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욱 교수의 "한나 아렌트의 판단이론과 의사소통적 합리성", 사회와철학연구회, <한국사회와 모더니티>(이학사, 2001)를 (오래전에) 정리한 것이다. 참고로, 국내에서 아렌트에 관한 논문을 활발하게 쓰고 있는 연구자들은 김비환, 김석수, 김선욱, 서유경 등 4-5명 정도이다. 김선욱은 아렌트와 하버마스의 정치철학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소장연구자이며 <칸트 정치철학 강의>의 역자이다. 최근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교양서 <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자음과모음, 2006)을 출간한 바 있다. 참고로, 아렌트의 주저 <전체주의의 기원>(1951)은 이진우 교수 등의 번역으로 조만간 역간될 예정으로 안다.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정치 현상에서 이론적 논의를 시작하는 현상학적 태도를 취한다. 아렌트는 이성적 접근, 도덕적 접근 등은 정치영역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법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서 정치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정치란 인간의 존재조건으로서의 다양성 혹은 복수성(human plurality) 때문에 존재하는 공적 영역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종래의 정치철학은 이성 개념을 핵심으로 사용하여 정치문제에 접근함으로써 인간의 복수성을 억압하는 경향을 보여왔다는 것이 아렌트의 비판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세 가지 유형, 즉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한다(<인간의 조건> 참조). 노동이란 우리의 신체의 유지를 위한 신진대사에 필요한 소비의 대상을 마련하는 활동을 말하고, 작업은 보다 항구적인 물건을 만들어 생활에 도움이 되게 하는 활동을 뜻한다. 반면에 행위란 자신의 모습을 공적인 자리에서 드러내며 자신의 개성을 알리려는 시도인데, 이러한 행위가 바로 정치행위의 핵심이다. 하지만, 플라톤 이래의 서양정치철학사에서 이러한 정치의 특성이 적절하게 고려되지 못했다. 그것은 정치에 대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차이에서 확인된다.

소크라테스는 의견들이 경쟁하는 정치 영역을 염두에 두었던 반면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은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기초 아래에서 정치적 문제들을 재단할 것을 주장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서양철학은 관조적 삶을 활동적 삶보다 우위에 두었고, 이 양자가 양립불가능하다고 주장해왔다. 플라톤식으로 철학적 이념이 정치영역에 부과되면, 언어는 더 이상 개성을 드러내는 기능을 하지 않게 되고 단지 주어진 철학적 이념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즉 언어적 행위(action)가 단순한 기능적 작업(work)의 차원으로 전락하는 것이다.(아렌트의 유명한 전체주의 비판은 이러한 문제의식과 직결된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국가가 어떤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복수성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아렌트가 지적한 정치영역 내에서의 철학적 태도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정치문제에 있어서의 이성이나 합리성의 기능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의미한다. 이성은 정치영역에서 의견의 복수성을 파괴하는 기능을 할 것이고, 인간의 기본조건인 복수성의 파괴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아렌트는 이렇듯 서양의 정치철학을 거부했지만,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정치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것은 <판단력 비판>에서 다루어지는 인간이 지적 존재나 인식적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사회 가운데 살고 있는, 복수의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때문에 자신의 독특한 정치 개념에서 중요한 개별자, 개별자를 다루는 정신능력으로서의 판단력, 사교성 등의 개념을 다루고 있는 <판단력 비판>을 아렌트는 자신의 정치사상을 배양시킬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장소로 생각했다.

우리는 취미판단을 내릴 때 다른 사람과 공통적이라는 느낌에 바탕을 둔다. 이처럼 다른 사람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감각을 공통감각(common sense)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달리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 즉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에 어울리게 해주는 별개의 감각"을 의미한다. 이 공통감이 판단의 소통가능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되며, 우리로 하여금 의사소통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해주는 것이다.



아렌트에게서 정치문제에 대한 목적합리성의 작용은 거부되지만, 하버마스(1929- )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아렌트의 판단이론과 합치될 수 있다. 아렌트가 판단을 통해 타인의 동의를 구할 때 전제하는 요소가 하버마스가 설명하는 의사소통의 가능성의 조건과 겹치며, 아렌트가 판단의 소통가능성의 근거로서 얘기하는 공통감 개념은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타인과의 상호관계 속에서의 언어학습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간의 차이도 분명한데, 하버마스의 이론이 어떻게 합의가 가능한가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에 아렌트의 정치사상은 개성의 표출과 복수성의 인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양자는 언어의 기능에 주목하여 의사소통 가능성에 착안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각각 공통성과 특수성이라는 정반대의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비교에서 드러나는 아렌트 정치사상의 특징은, 판단이론이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합의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21세기 문화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효과적인 접근법을 하버마스보다는 아렌트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의 핵심은 서로 다르면서도 소통가능성이 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 자신은 문화개념과 판단이론을 적극적으로 연결하지는 않았으나, 문화적 차이가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는 국제관계가 정치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한 바 있다...

06. 0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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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3-24 18:50   좋아요 0 | URL
'늘'은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가끔'만 기억해 주십시오.^^

이리스 2006-03-24 22:06   좋아요 0 | URL
에.. 그럼 이따금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앗.. ^^;;

마늘빵 2006-03-25 00:21   좋아요 0 | URL
로쟈님 또 퍼갑니다. ^^

2006-03-25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3-25 13:54   좋아요 0 | URL
**님/ 예, 들어오긴 했는데, 계속 버벅대서 (바이러스)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문의해주신 '예술공론장'은 말이 됩니다.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지는 보다 구체적인 해명이 있어야 될 거 같구요. 다만, 맨마지막 문장 정도가 저에겐 좀 모호합니다. 예술의 사회적 실천모델이 '예술공론장'으로 규정된다고 해서, 그 규정가능성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구원과 해방'이 발견될 수 있는 것인지. 좀 건너뛰는 내용이 아닌가 싶은데, 요약문이라 뭐라 말씀드리기가 곤란하네요.^^

twoshot 2006-03-25 16:29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퍼갑니다~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에 관한 페이퍼를 두어 번 올린 바 있는데, 관련기사가 눈에 띄어 다시 옮겨둔다. 하던 일이니 계속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모종의 책임감에 떠밀려서. 일단,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란 제하에 오르는 무대 소개.

한국일보(06. 03. 23)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 무대에 오른다. 27일 대학로 라이브소극장에서 열리는 ‘제1회 문학 나눔 콘서트’. 새로운 시 세계를 선보이며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시인 강정, 황병승, 김민정씨가 나와 자신의 삶과 문학 이야기를 나눈다. 인디록밴드 ‘모레인’이 이들의 시와 호흡을 맞춰 노래를 부르고, 연극연출가 박정의(극단 초인)도 배우들과 함께 시를 테마로 한 퍼포먼스를 선뵐 예정이다. 진행은 소설가 이명랑씨가 맡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고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 사이버문학광장이 주관하는 이 행사는 문학 작품을 책 바깥으로 끌어내 작가와 독자가 서로 소통하도록 하기 위해 기획됐다. 첫 회 참가 시인들은 서정과 서사, 뚜렷한 시적 메시지 등 전통적인 시의 소통 구조를 배격하는 대신 내면에 밀착된 언어에 천착해온 이들이다. 이들을 두고 시인 강정은 “그들은 애당초 공공의 광장이란 걸 믿지 않”으며 “그 허물어진 공간을 제 멋대로 부유하며 (바퀴벌레들처럼) 자신들만의 진지하고도 즐거운 놀이에 전념한다”('한국일보' 12월12일자 ‘강정의 나쁜 취향’)고 말한 바 있다. 첫 회 제목은 그의 이 언명에서 차용됐다. 공연은 무료이며, 모든 관객들은 시인들이 서명한 작품집을 받을 수 있다. 4월에는 소설가 김종광 이기호와 황신혜밴드, 5월에는 젊은 서정시인 문태준 손택수 신용목이 참여해 무대를 꾸밀 예정이라고 주최측은 밝혔다.

그리고 참고자료로서 '젊은 바퀴벌레'의 명명자이자 그 자신 '쇠잔한 바퀴벌레'이기도 한 강정 시인의 기고문 "시인공화국의 젊은 바퀴벌레들"(<무비위크> 199호).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얼마 전, 한 젊은 시인의 첫 시집 출판기념회자리에 갔다가 어질어질한 느낌을 받았다. 그저 지인 몇몇이 모여 단촐하게 한잔하는 자린 줄 알고 밍밍하게 얼굴을 내밀었는데, 그 모인 사람들의 수와 면면에 새삼 놀란 것이다. 시집출판기념회가 그토록 ‘뻑적지근’하게 펼쳐진 건, 내 기억으론 거의 10년 만의 일이다. 그 잊혀진 10년 사이, 내가 시의 바깥에 있었거나 시가 나의 바깥에 있었거나 둘 중 하나지만, 그 자리에 모인 젊은 시인들에게 시는 여전히 진행 중인 어떤 독립적인 삶의 거점처럼 여겨졌다.


-고종석의 표현처럼 우리나라는 이른바 ‘시인공화국’이다. 인구 대비 시인의 숫자를 봤을 때도 그렇고, 시장의 전반적인 침체와 불황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시집을 출간하고 있는 출판사들의 ‘시인 모시기’를 봐도 그렇고, 아주 가끔 특정 시인의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는 기이한 독서풍토를 봐도 그렇다. 출판사 입장에서 봤을 때 시집 출간은 숫제 시인들을 위한 자선사업에 가깝다. 이윤은 고사하고 제작비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거늘 소위 정통문학을 표방한 출판사들은 끊임없이 시인을 배출하고 시집을 출간한다. 시를 문학의 본령이라 여기고 숭상하는 풍조가 여전히 남아있는 탓이겠지만, 이유야 어떻든 대한민국 시인공화국은 여전히 번성중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번 가을에 출간된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유독 많다.


-기형도의 죽음 이후, 대략 15년 동안의 무관심과 침묵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예감이 들 정도로 최근 젊은 시집들의 득세는 심상찮은 기미가 있다. 이들의 연령대를 훑으면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 걸치지만, 나이와는 무관하게 이들의 시 세계는 개인의 경험을 환상적 이미지와 자폐적 언어로 형상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중음악과 영화, 컴퓨터 문화에 대한 탐닉 등은 이들의 무의식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가 될 만하다. 과잉되거나 뒤틀린 자의식으로 무장하거나, 유약하면서도 섬세한 어조로 삶의 스산한 비의를 읊조리는 이들 감수성의 촉수는 외부세계로 뻗어있기보다는 자아의 심부를 향해 깊숙이 가라앉아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소통불능의 자폐적 진술로 흐르지만, 그 자폐는 의외로 고집스럽고 사나워 역설적인 자기과시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거기서 새로운 시적 에너지를 발견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나는 더 이상 시가 ‘시대의 아픔에 반응하는 예민한 성감대’라느니 하는 말들을 믿지 않는다. 시는 시대의 아픔에 반응하기 보다는 한 개인의 아픔과 고뇌를 세상 전체의 아픔으로 변용시키는 힘을 ‘때때로’ (자주 쓸 수 있다면 그건 힘이 아니다)가졌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아픔을 객관화하고 삶의 무미한 디테일들을 유의미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전환시켜 스스로의 내구성을 다지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엿보이는 자폐적인 이기성을 나는 존중한다. 동시에, 천성적인 유약함을 내밀한 읊조림으로 치환하여 스스로의 껍질을 두텁게 하는 그들의 타고난 ‘비사교성’에 더 강퍅한 지지를 보낸다.

 

-대의에 얽매이거나 시류적인 일반론의 강박에서 벗어난 그들의 ‘사적 언어’는 한 개인의 편협한 광증과 무기력함이 편의와 실용으로 무장한 21세기적 속도의식에 맞불을 지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들의 경우, 시란 세계보다 먼저 가는 게 아니라 세계보다 늦게 가거나 아예 가지 않음으로써 저 혼자 아득바득 빛나고 저 혼자 용케 신성하거나 철없이 솔직하게 만드는 특별한 자기치장술이다. 그럼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왕따’ 당하지만, 그 왕따는 시를 씀으로써 선점하게 된 특출한 고독이나 진배없다. 그 고독은 아무도 봐주지 않을지언정, 적게나마 목격한 이들에겐 일방향의 삶을 근원부터 다시 살피게 하는 끈끈한 설득력을 지녔다. 따라서 나는 시인들의 언어가 좀 더 거칠고 생경하고 느리고 육감적이길 바란다. 극단적으로 말해, 첨단의 주방 귀퉁이에 알을 슨 바퀴벌레처럼 느닷없이 악명 높아지길 바란다.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일말의 악의 없이 파문을 일으키며 미련하게 잠든 세상을 가끔씩 놀래켜 주는 것. 그게 시의 존재의의고 시의 존재방법이며 시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자기방어이다. 시인공화국은 시의 궁창이자 시의 궁전이다.

 

이어서 시인 강정의 신작 시집을 소개한 연초의 기사. <시인 강 정 “나를 뒤집는 전복의 힘으로 시를 쓰지요”>란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국민일보(06. 01. 08.) 지난해 12월말 시인 강정(35)은 홍대 앞 모처에서 인디밴드 ‘모레인’과 특별한 공연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한대수의 ‘하루 아침’을 비롯한 올드록 넘버 세 곡을 부르고 자신의 시 두 편을 즉흥연주에 맞춰 낭송했다. 시와 음악과 산문을 아우르는 그이기에 가능한 장면일 것이다. 강정이 10년만에 펴낸 두번째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문학동네, 2006)은 거친 록 사운드에 실려 전해지는 공연장에서의 그의 격렬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가 낭송했다는 ‘들판을 달리는 토끼’의 한 대목을 소리내 읽어본다.

“토끼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소리는/ 당신이 밤새 두드리는 머릿속의 열기 한가운데 너른 벌판을 열고 뛰어나올지 모른다/ 토끼라는 것이 가벼운 발과/ 소리나지 않는 입과/ 가늘게 찢어진 눈 옆에 길고 뾰쪽한 두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당신은 불만을 표시해도 괜찮고/ 박수를 치며 환영해도 나쁘지 않다/ 토끼는 어쩌면 당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 있으므로”

 

-‘들판을 달리는 토끼’는 지난해 계간 <문학동네>(겨울호)에 발표했을 때부터 입소문으로 유명해진 시다. 찢어진 눈이며 껑충한 귀며 강정을 본 순간,어쩌면 우리가 찾던 토끼가 바로 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가까운 친구인 시인 이준규가 제목의 영감을 주었는데,30분만에 써내려갔지요. 제목은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만든 르네 클레망의 작품에서 따왔어요.”

