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과 대중심리>에 관하여 내가 갖고 있는 책들은 독어본을 제외한 4종의 번역본이다. 이번에 나온 황선길 역의 <파시즘과 대중심리>(그린비, 2006)와 함께 오세철/문형구 역의 <파시즘과 대중심리>(현상과인식, 1980/1987), 그리고 영역본 'The Mass Psychology of Fascism'(1970 )과 러시아어본 'Психология масс и фашизм'(2004)이다(러시아어본은 여러 권이 나와 있으며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악트출판사의 2004년판이다).

 

재작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본을 구입할 당시에 내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책은 현상과인식사판의 국역본이었지만, 작년에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될 거라는 소식을 접하고 은근히 고대한 바 있다. 이번에 나온 책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라이히 정본으로서 흠잡을 데 없어 보인다. 이젠 독자들이 좀 읽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 

 

한데, 새 번역본을 읽어나가다가 좀 의아스런 대목들과 마주치게 됐다. 본문 첫장인 '제1장 물질적 힘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첫 페이지부터이다: "독일에서 민족사회주의가 권력을 장악한 지 몇 개월이 지났을 때, 여러 해 동안 자신들의 혁명적 굳건함과 자유를 위한 출격준비를 행동으로 증명한 사람들조차도 사회적 사건에 대한 맑스주의적 기본개념의 정당성에 대하여 자주 의혹을 표명했다."(33쪽)

 

굵은 글씨로 표시한 건 처음 읽으면서 낯설게 느낀 대목들인데, 일단 예전에 '국가사회주의'라고 주로 번역해온 단어 'Nationalsozialistische'(영어로는 'National Socialism')이 최근에는 '민족사회주의'로 번역된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학계에 따르면, 나치즘의 이론이 국가보다 민족을 더 우위에 두고 있는바, '국가'는 '민족'을 위해 존재하는 식이라는 사고 방식을 고려한 수정된 번역이라 한다(물론 독어나 영어 등에서는 '국가'와 '민족'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nation'이라 통칭하므로 이런 번역문제가 제기되는 건 한국, 일본 등 아시아권에 국한될 듯하지만). 어쨌거나 새 번역어가 단번에 입에 익지는 않을 테지만 새로운 '관행'에 따라야 할 터이다.

 

이어서 '자유를 위한 출격준비'. 그린비판의 번역은 <파시즘과 대중심리> 독어본이 아니라 라이히재단에서 제시한 라이히 '수고본'을 옮긴 것이기에 다른 번역본들과 차이가 나는 대목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를 위한 출격준비'까지 그러한 차이와 관련되는 것인지는 좀 의심스럽다. 현상과인식사판의 이 대목 번역은 이렇다: "독일에서 국가사회주의가 권력을 장악한 지 몇 개월이 지났을 때, 혁명적 굳건함을 가지고 혁명에 투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인정된 사람들까지도 사회과정에 대한 마르크스의 기본개념의 정확성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하였다."(37쪽)

 

그리고 영역본: "In the months following National Socialism's seizure of power in Germany, even those individuals whose revolutionary firmness and readiness to be of service had been proven again and agian, expressed doubts about the correctness of Marx's basic conception of social process."(3쪽)

 

오세철본은 영역본을 옮긴 것이고 러시아어본의 번역도 영역본과 일치한다. 나로선 황선길본 번역이 부정확한 게 아닌가 싶다('자유'라는 단어가 어떻게 끼어든 것인지 모르겠다. 거기에 '출격'?). "자신들의 혁명적 굳건함과 자유를 위한 출격준비를 행동으로 증명한 사람들"이란 짐작에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투철한 신념과 행동의지(준비)를 갖춘 사람들" 정도의 뜻이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우리말로 어색하며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사회적 사건에 대한 맑스주의적 기본개념". 이에 대한 영역이 "Marx's basic conception of social process"인 것에서 알 수 있지만, '사회적 사건'보다는 '사회과정'이라는 역어가 더 적절해보인다(러시아어본도 '사회과정'이라고 옮기고 있다). 해서, '정당성'과 '정확성'은 문맥상 호환의 여지가 있다고 쳐도 이 대목의 새 번역의 '정확성'에 나로선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다른 곳도 아니고 첫 페이지이기 때문에 더더욱.

 

조금만 더 읽어보자. 황선길본 35쪽에서 라이히가 맑스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오토 슈트라서(1897-1974)를 인용하고 있는 대목이다. 참고로, 그레고르와 오토 슈트라서 형제는 나치당 형성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로서 바이에른의 중산층 출신이고 1920년 신생 나치당에 입당, 1923년 히틀러의 '비어 홀 폭동'에 참가했다. 히틀러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레고르는 불법화된 나치당을 이끌었고, 설득력 있는 대중 연설가이며 타고난 조직가였던 그는 동생 오토와 함께 요제프 괴벨스의 도움을 받아 대중운동을 조직했다. 그들은 민족주의적·인종주의적인 색채가 가미된 사회주의를 역설함으로써 중하층 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해서, 1928년 이후 나치당이 얻은 대중적 지지는 부분적으로 이들 형제의 노력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한다(하지만, 이후에 이들은 히틀러의 노선에 환멸을 느껴서 탈당하게 되며, 그레고르는 1934년 에른스트 룀의 숙청기간에 살해되었고, 오토는 간신히 탈출하여 캐나다에 정착했다가 1955년 독일로 돌아와 정계복귀를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한다). 

 

그는 무어라고 연설했는가: "당신들 맑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맑스의 이론을 즐겨 인용한다. 맑스는 이론을 실천에 의해서만 검증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당신들은 항상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실패에 머무르고 있다.(...) 1880년 이후 실천을 통한 사회혁명의 가르침에 대한 검증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한 오세철본의 번역: “마르크스주의자 당신들은 당신들의 방어를 위해 마르크스의 이론을 인용하기를 좋아한다. 이론은 실천에 의해서만 입증된다고 마르크스는 가르쳤으나 당신들의 마르크스주의는 실패로 판명되었다. 당신들은 항상 노동자 인터내셔날의 실패에 대한 설명에 머무르고 있다.(...) 80년이 지났는데도 사회혁명 이론구체적인 확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39쪽)

 

그리고 영역본: "You Marxists like to quote Marx's theories in your defense. Marx taught that theory is verified by practice only, but your Marxism has proved to be a failure. You always come around with explanation for the defeat of the Workers' International.(...) Eighty years have passed, and where is the concrete confirmation of the theory of social revolution?"(5쪽)

 

 

 

 

 

 

  

 

 

 

굵은 글씨는 일단 차이가 나는 대목들인데,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일단 황선길본에서는 '당신들의 맑스주의는 실패로 판명되었다'란 대목이 누락됐다. 그리고, "80년이 지났는데도"가 "1880년 이후"로 옮겨졌다. 나는 이 대목을 읽고 처음에는 오세철본이 오역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지만,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에서 모두 '1880년'이 아니라 '80년'이라고 돼 있었다. 연설시점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기점을 <공산당선언>(1848)으로 삼은 게 아닐까 싶다. 이후 80년이면, 대략 1928년 이후가 되며 슈트라서 형제가 활동하던 시기이다. 그렇다면, '1880년 이후'란 번역은 픽션에 속한다. 나머지 '사회혁명의 가르침' 대 '사회혁명의 이론'이나 '검증' 대 '구체적 확신' 등의 차이가 선택적인 걸로 용인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고작 몇 페이지를 읽은 소감이긴 하지만(역자는 열번 이상 읽지 않았을까?), 모처럼 출간된 <파시즘과 대중심리>의 새 번역본이 기대에 값한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필요한 대목들이 2판에서라도 수정/교정되어 라이히 정본으로서 널리 읽히고 인용되기를 기대해본다.   

 

06. 01. 18.

 

 

 

 

 

 

 

 

 

P.S. 몇 페이지밖에 안 읽었어도 건질 건 건져야겠다. 당대 맑스주의의 문제점(결점이면서 태만)을 꼬집으면서 라이히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런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맑스주의적 정치는 그 정치적 실천에 있어서 대중들의 성격구조와 신비주의의 사회적 영향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36쪽) 그렇다면, 거꾸로 라이히가 이 책에서 고려하고자 하는 것도 분명해진다. 그것은 '대중의 성격구조'와 '신비주의의 사회적 영향'이다. 여기서 '신비주의'란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가리키는바, 그 '영향'이란 건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이다. 이제나 저제나 좌파 관념론자들이 간과하거나 사고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 말이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oule 2006-01-18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서재에 가져가서 볼게요.

Joule 2006-01-18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참, 홀링데일의 니체요. 루 잘로메 말고 나머지 번역상태는 괜찮은가요.

로쟈 2006-01-18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홀링데일의 책은 도서관에서 대출했다가 바로 반납했기 때문에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책은 아니므로 별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lefebvre 2006-01-18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글을 로쟈님 글 앞쪽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이유는......양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

로쟈 2006-01-1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문점들을 해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라이히의 독일어 수고를 직접 옮긴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번역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독일에도 없는 책이죠!) 한데, 이미 나와 있는 독어본, 영어본들이 수고본과 결정적인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차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심사항이 될 만한 것 정도인지 궁금합니다. '의미있는 차이'일 경우, 아마 역자도 기존의 독어본을 같이 참조했을 터이므로 국역본에서 언급해주었더라면 보다 완벽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1)'민족사회주의'는 제가 의문을 제기한 게 아니고 (2)'자유를 위한 출격준비'는 라이히의 '시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면 되겠군요.^^ (3)그렇다면, '사회적 사건'에 대해서만 옮긴이와 '해석'을 달리하는 듯합니다. '독일 파시즘(즉, 나치즘)의 등장과 성공'에만 국한된다고 보진 않지만, 그 경우에도 '특정한 사건'이라기보다는 일련의 '흐름'이나 '진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4)'정확성'과 '정당성'도 선택(해석)의 문제로 보이며, 저는 어느 한쪽이 오역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본문에서도 오역이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사소한 '옥에 티'도 커보이는 걸로 생각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瑚璉 2006-01-18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접 옮기신 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느니 참 좋군요.

그런데 로쟈 님께 하나만 질문드리자면, 저로서는 정확성과 정당성을 상호교환이 가능한 개념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만 저 개념들이 선택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냥 딜레탕트의 질문으로 간주해 주십시오)

로쟈 2006-01-18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말에 '맞다' 같은 경우 '옳다'의 함의도 갖기 때문에 '정확성'과 '정당성'을 모두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영어의 'correct'에도 두 가지 뜻이 다 있구요. 우리말이 '너무 예민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 아서 단토(1924- )의 책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는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된 예술/미학 관련서로서 단연 손에 꼽을 만한 책이다(모스크바에서 이 책을 검색하고 잠시 놀라고 반가웠다). 하지만 '경제난'으로 구입을 망설이다가 얼마전 미술 전공자 몇 분과 독회를 꾸리게 되면서 이 책을 드디어 손에 들게 되었다. 마침 그해 여름에 나온 미국의 모더니즘 최고의 미술비평가로 꼽히는 클레멘트 그린버그(1909-1994)의 에세이집 <예술과 문화>(경성대출판부, 2004)도 번역/소개된 만큼 미학과 예술철학에 관심있는 독자들로선 한번쯤 시간을 내봄직하다.

참고로 평론가 그린버그의 짝패는 액션페인팅의 주창자 잭슨 폴록이며, 이 두 사람의 주거니받거니 덕에(거기에 CIA가 뒤를 봐줬다고도 하고) 2차 대전 이후 세계미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건너가게 된다. 단토는 '그린버그 이후'의 대표적인 비평가이고자 한다(이미지들은 차례대로, 아서 단토와 'After the end of art' 원저, 그리고 그린버그와 'Art and Culture' 원저). 그의 이론적 영감의 원천은 앤디 워홀. 폴록과 워홀에 대해서는 각각 영화 <폴락>(2000)과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1999)를 참조할 수 있겠다. 나는 몇년 전에 <폴락>은 본 적이 있는데, 볼 때는 몰랐지만 거기 나오는 비평가가 혹 그린버그가 아닌가 싶다. 단토의 책 제4장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역사적 비전'에 할애돼 있다.

