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 남자와 틀린 여자'는 히치콕의 <누명 쓴 사나이(The Wrong Man)>(1956)에 대한 레나타 살레츨(살레클)의 읽기이며(참고로, <누명 쓴 사나이>는 국내에 <오인>으로 출시돼 있다),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의 제2부 9장에 실려 있다. 이 글은 그 '읽기'에 대한 (재)정리인데, 일차적으론 재작년 5월 모스크바에서 작성된 것이고(따라서 국역본과 러시아어본만을 참조했다) 거기에 이미지들을 붙여서 창고에 넣어둔다. 참고로, 살레츨의 이 작품론은 <히치콕>에서 가장 쉽고 재미있는 꼭지라 할 만하다(해서, 이 책을 읽는데 어려움을 느낀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 봄 직히다).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도서출판b, 2003)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는 바이지만, 레나타 살레츨은 재치있고 똑똑한 비평가이다.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언제나 논리적이면서도 흥미롭게 ‘무대화’한다. <히치콕>에 들어가 있는 그녀의 글이 '맞는 남자와 틀린 여자' 한 편인 것이 다소 아쉬울 정도이다. 대개의 다른 글들에서는 다루고 있는 영화를 보지 않은 것이 글을 읽는 데 장애가 되었지만, 살레클의 글은 전혀 그런 장애감 없이 읽어나갈 수가 있었고, 다 읽은 후에는 마치 히치콕의 이 영화를 이미 본 것 같다는 느낌마저 갖게 되었다. 비평의 미덕이라 할 만하다.

이 장의 국역본 번역은 대체로 무난하며 ‘읽기’를 방해하지 않는다. 물론 옥의 티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만. 따라서 이하의 언급은 오역에 대한 지적이라기보다는 더 나은 번역에 대한 ‘제안’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먼저, 히치콕의 이 영화는 평범한 음악가였던 매니 발레스트레로가 우연히 강도로 오인되는 바람에 악몽과도 같은 곤욕을 치러야 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영화 자체는 카프카적 주인공과 그 테마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실제로 살레츨은 여러 차례 카프카를 언급한다.



러시아어본은 첫번째와 두번째 문장 사이에 이 영화와 <북북서로 기수를 돌려라>(둘 다 ‘오인’을 다룬다)와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8줄 더 들어가 있지만, 이건 아마 영어본에서는 뺀 모양이다(러시아어본은 영어본을 옮긴 걸로 돼 있지만, 이미 언급했다시피 편제가 다르고, 부분적으론 슬로베니아어본을 참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역자가 그런 내용을 썼을 리는 없으니까). 269쪽에서 ‘실제의 기미’라고 옮긴 건, 나라면 ‘실화성’이라고 옮기겠다. “이러한 ‘실화성’을 강조하기 위해 히치콕은 그 영화를 의사-다큐멘터리적인 양식으로 찍었다(‘감독했다’).”



그런 맥락에서, 카메오 히치콕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일러주는바, (이 영화의 스토리는) “그 암영에 못지 않게 그 ‘진실’로 인해 어둡고 공포스럽다.” 물론 여기서의 ‘진실’은 그 이야기가 ‘실화’라는 걸 가리킨다. 그리고 ‘암영’은 ‘shadow’의 번역인지 모르겠지만(나는 ‘암영’이란 번역어에 반대하지 않는다), 러시아어본은 ‘음울함’(‘어두움’)이라고 옮기고 있다. 참고로, 러시아어본을 약간 의역하면, “이 이야기는 그 음울함 못지 않게 그것이 실화라는 점 때문에 슬픔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암영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히치콕은 스토리를 말하는 입각점을 결백한 매니에게 설정한다.”라고 돼 있는데, 나는 이 영화에서 아예 매니가 (부분적으로라도) 화자로 등장하는 게 아닌가 싶다. 만약에 그렇다면, “히치콕은 결백한 매니를 스토리의 화자로 설정한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다. 혹 그가 화자가 아니더라도, 히치콕은 다큐멘터리적 양식(=객관적 시각)과 함께 매니의 시점쇼트(=주관적 시각)로 영화를 이끌어나감으로써 매니에 대한 관객의 공감을 호소한다.

그런데, 살레츨이 지적하는바, 이 영화에서 특이한 것은 히치콕이 사용하고 있는 시점쇼트가 주인공에 대한 관객의 ‘동일시’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점이다(<사이코>에서 아보가스트 형사가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과 대조적으로). 왜 그런가? 이것이 살레츨의 통찰인데(일반적으로 지적되는 바가 아니라면), 그것은 이 영화에서 매니의 주관적 응시가 그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따라서 “주체(매니)는 그 영화의 형식이 제시하는 주관화의 양식에 들어맞지 않는다.”(271쪽) 그건 매니가 히치콕의 다른 영화들에서 “실수로 죄를 뒤집어쓴 주인공(‘주연’)”들과 뭔가 다르다는 걸 암시한다. 그 주인공들이 ‘사실들’에 관해서는 무죄였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욕망’에 관해서는 유죄였던 반해서, 그래서 나름대로 죄의식을 갖고 있는데 반해서, 매니는 어떠한 죄의식도 갖지 않는다. “요컨대 매니는 어떤 관료적인 기제가 수행적으로 유죄로 만든 카프카적인 영웅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다.”(272쪽)

 

 

 

 

‘기제’는 물론 ‘메커니즘’의 번역이고 ‘영웅’은 ‘hero’의 번역인데, 이런 문맥에서 ‘hero’는 ‘영웅’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번역돼야 한다. 게다가 ‘카프카적인 영웅’이란 일종의 모순어법이다! “어떤 관료적인 메커니즘이 수행적으로 유죄로 만든 카프카적 주인공”의 대표적인 사례는 <소송>의 ‘요제프 K’이다. 결국에 자신의 유죄성을 승인하는 ‘요제프 K’적인 인물과 매니는 다르다는 게 살레클의 핵심적인 주장이며, 왜 다른가를 보여주면서 그녀는 <누명 쓴 사나이>에 대한 독창적인, 페미니즘적인 독해로 나아간다. 이 독해의 핵심은 매니 대신에 그녀의 아내 로즈가 죄의식을 덮어쓴다는 것이다. ‘정신병자’ 남편 매니 대신에 정신병원에 가게 되는 주체가 바로 그의 아내 로즈이다. 이건 무슨 메커니즘인가?



273쪽에 나오는 건 로즈의 고백인다. “이 일이 당신에게 일어난 것은 제 실수예요. 이제 철들 나이예요…”(‘나이에요’는 오타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국역본이 읽을 만하기 때문에, 굳이 러시아어본을 참조하지 않고 읽어나가다가 이런 대목에서는 멈추게 되는데, 뭔가 ‘튀기’ 때문이다. “이제 철들 나이예요.”? 러시아어본에는 ‘사랑니’라고 돼 있어서, 같은 뜻의 영어단어 ‘wisdom tooth’를 찾으니까 (‘wisdom teeth’에) ‘철들 나이가 되다’란 뜻도 들어 있었다. 그런가 하고, 넘어갔는데, 274쪽에 바로 치통 얘기가 나온다! 그러니까 짐작에 “이제 철들 나이예요”라기보다는 문맥상 “사랑니가 문제였죠.” 정도로 번역되어야 한다.



문맥을 재구성하면, 아내 로즈는 사랑니 때문에 치통에 시달리는데, 돈이 없어서 치료를 하지 못한다. 그녀는 어느 날 남편 매니에게 자신을 위해서 돈을 좀 빌려오라고 부탁하고, 보험 사무실에 돈을 꾸러갔다가 매니는 강도로 오인되어 체포된다. 로즈가 자신의 ‘유죄성’을 주장하는 것은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에게, 자신의 치통(‘사랑니’)에 있다고 믿어서이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남편 매니의 ‘완벽함’을 유지하고자 하며, 결국 그의 ‘유죄성’(‘정신병’)을 자신이 떠안게 된다. 이상적인 남편으로 묘사되는 매니의 유죄성? 영화의 도입부에서 이미 그의 ‘이상성’에 어떤 균열이 내재해 있음이 암시된다. 치과에 갈 돈이 없어도 우린 아주 운 좋은 사람들이야, 란 매니의 말에 로즈는 “(과연) 그럴까요?”라고 받아넘기는 장면이 그것이다. ‘완벽함, 근면함, 헌신성’ 등과 같은 매니의 ‘이상성’에 가려진 그의 이면은 ‘무기력과 수동성’이며, 더 근본적인 것은 그의 ‘정신병적인 태도’(276쪽)이다.

매니는 왜 정신병자인가? ‘언어-존재(parletre)’, 즉 ‘말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실존을 구성하는 근본요소인 ‘존재론적 죄의식’이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죄의식에 붙인 프로이트적인 이름은 물론 부모살해(parricide)이다.”(277쪽) 이 번역에는 혹 문제가 없을까? 있다! 물론 parricide의 사전적 정의는 ‘부모살해’이지만(그러니까 부모 중의 한 사람을 살해하는 걸 parricide라고 한다, 둘 다 죽여야만 하는 건 아니고), 이 경우는 ‘부친살해’라고 해야 한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문제되는 건 ‘아버지-살해’이지, ‘어머니-살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바로 다음 문장에서 확인된다. “라캉의 프로이트 재독해에서처럼, 우리가 말한다는 단순한 사실은 우리가 아버지를 살해했음을 함축한다.”! 이런 건 역자가, ‘사랑니’의 경우처럼 앞뒤로 조금만 주의해도 피할 수 있는 ‘오역’이다. 

해서, 살레츨의 요점은 매니가 아무런 죄의식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신병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친살해’에 대한 ‘존재론적 죄의식’이야말로 ‘말하는 존재’의 근본적인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니의 경우는 죄의식이 억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봉쇄되어 있다(여기서 ‘봉쇄’란 말은 ‘배제’ 혹은 ‘폐제’와 연관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277쪽 중간에 ‘가족 전원시’란 말이 나오는데, 이건 물론 ‘family idyll’의 번역이겠다. 내가 보기에 이 말은 ‘가족 로맨스’와 동의어인데, 그런 경우라면, 좀더 친숙한 ‘가족 로맨스’란 말로 번역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그리고, 만약에 둘이 서로 구별되는 것이라면(나도 프로이트는 전문가는 아니므로), 그 차이에 대해서 주석을 달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상적인 경우에, 아버지란 ‘아버지의 이름’(=“공허하고 상징적인 기능”)과 (실제의 우연적인) ‘아버지’(=“경험적이고 우연한 거주자”)의 간극을 가족 구성원들이 수용할 때 ‘기능하게 된다’(“우연한 거주자”보다는 “우연한 담지자”쯤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매니는 ‘자기가 아버지라고 실제로(정말로) 생각하는’ 아버지로서 행동하며, 따라서 정신병자이다!

살레츨의 분석은 여기까지도 높이 살 만하지만, 278쪽 이하의 영화 속 한 장면에 대한 분석은 ‘예술적’이다. 매니의 정신병적인 무관심이 어떻게 로즈로 하여금 유죄라는 망상에 빠지도록 몰아대는가? 로즈가 (아마도 유일하게?) 매니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장면에서이다. “당신은 완벽하지 않아요. 내가 어떻게 당신이 죄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죠?...”(278쪽의 스틸사진 참조) 로즈는 매니에게 빗을 집어던지고, 그에게서 튕겨나온 빗은 거울을 때리면서 금이 가게 한다.”(쇠빗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거울에는 섬뜩하게 왜곡된 매니의 얼굴 이미지가 나타나는데(280쪽 스틸사진), “그의 완벽한 아버지 이미지의 이면, 즉 외설적인 미치광이(‘광인’)의 균열된 우스꽝스런 얼굴”(279쪽)에 대한 응시는 매니의 것도, 로즈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테이블 램프’의 것이며, 로즈는 그 응시를 포기하는 대가로 정신병원에 가게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실질적인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이 장면에서, 매니는 로즈의 분노에 대해서 다시 ‘결백한 표정’을 지으며 다독거리려고 하고, 로즈는 체념하면서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나한테 정말 뭔가 문제가 있어요… 죄는 나한테 있어요.” 국역본에서는 그녀가 “체념한 얼굴로 혼수상태에 빠져든다”라고 했는데, ‘혼수상태’는 정확한 번역이 아닐 듯싶다(지금 쓰러진 것도 아니니까). 이 ‘체념’과 ‘혼수상태’의 러시아어 번역은 ‘냉정’과 ‘자기비하’이다.

로즈는 남편의 혐오스러운 캐리커처, 조각난 얼굴 이미지를 견뎌낼 수 없으며, 그것을 “상징적 질서 속에 통합할 수 없”다(281쪽). 그리고 바로 그것이 ‘정신병’이다. 라캉에 따를 때, “(정신병에서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밝혀지지 않는 것이 실재, 즉 주체 바깥의 영역 속에서, 예를 들면 환각으로 나타난다.”(여기서 ‘환각’은 아마도 hallucination의 번역이며, ‘망상’과 동의어이다.) 이 문장의 러시아어 번역은 더 압축적인데, “상징계에서 배제된 모든 것은 실재 속에서(혹은 실재로서) 되돌아 온다. 가령 환각의 형태로.” 그러니까, 주의할 것은 우리말 번역에서 ‘실재=주체’가 아니라 ‘실재=주체 바깥의 영역’이라는 점이다(원문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이 글의 마지막 문장에서 다시 반복되는바, “그의 아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그 상황의 압박이 아니라 사실상 남편의 실제 이미지인 그 외설적인 캐리커처에 대한 시선이다.” 여기서 그 ‘시선’은 ‘그녀의 시선’이다. 그녀는 남편의 외설적인 실제 이미지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미쳐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살레츨의 결론은 “로즈의 정신병은 궁극적으로 매니의 정신병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마저 들어보자. 번역도 잘 읽힌다. “죄의식을 스스로 덮어쓰고 미쳐버림으로써 그녀는 매니가 정신병적 무관심의 태도를 보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녀가 나쁜 여자의 역할, 죄의식의 부담을 지는 역할을 떠맡았기 때문에 그는 죄의식에서 자유로운 올바른 남자로서 계속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공적인’ 미친 여자의 역할을 취하기 때문에 그의 광기는 정상성이라는 공적인 가면을 계속 쓰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히치콕과 매니 역의 헨리 폰다.

