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투쟁'은 흥미로운 주제이다. 이 주제의 원천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개인적으론 지젝 이전에, 읽히지 않는 헤겔을 그래도 읽어보려고 애쓰면서 자료들을 모으고 했던 건 순전히 이 테마에 관해서 뭔가 글을 써보기 위해서였다. '주인과 하녀의 변증법'이란 제목으로(조만간 실현되지는 않겠지만 아직도 유효한 프로젝트이다). 이 주제에 관한 가장 간명한 소개서는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동녘, 1996)이고, 이와 관련한 연구서 서너 권을 나는 갖고 있다.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1949년생이고, 하버마스의 수제자로서 현재는 프랑크푸르트 소재 사회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소위 3세대 프랑크프루트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이다(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방한한 적이 있다). 물론 예전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아니지만. '사회와 철학연구회'의 사회와 철학 시리즈 중 <한국사회와 모더니티>(이학사, 2001)에 그의 대담이 실려 있다. 내용 중 푸코와 하버마스를 종합하고자 하는 자신의 이론적 기획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을 발췌하여 잠시 옮겨본다.

질문: 당신은 <인정투쟁>에서 인정투쟁 개념이 푸코의 이론적 성과를 의사소통 이론 속에 통합시키는 개념적 장치라고 주장했다. 어떻게 인정투쟁 개념으로 하버마스와 푸코를 통합시킬 수 있는가? 하버마스와 푸코의 이론적 결함은 무엇인가?



 

 

 

답변: 나는 인정투쟁 이념을 통해서 하버마스와 푸코의 이론적 관심을 매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푸코의 관심사는 근본적으로 모든 형태의 공동체, 모든 형태의 사회를 항구적 투쟁의 일시적 휴전상태로 보려는 데 있다. 즉 푸코의 근본이념에 따르면 사회적인 것은 투쟁이며, 기존의 질서는 단기적인, 일시적인 휴전상태일 뿐이다. 그러나 푸코에게는 투쟁의 동기에 대한 납득할 만한 분석이 결여돼 있다. 홉스와 니체의 유산을 이어받은 푸코는 사회에서 투쟁하는 이유를 자기본존을 위해서나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서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인간학적으로나 사회이론적으로 충분하지 않을 뿐더러 아마도 잘못된 생각이다.

 



 

 

나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주장의 타당성을 의사소통적으로 인정받길 원한다는 하버마스의 이념에 헤겔적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보다 분명한 투쟁모델을 만들고자 했다. 인간은 개별자로서든 집단으로서든 자기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한 사회 속에서 투쟁한다. 이 점이 바로 하버마스와 푸코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즉, 인정투쟁 모델은 의사소통이념과 투쟁이념을 결합시킨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모델을 갈등이론과 충분히 결합시키지 못했다. 하버마스는 개인의 사회화 과정이나 상호작용 속에 존재하는 갈등이나 투쟁의 요소가 자주 사라지곤 한다. 하버마스는 부명 의사소통 능력을 과신하고 있다. 우리는 의사소통이 빈번히 인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 때문에 요구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반대로 푸코의 최대의 결함은 그가 투쟁의 동기를 너무나 홉스적으로 본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사회를 자기보존을 위해 싸우는 개인들의 집합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니까 호네트의 이론적 기획을 요약하면 푸코(투쟁이념)과 하버마스(의사소통이념)를 접속시키는 것이겠다. 덧붙여서, 그의 학문적 '아버지' 하버마스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하버마스에게서 성장한, 이제 어른이 된 제자이다. 그러나 배신자이거나 살부를 감행한 사람은 아니다. 나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성장한, 그러나 자립적 사고를 감행한 그의 아들이다. 이런 점에서 나의 생각은 계승발전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보완은 아니다. 결코 보완이나 단절은 아니다. 나는 하버마스가 기초한 프로젝트를 자립적으로 계속해서 사고한 것뿐이다..."

호네트가 푸코나 하버마스보다 더 멀리 가기를 기대해보지만, 아직 '후속타'에 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아 아쉽다(우리 '통신원들'이 직무를 게을리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주제에 관하여 내가 당장에 보탤 말은 없고, 대신에 작년에 여름 <한겨레21>(05. 08. 11)에 실렸던 '우리시대의 마당발' 강준만 교수의 기고문 "인정투쟁’ 민주화시대의 명암"을 옮겨놓으면서 몇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추려보겠다. 부제로 붙어 있는 건 "왜 간호조무사는 신생아를 학대했을까, 왜 사이버 삐끼들은 횡행하는가. 인정욕구가 매우 강한 한국의 네티즌들, 티티테인먼트로 흐를까 염려된다."였다(인용문에서의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한편 그의 책들이 예외없이 올해도 '행진'을 시작했는데, 첫타자로 나선 책은 <대중문화의 겉과 속3>(인물과사상사, 2006)이다. '사람들은 왜 인정투쟁에 빠져드는가"란 꼭지가 들어 있는데, 아마도 이 글과 관련된 것일 성싶다. 나머지 책들은 관련서들과 '인정'을 모티브로 한 처세서들.

 

 

 

 

-인간이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너무나도 깊고 근원적이어서 인류의 역사 발전에 원동력으로 작용해왔다(*그러니까 인정욕구는 생물학적 본성은 아니더라도 이차적 본성쯤은 되는 듯하다). 옛날에는 전쟁터에서 이러한 욕구가 발휘되었지만, 오늘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군사 영역에서 경제 영역으로 옮겨졌다. 우리가 일을 하고 돈을 버는 동기는 먹고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경제생활이 물질적 풍요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인정을 얻기 위해서 추구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상호 의존성은 명백해진다.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체제인바, 오늘날 사실상 모든 선진국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를 받아들였거나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류 사회의 폭넓은 진화라는 마르크스주의적·헤겔주의적 의미의 역사는 이제 끝났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리플’의 본질

