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끄트머리이고 겨울의 끝이다. 그리고 내일이 봄이다. 봄풍경이 들어서기까지는 몇 주 더 걸리겠지만(그림은 러시아의 풍경화가 레비탄의 '봄 홍수'(1897)), 교정이 재잘거리는 소리로 가득차는 건 당장 (대개의 입학식이 예정돼 있는) 모레부터이다(그러면 나도 덩달아 좀 바빠지겠다). 여기저기가 북적거리겠지만, 가장 북적댈 곳은 건 강의 교재들이 판매되는, 북새통같은 구내서점이겠다. 그런 게 변함없는 내 주변의 풍경이다(한적한 봄풍경을 맞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새학기 개강도 출판계에서는 일종의 특수일 것이다. 눈에 띄는 책들이 부쩍 많아진 것은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교재나 교양학술서 범주에 들어갈 만한 책들을 북적거리기 전에(!) 몇 권 꼽아본다(일단은 점심시간 동안만).  

 

 

 

 

가장 먼저 꼽을 책은 학술명저번역총서로 출간된 찰스 다윈의 <인간의 유래>(한길사, 2006)이다. 아마도 다윈 자신의 책으론 <종의 기원> 다음으로 유명할 이 책이 이제서야 국역본을 얻었다는 건 한참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또 한편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법이기도 하다(1871년에 나온 책이니까 135년만에 한국어본이 나온 셈이다). 다윈과 다위니즘에 대해서는 우리시대의 가장 탁월한 다위니즘 해설자 리처드 도킨스의 <에덴의 강>(사이언스북스, 2005)을 참조하는 게 좋겠다. 다윈의 자서전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갈라파고스, 2003)와 <30분에 읽는 다윈>(랜덤하우스중앙, 2004)도 워밍업으로는 좋겠다.

문제는 <인간의 유래>를 읽는 것이지만, 고전의 가치는 읽는 데에만 있는 게 아니라 모셔두는 데에도 있으므로 일단은 저마다 서가에 꽂아두고 볼일이다. 나만은 아니겠지만, 특별히 관심있는 대목은 다윈의 '성선택설'인데 그런 대목만 미리 챙겨읽는 게 흠은 아니겠다. 이때는 저래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사이언스북스, 2005) 반드시 참조할 필요가 있는바 곁에 두고 같이 읽으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더불어 좀 여유가 있는 '교양인'이라면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바다출판사, 2004) 정도를 <인간의 유래>와 나란히 꽂아두면 좋겠다. 이 책의 원제 'The Ascent of Man'(1973)는 다윈의 책 'The Descent of Man'을 뒤집은 것으로 "인간이 상상력과 이성, 정서적 예민함과 강인성으로 환경을 변화시켜온 문화적 진화의 상승과정을 담고 있"는 고전적 저작이다. BBC의 다큐 시리즈였는지라 DVD 타이틀로도 나와 있다.  

 

두번째 책은 패트리샤 처칠랜드의 <뇌과학과 철학>(철학과현실사, 2006)이다. 처칠랜드 여사는 남편 폴 처칠랜드와 함께 심리철학과 인지과학 분야의 저명한 학자이며(이 분야에 대한 개괄적인 책으론 김영정 교수의 <심리철학과 인지과학>(철학과현실사, 1996)을 꼽을 수 있다), 폴은 국내에 '심리철학 입문서' <물질과 의식>(서광사, 1992)으로 진작에 소개된 바 있다(저자의 성이 '처치랜드'로 표기됐었다. 국내 학계의 관행이 어느쪽인지 모르겠지만, 이 부부가 별거하는 것도 아닌데 '처치랜드'와 '처칠랜드'로 따로 검색되는 것은 보기에 안 좋다). 이번에 나온 건 패트리샤의 저작이며 훨씬 두껍다(766쪽이고 원저는 560쪽. 물론 두께가 지성에 비례하는 건 아니겠지만 폴도 분발해야겠다).  

책의 원제는 'Neurophilosophy'(1986, 1989)이고, 이미 20년전에 나온 저작이다. 컴퓨터공학의 발달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법한 분야인 만큼 다소 '낡아보이는'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거꾸로 20년을 버틸 수 있었다면, 이미 이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좀 낡은 책이 번역된 것인지, 고전적인 저작이 번역된 것인지는 관련 서평을 읽어봐야 알겠다(이런 서평도 제 때 써줄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엔 드문 것인지?).

 

 

 

 

뇌 얘기가 나온 김에 요로 다케시의 <유뇌론>(재인, 2006)도 언급해 두도록 하자. 소개에 따르면, "다치바나 다카시와 함께 일본 최고의 지성으로 손꼽히는 요로 다케시의 책. 2003년 출간되어 그해 일본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바보의 벽> 등의 저작을 통해 해부학자로서의 지식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폭넓은 사유와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 바 있다. <유뇌론>은 요로 다케시 사상의 출발점이자 근간이 되는 저서이다. 유뇌론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뇌라는 기관의 법칙성을 통하여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입장이다. 유물론과 유심론 중 굳이 따지자면 유심론, 또는 관념론과 가깝다."

236쪽 정도의 분량이 그닥 미덥지는 않지만, 역시나 두께가 통찰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므로 한번 일독해봄 직하다. '뇌를 향한 두렵도록 새로운 시선'이란 부제를 얼마나 감당하고 있는지 확인도 해볼 겸. '새롭다' 싶으면 이미 알게 모르게 많이 소개된 요로 다케시의 세계로 푹 빠져들어가면 되겠다. "일본에 있을 때 일주일에 한번쯤 술을 마셨던 일본 친구가 그의 책을 권했다. 그는 일본인이라면, 아니 누구든지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며 나무젓가락을 넣은 좋이에 '요로 다케시'란 이름을 써줬다. 그의 책 <유뇌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이 책을 추천한 전여옥 의원도 아마 '요로 다케시'의 팬인 듯한데, 겸사겸사 치매에 안 걸리는 법도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그런데 책에선 왜 "일본엔 요로 다케시가 있더라"라고 하지 않았을까?).

 

 

 

 

세번째 책은 한국칸트학회 편으로 나온 <포스트모던 칸트>(문학과지성사, 2006). 제목은 '포스트모던'하지만, 내용은 '칸트적인' 논문 모음집이다. 칸트학회장인 강영안 교수의 서명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의 기획자인 총무이사 서동욱 교수가 작성한 글임에 분명한 서문은 '그레고어 칸트와 그의 벌레 변신'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거기서 주장되는바, "이 책은 바로 이 칸트의 변신 '모던 칸트'에서 '포스트모던 칸트'로의 '변신담'이다."