결론 이후의 한 문단은 유쾌한 보너스이다. 여기서 살레클은 사회주의 시기 소련의 농담 하나를 인용하고 있는데, ‘라디오 에레반(Radio Erevan)’은 사람 이름이 아니고, 라디오 방송사 이름이다. 러시아어본에는 ‘아르메니아 라디오’라고 돼 있는 걸로 봐서, 아르메니아의 한 라디오방송사인 듯하다. “라비노비치가 모스크바에서 복권 당첨으로 차를 탔다는 게 사실입니까?”란 물음에, “원칙적으론 그랬지만, 그건 차가 아니라 자전거였다는군요. 게다가 그는 그걸 타내지도 못했어요. 도둑맞았거든요.” 어디선가 한번 본 농담인데, 영어본에는 상당히 압축돼 있는 거 같다. 사실 이런 식의 버전이야 계속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소련의 농담이었으니까 러시아어본에서 직접 인용하는 것도 의미가 없진 않을 것이다(이게 축약되지 않은 원래의 농담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더라도). 라비노비치가 복권에 당첨되어 ‘볼가’(러시아산 중형차. 우리라면 ‘그랜저’)를 탔다는 게 맞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맞긴 맞아요, 하지만 라비노비치가 아니라 이바노프구요, 복권이 아니라 도박이고, 볼가가 아니라 3루블이고, 딴 게 아니라, 잃은 거고…”

해서, <누명 쓴 사나이>가 “카프카적인 메커니즘(‘기제’)의 수레바퀴라는 함정에 빠진, 그래서 실수로 피소되지만(‘피소되며’), 그의 확고한 도덕 덕택에 사건 전체를 극복하고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는 주인공(‘영웅’)에 관한 영화”라는 해석에 대해서, “반면 그의 아내는 성격상의 허약함 때문에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버린다는 해석에 대해서” 이러한 ‘해석에 반대하여’ 살레츨은 이렇게 말한다. “맞긴 맞아요, 하지만, 그 남자는 처음부터 미쳐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는 거구요, 그의 아내가 견딜 수 없었던 건 그런 상황의 압박이 아니라, 남편의 실제 이미지, 그 외설적인 캐리커처였답니다…” 그렇다면, 글의 제목 또한 ‘맞는 여자와 틀린 남자’로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

06.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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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3-12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응시를 포기한 또는 포기된 사람이 실재라면 결국 미쳐야만 감당이 되는 아니면 미치지 않는다면 감당이 되지 않는게 현 시대의 인간적인 삶인가요. 야만의 시대에 정신을 잃지 않으려면 정신을 잃어야만 한다. 답답한 현실이네요.
‘말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실존을 구성하는 근본요소인 ‘존재론적 죄의식’이 그에게는 결여되어 .... 말하는 존재는 왜 죄의식을 당위적으로 가져야만 하나요?

로쟈 2006-05-27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뒤늦게 댓글을 답니다(어려운 문제라 좀 생각해본다는 것이 흐지부지됐던 모양이네요). 그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관련된 것인데, 그때의 죄의식은 제가 보기에 '당위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입니다. 주체로서의 자기정립에 대한 대가로 지불하는 '상징적 거세'가 '존재론적 죄의식'과 짝이 되는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주 17일부터 열흘 동안 서울 낙원동 필름포럼(구 허리우드 극장)에서는 히치콕의 대표작 9편을 상영하는 ‘알프레드 히치콕 걸작선’을 연다고 한다. 상영작 9편은 <39계단>(1935), <레베카>(1940), <의혹>(1941), <오명>(1946), <이창>(1954), <다이얼 M을 돌려라>(1954), <현기증>(195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프렌지>(1972) 등이다. 최근에 패트릭 맥길리건의 가장 방대한 분량의 히치콕 평전 <히치콕>(을유문화사, 2006)도 번역된 차에 개최되는 영화제라서 타이밍도 잘 맞는다. 재작년 모스크바에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에 대한 자세한 읽기를 시도한바 있는데, 상기된 김에 다시 정리해둔다. 일단은 책의 3부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지젝의 <사이코> 읽기에 관해서.

지젝의 <사이코> 읽기. 일단 지젝이 주장하는 바의 핵심은 이 영화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첫번째는 욕조에서 살해당하는 메리언(자넷 리) 이야기이고(<사이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기도 하다), 두번째는 그 이후의 이야기, 즉 노먼의 이야기이다(지젝은 메리언과 노먼이라는 두 이름 사이의 거울-관계를 지적하고도 있다). 그런데, 메리언의 살해 이후 “다이제시스적 공간을 지배하는 인물과의 동일화는 불가능해” 지는바, 그 이유는 무엇인가가 지젝이 던지는 첫번째 질문이다.



“메리언의 세계는 현대 미국의 일상생활의 세계인 반면 노먼의 세계는 그 야간의 이면”(330쪽)이다. “이 두 세계의 관계는 표면과 심층, 현실과 환상 등의 단순한 대립을 피해”가며, “그것에 알맞은 유일한 지형학은 뫼비우스의 띠”이다. 여기서 ‘지형학’이 ‘topology’의 번역이라면(그럴 거 같은데), 그건 ‘위상학’으로 번역돼야 한다. ‘뫼비우스의 띠’가 지형학에서 나올 거 같지는 않으므로. 이후 333쪽까지가 지젝의 논의 핵심을 구성한다. 즉 그의 기본적인 아이디어가 집약돼 있다. 그 아이디어란, 메리언의 세계로부터 노먼의 세계로의 이행을 “히스테리적인 욕망의 기입으로부터 정신병적 충동의 기입”으로의 이행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 메리언과 노먼이라는 뫼비우스의 띠의 두 ‘표면’에 붙인 ‘라캉적인 이름’이 각각 ‘아버지-의-이름’과 ‘어머니의 욕망’이다.

정리하자면, “메리언은 ‘아버지’의 기호 아래, 즉 ‘아버지의 이름’으로써 구성된 상징적 욕망의 기호 아래 서 있으며 노먼은 아직은 부성적 ‘법’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어머니의 욕망(이라기보다는 전-상징적 충동)에 걸려 있다. 히스테리적 여성(메리언)의 입장은 ‘아버지의 이름’에 말을 거는 반면 정신병 환자(노먼)는 어머니의 욕망에 달라붙어 있다. 요컨대 메리언에서 노먼으로의 이행은 ‘욕망’의 기입으로부터 ‘충동’의 기입으로의 ‘퇴행’을 축약한다.”(331-2쪽) 더 압축하면, ‘욕망으로부터 충동으로’가 되겠다(욕망과 충동의 차이에 대한 설명은 332쪽 참조). 여기서 충동의 세계는 상징적 욕망과는 대조적으로, ‘불가능한-실재’에 속하며, 따라서 동일화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정신병적 충동에 수감되어 있는 한, 욕망에의 접근이 그에게서 거부되는 한 노먼은 동일화를 교묘하게 피해 달아난다.” 이것이 지젝이 던진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이제 남은 건 이러한 주장을 논증해나가는 것이다. 지젝은 먼저 <사이코>에서의 두 살인장면, 즉 “메리언의 샤워-살해와 아보가스트 형사의 계단-살육의 대조”를 통해서, 욕망과 충동의 대립을 입증하고자 한다. ‘아보가스트의 살인’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통해서, 그는 이 장면이 “기대된 것과 기대되지 않은 것의 정치한 변증법, 요컨대 (관객의) 욕망의 변증법”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까지가 <사이코>의 ‘뫼비우스의 띠’적 구조에 대한 내용이다.



이어지는 ‘뒤집힌 아리스토파네스’ 절부터는 욕망과 충동의 대립이라는 기본 테마의 변주이다. 제일 먼저, 지젝은 이 대립에 투입되어 있는 ‘역사적 긴장’을 지적한다(이 ‘긴장’을 러시아어본은 ‘충돌’ 혹은 ‘모순’으로 번역하고 있다). 어떤 긴장인가? “다시 말해 두 살인의 건축적 현장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첫번째 것은 익명적인 미국의 근대성을 축도하는 모텔에서 발생하는 반면, 두번째 것은 미국의 전통을 축도하는 고딕 주택에서 발생한다.” 이 대목의 번역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나라면, ‘살인의 건축적 현장’은 ‘살인 장소’로, ‘중립적’은 ‘중성적’으로, ‘고딕 주택’은 ‘고딕 저택’으로 옮기고 싶다. 실제로 이 저택은 미국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기찻길 옆집>, 1925, 왼쪽사진)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호퍼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도 좀 된다).



이 두 공간을 왔다갔다 하는 노먼은 그래서 “전통과 근대 간의 일종의 불가능한 ‘매개자’로 이해”되며, 그의 ‘정신분열’은 상징적 의미 또한 갖게 된다(그런 의미에서 <사이코>는 모더니즘의 영화이다). 지젝의 지적대로, “포스트모던한 <사이코>에서라면 모텔 자체가 낡은 주택을 모방하여 재건축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낡은 주택’은 적절한 번역이 아니다. ‘고풍(古風)스런 저택’ 정도로 옮겨야 한다. ‘낡은 주택’을 모방한 모텔에 누가 묵겠는가?

“결과적으로 욕망과 충동의 바로 그 이중성은 근대 사회와 전통 사회의 리비도적 상관물로 이해될 수 있다. 전통 사회의 모체는 ‘충동’의, 동일성 주의에서의 순환운동의 모체인 반면, 근대사회에서는 선형적 진보가 반복적 순환을 밀어내고 대신 들어앉는다. 이처럼 끝없는 진보를 촉진하는 욕망의 환유적 대상-원인을 구현하는 것은 다름아닌 돈이다.”(337쪽) 지젝의 핵심적인 주장이면서, 좋은 통찰이기에 그대로 옮겨보았다. “<사이코>는 따라서 두 이질적인 부분의 일종의 이종교배이다.”

이후에 지젝은 두 이야기가 각기 완결된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자 한다. 그런데, 메리언의 살해장면으로 끝나는 첫번째 이야기처럼 이야기의 종결/완결은 성취되지 않았다. 그것은 “만연한 미국적 이데올로기와는 반대로,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정말로 결의한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이 단연코 가능하지 않은 곳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339쪽) 즉, 메리언 이야기는 ‘아메리칸 드림’의 어두운 이면이자 그 ‘실재’라고 할 만하다. 그러한 ‘실재’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를(즉 관객을) 직접 쳐다보는 노먼의 ‘응시’이다. 그것은 모든 동일화를 사전에 배제해버리는 ‘절대적 타자성’을 체현하고 있는 응시이다.



342쪽부터 지젝은 다시 이 ‘응시’에 대해서 자세하게 해명해간다. “굳어진 응시는 실재의 오점, 즉 상징적 현실의 틀로부터 ‘두드러지는’ 하나의 세부, 요컨대 ‘상징적인 것을 능가하는 실재적인 것의 트라우마적 잉여’를 고립시킨다.”(343쪽) 여기서 ‘굳어진 응시’라는 건 어떤 충격이나 놀람 때문에 굳어진 응시를 말한다. 그러한 응시는 충격/놀람을 산출한 대상, 아주 작은 세부를 고립시켜낸다(그러니까 그러한 세부를 ‘발견’한다). 그런데, ‘상징적인 것을 능가하는 실재적인 것’이란 표현은 약간 부적절하다. 우리말의 ‘능가’라는 건 어떤 ‘능력’과 상관적인 말인데, 그런 ‘능력’은 이 문맥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징적인 것’은 (역자에 따라 주관이 다를 수는 있지만) 보통 ‘상징계’라고 옮기며 ‘실재적인 것’은 ‘실재’라고 옮기는 게 관행이 돼가고 있으므로, 그에 따라 다시 옮기면, “상징계를 침범해오는 실재의 트라우마적 잉여” 정도가 되겠다(‘침범’이란 역어를 고른 것은 잠시후에 설명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맞추어서, “상징적 현실의 틀로부터 ‘두드러지는’ 하나의 세부”라는 것도 “상징적 현실의 틀을 넘어서는 하나의 세부” 혹은 “상징적 현실의 틀에서 삐져나오는 하나의 세부” 정도로 옮기는 게 이해하기에 쉬워 보인다. 그러한 세부를 상징계로부터 분리시켜내는 응시 자체가 ‘대상a’이다.

344쪽의 ‘지배-기표(master-signifier)’도 요즘은 보통 ‘주인-기표’라고 옮긴다. 이 주인-기표는 정의상 ‘비어있으며’ “‘주인’은 단지 우연히 이 빈 장소를 점유하는 자이다.” 영화 <북북서로 기수를 돌려라>에서 케리 그랜트가 잠시 점유하게 되는, 오인받게 되는 ‘조지 케플란’이 바로 그러한 기표이다. 이러한 ‘주인-기표’나 ‘대상 a’의 또 다른 양상으로 지젝은 히치콕 영화에서의 ‘프레임과 그 외부의 변증법’을 든다. 그 전형적인 예는 <사이코>의 샤워-살인이나 <새>에서의 새들의 공격이다.

이 살인이나 공격은 모두 “외부로부터, 더 정확히는 다이제시스적 현실과 우리의 ‘진짜 현실’의 중간에 있는 공간으로부터, 다이제시스적 현실에 침입하는 일종의 오점으로 경험된다.” 이 인용에서의 ‘침입’이 바로 앞에서의 ‘침범’과 같은 의미를 갖는 말이다. 실제로 <새>에서 “새들은 종종 이후의 쇼트에 포함되거나 심지어는 만화에서처럼 직접적으로 그려”졌다(이 문장에서 ‘이후의’는 오역일 것이다. ‘나중에’라고 해야 한다. 그러니까 공격해오는 새떼들의 쇼트를 따로 찍어서 ‘나중에’ 합성하거나, 아니면 촬영한 쇼트에 새떼를 직접 그려 넣었다는 얘기일 테니까).



일반적으로 “스크린 위에 기표가 이처럼 환영-처럼 출현하는 것은 억압된 것의 귀환으로서의 징후의 논리”를 따른다. “상징적인 것으로부터 봉쇄된 것은 실재적인 것 속에서 귀환한다”는 정신병에 대한 라캉의 공식을 조금 바꾼 것이다(국역본에서처럼 ‘전도’시킨 건 아니다). 즉, “징후의 경우에 현실(=상징계)로부터 배제된 것은 스크린 위에 의미작용(‘의미화작용’)의 흔적으로서 다시 나타”난다(347쪽). 이것이 프로이트식의 ‘대표-표상(Vorstellungs-Reprasentanz)’이다(‘대표-표상’은 ‘대표적 표상’이란 뜻이 아니다. ‘대리-표상’이란 뜻으로 이해하면 쉽다. ‘대표-표상’이란 역어가 관행이 아니라면 ‘대리-표상’이라 옮기고 싶을 정도이다).

