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국외 저자들로만 '이주의 저자'를 채운다. 게다가 모두 거물 철학자들이다. 주저가 아닌 얇은 책들이 나왔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푸코의 책으로는 <철학의 무대>(기담문고, 2016)가 연초에 나왔었다.  



먼저, 미셸 푸코. '미셸 푸코 미공개 선집'의 첫 권으로 <비판이란 무엇인가?/ 자기 수양>(동녘, 2016)이 출간되었다. '비판이란 무엇인가'와 '자기 수양', 두 강연문을 묶은 것으로 강연에 대한 토론문도 함께 실었다.  

"1978년 5월 27일에 소르본대학교에서 프랑스 철학회 주최로 열린 푸코의 강연 <비판이란 무엇인가?>와 1983년 4월 12일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서 있었던 푸코의 강연 <자기 수양>, 그리고 버클리캠퍼스에서의 강연과 함께 기획된 세 차례의 토론을 싣고 있다. 이 텍스트들에 대한 상세한 해설과 유용한 각주들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푸코의 이 두 강연은 그의 사상의 변화와 연속성을 동시에 명확히 해명하는 중요한 텍스트이며, 특히 푸코 후기 사유의 중심 주제들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주체의 문제, 더 구체적으로 말해 ‘자기’의 문제에 대한 풍부한 성찰을 제공한다."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가 계속 소개되고 있는 와중에 '간식' 거리가 될 만한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시리즈의 책으로는 <담론과 진실>, <자기 해석학의 기원> 등이 내년에 출간될 예정이다.  


막간에 보태자면 푸코 연구서로는 나카야마 겐의 <현자와 목자: 푸코와 파레시아>(그린비, 2016)가 지난 가을에 출간됐었다. "후기 푸코 사유의 핵심 개념 ‘파레시아’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자기’와 ‘진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1부),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를 맞이하며 원래 공공을 향한 ‘진실 말하기’였던 파레시아가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한 검열과 고백의 실천으로 변해 갔는지를 살핀다." 묵직한 책들을 읽어볼 만한 (시국적) 여유를 언제쯤 갖게 될까?



조르조 아감벤의 신간 <불과 글>(책세상, 2016)도 번역돼 나왔다(심지어 영어판보다도 빨리). 아감벤의 책으로는 여름에 나온 <왕국과 영광>(새물결, 2016)과 함께 '유이한' 올해의 수확이다. '우리의 글쓰기가 가야 할 길'이 부제. "문학에 가까운 글쓰기를 보여주는 열 편의 철학적 단상을 묶은 책이다. <불과 글> <관료주의적 신비> <비유와 왕국> <창조 행위란 무엇인가?> 등, 읽고 쓰기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볼 만한데, 일단 영어본도 주문해놓아야겠다. 



끝으로 알랭 바디우도 뜻밖의 책을 펴냈다. <행복의 형이상학>(민음사, 2016). 올해 나온 바디우의 책은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자음과모음, 2016)과 함께 '유이'하다. 분량으로는 둘다 팸플렛에 가깝다. 어떤 책인가. "알랭 바디우가 펼치는 혁신적 행복론이다. 침울한 일상 속에서 빛나는 삶을 획득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새로운 행복을 선택하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행복이란, 주체로 서는 것이다. 지금 이곳 열정과 분노로 가득한 광장에서, 다시는 이전과 같은 세계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새로운 행복의 정체가 밝혀진다." 


찾아보니 영어본은 내년에 <행복>이란 제목으로 나온다. 아감벤의 책도 그렇고 요즘은 한국어판들이 영어판보다 앞서 나오는 일이 드물지 않다. 바디우 관련서로 올해 나온 가장 중요한 책은 피터 홀워드의 <알랭 바디우: 진리를 향한 주체>(길, 2016)이었다. 해를 보내면서 한번 더 확인해둔다... 



말이 나온 김에 내년 기대작도 적는다. 바디우의 책은 <행복> 외에 <성관계는 없다: 라캉에 관한 두 강의>가 기대를 모은다. 바디우의 라캉론이다. 더불어 슬라보예 지젝의 <레닌 2017>은 러시아혁명 100주년과 관련하여 미리부터 구미를 당기는 책. 이런 책들에 대한 기대 때문에라도 '병신년'과 빨리 작별하고 싶다...