이 화려한 예고편에 이어지는 것은 그러나 '칸트와 하이데거', '칸트와 라캉', '칸트와 레비나스' 등등이며, '칸트와 하버마스', '칸트와 로티'로 마무리된다. 칸트의 변신담이라고는 하나 '칸트'는 거의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꼴은 아닐까? 그 서론에서 인용되는바, "나는 옷을 벗고 <순수이성비판>과 담배 한갑을 들고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무라카미 하루키, <1973년의 풋볼>)나 "뒷주머니에 <프롤레고메나>를 넣어둔 것은 그 탓이야. 내가 슬럼프인데도 계속 이기고 있는 것도, 모두 칸트 할아범의 덕분이지."(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같은 대목들이 '포스트모던 칸트' 현상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면, 그와 정면대결하여 '칸트와 하루키'나 '칸트와 일본야구' 같은 글 꼭지가 아마도 '포스트모던 칸트' 변신담에 더 적합할 것이다.  

해서, 이 변신담은 아직은 제목과 서문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 서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끝으로 이 책은 한국칸트학회 기관지 <칸트연구>의 특별호로서 16집 2호에 해당함을 밝혀둔다." 그리고 그렇게 읽을 때 이 논문집은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엽기적인 식탁이 아니라) 읽을 만한 논문들을 두루 갖춘 풍족한 식탁이 된다.

 

'포스트모던'이란 말이 나온 김에 또 언급해 두는 책은 마크 포스터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새로운 문화사>(이대출판부, 2006)이다. 원제는 'Cultural History and Pstmodernity: disciplinary reading and challenges' (1997)이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맥락 속에서 문화사와 관련된 쟁점들과 논제들을 검토하고 역사학의 미래를 전망한 책. 역사학계에 퍼져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역사학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지혜를 밝히고자 했다. 문화사를 다루는 데 있어 작용하는 인식론적 조건과 프랑수아 퓌레, 린 헌트, 미셸 푸코 등의 실제 연구 기록들을 사례로 점검함으로써 논지를 구성했다"고 한다. 230쪽의 컴팩트한 분량이므로 단숨에 읽으면 되겠다. 아니면 국내 필자들이 참여한 <포스트모더니즘과 역사학>(푸른역사, 2002) 같은 책과 천천히 비교해 보면서 읽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다.

<푸꼬, 마르크시즘, 역사학>(인간사랑, 1990)이란 책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 포스터는 이후에 <뉴미디어의 철학>(민음사, 1994), <제2미디어의 시대>(민음사, 1998),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기 전에 인터넷을 생각한다>(이제이북스, 2005) 등의 번역서명들이 말해주듯이, 주로 문화이론이나 미디어 이론 분야의 책들을 내왔다. 해서, '역사학'을 주제로 하고 있는 이번 신간은 한동안의 딴살림은 접고 애당초 그의 이름을 알린 <푸꼬, 마르크시즘, 역사학>의 '족보'를 다시금 잇고 있는 것으로도 읽힌다(그는 원래 직분은 역사학 교수로 돼 있다).  

 

 

 

 

네번째 책은 정치사상과 세계화 분야의 책으로 골랐다. 일단 가장 최근에 나온 두툼한 책으로 <현대 정치사상의 파노라마>(아카넷, 2006). "서구 정치사상의 중요한 줄기를 이루는 이데올로기의 개념과,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해설을 담았다"고 하니까 간단히 말해서 '교재'이다. 교재류의 특성상 '예리한 시각'을 담고 있을 법하지는 않지만, 교양의 토대는 튼튼하게 해줄 것이며 차후의 보다 깊이 있는 독서로 안내해줄 것이다. 작년에 바라다트의 <현대정치사상>(평민사, 2005)도 그런 책으로 보인다.

'정치사상'이 원론이라면 '세계화'는 작금의 현안이다. 이 주제와 관련한 책들은 차고 넘치지만, '세계화 시대의 양극화를 넘어서는 길'이란 부제를 단 <세계화의 두 얼굴>(이른아침, 2006)이 일단 눈길을 끈다. "세계화와 불평등, 그리고 양극화 문제에 대한 비판서. '모든 이들이 똑같이 부유해질 수 있다'는 청사진을 걸고 나온 세계화 운동이 오히려 국가간, 계층간에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는 현상을 분석하고 그 해법을 모색"하는 이 책은 "세계화 시대의 부자들과 빈자들의 현재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부자들이 세계화 물결을 타고 어떻게 세계 경제를 장악했는지, 그리고 빈자들이 어떻게 끝없는 가난의 덫에 걸려들 수밖에 없는지를 분석한다. 그리고 미국과 인도 등의 사례를 제시하여 이러한 양극화 현상이 국가 간에, 혹은 비(非)선진국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분석내용은 '상식적'인데, '넘어서는 길'이란 대안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궁금하다.

작년 연말에 나온 <진화하는 세계화>(아이필드, 2005)는 부제가 '현대 세계의 문화적 다양성'이고 원제는 'Many Globalization'(2002)이다. 제목 그대로, 다수의 다양한 세계화의 진행현황에 대한 리포트적 성격의 책이다. 이 세계화를 둘러싼 찬반 양론은 실상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로 귀결될 듯한데, 이 '차이'를 조망해주는 책으로 <비전의 충돌>(이카루스미디어, 2006)이 또한 눈길을 끈다. 저자는 "수세기에 걸쳐 지속되어 온 보수와 진보 사이의 논쟁을 '비전의 충돌'이라는 아이디어로 분석했다"거 하며, "미국의 대표적 두뇌집단 중 한 사람인 정치학자 토마스 소웰이 미 행정부 정책 자문의 경험을 바탕으로 30년간의 사상사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라고 소개된다.

소웰에 따르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충돌해 온 두 가지 관점(비전)"이 있는데, "하나는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변하지 않는다는 '제약적 비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본성은 완벽해질 때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무제약적 비전'이다." 이러한 비전관은 마치 본성(nature)과 양육(nuture)이라는 생물학 화두의 정치학 버전 같다. 하면, 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김영사, 2004)도 같이 읽어봄 직하다(그렇게 다 찾아 읽으신 분은 내게 결론을 좀 알려주시압).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에드워드 루시-스미스와 주디 시카고가 쓴 <여성과 미술>(아트북스, 2006). '열 가지 코드로 보는 미술 속 여성'이 국역본의 부제인데, '여성과 미술'이란 주제사나 '페미니즘 미술사' 교재로 적합해 보인다.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세계 미술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 있던 여성 미술가들의 성취를 재조명했다. 남성 화가들의 그늘에 가려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위대한 여성 화가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생애와 미술사적 업적을 소개한다"고 하니까.

