의 왕가위’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비정전>뿐이라고 해야겠다. 이후에 이 영화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을 많이 읽었고 거기에 대부분 수긍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러한 ‘상징적’ 읽기 이후에도 남아있는 어떤 잔여물이 있다. 지젝은 타이타닉호의 잔해를 ‘상징적인 중층결정’에 의해서, ‘은유적인 의미’에 의해서 다 설명될 수 없는 “라캉적 의미에서의 사물(Thing)”이라고 불렀지만, <아비정전>의 잔여물은 그와는 다른 종류의 잔여물이다.



영화에서 장국영이 '발 없는 새'의 우화를 얘기하지만, 이 영화는 아무런 ‘거대한 잔해’도 남기지 않고 그냥 바람처럼 너울거리며 지나가버린다. 즉, ‘사물’ 대신에 거기에 있는 건 나르시시즘적인 맘보춤이고 허물(虛物; Nothing)이다(‘허물’은 ‘없지만 있는 것’이란 의미에서 ‘증상’에 대응한다). 해서 모성, 혹은 어머니-타자(mOther)의 부재에 관한 영화(이 영화의 모든 인물들은 혼자가 된다. 즉 그들은 어떠한 2자적 관계도 형성하지 못한 채 모두 울며 겨자 먹기의 나르시시스트들로 남는다) <아비정전>의 잔여물은 ‘물질적인 잔여물’이 아니라 허무/허물을 채우는 ‘감정적인 잔여물’이다.



드디어, 양조위가 구두를 닦고 손수건을 양복에 꽂고 기름 바른 머리를 빗어 넘긴 다음에 외출했다(<아비정전>은 미완의 영화이다). 즉 마지막 장면이 지나가고 타이틀이 올라간다. 그렇게 모든 것은 지나가버린다. 영화의 시작에서 장국영과 장만옥이 잠시 함께 했던 시간처럼(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그 시간에 대한 기억 또한). 그 장국영도 “발 없는 새”처럼 어느 샌가 우리 곁을 떠나버리지 않았던가. <아비정전>에는 “왕가위적 의미에서의 허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으며, 그것을 채우는 것은 우리의 ‘감정적인 잔여물’이다. 요컨대, 왕가위의 영화들은 우리의 고독과 불가피한 나르시시즘의 증상이다. 

 

일반화시켜서 말하자면, 왕가위의 영화들은 모두 외로움에 대한 영화이고 고독에 대한 영화이다(이건 왕가위의 ‘전속’ 촬영감독인 크리스토퍼 도일의 영화관이기도 하다). 다르게 말하면, 그의 영화들은 ‘해피 투게더’의 (불)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 데뷔작인 <열혈남아>가 당시에 유행하던 ‘홍콩영화’의 스타일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면(유덕화와 장만옥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남자들/‘형제들’ 간의 ‘의리’였다), 두 번째 영화인 <아비정전>은 온전하게 왕가위만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으며, 거기에는 그의 영화를 가로지르는 고독의 기원, 이자적 관계(=투게더)를 불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외상(=트라우마)이 놓여 있다. 그것은 모성의 부재, 혹은 모성과의 단절이다.

알다시피, 엄마와 아이간의 이자적 관계는 3자적 관계에서 형성되는 상징적 정체성 이전에, 정서적 안정감 혹은 정서적인 정체성이 형성되는 기본관계이다. 따라서 엄마와 아이간의 안정적인 관계의 형성, 기본적인 애착관계의 형성은 이후의 대인관계에서 기본적인 안정감/신뢰감을 구축하기 위한 조건이자 바탕이 된다(즉 이자적 관계의 모델을 제공하는 것). 그런데, 엄마의 (너무 이른) 상실은 이러한 바탕을 미처 제공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후에 아이는 상실한 이자적 관계를 그리워하면서도 (반복적인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언제나 그것의 실현가능성에 대해서 의심하며 불안해 하게 되는 것. <아비정전>의 영어 제목은 인데, 이때 ‘사나운’이란 뜻의 ‘wild’는 다르게는 ‘길들여지지 않는’이란 뜻이다. 왕가위 영화의 주인공들은 멀쩡하게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더라도 모두들 ‘길들여지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그건 정작 필요할 때 아무도 그들을 돌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가위의 영화가 단지 유행/겉멋으로서의 ‘고독’을 넘어서는 대목이 있다면, 나는 그의 영화에 드리워진 이러한 외상적 진정성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나는 실제로 그가 모성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지 어쩐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짐작에 그럴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타자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고독의 주제화는 문학에서 상당히 보편적이다. 또 다른 한 가지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은 러시아의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시인 유리 레르몬토프(1814-1841)이다.

<우리시대의 영웅>이란 소설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시인 또한 젊은 나이에 결투로 죽었는데, 그의 문학적 유언이라 할 만한 시는 생애의 마지막 해에 씌어진 '나 홀로 길을 나선다'(1841)이다(이 시에 가락을 붙인 곡이 우리 드라마에서 몇 차례 주제가로 사용됐었다. “브이하주- 아진- 야 나 다로-구”라고 느리게 시작하며 서정적인 음색의 여가수가 부른다. 이 노래만큼은 여가수들이 더 어울린다). 이 시를 러시아어와 함께 옮기면 이렇게 된다.

Выхожу один я на дорогу,
Сквозь туман кремнистый путь блестит,
Ночь тиха. Пустыня внемлет Богу,
И звезда с звездою говорит.
나 홀로 길을 나선다.
안개 속으로 자갈길이 빛나고,
밤은 고요하다. 황야는 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별들은 별들과 속삭인다.

В небесах торжественно и чудно!
Спит земля в сиянье голубом...
Что же мне так больно и так трудно?
Жду ль чего? Жалею ли о чём?
하늘은 장중하고 아름답구나!
대지는 푸른 빛 속에 잠들고...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아프고 힘들게 하는 걸까?
무엇 때문에 기다리는 걸까? 무엇을 후회해야 하는 걸까?

Уж не жду от жизни ничего я,
И не жаль мне прошлого ничуть;
Я ищу свободы и покоя!
Я б хотел забыться и заснуть!
이미 나는 인생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나에게 과거는 전혀 후회스럽지 않다.
나는 자유와 평온을 찾고 있다!
나는 모든 걸 잊고서 잠들고 싶다!

Но не тем холодным сном могилы,
Я б желал навеки так заснуть,
Чтоб в груди дремали жизни силы,
Чтоб, дыша, вздымалась тихо грудь;
하지만, 무덤 속의 차가운 잠이 아니라...
영원히 그렇게 잠들었으면,
생명의 힘이 가슴 속에서 조곤조곤 잠들어,
숨쉴 때마다 조용히 가슴이 부풀어 오르게.

Чтоб всю ночь, весь день мой слух лелея,
Про любовь мне сладкий голос пел,
Надо мной чтоб, вечно зеленея,
Тёмный дуб склонялся и шумел.
밤새도록, 하루 종일 나의 귀를 즐겁게 해주며,
달콤한 목소리가 나에게 사랑을 노래하고,
내 위로는 영원히 푸르른,
울창한 참나무가 몸을 숙여 수군거렸으면.



전체 5연의 이 시는 1841년 5월에서 6월초에 씌어졌다. 레르몬토프가 결투로 사망하게 되는 것이 7월 15일이므로 죽음을 두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다. 1연에서부터 눈에 띄는 것은 ‘혼자/홀로’라는 서정적 화자, 레르몬토프의 자의식이다(러시아어의 ‘고독’을 영어로 옮기면 ‘oneness’가 된다. 나는 왕가위 영화의 중핵이 이 ‘Oneness’라고 이미 지적한바 있다). 이러한 자의식은 그를 둘러싼 자연이 서로 화합하고 호응하는 시간에도 혼자만의 무거운 상념으로 이끈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아프고 힘들게 하는 걸까?” 이러한 상념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으며 자연과의 불화는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가?

2연의 4행, 그리고 3연에서 보듯이, 서정적 화자에게서 기다림의 대상으로서의 미래와 후회의 대상으로서의 과거라는 시간 개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서 시간은 특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전락이나 비약 또한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그가 찾는 것은 ‘자유와 평온’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와 평온의 상태로서 그가 지향/소망하는 것은 ‘잠’이다. 이 잠의 내용을 꿈꾸는 것이 그에게서 상상력이 갖는 몫이다.

‘하지만’이라는 4연의 서두가 말해주듯, 그의 잠은 죽음을 상징하는 일반적인 잠과 다르다. 일반적으로 ‘무덤 속 차가운 잠’(=죽음)으로서의 잠은 삶의 중단을 전제로 하는 죽음 이후의 다른 삶, 다른 시간의 체험이지만, 이 시의 4-5연에서 묘사되는 잠은 삶의 연속으로서 현재의 시적 자아가 더 확충되는 경험이다. 즉 여기서 ‘나’와 자연의 조화는 (일반적인 경우에서처럼) ‘나’라는 자의식의 소멸을 통해서 자연과 합일/통합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 전체가 ‘나’에게 순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시에서의 상상력은 자연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자아의식의 확대/심화에 봉사한다(아래 사진은 모스크바에 있는 레르몬토프 박물관). 

Lermontov House-Museum, Moscow, Russia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이 시는 자궁회귀로의 충동 혹은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4연에서 생명이 가슴에서 조용히 부풀어 오르는 잠이란 (모체의 자궁 속에서의) 태아의 잠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5연에서, 밤낮으로 사랑의 노래를 불러줄 수 있는 ‘달콤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물론 어머니이며(시인 레르몬토프가 간직하고 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목소리뿐이었다), 동그만 ‘나’의 무덤/자궁 위에 있는 ‘울창한 참나무’는 아버지의 형상이다. 그렇다면, ‘나’는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요구하는 자궁 속 ‘어린아이’이다. 다만, 이 ‘어린아이’는 실제의 태아와는 달리 ‘나’라는 자기의식을 보존/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즉 그는 자신이 즉자로서의 태아임을 의식하고자 하는, 행복의 극대치를 경험하고자 하는 대자(‘나’)이다.