현재 컬럼비아대학 철학과의 명예교수로 소개돼 있는 단토는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과학철학과 분석철학에서 시작해 역사철학, 예술철학 등 다방면에 걸친 수십 권의 저서를 갖고 있다(그는 1984년부터 <네이션>지의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하니까 20년 이상 현역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셈이며, 비평서들도 꾸준히 묶어내고 있다. 최신간은 작년에 출간된 'Unnatural wonders'). 그 중 <사르트르의 철학>(민음사, 1985)이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실상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이후에 <철학자로서의 니체>(1965, 작년 2005년에 개정판이 나왔다)가 그의 또다른 주저라는 걸 알게 됐고, 도서관에서 그의 역사철학서도 발견하면서 '스케일'에 놀랐다('Narrartion and Knowledge'가 그 책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는 예술철학자나 미술비평가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고, 단토 자신도 그걸 더 원하는 듯하다. 그럴 경우 그의 이름과 함께 나란히 기억될 테제가 바로 '예술의 종말'론이다. <예술의 종말 이후> 한국어판에 붙인 서문의 끝자락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예술의 종말 이후>를 한국어로 번역하기로 한 결정이 이 책의 테제가 진리임을 증명하고 있다는 생각을 억누를 수가 없다!" 이러한 그의 기대가 백일몽만은 아닌 것이 독어권 학자인 미카엘 하우스캘러(혹은 '미하일 하우스켈러')의 <예술이란 무엇인가>(철학과현실사, 2004, 이 책의 다른 번역본이 <예술앞에 선 철학자>(이론과실천, 2003)이다)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미학이론가'들이 바로 플라톤부터 단토까지이다. 이미 '명예의 전당'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은 셈.   

<예술이란 무엇인가>는 1974년생이라는 저자 하우스캘러가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내 룬트샤우 신문에 기고했던 16명의 사상가들의 미학 사상을 요약한 글 모음"이라는데, 단토와 함께 거명되고 있는 20세기 후반의 미학이론가는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1924-1998)와 넬슨 굿맨(1906-1998) 정도이다(단토는 리오타르와 동갑내기이군). 그 정도면 단토의 지명도를 어림짐작해볼 수 있겠다. 한편, 단토와 교분을 나누었던 박이문 교수의 <예술철학>(문학과지성사, 1984) 등에서도 그에 대한 언급들을 찾아볼 수 있다(비록 그 책에서 박이문의 경쟁상대는 단토가 아니라 '제도로서의 예술'을 주장했던 조지 디키(딕키)였지만. 알라딘에는 저자가 '조지디키'로 돼 있다. 현재로서 단토의 지명도는 디키를 넘어선 듯하다). 한편, 하우스캘러의 책은 너무 소략해서('책'이라기보다는 '팜플릿'이다) 말 그대로 '30분에 읽는 예술이론'이다.

 

 

 

 

'예술의 종말(the end of art)'라고는 하지만, 이때의 '예술'은 '미술'을 가리킨다(영어에서 'art'란 단어는 예술과 미술을 구분없이 지칭하기 때문에 우리말 번역에서 간혹 애를 먹인다). 곰브리치(1909-2001)의 고전 'The Story of Art'가 <서양미술사>(예경, 1999)로 번역되는 것처럼(곰브리치는 그린버그와 동갑내기로군). 이 예술 혹은 미술의 종말은 사실 여러 차례 주장되었었다. 세잔 이후에 미술은 끝났다는 둥, 뒤샹의 레디-메이드 이후에 미술은 이미 종쳤다는 둥.

 

단토의 경우 이 '미술의 종말'은 1965년부터이다. 일단 역자해설을 참고하면, 그에게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1964)인데(아래 이미지. 말 그대로 상품박스이다. 단 '미술관에 전시된'. 이게 '마트'에 있을 경우엔 별 문제가 없지만 '미술관'에 놓여 있을 때는 머리 아파지기 시작한다!), 그게 미술의 끝이자 역사의 끝이며, 이후는 '미술의 역사 이후의 시기(the Post-Hostorical Period of Art)'이다. 단토의 <브릴로 상자를 넘어서(Beyond the Brillo Box)>(1992)는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미술사는 이른바 이 '브릴로 상자'를 경계로 하여 '역사시대'에 '탈역사시대'로 구분된다는 얘기.  

그렇다면,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왜 그토록 충격적인 것인가, 혹은 충격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미술작품과 미술작품이 아닌 것의 차이를 더이상 식별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개나 소나, 혹은 비누박스나 라면박스나 다 '예술'로 둔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으므로). 적어도 외관상으로 똑같은 브릴로 비누상자와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그렇다면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미술에 대한 정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미술의 문제를 감각(손)의 문제가 아닌 사고(머리)의 문제로 전환시킨다.

"그[단토]에게 워홀의 작품은 헤겔 이후 미학의 황무지에서 발견한 한 가닥 희망이었다. 그는 미술의 의미를 미술로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워홀의 작품에서 깨달은 바는 '어떤 것들이라도 작품이 될 수' 있으며, '미술이 무엇이냐는 점을' 발견하려면 '감각의 경험으로부터 사고로 방향을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미술이 외관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이며, 궁극적으로 철학의 문제임을 알았다."(역자해설, 431쪽, 강조는 나의 것)

사정을 단토의 표현으로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게 된다: "(이제) 우리는 예술이라고 하는 핵심적인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거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것과, 한때 예술에(게) 본질적인 것으로 보였던 속성들이 아예 없더라도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술작품의 외양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어떤 것이든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의 발견과 논리적으로 서로 맞아떨어지는 예술정의를 짜만들어야 했다. 어떤 것을 집어들고서 이것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 이제 논지를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역사는 종말에 도달하였다."(13쪽)

 

 

 

 

다시 말해서, 예술이 무엇인가를 규정해줄 수 있는 어떤 고유한 '예술성'의 목록을 우리가 제시할 수 없을 때 더이상 (예전에 정의되던 바의) '예술'은 없다. 예술은 끝났다. 예술은 종쳤다. 그럼, 뭐가 남는가? 폐허만이 남는가? 그건 아니다. 여기서는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외침을 다시 반복하면 된다: '만세!'(딸아이의 표현으론 '앗싸!') 해서, 예술 이후의 시대는 "심원한 다원주의와 완전한 관용의 시대"(24쪽)이다. 더불어, 예술에 대한 모든 규정과 종속으로부터 해방된 시대이다.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이다. 그들은 이제 어떤 것이 가능한지 않은지를 확증하기 위해 실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 고 미리 말해줄 수 있다. 예술의 종말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오히려 역사의 종말에 대한 헤겔의 생각과 비슷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는 자유에서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예술가들의 상황이다."(17쪽)

이것이 헤겔리안으로 분류되는 단토의 '철학적 미술사'이다(비록 헤겔과의 차이도 그 자신은 분명히 하지만). 그리고, 그의 자평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예술의 종말이라고 하는 테제는 철학적 미술사라 불릴 만한 것에 대한 하나의 기여이며, 혼돈스럽게 보이는 모던 미술에서 어떤 이해가능성을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10쪽)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06. 01. 18.   

P.S. 앤디 워홀의 작업이 불러일으킨 충격으로부터 단토의 '예술의 종말론' 테제는 제창되었지만 <예술의 종말 이후>의 서문에서 그가 상기시키고 있는 작업은 책의 권두화로도 쓰인 화가 데이비드 리드의 것이다. 당초 이 리드의 작업과 관련한 페이퍼를 의도했지만, 분량상 그 내용은 다른 자리에서 다루기로 한다.

P.S. 2. 얼핏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연상시키지만, 마이크 비들로(Mike Bidlo)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 아님 Not Andy Warhol (Brillo Box, 1969), 1991>이다. 일종의 '따라하기'이고, '한술 더뜨기'이고 패러디이다. 물론 비들로의 작업은 워홀의 작업을 전제로 한 것이며, 순서상 선행할 수 없다. 이것이 단토가 말하는 '역사적 불가능성'이고, 말하자면, 불가능성의 내러티브이다. 하여간에 이 정도면 갈데까지 간 거 아닌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 2006-01-1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의아니게(?) 속타게 해드리고 있군요. 단토의 책을 읽을 기회가 있어서 여러 차례에 나누어 '브리핑'을 할 계획입니다(계획상으론 두달쯤 걸릴 거구요). 물론 서론에 대한 이 페이퍼는 오늘 끝내는 게 목표이지만...
 

몇 년전부터 한국사회에 유행하는 담론, 혹은 키워드는 '파시즘'이다(최근엔 보다 '대중적'인 버전으로 '대중독재'란 말도 쓰이고/퍼지고 있다). 흔히 스탈린이즘과 함께 전체주의의 두 축을 이루는 이념으로 지칭되는 파시즘은 상식적으로 이해하면, '권위적 국가주의'와 그에 대한 '대중의 절대적 지지'가 결합된 형태인데('대중독재'란 조어는 그 두 가지항을 결합한 것이겠다),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의 응원열기에 대해 일부 지식인들은 '파시즘'이란 표현을 썼고, 최근에 황우석 사태와 관련하여 일부 열성적인 '황빠'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파시즘'이란 표현을 갖다붙였다. 당초 '파시스트'란 말은 아마도 최대의 경계와 경멸을 담은 어사였을 텐데, 이젠 다반사로 쓰는 말이 돼 버린 것. 나의 일상, 나의 파시즘? 

 

 

 

 

그만큼 '파시즘'이란 용어가 '일상화'되었다는 뜻이겠는데, 이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이는 줄기차게 우리사회의 '일상적 파시즘'론을 주장해온 임지현 교수가 아닌가 싶다(거기에 강준만 교수의 개마고원팀들이 가세했다). 좁은 견문에 기대어 말하자면, 그 '(일상적) 파시즘'은 아마도 계간 <당대비평>의 최고 히트상품일 것이다. 최근엔 김상봉 교수까지 <도덕교육과 파시즘>(길, 2005)으로 무장하고서 이 '반-파시즘' 대열에 가세했다. 한 용어의 이러한 일반화/일상화는 한편으로 우리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극대화하면서(대한민국이 파시스트 국가라니!)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이도록 한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파시즘'을 말 그대로 부드러운 것으로 순치시켜버린 면도 있다('항시적' 파시즘은 말 그대로 '부드러운' 파시즘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이나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현 '노빠 정권'이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정권의 '무시무시함'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히틀러/무솔리니 정권을 무능력하고 무기강적인 정권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지지율이 30%를 밑도는 '국가주의'도 있나?).

해서, 현재의 '파시즘 인플레'는 주창자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오히려 파시즘을 권장하고 장려한다(왜? 일상적 파시즘은 견딜 만한 파시즘이니까. 견딜 만한 것이 아니면 일상화될 수 없으니까). 더불어 모든 근본주의는 서로 공모하기에(주사파들이 조갑제류가 되는 것은 '전향'이 아니다. 본래 조갑제가 '주사파'이기 때문에. 박정희주의나 김일성주의나 그게 그거니까. 모두가 '인민'을 위해 애면글면했다. 단, 차이라면 뭔가 꿀리는 게 있었던 '친일파'는 어떻게든 먹여살렸지만 너무도 당당했던 '항일투사'는 인간 주체라는 게 먹고만 사는 거냐라고 내내 '교시'했다는 것. 말하자면, '배부른 돼지' 대 '배고픈 주체' 간의 차이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적 파시즘론이 무용하다거나 임지현 교수의 작업이 오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이론은 의미론과 함께 화용론을 가지는 것이어서 의미론적으로 '옳은' 이론이 화용론적으로, 즉 실제 현실상으로 언제나 '옳은' 결과를 낳는 건 아니라는 것(이론적 순결주의자는 교리적 근본주의자의 세속적 버전일 뿐이다). 사실 '좋은 의도'와 '나쁜 결과'의 조합은 인간적인 결함의 결과만은 아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이런 모양'을 기대하신 건 아닐 테니까.  