 

 

 

 

 

 

 

 

 

 

 

-30분만에 무려 80행을 써내려간 그의 머릿속 열기가 훅 끼쳐왔다. 스무 두살에 등단해 1996년 첫 시집 ‘처형극장’을 내놓은 이래 그의 탐미적인 언어는 시를 떠나 음악 미술 영화 등 다채로운 영역을 종횡하며 날카로운 감수성의 표창을 날려왔다. 2000년대에 등장한 황병승 장석원 김행숙 등 젊은 시인이 이른바 ‘미래파’로 지칭되기 전,말하자면 그는 10년전부터 미래파의 선두 주자였다. 그는 한 연재글에서 스스로를 ‘한 쇠잔한 바퀴벌레’라 칭하는 한편 이들 미래파 후배 시인들을 ‘바퀴벌레’라 호칭하며 이들의 약진에 지지와 옹호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바퀴벌레는 낡은 공간을 부식시키고 냄새를 풍기지요. 이 친구들의 존재 방식은 사물을 흉물스럽게 바라보는 느낌 그 자체에 있는데, 일상적이지 않고 낯설다 뿐이지 실은 그들의 시에 새로운 세계의 총체성의 기미가 꿈틀거리고 있어요.”

 

-표면에 떠 있는 감정들을 슬슬 건드려주는 정도의 신서정 계열의 시편들은 비록 대중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진검승부를 낼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결핍의 언어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이단이 되어야 해요. 자기가 써왔던 것,했던 것을 까뒤집는 전복이 필요하지요. 요즘 들어 이성복 시인을 제외하고는 선배시인 가운데 그런 전복의 힘을 본 적이 없어요. 근래의 서정시들은 거개가 ‘자기가 눈 똥을 보고 이쁘다’고 자평하는 동어반복에 불과하지요.”

 

-이번 시집 가운데 표제시는 빼어난 수작으로 꼽힌다. “그가 내게 처음 한 말은/ 물이 모자라 거죽이 붉게 부르튼 어느 짐승에 관한 얘기다/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그 짐승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다/ 비이거나 혹은 바람이거나/ 아직도 살 만큼 물이 충분한 내 몸에 파충류의 피륙 같은 돌기가 솟았던 걸 보니/ 짐짓 실체가 없는 무슨 진동 같은 거였는지 모른다”

 

-강정의 시적 매커니즘은 우주와 몸의 대비에 있다. 빛까지 빨아들이는 우주의 카오스처럼 모든 것을 뒤섞어버리는 혼돈성,세계와 자아의 대립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들,성적이고 관능적 환상들,끝까지 규정할 수 없는 본질에 대한 집요한 탐색…. 그는 언어가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 감각의 허물을 벗어던진다. “우리 시보다 외국의 번역시를 읽을 때 언어를 뛰어넘는 느낌을 받아요. 언어를 삐딱하게 놓는 행위랄까. 스스로를 배반하는 것들,뒤섞여 나오는 것들…. 사람도 잡종이 더 이쁘잖아요. 시를 쓰면서 모국어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마음의 모국을 떠나 외계를 발견하는 우주인,그게 시인이지요.” 강정은 우리 시단의 블루칩이다. 

 


 

 

 

 

 

 

 

시인의 마지막 발언에서 시인/평론가 이장욱이 이 '바퀴벌레 시인'들을 다룬 글의 제목을 '외계인 인터뷰 - 시적 윤리와 질문의 형식'라고 붙인 이유가 절실하게 드러난다. 지구 종말 이후에도 살아남을 이 시인들이 굳이 국적에 연연하겠는가?!..

 

06. 03. 23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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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23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이렇게 '문학의 현장'이 느껴지는 글은 요새 접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로쟈 2006-03-24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과문하신' 탓입니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시인들이고 시적 경향이니 말입니다.^^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읽기의 계속이다.  지난번에 제2부의 4장 '이제 내겐 글리세린이 있소!'를 정리하다가 끊었었는데, 그걸 다시 이어서 가급적이면 4장까지는 정리해놓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예정대로 내일쯤 집에 인터넷을 깔게 된다면, 이런 류의 정리작업을 훨씬 진도를 빨리 뺄 수 있을 것이다. 읽을 책들은 넘쳐나고 써야 할 글들도 너무 많은데, 이렇게 굼뜨게 정리하다가는 한 생애를 말아먹기 십상이겠다. 어쨌거나 지난번에 키에슬롭스키가 왜 다큐에서 극영화로 이행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면('진짜 눈물'에 대한 두려움이 그 이유였다. 말하자면, 그에게 드라마는 실제 현실에 대한 방독면 같은 것), 이번에 다룰 건 그의 (유심론적 신비주의가 아닌) '유물론'이다.

130쪽부터 보도록 한다. "진짜 눈물에 대한 키에슬롭스키의 금지는 구역에서 이미지들의 금지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여기서 '이미지들의 금지'라고 한 것은 '우상 금지(Bilderverbot)'를 뜻한다(성경에서 흔히 '우상'이라 번역되므로 병기해주는 게 낫겠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우상을 만들지 말 것'(출20: 4,5), '우상을 자기 앞에 두지 말 것'(겔14: 4), '우상을 멀리할 것'(요일5:21), '우상을 마음 속에 두지 말 것'(왕상21:20), '우상으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 것'(겔20:7), '이방 신상들을 버릴 것'(창35:2), '우상에게 절하지 말 것'(신5:9), '우상을 훼파할 것'(신12:3), '우상숭배를 피할 것'(고전10:14).

Schoenberg - Moses und Aron / Pittman-Jennings · Merritt · Boulez

지젝은 이러한 구약에서의 금지와 키에슬롭스키 영화의 상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쇤베르크의 오페라 <모세와 아론>을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고 제안한다. 이 대목의 번역은 부정확하고, 역주도 엉뚱하게 달려 있어서 교정하기로 한다. 먼저 본문: "이미지 제작의 금지에 관한 오페라인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모세와 아론>을(혹은 그에 상당하는 무지카 픽타를 - 왜냐하면 쇤베르크의 노력은 바로 이미지즘적으로 묘사하는 틀밖으로 음악을 끌어내어 헤쳐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참조하는 것이 여기서 얼마간 도움이 될 것이다."

원문은 "A reference to Arnold Schoenberg's Moses und Aaron, the opera concerning the prohibition on making images (or its equivalent, musica ficta - since Schoenberg's effort is precisely to tear music out of the imagistic-depicting frame), might be some help here."(74쪽)

먼저 지적할 것은 '무지카 픽타'에 대응하는 게 '우상(이미지) 만들기(making images)'라는 점이 번역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무지카 픽타'는 음악용어로 "10-16세기의 음악에 있어서 반 음계적 변화음"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가령 거친 화성을 피하기 위해 B-natural(제자리) 대신에 B-flat(내림)을 사용하는 것이라 한다.

음악에 문외한인 탓에 그렇게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지만, 문맥상 곡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준다는 뜻이겠다. 그것이 '이미지 제작'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어떤 곡조로부터 자연스런 이미지-연상이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란 뜻이 아닐까 한다. 즉, 일종의 '음악적 허구'를 만들어낸다는 것. 참고로 프랑스 철학자 라쿠-라바르트의 저서에 <무지카 픽타>가 있으며(아도르노의 책에 견주어진다) 바그너 연구서인 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일역본은 <허구의 음악>으로 옮겼다.

이어서, 'imagistic-depicting frame'를 국역본은 '이미지즘적으로 묘사하는 틀'이라고 옮기고 이 복잡한 삽입구문에 "1912년경에 일어난 시의 풍조....라는 식의 '이미지즘'에 장황한 내각주를 붙였다. 오페라 얘기를 다루는 대목에서 (시에서의) 이미지즘 얘기는 뜬금없다. 내가 이해하기론, 쇤베르크가 음악을 그 이미지-연상적(기술적) 틀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했다는 것 정도이다. 즉, 음악을 들을 때 자연스레 떠올려지는 '그림들'(=허구들)을 파괴하고자 했다는 것(음악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가령, "쇤베르크의 오페라에서 노래는 멜로디가 없는, 슈프레히게장(Sprechgesang)'에 더 가까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와 아론>은 푸치니 같은 이의 멜로드라마적인 과잉들에 비교되어야 할 것이다." '슈프레히게장'은 음악용어로 '이야기하는 노래'란 뜻이라고(이런 데는 역주가 붙어 있지 않다). 다르게 말하면, 푸치니의 멜로디 과잉과는 대조적으로 쇤베르크의 경우엔 노래에서 멜로디를 (거의) 제거해버리는 것. 하지만, 그렇게 한 결과 아도르노가 주목한 바대로 <모세와 아론>은 자기지시적(=자가당착적)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술작품 속에서 위대한 착상들에 직접적인 주제 표현을 부여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그 착상들의 잔상을 묘사하는 것을 의미"(아도르노)하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의 (영역된) 문장은 이렇다: "To give great ideas immediate thematic expression in a work of art nowadays means depicting their after-image." 즉, '잔상'은 'after-image'를 옮긴 것이며 축어적으론 '이미지(우상)을 따른다'는 뜻도 내포한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예술작품에서 위대한 착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 그러한 잔상(이미지 효과)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하면, 이미지를 자신의 오페라에서 제거하고자 했던 쇤베르크는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내다버리게 되는 것. 의미심장하게도 <모세와 아론>은 "오 말씀이여, 내게는 없는 당신의 말씀이여"라는 모세의 절규로 끝난다." 즉, 이미지의 결여는 말씀(혹은 '위대한 착상') 자체의 결여로 귀결된다! 

지젝의 결론: "What breaks down here is not Aaron's exuberant singng, but precisely its opposite, Moses' purity of Word. In a kind of hegelian 'negation of negation,' the negation of image on behalf of the Word leads to the self-negation of the Word itself."(74쪽) 원문을 먼저 제시하는 것은 국역본에서 첫문장이 누락됐기 때문이다: "일종의 헤겔적인 '부정의 부정' 속에서, 말씀을 대신하는 이미지의 부정은 말씀 자체에 대한 자기-부정이 되어버린다."(131쪽) 그 첫문장을 포함하여 다시 옮기면, "여기서 쇠멸하는 것은 아론의 열광적인 노래가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모세가 지키고자 하는 '말씀의 순수성'이다. '부정의 부정'이라는 일종의 헤겔식 논리가 적용되는 것인데, 말씀을 위해서 이미지(우상)을 부정하는 것은 말씀 자체에 대한 자기부정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렇다면, 키에슬롭스키의 경우는? "키에슬롭스키는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의 영역을, 타락시키는 시각성으로부터 철수시키라는 구약의 명령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Kieslowski seems to share the Old Testament injuction to withdraw the domain what really matters from degrading visibility.) 전형적인 직역투인데(이런 문장들만 연속된다면 '멀미' 때문에 책을 계속 읽어나갈 수 없을 것이다), 조금 풀어서 다시 옮기면, "정말로 중요한 가치영역을 우상(이미지)의 타락적인 가시성으로부터 떼어내라는 구약의 명령을  키에슬롭스키는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구약의 우상 숭배 금지를 거스르면서 '실제' 삶의 내밀한 순간들에 대한 묘사의 금지를 바로 허구, 즉 '허위' 이미지들로 보충한다. '실제' 섹스 또는 내밀한 감정적 순간들을 보여주어서는 안되지만 배우들은 그것을 꾸며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사실주의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의 '가면쓰기'는 단순히 은폐되어야만(가려져야만) 하는 것에 대한 존중의 표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가면쓰기의 변증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가면(=게임)을 통해서만 우리의 실제의 삶에서 '억압된 태도들'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이 경우 진실은 허구의 가면(위장)을 통해서만 그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키에슬롭스키가 다큐에서 극영화로 옮겨가야 했던 또다른 이유와 만나게 된다. 그의 영화들에서 실제의 인물들은 "스스로를 연기하면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섬뜩한 중첩을 만들어" 내곤 하던 '궁지'에 직면하여 그는 극영화(fiction)로 이행해갈 수밖에 없었던 것.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으로 '실제 삶'의 장면들을 영화화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연기하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에, 연기라는 그들의 방어적 가면 아래 있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직접 하나의 역할을 연기하게 만드는 것, 즉 허구로 옮겨가는 것이다. 허구는 역할들을 연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133쪽)

마지막 문장의 강조는 나의 것이며, 원문은 "Fiction is more real than the social reality of playing roles."(75쪽)이다. 거기에서 귀결되는 것이지만, "만일 키에슬롭스키의 다큐멘터리들에서 주인공이 스스로를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의 후기 극영화들은 아름다운 여배우(비노슈, 야콥)의 눈부신 매혹적 연기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이런 게 '가면쓰기의 변증법'이다.

물론 이러한 키에슬롭스키적 선택과는 정반대되는 선택도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의 내밀함 속으로 포르노그라피적인 침입을 감행하는 것인데('몰래 카메라'가 전형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선택을 부추기는 것은 '모든 것을 말하라!'(혹은 '모든 것을 까발려라!')는 우리의 문화이다(그리하여 대통령의 페니스 모양까지도 면밀히 조사한다). "물론 역설적인 점은 담론의 이러한 전지구화가 바로 그것과는 반대되는 것을 표현해주는 양식이라는 점이다. '모든 것이 담론'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가 치루는 대가는 담론이 가장 바보 같은 현실 앞에서도 무력해진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개인의 무제한적인 공적 고백/공개는 개인성 자체의 증발을 낳는다.

"이러한 역설들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만날 수 있는 것은 특히 反키에슬롭스키적인 제스처로 보이는 것들에서이다. 섹스의 '하드코어'적 묘사를 내러티브와 결합하여 내러티브 영화의 근본적인 금지들을 중 하나를 어기려는 최근의 노력, 즉 실제로 연기되는 섹스 장면들을 내러티브 속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한 사례로 지젝이 다른 자리에서 거론하고 있는 영화들은 파트리스 셰로의 <정사>(2001)나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1998) 같은 영화이다. 아래는 "발기한 페니스의 실제 삽입" 장면이 포함돼 있는 영화 <정사>의 한 장면.

