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교보에 들렀다가 미술사 책 한 권과 함께 구한 책이 알폰소 링기스의 <낯선 육체>(새움, 2006)이다. 얼마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언급한 책인데, 책에 대한 흥미와 일말의 책임감에 이끌려 책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육체'와 관련한 독서계획을 급조했는데(급조한 제목은 '낯선 육체를 찾아서'), 피터 브룩스의 <육체와 예술>(문학과지성사, 2000), 쥬디스 버틀러의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인간사랑, 2003)이 가장 먼저 꼽은 책들이다. 계획대로 진행되는 일이 어디 있으랴 싶지만, 하여간에 이 책들을 읽게 될 것이다(<낯선 육체>는 원서를 구하고 있고, 나머지 책들은 번역본이 나오기 전에 이미 원서를 갖고 있던 책들이다). 버틀러는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에도 분량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지젝의 재비판을 더불어 읽어볼 수도 있겠다. 다른 책들은 고려중이다.    

 

 

 

 

한데, 조금 유감스러운 것은 '육체'보다도 먼저 일부 눈에 띄는 오역들. 대개 책을 구하게 되면, 서문과 목차, 그리고 색인 등을 들춰보는데, <낯선 육체>의 색인에는 '유어세너, 마거리트'라는 이름이 올라와 있다. '낯선' 이름이지만 소리나는 대로 적어보면 'Marguerite Yourcenar', 즉 프랑스의 저명한 여성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1903-1987)'이다. 국내에서는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세계사, 1995)으로 일부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는 명망 높은 작가이고 이미 여러 권의 소설들이 번역돼 있는데, '유어세너'라는 건 좀 무례한 호명이다. 전문 번역가들이 우리말다운 문장들을 만들어내는 데는 '전문가들'보다 나은 편이지만, 이런 대목에서는 종종 실수를 드러낸다. 본문에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낯선 육체>의 원서를 구할 때까지(이번주 안으로 구해질 것이다) 먼저 <육체와 예술>을 읽어보기로 했는데, 뜻밖에도 좀 실망스럽다. 저자인 'Peter Brooks'를 '피터 부룩스'라고 옮긴 것부터가 의아한 대목인데(이게 얼마나 갈망질팡이냐면, 겉표지/속표지에는 '룩스'이고 본문과 서지정보란에는 '룩스'이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었다는 얘기이다. 하기야 발음상으로야 대수롭지 않은 차이이지만), 이런 경우 검색에서는 서로 '다른 사람'이 돼버리는 수도 있다. 물론, 나의 오랜 '경험'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이런 무신경이 오직 저자명의 표기에만 국한될 리는 만무하다.  

<육체와 예술>의 원제는 'Body Work'이고, 부제는 '근대 서사에서의 욕망의 대상들'이다. 국역본 뒷표지의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문학과 미술 작품에서 육체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왜 육체를 다루고 있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육체와 의미, 육체의(에 의한) 글쓰기를 탐구하고 있다." 저자인 브룩스는 예일대학의 불문과 교수로서 <플롯을 위한 독서(Reading for the Plot)>이란 대표적인 저작을 갖고 있다(이 책에 대해서는 권택영 교수의 <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동서문학사, 1991; 문예출판사, 1995)를 참조할 수 있다. '육체'와 관련한 주제로는 권택영, <몸과 미학>(경희대출판부, 2004)도 출간돼 있다).

그런데, 국역본의 표지에는 유감스럽게도(?) 원서 표지에 실린 앙리 제르벡스(Henri Gervex)의 그림 <롤라(Rolla)>(위의 그림)의 상당 1/5 정도만이 사용되고 있다. 나는 첫눈에 번역 또한 그렇게 '에누리'한 수준은 아닐까 우려하는 마음을 가졌는데, 첫페이지의 번역은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켜주지 못했다. 첫 페이지라는 건 1장 '서사물과 육체'가 시작되는 21쪽을 말하는데, 가령 이런 대목을 읽어보자.

"상상적 문학에 있어 육체는 항상 매혹의 대상이 되어왔다. 육체는 인간의 정신력과 의지력을 세상에 행상하는 중간과정이며, 물질성을 넘어서는 의미의 생성 작업에 있어 타자로서 작용한다.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의미 생성의 매개가 되고 하며(예를 들어, 글을 쓰는 손 같은 경우), 심지어는 작업의 장소로도 사용된다."

이 대목의 원문: "In imaginative literature the body has always been a object of fascination, at once the distinct other of the signifying project - which, as an exercise of mind and will on the world, takes a stand outside materiality - and in some sense its vehicle(this living hand that writes), perhaps even its place of inscription."(1쪽)  

처음 몇 페이지를 읽어본 인상으로 판단하건대, 국역본은 대개 '의역'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두번째 문장에서 'as an exercise of mind and will on the world'을 '인간의 정신력과 의지력을 세상에 행사하는 중간과정'이라고 옮기는 것도 그런 사례인데, '중간과정'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임의적'인 첨가어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는 'body'가 아니라 'signifying project'이다. 문장의 요체만 간추리자면, "[T]he body has always been a object of fascination, at once the distinct other of the signifying project and in some sense its vehicle..." 정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육체'는 '의미화 작업'과의 관계에 의해서 정의되고 있다. 즉, 육체는 의미화작업과는 무관한 타자이면서(의미화작업은 주로 '대뇌'에서 담당한다) 한편으론 그 수단이라는 것.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손(this living hand that writes)'이 바로 그 '수단'이다. 그리고 때로 육체는 심지어 '그 기입의 장소(its place of inscription)'가 되기도 한다. 육체에 뭔가를 쓰거나 새겨넣는 경우도 있으니까. 가령,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 <필로우북>(1995)이 좋은 예가 되겠다.

한국영화로는 정진우 감독의 <자녀목>(1984)에서도 '육체에 씌어지는 글자들' 장면을 볼 수 있다. 주연을 맡았던 원미경은 80년대 초중반 여러 사극영화들에서 연기력 좋은 '육체파' 배우로 각광받았었다(<변강쇠>, <사노>, <물레야, 물레야> 등이 그녀의 주연작들이다). 이야기가 언제 또 '육체파'로 새버렸나? 

어쨌든 나의 요점은 <육체와 예술>의 번역이 '예술'의 수준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임의적인 의역/오역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주의해 읽어야 한다는 것.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을 포함하고 있는 책에 '역자 후기'가 빠져 있는 것도 상당히 드문 일인데, 번역의 자초지종에 대해서 알길이 없기에 유감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애로사항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육체와 예술>에 대한 읽기는 한동안 더 진행될 것이며 독후감은 나중에 따로 올리기로 한다.

06. 01. 31.

P.S. <의미를 체현하고 있는 육체>도 읽을 만한 번역이지만, 아쉬운 대목들이 눈에 띈다(라캉의 '실재(계)'를 '실제계'라고 옮긴 것 등의 대표적이다). 서문에서 일인칭 주어 '나'를 '본인'이라고 옮기는 경우는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데, 그렇다고 이걸 오역이라 할 수는 없겠다. 다만 '공통감각'의 부재를 탓할 밖에. 이 책에 대해서도 브리핑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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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페이퍼인데, 재작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의 여행을 돌이켜보면서 정리하기로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도보 여행이 아닌 기차 여행이었기에 내가 여정은 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이다. 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역'에 떨어지자 역사에 상징처럼 서 있는 표트르 동상 앞에는 페테르에 있는 후배들이 마중나와 있었다(거의 동일한 역사 구조인데, 동상으로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역사는 구별된다. 모스크바의 '레닌그라드'역에는 레닌동상이 서 있다). 아래는 '모스크바'역의 야경.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때의 풍경과 유사하다.