 

 

 

 

이야기가 괜히 길어졌는데, 최근에 임지현 교수의 파시즘론에 결정적인 영감을 제공했던 책이 출간됐고, 나는 그냥 그 책에 대해서나 말하려던 참이다. 빌헬름의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그린비, 2006)이 그 책이다. 임교수는 책의 뒷표지에 실린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처음 읽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생동감을 잃어버린 좌파 교과서의 정답을 무시하고, 파시즘의 복합적 현실을 응시하는 그의 집요한 시선에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내 개인의 지적 여정에서 이 삐딱한 맑스주의자와의 만남은 '대중독재'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징검다리였다." 

이 '삐딱한 맑스주의자'를 일반적으론 '프로이트 좌파' 혹은 '프로이트 맑스주의자'라고 부른다. 프로이트주의와 맑스주의를 결합해보고자 시도했기 때문이다(하지만 프로이트주의는 혁명 러시아에서 곧 기각된다). 이미 작년에 <오르가즘의 기능>(그린비, 2005)이 출간됐을 때 라이히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길게 늘어놓지 않겠다. 대신에 횡적으로, 작년초에 출간된 책으로 파시즘에 대한 역사적 분석으로는 '최고'라는 평을 듣는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교양인, 2005)과 나란히 읽어볼 만하겠다는 의견 정도를 덧붙인다. 심리적 분석과 역사적 분석이 서로 보완해줄 수 있을 테니까. 팩스턴의 <파시즘>은 600쪽의 방대한 분량인데, 이게 좀 부담스럽다면, 마크 네오클레우스의 <파시즘>(이후, 2002)로 때우셔도 해도 좋겠다. 1/3 정도의 분량이다. 얼마전에 나와서 이 연재에서 다룬 바 있는 강유원의 <주제>(뿌리와이파리, 2005)에는 한 장에 파시즘 관련서들에 대한 서평에 할애돼 있다. 유익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라이히의 파시즘론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만한 책으로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교양인, 2006)도 이번에 출간된 책이다.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괴벨스의 본격 평전인 이 책은 괴벨스의 일기와 그가 쓴 소설, 연설문, 편지 등 방대한 자료를 꼼꼼히 분석해 괴벨스의 내면세계를 가장 깊숙한 지점까지 파헤쳐 들어간 탁월한 나치 심리의 해부서"라고 하니까 관심있는 독자들은 참조해볼 만한다. '대중의 자발적인 지지'가 '파시즘'의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할 때, 괴벨스의 공적은 그 지지를 '동원'할 수 있는 선전선동(=아지프로)전략을 개발한 데 있다. 물론 이것은 파시즘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그러한 선전선동은 현실민주주의에서도 이미 '파시즘'만큼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니까.

 

 

 

 

괴벨스를 언급하면서 히틀러를 빼놓을 수는 없겠는데, 관련서들은 막스 피카르트의 <우리 안의 히틀러>(우물이있는집, 2005)부터 홀로코스트에 대한 분석서 <히틀러와 홀로코스트>(을유문화사, 2004), 히틀러에 대한 신화적 분석서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민음사, 2003), 히틀러에 대한 정신분석서 <히틀러의 정신분석>(솔출판사, 1999) 등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거기에 요하임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푸른숲, 1998)과 <히틀러 최후의 14일>(교양인, 2005)도 덧붙일 수 있겠다(바람구두님의 강추에 따른 것이다). <30분에 읽는 히틀러>(랜덤하우스중앙, 2004)라면 히틀러에게 너무 야박한 것일까? 그렇다고 당신이 이 참에 <나의 투쟁>까지 읽겠다고 나선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속으론 이렇게 중얼거리겠다. "그건 좀 오버가 아닌가요?" 

 

 

 

 

두번째로 꼽을 책은 프랑스의 저명한 두 에세이스트 파스칼 브뤼크네르와 알렝 핑켈크로트(팽켈크로)의 공동저작인 <길모퉁이에서의 모험>(동문선, 2005). 작년말에 나온 책인데, 최근에서야 눈에 띄었다. <피아니스트>의 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비터문>의 원작자이기도 한 브뤼크네르의 책은 <비터문>(산하, 1993) 등의 소설을 포함해서 여러 권의 번역돼 있지만, 내가 읽은 가장 압권은 역시나 <순진함의 유혹>(동문선, 1999)이었다. 핑켈크로트의 경우도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 <사유의 패배>(동문선, 1999) 같은 뛰어난 에세이들이 소개돼 있고(아래 사진은 영화 <비터문>의 포스터).

각자가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지만, 내가 알기에 두 권의 공저도 쓰고 있는데, 한때 내가 구했던 책은 <새로운 사랑의 혼돈>이었지만 이번에 <길모퉁이의 모험>이 먼저 나왔다(전자도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얼른 가늠할 수 없는데, 이런 경우엔 저자들의 지명도를 믿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물론 번역서의 경우엔 역자를. 한데 역자의 책을 내가 읽은 게 없다! 브뤼크네르의 <번영의 비참>을 약간 읽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차례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곱 개의 장이다. 그러니까 '일상'이 전면화되어 있는 셈인데, 일상에서의 모험이란 사실 '길모퉁이에서의 모험'밖에 더 있겠는가? 이 책을 집어드는 것이 모험이듯이(한가지 곁들이자면 동문선 책 치고는 가격이 저렴하다).

 

 

 

 

세번째 책은 송태현의 <상상력의 위대한 모험가들>(살림, 2005). '융, 바슐라르, 뒤랑 - 상징과 신화의 계보학'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책 자체보다 주목을 끄는 것은 이 부제이며 세 명의 상상력 '이론가'들과의 조우를 한번쯤 권하는 의미에서 꼽아본다. 유익한 안내서가 되어줄 듯하기 때문에. 융이나 바슐라르 관련서들은 우리 인문학 현실에선 '과다'할 정도로 여러 권 번역/소개돼 있기 때문에(가장 얄팍한, 그래서 읽기에 간편한 책 몇 권만 이미지로 띄워놓는다), 한때 소개되다가 주춤하고 있는 질베르 뒤랑에 대해서만 몇 마디 덧붙인다. 사실 저자 자신이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교에서 '질베르 뒤랑의 문학비평:새로운 세계관과 비평의 쇄신'으로 박사학위 받은바, 뒤랑은 상상력이론과 신화이론에 있어서 (바슐라르파와는 또 구별되는) '그르노블학파'의 수장이었고, 국내에도 그의 직간접적인 제자들이 여럿 된다.

 

 

 

 

대표적으론 뒤랑의 <상징적 상상력>(문학과지성사, 1983)을 처음 번역/소개한 진형준 교수를 들 수 있다. <상상적인 것의 인간학: 질베르 뒤랑의 신화방법론 연구>(문학과지성사, 1992)가 그의 박사학위논문이다. 오래전에 둘다 읽어보았지만 역시나 번역서보다는 우리말 저작이 읽기 쉽고 이해하기 편하다. 이후 뒤랑은 진형준 교수가 관여하기도 했던 계간지 <상상>과 살림출판사쪽이 '전담'하게 되는데, 뒤랑의 <신화비평과 신화분석: 심층사회학을 위하여>(살림, 1998)이 유평근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되고, 이어서 <상상력의 과학과 철학(원제는 '상상력')>(살림, 1997)이 다시 진형준 교수의 번역으로 나온다. 같은 해 <상상력이란 무엇인가>(살림, 1997)도 진형준 교수 등의 편역으로 출간되고(덧붙이자면 유평근, 진형준 교수의 <이미지>(살림, 2001)도 이런 맥락상에 놓여 있는 책이다). 뒤랑의 상상력론이 한국문학에 실제적으로 적용된 사례는 진형준 교수의 비평집 <깊이의 시학>(문학과지성사, 1986), <또 하나의 세상>(청하, 1988)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가장 최근의 평론집인 듯한 <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살림, 1997)은 읽어보지 못했다).   

 

 

 

 

네번째 책은 일본 작가 홋타 요시에의 <라 로슈푸코의 인간을 위한 변명>(한길사, 2005). 라 로슈푸코(1613-1680)에 관한 책으론 국내에 드물게 소개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저자에 대한 신뢰 때문에 꼽아본 책이다. 이미 <고야>와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 등의 저작이 국내에 번역/소개돼 있는 바, 저자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문화사나 지성사쪽의 전문가라고 해야겠다. 언젠가 몽테뉴를 <인생에세이>를 소개하면서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책으로 요시에의 <몽테뉴>를 꼽은 적이 있는데, <라 로슈푸코>도 보태야겠다.

프랑스의 인문주의자 정도로 알고 있는 라 로슈푸코는 블레즈 파스칼(1623-1662)과 동시대인이고 미셸 드 몽테뉴(1533-1592)보다는 두 세대쯤 아래 연배이다. 저작으론 원래 <잠언집>이 유명한데, 현재 구할 수 있는 번역본으론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나무생각, 2003), <광우예찬, 군주론, 방법서설, 잠언과 성찰>(을유문화사, 1995)에 실린 '잠언과 성찰'이 있다.

 

 

 

 

끝으로 남아공의 여류 극작가 레자 드 왯(Reza de Wet)의 <러시안 트릴로지>(예니, 2005). 출간된 책들은 많지만, 손가락은 한정돼 있고 또 팔은 원래 안으로 굽는 법이니 내 눈길이 '러시안'에 머문 걸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저자에 대해선 별로 아는 바 없다. 다만, 이 희곡집이 체홉의 주요 희곡 <세자매>, <바냐 아저씨>, <갈매기>를 토대로 그 주요 등장인물들의 '후일담'을 그렸다는 것밖에(그러니까 '후일담 희곡'이다). 나로선 그걸로도 충분히 흥미롭다(아래 이미지들은 차례대로 레자 드 왯, <세자매> 영화스틸, 데이빗 마멧과 그의 <세자매> 원서이다).

소개에 따르면, "<세자매2>는 체홉의 <세자매>의 마지막 장면에서 17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이야기이다. 1920년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 그 격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올가, 마샤 그리고 이리나 세 자매가 갖고 있는 열망과 희망이, 또 그들의 고귀함과 선량함 혹은 그들의 무지가 어떻게 비루해지고 전락해 가는가를 성찰한 작품이다." 그리고 "<엘레나>는 원작인 <바냐아저씨>의 8년 후를 배경으로 혈연과 애정, 결혼으로 이루어진 한 작은 집단이 사랑으로 파멸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마지막 "<호숫가에서>는 원작 <갈매기> 4막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호숫가에 있는 집에 다시 나타난 니냐의 이야기로, 인간의 심연을 드러내보인다."

이미 번역/출간돼 있는 체홉의 희곡들과 나란히 비교해서 읽어봄 직하다. 거기에 덧붙일 건 이번에 미국 연출가 데이빗 마멧의 번안작을 옮긴 <세 자매>(예니, 2006). "체홉을 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현대 관객들에게 소개하려는 의도로 집필되었다. 영상미에 주안점을 두고, 공연하기에 적합한 글로 새롭게 썼다"고 하니까, 이 또한 흥미를 끌 만하다. 

 

 

 

 

P.S. 그밖에 눈에 띄는 우리 저자들의 책들은 나중에 몰아서 다루기로 하고, 세 권 정도만 덧붙여 '언급'하도록 한다. 먼저, '책, 그 유혹에 빠진 사람들'이란 부제를 가진 <젠틀 매드니스>(뜨인돌, 2006). 아마도 지난주에 이 페이퍼를 썼다면 제일 먼저 꼽았을 책이다. 하지만 이미 주간베스트에도 오를 만큼 널리 알려진 책이기에 내 말은 군말 정도이겠다. 책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 즉 도서수집가들의 역사를 추적한다. 책의 제목인 '젠틀 매드니스(Gentle Madness)'는 한마디로 '점잖은 미치광이, 책에 미친 점잖은 사람들'을 일컫는다."는 소개대로이다. '곱게 미친 사람들'로 보면 되겠다("미치려면 곱게라도 미칠 것이지!"란 요구를 그래도 잘 수용한 사례들이라고나 할까).