 이럴 경우,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그러한 정사 장면의 프레임을 제공해주는 내러티브는 "우스울 만큼 비현실적이고 스테레오타입적"이게 된다. 마치 18세기의 코메디아 델라르테(이탈리아 가면극)처럼. 지젝이 언급한 바는 아니지만 아마도 '모든 것'을 보여주는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틴토 브라스의 코믹에로물들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브라스 자신은 에로영화의 '히치콕'을 자임하는 듯하다). 아래는 그의 영화 <살롱 키티>(1972)의 한 장면.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또 다른(대안적) 현실들'이란 테마는 이러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간의 긴장에 의해, 그리고 그 변증법에 의해 촉진된다. 그렇기 때문에 "키에슬롭스키가 만든 극영화들의 내러티브 저변에 놓여 있는 시각적 모티브 및 기타 모티브들의 연결과 반향의 패턴은 유심론적 신비주의와는 아무관계도 없다. 반대로 그것은 유물론의 궁극적 증거이다. 극영화들에서조차 키에슬롭스키는 촬영된 모든 필름 조각들을 다큐멘터리적 재료로 취급하기 때문에 그 결과 남아있는 것은 모두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단편들뿐이다. 즉 그의 최종 편집에는 무엇인가가 항상 빠져 있다."(135쪽) 

"따라서 키에슬롭스키가 反다큐멘터리적인 천상의 영성(靈性)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우연한 만남, 우연한 일치, 예기치 못했던 신비로운 연결들, 즉 수없이 칭송된 그의 후기 장편영화들의 이 '신비로운' 효과에 대여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가 영화를 만드는 마지막까지도 다큐멘터리적 접근을 고집했다는 것에 근거한다.(...)"

"아마도 거기에 다큐멘터리 현실과 극영화 간의 변증법적 긴장이 주는 궁극적 교훈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 교훈이란, 만일 우리의 사회 현실 자체가 상징적 허구나 환상에 의해 유지된다면 영화예술이 궁극적으로 성취하는 것은 내러티브 허구 속에 현실을 재창조하는 것, 허구를 현실로 이(오)해하도록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현실 자체의 허구적 측면을 분별하게 만드는 것, 즉 현실 자체를 하나의 허구로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강조는 나의 것)

그렇다면, 키에슬롭스키의 필모그라피는 (1단계)다큐멘터리, (2단계)극영화, (3단계)영화-제작의 단념으로 이행해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제3의 단계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단계에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만일 다큐멘터리로부터 극영화로의 이행이 '진짜 눈물의 공포'에서, '실제-삶'의 내밀한 경험들을 직접적으로 그리는 것의 외설성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되었다면, 극영화들마저 포기한 것은 허구들이 어떤 점에서는 현실보다 훨씬 더 취약하다는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136쪽) 여기서 '취약하다'는 '상처받기 쉽다'(vulnerable)는 뜻이다.

"만일 다큐멘터리들이 주인공의 개인적인 현실(reality)에 침입하여 그 현실에 상처를 입힌다면 극영화는 꿈 자체(dreams themselves)에 침입하여, 즉 우리의 삶의 언명되지 않은(=은밀한) 핵심을 형성하는 은밀한(=비밀스런) 환상들에 침입하여 상처를 입"히는 것일 테니까.

요컨대, 키에슬롭스키는 '진짜 눈물의 공포' 때문에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옮겨갔지만, 거기서 또한 '진짜 눈물'보다도 더 리얼한 '가짜 눈물의 공포' 때문에 영화를 그만두게 되었던 것. 요컨대, 진정한 영화감독이란 '진짜 눈물'의 공포를 지나서 우리를 '가짜 눈물'의 섬뜩함으로 데려다주는 사람이다. 그 자신 '인간에 대한 예의' 때문에 영화라는 매체를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는 지점으로 말이다. 바로 키에슬롭스키 그 사람처럼... 

06. 03. 21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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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가을에 모스크바통신에 올린 것을 이미지-버전으로 다시 띄운다. 겸사겸사 오류도 수정하고 군말도 더 보태면서.

막간을 이용해서(이래저래 무거운 머리도 비울 겸) 러시아문학 ‘20세기의 책 20권’을 꼽아본다. 선정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페테르부르크대학의 이고르 수히흐 교수가 한 것인다. 그는 체홉 전공자로서, <체홉 시학의 제문제>(1987, 박사학위논문)와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시간, 장소, 운명>(1995, 사진) 등의 저서를 갖고 있는 중견학자이다(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에 망명했던 작가 도블라토프는 이미 ‘클래식 작가’의 리스트에 올라 있고, 4권짜리 전집과 함께 대부분의 작품이 문고본으로 나와있다. 그 자신은 작가 체홉을 가장 닮고 싶어했다고). 아래 사진은 차례대로, 도블라토프(1941-1990)의 마지막 책과 전집, 그리고 생전의 모습.



러시아의 체홉 연구에 있어서는 차세대 선두주자로 꼽히는 수히흐 교수는 페테르부르크에 소재한 출판사 ‘아즈부카’에서 나오는 문고본 클래식의 편찬에도 적극 관여하고 있기도 하다(이 문고본의 체홉 등은 그가 편집하고 해설을 붙였다). 그는 올 초에 <20세기의 책 20권: 러시아의 정전>(544쪽/ 5,000부 발행)이란 책을 출간했는데, 말 그대로 20세기 러시아문학의 ‘고전’ 20권을 선정하고 각 작품에 대한 자신의 품평을 곁들인 에세이이다. 물론 그의 취향이 어느 정도 반영돼 있는 선정일 테지만, 내가 보기에 어느 정도의 객관성은 유지되고 있는 듯하며, 따라서 우리가 ‘외국문학’으로서의 20세기 러시아문학을 이해하고자 할 때 유익한 참고가 될 만하다(이와 다르게 참고할 만한 것은 이곳의 문학 교과서들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로선 그의 목록을 보고서야 처음 알게 된 작가와 작품이 없지 않으며, 절반 정도의 작품은 아직 읽지 않았다. 다소간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자극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목록에 없는 작품들을 읽었다고 변명하는 수밖에). 20권의 목록을 차례로 나열하면서,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국내 소개현황도 함께 언급하도록 하겠다.

 

 

 

 


(1)안톤 체홉의 <벚꽃동산>(1903). 체홉 전공자답게 체홉의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을 제일 처음으로 꼽았다. 그리고 <벚꽃동산>은 20권 가운데 유일하게 드라마 작품이기도 하다. 나머지 19권의 작품들은 전부 장편소설이거나 단편소설집들이다(그러니까 이 ‘20권’에 시는 빠져 있다). 사실, <벚꽃동산>은 20세기를 시작하는 작품이라기보다는 19세기를 마감하는 작품이다(정확하게는 그 경계를 표시하는 작품이다). 물론 <벚꽃동산>은 우리말로도 여러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으며 자주 공연되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을 간혹 <벚나무동산>으로 번역/공연하는 경우도 있는데, 원작의 제목이 ‘벚꽃’이나 ‘벚나무’ 둘 다 의미하기 때문에 오역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벚꽃동산>이라고 옮겨야 한다. <벚나무동산>이라고 옮기는 건 미적 가치보다는 경제적/실용적 가치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서 이 작품의 주인공을 ‘로파힌’으로 볼 경우에나 유력한 번역이다(그건 ‘독창적인’ 해석이지만, 상식적이지는 않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은 라예프스카야(=귀족계급)의 아름다운 벚꽃동산이 그걸 고작 벚나무동산으로 간주하는 로파힌(=상인계급)에게 넘어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이 동산을 별장지로 개발하고자 하며, 4막의 배음(背音)으로 이 벚나무들을 찍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참고로, 작가 체홉은 객관적인 관찰자였지만 인간 체홉은 ‘아름다움’의 예찬자였다.

곁다리로 말하자면, 체홉의 (성공한) 첫 장막극인 <갈매기>는 전세계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 다음으로 무대에 자주 올려지는 작품이라고 한다. 어제 날짜 <문학신문>의 한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알게 된 건데, 이 <갈매기>에는 세 가지 버전이 있다. 물론 체홉 원작의 <갈매기>가 있고, 이걸 비틀어서 트레플료프가 (체홉 <갈매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살에 실패하지만, 나중에 누군가에게 타살 당한 걸로 이야기를 다시 쓴 보리스 아쿠닌(1956-, 아래 사진 )의 희곡 <갈매기>(2001, 아래 사진)가 있다. 주로 탐정소설을 쓰는 아쿠닌은 드물게도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는 가장 인기 있는 동시대 작가이다(그의 작품들은 연극으로 공연될 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또 하나 오페레타 버전의 <갈매기>가 있으며, 이건 알렌산드르 주르빈(아래 사진)의 작품이다. 그는 1990년부터 12년간 미국 뉴욕에서 살다가 왔으며(그러니까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 먼저 공연된 그의 <갈매기>는 이번 시즌에 러시아에서 초연된다. 이 세 <갈매기>를 나란히 무대에 올리는 곳은 극단 <슈꼴라 사브레멘노이 삐에스이>(‘동시대 희곡학교’란 뜻)이며, 연출자는 이오시프 라이헬가우스이다. 언제 시간을 내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언제가 될는지는 모르겠다(하여간에 이번 시즌 안에). 안톤 팔르이치(안톤 파블로비치 체홉을 그렇게도 줄여 부른다)가 당신의 작품을 본다면, 이란 질문에 주르빈은 이렇게 말한다. “아주 만족할 겁니다!”



(2)막심 고리키의 <어머니>(1906-1907). 물론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한 작품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대학신입생들의 필독서 목록에서는 빠져나간 듯하지만,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평가 또한 예전에 못 미치지만,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유효하다. 하지만, 이때 ‘고전’이란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란 의미가 아니라, ‘시대를 환기시키는 작품’이란 뜻이어야 한다(때문에 <어머니>는 1980년대 우리의 대학가에서 필독서였다. 대학가 축제 때면 <파업전야> 같은 영화를 보는 게 당시의 ‘문화’였고).



 

 

 

한 시대와 운명을 같이하는 작품이 ‘고전’이란 이름에 값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개인적으론, 어떤 작품에 들어맞는 시대/시점이 있는 것이지 시대를 넘어선 작품이 있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작품이 우리의 DNA에 새겨진 것이 아닌 이상. 그건 우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베스트로 꼽는 작품들이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러한 당대성을 감안하지 않고 지금의 시점에서 이 작품을 읽는다면 너무 ‘도식적’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그러니까 <어머니>는 ‘도식적’이었던 시대에 어울리는 작품이며, 우리의 80년대는 ‘도식적인’ 시대였다). 아래는 푸도프킨의 영화 <어머니>(1929)의 한 장면.



한 가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정식으로 공포되는 것은 1934년이다)의 효시로도 평가되는 작품이지만, <어머니>에는 종교성도 중요한 테마로 등장한다(수히흐 교수가 <어머니>에 대한 장의 제목을 ‘마르크스와 성모 사이’라고 붙인 건 그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새로운 시대의 복음서’였다). 그와 관련된 것이지만, 사실 고리키의 이념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휴머니즘이었다(그에게 인간은 언제나 대문자 인간이었는바, 그는 인간을 숭배했다). 그리고 그 휴머니즘의 최대치는 그가 쓴 드라마 작품들 중에서 최고작으로 평가되는 <밑바닥에서>(1902)에서 선언된다. 체홉의 섬세한 드라마들과 비교한다면 투박하기 이를 데 없지만, 고리키의 이 드라마에는(특히 4막) (유머 대신에) 박력과 (페이소스 대신에) 에너지가 넘친다. 해서, 나는 러시아문학의 20세기가 ‘벚꽃동산’이 아닌 ‘밑바닥’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고리키는 국내에 꽤 소개돼 있는 편이다. <어머니>만 해도 최소 2종의 번역서가 있다. <밑바닥에서>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인가 <밤주막>이란 제목으로 번역/공연돼 온 걸로 안다(작품의 배경은 빈민굴이다). 고리키의 자전 3부작(<어린시절> <세상속으로> <나의 대학>)부터 미완의 장편 <포마 고르제예프>까지 어지간한 고리키의 작품들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물론 30여권에 이르는 그의 러시아어 전집에 비한다면 약소한 것이겠지만. 참고로,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고리키의 본명은 페슈코프이며 ‘고리키’는 러시아어로 ‘쓴/쓰라린’이란 뜻의 형용사이다. ‘막심’은 ‘맥시멈’이란 뜻이고. 해서 ‘막심 고리키’는 ‘그토록 쓰라린’이란 뜻이 된다. 젊은 시절 ‘룸펜 프롤레타리아’였던 페슈코프의 삶이 바로 ‘그토록 쓰라린 삶’이었으며, 그는 권총자살까지 시도한바 있다(폐에 구멍이 뚫렸지만, 다행히 살아난다).



고리키의 문학적 삶은 레닌과 운명을 같이 한다(고리키는 문학에서의 레닌주의를 대표한다). 레닌 사망(1924) 이후 스탈린 시대의 고리키는 사회주의 작가로서라기보다는 문학적 전통의 보호자 역할에 더 충실했다. 그가 주로 했던 일은 소련문학의 ‘얼굴 마담’ 역과 작가들의 후견인 역이었다. 스탈린 시대 숙청 리스트에 올랐던 작가들 가운데 여럿이 그의 구명(救命) 운동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의 생명은 연장할 수가 없었는데, 한편으로 그의 죽음(1936년)에는 스탈린에 의한 암살설이 떠돌기도 했었다. 



참고로, 니즈니 노브고로드는 볼가강변의 항구 도시인데(고리키 초기 단편들의 주된 배경이다), 고리키 사후에 ‘고리키시’로 개명되었던 곳이다. 한데, 사회주의 몰락 이후 레닌그라드가 페테르부르크라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듯이, 니즈니 노브고로드도 고리키란 이름을 벗겨냈다(그래도 고리키 학술대회는 거기서 열린다). 레닌과 고리키는 그런 사후의 운명까지도 나눠 갖고 있다.

(3)안드레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1911-1913). 나보코프가 조이스의 <율리시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세계 3대 소설에 꼽기도 했던 작품이다(이어서 나보코프가 꼽는 작품은 카프카의 <변신>이다). 산문작가로서 벨르이는 시인인 알렉산드르 블록과 함께 러시아 상징주의의 최대 작가이며, <페테르부르크>는 그의 대표작이다(더불어 그는 고골에 대한 고전적인 연구서를 갖고 있다).