“이와는 반대로 <새>와 <사이코>의 장면들에서 오점의 침입은 정신병적 자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신병적 자연’? 우리말로 이상한 건(오점들!), 물론 대부분이 오역이다. 아마도 ‘psychotic nature’를 옮겼을 거 같은데, ‘정신병적 성격’이라고 해야 말이 된다. 즉, “(<새>와 <사이코>에서는) 상징화되지 않은 것이 트라우마적 대상-오점으로 위장하여 귀환”한다.

그러니까, 일단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두 귀환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1)실재의 오점의 귀환(이건 “말이 실패하는” 즉, 언표 불가능한 것의 귀환이다)과 (2)기표의 귀환(이건 재현적 현실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귀환이다). 이 두 귀환의 비대칭은 “현실과 실재의 분열에 의존한다.” 여기서 ‘현실’과 ‘실재’는 아마도 각각 ‘reality’(=상징계)와 ‘the Real’(=실재)의 번역일 것이다. 이때의 ‘현실’은 “상징적으로 구조화된 표상들의 장이며 ‘실재’의 상징적 ‘고상화’의 성과이다.”(348쪽) ‘성과’보다는 ‘결과’가 낫겠다. 즉 우리의 ‘현실’은 (길들여지지 않은) ‘실재’를 상징적으로 고상화함으로써 얻어진다.

비유컨대, ‘실재’가 ‘야수’라면, ‘현실’은 ‘가축’이다. 우리는 ‘야수’들과 같이 살 수는 없기 때문에, 그걸 길들여야만 한다(해서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가축적’이다). 그런 길들임이 ‘승화’이다. “우리가 ‘승화’라고 부르는 것의 성공은 ‘기표의 결핍’을 ‘결핍의 기표’로 (…) 전도시키는 것에 달려 있다.” 야수들에게 무슨 이름(=기표)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메리’라거나 ‘부시’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에게 ‘결핍의 기표’를 부여/할당함으로써, 그들을 상징계적 현실로 포섭하는 것이다. 즉 아무런 기표도 없는 ‘맹목적인 희열(brute enjoyment)’(이 대목에선 ‘야성적 향락’이라고 옮기고 싶다)을 ‘텅 빈 기표’로 대체하는 것이 관건이다(‘메리’나 ‘부시’가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그저 아무 집 없는 강아지한테나 갖다 붙이면 되는 것이다).

349쪽은 지젝의 장기가 발휘되는 대목이다. 그는 이처럼 ‘오점’으로부터 ‘대표-표상’으로의 이행/대체의 사례로 다신교로부터 유대교(‘유태교’?)로의 이행을 든다. 다신교적 신들은 ‘실재’에 속하며, 그들의 영역은 ‘이름붙일 수 없는 것’의 영역이다. “이것이 바로 신들에게 접근할 유일한 길이 신성한 난교축제들의 엑스터시를 통해서인 이유이다.”(이 ‘난교축제들의 엑스터시’가 바로 ‘주이상스’인데, 이걸 ‘향유’라고 옮기는 건 그 엑스터시를 ‘고상화’하는 것이고, ‘가축화’하는 것이다. '향유'로 옮기는 게 적절한 레비나스의 '주이상스'처럼. 내가 라캉의 '주이상스'의 역어로 ‘향락’을 고집하는 이유이다. <히치콕>의 역자는 ‘희열’을 선호한다.)

 

 

 

 

반대로 유대교에서는 ‘신’의 영역에서, “향락(‘희열’)이 정화되어 있다.” 예배에서의 ‘경건한 향락’을 생각해 보라. 간혹 ‘벅찬 감동’이라고도 표현하는.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예배와는 또 다른) 한국식 부흥성회는 ‘유대교적’이라기보다는 ‘다신교적’이다. 거기엔 엑스터시(향락)가 정화되어 있다기보다는 넘쳐나기 때문이다. 부흥성회는 예배라는 상징계의 틀을 넘어서는/초과하는 ‘실재’의 오점이라 할 만하다(할렐루야!).

다시 돌아와서, 요컨대, “(유대교에서) ‘신’은 순수한 상징으로서, 비어 있어야만 하며, 그 어떤 실제 주체도 그것을 채우도록 허락되지 않는 하나의 ‘이름’으로 바뀐다.” 바로 이어지는 대목에서 역자는 중대한 오역을 범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신적인 ‘이름’을 신적인 ‘사물’로 이런 식으로 대체하는 것은 금지의 자체-의-반영-을 수반한다.” 무엇이 잘못 됐는가? 바로 앞에서 ‘신’(=사물)에서 ‘이름’으로 이행/대체된다고 해놓고, 다음 문장에서는 그걸 거꾸로 말하고 있다. 이런 것이 오역의 ‘실재’ 혹은 파이-오역이다. 다시 옮기면, “다시 말해, 신적인 ‘사물’을 신적인 ‘이름’으로 이런 식으로 대체하는 것에는 자체-반영적인 금지가 수반된다.”

‘자체-반영적인 금지’가 무슨 뜻인가는 이어지는 두 문장에서 설명된다. 즉 다신교에서는 ‘이름’ 자체가 금지돼 있었는데, 유대교에서는 이름을 붙이는 게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이름에 어떤 실정적(‘실증적’) 내용을 채워넣는 것이 금지된다. 어떻든, 다신교에서의 ‘금지’가 유대교에도 계승되는 것인데, 이게 ‘자체-반영적인 금지’란 말이 뜻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역의 연속타. “히치콕 영화들에서 거대한 조각상들, 즉 화석화된 희열의 이러한 기념비들은 어떻게 오늘날 ‘이름’을 ‘사물’로 대체함이 그 격렬함(edge)을 상실해 있는가를, 어떻게 ‘신들’이 실재로 귀의하고 있는가를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350쪽)

반복하지만, ‘이름’을 ‘사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이름’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리고 히치콕 영화에서의 거대한 조각상들은 다신교적인 형상인바, ‘신적-사물’의 ‘이름’으로의 대체가, 즉 다신교에서 유대교-일신교로의 이행이 그 예리함(edge)을, 즉 지배력을 오늘날 상실하고 있다는 걸, 즉 (다신교적) ‘신들’이 ‘실재’로 귀환하고(‘귀의’가 아니다)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라는 게 지젝의 주장이다. 이에 대한 각주39) 또한 오역인 것은 당연하다. “그것의 피상적인 지표는 아마도 소위 ‘신세대 의식’에도 아랑곳없는 유태-크리스챤적 태도의 퇴각일 것이다.”

역자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이런 ‘피상적인’ 번역은 역자에 대한 신뢰를 잠식한다. 일단 ‘유태-크리스챤적 태도’는 ‘유대-기독교적 태도’라고 해두자. ‘신세대 의식’이란 ‘뉴에이적 의식’의 맥거핀이다. 이전에 다른 자리에서도 지적한바 있는데, 여기서의 ‘New Age’는 ‘신시대’도 아니고, ‘신세대’도 아니다. 우리말로는 그냥 ‘뉴에이지’라고 옮겨야 한다. 종교에서는 일종의 현대판 신비주의를 가리킨다(신비주의는 다신교적이다). 그리고 과학에서 이에 상응하는 것이 프리초프 카프라를 원조격으로 하는 ‘신과학’이다. 즉 현대과학과 동양사상의 만남 어쩌고저쩌고 하는. “아랑곳없는”도 문맥상 적합하지 않다. 지젝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뉴에이지적 의식’ 즉 다신교적 신비주의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유대-기독교적 태도(=일신교)이기 때문이다. 즉, 유대교적 일신교가 현대사회에선 무너지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신들’의 귀환!).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구도는 <다신교→일신교→다신교>이다. 의역하면, “그 피상적인 지표는 아마도 ‘뉴에이적 의식’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며 주춤거리는 유대-기독교적 태도일 것이다.”

350쪽부터는 ‘내러티브의 종결과 그 소용돌이’란 절이다.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소용돌이’는 'metamorphosis’의 번역 같은데, 그럴 경우 적절한 역어가 아니다. 그 이유는 이 절을 읽어나가면 알 수 있다. 일단 ‘내러티브의 종결과 그 변형’이라고 해두겠다. 거기에 감독 히치콕의 ‘환상’이 직접 언급돼 있다. 영화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고, 즉 대뇌에 전기자극을 줌으로써 무매개적으로 관객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하는 것이 그의 환상이다. 그는 영화라는 번거로운 작업을 통해서 그런 ‘대중의 감정 조작’을 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면, 영화는 그런 전기자극에 대응하는 번거로운 매개(체)이자 상관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매개란 “다름 아닌 기표, 즉 상징적 질서”이며, “심리기제 내에서의 자신의 대표(=표상) 없이도 기능할 수 있을 이러한 충동의 꿈은 우리가 히치콕의 세계의 정신병적 중핵이라고 명명하고픈 어떤 것이다.”(351쪽) 참고로, 정신병적 세계란, 그러한 단속순환적이며 자기만족적인 충동의 세계이다.

“하지만 우리가 상징적 질서 안에 머무는 한 관객과 히치콕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알레고리적이다.” 그리고 “이 알레고리적 영역은, 내러티브 공간을 ‘구부러뜨리는’ 요소를 수단으로 하여 다이제시스적 현실 자체에 각인되는(=기입되는) 한에서만 효과적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내러티브 종결’의 문제가 제기된다. “내러티브 종결은 대개 텍스트에 이데올로기를 각인시키는 것을 가리킨다.”(351쪽) 즉 내러티브의 이데올로기적 지평으로서의 종결은 그 내러티브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과 발생할 수 없는 것을 윤곽짓는다.

352쪽 이하 ‘내러티브 종결’의 문제를 다룬 대목은 문학연구자의 입장에서도 흥미롭다. 지젝의 논의를 따라가보자. “‘왜 대단원이 다를 수 없는가?’라는 소박한 질문은, 비록 그것이 종결의 자명한 성격을 간결하게 정리한 것이나, 겉보기보다는 훨씬 전복적이지 못하다. 그 질문은 그 자체를 자기의 대립물로 (잘못)이해하는 것을 내재적 조건으로 하는 ‘내러티브 종결’에 제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작부터가 좀 막힌다. 먼저, ‘간결하게 정리하다’란 말은 문맥과 맞지 않는다. 그 질문은 종결의 자명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 그 의문이 보기만큼 전복적이지는 않다는 게 이 문장의 줄거리이다.

다시 옮기면, “‘왜 대단원(=종결)이 다를 수는 없는가?’라는 소박한 질문은, 비록 종결의 자명성을 낯설게 만들지만, 겉보기보다는 훨씬 덜 전복적이다. 그 질문은 ‘내러티브 종결’에만 관련되는바, 그 종결의 내적 조건은 그것이 그 자체(=종결)를 종결이 아닌 것으로 (잘못)알고 있다는 데 있다.” 여전히 좀 모호한가? 지젝이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이런 종결이 아닐 수도 있다는 환상, 종결이 얼마든지 다를 수도 있다는 환상이다. 즉, 여기에 작동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종결이 아니라 ‘개방’의 환영, 즉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 또한 일어날 수 있었으리라는 환영, 어떻게 세계의 바로 그 텍스처가 사건들의 다른 경로를 사전에 배제하는가를 무시하는 환영이다.”(352쪽)

여기서도 ‘환영’ 대신에 ‘환상’이라고 하는 게 더 낫겠다(이데올로기는 환영이 아니라 환상이니까). 그리고 ‘개방의 환영’은 ‘개방성의 환상’이라고 하고 싶다. 그러니까 종결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인 게 아니라, 다른 종결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환상)이 이데올로기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은 ‘세계의 텍스처’가 사건들의 다른 경로, 즉 다른 방식의 종결을 배제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텍스처’도 ‘세계의 텍스트적 구성’쯤으로 옮기고 싶다. ‘텍스처’란 말은 (‘텍스트’와는 달리) 아직은 우리말 ‘번역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복하자면, “이데올로기 최고의 유혹은 근간을 이루는 구조적 필연성을 비가시적이게 만듦으로써 ‘개방된’ 듯한 환영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지만, 다시 옮기면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의 마력은 그 기저의 구조적 필연성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개방성’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그에 따라 “우리가 내러티브 공간 내에서 움직일 때 필연적으로 간과하는 것은 이러한 공간이 ‘구부러지는’ 방식이다.”(352쪽) 이 ‘구부러짐’이 정신분석학에서의 ‘억압’에 대응할 것이다. 그리고, “‘억압’의 사실은 궁극적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의 공간, 즉 주체의 의미의 체계가 언제나 트라우마적 공백들에 의해 ‘구부러져’ 있다는 사실, 이 세계가 그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해지지 않은 채로 있어야만 하는 것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사실”(353쪽)이다.

참고로, 이러한 ‘구부러짐’을 사고한다는 점에서 지젝의 이데올로기론 혹은 환상론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세계를 연상시키며,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상응한다(상대성 이론의 기하학적 바탕은 리만기하학이다). 그리고, 그에 근거하여 지젝은 뉴턴적 절대시공간의 세계에 견줄 수 있는 데리다식의 ‘차연’론을 암묵적으로 비판하게 된다. 핵심은 “모든 편지(letter)는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것이다(라캉의 것이면서 지젝이 반복하고 있는 테제이다). 구부러짐, 곧 곡률이 주어지지 않는 차연적 시공간에서는 “모든 편지는 제대로 도착되지 않는다.” 데리다가 비판한 것은 ‘도착에의 환상’, 커뮤니케이션의 환상이었다(그런 점에서 그 또한 ‘환상의 횡단’을 시도한다). 거꾸로 지젝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도착되지 않는다’는 환상이다. 모든 편지는 궁극적으로는 발신자인 주체 자신을 수신자로 하여 언제나 도착하며, 이미 도착해 있다. 즉, 지젝은 라캉을 경유하여 데리다란 (필수적인) 문턱을 넘어서고자 한다.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내러티브 종결은 환상의 논리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환상-장면은 내러티브 공간을 구부리는 바로 그 해석할 수 없는 X를 상연”(354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X는 궁극적으로 주체의 출생 그리고/혹은 죽음이며 따라서 환상-대상은 주체를 그/그녀 자신의 잉태나 죽음의 목격자로 만드는 그 불가능한 응시”에 다름아니다. 그리하여 모든 환상은 (1) ‘주체의 잉태 장면’(부모의 성교)과 (2) ‘주체의 죽음 장면’의 변주이다(이하의 지젝의 ‘통찰’은 기존의 ‘중성적’ 서사학(Narratology)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줄 수 있는 주요한 암시들을 포함하고 있다. 로트만, 리쾨르 등과의 ‘접속’도 고려해 볼 만하다).