16. 12. 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주의 책'을 고른다. 타이틀북은 영국 철학자 존 그레이의 <꼭두각시의 영혼>(이후, 2016)이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소고'가 부제. 누군가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저자는 원론적인 차원에서 인간 존재의 꼭두각시성을 문제 삼는다.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의 존 그레이는 이번 책을 통해 ‘인간은 자유롭다’는 생각이야말로 엄청난 착각이고 망상이라 역설한다. 그러면서 존 그레이는 인간을 ‘생각하는 꼭두각시’라 규정한다." 



내가 '우리시대의 쇼펜하우어'라는 부른 저자의 모든 책은 관심에 값한다.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부터 세면 이후에서 출간된 다섯 번째 책이다.  



그리고 두 권은 박근혜 관련서다. 미디어오늘 정철운 기자의 <박근혜 무너지다>(메디치미디어, 2016)와 강준만의 <박근혜의 권력 중독>(인물과사상사, 2016)이다. 전자는 '한국 명예혁명을 이끈 기자와 시민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후자는 '박근혜는 왜 꼭두각시로 전락했는가?'를 분석하고 있다. 


 


네번 책은 하승수, 하승우의 <껍데기 민주주의>(포도밭, 2016)다(두 저자가 형제라는 건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책의 부제는 '기득권 공화국에서 민주공화국으로'다. 제목과 부제에서 문제의식을 간취해낼 수 있다. "‘기득권 공화국’과 ‘헬조선’을 초래한 원인을 진단하고, 사회가 과두지배나 다름없이 운영되는 ‘껍데기 민주주의’ 체제의 문제를 파헤친다. 형제이면서 풀뿌리 활동가이자 정당인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변호사 하승수와 정치학자 하승우는 근본적인 사회 전환의 실마리를 찾고자 ‘민주주의’ ‘자본주의’ ‘풀뿌리’ ‘개발과 폭력’을 주제로 정해 대화를 시작했다." 한티재에서 나온 팸플릿 시리즈와 함께시민혁명 기간 중 독서토론 거리로 삼아볼 만하다.  



끝으로 '청소년이 만들어온 한국 현대사'가 부제인 공현, 전누리의 <우리는 현재다>(빨간소금, 2016). "3·1운동에서 촛불 광장까지, 청소년 정치행동의 역사를 다룬 최초의 책"이다. 몇 달 전에 나온 <인물로 만나는 청소년운동사>(교육공동체벗, 2016)와 짝이 될 만하다.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꼭두각시의 영혼- 인간의 자유에 대한 소고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6년 12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2016년 12월 18일에 저장
절판
박근혜 무너지다- 한국 명예혁명을 이끈 기자와 시민들의 이야기
정철운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12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6년 12월 18일에 저장
품절

박근혜의 권력중독- 의전 대통령의 재앙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6년 12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2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6년 12월 18일에 저장

껍데기 민주주의- 기득권 공화국에서 민주공화국으로
하승수.하승우 지음 / 포도밭출판사 / 2016년 12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2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6년 12월 18일에 저장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인용문으로 처리했지만 '이주의 발견' 감으로 고른 책 제목이다. 주쯔이의 <단 한 줄도 읽지 못하게 하라>(아날로그, 2016). 짐작할 수 있지만 금서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누가 왜 우리의 읽고 쓸 권리를 빼앗아갔는가?'가 부제. 


"기원 전 410년의 <리시스트라타>부터 1988년 발표된 <악마의 시>까지, 문학의 역사에서 자행되어온 이른바 문화 방화 사건들을 당시 작가 및 주변 인물들이 남긴 기록과 풍부한 원문 인용을 통해 자세히 들여다본다. 금서로 지정된 원인을 사회 비판과 대중 선동, 권력층에 대한 비판과 풍자, 자유로운 사상에 대한 통제, 풍기문란의 네 가지 주제로 나누어 어떤 책이, 누구에 의해, 어떤 이유로 금서로 지정이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흥미롭게 소개한다. 또한 사드, 푸시킨, 톨스토이 등 금서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대표 작가들의 전체적인 작품 활동과 생애를 살펴본다."