 

 

 

 

푸슈킨의 서사시 <청동기마상>에서 시작된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문학적/문화적 신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거쳐서 완결되는 작품이 또한 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언급은 삼가도록 하겠다.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지만(물론 영역은 돼 있다), 조만간 번역서가 나올 거라는 얘기도 들린다(아마도 1-2년내로 출간될 것이다. *이번 7월에 출간됐다!). 시적이고 장식적인 그의 문체가 얼마만큼 우리말로 옮겨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벨르이의 소설 가운데 우리말로 번역된 건 <은빛 비둘기>(제3문학사)이다. 이미 절판된 지 오래된 책이지만, 도서관 등에서 구해볼 수 있을 듯하다. 더불어, 러시아문학에서의 ‘페테르부르크 텍스트’에 대해서는(이전에 나도 짤막한 기고문을 쓴 적이 있다) 블라지미르 토포로프 교수의 연구가 독보적이다(그의 ‘소개’ 논문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작년에 이 주제에 관한 논문들을 모은 <러시아문학의 페테르부르크 텍스트>(616쪽)란 책이 페테르부르크 300주년에 즈음하여 출간된바 있다(물론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도 다루어진다).

더불어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필독서는 솔로몬 볼코프가 쓴 <상트 페테르부르크 문화사>이다. 원래 영어로 먼저 씌어진 이 책의 러시아어본이 지난 여름에 출간됐다. 볼코프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저술가로 시인 브로드스키와의 대담집과 함께 역시 지난 여름에 나온 <쇼스타코비치와 스탈린> 등의 저서를 갖고 있다(그는 본래 음악 전공자였다). 위의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바실리예프스키 섬.

 

 

 

 

(4)예브게니 자먀친(1884-1937, 아래 사진)의 <우리들>(1920). ‘자먀찐’(혹은 ‘자먀틴’)으로도 읽히는 이 작가의 대표작으로, 흔히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의 원조(元祖)가 되는 ‘안티-유토피아’ 소설로 알려져 있다(이 작품을 <멋진 신세계>와 나란히 묶은 러시아어본도 있다). 내전의 와중이던 1920년에 이미 혁명의 불행한 종국을 예견하고 있는 이 작품은 29세기 단일제국이란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유토피아, 즉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세계의 극단을 예시해 보인다.

같은 러시아문학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상호텍스트적으로 읽히는 작품(‘수정궁’ 비판과 ‘2*2=4’란 테마). 자먀친은 다른 단편들과 함께 에세이들도 남기고 있지만(단편 두어 편이 우리말로 더 번역돼 있다), 역시나 기억되는 건 <우리들>의 작가로서이다. 우리말로는 두 차례(중앙일보사, 열린책들) 출간된바 있지만, 지금은 모두 품절된 걸로 보인다(*얼마전 재출간됐다). 몇 년 전에 개최되었던, 자먀친에 관한 국제학술회의 논문집을 보니까 “한국에서의 자먀친”이란 발표문도 실려 있었는데, 석사학위 논문까지 총동원됐지만 (당연하게도) 몇 건 되지 않았다.

 

 

 

 

(5)이삭 바벨(1894-1940)의 <기병대>(1923-1925). 바벨은 러시아 남부의 항구도시 오뎃사(영화 <전함 포템킨>에 나오는 도시) 출신의 유태계 작가로서 <기병대>는 내전(1918-1920) 시기를 다룬 연작이면서 그의 대표작이다(이 연작의 화자가 내전에 참전한 유태계 지식인이다). 우리말로는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소련동구문학전집>에 수록돼 있으며, 조만간 그의 선집이 다시 나오는 걸로 안다. 참고로, 마샬 버먼의 <맑스주의의 향연>에는 버먼의 이삭 바벨론(서평)이 포함돼 있다. 동향의 작가 유리 올레샤(1899-1960)의 <질투>는 <마호가니>(열린책들, 2005)에 실려 있다. 아래 사진은 바벨과 올레샤.

에이젠슈테인과 같이 작업하기도 했으며(<베진초원>의 시나리오를 썼던가?),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영화화하기에 적당한 테마와 문체를 갖고 있다. 다른 연작 <오데사 이야기>의 경우(‘오데사 마피아 이야기’쯤 된다), 내 기억에 그는 시나리오도 따로 썼던 것 같다. 그의 문학세계는 2권짜리 전집에 다 수록될 만큼 간명하다(이에 견줄 만한 작가는 좀 두꺼운 한 권에 다 정리되는 자먀친, 그리고 같은 오데사 출신의 유리 올레샤가 있다). 우리말 선집이 출간된다면, 좀더 자세하게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6) 알렉산드르 파제예프(1901-1956)의 <궤멸>(1925-1926). 역시 내전 시기를 다룬 작품이지만, 바벨의 <기병대>처럼 좀 삐딱한 시각의 작품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선정자인 수히흐 교수가 아마도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궤멸>을 꼽은 듯하다. 지금은 줄거리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궤멸>(예문출판사, 1988)은 아주 오래 전에 우리말로 번역 소개된 바 있다. 지금은 당연히 품절된 책이다. 작가 파제예프는 역시나 스탈린 시대에 숙청당한 바벨과는 달리 소위 ‘메인 스트림’에 속해 있던 작가이며, 작가동맹의 의장인가 부의장을 역임한 문학권력자였다.

(7)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의 <체벤구르>(1926-1929). 요즘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연극 연출가 레프 도진의 레퍼토리에도 들어가 있는 <체벤구르>는 러시아에서도 재발견된 작가 플라토노프의 대표작이다(그러니까 러시아에서도 소개/해금된 건 내가 알기에 80년대 중반 이후이다). 그렇게 재발견된 작가로 미하일 불가코프와 비교되기도 하는 플라토노프이지만, <체벤구르>가 <거장과 마르가리타>만큼 폭넓게 읽히는 것 같지는 않다(출판되는 걸 보아도 그렇고, 공연되는 걸 보아도 그렇다). 아래는 연극의 한 장면.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이어서 자세하게 언급할 수 없지만(역시 우리말로 번역중이라는 ‘풍문’은 있다), 이 작가의 몇몇 단편들은 우리말로도 번역 소개돼 있는바 참조해 볼 수 있다(책세상에서 단편집 <귀향>이 나와 있다). 내가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은 <포투단강>이란 단편. 철도노동자 출신의 플라토노프는 사회주의 이념의 철저한 신봉자로서 오히려 소비에트 권력층에 부담을 주었던 작가였으며(스탈린이 싫어했다던가), 한편으론 작품의 매우 형이상학적인/유토피아적인 주제들 때문에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로도 불린다.



(8)미하일 조셴코(1894-1958)의 <감상적인 이야기들>(1923-1930). ‘조셴코’ 혹은 ‘조시첸코’로 표기될 수 있는데, <감상적인 이야기들>은 단편모음집 이름이고, 장편소설(roman)을 쓰지 않은 작가이기 때문에, 굳이 어떤 한 작품을 거명하기는 어렵다. 플라토노프가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조셴코는 ‘20세기의 고골’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작가이다.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정말로 코믹하고 유머러스하며 풍자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 정식화하자면, <조셴코=고골+체홉>이다(이 세 작가를 ‘사소한 것들의 시학’으로 묶어서 다룬 연구서도 있다).   

나는 단편 몇 편을 읽었을 뿐이지만, 보다 본격적으로 소개되어도 좋은 작가이다. 거꾸로 말하면, 조셴코의 단편들이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건 미스터리라 할 만하다(*이후에 두 권이 번역되었다).

(9)블라지미르 나보코프(1899-1977)의 <재능>(1937-1938). <재능> 혹은 <선물>은 나보코프의 러시아 시절은 마감하는 장편소설이다(러시아어 ‘다르Dar’는 ‘재능’이란 뜻과 ‘선물’이란 뜻 모두를 갖고 있다. Gift란 영어 단어가 그렇듯이). 주인공이 시인으로서 성장해가는 자기발견적 이야기이면서 나보코프가 러시아문학의 전통과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을 끝으로 나보코프는 ‘러시아어 시절’을 마감하고 영어로 언어를 바꿔서 작품을 쓴다. 그렇게 처음 쓴 소설이 우리말로도 번역된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이다(원제는 ‘세바스챤 나잇의 참인생’). 나보코프에 대해서는 작품을 읽지 않고도 할 얘기가 너무 많지만, 여기선 간단히 줄이도록 한다.  

우리에겐 <롤리타>의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이 작품은 스탠리 큐브릭과 에드리안 라인에 의해 두 번 영화화됐다. 영어로는 영어본과 러시아어본 <롤리타>를 비교하는 사전까지 나와있고), 그리고 간혹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로 ‘오해’ 받기도 하지만, 그는 제임스 조이스의 계보에 속하는 전형적인 모더니즘 작가이다(그는 언어를 다루는 작가적 재능에 있어서 조이스 정도를 질투했을 것 같다. 하지만, 조이스는 러시아어로는 작품을 쓰지 않았다). 적어도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작가의 죽음’을 전제로 한 텍스트의 유희/게임을 주요한 특징으로 갖는다면 말이다.

나보코프의 문학세계는 진정으로 ‘신적인’ 작가 나보코프에 의해서 자신을 작가로 착각하는 주인공들이 징벌받는 세계이다. 그 세계는 대단히 유희적이지만, 포스트모던적 유희와는 거리가 있다. 현재까지 나온 나보코프의 전기로 가장 방대하며 탁월한 것은 브라이언 보이드의 영어본이다. 그는 나보코프의 삶과 문학을 ‘러시아 시절’과 ‘미국 시절’로 구분하여 두 권의 책으로 상술했는데, 얼마 전에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나왔다(여기서의 평가도 ‘최고의 전기’라는 것이다). 두툼한 양장본 2권의 가격이 4만원 안팎(나는 영어책을 복사했었다). 나보코프 애호가나 전공자에게는 필독서이다. 나보코프의 러시아소설 가운데는 <마셴카>(<첫사랑>으로 번역됨), <루진의 방어>(단행본으론 나오지 않고 한 문예지에 소개됐었다) 등이 우리말로는 번역돼 있는데, <재능> 이외에도 <절망>, <단두대로의 초대> 등이 모두 번역될 만하다(*<단두대로의 초대>가 <사형장으로의 초대>로 번역됐다). 하지만, 저작권이 까다로운 작가이기 때문에(물론 번역도 까다롭다) 정말로 번역될지는 미심쩍다.

영어소설 가운데는 <롤리타> 외에도 <어둠 속의 웃음소리>(언젠가 오래 전에 TV미니시리즈로도 만들어진바 있다. <창밖엔 태양이 빛났다>란 제목이었던가. 기억에, 황인뢰 PD의 작품이었다), <투명한 물체들>, <킹, 퀸, 잭>, <창백한 불꽃>, <아다> 등이 번역돼 있다. 전문가 수준이었던 그의 나비수집에 대한 얇은 책도 한 권 번역돼 나온바 있고. 물론 나보코프에 대한 학위논문들은 상당수에 이르며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도 있다.



러시아에는 물론 각종의 너무 많은 나보코프가 있다. 2개의 언어로 작품활동을 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이 영어와 러시아어로 ‘거의 완벽하게’ 번역돼 있다. 그 중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왼쪽 사진) 번역/주석(이 작품에 대한 주석으로는 러시아의 기호학자/문학연구자 유리 로트만의 것과 쌍벽을 이룬다)과 함께, 러시아어로는 3권으로 나온 문학강의가 기록해 둘 만하다(그는 <롤리타>의 인세 덕분에 팔자가 피기 전까지는 코넬대학 등지에서 문학선생 노릇을 했다. 미국 작가 토마스 핀천이 그의 강의를 들은바 있다). 그 3권은 각각 <러시아문학강의>, <서구문학강의>, <돈키호테에 대한 강의>(오른쪽 사진)이다. 나는 이 강의들도 우리말로 번역되길 바라지만, 가능할는지…  

(10)미하일 숄로호프(1905-1984)의 <고요한 돈강>(1925-1940). 요즘은 대학에서의 러시아문학사 전공강의에서도 빠지는 수가 많지만(부담스런 분량 때문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교되기도 하는 대하장편소설이다(당연히 영화화됐고, 얼마 전에도 이곳 TV에서 시리즈로 나왔다). 나는 학부에서 20세기 문학사 강의를 들을 때 읽었는데, 우리말로는 7권으로 번역돼 나와 있었다(러시아어로는 보통 2권). 지금은 품절이지만. 한 권짜리 만화로도 나와 있었고(기말고사 시험문제가 이 작품의 줄거리를 쓰는 것이었는데, 그때 만화를 본 게 도움이 되었다). 수히흐 교수는 <고요한 돈강>을 다룬 장의 제목을 ‘카자크 햄릿의 오딧세이’라고 붙였는데, 그럴 듯하게 여겨진다. 그 햄릿의 이름은 물론 주인공 그레고리이다.

숄로호프의 다른 작품으론 <인간의 운명>, <돈강 이야기> 등도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데, 나는 읽지 않았다. 사실 그다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문학권력자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고요한 돈강>을 정말로 그가 썼는지에 대한 의혹들도 그래서 나왔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반 부닌과 파스테르나크에 이은 노벨문학상(1965) 수상자이다('파스테르나크 노벨상 파동' 때 러시아내에서는 파스테르나크가 '국민작가' 숄로호프보다 먼저 노벨상 수상자로 지명됐다는 사실에 분개한 이들도 많았다). 아래 사진은 영화 <고요한 돈강>(1992)의 한 장면. 러시아판 대작 <전쟁과 평화>를 찍은 세르게이 본다르추크(1920-1994)의 마지막 작품이다.

(11)미하일 불가코프(1891-1940)의 <거장과 마르가리타>(1928-1940). 드디어 불가코프! 그의 작품집은 어디서나 눈에 띄고, 또 희곡들은 거의 끊이지 않고 공연되기 때문에 과연 이 작가가 스탈린 시절 이후 오랫동안 탄압 받고 금지됐던 작가였던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거장과 마르가리타>는 그의 생전에 발표될 수 없었던 작품이다).

 

어쨌든 <불가코프 백과사전>까지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사전과 같이 나올 정도의 지명도를 그는 갖고 있고, 또 누리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극작가 몰리에르를 (권력과의 관계에서) 자기 삶의 모델로 삼았었지만(그는 <몰리에르의 생애>란 전기도 썼고, 몰리에르가 등장하는 드라마 작품 <위선자들의 밀교>도 썼다), 그가 뒤늦게 누리는 영광은 몰리에르에 뒤지지 않는 듯하다.

 

 

 

 

우리말로 번역된 불가코프도 제법 적지 않다. 혁명을 풍자한 <개의 심장>, <운명의 알> 등의 중편들에서 <백위군> 같은 소설, 그리고 <극장>, <위선자들의 밀교>, <조야의 아파트> 같은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여전히 <투르빈가의 나날들> 같은 대표 희곡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고(출간예정이라는 소문은 있다), 여러 러시아 교수들이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거장과 마르가리타> 또한 현재로선 품절이다(아마도 내년까지는 새 번역본이 나올 듯하다. *박형규 교수의 번역본이 재출간됐다). 우리에게서 불가코프가 그 정도의 대접을 받지는 못하는 걸로 봐서 우리의 불가코프 수용에는 어떤 ‘장벽’이 있는 듯하다. 아래는 마리나 코렌펠드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삽화.