-국내 언론이 대서특필해준 덕에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론을 요약해본 것이다. 후쿠야마는 좀 독특한 유형의 본질주의 함정에 한 발을 담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들 밥은 먹고 살잖아?” 사람 사는 걸 ‘밥’이라는 본질로 환원해버리면, 그 밥의 값이 천차만별이라는 건 사소해진다. 극심한 빈부 양극화 체제에서 빈곤층에 속하는 사람도 그 세계에선 나름대로 ‘인정’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겠지만,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는데 부유층이 추구하는 ‘인정’과의 엄청난 괴리에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요컨대 ‘인정의 빈부격차’가 다시 문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정의 빈부격차’는 아직 심각한 화두로 떠오르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새로운 대안이 아주 자연스러운 시장 논리에 의해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티티테인먼트’(tittytainment)라는 개념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겠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세계화’로 인해 ‘20 대 80’(부유층 20%, 빈곤층 80%)이 이루어진 세상에선 티티테인먼트가 판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entertainment’와 엄마 젖을 뜻하는 속어인 ‘titty’를 합한 말인데, 기막힌 오락물과 적당한 먹을거리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서 이 세상의 좌절한 사람들을 기분 나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게임에 몰두하면서 흥분한 나머지 괴성까지 질러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그게 괜한 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요즘 그렇게 말했다간 시대착오적인 인간으로 몰매 맞기 십상이다. 게임은 ‘국민산업’이 아닌가.(*내가 이 글을 치고 있는 PC방 옆자리들에도 초등학생들이 죽 늘어앉아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나 같은 '비정규직 지식노동자'나 백수들 외에 PC방에 죽치고 있는 아이들은 대개 저소득층 자녀들인 듯싶다. 집에서 오락을 할 만한 처지가 못되는 수준일 테니까. 해서 이들의 안쓰러운 유해환경은 '오락'이 아니라 오락실의 '탁한 공기'이다. 한번이라도 동네 PC방에 들러본 부모라면 담배 연기 자욱한 이런 곳에 아이들을 내돌리지 않으리라. 요즘 떠오르는 화두대로, 건강의 불평등은 경제적 불평등을 반복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는 ‘인정투쟁’의 민주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아니 언제는 그런 시대에 살지 않았단 말인가? 이렇게 정색을 하고 전투적으로 묻는다면, 인류 역사 이래로 그랬다고 한발 뒤로 물러서야 하겠지만, 겸손한 자세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을 것이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착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간호 조무사가 신생아를 학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건으로 경찰서에 출두한 어느 간호 조무사는 “싸이월드에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예쁘게 꾸미고 싶었다. 영아들의 인상을 특색 있게 해 주변 다른 간호 조무사 또는 간호 관련 종사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 이거 아주 중요한 ‘인정투쟁’이다.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연예인 누드 사진을 보고 싶으면 내 홈피로 오세요”라는 글을 올려 작은 소동을 빚었던 주인공도 자신의 홈피 방문자 수를 늘려 인정을 받고 싶어했던 초등학생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리플’의 본질도 인정투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근의 ‘성기 노출’ 사건도 그랬지만, 무슨 사건만 터졌다 하면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삐끼’들이 나타나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놀러 오세요. 보러 오세요. 화끈해요. 죽여준다니까요.” 아니다. 삐끼는 아니다. 삐끼는 돈을 벌기 위해 그런다지만, 우리 시대의 사이버 삐끼는 자신의 미니 홈페이지 조회 수를 올리려는 소박한 마음에서 그러는 것뿐이다. 보여줄 것도 없으면서 거짓말로 유혹하는 삐끼들도 있다지만, 행여 화를 내선 안 될 일이다. 조회 수 올리는 걸로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그 소박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몸부림에 감히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인터넷 이전과 이후가 이렇게 달라졌다. 과거 보통 사람들의 인정투쟁은 수단이 미비했다. 인정투쟁의 주요 수단이라 할 미디어는 엘리트의 독무대였다. 학생들의 경우 공부를 빼놓곤 기껏해야 소풍이나 수학여행에서 뭔가를 보여주는 것 이외에 이렇다 할 수단이 없었다. 운동을 잘하거나 주먹을 쓰거나 연애박사가 되는 길로 빠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돈질도 부유층 자제에 국한되었다.

유희주의에서 공동체주의까지

-인터넷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인터넷이 ‘규범 테크놀로지’로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파급 효과가 인터넷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앞으로 어떻게 더 달라질 것이란 말인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보자면 ① 유희주의 ② 다문화주의 ③ 극단주의 ④ 공동체주의 등 네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첫째, 유희주의다. ‘유희주의’란 말은 없다고 시비를 걸 사람도 있겠지만, 이제 유희주의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찜쪄 먹을 수준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좋겠다. 인터넷의 본질은 유희다. 사람에 따라 ‘오락’이라고도 하고 ‘엔터테인먼트’라고도 한다.

-‘엔터테인먼트 경제’는 이미 주류로 등극한 지 오래다. 인포테인먼트, 에듀테인먼트, 폴리테인먼트, 도큐테인먼트, 마켓테인먼트, 이터테인먼트, 처치테인먼트, 워크테인먼트, 쇼퍼테인먼트, 볼런테인먼트, 티티테인먼트 등 엔터테인먼트를 물고 들어가는 수많은 합성어들이 양산되는 게 그 위력을 잘 말해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미래연구소 소장 폴 사포는 “디지털 기술은 너무나 흡인력이 강해서 ‘모든 것’을 유희의 도구로 만들어버릴 위험성이 크다. 로마제국의 멸망에서 읽을 수 있듯이, 위대한 문명의 몰락은 모든 것을 유희화한 데서 비롯됐다”고 경고했다.

-그대로 믿을 말은 아니지만, 유희 아닌 것들이 이젠 유희와 더욱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지 않을 수 없다는 건 분명해졌다. 유희는 인정투쟁의 주요 수단으로 등극하면서 전투성을 획득했기에 더욱 그렇다. 예컨대 정치가 무슨 수로 유희와 경쟁할 것인가. 하긴 그래서 정치가 자꾸 유희화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사주간지마저 유희와 타협하지 않고 이렇게 골치 아픈 이야기 하면 문을 닫아야 하는 건가? 생각해볼 점이다.

-둘째, 다문화주의다. 최근 인터넷엔 “님의 노예로 부려주시옵소서” “어린 ‘주인님’을 찾습니다” “내 속옷도 팔아요” 등을 외치는 카페가 많아졌나 보다. 가령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발’이란 단어를 치면 발을 탐닉하는 카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한 포털 사이트에는 이런 카페가 600개 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은 이런 카페를 ‘변태 카페’라고 이름 붙였지만, ‘변태’의 경계 설정은 이제 날이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다.

-그간 다문화주의는 소수자의 권익 옹호라는 점에서 좋은 의미로만 여겨져왔다. 인터넷 이전엔 당당하게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소수자들 중심으로 소수자를 이해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소수자’의 폭발을 몰고 왔다. 인터넷 이전엔 뭉치기 어려웠던 소수자들까지 대거 인정투쟁을 위해 독자적인 동아리 또는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에서 다문화주의는 늘 보수파의 공격 대상이었지만 이젠 일부 진보파도 다문화주의 공격에 합세했다. ‘성향의 소수자’건 ‘취향의 소수자’건 이들의 특성은 자신의 열악한 위치를 타개하기 위해 ‘단일 이슈 정치’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이 내세우는 이슈 한 가지만을 보고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진보파는 이런 정치 행태가 소수 집단간 ‘연대’를 파괴해 진보 정치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게 바다 건너 다른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점점 한국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사이즈’와 ‘주목’의 문제

-셋째, 극단주의다. 인터넷은 대중의 전폭적인 참여와 그들의 인정투쟁 욕구로 인해 전반적으로 보아 반지성주의로 흐르게 돼 있다. 지성주의는 좋고 반지성주의는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한겨레> 문화생활부장 이인우는 “반지성주의·반지식인 정서는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 문화의 특징적 흐름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다고 본다”며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인터넷을 지목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렸는데, 이게 중립적인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인쇄술이 지식의 생산과 소유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과 같이 지식과 정보가 급속하게 전파되고 공유되고 가공되는 인터넷 문화가 지식과 정보의 평균화, 지성의 평등화가 가능한 것 같은 착각을 대중들에게 확산시키고 있는 것 같다.”

-화끈한 해결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반지성주의에도 좋은 점은 있는지 모르겠지만, 반지성주의와 사이버 폭력이라는 극단주의가 상호 무관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정부는 사이버 폭력을 일소하겠다며 ‘인터넷 실명제’를 들고 나왔는데, 흥미로운 건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네티즌들의 의견이 반대하는 의견보다 최대 4배 가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야후 조사에서는 찬성 79%, 반대 20%로 나타났으며, 20~30대 이용자가 많은 네이버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5%가 실명제 도입에 찬성한 반면 반대 입장은 32%에 그쳤다. 이게 과연 무얼 의미하는지 심층 분석해볼 필요가 있겠다.