이런 책소개를 수시로 늘어놓는 통에 간혹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내게도 어쩌면 '젠틀 매드니스'의 유전자가 새겨져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이 말은 1800년대 미국의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가리켜 '가장 고귀한 질병, 바로 애서광증(愛書狂症)에 일찌감치 푹 젖어버린 분'이라고 한 표현에서 차용했다"고 하니까 그게 그리 나쁜 건가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책은 분량도 분량이고 역자들도 역자들이다. "평론가이자 번역가인 표정훈,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김연수, 출판기획자이자 번역가인 박중서 등 책에 미친 세 사람이 3년만에 번역을 마쳤다"! 우리의 경우 혈통과 무관하게 이들의 조상은 아마도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가 아니었을까? 표덕무, 김덕무, 박덕무 하는 식으로 말이다.

 

 

 

 

두번째 책은 중국화인열전의 한 권으로 나온 저우스펀의 <석도>(창해, 2006), "청대 초기의 화가 '석도'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전기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왕손으로 태어나 승려의 몸으로 세상을 떠돌고 유민(遺民)화가로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서위 생애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되살려 그림과 함께 담아냈다. <팔대산인>, <서위>에 이어 출간된 '중국화인열전'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내가 중국 회화에 조예가 있을 리는 만무하고, 다만 이전에 김용옥의 편역으로 출간되었던 <석도화론>(통나무, 1992/2002)에 등장하는 이름 '석도'가 그 '석도'라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되어 꼽은 것이다. 도올의 책은 부제가 '김용옥이 백남준을 만난 이야기'라고 돼 있는데, 백남준 예술론의 요체는 '예술은 사기다!'라는 것이다. 오래전에 백남준과 '플럭서스' 운동에 대한 논문을 교정하느라 참조했던 책들이 문득 몇 권 떠오른다(김홍희의 책들이 표준적이었다).   

세번째 책은 <호두까기인형>의 독일작가 E. T. A. 호프만의 <스퀴데리양>(열림원, 2006). 예전에 <스퀴데리 부인>(이유, 2002)이라고 출간된 적이 있는 책인데 새 번역본이 나온 것. 러시아 낭만주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작가이기에 관심이 가는 책이다. 비록 '세 자매'에 밀리긴 했지만. 호프만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P.S.2.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오세철 교수 등의 번역으로 1980년대에 현상과인식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영역본을 옮긴 것이다). 내가 산 1987년 2판은 당시로선 고가인 8,000원이어서 상당 기간 망설이다가 구입한 기억이 있다. 어제 새로 나온 번역본과 대조해서 몇 페이지 읽다가 (부분적으로라도) 새 번역본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걸 알았다(오역들이 지적되던 예전 번역보다 못한 대목들도 더러 있는데, 이에 대한 지적은 다른 자리에서 하도록 하겠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파시즘의 대중심리>의 우리말 정본에 대한 기대는 좀더 미루어두어야 할 것 같다.

06. 01. 17 - 18.


댓글(7) 먼댓글(0) 좋아요(7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 2006-01-17 15:02   좋아요 0 | URL
<최후의 14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읽어보지 않았지만 분량이 많지 않아서 집어넣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자리에서 바람구두님이 이미 추천하셨더군요.^^

돌바람 2006-01-19 13:13   좋아요 0 | URL
글 퍼가는 걸 좀 자제하는 편인데 로쟈님 페이퍼는 나중에라도 다시 봐야겠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득불 퍼갑니다.

로쟈 2006-01-19 14:41   좋아요 0 | URL
'셀프'라서 좀 불편하긴 하지요.^^

새벽길 2006-01-20 15:49   좋아요 0 | URL
저도 담아갑니다.

모네 2006-01-20 16:02   좋아요 0 | URL
님의 평론에서 늘 많은 도움 받고 있어요. 감사!

승주나무 2006-01-20 23:04   좋아요 0 | URL
라 로슈푸코를 보게 되는군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의 잠언집을 인용했는데, 그 중에서도 '나이가 들면 주위에서 늙었음을 말해주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아우! 십 년은 젊어지셨네요''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아요'라는 인사말도 씁쓸하게 들린다는 겁니다. 잘 읽었습니다. 혹시 '잠언과 성찰'은 예쁘게 번역이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저는 세로 읽기로만 보아서..

로쟈 2006-01-21 10:35   좋아요 0 | URL
저도 새 번역본을 읽어보지 않아서 '예쁘게' 번역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기호학과 관련한 로트만의 저작은 국내에 세 권이 소개돼 있다. <영화기호학>(민음사, 1994), 러시아 영화론 선집인 <영화의 형식과 기호>(열린책들, 2001), 그리고 치비얀과의 공저 <스크린과의 대화>(우물이있는집, 2005)가 그것이다. 이 중 <영화기호학>과 <영화의 형식과 기호>에 실린 '영화기호학과 미학의 문제'는 (내가 알기에) 같은 내용이다. 해서, 로트만 영화기호학에 대한 개괄적인 코멘트를 담고 있는, 오래전에 작성된 아래의 글은 <영화기호학>(민음사)를 대본으로 했던 것이지만 <영화의 형식과 기호>에도 적용될 수 있다(단, 페이지수는 전자의 것이다).

로트만의 <영화기호학>(1973)은 그가 결론에서 지적한 대로 ‘소박한’ 입문서이다. 무엇에 대한 입문이냐고 하면 바로 영화-언어(film language), 즉 언어(기호=약호)체계로서의 영화 입문이다. 이 입문을 통해서 우리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 영화 이해의 문턱이다. 단순하게 그렇게만 본다면, 그래서 영화기호학을 영화 이해의 한 방법이나 절차로서 인정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1968년 이후 영화연구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된 기호학이 처음부터 그러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기억하기로 하자(기호학은 “값싼 물건과 장신구로 치장한 귀부인들”이나 하는 짓(혹은 실천)이며 기호학의 일반적 태도는 “백치 수술을 받은 담비(a lobotomised ferret)의 경계심”에 불과하다는 비난 여론이 있었다).

즉 세상 대부분의 것이 그러하듯이 영화기호학 또한 자연스러운 것(선험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이 자리에서 이 모든 걸 따져볼 수는 없고(그럴 능력과 시간이 없다), 영화기호학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만을 잠깐 옮겨보기로 한다: 메츠의 영화기호학에 대해서(사진은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언어> 영역본). 메츠의 영화기호학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이 향하는 곳은 역시 이미지와 서사 중 어느 것을 근본적으로 보는가라는 문제이다.

메츠는 의미작용을 행하는 일상적인 언어와 달리 영화에서는 이미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쇼트가 문장이나 발언에 해당하는 지위를 갖고 있음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움켜쥔 이 손의 쇼트는 ‘손’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손이다’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러한 관점은 언어를 영화분석의 틀로 간주하는 전제 위헤서(만) 성립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발언으로서의 쇼트와 그의 ‘거대 통합체’는 언어학의 모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방법의 산물이며 이를 통해서 영화의 분석에서 이미지는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보기에 서사란 가시적 이미지들 자체와 그것들의 결합의 결과에 불과하다... 서사란 이미지의 자명한 소여가 아니며 그 이미지의 토대에 있는 어떤 구조의 효과도 아니다. 즉 그것은 가시적 이미지들 자체의 한 결과이다.”

이런 식으로 이미지를 사유(=서사=개념=이론적 이성=인식론)에 대비시키면서 그 존재론적, 가치론적 위계를 전복시키는 것은 분명 이해의 또다른 문턱으로 이끄는 것이지만, 당장에 그 문턱을 넘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닌 것 같다. 그저 저만치서 펼쳐지는 새로운 풍경만을 얼핏 감지할 수 있을 뿐인데, 그에 대해서 내가 좋아하는 한 문단을 여기에 다시 옮긴다:   

“현대 영화가 보여주는 이 모든 특징이 철학에 대해 갖는 관련성은 바로 사유의 무능력에 직면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케 하고 무의 형상을 사유하게 하며 사유될 수 있는 전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사유하게 한다. 영화의 이미지가 운동의 교란을 나타내는 순간 그것은 세계를 일정하게 유보시키는 것이며 가시적인 세계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사유는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여 자신의 한계를 사유하게 된다. 이것이 영화가 철학에 대해 갖는 의미이다.”(박성수, '이미지와 사유: 들뢰즈의 영화기호학 비판에 대해'에서 재인용)

이 무능력 앞에서 굳이 결론을 내리자면, 영화언어의 이해는 20세기의 가장 대중적인 예술인 영화의 이념적-예술적 기능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첫걸음일 뿐이지만, 그건 진짜 막연한 걸음이어서 과연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우리는 과연 영화를, 삶을 이해할 수 있기나 한것인지? 도대체 그걸 전체로서 이해할 수 있는 생리적 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무능력을 염두에 두고 다시 질문하자면, 영화기호학의 알짜는 무엇인가? 그건 영화기호학이 어떻게 가능하며 얼마만큼 가능한가를 묻는 일에서 구해져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 가능성의 물음에서 사유는 시작된다. “사진이나 그림처럼 연속적인, 분절될 수 없는 기호에서 과연 자연어에서의 단위와 같은 의미 단위를 찾을 수 있을까?”(<영화기호학>, 역자해설)라는 것이 그것. 그에 대해서: “(프랑스의)초기 영화기호학 이론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던 것과는 달리, 로트만은 일정한 문화적 관념들이 하나의 도상 텍스트(그림 혹은 영화의 쇼트)에 어휘적인 특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데 착안함으로써 이 함정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개략적이지만, 여기에 처음과 끝이 다 들어 있다. 영화기호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영화언어가 가능해야 하고, 그 언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분절될 수 있는 어떤 (의미) 단위가 설정돼야 한다. 로트만 자신은 언어를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기호체계”로 아주 기능(주의)적으로 정의한다. 뭔가(전언)를 전달할 수 있는 약호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언어라는 이름에 값한다. 그런데 영화가 바로 그렇다. 왜? 사람들은 영화를 만들고 또 보면서 뭔가를 전달하려 하고 또 전달받기 때문이다. 분명 여기에 오고가는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달의 매체(매질)는 무엇인가? 조형적 기호(이미지)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의 이 기호연속체(sign continuum)가 분절되는 자리, 그러니까 끊어지면서 이어지는 자리, 그것이 바로 쇼트이다. 이 쇼트가 바로 “몽타주의 세포”이면서 영화적 의미론의 기본단위가 된다.

기본단위는 그렇다 치자. 그럼 어떤 방식으로 이 단위들의 통사론과 의미론이 가능한가, 즉 영화에서의 의미작용 메카니즘은 무엇인가? 이건 그다지 어려운 물음이 아니다. 일단 단위가 주어진다면, 그걸 배합해서 잘 버무리는 일은 그저 ‘솜씨’에 달려 있을 따름이니까. 쇼트들을 a, b, c, ...라고 해보면, 이들간의 연결관계가 문제된다. 즉 가능한 관계, 가능한 경로가 문제되는 바, a-b-c의 조합이 가능할 수 있고, a-b-d의 조합이 가능할 수도 있다. 이런 조합들 중에서 보다 중립적인(비표지적인) 것을 표준으로 놓는다면, 이 표준으로부터의 표시될 수 있는 거리 관계, 일탈 관계(말하자면 기대-위반의 메카니즘)가 바로 의미발생의 전조건이 된다(<영화기호학>, 67쪽 참조).

이건 보다 매크로한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얘기될 수 있다. 어떤 한 묶음의 쇼트(단어 혹은 문장)를 시퀀스(담화discourse)라고 한다면, 이 담화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시대적, 사회적, 이념적 의미소들과의 결합(연루) 관계에 의해 영화적 담론은 보다 복잡한 사회적 의미기능을 담당할 수 있게 된다. 대충 그런 식이다. 좋은 영화건 ‘나쁜 영화’건 영화가 말하는 방식, 그러니까 말하게 되는 방식은 그런 식이다(사진은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 계단 시퀀스에서 사자상 몽타주).    

