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관련 자료들을 검색하다가 그의 얼굴 사진들을 모아놓은 걸 발견했다. 나중에 자료로 쓰기 위해 여기에 옮겨놓는다. 톨스토이의 러시아명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928-1910), 흔히 '레프 톨스토이'이지만, 영어식으론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이다. 간혹 사전이나 번역서 등에 '레오 톨스토이'란 표기가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레프 톨스토이'라고 표기해주는 게 옳겠다. 사진이 찍힌 연대는 우측 하단에 씌어있다.

06. 02. 16.

P.S. 러시아어 표기와 관련하여 한마디. 푸슈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1830)은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초연은 1879년)로도 만들어져 잘 알려진 작품인데 영어명은 'eugene onegin'이어서 종종 '유진 오네긴'이라고 옮겨지기도 한다. 지난 1999년엔 영국의 여성감독 마사 파인즈에 의해 <오네긴>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국내에 출시돼 있으며 주연은 감독의 오빠인 랄프 파인즈가 맡았다. 타치야나 역은 리브 타일러). 아래 사진은 각각 오페라와 영화의 한 장면.

그보다는 좀 나은 표기가 '예게니 오네긴'인데, 'Evgenii Onegin'의 음역으로 부정확함에도 불구하고 (대개 음악 분야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것은 마땅찮다(지난주엔 <씨네21>에서도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을 소개하면서 <예프게니 오네긴>이라고 표기했다). 우리의 러시아어 표기는 보통 '무성음화'를 반영하기 때문에 어미에 오는 [v](즉, 무성음화되어 [f]로 발음되는 'Lev'에서 [v] 같은 경우)는 '브'가 아닌 '프'로 읽어준다. 하지만, 'Evgenii'의 경우 유성음인 [je]와 [g]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에 굳이 '프'로 발음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질 않는다(오히려 이런 조건에서는 [f]가 와도 [v]로 유성음화된다). 그러니, 앞으로는 '예게니'라고 침튀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냥 부드럽게 '예브게니'라고 불러주는 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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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2-16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지휘자 중에서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

같은 경우는 동호회에서 예프게니냐 예브게니냐 때문에 논쟁도 많았었죠.


로즈마리 2006-02-18 0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예브게니 오네긴이 오페라, 영화로도 있었군요. 예브게니 오네긴을 읽었던 것 같은데도 내용이 잘 생각 안나네요. 당시, 아 이런 식의 서사시도 대단하군, 하는 인상을 받았던 그 느낌만 생각 나네요. 역시 정리를 안 해서 그런가? ㅠㅠ 핫 오페라는 왠지 보고싶네요..^^

로쟈 2006-02-17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게닌'이 아니라 '오네긴'입니다. 그리고 '서사시'가 아니라 '운문소설'입니다.^^

로즈마리 2006-02-17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러네요. 그나저나 전 서사시로 생각했는데...그 둘의 차이가 궁금하네요. ㅋㅋ

로쟈 2006-02-17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그렇게 적었거든요.^^
 

워크샵 참석차 2박 3일간 지방에 다녀왔다. KTX를 타고 대구에 내려가 팔공산에서 1박하고 경주 보문단지에서 2박을 한 후에 다시 KTX를 타고 올라왔다. 대구는 처음 내려가보는 것이었고, 경주는 11년만이었다. 그래봐야 별로 구경한 것이 없는지라 들러본 자취조차 벌써 지워졌겠다. 

 

직접 제 발로 걸어보지 않은 여정이란 별로 의미가 없다. 보문단지의 경우도 4월의 벚꽃이 진해만큼 아름답다고 하는데, (물론 아직 이르긴 하지만) 그 눈부신 벚나무길을 걸어보지 않았으니 경주에 다녀왔다는 말도 삼가해야겠다. 그러니, 경주에 다녀왔지만 '생활'은 발견하지 못했다(다음엔 새마을호를 타봐야할까?). 그나마 우산을 챙겨가서 쫄딱 비를 맞지 않은 게 다행인 것인지?(어제 대구에는 비가 좀 내렸다.)

  

텍스트를 읽는 것 또한 그러하다. 직접 텍스트의 가로수길을 제 발로 걸어보지 않는다면, 그저 KTX식 다이제스트로 대신한다면,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읽었지만 읽은 것 같지 않은 책들'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목록에 포함되어야 한다. 나는 가급적 그 '슬프게 하는 것들'의 목록을 좀 줄여보고 싶다. 이런저런 텍스트들을 자세히 읽고자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이다('텍스트의 발견'이 없다면, 읽기는 얼마나 단조롭고 무의미한가!).

그런 생각과 맞물려서 마침 생각이 나서 여기에 옮겨오는 건 고진의 텍스트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에 대한 자세히 읽기이다. 2003년 1월에 쓴 것이니까 그 또한 벚꽃과는 인연이 없던 계절에 작성된 것이다.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먼지를 털어서 창고에 넣어둔다(나중에 좀 때깔을 내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읽기'에 부록으로 포함시킬 예정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과 관련하여 내가 갖고 있는 텍스트는 세가지이다. 첫째는 우리말 번역서 <유머로서의 유물론>(문화과학사, 2002)에 실린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E1이라고 부르겠다)이고, 둘째는 박유하 교수의 번역으로 <세계의문학>(94년 겨울호?)에 실린 '언어와 정치'(E2라고 부르겠다)이며, 셋째는 박 교수의 글을 쿤데라(소조)님이 교정해서 올린 카페(비평고원) 자료실의 '내셔널리즘과 에끄리뛰르'(E3라고 부르겠다)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에 실린 비평문들 가운데 내가 가장 관심있게 읽은 글이 바로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이다. 쿤데라님에 의하면, "이 글은 맨 처음 <비평공간> 92년 10월호에 발표되었다가, 93년 고진의 <유머로서의 유물론>이란 책에 실리게 된다. 그러다 이 논문을 수정 보완한 <내셔널리즘과 에크리뛰르>이란 논문으로 95년, <인문학 담론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재발표된다. 이때 이 논문에 대한 데리다의 서설이 유명하다."(데리다의 텍스트는 http://www.pum.umontreal.ca/revues/surfaces/vol5/derrida.html을 참조할 수 있다). 