-넷째, 공동체주의다. 지금은 무분별한 사용으로 오염된 단어가 되었지만 초기의 ‘해커’를 떠올리면 되겠다. 해커는 원래 ‘인정’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 도덕성 수준도 높았다. 남들이 자신의 기술 수준을 인정해주는 기쁨 하나로 돈도 받지 않고 폐인이 될 정도로 자신을 혹사해가며 프로그램 개발에 헌신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건 ‘사이즈’와 ‘주목’의 문제다. 누군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를 할 때에 남들이 얼마나 주목해주느냐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생각해본다면 간단히 풀리는 문제다. 내가 무슨 희생을 하건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면 희생하고 싶은 마음도 약해질 것이다. 반면 나의 희생이 영웅적 행위로 널리 알려질 수 있다면 애초 마음먹었던 희생의 정도보다 ‘오버’할 수도 있다. 인터넷은 ‘사이즈’와 ‘주목’의 경계를 깬 열린 공간으로 이타성과 협동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주의의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

‘인터넷 강국론’은 정말 허구가 아닐까

-이렇듯 인터넷을 주요 무대로 삼은 인정투쟁엔 명암이 있다. 세계 각국의 인터넷을 두루 살펴보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한국 인터넷 문화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는 네티즌들의 인정 욕구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간 한국은 보통 사람들의 인정 욕구 충족에 무심한, 아니 억압적인 사회였다는 점에 주목해보는 게 좋겠다. 대중의 인정 욕구 충족은 다양성을 생명으로 한다. 인정 욕구 충족의 방식이 획일적이라면 도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사람들의 인정 욕구가 충족되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사회는 인정 욕구 충족에서 일렬 종대로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유별난 문화를 갖고 있다. 돈,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명품, 골프 등 모두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한 가지 잣대만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데에 익숙한 문화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무지막지한 위계가 “한국에선 인간답게 살려면 어찌어찌해야 한다”는 수많은 속설들을 낳았고, 또 이것들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일하게 만든 동력이 된 게 아닌가 싶어, 과거의 민주화 투사들조차 자랑스럽게 뻐겨대는 ‘세계 10대 경제강국론’에 흔쾌히 박수를 치기가 어려워진다.

-인터넷이라는 축복이 인정 욕구 충족의 다른 출구를 열어준 것은 그 어떤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야 마땅하겠건만, 다문화주의의 일부와 공동체주의를 제외하곤 이것마저도 혹 ‘티티테인먼트’가 아닌가 싶어 주저하게 된다. 인터넷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하는 많은 인터넷 기업가·전문가들이 한국 인터넷은 세계에서 가장 유희 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른바 ‘인터넷 강국론’은 허구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그런 주저가 시대착오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인정투쟁 민주화의 내실화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끝)

 

 

 

  

전반적으로 시의적절하고 발빠른 진단이다. 더불어 또다른 숙제까지 떠맡게 하는. 내가 임의로 골라본 참고서들이 숙제 해결에 도움을 줄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티티테인먼트와 더불어 자라날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염려하고 공부해야 할 주제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06. 01. 24.

P.S. 이렇듯 자주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도 나대로의 '티티테인먼트'가 아닌가 문득 반성하면서, 이성복의 '서시(序詩)'를 떠올려본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류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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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과 물화
    from 파란딸기 2009-03-11 08:15 
    왜 이런 책을 거론하는데 강준만의 경우는 한국의 소비사회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데에다가 사용하는지 그것도 의문이다.문제는 이런 집단행동이 어떻게 가능하느냐에 관계되어, 인정받지 못한 어떤 정체성을 인정받고자하는 행위로 분석될 즈음이라면, 이 때쯤 이런 책도 읽어줘야한다.인정투쟁악셀 호네트 지음, 문성훈, 이현재 옮김/동녘2000년에 이 책을 구입하여 세 번을 읽었지만, 뭔가 께름칙하게 개운치 않은 부분이 많다. 오늘 정리해보고 그 부분...
 
 
2006-01-31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1-31 15:02   좋아요 0 | URL
**님/ 감사합니다.^^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의 1장 '모던, 포스트모던, 그리고 컨템퍼러리'를 정리하는 게 이 글의 목표이다(며칠 뜸을 들이고 있다가 다시 달려들었는데, 머리가 좀 무거운지라 잘 진행될는지는 의문이다). 단토의 책은 출판사 미술문화의 '동시대 미학' 1권으로 나온 책인데, 뒷갈피에 씌인 기획의 변을 보면 "동시대 미학 시리즈는 먼저 이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주목받고 있는 단토의 주요 저서들을 통해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이해하고, 그 밖의 주요 미학자들의 저서들을 추가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적합한 예술철학을 소개하기 위해 기획되었다."고 하니까 단토의 저작들이 몇 권 더 소개될 듯하다. 기다려볼 만하다.

단토가 '미술의 종말'의 시점을 1964년 워홀의 '브릴로 상자' 이후로 잡고 있다는 얘기는 이미는 적은 대로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가 그러한 주장을 한 건 아니다. 역사적 사건의 의미란 언제나 소급적인 성격을 갖는바, 실상 단토가 '미술의 종말'에 대해서 감을 잡고 치고 나오는 것은 공교롭게도 그가 미술비평가로 데뷔한 1984년부터이다. 그러니 그는 미술비평가로서 자신을 신고함과 동시에 '미술의 종말'을 선언하고 나선 것. 'The End of Art'란 논문을 Berel Lang이 편집한 책 'The Death of Art'(1984)에 실은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예술의 종말에 다가가기(Approaching the End of Art)'를 한 박물관에서 강연하며, 이것은 그의 책 'The State of the Art'(1987)에 수록돼 출판된다(이 논문은 오늘 도서관에서 복사했다). 이후 다시 10년쯤의 시간이 흐른 뒤 저자는 '예술의 종말' 혹은 '예술의 종말론' 이후에 대한 회고와 소회를 밝히고 있는 것이 이 글의 서두이다. 37쪽의 각주에서 자세히 보고하고 있는 것이지만, '미술의 종말'에 대한 아이디어를 단토는 독일의 미술사학자 한스 벨팅(Hans Belting)과 공유한다. 벨팅의 책 <미술사의 종말(The End of the History of Art)>(독어 1983, 영역 1987)이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것이다: "대략 같은 시기에 독일의 미술사학자 한스 벨팅과 나는 서로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미술의 종말에 관한 글들을 출간하였다."(37쪽) 

참고로, 벨팅은 독일 마인츠대학의 미술사 교수이며, 대표작으론 <유사성과 현존(Likeness and Presence: A History of the Image Before the Era of Art)>(1984)이 있다. 단토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는 책인데(74쪽 등), 국역본은 독어본의 제목에 따라 <이미지와 제의: 예술의 시대 이전의 이미지>라고 옮겼다.

  

 

 

 

<미술사의 종말>은 분량이 얇은 책인데(오늘 도서관에서 복사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책 <예술과 문화>(경성대출판부, 2004)의 갈피를 보니까 근간 예정인 도서이다. <미술사의 종말: 10년후의 결산>(가제). '경성대문화총서' 11권으로 예정돼 있는데, 쟌니 바티모의 <근대성의 종말>(2003)에서부터 시작된 이 총서에는 현대문화와 미학관련의 유익한 도서들이 다수 포함돼 있고, 근간예정인 도서도 여럿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가 되는 건 13권으로 예정돼 있는 수잔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가제)이다. 원제는 'Dreamworld and Catastophe'(MIT출판부, 2000)인데, 20세기 미국과 러시아의 '대중 유토피아' 문화에 관한 책이어서 작년에 구입해두었다. 한 러시아 철학자가 이 책과 관련하여 벅 모스와 나눈 대담 등을 포함하고 있는 대담집을 올해 번역할 계획도 갖고 있어서 <꿈의 세계와 파국>의 국역본 출간은 그만큼 기다려진다...