“내러티브 공간의 ‘굴곡’은 주체가 결코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살고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생은 다른 곳에!) “주체의 삶은 ‘아직은-아닌’의 양상 속에서 미끄러져 간다. 주체의 삶은 X, 즉 온전한 의미에서의 ‘사건’(그것이 ‘정글 속의 야수’의 도약이었기 때문에 헨리 제임스의 이름인)에 대한 기대 그리고/혹은 기억으로서 구조화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 말이다.” 괄호를 빼고 번역을 일부 수정했다. 괄호 안의 내용은 물론 ‘우리말’이 안되니까 오역이다. '헨리 제임스의 이름'은 '헨리 제임스가 이름붙인바'란 뜻이겠다.

 

 

 

 

요컨대, 우리의 삶은 X, 즉 진정한 삶(정말로 사는 삶)을 준비하는 데 소진된다. “하지만 우리가 마침내 이 X에 접근할 때 그것은 그 자신(=삶)의 대립물임이, 즉 죽음임이 드러난다. 진정한 탄생의 순간은 죽음과 일치한다.” 이에 대한 각주42)는 작년에 세상 뜬 스티븐 제이 굴드의 <판다의 엄지>(번역돼 있다)에 나오는 한 벌레 얘기이다(언젠가 얘기한 것 같은데, “굴드의 모든 책!”이다. 이 분야에서 그런 저자들은 여럿 된다.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핑커, 다니얼 데넷 등등). 이 내용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무슨 내용인가? “어머니의 육체 내부에, 즉 그 자신의 탄생 전에 남성은 그의 ‘자매들’과 교접하여 수태시킨 다음 죽으며 죽은 채로 탄생한다. 다시 말해 그는 ‘살아있는 육체’를 건너뛰며 태아의 상태로부터 시체의 상태로 넘어간다. 시체로 태어난 태아라는 이 한계-경우는 기표의 ‘빗금친’ 주체의 지위에 대한 가장 가까운 생물학적 상관물이다.”

소개된 사례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오역이다. 무엇이 이상한가? 동물도, 하다못해 벌레도 인간과 다 똑같다는 역자의 신념이 반영된 번역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맥에서 ‘어머니’나 ‘남성’ 등은 우리말의 관례가 아니다. ‘어미’, ‘수컷’ 등으로 번역돼야 한다(나머지도 거기에 준해서). 그리고 ‘한계-경우’는 ‘limit-case’를 옮긴 듯한데, ‘극단적인 사례’라고 해야 할 것이다(‘limit’가 ‘극단’이나 ‘극한’이란 의미를 갖는 다른 곳에서도 자동적으로 ‘한계’라고 번역돼 있다).

정리하자면, “주체의 존재는 동시적인 견인과 반발의 지점, 그 과잉근접성이 주체의 소멸을 야기하는 지점인 트라우마적 X와의 관계 속에서 구조화되는, (무엇을) 향하는 존재이다. 죽음을-향하는-존재는 그러므로 그 내재적 구조에 있어서 오직 언어-의-존재와 함께만 가능하다. 구부러진 공간은 언제나 상징적 공간이다.”(355쪽) 첫문장을 다시 옮기면, “주체란 트라우마적 X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구조화되는 ‘지향적 존재’(being-towards)이다. 이 X와 한편으론 인력과 척력의 관계에 놓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 X에 대한 과잉 근접은 주체의 소멸을 야기하게 된다.” 그리고, ‘죽음을 향하는 존재’(being-towards-death)는 하이데거의 용어이다. 이 대목에선 지젝이 라캉에 몰입하기 이전에 하이데거 전공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그의 철학박사학위논문은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었다).

“‘내러티브 종결’은 그러므로 주체가 일련의 우연성들에 의미를 소급해서 부여하며 그/그녀의 상징적 운명을 가정하는, 즉 그/그녀의 장소를 상징적 내러티브의 텍스처 속에서 인식하는 수단인 ‘주체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지나는 김에 한마디 덧붙이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을 위한 표기인 ‘he/she’를 (다른 번역서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매번 우리말로 ‘그/그녀’라고 옮겨주는 건 읽기에 번거롭다(마치 엑스트라가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거나 과장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말은 대명사 표현을 선호하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로 옮겨질 수 있는 대목에서는 그렇게 해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러시아어본에 근거해서) 다시 옮기면, “그러므로 ‘내러티브 종결’은 ‘주체화’의 다른 이름인바, 이 주체화를 통해서 주체는 일련의 우연들에 소급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의 상징적 의미를 수용하고, 상징적 내러티브의 텍스트적 구성 속에서 자신의 자리(장소)를 인식하게 된다.”

자, 그렇다면, 이 ‘내러티브 종결’이 히치콕의 <사이코>와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내러티브 공간의 일관성을 보장하는 이러한 규칙들을 직접 깨뜨리기보다는, 히치콕은 그 일관성의 그릇된 ‘개방성’의 유혹을 일소해버림으로써, 그러한 종결을 가시화함으로써 그 일관성을 전복한다. 그는 종결의 규칙들에 완전히 영합하는 듯 가장하지만(예컨대, <사이코>의 두 부분은 종결과 함께 끝난다), 종결의 표준적인 효과는 여전히 충족되지 않는다.”(그는 관습적인 종결을 따르지만 2% 부족하게 끝낸다는 것!) 왜냐고? “내러티브의 내적 논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스토리가 이미 끝나 있을 때 우연한 실재의 잉여(메리언의 무의미한 살해)가 부상하여 종결의 효과를 약화시키며, 또한 어머니의 정체성이라는 미스터리에 대한 최종적 설명은 그 대립물로 바뀌고 개인적 정체성의 개념 자체를 침식시키기 때문이다.”(356쪽)

최종적 설명이 그 대립물로 바뀐다는 말은, 그 설명(‘해명’)이 오히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어놓는다는 뜻이다(즉 그녀의 정체성이 이거다라고 밝혀놓으니까, 이번엔 ‘정체성’이란 것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 이때 히치콕이 사용하는 전략은 과잉 근접이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 낯익은 대상도 낯설게 보이는바(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다 보면 자기 자신이 낯설어 보이듯이. 네가 나냐?), 그것이 독일어 ‘다스 운하림리헤(das Unheimliche)’에 해당하는 ‘섬뜩함’이다(<사이코>의 결말 장면!). “절대적 타자성이라는 금지된 영역에 우리가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 공간은 구부러”진다(357쪽). 그리고 “히치콕이 세계 전체는 카메라를 보는 ‘타자’의 응시로 축약되는 ‘절대적 타자성’과 관객의 시선 간의 이러한 공모에 기초해 있다.”

이 ‘절대적 타자성’이란 ‘주체화’ 즉 라캉이 일컬은바,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 주체를 가리킨다. 이 주체는 상징적 계약(‘협정’)에 묶여있지 않기 때문에 ‘타자’의 응시와 동일한 주체이다. 지나가는 김에, 여기서 ‘타자’는 모두 대문자 Other를 번역한 것일 텐데(국역본에는 굵은 글씨로 표기돼 있다), 글자체만으로 소문자 타자(other)와 대문자 타자(Other)의 차이를 전달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그건 다른 번역본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아무런 주석도 없이. 나는 Other의 경우 ‘대타자’ 혹은 ‘큰타자’로 옮겨주는 것이 독자들을 더 배려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절대적 타자성’은 “주체의 장소를 상징적 질서 내에 표시하면서 주체를 표상하는 기표가 아니라 움직이지 못하는 대상, 주체의 목구멍에 걸려서 상징적 질서로의 그/그녀의 통합을 방해하는 하나의 뼈이다.”(358쪽)



다시 반복: “(<사이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가 카메라를 바라보는 노먼의 응시와 얼굴을 맞대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때 직면하는 ‘비개인적’ 심연은 언어의 그물망에 아직은 포획되지 않은 주체의 바로 그 심연이다. 주체화에 저항하는 접근불가능한 ‘사물’, 모든 동일화의 이러한 실패의 지점은 궁극적으로 ‘주체 자신’인 것이다.”(359쪽) 그러니까 여기서의 대립구도는 ‘주체’ 대 ‘주체화’(상징계로 통합된 주체)이다. 359-361쪽에서 지젝은 이 대립구도에 근거해서 <살인!>에서의 성차(性差)와 연기의 문제를 읽어내며, 이를 <사이코>와 대비시킨다.



<살인!>은 주인공 페인은 남성이지만 남성을 ‘연기’함으로써, 성차에 대한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킨다. 즉 “남자의 세계는 스스로를 수행적인 것의 세계로, 지배-기표의 세계로, ‘본래 행위를 구성하는 말’의 세계로, 즉 여성적 연극성을 극복한 것처럼 가장하고 그것을 평가절하하는 말의 세계로 제시하지만 이러한 극복은 본래가 최상의 연극적 제스처이다.” 가령, “현재 관건인 것은 물(物) 자체이지 수사학적인 싸구려 시시껄렁한 농담이 아니다.”라는, 수사학을 포기하고 폄하하는 듯한 남성적 담론이야말로, 고단수의 ‘수사학’이라는 것이다(‘과묵한 수사학’이 ‘수다스런 수사학’보다 한 수 위다!)

여기서 thing itself를 옮긴 걸로 보이는 ‘물 자체’는 적절하지 않다. ‘물 자체’라는 건 구어적인 일상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수사학이 할당된) 여자들에게 하는 얘기 스타일: “우린 사태의 본질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거야, 이건 공허한 수사학이 아니라구!”라고 할 때의 ‘사태의 본질’이나 ‘문제의 핵심’ 정도가 이 경우 thing itself에 대응한다. 요컨대, 남자가 여자보다 더 고단수의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이건 연기가 아냐”라는 연기!).

그렇다면, 페인의 자살이 갖는 메시지: “거기에 페인의 자살의, 이러한 ‘시적이고 가부장적인 정의의 격발’의 트라우마적 메시지가 있다. 그 메시지를 드러냄으로써 페인은 존 경이 협잡꾼임을 폭로한다.”(360쪽) 그런데, 메시지가 잘못 됐다. ‘시적이고 가부장적인 정의의 격발’이라니? 가부장적인 것이 시적인가? 거듭 말하지만, 말이 안되는 건 거의 대부분이 오역이다. 그리고 말이 안되는 듯하면 사전을 다시 찾아봐야 한다. ‘가부장적’이란 건 ‘patriarchal’의 번역인 듯한데, 거기엔 ‘존경할 만한’이란 뜻이 있다(러시아어로는 ‘순박한’이란 뜻도 있다). 그러니까, “시적이며 존경할 만한 정의의 발작(‘격발’)” 정도의 뜻으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도 마찬가지이다. “그 충격적인 진정성, 행위의 존엄성은 존 경의 행동을 단순한 수행으로, 그의 담론을 단순한 유사물(semblance)로 바꾸어놓는다.” 이 또한 유사-번역이다. ‘행동’을 ‘수행’으로 바꾸어놓는다? ‘수행’은 ‘performance’의 역어일 텐데, 여기선 ‘연기’란 뜻이다. 그리고 ‘그의 담론’이 아니라 ‘그의 말’이다(‘행동’에 대응하는 거니까). ‘유사물’이 아니라 ‘허위’ 혹은 ‘위선’이다(꾸며대는 것이니까). Semblance가 무슨 대단한 단어라도 되는 양 매번 ‘유사물’이라고 번역해줄 필요는 없다. 중요하지 않은 단어에 불필요하게 원어를 병기해 놓는 건 엑스트라들의 과장된 연기만큼이나(기형도의 표현에 따르면, ‘잘못 찍힌 방점’들 만큼이나) 보기에 흉하다. 다시 옮기면, “그 행위의 충격적인 진정성과 존엄성은 존 경의 행동을 연기로, 그의 말들을 순전히 위선적인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리고 다음 문단: “<살인!>과 <사이코> 간의 변화된 역사적 성운의 결정적인 지표는 ‘주인’으로부터 그의 ‘진실’인 ‘히스테리환자’로의 전이이다.” 여기서도 ‘역사적 성운’이란 번역은 유감스럽다. 우리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역사적 상황’으로 충분하다(하긴 ‘히치콕의 세계’(universe of Hitchcock?)를 ‘히치콕의 우주’로 번역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역자에게 감사할 일이긴 하다). 해서 “변화된 역사적 성운의 결정적인 지표”는 “변화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중요한(‘결정적인’) 지표”로 바꿔 옮기고 싶다. 이 ‘지표’에 대한 얘기가 361쪽까지이다. 361쪽의 ‘행위로의 빠스(passage a l’acte)’는 고육지책으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이해되지 않는 번역이다. ‘빠스’가 무슨 말인지?(불어로는 ‘파사주’이고, 영어로는 ‘패스’ 혹은 ‘패시지’일텐데!) 요즘은 ‘행위로의 이행’이라고 보통 옮기고 있다.

362쪽부터는 ‘사물의 응시’ 절이다. 여기서 지젝은 ‘주체화를 넘어서는 주체’와 관련하여 형사 아보가스트의 살해장면, 즉 ‘아보가스트 쇼트’에 대해서 분석한다. 영화의 이 장면을 반복해서 보면서 읽으면 훨씬 이해가 빠를 듯하다. 이 분석의 결론: “아보가스트의 살해장면 전체의 내적 역동성은 히스테리에서 도착으로 가는 <사이코>의 궤도를 축약한다.”(364쪽) 여기서 ‘역동성’은 (쇼트의) ‘전개과정’으로 이해하는 게 편하다. 그럼, 히스테리는 뭐고 도착은 뭔가? “히스테리는 타자의 욕망에 대한 주체의 욕망의 동일화로 정의된다. 반면 도착은 대상-사물 자체의 ‘불가능한’ 응시와의 동일화를 포함한다.”

히치콕은 아보가스트 쇼트를 ‘신의 시점’으로 찍었는데(364쪽의 스틸사진), 그것은 감독이 무언가를 숨기려 한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키지 않고도 관객들을 무지 속에 두려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지젝은 그 전제를 더 밀고 나간다. “만약 우리가 신의 시점을 취함으로써 무지함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어떤 근본적인 무지가, 분명히 상징적 기계(=인간)의 맹목적인 운행을 축도하게 되는 신 자신의 지위에 영속해야만(=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히치콕의) 신은 우리 살아있는 인간들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신은 죽은 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366쪽) 상징이 사물들의 살해인 한에서(당신은 ‘사과’라는 상징-기호를 먹을 수 없다. 거기엔 ‘사과’가 부재하기 때문에, 즉 ‘죽어있기’ 때문에), ‘사물들의 질서’는 곧 ‘상징적 질서’이며, ‘아버지의 이름’으로서의 신(=상징적 권위)은 삶의 실체(life-substance)에 관해서, 희열(=향락)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즉 “상징적 질서(대타자)와 희열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가 없”다(367쪽). 각주60)에 “여성적 희열과 무지 간의 내밀한 연결에 대한 그 유명한 논문”에서, ‘논문’은 ‘테제’의 오역이다. 맥거핀들은 도처에 있다.