공저자의 한 사람인 자마이카 태생의 영국 비평가 에드워드 루시-스미스(1933- )는 전방위 작가인 듯한데(시인에다가 사진작가까지 겸하고 있다), 많은 교양미술서들을 집필했고 또 국내에 많이 소개돼 있다(그림 읽어주는 할아버지?). 내가 갖고 있는 건 <서양미술의 섹슈얼리티>(시공사, 1999) 한권뿐이지만. 아래와 같은 사진이 그의 작품인데, 그만한 지명도라면 어쩌면 사진집도 국내에 소개될지 모르겠다.

덧붙여 교양미술 교재로도 쓰일 만한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의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현실문화연구, 2006)이 재출간됐다. 예전 판본에 대해 쓴 리뷰에서 나온 흑백 도판에 대해 아쉬움을 표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새로 편집하고 칼라 도판을 추가한 개정판"이 나온 것. 그런 수고에 비하면 상당히 저렴한 가격도 책의 장점이다. '교재' 정신에 충실한(턱없는 책값의 '교재'들을 나는 혐오한다).

06. 02. 28 - 03. 02.

P.S.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학자 자크 오몽의 책 <영화 속의 얼굴>이 번역돼 나왔다. 소개를 옮기면, "영화이미지들 중 가장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얼굴 이미지'에 대한 미학적 분석을 담은 책이다. '영화'라는 매체와 '이미지'라는 표현 수단의 관계에 대해, 나아가 '이미지'와 '현실'과의 관계에 대한 방대하고 심도 깊은 사유를 펼쳐 보인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영화학자 중 한 사람인 자크 오몽의 저서로, 그의 제자인 김호영 교수가 우리 말로 옮겼다." 그리고 예상과 다르게 400쪽이 넘는 듬직한 분량이다.

물론 <영화 속의 얼굴> 같은 책이 <영화미학>(동문선, 2003)처럼 영화학 교재로 쓰이지는 않겠지만, 내게 더 흥미로운 건 <미학>이 아니라 <얼굴>이다. 한국영화통으로도 잘 알려진 오몽이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미 3~40년 전부터 한국 영화에는 임권택의 완벽하게 통제된 고전주의와 김기영의 장중하면서도 통속적인 가면 예술, 홍상수의 '모던한' 얼굴들, 봉준호나 박찬욱의 '기발함' 등이 평화롭게 계승되고 공존해왔다. 물론, 김기덕처럼 모든 장르와 스타일에 재능을 보이는 시네아스트들도 있었다... 판타스틱 영화나 초자연적 영화에서도, 조지 로메로의 산송장들이나 팀 버튼의 비현실적 피조물들, 혹은 만화영화로부터 유래된 슈퍼 히어로에서조차도,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여전히 '배우'의 얼굴이며 '타인의 얼굴' 이다."(강조는 나의 것, 레비나스의 상용구를 오몽에게서도 읽게 되는군!)

가령, 내가 작년에 본 영화들에서 <여자, 정혜>의 김지수나 <나의 결혼원정기>에서 수애의 얼굴은 영화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기억해 둘 만한 얼굴들이었다. '배우'의 얼굴이면서, '타인'의 얼굴. 그 무한자의 미스테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열린책들)을 읽은 건 개역본이 나오기 80년대 후반이거나 90년대 초반이었던 듯한데, 그때 읽은 건 '호르헤' 수도사가 아직 '요르게' 수도사로 활약하던, 그러니까 개역본이 나오기 전 초판 번역이었다. 이후에 개역본도 무슨 사은품으로 받아서 갖게는 됐지만 아직 들춰보지는 못했다. 대신에 2001년 봄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열린책들)를 읽었고, 작년 봄인가 언젠가는 (<장미의 이름> 개역본에 지대한 기여를 한) 강유원의 <장미의 이름 읽기>(미토, 2004)를 대충 읽었다(책은 <장미의 이름>과 같이 읽어나가야 효과가 있다). 물론 숀 코너리 주연의 영화 <장미의 이름>(1986)도 보았으니까 할 만큼은 한 셈.

 

 

거기에 내가 더 갖고 있는 것은 러시아어본 <장미의 이름>이다(왼쪽 이미지, 오른쪽은 영화의 러시아판 포스터. 러시아어본으로는 두툼한 <푸코의 진자> 주석/해설서도 나와 있었으나 구입하지는 않았다). 중세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장미의 이름>을 보다 정밀하게 다시 읽어보았을 테지만, 내 관심과 여력은 현재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다만,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를 읽으면서 옮겨적은 대목들이 있기에 일단은 여기에 다시 옮겨놓는다(분류상 '밑줄긋기'에 들어가는 게 알맞지만, 이미지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그냥 '페이퍼'에 쓰기로 한다). 박식한 학자이면서 동시에 재주꾼 소설가인 에코의 '창작론' 강의 정도이겠다(인용문에서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작품이 끝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 죽음으로써 그 작품의 해석을 가로막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p.20) 작가는 해석자가 아니다. 그러나 해석자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왜 썼고 어떻게 썼는가 하는 것은 말할 수 있다.(*이것이 '작가' 에코가 '창작노트'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작품에 개입하는 근거이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소설의 세계를 구축해 놓으면 언어는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즉 <주제를 붙잡으라, 그러면 언어가 뒤따라 온다>인 것이다. 내가 알기로 이것은 시의 경우와는 정반대이다. 시의 경우는 <언어를 붙잡으라, 그러면 주제가 뒤따라 온다>이다.(p.43).