이런 식으로 진도를 뺀다면, 여름방학 때나 정리가 끝나겠다! 좀 서둘러야겠다. 상식적으로 말해두자면, 유행하는 종말론의 계보는 세 종류이다. 철학의 종말, 역사의 종말, 예술의 종말.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한마음사, 1992/1997)에 대해서는 군말이 필요 없겠다. 데리다의 <마르스크의 유령들>(한뜻, 1996; 절판된 이 책은 뜻없는 번역이고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역본이 나올 것이다, 나와야 한다)에는 이에 대한 비판이 들어가 있다. 간단한 요약은 스튜어트 심의 <데리다와 역사의 종말>(이제이북스, 2002)을 참조. 그리고 철학의 종말은 하이데거의 테제이기도 한데, 전반적인 맥락에 대해서는 김상환,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민음사, 1999)이 유용하다(한국어로 이보다 더 유려한 문체의 철학서를 나는 아직 읽지 못했다). 그리고, 예술의 종말에 대해서라면, 가다머 등이 쓴 <예술의 종언 - 예술의 미래>(느티나무, 1993)가 있지만, 바티모의 <근대성의 종말>과 마찬가지로, 단토의 표현을 빌자면, '허공을 맴돌고 있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이지 못하다는, 즉 사변적이라는 얘기.

"(<근대성의 종말>에서) 바티모는 벨팅과 내가 다루고 있는 현상들을 우리 둘이 가지고 있는 관점보다 훨씬 더 폭넓은 관점을 가지고서 바라다 본다. 즉 그는 '기술적으로 진보한 사회'가 제기하는 미학적 물음들에 대한 철학적 반응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형이상학 일반의 죽음이라는 관점 하에서 예술의 종말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관점을 취하든간에 예술의 종말에 관한 그의 생각이 아직 '허공을 맴돌고 있다'는 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38쪽)

반면에 "우리의 주장은, 새로운 복합체의 형태가 여전히 명료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의 실천복합체가 다른 실천복합체에게 어떻게 자리를 내주게 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벨팅과 나는 둘 다 예술의 '죽음'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생각한 어떤 하나의 내러티브에 관해서 글을 쓰고 있었으며, 내가 보기에 종말에 도달한 것은 예술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 내러티브였기 때문이다.(...) 종말에 이른 것은 그 내러티브이지 그 내러티브의 주체는 아니다."(41-2쪽, 강조는 나의 것) 벨팅의 논지 역시 내러티브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이 점이 핵심이며, 단토에 예술종말론에 대한 오해의 대부분은 내가 보기에 이 '내러티브 종말론'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에 기인한다. "예술은 끝이 없다"는 식의 반론이 그것이다(그 경우에 예술은 시작도 없다).

 

 

 

 

그렇다면, 무슨 내러티브를 말하는 것이냐? "이에 관해서 서둘러 해명해야겠다." 단토가 많은 영감을 빌어오고 있는 것은 역시나 헤겔이다(세계/역사는 자기인식에의 여정으로서의 교양소설로서 현상한다). 제2장 '예술의 종말 이후 30년'에서 앞질러 인용하자면, "예술의 종말은 예술의 참된 철학적 본성을 깨닫게 된다는 데 있다. 이러한 나의 사유는 전적으로 헤겔주의적"(85쪽)이다. 그러면서 그가 인용하는 것은 <헤겔미학>이다. 사소하지만, 원문에는 인용출처가 'Aesthetics,'로 돼 있고(38쪽), 국역본에는 'Aesthetics,'로 돼 있다(86쪽). 부분 인용하면:  

"우리가 예술작품의 내용과 표현수단, 그리고 이 양자가 서로 적합한지 부적합한지에 대해 이론적으로 고찰해보면, 우리는 예술작품을 바라보았을 때 내면에서 그것을 즉각적으로 향유하는 것 외에도 동시에 그 작품에 대한 어떤 판단을 내리고 싶은 충동으로 고무된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와서 예술은 예술 자체로서 이미 충분한 만족을 주었던 옛날과는 달리 이제 예술에 관한 학문이 필요해졌다. 즉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도록 점차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을 예술로서 다시 회생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이다."(85-6쪽, 강조는 나의 것)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에서 '회생'은 '창조'로 옮겨져야 한다. 실제로 87쪽에서는 '창조'라고 옮겨졌다: "그리하여 예술계의 구조가 정확하게 말해서 '예술을 다시 창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예술이 무엇인지 철학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예술을 창조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예술에 대한 이러한 역사철학적 성찰은 역사의 특정한 단계에 도달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건 워홀의 팝아트가 인상파나 입체파 미술보다 먼저 출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이다. 그리고, 워홀의 '브릴로 상자'(1964) 같은 팝아트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게 된 시점도 20년 후인 1984년에 와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단토에 의해서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은'(70쪽) 해로 규정된 그 해인데, 이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음'이 실상은 컴템퍼러리, 혹은 탈역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이제 회고적/소급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된 것이지만, 워홀 이후에 미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과연 컨템퍼러리란 무엇인가?  

"현재의 역사적 감수성을 특징짓고 있는 것은 현재가 어떤 위대한 내러티브에 더이상 속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활력 사이의 어딘가에 놓여 있는 우리의 의식 위에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에 벨팅과 내가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이것이야말로 모던 미술과 컨템퍼러리 미술 사이의 예리한 차이,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에 대한 인식이 1970년대 중반에야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한 차이를 정의내리는 데 도움을 준다. 슬로건이나 로고도 없이, 어느 누구도 그것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지각하지도 못한 채 부지불식간에 시작하였다는 것이 컨템퍼러리의 특징이다."(43쪽, 강조는 나의 것)

그러니까 미술사의 '거대 서사'가 종결된 이후에 남은 건 이 '종말'의 사후 충격으로 겪게 되는 불안과 이상한 활력이다. 불안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아무런 지침도 운동도, 지향도 가능하지 않기에 비롯된다. "(모더니즘과 대조적으로) 컨템퍼러리 미술에는 과거의 미술에 반대하는 지침 같은 것이 없으며, 과거라는 것은 그에 대항해서 해방을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없고, 심지어는 자신이 미술로서 일반적으로 모던 미술하고도 전혀 다르다는 의식도 없다. 컨템퍼러리 미술을 정의하는 부분적인 특징은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이 과거의 미술을 자신들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에게 이용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미술이 제작되었던 바로 그 정신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하는 작업: "오늘날 예술가들은 미술관을 죽은 미술작품들로 가득 채워진 장소로 여기지 않고 살아 있는 예술적 선택들이 가득찬 장소로 여긴다. 미술관은 끊임없는 재배열을 위해 활용가능한 열린 곳으로서, 사실 미술관을, 특정한 테제를 환기하거나 지지하기 위해 배열된 사물들의 콜라주를 만들어내는 데 쓰일 자료들의 저장고로 이용하는 하나의 예술형식이 지금 출현하고 있다."(44쪽)

문학의 경우에 견주자면, 작가들이 더 이상 현장이 아닌 도서관에서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겠다. <스무살>, <7번국도> 같은 소설과 <꾿빠이, 이상>,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사이에서 진동하는 김연수는 이러한 종말의 과정을 구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문학의 종말 이후'의 작가들은 모두가 '유령작가'이거나 박민규 같은 '무규칙이종작가'들일 테니까. 조금 시야를 확장하면, 우리는 'Endgame'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와 만날 수 있다. 종말의 문학, 혹은 종말 이후의 문학.   