이제, 무얼 더 말해야 할까? 영화기호학의 대강이 그러하니까 이젠 그것의 디테일에 대해서 말할 차례인 듯한데, 로트만은 그 디테일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건 아랫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놓는 듯하다. 그는 요컨대, 기본만을 말하는 것이며, 전략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건 조건적 기호조형적 기호라는 로트만의 기호 이분법이다. 물론 이 두 기호는 고정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다. 그러니까 모든 기호는 이 두 극단 사이에 퍼지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래서 거기에 어떤 변증법적 운동이 가능해지는데, 로트만이 보기에 시(문학예술)는 조형적 기호를 지향하는 조건적 기호이고, 영화는 조건적 기호를 지향하는 조형적 기호이다.

 

지향한다는 것은 닮아간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끝까지 잘 안된다는 것이다. 이때 잘 안되기 때문에 생기는 긴장이 바로 기호의 존재론적 긴장이고 의미론적 긴장이다. 글자들은 이미지를 동경하면서도 완강하게 글자들로 남으며, 이미지들은 이야기를 동경하면서도 또 굳건하게 이미지로 남는다. 로트만은 바로 거기까지만 얘기한다(그리고 나머지는 암시하는 걸까?) 그리고 우리에겐 생각할 거리들이 좀 남는다. 서로를 마주보며 애닯도록 깃발을 흔들어대는 시와 영화에 대하여, 그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시텍스트의 분석과 영화텍스트 분석의 방법론에 대하여(그 공통점과 차이에 대하여). 사실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가? 생각할 거리들이 좀 남아 있다고. 이하는 <영화기호학> 후반의 내용정리이다(전반부는 다른 사람이 정리했던 모양이다).  

 

10장 시간과의 투쟁

영화는 세계를 모형화한다. 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시간과 공간이다. 모형의 시간-공간적 성질에 대한 대상의 시간-공간적 특성의 관계는 모형의 본질과 그 인식적 가치를 여러 모로 규정한다. 모형의 인식적 가치는 모형화의 방법을 선택하는 예술가의 자유가 늘어날수록 높아진다. 이 때문에 자연히 예술가는 세계의 시간-공간적 변수를 영화 속에 자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영화는 창조행위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객관적 시공간의 등가물들이 갖는 고유의 엄격한 체계를 예술가에게 부과한다. 이들로부터 벗어난 채로 영화의 경계내에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술가에게 남겨진 것은, 다름아닌 영화적 수단을 가지고 이들과 투쟁하여 이기는 일뿐이다.

 

시각 및 도상적 기호화 관련된 모든 예술에서 예술적 시간은 오직 하나, 즉 현재밖에는 있을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각 예술에 있어서의 시간은 언어 예술에 비하여 궁핍하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배제한다. 시각적으로 지각되는 행위는 오직 하나의 양태, 즉 현실적인 양태만이 가능하다. 때문에 영화는 현재 시제의 필연성과 스크린상의 행위가 갖는 현실적 양태를 한꺼번에 돌파해야 할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는 그 초기부터 꿈, 회상, 의사 직접 화법 등의 전달을 위한 수단을 모색하면서 디졸브를 비롯하여 일련의 수단들에 기대어왔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영화는 여러 가지 동사 시제를 현재 시제에 의해 전달하고, 비현실적 사건을 현실적 사건으로 전달하는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삶의 템포에 대한 자동 기록장치로부터 시간의 예술적 모형으로 전화시키기 위하여 영화 필름에 가해진 힘은, 관객에게 예술적 에너지로, 긴장과 의미 포화성으로 느껴진다.

 

11장 공간과의 투쟁

현실의 모든 공간적 형식과 네 변으로 한정된 평면 스크린 공간과의 동형성 위에서 쇼트의 효과는 구축된다. 상이한 것끼리의 이러한 대비 관계야말로 영화 공간의 기초를 이룬다. 스크린은 네 변과 표면만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 한계 밖에서 영화세계를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경계 돌파의 가능성이 언제고 있을 수 있다는 가정 속에서 스크린 내의 표면을 채운다. 클로즈업은 네 변을 위협하는 기본적인 수단이다. 떨어져나온 디테일은 전체를 대신하는 환유가 된다. 따라서 스크린 위에 존재하지 않는 이 사물의 전모는 스크린의 경계와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평면성에 대한 공격은 최근 수십 년 사이에 큰 의의를 거두고 있다.

 

Citizen Kane

 

 

 

 

 

 

 

 

 

 

 

 

 

 

 

이와 관련하여 현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른바 쇼트의 심도 구축이다. 화면의 전경에 클로즈업을 배치하고 그 후경에 롱 쇼트를 결합시키면, 이들은 스크린의 '본래적인' 평면성을 깨고 훨씬 더 엄밀한 동형성의 체계를 구축하면서 영화 세계를 만들어낸다. 3차원이며 경계가 없는 다층적 현실 세계가 평면적이며 제한된 스크린의 세계와 동형으로 되는 것이다(심도 쇼트의 탁월한 테크닉으로 <시민 케인>과 트뤼포의 영화들을 들 수 있다).  

 

 

 

모든 예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공간은 특정한 액자 안으로 제한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세계의 무한한 공간과 동형성을 갖는다는 점을 이 책의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모든 예술에 공통되며 특히 조형 예술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모순에다 영화는 자기 특유의 모순을 보탠다. 요컨대, 그 어떤 다른 조형 예술에서도, 예술적 공간의 내부 경계를 채우면서 그처럼 적극적으로 그 경계를 파괴하고 한계 밖으로 나오고자 애쓰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갈등은 영화 공간의 현실성이라는 환상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12장 영화배우의 문제

영화 쇼트의 기호학적 구조 속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영화 예술은 역사적으로 두 전통의 교차점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 하나는 비예술적인 기록물의 전통에, 다른 하나는 연극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기록 영화는 스크린 평면 위에서 우리에게 흑백으로 교차되는 얼룩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를 잊은 채 스크린 위의 형상을 살아있는 인간으로 지각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연극은 우리에게 보통의 인간, 즉 우리의 동시대인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잊고 그에게서 어떤 기호적 본질, 예컨대 햄릿, 오셀로 혹은 리처드 3세를 보아야만 한다. 예술 영화를 이러한 두 전통에 이중으로 투영해 본다면, 예술 영화에 있어서 스크린 위의 인간에 대한 두 가지 대립된 관계 유형이 당장 드러나게 된다.

 

영화에서 배우의 연기는 기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세 차원으로 약호화된 전언이 된다 - 1 감독의 차원, 2 일상적 행위의 차원, 3 배우 연기의 차원. 감독의 차원에서 인간을 묘사하는 쇼트 작업은 많은 점에서 다른 경우와 동일한다. 즉, 클로즈업, 몽타주, 그 밖에도 우리에게 이미 알려져 있는 다른 수단들이 쓰인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의 연기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는 이런 전형적인 영화 언어의 형식들이 특별한 상황을 창출한다.  

 

 

일상적 행동에 대한 관계는 연극과 영화에서 근원적으로 상이하다. 무대는, 그것이 아무리 사실적이라 할지라도 어떤 특별한 '연극적' 행동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배우의 행동이 일상의몸짓과 억양에 대한 복사가 아니라 단지 이를 지시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일상의몸짓과 행동의 정확한 재현을 위한 기술적 가능성들을 만들어낸다. 일상 관계의 기호학과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전통의 기호학을 흡수할 수 있는 영화 텍스트의 능력은 영화를 광범한 비예술적 시대 기호로 가득 차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어떤 극장 공연형식과도 비교가 안된다. (참고로) 우리시대의 여배우들은 안나 카레니나나 나타샤 로스토바의 의상을 입었다 해도 여전히 우리시대의 여자들인 것이다. 영화에 있어서 이 점은 이미 결핍이 아니라 미적 법칙이다. 이는 스크린 위에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아름다운 여주인공을 보여주어야 할 때에 특히 강조된다(그레타 가르보에서 소피 마르소까지). (마찬가지로) 영화에서의 의상은 어떤 역사적 시기의 실제 의복에 대한 재현이기보다는 특정한 시대의 기호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다.

 

기호적 의미의 세번째 층위는 바로 배우의 연기에 의해 구축된다. 스크린상의 인간 행동이 지니는 기본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는 생생함, 즉 관객으로 하여금 직접 현실을 관찰한다는 환상을 갖게끔 한다는 데에 있다. 이 '생생함'이란 느낌은 실은 영화배우의 연기 구조 속에 내재된 모순으로부터 생겨난다. 한편에서 보면 영화배우는 최대한 '자유롭고' 일상적인 행동을 하고자 애쓰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영화 연기의 역사는 현대의 연극에 비해 더 상투어, 마스크, 역할의 컨벤션, 전형적인 제스처들의 복잡한 체계에 의존해 왔다. 영화는 컨벤션 연기의 다양한 유형을 단지 이용할 뿐만이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창조해 왔다(감독의 영화/ 배우의 영화). 영화배우 연기의 컨벤션이 갖는 또다른 유형은 영화의 장르적 성격과 관련된다. 하나의 예술적 세계에 대한 특별한 조직 유형으로서의 장르는 연극에서보다 현대의 영화에서 훨씬 더 강하게 표현된다. 이러한 기대와 관련된 충족은 물론, 그 파괴까지도 많은 예술적 의미를 가능하게 한다. 영화의 특정한 부분에서 조건성의 정도를 심하게 변화시킴으로써 전체 속에서 배우 연기가 갖는 기호성이 제고될 수 있다.

 

13장 영화 - 종합예술  

우리는 "움직이는 그림의 도움을 빌린 이야기"가 전달하는 복잡한 의미구조를 고찰했다. 그렇지만 현대의 영화는 단지 이 언어로만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언어적 전언, 음악적 전언, 텍스트 외적 관련의 활성화를 포함하며, 이들은 영화에 다양한 의미구조들을 보태준다. 이 모든 기호학적 층위들은 또한 의미적 효과를 창출한다. 영화의 이와 같은 능력 때문에 우리는 영화의 종합적 특성 혹은 다성적 특성을 거론하는 것이다. 다양한 기호체계의 복잡성, 텍스트 약호화의 다회성 그리고 이와 관련된 예술적 다의성 등은 현대 영화를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와 비슷한 걸로 만든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영화가 어떻게 고도의 기호적 복잡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교육의 수준이 천차만별인 광범한 관객 대중의 이해에 부응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로, 어떤 체계를 사용하는 것과 그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복잡성을 갖는 문제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둘째로, 영화는 다층적 구조이며 그 구조의 층위들은 상이한 정도의 복잡성으로 조직되어 있다. 교육 정도가 다른 관객들은 각각 다른 의미 층위들을 취한다. 세 번째로, 텍스트는 또다른 의미에서 다성적이다. 그것은 한 차원 위에서 다양하게 움직이는 기호들의 다발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상이한 차원들 위에서의 동시적인 움직임을 제시한다. 관객에게는 텍스트와 나란히 약호가 주어진다. 영화란 하나의 교육기제이다. 그것은 정보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 정보를 취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14장 기호학과 현대 영화의 진로

기호와 의미의 문제에 대한 증대된 관심은 단지 학문적 기술에서의 특성일 뿐 아니라 19세기 후반의 문화적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기호의 문제는 언어뿐만 아니라 영화의 내용 속으로도 침투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베르히만(<페르소나>), 펠리니(<8 1/2>), 안토니오니(<블로우업>) 등과 같은 여러 예술가들의 흥미를 끌었다...  

