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러시아문화의 이해' 시리즈이다. 예전에 한국인이 러시아에 대해 갖고 있는 갖고 있는 상투형, 상투적인 이미 지 혹은 고정관념 세 가지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걸 좀 보완하겠다. 일단 모스크바 통신의 한 대목을 옮겨놓겠다.

 

 

 

 

한국인이 러시아에 대해 갖고 있는 상투적인 이미지 혹은 관념 세 가지는 크레믈린, 보드카, 그리고 러시아 미인들이다. 그래서 보통 한국인들의 모스크바 관광코스는 크레믈린의 붉은 광장에 가서 사진 한 장 찍고, 바로 앞 볼쇼이극장에서 발레공연을 보고, 한국 가라오케에서 러시아 여성들의 접대를 받으며 보드카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한편으로 관광객들이 선물로 가장 많이 사 가는 것도 보드카와 러시아 민속인형인 마트루슈카이다. 이미지들을 나열해 보면, 먼저 크레믈린.  

그리고, 볼쇼이극장에서의 공연 관람. 레퍼토리는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이면 금상첨화이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보드카. 한국인들이 가장 애용하는 보드카인 '스탄다르트', 그리고 한국인이 상상할 법한 러시아 여성(만지지는 마시길).

 

지난 학기(2004년 1학기) 수업시간에 그런 얘기를 했더니, 세 번째에 대해서는 담당 교수나 동료 학생들(독일 학생들이었는데) 아무도 동의를 하지 않았다(그걸로 봐서, 러시아 여성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념은 일종의 판타지이다. 이스라엘에도 그런 판타지가 있는 모양인데, 며칠 전에는 러시아여성들은 이스라엘 접객업소에 팔아넘긴 업자가 구속되기도 했다). 그들이 ‘미인들’의 나라로 꼽은 건 프랑스나 스페인 등이었다(한편으로 러시아 남자들은 동양에서 온 ‘평범한’ 여학생들을 예쁘다며 추근거리기도 한다). 물론 최근에는 늘씬한 테니스 스타 마리야 샤라포바가 한국인이 상상하는 러시아 여성의 '표준치'일는지도 모르겠다.

Мария ШараповаМария Шарапова

물론 러시아 여자들이 평균적으로 (같은 서양이라도) 미국 여자들보다는 아름다운 편이다. 그건 키가 크고, 눈이 크고(속눈썹이 유난히 길다), 콧대가 높으니까(거기에다 더 최악인 건 지성미마저 풍길 때이다), 그런 걸 미의 기준으로 갖고 있는 한국인의 안목에서는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 여성들 대부분이 미인축에 드는 것은 아니며(어느 나라, 어느 인종이건 상위 5% 정도는 다 아름답다), 그나마 요즘은 미인들의 대부분이 (1)해외에 나가 있거나 (2)벤츠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두 가지 유력한 설이다) 길거리에서 ‘아찔한’ 미인들과 마주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전혀 없지만 않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그런 미인들과 마주치면 또 어쩔 텐가? 당신은 ‘아름다움’을 견뎌낼 수 있는가?!(추(醜)만이 우리를 고문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더 견딜 만한 건 ‘넓게 보아’ 아름다운 쪽 정도이다(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그 정도에 만족할 일이며, 혹 당신이 러시아에 온다면 엉뚱한 기대는 하지 말 일이다. 뭐라, 결혼을 하겠다고? 영화 <버스데이 걸>(2001)을 따라서 인터넷으로 주문해 보시길. 당신을 수갑 채워줄 러시아 여인이 배달될지도 모른다. 당신의 판타지 속에서...

06. 03. 07.

P.S. 본문에서 제시한 상투형은 아무래도 '남성 버전'인 듯하다. 여성 버전을 잠시 상상해보면, 시베리아의 자작나무숲은 어떤가(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를 참조할 수 있겠다). 혹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실제로 타본 사람은 절대로 아무도 권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름날의 백야. 사진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거기에 페테르부르크의 여름 정원.

끝으로 '삶에 혹독함에 굳어버린 얼굴들'. 일리야 레핀의 '볼가강의 배끄는 사람들'(1873).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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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0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번째 고정관념에 덧붙여 "그토록 아름답던 여인"이 결혼하면 "푹 퍼진다"가 있었드랬습니다..-.-;;

로쟈 2006-03-0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토록 아름답던 여인'이 러시아 여성인가요?

비로그인 2006-03-07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보고 호기심에 열어봤는데, 제가 상상하는 러시아는 없네요. 전 모래황무지에 칼바람만 살고 있는 벌판, 그 위를 지나고 있는 기차칸 안에 있는 추위나 기타 삶의 혹독함에 굳어버린 사람의 얼굴, 그리고 피아노가 딱 떠오르는데.. 제가 여자라서 그런가요?.. 보드카도, 러시아 미녀도 떠오르지 않을 걸 보니...ㅎㅎ 글 잘 읽었습니다.^^ 러시아 너무 가보고 싶어요~

로쟈 2006-03-07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 버전도 더 '상상'해보았습니다. 한데, '삶의 혹독함에 굳어버린 사람의 얼굴'은 러시아만의 것은 아닌 듯한데요.^^

twoshot 2006-03-08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토록 아름답던 여인'이 러시아 여성만은 아니겠으나 저의 댓글은 러시아여성을 전제한 것이었습니다. 중국동포인 제 친구의 말도 그렇고 결혼 전과 후과 많이 다르다는 얘기였읍니다...쿨럭...

로쟈 2006-03-08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 전과 후과 많이 다르다"도 러시아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겠네요.^^

로즈마리 2006-03-13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하면...왠지...도스토예프스키만 생각나는데...ㅠㅠ 그리고 처절한 가난의 냄새...그게 제가 가진 선입견? 인듯
 

'러시아 문화의 이해'란 과목의 강의 첫날이었다. 이번에 처음 가보는 캠퍼스인지라 조금 일찍 나섰어야 했지만 예의 늑장을 좀 부리다가 5분 지각하면서 강의실에 들어섰다. 생각보다는 많은 학생들이 앉아 있었는데 아마도 연휴에 지각으로 수강신청한 학생들이 좀 되었던 모양이다. 처음 맡은 과목은 아니어서 수업준비에 많은 공력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제대로 하자면 한 주에 책 한권 분량은 읽어야 한다. 하지만, 딜레마스러운 건 그렇게 나 자신을 업데이트하는 게 수강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

 

 

 

 

가령 러시아 사학자인 리처드 파이프스 교수의 'Russian under the Old Regime'(1974) 같은 고전적인 역사서도 읽고는 싶지만(나는 책상에 놓여 있는 이 책의 머리말만 읽는다. 한편 이 책은 재작년에 러시아어본도 나왔다. 한국어본은?), 읽을 시간을 내지 못한다(방학때 뭐했느냐고? 방학때 강사료가 나오나? 나는 '무임금 무노동'의 원칙을 지킨다). 교양 교재로 추천하기에는 이래저래 너무 방대한, 하지만 경탄할 만한 저작 <나타샤 댄스>(이카루스미디어, 2005)에서 저자 파이지스가 주제별로 추천하고 있는 도서들을 일람하면서 또 10여 권 이상의 책들을 메모해 두었지만, 그걸 다 챙기다가는 한 달 강사료가 날아갈 것이다. 그래서 이래저래 건강에 좋은 건 그냥 참아두는 것이다. 적당히 안 읽고 강의하기.

한데, 그런 건 과목 자체의 요구이기도 하다. 교양과목은 '인포테인먼트' 성격이 강해서 좀 '진지한' 10% 정도의 학생을 제외하면 적당한 지식과 적당한 재미를 적당히 (얼)버무려야 '효과'를 볼 수 있다(실상 강의명이 '러시아 문학의 이해'가 아니라 '러시아 문화의 이해'라는 것 자체가 이미 그러한 '에누리'를 전제한다. 전공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내가 강의하는, 강의해야 하는 내용을 내가 학생일 때는 들어본 적이 없다!). '강사가 아는 게 많다'는 게 이른바 '좋은 강의'의 한 필요조건일 수는 있겠지만, 충분조건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게다가 '재미'는 애드립으로만 다 충당되는 것도 아니어서(직업이 개그맨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는 '준비'도 해야 한다. 그 '어느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첫 대면 강의의 목적 중 하나이다. 이것이 그간의 강사 '짬밥'으로 터득한 바이지만, 이러한 노하우로도 수위의 강의평가를 얻어내지 못하는 걸 보면 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분들이 계신 것(이 분들은 언제 은퇴하시는가?).    

강의 자료로 쓸 만한 자투리들을 가끔 정리해놓으려고 하는데, '서비스' 문제에 대한 건 작년 연초에 쓴 모스크바 통신에서 따온 것이다. '현장감'은 좀 있으나 이미 '지나간 얘기'이기도 해서 멋쩍긴 하지만, 멋쩍은 일이라고 가려온 처지도 아니므로 그냥 밀어붙이기로 한다.   

2005년 새해가 밝았다. 어제의 일이다. 러시아는 어제부터 1월 9일까지가 공식 휴일이다. 연말에 개정된 법에 따라 그렇게 됐는데, 덕분에 다음 한 주 내내 생활이 불편할 듯하다. 일단 휴일이면 기숙사가 있는 본관 건물의 중앙통로가를 막아놓는 탓에 전철역이건 인터넷카페건 밖에 좀 나가자면 400미터쯤을 돌아나가야 한다. 게다가 인문대학 구내의 PC방이 놀기 때문에 디스켓을 사용하려면 카페막스(인터넷카페)에 가서 매번 10루블(400원)을 더 내야 한다(*사진은 내가 주로 이용했던 대학구내 카페막스의 카운터. 오른쪽은 카페막스의 로고이다).

