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모출스키(1892-1950)의 <도스토예프스키1,2>(책세상, 2000)에서 발췌/정리한 부분을 옮겨온다. <악령>에 관한 해설인데, 도스토예프스키의 '표현예술'에 대한 저자의 해명을 포함하고있다. 모출스키의 평전은 한국어로 구해볼 수 있는 가장 권위있는 책이다. 양과 질에 있어서 가장 깊이있고, 해박한 도스토예프스키 전기라고 할 수 있다. 바흐친의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정음사, 1989; 중앙대출판부, 2003)과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 이해와 연구에 있어서 필독서라 할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러시아문학자 콘스탄틴 모출스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구조와 기법의 모든 특수성은 예술적 표현성의 원칙으로 설명된다. (1)주인공의 개성을 중심으로 한 사건 집중, (2)구조의 극적인 요소, 그리고 (3)어조의 수수께끼가 바로 '표현 예술'의 세 가지 특징이다.

(1) 작가는 단지 인간과 그 세계, 그리고 그의 운명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주인공의 개성이 작품 구성의 중심축이다(이 작가와 주인공의 자세한 관계는 바흐친의 저서를 참조할 수 있다. 바흐친은 이러한 특징을 '다성악적 소설'이란 개념으로 정식화한다). 이 축을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이 배분되고, 플롯이 구성된다. <죄와 벌>의 중심에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서 있다. 그리고 <백치>의 중심에는 므이시킨 공작이 있다. 이런 집중화는 <악령>에서 그 극치에 이른다. 작가의 노트에서 우리는 이미 다음과 같은 메모를 발견했다. "스타브로긴이 전부다." 그리고 실제로 소설 전체가 스타브로긴의 운명 그 자체이며, 모든 것이 그에 관한 것이고, 모든 것이 그를 위한 것이다. 아래는 연극 <악령>의 한 장면.

(2) 도스토예프스키의 표현 예술의 두번째 특징은 바로 연극성이다. <악령>은 비극적이고 희비극적인 가면들의 무대이다. 도입부 후, 다시 말해 과거 사건들에 대한 짧은 설명과 주인공들의 성격 묘사 후에 발단이 뒤따른다. 스타브로기나는 스테판을 다샤와 결혼시킬 계획을 세운다. 발단은 두 개의 극적인 대화로 구성된다.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 세상은 복잡한 상호왕래와 도덕적인 전일체처럼 이루어진다. 모든 주요 인물들이 '중요한 날'인 일요일에 '우연히'; 바르바라의 응접실에서 만난다. 이러한 운명적 우연성은 도스토예프스키 세계의 법칙이다. 그는 극적인 기법인 이 관례를 심리적 필연성으로 변화시킨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사랑과 증오로 서로에게 끌리며, 우리는 그들의 접근을 주시하고 갈등의 불가피성을 예감한다. 작가는 폭발을 앞두고 속도를 지연시키며 우리를 괴롭히고(독자의 흥미를 높이기 위해 진행을 늦추는 수법), 우리의 기대를 점점 고조시키면서(점층법), 거짓 대단원으로 우리를 속이고(급변), 마침내 대파국으로 놀라게 한다. 이것이 그의 역동적인 구성방식이다.

(3) 도스토예프스키의 표현예술이 갖는 세번째 특징은 바로 재미다. 작가는 독자들을 자신이 의도한 세계로 끌어들이고, 그들의 공감과 참여를 요구한다. 독자의 활동은 사건의 신비스럽고 낯설며 특이하고 예기치 못한 성질에 의해 유지된다. 작가는 자신의 개인적인 평가와 수수께끼, 암시 등으로 인상을 예상하고 강화한다. 수수께끼들은 또다른 수수께끼들 위에 계속 쌓인다. 이러한 수수께끼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좋아하는 표현기법이다. 하나의 비밀을 파헤치면 또다른 비밀이 나타난다. 끊임없이 비밀을 파헤쳐도 여전히 '혼돈의 숲'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우리는 복잡한 여러 가지 사건들의 그물 속에 빠져 어쩔 수 없이 탐구자 또는 탐정이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노트에서 소설의 독특한 어조에 대해 썼다. "이 작품의 어조는 네차예프(표트르 베르호벤스키)와 공작(스타브로긴)을 설명하지 않는 데에 있다. 그(네차예프)를 숨겨두고 강렬한 예술적 특징을 통해서 아주 조금씩 공개한다." 공작은 '불가사의하면서도 낭만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 속의 두 명의 '악마들'에게 특별하면서도 고통스러운 표현성을 부여한다. 무의 공허함은 그들의 환상적인 특징들 속에서 빛난다. 부정과 파괴의 영혼들은 끝까지 설명되거나 표현되지 못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뛰어난 창작술은 어둠의 점층과 빛의 대조, 그리고 이중 조명 속에 존재한다.(642-650쪽)

06. 0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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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때문에 몇년 전에 몇 자 적어둔 글을 옮겨온다. 카뮈의 <전락>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면서 쓴 거 같기도 하다. 카뮈의 생애에 관해서는 올리비에 토드의 <카뮈>(책세상, 2000)를 참조했었다. 국내에서 나온 입문서로는 유기환 교수의 <알베르 카뮈>(살림, 20004)와 박홍규 교수의 <카뮈를 위한 변명>(우물이있는집, 2003) 정도를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으로 꼽아볼 수 있겠다. 물론 카뮈에 관한 가장 방대한 연구는 국내 최고의 권위자인 김화영 교수의 <문학 상상력의 연구>(문학동네, 1998 개정판)를 꼽을 수 있으며, 가장 최근에 나온 연구서는 김진식 교수의  <알베르 카뮈의 통일성 향수와 미학>(울산대출판부, 2005)이 있다.