물론 이러한 즉자-대자적 존재는 상상력 속에서만 가능하며, 이 상상 속의 ‘나’와 대조되는 것이 1연에서 혼자 길을 나서는 불행한/무거운 현실의 ‘나’이다. 이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일찍 여읨으로써 자신이 소망하는 행복의 결여와 일찌감치 마주하게 된 고아 레르몬토프의 형상이다(시인은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읜다). 생각건대, 엄마들은 아이를 놔두고 일찍 죽으면 안된다. 아이가 나중에 시인이 못 되더라도 말이다(아래 사진은 레르몬토프가 결투로 숨진 장소에 세워진 기념비)...

06. 0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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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르몬토프의 고독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19 00:02 
    러시아 시인 레르몬토프의 시에 곡을 붙인 '나 홀로 길을 나선다'를 그냥 흥얼거리다가 문득 예전 모스크바 통신에서 '레르몬토프의 고독'이란 페이퍼만 유독 정리해놓지 않은 걸 알게 됐다(이것도 그의 고독에 대한 배려였을까?). 바쁠 때일수록 이렇게 딴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의 고독에 대해서 다시 정리해놓는다(모스크바통신에서는 푸슈킨 시와의 비교도 다루었었는데 그건 생략하도록 한다). 참고로, 시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대해서
 
 
twoshot 2006-01-15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가위, 좋은 의미와 나쁜의미에서 그는 똥폼의 대가인 거 같습니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힘(그러니까 영화의 본질을 눈치 챈)이 있지만 허전합니다. 있는 "척"하는 거의 대가.
2046은 그의 정점인 거 같습니다. 어디로 가려나...왕가위..

로쟈 2006-01-15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세의 <형사>를 보다 보면, 왕가위 '똥폼'도 얼마나 드문 것인가를 되새기게 됩니다. 영화의 본질이 '있는 척하는 거'란 지적에는 공감합니다. '있는 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전제에서...
 

재작년 모스크바통신에 띄운 글 '로망스와 포르노를 구별하는 법'을 '베이스캠프'용으로 다시 정리한다(주로 프랑스 감독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들에 대한 것이다). 관련 참고문헌들도 몇 권 소개하면서(내가 무슨 전문가인가?).

최근 미국의 포르노 영화 '목구멍 깊숙이'(1972)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다큐영화 '인사이드 딥 스로트'(2005)가 어제 개봉된 걸로 아는데, 이 참에 포르노그라피의 미학과 사회학/정치학을 두루 공부해본다면 좋겠지만 이목은 있고 시간은 없는 관계로 '복습' 정도 하는 걸로 참아두기로 한다. 다만, <목구멍 깊숙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어보기로 한다. '애프터 딥스로트' 정도의 제목이 될 것이다.  


 

 

 

 

영화 얘기가 나온 김에, 프랑스의 여성감독 카트린 브레야에 대해 한 마디(*'한마디' 치곤 너무 길어지지만). 모스크바에 처음 왔을 때, 한동안은 매주말마다 채널 ‘엔떼베’에서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들을 방영했다(한국에서는 그의 영화제도 개최된바 있다). 나는 그의 영화라면 <스위밍> 밖에 본 게 없었는데, 그걸 포함해 서너 편의 영화를 더 보면서, 이 감독 역시 ‘아버지’가 없는 세계, 혹은 여자들만 많았던 가정 출신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그의 최근작은 <8명의 여인들>이다!). 그의 장기는 중년여성의 심리묘사로 보이는데, 그런 걸로 포섭되지 않는 ‘튀는’ (코미디)영화들도 없지 않았다. 이때 ‘튄다’는 것은 ‘아버지의 결여’가 낳는 징후이다. 하지만, 오종에 대해서는 아직 그 이상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8명의 여인들>을 나는 아직 보지 않았다. 그건 귀국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겐 <로망스>로 잘 알려진 카트린 브레야(Catherine Breillat; 1948- )는 올해(2004년) 신작 <지옥의 해부(Anatomie de l’enfer)>(2004, 74분)를 내놓았는데, 러시아에서는 <포르노크라시>로 개봉되었고, 이미 비디오CD로도 나와 있다(*국내용 제목은 <지옥의 체험>인 듯하다). 영화는 브레야의 소설 <포르노크라시(Pornocratie)>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므로, ‘포르노크라시’란 제목이 억지는 아니며, 여기서도 그 제목을 쓰도록 하겠다.

Anatomy of Hell

원제의 ‘지옥’은 영화로 미루어보건대, 여성 성기의 은유이면서, 동시에 남녀관계의 은유이다. 이 영화는 지난주에 이곳의 한 TV채널에서 브레야의 <로망스>를 다시 보고 브레야란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음반/비디오가게에서 비디오CD가 눈에 띄길래 산 것이다. <로망스>(한국에서의 <로망스>는 노출장면이 다 지워진 말 그대로 <로망스X>였지만)보다도 더 ‘엽기적인’ 노출 때문에 한국에서도 이 영화가 소개될 가능성은 전무해 보이지만(모스크바에서도 이번 6월에 한 극장에서 밤 10시 이후에만 한 차례씩 이틀 상영하고 말았다). 혹 조만간 성인영화관에서의 상영이 허용되더라도 흥행할 영화는 전혀 아니다. 보기에 아주 불편하므로.

‘노출’에 덧붙여. 얼마 전, 한국의 인터넷 뉴스에는 요즘 드라마에서의 ‘노출’이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식의 ‘선정적인’ 뉴스가 떠서 클릭해보았다(당신이 이 글을 클릭하는 것처럼). 김미숙, 장나라가 드라마에 수영복을 입고 등장했다고 (혼자서) ‘흥분하고’, 한고은이 드라마에서 한쪽 가슴에 문신을 새겼다고 (혼자서) ‘분개한’ 기사였다(물론 이런 기사들의 노림수는 순전히 ‘클릭’에 있지만). 한국은 인터넷에서 음란(포르노) 사이트의 비율 가장 높은 나라의 하나일 텐데(그게 인터넷 강국의 지표이기도 하다), 아직도 그러한 ‘가장(假裝)’ 혹은 ‘연기’가 통용된다는 게 새삼 신기하고 우스꽝스럽다.

언제나 그렇지만, 선정적인 건, ‘대상’이 아니라 그걸 바라다보는 ‘시선’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TV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덜 선정적’이지만, 즉 ‘건전’하지만(혹 아랍권이 우리보다 더 ‘건전’할는지?), 그걸 바라보는 국민적 ‘시선'과 '응시’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더 ‘선정적’이고 ‘퇴폐적’이다(누드 프로젝트가 ‘돈’이 된다고 뛰어드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대상과 시선이 서로 보충하는 식으로 어느 나라건 ‘선정성의 총량’은 보존되는 것인지?

다시 브레야. 이곳의 공연전문잡지 <아피샤>(‘공연 프로그램’이란 뜻)의 소개에 따르면, <포르노크라시>는 <섹스는 코미디다>(러시아에는 <친밀한 장면들>이란 제목으로 출시, 국내에도 출시돼 있다.맨왼쪽 이미지, 두번째 이미지가 러시아판), <로망스>에 이은 완결편이다. 이걸 3부작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르상으론 (섹스에 대한) 코미디, 로망스, 포르노가 된다. 나는 그녀의 ‘코미디’는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나중에 러시아 TV에서 봤다. 일종의 메이킹 필름 형식의 영화이다), ‘로망스’와 ‘포르노’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한다.

 

 

 

 

일단, ‘로망스’와 ‘포르노’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는 안 벗고 나오고, 하나는 벗고 나온다는 것인가? 일반적인 분류에 따르면(알베로니를 따른 것인데), ‘포르노그라피’가 남성의 장르이고, 여중생들이 좋아하는 ‘하이틴 로맨스’가 여성의 장르이다(혹은 <도쿄 데카당스> 남성의 장르라면 <도쿄 타워>가 여성의 장르이다). ‘하이틴 로맨스’를 거의 읽어본 게 없어서 여기선 장르의 시학을 구성할 수 없지만, 내 의견으로 <로망스>는 셋이 나오고, <포르노>는 둘이 나온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영화 <로망스>에 나오는 셋은 누구인가? 여주인공과 그의 남자친구, 그리고 중년의 교감선생?(정확하게 ‘교감선생’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상으론 그렇게 기억된다.) 아니다. 사실, 영화의 원제는 ‘로맨스는 없다!’ 내지는 ‘로맨스, 엿먹어라!’란 뜻의 <로망스X>이다(그러니 이 또한 교육용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영화 <로망스>는 ‘로맨스’인데, 그것은 ‘아이’라는 '제3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이’가 ‘로망스’와 ‘포르노’를 가르는 기준이다. 거꾸로 말해서, 포르노의 필수조건은 ‘아이’의 부재이다(물론 형식적인 필수조건은 남녀의 섹스가 나온다는 거지만).

해서, 아무리 영화에서 남녀의 섹스가 적나라하게 묘사된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등장하게 되면 그 영화는 ‘포르노’가 될 수 없다. 반면에 아이가 등장하게 되면, ‘로망스’가 아니될 수가 없다(패밀리 로망스! 참고로, 그 경계에 있는 영화가 스페인 영화 <패션 투르카>(1994)이다). 따라서, 로맨스적 상상력이란 로맨틱한 2자적 관계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 3자적 관계에 대한 상상력이다(이 3자적 관계의 드라마 버전이 3각 관계인바, 3각 관계가 아니라면 드라마가 진행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거꾸로 2자적 관계에 대한 상상력은 언제나 포르노적 상상력을 함축한다. 거기엔 ‘경건한 포르노’와 ‘적나라한 포르노’가 있을 따름이다(포르노중독자들은 ‘소프트코어’와 ‘하드코어’로 구분하겠지만). ‘경건한 포르노’? 그건 보여지지 않는 포르노를 말한다. 즉 마이너스 포르노, 상상 속의 포르노이다. 예수 가라사대, 마음에 음심(淫心)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姦淫)한 것과 다름 없다고 했으니, 상상 속의 ‘경건한 포르노’도 포르노이다.