10시간짜리 인터넷 이용료는 이미 지난달에 400루블에서 550루블로 대폭 올랐다(러시아는 인터넷 이용료가 더 비싸지는 드문 나라일 것이다). 그렇다고 1시간 단위로 끊자니 최고 90루블까지 하므로 (왜 이렇게 비싸냐고 따지는 대신에) 결국은 울며 겨자먹기로 550루블을 주고 끊는 수밖에 없다(10시간을 한달 이내에 써야 한다). 연중무휴 24시간 영업이라는 카페막스도 12월 31일에는 문을 닫았고, 듣기에 어제도 단축영업을 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연초인바, 다시금 새겨둘 것은 “착취가 없으면 서비스도 없다”는 문구이다(이건 거꾸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서비스가 없으면 착취도 없다.” 이걸 운동주의적인 문구로 바꾸면, “서비스를 없애야만 착취도 없어진다”).

자본주의화(민영화) 이후에 러시아 또한 ‘서비스(=착취) 없는 사회’에서 ‘서비스(=착취) 사회’로 이행해가고 있는바, 아직은 초보적인 구석이 많아서 어느 상점이나 식당에서건 불친절은 예사로 경험하는 일이다(그러니까 아직도 ‘서비스’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가 많다). 이런 러시아와는 반대로 ‘서비스 사회’에서 ‘서비스 없는 사회’로 얼마간 거꾸로 이행해간 나라들도 있으니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서유럽의 ‘선진국’들이다(서로 비슷하게 ‘불편한’ 나라인 영국과 러시아는 둘다 석유 수출로 먹고 산다는 점에서도 처지가 닮았다).

지난달에, (인구가 고작 100만명임에도) 영국의 제2도시라는 버밍엄(버밍검?)에 유학중인 후배가 모스크바에 잠깐 들러서 전해준 얘기에 따르면, 멀쩡한 지하철이 예고도 없이 안 다니고, 버스 기사가 운전중에 손님들에게 그냥 다 내리라고 요구하는 일도 종종 있다고. 일반 시민들은 거기에 익숙해서인지 곧바로 다른 교통수단을 찾는다고 한다(후배의 말이 프랑스는 이런 영국보다도 한술 더 뜬다고). 일반 교통요금이 모스크바보다 10배는 더 비싼 도시에서(전철요금이 모스크바가 400원인 데 반해, 버밍엄은 4,000원이다, 그것도 한 구간이) 그런 불편을 겪으면서도 불평없이 살아간다는 건 우리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그런 식으로 서비스가 없는/부족한 만큼 착취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만큼 ‘인간적’일 거라는 것. 적어도 ‘인간적인 사회’를 ‘착취없는 사회’로 우리가 정의하는 한에서는 말이다.

‘서비스’란 무엇인가? 외래어로서 이미 국어사전에도 올라가 있는 이 말의 사전적 정의는 먼저, “생산된 재화를 운반/배급하거나 생산/소비에 필요한 노무를 제공함”이란 뜻이다. 서비스 없는 사회, 즉 (보다) ‘인간적인 사회’는 그런 재화나 노무를 제때에(혹은 아예) 배급/제공하지 않는 사회이다(생산자/노동자에겐 쉴 권리가 있다!). 당연히 ‘인간적인 사회’는 ‘없는 게 많은 사회’이며 ‘줄이 긴 사회’이다(‘인간적인 사회’가 고려하는 것은 인간의 필요(need)이지 욕망(desire)이 아니다). 부족한 재화나 노무를 배급/제공받기 위해서 ‘평등한’ 인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줄을 서는 것밖에 없다. 이 ‘줄 문화’를 전면적으로 다룬 문학작품이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작가의 한 사람인 소로킨의 <줄>이다(우리말로는 <세계의 문학>에 번역된바 있는데, 단행본으로는 출간되지 않았다).



모스크바는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아직도 러시아에는 (상점에서의) 줄서기 문화가 남아있으며(불과 10년전만 하더라도 모스크바에서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기 위해서는 1시간 이상씩 줄을 서야 했다. 그때 유학왔던 친구는 그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 한번에 3-4인분씩 폭식을 하곤 했었다. 하긴 지금도 맥도널드에 가면 10-15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2004년판 회화교재에조차도 ‘상점회화’의 핵심으로 ‘줄서기’가 다루어진다. 가령, “당신이 (이 줄의) 마지막 사람입니까?”라거나 “제 자리 좀 맡아주세요” 같은 표현들이 그런 것들이다. 당신 생각에 이 (인간적인) ‘줄 서기’가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왜냐하면, 자기 자리를 맡아달라고 해놓고 한번에 여러 군데에 줄을 서기 때문이다(물건을 한 종류만 사는 게 아니므로).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줄을 짧게 서기 위해서는 절묘한 시간 계산과 순발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오랜 줄 문화의 경험 때문인지 러시아 사람들은 웬만한 줄서기에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않는 듯하지만, 이런 걸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은 저절로 욕이 나온다. 가령, 공항 입국장에서부터 짐을 들고 2시간씩 서서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모스크바 국제공항에서의 그런 모습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하는데(거기에 익숙한 사람은 1시간내로 입국장을 빠져나올 경우 ‘만세!’를 부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국제공항이야말로 가장 ‘사회주의적’이며, 가장 ‘인간적’이라고 할 만하다. 일반적으론, 그걸 뭉뚱그려서 ‘러시아적’이라고도 하지만, 그건 불충분한 일반화이다. 요는 그러한 ‘인간적인’ 태도의 전제인바, 그것은 “(같은 인간으로서) 내가 왜 굳이 당신한테 애써 봉사해야 하는가?”이다(“당신이 그렇게 잘났나?”). 인간은 평등하지 않은가?!

거기서 고려해 볼 수 있는 것이 ‘서비스’의 두번째 사전적 의미인바, 그것은 “개인적으로 남을 위하여 돕거나 시중을 듦”을 뜻한다. 이걸 달리 ‘봉사’ 혹은 ‘접대’라고 말한다. ‘봉사’란 ‘접대’를 순화시킨 말인바, 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서비스가 없는 사회’로서의 ‘인간적인 사회’란 ‘접대가 없는 사회’이다. 그리고 그와는 대척점에 놓여 있는 ‘비인간적인 사회’, 돈만 있으면 ‘서비스 만땅’인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다. 예컨대, ‘돈있는’ VIP는 모스크바 공항도 귀빈실을 통해서 바로 빠져 나간다. ‘자본주의 러시아’에서 2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건 ‘돈없는 사람들’이지 자본가들이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기본 원료는 봉사료/접대료이다(그래서 ‘봉사비/접대비’가 된다). “난 네가 돈을 주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가 자본주의의 캐치프레이즈이다. 이건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이현세 만화의 구호이자(‘까치’의 대사) 이장호의 <공포의 외인구단> 주제가를 패러프레이즈한 것인데, 그러한 패러프레이즈가 암시하는 바는 이 둘이 동형적이라는 것이다. 둘 모두에 걸려 있는 것은 ‘욕망(desire)’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욕망의 무한성에 대응하는 지표이다(때문에 “돈을 그 정도 벌었으면 됐지”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동형성을 간과하는 태도가 ‘순진한 태도’이며, ‘소녀적 태도’이다(즉,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에 감동하는 태도가 ‘소녀적 태도’인바, 물론 이것은 곧 ‘아줌마적 태도’로 전화하게 된다. “돈이나 벌어오면서 그런 소리를 해!”).

자본주의의 기본 원료가 봉사/접대인 한에서, ‘접대 없는 자본주의’란 말은 ‘인간적인 자본주의’만큼이나 모순형용이다(‘앙꼬 없는 찐빵’이란 얘기다). 혹은 (지젝이 즐겨 인용하는) ‘카페인 없는 커피’나 ‘섹스 없는 섹스’ ‘아편 없는 아편’ 정도쯤 될까? 그렇다면, 접대의 한 유형이자 대표종(種)으로서의 성접대의 경우는 어떤가? 몇 달 전부터 한국에서는 (새로운) 성매매 방지법이 발효/적용 중인 듯한데, 좌파라면, (개량주의적/타협적 좌파가 아니라) 적어도 자본주의의 타파만이 인간적인 사회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근본주의적/비타협적 좌파라면 그러한 법안에 대해 반대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존권’을 주장하는 접대여성들(성노동자들)이나 포주들과는 좀 다른 이유에서 말이다.


 

 


지젝이 주장하는바, “우리가 레닌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즉 진심으로 빈민의 곤경을 동정하는 어떤 선한 신부를 동료 볼셰비키가 칭찬하는 것을 들었을 때의 레닌처럼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볼셰비키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술에 취해 농민들에게서 부족한 자원의 마지막 한 조각마저도 강탈하고 그들의 아내들을 강간하는 신부들이라고 논파했다. 그들은 신부가 객관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 농민들로 하여금 분명히 자각하도록 한 반면, ‘선한’ 신부들을 그들의 통찰을 어지럽혔다는 것이다.”(<이라크>, 198쪽)

조금 번안해서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타파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연말 보너스를 챙겨주는) ‘선한’ 자본가들이 아니라 (보너스는커녕 월급까지도 떼먹는) ‘악독한/악랄한’ 자본가들이다(다행히도/불행히도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고 한다). 이런 자본가들이야말로 노동자들로 하여금 정말로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분명히 자각하도록” 할 것이 아닌가? 그런 사정은 성접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의 표본으로서의, 성의 무한 상품화이고 성노동자에 대한 악독한/악랄한 착취이다(군산에서인가 이리에서인가 시범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나?). 그러한 착취만이 전선(戰線)을 교란시키지 않고 분명하게 해줄 것이기에.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지젝은 금융 투기와 인도주의적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소로스 같은 인물들은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시장 폭리자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훨씬 더 위험하다”(같은 쪽)고 말하는 것이다(아이러니컬한 것은 헝가리 출신이자 칼 포퍼의 제자임을 자임하는 그 소로스가 하는 ‘인도주의적 활동’에 구 공산권 국가들의 “문화적이고 민주적인 활동을 위한” 재정지원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고, 러시아에서 출간된 지젝의 책들도, 전부는 아니지만, 이 소로스 펀드의 지원하에 출간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지젝이 지난 미대선에서 부시가 당선된 사실에 전혀 유감스러워하지 않은 것은 아주 당연하다(오히려 내심으론 아주 반가워했을 법하다).