고진이 데리다에게서 많은 시사를 얻었다는 이 글에서 고진은 거꾸로 데리다의 몇몇 논점을 비판하고 있고, 데리다 또한 그 비판이 부적절함에 대해서 반박하고 있기에 옆에서 지켜보기에 퍽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관전에 앞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은 문제의 텍스트를 확정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자리에 앉아서 '게임'을 관람할 것인가를 확정하고, 자리 정리라도 해두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일이 필요한 것은 세 텍스트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며, 부분적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오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에크리튀르'란 불어의 번역. 보통, 문자, 글말, 문어 등으로 번역되는데, E2에서 박교수는 '문장어'라는 말로도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적절한 번역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문장과 계열관계를 이루는 단어나 구, 문단 등을 떠올려 보라). 어쨌든 에크리튀르는 구어(입말)와 대비되어 쓰이고 있다. 고진의 첫 번째 논점은 음성중심주의가 서양의 경우에만 국한되지/한정되지 않는 문제라는 것이다(E1, 62쪽). 그런데, 이 논점은 좀 이상한 논점이다. 그것은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란 것이 서양 형이상학적 전통에 국한된다라는 전제에 대한 반박으로서 제기된 것일 텐데, 그러한 전제를 주장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자신이 한번도 그러한 주장을 한 적이 없음을 자신의 반박문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고진이 좀더 정확하게 말하려면, 데리다가 말하는 음성중심주의가 서양뿐만 아니라 (데리다가 미처 다루지 않은) 동양에서도 발견된다라고 해야 한다.

어쨌든 이 문제는 음성중심주의가 근대 내이션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는 고진의 두 번째 논점(사실 이것이 고진의 핵심적인 주장이자 우리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주제이다)과 함께 다음에 '메인-이벤트'를 다룰 때 다시 확인하기로 하고, 이 자리에서는 '텍스트 비판'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E1과 E2/E3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문단의 배열은 사뭇 다르다(비교하는 작업마저 어지러울 지경이다). 고진 자신이 원텍스트를 수정한 듯한데, E2/E3가 <비평공간>(1992년 10월)에 발표된 걸 번역한 것이라고 하니까 <유머로서의 유물론>(1993)에 실린 E1이 더 나중에 발표된 것이고, 따라서 수정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우리말 번역은 99년판을 옮긴 것이다(거기에 증보나 개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따라서 여기선 E1이 저자의 생각을 더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E1의 두 번째 대목(64쪽 이하)에서 고진은 데리다의 소쉬르 독해를 소개하고 그것의 불충분성 혹은 결함을 비판한다. E1의 역자는 differance(디페랑스)를 옮기지 않았고, E2에서는 그것을 '차연'이라, E3에서는 '차이'라 옮겼다. 물론 일반적인 역어는 '차연'이다. 고진의 논점은 데리다처럼 소쉬르를 형이상학 비판이라는 문맥에서만 읽을 필요는 없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소쉬르가 문자를 언어학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소쉬르가 문자를 언어학에서 배제한 것은, 그것이 음성보다 이차적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다. 문자가, 배제될 수 없을 정도로 음성 언어에 침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E1, 65쪽) "소쉬르가 문자를 언어학에서 배제시킨 것은, 문자가 음성에 비해 이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문자에, 배제할 수 없을 정도로 음성 언어가 침투되어 있기 때문이다."(E2, 108쪽/E3) 여기서 E1과 E2/E3의 내용이 상반되는데, 물론 E1이 논리적으로도, 그리고 문맥상으로도 맞는 말이다. E2의 경우 역자가 오역을 했거나, 아니면 그보다 가능성은 낮지만 고진 자신이 잘못 썼거나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제의 소쉬르 인용(내가 '문제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 대목을 확인하기 위해서 반나절 이상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세 텍스트 모두 <언어학 서설>에서 인용한 걸로 돼 있는데, 이건 전부 오역이다. 왜냐하면 고진이 인용하고 있는 텍스트는 소쉬르 <일반언어학 강의>이기 때문이다. 그걸 일본에서는 <언어학 서설>로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말로 <언어학 서설>로 번역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고진의 인용.

"언어와 문자. 이는 연대적인 듯이 생각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입말만이 언어학의 대상인 것이다. 언어학의 시간 속으로의 분류는 오직 언어가 받아 씌어지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문자의 중요성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실제로 그것들은 문명의 어떤 단계와, 언어활동의 사용상 어떤 완성도의 단계를 각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글말과 문자는 입말에 반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글말과 입말의 혼동은 초기에 셀 수 없을 정도의, 유치한 잘못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E1)

