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전철에서 부대끼며 읽은 한국일보에 두 화가 얘기가 실렸다. 현재 미국에서 투병중이라는 화가 천경자씨의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라는 전시회 소개 기사와 미국의 알츠하이머 화가 어터몰렌에 관한 기사였다. 이런 기사를 큰 비중으로 싣고 있는 게 반갑고 '대견'했다. 덕분어 출근길 짜증을 좀 줄여볼 수 있었다.

 

 

 

 

투병중에도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는 두 화가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두 소개 기사를 부분적으로 옮겨온다.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해서.

-미국에서 투병 중인 화가 천경자(82)씨의 ‘내 생애 아름다운 82 페이지’ 전에 관객이 몰리고 있다.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와 두가헌 갤러리에서 8일 시작된 이 전시는 꽃과 여인의 화가로 알려진 그의 예술세계를 두루 보여주고 있다. 1998년 미국의 큰 딸 집으로 건너간 그는 2003년 봄 뇌일혈로 쓰러져 의식은 있지만 거동은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그의 생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전시를 보려는 사람들이 평일에도 줄을 잇고 있다.



-이번 전시는 1970~90년대 대표작 30여 점 뿐 아니라 초기 화풍을 보여주는 50~60년대 미공개작 4점, 평생 작업한 수채화와 드로잉 180점, 미완성작 42점을 망라하고 있다. 미완성작 중에는 거의 완성해 놓고도 서명하지 않은 작품이 많아 그의 완벽주의를 짐작케 한다. 화가가 즐겨 입던 옷과 쓰던 물건, 여행지의 엽서와 사진, 인형과 장신구 등 각종 수집품도 전시장 군데군데 놓여 그의 체취를 전한다.



-특히 눈여겨 볼 것은 드로잉이다. 세계를 여행하면서 스케치한 이국의 풍물, 예리한 필치로 단숨에 포착한 동물과 인체, 치밀한 관찰의 흔적이 역력한 꽃과 나무 등 펜이나 연필로 그린 이 그림들은 그가 얼마나 기초 작업과 자기 훈련에 철저했는가를 보여준다. 꽃잎 하나하나, 나비와 새의 날개마다 각 부분의 색깔까지 꼼꼼히 적어놓았다. 그를 인기작가로 만든 강렬하고 환상적인 채색화들과 나란히 걸린 이 소박한 밑그림 혹은 습작들은 지독한 연마의 흔적이란 점에서 감동적이다. 그의 드로잉이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선보인 적도 없다.

-사람들은 그를 ‘정한과 고독의 작가’라고 부른다. 곱고 화려해서 오히려 더 슬프고 쓸쓸한 그의 그림들은 매우 자전적이다. 언젠가 그는 “내 온몸 구석구석에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는지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 슬픈 전설의 내력에는 아끼던 여동생의 죽음, 유부남과의 사랑 등 개인사도 있지만, 스스로 예술의 황홀경을 찾아 고독의 끝까지 치달았던 모진 여정이 깔려 있다. 46세부터 74세까지 28년 간 열두 차례나 해외 스케치 여행을 떠나 지구를 한 바퀴 돌다시피 한 것도 예술가로서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내 그림은 분명 어딘가 이상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바로 잡을 수가 없다. 내 작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10년 전부터 알츠하이머에 시달려 온 미국 화가 윌리엄 어터몰렌(73)은 자화상만 그린다. 뇌를 갉아 먹는 병마가 화필을 가로막으려 하지만 그의 창작 욕구까지 꺾지는 못했다. 어터몰렌이 2000년까지 그려 온 자화상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 뿐이다. 그러나 화가가 병마와 싸우면서 느꼈을 분노와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에서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발병 초기 자화상은 공포와 고립감을 담고 있다. 이후 저항과 분노에서 부끄러움과 혼란, 고통으로 바뀌었고 마지막에는 혼란스러운 붓 자국만 남아 있는 완전한 자아 상실로 끝을 맺고 있다. 어터몰렌의 자화상은 알츠하이머의 진행과 그에 따른 창작능력 손상 과정을 자세히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학적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필라델피아 의대 안얀 채터지 박사는 “단순한 좌뇌, 우뇌론이 아니라 사람이 그림을 그릴 때에는 뇌의 매우 다른 부분들을 이용한다는 점이 확인됐다”며 “인간의 뇌가 손상돼 가는 과정이 그대로 표현돼 있는 그림을 보는 것은 그것 자체로 숨막히는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면역체계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어떻게 사람이 창작 활동을 계속하는지를 그는 보여주고 있다”며 감탄했다.

-뉴욕과 유럽의 갤러리에서 호평 속에 판매됐던 어터몰렌의 자화상은 필라델피아 의과대학에서 다음달 30일까지 전시에 들어갔다. 주최측은 알츠하이머를 처음 발견한 독일 의사 알로이스 알츠하이머 박사와 어터몰렌의 삶을 기념할 목적으로 기획했다. 론다 소리첼리 박사는 “알츠하이머를 두려워 하는 상황에서 이런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환자와 가족, 의사, 대중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어터몰렌은 병을 앓기 전까지 30년 가까이 런던을 중심으로 신화와 일상 생활을 소재로 삼은 표현주의 작품을 그려 큰 명성을 얻었다(위의 그림 참조). 런던 북부 유대교 예배당과 병원 벽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현재는 의사소통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런던의 요양소에서 부인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아래 그림들은 알츠하이머 병의 진행과정을 보여주는 일련의 자화상들. 각각 1994년("머리 위의 강력한 빛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는 듯 탁자를 꽉 붙잡고 있다"), 1996년(알츠하이머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이며 "노랑과 주황색을 주로 사용했고 두 눈에는 공포감이 역력하다"), 1997년("공간감각을 잃고 있음을 알게 한다"), 2000년작(병세가 최악에 이른 해이며 "창작 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작은 캔버스 위에 머리 흔적과 붓자국만 남아 있다).


06. 03. 14.

P.S. 한데, 이 마지막 그림은 왠지 베이컨의 그림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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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3-14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보고 글을 하나 급히 썼어요.
추천하고 퍼갑니다.^^

로쟈 2006-03-14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급히 쓰신 글 읽어봤습니다. 책 한권 내시죠?^^

로드무비 2006-03-14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 주제는 못되고요.^^
 

지젝과 그 일당의 히치콕 읽기, 즉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 이하 <히치콕>)에 대한 예전의 읽기를 또 옮겨둔다. 가장 앞에 놓였어야 하는. 왜냐하면 지젝의 서문부터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나면 나는 원래의 영어본을 읽어가며 이 책을 다시 정리하거나 이 읽기를 보완할 생각이다.

라캉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얼마전에 <에크리>의 완역본이 드디어 출간됐다. 역자는 역시나 몇 년전에 <에크리> 선집을 낸바 있는 브루스 핑크. 아마도 영어권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라캉 연구자/주석자인 그는 이미 <세미나>의 번역과 주해로 잘 알려져 있으며, <에크리> 해설서인 'Lacan to the letter: Reading Ecrits Closely'의 저자이기도 하다(한마디로 말해서, '에크리라면 핑크에게 물어봐!'이다).

국내에는 아직 <라캉과 정신의학> 정도만 소개돼 있는데, 저명한 라캉 이론 해설서 'The Lacanian Subject'의 국역본이 근간 예정인 것으로 안다. 그간에 <에크리> 국역본 출간을 고대해 왔는데, 이번 영역본 출간으로 그 지루함을 덜 수 있게 돼 반갑다(영역본을 참조한다면 아마도 좀더 정확한 국역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선집을 갖고 있었지만, 지젝의 신간 'The Parallax View'와 함께 단번에 책을 구입한 이유이다. 부피가 부피인 만큼 지젝의 책도 국역본이 나오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릴 듯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좋은 번역본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지젝의 히치콕 이야기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시도하는바 히치콕에 대한 진지한 이론적 접근 자체가 '포스트모던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지젝이 정의한 바 “포스트모더니즘적 접근방식의 목적은 바로 처음의 익숙함을 오히려 낯설게 하려는 데 있다.”(12쪽) 그리고, 지젝 등은 그러한 접근방식에, 혹은 ‘광기’에 주저없이 참여하고자 한다. 그 광기란 무엇인가? “(히치콕의 영화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는데, 겉보기에는 극히 단순한 플롯이라 하더라도 예기치 못한 철학적 정치(精緻)함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13쪽)고 간주하는 태도이며, “그 자신의 작품의 가장 미세한 세부까지도 관장한 신과 같은 조물주로 히치콕을 격상시키는”(26쪽) ‘열애가적’ 태도이다.