 

-세계 창조의 작업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제약 조건을 만들어 심어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주변 세계가 제한 조건이 되어 준다. 이것은 리얼리즘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따라서 전혀 비현실적인 세계, 가령 나귀가 하늘을 날고, 죽었다가도 키스 한 번으로 되살아나는 왕자가 나올 수 있는 세계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가능한 세계, 비현실적인 세계라고 하더라도 소설로 존재하려면 처음에 정의된 구조에 따라야 한다(우리는 먼저, 그 세계가 공주가 왕자의 키스 한 번으로 되살아날 수 있는 세계인지, 아니면 마녀의 키스 한 번으로 되살아날 수 있는 세계인지, 공주의 키스가 개구리, 혹은 아르마딜로 왕자로 변하게 할 수 있는 세계인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창조한 소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한 요소는 역사이다. 내가 중세의 연대기를 읽고 또 읽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중세의 연대기를 읽으면서 나는 모름지기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애초에는 작가의 머리 속에 없던 것, 가령 청빈을 둘러싼 논쟁, 소형제회 수도사들에 대한 심문관의 적의 같은 것들도 소설 안으로 껴안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pp.44-45)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등장 인물은 소설이라는 세계에서 자율적인 생명을 지니는 것이고,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종의 망아(忘我) 상태에서 그 등장 인물이 지향하는 방향대로 행동하게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작중 인물은 자신의 현실인 소설 세계의 법률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화자는 자기가 내세운 갖가지 전제 조건의 포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p.47)(*그러니까 작가는 그 '소설 세계의 법률', 혹은 '소설 세계의 법칙'에 대한 입법자로서의 권능을 갖는다. 그리고 작중 인물은 (입법자로서의 소설가가 아니라) 이 법률/법칙의 구속을 받는다. 이 차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소설이 아마추어 소설이다.)  

 

-소설의 경우 작품이 완성되면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는 대화의 채널이 이루어진다. 집필 단계에는 두 가지의 대화가 존재한다. 하나는 텍스트와 이미 쓰여진 다른 텍스트와의 대화, 또 하나는 저자와 그 모범 독자와의 대화이다.(pp.71-72)

 

- 추리의 추상적인 모델은 바로 미궁이다. 미궁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이 '미궁'의 다른 말이, 플롯(plot), 곧 '음모'이겠다.) 

 

 

(1)하나는 그리스적 미궁, 즉 테세우스의 미궁이다. 이런 미궁에서는 들어간 사람이 길을 잃지 않는다. 이런 미궁에 들어가면 중심에 이르게 되어 있고, 바로 이 중심에서 바로 출구에 이르게 되어 있다. 이 중심에 미노타우로스가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미궁이 나오는 소설에서는 독자가 공포를 느껴야 하는데, 이때 공포는, 우리가 미궁에서 어디에 이를지 모른다는 점, 미노타우로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데서 생긴다. 그러나 고전적인 미궁을 해명해 들어가는 독자는, 미궁이라고 하는 데는 한 실타래, 아드리아네의 실타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고전적인 미궁은, 아드리아네의 실타래가 있는 미궁이다.

 

(2)그런가 하면 매너리스틱한 미궁도 있다. 이것을 해명해 들어가는 독자들은 자기 손 안에 일종의 나무 같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출구는 하나뿐이다. 그러나 이 출구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도 길을 잃지 않으려면 아드리아네의 실타래가 필요하다. 이런 미궁은 시행 착오 과정의 모델 노릇을 한다.

 

 

(3)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물, 혹은 델레우제와 구아타리가 <리조메>(뿌리)라고 부른 것도 있다(*'리좀'이라고 더 잘 알려진 것). 리조메는 구조상, 한 줄기는 어떻게든 다른 줄기와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는 중심도 없고, 주변도 없고, 출구도 없다. 이것은 잠재적 영속성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추리의 공간의 리조메의 공간이다. 내 소설에 나오는 미궁은 일종의 매너리스틱한 미궁이다. 그러나 윌리엄이 경험하게 되는 미궁은 리조메의 구조를 지닌 미궁이다. 말하자면 구축될 수 있는 미궁이기는 하나 완벽하게 구축된 미궁은 아닌 것이다.(pp.80-83)

 

06. 02. 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일들을 정리하다가 오래전에 임지현 교수의 글 '20세기와 잃어버린 마르크스주의'(<문학과사회>, 1999년 여름호)을 읽고 정리/인용해둔 글을 발견했다. 이 글은 두해 뒤에 나온 <이념의 속살>(삼인, 2001)에 실려 있다. 인용 쪽수는 <문학과 사회>의 것이기에, 그리고 <이념의 속살>은 내가 안 갖고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나름대로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던져주는 글이었다. 부분적으론 군말들을 붙였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사실상 운명적 적수가 아니었다. 비록 길은 달리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계몽으로서의 이성에 대한 유럽 지성의 고상한 꿈을 실현하는 현실적 기제였다.(A. and M. Kroker,  "Ideology and Power in the Age of Lenin in Ruins"(New York, 1991, p.ⅹ.)  같은 ‘미래파’ 운동이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의 지지세력이 되고 러시아에서는 볼셰비즘에 친화력을 지녔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생산 체제의 관점에서 본다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생산력 중심주의에 기초한 ‘근대’의 경제가 있을 뿐이다. 근대적 기획으로서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생산력 중심주의의 서로 다른 얼굴일 따름이다.(이마무라 히토시, <근대성의 구조>(민음사, 1999)(*하면 자본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거리는 생각만큼 멀지 않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각각 표방하였던 시장 합리성과 계획 합리성은 근대성이라는 공통 분보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보다는 공유하는 것이 더 많았다. ‘전근대’를 탈출하여 ‘근대’라는 공통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양자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을 뿐이다... 사회주의의 역사적 실패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근대 이후’를 겨낭하지 못하고, ‘전근대’를 탈출하는 이념적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데 있다. 그 결과는 사회주의는 더 이상 자본주의적 ‘근대’를 극복하는 해방의 이데올로기이기를 그치고, 자본주의적 ‘근대’를 따라잡기 위한 동원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였다. 그것은 사상의 패배였다.

 

-이 패배는 마르크스가 도모했던 프로메테우스적 진보의 길에 잠재된 위험이기도 했다. 생산성과 물질적 진보를 달성하기 위한 인류의 헌신적 노력을 상징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영웅관은 노동을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신성시한다. 이 점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마르크스의 영웅이자 부르주아지의 영웅이었다.(*이하 모든 강조는 나의 것.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해서는 얼마전에 '프로메테우스의 두 얼굴' 등의 글을 정리해놓은 바 있다.) 