그런데, 언제 이 포르노로부터, 포르노에 대한 상상으로부터 깨어나게 되는가? ‘아이’에 대한 상상이 덧붙여질 때이다. 그 ‘아이’가 ‘행복한 로망스’를 낳는지, ‘끔찍한 로망스’를 낳는지는 각자가 판단할 문제이지만, 하여간에 포르노 배우에게서 ‘질외 사정’이 절대 수칙인 것은, 2자적인 포르노적 상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바로 이 제3자를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질내 사정’은 포르노적 판타지를 잠식하는 (실재적) ‘악몽’이기에...

브레야의 영화 때문에, ‘포르노’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됐지만, 내가 포르노 영화에 ‘입문’하게 된 건 ‘남들’ 보다 늦은 대학 1학년 때이다(포르노 사진(=빨간 책)이나 만화는, 요즘은 더 빨라졌겠지만, 그때도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접하게 됐다). 남들보다 늦었다고 한 건,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선 동료 고3 학생들이 단체로 포르노를 보다가 적발되어(나는 주로 공부만 했다), 입시공부에 바쁜 와중에 대거 반성문을 쓰는 사태가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같이 본 학생들의 이름을 적어내라는 지도과 교사들의 닦달에 리스트가 108명에 이르렀다는 믿지 못할 소문도 들렸는데, 이후에 이 사건은 (포르노란 이름을 넣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108인 사건’으로 회자되었다. 사건의 핵심 33명이 견책을 받는 걸로 일단락되었는데, 하도 오래된 일이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하여간에 때는 전두환 정권 말기였는데, 당시에는 대학주변이 여관마다, 그리고 일부 심야다방마다 포르노 ‘영업’을 했다. 포르노 비디오를 예사로 틀어주었던 것이다(낮에는 최루탄, 밤에는 포르노!). 그래서, 동문회 같은 모임을 갖게 되면, 먼저 중국집에서 짬뽕 국물에 소주를 마시며 몇 시간 운동권 노래를 ‘학습’하며 시국에 대해서 자못 비장한 각오들을 다지다가, 한두 차례 ‘오바이트’를 하고는 우리가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다는 핑계로 여관에 단체 숙박을 했다. 그리고는, 여럿이 함께 자못 충혈된 눈으로 취기와 피곤을 무릅쓰고, 포르노 영화를 새벽까지 보다가(가끔은 아침에 한편 더 틀어달라고 전화를 걸었다가, 여관집 청년이나 주인 아줌마한테 핀잔을 듣기도 하고)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런 것이 당시의 ‘일상’이었다(당시 포르노는 룸살롱의 대학생 버전인데, 포르노와 계급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될 때 얘기하겠다, 고 했지만, 나는 그냥 '전문가들'의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세상 밖으로>로 데뷔한 여균동 같은 80년대 ‘운동권’ 출신 감독이 <포르노맨> 같은 ‘한심한’ 영화를 만든 데에는 (개인적인 트라우마 외에도) 그런 대학가의 ‘일상’이 한몫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포르노’는 검열당해서 <맨?>(1995)이란 제목으로 개봉됐었다. 문제는 그가 포르노를 ‘리얼리즘’이 아닌 ‘판타지’로 접근하려 한 데 있다. 그러니까 <포르노맨>의 문제는 정작 거기에 ‘현실’에 대한, ‘일상’에 대한 아무런 ‘포르노’도, 혹은 ‘폭로’도 담겨 있지 않다는 데 있다. 80년대 중반 대학가 여관이나 심야다방의 포르노 ‘영업’만 영화로 재현해도 ‘포르노’와 ‘정치적 리얼리즘’, 모두 성취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때문에 그도 저도 아닌 <포르노맨>은 결국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커녕 <파리애마>(1988)나 <서울에서의 마지막 탱고>(1985)보다도 못한 영화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관념적인’ 감독이 이후에 <죽이는 영화>로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다시 <미인> 같은 ‘더 한심한’ 영화를 찍은 걸 보면(플레이보이의 ‘판타지’ 시리즈가 차라리 더 정직하다), ‘가방끈’이 긴 것과 영화를 잘 만든다는 것은 정말로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여감독은 <리얼리즘의 역사와 이론> 같은 이론서들의 역자이기도 했다). 차라리 그는 ‘배우’로서 더 뛰어나다.

 

 

 

 

80년대 대학가의 ‘포르노적 일상’에 대해서 잠깐 언급했지만, 가장 정치적이었던 년대가 가장 포르노적이기도 했다는 건 역설이 아니다. 포르노야말로 가장 정치적이며, 동시에 정치적 독재야말로 또 가장 포르노적이기 때문이다. 불임(不妊)의 정치가 포르노가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또 포르노를 ‘대학생들’보다도 더 좋아하는 건 ‘군인들’(속칭 ‘군바리들’) 아닌가? 그런데, 우리 주변의 이 포르노적 일상이 언제 사라졌는가? 소위 ‘민주화’ 이후이다(민주화는 포르노의 적이다! 거꾸로 얘기하면, 포르노는 파시즘적이다, 내지는 파시즘과 공모적이다! 가령, 파졸리니의 몇몇 영화들). 그리하여 대략 1990년대를 경계로 하여, ‘(비공식적)포르노’와 ‘(공식적)애마부인’은 성인비디오(AV)로 통합된다. 이쯤에서 동시대 시인 권혁웅의 시 '애마부인 약사(略史)'를 참조해보는 것도 유익할 듯. 참고로, ‘애마부인’에서의 ‘애마’의 ‘공식적인’ 표기는 ‘愛馬’가 아니라, ‘愛麻’(?)이다. ‘愛馬’가 너무 음란하다고 해서 검열에서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음란한 정치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도덕성’을 연기(演技)한다.

1대 
고개를 좌우로 꼬며 말을 달리는 고난도 기술을 선보인 안소영(1982)에 관해선 이미 말한 바 있다 침대에 누운 그녀가 말 탄 꿈을 꾸는 것인지, 말을 모는 그녀가 침실 꿈을 꾸는 것인지를 중3이 다 말할 수야 없었지만, 동시상영관은 돌아온 외팔이와 안소영 때문에 후끈 달아올랐다

2대 
오수비(1983)는 바다로 갔다 그녀는 젖은 몸으로, 몰려오는 파도를 다리 사이로 받으며, 파도보다 큰 소리를 지르곤 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靑馬)의 시구를 그때 배웠다 고1때 일이다

3대 
김부선이 말죽거리 떡볶이 집에서 권상우를 유혹할 때(2004) 나는 기절할 뻔했다 나도 권씨지만 그녀를 피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씨름선수 장승화의 들배지기에 자지러지는 그녀(1985)를 본 고3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그렇다

4대 
이후의 애마부인(1990∼ )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더 이상 연소자가 아니었으니까, 도처에서 여자들이 말 타고 출몰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다만 김호진(1990)처럼 ROTC 애마보이가 되고 싶기는 했다 그 후로는 나도 애마도 주마간산이었다

9대 
진주희(1993)의 운명처럼 말이다 아, 어찌하여 애마의 도(道)는 일본으로 흘러갔는가? 애견부인(1990)은 또 뭐란 말인가? 드라큘라 애마(1994), 애마와 백수건달(1995), 애마와 변강쇠(1995)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끝없는 연애담과 지리멸렬 속으로 빠져들었다

외전(外傳) 
애마는 파리에도 가고(1988) 집시도 되었지만(1990) 정작 애마부인을 가르친 정인엽은 지금 삼겹살집 주인이다 애마 아래 남편, 애마 위에 애마보이, 그 위에 나…… 우리는 그렇게 불판 위에서, 납작하게, 지글거렸다 어마 뜨거라, 소리 지르며 한 시절을 지나왔다

'90년대의 성인비디오는 <애마부인>류의 극장용 에로영화가 ‘하드’해진 것이면서, 포르노가 몇 배 ‘소프트’해진 것이다. ‘하드’해졌다는 건 가슴 노출이 전면화되었다는 걸 뜻하고, ‘소프트’해졌다는 건 그럼에도, 남녀의 성기 노출은 금지되었다는 의미이다(브레이야의 영화들에서 성기 노출은 소프트코어를 넘어선다). 이 ‘하반신’ 노출 금지에 대한 보상욕구가 극대화된 것이 90년대 성인비디오 최대 히트작이라는 <젖소부인> 시리즈이다. 좀 오버해서 말하자면, (에로영화적 관점에서) 80년대는 ‘애마부인’의 시대였고, 90년대는 ‘젖소부인’의 시대였다(그럼 2000년 이후는? <미소녀 자유학원> 시리즈에서 보듯이, 팬티-페티쉬와 원조교제의 시대이다. ‘부인’들에서 ‘미소녀’로의 이행이 갖는 의미에 대한 분석은 각자 해보시길). 두 ‘시리즈’ 사이에 어떤 시대적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수사학적 관점에서 ‘애마(愛馬)’는 ‘부인’의 환유(인접관계)이고, ‘젖소’는 ‘부인’의 은유(유사관계)이지만, 의미론적으론 ‘애마부인’이 시대의 은유인 반면에, ‘젖소부인’은 환유이다. 어째서 그런가?

‘애마부인’과 ‘젖소부인’ 모두 주연은 여성이지만(안소영과 진도희라는 두 페르소나. 물론 주연배우들로 치자면, 한 명의 ‘젖소부인’과는 달리 열 명이 넘는 ‘애마부인들’이 있지만. 이후에도 이름이 좀 남은 배우로는 김부선(<말죽거리잔혹사>에 나온), 유혜리, 진주희 등이 있다), ‘애마부인’이 욕망의 주체인 반면에, ‘젖소부인’은 욕망의 대상이다. ‘애마’는 물론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지만(‘젖소부인’의 이름은 ‘젖소’가 아니다), 그 이름 자체는 말(馬)에 대한 욕망(愛)이란 뜻 그대로 ‘애마부인’의 욕망의 대상을 가리킨다. 반면에 ‘젖소’라는 것 자체가 남근적 명명이며, 남성적 욕망의 투사이다. 이 욕망의 주체가 항상 결핍의 주체라면, 욕망의 대상, 즉 사물은 항상 충만해 있으며, 그 차이가 <애마부인>과 <젖소부인>에 대응한다.