지젝은 이러한 광신적 태도 속에 히치콕의 오류와 비일관성을 트집잡는 ‘맨정신적’ 태도보다 더 많은 진실이 있으며 이론적으로도 훨씬 더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진실은 ‘오버’하는 태도에 있다!). 이것이 책의 서론에서 지젝이 전제하는 것이며, 서론의 나머지 부분은 F. 제임슨의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3단계론을 배경으로 삼아 히치콕 영화의 단계를 ‘변증법적으로’ 구획하는 데 바쳐져 있다.

 

 

 

 

지젝은 일단 다섯 시기로 구획하는데, 거기서 첫 시기인 ‘<39계단> 이전의 영화들’과 마지막 시기인 ‘<마니> 이후의 영화들’은 히치콕 ‘이전’과 ‘이후’의 영화들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으며 또 분석하고자 하는 ‘히치콕’에는 부수적인, 하지만 유익한 참조가 되어주기도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중간에 놓여 있는 히치콕의 세 시기이다.

 

 

 

 

(1)1930년대 후반의 영국 영화들: <39계단>에서 <숙녀 사라지다>(<사라진 여인>)까지. (2)’셀즈닉’ 시기: <레베카>에서 <염소좌 아래서>까지. (3)1950년대와 1960년대 초기의 위대한 영화들: <스트레인저>부터 <새>까지. 이러한 구획 이후에 지젝은 이 세 시기의 ‘사회적-역사적’ 매개를 ‘주체성의 지배적 유형’과 ‘욕망의 세 가지 양상’에 대응시키는바, 이때 중요한 준거가 되어 주는 것은 이른바 ‘히치콕적 대상’의 지배적 형식이다. 지젝은 이 대상을 세 가지(대상a로서의 맥거핀, 교환대상으로서의 상징적 대상, 그리고 Φ로서의 실재)로 분리해 내며, 이것이 각각 세 시기의 지배적인 대상임을 보이고, 이렇듯 특정 유형의 대상이 우세한 것이 욕망의 양상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이상이 그의 논의의 대략적인 윤곽이다.

여기서, 아쉬운 것은 국역본/러시아어본뿐만 아니라 영어본에도 히치콕의 필모그라피가 소개돼 있지 않은 것이다. 최상의 경우라면, 연대별 필모그라피를 포함해서, 러닝타임과 주연배우들, 각 영화의 줄거리(시놉시스) 등이 부록으로 포함돼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선, 서비스가 부족하다. ‘너무 많이 알았던 관객’이란 장도 이 책에는 있지만, 히치콕 영화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앎은 저자들 같은 매니아(광신도)가 아니라면 턱없이 부족하다. 이 책에 나오는 영화들을 다 본 독자들이 몇이나 되겠는가?(국내에는 물론 다 출시돼 있지도 않지만.) 비록 지젝은 로셀리니의 영화를 한 편도 안 보고도 태연하게 그의 영화들을 분석해낸다지만(물론 영화관람을 대체할 자료들을 다 읽었을 것이다),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는 독자’로서 이 책의 논의들을 태연하게 다 따라가는 건 좀 무리이다.

더불어 번역에 대한 불만들. 11쪽의 첫문장부터 보자.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간의 단절을 해석하려는 다양한 시도 속에서도 이러한 단절이 ‘해석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대개 간과되고 있다.” 이 첫문장부터 몇 번 반복해서 읽어야 했는데, 러시아어본을 참고하여 다시 번역하자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단절을 해석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절이 어떤 방식으로 ‘해석의 지위’ 자체와도 관련되는지는 흔히 간과되어 왔다.”(‘관련되는지’의 러시아어 번역은 ‘(자체를) 건드리는지’이다) 원문은 양보구문이 아니지만,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양보구문으로 옮겼다. 어떤 논문에서 자기만의 테제를 제기하고자 할 때, 제일 먼저 언급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자신이 주장하려고 하는 바) 이제까지 간과되어 왔거나 오해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서두에서 지젝이 하고자 하는 것도 그런 사전 정지작업이다.

일단,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간의 단절’이란 표현은(영어본에는 정말로 그렇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차성을 고려할 때 자연스럽지 않다(‘포스트’는 뒤에 와야 하는 것 아닌가?). 바로 다음 문장에서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시작하고 있으므로, 이 경우에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간의 달절’이라고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할 당시에 나온 책들에는 대부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단절, 즉 그 차이/차별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표들이 등장했었다. ‘다양한 시도’라는 건 그걸 말한다.

그런데, 지젝이 보기엔 거기에 하나 빠진 항목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해석의 지위’라는 것이다(‘지위status’라는 말은 ‘역할’로 이해하면 더 쉽다). 그러니까 ‘해석의 지위’라는 기준으로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단절, 즉 차이를 이해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말 번역문에서 내가 찜찜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단절이 해석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란 표현이다. ‘영향을 미치는’이란 말이 어느 동사를 옮긴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문맥상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단절’이 먼저 일어나고 그것이 순차적으로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식이 아니라, ‘단절’과 ‘방식’은 등가적이고 동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런 ‘방식’이 곧 ‘단절’이다.

‘해석의 지위’라는 기준으로 볼 때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떻게 다른가? 어떻게 각기 다른 것으로 판별되는가? 일단 모더니즘에서의 예술작품은 ‘이해불가능한’ 어떤 것, 즉 ‘트라우마’(충격이요, 외상)이다. 즉, 예술은 쇼킹한 어떤 것이다. 모더니즘에서의 해석은 이 ‘이해불가능한 것’ ‘쇼킹한 것’을 ‘이해가능한 것’ ‘고상한 것’으로 형질을 바꿔줌으로써 우리가 수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이에게 음식을 먹일 때 먼저 몇 번 씹어주는 행위, 이게 ‘해석’이다. 그래서 모더니즘에서는 아이-일반독자들을 위한 엄마-전문가들이 있다. “이게 바로 이런 뜻인 것이죠.” “아, 그런 거로군요! 호호호.” <황무지>의 시인 T. S. 엘리어트가 꽤나 영민했다는 얘기는(‘기민했다’고 번역돼 있는데), 그가 자기 시에 주석까지 붙임으로써 북치고 장구치고 다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방향이 정반대이다. 모더니즘에서의 해석이 대상(예술작품)의 불안한 ‘섬뜩함’(uncanniness의 번역인데, 이전에 밝힌 바대로, 나는 uncanny의 번역어로 ‘섬뜩함’을 지지한다, 여기에는 ‘낯섬’ ‘두려움’ ‘불편함’ 등의 뜻이 포함돼 있다)을 ‘순화시키는’(러시아어 번역은 ‘고상하게 만드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은 ‘익숙해 보이는 것’을 거꾸로 ‘낯설고 복잡한 것’으로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지나가는 김에, “이제야 이 엉망진창인 것의 초점을 알겠구만!”이라고 모더니즘적 해석의 효과를 부연설명하는 대목에서 ‘엉망진창인 것’(러시아어 번역은 ‘혼돈’)은 무얼 번역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좀 어색하다. 모더니즘의 예술작품은 ‘엉망진창’이라고 하기엔 정교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 정도의 의미가 들어가야 한다. “(그런 걸) 아하, 이젠 이해할 수 있겠어!”란 내용이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의 즐거움은 아주 쉽고 진부해 보이는 내용을 낯설고 복잡한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 물론 여기에 징후니, 징환이니, 보로메오 매듭이니 하는 현학적인 수사들이 동원될 것이다(일반 독자들에게 겁을 주는 것이다!). 가령, “(애들도 보는) <대장금>의 이면에는 복잡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작동하고 있는바, 여기서 장금은 여성적 욕망의 집합적 투사인 듯이 보이며, 한편으론 페미니즘적 강령을 실천하는 듯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여전히 가부장적 국가장치 내에서 여성의 ‘개인적’ 성공이란 남근적 인정에 있다는 것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아주 교묘하게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훈육적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떠든다고 해보자. 이런 종류의 담화가 일반 독자나 청중에게 겁을 주는 데 성공한다면(백남준의 말대로, ‘예술은 사기다!’), 그래서 ‘내가 바보같이 <대장금>을 좋아하다니!’하는 반응을 혹 불러일으킨다면, 이런 류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은 성공한 것이 된다.