(12)이반 부닌(1870-1953)의 <어두운 가로수길>(1937-1945). 러시아에서는 얼마전에 이반 부닌의 새 전기가 출간됐는데,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1933) 수상자 부닌은 20세기 전반기의 유능한 시인/작가의 한 사람이다.

부닌은 그가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인도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동양적인’ 외모를 갖고 있는데, 외모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 있어서도 부닌은 지극히 ‘동양적’이다(특히 불교적이다). 러시아나 서구인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는 그의 문학이 우리에겐 오히려 친숙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나의 도식적인 이해에 의하면, 부닌은 체홉, 고리키와 함께 ‘거대한 작가’ 톨스토이의 문학적 계승자의 한 사람인데, 체홉이 톨스토이의 문학성을, 그리고 고리키가 민중성을 이어받았다면 부닌은 그의 종교성을 계승하고 있다.

 

 

 

 

내 기억에 <어두운 가로수길>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으며(<비밀의 나무>란 제목으로 나왔던가), 기타 그의 단편들(<사랑의 문법>으로 번역돼 있다)과 <마을> 같은 중편들도 번역돼 있다(그의 단편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이며, <일사병>이란 단편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견주어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직 <아르세니예프의 삶> 같은 자전적 대표작은 번역되지 않았다(*최근에 번역되었다). 더불어 지적하자면, 나보코프도 그랬지만 부닌도 문학적 출발은 시인이었다. 그의 시들도 번역된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만, 가능할는지…

(13)알렉산드르 트바르도프스키(1910-1971)의 <바실리 테르킨>(1942-1945). 드디어 내가 처음 듣는 작품이 나왔다. 사실 트바르도프스키란 이름을 내가 기억하는 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1962년에 잡지 <노브이 미르>에 실을 수 있도록 한 편집장 트바르도프스키로서이다(또 다른 트바르도프스키가 있는 게 아니라면). 그가 솔제니친에 맞먹을 만한 작가였다는 건 모르던 사실이다.

제목으로 봐선 바실리 테르킨의 일대기를 다룬 듯싶은 장편소설인 듯한데(*소설이 아니라 서사시이다. 부제는 '어느 병사에 관한 책'이고, 조국전쟁, 즉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다고), 아마도 그가 혁명과 내전기를 관통하는 듯하다. 수히흐 교수는 “죽음과 전쟁, 운명, 조국에 대하여”란 장제목을 달았다.



(14)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닥터 지바고>(1945-1955).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다. 1956년에 이 작품을 해외에서 먼저 출간하고, 이어서 1958년에 (다소간 정치적인 선정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작가 파스테르나크는 다소간 은둔적인 성격에 걸맞지 않은 문학적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그는 스톡홀름에 가는 걸 포기한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 때문에 그는 1960년에 사망하고 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이 작품 때문에 그는 조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재촉한 것이다. 지바고 때문에!(‘지바고’는 러시아어 ‘삶’의 고어(古語) 형용사형이다)

 

 

 

 

시인 파스테르나크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이 작품은 사실 ‘소설로 씌어진 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그런 의미에서 푸슈킨의 ‘시로 씌어진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과 마주보고 있다), 지바고의 죽음 이후에 남겨진 유고시 25편은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데 참조물이 아니라 핵심이다(이걸 빼놓은 번역서들도 있었는데, 좀 어이없는 경우이다). 이 말은 소설미학적인 기준에서 이 작품을 판단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이 작품에는 어이없는 우연들이 남발되고 있다). 푸슈킨이 ‘특이한 소설’을 썼다는 의미에서 파스테르나크는 ‘특이한 시’를 쓴 것이며, 러시아 소설의 전통은 그렇게 열리고 닫힌다.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두 ‘망명작가’에 의해서.



<닥터 지바고>는 1988년쯤에야 해금되며(그 이전에는 그의 초기 시들만이 출판될 수 있었다) 그맘때쯤 저명한 러시아 문학자 드미트리 리하초프의 편집하에 간행된 최초의 파스테르나크 전집에는 빠져 있다(나는 이 전집과 <닥터 지바고>를 따로따로 샀다). 굳이 찾으러 돌아다니진 않았지만, 이 작품이 포함된 전집은 아직 보지 못했다. 한편, 1930년대 이후 생계를 위해서 옮긴 번역작품들(그는 셰익스피어와 괴테 등을 주로 번역했다)은 요즘 따로 출간돼 있다. 우리말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외에, <나의 누이, 나의 삶>이란 번역시집(그의 시들은 상당히 난해하지만, 좀 이해하면 재미있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죽음>이라고 옮겨진 그의 자전적 기록 정도(마야코프스키와의 교우와 그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라라의 모델이었던 올가 이빈스카야의 회고록 정도.



(15)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 )의 <수용소 군도>(1958-1968). <수용소군도>가 출간된 건 1972년 겨울 파리에서였고, 이 때문에 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소비에트로부터 망명을 강요받게 된다(그에겐 강제출국 당하거나 망명하거나의 선택이 있었다). 흐루시초프 시대의 해빙 분위기를 타고 자신의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했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출간될 수 있었지만, 1970년대는 이미 (해빙은 물 건너 간) 브레즈네프의 시대였고, 이 새로운 시대는 자신의 조국을 ‘거대한 수용소’라고 고발하는 작가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아래 사진은 수용소 죄수 시절의 솔제니친.

<수용소군도>는 소비에트뿐만 아니라 책이 출간된 프랑스에서도 파문을 일으켰는데, 과거 소련을 지지했던 좌파 지식인들에게 결정타를 안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지를 계속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회의해야 했다(상당수는 스탈린주의의 ‘수용소’ 대신에 마오쩌뚱의 ‘문화혁명’을 선택하며, 한편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을 비판하는 신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서는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에서도 기술되어 있었던 듯하다). 물론 솔제니친이 망명지로 안착했던 곳은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의 시골마을이었으며, 거기서도 그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연설들을 늘어놓는 바람에 곧 여론의 관심밖에 놓이게 된다(흔한 오해와는 다르게 솔제니친은 공산주의자이다. 다만 그의 공산주의는 ‘종교적 공산주의’일 따름. “현대인은 신을 잊었다!”는 게 그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한때의 신화였던 작가였지만(한 문학작품이 한 시대의 표정이 되고, 한 시대의 좌표를 바꾼다는 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그는 너무 뒤늦게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으며 (좀 무례한 말이지만) 너무 오래 살고 있다. 몇 번 추진되던 한국방문이 무산될 정도로 건강이 썩 좋은 건 아니면서도 나름대로 장수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엔 <신화와의 작별>이란 제목으로 방대한 분량의 평전까지 출간됐는데, 그는 생전에 자신의 신화가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있는 드문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망명문학으로서의) 러시아문학이 푸슈킨에서 시작해서 파스테르나크에서 끝난다고 했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서의) 소비에트 문학은 고리키에서 시작해서 솔제니친에서 끝난다. 즉,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수용소’에서 끝난다. 솔제니친 이후의 소비에트 문학은 잠시 농촌문학(발렌친 라스푸친)과 일상문학(유리 트리포토프)에 의해 채워지면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종말을 맞는다.

 

 

 



우리말로 번역된 솔제니친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군도>(5권이던가?)를 비롯하여 아주 많다. <암병동>과 <제1권>, <붉은 수레바퀴>(이 대작도 나오다 만 것 같다)까지가 그의 주요 장편들이라고 한다면, <마트료나의 집> 등과 같은 초기 단편들도 여럿 번역돼 있고, <사슴과 라게리의 여인>(‘라게리’는 ‘수용소’란 뜻이다) 같은 희곡작품도 번역돼 있다(오늘 헌책코너에서 산 그의 희곡집에는 안 들어 있는 걸로 봐서, 그는 희곡작품도 꽤 여럿 쓴 모양이다). 그리고 그의 에세이집까지.



(16)바를람 샬라모프의 <콜리마 이야기>(1954-1973). 샬라모프는 이름만 들어본 작가인데, 이 정도로 지명도가 있는지는 몰랐다. ‘콜리마’는 소비에트 시절 가장 '악명 높았던' 수용소가 있었던 지명이고(그러니까 아마도 시베리아 어디일 것이다), ‘콜리마 이야기’는 콜리마를 배경으로 한 연작이다. 웬만한 작품집에 들어가 있는 <콜리마 이야기>가 다 ‘선집’인 걸로 봐서 이 연작으로 작가가 얼마나 많은 걸 썼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아래 사진은 콜리마 수용소.

사실, 샬라모프 자신이 15년간(1937-1951) 거기에서 유형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에 그는 그 기간보다도 더 긴 시간 동안(꼬박 20년이다!) 자신의 유형생활을 되새김질하는 이야기들을 쓴 것이다. 그런 사실만으로도 예의상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샬라모프에 대한 논문들이 국내에서도 나오고 있으므로 번역본들도 곧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7)안드레이 비토프(1937- )의 <푸슈킨의 집>(1964-1971, 1978…) 최근에 비토프의 2권짜리 작품선집이 새로 나왔는데, 물론 장편 <푸슈킨의 집>은 제외한 것이다(원제인 ‘푸슈킨스키 돔’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문학연구소로 보통 ‘푸슈킨연구소’라고 부른다. 거기엔 푸슈킨의 데드마스크가 많은 육필 원고와 함께 보존돼 있다고 한다). <푸슈킨의 집>은 작가가 계속 버전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확정된 연도를 아직 표시할 수 없다. 내가 갖고 있는 건 그나마 작년인가 새로운 장정으로 출간된 것인데, 현재까지는 최종본이라고 할 수 있다.



비토프의 이 소설 역시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 작품은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다(좀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고전’이다). 그건 각종의 텍스트들이 교직되어 새로운 텍스트를 축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러니까 나보코프의 소설에서와는 달리, 진정한 문학적 유희, ‘텍스트의 즐거움’(바르트의 용어)이 실현되고 있는 것. 물론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그것을 통칭할 수 있는 것은 ‘푸슈킨의 집’이다. 푸슈킨의 문학적 유산으로서의 러시아문학 전체가 이 소설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인자이거나 잠재적 인자들이다. 실제로 비토프는 나름대로의 푸슈킨 ‘연구자’이기도 하며, 푸슈킨에 관한 두 권의 책, ‘1825년의 푸슈킨’, ‘1836년의 푸슈킨’을 편집하기도 했다(1825년은 제카브리스트 봉기가 일어난 해이며, 1836년은 푸슈킨의 생애 마지막해이다. 그는 1837년 1월에 사망했기 때문에). 아래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푸슈킨 연구소'(=푸슈킨의 집).



물론 내가 아는 한, 비토프의 작품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된바 없다(어디 잡지에 소개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수년 전에 한국 펜클럽 초청으로 방한할 뻔했으나 역시 무산됐다(그러니까 그는 아직 한국과는 아무런 인연을 갖고 있지 않다). <푸슈킨의 집>에 대한 연구서들은 이미 러시아와 미국 등지에서 나오고 있으며, 국내에도 연구논문들이 있다. 작품도 번역돼 나올지는 두고 봐야겠다.



(18)바실리 슉쉰(1929-1974)의 <성격들>(1973). 짐작에 <성격들>은 특정한 작품이 아니라 슉쉰의 문학을 총괄하는 작품집인 듯하다. 또 그래야 말이 된다. 그의 문학은 그의 삶 전체로 웅변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검게 탄 얼굴에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농부 같은 (한 성격 할 것 같은) 인상의 슉쉰은 70년대 초반 소비에트 문화계의 ‘간판’이었다(우리 작가로는 딱 황석영 같은 타입이다. 황석영이 영화감독도 겸했다면). 그는 영화계에서도 유명인사였는데(감독으로도 유명하다), 1973년에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쓰고 주연과 연출까지 맡은 영화 <칼리나 크라스나야>(사전적 의미로는 ‘빨간 까마귀밥나무’란 뜻이다)는 각종 영화상을 휩쓸며 수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대학원 시절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그렇게 유명한 영화인 줄 몰랐다. 오른쪽은 영화의 한 장면). 그건 그만큼 슉쉰이 러시아 나로드(민중)의 정서에 가장 잘 호소하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수히흐 교수의 장제목은 “한 영혼이 아프다”. ‘작가-예언자’란 평까지 듣는 슉쉰은 러시아의 영혼이면서 한 시대의 영혼이었던 것.



하지만, 내가 그에 대해서 아는 내용은 별로 많지 않다. 얼마 전 그의 사망 30주년을 맞는 특집기사들을 보고 새삼 작품집과 영화CD 등을 사두었고, 엊그제 헌책코너에서 우연히 그의 전기를 구입했을 뿐이다. 그러니 알 준비가 되어 있을 뿐인 것. 한국에서의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은데, 몇 편의 단편이 소개돼 있는 게 전부이다. 스첸카 라진의 농민반란을 소설화한 <나는 너희에게 자유를 주러 왔노라> 같은 대표적 장편소설은 한국 독자들의 구미에도 맞을 듯하므로, 한번 기다려봄 직하다(이 작품의 번역은 오래 전에 한번 추진되었다가 무산됐던 걸로 안다. 분량 때문에). 참고로, 슉쉰을 추모하는 기고문에서 한 작가는 러시아문학에서 다섯 명의 위대한 작가를 꼽았는데, “푸슈킨, 고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슉쉰”이 그 다섯 명이다.



(19)발렌친 라스푸친(1937- )의 <마쪼라의 이별>(1976)과 (20)유리 트리포노프(1925-1981)의 <노인>(1978)은 한꺼번에 언급하기로 한다(막간이 너무 긴 것 같으므로). 브레즈네프 시대인 1970년대 러시아문학의 대표적인 경향은 ‘농촌문학’과 (도시의) ‘일상문학’이었는데, 라스푸친과 트리포노프는 각각 이 두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지명도에 있어서는 라스푸친이 한 수 위인데(제정 말기의 괴승 라스푸친과 성이 같지만 무관하다고 한다), 러시아의 중학교(1학년부터 11학년까지 같은 학교에 다닌다) 교과서에는 그의 작품들이 다수 수록돼 있어서 <학교에서 배우는 라스푸친>이란 책도 나올 정도이다. <마쪼라의 이별>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데(<소련동구문학전집>), 댐건설로 수몰 예정인 한 농촌마을 사람들의 얘기이다.