 

 

-마르크스의 문화적 영웅을 프로메테우스에서 오르페우스나 나르시소스, 디오니소스로 대체하자는 마르쿠제의 빛 바랜 지적이,(H. Marcuse, "Eros and Civilization"(New York, 1962, pp. 146-47.) 내게 새삼 절실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1929년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타리옹이 ‘노동 타도!’의 슬로건을 제시했을 때, 1935년 혁명 러시아는 노동 영웅 스타하노프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7톤의 할당량 대신 102톤에 이르는 경이적인 양의 석탄을 캐낸 돈바스 탄광의 전설적 광부 스타하노프가 해방된 육체 노동자였다면, 노동을 거부한 초현실주의자 티리옹은 ‘초’해방된 지식 노동자였다. 스타하노프와 티리옹은 각각 프로메테우스적 해방과 디오니소스적 해방을 상징한다.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자신의 문화적 영웅을 프로메테우스에서 디오니소스로 대체할 때, 인간 해방과 노동 해방의 이데올로기로서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근대’의 물적 진보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의 토대가 될 때, 명징한 이성이 술에 취할 줄 아는 지혜와 결합될 때, 순백한 이성이 감성의 인간적 얼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방법주의의 정확성이 에세이적 스타일의 유연한 사고에 포섭될 때, 인간과 자연을 기계화하는 총체적 사물화라는 근대의 고질병은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여기서 '디오니소스'는 바타이유의 테마이기도 하다. 비생산적 소비로서의 에로티즘과 디오니소스주의.)

 

 

 

 

 

 

 

 

 

-혁명 후에 쿠바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된 체 게바라가 32층짜리 중앙은행 사옥 신축 공사 과정에서 보여준 일화는 이 점에서 시사적이다. 게바라는 이 고층 빌딩에 엘리베이터가 필요하다는 건축가 퀸타나의 논리를 끝내 수긍하지 못했다. 천식을 앓는 자신이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다면 건강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르트르가 “우리 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극찬했던 ‘60년대의 영웅’ 게바라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영웅적 헌신을 일반 노동자 대중에게까지 요구하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바라는 “자기 희생을 할 수 없는 인간은 새로운 인간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쿠바 국민들이 자신과 같은 프로메테우스적 영웅의 길을 걸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의 메커니즘 속에서 결국 ‘전인민의 노동 영웅화 혹은 프로메테우스와’는 근대화라는 국가적 목표 아래 디오니소스적 삶에 대한 인민들의 절실한 욕구를 억압하는 신화적 기제였을 뿐이다.(*나는 이것이 '체 게바라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여타의 겉멋과 구별되어야 하는. 게바라뿐만 아니라 대문자 인간(Man)을 요청하는 모든 휴머니즘은 언제나 범속한 인간들에게 '자아비판'을 요구한다. 이때 동원되는 논리가 '품성론'이고, 그 상용구가 '모름지가 인간으로서'이다. 그리고 그러한 요구를 감당하지 못할 때, 범속한 인간들은 이기적이며 반동적인 '벌레보다 못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은 '사촌이 땅사면 배아픈' 인간들을 상대하지 않는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바로 그러한 '이기적인 인간'을 기본단위로 설정한다. '거저 대충 남들이 죽거나 말거나', 그게 성공의 비결 아닌가?)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기획이 자주 ‘전인민의 프로메테우스화’를 요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삶의 리얼리즘을 놓고 볼 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요구일 뿐이다. 결국 이성의 기획이 순수하고 정확할수록, 그것은 일상적 삶의 현실과 멀어진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20세기의 역사가 잘 보여주듯이, 자신의 기획을 완성하기 위해 공동체를 통제하고 관리하며 계획하는 이념의 순수주의는 결국 그것을 거부하는 성원들을 배제함으로써, 스탈린주의나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를 배태한다.(*전체주의의 '배제'에 상응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방치'이다. 전자는 '죽이고' 후자는 '죽게 내버려둔다'. 어느 편이 더 '인간적'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자아의 자유로운 발전을 주장한다고 해도,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론은 노동의 물신화로 떨어질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전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노동의 집으로 개조하려 했다는 아도르노의 비판이나, 노동을 강조하는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연 지배라는 면에서 진보만 알았지, 사회의 진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결국 파시즘에서 엿보이는 기술 관료적 속성을 드러낸다는 벤야민의 비판은 실로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준다.(마틴 제이, <변증법적 상상력>, 돌베개, 1981)  

 

-한편 아도르노나 마르쿠제 혹은 벤야민에 앞서, 노동의 물신화를 정면으로 거부한 최초의 사회주의자는 마르크스의 사위 라파르그(Paul Lafargue)였다. 물레토의 피가 섞인 이 독특한 사회주의자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 노동의 물신화를 단호히 거부하고 노동과 놀이의 조화에 기초한 푸리에의 ‘매력적 노동’ 혹은 모리스의 ‘예술가적 노동’관을 추구했다...

-부르주아지의 노동 물신화와 금욕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디오니소스적 노동 해방을 부르짖은 이 저작이 20세기의 사회주의 근대화론에 시사하는 바는 간단하다. 스탈린주의의 프로메테우스적 진보의 주술에 걸린 현실 사회주의의 노동 영웅들을 구출하고, ‘사방이 술에 잠기는 축제’를 통해 그들의 탈진한 원기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 문명의 프로메테우스적 진보는 디오니소스적 해방의 디딤돌이 될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무차별 공세에 맞서 자신의 진정한 역사적 성과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한데, 탈합리적 디오니소스주의와 '역사적 방향성'은 궁합이 맞을 수 있는 것인지? 즉, 그것은 역설이 아닌가?)

 

 -탈이념의 시대에 이념의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프로메테우스적인 자기 헌신과 반역 정신이 동시에 요구된다. 디오니소스적 해방의 길이 디오니소스적 정서가 아니라 프로메테우스적 정신으로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은 역사의 또다른 역설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삶의 역설이기도 하다. 역설은 일직선적 진보의 논리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프로메테우스의 직선적 해방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의 휘돌아가는 곡선적 해방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이후에 내가 기대한 건 이 '곡선적 해방'에 대한 이론적 모색이었다. 하지만, '이념의 속살'을 매만지던 저자는 이내 '일상적 파시즘'과 '대중독재' 비판으로 물꼬를 돌렸다. 그게 일관된 논리에 근거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06. 02. 27.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 2006-02-27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류사가 고민해온 문제를 '한해' 고민해서 해결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근사치의 답들은 내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람구두님의 의견도 언제 듣고 싶군요...

로쟈 2006-02-2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봉착한 역설을 수용하자면, 제 생각엔 어떤 '프로그램 없는 프로그램'이 요청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프로그램 없음'이라고 투항하는 이들과, '확실한 프로그램'을 여전히 주장하는 이들을 저는 지지하지 않으며 신뢰할 수 없습니다. '프로그램 없는 프로그램'? 물론 아직 말할 수 없는(혹은 말해지지 않는) 프로그램입니다. 약간의 유희를 보태자면, 저는 그걸 '파라그램'이라고 부릅니다...
 