카뮈(1913-1960)가 영향을 받은 러시아 작가들을 들라면, 톨스토이(1828-1910)와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가 대표적이겠지만(레르몬토프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전락>의 원고는 <우리 시대의 영웅>이란 제목이 붙을 뻔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에는 아무래도 도스토예프스키의 흔적이 더 많이 배여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전락>(1956)이다.

 

 



 

이 작품은 카뮈가 43세 때 쓴 것이고, 그가 1960년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에, <최초의 인간>을 제외하면 거의 유작과도 같은 작품이 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역시나 도스토예프스키가 43세 때 쓴 작품)에 대한 20세기 버젼(혹은 변형)으로 이해한다. 나 또한 <전락>을 읽으면서 먼저 읽었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벌써 십년도 더 된 얘기가 돼 버렸나...

나는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를 대충 잡아도 대여섯 번은 읽은 듯하다. 더 읽었을지도 모른다. <전락>은 세 번쯤 읽었다. 이 두 작품을 비교하는 학위논문도 대충 읽어 보았다. 그래서? 과연 이 두 작가는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갈라지는 것인지? 요점을 말하자면, <전락>은 카뮈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이채로운 작품이다. 달리 말하면, 카뮈적이지 않은 작품이다. 물론 이때 카뮈적이란 말은, <이방인>(1942)과 <시지프의 신화>의 카뮈를 말한다. 태양의 작가 카뮈, 지중해의 작가 카뮈.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뮈, 둘다 가난한 작가였고, 저널리즘에 종사하였으며(한 사람은 발행인으로, 한 사람은 기자로) 문학적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도 일치한다. 그래서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1863)에 대한 문학적 응전(작가는 원래 리뷰를 쓰려고 했으나 결과는 작품이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이었다면, <전락>은 <반항적 인간>(1951)을 놓고 벌어졌던 사르트르(패)와의 논쟁에 대한 작가로서의 답변서라고나 할까. 작품의 많은 모티브들은 이 두 논쟁을 염두에 두고서야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형식(스타일)상의 유사성. 둘다 1인칭 독백(타자의 말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는 독백)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말들'뿐이다. 어떤 말을 하는가? 지하생활자는 물리법칙과 마찬가지로 도덕의 법칙이 있다고 주장하는 합리적 에고이스트들에 대해서 딴지를 걸며 흥분한다. 2*2=4 따위는 인간에 대한 모욕이라고. 클라망스(이 이름은 '사막에서의 외치는 자의 목소리'라는 성경 글귀에서 나왔다. 장 바티스트 클라망스는 세례자 요한이면서 외치는 자이다, 말 그대로)는 진정한 선행을 하는 대신에 그 흉내만 내면서 도덕적인 인간인 척 행세하는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들을 고발하고 심판한다(타인들을 심판할 권리를 얻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심문한다).

그리하여 이 두 작품 모두 신이 사라진, 혹은 죽은 시대에 '성자'는 어떻게 가능하며 '신앙'은 어떻게 가능한지는 묻는다. 물론 작품 내에서는 아무런 해답이나 대안이 주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두 작품은 모두 가장 음침하고 음울한 작품이 되었다. 한 전기작가의 말을 빌면, 두 작품은 모두 "(가장) 비참한, 그러나 낄낄거리며 조소하는 자포자기로 끝나는 유일한 소설"들이다.(이런 작품들을 좋아하다니!)



'속죄자이면서 재판관'이라는 클라망스의 자기 규정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카뮈가 아마도 가장 좋아했던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었을 듯한데(카뮈는 <악령>을 각색하여 무대에 올리기도 했었다. 이 각색본은 폴란드의 영화감독 안제이 바이다의 연출로 러시아 무대에도 올려졌었다. 내가 가졌던 기대에는 못 미치는 공연이었지만), 속죄자-재판관 모티브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온다(나의 심증이다).

조시마 장로가 죽기 전에 남기는 설교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의 심판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심판자 자신이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며, 아니 자기야말로 다른 누구보다도 그 범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는 아무도 죄인을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그는 비로소 심판자가 될 수 있다. 언뜻 듣기에는 정신나간 소리 같지만 이것이 진리다." 정신나간 소리같지만, 클라망스는 바로 이 진리를 깨닫고 실천한 자가 아닌가!