 

 

그때의 기록을 잠시 따라가본다: "며칠 전 소시지를 잘못 먹고 배탈이 났다는(그래서 못나온) 후배가 집에서 저녁을 준비해놓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모스크바역은 넵스키(=네프스키) 거리와 바로 통한다. 넵스키의 밤거리는 보도블록 공사를 하느라 좀 어지러웠는데, 함께 간 후배가 '남대문 시장 같다'는 얘기는 하는 바람에 페테르의 문화시민들에게 핀잔을 들었다(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페테르를 보통 문화의 도시라고 지칭하며 장사꾼들의 도시인 모스크바를 보통 무시한다). 택시는 네바강을 건너서 바실리 섬으로 들어서서도 한참을 더 달렸다. 얘기를 들어보니 페테르의 거의 끝에서 끝까지 타고 온 셈이었다(나중에 버스를 타보니 종점에서 종점이었다)." 아래는 그 넵스키 거리의 이미지이다(이 거리를 소재로 한 가장 유명한 작품이 고골의 '넵스키 거리'이다. 이 거리명은 '네바'강에서 따온 것이다). 흑백 사진은 1906년의 넵스키 거리. 이하에서는 여행기를 간추린다.

 

 

다음날 아침 늦게서야 식사를 하고 우리는 투어에 나섰다. 페테르부르크 초행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첫번째 목적지는 겨울궁전 에르미타주 박물관이었다(참고로, 학생증을 소지하면 에르미타주를 포함한 대부분의 박물관이 무료이다). 소장 작품들을 전부 보려면, 5 7개월이 걸린다는 둥, 10년이 걸린다는 둥 하도 전설이 많은지라 우리는 겸손하고 소박하게 3시간만 돌기로 하고 후배의 가이드를 받으며 인상파의 그림들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상파부터 둘러보기로 시작한 게 아니라, 둘러보기 시작했는데 인상파 그림들이 튀어나왔다. 19-20세기 프랑스 회화 방부터 돈 것이다(143-146번 방). 아래 사진이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는 에르미타주박물관이다.  

 

 

여행안내 책자인 'Lonely Planet'을 참조하면(여행안내서로서 훌륭하다. 에르미타주의 경우 각 방별로 소개돼 있다), 고호, 고갱을 비롯하여 이 방에 있는 모네, 드가, 르느와르, 세잔, 피카스, 등의 그림 74점은 2차 대전 때 독일에서 훔쳐온 것이다(물론 원래 독일 것이 아니고, 독일은 프랑스에서 훔쳐왔다). 이 그림들을 러시아에서는 50년 동안 입다물고 보존하고 있다가 종전 50년이 되는 1995년에 숨겨진 보물들의 전시회를 개최했다(그러니까 이 그림들이 에르미타주에서 전시되기 시작한 건 10년이 채 안된다). 물론 '가진 자가 임자'라고 그 시점부터 소유권은 러시아로 넘어와 있다(프랑스도 훔쳐온 것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걸 가지고 소유권 분쟁을 일으켜서 이득이 될 게 없다). 하여간에 이 그림들을 포함해서 대표적인 전시물들은 에르미타주 인터넷 사이트에서 모두 관람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3시간의 관람에서 이런저런 그림과 조각 작품들을 구경했지만(그리고는 <포켓용 에르미타주>란 책을 샀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푸슈킨과 동시대인이었던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1797-1856)가 그린 한 젊은 여인의 초상화이다('Portrait of Henrietta Sontag', 1831). 다음날 이곳의 전문가이드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얘기를 꺼내니까 그림이 걸려 있는 방번호와 위치까지도 정확히 기억해내고 있었다(내심 자기도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하여간에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내가 정확하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대학 1학년 때인가 방에 걸어놓았던 듯하다(내 방에는 선물로 받았던 시슬레의 풍경화와 함께 이 여인의 초상화가 붙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도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하니 그녀는 잊혀진 여인이다. 그런데, 17년이 지나서, 먼 객지에서 재회하게 된 것이다(그것도 오리지널로). 물기를 약간 머금은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이 여인을, 나는 앞으론 오래도록 잊지 못할/않을 것이다(그래서 여기에 다시 옮겨놓았다!). 우리가 걸작들보다 더 오래 기억하는 것은 이런 사소한 인연의 그림들이다.

 

여정을 조금 건너뛰어서 푸슈킨시로 향한다. 푸슈킨시는 원래 차르스코예 셀로(황제의 마을이란 뜻)라고 불렸으며 예카테리나 여제의 궁전(=여름궁전)이 위치하고 있다(이 궁전은 소설 <대위의 딸>의 결말 부분에도 등장한다). 그리고 그 궁전과 연결되어,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세운 특수학교, 리체이가 위치하고 있는바, 푸슈킨은 그 학교의 제1회 입학생으로서 6년간의 요람기를 보내게 된다(입학 동기생은 30). 그걸 기념하여 이 차르스코예 셀로는 1937, 시인 사망 100주년을 맞아 푸슈킨시로 개명된다. 일정상 여름정원과 푸슈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우리 일행은 푸슈킨을 골랐다.  

이 리체이 건물 역시 지금은 푸슈킨 박물관이 되어 있는데, 4층짜리 건물에는 학생시절 푸슈킨의 스케치 그림들과 함께 성적표 등이 보존돼 있고(4층에 있는 그의 기숙사방은 내 방보다 작았다), 박물관 가이드들은 푸슈킨이 앉았던 책상을 가리키면서 그에게 얽힌 각종 일화들을 유머와 감동을 섞어가며 설명해준다. 하지만, 기대만큼 잘 꾸며진 박물관은 아니었는데, 푸슈킨이 1815 1월 상급반 시험장에서 당대 최고 시인이었던 제르자빈(1743-1816)을 앞에 두고 전해의 가을에 쓴 시 <차르스코예 셀로의 회상>을 낭송함으로써 일약 2의 제르자빈으로 호명된 문학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들을 수 없었다는 점도 이러한 인상을 더욱 굳게 했다. 문화적 신화는 러시아의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I. Repin, 1844-1930)의 그림 <차르스코예 셀로의 알렉산드르 푸슈킨>(1911) 속에서도 전승되고 있는데, 소위 러시아 국민문학이 탄생하는 장면이다(아래 그림).

 

 

푸슈킨시는 페테르부르크 남쪽으로 25킬로쯤 떨어져 있으며 시내로부터 가는 데는 40-5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교외로 빠져나가서 20분쯤 차를 달리다 보면 오른편에 푸슈킨 동상과 함께 <푸슈킨>이란 표지판이 등장하는 데(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푸슈킨 동상으로 유명한 것은 러시아박물관 앞에 서 있는 동상이다), 우회전해서 소로를 따라 들어가면 그림 같은 도시가 등장한다. 이 푸슈킨시의 리체이 박물관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궁정 앞의 정원은 기대 이상이었다(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궁전 안은 둘러보지 않았다). 약간 쌀쌀한 날씨였지만, 가을의 차르스코예 셀로는 각종의 조각상들과 어우러져 우아하고 품위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오리떼들이 뛰놀고 있는 호수의 정경이 눈길을 끌었는데, 푸슈킨이 <예브게니 오네긴>(1831)에서 자신의 시들을 물오리떼들에게 읽어주었다는 바로 그 호수였다. 여제(女帝)의 궁전이 서 있을 만한 곳이었다

 

 

 

그날 저녁은 네바강변의 일식집에서 보드카를 양껏 마셨다. 같이 술을 마신 사람들이 네바강에 한번 빠져봐야 한다고 손님을 독려했지만, 물에 빠지기엔 너무 추운 날씨였다(여름이었다면 도전해봤겠지만). 그리고 다음날 나는 저녁 기차표를 예매한 다음에, 오후 시간을 친구와 함께 도스토프예프스키의 행적을 찾아 다니며 보냈다. 먼저, 지난번에 얘기한 쿠즈네츠느이 5번가의 박물관을 찾아가서 1시간 동안 안내 테이프를 들어가며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방과 그가 생활했던 방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건 물론 새삼스러운 그의 작품세계가 아니라 그의 생활이었다(아래 세번째 이미지가 도스토예프스키 가족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 현재는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