이 대목에서 E2/E3는 '입말'을 '구어'로 '글말'을 '문장어'로 번역한다.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문어(written language)/구어(spoken language)를 굳이 글말/입말로 번역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고('음성'이나 '문자' 같은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말이다), '문어'를 '문장어'로 번역한 것은 이미 지적했듯이 타당하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문제의 인용을 우리말 <일반언어학 강의>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 알다시피 <일반언어학 강의>는 소쉬르가 쓴 책이 아니라 그가 제네바 대학에서 세 차례 강의한 내용을 그의 제자들이 세 번째 강의를 중심으로 노트를 모아 편찬해낸 책이다. 그런데, E1에서 '<언어학 서설>1908-1909'라고 한 건, 1908-9년에 행해진 소쉬르의 두 번째 강의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말 <일반언어학 강의>(민음사, 1990)과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인용문의 핵심은 문어가 아닌 구어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우리말 번역은 "언어적 물체는 쓰여진 낱말과 발음된 낱말의 결합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후자 하나만으로써도 이 물체를 구성한다."(최승언 역, 35-6쪽)이다. 나는 밤중에 소쉬르 관련 책들을 쌓아놓고 뒤적이다가 이 대목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언어학의 대상'을 정말 황당하게도 '언어적 물체'라고 번역해놓고 있는 것이다! '숨어있는 오역찾기' 게임이 있다면 거의 골든벨 수준에 해당하는 오역이다.

90년 간행 이후에 여러 판을 찍은 책에서(요즘은 절판된 걸로 나오는데) 어떻게 이런 오역을 발견할 수 있을까? 처음엔 재미있었지만(!) 차츰 처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2006년판이 12월에 새로 나왔다. 오역들이 수정됐는지는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다). 요컨대, (나도 그랬지만) 우리말 번역 <일반언어학 강의>를 아무도 읽지 않은/않는 것이다! 지난주(2003년) 한겨레 책세상에선 김재기 교수가 <일반언어학 강의>를 권유하는 리뷰를 실은 바도 있지만, 이런 번역이라면 핵생들에게 권하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물론 딱 이 부분만 어처구니없는 오역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학 3학년만 돼도 이 정도의 오역은 하지 않는다.

어쨌든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반언어학 강의>의 옛날 번역판을 도서관에서 찾았다. 오원교 역(형설출판사, 1973)에서 이와 관련된 대목은 "언어와 문자법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기호 체계다. 후자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전자를 표기하는 일이다. 언어학의 대상은 쓰여진 낱말과 말해진 낱말의 결합인 것으로는 정의되지 않는다. 말해진 낱말만이 그것의 대상이다."(41쪽) 역시나 흡족한 번역은 아니지만, 최승언 역만큼의 오역은 아니다. 참고로 이 부분에 대한 바스킨(W. Baskin)의 영역은 이렇다: "Language and writing are two distinct systems of signs; the second exists for the sole purpose of representing the first. The linguistic object is not both the written and the spoken forms of words; the spoken forms alone constitute the object."

나는 이어서 혹시 두 번째 강의에 대한 번역은 없을까 하고 찾아봤는데, 다행히 도서관에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두 번째 강의, 1908-1909'에 관한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Eisuke Komatsu(예스케 고마츠?) 교토대 교수와 G. Wolf 교수가 편집한 불영 대역본이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강의의 발췌역이 작고한 김방한 교수의 <소쉬르>(민음사, 1998)에도 부록으로 실려 있다.

해당 부분에 대한 김교수의 번역은 이렇다: "언어의 위치를 정하고 분류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을까? 시간 속에서 언어의 분류가 가능한 것은 언어가 쓰여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문자의 중요성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초기의 언어학이 범한 그 수많은 유치한 과오는 쓰여진 언어와 말하는 언어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말하는 언어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206-7쪽)

이 인용부분은 불영대역본과 일치한다. 즉 고진이 인용한 부분과 비슷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만, 의아하게도 똑같지는 않다. 차이가 나는 부분은, "언어와 문자. 이는 연대적인 듯이 생각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것들은 문명의 어떤 단계와, 언어활동의 사용상 어떤 완성도의 단계를 각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글말과 문자는 입말에 반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부분들은 내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다. 글말과 문자의 입말에 대한 반작용 운운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리고 왜 불(영)어 원전에도 없는 내용이 일역본에는 들어가 있을까?

고진이 인용한 <일반언어학 강의>에 대해서 나로선 그 출처를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문제는 일단 미루어두기로 한다. 대신에 인용문을 쿤데라님이 다시 번역해 주셨는데, 조금 이해가 용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명료하게 이해되는 건 아니다. 쿤데라님의 번역: "언어와 문자. 이것은 흔히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때에 따라선 근본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구어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다. 통시적인 언어학적 분류는 언어가 쓰여지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자의 중요성을 완전히 부정해선 안 된다. 실제로 문자에는 문명의 단계와, 언어활동에서 있어 사용상 완성도 단계가 각인되어 있으며, 문어와 문자는 구어에 대해 반작용한다. 하지만, 문어과 구어의 혼동은 초기에 수많은 유치한 잘못의 원인이 되었다."

여기서 처음에 언어라고 번역된 건 불어의 '랑그'(=언어)일 것이다. 알다시피 소쉬르는 언어활동으로서의 랑가주를 랑그와 파롤로 구분하고 랑그만을 언어학의 대상으로 설정한다(랑그가 언어란 뜻이니까 언어가 언어학의 대상이라는 말은 아주 상식적이지만). 그런데, 사람들이 보통 언어라고 할 때 그것을 '쓰여진 말'과 동일시하는 바, 소쉬르는 거기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참고로 E2/E3의 경우 인용문의 '문장어' 옆의 원어 병기가 모두 잘못됐다. 'langue ecrite'를 E2는 'langue ercite'로 잘못 표기했고, E3는 'langue ereite'로 잘못 타이핑했다. 다시 읽어본 결과 E3는 E2의 '내이션'을 전부 '국민'으로 통일한 것과 각주가 미주로 돌려진 것 말고는 눈에 띄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이후엔 E1과 E2만을 비교하도록 하겠다.)