<전락>의 공간적 배경은 오늘처럼 흐리고 비가 많이 내리는, 안개가 자주 끼는, 물위의 도시 암스테르담이다. 알제리의 사막이 아닌 것. 이 가장 비카뮈적인 배경이 이 작품의 비카뮈적인 성격을 낳는다(카뮈는 1954년 10월에 이틀간 암스테르담에 체류한 적이 있다. 그리고 꼼꼼한 작가 카뮈에게서 <전락>은 아주 우발적으로 탄생한 작품이었다). 암스테르담은 역시나 우중충하고 진눈깨비 흩날리는 페테르부르크의 카뮈적 버젼이다. 말하자면 러시아적 공간이고 도스토예프스키적 공간이다. 클라망스의 목소리가 좀 세련되긴 했어도 지하생활자의 목소리를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니겠다. 그는 지하생활자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배우' 카뮈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 카뮈적인 세계란 무엇인가? "스스로 인정하는 무지, 광신의 거부, 세계와 인간을 테두리짓는 한계, 사랑받는 얼굴, 그리고 끝으로 아름다움,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스리스 사람들과 한데 어울리게 되는 우리의 진영이다.('헬레네의 추방')이라고 적을 때, 그 '우리의 진영'에 속하는 것이 카뮈적인 세계이다. 거기엔 정오의 태양과 바다가 지배하는 세계이다(다시 한번 더 암흑의 철학은 빛나는 바다 저 위에서 흩어져 버릴 것인다. 오, 정오의 사상이여!).

그에게서 지중해가 가진 태양의 비극성은 북구(와 러시아)의 안개의 비극성과는 다른 비극성이다. 그의 정오의 사상은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암흑의 철학과 다른 철학이요 사상이다. 이러한 둘을 묶어주는 것은 인간의 부조리한/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집요한 관심과 지극한 사랑이다.

만약에 진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다면 나는 그리스도 곁에 남겠다라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적었다. 카뮈라면? 아마 그는 진리 대신에 바다(지중해)를 택할 것이다. 그리스도도 바다도 없는 나는? 이렇듯 비오는 날에 이런 걸 적으며, 중얼거리고 탄식할 따름이다. "나의 삶은 내가 바라는 바에 적합하지 않는구나!..."

06. 03. 27.

P.S. 타이밍을 맞추자면 봄비라도 내리는 날에 옮겨적어야 했나 보다. 아래 그림은 러시아 화가 알렉산드르 볼코프(1960- )의 <비오는 날>. 이걸로 비오는 날의 분위기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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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28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 신고: 김진석->김진식

로쟈 2006-03-28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헀습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03-28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퍼갈게용)

비연 2006-03-2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갈께요. 도스토예프스키나 카뮈나 제가 다 좋아하는 작가들인데..
로쟈님의 페이퍼를 보니 아...그렇구나 하는 마음이 새삼...

로쟈 2006-03-28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소략한 글인데, 좋아하는 작가들을 한번 더 떠올릴 수 있다면 나름대로 제몫은 한 것이네요.^^

2006-05-28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테렌티우스 2006-12-2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뮈는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에 벌어진 자신의 알제리 독립 반대입장에 관련된 비판에 이렇게 대답했지요 : "나에게 정의와 어머니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어머니를 선택하겠다"...

그런데 이 답변은 그 맥락상 좀 (상당히) 문제가 있기도 한데요... 함 간단히 브리핑을 해드려보면...


이 대답은 카뮈의 스웨덴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 직후 한 청중이 알제리 독립에 관한 그의 의견을 묻는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1957년 카뮈의 수상 당시 젊은 푸코(카뮈는 1913년생, 푸코는 1926년생)가 스웨덴 프랑스 대사관의 문정관으로 일하며 그를 영접했었다는 사실인데, 푸코는 노벨상 위원회가 1954년 이후의 알제리 독립선언에 대한 일종의 헌정행위로서 카뮈를 '잘못' 선택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카뮈는 일반의 예상과 달리 알제리 독립에 반대했으며(나도 카뮈를 너무나 좋아했던만큼, 이는 충격이었다. 왜 우리의 카뮈 연구서들은 이러한 점을 밝히지 않나? 하긴, 서양에서도 미시마 유키오가 파시스트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알제리 문제와 관련하여,

'특히 프랑스의 정착 규모와 기간은 역사에서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문제를 야기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알제리의 프랑스인은 이 어휘가 지니고 있는 강력한 의미에서 역시 토착민이다. 더구나 순수하게 아랍적인 알제리는 - 정치적인 독립이라는 하나의 환상이 없었다면 - 결코 경제적 독립을 성취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노력이 아무리 부적절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늘날 그 어떤 나라도 기꺼이 책임을 떠맡으려고 동의하지 않는 상당한 노력, 바로 그것이었다'라고 적었다.