개인적으로는 러시아 문학가들의 작품이 다수 소개돼 있어서 특히 더 관심을 갖게 된다. 금서를 주제로 한 국내서로는 백승종의 <금서, 시대를 읽다>(산처럼, 2012)와 장동석의 <금서의 재탄생>(북바이북, 2012)이 수년 전에 나란히 출간됐었다. 



더불어 프랑스 혁명기 금서 베스트셀러의 역사를 다룬 로버트 단턴의 <책과 혁명> 같은 고전적 저작도 떠올려볼 수 있다. 주명철의 <서양 금서의 문화사>(길, 2006)도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고, 찾아보니 베르너 풀트의 <금서의 역사>(시공사, 2013)도 목록에 추가할 수 있다(눈에 익은데 어쩐 일인지 구매 내역에 없다).  



한편, 주쯔이가 언급하고 있는 책 대부분은 국내에 번역돼 있는데, 제목이 다른 경우도 있다. 가령 필리핀 작가 호세 리살의 <나에게 손대지 마라>는 <나를 만지지 마라>(눌민, 2015)로 번역돼 있다...


16. 12. 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달 '출판문화'(612호)에 실은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 연재 꼭지를 옮겨놓는다. 격월로 쓰는 것인데, 올 마지막 연재에서는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다뤘다. 그래서 붙인 제목이 '나쓰메 소세키 문학의 여정'이다. 소세키의 책은 최근에도 몇 권 추가되었는데, 네 편의 중편을 엮은 <긴 봄날의 소품>과 아내 나쓰메 교코의 회고록 <나쓰메 소세키, 추억>(현암사)이 소세키 소설전집의 '서플먼트'처럼 나왔고, 절친이었던 시키와 교환한 편지들도 <시키와 소세키 왕복 서간집>(지만지, 2016)으로 출간되었다. <긴 봄날의 소품>에는 '유리문 안에서'도 수록돼 있어서 역시 최근에 나온 민음사 쏜살문고의 <유리문 안에서>까지 포함해 졸지에 번역본이 3종이 되었다. 그렇게 '소세키 사후 100주년'은 일단락되는 듯하다. 



출판문화(16년 12월호) 나쓰메 소세키 문학의 여정


세계문학 독자에게 올해는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서거 400주년으로서 의미가 있었지만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일본의 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사후 100주년이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의당 기념출판이나 행사가 기획됐음 직한데 사정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대신 국내로 시야를 한정하면, 지난 2013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나쓰메 소세키 소설전집’(14, 현암사)이 완간된 것을 가장 의미 있는 사건으로 꼽아볼 수 있겠다. <도련님><마음> 등 소세키의 주요 작품은 여러 차례 중복 출간되었고 여타 작품도 한두 종씩 번역본이 나와 있었지만 품위 있는 장정의 새 번역본 전집이 완간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소세키의 저작으론 장편소설 외에도 단편과 산문, 문학론 등이 더 남아 있지만 이미 출간된 번역본들을 참고할 수 있다. 단편의 경우는 <런던소식><회상>(하늘연못, 2010) 두 권으로 갈무리되어 나와 있고, 문학론과 문명론은 각각 <나쓰메 소세키 문학예술론><나쓰메 소세키 문명론>(소명출판, 2004)이 진작 출간되었다. ‘일본의 셰익스피어를 읽기 위한 여건은 충분히 갖춰진 셈이다. 남은 건 독자의 일인데, 한 세기 전을 살았던 일본 작가에게서 무엇을 읽을 수 있고, 그것이 지금 시점에서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지 따져보는 것 말이다.