 

 

속기사였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두번째로 결혼한 이후 둘 사이에는 4명의 자녀가 태어나는데(1870, 그러니까 그의 나이 50을 전후해서이다), 불행하게도 첫아이와 막내 아이는 일찍 죽는다(1868 2월에 태어난 첫딸 소피야는 그해 5월에 죽고, 1875년에 8월에 태어난 막내아들 알료샤는 78 5월에 죽는다). 특히 알료샤의 죽음은 작가에게 커다란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안나의 회고에 의하면, 남편은 곧 죽을 것을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아들을 병적일 정도로 사랑했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는 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묘사하는 절절한 장면이 나온다). 성격이 괴팍할 것 같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이지만, 자녀들에게는 더없이 자상한 아빠여서 그는 언제나 저녁식사 후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에는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아이들 때문에 당연히 낮에는 집필에 몰입할 수 없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전형적인 저녁형 인간이었는데, 11-12시부터 서재로 들어가서 아침시간까지 소설을 집필했다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다.

 

 

 

 

 

 

 

 

 

그의 서재에는 그가 가장 좋아했다는 그림인 라파엘의 성모상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가 선물한 것이라 한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그림이다. 해서 느낀 건데, 아이에 대한 사랑을 모른다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이해할 수 없다(<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반의 형이상학적 반항의 모태가 되는 것도 무고한 어린아이들의 고통이었다. 그걸 관념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러니 형이상학적 고뇌만을 흉내낸다고 해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소설이 되는 건 아니다. 거기에 덧붙여져야 하는 것은 다음 세대에 대한 사랑과 염려이다. 그의 소설이 형이상학적이면서도 리얼한 소설이 되는 것은 그런 때문이다.

 

작가의 성실한 아내, 안나의 책상에는 남편의 작업량과 원고료 등이 빼곡하게 적힌 가계부가 놓여 있었다(안나는 작가 톨스토이도 부러워한 작가의 아내였는데, 사실 톨스토이의 아내 또한 객관적으로 말해서 조강지처였다. 하다못해 그녀는 아이를 열셋이나 낳았다! 하여간에, 악처를 요구하는 철학자와는 달리 작가에게는 처복이 좀 있어야 한다). 작가의 사후에 쓴 그녀의 회고록은(우리말로도 번역돼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가족의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더불어 최근에 안 것이지만, 그의 딸 역시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을 쓴바 있다(좀 얇은 책이다). 아마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을 그녀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을 나오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페테르부르크란 큰 지도와 함께 같은 제목의 팜플렛을 샀다. 팜플렛의 말미에는 그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기술학교에 다니기 위해 형 미하일과 함께 지방에서 올라온 1837(그의 어머니가 죽은 해이기도 하다)부터 1881년 사망할 때까지의 주소지들이 적혀 있는데, 모두 22곳이다. 1867 2월 안나와 결혼한 이후에도 14년의 결혼생활 중 8차례 주소지가 바뀐다(그러니까 7번 이사했다).

 

 

내가 박물관에 이어서 찾아간 곳은 결혼 바로 직전에 그러니까 1864년부터 67년까지 <지하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을 쓴 집인데, 이전 지명은 메샨스카야 거리의 알론킨의 집이었지만 현재의 주소는 카즈나체이스카야 거리 7번지이다. 이 건물의 벽면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두상 부조와 함께 <죄와 벌>의 씌어진 곳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물론 박물관이 아니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거나 할 수는 없었고, 그때부터는 <죄와 벌>에 등장하는 몇몇 지명을 찾아 나섰는데, 정확한 주소를 안 가지고 있어서 약간 애를 먹었다. 사실, S. 벨로프의 <도스토예프스키의 페테르부르크>(2002)란 책에 주소들이 다 나오는데, 나는 방심하고서 그 책을 안 갖고 갔던 것. 팜플렛에서 대략적인 주소와 판화 그림만을 찾아가지고 몇 군데를 돌아다녔는데, 소냐의 집과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은 카즈나체이스카야에서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에서 730걸음 떨어져 있는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의 집을 찾아나섰는데, 걸어서 간 게 아니라 자가용을 타고 가는 거라서 오히려 더 찾기가 힘들었다. 친구와 합의를 봐서 어느 집이겠거니 하고 찍었지만 맞는지는 확인해볼 수 없었다. 참고로, <죄와 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현재의 주소를 벨로프의 책을 참조하여 밝히면 이렇다.

 

<라스콜리니코프 그라주단스까야 거리 19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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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포노파 그리보예도바 운하 10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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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냐 그리보예도바 운하 7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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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피리의 경찰서 발샤야() 포쟈체스카야 거리 26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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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그런 것이 나의 공식적인 여행 일정이었다. 투어 첫날 카잔성당과 이삭성당 등을 둘러보고, 제카브리스트 봉기가 있었던 원로원광장(지금은 제카브리스트 광장)을 거쳐서 네바 강변의 청동기마상(푸슈킨의 <청동기마상>을 모른다면, 이 동상을 구경하는 일도 별 의미가 없다)을 구경한 다음에 넵스키 거리를 종주한 일 등은 따로 기록하지 않겠다. 아래 이미지가 프랑스의 조각가 팔코네의 1782년작 '청동기마상'. 오른쪽은 알렉산드르 브누아(Alexandre Benois)가 그린 <청동기마상>의 삽화(1904). 에르미타주와 함께 페테르부르크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청동기마상'에 대해서는 따로 그에 걸맞는 분량을 할애해야 한다.

 

 

여정을 마무리하자. 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역에서 내가 탄 모스크바행은 밤 9 55분발 열차였다. 플랫홈까지 친구가 배웅을 나왔고, 우리는 악수를 하고서 헤어졌다. 열차는 정시에 또 아무런 안내방송도 없이 스르르 플랫홈을 출발했다. 밤기차라 침대차였는데, 내가 끊은 건 좀 싼 6인용이었다(역시 13,000원 가량). 그보다 비싼 건 꾸페라고 해서 4명이 한 객실에서 타고 가는 식이다. 6인용이라고 한 건 통로쪽으로 2층짜리 잠자리가 더 달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를 따름이고 이건 객차 전체가 그냥 다 개방돼 있다. 침대보 등의 침구는 30루블(1,200)을 주고 객차 승무원에게 사와서 잠자리는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나는 자리가 위층이었는데, 대략 옆에서 하는 걸 보고 나름대로 처음은 아닌 듯이 행세하며 잠자리를 만들고는 누웠다. 8시간쯤 앉아서 가면 어떠랴 싶었는데, 눕고 보니까 역시 누운 게 편했다. 게다가 조명도 끄기 때문에 책을 읽을 형편도 아닌지라 나는 일찌감치 눈을 감았다.

 

View along a River (still Sparrow Hill)

 

기차는 5 55분에 모스크바에 있는 레닌그라드역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한 시간 전에 조명이 환하게 밝혀지고 승무원들이 침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즉 자기 잠자리를 정리해서 다시 반납해야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종착역에 이르렀지만, 역시나 아무런 방송도 없었고 승객들은 알아서들 내렸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새벽 지하철을 타고 슬레두유샤야 스딴찌야-(다음역은-입니다)란 낯익은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비로소 모스크바에 안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몇 달 정이 붙은 지라 모스크바가 내겐 더 편한 느낌을 준다(사진은 모스크바국립대학이 있는 '참새언덕'에서 바라본 모스크바 시내의 전경.하절기에는 유람선이 왕래한다. 본래 더 장쾌한 이미지를 축소할 수밖에 없어서 아쉽다). 남성명사인 페테르부르크와 달리 모스크바는 여성명사이다. 여자들은 화려한 도시 페테르부르크를 더 좋아할 만하지만, 남자인 나로선 수더분한 모스크바가 더 맘에 든다. 모스크바(=여자)는 페테르부르크(=남자)의 미래이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06. 01. 28-29.