이 카뮈의 말을, 우리의 예로 치환시켜, 점령국의 국민이자 노벨상 수상작가인 한 일본인의 입에서 아직 미독립 상태의 1940년대 한국을 향해 발설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망언'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 중 2장 8절 '카뮈의 제국주의 경험' 편을 보면 된다. 이 글에서 사이드는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를 '문화와 제국주의에 대한 논쟁의 일부'로서 분석하고 있다

단적으로 카뮈의 소설에 등장하는 그 많은 아랍인들은 하나도 이름이 '없다'. 일제시대 군산의 한 백사장에서 '태양빛이 너무나 뜨거워' 총을 난사한 '이방인' 일본인에 의해 사망하는 '조선인'에게는 이름이 없는 것이다.

로쟈 2006-12-20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적으로 카뮈의 소설에 등장하는 그 많은 아랍인들은 하나도 이름이 '없다'"라는 게 새로운 비판은 아니지만 카뮈를 읽을 때 참조해야 할 대목이라고는 생각됩니다...
 

 

 

 

 

이번주 <필름2.0>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중저가' 영화잡지이지만, <씨네21>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요즘의 <씨네21>이 과연 세 배만큼의 제값을 하는 '고가' 브랜드인지는 의문이다), 최근에 개최된 '1996년의 한국영화 회고전'(서울아트시네마)를 계기로 '1886년 대한민국에 무슨 일이?'를 특집으로 내건 이번주 기획만큼은 단연 돋보인다(이번 주 <씨네21>의 기획특집은 '영국배우의 힘'이다). 

이 특집과 관련해서, 10년전, 1996년의 이야기를 나도 풀어볼까 하다가 견적 대비의 여유가 없는 관계로 그냥 한 두 꼭지에 대해서만 참견하기로 했다. 그 중 하나는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 또 한편의 저예산 디지털 영화를 발표한 송일곤 감독의 인터뷰 꼭지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송감독과 박영준 촬영감독의 대담 꼭지이다. 

폴란드의 국립영화학교 우츠출신으로 우리에겐 영화보다 (모 통신회사) CF로 처음 알려진 그의 영화들 중에서 단편영화 <간과 감자>와 장편 <꽃섬>(2001), <거미숲>(2003) 등이 내가 본 작품들이다(그러니까 단편 <소풍>과 장편 <깃> 등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나로선 너무 도식적이라고 여겨진 <거미숲>이 실망스러워서 그의 영화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었는데, 이번에 개봉될  <마법사들>은 '원 테이크 원 컷'이라는 형식적 특징 때문에 '어떨까' 싶은 눈길을 끈다.

이 신작과 관련해서는 얼마전 오마이뉴스(06. 03. 19)에 소개된 기사내용을 약간 재구성해서 잠시 따라가본다: "송일곤 감독의 영화 <마법사들>은 한편의 연극같은 영화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3인3색’ 프로젝트로 진행된 이 영화는 하나의 시공간 안에서 편집 없이 하나의 컷으로 이루어진 ‘원 테이크 원 컷’ 촬영으로 관심을 끈다. 이 영화는 자아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상처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줄거리 ‘마법사밴드’는 멤버 자은(강은비)의 죽음으로 해체된 인디밴드다. 음악을 통해 청춘을 보낸 그들에게 자은의 죽음은 3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자은과 연인 사이였던 재성(정웅인)은 그들만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강원도 숲 속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며, 명수(장현성)는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을 결심했다. 한편, 보컬이었던 하영(강경현)은 자은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에 더 이상 노래조차 부르지 못한다. 그들은 죽은 자은을 기념하기 위해 재성이 운영하는 카페에 모인다. 이곳에서 그들은 즐거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긴다. 특히 명수는 하영의 노래를 듣고 싶다며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을 하영에게 선물한다. 그러나 자영은 여전히 노래하기를 망설인다. 그들은 회상을 통해 잃어버린 열정과 사랑을 재정립하고 극복해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공간의 변화를 통해 시공을 넘나드는 송일곤 감독의 연출력이다. 카페의 1층은 현재의 공간으로 살아있는 세 명의 멤버가 다시 만나는 장소이며, 과거의 공간인 카페 2층에서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힘겨워하는 자은과 재영의 갈등을 보여준다.

-형식미 단편 <소풍>으로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송일곤 감독은 장편 <거미숲>, <깃>을 통해 철학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마법사들> 역시 그만의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 <거미숲>에서도 ‘숲’을 통해 혼란스러운 인간의 기억을 표현한 바 있는 송일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숲’을 통해 각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이 영화는 ‘원 테이크 원 컷’ 촬영에도 불구하고 카페 1층과 2층, 숲에 이르기까지 장소의 변화를 주는 과감한 시도를 했다. 96분간 쉬지 않고 연기해야 할 연기자들뿐만 아니라 촬영 스태프 모두가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중간에서의 작은 실수는 곧 촬영 종료를 의미하고, 모든 작업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그만큼 이 영화는 배우와 스태프들 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그러나 스토리 자체가 가지는 진부함과 급격한 심리의 변화는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30분짜리 단편을 96분의 장편으로 재구성한 영화 <마법사들>은 3월 30일 CGV 인디상영관에서 개봉된다).