 

 

 

 

국내에는 '슬로베니아 라캉학파'로 소개되고 있는 지젝과 그의 친구들, 곧 류블랴나의 '이론정신분석학회' 멤버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이미지를 옮겨둔다. '모스크바통신'에 있던 내용에 약간의 첨삭을 가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소개내용을 갖고 있지만 당장은 옮길 만한 여력이 없다. 이 필자 소개는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의 러시아어본을 참조한 것이다(이 책의 러시아어판은 2004년 로고스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분량은 336쪽이고, 1,000부 발행. 개인적으론 모스크바의 기숙사방에서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던 책이다). 

전체 7명이 번역자로 참여하고 있고, 이 중 세 사람이 편집을 맡았는데, 기본적으로는 지젝의 영어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순수하게 류블랴나 학파 사람들의 글로만 묶어놓은 것이 영어본과의 차이점이다. 그래서, 영어본과 우리말 번역본에 들어가 있는 시옹, 보니체르, 제임슨의 글들이 빠지고(이들의 글에 대해서는 부록에서 요약해놓고 있다), 대신에 보조비치의 글 하나와 지젝의 글 세 편을 더 싣고 있다. 원래 지젝이 편집한 영어본도 슬로베니아어본을 근간으로 한 것인데, 슬로베니아어본은 2권짜리이다. 따라서, 더 들어간 보조비치나 지젝의 글 중 일부는 이 슬로베니아어본에만 들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영어본/한글본과 다르게 더 들어간 보조비치의 글은 '벤담과 히치콕'이고, 지젝의 글은 <삐딱하게 보기>에 들어가 있는, 히치콕에 대한 두 편의 글과 “Is There a Proper Way to Remake a Hichcock Film?”이다. 그러니까 히치콕에 대해서 지젝을 위시한 류블랴나 학파의 대표적인 글들이 모두 모아져 있는 것이 이 러시아어본의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의 맨마지막 쪽에는 지젝과 그 일당들에 대한 역자(A. 스미르노프)의 간략한 소개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잠시 옮겨보겠다.

먼저, 작년에 나온 지젝의 대담집(왼쪽 사진, 오른쪽은 러시아어본 <상호수동성>)에서도 읽을 수 있는 내용이지만, 이 ‘학파’의 공식명칭은 '이론 정신분석학회'(영어로는 ‘Society of Theoretical Psychoanaysis’쯤이 될까?)이고, 이걸 러시아에서는 그 근거지 명칭을 따서 ‘류블랴나 학파’라고 부른다(지젝에 따르면, 처음에 이건 학회/학파라기보다는 그냥 자신과 돌라르가 가끔 만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자신이 회장이고, 돌라르가 부회장!). 이하의 내용은 번역이다.

'이론 정신분석학회' 혹은 '류블랴나 학파'는 1980년대 초에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과 믈라덴 돌라르의 활동의 결과로 형성되었다. 하지만, 그 초석은 1970년대 후반, 지젝과 돌라르가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의 텍스트를 활발하게 연구하고 번역할 때 놓여졌다. 논문모음집인 'Everything you always wanted to know about Lacan (But were afraid to ask to Hichcock)'(London;New York: Verso, 1992)는 이 그룹(여기에는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밀란 보조비치, 알렌카 주판치치, 즈드랍코 코베, 레나타 살레츨 등이 또한 가담한다)이 영미 비평계에서 광범위한 명성을 얻게 되는 첫번째 책이 되었다. 이 책에는 영화감독 히치콕에게 바쳐진, 슬로베니아어로 출간된 두 권의 모음집에 실린 논문들이 들어가 있었다. 이 라캉 철학 그룹의 공동작업의 계속적인 결과들은 테마별 모음집으로 출간됐다: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응시과 목소리>(1996), <코기토와 무의식>(1998), <섹슈에이션>(2000)(*이 책들은 모두 듀크대학출판부에서 나오고 있으며 지젝과 살레츨이 편집을 맡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대표적인 학파 구성원들에 대한 소개가 이어지고 있는데, 별다른 첨삭없이 정리해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미란 보조비치(1957년 8월 12일생)는 류블랴나에서 태어나서 류블랴나대학 철학부에서 공부했다. 1996년부터 류블랴나대학 조교수(혹은 강사)로 있으며, 전공은 17-8세기 유럽철학사이다. 그의 책으론 <암흑지점(An Utterly dark spot)>(영어본, 2000/ 국역본, 2004)이 있다.

*믈라덴 돌라르(1951년 1월 29일생)는 마리보르(?)에서 태어나서 류블랴나대학의 철학부와 파리 8대학(1979-80), 그리고 웨스트민스터대학(1989-90)에서 공부했다. 1996년부터 류블랴나대학 철학부 조교수(혹은 강사)이며, 전공은 독일고전철학, 구조주의, 정신분석이다. <이론 정신분석학회>의 부회장. 저서로는 <헤겔의 정신현상학1, 2>(1990, 1992)가 있다(*돌라르의 이 주저들은 슬로베니아어로 씌어진 것인데, 예고만 되고 아직 영역본이 나오지 않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1949년 3월 21일)은 류블랴냐에서 태어나 류블랴냐대학의 철학부에서 공부했다. 1979년부터 1998년까지 ‘사회학과 철학 연구소’(1992년부터는 ‘사회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했다. 1998년부터는 류블랴나대학의 철학부 연구원이다. <이론 정신분석학회>의 창립자이자 회장. 러시아어로 번역된 그의 저작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99),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2002),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2003), <레닌에 대한 13가지 경험>(2003)이 있다.

*알렌카 주판치치(1966년 4월 1일생)는 류블랴나에서 태어나 류블랴나대학 철학부에서 공부했다. 철학연구소의 연구원이며, ‘현대철학연구’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그녀의 책으론 'The Shortest Shadow: Nietzsche’s philosophy of the two' (2003)이 있다(국역본은 <정오의 그림자>).

여기까지가 소개인데, 주요 멤버인 레나타 살레츨에 대한 소개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지젝의 두번째 부인이기도 했다).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러시아어본 뒷표지에 간략하게 실린 소개로 대신해보면, “레나타 살레클은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서 류블랴나의 <이론 정신분석학회> 대표자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류블랴나대학의 범죄학연구소와 미국의 미시건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지젝과 이 류블랴나 학파의 주요 소개 창구는 ‘후도줴스트벤느이 주르날’(‘예술저널’)이며, 살레츨의 <도착들>과 지젝의 <부서지기 쉬운 절대성>을 러시아어로 옮기고 서문을 쓴 빅토르 마진(V. Mazin)이 이쪽의 전문가라 할 만하다...