<애마부인>에서 계속 반복되는 모티브는 자신의 ‘합법적인’ 남편에게서 충족하지 못하는 여성적 욕망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남자’이며, 따라서 그녀의 욕망은 ‘법적으론’ 금지된 욕망이다. 말을 타고 달리는 <애마부인>의 전형적인 씬은 그 금지된 욕망의 상상적 충족, 즉 판타지이다. 이 판타지의 정치적 버전은 무엇인가? 그 판타지의 주체는 ‘합법적’ 군부독재에 대한 욕구불만과 한편으론 그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투쟁) 사이에서 갈등하는 대중이 아니겠는가? 그 대중의 ‘응시’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애마부인>의 관객들이 상상적 동일시에는 이 정치적 동일시 또한 새겨져 있다. 그러니 그들이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을 한 켠에 느끼며 극장문을 나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가 자신을 ‘애마부인’과 동일시하건(=결핍의 주체), 동일시하지 않건(=여성적 욕망에 대한 공포) 결과는 언제나 ‘결핍감’이다.

물론 그 ‘결핍감’이 체제전복적인 의지로까지 승화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중의 ‘응시’가 결과적으론 체제유지에 봉사하는 것이 되겠지만, 언제나 체제(system)에는 오작동(malfunction)이란 게 있는 법이고, 혹 그 오작동과 무관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87년 4월의 정권의 ‘호헌선언’이 초래한 6월의 시민항쟁은, 체제의 관점에서는 그러한 ‘예기치 않은’ 오작동의 사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젖소부인>을 특징짓는 건 ‘포만감’이다. 그 포만감을 이 시리즈는 노골적이고 조야한 수준으로까지 전시한다(이 정도 사이즈에도 만족 못하겠느냐!). 때문에, 거기에선 은유의 성찰적 거리 혹은 (등장인물의 수준에서) 금지/위반의 긴장이 들어서는 대신에 환유적 욕망의 맹목성이 질주한다. 환유적 욕망? 라캉에 의하면 욕망 자체가 환유이긴 하지만, 하여간에 이 환유적 욕망에서는 주변의 모든 것, 만나는 모든 사람이 욕망의 대상이 된다.

다시 지젝을 인용하면 “(성불능의) 부성적 인물(=남편)에 의해 트라우마를 입은 여주인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애마부인>은 모더니즘적이다. 반면에, <젖소부인>의 주체는 ‘소비사회’를 특징짓는, ‘병적인 나르시시스트’(<히치콕>, 18쪽)들의 응시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애마부인>의 관객들이 대개 극장에서 ‘공동으로’ 영화를 보았다면(=욕망과 죄의식의 공동체), <젖소부인>의 관객들은 상당수가 밀폐된 비디오방에서 혼자인 경우가 많았을 것인바(=나르시시스트들), 여기서, 영화관/비디오방의 공간적 대립 또한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대립에 상응한다. 참고로, <젖소부인>의 제작자는 이 영화의 극장용 판까지 기획했었는데, 아마도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리라(35밀리 ‘젖소부인’이라니!).

Romance

무슨 얘기가 이리로 흘러갔나? 브레야의 <로망스>가 왜 ‘로맨스’인가란 얘기를 하다가 ‘젖소부인’까지 들먹이게 됐군. <로망스>에는 하여간에 결말에서 ‘아이’라는 제3자가 등장하며, 따라서 이 영화는 일부 성기노출 장면에도 불구하고 ‘포르노’가 아니다.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남자친구(요즘은 보통 아버지가 되기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한다) 무관심 속에 자신의 육체의 ‘용도’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문한다. ‘여성’은 여성 자신에게도 타자이기에(여성끼리의 동성애가 더 많은 것은 그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녀가 종국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것은 한 아이의 엄마로서의 정체성이다. 여기서도 그녀가 아이를 낳는 과정, 즉 엄마로서 ‘태어나는’ 과정과 ‘남자친구(=아버지)’의 ‘상징적’ 죽음은 겹쳐진다. 내가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타란티노의 <킬빌>을 떠올린 건 그런 연관성 때문이다.

Anatomy of Hell

반면에, 신작 <포르노크라시>는 말 그대로 ‘포르노’인데, 그건 이 영화가 ‘고립된 섬’ 혹은 ‘기계들(automaton)’로서의 남성과 여성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 여자가 ‘여자화장실’에서 손목을 그어 자살하려는 걸 한 남자가 목격하고 구해주게 된다. 그 대가로 여자는 남자에게 나흘 밤 동안 자신의 나체를 온전하게 전시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나체, 혹은 음부(‘숨겨진 보물’로서의 ‘아갈마’)를 내주는 것인데, 그 이후에도 남성은 여성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 여자의 물음이면서 감독 카트린 브레이야의 물음으로 보인다. 쉽게 말하면, 남자가 어떤 여자와 하룻밤을 같이 자고도 여전히 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것. 물론, 이런 물음 자체는 그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 혹은 절망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영화의 결말은 그것을 입증한다. 남자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는 여자의 육체는 매혹이면서 동시에 지옥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포르노에 대한 지젝의 정의와 맞물린다. 지젝은 포르노를 아킬레스와 거북과의 경주에 견주는데, 아킬레스는 언제나 거북보다 빨리 가거나 늦게 간다. 결코 나란히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는 여자보다 더 빨리 가거나 더 늦게 간다(때문에 성관계는 없다! 둘이 만나질 않으니까). 여성의 육체 앞에서 남성은 거북을 따라잡으려는 아킬레스처럼 조바심 친다. 하지만, 그가 막상 그 육체를 소유했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그 육체는 욕망의 대상에서 멀어져 있다. 그래서 언제나 매혹이고, 지옥인 것이지 그 중간은 없는 셈이다. 바로 포르노의 세계가 그러하지 않은가? 그것은 언제나 매혹적이지만(아갈마에의 매혹!), 곧 지겨워지며 자신이 진창에 처박힌 것 같은 오욕감을 맛보게 한다(바타이유의 포르노그라피들은 그 ‘한계체험’을 다룬다). 왜냐하면, ‘매혹’이 어느새 ‘지옥’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디바’ 여배우들의 결혼이 자주 실패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2자적 세계, 혹은 포르노적 세계이다.

참고로, 그런 의미에서 장정일은 대표적인 포르노 작가이다. <거짓말>의 원작인 <내가 거짓말을 해봐>뿐만 아니라(얼만전에 나온 그의 <전집>에는 빠져 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포르노적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삼국지> 빼고). 물론 그의 작품들이 ‘포르노’라고 해서, 법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거나 하는 건 전혀 아니다(나는 판금된 그의 책을 여러 권 제본해서 지인들에게 나눠줬다). 그건, 아이(제3자)를 갖지 않는 부부들을 전부 ‘위법’으로 구속하겠다는 발상과 마찬가지로 ‘오버’이고 정신 나간 짓이다. 아이를 갖건 말건, 그건 두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물론 국가는 필요 때문에, 출산을 장려하거나 제한하기도 한다. 그건 또 국가의 일이다).

작가 장정일은 너무나도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에서라도 스스로는 아버지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그의 소설들에서 ‘아이들’이 부재한 것은 그러한 ‘결심’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니, 그가 ‘가족소설’이라는 근대소설의 ‘적통’에서 벗어나 ‘일탈적’인 소설들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2자적 관계를 근간으로 한 글쓰기, 그건 곧 포르노적 상상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만약, 한국에 정치적 포르노 영화가 존재한다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건 장정일의 원작을 장선우가 영화화한 <너에게 나를 보낸다>나 <거짓말> 같은 영화들에서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이 내가 보기엔 장선우가 제일 잘 찍을 수 있는 영화들이다(그의 영화들은 ‘화엄경’이란 판타지를 들먹일 때마다 죽을 쑨다). 그러니까 ‘퇴폐적인’ 영화들이 그의 적성에는 맞아 보인다. ‘나쁜 영화’의 길로 끝까지 가지 않고, 자꾸 ‘좋은 영화’를 만들려는, 세상을 구제하려는 그의 선(善)에의 의지 때문에, 관객들이 매번 낭패를 보는 건 물론이고, 한국영화는 얼마나 큰 손실을 보고 있는 것인지!

다시, 브레이야. <포르노크라시>는 다른 ‘포르노’들과 마찬가지로, 내러티브가 빈약한데(<거짓말>의 내러티브도 얼마나 단순한가!), 그건 제3자가 이야기의 동력으로 작동하는 ‘로맨스’와의 결정적인 차이이면서,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포르노와 내러티브(이걸 ‘로맨스’나 ‘멜로드라마’로 바꿔불러도 된다)는 상호배제적이기 때문이다. 포르노에서의 내러티브는 내러티브라기보다는 섹스를 위한 ‘구실’에 불과하며, 내러티브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포르노가 들어가선 안된다.



 

 

 

지젝은 <삐딱하게 보기>의 한 장에서('포르노그라피, 노스텔지어, 몽타주')에서 ‘노스텔지어적인 멜로드라마’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예를 드는데, 초반에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이 감미로운 키스를 나눈 후에 그들이 벌이는 정사(情事)가 말 그대로 적나라하게 포르노로 보여진다면, 이 영화에서 더 이상의 ‘멜로드라마’는 없으며, 더 이상의 ‘내러티브’도 가능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 물론 선택할 수 있다면, 남성들은 ‘포르노’를 여성들은 ‘멜로드라마’를 더 선호할 것이다(나는 ‘남자’, ‘여자’란 말 대신에 일부러 ‘남성들’, ‘여성들’이라고 썼는데, 그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이다. 남자도 멜로드라마를 좋아할 수 있고, 여자도 포르노를 즐길 수 있다).