한편, <필름2.0>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는 이 영화적 실험의 배경: "폴란드에서 공부할 때 2학년 가정의 중요한 수업 중 하나가 '마스터 샷'이라고 해서 끊지 않고 이어지는 하나의 연속적인 샷 안에서 배우들이 움직일 때 카메라가 어떻게 움직일까를 공부하는 과정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타르코프스키나 소쿠로프뿐 아니라 북유럽이나 소련을 중심으로 영화미학이 발전했던 60, 70년대에는 시간을 어떻게 조각할 것인가가 많은 이들의 화두였다. 그러면 우리도 해보자, 그렇게 시작한 거다."

Александр Сокуров

다시 말하면, 그러한 실험이 헐리우드쪽보다는 러시아나 북/동유럽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최근의 사례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칸느영화제 출품작이기도 했던 알렉산드르 소쿠로프(1951- )의 <러시아방주>(2002, 99분)이다(역시나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영화). 제목에서 얼핏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영화는 러시아의 보물창고라 할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대한 감독의 공시적/통시적 사색과 명상을 담고 있다.

재작년 모스크바 체류 기간에 이 영화를 TV에서 본 적이 있는데, 실제 영화보다 흥미로웠던 건 본편 방송 이후에 덧붙여진 '메이킹 필름'이었다. 영화는 단 한번에 테이크로 모든 걸 찍어야 하기 때문에 치밀한 계산하에 모든 배우 및 스탭들의 동선까지 완벽하게 준비돼 있어야 했다(리허설이 중요하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해서, 이런 방식의 영화는 필름속에 담기는 내용만큼(혹은 그보다 더) 그 찍는 과정 자체가 '예술'이었다. 아래 사진은 소쿠로프와 그의 스탭들.

그런 사정은 <러시아 방주>와 같은 방식으로 찍은 <마법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마법사들의 러시아 방주?). 박영준 촬영감독의 고백: "<마법사들>에서 최고의 관객은 현장에서 감독님의 '오케이'를 들었던 현장 스탭들이다. 연극을 보듯 그 순간을 우리 모두 '생짜'로 본 거다. 그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뭐랄까, 우리 스스로 치유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내 손으로 흙 발라서 집을 만든 것 같은 느낌이다." 옆에서 거드는 송감독: "마지막 촬영 끝나고 나서 스탭들이 너무 즐겁고 행복해 했던 것 같다." 

해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내가 <마법사들>보다 더 보고 싶은 건 그 메이킹 필름이다(어떤 경우에 예술은 'picture'가 아니라 'picturing'에 깃든다). 그걸 찍을 비용이 '저예산'에 포함돼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06. 03. 26.

P.S. 보너스로 덧붙이자먼, 감독 자신이 꼽는 <마법사들>의 베스트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 두 남녀가 숲에서 사과를 먹는 장면이다. 한국영화에서 그런 룩을 처음 본 것 같다. 흑백이 강렬하면서도 컬러가 살아있고 표정들도 너무 잘 나타나 있고, 미학적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신이다. 우리 영화니 자뻑이기는 하지만." 아마 자뻑인 거 맞을 것이다. 한데, 사과를 먹는 장면은 <거미숲>의 정사장면에서도 나온다. (감자가 아니라!) 사과가 송일곤 감독의 '대상a'쯤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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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26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와 [필름]모두 좋아하지만 [씨네]의 경우 그 "값"을 한다고 봅니다. "3천원시장"을 [필름]이 포기했지만 [씨네]는 영화잡지에 바랄 수있는 "뽀대"가-표지사진하나만 보더라도-훌륭합니다. 내용은 [필름]의 경우 "이연걸 특집"에서 보듯 하나의 기사로 도배하는 경우가 왕왕있습니다.그리고 [필름]에는 토크2.1이 있지만 비평면이나 "김혜리가 만난사람들"같은 경우는 [씨네]가 독보적이구요.

로쟈 2006-03-2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씨네21>을 더 자주 봤었지만, 최근에는 주로 실망감을 안겨주더군요. 아마도 작년말에 '2005년 나의 베스트 초이스' 같은 기사 꼭지가 결정타였던 것 같은데, 기자들의 베스트 초이스의 대상이 (영화가 아니라!)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런 '수다'는 개인 블로그에나 올릴 만한 거라는 '편견'을 가진 저에겐 잡지가 좀 뻔뻔해 보이더군요. 이후엔 간혹 살 때마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happyant 2006-03-27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로쟈님. 한때 씨네21의 열혈 애독자였습니다만, 근래의 씨네21은 예전의 그 톡쏘는 '취향'의 맛이 느껴지지 않더군요. 스스로의 '수준높음'에 도취된 듯 보입니다. 이번호 필름2.0은 정말 재밌더군요.^^

로쟈 2006-03-27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취이면서 매너리즘 같기도 합니다. 자체적으로 긴장감 있는 리뷰들이 아주 드물게 눈에 띄는 것이 제 시력 때문만은 아닌 거 같습니다...

