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 - 타자를 향한 욕망>(다산글방, 2001)은 최적의 레비나스 입문서이자 내가 좋아하는 책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책은 Colin Davis의 원저 'Levinas: An Introduction'(Polity Press, 1996)이다. 레비나스에 관한 이런저런 책들을 나는 20여 권 이상 갖고 있는 듯한데, 데이비스의 책은 드물게도 내가 완독한 거의 유일한 책이고, 당연한 일이지만 레비나스에 대한 나의 이해의 절반 이상은 이 책의 완독에 힘입은 것이다(나머지는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와 여러 한국어 논문들이 채워주고 있다).

그때가 1999년 1월이었고 나는 160쪽 정도의 이 원서를 일주일 정도 걸려서 아주 '맛있게' 읽었던 듯하다. 하니, 이 책의 국역본 출간은 나로선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책은 바로 사지 않았었는데, 그건 굳이 다시 읽을 필요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몇 년 뒤에서야 국역본을 구입한 건 순전히 '레비나스 컬렉션'을 위해서였다. 이번에 다시금 이 책을 읽고 있는데(나는 '현상학'에 관한 1장을 읽었다) 여전히 만족스러우며 (과문한 탓이긴 하지만) 이만한 분량에 이보다 더 좋은 입문서는 없어 보인다. 단, 국역본은 가독성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드문드문 오역을 포함하고 있어서 다소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나는 다른 독자들에게도 이 책이 유익한 입문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내가 오역이라고 보는 부분들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견해를 보태고자 한다. 그러니까 약간의 때를 벗겨냄으로써 충분히 '재활용' 혹은 '인용' 할 수 있는 책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인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번역서의 수준을 판가름하는 가장 유력한 기준이다. 국역본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읽을 만한 책이지만 인용시에는 주의가 요구되는 책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가 이 책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레비나스에 관심있는 독자들이 보다 많이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데이비스의 책은  폴리티출판사의 '우리시대의 핵심 사상가들(Key Contemporary Thinkers)' 시리즈의 한 권으로 나온 것인데, 같은 시리즈의 책들로 국역본이 나와 있는 것으로는 조지아 원키의 <가다머>(민음사, 1999)와 그램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2005), 그리고 숀 호머의 <프레드릭 제임슨>(문화과학사, 2002) 등이 있다(분량과 내용 면에서 권장할 만한 시리즈이기에 더 많이 소개되었으면 싶다). 이 중 번역이 가장 좋은 것은 <가다머>이다.

일단 서론으로 들어가보자. "단순하지만 광범위한 생각, 곧 서구 철학은 지속적으로 타자(the Other)를 억압해 왔다는 생각이 레비나스의 사상을 지배한다."(9쪽) 단순하게 말하자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바로 이 타자에 관한 철학이며, 이를 통해서 서양철학의 패러다임을 '동일자의 존재론'에서 '타자의 윤리학'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거시적인 프로그램이다. 이 "레비나스 윤리가 현대에 중요한 것은 그것이 타자성이라는 문제에 던지는 중대한 역할 때문이다."(12쪽) 한편으로 레비나스의 동일자/타자 구도는 벵상 데콩브의 프랑스 현대철학사 <동일자와 타자>(인간사랑, 1990)의 표제가 말해주듯이, 현대철학의 핵심구도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레비나스적 의미에서의 윤리(학)란 무엇인가? 교과서적인 윤리학 책들을 몇 권 이미지로 나열했지만, 짐작에 '레비나스의 윤리학'이 다루어지고 있는 윤리학 개론서는 없다. 특히나 영미적 전통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콜린 데이비스의 설명을 따라가자면, "레비나스는 도덕 행위를 위한 규범이나 잣대를 세우는 데 관심이 없으며 윤리적 언어의 본질이나 잘 살 수 있는 조건들을 연구하는 데에도 관심이 없다."(13쪽) 한데, 영미적 전통에서는 바로 그러한 것이 윤리학의 영역 아닌가.

해서 "거의 모든 맥락에서 레비나스가 쓰는 프랑스어 l'ethique를 '윤리(ethics)'보다는 '윤리적인 것(the ethical)'으로 옮기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윤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더욱 제한된 의미에서 정치와 구별되는)과 같이, 그 어떤 인간이라도 소외시킬 수 없는 영역을 뜻한다."

원문은 "In most contexts, the French word used by Levinas, l'ehique, might just as well be translated by 'the ethical' as by 'ethics'; and the ethical, like the political (as distinct from politics in the more restricted sense), refer to a domain from which nothing human may be excluded."(3쪽)

뒷문장을 다시 옮기면, "윤리적인 것은,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정치'와는 구별되는) '정치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것은 어떠한 것도 배제되지 않는 영역을 가리킨다."

요컨대, '제1철학'으로서의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모든 인간의 근간이며,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포섭한다. 분량상, 이 '입문'은 몇 차례로 나누어야 할 듯하다. 다음번에는 '현상학을 넘어서'란 주제가 될 것이다.

06. 02. 20-22. 

P.S. 'Emmanuel Levinas'는 '에마뉘엘 레비나스'라고 읽어주는 게 현지음에 가까운 모양이다. 그건 강영안, 서동욱 교수 등의 최근 표기를 보아 짐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강영안 교수조차도 <시간과 타자> 등을 번역/소개할 당시에 '엠마누엘 레비나스'로 표기했다(그 책에서 '베르그송'은 '베르크손'으로 표기됐다가 이번에 나온 <타자의 얼굴>에서는 '베르그손'으로 수정됐다). 번번이 지적하는 바이지만, '현지음'이란 건 표기의 고려사항이지 절대적인 표기원칙이 될 수 없다. 더구나 '에마뉘엘'이란 이름에는 우리에게 보단 친숙한 '엠마누엘'이 갖는 성서적/문화사적 의미가 포함돼 있지 않다. 나는 그런 의미의 '두께'를 얄팍한 '현지음'에 양보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학술논문에서나 써주면 될 것이다).