367쪽 하단에서 “<사이코>로 되돌아가보면, ‘오점’(어머니)은 따라서 눈먼 신의 길어진 손으로서, 세계에 대한 신의 무의미한 개입으로서 갑자기 떠오른다.”라는 건 무슨 뜻일까? ‘갑자기 떠오른다’는 ‘(갑작스레) 일격을 가한다’의 오역 같다. 아보가스트 쇼트 얘기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오점(어머니로 가정되는)’의 손은 마치 눈먼 신의 길어진 손이 이 세계에 무의미하게 개입하는 것처럼, 아보가스트를 난자한다(365쪽의 스틸사진).

368-9쪽에서 프레드 윌튼 <낯선 이가 전화할 때>란 영화 얘기를 잠깐 하고 나서 지젝은 <사이코>의 특징을 지목한다. “<사이코>의 결정적인 특징은 히치콕이 주체화로의 이러한 단계를 히치콕이 성취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물의 ‘주관적인’ 응시 속을 던져질 때 그 사물은 비록 ‘주체가 되’기는 하지만, 스스로를 주체화하지는 (…) 않는다.”(369쪽) ‘성취하지 못한다’란 표현 때문에, 이 대목이 히치콕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읽혀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점이, 즉 ‘주체화되지 않는 주체’를 다룬다는 점이, 그런 응시와의 동일시를 다룬다는 점이 히치콕의 ‘문제성’이며 거장다운 면모이기 때문이다.

372-5쪽에서도 아보가스트 쇼트에 대한 분석이다(지젝은 이 쇼트가 <사이코>의 정수일뿐만 아니라, 어쩌면 히치콕의 영화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쇼트일 거라고 간주한다). 이 전체 신은 ‘신의 시점’이라는 객관적 쇼트와 그에 따르는 시점 쇼트(살해자의 시점)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의 의미: “이러한 중립적이고-자유로운 응시로부터 그것을 뒤따르는 ‘사물’ 자체의 응시로의 이러한 커트는 그러므로 그 순수성의 내재적인 전복이다. 즉 주체성으로의 퇴보가 아니라 주체성을 넘어선 주체의 차원으로의 진입이다.”(375쪽) ‘내재적인 전복’의 러시아어 번역은 ‘내파(內破)’이며, ‘퇴보’의 번역은 ‘합류’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다.

이제 376쪽부터 마지막 절, ‘상호주관성의 붕괴’이다. 서두에서는 앞에서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한번 읽어보면 된다. 요점은 ‘신의 시점’과 외설적 ‘사물’간의 공모관계가 단순한 상보관계가 아니라 절대적인 일치라는 것.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들은 서로에 대한 이면처럼 보이지만, 서로 만나며 일치한다. 그러한 전제에서, 마지막 오해에 대한 해명: “<사이코>의 궁극적인 ‘비밀’, 노먼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것이 축약하는 비밀은, 언어 등의 장벽 너머 인간의 불가해하고 형언할 수 없는 심층 위에 놓인 진부함의 새로운 판본에 해당하지” 않는다. “궁극적인 비밀은 이 ‘너머’가 본래 비어 있으며 그 어떤 실증적 내용도 결여한다는 사실이다. 그 속에는 어떠한 ‘영혼’의 심층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너머’는 응시 자체와 일치한다.”(378쪽)

그래서, 히치콕 영화들의 허위적인 ‘심층’에 대한 레이먼드 더냇의 아이러니적인 언급, “전함 뽀쫌낀 – 선체 없는 잠망경들의 선대(船隊)”는 틀린 말이 아니다. ‘뽀쫌낀’은 출시된 제목대로 ‘포템킨’이라고 하자. 아마도 이 비평가가 히치콕 영화에서의 심층(=심오한 메시지?)의 부재를 ‘<전함 포템킨>에서의 선체(=본체)는 없이 잠망경만 둥둥 떠있는 함대’ 같다고 비아냥거린 모양이다. 즉 ‘외관’만 있고, ‘실체’는 없지 않느냐는 것(혹은 있는 것 없이 폼만 잡는다는 것). 지젝은 뒤집어서 바로 그거! 라고 말한다. 즉, 외관이 바로 곧 실체라고. 해서 다음 문장, “이러한 묘사는 논박되기보다는 ‘사물 자체’로 치환되어야 한다.”는 역시 좀더 쉽게 번역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술의 터무니없음을 반박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문제의 핵심’에 적용해야 한다.”(‘사물 자체(thing itself)’에 대한 의견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379쪽에서 지젝은 <사이코>를 근거로 하여, 데카르트적 코기토에 대한 현대철학자들의 공박(“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상호주관성의 일차성/우선성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을 방어해낸다: “암묵적인 대항-운동 속에서 <사이코>는 상호주관성에 선행하는 주체, 사물의 위상학적 역(逆)일 뿐인 순수한 응시의 심층 없는 공백의 지위를 지표한다.” 일단, ‘지표한다’는 ‘가리킨다’로 고쳐놓자. 그리고 ‘암묵적인 대항-운동’은 당연히 오역이거나 미숙한 번역이다(대항-운동?). “암묵적으로 (현대철학의 주장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즉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방향으로 간다는 뜻)” 정도의 뜻이다.

‘위상학적 역’은 ‘위상학적 이면’이다. 다시 옮기면, “암묵적으로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 <사이코>는 상호주관성보다 선행하는 ‘주체의 지위’를 가리키며, ‘사물’의 위상학적 이면일 뿐인, 아무런 심층적 차원도 갖고 있지 않은 순수한 응시의 공백을 지시한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에서 “상호주관적 접근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중성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의 ‘중성화’는 ‘무력화’로 바뀌어야 한다.

요컨대, ‘라캉 못지 않게 데카르트적인’ 히치콕은 라캉과 쿵짝이 잘 맞는다. “그의 30년대 영화들로부터 <사이코>로의 히치콕의 행로는 그러므로 라캉의 행로와 평행을 달린다.” 그 얘기가 380쪽 절반까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데카르트적 면모가 히치콕으로 하여금 필름 누와르에서의 플래시백/보이스-오버에 거부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보이스-오버/플래시백의 ‘유언적 차원’을 빌어서 필름 누아르는 일관된 내러티브를 직조해내며, 이것은 “그것이 여전히 ‘타자’(상징적 질서)의 일관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382쪽) 따라서, 이 보이스-오버/플래시백과 ‘주관적 카메라’는 근본적으로 양립불가능하다. “보이스-오버/플래시백과 주관적 카메라의 불연속성은 궁극적으로 상징적인 것(=상징계)과 실재적인 것(=실재) 간의 불연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연속성이 히치콕에게서보다 더 잘 언명되는 곳은 없다.”(384쪽)

“이러한 불연속성은 <사이코>에서 그 극단에 이른다. 결국 그 결과는 ‘진실-효과’를 초래하는 상호주관성의 공통 영역에 상이한 주관적 관점들을 위치시키는 것의 정반대가 된다.” 좀 쉽게 설명하면, A, B, C라는 상이한 주관적 관점이 있을 때, 이것들을 상호주관성의 공통영역에 나란히 놓으면, 즉 서로 입장 바꿔서 토론해 보라고 해 놓으면, 서로 치고 받고 하다가도 뭔가 합의가 도출된다. 이것이 상호주관적 ‘의사소통 행위’에서 산출되는 ‘진실-효과’이다(롤즈에 따르면 거기서 ‘정의’가 산출되기도 하고). 그런데, <사이코>의 경우엔 A(정신병 의사의 객관적, 공적 지식)와 B(정신병환자 노먼의 주관적 진실)가 결코 서로 합치/타협될 수 없는 상태로 남겨진다. 즉 여기서의 초점은 “히스테리적인 상호주관적 진실과 (노먼의) ‘어머니’의 최후의 독백 속에서 언표되는 정신병적 진실 간의 대립이다.” “후자가 결여하는 것은 바로 상호주관성의 차원이며 노먼의 ‘진실’은 상호주관성의 장 속에 통합되지 않는다.”(385쪽) 즉 구제(=의미화) 불능이다!

해서, “<사이코>의 궁극적인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교훈은 그러므로 후기 자본주의에서 진리의 매개로서의 상호주관성이라는 장(場) 자체의 붕괴, 즉 전문지식과 정신병적인 ‘사적’ 진실이라는 양극단 속으로 그 상호주관성이 통합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호주관적인 공통의 영역이 ‘전문지식’과 ‘사적 진실’이라는 양극으로 붕괴되었고, 이게 통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정신분석학은 이 시대에,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무엇이며, 무얼 할 수 있는가? 지젝은 <양들의 침묵>에서의 한니발 렉터를 참조의 대상으로 불러낸다. 여기서 라캉적 (정신)분석가와 한니발 렉터의 관계는 칸트가 ‘역학적 숭고’라 부른바, ‘길들여지지 않는 대자연’과 ‘이성의 초감성적 이념(‘관념’)’ 사이의 관계에 대응한다.



하니발 렉터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는 희생자들을 살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장의 일부를 먹기까지 한다.”(386쪽) 하지만, 그는 정신분석가의 행위의 진정한 차원을 포착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정신분석가도 똑같이 ‘먹지만’ 그가 먹는 건 우리 신체의 핵심으로서의 내장 따위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핵심, 대상a, ‘비밀스런 보물’로서의 ‘아갈마’이다. 그런 걸 먹어 치우는 걸 ‘환상의 횡단(la traverse du fantasme)’이라고 한다. ‘환영의 횡단’이라고 번역돼 있는데, 일반적으로 ‘환상의 횡단’이라고 옮긴다. 더불어 “우리의 근원의 환상을 겪음으로써”라고 설명돼 있는 건 좀 부족하다. ‘환상의 횡단’에 대한 설명인데, “우리의 원초적/근원적 환상의 극복”이라고 해야 한다. 즉, ‘횡단’이란 ‘극복’인데, ‘극복’이란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횡단’이란 용어를 쓰는 걸로 안다(‘횡단’은 회피나 거부가 아니라 대면과 직시를 뜻한다).

라캉은 대상a를 환상적인 ‘자아의 재료’라고 규정하는바, 그것은 ‘주체’라는 존재론적 공백에 한 ‘인물’의 존재론적 일관성과 충만함을 부여하는 것이다. 정신분석가가 먹어치우는 것은 바로 이 ‘재료’, ‘자아의 재료’이다. “너의 현존재를 먹어라!”라는 하이데거의 인유를 통해서 라캉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따라서 분석가의, 혹은 분석행위의 맥심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어쨌든 ‘먹어 치운다’는 점에서 한니발 렉터는 나름대로 매력을 갖고 있으며, 하지만 동시에 “라캉이 ‘주관적 궁핍’이라고 부르는 것의 절대한계에 도달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그것은 우리가 분석가라는 관념에 관해 불길한 예감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386쪽)

‘주관적 궁핍’은 ‘subjective destitution’의 번역 같은데, (객관적의 상대개념인) ‘주관적’보다는 ‘주체의’라고 하는 게 옳다(‘객관적 궁핍’의 상대어가 아니기 때문에). 즉, ‘주체의 궁핍’. 이건 우리의 ‘주체’가 텅 빈 형식임을 직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나는 말야, 이렇게 생각해.”라거나 “나는 이게 더 좋아.” 혹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할 때의 ‘나’라는 주체는 결코 무슨 ‘실체’가 아니라는 것. 특정한 사회적 관계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걸 대면하고, 직시함으로써 ‘나’라는 환상을 횡단하는 것이 ‘주체의 궁핍’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흔히 쓰는 ‘궁핍’이란 역어도 적절하진 않다(‘궁핍’이란 단어에서 제일 먼저 떠올려지는 건 ‘가난’이다). 보다 정확한 건 ‘부재’이고 ‘공백’이기 때문이다. 지금 드는 생각으론 ‘주체의 공백’이 더 나은 번역 같다(‘destitution’은 무엇이 없거나 빠진 상태를 가리키며, ‘subjective’라고 수식어론 온 건 그 의미상 주어(‘무엇’)이다). 참고로, ‘주체의 결여’도 후보가 될 수 있지만, ‘주체성의 결여’란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부정적인 뉘앙스가 너무 강하다.

어쨌든 한니발 렉터는 그러한 ‘주체의 공백’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것이 분석가라는 관념에 관해 ‘불길한’ 예감을 갖게 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이건 ‘omen’의 번역일까? 러시아어본만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다. 렉터가 유사-분석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하는 것은 그의 희생자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FBI 수사관인 클래리스 스탈링과의 관계에서이다. 즉, 그들의 관계는 (정신)분석적 상황을 흉내낸 것이다. ‘버팔로 빌’을 체포하도록 도와줄 테니까, 너의 근원적 환상(‘양들의 울음’)을 털어놓으라는 것. “렉터가 클래리스에게 제안했던 오해(quid pro que)는 그러므로 ‘만일 네가 나로 하여금 너의 현존재를 먹게 해준다면 나는 너를 돕겠다!’이다.”(387쪽) 여기서 ‘오해’는 말 그대로 ‘오해’이자 마지막으로 지적하는 오역이다. 라틴어 ‘quid pro que’는 내가 알기로 ‘무엇 대신에 무엇’이란 뜻인데, 그래서 오인/오해란 뜻도 갖지만, 여기서는 ‘거래’란 뜻이다(어떻게 ‘오해’를 제안할 수가 있는가?).



그런데, 이 ‘거래’의 제안은 정신분석가로서 렉터가 아직 이류라는 걸 입증한다. 정신분석에서는 분석가가 먹어주는 대가로 피분석자(=분석수행자)가 돈을 내기 때문이다(‘분석가’야말로 탁월한 직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렉터가 일급이었다면, 스탈링의 근원적 환상을 ‘먹어 치우는’ 대가로 그녀를 도와줄 게 아니라, ‘먹어 치워주는’ 대가로 오히려 돈을 받았어야 했다. 담장에 페인트칠을 하게 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아먹은 톰 소여처럼(톰은 분석가적 재능이 있었던 셈이다!). 거기에 비하면, 내 돈 주고 책 사서 교정이나 하고 있는 건 얼마나 멍청한 일인가? 돈 주고 페인트칠 하다니!...

06. 03. 10 - 11.

P.S. 이 글은 당시의 현지사정상 국역본과 러시아어본만을 대조하며 읽은 결과이다. 지금은 영어본도 참조할 수 있지만, 이 글에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보완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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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3-11 0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내용이지만 눈이 빠져라 읽었네요. subjectivity가 텅빈 실체라면 intersubjectivity 관계, 그 소통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공유된 창문 너머로 나와 외부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면 내가 보는 사실과 너가 보는 사실이 공유 불능일때 불능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로쟈 2006-03-11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정리가 덜 된 글을 읽느라 고생하셨군요.^^ 선무당 수준으로 말하자면, 그 '불능'이 진리, 혹은 실재가 아닐까요?..