그러한 레닌주의적 정신에 충실할 때, 이라크 파병(연장)에 반대하는 것은 개량주의적 좌파들, 혹은 얼치기 좌파들의 행태이다(물론 ‘반대하는 척’ 할 수는 있다). 오히려 적극 찬성해야 마땅하다(그래야지 ‘자본주의와의 전쟁’도 빨리 끝장을 볼 게 아닌가?). 즉, 친미 수구주의자들과 같이 행동해야 하는 것. 그건 성매매 방지법안을 놓고서도 마찬가지이다. 포주들과 같이 행동해야 하는 것. 비록 전혀 다른 이유/계산에서이긴 하지만.(해방공간에서 제출된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에 대해서도 ‘반탁’에서 돌연 ‘친탁’으로 돌아선 공산주의자들의 행태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적과의 동침’은 레닌주의이건 마오주의이건 간에 A급 좌파의 기본 ‘전술’이다(수단으로서의 모든 ‘전술’을 정당화하는 건 목적으로서의 ‘전략’이다).



반면에, 성매매/성접대에 반대함으로써 ‘접대 없는 자본주의’를 희구하는 태도는 ‘인간적인 자본주의’, 혹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가능성을 용인하는 태도이다(‘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불가능한 만큼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도 딱 불가능하다). 그것이 소위 개량주의적/타협적 태도이며, ‘카페인 없는 커피’처럼 ‘무해한 자본주의’(적어도 ‘덜 유해한 자본주의’)를 우리가 가질 수 있다고 믿는 태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량주의적 좌파(가령, 제도권 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와 자유주의자(가령, 고종석) 간의 간격은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가령, 고종석은 ‘마약 없는 마약’ 마리화나의 합법화를 지지하며, ‘섹스 없는 섹스’ 사이버-섹스를 지지할 법하다. 민노당도 마리화나와 사이버-섹스를 지지하나?). 적어도, 근본주의적 좌파나 우파(=수구반동)와 비교해본다면 말이다(고종석은 칼럼 ‘세속사회를 위하여’에서 세속사회에 덜 간섭하는 ‘덜 유해한 종교’를 지지한다. 나는 그걸 데리다식의 ‘종교 없는 종교’의 고종석 버전으로 이해하고 싶다.)

06.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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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레비나스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로서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시간상/분량상 레비나스에 대한 '비판들'은 언급하지 못했다. 따로 기회가 있을까? 장담하기 어렵다...

 

 

 

 

 

 

 

 

 

 

올해는 지난 1995년 성탄절에 세상을 뜬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해 말에 출간된 강영안 교수의 <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5)과 ‘레비나스 탄생 100주년’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 <세계의 문학>(2006년 봄호) 등은 20세기를 관통하는 생애를 살았던 이 ‘최고의 윤리학자’의 삶과 철학을 기념하는 의미를 갖는다.


레비나스는 누구인가? 1906년 1월 12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카우나스(코우노)에서 태어나 1995년 12월 25일 새벽에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프랑스 철학자이다. 그의 모국어는 러시아어였으며, 그가 처음으로 읽은 책은 히브리어 성경이었다고 한다. 이 히브리어 성경과 탈무드, 그리고 푸슈킨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러시아문학이 그의 유년기를 채운 정신의 수프였다.


프랑스로 건너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레비나스는 베르그송을 경유하여 현상학에 몰입하게 되고 후설과 하이데거가 있던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대학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한다. 그리고 1930년 프랑스로 귀화한 이후에 현상학을 소개하면서 독창적인 자기 철학, 즉 ‘제1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전개하게 된다. 요컨대, 레비나스는 히브리어와 러시아어,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책을 읽고 그 문화와 함께 숨을 쉬면서 작업한 철학자였으며, 때문에 ‘네 문화의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오래전 그의 생전에 그의 철학을 소개하는 글들을 처음 접하면서 나는 매혹된바 있는데(‘타자=무한자로서의 신’을 핵심으로 한 그의 종교론은 내가 유일하게 동의하고 공감하는 종교론이다. 그에게 신은 ‘존재자’가 아니다!), 이제 그를 기념하는 계절을 맞이하여 비록 ‘거창한’ 기획들에 동참할 만한 역량은 갖고 있지 않지만 그에게 진 빚은 조금이라도 덜고 싶다. 이 자리에서 나대로의 ‘입막음 의식’을 갖는 이유이다. 그 의식은 레비나스라는 ‘타자’가 나에게 강요하는 명령이자 거기에 답하는 나의 응답이기도 하다.


비유컨대, 출석부를 부르는 윤리 선생님 레비나스 앞에서 “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래서 ‘너 어디에 있느냐?’라는 독촉을 사전에 입막음하는. 이 자리에서 그 입막음은 레비나스의 철학적 여정, 혹은 ‘사랑의 지혜’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나의 손가락으로 가름될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지혜라고? 그렇다. 사랑,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지혜에 대한 사랑’(필로소피아)이 있기 이전에 ‘사랑의 지혜’ 혹은 ‘사랑하라’는 무한자의 명령이 있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어쩌면 철학은 아테네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란 ‘사랑의 지혜’를 그 가능조건으로서 미리 전제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가족을 나치의 수용소에서 잃은 유대 철학자 레비나스는 ‘존재의 망각’에 대한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염려 이전에 ‘사랑의 상실’에 대한 근심이 우선적이라고 간주했을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울고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웃고” 하는 그런 사랑으로 세상은 넘쳐나는 듯도 한데, 어찌하여 사랑이 부족하며 사랑이 상실되었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거기에 사랑의 정념은 넘쳐나되 ‘사랑의 지혜’, ‘사랑이라는 지혜’는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편재하는 탐욕과 각자 자신만을 위해서 군림하는 자기중심성과 무사무욕의 가치를 대립시키는 사상”(핑켈크로트)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지혜’란 레비나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즐겨 인용하는바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고백하는 지혜이다. 어쩌면 용기이기도 한.    

 

 

나는 이러한 지혜로 가는 길에 굳이 우회의 여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철학은 사랑에 봉사하는 사랑의 지혜”(la philosophie: sagesse de l'amour au service de l'amour)라고. 이걸로 충분하지만, 이에 대한 주해가 필요하다면 알렝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를 읽어보시길. 레비나스 관련서들 가운데 아마도 철학에 문외한인 일반 독자들도 따라가며 읽을 수 있을 거의 유일한 책이며 레비나스의 (윤리학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수준 높은 개관이다. 게다가 감동적이기까지 한.  


그러한 개관을 통해서 레비나스에 대한 영감을 좀 얻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게 ‘뭐, 그런 정도군!’이 아니라 ‘영감의 폭탄’이어서 자신의 존재가 주체할 만한 수준을 좀 넘어서까지 뒤흔들리는 경험을 한다면 보다 본격적으로 레비나스를 입에 담고 중얼거려볼 수 있겠다. 레비나스의 육성을 그대로 따라서 말이다. 우리말로 녹음된 레비나스의 육성은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현대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 1998)의 한 꼭지인 ‘무한성의 윤리’에서 레비나스는 대담자인 리처드 커니의 질문들에 답하여 자기 철학의 핵심을 일목요연하게 해설해준다(한두 군데 흠잡힐 만한 번역이지만 레비나스 관련 번역으로는 가장 우수하다).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사랑은 신과 인간의 사회이다. 하지만 인간이 더 행복한데, 신은 인간을 동료로 갖고 있는 반면 인간은 신을 동료로 갖고 있다”(273쪽)는 대목에 이르러 왠지 행복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못난 놈들끼리는 서로 얼굴만 봐도 즐거운 법이다!).   


그리고 ‘필’을 받은 김에 필립 네모와의 대담을 담은 <윤리와 무한>(다산글방, 2000)까지 내처 읽어볼 수도 있겠다(우리말 번역은 ‘외재성’을 ‘외모’라고 옮기는 식의 부정확한 대목들을 군데군데 포함하고 있다). 대략 레비나스의 연대기를 따라가는 열 개의 대담 꼭지들은 한 철학자의 철학적 생애를, 혹은 지혜의 생애를 자세히 되짚어준다. 그 끄트머리에서 레비나스가 던지는 말(혹은 벼락): “참으로 사람다운 삶은 있음의 차원에 만족하는 조용한 삶이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 삶은 다른 사람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다. 철학전통에서 자신있게 말하는 것과 달리, 있음이 곧 있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158쪽) 즉,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쯤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레비나스가 문제삼는 것은, 스피노자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존재하고자 하는 노력(conatus essendi)', 즉 존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끈질기게 노력하는 자기보존욕이다. 그것이 그 자체로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타자의 현현으로서의 타인의 얼굴 때문이다. 우리에게 무한책임을 떠맡기면서, 우리로 하여금 ’대속적 주체‘로 다시 깨어나도록 발목을 잡는 그 얼굴은 이방인과 과부와 고아의 얼굴이다. 아, 젠장, 나는 나대로 좀 살고 싶은데, 어쩌자고 내 앞에 있는 당신은 헐벗은 이방인이고 젊은 과부이며 배고픈 고아인가? 그런 물음을 무겁게 등에 짊어질 때 우리는 ’사랑의 지혜‘로 가는 도상에 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직선적인 여정에 자신을 내맡기기엔 머리나 엉덩이가 너무 무거운 이들도 없지 않겠다. 이 분들을 위해서는 보다 우회적인, 현학적인 여정이 필요할 듯한데, 그건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철학자’ 레비나스를 읽어나가는 것이다. 사실 이 또 다른 방향의 여정은 아직 다 개발되지 않은 코스의 여정이어서 언제 ‘사랑의 지혜’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레비나스의 철학적 주저에 해당하는 <전체성과 무한>(1961)과 <존재와 다르게 혹은 존재사건 저편에>(1974)가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 그의 초기 철학을 입에 물게 해주는 <시간과 타자>(문예출판사, 1996)와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 2003)인데, 1947년에 발표된 이 두 작품은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서 레비나스 자신의 윤리학으로 이행해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러한 저작들을 읽어나가는 데 매뉴얼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이 앞서 언급한 강영안 교수의 <타인의 얼굴>과 함께 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다산글방, 2001)이다. 거기에 국내 박사학위논문을 바탕으로 한 김연숙의 <레비나스 타자윤리학>(인간사랑, 2001)도 레비나스 해설서로 참고할 만하다.  