더구나 '엠마누엘'은 우리의 '마담 엘마누엘'도 환기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불경스럽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레비나스에 대해서 별로 읽어본 바가 없다는 뜻이다. '애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절절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는 책이 또한 <시간과 타자>이기 때문이다. 국역본에만 있는 것이지만,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부제는 '타자를 향한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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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연 2006-04-12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알게된 공간입니다. 너무 재밌어서 몇시간째 님이 쓰신 글들을 읽어보고 있습니다. 하지만...음...엠마누엘레비나스의 부제인 '타자를 향한 욕망'에서의 욕망은 그 욕망이 아닌것으로 알고있습니다만...^^;

비로그인 2008-06-1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를 향한 욕망>은 사려고 하지 않았는데, 결국은 사게 되버린 책입니다. 지난주에 주문해서 오늘 받았는데, <사랑의 지혜>를 오늘 다 읽었고 이제는 <엠마누엘 레비나스>를 읽으려고 합니다. 로쟈님 페이퍼에 실린 이 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데요. 바쁘신 와중이란 것 얼핏 간추려 짐작은 하지만서도.. 시간 짬이 나고 기억이 나실 때, 관련 페이퍼를 더 올려주실 수 없나요?^^ 꼼꼼히 대조해보거나 깊이 한권을 파고 드는 독서를 잘 못하지만, 사소한 것에서 의외의 큰 도움을 얻는다고.. 로쟈님의 페이퍼를 통해 좀 더 비판적인 독서가가 됩니다.
 

 

원저가 1984년에 나온 <예술사회(The Art Circle)>(문학과지성사, 1998)는 <미학입문>(1971)과 <예술과 미적인 것>(1974)에 이어서 번역된 미국의 예술철학자 조지 디키의 최근작이다. 뒤엣책들은 각각 <미학입문: 분석철학과 미학>(서광사, 1981), <현대미학: 예술과 미적 대상의 분석>(서광사, 1985)로 번역돼 있는데, <예술사회>는 특히 <예술과 미적인 것>(<현대미학>)에서 그가 제기한 '제도론적 예술'론을 수정/보완한 것이다(제도론적 예술론에 대한 개관과 비판은 박이문의 <예술철학>(문학과지성사, 1984)을 참조할 수 있다).  

제1장의 서론에서 디키는 자신이 <예술과 미적인 것>에서 개진한 바 있는 제도론적 예술론을 어떻게 수정/보완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제2장에서는 실질적으로 그가 그러한 예술론에 대한 발상을 얻은, 하지만 다소간 의견차이를 노출하게 되는, 아서 단토의 '예술계'론과 자신의 입론을 비교검토한다. 참고로, 19쪽에서 언급되는 '톰 월프의 <그림언어(The Painted Word)>(1975)'는 '톰 울프'의 <현대미술의 상실>(열화당, 1976; 아트북스, 2003)로 번역돼 있는 책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제2장에서 디키가 검토하고 있는 단토의 논문은 '예술계'(1964), '예술작품과 실재적 사물들'(1973), '일상적인 것들의 변용'(1974) 세 편이다. 그는 이 논문들을 차례대로 검토해나가는데, 그가 지적하는바, '예술계'에서 단토는 예술에 대한 소크라테스/플라톤의 견해를 최근의 '반예술 이론가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본다: "단토는 우리가 '예술'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고 예술을 제대로 식별한다는 견해를 모리스 와이츠 같은 최근의 반예술 이론가들이 나눠 갖고 있다고 본다."(30쪽)

국역본에는 이 문장의 바로 앞 문장이 누락돼 있는데, 그 내용은 "I shall not concern myself with the question of whether these views are actually attributable to Socrates or Plato."이다. 그러니까 단토가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예술론이라고 제시하는 견해가 실제로 소크라테스 혹은 플라톤에게 귀속될 수 있는 견해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는 것(그래서 역자도 빼놓은 것일까?). 더불어 '반예술 이론가들'이란  'anti-theorists of art'의 역어인데, '예술이론의 반대자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명료하지 않을까 한다('반예술'에 대한 이론가들이란 뜻이 아니므로).

디키가 요약하는바, 단토는 그렇듯 우리가 예술작품들을 식별해낼 수 있다는 견해("예술인지 아닌지는 보면 안다"는 견해)에 반대한다. 단토의 주장은 이렇다: (1)예술이론들이 우리로 하여금 예술작품과 비예술작품을 구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인식론적 주장. (2)예술이론들이 예술을 가능하게 한다는 존재론적 주장. 이하의 내용에서 역자는 'identify artworks' 란 표현을 모두 '예술작품을 동일시하다'는 식으로 옮겼는데, '예술작품을 식별하다'라고 해야 한다.

"단토는 과거에 모방론이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지만, 어쩌면 모방론은 예술이 곧 모방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함으로써 도움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모방이 아닌 어떤 것을 대면했을 경우, 그들은 그것이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며, 그리고 만일 그들이 모방인 어떤 것을 대면했다면 그들은 그것이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30-1쪽) 병렬적인 구문인데, 곰곰히 읽어보면, 강조한 대목이 오역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이 예술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모방론에 근거하여) 사람들이 척 보고서 모방이면 예술이고, 모방이 아니면 예술이 아니라고 식별/판정했을 거라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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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도서관 2006-04-03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역자 분이 톰 월프의 (1975)를 <그림언어>로 옮기셨다는데, 제 생각에, <그려진 말씀>이라고 옮기는 것이 적합할 것 같네요. -평론가들과 작가들이 사용하는 이론을 의미하는 바- Word라는 단어는 신학적 메타포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 맥락에서 사용되는 은유적 단어를 차용함으로써, 월프는 그 이론들의 정전화 현상을 꼬집고 있는 것일 테지요.

2006-04-03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4-03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유가 없는 탓에 미뤄지고 있는 글인데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월프의 책은 저도 완독한 게 아니고 그린버그에 관한 내용만 봤기 때문에 전체적인 흐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데, '신학적 메타포'라는 건 일리가 있는 의견이십니다. '기독교적 맥락'인지는 불확실하지만.

 

레비나스의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는 같은 해에 나온 강연록 <시간과 타자>(1947)와 함께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서 출발했지만 바야흐로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을 구축하기 시작한 레비나스의 '야심작'이다. 비록 아담한 판형에 분량도 100쪽이 조금 넘을 정도로 소략하지만(영역본은 100쪽이 되지 않는다), 자신이 20세기의 '철학사적 사건'이라 명명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고 있는 책이기에 그러하다(두 사람의 대결을 제대로 관전하기 위해선, 따라서 하이데거에 대한 예비적인 독해가 필요하다. 하이데거가 얼마나 강자인가를 확인해두어야 이 '도전장'의 의미가 음미될 수 있다. 가서 하이데거에게 얻어맞는 일은 각자가 해보시길).

잘 알려진 바대로, '존재자에서 존재로'(하이데거)에 대항하는 레비나스의 구호는 '존재에서 존재자로'이다. <존재와 시간>이 '철학사적 사건'이라면 '논리적으로 볼 때' <존재에서 존재자로> 또한 그에 버금하는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물론 팜플렛적인 저작으로서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레비나스 사건'의 프로그램적 윤곽 정도를 그리고 있을 따름이며(그러니까 이건 '전체주의' 철학의 거두 하이데거에 던지는 레비나스의 잽이다), '사건'의 전말이 다 드러나게 되는 것은 <전체성과 무한>(1961)에 와서이다(이게 어퍼커트이다). 