싸이런스 2006-03-12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년도 훨씬 지난 일인데... 알튀세르의 고독인가... 하는 책을 보다가,,, 절대고독의 수수께끼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저는 책 읽기를 때려쳤었는데요. 그 불능이 진리.. 실재라면 모든것을 후벼파고 남는 것이 나와 타자의 화해 불가능한 그 사이의 긴장이라면 그게 진리라면 타자와의 관계, 공동체의 삶, 그 사이에서의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신가요? 너무 텅비어 있는것이 허무하게 느껴지네요.

로쟈 2006-03-1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한트케의 대사대로라면, "나는 왜 나이고 너가 아닌가?"인데, 그 '조건' 자체에 허무가 내재한 건 아니겠죠. '신의 죽음'이 그렇듯이. 문제는 그러한 (견디기 어려운) 불가능성을 견딜 만한 어떤 것으로 대체하지 않는 거라고 봅니다...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를 읽고 있다. 작년에 1부 1장까지 읽고 덮어두었던 책인데(주로 영화이론을 다루는 1부는 정색하고 읽어야 한다. 특히 '봉합'이론 같은 건 다른 일들을 봉합하고 읽어야 한다. 한데, 그럴 만한 여유를 갖기가 힘들다), 이번에 키에슬롭스키(1941-1996) 서거 10주기를 맞이하여(내주에는 영화제도 개최된다) 한번쯤 그의 영화세계를 돌이켜보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건 지젝을 경유하는 것인데, 최선의 선택이면서 동시에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다(국내 키에슬로프스키 관련서는 그밖에 <데칼로그> 정도가 유일하므로).

아마 이 책을 처음 접하고 어려움을 느낀 독자들이 더러 있을 법한데, 조금더 읽기 편한, 그리고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를 막바로 다루고 있는 제2부부터 읽는 게 나을 듯하다. 내가 그렇게 읽고 있는데, 훨씬 진도가 빨리 나간다. 우리말 번역본은 대충 무난하지만 섬세하지는 않다. 읽어나가면서 동의하지 않는 대목에 대해서는 지적하기로 한다. 먼저, 이 글에서는 4장 "이제 내겐 글리세린이 있소!"를 읽어보고 싶은데, 영화감독으로서 키에슬롭스키의 변신/이행 과정에 대해 지젝이 자신의 '논리'를  부여하고 있는 장이기에 키에슬롭스키에 대한 '개관'으로서 적절해 보인다.

지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키에슬롭스키가 다큐멘터리 리얼리즘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실재에 대한 충실성 때문이었다 - 어느 지점에서인가 우리는 현실 자체보다 더 실재 같은 어떤 것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125쪽) "It was precisely a fidelity to the Real that compelled Kieslowski to abandon documentary realism - at some point, one encounters something more Real than reality itself."(71쪽)

여기서 실재(the Real)와 현실(reality)은 모두 라캉-지젝의 용어이므로 이에 대한 사전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만 전제된다면 내용은 간명하다. 그 '내용'에 대해 말하기 전에 잠시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오래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서 키에슬롭스키에 대해 언급했던 대목을 참고삼아 일부 인용해본다. 우리에겐 다소 낯선 '다큐멘터리 감독' 키에슬롭스키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대목이다(이 방송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정성일: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릴 감독은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입니다. 아마도 제 생각으로 지금 영화를 만들고 있는 감독 중에서는 이만큼 독창적이고 그리고 깊이 있는 영화를 만들어 내는 감독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키에슬로프스키 선풍이 다가온 것은 그러나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은 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실 키에슬로프스키의 이름은 폴란드의 영화 감독 중에 그저 낯설은 새로운 이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고 그에게 주목하고 있는 영화 평론가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꾸준히 그의 작품이 깐느에 출품되기는 했었지만은 그러나 번번이 공식 경쟁 부분에 끼여들거나 아니면 'Un Certain Regard' 그러니까 '주목할 만한 시선'에 그 그의 영화를 찾아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됐었습니다. 하지만 88년도에 10편의 영화가 동시에 개봉되면서 그야말로 사정은 모두 바뀌었습니다. 그 영화가 그 유명한 십계입니다. 그 88년 십계를 발표하면서 그 영화 평론가들은 이 감독이 어쩌면 우리의 세기말에 다가온 우리 시대를 다음 시대에로 이어줄 유일한 이름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성일: "만약에 여기 그 이 프로의 청취자 분들께서 만약 유럽에 영화를 공부하러 가신다면은 4개의 학교 중에 하나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이 4개의 학교를 보통 최고의 학교라고 부르는데요, 영국의 그 BF'라는 학교가 있습니다. 이곳은 '런던 UNIVERSITY'와 같이 그 관계를 맺고 계속 세미나를 하는 학교이구요, 또 프랑스에는 이데끄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름을 페미스로 바꿨는데요 입학 시험 1주일을 봐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영화학교가 있습니다. 벤더스가 떨어진 바로 그 학교입니다. 마지막으로 폴란드의 로쯔 스쿨이 있습니다."

정성일: "어....이 4개의 학교 출신들....학생들이 1년에 한 번씩 뮌헨 학생 영화 페스티벌을 벌리는데요, 우연히 한 번 이 페스티벌에서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4 학교 중에서 가장 영화를 새롭게 찍는 학교의 학생들은 프랑스 이데끄 출신이었습니다. 보면은 뭐 거의 눈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테크닉이 뛰어난 영화를 찍고 이렇게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입을 벌리게 합니다. 또 BFI의 학생들의 영화를 보면 테크닉이 거의 완벽합니다. 마치 이것이 학생 영화가 아니라 헐리우드에서 와서 온갖 일류의 스텝 진을 갖고 만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베를린 영화학교 작품들을 보면은 거의 정치적인 이슈, 아주 민감한 소재들을 다루어서 충격적으로 묘사하는데는 일가견들이 있습니다. 제일 따분한 것은 바로 로쯔 학교 출신들입니다. 이 학생들의 영화를 보면 스타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영화는 다 로쯔 학교 출신들 영화입니다.(...) 이들이 영화를 찍을 때는 스타일보다도 주제에 대해 아주 끈질긴 연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인데요, 바로 키에슬로브스키가 나온 학교가 이 학교입니다."(*요즘의 표기는 '키에슬로브스키'가 아니라 '키에슬롭스키'이지만, 수정하지는 않았다.)

정성일: "아, 크지쉬토프 키에슬로브스키는 1941년생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나이가 꽤 되는 셈인데요, 키에슬로브스키는 원래 영화를 전공할 생각이 아니었었고 신부님이 되는 것이 자기의 인생 목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25살이 되면서 자기의 인생관을 바꾸고 이제 영화를 하기로 결심하고 로쯔 필름 스쿨에 들어갔는데요, 이 학교에서 원래 전공한 것은 그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 영화 공부를 하면서 존경했었던 영화 감독은 그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찍었었던 지가 베르토프 그리고 독일 영화 감독인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또 북극의 나누크라는 그 무성 영화 시대 때의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낸 로버트 플레어티 그리고 프랑스의 장세니스트라고까지 불리우는 엄격한 촬영감독, 타르콥스키도 그렇도록 존경했었던 영화 감독 로베르 브레송이였었습니다."

정성일: "어..이 키에슬로브스키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 꾸준히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왔었는데요...사실 다큐멘터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키에슬로브스키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근 그 영화광을 자칭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아졌었는 많아지고 있는데요 그 그런데 문제는 게으른 영화광들의 아주 그럴듯한 변명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그 영화 소년들이 또는 후배들이 영화를 이리저리 토론하고 분석하고 제단하고 해부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빈정거리는 듯한 태도로 보고 있다 딱 한마디 근사한 표정을 지으며 던집니다. '영화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거야.'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게으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사실 영화는 제 생각에는 머리와 가슴 모두를 따듯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입니다."



정성일: "가슴만이 따듯해진다면 그거야말로 그것은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것이지 그것이 영화의 본연의 자세라고 얘기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다큐멘터리 정신입니다. 키에슬롭스키는 자기의 인터뷰 책인 최근에 그 BFI 에서 발행한 <키에슬로브스키 & 키에슬로브스키>란 책을 보고 있으면(*잘못 필사돼 있는데, '&'가 아니라 'on'이다) "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머리와 가슴 그 모두를 따뜻하게 만들어야할 것이다." 동구 다큐멘터리는 그 유럽 다큐나 미국 다큐 또는 라틴 아메리카나 소련, 일본 다큐멘터리들과는 다소 그 다른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동구 다큐멘터리의 특징은 인간을 다루는 것입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놓는 사회주의가 왔는데 왜 자본으로부터의 해방된 사회주의에서 인간은 그 중심에 있지 않은가 라는 것이 사회주의 다큐멘터리, 그 중에서도 특히 동구권 다큐멘터리들이 자신들이 서 있는 조건에 대해서 던지는 아주 비판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정성일: "이러한 입장에서 키에슬로브스키는 약 10년간 다큐멘터리 작업을 계속 해왔습니다. 그는 지금도 영화를 찍으면서 이 시기에 찍었었던 그 자기의 작업 방식을 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작업을 할 때 항상 하는 방법은...하얀 종이를 한 장 올려놓고 그리고 지금부터 찍어야될 영화의 스토리를 그 한 장에 요약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이제 5페이지 정도 늘립니다. 5페이지로 늘린 것을 다시 10페이지로 늘립니다. 그리고 10페이지로 늘린 것을 이제 시나리오 작가를 대동해서 20페이지에서 30페이지로 늘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늘려 논 다음엔 촬영 감독을 데려와서 100페이지로 늘려 논다고 합니다. 그리고 100페이지가 되어진 다음에는 배우를 불러서 거기서 그것을 낭독하게 하면서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그 배우의 엑센트를 들어가며 대사를 써 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감독이 그 대사를 만들어 놓고 배우보고 그것을 아무리 주문해봐야 그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키에슬로브스키는 그것을 읽으면서 그 배우의 음색 그리고 그가 놓치고 있는 발음 같은 것들도 그가 필요 이상으로 격앙하는 대목들을 일일이 체크하여 그 배우에 맞는 대사를 만들어 줄 때, 그러니까 그의 작업 방법은 배우 그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합니다."(강조는 나의 것. 지젝도 비슷한 내용은 얘기를 한다.)

그렇게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키에슬롭스키는 폴란드 사회현실(=리얼리티)에 대한 재현을 의도했지만(그는 1966년부터 1988년까지 25편 가량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다), 어느 지점에서는 부득불 리얼리티 너머의 '실재'와 조우할 수밖에 없었고, 혹은 '실재'에로 침입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로서는 어떤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실재에 대한 충실성' 혹은 예의 때문에.

가령, "<첫사랑>(1974)이라는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부분에서 카메라는 결혼전에 임신한 젊은 커플을 따라가면서 그들이 결혼하여 아기를 낳고, 새로 태어난 아기를 손에 안고 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키에슬롭스키가 '진짜 눈물의 공포'를 언급하는 것은, 타인의 내밀한 부분에 그렇게 허락도 없이 파고 들어가는 외설성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가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넘어가기로 결심한 것은 따라서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볼 때 윤리적인 결심이었던 것이다."(126-7쪽, 강조는 나의 것)

키에슬롭스키가 육성으로 말하는 바는 이렇다: "모든 것을 기술할 수는 없다. 그것이 다큐멘터리의 큰 문제이다. 다큐멘터리를 자기 덫에 걸린다...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치자. 만약 실제 인물들이 거기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 침실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한 개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수록 내 관심을 자아냈던 대상들은 스스로를 닫아버린다는 것이었다. 내가 극영화로 전환한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극영화는 뭐가 다른가: "극영화는 아무 문제도 없다. 침대에서 사랑을 나눌 커플이 필요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물론 기꺼이 브라를 벗을 여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을 수 있지만 이내 그런 사람을 찾아낼 것이다... 나는 글리세린을 약간 살 수도 있다. 그것을 여배우의 눈에 몇 방울 떨어뜨리면 그녀는 울 것이다. 나는 몇 번이간 애써 진짜 눈물을 가까스로 찍은 적이 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겐 글리세린이 있다. 진짜 눈물은 두렵다. 사실 내게 그 눈물을 찍을 권리가 있는지조차도 모르겠다.(...) 그것이 내가 다큐멘터리로부터 도망친 주된 이유이다."(127-8쪽, 강조는 나의 것)

이렇듯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이행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지제은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카메라광>(1979)라고 본다. "이 영화는 카메라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아내와 아이, 일자리를 잃어버린 남자를 그린, 다뷰멘터리 영화감독에 관한 극영화이다(a fiction film about a documentary film-maker). 따라서 그 영화에는 '침범하지 마시오' 표시가 붙어 있는, 그래서 포르노그라피적인 외설을 피하려 한다면 오직 허구를 통해서만 접근해야 하는 환상적인 내밀함의 영역이 존재한다."(128쪽)

이러한 다큐멘터리 감독의 또다른 형상으로 지젝은 <베로니크의 두 개의 삶>(<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인형조종사와 <레드>의 판사를 든다: "어떤 점에서는 판사는 키에슬롭스키의 상당히 명백한 자화상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그는 키에슬롭스키 자신의 유혹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유혹이란 외설적인 실재에의 유혹이다. 아래는 <레드>(1994)에서 이웃들의 사적인 전화통화를 은밀히 엿듣는 퇴직 판사역 장 루이  트랭티낭(1930- )의 모습(내게는 아누크 에미와 공연했던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영화 <남과 여>(1966)의 주연으로 각인된 배우이다).

'진짜 눈물'을 찍는 건 포르노그라피적 외설과 다름없다(그런 의미에서 '몰래카메라'는 포르노그라피이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는 오직 허구(극영화)를 경유해야 한다. '진짜 눈물' 대신에 '글리세린 눈물'. 다시 반복하자면, "인간에 대한 모든 알량한 휴머니즘적 찬사는 그저 '침범하지 마시오'라는 표시에 대한 외설적 위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적절한 일은 내밀하고 특이한 환상 영역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성을 입증하는 이 깨지기 쉬운 요소들을 에둘러 넌지시 암시할 수 있을 뿐이다."(129쪽) 마지막 문장은 "one can only circumscribe, hint at, these fragile elements that bear witness to a human personality."(73쪽)의 번역이다. 여기서 'a human personality'는 '인간성 일반'이 아니라 어떤 한 인간의 고유한 '개인성'을 뜻한다.