요컨대 랑그(언어)는 다시 문어와 구어로 나뉘는 바, 구어만이 언어학의 대상이라고 소쉬르는 확정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데리다는 소쉬르의 음성중심주의를 비판하며, 고진은 음성(중심)주의는 그런 식의 형이상학 비판이라는 문맥에서 벗어나 정치적인 문맥에서 이해할 때 보다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E1이나 E2 모두 영어로 'historical linguistics'에 해당하는 것을 '역사적 언어학'이라고 번역하는데, 내 생각엔 '역사언어학'이라고 옮겨야 한다('역사적 언어학'이란 말은 보지 못했다). 소쉬르가 공시언어학을 제창하면서 의식했던 것은 당시 언어학계를 풍미했던 '역사-비교 언어학'이고, 이러한 학풍(지금은 언어학의 한 분야가 됐지만)을 우리 언어학계에서는 관행적으로 '역사언어학'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와 같은 것을 일본(학계)에서는 '역사적 언어학(歷史的 言語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말이 나온 김에 E1 번역에서 이런 관점에서 불만스런 부분 몇 곳을 지적하기로 한다.

"따라서 이런 데이터 없이는 왜 민족지학자가 결코 재정(裁定)을 내릴 수 없었을까가 질문되고 있습니다."(E1, 68쪽)에서 '재정'이란 말은 (내 감각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 일본식 한자어이거나 일본어이다. 그것을 E2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민족지학자는 왜 이러한 자료 없이는 결코, 판단을 내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 의문시되고 있습니다."(120쪽)라고 하여 '재정'을 '판단'으로 옮겼는데, 우리말로는 훨씬 더 자연스럽다(E1에서는 '재정'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함'이라고 각주를 달았는데, 그렇게 거창하게/거추장스럽게 처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에서 E1은 "언어학자가 **어라고 동정(同定)하면"이라고 옮겼는데(이건 사실 실사는 놔두고 토씨만 옮기는 격이다), 이때의 '동정'은 한국어가 아니라 거의 100% 일본어이다. 그것은 마치 "언어학자가 **어라고 디파인(define)하면"이라고 옮기는 것과 같다(이런 게 독자를 우롱하는 일이란 걸 역자들은 알 필요가 있다). 다행히 E2에서는 "언어학자가 **어라고 규정하면"이라고 옮기고 있다.

하나만 더 예를 들자. E1에서 "나치스의 '제3제국'(아리아 인종에 의한 근대국가의 양기(揚棄) 출현으로 적중했던 것이다"(70쪽)라고 옮긴 부분. 제대로 교정도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인데, 원래대로라면 "나치스의 '제3제국'(아리아 인종에 의한 근대국가의 양기(揚棄))의 출현으로 적중했던 것이다"일 것이다. 여기서도 문제는 '양기'라는 일본어이다. 떨칠 양(揚)에다 버릴 기(棄)자를 쓴 걸로 미루어 짐작할 도리밖에 없는데, E2의 역자는 그것을 지양(止揚)이라고 제대로 옮겼다: "나치의 '제3제국'(아리아 인종에 의한 근대국가의 지양)에서 적중한 것이다."(122쪽) 지양은 물론 헤겔의 개념인데, 그것을 일어로는 '양기'라고 옮기는 모양이다.

여하튼 이런 몇 가지 사례를 놓고 볼 때, E1의 역자의 일어실력이란 게 신뢰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덧붙여 불만스러운 것은 각주 문제. E1의 경우 각주가 원주인지 역주인지가 밝혀져 있지 않고(모두 역주인가?), E2에는 붙어 있는 원주가 빠져 있다(고진이 뺀 것인가?).

다시 원래의 문맥으로 돌아와서, 고진이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글은 소쉬르의 <제네바 대학 취임강연>이다. 이걸 E1의 역자는 '쥬네브 대학'이라고 옮겼다. 사실 국내의 소쉬르 학자들도 불어인 '쥬네브'(혹은 주네브)라고 옮기는 수가 많은데, (무)의식적으로 티내는 치레에 불과해 보인다. 프랑스 파리를 영어식으로 '패리스'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E1에는 내용이 빠져 있지만(66쪽의 각주로 처리돼 있다), 이 강의는 E2에 의하면 마에다 히데키(前田秀樹)가 번역/주석한 것이다(마에다의 저작은 <침묵하는 소쉬르>이다).

 

 

 

 

일단 감탄스러운 건,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일본의 소쉬르학 수준이고(이 취임강연을 도서관 등지에서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궁금한 건 고진의 소쉬르론이 얼만큼 독창적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즉 그가 일본의 소쉬르학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 내가 알기에, 그리고 내가 읽은 소쉬르 입문서 등에서 소쉬르 언어학에 관한 정치적 해석은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대개는 기호학의 창시자로서의 소쉬르 조명으로 채워져 있다). 여담이지만, 최근엔 동경대 시리즈 <지의 논리>(경당, 1996)에서 소쉬르와 동시대 화가 파울 클레를 비교하는 글을 읽었는데, 역시나 계발적이었다(덕분에 클레의 책들을 사고 있다!). 일본 지식인들이 구조주의, 포스트 구조주의에 강한 면모를 보이는 것은 다 그런 베이스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고진은 그 취임강연을 근거로 소쉬르의 음성주의를 마치 <라쇼몽>에서처럼 상식과는 다르게 재구성한다. 그 주요 내용을 발췌하면 이렇다. "역사언어학에서는 문화=문명과 음성언어가 동일시되고 있다. 다시 말해 거기에서는 외적인 것의 우연적인 소산(이것도 '산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이 마치 '내적'인 연속성인 것처럼 상정된다. 언어학은 언어 외적인 것, 또는 '외적 언어학'의 결과를 언어의 법칙으로 취급해 왔다... 따라서 소쉬르가 '내적 언어학'에 구애되는(E2는 '천착하는'으로 옮겼다) 것은 '외적'인 것을 무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적'인 것의 소산을 내면화하고 있는 언어학을 비판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소쉬르가 언어학의 대상을 어디까지든 음성언어에 한정하는 것은, 그가 음성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언어학이 지닌 음성중심주의의 기만을 폭로하기 위해서이다."(E1, 66-67쪽/ E2, 110-1쪽)