보다 단순하게 말해보자. 이상의 시가 모더니즘 텍스트라면, 김소월의 프리-모던한 시들은 “김소월의 시는 생각보다 어렵고 복잡하다”고 규정하는 순간 포스트모던한 시 텍스트로 탈바꿈할 수 있다(그의 시 <왕십리>의 해석을 놓고 벌어진 근년의 논란을 보라). 그는 <삼수갑산>에서 왜 ‘아하’ 대신에 ‘아하하’라고 했을까? 라는 식으로 물고 늘어지면, 이 민요조 시인은 졸지에 ‘숭고한’ 시인이 돼 버린다. ‘포스트모더니스트’ 히치콕이 놓이는 자리가 바로 그러한 ‘숭고한 대장금’의 자리이고 ‘숭고한 김소월’의 자리이다. 이제 문제는 그걸 얼마나 정교하게 말하는가이다. 지젝은 이렇게 놓인 히치콕을 ‘이론화’하기 위해서 프레드릭 제임슨의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3단계론의 틀을 빌려온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제임슨/지젝의 규정: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오늘날 속해 있는 엉망진창인 것, 즉 사물(Thing)을 ‘순화’시키려는 특수한, 그러나 실패해버린 노력으로 모든 내러티브의 격자를 환원시키는 트라우마적 사물에 대한 강박을 대표한다.”(13쪽) 전형적인 제임슨 번역의 문체이긴 하지만, 그래도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이 문장에서 ‘엉망진창인 것’을 받는 것은 (1)사물(Thing) (2)트라우마적 사물 (3)강박 중 어느 것일까? 우리말 화자라면 대부분 (1)번을 고를 것이고, 그게 우리말 문장에서는 자연스럽다. 그런데, 러시아어본을 보니까 (3)번이다.

그러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을 받는 술어가 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1) ‘엉망진창인 것’이고, (2) ‘강박’이다. 역자는 왜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지 않았을까? 다시 번역해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혼돈이며, 트라우마적 사물에 대한 강박관념인바, 이 트라우마적 사물은 그것을 ‘순화’시키려는 모든 내러티브적 시도를 매번 실패하게 만든다.” 요는 문장의 ‘단어들’을 번역하는 게 아니고, 그 문장에서 자신이 ‘이해한 바’를 번역하는 것이다.

이어서 지젝은 과연 히치콕은 리얼리스트인가, 모더니스트인가, 포스트모더니스트인가 라는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결론으로 이끄는) 본질적인 규정보다는 히치콕의 필모그라피 자체가 그러한 3단계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14-18쪽까지의 다섯 시기는 그러한 전제에서 구획된 것이다. 이 중 중요한 세 단계를 다시 반복하면, (1)<39계단>에서 <숙녀 사라지다>까지: 시련을 통해서 성숙/재결합하는 커플에 관한 이야기, (2)<레베카>에서 <염소좌 아래서>까지: 부성적 인물에 의해 트라우마를 입은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대개 두 남자 사이에서 분열돼 있다가 멋없는/선한 남자를 선택). (3)<스트레인저>부터 <새>까지: 정상적인 성관계에 대한 접근을 봉쇄하는 모성적 초자아를 가진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

미심쩍은 번역 한 대목. 17쪽에서 (3)번 시기에 대한 설명: “‘포스트모더니즘’, 형식적으로는알레고리적 차원의 강조로 요약되고(음악과 함께 전개되는 영화의 다이제시스적 내용 속에서 언표행위와 소비 과정 자체를 표시하는 것. <이창>부터 <사이코>에 이르기까지의 ‘관음증’의 참조 등), 주제는 정상적인 성관계에 대한 접근을 봉쇄하는 모성적 초자아를 가진 남자 주인공의 관점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니까 지젝은 1950년대와 60년대 초기 히치콕의 걸작들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해하는데, 그 근거를 다른 시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차별적인 ‘형식’과 ‘주제’에서 찾고 있다.

여기서는 ‘형식’을 부연설명하는 괄호안의 내용을 다시 읽어보기로 하자. “음악과 함께 전개되는 영화의 다이제시스적 내용 속에서 언표행위와 소비과정 자체를 표시하는 것.” 이게 무슨 뜻인지 누가 설명해 주실 수 있는지? ‘다이제시스적’ 내용이란 건 간단히 ‘스토리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역자가 친절하게 설명을 붙였지만, ‘언표행위’와 ‘소비과정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그건 역자가 간단한 수식어구 한두 개를 덧붙이는 데 인색했기 때문이다(원문에 its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언표행위’라고 옮긴 enunciation의 기본적 의미는 ‘발음’인데, 어떤 전언이 표현되는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영화가 언표되는 방식을 뜻하고.

‘음악과 함께 전개되는’이란 내용은 러시아어본에는 없는데, 문맥상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원문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걸 배제하고 다시 옮기면: “영화적 내러티브의 세계 안에서 영화적 언표행위와 그 소비 과정 자체가 지시된다. <이창>부터 <사이코>에 이르기까지의 ‘관음증’을 보라.” 알다시피, 영화의 소비 형식 자체가 관음증의 형식이다. 관객은 어두컴컴한 객석에 앉아 마치 문구멍을 통해서 몰래 엿보듯이 영화속 내러티브의 세계를 엿보는 것이다. 그러한 관음증의 형식이 히치콕의 걸작들에서는 영화적 내러티브 세계(다이제시스적 공간) 안에서 재현/지시되고 있다는 게 이 문장의 내용이다. 요컨대, ‘영화적’이란 말만 삽입하면,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었던 부분이다.

 

 



 

지나가는 김에 영화제목에 대해서. 17쪽의 <밧줄>은 <로프(Rope)>로 출시됐거나 방영된 거 같은데, <밧줄>로 표기하는 게 ‘관례’인지 모르겠다(우리식의 외화 작명방식을 보건데, <로프>가 <밧줄>로 번역/표기됐을 거 같지 않아서 하는 얘기다). 그리고, 18쪽의 <패밀리 플롯>은 정반대의 경우인데, 그게 ‘관례’인지 모르겠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가족의 음모>라고 해야 낫겠다. 영어 plot에는 있고, 우리말 ‘플롯’에는 없는 것이 바로 ‘음모’란 뜻이기 때문에. 이런 사례들은 종종 등장하는데, 62쪽에서 “어머니에 대한 맨 처음의 스케치”라고 한 것도 그 중 하나이다. 여기서 스케치는 물론 sketch를 옮긴 것인데, 이건 ‘초고(draft)’나 ‘초안’이라고 옮겨야 한다(“어머니에 대한 맨 처음의 스케치에서처럼 우리가 결코 볼 수 없는 존재이다”라는 게 말이 되는지?). ‘plot≠플롯’이듯이 ‘sketch≠스케치’이다. 음역한다고 해서 오역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18쪽에서는 세 시기에서 지배적인 주체성의 유형과 자본주의의 세 단계(자본주의-제국주의-후기 자본주의)에 대응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지적하고 있고, 19쪽부터는 (주체가 아닌) 대상(‘히치콕적 대상’)의 관점에서 이러한 양상을 재기술하고 있다. 이 내용은 그냥 쭉 읽어보면 된다. 좀 거리를 두고 읽으면 윤곽은 그려지니까. 단, 26쪽에서 괄호 안의 내용은 지젝의 것이 아니라 ‘히치콕 열애가들’을 비난하는 이들의 것이다. 그래서 사정을 정확하게 하려면, “전이적 관계의 징표에 불과하다”는 “전이적 관계의 징표에 불과하다고”라고 해줘야 한다. 그리고 각주 하나. 21쪽 각주9)에 크립키의 용어 ‘rigid designator’가 나오는데, 역자는 ‘엄격한 지명자’라고 옮겼다. 그거야 자유일 수 있지만, 내 기억엔 (확실하지 않지만) ‘고정 지시자’로 번역되었던 거 같다.