물론 이 책들은 <시간과 타자>, <존재에서 존재자로>에 대한 해설뿐만 아니라 레비나스의 철학 전반과 주저들에 대한 해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나 데이비스의 책은 개인적으로 경탄할 만큼, 분량에 걸맞지 않게 섬세하고 정교한 안내서 역할을 해준다(국역본은 가독성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곳곳에서 오역을 범하고 있기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한편으로 강영안 교수와 함께 국내에서 레비나스 철학에 가장 정통한 서동욱 교수의 <차이와 타자>(문학과지성사, 2000)와 <일상의 모험>(민음사, 2005)에는 레비나스를 직접 다루거나 레비나스적 영감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글들이 여러 편 실려 있으므로 읽어봄 직하다.

 


 

 

 

 

 

 

 

 

시야를 좀 넓히면, 레비나스와 영감을 주고받은 가장 중요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레비나스론(최초의 본격적인 레비나스론이기도 하다) ‘폭력과 형이상학’(1964)을 그의 <글쓰기와 차이>(동문선, 2001)에서 읽어볼 수 있다(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는 데리다의 비판을 고려하여 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데, 이 글 또한 레비나스의 주저인 <전체성과 무한>을 주로 다루고 있기에 막바로 읽기에는 무리가 없지 않다(우리에게 레비나스는 여전히 풍문이다). 해서, ‘레비나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체성과 무한> 등의 주저들이 번역돼 나오는 것이겠다. 우리의 무거운 엉덩이만 믿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아닐까?


자, 여기까지가 나의 응답이고 책임이다. 레비나스라는 타자에 대한 이 책임은 무한책임이기에 이건 고작 ‘입막음’에 불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언제나 중과부적이어서 겨우 틀어막은 틈새로 새어나오는 준엄한 무한자의 목소리를 나는 어찌할 수 없다. “너 어디에 있느냐?” 오, 신이시여, 제발!..

 

06. 03. 03 - 04.

 

P.S. 내가 보기에 레비나스에 대한 비판은 주로 '타자'의 일상성에 걸려 있다(바디우와 지젝, 고진 등의 비판). 레비나스식의 '타인의 얼굴'에 대한 이들의 카운터 펀치는 (지젝이 언급한 것이지만) 영화 <페이스 오프>(1997)이다. 이에 대한 숙고는 다른 자리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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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04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PS에서 언급하신 레비나스에 대한 비판을 참고할 만한 책좀 소개해 주세요..

로쟈 2006-03-0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언젠가 읽은 지젝의 언급은 출처를 못 찾아서(!) 적어놓지 못했습니다. 고진의 언급은 <트랜스크리틱>에 있고(다른 데도 있을 듯하지만), 바디우의 비판은 <윤리학>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전체성과 무한>에 대한 비판이고, <존재와 다르게> 정도로 가면 데리다의 비판과 마찬가지로 상당 부분 카바가 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twoshot 2006-03-06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감사드립니다.

sgtchoi75 2023-04-2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레비나스와 관련된 지문이 계속 나오는데 속수무책이더군요
그러다가 예전에 사두었던 ‘책을 읽을 자유‘에서 그나마 깨우침을 좀 얻었습니다
(아니면 깨우침을 얻었다고 제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든가요....)
추천해주신 개론서를 읽을 만큼의 깜냥은 저한테 없는 거 같구요
대신 ‘책에 빠져 죽지 않기‘를 구입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또다시 지적 대화를 위한 입막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2월의 끄트머리이고 겨울의 끝이다. 그리고 내일이 봄이다. 봄풍경이 들어서기까지는 몇 주 더 걸리겠지만(그림은 러시아의 풍경화가 레비탄의 '봄 홍수'(1897)), 교정이 재잘거리는 소리로 가득차는 건 당장 (대개의 입학식이 예정돼 있는) 모레부터이다(그러면 나도 덩달아 좀 바빠지겠다). 여기저기가 북적거리겠지만, 가장 북적댈 곳은 건 강의 교재들이 판매되는, 북새통같은 구내서점이겠다. 그런 게 변함없는 내 주변의 풍경이다(한적한 봄풍경을 맞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새학기 개강도 출판계에서는 일종의 특수일 것이다. 눈에 띄는 책들이 부쩍 많아진 것은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교재나 교양학술서 범주에 들어갈 만한 책들을 북적거리기 전에(!) 몇 권 꼽아본다(일단은 점심시간 동안만).  

 

 

 

 

가장 먼저 꼽을 책은 학술명저번역총서로 출간된 찰스 다윈의 <인간의 유래>(한길사, 2006)이다. 아마도 다윈 자신의 책으론 <종의 기원> 다음으로 유명할 이 책이 이제서야 국역본을 얻었다는 건 한참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또 한편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법이기도 하다(1871년에 나온 책이니까 135년만에 한국어본이 나온 셈이다). 다윈과 다위니즘에 대해서는 우리시대의 가장 탁월한 다위니즘 해설자 리처드 도킨스의 <에덴의 강>(사이언스북스, 2005)을 참조하는 게 좋겠다. 다윈의 자서전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갈라파고스, 2003)와 <30분에 읽는 다윈>(랜덤하우스중앙, 2004)도 워밍업으로는 좋겠다.

문제는 <인간의 유래>를 읽는 것이지만, 고전의 가치는 읽는 데에만 있는 게 아니라 모셔두는 데에도 있으므로 일단은 저마다 서가에 꽂아두고 볼일이다. 나만은 아니겠지만, 특별히 관심있는 대목은 다윈의 '성선택설'인데 그런 대목만 미리 챙겨읽는 게 흠은 아니겠다. 이때는 저래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사이언스북스, 2005)를 반드시 참조할 필요가 있는바 곁에 두고 같이 읽으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더불어 좀 여유가 있는 '교양인'이라면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바다출판사, 2004) 정도를 <인간의 유래>와 나란히 꽂아두면 좋겠다. 이 책의 원제 'The Ascent of Man'(1973)는 다윈의 책 'The Descent of Man'을 뒤집은 것으로 "인간이 상상력과 이성, 정서적 예민함과 강인성으로 환경을 변화시켜온 문화적 진화의 상승과정을 담고 있"는 고전적 저작이다. BBC의 다큐 시리즈였는지라 DVD 타이틀로도 나와 있다.  

 

두번째 책은 패트리샤 처칠랜드의 <뇌과학과 철학>(철학과현실사, 2006)이다. 처칠랜드 여사는 남편 폴 처칠랜드와 함께 심리철학과 인지과학 분야의 저명한 학자이며(이 분야에 대한 개괄적인 책으론 김영정 교수의 <심리철학과 인지과학>(철학과현실사, 1996)을 꼽을 수 있다), 폴은 국내에 '심리철학 입문서' <물질과 의식>(서광사, 1992)으로 진작에 소개된 바 있다(저자의 성이 '처치랜드'로 표기됐었다. 국내 학계의 관행이 어느쪽인지 모르겠지만, 이 부부가 별거하는 것도 아닌데 '처치랜드'와 '처칠랜드'로 따로 검색되는 것은 보기에 안 좋다). 이번에 나온 건 패트리샤의 저작이며 훨씬 두껍다(766쪽이고 원저는 560쪽. 물론 두께가 지성에 비례하는 건 아니겠지만 폴도 분발해야겠다).  

책의 원제는 'Neurophilosophy'(1986, 1989)이고, 이미 20년전에 나온 저작이다. 컴퓨터공학의 발달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법한 분야인 만큼 다소 '낡아보이는'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거꾸로 20년을 버틸 수 있었다면, 이미 이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좀 낡은 책이 번역된 것인지, 고전적인 저작이 번역된 것인지는 관련 서평을 읽어봐야 알겠다(이런 서평도 제 때 써줄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엔 드문 것인지?).

 

 

 

 

뇌 얘기가 나온 김에 요로 다케시의 <유뇌론>(재인, 2006)도 언급해 두도록 하자. 소개에 따르면, "다치바나 다카시와 함께 일본 최고의 지성으로 손꼽히는 요로 다케시의 책. 2003년 출간되어 그해 일본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바보의 벽> 등의 저작을 통해 해부학자로서의 지식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폭넓은 사유와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 바 있다. <유뇌론>은 요로 다케시 사상의 출발점이자 근간이 되는 저서이다. 유뇌론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뇌라는 기관의 법칙성을 통하여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입장이다. 유물론과 유심론 중 굳이 따지자면 유심론, 또는 관념론과 가깝다."(<뇌를 단련하다>란 다치바나의 책도 있지만, '뇌'에 대한 관심은 우리와는 대조되는 일본적인 특성의 하나가 아닐까란 생각이 문득 든다.) 