 

 

 


라스푸친은 농촌문학에 심리적, 철학적 깊이를 부여한 걸로 평가되는데, 우리의 전통적인 ‘무속신앙’과 유사한 ‘지킴 신앙’ 등이 다뤄지기 때문에, 비교적 친숙하게 읽힌다. 라스푸친의 작품으로는 <마쪼라의 이별> 외에도, <마리아를 위하여>(원제는 ‘마리아를 위한 돈’), <마지막 기한>,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 등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고, 트리포노프의 작품으론 <긴 이별>, <또 다른 삶> 등이 번역돼 있다(<소련동구문학전집>에 실려 있다). <교환>(경희대출판부, 2005)가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페테스트로이카 이후의 러시아문학, 혹은 포스트-소비에트의 문학은 선정에서 빠져 있다. 그건 걸작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음 세기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론, 이 20명의 작가와 작품 목록에 (국내에서 다소 과대평가된) 친기스 아이트마토프(<하얀배>, <백년보다 긴 하루>, <처형대> 등이 번역돼 있다)가 빠진 것이 반갑고, 블라지미르 보이노비치(<병사 이반 촌킨의 모험>, <2040> 등이 대표작이다)가 빠진 것이 아쉽다. 또 하지만, 서두에서 얘기했듯이, 이러한 선정이 편파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일을 벌이면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으므로…

06. 03. 21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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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현대 러시아작가 7인을 만나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19 02:10 
    아트앤스터디 '인문숲'에서 지난 겨울 '로쟈의 러시아문학 기행'의 속편으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 현대 러시아작가 7인을 만나다'를 진행한다(http://www.artnstudy.com/inmoonsoop/Lecture/default1010.asp?lessonidx=off_hwLee07&OVRAW=%EB%A1%9C%EC%9F%88&OVKEY=%EB%A1%9C%EC%9F%88&OVMTC=standard&OVADID=193044
 
 
2006-03-21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3-22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아직 진행중인 글인데요.^^

urblue 2006-03-23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다닐 때 러시아극회에서 <벚꽃동산>을 연극으로 올렸습니다. 그때 어떤 선배의 주장으로 제목이 <벚나무동산>으로 나갔는데, 그런 관점의 차이가 있는 건줄은 몰랐군요. ^^

로쟈 2006-03-23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공자들도 <벚나무동산>을 고집하곤 하는데, 저로선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아름다운 건 '벚나무'가 아니라 '벚꽃'인데요...

Koni 2006-03-23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비극에 주목하나 보죠.^^

로쟈 2006-06-26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출간되자 마자 구입해놓은 책인데, 이 페이퍼에 링크시켜놓는 걸 깜박했습니다.^^

2006-07-31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외톨이 2007-03-27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히 퍼갑니다.

kjklee88 2008-01-10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감사히 퍼갑니다! 네이버 블로그로 퍼갈께요~(주소도 같이 올려놓을께요^^)

2008-09-17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7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이란 제목으로 재작년 6월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을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고종석에 대한 부분만 따로 떼내어 보강하려다가 '자료' 차원에서 글 전체를 다시 옮겨놓기로 한 것이고, 대신에 이미지들을 보강해 넣기로 한다.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정의한 바대로 문체가 '양파' 껍질 같은 것이라면, 내가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김훈, 김규항, 고종석이라는 세 종류의 양파가 되겠다.  

문체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을 적고자 한다. 먼저, 자신만의 독특한 ‘얼굴’ 혹은 ‘손가락’을 가진 작가로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이 김훈이다. 그는 소설가이기 전에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스트이기 전에 언론사 기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과 표정을 그렇게 변화시켜가고 있지만, 나에게 소설가로서의 김훈은 좀 낯설다. 문학판의 각광에도 불구하고(그는 두번째 장편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고, 첫번째 단편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런 건 그들만의 ‘비즈니스’이다. 작품이 있으니까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상이 있으니까 작품을 찾는 것이 문학/출판계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소설가의 손가락’이 아니라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주제를 모른다거나 어리석은 것은 결코 아니다. 에세이로서는 ‘밥벌이’를 할 수 없는 나라가 한국이며, 그는 ‘밥벌이’의 신성함을 누구보다도 ‘지겹도록’ 맹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현재 오랜 기자생활을 그만 둔 그에게 소설쓰기는 그의 밥벌이, 즉 그의 비즈니스이다. 도둑질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게 아닌 이상 남의 밥벌이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다. 그건 각자의 문제이다. 그래서 예컨대, 화장실 청소원에게 혹 “그것도 밥벌이냐?”고 묻는 것은 우스운 일을 넘어서 아주 무례한 일이다. 세상의 밥벌이에는 귀천(貴賤)이 없으므로.

 

 

 

 

나는 김훈의 에세이들을 ‘숭배’하지만(나는 그것들이 국어교과서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소설들은 아직 한편도 읽지 않았다. 그의 에세이들은 출간되자 마자 사들였지만(어떤 건 몇 권씩),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 세 장편 소설에 대해서는 무심하게 대했다. <빗살무늬>는 품절된 이후에야 사려고 돌아다녔는데, 결국 내가 샀는지 못 샀는지도 기억나지 않으며, <칼의 노래>는 대폭 할인할 때에야 ‘싼 맛’에 샀고, <현의 노래>는 사두지 못한 채 모스크바에 왔다. 그러니 내가 그의 소설들에 대해서 말할 ‘지분’은 별로 없는 셈이다.

대신에 나는 북매거진 <텍스트>(2004년 4월호)에서 <현의 노래>에 대한 두 편의 서평을 읽었고, 이 소설에 대한 그림을 대충 그려볼 수 있었는데, 그건 읽지 않은 상태에서 그린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이하의 인용은 모두 두 서평으로부터의 재인용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그를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있다(하긴, 소설을 제외한 그의 글과 인터뷰 대부분을 찾아 읽었으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장편소설’이라고 표지에 박혀 있더라도, 그런 걸 세 권이나 냈더라도 그는 아직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 그가 쓴 건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이 쓴 역사 ‘에세이’이고, 혹은 그에 대한 ‘판타지’이거나 ‘모노드라마’들이다. 그건 박상륭의 ‘잡설’들이 ‘소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어떻게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그의 ‘문체’ 때문이다. 흔히 ‘아름답다’ 혹은 ‘현란하다’고 일컬어지는 것 말이다. 요컨대, 그의 문체는 소설이란 장르, 품위 없고 잡스러운 장르가 요구하는 바 일상적 디테일, 저자거리의 언어를 담기에는 너무 고상하며 품위가 넘쳐난다. 그래서 어색하다. 마치 장미희가 떡장사를 연기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가 아무리 “소설이요!”라고 외쳐도 내겐 “똑 사세요!”로 들린다.

<텍스트>의 두 서평은 ‘모노톤의 복화술’(김용필)과 ‘문체의 아름다움이 놓친 몇 가지’(조은영)란 제목으로 돼 있는데, 서평자들이 지적하는 바나 내가 지금 얘기하는 거나 같은 얘기이다. 그의 소설은 ‘모노드라마’이며, 문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소설을 ‘망쳤다’는 얘기니까. 조은영 기자의 서평은 “그렇다면, 김훈의 진정한 3인칭 소설, 최초의 3인칭 소설은 아직 씌어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조심스러운 진단으로 마무리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물론 신중함은 기자로서의 조건이다). 그는 3인칭 소설은커녕, 소설 자체를 쓴 일이 없고, 앞으로도 별로 쓸 일이 없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예컨대, 김훈은 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악기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그 구멍과 줄과 떨림판과 건반 어디에도 소리의 흔적은 없다. 악기는 소리의 집이지만, 소리는 그 집에서 살지 않는다. 소리는 어디에 있느냐. 소리는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죽느냐. 나는 소리의 거처를 알지 못하지만, 소리는 악기와 그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몸 사이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태어나고 죽는다.”(<밥벌이의 지겨움>, 19쪽) 이런 건, 그의 에세이들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사유이고, 문장이지만, 소설로는 옮겨질 수 없는 문장이다(뿐만 아니라 번역되기도 곤란한 문장들이다. 박상륭의 잡설들이 번역 불가능한 것처럼, 김훈의 에세이들도 번역 불가능하다).

그것이 <현의 노래>에서 “소리는 몸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몸이 아니면 소리를 빌려올 수가 없다. 잠시 빌려오는 것이다. 빌려서 쓰고 곧 돌려주는 것이다. 소리를 곧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 자리는 적막이다. 그 짧은 동안만 흔들리고 구르고 굽이치는 것이다. 소리를 거스를 수 없다.”라는 우륵의 말로 가장(假裝)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게 김훈의 목소리임을 이미 알고 있다. 요컨대, 그의 소설의 언어는 에세이의 언어를 “잠시 빌려오는 것이며, 빌려서 쓰고 곧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 에세이의 자리는 그가 <풍경과 상처>나 <자전거여행>에서 적었듯이 물론 ‘적막’이다(이 적막으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짧은 동안만 흔들리고 구르고 굽이치다가”(빨리 한몫잡고서!) 곧 제자리, 에세이스트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에세이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 정신, 그 문체, 그 손가락, 그 적막을!



김훈의 보수주의를 이문열의 보수주의와 비교하는 시각도 있는데(하긴 쿤데라와 이문열도 양립 가능하다고 동렬에 놓는 시각에서라면야), ‘보수주의’에 대한 얘기를 잠시 미뤄두고, 일단 ‘소설가’ 김훈과 이문열을 비교하는 것 자체는 흥미롭다. 일단 둘 다 ‘소설가’가 아니라는 점, 즉 ‘소설가’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김훈은 이제 막 소설로 밥벌이하고 있으며, 이문열은 소설로 밥벌이를 할 만큼 하자 딴짓을 하고 있다(사실, 한때 소설가이긴 했지만, 요즘도 소설가 이문열 운운하는 것은 좀 우습다. 그의 대표작은 <삼국지>이며, 이번에도 동아일보에 <초한지>인가를 연재하는 듯하던데, 그걸로 미루어도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의 본업은 ‘고전 번역가’이다). 근래엔 둘 다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소설들만 썼다는 것도 공통적이고, 그 소설들이 ‘에세이 정신’으로 충만해 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가령, 이문열의 <선택> 이후의 ‘소설들’). 차이라면, 문체에 있어서, 품위에 있어서, 그리고 언변에 있어서 김훈이 한 수 위라는 것 정도(그런 이문열도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 요즘 좀 특이한 한국사회의 풍경은 자칭 보수주의자들, 즉 ‘자각적인’ 보수주의자들이 (특히 젊은 세대에서) 늘어나고 있는 것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B급 좌파’들이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마치 이전에 ‘보수꾼’들이 ‘빨갱이’(혹은 ‘사회주의자’)란 딱지를 적대자들에게 갖다 붙이듯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술어논리에 의하면, ‘B급좌파’나 ‘보수꾼’이나 똑같게 된다). 그런 식으로 보수주의나 진보주의(혹은 사회주의)의 외연이 넓어지는 것은 ‘언어의 경제’상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보수주의’나 ‘진보주의’란 말의 의미가 불분명해지는 탓에 앞에다 수식어를 더 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노무현 정부는 한쪽에서 보기엔 좌파 사회주의 정부이고, 다른 쪽에서 보기엔 우파 보수주의 정부이다. 그런 ‘딱지’들이 가리키는 바는 대개 “당신은 우리편이 아니다!” 내지는 “우리는 당신이 싫다!”는 정서적 상관물이자 자기정체성의 확인이지 지시적 연관성을 갖는 논리가 아니다.

김훈과 이문열의 보수주의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건 대국적 견지에서의 ‘통찰’이긴 하지만, 섬세하지는 않다. 김훈은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이다(이문열도 허무주의자인가?). “아마도 소리와 병장기는 같은 것인 모양이구나”(<현의 노래>)라는 통찰, 즉 악기와 무기는 등가이며, 펜과 칼은 같은 것이라는 그의 주장 혹은 자기암시는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변증법적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그게 그거라는 허무주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허무주의야 말로 모든 것을 ‘풍경’의 자리에 갖다 놓는 그의 에세이스트 정신에 부합한다. 풍경의 자리에 놓일 때,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사계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충만하며 허무하고 부질없다. 역사 또한 그는 그 ‘풍경’의 자리에다 놓고 묘사할 따름이다.

<현의 노래>의 한 장면에서 김훈이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빨아당기는 속살이 어째서 왕의 무덤 속에 들어가 쇠와 함께 썩어야 하는가. 야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117-8쪽)라고 묘사할 때, ‘야로’는 김훈 자신이며,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야말로 그의 ‘허무주의’의 근거이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풍경의 ‘적막’이다. 그는 언제나 그 풍경 앞에서, 허무 앞에서, 적막 앞에서 기진맥진하였고, 그러면서 마치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이 험난한 사투 끝에 돛새치의 뼈다귀만을 건져 올리듯이 자신의 문체를 길어냈다. 언제나 칼로 깎은 연필을 손가락에 쥐고 원고지에 쿡쿡 눌러써가면서 말이다(왜 칼과 펜이 등가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그의 ‘기진맥진’에, 그의 ‘문체’에 나는 언제나 경의를 표한다.

반복하자면, 내가 보기에 김훈에게서 더 핵심적인 건 그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허무주의이다. 그가 ‘보수주의자’라면, 그에겐 ‘보수’나 ‘진보’가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가 가부장(家父長)적인 사고의 틀을 고수한다는 의미에서일 뿐이다(언젠가 이 때문에 ‘김훈 파동’이 한번 있었다). 그는 무어라고 말하는가?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 언어를 다루는 일의 힘겨움을 생각한다면 등에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이 고백에 그의 진실이, 핵심이 담겨 있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가 뜻하는 바는 말의 허무주의, 의미의 허무주의이다. 그래서 그에겐 그러한 의미(=기의)보다 말의 뼈(=기표), 말의 잔해, 말의 화석이 더 중요하다. 그가 일상적 시간(=밥벌이의 시간)이 아닌, 역사적 시간, 더 나아가 지질학적 시간에 언제나 매혹되며 거기에 붙들려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예컨대, <현의 노래>의 구상 또한 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우륵의 가야금에서 얻어졌다고 하지 않는가? 그 천년의 ‘적막’이 곧 그의 ‘질퍽거리는 구멍’이다.