 

 

<블로우업>(1967)에 대한 분석... 안토니오니를 그의 주인공(사진작가)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그럴수도 있다. 그렇지만 안토니오니가 작품의 플롯을 그런 식으로 설정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와 주인공과의 분리를 증거해준다. 안토니오니는 <배회하는 카메라>의 이념으로부터 분석의 영화로 옮겨간 것이다('확대'란 뜻의 '블로우업'은 국내에 <욕망>으로 출시돼 있다).

 

 

안토니오니의 영화는 현대 영화의 자발적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증거이다. (<블로우업>에서) 우연히 찍은 사진에 대한 기호학적인 분석은 살인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그의 견해에 따른다면) 이 세계에 대한 기호학적인 분석은 사실의 부동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흔들면서 영화적 진실에로의 길을 열어준다. 또 안토니오니의 영화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즉, 예술가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보다 정신적, 예술적으로 우위에 있어야 하는가? 안토니오니는 예술가가 하나의 ‘개인’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메타-언어에로의 무한소급 문제. 이러한 과학적 진리는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함의를 갖는다.

 

첫째, 그것은 예술이 그 대상이 삶보다 논리적 추상화에 있어 높은 차원의 언어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과학 텍스트에서는 메타 언어의존재 자체가 연구자로 하여금 연구 대상의 바깥에 있게끔 보장해준다. 예술의 경우 이 점에서 예술가의 이념적이고 도덕적인 자질이 더욱 불가결하다. 예술가는 종종 자신 속에서 기술자와 기술 대상, 의사와 환자를 겸하고 있는 까닭이다. 안토니오니의 영화에 나오는 사진작가는 다면적인 의식으로 인해 후자에 속하며, 바로 그 때문에 전자의 위치를 가질 수가 없다. 의사, 재판관, 삶의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주인공이 필요하다. 안토니오니는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결론

이 책은 영화의 기초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도 아니고 영화의 문법서도 아니다. 이 책이 추구하는 목적은 가장 소박한 것, 즉 관객들에게 영화 언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나아가서 영화언어를 관착하고 그 영역에 관해 숙고하게끔 자극하자는 데 있다. 영화언어의 이해는 20세기의 가장 대중적인 예술인 영화의 이념적-예술적 기능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첫걸음일 뿐이다...

 

06. 01. 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리 로트만(1992-1993)은 러시아 최대의 문화이론가이자 기호학자이며 문학연구가이다. 오래전 학원 시절에 작성한 글 하나를 그에 관한 '소개'의 글이 될 만하겠다 싶어서 여기에 옮겨온다. 혹 텍스트이론이나 문화기호학에 관심있으신 분들에게 소용이 닿았으면 싶다.

로트만의 저작으론 <예술텍스트의 구조>(고려원, 1991), <문화기호학의 이해>(민음사, 1993), <영화기호학>(민음사, 1994), <문화기호학>(문예출판사, 1998) 등이 번역/소개돼 있다. 물론 그의 학문적 업적과 국제적인 지명도에 비하면 소략한 편이다. 로트만 문화기호학의 기본 개념들과 프로그램 등에 대한 소개는 송효섭의 <문화기호학>(아르케, 2000) 등을 참조할 수 있다(세번째 이미지는 러시아에서 나온 로트만 전집 중 마지막 권의 표지이고, 마지막 이미지는 강의중인 로트만. 그는 에스토니아의 타르투대학에 오래 봉직했다. 아래 사진은 타르투대학의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1. 텍스트에서 텍스트-기계로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30여년 간의 지적 여정을 통해 러시아의 대표적인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은 기호텍스트/문화텍스트에 대한 방대한 양의 또다른 텍스트를 남겼다. 그의 텍스트들이 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기호텍스트(예술텍스트)[초기]와 문화텍스트[후기]의 의미생산 방식이다. 그에게서 물질계와 생명계의 모든 현상은 기호작용을 통해 언어[기호]로 번역되어 기호계로 편입된다. 그리고 이 기호계는 무엇보다도 의미의 생산과 소통의 메카니즘으로 구성되는 세계이다. 이 기호계에 편입되면서, 현상은 비로소 현상의 이름에 값하는 의미를 획득하며, 현실의 사태는 사태로서의 규모와 의의를 부여받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의미작용이다. 

의미작용이란 의미를 생산하는 작용이다. 여기에 어떤 텍스트가 주어졌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하게 어떤 의미 잠재태, 의미 가능태를 지닌 존재의 현실태일 따름이다. 텍스트는 그저 사물로서 존재한다(로트만의 아들 미하일 로트만은 자신의 아버지를 칸트주의자로 규정하면서 그의 기호학의 기본개념인 텍스트가 칸트 철학에서의 물자체(Ding an sich)라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사진은 미하일 로트만). 즉 다만 몸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의미있는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텅빈 기호로 자신의 존재를 변환시켜야 한다[=기호작용]. 그리고서는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 이름부르는 행위가 바로 ‘읽기’이며, 이 읽기를 통해 텍스트는 자신의 많은 가능태 중의 하나를 현실태로 만든다{=의미작용]. 이러한 일련의 과정, 그러니까 다수의 가능태가 하나의 현실태로 고정되는 가역적이고 반복적인 과정이 바로 의미생산과정이며, 이것은 의미작용의 결과이다.

 

이때 이러한 과정 속에 놓이게 되는 대상이자 주체인 텍스트는 말의 정당한 의미에서 텍스트-기계가 된다. 그것은 생산하면서 생산되는 특수한 기계이다. 로트만의 기호학이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로 이 텍스트-기계이다로트만이 직접 ‘텍스트-기계’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텍스트-기계'는 그의 ‘텍스트’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다. 참고로, 텍스트-기계(textual machine)는 에코에게서 빌어온 개념이다). 그래서 그가 텍스트 기호학자라는 말은 이 텍스트-기계의 기계공학자라는 말과 등가적이 된다. 사실, 이러한 명칭은 그의 지적 경력에 잘 들어맞는 것이기도 하다.

  

 

 

 

 

 

 

 

 

2. 기호와 기호-기능       


기호는 기호작용의 결과로 생성된다. 기호는 기호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부품이며 원소이다. 하지만 이런 규정은 다소의 모호함을 내포하게 되는데, 바로 텅비어 있음이 기호의 기본적인 자질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것이 기호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아니어야 한다. 기호는 다만 어떤 것이 되기 위한 가능성일 따름이고 준비상태일 따름이다. 그래서 기호는 기호-기능과 별다른 의미차이를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U. 에코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호-기능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에코가 퍼스(C. S. Peirce) 기호학의 실용주의적인 사고를 받아들이고 있는 한 증거라고도 볼 수 있다. 이때 실용주의적인 사고란 것은 이름껍데기만 있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고를 말한다.

 

이에 대한 로트만의 입장은 조금 차이를 보인다. 그는 텍스트의 자리를 텍스트-기계 이전의 단계에 물자체와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서 마련해둔 것처럼 기호의 자리를 기호-기능 이전의 단계에 마련해둔다. 에코적인 입장에서 보면, 기호는 본 얼굴이 없고 단지 마스크들만 있는 것이고, 로트만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래도 그런 마스크들의 가족유사성을 보장해주는 어떤 얼굴(혹은 얼굴의 흔적)이 있는 것이다. 이 차이는 미묘하긴 하지만 여러 가지 효과를 낳는다. 텍스트와 텍스트-기능에 대한 로트만의 구분은 이 효과에 속한다. 그것은 기호와 기호-기능의 구분과의 연관성 속에서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 

 

3. 텍스트와 텍스트-기능


텍스트는 일반적으로 표현성, 경계성, 구조성에 의해 규정된다(<예술텍스트의 구조> 참조). 여기서 표현성이란 공간적인 고정화를 말하고, 경계성이란 비텍스트와의 대립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걸 말하며, 구조성이란 특수하게 조직화되어 있어야 한다는 걸 말한다. 이걸 뭉뚱그려서 표현성이라고 한다면, 언어학적 텍스트는 이 표현성에 의해 규정되는 텍스트이다. 그런데 이 언어학적 텍스트만이 텍스트의 전부가 아니다. 로트만은 거기에 메타언어학적 텍스트 개념을 도입한다.

 

 

 

 

 

 

 

 

 

메타언어학적 텍스트는 진리성이라는 사회적/문화적 가치에 의해 규정되는 텍스트이다. 즉 언어학적 텍스트가 존재론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라면, 메타언어학적 텍스트는 가치론적 규정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로트만의 기호학 이론체계 속에서 텍스트는 종적 분화를 일으킨다 어떤 기호나 텍스트가 그것 자체로 가치담지적이라고 보는 바흐친/볼로쉬노프의 입장과 로트만의 입장 사이의 차이가 부각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그리고 이것이 로트만의 텍스트론의 바탕을 이루면서 문화텍스트에 대한 그의 기호학을 생산적인 것으로 만든다(참고로, 이장욱의 <혁명과 모더니즘>(랜덤하우스중앙, 2005)에는 로트만 기호학에 대한 해설과 함께 바흐친과의 흥미로운 비교가 제시돼 있다).  

 

텍스트 = 언어학적 텍스트(표현성) + 메타언어학적  텍스트(진리성) 

 

이 메타언어학적 텍스트를 로트만은 텍스트-기능이라고 부른다. 이 텍스트-기능이 문제되는 지점은 텍스트가 문화적 가치체계의 변동 속에 놓이면서 언어학적 텍스트와 메타언어학적 텍스트의 단일성이 의심받게 되는 지점이다. 즉 언어학적 텍스트의 표현성이 더 이상 메타언어학적 텍스트의 진리성을 담보하지 못하게 될 때, 텍스트의 권위에 가려져 있던 비텍스트 그룹의 숨은 주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텍스트를 사칭하는 일이 발생한다. 텍스트와 비텍스트 간의 동력학은 이런 과정을 문화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견인해낸다. 그리고 이 동력학에 의해 로트만의 형식주의는 특이한 활력을 획득한다. 텍스트적인 하위약호들의 조직화(표현성)를 전제로 한다면(로트만은 '텍스트와 기능'이란 논문에서 마이너스 표현성까지 고려하여 원래는 텍스트를 8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텍스트와 텍스트-기능은 네 가지 범주의 텍스트 유형을 만들어낸다.

          

 

     텍스트

    텍스트-기능

   텍스트Ⅰ

        +

         +

   텍스트Ⅱ

        +

         -

   텍스트Ⅲ

        -

         +

   텍스트Ⅳ

        -

         -

 

먼저 텍스트Ⅰ은 텍스트의 언어학적인 의미론적 통사론적 구조와 메타언어학적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경우이다. 그리고 텍스트Ⅳ는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로서 비텍스트, 즉 텍스트의 예비주자이다. 텍스트Ⅱ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더 이상 텍스트-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로트만이 들고 있는 것은 1830년대 러시아 시문학이다. 시에서 산문으로 이행하던 이 시기에 시(=텍스트)는 더 이상 가치담지적인 장르로 인식되지 않았고 따라서 텍스트-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반면에 이 시기의 산문은 텍스트Ⅲ에 속하게 되는데, 새로운 산문 장르가 가치담지적이라는 당대의 믿음 때문에 1830년대 산문문학은 텍스트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 네 가지 텍스트 유형은 당연히 고정적이거나 정태적인 것이 아니다. 존재론적으로 규정되는 언어학적 텍스트는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가치론적으로 규정되는 텍스트-기능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자리바꿈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더구나 우리 시대는 어떤 보편적인 가치체계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가치들이 양립하고 있는 가치 다원(주의)적인 시대이기 때문에 동일한 텍스트일지라도 개개인이 가진 가치관이나 문화적 선입견에 따라 서로 다른 텍스트 유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에 대한 예를 더 들어보기로 하자.