<전체성과 무한>은 아직 우리에게 번역/소개되지 않은 관계로(물론 해설들은 차고 넘친다), 우선은 레비나스의 잽만 맛보기로 한다. 그런 생각으로 집어든 것이 오래전에 사둔 국역본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 2003)이다.  당시에 내겐 비교해볼 만한 영역본이나 러시아어본이 없었기 때문에 독서는 자연스레 미루어졌는데, 어느덧 3년전이다. 한데, 이번에 주문받은 글도 있고 해서 (없는 시간이지만) 이참에 완독해보리라 책을 펼쳤다. 알폰소 링기스의 영역본(3판, 1995)과 러시아어본(2000)도 백업으로 준비하고서.  

한데, 분량상 수월하게 읽을 줄 알았던 국역본은 초반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인문 번역서의 첫페이지부터 오역이 등장하는 건 절대로 드문 일이 아니지만(차라리 그런 게 고마운 일이긴 하다. 책에 대한 '판단'을 빨리 할 수 있도록 해주니까), 이 공들인 번역서에서(역자는 부록에서 번역어에 대한 해설과 일람표까지 제시하고 원서의 오기까지도 교정하고 있다) 어떻게 첫문장에서부터 오역이 튀오나올 수 있는지 정말 미스터리하다('철학책'들이 '추리소설'과 얼마나 동종적인가를 새삼 확인시켜주는 역자의 고난도 유머가 아닌가란 생각도 했다). 서론의 그 첫문장이다.

"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존재 자체 사이의 구별, 개별자, 유, 집단, 신 - 이런 것들은 명사들 및 그것들의 존재 사건 또는 존재 활동을 통해 나타나는 것인데 - 사이의 구별은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19쪽)

단어들에 병기된 불어는 인용에서 삭제했는데, 중간의 삽입절까지 삭제하면 이 문장의 요체는 이렇게 된다: "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존재 자체 사이의 구별, 개별자, 유, 집단, 신 사이의 구별은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여기서 철학적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번역문에 따르면, (1)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존재 자체 사이의 구별, (2)개별자, 유, 집단, 신 사이의 구별이다. 그리고, 조금 주의깊은 독자라면, 구문적으로 병행적인 이 두 가지 구별이 실상 같은 사실을 반복진술하는 것일 터이기에 뭔가 아귀가 안 맞는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1)에서 '존재하는 것과 그것의 존재 자체 사이의 구별'은 다시 말해서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구별이지만, (2)에서 나열된 "개별자, 유, 집단, 신"들은 모두 '존재자'이므로 이건 그냥 존재자들 사이의 구별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두 가지 구별은 같지 않으며, '존재자들 사이의 구별'은 하이데거나 레비나스에게서 상대적으로 아무런 철학적 의의도 갖지 않는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영역본을 옮겨오면 이렇다(집에 놔두고 온 불어본의 경우도 내가 아는 한 같은 내용이다): "The distinction between that which exists and its existence itself, between the individual, the genus, the collective, God, beings designated  by substantives, and the event or act of their existence, imposes ifself upon philosophical reflection."(17쪽) 

이 문장의 통사적 핵심은 두 차례 등장하는 'between A and B' 구문에 있다. 해서, "A와 B 사이의 구별, 즉 C와 D 사이의 구별은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는 게 문장의 내용이다. 국역본의 역자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여기서 두번째 'and'이다. 그걸 연결된 수식어구로 본 것(그래서 '및'이라고 옮긴 것이리라). 영어본 문장에서 수식어구를 삭제하면 이렇게 된다: "The distinction between that which exists and its existence itself, between the individual, the genus, the collective, God and the event or act of their existence, imposes ifself upon philosophical reflection."

'존재하는 것(ce qui existe; that which exists)'이 소위 '존재자(existant; existent/being)'이다. 즉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존재(불어, 영어로 existence)'라는 건 존재자들의 '존재함이라는 사건 혹은 행위'(existing; Being)를 가리킨다. 이 '존재'를 흔히 우리말로 '있음'이라고도 옮기는데, 나는 '있다는 것'으로도 새긴다. 그러니까 '있는 것들'과 그것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 사이의 구별이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구별이며, 이 둘 사이의 차이, 즉 (하이데거의 전매특허이기도 한) '존재론적 차이'가 레비나스가 하이데거의 가장 중요한 기여로 꼽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덧붙이자면, 하이데거에게서는 이 존재자(=있는 것들)와 존재(=있음)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서 존재는 항상 '존재자의 존재'이다. 반면에 레비나스는 그 둘 간의 분리를 가정한다. 소위 '존재자 없는 존재' 그것이 레비나스 철학의 출발점이다.    

어쨌든 첫문장이 왜 오역인지는 확인한 셈이다. 사실, 영역본이나 러시아어본과 대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나는 왜 이런 '실수'가 빚어졌는지 궁금해서 불어본(1947년판이었다)을 도서관에서 복사하기까지 했다. 한데, 원서라고 해서 특별히 미스터리한 구석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내가 갖게 된 결론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역자나 교정자도 책을 그다지 꼼꼼하게 읽지 않는다는 것. 먹고 살 만한 고상한 독자들은 번역서를 외면하며 일반독자들이라면 이런 고상한 철학서는 일찌감치 독서 목록에서 제외된다.

하여, 이 책이 작년에 학술원 주관으로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데는 그런 이유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정도 흠이라면 문제삼을 만하지 않다는 판단을 심사위원들이 했었는지 모르겠지만(나는 그보다는 아무도 읽지 않았을 거라는 데 내기를 걸겠다), 만일 그런 경우라면 대한민국 학술원은 우리의 학술 수준을 대단히 얕잡아보고 있음에 틀림없다(일리가 없지는 않으나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적어도 체면이 있지 않은가?). 왜냐면 오역은 이 첫문장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서문에서 처음 이런 문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나름대로 '옥에 티'를 발견한 거라 생각하여 부듯했다: "존재 안의 이 자리는 현재의 노동이라는 주제로 제한된다."(9쪽) 이 대목의 영역은 "The theme of the present work is limited to this position in Being."(15쪽)이고, "이 책의 주제는 존재 안의 이러한 자리로 한정된다." 정도의 뜻이다. 'present work'를 '현재의 노동'으로 옮긴 것인데(역자는 불어의 'travail'를 번역 일람표대로 '노동'이라 옮겼다! 한데, 다른 대목들에선 '연구'라고 옮기기도 했으므로 역자가 문맥을 잘못 본 것이라고 할 밖에) 번역이라는 노동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가를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

그렇게 한번 웃으면서 지나갔지만, 막상 서론의 첫문장과 대면하니까 이게 웃을 일이 아니었다. 이 국역본이 런닝 바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전혀 아니며 중무장을 요구한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에(이젠 조금이라도 뜻이 들어오지 않으면, 불어본과 다른 두 번역본을 뒤적여야 한다).