소쉬르가 보기에 문자화된 음성("역사언어학자가 말하는 음성은 이미 문자이다"), 즉 에크리튀르의 외부성으로서의 음성은 "넓은 의미의 정치적 제관계"를 의미하며, 소쉬르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그러한 정치성을 내면화시킴으로써 (마치 없는 것처럼) 소거해버리는/소멸시켜버리는 언어학이다. 그렇다면, 소쉬르를 음성(중성)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데리다의 태도는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물론 데리다는 이에 대해 변호한다). 고진이 보기에 (흔히 내적 언어학이라 불리는) 소쉬르의 언어학이야말로 대단히 정치적이며("역사언어학에 대한 소쉬르의 비판에는, 분명히 역사언어학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대한 비판이 있다." 70쪽), 소쉬르야말로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자인 것이다...

06.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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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6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2-1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농담도.^^

paby 2006-02-16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말"과 "입말"은 (한자어를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어", "문어"가 좋지 않은 번역이라고 생각해서 선택한 번역어들이 아닐까 싶군요. "구어"와 "문어"는 대부분의 경우 표현상의 차이를 나타내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음성언어냐 문자언어냐를 구별해서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요. 그래서 구어로 쓰여진 소설이 있을 수 있고, 문어로 이야기하는 (좀 이상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요. 역자는 아마도, "글말"과 "입말"은 잘 사용되지 않는 말들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러한 오해의 소지가 적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군요. (*그리고 "문장어"는 혹시 "문자어"의 오타가 아니었을까요?)

곰집 2006-02-16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일한 텍스트를 읽는 다양한 방법을 로쟈님을 통해 "실제로" 그 흐름을 확인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로쟈 2006-02-17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by님/ '동정'이나 '양기' 같은 일어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역자가 '입말'/'글말'에 대해서 그렇게 고심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문장어'는 반복해서 쓰고 있는 걸로 보아 오타 같지는 않지만, 현재 텍스트를 갖고 있지 않아 확인이 어렵습니다...

earthmt 2020-02-16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isuke Komatsu(예스케 고마츠?), 는 小松英輔(현행 일본어 표기법에 따르면, 고마쓰 에이스케)인 듯합니다.
http://webcatplus.nii.ac.jp/webcatplus/details/creator/2532467.html
 

레비나스와 필립 네모와의 대담을 엮은 <윤리와 무한>(다산글방, 2000)은 리처드 커니와의 대담과 함께 레비나스 입문으로서 가장 평이하면서도 알찬 내용을 담고 있다(대담의 밀도를 기준으로 하자면 커니와 대담을 권하겠다. 대신에 네모와의 대담은 편안하다). 무엇보다도 레비나스 자신의 육성을 통해서 그의 삶과 철학에 관해 들어볼 수 있다는 것이 이 대담들의 최대 강점이다.

<윤리와 무한>은 분량도 150여쪽에 불과하기에(영역본의 경우엔 120여쪽) 조금 과장하자면 '30분에 읽는 레비나스'로 부족함이 없다. 역자 또한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으니 '동문'이라 할 수 있다. 몇 군데 생각이 다른 부분들이 있지만 번역의 가독성 또한 좋은 편이다. 

리투아니아 태생의 레비나스가 제대로 된 철학에 입문하게 되는 것은 스트라스부르대학에 입학하고서부터이다. 이전에 그가 읽은 것은 성경과 탈무드, 그리고 주로 러시아 문호들의 작품들이었다. "18세 때 거기서 네 분의 교수님을 만났다. 그분들 이름은 샤를르 블롱델, 모리스 알바하, 모리스 프라딘느, 그리고 앙리 카트롱이다. 그분들은 내 머리 속에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권위로 자리잡았다. 아, 나의 스승들!"(30쪽)  

그가 대학에 들어간 건 1923년이다(<존재에서 존재자로>에 실린 연보를 보니 스트라스부르로 건너간 게 1923년이고, 실제 대학에 들어간 건 1926년이다. 그리고 1930년에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는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이 네 분 선생님을 통해 위대한 지성의 맛을 보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그리고 칸트 등을 배우기 시작한다. 당시에 프랑스에선 아직 헤겔이 진지하게 읽히지 않았으며(소위 '3H'의 시대는 30년대로 넘어가야 한다), 스트라스부르에서는 뒤르켐과 베르그송이 영웅이었다. 레비나스는 특히 베르그송의 철학은 높이 평가한다.

"베르그송의 사상이 없었더라면 하이데거가 '현존재(Dasein)'의 유한한 시간성을 생각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베르그송의 시간개념과 하이데거의 시간개념이 사뭇 다르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전까지만 해도 모두 과학에서 말하는 시간을 추종했는데, 철학을 거기서 해방시킨 것은 분명 베르그송의 공헌이다."(33쪽) 베르그송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커니와의 대담에서도 읽을 수 있다. 특히 레비나스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베르그송의 시간론이다.