1867년생인 소세키의 생애는 대부분의 기간이 메이지 시대(1868-1912)와 중첩된다. 메이지 시대는 한마디로 서양에서 300년 동안 진행되어 온 근대화를 40년 동안 압축해서 실현하고자 했던 시대다. 이 압축근대화는 러일전쟁(1904-1905)에서의 승리로 일단 성공을 거둔 듯이 보였다. 숙원대로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기간의 갑작스런 근대화산업화가 아무런 부작용 없이 진행될 리 만무했다. 메이지 유신 이전의 전근대적 사회규범은 급속도로 무효화되었지만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사회 규범과 근대적 시민의식의 형성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세키는 서양을 모델로 한 일본의 근대화는 결국 서양 흉내 내기에 지나지 않으며 서양과 일본의 격차는 결코 좁혀질 수 없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을 갖고 있었다. 이미 1900년부터 1903년까지 정부 유학생으로 2년 반 동안 영국 런던에서 생활해본 소세키의 실감이 그러했다. 그는 키도 작고 왜소한 체구의 자신이 유럽인들과 비교할 때 한갓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근대국가 일본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가 어렵사리 찾아낸 출구는 자기본위라는 네 글자였다. 소세키의 문학은 이 자기본위라는 신념이 겪게 되는 여정이기도 하다.



소세키 문학의 출발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부터다.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를 주재하던 친구로부터 소설을 한번 써보라는 권유를 받고서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의 시점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을 관찰한다는 설정으로 지어낸 이야기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도쿄제대의 영문과 교수로 임명되었지만 오랫동안 앓아온 신경쇠약과 우울증 증세가 더 나빠지던 무렵이었다. 기분전환 삼아 써본 것이었지만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그에게 뜻밖의 치료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이 작품에서 주된 관찰 대상인 구샤미 선생은 소세키 자신을 모델로 한 인물이지만, 화자인 고양이도 물론 소세키의 분신이다. 즉 고양이(소세키)가 주인 구샤미(소세키)를 관찰하는 구조이다. 통상적인 자기 분석이 분열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반해서 이 작품에서는 고양이라는 구체적인 거점 덕분에 그러한 자기 분석이 자기 분열에 빠질 위험 없이 안정감 있게 진행된다. 직업이 선생으로서 대단한 면학가인 척하지만 고양이가 서재를 들여다본 결과 대체로 그는 낮잠을 자고 있다. 가끔은 읽다 만 책에 침을 흘린다.” 책을 읽는다지만 두세 페이지 넘기다 이내 침을 흘리며 조는 게 구샤미(소세키)의 일상이라고 고양이(소세키)는 폭로한다. 이러한 폭로의 해학적 어조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성공을 낳았다. 독자들의 호평이 이어졌고 소세키는 수년간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소설쓰기의 순기능을 발견한다. 직업작가로서 나설 결심을 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경험에 힘입어서다.


1907년 소세키는 도쿄대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아사히 신문사의 전속작가로 입사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련님>(1906) 같은 작품을 단숨에 써내려간 전력을 믿었지만 막상 전속작가의 생활은 만만치가 않았고 한때 해방감을 맛보게 했던 소설쓰기는 또 다른 굴레가 되어 그를 옥죄었다. 힘들게 소설쓰기의 출구를 모색하던 그는 시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도쿄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된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 <산시로>(1908)를 통해서 마침내 그만의 주제와 스타일을 발견한다. 그것은 근대화 과정의 한복판에 놓인 문제적 주인공의 자기발견 내지 자기본위의 구현이다.


<산시로>에서 스물세 살의 대학생 주인공 산시로는 아직 풋내기로서 자기만의 개성과 독자성을 밀고나갈 만한 배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소세키 소설에서 그런 개성은 주로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서 표현되는데, 산시로는 동향의 대학 선배이자 촉망받는 물리학자 노노미야와 함께 매력적인 신여성 미네코를 사이에 두고 어정쩡한 삼각관계를 형성하지만 그녀를 휘어잡을 만한 능력은 보여주지 못한다. 노노미야 역시 여자의 마음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하여 미네코를 다른 남자에게 놓치고 만다. 그렇듯 어설픈 사랑이야기로 전개되다 끝나고 말지만 <산시로>는 어둡다기보다는 산뜻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젊은 주인공에게 아직 창창한 미래가 남아 있기 때문이겠다.