<포르노크라시>의 내러티브 또한, 두 사람의 만남을 위한 초반 설정 외에는 나흘 밤의 나열로만 이루어져 있으면, 이 장면들에선 아무런 제3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즉, 이 영화는 말 그대로 ‘포르노’이며 브레야의 상상력은 포르노가 ‘지배’(=포르노크라시)한다. 영화에는 좀 유치한 장면도 들어가 있는데, 벽에 걸린 십자가의 예수를 보여준 다음에 이어서 여주인공의 생리 피를 보여주는 식의 장면이 그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는 ‘생리’의 숭고함과 성스러움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일 텐데, 두 남녀가 생리대에 묻은 피를 물에 타서 성수(聖水)처럼 같이 마시는 장면만큼이나 억지스럽다. 브레이야는 그런 ‘숭고한 희생’의 상징은 가져오면서 왜 그리스도의 ‘사랑’은 빼놓았을까? 왜 그녀는 남녀관계에서 ‘지옥’ 밖에는 보지 못하는 것일까? ‘타인은 지옥’이란 건 사르트르의 맥심이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아닌데 말이다. 56세의 카트린 브레야는 아직 너무 젊은 것 같다.

결론적으로 <포르노크라시>는 <로망스>와 병렬적인 자리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면, ‘퇴행적인’ 작품이다. 브레이야는 아마도 이 주제로는 더 찍을 영화도 없을 것이다(‘지옥’까지 갔으면 끝 아닌가?). 혹 <포르노크라시>가 ‘반면교사’적인 의도에서 찍은 영화라면 몰라도…

06. 01. 13.

 

 

 

 

P.S. 현재 출간된 포르노 관련서들 가운데 다섯 권 정도를 꼽아두도록 한다. 기본서는 단연 <프랑스 혁명과 가족로맨스>(새물결, 1999)의 저자이기도 한 역사학자 린 헌트의 <포르노그라피의 발명>(책세상, 1996)이다. 최근 문화연구가 붐을 타고 있으므로 조만간 국내에서도 그럴 듯한 연구서가 나올 듯하다. 기다려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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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1-13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 앞으로 삼가하도록 하겠습니다(저도 그러고는 싶습니다!)...

로쟈 2006-01-13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일이 많을 때 딴짓도 많이 하지요.^^

헤르베르트 2006-01-14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애프터 목구멍 깊숙히'가 기대되네여. 딥쓰롯은 OST 또한 매우 좋은 명반인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OST에 대해 끄적여보고 싶네여. 그나저나 볼때마다 느끼는거지만 들뢰즈는 영화배우 같이 생겼어여ㅎㅎ

palefire 2006-01-17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그렇듯 잘 보고 갑니다. 생각하신 대로 브레이야는 <로망스> 이후 발전이 없는 감독입니다. <지옥의 해부>(국내에는 여성영화제에서 공개)는 그녀의 시선과 연출이 동어반복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듯해요. 결론은 로자님께서 파악하신 바로 그것인데 그걸 보여주고자 1시간도 더 되는 필름을 지루한 감정적 갈등과 육체적 관찰/마찰에 쏟아붓죠. 결론 하나를 증명하기 위해 이미지를 허비하는 건 참기 쉽지 않죠. 이게 지옥같고 권태롭다는 걸 그녀와 비슷한 방식으로 보여주다면 세드릭 칸의 <권태>가 차라리 낫고, 그러한 결론에 이르는 갈등과 선택의 모럴을 이미지와 서사의 전개와 짜임새 있게 연결시킨다면 에릭 로메르가 훨씬 나은 듯. <인사이드 딥 스로트>는 작년 베를린에서 미드나잇 상영으로 봤는데, 너무나 교과서적이고 연대기적이어서 생각보다는 밋밋했던 다큐였습니다. 건질 거라곤 <목구멍 깊숙히>의 클립들(생각보다 많지는 않음), 그리고 지금 쓰신 주제에서 랜드마크급 연구서인 [Hard Core]의 저자 Linda Williams가 출연해서 반가웠다는 것 정도네요.

로쟈 2006-01-17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palefire님의 글(혹은 책)을 기다리는 게 더 낫겠군요.^^
 

재작년 모스크바통신에 올린 글에서 '공부와 학습'에 관련된 내용을 다시 정리해서 이미지-버전으로 올린다. 이 또한 오프라인용 글쓰기를 위한 '베이스캠프'이다. 당시 글을 쓴 계기는 북매거진 <텍스트>에 실린 한 서평이었지만, 몇 호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호 <텍스트>에는 <백범 김구 평전>(시대의 창, 2004)에 대한 서평도 실려 있었는데(서평자도 쓰고 있지만, 이 책이 최초의 평전이라는 건 다소 믿기지 않는다. 정말로 그런가?), 백범의 '나의 소원' 중에서 자주 인용되지만 언제 읽어도 자긍심을 느끼게 되는 대목을 옮겨본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큼이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반 세기도 더 전의 글이지만,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류가 불행한 것은 인의와 자비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보다 근본적인 건 계급적 적대인가?). 그런데 그걸 키워줄 수 있는 건 자연과학이 아니라(예컨대, 인간복제가 아니라) 문화이고 문화의 힘이다(그렇다면, 백범의 이데올로기는 민족이 아니라 문화이다. 우리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는가?).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다책읽기의 즐거움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고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그게 독서문화이고 출판문화이다(거꾸로 괴로움을 주는 건 문화가 아니다. 날림출판은 문화가 아니다). 그런 즐거움 속에서야 우리는 인의와 자비와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다(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을 줄 수 있다. 즐거움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 남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런 즐거움의 향유는 사실 유교적 전통에서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알다시피 공자의 어록인 <논어>는 즐거움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되지 않는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즉 배우고 수시로 그것을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여기서 익히다란 말은 (1)(완전히 자기 걸로 만들기 위해) 암기/습득하다 (2)(생활 속에서) 실천하다 등으로 해석되는 듯한데, 러시아어 번역은 이 대목을 배우고 완성을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면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옮기고 있다(세메넨코의 번역). 러시아어본에 따를 때, 군자(君子)자기완성의 인간이고, 유교는 자기완성을 위한 종교이다. 문제는 무엇이 완성인가라는 점. 무엇이 배움의 완성이고 자기완성인가 

 

열심히 사서삼경(혹은 육법전서)을 암기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시에 패스하는 것이 배움의 완성인가? 그건 어떤 단계(혹은 집안의 부흥)를 뜻할 수는 있을지언정 완성으로는 좀 모자라 보인다(요즘은 특히나 그럴 것이다. 고시도 자격증화되었다고 하니까). 그리고 생활 속에서 실천한다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소 막연하다(사실 막연하기 때문에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익힌다는 말을 보다 적극적/구체적으로 가르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다. 비록 공자가 학이시교지(學而時敎之)라고 말하고 있진 않지만 말이다(()자는 너무 딱딱하긴 하다). 왜냐하면, 배움의 완성은 가르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단순한 논리인데, 군자의 모델로서의 공자야말로 (자신이 배운/터득한 걸) 가르치는 사람 아닌가? 더불어 실습(實習), 즉 실제로/진짜로 배운다는 건 무엇인가? 자신이 배운 걸 해보는 것인바, 교사들의 교생 실습이란 자신이 배운 걸 실제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걸 말한다 




 

 

 

직접 가르쳐보는 경험 속에서 자신이 배운 건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그러니까 공자는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행위 속에서 비로소 군자가 된다. , 자왈(子曰) 이전에는 공()선생도 군자도 없는 것이다(군자이기에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에 군자이다). 이것이 배움의 변증법이다. , 우리가 진정으로 배우는 것은, 배움을 완성하는 것은 가르침으로써이다(가르칠 수 없는 앎은 완성된 앎이 아니다). 그러니까 학이시습지의 즐거움, 학습(學習)의 즐거움은 가르침으로써 배움을 완성하는 즐거움이다. 학습이란 말이 (주로 사무/행정적인 용어로만 남아있고) 일상어에서는 공부(工夫)(=쿵푸)로 대체된 것은 그래서 좀 아쉽다(동무란 말처럼 북한에서 너무 자주 쓰기 때문일까? 그래서 동무 대신에 친구를 갖게 됐듯이, 우리는 주로 학습하는 대신에 공부하는 것일까?). 공부란 말에는 즐거움이 왠지 빠져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부비변증법적이다(거기에 대비되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들에서의 유물변증법 학습일 것이다).



 


 

 

변증법적인 학습배우다-가르치다란 의미쌍을 조금 확장하면(물론 '가르치다-배우다'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건 가라타니 고진이지만 여기서는 거기까지 나가진 않도록 하겠다), 얻다-베풀다가 될 것이다(배움은 얻음이고, 가르침은 베풂이니까).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얻는 것은 무엇을 베풂으로써이다. 그리고, 그것은 덕()이란 말이 진정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뜻하는 바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베풂으로써 덕을 쌓는 것이니까 말이다(김용옥은 ()얻음으로 옮긴다).