작가는 ‘천년의 적막’을 탐사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문체를 낳은 허무주의는 좀더 실제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고백한바 있지만, 그는 5공 때 한 일간지의 젊은 기자로서 군사정권에 대한 ‘용비어천가’에 앞장섰던 경력이 있다. 그가 신념(=이즘)을 갖고 그 일에 나섰던 거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것이 ‘신념’이 아니라 ‘처세’였더라도 마찬가지이다(그랬더라면 이후에 다른 ‘기자들’처럼 금배지라도 달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를 그 일에 내몬 것은 ‘신념’도 ‘처세’도 아닌 ‘체념적 자학’이고 ‘허무’였다. 당당하게, 폼나게 사표를 던질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의 논리는 좀 다르다. 그 대신 다른 누군가가 결국 그 일을 해야 했을 거라는 것. 즉, 한 사람이 폼나는 대가로 또 다른 누군가가 오물을 뒤집어써야 하는 것이다. 그럴 거라면, 자신이 하겠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건 그러한 ‘자발적 부역’에 대한 변명의 논리이다. 그의 ‘부역’은 오직 그가 문장에서 ‘의미’를 버릴 때에만 가능했다. 그것이 그의 의미론적 허무주의의 기원이다.



 

 

 

한편으로, 대장부의 길과 가장(家長)의 길은 좀 다른 길이다. ‘질퍽거리는 구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달리 식구(食口)들의 ‘입구멍’이다. 한 가장이 해야 할 최소한이란 그 구멍을 채워 넣을 밥벌이를 하는 것이다. 유구한 일이지만, 대장부의 ‘명분’은 우리를 한번도 밥 먹여주지 않았다(밥 먹여주기는커녕 죽이지만 않아도 다행이겠다. 오, 계백이여!) 후배 박래부 기자와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문학기행>이 책으로 묶여 나왔을 때, 김훈이 썼던 서문에는 그의 가족사 한 자락이 들어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엄하고 혹독한 분이었는데, 자주 ‘세상을 저버린 자’처럼 세상에 대한 분노와 허무를 무지막지한 술로 달랬다. 그리고 그런 날 새벽이면, 소년 김훈은 해장국 심부름을 가야 했다고. 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에도 그는 해장국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그만 뚝배기를 바지와 길바닥에 다 엎지르고 말았다. 새벽녘 길바닥에서 그는 목놓아 엉엉 울면서 절대로 아버지와 같은 삶은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아버지와 같지 않은 삶? 그건 대장부의 삶이 아니라 충실한 가장의 삶이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것은 대장부의 논리가 아닌 바로 가장의 논리이며(대장부는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지만, 가장은 한 입으로 두 말 해야 할 때가 있다), 가장으로서의 김훈이 발명해낼 수밖에 없었던, 발명해내지 않으면 안되었던 논리이다(자신의 아들에게 주는 편지에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바도 ‘자기 밥벌이’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당연하다. 그 ‘밥벌이’에 그의 오욕과 영광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허무주의는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장(家長)의 허무주의’이다. 그 허무주의는 결코 겉멋이나 잘난 체가 아니며, 젊은 치기나 늙은 달관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자 김훈이 밥벌이를 하기 위한, ‘유능한’ 가장이 되기 위한 허무주의였다. 어찌 그의 허무주의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나는 6하원칙의 신성함을 믿는다. 다만 6하의 가치와 존엄을 인정하되, 6하로서 충족될 수 없는 진실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뿐이다.”라고 그는 또 말한다. 복습하자면, 그가 말하는 ‘6하원칙’이란 ‘밥’과 동의어이다. 기자 김훈은 어떤 원칙의 신성함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밥의 숭고함과 밥벌이의 신성함을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기자의 밥벌이란 ‘6하원칙’에 맞게 기사를 쓰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또한 ‘6하원칙’이라거나 ‘밥벌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건 앎일 수도 있고, 직관일 수도 있고, 양심일 수도 있다.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가져오자면, ‘죽음 충동’이라 지목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죽음충동은 삶 혹은 생존에의 의지를 ‘전부가 아닌(not-All)’ 것으로 잠식하며, 거기에서 기자 김훈이 아닌 에세이스트 김훈이 태어난다.

 

 

 

 

가장은 자기 식구들의 밥벌이를 하는 것으로 충분히 존엄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은 그가 다 먹여 살릴 수 없는 ‘구멍들’ 천지이다. 그 구멍들 앞에서, 어느 봄날 전군가도(全群街道)에 무지막지하게 흩날리는 ‘사쿠라’ 꽃잎들 앞에서, 그는 할딱이며 기진맥진이고 속수무책이다. ‘6하’로 기술될 수 있는 세상의 진실들은 몇십 년 기자생활의 ‘짬밥’으로 어떻게든 카바한다지만, 그걸로 충족되지 않는, 그걸 넘어서는 진실들은 다 어찌한단 말인가? 에세이스트 김훈은 그 ‘충족될 수 없는 진실’들을 (‘가부장적’ 책임의식을 가지고!) 기록하고자 분투하지만, 그의 자백대로 언제나 ‘백전백패’이다. 그의 문체는 그 싸움에서 얻어진 전과이되, 패장(敗將)의 그것이어서 아름답지만 속절없다. 아마도 김훈 자신이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스트 김훈의 허무주의는 기자 김훈의 그것과 같이 ‘가장의 허무주의’이되, 이 대책 없는, ‘무능한’ 가장의 허무주의이다. 어찌 그 허무주의가 안쓰럽지 않겠는가? 하여 그 ‘허무주의들’에 비하면, 보수주의란 딱지는 사소하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사르트르에 의하면, 현실과 지시적 연관을 갖는, 그러니까 현실을 ‘앙가제’하고, 현실에 ‘앙가제’하는 문학은, 곧 소설은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에 복무해야 한다(그는 총구를 제대로 겨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무엇을’을 달리 ‘의미’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순수한 음악의 상태, 무의미의 상태를 지향하는 시와는 달리, 산문(=소설)은 무엇보다는 ‘의미’해야 하며, 의미-지향적이어야 한다(그것이 시와 산문의 차이이다). 비록 그 의미가 단선적이거나 독백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카뮈와의 논쟁에서 사르트르-장송이 지적했던 바는 카뮈의 아름다운 문체가 ‘앙가주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의 아름다운 문체,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허무주의적 세계관(“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은 소설에 적합하지 않다. 소설가의 문체는 적당히 아름다워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 그것이 ‘산문적 일상’을 묘사/기술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즉 소설가가 자신의 얼굴, 필체, 문체를 갖는 건 바람직하며, 동시에 좋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문체’이어서는 안된다(<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란 프랑스 영화의 문제의식이기도 한데,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아내’로서 적합하지 않다. 결혼생활은 ‘산문적’이기 때문이다).



<현의 노래>의 서평이 들어 있는 <텍스트>(4월호)에는 ‘여성’을 주제로 한 서평들도 여러 편 모아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한국어로 ‘아름다운 페미니스트’란 부제를 달고 나온 <글로리아 스타이넘>이다. 플레이보이의 바니걸로 위장취업할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미국의 이 대표적인 ‘스타’ 페미니스트 운동가의 평전인데, 스타이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녀의 ‘너무 아름다운 외모’는 페미니즘에 혼란과 지장을 초래한다. “곧 그녀는 페미니스트이기에는 너무 예쁜 여성인 것이다.” 그래서 튄다. 다르게 말하면, 그녀는 ‘문체적/문채적’이다. 가령, 그녀의 50세 생일파티 풍경. “보스턴의 부동산 부호가 파티준비를 돕겠다고 나섰고, 파티 장소는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 그랜드볼륨이었다. 베트 미들러의 축하공연이 있었으며 스타이넘의 어린 시절과 젊었을 적 사진이 실린 생일 책이 전시되었다. 언론 또한 이 파티를 크게 다루었다. 스타이넘은 일에서나 개인적으로나 인생의 정점에 서 있었다.”

페미니스트의 삶이 불행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성공적인’ 페미니스트란 건 뭔가 어색하다. 결국 페미니즘은 그녀의 미모와 상승작용하며 스타이넘이란 한 여성에게 ‘성공한 삶’을 가져다 준 것이지만, 그것이 전체 페미니즘, 혹은 억압받는 여성 전체의 삶과는 과연 얼마만큼의 관계가 있을까? 그녀를 비판하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대로, 차라리 스타이넘이란 ‘스타’ 없는 페미니즘이 더 낫지 않았을까?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못생겨야 할 필요는 없지만, 적당히 못생길 필요는 있다(그래야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주장을 듣는다). 즉 적당히 예뻐야 한다. 그건 다른 모든 ‘산문적’ (정치적)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시적인’ 외모는 ‘산문적’ 일상에 적합하지 않다.


 

 

 

이건 너무 ‘마초적인’ 생각인가? 가부장적인 김훈은 ‘마초적’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그 자신은 거기에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념적으로 그와는 좀 거리가 먼 ‘B급 좌파’ 김규항조차도 똑같이 ‘마초적’이란 비판을 받곤 한다는 점이다(술어논리에 따르면, ‘보수주의자’ 김훈과 ‘진보주의자’ 김규항은 똑같다). 그건 그가 성모순보다 계급모순이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그리고 그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공격적으로 드러낸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사실 나로선 그의 비판자들보다는 그의 의견에 공감하는 바가 더 많다. ‘중산층 페미니즘’, 즉 “계급과 사회구조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페미니즘은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다른 여성, 빈민, 식민지인)’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벨 훅스, <행복한 페미니즘>)는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이다(<텍스트>의 서평에서 인용).

그런 의미에서 이 페미니즘은 민주주의와 똑같은 딜레마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 또한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민주주의의 기원으로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바탕은 노예제였다). 미국, 프랑스, 영국 등 대부분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경영국가, 제국주의 국가였던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라크 침공을 거론하면서 이런 것이 미국의 민주주의냐고 비판하는 것은 따라서 예리하지 못하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반민주주의적, 제국주의적 행태이기 때문이다.

다른 데서 착취해야지만, 자국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한국의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적 ‘평등’은 국외적 ‘차별’에 의해서 지탱된다). 민주주의가 고상하고 고급스런 제도라는 건 그런 뜻에서이다(어느 정도의 경제적 바탕, 가령 1인당 국민소득 1만불 이상이라든가 하는 토대가 마련돼야지만, 민주주의란 제도는 작동한다). 이러한 사정은 ‘고상한’ 페미니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고상한 것들이란 원래 그 모양이다). 나는 다른 민주주의, 다른 페미니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자신할 수 없다.


 

 

 

내가 김규항을 처음 알게 된 건, 그러니까 그의 글을 처음 읽게 된 건 <씨네21>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지면을 통해서였다. 공동으로 연재하던 몇 사람의 필자들 가운데에서 유독 그가 눈에 띄었는데(그는 아마도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지면이 낳은 최고의 ‘스타’일 것이다), 그건 그가 자신의 ‘문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더라도 그의 문장들은 ‘김규항’을 입증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비유컨대, 김훈의 문체가 아름답고 유장한 ‘패장(敗將)의 문체’라면, 김규항의 문체는 ‘자객의 문체’이다. 백전백패를 ‘자랑하는’ ‘패장의 문체’와는 달리, ‘자객의 문체’는 ‘무엇을’에 ‘어떻게’가 복무하는 문체이다. 마치 자토이치의 검술처럼, 그는 짧게 끊어서 군더더기 없이 급소들만을 공격한다. 그래서,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때에라도 그의 문장(=수사학)에는 매료되었다. 이후에 내가 가급적이면 그가 쓴 모든 글을 챙겨 읽고자 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에 인터넷에서 그가 쓴 글을 읽고 다소 실망했다. 유시민에게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붙이는 글이었는데, 내용에 실망한 게 아니라(“나는 유시민을 보수주의자로 본다”는 데 어쩔 것인가?), 문체가 예전의 문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온라인 글쓰기의 특수성을 고려한다고 해도(설마 그런 류의 글들이 공식적으로 출판되는 걸까?) 그의 글은 더 이상 김규항의 ‘얼굴’도 ‘필체’도 보여주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손가락’ 대신에 글의 ‘내용’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되었다.

김규항의 문체를 ‘자객의 문체’라고 했는데, 그의 칼끝이 유독 예리하게 겨냥하는 것은 우파(=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자신이 유사-좌파(=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것이 좌파 전체의 ‘이익’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유시민을 전여옥과 ‘똑같은 놈’이라고 배제함으로써, 좌파는, 혹은 민노당은 어떤 이익을 챙기는지) 모르겠지만, 유사-좌파들을 걸러내는 일을 이 ‘B급 좌파’는 자신의 소명으로 간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단순하게 말해서, 민노당을 지지하지 않은 90% 국민들, 혹은 요즘 지지율이 좀 올라갔다고 하니까 한 70%의 ‘불순한’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들을 어떻게 걸러내고 순화/훈육/계몽해야 하나?). 그것은 한국의 논객 중 가장 ‘좌파적’이라 할 만한 자신의 입지/주장을 ‘B급’이라고 공언하는 그의 ‘결벽’에 이미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좌파의 ‘최소한’이라고 간주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기준에 미달한다면, 모두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뒤집어써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준에 따를 때, 제도권 좌파, 즉 개량주의적 ‘의회주의 좌파’는 진정한 좌파인가? 동급의 의원으로서 한나라당 의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정을 논할 민노당 의원들은 과연 좌파다운 좌파인가? 대학에 몸담고 있는 제도권 좌파, 자칭 ‘좌파’ 교수들은 과연 진짜 좌파이며 진보주의들인가?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면서 ‘아빠’로서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일(“너희는 이렇게 바르게 살아라!”)은 진정 얼마나 좌파적인가? 혹은 한국의 자본주의라는 ‘식인체제’ 하에서 구차하게 계속 살아가는 일은 과연 얼마나 좌파적인가? 등등.

‘자객식’으로 말하자면, 사실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놈들”은 전부 보수주의자이고, “죽지 못해 안달인 놈들”이 진보주의자이다. 유기체의 생존은 ‘항상성(호메오스타시스)’이라는 걸 조건으로 한다. 항상성이란 건 ‘기브 앤 테이크’, 즉 주고받는 타협을 통해서 유지된다. 단칼에 자결하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일은 언제나 그러한 ‘타협’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인간조건이다. 그럴 경우, 급진적인 진보주의 혹은 절대적 진보주의(‘숭고한 A급 좌파’란 게 있다면)란 그러한 타협과 인간조건으로부터의 ‘단절’을 뜻한다. 즉, 결코 타협하지 않으며, 죽음을 무릅쓸지언정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것(지젝 같은 좌파가 ‘죽음충동’에 그토록 매혹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그에게 유일한 ‘행위(act)’는 상징적 ‘자살’이다). 지젝과 네그리 같은 좌파들은 모두 기계-인간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바, 그것은 현재의 인간조건이 극복되어야지만 진정한 ‘진보’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김규항도 그러한지?).