서론의 25쪽도 그런 대목이다. '목적을 향한 탈자태'(영역은 'toward the end')에서 'fin'을 '목적'이라 옮긴 건 '유한성'을 다루고 있는 문맥상 '종말'이 더 적절했을 거라는 건 아쉬움이지만, "불안 없는 존재란 무한한 존재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무한한 존재라는 개념은 모순이 아니다."라는 번역문은 유감이다. 영역은 "A being without anxiety would be an infinite being - but that concept is self-contadictory."(20쪽)

이 대목의 불어문장은 내가 보기에 가정법 문장이고, 러시아어본도 가정법으로 옮겼지만("만약에 이 개념이 모순이 아니라면") 영역본과 국역본은 직설법 문장으로 바꿔 옮겼다. 그런데, 뜻은 정반대이다. 영역본에 따르면, '무한한 존재'라는 개념은 자기모순적이며, 국역본에 따르면 '모순이 아니다'. 역자가 참고했을 것으로 보이는 독역본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읽은 불어본과 러시아어본, 영역본은 모두 같은 뜻이며 '무한한 존재(infinite l'être)'를 개념적으론 모순형용이라고 진술한다. 그건 내가 보기엔 '무한한 존재자'라고 해야 한다.

우리말 '존재'도 그렇지만, 불어의 'l'être'도 모든 문맥에서 하이데거의 'Sein'에 상응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사실 역자도 "존재라고 번역하는 l'être가 문맥에 따라 '존재자'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걸 염두에 두기 바란다"(175쪽)고 적고 있지 않은가? "대부분 문맥상 어떤 뜻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물론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구별은 단어상으로는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다(레비나스는 어감상의 이유로 기존의 역어 대신에 'existence/existant'를 사용함으로써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다). 그러한 혼란은 영역본 등의 다른 번역본들에서도 해소되지 않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내가 읽은 바 이 대목의 다른 번역들은 국역본을 지지하지 않는다. 국역본을 내가 충분히 신뢰할 수 없다고 보는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번역 작업은 '번역자에서 번역으로' 이행하지만, 이 레비나스 국역본은 부득불 '번역에서 번역자로' 관심을 돌리게 한다. '신뢰할 수 없는 번역'과 '신뢰할 만한 번역자'(그는 같은 세대의 훌륭한 인문학자이면서 경탄할 만한 논저들의 저자이다) 사이에서  나는 잠시 길을 잃는다. 이 '미스터리 극장'에서...

06. 02. 20.

P.S. 일견 단순해 보이는 오역들이어서 나는 2쇄 이후에 번역문이 혹 수정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구내서점에 가보았지만 재고가 없었다(내가 갖고 있는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1판 1쇄이다). 혹 출간 직후의 서평들에서 이러한 일부 오역들이 지적되지 않았을까도 싶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가까이에서 찾을 수 없기에 일단 이 번역서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올려둔다.  

P.S.2. 충실한 역주와 해제 등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모범적인 번역의 사례로 꼽힐 만하지만, 이 책의 '번역원칙' 한 가지는 나로선 불만스럽다. 그건 'existence'와 'existant'의 역어로서의 '존재' '존재자'에 대해서는 항상 원문을 병기해준다는 원칙이다. 즉, 본문에서는 항상 '존재(existence)'와  '존재자(existant)'로 기재된 형태만을 만나볼 수 있다. 두 용어는 레비나스 자신이 하이데거의 '존재(Sein)'와 '존재자(Seindes)'의 역어로 채택한다고 밝힌 바 있고, 역자 또한 이를 분명하게 언급해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그렇다면 같은 개념인 etant/l'être와 혼동의 여지가 없는 거 아닌가?) 매번 원문을 병기해준다는 것은 '원문에의 충실성'이라는 강박관념의 소산으로 보인다. 덕분에 훼손된 건 우리말 번역문의 말끔함이다. '존재'/'존재자'란 우리말 역어가 그렇게 못 미덥다면, 그냥 원문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아무리 '타인의 취향'이라고 해도 동감할 수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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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수록 2006-02-20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체성과 무한'은 번역본이 없는 고로 국역본 '전체성과 무한'을 본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네요. 혹, '존재에서 존재자로'를 혼동하신 걸까..책이 없어 확인불가입니다. 이번 비판에 당첨된 역자분은 다소 의외군요. 번역의 길은 멀고 끝fin이 없어라~

로쟈 2006-02-20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였습니다...

비로그인 2006-02-20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동욱 같이 깐깐한 양반이 당첨되다니요.

yoonta 2006-02-21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동욱씨처럼 전도유망한 철학자께서 저런 실수를 하시다니 실망이군요..-_- 존재에서 존재자로정도의 책이면 외울정도로 많이 봤을텐데(아닌가?-_-) 저런 오역을 하다니.. 번역이라는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시한번 느끼게 되네요..더불어 그것을 찾아내는 로쟈님의 능력도 대단하다고 할밖에는..^^

로쟈 2006-02-22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 능력이 좀 '대단'했으면 싶지만 실상은 대수롭지 않은 능력이며, 여기서 꼬집은 오역들도 사실 너무 코미디 같은 오역들입니다(사실 실수는 누구나 하는 것이지만, 이번의 경우는 너무 의외의 실수입니다). 마치 '도둑 맞은 편지'를 찾는 것 같은. 그냥 국역본만 읽어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니까요. 인용할 만한 역서를 만난다는 게 정말 힘들군요...
 

개강을 앞두고 있는데다가 밀린 일들 때문에 '마지막 초읽기'에 몰려 있는 처지여서 한가하게 책소개나 늘어놓을 형편이 아니지만 막간에 몇 자 적는다(아마도 이 소개는 좀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 이런 건 ('사고'라기보다는) 그냥 '본능'이라고 해야겠다. 나를 보전하며 나를 망치는.

 

 

 

 

먼저, 조셉 캠벨(1904-1987)의 <신화의 이미지>(살림, 2006)을 꼽아두고 보자. 저자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는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이며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이다. 더불어 대중적으로는 가장 유명한 신화학자. 소개에 따르면 캠벨이 생애 마지막으로 펴낸 저작이라고 하는데, 원저 'The Mythic Image'가 1974년 저작으로 돼 있으니까 그의 나이 70세에 나온 책이다(이후에 캠벨은 '여생'을 살았나 보나). 