 

그러한 사정은 읽다-쓰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가 어떤 책을 진정으로 읽게 되는 것은, 그러니까 그 책에 대한 읽기를 완성하는 것은 그에 대한 글을(혹은 책을) 씀으로써이다(지젝은 라캉에 대해 계속 씀으로써 비로소 라캉을 읽는다. , 읽기 위해서 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와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 사이의 바르트식 구별은 사소하다. 모든 텍스트는 씌어지는 텍스트이어야 하며, 그리고 그 씌어짐을 통해서 비로소 읽히는 것이기 때문이다(예컨대, 리뷰를 쓰는 건 책읽기를 통해 얻은 걸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책읽기를 완성해나가는 건 그러한 베풂이다). 그러한 쓰기/베풂의 여정은 끝이 없는가? 그렇다. 그것은 무한이기에 그렇다 

 

<도덕경>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이 나오는데(대기만성인과응보와 함께 중학생때 교내 가훈전시회를 위해서 급조해낸 우리집 가훈이었다. 사자성어 사전에서 뜻이 좋다고 골라낸 것인데, 인과응보에 나는 아직도 시달리고 있다. 대기만성이라나!), 그 뜻은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큰 그릇은 이루어짐이 없다이다(만약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크지 않다!). , 큰 그릇이란 무한을 가리킨다. 아무리 큰 유한도 무한보다는 작기 마련이기에 가장 큰 유한이란 곧 무한인 것. 해서, 큰 그릇의 바깥은 없다! 공자가 말하는 성인, 곧 군자도 마찬가지이다 

 

군자란 완성된 인간이지만, 그 자기완성이란 건 미래완료형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진정 완성된 인간(=가장 큰 유한)이란 끊임없이 완성되어 가는 인간(=무한)이다. 그래서 자왈 한 마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하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베풀고 또 베풀어야 하며, 끊임없이 쓰고 또 써야 한다. 글쓰기가 자동사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무엇을 이룬다는 타동사는 자동사의 극한이며, 자동사의 미래완료형이다. 모피를 뒤집어쓴 잉크(=사르트르)가 끊임없이 써댄 것은 그런 때문이다(해서, 앙가주망은 그런 자동사적 글쓰기와 대립/모순되지 않는다). 데리다가 끊임없이 써댄 것은 그런 때문이다.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데리다의 이 말은 많은 오해를 부른바 있는데, 그는 그 말을 (다소 상식적인) 컨텍스트의 바깥은 없다와 등가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텍스트-무한은 곧 컨텍스트 아닌가?)  




 

 


 

 

해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즐거움 또한 끝이 없다. 그런 즐거움을 배우고 익히는 것, 즉 다시 가르치고 베푸는 것이 나는 교육의 몫이라고 생각한다(해서 우리가 배우는 지식은 언제나 즐거운 지식이며, 새로운 계몽주의즐거운 계몽주의이다). 그것이 시민의식의 함양이고 시민교양의 양생(養生)이다. 시민의 학습이고 합창이다. 끊임없이 읽고 쓰고 떠들어대라! 그것이 한편으론 시인 이성복의 말을 빌자면(그는 한동안 경전 공부를 했었다), 세상과의 연애이다

세상과의 연애를 통해서 제가 깨우친 바가 있다면 삶의 의미는 끊임없는 배움에 있으며, 그 배움은 공경하는 마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더 자세하게 살피자면 배움은 다름 아닌 공경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앞도 뒤도 알 수 없는 막막한 세월 속에서 구원도 해탈도 아닌 막막한 걸음걸이, 우리는 모두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막막함을 함부로 제 멋대로 제 편한 것으로 바꾸어 버리지 않고 그 길을 끝까지 가는 것, 모든 공부는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 같은 것입니다. (이성복, '세상과의 연애')  

물론 매일같이 읽고 쓰는 우리의 공부, 혹은 학습이 당장에 좋은 세상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백범의 표현을 빌면, 인의와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은 데리다의 민주주의만큼이나, 혹은 메시아만큼이나 더디게 (하지만 언젠가는 예기치 않게) 올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울음 또한 당장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詩를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이성복, '아들에게')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작부들과 물수건과 속쓰림은 또 그 나름대로 자동사이다. 울음이 그러하듯이. “한 여인이 웬 서류 봉투를 손에 쥐고 흐느끼며, 흐느껴 울며 갔다 콸콸대는 물소리 같은 울음을 거푸 울며 여러 번 길을 건너갔다 아무한테도 그 울음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고 세상 끝까지 울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듯이 울며 갔다 비교도, 비유도 허락되지 않는 울음, 꽃핀 벚나무의 검은 가지처럼 검은 길을 그 울음으로 적시며”(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27')  

우리는 그렇듯 비교도, 비유도 허락되지 않는 울음에 대해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면서 다만 기다려볼 따름이다. 배우고 가르치고 베풀면서 고대해볼 따름이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 날을. 하지만 그때의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장 큰 나라와 마찬가지로 경계와 구별이 없는 나라일 것이니, 세계 자체와 등가일 것이다(우리나라=세계). 우리 나라도 너네 나라도 없는 세상 말이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진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초월론적 가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준비하며 기다려야 한다. 매일같이 변기에 물을 갖다 부으면서, 세상을 밥 먹듯이 구원하면서, 읽고 쓰고 떠들면서, 속쓰림을 참아가면서, 사랑하면서 실연하면서, 가끔은 못살겠다고 도망치면서, 저항하면서 이를 갈면서, 이빨을 갈면서, 즐겁게 아주 즐겁게   

 

06. 0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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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2010-07-21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로쟈님 글을 보면서 공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권혁웅의 평론집 <미래파>(문학과지성사, 2005)에서 요즘의 젊은 시인들에 대한 표제 평론 '미래파'를 훑어보다가 인용된 시들 중 장석원의 '金秋子에게 보내는 戀書'를 읽었다. 제목이 주는 인상 그대로 '활달한' 시인데, 최근 들어 그런 걸 드물 게 보는지라 반가운 마음에 시집을 구입했다. 작년 11월에 나온 시집 <아나키스트>(문학과지성사, 2005)가 그것이다. 시는 3단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나의 '구성감각'으로는 뒤에 네번째 단락이 더 붙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그래서 2% 아쉬운 감을 갖게 되지만), 읽어볼 만한 시이다. '방법적 인용'의 새로운 차원을 건드리고 있는데, 권혁웅의 해설은 이를 '시와 다성성'으로 정리하고 있다. 시를 전문 인용해본다(80년대를 말한다는 건 요즘 시로선 드문 경우가 아닌가 싶다).

1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 그대의 눈동자에 고이는 슬픔 때문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갈대, 갈대의 순정 때문에 그날이 다시 온다 해도, 나는 빛좋은 개살구.

그대를 보면 입안에 침이 고여, 그대를 만지면 몸이 부풀어, 아흔 아홉 풍선이 되어 서쪽으로 날아가버려, 꽃잎이 피고 또 졌기 때문에, 꽃잎 속에 다시 꽃잎이 모여들기 때문에

그날은 부처님이 오신 날이었어, 자비는 그들에게 구해야 돼, 살려줘, 날 구해줘, 날 묻지 마, 파헤쳐줘, 뒤에서 날 쑤셔줘

떨어지는 꽃잎, 삼천의 꽃잎들, 실려간 청춘, 푸른 청춘, 꽃다운 그대 얼굴 위에, 다시 꽃비 내리는 오월에

그대 왜 날 잡지 않고, 그대 왜 가버렸나,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내게 사랑을 실어보냈는가, 나는 토막난 몸통이고 끊어진 길인데

다만 후회하지 않는, 지워지지 않는, 길 위의 혈흔 더운 피 더러운 피, 나의 시신경에 와 닿는 오월의 햇빛, 희미한 전기 신호, 뭉개진 얼굴

그대는 물질적 증거이기 때문에, 짓이긴 꽃잎이기 때문에, 오월의 햇빛 속에서, 소리없이 지는 한 점 그림자, 물들자마자 한 겹 벗겨지는 껍질

그리고 나의 사랑스런 벌레들 이 풍진 세상을 만나 번성의 시대를 보냈으니, 변태해야 하리, 벌레들이여 또 다른 살덩어리여, 내 아파트로 와서 하룻밤 즐기시라

그대 또 다른 살덩어리여, 붉은 혀 붉은 젖가슴 붉은 엉덩이여, 어두운 거실 소파 위에 나의 게르니카, 그대 차가운 추상이여


2

이것이면 족하다. 단 하나의 이미지면 나는 완성된다. 환상이 나를 건강하게 하고 희망이 나를 발기시킨다. 나의 연인이여, 내 가슴에 볼 비비는 꽃잎이여, 머릿속의 총알이여

'가장'이라는 최상급 부사는, 그렇다. 그대에게만 해당된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그대만이 독점한다.


3.

우리는 자욱한 歲月에 걸친 試鍊과 苦惱의 時代를 넘어서서 이제야말로 成長과 成熟을 通해 自己 完成의 時代를 形成하여야 할 80年代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聖스러운 새 時代의 序場에서 大統領이란 莫重한 責務를 맡게 된 本人은 國家의 成長과 成熟이 本人에게 賦與된 歷史的 課題임을 痛感하고 있습니다.('제5공화국 대통령 취임연설문'에서)

 

 

06. 01. 11.

 

 

 

 

 

 

 

 

 

 

P.S. 작고한 평론가 이성욱의 <쇼쇼쇼: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생각의나무, 2004)에는 '마음의 요람이 되어버린 김추자'란 절이 포함돼 있다. 김훈의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생각의나무, 2004)에도 '양희은, 김추자, 심수봉'이란 글꼭지가 있다(이 책은 산 것 같은데 그 글은 아직 못 읽었다). 그리고 이선영의 시집 <일찍 늙으며 꽃꿈>(창비, 2003)에는 '이미자와 김추자'란 시가 들어 있다(이 또한 아직 못 읽었다). 이영미의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황금가지, 2002)는 우리 대중음악사인데, '신중현과 김추자에 대한 기억들'이란 꼭지에서 김추자가 다루어지고 있다.

 

 

 

나는 김추자(1951-)에 대해서 특별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어렸을 적에 접했던 대중가요는 주로 남진, 나훈아, 아니면 패티김과 이미자였다(아마도 어머니의 취향이셨던 듯하다). 물론 이 '전설적인 가수(혹은 '간첩')의 노래를 들어는 보았겠지만, 그다지 조숙하지 않았던 '나의 취향'은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함께 비로소 시작됐기에.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을 점령했던 건 마이클 잭슨이었고 컬처클럽이나 듀란듀란 같은 '팝'그룹들이었다. 그 음악취향이라는 것도 '조지 마이클'과 '마돈나'를 거쳐 'R.E.M.' 정도에서 저문 듯하다. 이후로는 대중음반을 산 기억이 거의 없다. 나는 영화음악이나 편곡된 국악 정도를 가끔 듣는다.