236쪽 정도의 분량이 그닥 미덥지는 않지만, 역시나 두께가 통찰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므로 한번 일독해봄 직하다. '뇌를 향한 두렵도록 새로운 시선'이란 부제를 얼마나 감당하고 있는지 확인도 해볼 겸. '새롭다' 싶으면 이미 알게 모르게 많이 소개된 요로 다케시의 세계로 푹 빠져들어가면 되겠다. "일본에 있을 때 일주일에 한번쯤 술을 마셨던 일본 친구가 그의 책을 권했다. 그는 일본인이라면, 아니 누구든지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며 나무젓가락을 넣은 좋이에 '요로 다케시'란 이름을 써줬다. 그의 책 <유뇌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이 책을 추천한 전여옥 의원도 아마 '요로 다케시'의 팬인 듯한데, 겸사겸사 치매에 안 걸리는 법도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그런데 책에선 왜 "일본엔 요로 다케시가 있더라"라고 하지 않았을까?).

 

 

 

 

세번째 책은 한국칸트학회 편으로 나온 <포스트모던 칸트>(문학과지성사, 2006). 제목은 '포스트모던'하지만, 내용은 '칸트적인' 논문 모음집이다. 칸트학회장인 강영안 교수의 서명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의 기획자인 총무이사 서동욱 교수가 작성한 글임에 분명한 서문은 '그레고어 칸트와 그의 벌레 변신'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거기서 주장되는바, "이 책은 바로 이 칸트의 변신 '모던 칸트'에서 '포스트모던 칸트'로의 '변신담'이다."

이 화려한 예고편에 이어지는 것은 그러나 '칸트와 하이데거', '칸트와 라캉', '칸트와 레비나스' 등등이며, '칸트와 하버마스', '칸트와 로티'로 마무리된다. 칸트의 변신담이라고는 하나 '칸트'는 거의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꼴은 아닐까? 그 서론에서 인용되는바, "나는 옷을 벗고 <순수이성비판>과 담배 한갑을 들고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무라카미 하루키, <1973년의 풋볼>)나 "뒷주머니에 <프롤레고메나>를 넣어둔 것은 그 탓이야. 내가 슬럼프인데도 계속 이기고 있는 것도, 모두 칸트 할아범의 덕분이지."(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같은 대목들이 '포스트모던 칸트' 현상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면, 그와 정면대결하여 '칸트와 하루키'나 '칸트와 일본야구' 같은 글 꼭지가 아마도 '포스트모던 칸트' 변신담에 더 적합할 것이다.  

해서, 이 변신담은 아직은 제목과 서문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 서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끝으로 이 책은 한국칸트학회 기관지 <칸트연구>의 특별호로서 16집 2호에 해당함을 밝혀둔다." 그리고 그렇게 읽을 때 이 논문집은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엽기적인 식탁이 아니라) 읽을 만한 논문들을 두루 갖춘 풍족한 식탁이 된다.

 

 

 

 

'포스트모던'이란 말이 나온 김에 또 언급해 두는 책은 마크 포스터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새로운 문화사>(이대출판부, 2006)이다. 원제는 'Cultural History and Pstmodernity: disciplinary reading and challenges' (1997)이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맥락 속에서 문화사와 관련된 쟁점들과 논제들을 검토하고 역사학의 미래를 전망한 책. 역사학계에 퍼져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역사학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지혜를 밝히고자 했다. 문화사를 다루는 데 있어 작용하는 인식론적 조건과 프랑수아 퓌레, 린 헌트, 미셸 푸코 등의 실제 연구 기록들을 사례로 점검함으로써 논지를 구성했다"고 한다. 230쪽의 컴팩트한 분량이므로 단숨에 읽으면 되겠다. 아니면 국내 필자들이 참여한 <포스트모더니즘과 역사학>(푸른역사, 2002)이나 김현식 교수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역사란 무엇인가>(휴머니스트, 2006) 같은 책들과 천천히 비교해 보면서 읽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다.

<푸꼬, 마르크시즘, 역사학>(인간사랑, 1990)이란 책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 포스터는 이후에 <뉴미디어의 철학>(민음사, 1994), <제2미디어의 시대>(민음사, 1998),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기 전에 인터넷을 생각한다>(이제이북스, 2005) 등의 번역서명들이 말해주듯이, 주로 문화이론이나 미디어 이론 분야의 책들을 내왔다. 해서, '역사학'을 주제로 하고 있는 이번 신간은 한동안의 딴살림은 접고 애당초 그의 이름을 알린 <푸꼬, 마르크시즘, 역사학>의 '족보'를 다시금 잇고 있는 것으로도 읽힌다(그는 원래 직분은 역사학 교수로 돼 있다).  

 

 

 

 

네번째 책은 정치사상과 세계화 분야의 책으로 골랐다. 일단 가장 최근에 나온 두툼한 책으로 <현대 정치사상의 파노라마>(아카넷, 2006). "서구 정치사상의 중요한 줄기를 이루는 이데올로기의 개념과,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해설을 담았다"고 하니까 간단히 말해서 '교재'이다. 교재류의 특성상 '예리한 시각'을 담고 있을 법하지는 않지만, 교양의 토대는 튼튼하게 해줄 것이며 차후의 보다 깊이 있는 독서로 안내해줄 것이다. 작년에 바라다트의 <현대정치사상>(평민사, 2005)도 그런 책으로 보인다.

'정치사상'이 원론이라면 '세계화'는 작금의 현안이다. 이 주제와 관련한 책들은 차고 넘치지만, '세계화 시대의 양극화를 넘어서는 길'이란 부제를 단 <세계화의 두 얼굴>(이른아침, 2006)이 일단 눈길을 끈다. "세계화와 불평등, 그리고 양극화 문제에 대한 비판서. '모든 이들이 똑같이 부유해질 수 있다'는 청사진을 걸고 나온 세계화 운동이 오히려 국가간, 계층간에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는 현상을 분석하고 그 해법을 모색"하는 이 책은 "세계화 시대의 부자들과 빈자들의 현재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부자들이 세계화 물결을 타고 어떻게 세계 경제를 장악했는지, 그리고 빈자들이 어떻게 끝없는 가난의 덫에 걸려들 수밖에 없는지를 분석한다. 그리고 미국과 인도 등의 사례를 제시하여 이러한 양극화 현상이 국가 간에, 혹은 비(非)선진국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분석내용은 '상식적'인데, '넘어서는 길'이란 대안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궁금하다.

작년 연말에 나온 <진화하는 세계화>(아이필드, 2005)는 부제가 '현대 세계의 문화적 다양성'이고 원제는 'Many Globalization'(2002)이다. 제목 그대로, 다수의 다양한 세계화의 진행현황에 대한 리포트적 성격의 책이다. 이 세계화를 둘러싼 찬반 양론은 실상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로 귀결될 듯한데, 이 '차이'를 조망해주는 책으로 <비전의 충돌>(이카루스미디어, 2006)이 또한 눈길을 끈다. 저자는 "수세기에 걸쳐 지속되어 온 보수와 진보 사이의 논쟁을 '비전의 충돌'이라는 아이디어로 분석했다"거 하며, "미국의 대표적 두뇌집단 중 한 사람인 정치학자 토마스 소웰이 미 행정부 정책 자문의 경험을 바탕으로 30년간의 사상사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라고 소개된다.

소웰에 따르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충돌해 온 두 가지 관점(비전)"이 있는데, "하나는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변하지 않는다는 '제약적 비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본성은 완벽해질 때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무제약적 비전'이다." 이러한 비전관은 마치 본성(nature)과 양육(nuture)이라는 생물학 화두의 정치학 버전 같다. 하면, 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김영사, 2004)도 같이 읽어봄 직하다(그렇게 다 찾아 읽으신 분은 내게 결론을 좀 알려주시압).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에드워드 루시-스미스와 주디 시카고가 쓴 <여성과 미술>(아트북스, 2006). '열 가지 코드로 보는 미술 속 여성'이 국역본의 부제인데, '여성과 미술'이란 주제사나 '페미니즘 미술사' 교재로 적합해 보인다.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세계 미술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 있던 여성 미술가들의 성취를 재조명했다. 남성 화가들의 그늘에 가려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위대한 여성 화가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생애와 미술사적 업적을 소개한다"고 하니까.

공저자의 한 사람인 자마이카 태생의 영국 비평가 에드워드 루시-스미스(1933- )는 전방위 작가인 듯한데(시인에다가 사진작가까지 겸하고 있다), 많은 교양미술서들을 집필했고 또 국내에 많이 소개돼 있다(그림 읽어주는 할아버지?). 내가 갖고 있는 건 <서양미술의 섹슈얼리티>(시공사, 1999) 한권뿐이지만. 아래와 같은 사진이 그의 작품인데, 그만한 지명도라면 어쩌면 사진집도 국내에 소개될지 모르겠다.

덧붙여 교양미술 교재로도 쓰일 만한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의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현실문화연구, 2006)이 재출간됐다. 예전 판본에 대해 쓴 리뷰에서 나온 흑백 도판에 대해 아쉬움을 표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새로 편집하고 칼라 도판을 추가한 개정판"이 나온 것. 그런 수고에 비하면 상당히 저렴한 가격도 책의 장점이다. '교재' 정신에 충실한(턱없는 책값의 '교재'들을 나는 혐오한다).

06. 02. 28 - 03. 02.