책은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전세계 각 문화권에 퍼져있는 신화들을 4백 50여장의 크고 화려한 컬러 도판과 함께 소개하고, 그 상징성과 함께 이들을 궤뚫는 신화의 원형(archetype)을 분석한다"고 하니까 제목의 '이미지'는 수사이거나 겉멋이 아니다. 책은 말 그대로 신화의 방대한 이미지들을 잔뜩 보여주는 책인 것. 그러니까 600쪽의 분량이라고 하더라도 '부담'스럽지는 않겠다. 신화 이미지 '사전' 정도로 활용할 수 있을 테니까. 아래 그림은 '신화학자의 삶'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강의록들을 포함하여 캠벨의 저서들은 차고 넘칠 만큼 번역돼 있다. 그렇다고 그의 펴낸 책들이 전부 망라돼 있는 건 아니겠지만, 우리의 인문서 번역 현황에 비추어본다면 다소 과잉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그 일등공신은 짐작에 <신화의 힘>과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등을 번역 소개한 우리시대의 '신화 전도사' 이윤기 선생이다. 몇 차례 개정판이 나온 걸로 알지만, 내가 최초이자 유일하게 접한 캠벨의 저작은 <신화의 힘>(고려원, 1992)이다. "비교신화학의 세계적인 석학 조셉 캠벨과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의 TV 대담을 책으로 엮어낸"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신화학 입문서로 추천하곤 한다. 아직은 신화쪽으로 별로 끌리지 않는 탓에 캠벨의 다른 저작들은 모두 나로선 미래의 책들이다.

 

 

 

 

<문화국가>(경성대출판부, 2004)의 저자 마르크 퓌마롤리의 <100편의 명화로 읽는 그리스 로마신화>(마로니에북스, 2006)도 얼마 전에 나온 이 분야의 관련서이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쪽은 그래도 신화와 영화 쪽인데, 유재원의 <신화를 읽는 영화 영화를 읽는 신화>(까치글방, 2005), 강대진의 <신화와 영화>(작은이야기, 2004) 등이 국내 전문가들의 저작이고,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제시한 '영웅의 여정' 패러다임에 따라, 50편의 영화에 담긴 신화적 구조를 탐구"하고 있는 스튜어트 보이틸라의 <영화와 신화>(을유문화사, 2005)가 유익한 독서 자료이다. 다소 진부한 소개이긴 하지만, 롤랑 바르트의 <현대의 신화>(동문선, 1997)도 신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책이다. 

 

 

 

 

'위대한 작가들의 창조적 열병'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하이퍼그라피아>(휘슬러, 2006)가 두번째 책이다. 책의 기본적인 시각에 따르면, 작가를 비롯한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크게 두 가지 양태가 존재한다고 한다. "하나는 아이디어가 무한대로 쏟아져나와 막힘없이 글을 써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족할만한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인데, "전자를 의학 용어로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 후자를 '블록 현상(writer's block)'이라" 한다고(어느 것이 더 고통스러울까?). 

하버드 의대 교수인 저자는 자신이 경험했던 조울증과 하이퍼그라피아 증상에 근거하여 여러 천재적인 작가들의 임상사례와 자기 치유법을 소개한다고 한다. '천재로서의 작가'에 대한 신화를 냉정하게 해부하는 '천재와 광기' 또는 '무슨 신드롬' 류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첫장이 "도스토예프스키, 발작을 일으키다"이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발작은 간질 발작을 가리킨다. 참고로, 작가의 이 특이 병력은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에게도 반영돼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백치>의 주인공 므이슈킨(미쉬낀) 백작이다.  

 

 

 

 

세번째 책은 루마니아 태생의 미술사학자 빅토르 스토이치타(1949- )의 <그림자의 짧은 역사>(현실문화연구, 2006). 원제는 'A Short History of the Shadow'(1997)이며, 375쪽 분량이니까 그렇게 짧지는 않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재현의 담론에 중심에 서 있는 그림자를 미학과 서양 문화사의 맥락에서 바라본다. 지은이는 회화, 문학, 사진, 영화, 만화, 광고 등 서양 문화사 전반에서 등장하는 그림자의 의미와 상징성을 풀이한다. 이를 통해 예술가들이 그림자를 묘사하기 위해 들인 기술적 도전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이 도전이 바로 예술의 시초라는 점을 지적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 비유 등의 이야기와 다양한 예술작품을 사례로 들고 그 안에 등장하는 그림자가 예술가들의 자기반영의 기능을 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또한 이들 작품들의 컬러 및 흑백 도판 110개를 수록, 볼거리를 더했다." 

A Short History of the Shadow Book

저자는  소르본대학에서 국가박사학위를 받고 여러 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는 스위스의 한 대학에 재직중이라는데, <스페인 미술 황금기로의 꿈같은 체험Visionary Experience in the Golden Age of Spanish Art>, <자각하는 이미지The Self-Aware Image> 등의 다른 저서도 갖고 있다고. 로마대학에서 수학한 경력도 있지만, 외모상으로는 이탈리아 사람을 닮았다. 내가 읽고 싶은 그의 또다른 책은 <몬드리안>(1979)이다.

 

 

 

 

그림 책 얘기가 나온 김에 랜덤하우스중앙에서 나오기 시작한 '내 손 안의 미술관' 시리즈도 꼽아두어야겠다. 1차분으로 나온 책들 가운데에서는 내 맘대로 꼽자면 단연 닐스 오켈의 <브뢰겔: 이상한 천국의 풍경을 꿈꾸는 화가>이다. 이미 시공사에서 나온 <브뢰겔>(2001)을 갖고 있지만, 이 책은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림 한 점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읽기를 제공해주고 있는 책이다.

즉, "화가 브뤼겔(1525-1569)의 예술관과 그의 그림 '게으름뱅이 천국'(1567)의 탄생 배경을 소개하는 책"인데, 제대로 읽기를 선호하는 나의 취향과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미술사학자 노성두의 번역이라 더 믿음이 가고. 아마도 이전에 마루(금호문화)에서 나왔던 <화가가 꿈꾸었던 이상한 천국의 풍경>(2000)과는 같은 책으로 보인다(이번에 더 번듯하게 나오긴 했지만).

한편, 이 신비로운 16세기 화가는 러시아의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아래는 브뢰겔의 대표작 중 하나이면서 영화 <솔라리스>에 등장하는 '눈 속의 사냥꾼'(1565).