하지만, 그가 '철학함'을 배우게 되는 것은 후설로부터이다. 그는 후설에게서 "적절하면서도 정당하게 물음을 묻고 건너뛰지 않고 치밀하게 철학한다는 느낌"을 받으며 매력을 느낀다. 우연한 기회가 나중에 <데카르트의 성찰>(1931)을 공역하게 되는 동료 가브리엘 파이퍼로부터(파이퍼는 후설에 대한 학위논문을 준비중이었다) <논리연구>를 추천받아 읽으며 현상학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1928-9년에, 그러니까 그의 나이 23살에 후설이 있는 독일 프라이부르크로 유학을 떠난다. 그가 머문 것은 1년 남짓이지만, 그는 거기서 막 은퇴한 후설의 강의를 듣고, (후설의 제자이자 후임) 젊은 철학교수 하이데거와 조우하게 된다.

이 시기에 레비나스에게 결정적이었던 것은 막 출간된 세기의 저작 <존재와 시간>(1927)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존재와 시간>을 발견했던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몇이서 그 책을 읽었다. 읽으면서 나는 일찌감치 이 책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철학사에 빛나는 몇 권의 책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리라. 나는 몇 년후에 그런 평가를 내렸다. 아마 가장 훌륭한 책 네 권이나 다섯 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게다."(43쪽) 그 네댓 권이 어떤 책들이냐는 네모의 질문에 레비나스가 꼽아주는 철학사의 걸작들은 아래의 다섯 권이다: <파이돈>(플라톤), <순수이성비판>(칸트), <정신현상학>(헤겔),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베르그송), <존재와 시간>(하이데거).  

 

 

 

 

특히 레비나스에게서 하이데거의 성취는 결정적인데, 그것은 순전히 <존재와 시간> 때문이다: "내가 하이데거를 높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존재와 시간>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다. 나는 그 책을 읽을 때의 감격을 자꾸 되새기곤 한다. 당시는 아직 1933년의 사건을 생각할 수 없을 때였다."(44쪽) 1933년은 하이데거가 나치와 불미스런 연루관계를 맺게 되는 때이다.

사실, 레비나스의 철학 전체는 하이데거와의 철학적 대결이란 문맥에서 읽힌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 이후'에 서양철학이 '하이데거 이전'으로 후퇴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동시에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그래도 수용할 수도 없었다. '존재자에서 존재로'라는 하이데거의 '존재사유' 혹은 '하이데거적 전회'가 없었다면, '존재에서 존재자로'라는 레비나스의 문제의식, 혹은 '레비나스적 전회' 또한 사유될 수 없었거나 적극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레비나스의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그의 주저 <전체성과 무한>의 '서론'으로도 읽힌다. 한데, 국역본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외양과는 다르게 충분히 신뢰할 만하지 않다. 기이한 일이다).

"<존재와 시간>은 존재론의 모범이 되었다. 유한, 현존재, 죽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개념정리는 여전히 중요하다.(...) 내가 <존재와 시간>에 보내는 찬사가 하이데거 추종자들에게는 시시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나중 작품들은 <존재와 시간>을 통해서만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사실 후기 작품들을 볼 때 <존재와 시간>만큼 큰 인상을 받지 못했다. 잘 알겠지만 그것들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훨씬 설득력이 약하다."(48-9쪽)  

 

 

 

 

그러므로 레비나스를 읽으려면 <존재와 시간>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그런 게 또한 '철학수업' 아니겠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다행히도 우리에겐 두 권의 정역본 <존재와 시간> 외에도 가장 최근에 나온 이기상 교수의 해설서 <존재와 시간>(살림, 2006)에 이르기까지 몇 권의 입문서가 있다. <전체성과 무한> 같은 레비나스의 주저가 소개되기 전까지 우리는 이런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때우고, 자리를 데우는 게 좋겠다. 서양철학사의 1/5을 읽는다는 기분으로 읽는다면 또 못 읽을 것도 없지 않겠는가?(그리고 경험상 하이데거는 칸트와 헤겔에 비하면 훨씬 재미있으며 읽기 편하다. 단, 반드시 칸트나 헤겔하고만 비교해야 한다!)

06. 02. 13.

P.S. '수업'이 끝났으므로 며칠 '바람'이나 쐬러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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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2-13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진진...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6-02-19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이리스 2006-02-20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탐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주제넘게 <존재와 시간>을 보관함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냥, 넣어두었다는 것만 기억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_-;;

로쟈 2006-02-22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넣는 것까지는 아직 '탐욕'이 아닌 듯한데요.^^
 

레비나스에 관한 글들을 띄우는 김에 러시아어본 레비나스도 잠깐 소개해둔다. 실상은 재작년 5월 모스크바 통신에 띄운 글에 포함돼 있는 내용인데, 당시 서점에서 새로 나온 <레비나스 선집>(2004)을 반가운 마음에 사들였던 추억을 담고 있다. 아래 사진의 왼쪽이 헌책방에서 구한 <레비나스 선집: 전체성과 무한>이고, 오른쪽이 신간이었던 <레비나스 선집: 어려운 자유>이다.

Э. Левинас Эмманюэль Левинас. Избранное.Тотальность и бесконечноеЛевинас Э. Избранное: Трудная свобода (сост. Левит С.Я.; пер. с фр. Вдовиной Г.В., Маньковской Н.Б., Ямпольской А.В.)