 

 

 

사실, 새로운 사회를 위한 ‘새로운 인간’이란 테마는 러시아문학에서는 이미 고전적인 테마이다.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1863)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가 정면충돌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를 둘러싸고서이다. 1917년 혁명 이후에 역사는 한동안 체르니세프스키의 편이었다. 사회주의 인간형, 혹은 공산주의 인간형이 인민들에게 요구되었고(그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벌레’로 낙인찍혔다), 인간개조론이 제기되었다. 요컨대, 일차적 본성이든(공병호가 얘기하는), 이차적 본성이든(아도르노가 얘기하는), 현재의 ‘이기적인’ 인간본성을 가지고는 사회주의 유토피아(=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공산주의는 ‘인간들’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천사들’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왜 누구는 대학교수를 하고, 누구는 탄광노동자를 해야 하는가? 그걸 누가 결정하는가? 제비뽑기로 결정하는가? 혹은 로테이션을 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허용해서는 사실상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자발적인 ‘의무감’에 따라 마치 ‘기계’처럼 처리되는 수밖에 없다. 즉 인간-기계, 기계-인간들을 만들어내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좌파적 휴머니즘’이란 말은 ‘듣기 좋은 소리’이거나 넌센스라고 생각한다(그런 얘기를 들먹이는 좌파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C급이다). 휴머니즘을 가지고는 ‘좌파’를 할 수도 없고, ‘좋은 세상’을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진보가 변화/변혁에 대한 요구를 의미할 때 가장 먼저 변화/변혁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며, 인간조건 자체이다(기계-인간이 되기 전이라도 최소한 ‘강철 인간’은 돼줘야 한다. ‘스탈린’이란 이름에 새겨진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인간복제라거나 유전자 조작을 가장 앞장서서 환영해야 할 사람들은 라엘리안들이 아니라 좌파들이다. 그리고, 인간본성 운운하며, 인간복제에 반대하는 하버마스 같은 철학자야말로 유사-좌파, 즉 보수주의자이다. 진정한 좌파가 되기 위해선, 모성을 버리고, 부성도 버리고, 인간성 자체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유토피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리라(모스크바-유토피아의 ‘새로운 러시아인’들처럼). 좌파, 혹은 ‘에덴의 기계들’에게 입력된, 프로그래밍된 행복!

말이 좀 길어졌다. 요점은 보수주의자니, 진보주의자니 하는 딱지 붙이기가 얼마만큼의 준거성, 혹은 의미연관성을 갖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급진적 환경주의자들에 따르면, 환경문제의 해결은 이 지구의 암종인 인간이란 종이 완전히 사라질 때에야 가능하다. 거기에 무슨 타협의 여지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 서면, 좌파니 우파니 하는 구분은 사소하다. 좌파 박테리아와 우파 박테리아가 아웅다웅하고 있는 것이기에. 빨간색이건 파란색이건 박테리아는 박테리아일 뿐이다. 거꾸로 그런 게 아니라면, ‘작은 차이’를 중요하게 간주해야 한다. 좋은 사회, 혹은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하는 강박관념이나 순수에의 결벽에 들려 있지 않다면 말이다.

김훈과 이문열은 다르며, 유시민과 전여옥도 다르다. 그리고 전두환과 김대중이 다르며, 노무현과 이회창도 다르다. 그리고 부시와 케리도 다르다. 그들은 아주 조금 다를 뿐이지만,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게 내 상식이고 정치적 감각(이기 이전에 일상적 감각)이다. 나는 우리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될 거라고 믿지 않지만 적어도 ‘덜 나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덜 나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식과 감각이 필요하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덜 나쁜 사회’의 의의를 가르쳐준 이는 기자(요즘은 편집위원이던가?)이자 에세이스트이며 소설가인 고종석이다(자칭 ‘자유주의자’인 그가 복거일의 제자를 자처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 또한 ‘문체’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 문체는 화려하지도 간결하지도 않으며 그저 담백하다. 그리고 상식적이다. 그는 허무주의자(혹은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B급 좌파도 아니다. 그는 개인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이다. 이념의 스펙트럼 속에 굳이 자신을 분류해 넣어야 한다면, 나는 그와 같은 칸에 분류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즉 나의 정치적 입장은 그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것은 내가 그만큼 그에게서 감화를 받은 바가 많은 탓일 것이다(그에 따를 때, 외모에 의한 서열화는 지성에 의한 서열화보다 더 나쁘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이것도 마초적인가?).

김훈, 김규항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고종석의 (모든 글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글들을 읽었고, 읽고자 했다.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서얼의식’은 갖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특별한 트라우마나 결벽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논리적이지만, 모나지 않고 둥글다. 따라서, 그런 그의 문체가 소설이란 장르와 잘 어울리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김훈이 소설을 못 쓰고, 김규항이 소설을 안 쓰는 데 반해서, 고종석은 소설을 잘 쓴다(이 세 ‘글쟁이’를 내 식대로 분류하자면, 김훈은 ‘예술가’이고, 자칭 ‘출판인’이어서 ‘출판운동’을 하는 김규항은 ‘운동가’이며, 고종석은 ‘지식인’이다). 더불어, 그에게선 기자와 에세이스트와 소설가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지도 날카롭지도 않지만 담담하면서 유려한 그의 문체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체는 그렇게 그 사람이 된다…

06. 03. 19 -20.

P.S. 언젠가 김규항의 홈피에 들렀다가 인상깊게 읽은 것이 그의 '문장론'이다. 작년 8월에 씌어진 것인데, 이상하게도 9월에 나온 그의 책 <나는 왜 불온한가>(돌베개, 2005)에는 실려 있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의 '문체'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필히 읽어볼 필요가 있는 글이다. (저작권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여기에 옮겨놓는다(부분 발췌하고자 했으나 저자의 뜻이 훼손될 우려도 없지 않아 그냥 그대로 옮겨놓는다). 여기서도 군말과 강조는 나의 것이다.

-이따금 “문장론이 뭐냐”는 식의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현실에 익숙하지(하고 싶지) 않아서 늘 대답을 흐리곤 한다. 사실 나는 어떤 문장론을 갖고 글을 쓰진 않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 나는 글의 소재를 얻기 위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쓴다. 어쨌거나, 문장론이 있든 없든, 내가 초고를 써놓고 퇴고를 거듭하는 걸 보면 나에게도 문장에 대한 어떤 태도는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건 두 가지일 것이다. 간결함과 리듬.(*그러니까 그에게 글, 혹은 문장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소통을 위한 수단이다.)

-내가 쓰는 글의 8.5할쯤에 해당하는, 공을 들여 쓰는 글은 초고를 쓰면 적어도 서너 번 이상은 퇴고를 한다. 군더더기라 느껴지는 건 망설임 없이 없애거나 좀 더 간결한 표현으로 바꾼다. 나는 중언부언 하는 것만 군더더기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쓸데없이 화려한 표현도 군더더기라 생각한다. 그리고 부러 반복 효과를 내려는 게 아니라면 같은 글에선 같은 단어를 쓰지 않는다. 10매 이하 칼럼에선 반드시, 30매가 넘어가는 긴 글에선 되도록 그렇게 한다. 동시에 리듬을 만들어간다. 거창하게 말해서 운율을 맞추는 건데, 눈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서 리듬감이 흐트러지거나 호흡이 끊기는 부분은 글자 수를 고치거나 단어를 바꾼다.(*'간결함'이 그가 첫손에 꼽는 글의 요건이다. 앞에서 나는 그의 '자객의 문체'가 '자토이치의 검법'을 연상시킨다고 적었다.)  

-간결함과 리듬이 덜 다듬어진 글을 내놓는 것처럼 불편한 일은 없다. 어쩌다, 내 글의 1.5할쯤에 해당하는 글에서, 이런저런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도리 없이 그러곤 하는데 그런 글들은 그저 실용적인 이유를 위해 일회용으로 존재한 것일 뿐, 내가 썼지만 더 이상 내 글은 아니라 여긴다. 간결함과 리듬 말고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쉽게 쓰는 것이다. 나는 왜 거의 모든 글쟁이들이 글은 쉬우면 쉬울수록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배운 사람들이나 알아먹는 어려운 말을 이유 없이 쓰지 않는 건 물론이려니와 되도록 한자말을 줄이려고 애쓴다.(*하지만, 모두가 간결하고 쉽게 쓴다면 '간결함'과 '쉬움'이라는 미덕 자체가 증발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간결함, 리듬, 그리고 쉬움 같은 문장에 대한 내 모든 태도들은 오로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이오덕 선생이 말씀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믿는다. 모름지기 글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글을 씀으로서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

앞에서, 김규항은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라고 적었지만, 이 마지막 문단에 의거할 때 그건 그의 문장론으로서 불충분하며 부정확하다.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고 할 때 '문장'은 '삶'과 등가화되고 있으며, 그럴 때 '문장'은 단지 수단에만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그의 삶이다. 그러니, "문체는 곧 사람이다"(뷔퐁)라는 고전적인 명제에 기대지 않더라도 나는 그가 '문체주의자'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 또한 'B급 좌파'이면서 동시에 '양파'인 것이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양파'는 롤랑 바르트의 그것처럼 그저 텅빈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러시아 정교회 사원 지붕들에서 보듯이 신성함에의 의지와 염원을 담고 있다. 내가 문체주의자들을 존중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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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3-19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많은 부분에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자객식’으로 말하자면, 사실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놈들”은
전부 보수주의자이고, “죽지 못해 안달인 놈들”이 진보주의자이다.

아주 흥미롭습니다.^^

blowup 2006-03-1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한번쯤은 이 세 사람을 묶어서 글을 쓰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로쟈 님이 하셨네요. 저는 소설가 고종석에게서는 허무주의자의 숨결을 느끼곤 합니다. 그의 문체가 담백하다고 하셔서 사실 놀랐습니다. 의미의 뭉개짐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가, 가르고 고르고 조합하고 만들어내는 단어들에서 저는 현란함을 느끼거든요. 그 어지럼증을 즐기는 거지만. 글 퍼갈게요.

twoshot 2006-03-19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에 대한 혐오가 그득했는데 로쟈님의 글을 읽고 조금 누그러 졌습니다. 보수주의자도 좋고 허무주의자도 좋은데 그것이 넘치는 자기연민처럼 보일때는(그러니까 '용비어천가'를 부르던 시절에 대해 말할때) 참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고종석의 경우 인물과 사상에 쓴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 대한 신랄한 비평에서 보듯 더이상 제자로 남고 싶는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krinein 2006-03-20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행중'이라면 아직 완성된 글이 아닌 건가요? 괜찮으시다면 글을 퍼가겠습니다.

로쟈 2006-03-20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아직 진행중이고 가급적이면 완성되 후에 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페일레스 2006-03-20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로드무비님과 나무님 말씀에 공감하며... 제가 왜 김훈(의 글)에 그리 끌렸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yoonta 2006-03-21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로쟈님 페이퍼중에서도 발군인듯..^^
다만 좌파이기 위해서는 기계-인간이 되어야한다라는 부분은 좀 논란이 될만한 야이긴데..A급좌파이기 위해서 인간개조의 이론을 가져야만 하는지 아닌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좌파이기 위해서는 "기계-인간은 아니더라도 강철인간은 되어줘야 한다"라는 말은 현실에 타협하면서 (생계형) B급좌파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기자신을 변명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로쟈 2006-03-21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계를 돌보지 않고 썼던 것인데, 많이들 읽어주시는군요.^^ '기계-인간' 문제는 나중에라도 자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겠죠. 그리고, '생계형 B급 좌파'라고 보신 건 yoonta님 나름의 분류이시겠으나 저와는 다소 무관합니다('우파가 아니면 좌파다'란 잣대를 적용하지 않는 한). 본문에 적었다시피, 저는 김훈과 김규항과 고종석을 모두 지지하니까요(정치적 포지션상 가장 가까운 '자유주의자' 고종석은 '좌파'가 아닙니다). 단, 그들의 문체를. 굳이 분류하자면, '문체파' 혹은 '문장파' 그도 아니면 '양파'로 해주십시오...

로드무비 2006-03-21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퍼갑니다.^^

이리스 2006-03-2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파! ㅎㅎㅎ
저도 이글 퍼갑니다.. ^^;;

마늘빵 2006-03-2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로쟈님의 내공은 깊이를 모르겠군요. 퍼갈게요. ^^ 꾹.

urblue 2006-03-21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

Koni 2006-03-21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양파 중에 고종석 양파에 가장 관심이 있어서 열심히 읽었는데, 고종석 부분이 너무 짧아요.ㅠ_ㅠ

로쟈 2006-03-2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오님/ 그게 원래는 김훈에 대한 걸 쓰다가 두 사람 얘기로 확장돼서 그렇습니다. 한데, 세 '양파' 중 가장 덜 튀는(공감하는 바가 가장 많기도 하고) 고종석에 대해서는 그만큼 할 얘기가 없기도 합니다. 저로선 그의 칼럼들을 열심히 읽는 것으로 당분간은 만족할 거 같습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03-28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보고 퍼갑니다-

wnsgml 2007-12-0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게 읽게 되었네요 글 조금 가져갑니다 ㅡ

turk182s 2008-01-0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로쟈님 늦게읽었네요..아마도 로쟈님한테 알라딘에서 상줘야해요,,님덕분에 구입한 책이 저도몇권인지..이런게 플라톤의 극장의우상 이라고하나? 암튼 직장이 이런거하고 전혀 먼분야인지라 ,,그냥 이렇게 도움받으며 사네요,, 인문학을 공부하는게 겨우 지적만족을 향유하는거라면 저도 결국 상류층적 상징자본을 쫓는 것일테고..요즘은 그냥 어떻게 생각과 실천이 결합해야하나 라는 20대 초반때의 원론적 고민이 뼈저리게 생각이 듭니다. 귀족적인냄새가 조금나지만 그래도 노조쪽에 참가해야하나라는 생각,시골에 내려가 풍류나 읅으며 살겠다는생각등등.. 이러다 생각정리되면 뭐가나오겠죠,근데로쟈님은 서울쪽에 계신지.나중에기회되면 술이라도 한잔 ㅎㅎ 글퍼갑니다.

외계인교신장치 2008-03-01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미학적 행보의 끝에 위치한 관념이 무엇인지 잘 보고 갑니다 가지런하고 반듯하게 잘 골라 분류하셨네요 서재가 참 풍부하고 아름다와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