P.S.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학자 자크 오몽의 책 <영화 속의 얼굴>이 번역돼 나왔다. 소개를 옮기면, "영화이미지들 중 가장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얼굴 이미지'에 대한 미학적 분석을 담은 책이다. '영화'라는 매체와 '이미지'라는 표현 수단의 관계에 대해, 나아가 '이미지'와 '현실'과의 관계에 대한 방대하고 심도 깊은 사유를 펼쳐 보인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영화학자 중 한 사람인 자크 오몽의 저서로, 그의 제자인 김호영 교수가 우리 말로 옮겼다." 그리고 예상과 다르게 400쪽이 넘는 듬직한 분량이다.

물론 <영화 속의 얼굴> 같은 책이 <영화미학>(동문선, 2003)처럼 영화학 교재로 쓰이지는 않겠지만, 내게 더 흥미로운 건 <미학>이 아니라 <얼굴>이다. 한국영화통으로도 잘 알려진 오몽이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미 3~40년 전부터 한국 영화에는 임권택의 완벽하게 통제된 고전주의와 김기영의 장중하면서도 통속적인 가면 예술, 홍상수의 '모던한' 얼굴들, 봉준호나 박찬욱의 '기발함' 등이 평화롭게 계승되고 공존해왔다. 물론, 김기덕처럼 모든 장르와 스타일에 재능을 보이는 시네아스트들도 있었다... 판타스틱 영화나 초자연적 영화에서도, 조지 로메로의 산송장들이나 팀 버튼의 비현실적 피조물들, 혹은 만화영화로부터 유래된 슈퍼 히어로에서조차도,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여전히 '배우'의 얼굴이며 '타인의 얼굴' 이다."(강조는 나의 것, 레비나스의 상용구를 오몽에게서도 읽게 되는군!)

가령, 내가 작년에 본 영화들에서 <여자, 정혜>의 김지수나 <나의 결혼원정기>에서 수애의 얼굴은 영화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기억해 둘 만한 얼굴들이었다(이미지는 '이미지 버전'에 있음). '배우'의 얼굴이면서, '타인'의 얼굴. 그 무한자의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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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6-03-02 14:25   좋아요 0 | URL
요로 다케시의 '바보의 벽'은 저에게 책값이 매우 아깝다고 느끼게 했던 드문 책 중의 하나였는데...

로쟈 2006-03-02 14:30   좋아요 0 | URL
요로 다케시의 책은 읽은 게 없기 때문에 뭐라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라시니 '복음'입니다.^^ '바치바나' 정도라고 소개돼 있는데, 그건 아닌가 보죠?..

하이드 2006-03-02 14:53   좋아요 0 | URL
'여성과 미술'과 '세계화의 두얼굴'을 찜합니다.
'고전의 가치는 읽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셔두는데도 의의가 있으므로' 라니,
'아멘' 입니다.

瑚璉 2006-03-02 15:55   좋아요 0 | URL
제가 읽었을 때는 내용이 꽤나 피상적인데다가 구성이 견고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연과학 쪽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저자의 경력을 생각하면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저, 순전히 사견인데다가 내공까지 부족한 관계로 잘라 말하기는 무엇하니까 로쟈 님이 한 번 읽어보시고 의견을 주시면 기쁘겠습니다. (^.^;)

비로그인 2006-06-17 21:23   좋아요 0 | URL
[뇌과학과 철학] 과연 덤벼볼만한 책인지 아닌지 판단이 안 서요. 누가 옆에서 조언 좀 해주시면 좋으련만....

로쟈 2006-06-17 23:03   좋아요 0 | URL
두께 때문에 엄두가 잘 안나는 책이죠.^^
 

 

 

 

 

제목은 '바디우와 레비나스'라고 붙였지만 이 글은 두 철학자 간의 비교라거나 대조와는 거리가 멀다. 단지, 필요 때문에 바디우의 <윤리학>(동문선, 2001)에서 2장 '타자는 존재하는가?'를 읽었고, 이 장은 순전히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할애돼 있기에 자연스레 '바디우와 레비나스'란 이름 혹은 주제를 떠올려 보았을 뿐이다.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바이지만, 알랭 바디우(1937- )는 들뢰즈/데리다 이후의 프랑스 철학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철학자의 한 사람이다. 한데, <윤리학> 외에 <철학을 위한 선언>(백의, 1995)과 <존재의 함성>(이학사, 2001) 정도가 그의 책으론 더 번역돼 있고,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에서도 그의 철학이 핵심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아직 <존재와 사건> 같은 그의 주저들이 번역/소개되지 않은 탓에 왜 그가 그 정도로 중요한 철학자인지는 실감이 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지젝이 동시대를 대표할 만한 철학자로 아감벤과 함께 바디우를 들고 있는 터여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바디우의 책들을 주섬주섬 긁어모으고는 있다(대부분의 저작이 영역돼 있으며 최근에는 연구서들도 '매우' 활발하게 출간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읽으면 '친화감'을 갖게 되는 아감벤과는 달리 바디우는 여전히 나에겐 '타자'이다. '친구의 친구'로 소개받기는 했지만, 아직은 서먹한 관계인 것.

한데, 그 이유가 순전히 바디우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그의 두툼한 주저들을 독파해나갈 만한 형편은 아니어서 좀 편안한 번역본들이 나오길 기다리고는 있는데, 이제껏 나온 번역본들은 '편안함'에 대한 기대를 별반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존재의 함성> 같은 경우는 서론 정도만을 읽었기 때문에 아직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철학을 위한 선언>이나 <윤리학>은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자갈밭 같은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결코 편안한 독해를 허용하지 않는다(<선언>의 경우엔 나중에 부득불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을 구했고, <윤리학>도 영역본을 구한 뒤에야 다시 들춰볼 수 있었다).

가령, '타자는 존재하는가?'란 장의 첫문장은 이렇다: "'타자에 대한 윤리' 또는 '차이의 윤리'로서의 윤리라는 관점은, 칸트의 명제들이 레비나스의 명제들로부터 시작된다."(33쪽) 내용을 따져보기 이전에 통사적으로 이미 비문이다(주어 '관점은'을 받는 술어가 없다). 그리고 내용상으로도 오류이다. 영역본상으로 이 문장은 "The conception of ethics as the 'ethics of the other' or the 'ethics of difference' has its origin in the theses of Emmanuel Levinas rather than in those of Kant."(18쪽)에 대응하며, 그 뜻은 "'타자에 대한 윤리' 혹은 '차이의 윤리'로서의 윤리라는 개념은 칸트의 명제들보다는 레비나스의 명제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정도이다.

이 <윤리학> 국역본의 경우 출판과정에서 해프닝이 좀 있었고 곧바로 내용이 부분 교정된 2쇄가 나온 걸로 알지만(해서 오역/오류들이 전적으로 역자의 책임은 아니라지만), 반가운 마음에 단박 초판 1쇄를 구입한 나 같은 독자는 이런 '비문'을 그대로 뒤집어써야 한다(도서관에 들어와 있는 책도 1쇄본이어서 교정내용을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다). 정상적이라면, 이 첫문장은 필히 교정돼 있어야 한다.(한데, 형이상학의 '사유(thought)'를 '사고'로 옮기는 것 등의 취향도 역자가 아닌 편집자의 것일까?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라는 한국어 구문상 어색한 부제도?) 그런 맥락에서, 이전에 제1장 '인간은 존재하는가?'를 읽고 불만을 적어놓은 걸 여기에 다시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이 책의 번역에 좀 문제가 있다는 건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서 지적된 바이다. 역자의 책들을 여러 권 갖고 있는 나로선 좀 유감스럽지만, 나는 그를 신뢰할 만한 저자로는 분류하고 있지는 않다. 그 주된 이유는 물론 그의 번역이 미덥지 못하기 때문이다(바디우의 책으로 그는 <철학을 위한 선언>도 번역한바 있는데, 이 또한 인용하기 껄끄러운 번역이다). 모든 훌륭한 저자가 훌륭한 번역자인 건 아니지만, 적어도 부실한 번역자일 수는 없다는 게 나의 편견이다(방안이 없는 건 아니어서, 굳이 번역 같은 허드렛 일에 손대지 않고 좋은 책들의 저자로만 남으면 된다).

개인적으로 번역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는 기준은 인용가능성의 유무이다. 번역문 그대로 다른 글에, 혹은 논문에 인용할 수 있다면, 그건 나름대로 좋은 번역이고 신뢰할 만한 번역이다. 그리고 그러지 못하다면, 유감스러운 번역이자 (최악의 경우엔)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은 번역이다(유감스럽게도 그런 번역이 드물지 않다). <윤리학>에 대해서는 역자와 출판사간의 마찰설까지 흘러나왔지만, (출판사에서 함부로 개칠한 번역이 아닌 이상) 그렇다고 해서 역자의 책임이 면제될 수는 없다.

알라딘에서 읽어본 한 서평에서는 이 책이 "동문선 출판사에서 나온 다른 번역들에 비하면 비교적 나은 편에 속하고, 바디우에 관해 학문적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무난하지만, 이 번역서는 여러가지 세부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어서 학문적으로는 신뢰하기 어렵[다]."(balmas님)고 돼 있는데, 나로선 학문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데에 동의하지만, 일반독자들이 읽기에는 무난하다는 평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일반독자들이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번역이 좋은 번역이며 따라서 어려운 번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은 '일반독자'(나는 불어 원서를 대조해볼 수 있는 '전문독자'가 아니다)인 나로선 무난하게 읽을 수 없는 번역이었다.

먼저, 서론에서 저자가 책의 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대목: "윤리에의 준거의 사회적 인플레이션에 맞서서 현재의 관건은 이중적이다"(9쪽) 이에 대한 영역은 "With respect to today's socially inflated recourse to ethics,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wofold:"(2쪽) 나는 역자만큼 불어를 잘 하지 못하지만 이런 대목들은 불어본을 구해서 확인해보고 싶은데(도서관에 없길래 참아두었다) 하여간에 영역본이 좀더 이해하기 편한 건 사실이다. '현재의 관건'을 '이 에세이의 목적'이라고 풀이한다는 점에서.