지난주(*2004년 5월)에 나온 신간 가운데, 가장 반가웠던 것은 <레비나스 선집>이었다. 역시 <크리스테바 선집>과 같은 ‘세상의 책’ 시리즈로 나온 최신간(이 시리즈에는 그밖에도 불트만, 아롱, 라크루아, 플레스너 등이 들어가 있다)인데, 로스펜출판사에서 내는 이 시리즈는 러시아와 부다페스트(헝가리)의 <열린사회연구소>에서 기획하는 ‘번역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간되고 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돈줄은 소로스 펀드이다.

 

 

 

 

아마도 전세계적으로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펀드 매니저인 소로스는 헝가리 태생이고, (‘열린사회’란 말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칼 포퍼의 제자로도 유명하다. 요컨대, 그는 ‘열린사회’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가끔 계란 세례를 받기도 하지만). 그 ‘실천’의 방식이 ‘세상의 책’들을 번역/출간하는 데 있다는 점은 음미해 볼 만하다. 덧붙여, 소로스의 바람대로, 이번 미 대선에서 부시가 (제발) 낙선해서, ‘군사 민주주의’(촘스키) 국가인 미국도 어서 빨리 ‘열린사회’의 대열에 동참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물론 소로스의 기대에 어긋나게도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다).

어쨌든 소로스 펀드의 도움으로 나온 <레비나스 선집>의 제목은 ‘어려운 자유’이고, 전체 752쪽이다(1,500부 발행).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서점 <이데아>의 주인장 말에 따르면(사실 그는 몇 년 전에 뭐가 나온 게 있다고만 했다), 러시아에서 최초로 번역된 레비나스의 책은 2000년에 나온 <전체성과 무한>이다(*나중에 헌책방에서 구했다). 그리고 이번이 두번째인 듯한데, 모두 4권의 책이 한꺼번에 번역돼 나왔다(*<전체성과 무한>에는 5권이 번역돼 있다. 해서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 레비나스'는 모두 아홉 작품이다).

그 4권이란, <후설 현상학에서 직관이론(Theorie de l’intuition dans la phenonelogie de Husserl)>(1963), <후설과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를 발견하며(En decouvrant l’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1947/67), <어려운 자유(Difficile liberte)>(1963), 그리고, <타인의 휴머니즘(Humanisme de l’autre homme)>(1972)이다(번역서명은 강영안 교수의 표기를 따른다). 이 네 편의 번역 외에도 <글쓰기와 차이>에 실려 있는 데리다의 레비나스론 후반부가 번역돼 있고,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개념풀이가 부록으로 붙어 있다. 전체 번역은 두 사람이 했는데, 그 중 3편을 번역한 I. S. 보비나(Vovina) 여사가 레비나스 전문가로 보인다.

레비나스의 책으로 국내에 번역된 것은 <시간과 타자>, <존재에서 존재자로> 정도일 텐데(소로스의 ‘번역’ 펀드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이런 책들이 한꺼번에 번역되기는 아마도 힘들 것이다), 앞으로 사정이 얼마나 나아질지는 의문이다(*원전 번역에 관해서라면, 아직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앞의 책 4권 가운데, 내가 본 영역본은 <후설 현상학에서 직관이론> 한 권뿐이었는데, 그쪽도 사정이 달라졌는지 모르겠다(*지금은 거의 다 번역돼 있는 듯하다) . 물론 러시아에서의 인문서 번역 현황이 모두 레비나스 수준인 것은 아니다. 대형서점의 ‘철학’ 코너에 가보면, 클래식전집이라고 나온 걸 빼고, 외국철학자, 특히 현대철학자들의 책을 구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너네도 거장이 나오긴 틀렸구나!”라는 게 혼자 생각이었다. 물론, 사유의 거장들이 없더라도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므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더 많은 번역서들이 나와야 한다는 당위의 가치는 유보될 수 없다. 적어도, 번역은 소통과 나눔에의 의지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이야말로 ‘프로메테우스의 일’이다. 그것이 유익할 뿐만 아니라, 간혹 아름답고 숭고한 것은 그 때문 아닌가?

어쨌든 부피만으로도 ‘숭고한’ <레비나스 선집>의 가격은 240루블이었다(9,600원). 얼마전 국내에서 새로 나온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가 35,000원이던데, 할인가격을 고려하더라도 1/3이 안되는 가격이다. 하지만, 가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번역의 질이다. 내가 러시아아어본의 <그라마톨로지>를 아무런 주저없이 집어든 것처럼, 외국의 한국학 전공자가 우리말 <그라마톨로지>를 집어들 수 있을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해서 (1)더 많이 번역되어야 한다는 원칙에다가 (2)믿을 만하게 번역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반드시 추가해야 한다. 유사-프로메테우스들에 대한 주의가 요망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신이여, 이들의 간을 쪼아주소서!).

06. 02. 13.

Эммануэль Левинас Время и другой. Гуманизм другого человекаЭмманюэль Левинас: Путь к Другому

P.S. 러시아어본들에서 레비나스의 생년은 구력에 따라 (1906년이 아니라) 1905년으로 기재돼 있다.(*'러시아어 레비나스'는 몇 권 더 있다. 왼쪽이 <시간과 타자> 등을 묶은 선집이고, 오른쪽은 연구논문들까지 같이 묶은 <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로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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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02-14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로쟈님의 마지막 말씀 '신이여, 이들의 간을 쪼아주소서!'를 저도 되풀이하고 싶군요.
 