 

 

 

 

단토가 '박물관 미술'의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은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설치작업 '말할 수 없는 것들의 유희(THE PLAY OF THE UNMENTIONABLE, 1990 / INSTALLATION AU BROOKLYN MUSEUM, NEW YORK)'이다.

그렇다면, 미술(예술)은 어떤 여정을 통해서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물론 길은 '막다른 골목'이어도 '뚫린 골목'이어도 모두 적당하다.)  단토는 세 가지 마디(에포크)에 의한 네 가지 단계를 설정한다. 이걸 내 식으로 정리하면, <예술 이전의 시대 -> 재현적 예술의 시대 - 자기의식적 예술의 시대(=모더니즘) - 예술 이후의 시대(=컨템퍼러리)>가 된다. 이러한 이행의 과정 중에서 단토가 가장 역점을 두어 설명하는 대목은 '모더니즘에서 컨템퍼러리로의 이행'이다. 모더니즘의 내러티브가 어떻게 종결되었는가를 철학적/이론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그의 '예술의 종말론'의 중핵인 것이다.

 

 

 

  

모더니즘 회회의 최고 이론가/비평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로 클레멘트 그린버그이다(<예술의 종말 이후>의 제4장이 그린버그에 할애돼 있지만, 여타의 장들에서도 그린버그는 저자에 의해서 끊임없이 참조된다). '인정투쟁'의 관점에서 보자면, 단토는 컨템퍼러리, 즉 탈역사 시대의 '그린버그'로 인정/평가받고자 하는 비평가적 욕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모더니즘에서 컨템퍼러리로'는 '그린버그에서 단토로'에 대응한다. 분량상 모더니즘과 컨템퍼러리에 관한 얘기는 다음으로 넘긴다. 

 06. 01. 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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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에 대한 페이퍼를 쓰다가 머리도 식힐 겸 '제네바의 시민' 루소(1712-1778)에 대한 창고 정리를 한다(이른바 단순작업). 홀름스텐의 <루소>(한길사, 1997)를 읽고 메모해 놓은 것인데, (이것도 기억이라면) 꽤 오래 전에 쓴 것이다. 이미지들을 몇 개 붙여놓는다.

홀름스텐의 책은 내가 읽은 로로로 시리즈 몇 권의 책 중에서 가장 재미있다. 마치 츠바이크의 전기물들을 읽는 듯하다. 원저는 1972년에 발간된 것으로 저자인 홀름스텐은 방송기자와 저술가로서 활동하면서, 몇 권의 역사서와 10권의 전기소설을 집필한 걸로 되어 있다. 이런 류의 작가층이 두터워야 그 나라의 문화가 윤기 있어진다. 로로로 시리즈 중에서 <볼테르>도 저술한 걸로 되어 있는데 출간을 기대해 본다.

재미있게 읽은 부분들을 간추린다. 가령 디드로와의 비교(*디드로의 책들은 다섯 권 정도 검색된다. 이미지로 띄운 책들은 <수녀>와 함께 내가 갖고 있는 책). 동년배였던 두 사람(디드로가 루소보다 한 살 아래)은 기묘한 개인적인 운명, 혹은 비운 때문에 더욱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은 모두 지성적인 야심을 기대할 수 없는 소녀들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소의 설명: "내가 테레즈를 갖고 있듯이 그는 아네트란 여자를 갖고 있었다. 이것이 또한 우리의 처지의 비슷한 점이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었다. 즉, 나의 테레즈가 적어도 아네트만큼은 예쁜 데다가 성격이 부드럽고 상냥하며, 고상한 한 남자를 곁에 묶어두게 만들어진 반면, 그의 아네트는 게으르고 본성이 천박하여 다른 사람들 눈에 제대로 받지 못한 교육을 보충해줄 만한 어떠한 장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결혼했다. 아주 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녀에게 결혼을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었던 나는 그의 행동을 따르려고 서두르지 않았다."(83쪽)

 

 

 

 

실제로 루소는 1745년 뤽상부르 공원 근처의 생 캉탱 여관에서 처음 만난 소녀와 꼬박 23년의 동거 끝에 결혼한다. 그 사이 다섯의 아이들은 고아원에 갖다 버린 일은 유명하다. 루소의 고백적인 기록들은 이미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 유형을 예고하고 있다. 루소와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루소와 톨스토이(톨스토이에게 영향을 미친 철학자는 칸트, 루소, 그리고 쇼펜하우어이다)에 관해서 글을 써볼 수 있을까?

<인간불평등 기원론>의 제2부 도입부: "인류사상 최초로 한 조각의 땅에 울타리를 둘러치고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할 생각이 든 사람, 그리고 단순하게도 그러는 그를 믿는 사람들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시민사회를 처음 세운 사람이다. 만약 누군가 나서서 말뚝을 뽑아버리고 이웃들에게 '조심해라 사기꾼을 믿어서는 안된다. 당신들은 땅의 산물은 모두의 것이지만 땅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을 때 몰락하게 된다'라고 외쳤더라면 인류는 그 많은 범죄와 전쟁과 살인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105쪽)

이 대목은 "인간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톨스토이와 비교해 봄직하다. 이 대목에 대한 '지주' 볼테르의 평: "이것은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싶어하는 거지의 철학이다." 루소의 편을 들고 싶은 걸 보면 나에겐 거지근성이 있나보다.

내용중에서 루소가 연극예술을 반대한 점도 흥미로운데, 제네바에 극장을 건립하는 문제로 볼테르와 의견이 갈린(그는 디드로와 달랑베르와도 사이가 나빠진다) 그가 볼테르에게 보낸 편지. "당신은 당신이 찾은 피난처 제네바를 타락시켰습니다. 바로 당신이 제게 고향에 머무는 것을 못견디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저는 당신 때문에 이국 땅에서 죽어야 합니다. 당신이 제 조국에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모든 영예를 차지하는 동안, 저는 죽은 짐승을 버리는 구덩이에 던져질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저는 당신을 증오합니다."(146-7쪽)

윌 듀란트 부부는 이들의 시대에 관한 저작(<루소와 혁명>, 1967)에서 이렇게 요약한다: "볼테르와 루소의 긴 싸움은 계몽주의의 면전에서 벌어진 가장 유감스러운, 치욕적인 사건 중의 하나였다. 볼테르는 장 자크와 똑같이 민감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평소 자신의 재능을 격정에 의해 왜곡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감정과 본능에 호소하는 루소의 이론에서 반란에서 시작해 종교로 끝나는 개인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비합리주의를 예감했다. 볼테르는 파리와 그 도시의 유쾌함과 사치의 아들이었다. 반면 루소는 제네바의 아들로 자신이 당했던 신분차별과 자신이 누릴 수 없었던 사치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찬 음울하고 청교도적인 시민이었다. 볼테르는 문명의 죄는 문명이 가져온 안락함과 예술에 의해 상쇄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루소는 도처에서 불쾌함을 보았고 거의 모든 것을 비관했다. 개혁론자들은 볼테르에게 귀를 기울였고, 혁명가들은 루소에게 귀를 기울였다."(191쪽, 강조는 나의 것)

 

 

 

 