바디우는 이 컴팩트한 분량의 책 서문에서 자신의 요점을 분명히 하는데, 그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윤리 인플레이션'이다. 개나 소나 다 '윤리(학)'를 떠들어댄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그는 무얼 말하고 싶은가? "첫째, 의견들과 제도들 속에서 통용되는, 현시점의 주된 '철학적' 경향인 이 현상의 정확한 성격에 대한 검토를 행해야 한다. 우리는 이 현상이 실상은 진정한 허무주의에 불과한 것임을, 모든 사고에 대한 위협적인 부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9쪽)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은 아니지만, (영역본을 참조하건대) '이러한 철학적 경향'(=윤리 인플레이션)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서 "검토해볼 것이다" 정도가 왜 "검토를 행해야 한다"라는 의무로 번역되는지는 잘 모르겠다(이어지는 문장들도 다 그냥 미래시제이기 때문이다).

"의견들과 제도들 속에서 통용되는"은 영역으로 "as much in public opinion as for our official institutions"인데, 나라면 "공론장에서뿐만 아니라 대학 제도 내에서도" 쯤으로 옮기고 싶다. 짐작에 official instituitions란 주로 대학 등의 제도권 기관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뒷문장을 옮기면, "나는 이러한 현상이 그 실상에 있어서는 순전한 허무주의에 불과하며 사유 자체에 대한 위협적인 부정이라는 걸 입증하고자 할 것이다."(I will try to estblish that in reality it amounts to a genuin nihilism, a threatening denial of thought as such.")

그의 두번째 목적: "우리는 윤리라는 단어에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경향으로부터 이 단어를 탈환할 것이다.이 단어를 추상적 범주들(인간, 권리, 타자...)에 연결시키기보다는 '상황들'에 관계지을 것이다. 이 단어를 희생자들에 대한 동정의 차원으로 삼기보다는 개별적 과정들에 대한 지속 가능한 준칙으로 삼을 것이다. 이 단어를 보수적인 양심의 무대로 삼기보다는 그 속에서 진리들의 운명을 문제삼을 것이다."(9쪽)

먼저 첫문장에 대한 영역은 이렇다: "I will then argue against this meaning of the term 'ethics', and propose a very different one." (확인해볼 수는 없지만) 짐작에 영역본은 약간 의역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하여간에 영역본이 더 이해하기에 용이하므로 그에 준하여 다시 옮겨 보면, "나는 (윤리 인플레이션에서의) '윤리'란 말의 이러한 의미(사용)를 반박하면서 완전히 다른 의미를 제안할 것이다."

이어지는 영역은 "Rather than link the word to abstract categories (Man or Human, Right or Law, the Other...), it should be referred back to particular 'situations'. Rather than reduce it to an aspect of pity of victims, it should become the enduring maxim of 'singular processes.' Rather than make of it merely the province of conservatism with a good conscience, it should concern the destiny of truths, in the plural."(3쪽)

계속 이어서 옮겨보면, "즉, 윤리란 말은 (인간이나 권리, 타자 등과 같은) 추상적 범주와 연결되기보다는 개별적인 '상황들'과 연계되어야 한다. 윤리는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의 차원으로 축소되기보다는 '단독적인 과정들'의 영속적인 준칙이 되어야 한다. 윤리는 양심을 들먹이는 보수주의의 영역에 남겨지기보다는 (복수로서의) '진리들'의 운명과 관련지어져야 한다." 요점은 유행/경향으로서의 윤리에 대한 바디우의 전면적인 비판/반박과 새로운 윤리의 제안이 이 책의 줄거리가 될 거라는 점이다. 

이제 1장으로 들어가서 바디우는 '윤리'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쓰이는 말인 '인권'에 대해서 검토해 들어간다. 윤리란 이런저런 '자명한'/'자연적인' 권리들의 수호/존중과 관련된 문제라는 게 우리 시대의 통념이다. 요컨대, '자연권으로의 회귀'(혹은 '퇴행')이 이 시대의 증상이며, 그것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관련된다: '인간의 자연권이라는 낡은 교리로의 이러한 회귀는, 물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와 그에 의존하는 진보적 개입의 모든 형상들의 붕괴에 연관된다."(13쪽)

이 대목의 영역은 "This return to the old doctrine of the natural rights of man is obviously linked to the callapse of revolutionary Marxism, and of all the forms of progressive engagement that it inspired."(4쪽)이고, 이에 대한 번역은 "인간의 자연권이라는 낡은 교리로의 이러한 회귀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와 그것이 영감을 불어넣었던 모든 형태의 진보적 현실참여가 몰락하게 된 사정과 분명 연관된다." 이어지는 대목은 모두 바디우의 현실진단이다: "모든 집합적 지표를 상실하고, 역사의 의미'에 대한 사고를 박탈당한 채 사회혁명을 더 이상 희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많은 지식인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의견을 만들어내는 많은 부문들은 자본주의적 형태의 경제와 의회민주주의에 동조해 버렸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지만, 상당히 투박한 번역이다. 그리고, 영역본에 근거하자면, 바디우는 (1)현실정치와 (2)철학이라는 두 가지 영역에서의 현 정세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데, 국역본에서는 이러한 대비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먼저 이 대목의 영역은 "In the political domain, deprived of any collective political landmark, stripped of any notion of the 'meaning of History' and no longer able to hope for or expect a social revolution, many intellectuals, along with much of public opinion, have been won over to the logic of a capitalist economy and parliamentary democracy."이고, 우리말로 옮기면, "정치 영역에서는, 모든 집단적인 정치적 지향점(지표)을 상실하고 '역사의 의미'에 대한 모든 관념을 박탈당한 채 더이상 사회 혁명에 대한 아무런 기대나 바람도 가질 수 없게 된 많은 지식인들은 다수의 여론과 더불어 자본주의 경제와 의회민주주의의 논리에 투항하고 말았다."

그리고 철학. "철학에 있어서 그들은 과거 그들의 적들의 불변하는 이데올로기가 지니고 있는 덕목들을 발견했다. 인도주의적 개인주의, 그리고 모든 조직화된 참여의 강제들에 대항하는 권리들의 자유주의적 방어가 그것이다. 집합적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정치 용어들을 모색하기는커녕, 결국 그들은 기존의 '서양적' 질서의 준칙들을 받아들였다."(14쪽)

이에 대한 영역은 "In the domain of 'philosophy', they have rediscovered the virtues of that ideology constantly defended by their former opponents: humanitaruian individualism and the liberal defence of rights against the constraints imposed by organized political engagement. Rather than seek out the terms of a new politics of collective liberation, they have, in sum, adopted as their own principles of the established 'Western'order."(5쪽)

우리말로 옮기면, "철학의 영역에서 이 지식인들은 과거 자신의 적대자들이 항상 옹호하던 이데올로기의 미덕들, 가령 휴머니즘적 개인주의와, 조직화된 정치참여가 강제하는 억압들에 맞설 권리의 자유주의적 옹호 같은 걸 재발견했다. 새로운 집단적 해방의 정치학을 위한 용어들을 모색하기보다는 요컨대, 그들은 기존 '서구적' 질서의 원리들을 자신들의 원리로 받아들였다." 여기서 서구적 질서의 원리들이란 건, 앞에서 언급된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의회민주주의' 같은 게 아닌가 한다.

바디우의 진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현 상황은 사회혁명에의 전망 상실이 가져온 일종의 '패배주의'적 상황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 보수주의적 '윤리'이고 '윤리의 인플레이션'이다. 이러한 진단하에서 그는 인권의 윤리학과 (레비나스-데리다의) 차이의 윤리학에 대항하여 '진리들의 윤리학'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한다. 그것이 내가 가늠하고 있는 이 책의 윤곽이다. 하지만, 이 윤곽을 다 드러내는 것은 좀더 시간을 필요로 한다. 

거기까지 읽고서 이번에 읽은 2장은 그래도 후반부로 가면 요지를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는 번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문단들에 대해서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고유성이 실험되는 일련의 현상학적 테마들을 제시한다. 그 중심에는 얼굴의 테마, 자신의 몸의 현시를 통한 타자의 개별적이자 '사적인' 주어짐의 테마가 자리잡는다. 이 테마는 닮음을 통한 인정(나와 동일한 동류로서의 타자)을 체험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드러남으로써 타자에게 '바쳐진' 것, 나의 존재 속에서 그러한 소명에 예속된 것으로서의 나를 윤리적으로 체험토록 해주는 것이다."(34-5쪽) 

특히 마지막 문장이 자갈밭인데, 부분적으론 오역이기도 하다(바디우 자신도 레비나스를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짐작에는 역자도 레비나스를 참조한 것 같지 않다). 이 대목의 영역은 이렇다(전체가 한 문장이다): "Levinas proposes a whole series of phenomenological themes for testing and exploring the originality of the Other, at the centre of which lies the theme of the face, of the singular giving[donation] of the Other 'in person', through his freshly epiphany, which does not test mimetic recognition (the Other as 'similar', identical to me), but, on the contrary, is that from which I experience myself  ethically as 'pledged' to the appearing of the Other, and subordinated in my being to this pledge."(19-20쪽) 

삽입구가 많이 등장하는 탓에 좀 까다로워 보이는 건 중간에 나오는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를 찾는 것인데(역자는 '테마'로 보았다. 불어본의 경우에는 선행사를 식별하기가 더 쉬운지는 모르겠다), 다행스러운 건 'epiphany'나 'the Other'나 'theme of face'나 거의 같은 내용을 지시하므로 아무거나 잡아도 크게 오역은 아니라는 것. 나는 타자의 육체적 현현으로서의 '얼굴'을 그 선행사로 보고 다시 옮기도록 하겠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고유성(근원성)을 테스트하고 탐구하기 위한 일련의 현상학적 주제들을 제시하는데, 거기서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얼굴이라는 주제, 즉 고유한 것으로 주어지는 타자, 육체적 현현을 통해 '실물로서' 제시되는 타자라는 주제이다. 이것은 얼마나 닮았느냐라는 인정 테스트의 대상(나와 '유사한', 나와 동일한 자로서의 타자)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나는 그것으로부터 나 자신을 윤리적으로, 즉 이 타자의 출현에 저당잡혀 있는 것으로, 나의 존재가 이러한 저당하에 놓여 있는 것으로 체험한다." 