 

P.S. 연휴가 지나면 작년 이맘때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지 딱 1년이 된다.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의 기일을 계기로 하여, 러시아에서의 추억을 잠시 돌이켜보았다. '현재'가 아닌 '추억'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 정도이다. 나이 먹는 일에 대해서 내가 별반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것처럼.주변의 눈총 속에서 그나마 일을 마무리지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2006년의 오프닝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이제 '메인이벤트'로 넘어가야겠다. 아시겠지만,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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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6-01-30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반의 형이상학적 반항의 모태가 되는 것도 무고한 어린아이들의 고통이었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어린이를 학살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오싹할 정도로' 사실적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를 던져올리고 칼을 받친다든지, 아이와 얼굴을 한참 맞대다가 해맑게 웃기 시작하면 방아쇠를 당긴다든가 하는 일은 죽어도 잊지 못할 장면인 것 같군요. 즐거운 설 선물이 되었습니다^^

로쟈 2006-01-30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로소지음'이라고 하는데, 동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06-01-3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들의 호응이 기대에 못 미쳤던 것도 문제이지만, 채산성을 앞세워 절판시키는 것도 유감스러운 일이네요. 그렇다고 제가 '무슨 힘'을 쓰겠습니까? 유유상종하는 수밖에요...

털세곰 2008-01-06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위의 뻬쩨르부르그 도-끼와 "죄와 벌" 주변의 파노라마 사진들, 어디서 좀 더 크고 "장쾌한" 버전으로 구할 수 있나요...? 예전에 뒤져보다 저도 어디선가 보았는데 지금은 아무리 다시 찾으려 해도 찾을수가 없네요. 러시아쪽 인터넷이 그 열악한 인터넷 사정에 비춘다면 컨텐츠는 정말 우리보다 풍부하고 압도적인데 이상하게 사진 등의 이미지는 확실히 약하더군요. 혹시 원본 옮겨오시면서 줄이고 하셨으면 원본 어디서 구할수 있는지 좀 알려주세요^^
 

설 연휴를 맞아 아침부터 일찍 채비를 차려서 어머니댁으로 왔다. 1시간 거리이기에 '민족 대이동'과는 거리가 멀며 하룻밤을 자고 내일 오전이며 다시 돌아갈 것이기에 특별히 수고스러운 것도 아니다. 차례도 없는 탓에 어른들께 새배를 드리는 것과 김치만두만을 잔뜩 빚어서 두어 끼를 해결하는 것이 집안의 행사를 모두 가름한다. 이런 명절이면 으레 만드를 빚어먹는 게 집안의 내력이며, 이제 만두 속만 다 준비되면 곧 '장정'에 돌입하게 된다(조촐한 식구이지만 보통 200-300개는 빚어야 한다). 그런 틈틈이 이런 페이퍼를 쓸 수 있는 건 지난 가을에 어머니댁에 컴퓨터(와 인터넷)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노릇이다.

 

다른 일들을 제쳐놓고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해 재작년 가을/겨울에 모스크바에서 써놓은 글을 다시 정리하려고 마음 먹은 것은 오늘이 도스토예프스키의 기일(忌日)이고 내일은 푸슈킨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구력의 경우인데, 도스토예프스키는 1881년 1월 28일에, 그리고 푸슈킨은 1837년 1월 29일에 (이틀 전에 입은 결투에서의 총상으로 인하여) 세상을 뜬다. 이걸 신력으로 환산하면 각각 2월 9일과 10일이 되며, 러시아에서의 기념행사는 이때에 맞추어 치러진다.

 

enlarge  

 

작년 이맘때 나는 모스크바 체류를 끝내고 귀국 준비에 마음이 바쁘던 차였는데, 맨마지막으로 띄운 모스크바통신에는 이런 대목이 포함돼 있다. (바로 며칠 전 1월 29일을 돌이키며) "그날은 구력으로 푸슈킨의 사망 168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푸슈킨은 1837 1 27일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이틀 후인 29일에 숨을 거둔다. 이걸 신력으로 환산하면 2 10일이 되는바, 이날엔 그가 죽은 집(현재는 박물관인, 페테르부르크의 모이카 12번지)에서 매년 기념행사가 치러진다." 위의 사진이 모이카 강변 12번지이며 왼편 출입문이 푸슈킨 박물관의 입구이다. 에르미타주박물관으로부터 도보로 15-20분 정도의 거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왼쪽 이미지는 푸슈킨 박물관. 마당에 그의 동상이 하나 서 있고, 이 2층짜리 건물이 시인의 마지막 저택이자 그가 숨을 거둔 곳이다(재작년 가을에 나는 이 마당까지만 들어가봤다. 둘러볼 당시엔 무슨 행사로 인하여 박물관은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문을 닫았었다). 그리고 오른쪽 이미지는 죽기 이틀전 그러니까 1837년 1월 27일 푸슈킨이 단테스와 결투한 장소. 아래는 그걸 수평으로 확대해서 보여주는 사진인데, 두 결투자가 서 있던 자리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 아래 이미지는 결투에서 푸슈킨을 쓰러뜨린 단테스기 사용했던 총(단테스는 프랑스군 장교 출신으로 네덜란드 공사 헥케른의 양자였다).

 

 

 

하지만, 당시 나로선 설 연휴 이전에 귀국을 결정했던바, 아쉽게도 이번 러시아 체류기간에는 그 행사를 참관할 수 없었다. "대신에 그날 나는 푸슈킨의 동상이 있는 푸슈킨거리의 푸슈킨광장에 가서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시인에게 바쳤다(겨울이라 그런지 장미 한 송이에 120루블, 4,800원이었다. 꽃과 초코렛 선물에서만큼은 아주 유별난 게 러시아 사람들이다. 하지만, 러시아식 예법에 따르자면 붉은 카네이션 두 송이 정도를 바쳤어야 했다). 우중충한 날씨만큼 침울한 표정으로 시인은 여전히 건너편 맥도널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돌아서는 마음이 좀 무거웠다." 아래의 사진이 바로 그 유명한 푸슈킨동상이다.

  

 

동상의 후면에 보이는 극장이 '러시아'극장으로 모스크바영화제의 개/폐막식이 개최되는 메인극장이다(재작년 여름에 유일한 한국영화 출품작 <귀여워>를 본 곳이기도 하다). 내가 동상을 마지막으로 보던 날은 좀더 어둡고 눈이 많이 내린 날이어서 단대의 계단이 미끄러워 단상에는 못 올라가고 눈덮인 계단에다 헌화했다. 참고로, 동상에 머리에 비죽 올라 있는 것은 비둘기나 갈가마귀 같은 새 종류이다(러시아의 회청색 동상들은 대개 이 새똥들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다). 이 푸슈킨 동상의 시선이 가리키는 방향에, 그러니까 대각선쪽에, 스크바에서 두번째로 매출이 좋다는 맥도널드가 있다(가장 매출이 좋다는 곳은 크레믈린에 있는 맥도널드).

 

모스크바의 이 푸슈킨 동상이 유명한 것은 시인의 사후에 최초로 건립된 동상이기 때문이다. 푸슈킨 사후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자는 제안이 선배시인이자 문학적 후견인이었던 주코프스키를 중심으로 해서 나오지만,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거절한다. 그리하여 최초의 푸슈킨 동상이 세워지는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880 6월에야 이르러서이다. 이 동상 단대에서 정면을 제외한 면에는 푸슈킨의 시 <기념비>(1836) 1-3연이 새겨져 있다(내 기억이 맞다면).  