끝으로 루소에 대한 아놀드 하우저의 평가: "계몽주의 '철학자들'도 때때로 민중의 편에 서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항상 단순한 대변자 내지 보호자로 나섰을 뿐이었다. 루소는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말한 최초의 인물이요, 민중을 위해 말하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해 말하는 것이기도 했던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반역을 고취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반역자였다. 그의 선구자들이 개량주의자, 사회개혁가, 박애주의자였다면 그는 최초의 진정한 혁명가라고 하겠다."(221쪽)

루소의 저작 중 대부분이 번역돼 있다. <신 엘로이즈> 정도가 빠져 있을까? 연구서 중에서는 카시러의 책을 읽고 싶다(<루소, 칸트, 괴테>, 서광사, 1996). 듀란트의 책과 함께 장 스타로벵스키의 <루소: 투명성과 장애물>, 그리고 토도로프의 <덧없는 행복>도 읽고 싶다(스타로벵스키의 '주제비평'에 대해서는 김현의 연구서 <제네바학파의 비평>(혹은 <제강의 꿈>)을 참조할 수 있다. <덧없는 행복>(한국문화사)은 번역돼 있다. 러시아에는 스타로벵스키의 책들이 근간 <작용과 반작용>을 포함해 여러 권 번역돼 있다. 이 걸출한 문학연구자의 저작들이 국내에도 소개되었으면 싶다). 전문적인 연구서적은 물론 다 섭렵할 수 없다. 폴 드 만의 <독서의 알레고리> 2부가 루소에게 할애되어 있는데, 이것도 언젠가는 읽어야겠다. 자자손손...

06. 0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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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루소 사상의 이해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7-21 20:03 
    오늘 눈에 띈 한권의 책은 박호성의 <루소 사상의 이해>(인간사랑, 2009). 루소 연구로 학위를 받은 편역자가 루소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논문들을 엮고 옮긴 책이다. 김용민 교수의 <루소의 정치철학>(인간사랑, 2004) 이후에 드물게 나온 연구서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론 4부에 실린 몇 편의 논문을 기회가 되면 우선적으로 읽어보고 싶다.      제1부 루소 사상의 시
 
 
2006-01-24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1-24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저도 영역본은 갖고 있는데 읽을 짬을 내는 건 쉽지 않네요. (여성)전공자들은 대개 루소를 아주 싫어하던데요.^^
 

방학이지만 '월요일'이란 이유로 학교에 나왔다(대신에 점심 먹을 때쯤 나왔다). 오는 길에 이번주 <필름2.0>을 사서 대략 점심먹을 때까지 들춰보았다. 그리고는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2005)와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을 보아야 하는 영화로 일단 꼽아두었다. 전자는 나이 어린 부모(=아이)에게 생긴 한 '아이'에 관한 영화이며, 후자는 두 남자간의 (우정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게이 영화'이다. 

내 분류대로 하자면, 전자는 '로망스'이고 후자는 '포르노'이다. 아마도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두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몇 마디 코멘트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아마도 내가 접할 수 있는 '2005년의 영화' 두 편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곤 설특집이라고 실린 '문화계 32인의 강추, 나만의 컬처블로그'를 훑어보는데, 가장 눈길이 간 '블로그'는 역시나 마광수 교수의 '이런 게 예술이지'. 아침 나절에도 요즘 읽고 있는 <예술의 종말 이후>를 들춰본 탓인지 '예술'이란 단어에 내 시지각이 민활하게 반응했다. 커피 한잔 마시는 김에 아르바이트로 '예술' 좀 따라가본다. 

 

 

 

 

마광수 교수는 작년 한 해 동안 대략 8-9권의 책을 출간했다.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는 모양이다. 앤드류 블레이크에 대해서도 아마 그의 책들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상찬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로선 그의 책들을 초기의 문학이론서나 윤동주 론을 제외하면 별반 읽은 게 없다(한두 권 읽어보면 나머지는 지루하다는 게 그 가장 큰 이유이다).

 

 

 

 

'이런 게 예술이지'를 읽으며 그에게 더 맞는 건 '야설'이 아닌 '야동'의 세계가 아닐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변명과 일기, 잡담들만 잔뜩 늘어놓는 그의 '권태'는 동적인 영상들로부터의 소외가 낳은 결과는 아닐는지(그런 의미에서, '국민감독' 임권택만 도와주지 말고, '국민권태' 마광수도 좀 도와주자! 진짜 '예술' 좀 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또 먹고 살 만하면, 볼 게 포르노밖에 더 있는가?)  

마광수 교수(1951- )가 소개하고/자랑하고 있는 예술은 앤드류 블레이크(Andrew Blake, 1947- )의 세계이다. 아는 사람은 아는지 모르겠지만(나는 처음 들어봤다), '앤드류 블레이크의 세계'의 보다 정확한 이름은 '앤드류 블레이크의 에로틱 세계'이다. 관련사이트에서 그의 필모그라피를 보니 포르노 관련으로는 작가, 편집, 촬영, 감독, 제작 안 하는 게 없고, 직접 찍은 것만도 거의 60편에 이른다. 마교수는 앤드류 블레이크의 베스트 타이틀 5편을 거명하면서 이렇게 소개한다.

"요즘 학생들한테 물어보니 예쁘기만 하고 재미없다고 하지만 무슨 말씀, 탐미주의자인 내가 보기엔 이거야말로 유미주의의 결정판이지. 포르노가 아니라 예술이다. 미장센이 정말이지 너무 좋다. 불쾌하기는커녕 굉장히 아름답고 내가 좋아하는 페티시즘도 상당히 다양하게 반영돼 있다. 환상적이라고나 할까. 솔직히 어떤 작품을 봐도 앤드류 블레이크의 예술적인 포르노만한 걸 못봤다. 그의 작품을 10년전에 비디오로 봤지만 최근 이 다섯 편을 구해 보면서 다시금 즐거웠다. 예술이란 이런 거다."  

마광수 교수의 57편에 이르는 블레이크의 영화들을 다 구해서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베스트 5'로 꼽은 영화들의 목록은 'Body Language'(2005), 'Hard Edge'(2003), 'Girlfriends'(2002), 'Paris Chic'(1997), 'Captured Beauty'(1995) 등이다.

'요즘 학생들'은 재미없어 한다지만, 블레이크는 (예술의 종말과 무관하게) 요즘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역'이다. 그리고 그 현역 예술가의 세계는 "불쾌하기는커녕 굉장히 아름답고 내가 좋아하는 페티시즘도 상당히 다양하게 반영돼 있다. 환상적이라고나 할까." 앙드레 김 어법으로 '판타스틱'한 장면들을 나로선 그저 '상상해' 보는 정도이지만, 이런 '패티시'에 걸맞는 '예술작품'을 예술가 마광수도 충분한 영감을 받고 써주었으면 좋겠다('사라'만 즐거운 작품 말고). 마광수-예술론에서 지루하다는 건 죄악이니까(그에게 불충분한 건 도덕이 아니라 예술이다).

06. 0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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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1-23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광수 대단합니다. 이제 저런 그림들도 5분이상 들여다 보면 지루해 지는데 말이죠-.-+...어쨌거나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는 볼만합니다. 이제는 좀 새로운 길을 가야 하지않나 하면서도 그 호흡에 한 번 빨려들면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저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고요.

파란여우 2006-01-23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먹고 살만하면 볼게 포르노 밖에 없다면....
앞으로 기를 쓰고 먹고 살만한 수준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쳐야 하는건가,
아니면, 먹고 살만한 수준이 안되기 위하여 안빈낙도해야 하는건가.
갸우뚱... (아, 나두 몰러...)
여하튼, 마광수가 소외감에 찌든 사람으로는 보입디다.