흥미로운 것은 지젝이 진짜 눈물에 대한 키에슬롭스키의 금지를 구약에서 '이미지들'에 대한 금지와 열결짓는다는 점이다. 시간상/분량상 그 얘기는 다른 자리에서 마저 다루기로 한다.

06. 03. 08 -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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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08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눈물의 공포>...잘 읽히지가 않았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봐야겠습니다.

이네파벨 2006-03-08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에슬롭스키에 대한 글들...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주에 영화제를 한다구요...? 어디에서 하는지...좀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을까요?

그의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은 강렬한 마음이 들지만...
(그의 영화들이라기보다...사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라고 해야 옳겠죠.
삼색 시리즈나...또 다른 단편 하나는...그냥 키에슬롭스키 특유의 분위기만으로도 무척 좋았지만 지금까지 기억나는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제가 본 가장 아름다운 영화로 주저없이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한편으로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그 감동을 다시 만나지 못하면 어떡하나...
(영화는 그대로이나 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다 닳고 휘발해버려서...)
하는 두려움이 있네요.
위의 글에 나오는 진짜 눈물에 대한 두려움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

*딴소리*
혹시...<토토의 천국(Toto le Heros>이라는 영화 보신(그리고 기억하시는) 분 계신지요...
이 영화도 아...주....강렬한 인상을 남긴 영화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주...훌륭하고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하구요.
이 영화 좋아하시는 분 만나면 무척 반가울 거 같아요. ^^

로쟈 2006-03-09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에슬롭스키 영화제는 다른 카페에서 안내한바 있는데(주최는 서울아트시네마입니다), 그냥 '키에슬롭스키 영화제'를 검색하시면 바로 뜰 겁니다. 자크 도마엘의 영화던가요? 저도 <토토의 천국>을 개봉관에서(뤼미에르에서 했던 듯) 잘 봤습니다. 두 번 본 거 같습니다. 라스 폰 트리에의 데뷔작 <유로파>와 거의 같이 개봉됐던 영화였죠...
 

레프 도진은 러시아의 저명한 연극연출가이자 말르이(말리) 극장의 예술감독이다. 재작년에 그의 체호프 공연 한편을 보고 적어둔 감상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공연과 관련한 이미지들을 찾아넣으면 그때의 느낌이 조금은 되살아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해서, 연극은 시간예술이면서 공간예술이지만, 이 글-정리는 공간의 이미지를 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성격이 더 강하겠다. 아래 사진은 레프 도진.

 

 

한편 도진의 작품들은 <가우데아무스> 등이 이미 한두 번 내한 공연된 바 있는데, 소식에 따르면 올 5월 20-21일 양일간에 걸쳐서 그가 이끄는 말르이극단의 <형제자매들>이 LG아트센터에서 국내 초연된다.  러시아에서는 1985년에 초연한 화제작이라는데,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스탈린 정권 아래 살고 있는 러시아 민중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형제자매들>은 억압된 자유와 빈곤한 삶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강한 생명력을 예찬한다"고. "40여명의 배우들이 7시간 동안 뿜어내는 에너지와 감동은 영화의 시대이자 뮤지컬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연극이라는 장르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하니까 한번 기대해봄 직하다. 아래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말르이극장.  

 

내가 지난주(2004년 6월) 수요일에 ‘타간카’극장에서 본 레프 도진의 <바냐 아저씨>가 바로 ‘마냐 아줌마와 바냐 아저씨’(마야코프스키) 류의 연극이다(<바냐 아저씨>를 간혹 <바냐 외숙>이라고 옮기는데, 촌수야 그렇지만 ‘정떨어지는’ 번역이다). 그러니까 <바냐 아저씨>는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대표작이면서(나는 ‘체홉’이라고 즐겨 쓰지만, 여기서는 번역 관례대로 ‘체호프’라고 표기하겠다), 러시아 정통극의 상징이다. 

 

<바냐 아저씨>를 그의 ‘대표작’이라고 부르면, 약간 서운해 할 사람들도 있겠다. <갈매기>, <세자매>, <벚꽃동산>의 팬들도 만만찮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여전히 <바냐 아저씨>이고, 그걸 감추기는 어렵다. 내 생각에, 체호프의 이 네 작품에는 인생의 사계(四季)가 반영돼 있다. <갈매기>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좌절의 드라마이면서 동시에 봄의 드라마이고, 청춘의 드라마이다. 니나는 물론이거니와 트례플료프도 젊디 젊다. 그의 권총자살은 그 젊음을 웅변한다. 그는 미숙하지만 구차하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바냐 아저씨>와 <세 자매>에는 구차하게라도 삶을 계속 이어나가는, 이어나가야 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삶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진짜 삶, 삶다운 삶을 준비하고 고대하는 데 다 소진된다. 이들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다 비슷한 족속들일 것이다. 그들은 삶을 항상 고대하지만, 삶은 언제나 그들을 그냥 통과해간다. 마치 가구처럼, 무슨 간이역처럼. 그런 꿈이 허깨비였다는 걸 알게 된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데 이들의 삶이 가진 비극성이 있고, 진실이 있다(진실은 잔인하다!). <바냐 아저씨>는 그 진실의 남성-버전이고, <세자매>는 여성-버전인바, 드라마에서 이들의 삶은 여름에서 가을로 간다. 어느덧 그들의 젊음은 사라졌거나 대책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한편, <벚꽃동산>은 조락(凋落)의 드라마이자, 장년의 드라마이며, 체호프식의 ‘엔드게임’이다(어떤 연구자들은 <벚꽃동산>에서 부조리극의 ‘원조’를 읽어내기도 한다). ‘벚꽃동산’ 대신에 곧 ‘별장’이 들어서는 것처럼, 한 세대(혹은 한 시대)는 가고 또 다른 세대(혹은 또 다른 시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벚꽃동산>에는 ‘가을’에서 ‘겨울’로의 그러한 이행의 과정이 쓸쓸하게, 그러나 의외로 코믹하게 그려져 있다. 

<갈매기>를 무척 좋아했던 한 친구와는 다르게(그 친구는 구차하게 살기를 거절했다), 나는 처음부터 <바냐 아저씨>였고, 아직도 <바냐 아저씨>이다. 그래서, 이대로라면, 마흔 일곱까지는 조숙한(조로한) 편이게 된다. 바냐 아저씨의 나이가 마흔 일곱이므로. 하지만, 그 이후에라도 <벚꽃동산>을 좋아하게 되는 건 꺼려진다. 그건, 나의 분류에 따르면, ‘인생의 무대’에서 곧 퇴장할 사람들이나 ‘절절하게’ 즐길 만한 드라마이므로(‘잔혹극’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레프 도진이 체호프극 연출가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이 달 1일부터 24일까지 타간까 극장(사진. 전철역 ‘타간까’에서 나오자 마자 있는데,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했고, 비소츠키가 활동했던 극장으로도 유명하다)에서 열리는 ‘레프 도진 연극제’의 레파토리에도 들어가 있는 <제목 없는 희곡>의 성공에 힘입은 걸로 보인다. 지난번에 언급한 대로, 이 작품은 체호프가 최초로 시도한 장막극이자 실패한 장막극, 그래서 미완성으로 남은 드라마이다. <애비 없는 자식>이란 제목은 체호프의 한 편지에서 언급되며, 공식적인 제목은 아니다. 그리고, 흔히 일컬어지는 <플라토노프>란 제목은 독일인들이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붙인 제목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마도 도진은 이 작품을 새롭게 각색한 모양이다(원작은 공연 분량으론 너무 길다). 도진에 의하면, 우리의 삶 또한 ‘제목 없는 희곡’이다. 아래 사진은 <제목 없는 희곡>의 한 장면. 참고로, 니키타 미할코프의 영화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도 같은 원작이다.

 



이번 연극제에 대한 정보를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비싸더라도) 표를 구해볼 수 있었을 텐데, 룸메이트가 <바냐 아저씨>를 예매하고, 다른 날 다른 작품들을 예매하러 갔을 때 이미 모든 공연의 표가 매진이었다. <체벤구르>도, <악령>도, <제목 없는 희곡>도. 그래서 결국, <바냐 아저씨>만 보게 된 것인데, 다음에 그의 작품들을 보려면, 아마도 페테르부르크에 가야 할 것이다. 레프 도진은 원래 페테르(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에서는 ‘삐쩨르’라고 약칭해서 부른다)의 ‘말르이 극장’에서 활동하는 연출가이다(페테르에는 현대식 건물의 ‘제2 말르이극장’도 곧 건축될 예정이다. 지난번 설계공모에서 프랑스 건축가의 출품작이 선정됐다).

 

그래서 이번 공연의 원제는 ‘모스크바에서의 레프 도진의 공연들’이며 지난 봄에 있었던 제10회 ‘황금가면’ 연극제에서 <바냐 아저씨>로 도진이 연출상을 받은 걸 기념하여 기획된 걸로 안다. 그러니까 도진의 모스크바로의 ‘화려한 외출’인 셈이다. 배우들은 물론 전부 말르이극장 소속 배우들이며, 무대장치도 페테르에서 공수해 왔다고 한다. 참고로, 모두 7편이 공연된 도진의 연출작(혹은 감독작) 가운데, 제일 첫작품은 류드밀라 페트루셰프스카야의 <모스크바 합창단>이었다. 페트루셰프스카야? 지난번에 번역해서 올린 단편 <복수>의 작가 말이다. 그녀는 극작가로서도 상당한 명망을 갖고 있다. 막심네에서 들춰본 그녀의 희곡선집에는 <모스크바 합창단>이 빠져 있어서, 자세하게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다(그녀의 작품이 일부 <러시아 현대희곡>에 번역/소개돼 있다).

 

 

 


 

 

 

 

 

도진이 연출한 체홉극 목록에서 <바냐 아저씨>는 <제목 없는 희곡>과 <갈매기>, <벚꽃동산>에 이어진 작품이다. 그러니까 <세자매>가 목록에 빠져 있는 셈인데, 한 잡지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현재 오페라 <엘렉트라>를 준비중인 도진은 기회가 되면 <세자매> 또한 연출해볼 의향을 갖고 있다(그는 올해로 환갑을 맞았다). 한국에서 체호프의 공연을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에(나는 연극을 즐겨보는 편이 아니다), 도진의 <바냐 아저씨>가 어느 정도 뛰어난 작품인지는 잘 가늠할 수 없었지만, 객석이 꽉 들어찬 가운데 배우들이 가구들을 하나 둘씩 날라다 놓으면서 시작된 공연은 상당히 품위 있고 세련돼 보였다.


우리의 ‘바냐 아저씨’를 연기한 배우는 세르게이 쿠르이쇼프인데, 도진의 9시간짜리 <악령>에서는 키릴로프 역을 맡고 있고(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로는 차라리 ‘샤토프’ 역에 더 어울리는데), 이번 <바냐 아저씨>로 ‘황금가면’ 연극제에서 남자연기상을 받았다. 그런 걸로 미루어볼 때, 연기력을 인정 받는 배우이지만, 내가 상상해온 ‘바냐 아저씨’와는 조금 다른 면모의 배우였다. 일단 키가 좀 크고(그래서 어정거리며 걷는다), 갈색 머리는 웨이브의 장발이며, 양복을 아주 단정하게 입었고, 약간 술 취한 듯한, 질질 끄는 말소리에는 콧소리가 좀 들어가 있었다. 다른 배우가 연기한 ‘바냐 아저씨’를 보아야 감을 좀 잡을 거 같다.

바냐 아저씨가 헤프게 어정거리다 말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도진의 <바냐 아저씨>에서 두드러지는 건 의사인 아스트로프인데, 이 역을 맡은 배우 표트르 세마크는 단단한 체구에 똑 부러진 말투로 아스트로프의 열정과 냉소주의를 연기했다. 이 세마크란 배우가 도진의 <갈매기>에서는 역시 의사인 도른 역을, <악령>에서는 주역인 스타브로긴 역을 맡고 있다(이런 내용은 당일 70루블(2,800원)을 주고 산 전체공연 팜플릿에는 배우들의 사진과 약력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배우들의 이러한 면면으로 대략 도진 버전의 <악령>을 그려볼 수 있다. 아스트로프와 함께 도진의 <바냐 아저씨>를 끌고 가는 건 늙은 학자 세레브랴코프와 결혼한 ‘미의 화신’ 옐레나 안드레예브나인데, 크세니야 랍포포르트란 여배우가 연기했다. 이 배우는 <갈매기>에서 니나도 맡고 있었는데, ‘아름다우면서 콧대 높고 허영에 찬 젊은 여자’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다(실제로 눈이 크고 콧대가 높은 배우였다. 머리는 곱슬머리. 아니, 파마머리인가?). 사진은 아스트로프와 옐레나.

도진의 <바냐 아저씨>에서의 클라이막스는 예상과 다르게, 3막에서 영지를 매각하는 게 좋겠다는 세레브랴코프의 발언에 분노한 바냐 아저씨가 그에게 권총을 겨누지만 그마저 제대로 못 맞히는 장면이 아니라, 4막에서 아스트로프와 엘레나가 단둘이 작별의 포옹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둘은 포옹만 하는 게 아니라 열정적으로 상당히 긴 시간 또한 키스를 하는데, 그 바람에 남편 세레브랴코프를 비롯한 다른 식구들이 모두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객석에서는 탄성이 나왔다).

 

내가 읽은 <바냐 아저씨>에도 그런 장면이 있었나 싶어서 기숙사에 돌아와 확인해보니까 원작은 그렇지 않았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에서는 둘이 잠깐 포옹했다가 서로가 화들짝 놀라서 떨어진다(사실 그런 게 ‘체호프적’이다). 즉, 원작에서는 아스트로프가 바냐 아저씨 못지 않은 ‘등신’으로 나오는데(그래서 둘이 친구로서 어울린다), 도진의 <바냐 아저씨>에서는 아스트로프가 나름대로 박력있는 남자로 나옴으로써 ‘배신’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나는 이러한 도진의 해석이 창의적인 것인지 오바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물론 보기엔 더 좋다. 이 ‘한심한 인물들’의 드라마에 그래도 열정적인 키스씬이라도 나오니까 말이다).

 



엘레나의 남편이자 바냐의 처남이자 소냐의 아버지, 세레브랴코프 역은 이고르 이바노프란 배우가 맡았는데(사진은 세레브랴코프와 옐레나), 그는 <벚꽃동산>에서는 로파힌 역을, <악령>에서는 레뱌드킨 역을 맡고 있었다. 로파힌 역을 맡기에는 너무 젊잖고 완고해 보이는 외모인데(김무생 타입이다), 콘찰로프스키의 영화 <바냐 아저씨>에 나오는 아주 얌체 같은 늙다리 세레브랴코프에 비하면, 나름대로 권위적이고, 젊은 아내 엘레나를 거느릴 만한 세레브랴코프를 연기했다.