 

 

 

 

 

그런데, 역시나 이 동상만 보고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동상 제막 기념연설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별로 의미없는 구경이 된다(이 연설의 우리말 번역은 <작가의 일기>(벽호)와 <러시아 이념>(제이엔씨, 2004)에 실려 있다. 동상제막식에 운집한 군중을 찍은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에서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당장은 큰 사이즈의 이미지가 눈에 띄지 않아서 작은 걸 옮겨놓았다. 마지막 이미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장례식). 

나는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자신의 기념비를 세웠노라,

그리로 가는 민중의 오솔길에는 잡초가 자랄 틈이 없고,

기념비는 알렉산드르의 기념탑보다도 더 높이

머리를 치켜들고 솟아올라 있다.

 

아니다, 나는 아주 죽지 않으리라 - 영혼은 신성한 리라 속에서

나의 유골보다도 더 오래 살아남아 썩지 않으리라

그리고 나는 영광을 얻으리라, 이 지상에

단 한명의 시인이라도 살아남아 있는 한.

 

나의 명성은 위대한 러시아 전역에 퍼져 가리라,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민족이 그들의 언어로 나를 부르리라,

자랑스러운 슬라브족의 자손과 핀족, 지금은 야만적인

퉁구스족, 그리고 초원의 친구인 칼미크족까지.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민중의 사랑을 받으리라,

내가 리라로 선량한 감정을 일깨우고,

이 가혹한 시대에 자유를 찬양하고,

쓰러진 자들에게 자비를 호소했으므로.

 

오 뮤즈여, 신의 뜻에 따르라,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왕관을 바라지 말 것이며,

칭찬과 비방을 무심하게 받아들이고,

어리석은 자들과는 다투지 말지어다.

 

Thumbnail of Dostoevsky's funeral

 

푸슈킨 주간으로 선포된 3일간의 기념행사 마지막 날에 행해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연설에서 푸슈킨은 다시 예언자적 시인으로 호명되고, 위대한 천재로서 셰익스피어, 괴테, 세르반테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니 전 세계적인 공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시인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들을 능가하는 시인으로 간주된다. 투르게네프를 비롯하여 여러 시인/문인들이 기념연설을 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연설은 군중들을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갔으며 이렇듯 열렬한 반응에 대해서는 정작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조차 감동할 정도였다(때문에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다시 푸슈킨의 <기념비>로 돌아오면, 전체 5연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시의 1연에 나오는 알렉산드르의 기념탑이 바로 궁정광장(현재 에르미타주박물관 광장)에 서 있는 거대한 화강암 원주이며(동생 니콜라이 1세가 형 알렉산드르 1세를 기념하기 위해서 1834년에 건립했다), 푸슈킨은 이 시에서 자신의 사후 문학적 영광이 황제의 그것을 능가할 거라고 자부하고 있다. 시에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기념비’란 인간의 손으로 만든 기념비(=황제의 기념탑)와 대조되는 것이다푸슈킨은 자신의 문학(행위)을 국가권력과 대응하게 맞세운 최초의 러시아 시인/작가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는 최초의 근대작가이자 최초의 망명작가이다.

 
이 시가 씌어진 곳도 아마도 모이카 강변 12번지인지 모르겠다. 푸슈킨이 생애의 마지막 1년을 살았던 곳이 바로 그곳인데, 모이카강은 네바강의 작은 지류이며(우리로 치면 청계천쯤 된다) 에르미타주에서 나와 모이카 강변을 따라서 10-15분쯤 걸어가면 지금은 박물관이 된 이 저택에 이르게 된다. 생애의 마지막 1년이라고 했지만, 그의 방 시계는 1837년 1월 29일 그가 사망한 시각인 2시 45분에 맞추어 멎어있다. 아래 사진은 푸슈킨의 서재. 

 

 

 

푸슈킨의 죽음은 당시 전 러시아의 국가적인 이슈가 되었는바, 기록에 따르면 그의 결투 소식이 전해진 직후 1837 1 28-29일에 그의 집 주변에는 대략 2-5만 명의 문상객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좁은 거리와 넓지 않은 마당을 보건대, 얼마나 대단한 인파였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푸슈킨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요주의 인물로 간주했던 당시의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문상 인파에 놀라서 장례식 장소조차 비밀리에 변경하고 그의 6만의 군대로 하여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었다. 한편으로 그는 황제의 주치의를 푸슈킨에게 보냈고, 당시에 불법이었던 결투에 대해서 사면하며 마지막으로 러시아 정교식의 죽음을 맞을 것을 시인에게 당부하는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가족을 보살펴주겠다고 약속도 했는데, 애꿎은 것은 시인의 아내 곤차로바를 황제가 은근히 좋아했었다는 점이다

 

 

아래의 두 이미지는 당대 절세의 미녀였다는, 시인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1812-1863). 왼쪽은 1831년의 초상화인데, 푸슈킨은 곤차로바와 1831년 2월 18일에 결혼했고, 슬하에 네 자녀를 두었다.곤차로바는 시인의 사후에 1844년 란스키 장군과 재혼했으며,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결혼식에 참석하여 곤차로바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로 하사했다고 한다...

 

분량상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는 자리를 바꿔서 이어가기로 하겠다...

 

06. 01. 28.

 

 

 

 

 

 

 

 

  

P.S. 푸슈킨과 곤차로바에 대한 읽을 만한 참고문헌은 한 일본작가가 쓴 <러시아의 사랑과 고뇌>(고려원, 1991)이다(체르니셰프스키 부부의 사랑 이야기도 읽을 만하다). 푸슈킨의 사생활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푸슈킨 비밀일기>(작가정신, 1997)도 흥미로운 자료이긴 하다. 대부분의 전공자들은 이 책을 위작으로 간주하지만, 푸슈킨의 돈후안적 기질과 젊은 시절의 연애행각(?)은 결혼 이후 그의 '성생활'에 대한 (위작일 경우) 이러한 '추정'을 아주 허무맹랑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는 연애시와 포르노그래피적 시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포르노적 이미지에 도용되는 것도 이유가 없지는 않은바, 최근에 발견한 오른쪽 이미지(*다운됐다)에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푸슈킨이라면 분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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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이전에 묵은 해의 일들을 마무리하기 위해, 아니 그냥 조금이라도 덜어보기 위해 학교에 나왔지만, 새로운 일거리들만을 더 확인하게 된다(이런 경우를 일컬어 혹 떼러왔다가 혹 붙이고 간다고 한다). 보관함에 들어 있는 책들이 중구난방이어서 무슨 '이야기'가 짜여질까 싶지만, 대략 권수도 채워진 듯해서 일단 비워내기로 한다.

가장 먼저 꼽을 책은 재작년 가을 우리의 곁을 '유령'처럼 떠나간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의 <목소리와 현상>(인간사랑, 2006).

 

출판사에서 국역본을 예고한 지는 10년도 더 된 듯한데, 그간에 역자가 바뀌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드디에 이번에 출간된 것(많지 않은 분량에 비한다면 이 '우여곡절'은 미스터리하다). 다행히도 해제와 역주 등을 보건대, 적임자의 번역인 듯하여 반갑다. 작년엔 나온 <정신에 대하여>에 이어서 제대로 된 데리다 번역서들이 출간되고 있는 건 고무적이다.   

 

 

 

 

'후설 현상학에서 기호 문제에 대한 입문'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목소리와 현상>은 1967년, 그러니까 팔팔한 37세의 나이에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글쓰기와 차이>와 함께 한꺼번에 쏟아낸 책으로 '현상학도' 데리다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다. 흔히 후설 현상학의 음성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책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데리다의 이후 저작에서 후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후설 연구자들로부터는 환영보다는 냉대와 반박의 대상이 되었던 책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국내 문헌으론 이남인 교수의 논문 '데리다의 후설 비판'이 있다. 참고로, 이 '비판'은 후설과 하이데거를 다룬 이남인 교수의 연구서 <현상학과 해석학>에는 들어 있지 않다. '비판'에서 인용된 문구인데, 후설주의자들은 데리다를 '가장 골수에 사무친 현상학의 적대자'라고까지 부른다.