로쟈 2006-01-24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과 살 만한 수준'이 대개 10-20억 정도의 재산은 있어야 한다고 하니까 만만한 수준은 아니겠지요. 기를 써서는 안되고 로또를 쓰셔야 합니다. 본문에는 쓰지 않았지만, 포르노는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동물행동학자의 일리있는 주장도 있습니다. 에덴동산이 사실 포르노적 세상이 아니었을지...
 

이 글의 이전 제목은 '<나쁜 피>의 한 장면에 대한 생각'으로 1997년 성탄절에 쓴 것인데, 내 딴에는 '생명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미래의 글을 예비하는 차원에서 적어둔 것이었다. 지난 황우석 사태를 통해서 알려진바, 영화 <아일랜드>(2005)에서와 같은 본격적인 생명복제시대는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다. 그러니 본격적인 글을 쓰는 데 아직은 '여유'가 있는 셈이다. 당분간은 20년전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입막음 해야겠다. 대신에 이미지 버전으로 업데이트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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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알렉스가 안나에게 묻는다. 안나는 등을 돌린 채 세차게 머리를 가로젓는다. 레오(스) 카락스의 사랑의 3부작 중 두 번째 영화 <나쁜 피>(1986) 한 장면이다(*<소년, 소녀를 만나다>, <퐁네프의 연인들>이 나머지 두 작품이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이 문답의 바로 이전 장면, 즉 문밖에서 담배를 물고 서성이던 알렉스가 라디오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모던 러브>가 나오자 거리를 질주하는 장면이다. 처음엔 비틀거리며 걷다가 몇 개의 블록을 마치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질주하던 그는, 음악이 멈추자 그대로 정지하고 다시 안나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리고는 묻는다. "안나,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2. (한)순간에 완성되(면서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 그것은 반시간적 사랑이 아닐까? 순간이나 영원이란 것은 시간적인 계기이지만 동시에 반시간적 계기이다. 그것이 반시간적인 것은 시간의 고유한 운동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순간은 영원의 무한수축이고 영원은 순간의 무한팽창이지만 이 수축/팽창의 운동은 자연적 시간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때의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동형론적 형질전환이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이렇듯 반시간적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감성적 사랑이라는 개념적-정념적 테두리 안에서 다 파악될 수 없다. 즉 그것은 감성적 사랑을 초과한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라는 이 초감성적 사랑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다. 그것을 정념의 형이상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정념의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의 이념이 그러하듯이 현실이 아닌 오직 가상(이미지) 속에서만 자신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3. 감성적 사랑, 즉 미적 가상이 아닌 현실 속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진화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만족할 만한(agreeable) 상태, 즉 행복을 위한 것이다. 행복이란 "정상적으로 생겨 먹은 생물체의 경우 ①자기보존의 본능과 ②종족보존의 본능, 이 두 가지의 충족을 의미한다. 본능 ①의 충족은 개인적인 생존을 뜻하므로 음식과 주거의 문제이다. ②의 충족은 종(족)의 유지와 번영을 뜻하므로 성적 욕구의 문제이다." 여기서 대개의 경우 자기보존의 본능(생존의 욕구)이 종족보존의 본능(생식의 욕구)보다 먼저 고려된다. 즉 생식의 욕구라는 생물학적 기제의 정신적(정서적) 대응(수반)으로서의 감성적 사랑은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는 사랑이다(사랑을 팔고 사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초감성적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사랑이겠다(사랑에 죽고 못사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은 (한)순간에 자신이 완성되기를 열망한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도망간다(혹은 죽고 만다). 하지만 사랑을 잊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다(귀신이 되어 되돌아온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나쁜 피, 우리의 생-본능을 관장하는 '나쁜 피' 때문이 아닐까?

 

4. 애초에 사랑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육체를 가진 존재이어서이다. 즉 육체(나쁜 피)는 사랑의 가능조건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육체는 사랑의 걸림돌이 되고 초감성적 사랑의 불가능조건이 된다. 이 육체는 우리를 정념의 공간 속으로 내던져 놓고는 뭔가 이루어질 만하면 다시 잡아당기는 것. 그래서 우리는 어디론가 무한질주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곧 걸음을 되돌려야만 한다. 그래서 이 질주에 대해 "끝없이 몸부림치지만 나아갈 수 없는 삶의 불가해성과 무력함 그리고 이것 자체에 대한 분노 등"을 나타낸다고 한 것은 옳은 지적이다. 다만 여기서 '나아갈 수 없는 삶'이란 걸 나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으로 바꿔 읽고 싶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감성적 사랑, 아름다운 사랑의 끝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숭고하다(죽음을 무릅쓰는 사랑!). 이 숭고한 사랑은 (감성적) 사랑의 이해관계(목적)에 구속받지 않으며 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숭고한 사랑의 맹목적인 운동 앞에서 망연자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간혹 우리가 그러한 사랑에 걸려들기 때문에!). 알렉스의 물음에 대해 안나가 세차게 머리를 젓는 것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그렇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라 두려운 사랑이다. 그것이 두려운 것은 우리의 생-본능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영화 <나쁜 피>의 한 장면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그런 두려움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내가 다 이해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래서 그것은 두렵다(불쾌하다). 그렇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의 생-본능이라는 인간조건을 일시적으로나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에 우리를 (한)순간 개방한다(우리의 죽음이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우리를 일시적으로나마 자유롭게 한다(머리가 잘린 통닭모양).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아니다, 그건 더 이상 사랑도 예술도 아닌 어떤 것이다. 하여간에 무엇인가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5. 프로이트의 이분법을 사용하자면, 아름다움은 생-본능과 연관되어 있고 숭고(함)은 죽음-본능과 연관되어 있다. 생-본능은 사는 것, 잘사는 것, 보다 더 잘사는 것을 지향한다. 이성의 기능이란 것은 이러한 생-본능을 바람직하게 보좌하는 것이다(화이트헤드). 이에 대하여 죽음-본능은 절대적으로 잘사는 것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생-본능에서 발원하지만 곧 그것을 초과하고 만다(그래서 이성-이념의 한계를 표시한다). 절대적으로 잘사는 것이란 결코 삶의 안쪽에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끊임없이 무에 유혹되고 죽음에 도취된다. 마치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처럼(에로티즘 또한 생식의 욕구에서 발원하지만 그것을 초과한다).

죽음이 우리에게 불가해하듯이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우리에게 불가해하다. 이것들은 모두 절대적인 타자이다. 우리의 이성, 즉 개념적 사태 이해는 이들 안에 정립되어 있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의 뒤치다꺼리에나 바쁠 따름이다. 간혹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우리를 유혹하는가? 그럼 어쩔 텐가? 우리는 안나와 마찬가지로 세차게 머리를 내저으며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이 또 다른 '나쁜 피'로부터 도망가는 수밖에. 그러다 발병이 나고 덜미를 붙잡히는 수밖에!

6. 칸트가 주장하는 취미(아름다움) 판단의 무관심성(무사심성)은 숭고에 대해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그것을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한 안나의 부정과 나란히 놓을 수 있을까? 아름다운 대상에 대해 평정한 태도, 무관심한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안락의자에 주저앉는 일로 충분히 가능할 수 있겠지만, 숭고한 대상에 대해서, 가령 어떤 예술작품 속에 정립되어 있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능할까? 어딘가 불편하지 않을까? 만약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이 적극적인 관심의 결과라면 숭고에 대한 무관심은 필사적인 관심이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알렉스의 질주를 떠올려 보자. 우리의 생-본능은 숭고(죽음)로부터,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주(질주)할 때에만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것. 그런 필사적인 도주를 우리는 '무관심'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 만큼이나 숭고에 대한 무관심 또한 아이러니적이다. 너무 말이 없어서 '떠벌이'란 별명이 붙은 알렉스처럼.