06. 02. 24.  


댓글(2) 먼댓글(1)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슬로베니아 라캉학파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15 17:19 
    지젝과 그의 친구들을 흔히 'Slovenian Lacanians'라고 부른다. '슬로베니아 라캉주의자들' 혹은 '슬로베니아 라캉학파'라고 옮길 수 있겠다(이들에 관해서는 언젠가 '지젝과 그의 친구들'이란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얼마전에 나온 사라 케이의 <슬라보예 지젝>(경성대출판부, 2006)의 서론에서 이들에 대한 한 문단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오역들이 눈에 띄어서 교정해둔다.   "지젝은 뛰어난 사상가이다
 
 
비로그인 2006-02-25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학자들이 상당히 한 미모(!)하는 군요. 특히 늑대같이 생긴 지젝에 비해서....(미녀와 야수?)

로쟈 2006-02-26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데, 미모 이상의 특출한 지성의 소유자들입니다. 좀 불공평하게도.^^
 

틈나는 대로 이전에 쓴 글들을 다시 정리하고 있다. 혹은 이미지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하고 있다(이게 요즘 '공부'를 하다가 머리가 막힐 때 하는 나의 '단순작업'이다). 이 글은 모스크바 통신에서 '문학사가의 삶, 영화감독의 삶'이란 제목으로 띄운 글의 일부이다. 러시아의 저명한 문학사가 바쭈로와 영화감독 랴자노프를 기리며 혹은 기억하며 여기에 다시 옮겨둔다.

미하일 레르몬토프와 관련하여 기억해 둘 만한 이름은 저명한 러시아 문학사가이자 푸슈킨 시대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서 몇 년 전에 작고한 바짐 바쭈로(V. Vatsuro; 1935-2000) 교수이다(왼쪽은 청년 바쭈로이고, 오른쪽은 노년의 바쭈로이다).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푸슈킨연구소>(러시아어를 직역하면, ‘푸슈킨의 집’이다)에 오래 봉직한 걸로 아는데, 나는 그 연구소에서 학위를 받은 후배에게서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간혹 나도 자신이 전공자인지 의심스럽다!). 얼마전에 언급한 유리 로트만과 같은 세대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1922년생인 로트만보다 13살이나 아래이니까 한 세대 정도 차이가 난다.

로트만이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인정한 학자였지만, 바쭈로란 이름이 전공자들에게조차 생소한 것은 그가 (체계를 만드는) ‘문학이론가’나 (작품을 해석하는) ‘문학연구자’라기보다는 작품 안팎의 1차 문헌자료를 주로 다루는 ‘문학사가’였기 때문이다(최근에 나온 그의 논문선집에서도 그는 “탁월한 러시아문학사가”로 소개돼 있다). 때문에, 그의 책들에서는 우리에게 생소한, 푸슈킨 시대(19세기 전반기)의 마이너 작가들이 아주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옆에서 보기엔, 지나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우리 같으면 대학원에서도 안 다루는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그 바쭈로의 유고논문집들이 나오고 있다. 작년에 NLO(한번 소개했던 출판사)에서<러시아의 고딕 소설>이 출간됐고(544쪽, 2,000부 발행, 왼쪽의 책), 1994년에 초판이 나왔던 <푸슈킨 시대의 서정시: ‘엘레지파’>의 2판이 나우까출판사에서 나왔으며, 바로 지난주에는 (앞에서 말한) <논문선집>이 나왔다(빨간색 하드카바에 ‘바쭈로’란 이름이 큼직하게 박힌 이 책은 824쪽이고, 발행부수는 표시돼 있지 않지만, 많이 찍었을 거 같지는 않다. 오른쪽의 책).

필팍(인문대학)의 서점 <그노지스>에서 200루블에 산 이 책에서 나에게 인상적인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책 중간에 8쪽에 걸쳐 실린 그의 사진들이고, 다른 하나는 연구업적 연보. 먼저, 사진. 첫사진은 어린 바쭈로가 엄마인 류드밀라 발렌찌노브나의 품에 안겨서 목을 끌어안고 있는 사진이다. 쌍꺼풀이 크게 진 눈에(눈매가 엄마를 닮았다) 볼살이 도톰한, 얌전한 개구장이처럼 생긴 이 아이가 나중에 책에 파묻혀 사는 문학사가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장에는 1962년, 그러니까 27살(우리나이로 28살)의 바쭈로가 나온다. 70년대가 넘어가면 바쭈로는 두툼한 뿔테안경을 쓰고 얼굴이 콧수염과 구레나룻으로 뒤덮인 모습이지만, 20대 후반의 젊은 바쭈로는 아주 핸섬한 청년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 스냅사진으로 찍혔다. 이어지는 사진들은 대부분 그가 다른 학자들과 같이 찍은 사진들이다(1991년의 블록학회에서 로트만과 담소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도 들어 있다. 둘 다 머리가 희끗하다). 가족 사진이 없는 것이 아쉽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는 23쪽에 걸쳐서 모두 295건에 달하는 그의 연구업적 목록이 나와 있는데, 약간 의외로 청년 바쭈로의 초기연구는 레르몬토프에 집중돼 있다. 그리고 놀라운 건 그가 1959년에 나온 레르몬토프 전집(V. 마누일로프 편집)의 2권과 3권에 각각 “레르몬토프의 드라마”와 “레르몬토프의 서사시”란 작품해제를 싣고 있다는 사실이다. 1959년이면 그의 나이 24살 때인데, 그때 이미 학계(혹은 편집자 마누일로프)의 인정을 받을 만큼 유능한 학자(학생이 아니라)였다는 얘기가 된다! 그가 푸슈킨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하는 건 1963년부터이다.

바쭈로의 이러한 유고집들이 나오는 데 가장 애를 쓰고 있는 사람은 미망인 바지마 에라즈모비차 따마라 페도로브나 셀레즈뇨바 여사이다(이름이 왜 이렇게 긴지는 모르겠다). 지난번 통신문에서 ‘미용사의 남편’ 얘기를 잔뜩 했지만,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학자의 아내’는 주로 그런 일들로 여생을 보내게 된다(그게 그녀식의 ‘배꼽춤’인 것이다). 애서가의 아내는? ‘애서가의 운명’에서 암시한바 있지만, 아마도 책들을 헌책방에 근수로 넘기면서 여생을 보내지 않을까?...