 

 

 

 

한데, 국내에도 많은 '열렬한' 후설학도들이 왜 후설의 <논리연구> 같은 주저의 번역에는 게으름을 부리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나마 <이념들1>이나 <유럽학문의 위기>, <데카르트적 성찰> 같은 다른 주저들이 번역돼 있는 게 용하다고 해야 할까(하지만, 전공자들이 이들 번역서들을 인용하는 경우를 나는 거의 보지 못했다. 일반인들이 읽기엔 너무 어렵고, 전공자들은 '번역서'라고 해서 신뢰하지 않는다면 이런 '번역'의 의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무튼 데리다의 '전문서'를 읽기 위해서는 현상학에 대한 배경지식도 필요하다. 입문서로서 가장 포괄적이면서도 쉬운 책은 한전숙 교수의 <현상학>(민음사, 1996)인데, 이미 서점들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인 듯하다. 코켈만스의 <후설의 현상학>(청계, 2000)이 분량으로는 믿음을 주지만, 나로선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수 없다. 영어권 연구서 가운데는 라울러(Leonard Lawlor)가 쓴 <데리다와 후설: 현상학의 기본 문제(Derrida and Husserl : the basic problem of phenomenology)>(인디애나대학출판부, 2002)가 적당한 분량의 요긴한 참고문헌이다. 모셔두기만 했던 책인데, 이 참에 읽어봐야겠다.  

두번째 책은 1963년, 그러니까 <목소리와 현상>보다 4년 먼저 나온 실비아 플라스의 자전적 소설 <벨자>(문예출판사, 2006). 원제는 'The Bell Jar'. 기네스 펠트로우가 주연한 크리스틴 제프스 감독의 영화 <실비아>(2003) 덕분에 다시금 대중적 눈길을 끌기도 했던 실비아 플라스(1932-1963)는 20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이자 1963년 2월 11일 31살의 젊은 나이에 가스오븐에 머리를 처박고 자살함으로써 짧은 생애를 마친 비극적인 아내이고 두 아이의 엄마였다(가운데 흑백 사진이 실제의 실비아이고, 그 오른쪽은 펠트로우가 분한 실비아). 1956년에 영국의 (계관)시인 테드 휴즈와 결혼함으로써 가장 유명한 시인 커플이 됐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은 아니었고 아들 니콜라스가 태어난 해인 1962년 10월부터 남편과 별거에 들어간 후 창작에 몰입하기도 했지만, 끝내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했다(그녀가 여덟 살때 아버지 오토 플라스가 자살한 것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돼 있다). 


 

 

 

 

<벨자>는 이미 1981년에 고려원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사두진 않았지만, 서점에서 자주 보던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젊은 여성이 몰락하는 과정을 시적인 문체로 서술했다. 작가 자신의 자살 시도와 정신치료 경험을 토대로 씌어진 작품인 만큼, 작가와 주인공 에스더 그린우드의 삶에는 유사한 점이 많다"고. 그런 자전적인 흔적들을 엿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이 두툼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문예출판사, 2004)이다(한달쯤 전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놀랐었다! 역자와 출판사에 경의를 표한다). 한데, 시인의 소설이 나오는 마당에 정작 시인의 시집은 읽어볼 수 없다는 건 아이러니이다.

실비아의 첫 시집은 1960년에 출간된 <거상(The Colossus)>인데, 국역본은 <거상>(청하, 1990)이 나와 있었지만 절판됐다. 남편 테드 휴즈의 시집 <물방울에게 길을 묻다>(청하, 1986)는 같은 출판사의 '세계문제시인선집'의 첫권이었다. 이들 부부의 책으로 국내에 많이 나와 있는 건 시집이 아닌 동화책들이다(부부간의 불화는 극복할 수 없었지만, 아이들만은 사랑했던 듯하다).

그리고 내가 고른 실비아 플라스의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밝고 건강하다는 의미에서!). '해변의 실비아'?!

 

 

 

 

실비아 플라스의 짧은 생애는 한 개인의 삶이면서 동시에 시대적/사회적 한계 안에 놓여 있는 여성 일반의 삶으로 확대 해석되기도 한다. 이른바 페미니즘적 해석인데, 이미 여러 차례 번역본이 나온바 있지만 이번에 새로 나온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민음사, 2006)과 존 스튜어츠 밀의 <여성의 종속>(책세상, 2006)은 일독을 요하는 고전들이다. 전자에는 울프이 에세이 두 편이 묶였는데, 표제작인 '자기만의 방'과 그 후속편이라는 '3기니'가 그것이다.

잘 알려진 내용을 잠시 옮겨오면, "버지니아 울프는 묻는다. 왜 언제나 남성들만이 권력과 부와 명성을 가지는가. 여성은 아이들 말고는 가진 것이 없는데. 그리고 주장한다. 만약 여성이 자유의 문을 열 수 있는 두 가지 열쇠만 찾을 수 있다면 미래에는 여성 셰익스피어가 나올 수 있으리라. 그 두 개의 열쇠는 바로 고정적인 소득자기만의 방이다." 요즘은 ABC 같은 주장이지만, 하여간에 이 두 가지 조건은 여성의 자유를 위한 '필요조건'이다(문득 아빠가 '고정적인 소득'이 없어서 '자기만의 방'을 아직 못 갖고 있는 딸아이가 생각난다. 아이의 꿈이 '셰익스피어'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역시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삶에 대해서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2002)를 참조. 니콜 키드먼,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등 쟁쟁한 주연 여배우들이 단연 눈길을 끄는 영화(그런데 '디 아워스'가 뭔가? '더 차일드'와 마찬가지로 '의식박약'의 제목들이다. '세월'과 '아이'로 옮기면 덧나는가, 거덜나는가? 나처럼 성격이 무사태평인 쪽도 가끔은 짜증이 난다). 아래 스틸은 버지니아 울프 역을 연기한 니콜 키드먼.

그리고 <여성의 종속>.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혁신적인 주장을 담은 이 책은 20세기에 본격화된 여성해방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고전이면서, 자유, 효용, 인간 본성, 사회 등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고 있어 밀 사상의 종합판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밀은 양성 평등이나 여성 해방을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절대적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자유론>의 기조와 연관돼 있다. 또한 그는 여성을 억압에서 해방하는 것이 여성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강조해 사회적 합의를 구함으로써 여성해방의 당위성을 확립했다." 역시나 원론적인 ABC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울프나 밀이 이 '원론'의 정착에 지대한 공헌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고전이란 때로 표 안나는 책들이기도 하다(이미 '자연화'돼 있기에).