그리고 헷갈리는 디테일들. 19쪽에서 맥거핀의 사례로 ‘<39계단>에서의 군용 비행기 엔진의 공식’이 나오는데, 23쪽에서는 ‘<39계단>에서의 군용기 엔진 디자인’이라고 돼 있다. 그리고 그걸 73쪽에서는 ‘<39계단>에서의 비행기를 위한 계획들’이라고 옮기고 있고(설사 저자들이 실수로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이런 부분은 똑같게 옮겨줘야 한다). ‘공식’이기도 하고 ‘디자인’이기도 하며 ‘계획들’이기도 한 단어는 무엇일까? 내 짐작엔 design이고, 그건 아마도 ‘도면’으로 옮겨져야 할 거 같다. ‘엔진의 도면’.(<39계단>은 국내에 출시돼 있지만, 나는 미루어두다가 아직 보지 못했다).

그리고 <해외특파원>의 경우. 역시 19쪽에서는 맥거핀의 예로 ‘<해외특파원>에서의 해군조약의 비밀조항’이라고 돼 있는 걸 73쪽에서는 ‘<해외공작원>에 나오는, 방위조약에서의 비밀 절(clause)’이라고 해 놓았다. ‘특파원’이 ‘공작원’으로 변신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덕분에 400쪽에 있는 색인에는 빠졌더라도), ‘조항’이란 뜻의 clause를 문법용어인 ‘절’로 옮겨놓은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그걸 병기까지 해놓다니!). 같은 단어(blot?)를 옮겼을 ‘오점들’과 ‘얼룩들’도 혼용되고 있고.

조금 더 문제가 되는 사례들. 21쪽에서 세번째 종류의 대상, 실재적 대상에 대한 설명: “그것은 교환의 대상도 아니고 그저 불가능한 희열(주이상스)의 무언의 체현일 뿐이다.” 그런데 이게 바로 다음 쪽(22쪽)에서는 “즉 실재적인 것의 무감감하고 상상적인 대상화로서, 가능한 희열을 육체에 제공하는 하나의 이미지이다”라고 정반대로 옮겨지고 있다. “가능한 희열을 육체에 제공하는 하나의 이미지”는 “불가능한 희열(주이상스)을 체현/육화하고 있는 이미지”의 오역이다.

<의혹의 그림자>와 <스트레인저> 두 편의 영화를 분석하면서 ‘히치콕의 대상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돌라르의 글로 넘어가보자. 54쪽에서 “그것은 <흥겨운 과부> 왈츠인데, 춤추는 커플을 배경으로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그 음악이 처음 나오는 순간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말고 제쳐두자.”는 57쪽에 이 왈츠가 나오는 순간에 대한 내용이 나오므로 “잠시 제쳐두자”라고 해야 맞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결정타는 55쪽. ‘보편적 이중화’에 대한 일종의 아이러니적인 논평으로서의 핵심장면에 대한 묘사가 빠졌다. 그러니까 시계가 2시 2분 전을 가리키고 있는 ‘실외 네온사인’(그냥 ‘실외 사인’이 아닐 것이다)과 함께 ‘틸투(Till Two)’라는 바(술집)에서 일어난다는 이 핵심장면은 어디 갔는가? “이 바에서 찰리 삼촌은 브렌디 더블을 두 잔 주문한다.”라는 한 문장이 앙꼬 없는 찐빵처럼 누락됐다(어느 번역서에서건 누락도 흔한 것이지만, 이런 누락은 그냥 읽어도 ‘눈에 띄는’ 누락이다).

두 편의 영화에 대한 분석은 그런 대로 따라갈 수 있다. 영화를 보았다면, 더 재미있게 분석에 동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돌라르의 결론은 72-75쪽이다. 우선 맥거핀. “맥거핀들은 오직 그것이 의미화하는 것만을 의미화한다. 맥거핀들은 의미화작용을 자체로서 의미화한다. 실제 내용은 전적으로 비의미적이다.”(73쪽) 두번째 문장은 “맥거핀들은 의미작용 자체를 의미화한다.”로 옮기고 싶고, 마지막 문장은 (나라면) “그 실제 내용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라고 옮기겠다(‘비의미적이다(insignificant)’ 같은 걸 왜 ‘무의미하다’라고 번역하지 않는 걸까?).

74쪽에서 “그 열쇠는 남편이 자기 아내의 살인자에게 준 것인데 그로써 ‘너무 많이 알았던 남자’는 그의 잉여 지식에 의해 이해된다.”는 잘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다.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그로써 ‘너무 많이 알았던 남자’는 자신의 잉여적인 앎 때문에 체포된다(혹은 감금된다).”이다. 후자가 좀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75쪽. “라캉이 (프로이트와 하이데거를 따라) 물 자체das Ding라고 불렀던 것의 환기이다.”라는 것. 굵은 글씨로 강조까지 돼 있는데, 내 상식으론 프로이트적 사물(Freudian Thing)이라고 할 때의 그 the Thing(=das Ding) 아닌가? 그게 (칸트의) ‘물 자체’라고 번역되는 건지 의심스럽다. 라캉은 또 어느 구석에서 ‘물 자체’를 말했단 말인가?

한 가지만 더 지적한다. 187쪽. “앞 장면인 사격대회에서 어머니는 진흙 비둘기를 놓치고 그럼으로써 그 매혹적인 이방인이 남긴 강한 인상에 그녀가 동요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퀴즈. ‘진흙 비둘기’가 뭔지 아시나요? 이건 사격용어로 clay pigeon을 옮긴 것이다. 그런데, 사격에서 정말 ‘진흙 비둘기’라고 부르는지? ‘클레이 사격’을 ‘진흙 사격’이라고 하지 않는 걸로 봐서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그건 그냥 ‘클레이 피젼’인데, 짐작엔 ‘flying target’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정작 이 문맥에선 ‘클레이 피젼’이라고 옮기는 것도 부적절하다. 그냥 ‘표적’이라고 옮기면 된다. “사격대회에서 어머니는 표적을 놓치고…” 우리는 원저의 의미를 놓치고...

06. 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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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혹은 한국인의 귀에 가장 익숙한 러시아 노래는 무엇일까? 아마 '카츄샤' 같은 민요도 손에 꼽아봄직 하지만, 짐작엔 라슬 감자토프의 시에 붙인 곡을 알렉산드르 코브존이 부른 (<모래시계>의 주제가) '백학'(남성버전)과 알라 푸가초바가 부른 '백만 송이 장미'(여성 버전)가 아닐까 싶다. 물론 두 노래가 러시아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만, 상대적으로 더 사랑받는 것은 한국에서가 아닐까 싶고. 그 중에서도 이 글에서는 '백만 송이 장미'에 관한 얘기를 조금 다루기로 한다. 참고로, <굿모닝 러시아>(지호, 2004)에는 이 노래에 얽힌 사연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으며 나도 도움을 받았다. <노래로 배우는 러시아어>(문예림, 2003)에는 노래의 러시아어 가사와 그 번역이 실려 있으며, 이 노래 등이 포함된 CD가 부록으로 포함돼 있다.  

국내에서는 '백만 송이 장미'란 타이틀의 드라마도 만들어졌지만, 우선은 심수봉이 개사해서 부른 '백만 송이 장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절과 후렴의 가사는 이렇게 돼 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어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후렴)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있다네

그리고 이 노래의 원곡 가사는 대략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백만송이 장미 원곡'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시면 노래와 함께 원어 가사 등을 찾아보실 수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oIFmhye6fqw).

한 화가가 살고 있었네. 그에겐 집과 캔버스가 전부였다네.
화가는 꽃을 사랑하는 어느 여배우를 사랑했다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집과 그림들을 팔았고,
그 돈으로 바다만큼의 꽃을 샀다네.

아침에 일어나 창가에 서면, 그대는 아마도 정신이 혼미해지겠지.
꿈꾸는 듯 광장은 꽃으로 가득 찼다네.
어떤 부자가 이토록 놀라게 하는지?
그러나 창문 아래엔 가난한 화가가 숨죽이며 서 있다네.