twoshot 2006-03-2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지는 아니고 또 제가 [씨네]의 내부자도 아니지만 '리뷰'에만 초점을 맞춰 말해보면:김소영,허문영,정성일등의 [전영객잔]은 필자들의 명성에 값할만큼 수준이 고릅니다. 다른 비평은 보통 신진들로 채워집니다. 또 김혜리, 정한석등의 일급 내부필진이 그 뒤를 받치고 있고요. 홍성남의 성실한 글들도 그냥 넘어갈 수 없읍니다. "뭐 이정도면"하는 도취가 없을 수는 없겠으나 이것이 '최선의 의도'인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른 대안은 무엇일까...그게 쉽지는 않겠다는 거죠...문예지들에 그득한 '도취와매너리즘'이 그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로쟈 2006-03-2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주 <필름2.0>에도 두어 편의 읽을 만한 리뷰들은 실립니다. 해서 저의 불만은 정확히 <씨네21>이 <필름2.0> 3권 값을 하느냐입니다. 외부 필자들과 정한석 기자의 글들이 눈에 띄지만, '내부'는 예전 같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결정타는 '2005년 베스트 초이스' 같은 어처구니 없는 수작이었습니다(막바로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더군요). <씨네21>은 그 이후에 제게 아직 신뢰감을 회복시켜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twoshot 2006-03-28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처구니 없는 수작'에 대해서...다른 물건은 차치하고라도 아무개기자가 추천한 '디빅 플레이어'를 보며 이건 또 무슨 농담인가...어리둥절했었습니다. 씁쓸했구요. 헌데 '생선회칼'과 '만년필'이 들어간 그 '페이퍼'가 그리 싫지는 않았습니다. 물건들에 대한 페티쉬가 저의 취향에는 먹혔던 거죠. '하이비'같은 잡지에서 볼 수있는 억대 오디오는 아예 쳐다 보기도 싫지만...짐작컨대 그것은 씨네의 '엘리티즘'에 대한 내부의 가벼운 반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잡지의 잡스러움은 그래봐야 거기서 거기라는 게 아쉬움을 넘어 좀 안타까웠지만...

로쟈 2006-03-28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잡지에 대한 기대나 취향의 차이일 듯합니다. 저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기 위해서 영화 잡지를 사 읽는 편이라.^^
 

봄이면 한번쯤 떠올리게 되는 자작시가 'Don't cry for me!'이다. 물론 이 제목과 함께 떠올려지는 멜로디는 영화 <에비타>의 주제가로 에바 페론이 부르는 'Don't cry for me Argentina', 즉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다오!'이다. 한때, 봄바람이 날 때면, 나는 이 지구 반대편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떠나가는 꿈을 꾸곤 했다. 나의 '이민'을 결정적으로 가로막은 것은 '또다른 삶'으로서의 이민에 대한 이러한 '몽상'이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울지 말아다오!'란 청유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나는 간혹 그러한 연민으로 자기연민을 쓰윽쓰윽 지운다, 지워버린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관한 영화 <해피 투게더>의 이미지들을 군데군데 찬조출연시켰다. 피아졸라의 탱고음악과 함께 잠시 아르헨티나로 떠나본다.

 

Don't cry for me!

눈이 내리고 눈꺼풀이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봄이다 궂은 일도 아니다 


엊그제 내다버린 어항 속 개구리밥처럼

희망은 뿌리 없이도 푸른빛을 띠었고

사랑은 사당 사거리로 가는 길처럼 꽉 막히다가

이게 아니구나 싶어도 돌아갈 수 없었다

하긴

 

봄이다 다행이다

몇 년만에 본 여자는 아르헨티나에 갔었다는 여자는

사지가 멀쩡하고 아이도 있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남편은 외교관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도 눈은 내리고 바람은 분다

사실은 잘 모른다

나도 언젠가는 이민을 가려고 짐을 꾸리는 중이다

 

봄이다 봄바람 이젠 궂은 일도 아니다

몇 년만에 본 여자는 아르헨티나에 갔었다는 여자는

하필이면 사지도 멀쩡하고 아이까지 있을까

나는 혼자 이 여자를 사랑했나 보다

흔한 일이다

나를 위해 울지 말아다오 

 

눈은 더 내리지 않고 바람도 더 불지 않는다

그래도 봄이다 눈꺼풀이 감긴다   

 

눈은 더 내리지 않고 바람도 더 불지 않는다
그래도 봄이다 눈꺼풀이 감긴다  


엊그제 또 내다버린 어항 속 개구리밥을 걱정하다가 
나는 배가 고프기도 하고 아침 내내 꽉 막히던 길에 부아도 난다  

하지만 

나는 결코 울지 않을 테다

 

봄이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나는 이민 간다


봄이다 봄 그리고 여름 가을 겨울

여전히 눈이 내리고 눈꺼풀이 내리고 바람이 불겠지

이게 아니구나 싶어도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

나는 여차하면 이민을 가려고 짐을 꾸리는 중이다

 

나는 한푼도 예금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때나 울지 않는다 절대로 울지 않는다


봄이다 봄바람 다행이다 이젠 정말 궂은 일도 아니다

제발 나를 위해 울지 말아다오    

 

 

 

06. 03. 26. 