다시 신(新)아르바트거리의 <돔 끄니기>(영어로는 '북스토어'). 2층의 신간매장에 가서 열심히 찾은 건 영화관련서들이었는데, 놀랍게도 정말 초라했다. 영화이론서들은커녕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 같은 종류의 책도 전혀 없었고, 러시아 영화감독론도 전무했다(두어 권 나온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책들도 당연히 없고, 새로 나온 에이젠슈테인의 저작집들도 없고). 그나마 욕심이 났던 책은 가장 최근에 나온 것으로, 영화 속의 20세기 러시아사를 주제별로 짚어본 책이었는데, 가격이 400루블을 훌쩍 넘었다(18,000원 가량). 들고 간 돈도 얼마 없었기 때문에, 이를 가는 수밖에. 그래도 발행부수를 보니까 이해가 갈 만했다. 500부 발행. 그러니까, 이 책을 사게 되면, 500명 안에 드는 것이다!

시나리오 같은 경우 조그만 소책자로 나오는 정간물이 있었는데, 대부분 내가 못 들어본 최근의 영화들이어서 손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직원에게 라쟈노프에 관한 책이나 그가 쓴 책이 없는지를 물어봤는데, 두 권을 찾아주었다('랴자노프'의 러시아어 발음은 '리자노프'이다). 하나는 얇은 것으로, 시인이자 극작가이기도 한 이 영화감독과 그 주변사람들의 짤막한 글들을 모은 ‘그림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두툼한 ‘회고록’ 혹은 ‘자서전’이었다. 몇 번 망설이다가 (그래봐야 1만원도 안되는 책값이다!) 자서전을 들고 계산대로 갔다.



바그리우스출판사의 ‘나의 20세기’ 시리즈(정치가나 작가들이 대부분인데, 영화감독 중에는 페데리코 펠리니나 밀로스 포만 등의 이름이 보이고, 배우들 가운데는 브리지트 바르도와 캐서린 햅번이 눈에 띈다) 중의 하나로 나온 <엘다르 랴자노프>는 2000년에 나온 걸 이 출판사에서 작년에 다시 찍은 것이다. 하드카바에 637쪽 분량이고, 흑백화보도 풍성하게 들어가 있기 때문에 돈은 안 아까운 책이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젊은 시절의 랴자노프).

일단 이 책에서도 화보들을 먼저 보게 되는데, 세 군데에 나뉘어 실린 화보의 제일 첫 페이지에는 (아마도 본인이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사진인 듯한) 20세의 라쟈노프가 나온다. 중년 이후의 라쟈노프와 비교해보면, 도저히 동일인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잘생기고 퍽 진지해 보이는 청년이다. 그가 1927년생이니까 40년대 후반에 찍은 사진일 것이다. 그런 인상이 30대 초반 정도까지도 유지되는 듯하다. 머리가 이미 빠지기 시작하지만, 짙은 눈썹의 강인한 눈매, 그리고 단단한 턱은 남자다운 매력을 물씬 풍긴다. 라쟈노프 자신이 “이건 테너 가수가 아니라, 나입니다!”라고 설명을 달아놓았을 정도이다.

20세의 사진 뒤쪽에는 그의 엄마가 백일도 안된 라쟈노프를 안고 찍은 사진이 있다. 벌거벗은 채 장난감을 한 손에 들고 있는 8개월 된 라쟈노프도 보이고(엄마를 닮았다), 서너살쯤 된 라쟈노프가 아버지와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도 그 옆에 있다(아빠를 닮았다). 이 아이가 나중에 러시아의 거장이 된다! 그의 부모는 라쟈노프가 3살 때 이혼했으며, 아버지는 1938년(스탈린 시대 최대 숙청기)에 체포되었다고(아마 총살되었거나 강제수용소에서 죽었을 것이다).

20대엔 주로 다큐멘터리 작업에 동원되다가 그가 극영화 감독으로서 정식 데뷔하게 되는 것은 1956년이다. 그러니까 그의 나이 29세 때이고(우리 나이로 30세), 해빙기(흐루시초프 시대)의 대표적인 풍자코미디인 <카니발의 밤>이 그의 데뷔작이다. 이때부터 라쟈노프는 헝클어진 머리에 얼굴이 점점 넙적해지는 중년의 아저씨 타입이 된다. 거기에 선글라스를 끼면, 누가 봐도 공사장 작업반장이거나 영화감독이다. 맨마지막에 실린 근년의 사진은 약간 수척해진 백발의 노장(老將)의 모습을 보여준다. 칠순을 넘긴 라쟈노프이지만, 눈빛만은 아직도 예리하다.

국내에 이 거장의 영화들이 소개되지 않은 건 유감스럽다. 가장 오랜 기간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영화의 현장을 지켜왔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대중과 호흡을 같이 해 왔던(그의 영화 대부분이 흥행에 성공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감독이기에 그러하다. 비디오CD로 나온 그의 작품을 모두 구해보니까 9편이다(그는 비디오CD 레퍼토리 중 가장 많은 편수를 가진 감독이기도 하다). 자서전의 책날개에 실린 11편의 대표작 목록 중 근작에 속하는 두 편이 빠져 있을 뿐이다(이제 그의 영화에 관한 학술논문이나 비평문들을 도서관 등에 다니면서 구해봐야겠다).

가장 최근에 구한 1983년작 <잔혹한 로맨스>에는 연기에도 일가견이 있는 영화감독 니키타 미할코프가 주연을 맡고 있다(총을 들고 있는 남자. 라쟈노프가 연기지도를 했을까?). 국내에 출시된 영화들 중에서는 자신이 감독한 <(자동)피아노를 위한 희곡>, <위선의 태양>, <러브 오브 시베리아>에서 그의 연기를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러시아 영화의 황제’ 미할코프는 현재(2004년) 칸느에 가 있다. 얼마전 뉴스에서 현지 표정을 전해주었는데, 얼핏 보기로 이번 영화제에서 단편영화 심사위원장인가를 맡고 있다.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곳 <이즈베스찌야>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빈손으로 돌아가진 않을 거 같다고 점치고 있다. 그건 그 영화가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인 퀜틴 타란티노의 ‘취향’이기 때문이라고. 맞아떨어질 것인지?(*그걸 점치던 때가 있었다!) 

참고로, 그의 최고작은 해마다 연말이면 러시아 TV에서 방영되는 <운명의 아이러니 혹은 목욕 잘 하셨습니까?>(1975). 보통은 그냥 <운명의 아이러니>라고 부르는데, 사회주의 러시아의 최전성기를 대변하는 영화이다. 아래는 그 영화에 등장하는 사랑스러운 두 주인공 커플이다.

06. 02. 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