번역에 관한 나의 윤리는 '충실성이냐 가독성이냐' 이전에, 자신이 이해한 것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옮겨놓는 것이다. 해서, 잘못 이해했다면 잘못 옮겨놓는 것이 윤리이다! 하지만, 잘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 옮기는 건 윤리적이지 않다. 바디우의 <윤리학>을 읽다가 나는 엉뚱하게도 번역의 윤리에 대해서 다시금 되새겨본다...

06. 03.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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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3-01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바디우에 대한 개략적인 강의를 들었는데
기대한 것 만큼 대단한 철학적 바람을 일으킬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제 솔직한 생각입니다. 제 생각엔 들뢰즈와 바디우는
같은 아버지를 가진 형제 같다는 ....(물론 개성이 아주 강한.)

로쟈 2006-03-01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적 바람'의 크기 한 철학자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 아니겠지요. 저는 바디우가 자기 철학체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분명 강자일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다른 철학자들을 읽는 데 있어서 데리다나 들뢰즈만큼의 섬세함 혹은 독창성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종류가 다른 거겠죠...

madflora 2006-03-20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바디우 "윤리학" 의 역서가 출판과정에서 출판사와의 잘못된 교정으로 인해 바로 수정본이 나왔다면, 그 수정본을 가지고 얘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못 출판된 책을 가지고 논쟁을 하게되면, 주장이나 반론 모두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번역상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면 바디우의 원본을 가지고 지적을 해야겠지요. 영역본이든, 국역본이든 어차피 둘 다 역서입니다. 영역본을 가지고 국역본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마치 영역본이 국역본의 오류를 검증해줄 어떤 권위라고 지니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__^

하여간, 동문선 출판사에서 잘 못된 책은 바꾸어 준다니,
바꾸어 읽으셔도 좋을 듯합니다.







로쟈 2006-03-20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 감사합니다. 한 독자로서 순전히 '오역'을 지적하기 위해 몇 가지 교정됐다는 책을 또 구해봐야 한다는 것은 저로선 비생산적인 일입니다. 저는 단지 불만스러운 대목들을 지적했을 뿐이고, 불어본을 읽은 독자들 중에 이견이 있으시다면 또한 지적하실 수 있겠죠. 저는 러시아문학이 전공이지만, 가령 영역본을 읽고서도 오역을 지적할 수 있는 러시아 번역들도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오역을 지적하려면 독자들에게 반드시 러시아어 원본을 읽고 해야 한다고 말하진 못하겠습니다.

어떤 번역이건 얼마간의 오역의 불가피하게 수반될 수 있습니다. 한데, 영어나 불어나 동족어인지라 국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면이 있으며 모든 언어에 능숙하지 않는 한 그런 면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영역본의 권위'라는 건 방점이 잘못 놓여진 것이며(저는 아도르노의 일부 영역본들을 혐오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nostalgia 2006-03-23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종영씨의 최근 저서 '정치와 반정치'를 재밌게 읽은 사람으로써 그가 신뢰할 만한 저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저에게는 조금 어색합니다. 마치 제가 바보인 양 보입니다.ㅠㅠ; 이글은 그래서 제가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글은 또한 아닙니다. 그냥 드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구요.

 로쟈님의 말씀처럼 단지 오역을 지적하기 위해 교정된 책을 또 보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일 수 있고, 영어번역본이 더 정확할 가능성은 있습니다(가능성이죠..). 또 전 출판사와 문제가 있었다는 말은 처음 들었네요. 윤리학을 읽긴 했지만 그런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써는 아..그렇구나의 느낌 정도만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문제가 있었어도 자신의 이름으로 나간 책이기 때문에 전량 모두 수거해서 재배포하지 않는 이상에야 저같이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또한 사정을 안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그냥 역자의 책임으로 돌려지겠지요. 그리고 이부분은 역자가 어느 정도는 감수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안타까울 현실이지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과연 영어 번역이 과연 얼마만큼 불어책을 성실히 번역했는가의 문제는 있습니다. 번역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 그리고 성실여부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번역이 갖는 고유한 국가마다의 맥락이 있고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님께서 출판사와의 문제를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신다고 해도 역자가 신뢰할 만한 저자가 아닌가 하는 일종의 단정에 대해서 입니다....전 이 두가지 모두 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종영씨의 책을 읽었던 사람으로써 과연 그러한가이죠. 제 생각은 지나치게 빨리 단정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다라는 단정을 내리기 전에 한번 꼼꼼히 읽어보시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아무리 개인적 판단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단정적인 판단보다는 한번 되짚어볼 여유가 있으시면 어떤가 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럴 수 없다라고 하신다면 뭐 저도 할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유를 내신다면 여전히 비판적이라고 할 지라도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의 비판적 관점을 갖게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재미있어 하실수도 있고요. 돈들여서 책을 사셨는데, 안 읽어보면 아깝지 않나요...?(음..생각해보니 이건 나한테 할 소리이군요..쩝..) 그럼 이만...가보겠습니다.


로쟈 2006-03-24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서 적었지만, 저는 저자로서의 이종영씨에 대해서는 불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저도 두어 권을 책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갖는 불만은 그의 번역에 대한 것이며, 그것이 전반적으로 그의 저작의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저서에서 보여주는 (유려함이라는 차원은 배제하더라도) 논리적인 문장들을 번역서들에서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곤란한 일입니다. 영역본 문제를 몇 분이 제기하시는데, 제 기준은 제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 한국어로 된 책을 다른 언어로 된 책의 도움을 받아야 읽을 수 있다면 그건 저에게도 번거로우면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2006-05-02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돌아다니는 사이트 마다 로쟈님을 만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관심사가 비슷한 것 같군요. 뭐 이런 경우 있잖아요? 어 또 이 양반이 있네. ㅎㅎ 그건 그렇고 몇 가지 언급하고 싶군요. 첫째, 바디우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글이 한 권 더 있습니다. 실뱅 라자뤼스, <<이름의 인류학>>, 새물결, 2002입니다. 역시 이종영 번역이고요. 이 책의 한국어본 서문에 실린 글은 바디우가 라자뤼스의 글을 서평한 것이고, 바디우의 Metapolitics에 실려있습니다. 참고로 라자뤼스는 바디우와 60년대부터 이론적, 정치적으로 같이 활동한 인물입니다. 둘째, 바디우가 데리다, 들뢰즈에 비해서 다른 이론가들을 읽는데 섬세함과 독창성이 부족하다 평하셨는데요. 판단이 이르다고 봅니다. 바디우의 글을 보면 자신의 상대들을 향한 날카로운 주장들을 펼치고 있습니다. 명백히. 한 철학자가 다른 철학자들을 논박할 때는 세심한 독해가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고, 나아가 알튀세르의 제자로서 이론적 실천으로서 적들을 공격할 때 그것은 더욱 분명하겠죠. 특히 프랑스처럼 학파에 따라 이론적/정치적 지형을 달리하는 풍토를 가면한다면, 단지 글쓰는 방식이 철학사가와 다르다고 해서 그 날카로운을 폄하할 수는 없겠죠. 가령 <<윤리학>>에서 진리의 공정이 배신으로 전락하는 것은 누구를 가리키겠는지요? 바디우가 미테랑주의를 지목할 때, <<존재의 함성>>에서 언급되듯이 메테랑주의와 연루/묵인한 자들을 가르키지 않는지요? <<존재의 함성>>에서도 철학 전통에 대한 나름의 충실한 독해를 하고 있지 않는지요? 셋째, 이종영의 번역에 관해서 인데요. 저도 번역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번역투에다가 한국어의 논리구조에도 맞지 않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그것이 그의 저작의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는 점은 좀 비약입니다. 만약 언어 물신주의에 빠져있지 않다면, 번역과 이해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종영은 한국적 지형에서 좀 특이한 작업방식을 가지는데, 그의 저작들은 그 고유성을 존중해줘야 합니다. 소위 이론적 작업을 하는 사람들 중에 그렇게 격렬하게 문제제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물론 그의 논의의 동의 여부를 떠나서 말이죠.) 마지막으로 아마 가을 쯤 바디우의 <<조건들>>이 번역 출판될 것입니다. 역시 번역이 좀 거시기 하겠지만, 바디우의 주저 중에 한 권이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로쟈 2006-06-22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이 더 있었네요.^^ 바디우의 주저들이 출간된다면 오해나 편하는 시정될 수 있을 터입니다. 한데, 이정우씨가 쓴 <존재의 함성> 서평에 보면 '바디우, 대실망이다!'란 투로 돼 있는데, 제가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바디우의 몇몇 주저들을 영역본으로 갖고도 있고요. 이종영씨의 작업 자체에 대해서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의문을 갖는 건 그의 '매끈한' 저작과 '울퉁불퉁한' 번역 사이의 부조화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기인 2007-02-07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디우 최근에 관심이 생겨서 퍼갑니다. 바디우 관련하여 바디우 제자인 서용순 선생님께서 책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어서, 공부해볼 생각입니다.

로쟈 2007-02-0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다가 공익계의 석학이 되시는 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