너무나 짧은 만남이었고, 그녀를 태운 기차는 밤을 향해 떠나버렸네.
하지만 그녀의 삶엔 열정적인 장미의 노래가 있었다네.
화가는 외로운 삶을 살았지, 아주 불행하게...
하지만 그의 삶은 꽃으로 가득찬 광장이었다네.

(후렴)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붉은 장미를
창가에서, 창가에서, 창가에서 그대는 보고있지.
사랑에 빠진, 사랑에 빠진,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이
그대를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꽃과 바꾸어 버렸다네.

 : Алсу (Алсу) : Фотка N3 : Алсу (Алсу) : Фотка N2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알라 푸가초바인데, 러시아의 국민 여가수이다(젊은 여가수들 중에는 '알수'(1983- )가 있다. 아래 사진http://www.youtube.com/watch?v=2Mos7iGcqeo). 모스크바에 체류할 때 TV에서 몇 번 봤는데(더불어 언론에도 자주 등장한다) 체구에 걸맞게 괄괄하고 화려한 무대매너를 자랑하는 여가수였다. 조금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자신의 친구 아들과 결혼해서 한때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최근에 들은 바로는 이들 커플에 올초에 이혼했다고 한다).

'젊은 남편'인 필립 키르코로프 또한 가수이자 엔터테이너인데, 역시나 스캔들 메이커로서 재작년에는 자신의 발표한 앨범 홍보 인터뷰 중 한 여기자에게 폭언을 퍼붓는 바람에 법정소송에까지 몰린 적이 있었다(이 사건이 그해 연예계 최대 스캔들이었다).

이 '요란한 커플'에 관한 자료들을 검색하다가 발견한 글을 잠시 인용한다. <주간동아>(2001. 09. 27.)에 게재된 러시아 통신원의 보고이다. 비만과 관련한. '러시아 문화의 이해'라는 제목과 관련되기도 하므로 전문을 옮겨온다(이미지는 내가 집어넣은 것이다).  

-문명의 풍요와 더불어 찾아온 병’ 비만은 러시아도 예외가 아니다. 추위에 대항해 열량을 보존하기 위해 기름진 음식과 감자, 밀가루처럼 고칼로리 음식을 주로 먹는 식습관으로 유명한 나라다 보니 러시아인의 비만 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흔히 러시아 여성 하면 늘씬한 금발 미녀를 떠올리지만, 이는 사실 20대의 ‘빛나는 한때’일 뿐이다.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인은 총인구의 54%가 과다체중에 시달리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자본주의 체제가 정착하면서 러시아에서도 외양으로 사람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소비에트 시대 강한 여성상의 표본으로 받아들이던 ‘당당한 체구의 여성 노동자’는 미니스커트와 각선미로 중무장한 신세대 여성에 밀려 자리를 잃고 있는 것. 국민가수 알라 푸가초바가 50이 넘은 나이에 18세 연하의 남자와 결혼하면서 대대적인 주름살 및 지방제거수술을 받아 30대 외모로 거듭난 것 역시 무수한 사례 중 하나다. 이러한 세태에 힘입어 때를 만난 것은 피트니스 클럽. 지난 93년 최초의 클럽이 모스크바에 문을 연 이후 러시아 전역에서 800여 업소가 운영되는데다, 은행·석유재벌·대형유통회사들까지 시장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 ‘월드 클래스’ ‘플래닛 피트니스’ ‘핏 앤드 팬’ 등 유명 클럽의 1년 회원권 가격은 미화 3000달러를 넘는다. 3개월짜리(600~960달러 상당) 이하의 회원권은 아예 팔지 않을 정도로 이들 클럽은 전성기를 맞았다.

-회원권의 가격은 제공되는 서비스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 4000달러짜리 ‘핏 앤드 팬’ 클럽의 골드카드에는 심장질환 검사 2회, 에어로빅 강습, 트레이너의 개인 훈련, 사우나, 마사지, 자쿠지(거품목욕), 수영장, 일광욕은 말할 것도 없고, 유명 레스토랑과 미용실 할인혜택까지 포함한다. 다이어트 전문 컨설턴트와 상담해 피부 미용 등은 추가비용을 내야 한다. 그 밖에 요가·동양무술 코스도 인기 있는 옵션이다. 이들 피트니스 클럽은 자본주의 문화의 첨병답게 효율적인 마케팅 전략으로도 앞서간다. 낮 시간 이용자에게는 회비를 낮춘다거나 대기업 직원들과 제휴해 단체 할인혜택을 주는 것은 고전적인 기법. 어린이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 청소년 전용 헬스장도 있다. 클럽 내부에 레스토랑과 바, 옷가게, 미용실 등을 설치해 살도 빼고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원스톱 서비스 체제’를 구축한 경우도 있다. 물론 이 클럽들은 수백 달러의 월급으로 연명하는 대다수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한편 거센 다이어트 열풍 뒤에는 비만을 여유로 생각하는 ‘만만디족’도 있다. 날씬하지 않음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찾고 그것을 자신의 모습으로 인정하며 자부심을 갖는 사람이다. 러시아에는 ‘뚱보’ 클럽을 결성해 ‘풍요로운 체구’로 인해 침해당한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운동도 전개한다(http:// fatgirls.narod.ru/fatclub). 심지어 체중 130kg이 넘는 무용수로만 이루어진 발레단도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이 ‘뚱보 발레단’ 단원들은 신체조건을 극복하며 아름다운 발레를 하는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날씬함이 곧 경제적 여유를 상징하게 된 자본주의 러시아. 그 속에서도 ‘살빼기에 집착하다 건강 버리고 마음 상하느니 있는 그대로 만족하고 살겠다’는 이들의 주장이 돋보이는 것은 분명 우리 나라나 미국과는 사뭇 다르다. 이는 가난한 서민의 일종의 항의 표시일까, 아니면 러시아인의 낙천적인 본성 때문일까. 

아마도 짐작에는 '낙천적인 본성' 때문인 듯하다. 내지는 체중 정도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백만 송이 장미'로 돌아오면, 러시아어 노래는 실제의 사랑 이야기에 바탕을 둔 거라고 한다. 그 가난한 화가는 그루지야 출신의 니코 피로사니(피로스마니슈빌리; 1862-1918)이고, 비쩍 마른 간판쟁이 화가였던 그가 30대 중반에 사랑했던 젊은 여배우(마르가리타?)는 가사에서처럼 잠시 그의 구애에 감동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돈많은 남자에게로 가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아홉 켤레의 구두처럼 니코에게 남은 것은 '백만 송이 장미'의 추억. 그는 쓸쓸하게 여생을 살다가 56살에 세상을 뜬다. 한국식 가사에 따르면 그의 별나라로 떠난 것. 그의 그림 몇 점을 감상해보기로 한다.

 

마지막 그림은 라일락과 딸기를 그려놓은 듯하다. 그의 그림들 중에서는 굉장히 드물게도 뭔가 따뜻함이 배어나는 것도 같다. 최소한 '백만 송이 장미'보다는 덜 안쓰럽지 않은가? 여하튼 니코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신의 삶 전체를 꽃과 바꾸어 버리는 일은 자못 삼가해야겠다(내일이 '화이트데이'로군).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06. 0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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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죽음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6-04 01:22 
    몇 시간 전 일이지만 어제는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의 현대철학강의 종강일이었다.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과 비평에 관해 다루고 강의 뒤에는 몇 분과 간단한 뒷풀이를 가졌다. 어제 아침에서야 서울에서 선거 '패배' 소식을 접하고 수도권의 경우 고작 0:3(예상)에서 1:2(결과)란 말인가 싶었지만, 밤에 귀가하면서 한겨레를 보다가 2% 부족한 승리를 '관대한 승리'로 간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twoshot 2006-03-13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위에 대항해 열량을 보존하기 위해 기름진 음식과 감자, 밀가루처럼 고칼로리 음식을 주로 먹는 식습관으로 유명한 나라다"...비만의 원인, 이제야 알겠네요.
 