네번째 책은 프랑스 작가 줄리앙 그라크의 <시르트의 바닷가>(민음사, 2006). 세계문학전집의 책으론 오랜만에 꼽아보는데, 원제는 'Le Revage des Syrtes'(1951)이다. 그라크의 소설로는 처음 소개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숲속의 발코니>(책세상, 2001)가 이미 나와 있었다. 요즘은 이름이 생소한 작가들도 많이 소개되지만 '전설'로만 남아 있는 작가들도 드물지 않은데, 내게 줄리앙 그라크는 그런 작가이다(국내에도 전공자들이 여럿 있어서 '거장'이란 입소문은 진작부터 돌았지만 진상을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해서, 재작년엔 다른 작품이지만 러시아어본도 사두었다! 데뷔작인 <아르골 성>). 이번에 나온 작품은 그 오랜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을까 싶다. 제목의 '시르트'는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 연안의 유사(流沙) 지방을 뜻하는 모양이다.

 

작품은 "300년 이상 휴전이 지속되고 있는 가상의 국가 오르세나를 배경으로 한 소설"로서 "주인공 알도의 일상이 정치하고 시적인 문장들을 통해 그려진다"고 한다. "베일에 싸여 있던 프랑스의 은둔 작가 쥘리앙 그라크는, 1951년 이 작품에 수여된 공쿠르 상을 거부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는데, 그 이전인 "1949년 쥘리앙 그라크는 '뱃심의 문학'이란 글을 발표하면서 프랑스 문학계와 결별한다"고. 

"대형 출판사들이 영리 추구를 위해 서로 다투고 나눠 먹는 문학상 제도와 당시 문단을 지배하던 실존주의 유파를 표적으로 하는 도발적인" 평문이었다는데, 내용 자체는 먼 나라 얘기 같지 않다(우리도 배짱좋게 문학상 좀 거부하는 작가가 이젠 나와주었으면 싶다. '노벨문학상' 거부면 더 좋고. 물론 사르트르처럼 상금은 챙겨둘 일이다. 혹은 상금이 없지만 권위 있는 문학상이 좀 나와주든가, 안 주고 안 받든가. 그것도 아니면 유치원식으로 모든 작가들에게 상을 주든가...). 어쨌든 그런 지조로 인하여 그는 1951년 그의 작품 <시르트의 바닷가>가 공쿠르 상 수상작으로 지명되자, 그라크는 두 차례에 걸쳐 수상을 거부했다 한다.

그런 그에게 바치는 투르니에의 찬사: "그라크는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다. 그는 50년 전부터 프랑스 문학을 지배하고 있다. 그는 문학 비평을 지금껏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의 역량이 십분 확인되는 것은 소설과 기행 노트에서이다." 그라크의 책들이 더 많이 번역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초현실주의와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특한 창작세계 때문에 분류곤란한 작가로 '분류'되는 그라크는 1910년생이지만 아직 생존작가이다.

 

 

 

 

두께에서 밀리긴 했지만, 그라크와 같은 프랑스 작가 자크 카조트(1719-1792)의 <사랑에 빠진 악마>(열림원, 2006)도 놓치긴 아까운 작품이다. "환상문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프랑스 소설가 자크 카조트의 경장편 소설. 연금술에 의해 불려나온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고, 인간의 원칙과 열정이 그 악마와 투쟁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렸다.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문학의 경향을 집약하고 있을 뿐 아니라, 환상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프랑스 문단에 알린 작품"이라 한다. 그런 문학사적 맥락 외에 관심을 끄는 건 '사랑에 빠진 악마'라는 주인공의 형상이다(한데, 이 악마는 '알바로'라는 귀족청년을 사랑한다. 이 또한 동성애 코드인가?).

이 책을 소개한 지난주 한국일보의 북리뷰에서는 러시아 화가 브루벨(1856-1910)의 <악마>(1890)를 같이 실었는데(이게 삽화로 들어가 있는 건가?), 이 계열의 그림들은 레르몬토프(1814-1841)의 서사시 <악마>에 암시를 받아 그려진 작품이다(카조트의 소설을 레르몬토프가 읽은 적이 있는지 한번 확인해봐야겠다). 국내에선 (절판된) 레르몬토프의 작품집도 브루벨의 화집도 구해볼 수 없으니 유감스럽다. 다들 어디에 빠져 있는 것인지...

 

삽화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러시아 작가 고골(1809-1852; 왼쪽 초상화)의 <코>를 다시 쓰고 거기에 (현재는 미국에 살고 있다는) 러시아의 일러스트레이터 겐나디 스피린(1948- ; 오른쪽 사진 )의 그림들을 넣은 그림책 <코>(보림, 2006)도 최근에 나온 책이다. 소장용으로 꽂아둘 만한 책인데, 스피린의 그림은 이미 <야곱과 일곱 명의 도둑>(문학사상사, 2004)에서 소개된바 있다. 그는 (<코>의 삽화는 아니지만) 아래와 같은 식으로 그린다.  

이런 솜씨로 그려낸 <코>의 삽화가 아래와 같은 그림이다. 당당하게 마차에서 내리는 5등관 코를 코 주인인 8등관 코발료프가 놀라서 쳐다보고 있는 모습. 놀랄 만큼 매혹적인 삽화이다.

러시아 책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고골의 선배 작가 크릴로프(끄르일로프, 1769-1844)의 <끄르일로프 우화집>(문학과지성사, 2006)도 덧붙이도록 하자. 이전에 '크릴로프 우화'라고 나온 책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개가 중역에다가 발췌본이었다. 198편의 우화들을 수록하고 있는 이번 번역서는 "1843년 뻬쩨르부르끄에서 출판된 <9권으로 된 끄르일로프 우화집>을 한 권으로 엮은 1956년 모스끄바 예술문학사 판 <끄르일로프 우화집>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번역하였"고 "작품 해설과 작가 연보, 최초로 작품들이 발표된 지면 및 작품 연보를 수록하고 찾아보기를 함께 실었다." 그러므로 가히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이로써 세계 3대 우화집이라 일컬어지는 이솝 우화집, 라퐁텐 우화집, 크릴로프 우화집 등을 모두 우리말로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우화란 기본적으로 '사회풍자'적 성격을 갖는 것인데, '아동물'로 즐겨 읽히는 것은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일이다(아이들에게 일찍부터 견인주의적 냉소를 가르치는 것인가, 아니면 '거세된' 우화들을 읽히는 것인가?). 나이든 이들이 미리 좀 읽고서 가려 읽히는 게 합당하겠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유기환 교수의 해설서 <조르주 바타이유>(살림, 2006)이다. 이미 <에로스의 눈물>(문학과의식사, 2002)을 번역/소개한 바 있는 저자는 오랜 동안의 독서를 바탕으로 하여 바타이유의 세계에 대한 가이드를 자임하고 나섰는데, 이런 바타이유 소개서는 저역서를 막론하고 국내에선 처음 나오는 것이다(줄리언 페파니스의 <이질성의 철학>(시각과언어, 2000)이 예외라면 예외이지만, 거기서는 바타이유가 보드리야르, 리오타르 등과 함께 다루어지고 있다). 주로 <저주의 몫>과 <에로티즘> 해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모두 번역돼 있는 만큼 수월하게 바타이유의 나라로 떠나볼 수 있겠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프랑스 도르도뉴 현의 몽티냐크 마을에 이는 '라스코 동굴'을 직접 찾아가본 '충격적인' 체험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데(바타이유 또한 라스코의 벽화들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불가능한 체험'은 바타이유의 키워드 중 하나이다), 우리도 비슷한 흉내를 내보기 위해 잠시 구석기 시대를 '체험'해 보도록 하자. 그들은 삶에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열망했을까? '신화'보다도 더 먼 시대에. 아직 '책'도 없던 시대에!..