 

그밖에 주요 배역으론 소냐를 연기한 엘레나 카릴니나와 첼레긴을 연기한 알렉산드르 자비얄로프가 있다. 미스터리한 것은 이 배 나온 ‘첼레긴’이 <갈매기>에서 트레플료프를 연기한다는 점(사진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남자). 자비얄로프란 배우는 이고르 이바노프와 마찬가지로 1954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는 51세이다. 나는 (첼레긴 역에나 딱 어울리는) 그가 연기하는 트레플료프를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다!

기타 등등. 이제 마무리이다. 알다시피 <바냐 아저씨>는 “바나 아저씨, 우리, 일을 하는 거예요.”로 시작되는 소냐의 대사로 마무리되는데, 도진 버전에서는 이 마지막 대사가 비교적 절제된 톤으로 담담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룸메이트에 따르면, 한국의 <바냐 아저씨> 공연에서는 이 마지막 대사에 상당히 힘을 준다고(거의 울부짖는 수준으로).

 

하여간에, 우리들 ‘소냐’나 ‘바냐’들은 남은 여생을 그저 일이나 하는 수밖에 없겠다. 천국에 가서 그간의 노고를 위로 받고 쉬게 될 때까지 말이다. 그것이 냉철한 연민의 작가 체호프가 <바냐 아저씨>에서 내리는 결론이다. 이건 위안일까, 냉소일까? 혹은 낙관주의일까, 비관주의일까? 둘 다이다. 그래서 체호프를 ‘Optimo-pessimist’라고 부르기도 한다. 되는 일도 없고, 굳이 안 되는 일도 없는, 그래서 슬프도록 즐거운, 혹은 눈물 나게 즐거운 삶을 우리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갑시다!(막) 짝짝짝…

 

06. 03. 07.

 

P.S. 체호프 원작의 영화들 얘기는 조만간 다른 자리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로, 도진과 말르이극장에 관한 영어본 소개서로는 마리야 셰브쵸바의 'Dodin and the Maly Drama Theater'(Routledge, 2002)가 있다. 한번 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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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프 도진과 말리드라마극장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07 21:59 
    뜻밖의 책이면서 '오늘의 책'이라 할 만한 책은 마리아 셰프초바의 <레프 도진과 말리드라마극장>(동인, 2010)이다. 이미 여러 차례 방한한 바 있는 러시아의 연출가 레프 도진에 관해서는 여러 차례 포스팅한 적이 있고, 셰프초바의 책도 관심도서로 분류했었지만 막상 번역까지 될 줄은 몰랐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주문을 넣었다. 도진의 <바냐아저씨>가 내달 서울에서 공연될 예정이기도 해서 더욱 의미가 깊다. 
 
 
 

재작년 6월 모스크바 통신에 올린 글에서 두 시인/작가 '마야코프스크와 파스테르나크'에 관련된 대목을 다시 옮겨놓고 이미지들을 덧붙여둔다. 직접적인 관련이 되는 책은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자서전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글방, 1977)인데, 지금은 품절된 듯. 책의 원제는 '안전통행증'이며, 안정효 역에서 제목의 '어느 시인의 죽음'이 가리키는 것은 후배였던 마야코프스키(1893-1930)의 죽음이다.

 

요즘 들어 드물게 비가 오지 않았지만, 5월 이후 러시아는 비가 오는 날이 잦다. 그래 봐야 대개는 한두 시간 오고 말지만(2분씩 내리기도 한다), 어제 오후에는 꽤 내렸다. 3일 연휴라는 게 기분상 갑갑해서 외출을 했다가 그 비를 쫄딱 맞았다. 하지만, 여름비라고는 해도 (장마비가 아닌) 보슬비 정도이기 때문에 맞아 봐야 옷이 흠뻑 젖거나 하는 건 아니다. 산책길에 좀 맞으면 오히려 기분이 상쾌해지는 그런 비다. 물론 작정하고 비를 맞을 일은 없고, 날씨가 하도 변덕스럽기 때문에 준비 없이 나갔다가 비를 맞곤 하는 것이다. 토요일도 그랬다.

오후에 바람도 쐴 겸 <루뱐까>역에 있는 서점 <비블리오-글로부스>에 오랜만에 갔지만(교통이 제일 편한 서점이기도 해서), 뜻밖에도 연휴 3일 동안 휴점이었다. 한국의 대형서점이라면 턱도 없는 일이겠지만, 아직 자본주의에 ‘미숙한’ 러시아에서 아쉬운 건 손님이지 가게 주인들이 아니다(왼쪽이 서점 입구이고, 오른쪽 이미지는 서점의 로고).



다행인 건, 이전에 두 번 그냥 지나쳤던 <마야코프스키 박물관>을 둘러볼 시간이 있었다는 것. 휴일이라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데, 내가 들른 시간이 4시 15분쯤이었다. 이 박물관은 전철역에서 <비블리오-글로부스>서점쪽으로 가다가 박물관 표지가 있는 곳에서 골목 방향으로 20미터쯤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는 4층짜리 건물이다. 건물로 들어서면, 복도에는 미술과 문학 등의 관련서적들이 판매용으로 비치돼 있고, 책상 앞에 앉은 한 아줌마가 입장료를 받는다. 나는 ‘학생’이기 때문에 6루블(250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블라지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 ‘혁명의 목청’이자 미래파의 기수였던, 러시아 최대의 아방가르드 시인의 박물관답게 전시장 또한 아방가르드적이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까지의 공간 전체가 마치 미술대학의 창고처럼 각종 철골 구조물로 가득 차 있었고, 시인과 관련된 원고나 포스터 등의 각종 자료들이 사이사이에 배치돼 있었는바, 전시장 자체가 일종의 설치미술 작품이었다. 물론 시인이 남긴 퇴색한 원고들처럼 이 아방가르드 ‘설치미술’ 또한 세월의 두께만큼 쌓이는 시간의 먼지마저 털어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지만. 전시장을 층마다 지키고 있는 점잖은 할머니들도 주름살은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아래는 마야코프스키가 그린 수많은 선전 포스터들 중 하나.



30분 정도 둘러본 것이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그의 유언장과 시인의 죽음을 특집으로 다룬 1930년 4월 17일자 <리쩨라뚜르나야 가졔따>(‘문학신문’)이었다. ‘모두에게’라고 제목을 단 이 ‘공식적인’ 유언장은 1930년 4월 12일에 작성된 것인데, 일반노트보다 좀 큰 갱지에 연필로 큼직하게, 그리고 급하게 써 내려간 것이다. 나는 ‘모두에게’라는 제목 때문에 금방 그의 유언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다소 놀란 것은 이 유언장이 아무런 구별이나 표식 없이 다른 자료들과 섞여서 전시돼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의 ‘마지막 말’에 대한 대우로서는 좀 소홀한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이 유언은 내 기억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3권짜리 선집에 번역돼 있다(절판된 책이지만). 그리고, 아마도 각각 ‘역사비평사’와 ‘까치’에서 번역 출간된, <나의 혁명, 나의 노래>와 <마야코프스키>, 두 권의 전기에도 내용이 소개돼 있을 것이다. 그 유언의 시작은 이렇다: “나의 죽음에 대해서 (*나 자신 외에) 아무도 책망하지 마시길, 그리고 바라건대, 크게 떠들어대지도 마시길. 고인은 그런 걸 무척이나 싫어한답니다. 어머니, 누이들, 그리고 동지들, 용서하시길 - 이게 (*옳은) 방법은 아니지만(다른 사람들에겐 권하지 않겠소), 나에겐 다른 출구가 없다오. 릴랴 - 나를 사랑해주오.”(릴랴는 그의 연인이자 오십 브릭의 아내였던 릴랴 브릭을 말한다. 아래 사진.)



그리고 다른 페이지에 씌어진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책상 위에 있는 2,000루블은 국고로 환수해주시오. 나머지는 기즈에서 받으시길. V. M.”(‘기즈’는 ‘국립출판사’의 약칭이고, V.M.은 그의 서명이다.) 이 유언을 쓴 이틀 후인 1930년 4월 14일에 시인 마야코프스키는 권총자살하며, 그의 유언장은 다음날인 15일 <프라우다>지에 최초로 공개된다. 그리고, 17일(목)자 <문학신문>은 거의 전 지면을 갑작스런 자살로 전 러시아를 경악하게 한 마야코프스키 특집으로 꾸미고 있다. 아래는 자살한 시인의 유해.

사실, 마야코프스키의 자살은 한 시인의 죽음 이상의 시대적 상징으로서의 의미도 갖는다. 1920년대 말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행기로서, 정치적으론 레닌의 사망(1924) 이후 스탈린 체제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경제적으론 레닌이 ‘자본주의로의 전략적 후퇴’라고 부른 신경제정책(NEP) 시기(1921-1928)가 마감됨과 함께 본격적인 사회주의 경제체제로의 전환이 준비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NEP 시기에 허용되었던 문학/예술 분야에서의 창작과 비판의 자유가 차츰 위축되고 검열은 강화된다. 이러한 과정은 스탈린주의라는 ‘정치적 아방가르드’에 의해 ‘예술적 아방가르드’가 대체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보리스 그로이스의 <아방가르드와 현대성> 참조). 그러한 과정이 명시적으로 일단락되는 것은 1934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식 선포됨으로써이지만, 그 기점은 1920년대 말(1927-1930)이다.

 

 

 



<닥터 지바고>에서 주인공 유리 지바고가 거리에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는 1929년은 이러한 정치 사회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1929년은 스탈린이 ‘대전환의 해’라 부른 년도이자,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침묵이 시작되는 해이다. 그리고, 침묵이냐, 자살이냐는 선택에서 우리의 ‘목청’ 마야코프스키는 자살을 택한 것이다(그보다 먼저 1925년에는 ‘농민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의 자살이 있었다). 국내에 번역 소개된 파스테르나크의 자서전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은 바로 이 시인 마야코프스키와 그의 죽음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어느 시인의 죽음’이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자서전의 원제목은 ‘안전통행증’이다. 영어로는 ‘Safe Conduct’). 아래는 국역본에 들어 있는 사진으로 서 있는 사람이 파스테르나크이고, 나비 넥타이를 맨 '빡빡이'가 마야코프스키이다.

<닥터 지바고>로 1958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지만(예기치 않은 수상 스캔들로 마음 고생을 하다가 그는 1960년에 ‘일찍’ 죽는다), 파스테르나크는 무엇보다도 ‘시인’이다(그의 초기시는 ‘미래파’로 분류된다). 유리 지바고가 남긴 시편들은(간혹 이걸 ‘부록’이라고 빼먹는 엉터리 번역서들도 있는데), <닥터 지바고>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지만, 파스테르나크의 대표작들이기도 하다. 지바고는 소설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서정적 분신이다. 그래서, 언젠가 <닥터 지바고>의 서평에서도 쓴 바 있지만,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이 ‘시로 쓴 소설’이라면, <닥터 지바고>는 ‘소설로 쓴 시’이다(그러니 이걸 ‘소설미학’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곤란하다).

금서이던 <닥터 지바고>가 러시아에서 공식 출판되는 것은 1988년쯤이다. 그래서 1985년에 저명한 러시아문학자 드미트리 리하쵸프의 편집하에 출간된 (내 생각엔) 최초의 파스테르나크 전집(2권짜리)에는 <닥터 지바고>가 빠져 있다(한편, 지난달에는 TV에서도 데이비드 린의 <닥터 지바고>가 방송되어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영화속 ‘라라의 테마’는 한국의 애청자가 꼽는 영화음악 베스트에 항상 들어가곤 했는데,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여기에 와서 구한 책인데, 파스테르나크의 전기에 대한 가장 상세한 자료는 그의 아들 예브게니 파스테르나크가 펴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전기를 위한 자료들>(1989>이다. 68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이고, 50,000부가 발행되었다. 아래 왼쪽 사진이 아버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이고, 오른쪽은 아들이자 유산 관리인인 예브게니 파스테르나크이다.

특이한 것은 1957년에 파스테르나크가 올가 이빈스카야와 찍은 사진도 책에 들어 있다는 것. 내 기억엔 그녀가 ‘라라’의 모델이고, 아들 예브게니는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그녀를 무척 싫어했다(나는 갖고 있지 않지만, 국내에는 이빈스카야가 쓴 책도 번역 출간됐었다). 이 ‘무뚝뚝한’ 예브게니와의 인터뷰는 한국일보 김성우 기자의 러시아명작기행(매주 한 차례 한 면 전체에 연재됐던 이 기행문을 나는 모두 스크랩했었다), <백화나무 숲에서>에 실려 있다(기억에 의존한 거라서 제목이 확실치는 않다. 제3문학사에서 나왔던가?). 아래 사진은 라라의 모델 올가 이빈스카야. 국내엔 자서전 <올가 이빈스카야>(동흥문화사, 1992)가 출간됐었다. 아래는 만년의 두 사람.



파스테르나크의 저작권은 아마도 예브게니가 갖고 있는 모양으로 최근에 출간되는 <닥터 지바고>에는 그의 ‘소감’이 실려 있다. 어쨌든 러시아문학은 그렇게, ‘최초의 망명작가’ 푸슈킨에서부터 ‘내적 망명작가’ 파스테르나크까지이다(거기에 물론 ‘진짜로’ 망명한 소설가 나보코프와 망명당한 시인 브로드스키가 동급으로 덧붙여질 수 있다). 참고로, 소비에트 문학(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학)은 고리키에서부터 솔제니친까지이다(<밑바닥에서> 시작한 소비에트 문학은 <수용소군도>에서 끝(장)난다)…

하여간에, 파스테르나크가 시인으로서 후배인 마야코프스키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는 얘기를 하려다가 옆길로 갔다.  그래서 제목은 '마야코프스키와 파스테르나크'로 해둔다. 두 시인에게 건배를!..

06. 03. 07.

P.S. 내일이 '세계 여성의 날'이군. 오늘도 수고하시는 세계 여성들께도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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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느 시인의 죽음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21 09:30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자서전과 단편소설을 묶은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글방, 2010)이 재출간됐다.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선생의 번역으로 오래전에 나왔지만 절판됐던 책이다(안정효판 <의사 지바고>도 나는 갖고 있다). 예전에 몇차례 언급한 적이 있는 책이기도 한데, 반가운 마음에 파스테르나크에 관한 강의록의 일부를 붙여놓는다. 세계문학전집판의 새로운 <닥터 지바고>도 곧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야코프스키의 자살
 
 
2006-03-07 1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3-07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소설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두꺼운 듯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