레비나스
베른하르트 타우렉 지음, 변순용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저자 베른하트르 타우렉은 독일 대학의 교수인데, 이 책과 함께 니체, 푸코, 셰익스피어 입문서와과 철학 입문서들을 갖고 있는 것으로 돼 있다. 역자도 이에 착안하여 레비나스에 관한 '적절한 입문서'로서 이 '불어로 저술하는 철학자에 대한 독어로 된 입문서'를 옮기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수고는 별로 빛이 나지 않는다. 역자의 말대로 "입문서라는 것은 입문서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더구나 번역마저 신뢰감을 주지 못할 경우에 독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레비나스 연보에서부터 그가 태어난 나라 '리투아니아'를 독어식으로 '리타우엔(Litauen)'이라고 표기할 때(277쪽) 나는 이 번역서에 별로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래서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을 <데카르트적 명상>이라 옮겼을 때도 그러려니 했지만, 그마저도 <데카르트주의적 명상>과 혼용될 때는 좀 짜증스러웠다.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누스'를 '플로틴(Plotin)'이라 옮길 때도 철학계에선 그렇게도 쓰나? 란 의구심을 가져지만, '로젠츠바이크'를 '로젠쯔바익(Rosenzweig)'으로 표기하는 특이한 취향을 지나서 (프랑스 시인도 아니고) 독일 시인 '파울 첼란'을 '쓸랑(Paul Celan)'(140쪽)이라고 옮길 때에는 당혹감을 넘어서 '낭패감'을 갖게 되었다(그나마 별 기대를 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니 '데리다의 근본적인 반대리주의(反代理主義)'(128쪽)란 표현이 나오는 건('반표상주의'나 '반재현주의'가 아니라) 어찌해볼 도리가 없겠다. 레비나스의 타자론을 빌자면, 독자가 역자에게서 '타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역자 또한 독자에게는 '타자'라는 걸 확인하는 수밖에. 한데, 중요한 건 이 타자에 대한 '책임' 아닌가? 레비나스 철학 혹은 윤리학의 알파요, 오메가인 그 책임!

역자가 레비나스를 접하게 된 계기 또한 그 책임의 문제였다고 하는바, "그의 책임론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책임"까지도 추궁한다. 레비나스의 말을 빌면, 그것은 "나의 모든 자유보다 선행하는 타자의 자유에 대한 책임이다."(14쪽) 그러니 이 책 <레비나스>에서만큼은 역자의 책임은 '무한'이겠지만, 나는 역자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묻고 싶지는 않다. 애당초 별로 재미없는 책을 쓴 저자에게도 책임의 일부는 돌려져야 할 것이기에(이 책과 비교한다면, 콜린 데이비스의 또다른 '입문서'가 얼마나 훌륭한지 알 수 있다).   

원전이 독어본인지라 미심쩍은 대목들을 대조해볼 수가 없었지만, 영어 연구서에서 저자가 인용하는 대목은 예외였다. <해체론과 실용주의>란 책에 실린 로티의 말을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대목이다(이 대목은 독어역을 다시 우리말로 옮겼을 테니 중역이겠다). "나는 레비나스의 타자가 하이데거의 존재보다 결코 도움된다고 보지 않는다 - 이 두 가지는 내게 단순하게, 좌익으로서, 그리고 계몽적인 이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189쪽) 

각주에 있는 원서의 쪽수를 찾아갔더니 이 대목은 "I don't find Levinas's Other any more useful than Heidegger's Being - both strike me as gawky, awkward, and unenlightening ."('Deconstruction and Pragmatism', 41쪽)을 옮긴 것이다. '계몽적인 이득이 없는'은 그렇다고 해도 '단순하게, 좌익으로서'란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신실용주의자' 로티다운 의견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 대목은 "나는 레비나스의 '타자(Other)'가 하이데거의 '존재(Being)'보다 뭐가 나은 건지 알 수가 없다. 타자존재나 둘다 내게는 멍청하고 어색하며 몽매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다.

자질구레하게 이런 대목들을 더 지적하는 것은 내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건 '단순하게, 좌익으로서, 그리고 계몽적인 이득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시급하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전히 '계몽'이며, '타자의 독서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만은 확인해두도록 하자. 역자가 부록으로 실은 논문들(68쪽으로 번역 본문 분량의 1/3이 넘는다! 이 분량은 책값과 무관한가?)에 쏟아부은 정성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정확한 번역과 교정에 할애했더라면 책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이런 책과는 달리 혹은 이런 책의 저편에서' 신뢰할 만한 모양새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역자로서도 변명의 여지는 있겠다. "그의 철학은 느껴야 한다. 그 느낌은 언어로 다 표현될 수 없다."(15쪽)고 하니까. 해서 덧붙이자면, 레비나스 입문에 더 좋은 것은 이런 '입문서'들을 읽는 게 아니라, 그리고 이렇게 '책' 따위를 놓고 투덜거리는 게 아니라, 선량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레비나스의 얼굴을 보면서, '타자에 대한 책임'을 조용히 묵상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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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krad 2006-02-17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읽으면서 답답했던 생각이 납니다.^^

로쟈 2006-02-19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입문서로는 부적합해 보입니다. 레비나스 이해의 관건이 되는 하이데거에 대한 설명도 너무 부족하고...

사량 2006-02-26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파울 첼란의 경우, 이 사람이 훗날 파리에서 활동했다는 사실 때문에 프랑스인으로 간주되는 일이 종종 있는 것 같아요. 하이데거 전문가인 박찬국 교수의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동녘, 2004)의 앞부분에는 "프랑스의 시인 폴 셀랑(Paul Celan)"이라는 무시무시한-_- 말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로쟈 2006-02-26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대로, '무시무시한 말'이군요. 첼란이 불어로도 시를 썼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한번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찾아보니까, 1951년에 프랑스로 귀화했군요. 한데, 프랑스어 시집은 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로 독어시집이고 루마니아어 시집이 한 권 있는 것 같네요.

김한솔 2021-12-31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는 서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