 

 

 

 

 

 

 

그런 가운데 없는 인연을 만들어낸 건 조관우의 리메이크 '님은 먼 곳에'이다. 한 연구소에서 간사로 근무할 때에는 벅스뮤직에서 온갖 버전의 '님은 먼곳에'를 나의 앨범으로 만들어서 종일 듣곤 했다('빗속의 여인'도 그런 식으로 듣곤 했다). '꽃잎'은 그 다음이었다. 몇달 전인가 우리의 대중문화사를 다룬 한 TV프로그램에서 김추자 특집이 다루어지는 걸 보았고 김추자에 대한 새삼스런 '흥미'를 느꼈지만 내가 터치할 수 있는 쪽은 아니어서 흥미로운 책들이 씌어지기를 고대할 뿐이다. 그런 와중에 눈에 띈 '김추자에게 보내는 연서'가 기대를 얼마간 충족시켜준 것. 

 

시인은 김추자의 '꽃잎'을 주조음으로 깔면서 마치 디스크 자키처럼 여러 장르의 여러 노래들을 뒤섞고 있는데, 좀 아쉽게 생각하는 건 '나와 김추자'의 구체적 세목이 빠진 것. 해서 시는 재미있지만 감동은 없다. 물론 3번째 단락에 전두환의 연설을 삽입해 넣음으로써 시인이 의도한 건 돌발적인 충돌의 몽타주와 그로 인한 충격효과인 듯하지만, 시적 화자의 포지션은 (황지우식의) 방법적 인용과 (유하식의) 개인사적 고백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돼 버린 게 아닌가 싶다. '뒷심'을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참고로 신중현 작사/작곡의 '꽃잎' 가사를 옮겨둔다.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 날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서로가 말도 하지 않고
나는 토라져서 그대로 와 버렸네

그대 왜 날 잡지 않고
그대는 왜 가버렸나

꽃잎 보면 생각하네
왜 그렇게 헤어졌나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 날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서로가 말도 하지 않고
나는 토라져서 그대로 와 버렸네

꽃잎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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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1-11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추자 이전에 가수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없다.
작고한 평론가 이성욱씨의 말입니다.
저요? 제게있어 여가수 NO.1은 단연코 김추자입니다.
님과 공유하는 연서가 있다니, 가슴이 마구 뛰어요^^
제 페이퍼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580089 보시삼..흐흐

로쟈 2006-01-12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귀가길에 올린 글이어서 마무리를 못 지었었는데, 마저 보충했습니다. 김추자를 좋아하시는군요!^^
 

'리센코, 황우석 그리고 국가'란 페이퍼에서 리센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한 러시아 소설을 읽고서라고 했는데,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이 그 소설의 제목이다. 작가는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보이노비치. 대학원 시절에 발표용으로 써두었던 글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서사성과 풍자성이 아주 강한 재미있는 장편소설인데(줄거리만으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어서 '공개적'으로 소개한다),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것이 유감이다(아래 이미지들은 작가의 근영과 러시아본, 그리고 영역본). 보이노비치의 책으론 그의 소비에트 문명 비판서인 <혁명 70년의 소련사회>(지식산업사, 1988)가 유일하게 소개돼 있는 듯하다. 기억에 독역본의 번역이다.

먼저, V. 보이노비치(1932- )에 대해서 러시아 문학사전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의 타지키스탄의 수도 스탈리나바드(현재의 두샨베)에서 1932년 9월 26일 출생. 아버지는 세르비아계로서 저널리스트이자 번역문학가(세르비아문학을 러시아어로 번역)로 활동했고, 어머니는 유태계로서 교사였다. 5년간의 학교 교육을 받은 후 집단농장과 건설공사장, 공장 등지에서 일했다. 1951년에서 55년 사이에 붉은 군대의 병사로 복무하였다. 몇 편의 시를 발표하고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에 지원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카자흐스탄에서 낮에는 목수로 일하고 저녁엔 교사로 활동. 1960년에 모스크바 라디오에서 일자리를 얻고 소비에트의 비공식적인 우주비행사가의 작사가로서 유명해졌다(50여편의 노래를 작사하였고, 그 중에는 당시 소련 사람들에게 친숙한 것들도 많다고 함).

그의 첫번째 단편 <우리는 여기에 산다>가 1961년 <노브이 미르>에 발표되어 명성을 얻게 된다. 집단농장의 젊은이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있는 그대로의 삶”을 묘사한다는 그의 창작방법은, 그러나 곧 논란을 불러일으킴). 1973년(1963년?) 5편의 다른 단편과 혁명가 베라 피그너에 대한 한 편의 소설 발표. 아파트 공사장의 냉소적인 일꾼들에 대해 묘사한 <나는 정직하고 싶다>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본격적인 탄압은 그가 1966년에서 68년까지 진행된 시냐프스키와 다니엘 재판과 솔제니친의 작가동맹으로부터의 축출에 반대(그는 솔제니친을 “우리의 가장 위대한 시민”이라 부름)함으로써 시작되었고, 결국 1974년 2월 21일 그 자신 작가동맹으로부터 축출됨에 따라 소련에서는 더 이상 출판할 수 없게 되었다. <메트로폴에서 생긴 일>(1975)에서 그는 1975년 KGB가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보이노비치의 대표작이자 풍자소설인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1963-70)은 지하출판(사미즈다트)을 통해 널리 읽혀졌고 해외에서 출간되었다(이 소설은 속편을 포함해 2부작이며 여기서 소개하는 것은 1부의 내용이다. 물론 영화화돼 있다). 1976년 미국에서 러시아어로 출간된 <이반키아다>에서 그는 모스크바에서 아파트를 얻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묘사, 상층 관료집단을 가감없이 그려내기도 했다. 결국 어느 날 한 장교가 찾아와 “나는 소련 정부와 국민들의 인내심이 한계점에 다다랐음을 당신에게 알리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통고한다. 다행히 바로 체포되지는 않고 망명을 권유받아 1980년 12월 21일 가족과 함께 서독으로 강제 이주당한다. 이어서 6개월 후 당시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에 의해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1981년 무니흐에 있는 바바리안 미술 아카데미에서 강연, 1982-3년에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교수 역임를 역임했다. 현재는 다시 러시아에 귀향하여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보이노비치의 주된 테마는 사실보다는 환상에 가치를 두는 국가-통제 체제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 찾기가 얼마나 힘든가이다.  장편 희극 서사시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에서 이반 촌킨이라는 농민 반-주인공을 통해 보이노비치는 NKVD를 포함한 소비에트의 생활양식의 거품을 모조리 빼버린다(마음껏 풍자한다). 보이노비치의 탁월한 풍자적 재능과 상상력은 몇몇 비평가들로 하여금 그를 '새로운 고골'이라 칭하게 한다. 하지만 19세기의 고골이 단순한 풍자작가 이상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노비치 또한 풍자작가 이상의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어 보이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누구라는 공감하는 바이겠지만, 그에겐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고골의 <외투>가 보여주는 ‘눈물 속의 웃음’과도 같은 짓궂음이 그에게도 있는 것이다.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이하 <촌킨의 모험>)은 일차적으로 재미있다. 러시아에서 보이노비치는 대단한 인기이며, 그의 문학을 좀 읽는다는 사람치고 '촌킨'을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제대로 된 풍자작가에게라면 당연히 뒤따르는 대중성을 그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이다(주로 단편을 쓰긴 했지만 1920년대의 풍자작가 조셴코 또한 우리가 이 방면에서 기억해 두어야 하는 이름이다. 보이노비치 자신의 조셴코의 탄생 90주년에 부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러시아풍자문학의 전통과 계보의 맥락안에서 보이노비치를 위치시키고 다른 작가들과 비교․평가하는 일은 기본적인 일이면서 해볼만한 일로 보여진다, 당장은 아니지만.)  

 

먼저 줄거리. 이야기는 러시아의 어느 변두리 콜호즈인 크라스노예(어원상으론 '빨간 마을'이면서 '아름다운 마을'이란 뜻)와 병영을 오가며 시작된다. 때는 1941년 5월말에서 6월초.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6월 21-2일)을 불과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이다. 비번인 날에 우체국 직원인 노처녀 뉴라가 밭을 매고 있을 때 러시아군 비행기 한 대가 엔진고장으로 이 크라스노예의 한 텃밭에 불시착한다. 마을 면장인 골루베프는 자기 스스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선택하거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인물인데, 이제나저제나 ‘검찰관’이 오지 않을까 하던 차에 그런 방문을 받고서 애써 의연해진다.

 

그리고는 병영. 숏다리에다 앙가발이(O자형 다리)인 촌킨은 제대를 1년 정도 남겨둔 붉은 군대의 사병인데, 한창 얼차려를 받고 있다. 이미 이름(바보 이반)에서 예상할 수 있지만, 촌킨은 단순/소박의 무지랭이형으로서 무엇 하나 똑부러지게 하는 일이 없는 고문관 타입으로 땔감이나 나르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군대는 그의 체질이 아니다). 정신교육 시간에 그는 자주 놀림거리가 되는데, 순박한 촌킨은 자신이 놀림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태연하게 “스탈린 동지에게 마누라가 둘 있다는 게 사실이냐?”는 식의 황당한 질문으로 교관을 당혹스럽게 한다.

 

 

 

 

 

 

 

 

 

 

그러던 중 사령부에서는 비행기 불시착에 대한 보고를 받고 사병 하나를 보초로 보내기로 결정하는데, 엉겹결에 남는 사병(으로 여겨지는) 촌킨이 발탁된다. 한 조용한 마을에 덩그러니 놓인 비행기에 새 엔진이 도착할 때까지 일주일 가량 경계근무를 맡게 된 것이다. 그게 시작이다. 왜 하필 이런 인물이 주인공이냐는 질문에 대해, 작가는 다른 똘똘한 주인공들(가령, 나중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오스트롭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의 강철 같은 주인공들)은 다른 작가들이 다 데려가고 물렁쇠 같은 촌킨만 남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또 아무리 모자란 주인공이라도 제 자식이 이쁘고 똑똑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로선 애착이 간다면서. 하여간 모험은 그렇게 시작된다. 