 

 

 

 

7. "현대의 영화가 보여주는 이 모든 특징이 철학에 대해 갖는 관련성은 바로 사유의 무능력에 직면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케 하고 무의 형상을 사유하게 하며 사유될 수 있는 전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사유하게 한다. 영화의 이미지가 운동의 교란을 나타내는 순간 그것은 세계를 일정하게 유보시키는 것이며 가시적인 세계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사유는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여 자신의 한계를 사유하게 된다. 이것이 영화가 철학에 대해 갖는 의미이다."(들뢰즈) 이러한 주장은 비단 현대 영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리라.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철학이라는 개념적 사유에 대해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고 우리는 정당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능력을 절감하게 한다. 이것은 마치 데리다가 반 고호의 그림에서 구두끈이 반쯤 풀려/조여 있는 걸 두고 이중의 구속(double bind)을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우리의 잘난 예술은 우리를 (껴)안아주지도 않으면서 공연히 놓아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담배나 (꼬나)물고 그것의 주변만을 서성거릴 뿐이다, 문밖에서. 그러다가 문득 자각한다, 우리 자신의 숭고함을!

 

 

 

 

8. 자신의 사랑에 대해 중언부언하는 것은 품위 없는 짓이지만,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 몇 마디만 더 하겠다. 사실, 이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한 물음, 즉 정념론적 과제는 나에게 있어서 칸트 이후에 제기된 인식론적 과제와 결코 다르게 읽히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음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이성에 부과되어 있기 때문이요,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순수이성비판>)라고 말할 때, 이성에 의해 제기되지만 이성의 능력 바깥에 있는 물음들이란 바로 숭고한 물음들이며, 예술적인 물음들이다(가령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든가, "우주는 팽창하는데 왜 우리는 팽창하지 않는가?"라는 식의 물음들).

데리다식으로 말해서 반쯤 풀려 있고 반쯤 조여 있는 이 물음들을 이성의 잉여효과, 혹은 과민반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미친 듯한 질주가 어찌 과민반응이 아닐 수 있을까? 진화사적으로 볼 때도 형이상학적 물음들이 우리의 자기보존 본능이나 종족보존 본능에 유리하게 작용할 만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형이상학적 사유에 필요한 기회비용을 다른 데 투자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의미에서도 인식의 형이상학이나 정념의 형이상학 모두 본래의 프로그램을 초과하고 있다. 그것들은 프로그램의 돌연변이이며 아나그램이다.



9. 뒤샹의 경우.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뉴욕에서 리처드 무트(R. Mutt)라는 가명으로 레디메이드 작품 <샘>(변기)을 전시회에 출품하나 거절당한다. 이 미술사의 한 스캔들은 단순한 스캔들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그가 예술작품의 개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오브제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이 경우에는 화장실에서 미술관으로) 옮겨놓았을 때 그것이 예술작품이 된다는 걸 발견(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예술작품의 근원이 더 이상 예술작품이나 예술가 자신의 창조성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일부 작품의 경우에,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자리옮김이라는 일종의 새로운 명명행위이다.



뒤샹의 대표적인 레디메이드 중의 하나인 <자전거 바퀴>(1913)은 자전거 바퀴와 의자를 접붙임한 것이다. 이 바퀴와 의자는 모두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전혀 예술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오브제가 동시적으로 제시됨으로써 거기에 어떤 미감적 효과(뒤샹 효과)가 유발되는 것이다(그래서 자신이 예술작품임을 주장하게 되는 것). 이 새로운 예술, 혹은 '미적 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병치(명명)이고, 자리의 이동이다. 이점은 <샘>의 경우에 보다 극적으로 드러난다.

  

전시회에 예술작품으로 놓인, 그리고 '샘'이라고 새롭게 명명된 이 변기에서 우리는 이미 도구 존재로서의 도구다움을 경험할 수 없다. 이 변기의 "둘레에는 그것이 귀속될 만한 거라곤 아무 것도 없이, 다만 무규정적인 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기는 안전하고 편리한 배뇨를 위한 기구라는 도구의 도구 존재, 즉 신뢰성을 자신 가운데로 모아놓고 있다. 이를테면 변기라는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 곧 숨어 있지 않음(탈은폐) 가운데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듯 '존재자의 진리의-작품-속으로의-자기-정립'이 이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준다? 이런 식의 하이데거적인 사유는 그림이 아닌 실제 오브제의 경우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이미지로서의 고호의 구두 그림이 실제의 구두에로 관심을 정향시킨다면, 실제로서의 이 뒤샹의 변기는 오히려 완강하게 자신의 도구로서의 흔적을 지우며 이미지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하여 이 변기는 도구적 존재자로서의 자신의 신뢰성을 철저히 부인하고 망각한 이후에야 예술작품으로서, '샘'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과연 예술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이고, 무엇일 것인가?

10. 과학사에서 1997년이 의미있는 해로 기록된다면 그건 단연 복제양 돌리 사건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내지는 치료)라는 것은 생물체의 고유한 유전자 염기배열을 기술적으로 조작할 수 있음에 근거한다. 유전자 염기배열이란 A, C, T, G 네 개의 문자로 표시되는 DNA 염기의 조합('책')이다. 이제까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는 자신이 타고난 유전자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거기에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를 가할 수 있게 된 것. 그런 의미에서 유전자 조작은 일종의 아나그램(철자변환)이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재료(레디메이드)의 배열을 바꾸는 것이고, 자리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이면서 예술이다.

아나그램으로서의 예술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기술과 예술의 비분리를 다시금 경험하게 될 것인지(이에 대한 사유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미래에, 이성의 도움없이도 자기복제를 통한 종족보존이 가능해질 경우(그것이 허용될 경우), (숭고한)사랑은 무엇일 것인지? 레디메이드 이후에 (숭고한)예술은 무엇일 것인지? 그런 물음들 앞에서 사랑과 예술은 자신들의 유사한 운명을 놓고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11. 모든 이야기를 정리해서 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모든 단락은 보완을 강요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가볍게 말하는 것이다."(카뮈)라는 권고를 제법 따르려고 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칸트와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좋아하는 만큼 더 읽게 되면, 조금은 무겁게 말할 수 있을는지(여전히 사랑하면서)? 끝으로, 이 몇 가지 생각의 꼬투리가 되어준 카락스/알렉스에게 고마움을 전해야겠다. 알렉스 오스카(Alex Oscar)는 레오(스) 카락스(Leos Carax)의 아나그램이다. 예술은 분신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소진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젊은 카락스/알렉스는 내게 말했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다.



12. 하여간에 "중요한 것은 구애를 한다는 것이며, 이 구애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계속될 것이다."(<아방가르드의 다섯 노총각들>, 현대미학사, 1993)

06. 0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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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1-21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로쟈 2006-01-22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진행중인데요.^^

비로그인 2006-01-23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우석 사태로 생명 복제가 현실과 멀어졌다는 건 사실과 다르지 않나요?

황우석이 사기친 건 줄기세포고 생명 복제에서는 분명한 연구 성과 (스너피)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로쟈 2006-01-2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서 적었듯이, 제가 염두에 둔 건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 <아일랜드>에서 설정된 것과 같이 '본격화된' 생명복제 시대입니다(이 영화가 유독 한국에서 많은 관객을 동원했는데, 황우석 신드롬의 영향으로들 해석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