 

 

 

 

 

 

 

 

 

4. 피에르 메나르의 경우

 

단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보르헤스 전집2: 픽션들>, 민음사, 1994, 67-89쪽)는 나보코프와 동갑내기로서 형이상학적 주제(혹은 문학이론)를 서사화한 대표적인 작가로 주목받는 호르헤 보르헤스(1899-1986)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프랑스 작가인 피에르 메나르(허구적 인물)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중 일부를 한 자도 틀리지 않게 베껴썼음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를 능가하는 위대한 작품을 만들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다시 쓰기, 베껴쓰기의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많이 이해되는 이 단편을 로트만의 텍스트/ 텍스트-기능 범주를 이용하여 다시 읽게 되면, 이 작품이 문학텍스트에 대한 ‘읽기’의 문제 또한 건드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피에르 메나르의 것은 언아상으로는 단 한자도 다른 게 없이 똑같다. 그러나 피에르 메나르의 것은 전자보다 거의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롭다”고 주장하는 서술자는 이어서 직접 한 대목을 비교한다. 바로 이 대목이다.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한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돈키호테> 제Ⅰ부 9장)


  17세기의 <평범한 천재>인 세르반테스에 의해 편집된 이러한 열거형 문장은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반면 메나르는 이렇게 적는다.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한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이다. 이러한 생각은 놀라운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와 동시대 사람인 메나르는 역사를 현실에 대한 탐구가 아닌 현실의 원천으로 생각한다. 메나르에게 있어 <역사적 진실>이란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났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마지막 문구는 뻔뻔스럽게도 실용주의적이다. (...) 또한 문체에 있어서의 차이점도 아주 명명백백하다. 메나르의 고어체-무엇보다도 외국어 문체적인-는 작위적인 흔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따.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았던 선구자 세르반테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 메나르는 (아마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테크닉을 통해 그때까지 초보적이고 불완전했던 읽기라는 예술을 풍요하게 만들었다. 고의적인 시대 교란과, 잘못된 원저자 설정의 테크닉을 통해서 말이다.  

 

여기서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메나르의 텍스트 간의 언어학적 텍스트, 즉 표현성은 동일하다. 하지만 메나르가 3세기 후에 다시 (베껴)쓴 텍스트는 전혀 다른 텍스트가 된다. 이것을 텍스트 개념만 가지고 이해하려 하면 패러독스에 부딪치게 된다. A=A이면서 A≠A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일률에 위배되는 것이다. 하지만 텍스트-기능 개념을 도입하여 읽게 되면, 세르반테스의 텍스트가 평범한데 비해서 메나르의 것은 놀랍다는 서술자의 주장은 그다지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두 텍스트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적 가치체계의 차이로 말미암아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두 텍스트는 가치론적으로는 서로 다른 텍스트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언어학적 텍스트와 메타언어학적 텍스트 사이의 불일치가 여기에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베겨)쓰기’가 아니라 ‘읽기’이다. 이 읽기는 텍스트를 재현하는 모방론적 읽기가 아니라 텍스트를 생산하는 생성론적 읽기이다.(이런 관점에서 [메나르가] “초보적이고 불완전했던 읽기라는 예술을 풍요하게 만들었다”는 서술자의 평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텍스트는 없고 텍스트-읽기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로트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비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텍스트-읽기[현상]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서 텍스트[물자체]를 부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그의 칸트주의적인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기호이론 체계에서 객관적 실재에 대한 요구는 중심적인 것이다. 그가 텍스트-기계의 의미생산에 관심을 두면서도, 동시에 기호활동의 목적이 일정한 내용[전언]의 전달에 있다고 주장하는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요구가 놓여 있는 것이다(그의 이러한 입장은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강조하는 R. 바르트 기호학의 쾌락주의와 의미전달(communication)을 강조하는 U. 에코 기호학의 실용주의의 중간쯤에 자리하는 것이다. 이걸 규범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 이 점은 “(로트만의) 예술텍스트 분석이 결국 예술어를 비예술어로 번역함으로써 예술텍스트의 어떤 일정한 의미, 명백한 의미를 알아내고 있는 작업이라는 사실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바흐친과 달리 예술텍스트 구조분석에 로트만이 전적으로 시텍스트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바흐친 또한 산문텍스트만 연구대상으로 사용하면서 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쨌든 과연 이 두 이론체계를 평가할 수 있는 공약적인 준거가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이것은 칸트철학과 헤겔철학이라는 두 비공약적 전통에 기대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흐친의 경우 (신)칸트주의 입장과 헤겔주의의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이에 대해서는 페터 지마의 <문예미학>, 을유문화사, 1993 참조). 어쨌거나 예술텍스트의 번역가능성은 로트만 기호학의 기본 전제이다.(아래 사진은 아내이자 저명한 러시아문학 연구자인 민츠 여사와 함께 한 만년의 로트만.) 

5. 로트만-기계와 한국 현대시 

한 이론의 이론으로서의 생산성을 판단하는 한 가지 기준은 그것이 얼마나 많은 데이터에 적용될 수 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이론의 번역가능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로트만-기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이론이 한국 문학, 특히 한국 현대시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그의 시텍스트 분석 개념과 방법이 우리 나라에 일부 소개된 바 있지만(유재천, '로트만의 시의 기호학', <현대시사상>(1991년 여름호) 등), 아직 실제적인 분석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어(교착어)와 러시아어(굴절어) 사이의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 시 장르 자체가 언어 기호의 가능성(특히 기표적 가능성)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한 언어의 가능성에 근거하여 정초된 시이론이나 분석방법이 다른 언어에 그대로 적용될 리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로트만의 텍스트/텍스트-기능 범주는 언어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메타언어학적 범주이기 때문에 이러한 제한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적용의 범위가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는 아주 간략하게 한국 현대시, 1980년대와 90년대의 몇몇 시인의 경우를 가지고 로트만 텍스트론의 적용가능성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한국문학사에서 80년대 초반은 ‘시의 시대’라 불릴 만큼 많은 시인들이 활동했고 다량의 시들이 생산됐던 시기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의 시대’의 대표주자들이 자신의 시를 의식적으로 반시 혹은 비시로서 규정하고자 했던 점이다. 이것은 80년 광주 경험 이후, 모든 현실적인 가치에 대한 부정에서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확인하고자 했던 젊은 시인들의 정치적 (무)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서정시의 형식과 어법을 파괴와 해체와 두드러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즉 시의 텍스트성(표현성)이 더 이상 가치담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 이상, 오히려 반텍스트성, 즉 텍스트에 대한 파괴와 해체가 시의 시다움을 보장해주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 등 대표적인 시인들의 시는 모두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① 그해 가을 나는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壁에 맺힌 물방울 같은 또 한 女子를 만났다

   그 여자가 흩어지기 전까지 세상 모든 눈들이 감기지

   않을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그레고르 잠자의 家族들이

   埋葬을 끝내고 소풍 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그해 가을, 假面 뒤의 얼굴은 假面이었다  


②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지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③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①은 이성복의 '그해 가을'(부분), ②는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전문), ③은 최승자의 '즐거운 일기'(부분)이다(보다 더 형태파괴적인 시들이 있지만(특히 황지우의 경우), 인용의 번거로움 때문에 여기서는 ‘모범적인’ 시들을 골랐다. 참고로 이들의 데뷔시집은 이성복, <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1981)이다).

 

이 시들에서 표출되고 있는 환멸, 증오, 풍자, 연민 등의 정서는 이전 세대의 시에서는 잘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직선적이고 공격적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서정시에 길들여진 독자라면 “이것도 시인가?”라는 반응을 보일 만도 하다(좋은 시는 정서를 순화시켜야 한다는 고정관념!). 하지만 이런 공격성(=전투성)이야말로 이 시대 시의 징표였다. 이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시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을 이제 우리는 텍스트-기능의 관점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바, 이들은 기성의 가치와 체제에의 저항이야말로 시의 존재의의이며 기능이라고 보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이 시대의 문화적 컨텍스트는 존재론적으로 규정되는 텍스트보다는 가치론적으로 규정되는 텍스트, 즉 텍스트-기능을 보다 더 많이 요구한 것이기도 하다.

 

80년대 후반(그리고 90년대 초반)에 등장한 몇몇 시인들의 시에도 시/비시[텍스트/비텍스트]의 문제틀은 텍스트-기능과 관련하여 적용될 수 있다. 장정일, 유하, 기형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다.


④ 햄버거 빵 2/ 버터 1½큰술/ 쇠고기 150g/ 돼지고기 100g/ 양파 1½

   달걀 2/ 빵가루 2컵/ 소금 2작은술/ 후추가루 ¼작은술/ 상치 4잎

   오이 1/ 마요네즈소스 약간/ 브라운소스 ¼컵

    (……)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졌으면,

   이번에는 양파 1개를 곱게 다져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볶아 식혀 놓는다.

   소리내며 튀는 기름과 기분 좋은 양파 향기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신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이 명상에 흥미를 느낀다는 뜻이기도 한데

   흥미가 없으면 명상이 행해질 리 만무하고

   흥미가 없으면 세계도 없을 것이다.


⑤ 경천동지할 무공으로 중원을 휩쓸고 우뚝 무림왕국을 세웠던

   무림패왕 천마대제 만박이 주지육림에 빠져 온갖 영화를 누리다

   무림의 안위를 위해 창설했던 정보기관 동창서열 제이위

   낙성천마 금규에게 불의의 일장을 맞고 척살되자

   무림계는 난세천하를 휘어잡으려는 군웅들이 어지러이 할거하기 시작했다

   차도살인지계를 누구보다도 잘 이용했던 천마대제 만박

   천상옥음 냉약봉, 중원제일미 녹부용이 그의 진기를 분산시킨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수하친병의 벽력장에 철골지체 천마대제가 어이없이 살상당한 건

   곁에 있는 사람도 자객으로 변한다, 삼라만상을 경계하라는

   무림계의 생리를 너무도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었다    


⑥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④는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부분), ⑤는 유하의 '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부분), ⑥은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전문)이다(참고로 이들의 데뷔작은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 유하, <무림일기>(1989),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1989, 유고시집)이다. <무림일기>의 이미지가 없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을 대신 띄운다).

 

④, ⑤에서 특징적인 것은 규범문화 속에서 비텍스트에 속하는 요리책과 무협지의 언어들이 시어로 편입되면서 텍스트화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텍스트화에는 사회적 인준의 절차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바, ④를 표제시로 한 시집이 권위있는 문학상을 수상하고 ⑤의 연작시 또한 정통 문학지의 신인상을 수상함으로써 이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텍스트-됨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 경우 비시적인 요소들이 오히려 시적인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 것인데, 비텍스트의 마이너스적 가치가 오히려 플러스적인 가치로 전화된 형국이라고 볼 수 있다. ⑥은 시의 내용에서 그런 마이너스적인 가치가 시적인 질감을 얻게 된 경우이다. 비교적 전형적인 시텍스트의 형식과 어법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 시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비관적인 음조의 자기통찰은 독특한 개성으로 자기만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때문에 평자에 따라서는 “시가 아니다”고 평가절하하는 경우도 있지만, 시의 새로운 구석을 보여줌으로써 이 시인의 경우 90년대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시인들의 작업 배경에 바야흐로 소비 사회의 도래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학적 가치의 영역에 있어서도 오래 음미하면서 읽어내는 시가 아니라 한번 읽고 재미보는 시들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점차 문학시장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고, 앞에서 열거한 세 시인의 경우는 기존 문단의 순수시(이건 고정관념이지만)와 새로 등장한 소비성 시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다(특히 ④와 ⑥은 베스트셀러 시집이었다). 이 점은 80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지식인-시인, 투사-시인들과 비교될 만한 것이다. 이후 90년대 중․후반에도 여전히 많은 시들이 씌어지고는 있지만 앞에서 열거한 80년대 초반, 후반 시인들의 시적 인식틀과 문제틀을 넘어설 만한 새로운 시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물론 이러한 진단은 '과거'의 것이다. 2000년대 이후에 새로운 시인들이 많이 등장했으므로. 소위 '다른 서정'의 '미래파'들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텍스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컨텍스트의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어떤 시가 새로울 수 있느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바, 그것은 변화하는 시대, 디지털 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텍스트-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를 동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로트만 텍스트론의 관점을 한국 현대시에 적용하여 본 바, 시에 대한 거시적인 준거점의 확보에 그의 이론이 잘 원용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보다 말끔하고 정치한 분석은 다른 자리를 요구하는 것이긴 하지만.