 

P.S. 이 글은 '집'에서 쓰는 본격적인 첫 페이퍼이다. 집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의 이미지 여행이 가능한 것은 물론 인터넷 덕분이다. 인터넷-몽상 때문에 이제 이민 가는 건 정말로(!) 글렀다고 봐야지. 나는 매번 짐만 꾸리다,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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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자파 2011-10-03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에 심장이 흔들려 김어준버전으로 한 줄 적어놓습니다 - 전지적 어준시점, 닥치고 시!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까치글방 145
리처드 로티 / 까치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미국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이 주저는 꽤 오래전에 번역된 책이지만, 그다지 많이 읽히지는 않은 듯하다(꽤 오래전에 써두었던 리뷰를 다시 옮겨오는 이유이다). 사실 로티가 철학자로 분류되긴 하지만, 한 철학교수의 말을 빌면, 문학이 철학에 맞먹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우수한 장르라고 치켜세우는 '反철학자'이다. 때문에 미국 본토에서는 "전문적 철학훈련이나 철학적 지식은 부족하면서 막연히 철학이라는 것에 흥미를 표시하는" 각종 문학자나 문학 교수들간에서 더 인기가 있다고. 

굳이 분류하자면 (한때) 로티의 애독자로서 나 또한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것이니 이런 식의 '뒷북치는' 리뷰가 흠이 되지는 않겠다. 좋아하는 걸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몇년 전 그의 내한 강연에도 나는 기꺼이 참석했었다). 한편, 기존 철학 패러다임의 종언을 주장하여 직업철학자 동료들의 미움을 산 로티 자신은 프린스턴 대학의 철학교수 자리를 내놓고 버지니아 대학의 인문학교수로 옮겨갔다가 현재는 스탠포드대학 비교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걸로 안다(이젠 '비교문학자'라고 불러줘야 할까?).  

그럼, 로티의 어떤 주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또 통쾌하게 하는가? 전문철학자가 아닌 일개 문학도로서 이 점에 대해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제멋대로 말하자면, 그가 근대철학이 ‘가지 않은 길’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근대철학의 전통, 즉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이 걸어온 길은 근대의 철학적 이성이 ‘발명한’ 인간 '정신'이 '자연'이나 '실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거울로서의 특권적인 지위를 확보하면서 모든 지식의 기초나 바탕이 될 만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갈로 깔려 있는 길이다.

 

'인식론'에 정향되어 있는 그 길을 로티는 '토대주의'라고 부르고 그것을 일종의 병리적인 것으로 다룬다(로티는 자신의 철학이 ‘치료적’이라고 공표한다). 그것은 가지 않아도 될 길, 안 가면 더 좋았을 어떤 사유의 길이기에 그렇다. 이에 따라, 책의 대략적인 내용은 그 토대주의적 존재론 비판(1부), 토대주의적 인식론 비판(2부), 반토대주의적 철학관 제시(3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대안적 철학, 그러니까 근대철학이 ‘가지 않은 길’은 일종의 해석학으로서, 기존 철학이 누려왔던 제 1학문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한 '교화적 철학', 쉬운 말로 대화의 철학, 지혜의 철학이다.

 

이 새로운 철학, 제대로 된 철학은 다시금 과학이 아닌 우리의 일상적 삶을 철학의 중심적인 주제로 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주장과 입장은 그 자체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으로서 영미철학의 주류였던 분석철학의 종말뿐만 아니라 인식론 전반, 더 나아가 전통적인 철학 전반에 대한 거부와 해체를 뜻한다. 이에 대해서 많은 논란과 논쟁이 벌어진 것은 당연하며, 로티는 그를 통해 철학계의 문제적인 인물이면서 중심적인 인물로 부상한다.

 

일부 철학자들은 그의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을 표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적 주장에 대한 그의 논변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 이 또한 일개 문학도로서는 판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나의 판단은 다만 그것이 그의 문제의식과 논변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독자 개개인이 수고스럽게 숙고할 만한 문제라는 것 정도이다. 그 수고스러운 길에 들어서는 독자가 유의할 것은 로티가 주장하는 새로운 철학이 기존의 철학적 언어-게임의 어휘들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책의 독해에는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분석철학에 대한 예비지식이 어느 정도 요구된다. 비록 반(反)-철학, 탈(脫)-철학에 대한 일종의 선언적인 의미를 지니는 책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철학‘책이라는 걸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로티 자신은 철학적 논변에 대해서 매우 엄정한 태도를 갖고 있다. 그 자신 분석철학의 훈련을 받은 전도유망한 기대주이기도 했었고).