 

 

 

 

세번째 책은 1942년생으로 1966년에 문단에 등단한 독일 작가 페터 한트케의 기행문집 <세잔의 산을 찾아서>(아트북스, 2006)이다. 작년에 나온 신간 소설 <돈후안>에 이어서 소개되는 한트케의 책인데, 원저는 'Die Lehre Der Sainte-Victoire'(1980)이고, 부제는 '불멸의 산 생트빅투아르 기행'이다. 그림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미술 교과서에서 세잔이 즐겨 그린 '생트 빅투아르'산 그림을 본 기억마저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마지막 이미지는 세잔의 자화상). 아래 같은 그림 말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번 책은 "현대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페터 한트케가 세잔의 그림 속 풍경인 '생트빅투아르 산'을 찾아 나선 여정을 담은 책이다. 진정한 예술가의 모범이자 유일한 스승으로 여겼던 화가 폴 세잔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며,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되살렸다. 위대한 스승이 걸어간 예술의 길에서 자신이 추구해야 할 문학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도 함께 소개된다. 세잔은 메를로 퐁티, 릴케를 비롯해 20세기의 수많은 사상가와 시인,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화가이다. 파리에서 창작활동을 시작했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작업에 전념했다. 고향 프로방스의 풍경을 끊임없이 화폭에 담아가던 세잔이 말년에 집중적으로 그린 그림이 바로 '생트빅투아르 산'으로, 이 산을 소재로 한 그림이 수십 점에 이른다."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도 자신의 마지막 영화 <구름 저편에>(1995)에서 마스트로얀니와 잔느 모로가 등장하는 한 에피소드에서 세잔에 대한 오마주를 표하기도 했다. <세잔의 산을 찾아서>는 한트케의 오마주인 셈. "페터 한트케는 1978년 봄 파리에서 열린 세잔 특별전에서 접한 '팔짱을 낀 남자'에 큰 감명을 받고, 그의 예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양하게 변주된 '생트빅투아르 산' 연작을 본 뒤에는 직접 그 산을 찾기로 결심한다. 세잔이 자연 풍경을 고유의 시각으로 절묘하게 그려나간 것처럼, 페터 한트케는 자신의 시선에 와 닿은 심상을 탁월하게 표현한다. 일상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섬세한 시적 묘사로 압축되는 한트케의 글답게, 세잔의 산을 탐험하고 거장의 예술을 탐색하가는 여정이 정치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올해가 폴 세잔(1836-1906)의 사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므로 한번쯤 한트케의 여정에 동참해 보는 것도 의미있을 듯싶다.

이 인상파를 촉발한 것은 유럽의 지구 반대편인 일본의 그림이었다. 일본의 전통회화 ‘우키요에’가 서양으로 넘어가면서 인상파 화가들에게 색과 표현에서 새로운 영감을 줬고, 실제 인상파 화가들은 작품 속에 일본 우키요에를 그대로 소재로 등장시키기도 했을 만큼 이 동양의 그림에 빠져들었다. 우리로선 우리와 늘 비교하게 마련인 일본이 세계미술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 아직도 세계 문화의 변방인 우리의 현실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씁쓸한 대목일 수도 있다.

 

 

 

 

서구의 인상파가 일본의 전통 목판화 우키요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미술사적 사실이다. 우키요에라는 유형문화와 함께 무형문화로서 일본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공연예술 '가부키'에 대한 안내서가 네번째 책이다. 일본이 연구가 가와타케 도시오의 <가부키>(창해, 2006)이 그것인데, 원저는 '歌舞伎'(2001), 부제는 '서민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는 일본 미의식의 정화'이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무형문화유산이자 노, 분라쿠와 함께 일본 3대 전통연극에 속하는 '가부키'를 100여 편의 작품과 함께 담은 책이다. 가부키가 4세기에 걸쳐 어떠한 형태로 발전되어 왔는지를 약 80컷의 공연 사진을 곁들여 소개한다"는 것이 소개의 내용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가부키란 위와 같은 이미지들의 공연이다. 우리의 가까운 '이웃'이 몇 나라 되는 것도 아니므로 일본 전통문화에 대해서 좀 아는 체해두는 것도 좋겠다. 마침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일본사로 마이루스 잰슨의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2>(이산, 2006)도 출간되었으므로 '모듬'으로 읽어보면 좋겠다. 잰슨에 따르면, "1600년 이후 일본사에는 사회와 제도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세 번의 역사적 전기가 있었"는바, "첫째,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중앙집권적이면서 봉건적인 사회질서가 부여된 것, 둘째, 미국의 페리 제독의 내항과 함께 시작된 외부세계에 대한 문호개방, 셋째,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이다. 이 책은 이런 결정적인 국면에 특히 주목하면서 근대일본의 형성과정을 흥미진진하고 생생하게 재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인물들에 초점을 맞춘 역사서이니만큼 일반 독자들도 편하게 접근할 수 있겠다. 

 

 

 

 

일본 문화에 대한 책까지 소개했으니 '우리 것'을 건너뛸 수 없겠다. 조현설 교수의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한겨레신문사, 2006)를 끼워넣기로 하자(저자는 이미 이 방면으로 많은 저역서를 내고 있다).  한겨레에서 출간된 사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이 책은 2004년 11월부터 6개월한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라는 제목으로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글을 손질하고, 새 글을 보태 엮은 것이다." 새로운 해석들에 아울러 각 신화와 관련된 그림과 사진 자료를 풍부하게 실었다고 하니까 책으로도 읽어볼 만하다. 연재 당시 나는 열심히 읽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연재되던 정수일 교수의 <한국 속의 세계>(창비사, 2005)와 함께 기억해 두었던 글들이다. 한편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신화에 대한 이론적 저작으론 작년에 출간된 송효섭 교수의 <탈신화 시대의 신화들>(기파랑, 2005)을 기억해둘 만하겠다. 우리 시대에 '범람하는' 신화와 신화학에 대해서는 언젠가 따로 비판적인 리뷰를 쓰고 싶다.

 

 

 

 

우리의 신화와 대별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는 단연 박노자 교수의 신간 <당신들의 대한민국2>(한겨레신문사, 2006)이 있겠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젠 1권)이 처음 출간된 건 2001년 겨울이었다. 나는 대번에 그해말 '올해의 책'으로 꼽은 바 있다. 이후에 '박노자'란 이름은 우리 사회에서 더이상 낯선 이름이 아니다(그러니 이런 소개는 번거로우며, 사실 러시아계인 그는 이젠 '한국인'이다). 해서 연초부터 강준만과 함께 쾌조의 '비판'을 시작한 그에게서 들려올 '양심'의 목소리에 다시금 귀기울여볼 만하다. 2010년쯤 그의 비판은 어디쯤 가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06. 01. 27.

 

 

 

 

P.S. 다섯 권만 꼽다 보니 디아스포라와 번역 등에 관한 책 소개에 빠지게 되었다. 아마도 다른 자리에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대신에 언급해 둘 책은 오늘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니만큼 이를 기념하여 출간된 <1791, 모차르트의 마지막 나날>(엔북, 2006)에 대해서도 아는 체를 해두자. 생일을 기념하는 책으로는 좀 어울리지 않지만, 1791년 서른 다섯의 나이로 요절한 이 '천재'가 어떻게 죽었나 하는 내용.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당대부터도 온갖 수수께끼와 음모설이 난무했다고 하는데, 저자가 이를 얼마나 걷어내는지가 감상의 포인트겠다.

개인적으로 푸슈킨의 소비극 '모차르트와 살리에리'(1830)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데(작품은 국역본 전집 중 <보리스 고두노프>에 실려 있으며, 살리에리가 신의 불공정함을 탓하며 모차르트를 독살한다는 내용이다), 해외도서관에 복사신청을 했던 논문 한편을 오늘 도서관에서 인계받았다. 이런 서비스는 '무료'라서 '감동적'인데, 푸슈킨의 나라 러시아에서는 아직 어림도 없는 일이다(학술검색도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쨌든, 러시아의 천재 시인 푸슈킨을 경유하여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에 대해서 몇 마디 할 기회가 있을 것인바, 이것이 나대로의 '기념' 방식이 되겠다. 당신이라면 무얼 선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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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6-01-27 17:40   좋아요 0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뵙지요.
여러가지로 감사드립니다~~~

로쟈 2006-01-27 17:46   좋아요 0 | URL
예, 감사합니다. 두 분도 두루두루 건강하시고 복많이 받으시길. 제가 드리는 거라면 좋겠지만.^^

페일레스 2006-01-27 21:05   좋아요 0 | URL
새해 복 많이 받고 건강하십시오. 항상 좋은 책들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로쟈님은 '정리' 차원에서 쓰고 계시는 걸지도 모르지만요 ^^)

로쟈 2006-01-27 21:10   좋아요 0 | URL
일차적으론 '정리'이지만, '소개'의 뜻이 없지도 않습니다.^^ '실제적인' 도움을 드리는 건 아니니까 내세울 것도 없지만요...