 

 

6. 재약호화와 텍스트-기능


로트만의 기호이론은 약호화(coding)와 재약호화(recoding; transcoding)를 구분하는 바('재약호화'는 '코드변환'으로도 번역된다), 이 또한 그만의 특징이 된다. 약호화, 즉 일차적인 약호화는 기호의 기표 체계와 기의 체계 사이의 등가적인 관계 형성이다. 이것은 달리 기호화라 말할 수 있다. 말 그대로 기호가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재약호화는 이에 비해 광범위한 의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관계맺음이다. 이것은 약호화의 정태적인 이항 모델과대비되는 동태적인 컨텍스트 모델을 구축한다. 여기서 이항 모델이 안정된 커뮤니케이션을 보장해주는 근거가 된다면, 컨텍스트 모델은 다의미성의 모태가 된다.

 

이 컨텍스트 모델에서 기표(표현층위)와 기의(내용층위)는 교점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묶음[다발]에서 만난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이 기표와 기의 주자들은 댄스장에서 만난다. 이들에겐 어떤 정해진 짝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저 댄스 레퍼토리에 맞는 짝을 고르면 된다. 그리고 이 댄스 레퍼토리가 바로 다양한 의미 컨텍스트이고 문화적 컨텍스트이다. 따라서 이 레퍼토리에 대한 고려 없이는 기호의 의미생산 메카니즘을 알 수가 없게 된다. 어째서 그런 짝이 맺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약호화, 즉 이차적인 약호화란 것은 텍스트 구조 속에서, 그리고 문화적 장 속에서, 마치 댄스 레퍼토리에 따라 새로운 짝들이 맺어지듯이, 구축되는 새로운 관계쌍을 말한다. 그리고 당연히 이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게 된다. 예술텍스트가 정형화된 형식 속에서도 다른 텍스트들보다 많은 정보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보다 많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먼저 텍스트 내적으로는, 운율적 층위에서, 어휘적 층위에서, 그리고 통사적 층위에서 예술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의 다양성이 한정된 구성소를 가지고서도 다양한 의미조합의 형성을 가능하게 한다. 또 텍스트 외적으로는 텍스트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 중에 개입하게 되는 다양한 사회적 힘들이 텍스트를 주무르게 됨으로써, 텍스트의 의미는 그 손때만큼이나 확장되게 된다.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예를 들어보자.


   한 명의 아줌마 안에 수백 수십 명의 아줌마가 숨어 있다

   그 수심의 깊이는 아줌마가 아니면 절대 알지 못한다

   아줌마는 현재 우리 집 안에도 있다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들에겐 중요한 것이다

   아줌마의 생각을 알려면 아줌마들만의 은어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사회학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들이다.

 

김상미의 '아줌마'(<시와 시학>(1997년 봄호), 55-56쪽)란 시의 1연이다. 이 시에서 ‘아줌마’란 단어는 “아버지나 어머니와 같은 항렬의 여자”라거나 “동년배 혹은 젊은 남의 부인을 높여 정답게 부르는 말”로서의 ‘아주머니’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라는 사전적인 뜻만 가지고 시텍스트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오지 않는다. 이 시텍스트 속에서의 ‘아줌마’는 그동안 자신의 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가(그래서 아줌마들끼리는 “은어”로 소통한다) 비로소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한 이 시대 한국 주부들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때에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아줌마이다(이 시는 한국시사에서 ‘아줌마’란 제목을 가진 최초의 시이다). 말 그대로 아줌마들의 손때가 묻은 ‘아줌마’인 것이다. 이런 사정은 이 ‘아줌마’ 대신에 ‘아저씨’나 ‘아가씨’란 단어를 대입시켜 읽어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아저씨/아가씨가 생각하는 것은 아저씨/아가씨들에겐 중요한 것이다”란 진술이 결코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들에겐 중요한 것이다”란 진술 만큼의 울림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아줌마’의 경우 컨텍스트적 모델로서 재약호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기호는 텍스트-기호가 된다.

 

기호는 의미작용 과정에서 텍스트가 되려는 성향을 갖는다. 예술텍스트에서의 기호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런 기호는 회화적인 이미지, 어떤 공간적인 이미지가 그렇듯이 단의적인 의미에 저항한다. 그걸 로트만은 의미(론적) 면적이란 말로 표현한다. 이때의 면적이란 것은 여러 묶음 체계가 교차하는 공간이고, 다의적인 의미가 현실화되는 공간이다(라흐만에 의하면, 로트만의 '텍스트-기호'는 바흐친/볼로쉬노프의 ‘대화성’이나 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성’ 개념과 등가적이다). 

 

이 공간은 복수적 약호화에 의해 그 규모가 유지된다. 가령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라고 할 때, 13이란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언할 수 없다. 13이란 숫자에 교차하고 있는 많은 문화텍스트적 의미가 다 소진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그 의미의 테두리만을 대충 그려볼 수 있다. 이것은 어떤 그림이나 조각 작품을 감상하고 나서 그걸 언어로 테두리 지으려고 할 때와 비슷한 사정이다.

 

문제는 특히 예술텍스트의 경우, 텍스트-기호의 가능성을 모두 허용하면서도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텍스트-기호 이전 단계에 기호의 자리를 인정해야 하는 필요성을 낳는다. 이런 식으로 해서 로트만 기호이론체계에서 모든 개념은 두 단계로 이분화된다(그의 견고한 이분법!). 이차모델화가 그렇고, 재약호화가 그렇고 텍스트-기능이 그렇고 텍스트-기호가 그렇다. 이러한 형식적 이분화가 로트만 기호학의 균형감각을 지탱해주는 밑바탕이다. 특이한 것이 이런 이분화가 동태적인 모델을 이끌어낸다는 점이다(그의 기호학은 이상한 강점을 지니고 있다!).   

7. 이제 시작인 결말


앞에서 대략 로트만 기호학의 특징적인 몇 가지 개념에 대한 이해(+오해)의 몇 단락을 늘어놓았다. 문학/문화 연구 방법론으로서의 기호학은 이미 20세기 후반의 한 지배적인 학적 패러다임이 되었고, 톰슨(E. M. Thompson)의 지적대로, 자연과학에서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정보이론)과 인문(과)학에서의 기호학(=구조주의)은 통합적인 방법론으로서 주목받고 있는 양대 지적 조류이다. 이 두 조류가 유행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20세기 전반을 지배했던 과학-정향성(그리고 새로운 과학/통합과학)에의 요구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정초된 섀넌(C. E. Shannon)과 위너(N. Wiener)의 커뮤니케이션/정보 이론과 소쉬르와 퍼스의 기호학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새로운 학제적 모델이 되었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문학/문화 텍스트에 적용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되는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 또한 이러한 방법론사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로트만의 동료 퍄티고르스키는 1960년대를 회고하면서, 모스크바-타르투학파는 인문학에 ‘정밀과학’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했으며 자신들은 ‘현대적인 (과)학자’를 자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자신들의 학적 태도에 특히 20세기 중반 비엔나 학단의 (논리)실증주의가 미친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모스크바-타르투학파가 ‘2차 모델화 체계’를 기호학의 연구 대상으로 규정한 것은 과학의 언어를 철학의 연구 대상으로 규정한 카르납(R. Carnap)을 따른 것이다(이때 철학은 언어분석이 된다). 이러한 대상 규정은 단순히 방법론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다. 카르납이 하이데거(M. Heideggar)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논리)실증주의를 나치즘과 파시즘, 즉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이념(=논리)으로서 제시한 사실은 이 시기의 과학-정향성, 즉 합리주의에 대한 요구가 방법론적인 요청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요청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와 관련하여 철학자 로티(R. Rorty)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시사적이다. “영어권 철학에서 1930년대 이전에는 과학철학이라는 것이 없었는데, 1945년경에는 그것이 철학의 중심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하이데거와 카르납 간의 논쟁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카르납은 반나치즘의 정치적 태도와 정치적 자유주의 등을 자연과학의 위상과 연합시켰으며 라이헨바흐, 헴펠, 파이글 등과 더불어 과학의 본질 이해는 곧 나치즘의 비합리성 이해에 중요하다는 레토릭을 설득력 있게 피력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즉 거기에 반기를 드는 것은 곧 나치즘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고 간주되었고, 확증의 논리 등을 탐구하는 과학철학은 철학의 중심 영역이자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실용주의와 과학과 기술', <과학사상>(1997년 봄호), 190쪽)

 

로트만 기호학의 과학-정향성 속에 숨겨진 정치적 무의식을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로트만이 자신의 문화유형론 속에 20세기 러시아 문화유형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그의 마이너스 정치참여로 볼 수 있다). 그것은 1930년대 중반 소비예트 권력에 의해 중단된 러시아 형식주의의 학문적 유산과 과학적 정신을 암묵적으로 계승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주류 이데올로기에 대한 학문적 저항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신)칸트주의(neo-Kantian Formalist position)와 헤겔주의(Hegelian Idealism) 사이의 갈등의 한 양태이다. 이러한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도식화한다면, “과학=실증주의=합리주의=형식주의=형식논리=(진리 유보적) 칸트주의 대(對) 이데올로기=역사주의=비합리주의=내용주의(사회학주의)=변증법=(진리 담보적) 헤겔주의”가 될 것이다.

 

이러한 밑그림을 가지고 로트만 기호학의 개념체계에서 텍스트/텍스트-기능 개념을 자세하게 분석해보는 것이 이 글의 구상이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의 미비로 말미암아 문장 대신에 몇 개의 단어만 나열되어 있는 형국이 되었다. 그나마 이런 형국에도 몇 가지 오해가 개입되어 있을 테지만, 다시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점들이 수정되고 보완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어쨌거나 워밍업은 끝난 것이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기호학을 공부해볼 만한 시간이다. 비로소 시작인 것이다...

 

06. 01. 16.

 

 

P.S. 참고로, 왼쪽은 영어권에서 가장 최근에 나온 로트만 연구서인 앤드류스(E. Andrews)의 'Conversations with Lotman'(토론토대학 출판부, 2003)이며, 오른쪽은 로트만의 저작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영역선집 'Universe of the Mind'의 신간본(인디애나대학 출판부, 2000). 이 영역본의 서문을 움베르토 에코가 썼으며, 책은 국역본 <문화기호학>의 대본이기도 하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unnetworking 2007-12-30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트만의 문화기호학을 읽고 있는 중이어서 위의 글을 찾게 되어 잘 읽었습니다(다른 글들도 그렇구요.)

아, 그런데 "7. 이제 시작인 결말" 부분에 정보이론과 기호학을 통합적 방법론이라고 이른 "톰슨(E. M. Thompson)"에 대해 조금만 더 소개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저의 관심의 하나는 정보이론과 기호학이 커뮤니케이션을 이론화하는 차원에서 어떻게 만나고 있느냐인데,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문학/문화 텍스트에 적용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이 바로 그렇게! 평가된다는 점도 흥미롭고, 말씀하신 예의 "방법론사의 맥락"을 좀 더 알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톰슨씨가 그런 얘기를 한 것처럼 보이는데요... (꼭 톰슨이 아니어도 방법론사의 맥락에 참고할 것이 있을지요...)

감사합니다!

로쟈 2007-12-30 16:52   좋아요 0 | URL
기억엔 대학원시절에 쓴 발표문이고 '톰슨'은 그때 읽은 한 논문의 필자입니다. 출처는 지금 기억이 나지 않지만, 특별한 얘기는 아닙니다. 그냥 로트만의 문화기호학에 관한 영어권 입문서/연구서를 한권 읽어보시고 참고문헌을 좀 훑어보시면 맥락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unnetworking 2007-12-31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도움말씀 감사합니다. (이제 시작하는 저로서는) 계속 공부해볼 흥미로운 부분이 많은 듯 합니다. 정보이론 등의 자연과학의 방법론과 기호학 등의 인문과학을 충돌시켜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