  

 

06. 02. 18-23.

 

 

 

 

 P.S. 최근에 나온 시집 두 권을 별도로 언급하면서 글을 마치기로 한다. 먼저 황동규(1938- ) 시인의 13번째 시집 <꽃의 고요>(문학과지성사, 2006).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2003)에 이어 3년 만에 나온 시집인데, 그 3년이 시인에게는 "<유마경>을 읽고가 아니라, 읽을 수 있는 마음 상태를 엮은 기간"이었다고. 그 마음이 때로 터지면 이렇게 된다. 

시여 터져라.

생살 계속 돋는 이 삶의 맛을 이제

제대로 담고 가기가 너무 벅차다.

반쯤 따라가다 왜 여기 왔지, 잊어버린

뱃속까지 환하게 꽃핀 쥐똥나무 울타리,

서로 더듬다 한 식경 뒤 따로따로 허공을 더듬는

두 사람의 긴 긴 여름 저녁,

어두운 가을바람 속에 눈물 흔적처럼 오래 지워지지 않는

적막한 새소리,

별 생각 없이 집을 나설 때 기다렸다는 듯 날려와

귀싸대기 때리는 싸락눈을,

시여!

 

반면에 김승강(1959- )의 첫시집 <흑백다방>은 웬만해선 안 터지는 시와 삶의 꼴을 담고 있는 시집이다. 황동규 시인이 '꽃의 고요' 속에서 노래를 듣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면, 김승강은 능청스레 '꽃필까 두려운' '지경'에 머물러 있다: "제 몸에서 꽃 필까 두려운 목련/ 지난밤 바람이 햝고 간 자리/ 행여 열꽃으로 필까 두려운 목련"의 세계, '흑백다방'이란 제목처럼 촌스럽고 활달한 세계가 시인이 서두에 적은 '하루살이의 일기'이고, 평론가가 해설의 제목으로 적은 '생활의 발견'기이다. 그가 '발견'이라고 적어놓는 시들은 이런 식이다(근래에 보기 드문 능청이되 기본기 있는 능청이다. 김승강은 첫시집을 낸 '신예'이지만, 복학생보다도 나이 더 먹은 대학 새내기를 보는 듯하다).

 

아내는 자꾸

냄새가 좋다.

냄새가 좋다, 했다.

아버지, 논 물꼬를 트자

논물에서 개구리 울기 시작했다.

밤이 깊도록 아무도

개구리 울음소리를

끊어놓지 못했다.


아내는 아쉬운 듯 마지막으로

냄새가 참 좋다고 말한 뒤

잠들었다.


논물에서 개구리 목쉬게 울고

밤꽃 향기 밤새 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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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요일자(06. 02. 14) 한국일보 등에는 뉴욕타임즈(02. 12) 기사에 근거하여 러시아 영화계의 '뿌리찾기' 바람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내용을 따라가면서 몇 마디 보태기로 한다. 뉴욕타임즈 기사의 원제는 'Time to Come Home, Zhivago'(지바고, 집에 갈 시간이다)이며, 이걸 약간 변형하여 '닥터 지바고, 집에 돌아오다'란 제목을 붙인다. 주된 내용은 과거 헐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졌던 러시아 명작들이 일종의 붐처럼 러시아 영화로 다시 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래 왼쪽 사진이 데이비드 린 감독의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고, 오른쪽이 올 5월중 TV방영예정이라는 러시아판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소재로만 활용됐던 러시아 명작 소설들이 줄줄이 러시아 영화 감독에 의해 영화나 TV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12일 이런 현상을 1930년대 ‘전함 포템킨’의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감독 등이 활약했던 소련 영화 전성기에 견줄 수 있는 새로운 영화혁명이라고 평가했다.(*러시아 영화가 부흥을 맞고 있다는 전망은 몇 년전부터 나온 것인데, 2004년작 <나이트 워치> 등의 상업적 성공은 이를 뒷받침하는 한 가지 사례였다. 이러한 '성공'은 러시아의 문화적 전통과 정체성 회복의 계기로 삼으려는 노력이 현재 러시아에서 진행중인 것이다.)


 

 

 

가장 상징적인 영화는 <닥터 지바고>.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동명 소설을 1965년 할리우드의 데이비드 린 감독이 영화화한지 무려 41년 만에 러시아인의 손에 의해 TV 영화로 거듭난다. 구 소련 시절 금지소설로 분류됐던 이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는 것도 처음이다. 러시아 NTV는 올 5월 8시간 분량의 이 영화를 내보낼 예정이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러시아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앞서 마하일 불가코프의 명작 <거장과 마르가리따>는 지난해 12월 TV 영화로 만들어져(왼쪽 이미지. 오른쪽은 감독 블라지미르 보르트코) 러시아 시청자의 절반 이상을 사로잡는 경이적인 기록을 낳았다(*<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러시아 연극의 고정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한편, 현재 절판중인 국역본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새 번역본이 내년까지는 나올 예정이다). 스탈린 치하 강제수용소의 군상을 풍자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제1원>도 TV 영화로 제작돼 지난달 말 러시아 TV에서 방영됐다.(*'The First Circle'을 옮긴 <제1원>은 <제1권>(분도출판사, 1974)로 번역돼 있는 솔제니친의 장편소설을 가리킨다.) 