사량 2006-01-28 01:26   좋아요 0 | URL
<디 아워스>가 <세월>로 옮겨지지 않은 까닭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가운데 <세월>(대흥, 1991)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The Years'라고 하네요.

로쟈 2006-01-28 11:15   좋아요 0 | URL
예, 기억납니다. 'The Years'를 'The Hours'로 다시 쓴 경우이죠. 제가 불만을 갖는 정관사를 포함한 (번역 아닌 번역) '디 아워스'가 뭐냐는 것이죠. 이전에 '레크리스(Reckless)' 같은 외화 제목이 '뭐냐?'고 핀잔을 받곤 했는데, 이젠 그런 문제의식마저 희박해지는 게 아닌가 싶은...

2006-01-28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1-28 12:00   좋아요 0 | URL
**님/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슬리퍼 2006-02-06 18:56   좋아요 0 | URL
책 선택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2007-02-05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오늘자 한국일보에는 언제나처럼 '객원논설위원' 고종석의 '시인공화국 풍경들'이 실렸는데(이 연재가 47회에 이른 만큼 이젠 책으로 묶어도 좋을 만한 분량이 되었다), 오늘은 김현승(金顯承, 1913~1975) 시인 편으로 세번째 시집 <견고한 고독>(관동출판사, 1968)을 다루고 있다. 김현승 시인의 호는 '다형(茶兄)'이다. 생전에 차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이 글은 커피를 마시면서 쓴다).

고종석의 글은 "김현승의 시세계는 예술과 철학의 경계에 걸터앉아 있다. 한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철학적이라 규정하거나 한 철학자의 정신세계를 예술적이라 판정하는 것이 반드시 상찬일 수는 없다. 이성의 규칙과 감각의 규칙은 자주 맞버티기 마련이어서, 그 둘을 한꺼번에 끌어안으려는 시도는 얼치기 예술이나 반편이 철학을 낳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탐미의 끝머리와 치지(致知)의 첫머리를 이어 거룩한 매듭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류사의 높다란 정신들이 늘 지향해온 이상이었다. 김현승은 그런 매듭 하나를 지었다."라는 문단으로 시작해서, "김현승이 목월보다 세 살 손위고 미당보다도 두 살 손위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의 시를 읽을 때, 독자들은 이 시인의, 특히 그 후기 작업의 첨예한 현대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김현승을 딱히 주지주의자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는 우리 시단에 드문, 진정 지적인 시인이었다."란 문단으로 마무리된다.

 

 

 

 

내가 새삼 놀란 건 다형이 미당보다 두 살 위라는 사실. 깊이 따져본 적은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같은 연배나 후배 시인으로 간주하고 있었는데, 그건 아마도 '경건한 고독의 세계'는 언제나 '토속적 탐미주의의 세계'보다 나중에, 혹은 그런 세계를 거쳐서 도달하게 되는 어떤 경지가 아닐까란 선입견 때문인 듯하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처음 만난 그의 시 '가을의 기도'의 마지막 대목에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라고 시인이 '기도'할 때, '마른 나뭇가지'가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보다 나중에, 말하자면 '뜨거운 피'의 세계 이후에 나오는 것처럼. 

해서 등단도 다형이 1934년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서 데뷔하였으므로 193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서 등단한 미당보다 2년 앞서지만, 어쩐지 더 '나중'이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어떤 사건이 스토리상으론 먼저 나오지만, 플롯상으로 나중에 배치되어야 하는 경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여하튼 그는 두 사람보다 연배가 좀 위이면서 미당과는 '생명파'로 같이 묶여서 불리던 청마 유치환(1908-1967)과 더불어 한국 현대시 정신사의 삼각형을 만든다면 그 한 꼭지점을 이룬다('바위'와 '구렁이'와 '까마귀').    

작년 11월에 시인의 서거 30주년을 맞이하여 <김현승 시전집>(민음사, 2005)이 출간되었지만, 이 고독한 '기독교 시인'은 시단과 평단의 주류적인 관심사 밖에 있었다(기억에 <김우창전집 3: 시인의 보석>의 표제가 김현승론에서 따온 것이다). 그것은 그가 미당이나 대여(김춘수)와는 달리 시의 '언어'보다는 시의 '이념'에 더 주안점을 두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기독교적인 성향의 시인들을 내켜하지 않은 터라 나도 지난 80년대 중반에 구할 수 있었던 김현승의 전집(시인사)을 제쳐두고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문학과비평사, 1989) 같은 시선집을 통해서 김현승과 대면했었다(아마도 군복무 시절이어쓴데, 그때 몇 자 적은 독후감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는 곧 덮어두었다(시인의 '고독'에 동참하기에는 아직 젊었을 때니까).

이어서 언젠가 교육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였던 것 같은데, 김현승의 시세계에 대한 프로그램을 보았고, 전남 광주 출신이었던 시인의 시비가 무등산에 세워져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동향의 후배 시인 황지우가 시비에 새겨진 시 '눈물'을 낭송하기도 했다(중학교 교과서엔가도 실려 있던 시. 박완서의 소설에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 있다).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져......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아름답고 눈물겨운 시이지만, '시'로서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건 '연(鉛)' 같은 시인데, '납 연'자이므로 그냥 '납'이라고 불러도 좋겠다(실제로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오래전에, 작고한 평론가 김현이 엮은 세계시선집 1권(한국현대시)으로 나온 <나는 내가 무겁다>(정우사, 1994)에 표제를 빌려준 시가 바로 '납'이었다. 그때 만난 이 시가 내게는 김현승의 대표작이다. 

나는 내가 항상 무겁다,
나같이 무거운 무게도 내게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무거워
나를 등에 지고 다닌다.
나는 나의 짐이다.

맑고 고요한 내 눈물을
밤이슬처럼 맺혀보아도,
눈물은 나를 떼어낸 조그만 납덩이가 되고 만다.

가장 맑고 아름다운
나의 시를 써보지만,
울리지 않는다. - 금과 은과 같이는

나를 만지는 네 손도 무거울 것이다.
나를 때리는 네 주먹도
시원치는 않을 것이다.
나의 음성
나의 눈빛

내 기침소리마저도
나를 무겁게 한다.

내 속에는 아마도
납덩이가 들어 있나부다,
나는 납을 삼켰나부다,
나는 내 영혼인 줄 알고 그만 납을
삼켜버렸나부다.

요즘은 중국산 꽃게, 대구, 복어, 병어 등에서 '친근하게' 발견되는 것이 납이지만, 시인에게 납은 '금'과 '은' 같이 되지 않는 시와 삶의 은유이다(나는 영혼에 대한 시들보다는 이 납에 대한 시들을 더 좋아한다). 하긴 예전보다 무거워진 나의 몸속에도 납덩어리가 몇 개쯤 들어앉아 있는지도 모를 일인바, "나는 내가 무거워/ 나를 등에 지고 다닌다./ 나는 나의 짐이다."라는 시인의 하소연이 남의 것일 수만은 없다. 사실 보다 일반론적으로 해서,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를 들어올릴 수 없는 만큼, "나같이 무거운 무게도 내게는 없을 것이다."라는 진술은 보편적 명제에 값한다. 그러니 시인의 고독은 딴은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견고한 고독'에서 '절대 고독'에 이르는 김현승의 시적 여정에 새삼 눈길을 주어볼 만한 이유이다. 


06. 0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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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01-27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신문을 항상 하루 늦게 보게 됩니다) 고종석씨 글을 읽고 김현승 시인 나이에 깜짝 놀랐는데, 여기서 또 로쟈님의 글을 읽게 되니 반갑습니다. 추천하고 갑니다.

로쟈 2006-01-27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생각을 하셨다니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