 

그럼에도 나로선 이 문제적인 저작을 많이들 사서 읽어보시든가, 책장에 모셔놓든가 하시라고 권유하고 싶다. 특히 대중적인 철학교양서로서 이름높은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은 필독할 만하다. 듀란트는 그 책의 저자의 말에서 이렇게 적어놓았었다: ”저자는 인식론이 근대철학을 납치해서 거의 파멸시켰다고 믿는다. 저자는 인식과정의 연구가 심리학의 과제로 인정되고 철학이 다시금 경험 자체의 방식과 과정의 분석적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경험의 종합적 해석으로 이해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분석은 과학에 속하고 지식을 제공한다. 철학은 지혜를 위한 종합을 마련해야 한다.“ 로티는 바로 이런 듀란트의 믿음을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실천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철학적 지식보다는 지혜를 좀더 필요로 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이 지혜에 대해서라면 문학이 철학에 전혀 뒤질 것이 없다. 헤르메스의 철학자 미셀 세르는 어느 대담에서 오직 과학만이 철학이 과학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라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걸 이런 식으로 고쳐 말해도 무방하리라 나는 믿는다: “오직 철학만이 문학이 철학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철학을 좋아하는 이유이고 로티를 반기는 이유이다.  

 

참고로, 이 번역서에 대한 나의 유일한 불만은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라는 제목에 놓인다. 원제인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를 그냥 '철학과 자연의 거울'이라고 옮기지 않은 것은 다소 중의적인 이 번역에서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이격시켜놓기 위함일 터이지만, 그런 노파심이 우리말로 다소 어색한 지금의 제목을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다(내가 아는한 로티를 언급하고 있는 국내의 어떤  학자도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란 제목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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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03-26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로티를 좋아하시는군요.

로쟈 2006-03-2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로티가 문학 전공자들이 좋아할 만한 얘기들만 하거든요.^^

사량 2006-03-2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티의 책은 <실용주의의 결과>만 읽어보았는데, 저는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었더랬습니다. 로티는 문학이나 글쓰기라는 것에 꽤나 특권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정작 문학 작품들을 갖고 이야기하는 걸 보지 못했어요. 적어도 그 책에서는요. 나름대로 논리실증주의나 분석철학과 조금은 거리를 두고 '대륙철학자'들의 문제의식을 많이 수용하려 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야기하는 방식은 문학적 체취가 잘 맡아지지 않는 철저한 미국식 글쓰기였다고나 할까요...

로쟈 2006-03-27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서 저도 언급했지만 말씀대로 로티의 '문학적' 편향은 철학내에서의 입지입니다(더 좁히자면, 미국의 분석철학계 내에서이고, 그는 철학자에서 '대문자 진리'란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철학의 종언'을 고하는 철학자들 계보에 서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철학적 논변 방식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하이데거나 데리다를 진지한 철학자로 취급하지 않는 동네에서 (그가 '사적인 철학자'로 분류하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옹호/지지하는 예외적인 '철학자' 정도로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같은 책에는 오웰이나 나보코프 등의 작가들을 다루고 있는 장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비로그인 2006-03-2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유선 교수나 김동식 교수도 "철학과 자연의 거울" 이라고 하지요. 전 로티가 데리다 등과 비슷한 이야기를 함에도 그리 난해하지는 않은 (물론 비교적으로) 글쓰기를 해서 좋아합니다. 그런데 로자 님이 보시기에 이 책의 전반적인 번역 상태는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역자인 박지수 씨는 "그리 자신이 없다"라고 했는데... 저도 로티의 논변이나 문체에 흥미를 느끼는 터라 영문판도 구매해 뒀거든요.

로쟈 2006-03-2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도 원서를 갖고 있는데 대조해가며 완독하지는 않았(었)고, 중간 부분에서 대척인간(?)이 나오는 대목을 꽤 어려운 내용인 걸로 압니다. 한데, 제가 읽은 다른 글들을 고려해 본다면, 로티는 전혀 어려운 철학자가 아니죠. '그리 난해하지 않은'이 맞습니다(오역의 건덕지가 별로 없는 게 정상일 거 같구요)...

2006-03-28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3-28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철학의 거장들>은 아는 후배가 교정을 보기도 했었는데 번역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더군요. 그런데, 번역서들을 읽다 보면 그게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 지극히 일반적인 경우라는 걸 아시게 될 거 같습니다. '철학입문'에 대해서 제가 조언을 드릴 만한 처지는 못되고, 다만 제 경우엔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1학년때는 러셀의 <서양철학사> 같은 걸 추천받기도 했었지요. 아무거나 가급적이면 원서와 대조해가면서 한권 독파하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3794 2006-03-28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승주나무 2006-04-17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의 글을 읽으니 '인식론의 거미줄'이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개념조차 저에게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보다는 김수영의 '한꺼번에 혹은 동시에'론에 더 관심이 가네요^^
로티도 역시 이름만 아는 철학자였는데, 한 번 책을 살펴봐야겠습니다. 여기 오면 읽을 책이 자꾸 늘어서 큰일이에요^^;;

로쟈 2006-04-17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책 때문에 인생 허덕이고 있는 대표적인 케이스죠(^^;)...

자꾸때리다 2006-10-08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 부분 심리철학 부분을 자세하게 읽지 않아서 그럴 것입니다. 책의 후반부 번역은 괜찮지만 전반부 번역에는 상당히 많은 오역이 있습니다. - 김영건 박사의 코멘트더군요. 전반부 심리철학 부분이 오역이 상당히 많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