닥터 지바고를 제작중인 알렉산드르 프로쉬킨 감독은 “데이비드 린 감독을 존경한다”며 “하지만 그의 영화는 미국 영화일 뿐”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인의 작품을 러시아안이 해석해 영화로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 소설을 러시아인이 해석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영화에 많은 오류가 숨어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린 감독은 슬라브인과 비슷한 금발의 배우 줄리 크리스티를 지바고의 연인 라라로 캐스팅했지만 원작은 라라가 벨기에인 아버지와 프랑스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비 슬라브적인 인물로 묘사한다”고 꼬집었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는 빨간 머리의 러시아 여배우 슐판 카마토바를 라라역으로 캐스팅했고 지바고 역에는 오마 샤리프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올레그 멘쉬코프를 기용했다. 멘쉬코프는 ‘러브 오브 시베리아’를 통해 한국 관객에도 익숙한 배우이다.(*'슐판 카마토바'는 '출판 하마토바'의 잘못된 음역이다. 외신기자들도 이제는 영어-러시아어 음역체계에 대해서 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올레그 멘쉬코프'는 그냥 '올렉 멘쉬코프'라고 읽어주고 싶다. 얼마전 TV에서 재방영된 <러브 오브 시베리아>의 주연배우가 올렉 멘쉬코프인데, 한국일보인가는 '올렌 멘쉬코프'라고 적었었다.)

뉴욕타임스는 “스페인 라다하라 평원에서 올 로케된 린의 영화 현실은 가공일 뿐 실제 러시아 평원을 배경으로 제작되는 이 작품이 러시아 문학과 영화의 진수를 느끼게 해 줄 것”이라는 러시아 영화계의 반응을 전했다. 러시아 영화계의 이 같은 동향은 구 소련 붕괴 후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온 러시아가 최근 정치안정과 유가급등에 따른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국가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여러 시도 중 하나로 봐야 할 것 같다.(*어찌되었거나, 러시아문학 전공자로서는 아주 반가운 일이다. 이걸 다 언제 구해 보나?) 

06. 02. 17.

P.S. 모스크바 통신에서 '올렉 멘쉬코프'에 대해 몇 자 적은 대목이 생각나 옮겨온다. 작년, 그러니까 2005년 새해 벽두에 쓴 것이었다.

어제보니까 러시아의 (2005년)새해맞이는 푸틴의 5분 연설로 시작된다. 그는 12월 31일 밤 11시 55분에 대부분의 TV채널에 등장해서 새해의 의미와 새해를 맞는 러시아의 각오/다짐을 되새겨주었다.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2005년이 전승 60주년이 되는 해라는 것이다(러시아/소련은 1945년 5월 독일로부터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2차 대전의 승전국이 된다. 러시아는 그 전쟁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나라이다). 러시아인의 90%가 독일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하고 독일에서의 삶을 꿈꾸기도 하지만, 독일에 대한 승리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를 지탱하는 가장 큰 이념적 버팀목이다(그걸 보충하는 것이 ‘러시아 정교’이다). 방대한 영토의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이기에 그런 버팀목은 불가불 요구된다. 사회주의 시절엔 아마도 ‘러시아혁명’이 그런 역할을 수행했을 테지만, 지금은 오직 ‘조국전쟁에서의 승리’뿐이다. 이 ‘국가 이데올로기’를 어떻게든 유지시켜보려는 노력은 옆에서 보기에 간혹 안쓰럽다.

푸틴의 연설에 이어서 채널 NTV(엔떼베)에서는 ‘올렉 멘쉬코프와의 첫밤’이라는 쇼프로그램을 방송했는데, 멘쉬코프는 <시베리아의 이발사>(<러브 오브 시베리아>로 출신>)와 <위선의 태양>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남배우이자 러시아의 국민배우이다(*그는 러시아의 '중년의 꽃미남'이다). 듣기에, 아직 미혼이며 그의 전기까지 출간됐을 정도이고 중년이지만 배용준의 인기를 능가한다(러시아 연예계라는 게 우리처럼 떠들썩하진 않지만).

그래서 그날 챙기게 된 영화가 그의 1999년작인 레지스 바르니에 감독(<인도차이나>의 감독)의 영화 <동과 서>이다(왼쪽 사진은 <시베리아의 이발사>에서 줄리 오몬드와 멘쉬코프. 그리고 오른쪽은 <동과 서>에서 산드린 보네르와 멘쉬코프). 프랑스 등 4개국 합작 영화인데, 2차 대전 종전 후 1946년 의사인 러시아 남편을 따라서 남편의 조국 ‘소련’으로 간 프랑스인 아내의 ‘지옥에서의 10여년’을 다루고 있는 영화인데(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주연은 산드린 보네르이고 카트린 드네브도 조연으로 출연한다(푸틴이 러시아의 1945년을 기념하고 있다면, 멘쉬코프는 1946년 이후에 러시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고발한다).

러시아 생활에 절망하던 프랑스 아내는 간첩 혐의로 수용소에 끌려가기도 하지만 1956년(이 해 전당대회에서의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에 대해서는 이전에 언급했다)에 복권되며, 이후 남편의 숨은 노력으로 비밀 망명에 성공한다(그녀는 아들과 함께 불가리아의 프랑스대사관으로 망명하며, 그리스를 거쳐서 프랑스로 돌아간다). 혼자 남겨진 남편이 프랑스에서 가족과 재회하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30년 후인 1987년에 와서이다(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이들의 재회를 가능하게 했다). 아래 사진은 각각 <시베리아의 이발사>와 <동과 서>의 DVD 타이틀.

‘동’과 ‘서’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아픔을 겪은 러시아/프랑스판 이산가족을 다룬 영화인 셈인데, 우리의 관객들이라면 보면서 눈물나지 않을 수 없는 영화이다. 이런 '반공'영화가 소개되지 않는 것도 참 신기한 노릇이다(러시아 영화를 소개하는 채널조차 안 갖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므로 이럴 때는 '주변 4강'이란 말이 무색하다. 고작 '시베리아 유전'에나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인가? 심히 척박한/천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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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6-02-1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러시아에는 저렇게 문학이 많을까요... ^^;;

로쟈 2006-02-17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땅넓이에 비하면야.^^

비로그인 2006-02-17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구 수는 그래도 땅 넓이 만큼 많지는 않은데^^

2006-02-17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2-1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때리다님/ '고뇌'하는 인구수는 우리보다 훨씬 많은 듯합니다...
**님/ 닥터 지바고의 국역본을 모두 갖고 있지만, 찬찬히 대조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 지바고의 시 같은 경우, 대개는 맘에 들지 않더군요. 파스테르나크는 좀더 섬세하게 번역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재로선 아무 번역본이나 붙잡아도 '무드' 정도는 전달받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