다 완성해놓고 '등록하기'를 누르니까 '로그인' 화면이 뜬다. 그래서 날려버린 게 이 글인데, 사태를 대충 수습해서 다시 마무리짓기로 한다(별 재산도 없는 내가 성질 부린다고 누가 알아주겠는가?). 내용은 세계 100대 부자들에 관한 것이다. 어제(3월 11일) 아침 신문에 '포브스'지에서 이번에 발표한 세계 100대 부자 랭킹에 삼성 이건희 회장 일가가 82위에 올랐다는 기사를 읽은 게 발단이었다.  

 

 

 

 

그에 따르면, ‘2006년 10억 달러 이상을 보유한 억만장자’는 793명이고 이 회장 일가의 순자산은 전년보다 23억 달러 늘어난 66억 달러로 지난해 122위에서 40계단이나 뛰어올라 100대 부호에 들었다. 1위는 12년째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그리고 ‘투자의 귀재’라는 워렌 버핏이 2위란다. 지난해 세계 증시 호황에 힘입어 재산 10억 달러 이상 부자 수는 102명이나 늘었다는데(10억원이 아니라 10억 달러가 이젠 부의 기준으로 정착된 모양이다), 특이사항은 신흥경제성장국 브릭스(BRICs) 국가들, 즉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에서 부자들이 크게 증가한 점. 인도는 10명 늘어난 23명, 러시아도 7명을 새로 진출시켜 33명, 브라질도 두 배인 16명을 이번 명단에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검색해본 것이 러시아 관련 기사였고, 코트라 홈피에서 관련 내용을 찾았다. 이미지들을 덧붙여서 기사를 정리해본다: "4월 22일자 월간지인 ‘포브스’ 러시아판 특별호에 2005년 러시아의 100대 부호 명단이 개재됐다. 이에 따르면, 지난해보다 러시아의 100대 부호 평균 연령은 4살 낮아져 44 이며, 이들의 총 자산 합계액은 40억 달러 늘어난 1410억달러에 달하나, 오히려 억만장자의 수는 지난해 보다 6명 줄은 30명으로 집계됐다." 

"러시아의 가장 부자로는 러시아 추꼬트카 주지사겸 석유재벌이며 영국의 명문 프로축구 첼시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38, 사진)가 자산 평가액 147억 달러를 기록하며 선정됐는데, 그는 또한 지난 ‘포브스’ 미국판 3월호 세계 부호 명단 순위에서 21위를 차지한 바 있다." 나이가 나보다 더 먹지도 않은 이 '신종 러시아인'이 러시아 최고 갑부이다. 아래 사진은 7천 2백만 파운드(1,440억원 가량)에 샀다는 그의 요트이며 대공방어 시스템까지 갖추고 있고 전직 영국군 특수부대원 50여명이 경호하고 있다고. 그에 관한 내용은 조재익, <굿모닝 러시아>(지호, 2004)를 참조할 수 있다.

이어서 "지난 해 자산 평가액 152억 달러를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으나, 현재 세금 포탈 등의 혐의로 고초를 겪고 있는 유코스의 미하일 하다르콥스키(*호도르코프스키, 아래 사진) 전 회장의 자산에 대해 포브스는 7.6배 감소한 20억 달러로 평가 21위라고 발표다. 그러나 최근 언론센터에서는 미하일 하다르콥스키 재산에 대해 1억 달러가 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하다르콥스키의 공식 재산 평가액에 대해 엇갈린 의견이 나오고 있다." 현재 그는 시베리아의 한 형무소에 수감돼 있는 걸로 안다. 역시나 <굿모닝 러시아>에서  신흥 올리가르히의 이 대표주자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어볼 수 있다.

1. Mikhail Khodorkovsky
Net worth: $ 15.2 billion
Source: oil
Company: Yukos
Age: 40
/ Photo: Vyacheslav Kochetkov, Moscow News Picture Agency

그리고, "러시아 100대 부자 중 여성으로 유일하게 명단에 오른 것은 모스크바 시장 유리 루스코프(*루쉬코프)의 의 부인 옐레나 바투리나로 지난해 3억 달러의 재산 증가를 보여 현재 14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63년생이니까 그녀의 나이 마흔 셋이다.

35. Elena Baturina
Net worth: $ 1.1 billion
Source: construction, construction materials, petrochemicals
Comment: wife of Moscow mayor Yuri Luzhkov Age: 41
/ Photo from MN Archive 

"한편, 작년까지만 해도 러시아 부호들은 철강, 원유, 다이아몬드 등 주로 천연 자원에 의존했으나, 올해의 부자 100인의 명단에 유통 체인점 거물, 햄 제조업체 사장, 자동차 딜러, 심지어 슬롯머신 운영주가 신흥 부호로 선정됐는데, 이는 필수품에 대한 수요에서 생활 수준 상승에 따른 수요의 다변화와 유통의 활성화, 욕구의 다양화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런 소개내용을 접하니까 재작년 5월쯤에 써둔 글이 생각이 나서 여기에 옮겨둔다.

지난주(*2004년이다) 목요일자 (호텔 등에 무료로 배포되는 영자지, 35,000부 발행)와 금요일자 <이즈베스찌야>에는 <포브스>지 러시아판이 보도한 러시아의 ‘부자들’ 랭킹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내용을 종합하면, 러시아에는 36명의 억만장자(‘백만불’이 부의 지표이던 시절은 이미 지나간 듯하다. 억만장자는 'billionaire'인데(요즘 '백만장자'는 부자축에도 못 드는 모양이다), 산술적으로는 재산이 10억불 이상인 사람을 뜻하지만, 10억만장자라고 부를 순 없으므로, 그냥 ‘억만장자’라고 해두자. 원화로는 1조 2천억 이상의 재산가들을 말한다)가 있다(미국엔 277명). 이들의 재산은 러시아 GDP(국민총생산)의 24%, 거의 1/4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나다(미국의 경우는 6%).

그건 그만큼 빈부격차가 심하며 부가 편중돼 있다는 뜻도 된다(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한 지 아직 15년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들의 재산은 무섭게 증식되고 있는데, 지난 97년 조사 때의 경우 억만장자는 4명에 불과했었다. 이 부자들의 2/3는 석유나 가스 같은 자연자원을 채굴 수출하는 회사를 거느리고 있다(지금의 러시아는 석유와 무기 수출로 먹고 산다, 얼마전 들은 바로는 최대 산유국이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은 모스크바에 거주하고 있는바, 모스크바는 세계에서 억만장자 밀집도가 가장 높은 도시이다! 그대, 억만장자와 결혼하려는가? 일단은 모스크바에 와서 죽치고 있어 보기를...



이런 대동소이한 내용을 전하면서도 두 신문의 포커스는 각기 다른 곳에 맞춰져 있었는데, <모스크바 타임즈>는 152억불의 재산을 갖고 있다는 러시아 최고의 부자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가 아직 감옥에 있다는 소식을 그의 사진과 함께 보도하고 있고(탈세혐의로 체포되어 지난해 10월 25일부터 철창에 있다), <이즈베스찌야>는 러시아 억만장자 중 유일한 여성인 옐레나 바투리나를 두 장의 사진과 함께 한 면 전체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러시아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호도르코프스키란 이름이 낯설지 않을 텐데, 그는 최근에 부도설까지 나돌고 있는 거대 기업 '유코스'의 젊은 (전직)총수로서 정치적 야심까지 품고 푸틴의 재선가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권력의 ‘철퇴’를 맞았었다(비슷한 케이스로 현재 런던에 ‘망명’중인 한때의 최고 부자 베레조프스키는 이번에 47위로 순위가 떨어졌다).