 

경계근무를 서는 보초수칙에 의하면 잡담은 물론 먹고 마시는 것도 금지이지만, 일주일간 보초를 서면서 그런 수칙을 지킨다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지레 내린 촌킨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또 밭을 매던 뉴라를 보게 되고 수작을 건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둘 일은 농부로서의 촌킨은 거의 흠잡을 데가 없다는 사실(농사일은 그의 체질이다). 촌킨의 일솜씨에 뉴라는 반하게 되고 내친 김에 둘은 동거를 시작한다. 집안 청소며 가축들 먹이 주는 일에도 촌킨은 열성이고 남는 시간에 자수를 하는 자상한 면모까지 갖추고 있으니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다(더구나 밤에는 잠도 못자게 한다).

 

이런 촌킨과 비행기에 대해서 사령부에서는 까맣고 잊고 있는데,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 속에서도 문득 자신의 공적인 임무는 잊지 않고 있던 촌킨은(꿈에서 스탈린 동지가 근무지 이탈을 추궁한다) 왜 일주일이 지난 뒤에도 아무런 연락이나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가 의아하게 여기며 옆집 친구인 글라드이셰프의 손을 빌어 사령부에 보고편지를 내지만, 이 편지는 촌킨과 헤어질 것을 우려한 뉴라에 의해 몰래 소각된다. 그래서 당분간 촌킨은 뉴라의 집에 기숙하면서 크라스노예에 죽치고 있게 된다. 이런 그를 면장인 골루베프는 또 찾아와 “나는 주정꾼이다, 잡아갈테면 잡아가라.” “나는 애가 여섯이다, 그래도 잡아갈테냐”는 식의 푸념을 늘어놓는다. 물론 촌킨으로서는 영문을 알 리가 없다.

 

 

옆집 사는 글라드이셰프는 종자개량에 열성인 유사-과학자이다(리센코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물론 글라디이셰프는 사기꾼은 아니며 논문을 조작하거나 하지도 않는 '순수' 과학자이다. 아마추어라는 게 문제일 뿐). 그는 감자 뿌리에 토마토 열매가 열리는 종자교배(그걸 그는 “사회주의로의 길”이라고 이름붙인다. 러시아어 약자로는 '방귀소리'가 된다)에 몰두하고 있는데, 거의 성공하여 토마토 뿌리에 줄기가 감자 비스무레한 식물을 얻는데까지는 성공한다. 그는 아내를 아프로디테라 부르고 아들은 헤라클레스라 부르면서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하느라 집안일은 소홀히 하고(퇴비냄새가 진동한다), 또 입만 열면 자신의 업적과 관심에 대해 떠벌이기 일쑤이다(그래서 친구가 없다).

 

그런 그가 촌킨과는 막역한 친구가 되는데, 그로선 촌킨이 무식한데다 아무런 군소리 없이 자신의 열변을 다 들어주기 때문이고, 촌킨으로선 또 나름대로 대화상대가 생겼기 때문이다(이전의 촌킨은 주로 말과 대화를 나누던 정도). 진화론자인 글라드이셰프는 원숭이가 인간이 됐다는 자신의 지식을 떠벌이지만, 왜 열심히 일하는 말은 인간이 되지 못했느냐는 촌킨의 반문에 머리를 싸맨다(손가락이 없어서 그랬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한편 촌킨은 뉴라가 애지중지하는 새끼 돼지 보르카에 대해 이웃들이 수군거리자 보르카를 쏴죽이겠다고 하여 뉴라가 다투게 되고 홧김을 잠시 집을 나와보지만 딱히 갈곳은 없다. 잠깐 잠이 든 새에 그는 보르카와 뉴라가 결혼식을 하고 모두가 즐겁게 꿀꿀대는 꿈을 꾼다).

 

 

 

 

 

 

 

 

 

그러던 차에 촌킨이 크라스노예에 안착한 지 3주쯤이 지나고 전쟁이 터진다. 독․소 불가침조약(1939)만 철석같이 믿고 있던 소련군은 뒤통수를 맞은 격이니 전혀 준비가 안 돼 있다. 마을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마을 공회당에 집결하여 마을의 면장인 골루베프와 당위원장인 킬린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들은 한바탕 연설로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마을엔 사재지가 일어나는 등 어수선해진다. 한편 사령부에서는 뒤늦게서야 크라스노예에 누군가 보냈던 걸 기억해내고, 촌킨을 탈영병(근무지 이탈)으로 간주하여 체포영장을 발부한다. 이 와중에 사령부와 골루베프 간의 전화 교신 중 오해가 발생한다. 특이한 자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골루베프가 '촌킨과 그의 여자'라고 한 것을 사령부는 '촌킨과 그의 여단'으로 알아듣고 ‘촌킨과 그의 여단’에 대한 소문은 와전에 와전을 거듭하여 급기야는 독일군 첩보대로 간주된다.

 

 

 

 

 

 

 

 

 

사정도 모르고 있던 촌킨에게 일곱인가 여덟 명의 특수요원 체포조가 들이닥치지만 좀 엉성하면서 영웅적인 촌킨과 뉴라의 활약에 의해 오히려 이들이 촌킨의 포로가 되고 헛간에 갇힌다. 마침 전시라 곡물 수확량이 거의 없는 점에 착안해 촌킨은 이 유휴인력을 수확에 동원하고 크라스노에 마을은 가장 우수한 수확실적을 올린다. 한편 사령부에서는 체포조가 모조리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단 병력을 동원하여 마을을 포위한다. 이때 체포조장이었던 밀랴가 대위는 어렵사리 촌킨의 헛간을 탈출하지만 기절한 상태로 붉은 군대에 잡혀 오는데, 붉은 군대는 그를 독일군으로 착각하여 촌킨 일당에 대해 독어로 심문하게 되고 밀랴가는 자신이 독일군에 체포된 줄 알고 더듬대는 독어로 ‘히틀러 만세’까지 부른다. 나중에 밀랴가는 자신이 붉은 군대에 둘러싸인 걸 발견하고 러시아군이라는 걸 밝히기 위해 러시아어로 한 마디 하지만, 엉겹결에 말이 잘못나온다. ‘히틀러 만세’(그는 총살된다). 도대체 영문을 모르는 촌킨은 자신의 근무지를 사수하기 위해 결사항전을 하지만, 끝내 체포된다. 울먹이는 뉴라를 뒤에 남겨놓고...(여기까지가 1부이다. 이야기는 속편인 2부로 이어지지만 분량관계로 아직 읽지 못했다.)

 

 


크라스노예 마을의 별칭인 그랴즈노예('더러운 마을'이란 뜻)인 데서 드러나듯이 “촌킨의 모험”은 실재와 가면, 사실과 환상이 서로 뒤섞인 이야기이다. 스탈린이라는 절대 권력 하에서 모든 인물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보당한 채 끊임없이 어떤 역할(가면)들을 강요받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틀리게 읽고, 대부분의 웃음은 이 오인에서 비롯한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사회체제가 바뀌었으니 인민들도 바뀌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서 사회주의적 인간형으로 재탄생해야 마땅한 것이지만, 이 변두리 마을 크라스노예의 사람들이 대표해서 보여주듯이 사람들의 심성도 지적 수준도 더 나아지지 않았고 또 달라지지도 않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사회주의적 영웅을 강요받지만, 가령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에서의 주인공은 혁명과 내전을 위해 자신의 두 팔과 두 다리를 바쳤고 눈까지 멀었음에도 인민을 위해 마지막까지 봉사하려고 한다지만, 정작 어디 그런가, 누가 그런가? 이 점을 아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밀랴가 대위의 경우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인민들은 무능력하고(간간히 인물들은 자신의 무능력을 절감한다. 가령 2차 대전이니, 독일의 소련 침공이니 하는 것과 촌킨과 뉴라의 달짝지근한 삶과는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또 대단히 무식하다(이 무식함 또한 여러 군데서 독자를 웃게 만든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떡해야 하나? 종자개량이다.

 

 

이 점을 표나게 보여주는 것이 글라드이셰프의 “사회주의로의 길”이다. 토마토나 감자 가지고는 안 돼고 감자 뿌리에 토마토 열매가 열리는 것, 이것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새로운 종자이고 새로운 인간형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하고 있는가? 글라드이셰프의 열성에도 불구하고 고작 토마토 뿌리에 감자 줄기가 전부이다. 이건 물론 죽도 밥도 아니다(즉 감자로도 토마토로도 쓸모가 없다). 과도기에 진통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다(그 70년의 과도기 끝에 현실 사회주의는 붕괴했지만). 하지만 보이노비치는 단호하고 아주 결연하게 그러한 프로그램과 그러한 인간형, 그러한 종자개량에 반대하는 듯하다. 그저 바보 이반다움, 무식함, 순박함, 그런 걸 가지고도 얼마든지 사람다운 세상,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일까? 그렇다는 듯하다.

 

이 점은 서술전략에 있어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전혀 거리가 먼 주인공과 러시아 전래의 요술담 모티브들이 사용됨으로써 보강된다. 요컨대 전면전인 것이다. 재미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속에, 크라스노예와 그랴즈노예의 대립이, '촌킨과 그의 여단'과 새로운 사회주의 인간형의 대립이, 그리고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러시아 민담의 대립이 날줄과 씨줄로 짜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촌킨의 모험>이 조만간 번역되기를 바란다는 것. 그리고 비슷한 성격의 원조격 작품으로 체코 작가 야로슬라프 하셰크(1883-1923)의 <병사 슈베이크>(주우, 1983)도 재출간되기를 기대한다.

 

 

06.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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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6-01-12 0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와.........디게 재밌네요. 번역 예정이 있긴 하답니까.

로쟈 2006-01-1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량이 좀 두꺼운 탓인지 아직 번역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데, 시장성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눈밝은 출판사를 기다려봐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