11억 달러의 재산으로 전체 35위에 오르면서 러시아 여성 최고 갑부에 등극한 옐레나 바투리나(1963- )는 20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인테코'그룹의 총수인데, 그녀가 사업을 시작한 건 1991년 불과 25세의 나이 때였다). 그녀를 아내로 둔 ‘운좋은’ 남자는 현 모스크바 시장인 유리 미하일로비치 루슈코프이다(그는 대권에의 야심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사진). <이즈베스찌야>에 따르면, 그들이 처음 만난 건 1987년이고, 결혼한 건 1991년이다. 바투리나보다 30년 연상인 루슈코프의 나이 55세 때이고, 그로선 재혼이었다. 이들은 현재 12살과 10살 난 두 딸을 두고 있다. 덧붙여, 바투리나가 좋아하는 색깔은 에머랄드색이고, 좋아하는 작가는 미하일 불가코프와 알렉세이 톨스토이이다(레프 톨스토이 말고)…

이상, 나와 ‘무관한’ 얘기를 왜 시시콜콜 늘어놓느냐고? ‘포브스’의 부자 랭킹 관련 기사를 읽은 후에 우연히 옛날에 쓴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한 몇 가지 신화’란 글을 읽다가 앙드레 지드의 소설 <잘못 결박된 프로메테우스>(1899)의 이야기가 문득 ‘현실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의 발단을 다시 옮기면 이렇다: “드라마가 아니라 우화적 소설인 이 작품은 1890년대 파리의 한 다방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제우스(=죄스)는 부유한 은행가(!)로 등장하고, 프로메테우스(=프로메떼)는 무면허 성냥 제조 혐의로 구속된다. 이야기의 발단은 대부호인 제우스가 아무런 이유없이 한 사람(꼬클레스)의 따귀를 때리고 다른 한 사람(다모클레스)에게는 500프랑의 돈을 익명으로 부친 데서 비롯한다.”



그러니까 ‘돈이 말하는(money talks)’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거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대행하는 이들이 바로 ‘대부호 제우스’와 같은 ‘억만장자들’인 것이다(사진은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 그들의 행위는 아무런 동기나 이유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상적’인바, 기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억만장자’라는 기호는 비동기적인, 즉 완전히 자의적인 기호이다(이들은 발을 땅에 딛고 살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의 기호체계로서의 이들의 행동양식은 동기적인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평범한 인간들’ 혹은 ‘소금이나 받아먹는’ 샐러리맨들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다).

왜 한 사람은 따귀를 때리고 다른 한 사람한테는 거액을 적선(기부)하는가? 왜 노동자들의 임금은 떼먹으면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은 수십 억씩 내는가? 평생 먹고 남을 재산을 쌓아놓고도 왜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는가? 이런 걸 ‘인간들’이 이해하려고 하면 머리만 혹사시키게 된다. 탈세라면 합법/불법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에게 몇 백 만원짜리 장난감을 턱턱 사다주고, ‘언니들’한테도 팁을 몇 천불씩 콕콕 찔러주는 ‘몰상식’을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우리 주변에도 백만장자급의 유사-제우스들이 더러 있다) 요는, 그들이 ‘우리들’과는 격이 다르며, 종이 다르다는 것. 왜 아니겠는가? ‘비인간적인’ 그들은 신이거늘!(사실, 자신이 벌었는데 다 탕진할 수 없는 재산이란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그게 '비인간적인' 자본(capital)과 '인간적인' 재산(property)의 차이이다. 재산이란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 만큼의 소유를 뜻한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의 신에 대한 관심은 현대인들의 부자에 대한 관심과 등가이다. 오, 불쌍한 호도르코프스키, 감옥에 갇힌 거부(巨富)여! 그는 최고신(권력=부이다!)에 반항하다가 벌받고 있는 현대판 아틀라스요, 시지프스가 아닌가? 미국의 사회학자 베블렌은 이 신들을 일컬어 ‘Leisure Class’, 즉 유한계급이라고 불렀는데(한 국역본은 ‘한가한 무리들’이라고 옮겼다. 이 ‘한가한 무리들’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한심한 무리들’이다), 이때의 레저는 노동의 반의어이다. 그들의 생은 도대체가 무슨 ‘겨를’이 없는 노동자들, 혹은 ‘인간들’의 생과는 달리 온통 ‘남은 겨를’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니, 신들의 자녀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여생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IMF때 베스트셀러였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 따르면(물론 내가 이 책을 읽은 건 아니다.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혐오스러운데, 사실 모든 아빠는 자녀들을 거느린 ‘부자 아빠’이면서 한편으론 자신을 자녀들에게 한없이 부족하게만 여기는 ‘가난한 아빠’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르는 기준을 간단하다. 노동을 통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이 돈을 벌게 하거나(가령 주식이나 이자 소득 등) 한번의 노동으로 지속적인 소득을 얻어내면(가령, 특허나 인세 소득) 부자이고, 주로 노동을 통해서만 먹고 살아야 하면 가난한 자이다. 때문에, 부유할수록 한가하고, 가난할수록 몸으로 때워야 한다.



 

 

 

부자들도 열심히 일하지 않느냐고? 그리스의 신들은 맨날 놀기만 했던가? 그들도 열심히 수작을 걸고, 참견하고, 바람피고, 심술부리고, 진수성찬을 먹어대면서 굉장히 바쁘게 지냈다. 하지만, 그건 ‘신들의 일’이다! 해서, 거꾸로 말하면, 그들은 아무런 삶도 살지 않는다. (인간적) 삶의 근간은 노동이며 고통이기 때문이다. 여가를 꿈꾸고, 행복을 꿈꾸는 것은 삶의 현실, 혹은 인간의 조건이 (여가가 아닌) 노동이고, (행복이 아닌) 고통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다 아는 바이고, 또 곧 알게 되겠지만 그건 ‘막간의 행복’이다. 당신은 아직 젊은가? 곧 늙고 병들어 죽으리라. 때문에 신화 속 제우스가 이런 인간들을 별 볼일 없게 생각한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건, 오늘날의 ‘제우스들’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심한 것들’ 같으니라구!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잠시 신적인 관점에 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점들에 갈 때마다 책의 목차보다도 표시된 가격이 얼마인지를 먼저 확인하는 나는 스스로 얼마나 한심한 것인지. 책을 집었다가 놓았다가 반복하면서 열심히 머릿속으로는 이 달에 탕진한 지출이 얼마인지를 따져보는 나는 얼마나 가련한 것인지. 그러면서 결론은 어디 (제우스의) ‘돈벼락’이라도 좀 떨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어디서나 마찬가지겠지만, 모스크바에서도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듯 한심하게 ‘노르말나’하고, 가련하게 ‘노르말나’하다. 어이, 서울에 있는 ‘인간들’, 노르말나하게 잘 있는지?(*나도 지금은 서울에 있다.)

06. 03. 11 - 12.

P.S. '한가한 무리들'과 '한심한 무리들'의 경계가 아직 모호하지 않다면, 계급투쟁은 지나간 년대의 구호가 아니다. 그건 자본의 윤리와 무관하다. 즉, '도덕적인' 한가한 무리들과 '부도덕한' 한심한 무리들이라는 이차적 범주가 가능하지만, 그것은 이차적이다. '사촌이 땅사면 배아픈' 인간들이 특별히 도덕적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투쟁의 주체는 바로 그런 오만하고 이기적인, 그래서 '너나 내나'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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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12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노르말나'하게 잘 있어서 신들의 삶에는 관심을 가질 틈이 없답니다-.-+

로쟈 2006-03-12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그렇죠.^^
 

 

 

 

 

'히치콕의 서스펜스'는 프랑스의 영화이론가이자 시나리오작가에 감독 겸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는 파스칼 보니체르(보니체)의 '고전적인' 히치콕론으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의 제1부 제1장으로 번역/소개돼 있다.

보니체르의 책으론 그밖에 <비가시 영역: 영화적 리얼리즘에 관하여>(정주, 2001)와 <영화와 회화>(동문선, 2003)가 더 번역돼 있지만, 전자는 이미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이고 후자는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는 책이다(나는 정신건강을 위해서 국역본에 아직 손대고 있지 않다). 나는 영역본이 있나 찾아봤었지만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해서 아무리 저명한 이론가라고 해도 보니체르는 당분간 '그림의 떡'이다. 이 '히치콕 서스펜스'에 대한 나의 간단한 정리는 역시 재작년 6월초에 작성된 것이며, 몇 개의 이미지들을 첨가해 창고에 넣어둔다.

'히치콕의 서스펜스'는 (내가 주로 참조했던) 러시아어본에는 간략하게 요약만 돼 있고, 빠져 있다. 해서, 흥미로운 내용이지만, 미심쩍은 부분들까지 다 카바하면서 읽지는 못했다(나중에 시간이 되면 영어본과 대조해서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보니체르는 단적으로 히치콕이 발명해낸 서스펜스를 작동시키는 대상이 ‘응시’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응시는 이 책 전편에 걸쳐서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이기도 하다. 보니체르의 글이, 시기적으로도 앞서지만, 책의 머리에 놓여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32쪽. “마치 말라르메가 보들레르의 시를 ‘속이 비게 파냈다’고 주장했던 만큼이나 히치콕은 그리피스에게서 물려받은 영화적 추격을 ‘파냈던’ 것으로 보일 것이다.” 원문이 없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일단 ‘속이 비게 파냈다’라는 건 속된 말로 (어떤 가능성의) ‘끝장을 보다’란 뜻이겠다. ‘영화적 추격’은 물론 ‘영화에서의 추격장면’이다. 그러니까 히치콕이 이 영화적 ‘추격장면’ 찍기의 달인이란 얘기이다. 문제는 병렬적인 두 문장에서 ‘주장하다’와 ‘보일 것이다’란 두 술어가 잘 호응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때문에, 번역문은 우리말 문장으로선 부자연스럽다. 문법적으로 ‘주장하다’에 호응하는 것은 ‘파내다’이지만, 이 경우는 의미상의 호응관계가 맞지 않게 된다. 매끄럽게 하려면, ‘주장했던’을 빼야 한다. 그래야, “마치 말라르메가 파낸 것만큼 히치콕도 파낸 것으로 보일 것이다”란 핵심-전언이 전달될 수 있다. 이런 문장들을 허용하기 시작하면, 번역의 통사론은 무너진다.

그리고 33쪽. 응시는 영화적 촬영술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그것은 1895년 영화의 탄생 이후 스펙터클에 사로잡혀 있던 초기 영화들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었다. “불안과 응시의 편집은 아직은 알려지지 않았던 촬영술적 에덴 동산의 결실들로 보인다.” 여기서 ‘결실들’은 성경에서의 선악과를 가리키므로 ‘열매들’이라고 옮겨야 할 것이다. 이런 건 사소하지만, 하나 둘 쌓이게 되면, 미숙함의 상징이 된다. 아무튼 전환점은 1915-20년에 찾아오게 되는바, 그리피스에 의해서 비로소 클로즈업과 편집이 도입되며, 보니체르는 이것을 영화사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이에 비하면, 토키, 즉 유성영화의 출현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라고 그는 주장하는데, 동의할 만하다.



히치콕이 등장하는 건 이러한 배경에서인바(그리피스라는 배경. 사진은 D.W. 그리피스), 그는 영화적 의미작용에서의 이러한 혁명으로부터 가장 논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낸 감독(filmmaker)이기 때문이다(물론 거기에 대응할 만한 영화사적 인물로 러시아에는 에이젠슈테인이 있다. 그러니까 히치콕과 에이젠슈테인은 그리피스의 두 적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후의 분석은 왜 보니체르의 일급의 영화이론가인가를 잘 보여준다.

영화상의 혁명 또한 “다른 모든 혁명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그리고 죽음의 무대화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는 통찰! “죽음, 살인, 범죄의 무게는 오직 응시의 근접성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 바, “히치콕이 자신의 영화에서 해낸 모든 것은 무대화와 관련하여, 범죄가 폭로해낸 응시 기능의 최선의 가능한 사용법을 만들어낸 것이다.”(36쪽) 보니체르는 뤼미에르의 한 초기 단편 영화(라기보다는 스케치)를 히치콕이라면 어떻게 찍었을까를 상상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자 한다. 아래 사진은 뤼미에르 형제.


즉, 공원에서 한 병사가 유모차를 끌고가는 소녀(혹은 유모)를 유혹하는 뤼미에르의 스케치가 히치콕식의 극(fiction)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스케치 ‘앞에다’ 그저 하나의 범죄를 삽입하기만 하면 된다. 가령, 이 유모가 어떤 아이를 강물에 빠뜨려 죽인다든가 하는 장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뤼미에르의 이 ‘한가한’ 스케치는, 그 자체로는 동일한 시퀀스라 하더라도, 돌연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로 탈바꿈하게 된다.

즉 “우리가 유모차 속에서 옹알이하는 아기를 볼 때, 병사가 유모를 유혹하려고 주위를 돌며 익살을 부리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유모가 바보같이 웃으며 엉덩이를 흔들 때 강렬한 공포감이 그 장면의 명백한 의미를 훼손시키고 그 모든 기호들을 왜곡시킨다.”(38쪽) 여기서 ‘명백한 의미’는 아마도 ‘manifest meaning’을 옮긴 듯한데, 보다 적절한 역어는 ‘명시적 의미’이며, 기호학에서는 외연적 의미(denotated meaning), 혹은 디노테이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장면의 ‘지시적 의미’이며, 일차적인 의미작용의 결과이다(즉, 옹알거리는구나, 익살을 부리는구나, 흔들어대는구나).

그런데, 우리가 이 유모의 ‘전과’를 알고 있을 경우, 이 시퀀스의 이러한 ‘순진함’은 상실된다. 이 장면에 대한 ‘현실감(impression of reality)’은 이차적 수준, 즉 내포(connotation)의 수준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38쪽) 여기서 ‘내포’적 의미는 외연적 의미의 짝인바, 이차적 의미작용의 결과를 말한다. 즉, “이 아기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란 명시적/외연적 의미가 “이 사랑스러운 아기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는가”라는 내포적/함축적 의미로 전환되는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가? 그것은 유모의 ‘전과’를 알고 있는,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관객의 ‘응시’이다. 그런 앎이 여기서는 하나의 허구적인 드라마를 구성하는 오점(stain), 혹은 얼룩(blot)으로서 기능하며, 영화의 자연스런 질서를 탈구시킨다. 가장 히치콕다운 영화들은 그러한 오점들을 둘러싸고 조직된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응시를 유발하는 오점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구체적인 사례들은 39쪽 참조) 이 “오점을-만드는-대상이란 문자 그대로 말하면 자연을 거스르는 대상이다.”(41쪽)



40쪽에서 보니체르는 <북북서로 기수를 돌려라>에서의 예를 들고 있다.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캐플런을 만나기로 했던 케리 그랜트가 자신을 타겟으로 공격하는 비행기와 대면하게 되는 장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나중에 더 가까이 다가와 점점 커지다가 이윽고 프레임 전체를 채우게 될 이 멀리 있는 작고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이형(anomaly)에 직면한 케리 그랜트를 남기고.”란 번역에서 ‘anomaly’는 ‘이형’(이건 생물학에서 쓰는 말이다)이 아니라 ‘이상한 물체’라고 번역하는 게 낫겠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건 파종용 비행기이다.

보니체르의 요점을 공식화하면, <히치콕=뤼미에르+오점>이 된다. 이 공식에서 오점은 응시를 불러오게 되는바, <히치콕=뤼메에르+응시>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이 응시가 히치콕의 서스펜스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히치콕의 서스펜스의 본질은 에로티시즘이며 히치콕의 편집은 에로틱한 편집이다.”(45쪽) 이후에 보니체르는 여러 쪽에 걸쳐서 히치콕 영화에서의 커플들을 분석해나가며, 심지어 히치콕 자신의 청혼 경험까지 들춰낸다.

그에게서 시간의 ‘주관적 연장’, “시간의 점성은 에로티시즘과 결부되어 있으며 사건을 유예시키고 필연적으로 교란하는 결정 불가능성 속에서 성애적이게 된 시간과 관련이 있다.”(51쪽)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서스펜스란 공중으로 던져진 동전이 떨어지기까지의 ‘성애적인 유예’라는 것. “히치콕의 터치는 기껏해야 패러디나 패스티시화할 수 있을 뿐이며, 필연적으로 모방불가능”(52쪽)한 이유가 히치콕의 이 ‘에로티시즘’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상이 내가 읽은 '히치콕의 서스펜스'이다.

06.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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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3-12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치콕의 오점, 응시가 그 본질적인 면에서 왜 갑자기 에로티시즘으로 연결되는 것인지 고리를 모르겠네요.

로쟈 2006-03-12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역본만을 참조해서 정리했던 글인데, 자세한 건 영어본과 대조해서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