하지만 <산시로>에 이어지는 <그 후>(1909)에 오게 되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이 작품의 주인공 다이스케는 서른 살의 고등유민(高等遊民)이다.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일부러 직장을 갖지 않고 빈둥대기에 고등유민이라 불린다. 비록 사업가인 아버지에게 매달 용돈을 타 쓰는 처지이지만, 다이스케는 뛰어난 지성과 심미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는 인물로서 당대의 세태와 문명에 대한 예리한 성찰과 비판을 내놓을 줄 안다. 가령 왜 일을 하지 않느냐는 친구 히라오카의 핀잔에 대해 다이스케는 자기 탓이 아니라 세상 탓이라고 말하면서 일본과 서양의 관계를 핑계로 댄다. 서양의 빚을 얻어서 경제를 일으키려고 하는 일본은 마치 소하고 경쟁하려는 개구리와 다를 바 없고 곧 배가 터지고 말 거라는 게 다이스케의 생각이다. 그런 상황에서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논리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먹고살기 위한 노동, 생계를 위한 노동은 노동을 위한 노동이 아니기에 진정한 노동이 될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먹고살기 위한 노동은 타락한 노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근대에 대한 예민한 대결의식을 보여주는 것들로 작가 소세키의 생각으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문제는 그러한 비판적 인식이 생활 속에서 안정된 토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권하는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다이스케가 자신이 히라오카와 맺어준 미치요에게 뒤늦게 구애하는 것은 과감한 자기본위의 행동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매장을 감수하는 행위다. 그 자신의 표현으로는, ‘자연에 따라 미치요를 선택한 대가로 그는 친구에게는 물론 아버지와 형으로부터도 의절 당하게 된다. 이제 스스로 일자리를 얻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다이스케의 모습이 <그 후>의 결말이다.


<그 후>의 뒷이야기로 읽히는 <>(1910)의 주인공 소스케는 과거 친구의 동거녀 오요네를 아내로 삼는 바람에 도의상의 죄를 짊어지고 사회로부터 매장되다시피 한다. 비록 두 사람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지만 과거의 그림자를 다 떨쳐내지는 못한다. 세 번이나 아이를 갖지만 모두 잃게 되는 것도 자신들의 죄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본위의 대가로 감수하기에는 너무 큰 희생이다. 이들 부부에게 과연 행복은 가능할까? 소스케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을 열어젖힐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소설에서 찾을 수 있는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는 여전히 닫힌 문 앞에 무능하고 무력하게 남겨졌다.”는 게 <>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소세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마음>(1914)은 이러한 소설적 여정의 마무리로 읽힌다. 작중 화자가 선생님이라고 따르는 이의 유서가 작품의 절반을 차지하는데, 그의 절친했던 친구 K는 하숙집 딸을 사이에 두고 그와 삼각관계에 놓인 것에 절망하여 자살했다. 이후에 그는 하숙집 딸과 결혼하지만 결혼 생활 내내 친구의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하다가 결국은 메이지 천황의 죽음을 빌미로 하여 자살을 결심한다. 선생님의 이러한 선택은 자기본위적 삶의 궁극적인 패배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작가 소세키는 나의 개인주의를 당당하게 주장하고 옹호하고자 했지만 그의 개인주의는 작품 속에서 매우 힘겨운 투쟁 끝에 결국은 패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 패배를 잘 음미하고 성찰하는 것이 소세키 읽기의 과제로 여겨진다.   


16. 12. 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주의 발견'으로 제임스 페니베이커의 <단어의 사생활>(사이, 2016)을 고른다. 제목만 보면 언어학 책인가 싶은데, 사회심리학자의 책이다. 저자는 텍사스대학의 심리학 교수로 20년 이상 단어 연구에 매진해왔다고 소개된다. 단어와 그 사용자의 심리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 저자는 이를 '언어의 지문'이라고 부른다. 


"현재 텍사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자 학과장으로 재직중인 저자가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연설과 기자회견은 물론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 이메일, 블로그, 인터넷 게시글, SNS, 자기소개글, 대입 논술, 다양한 문학작품과 영화 등에 사용된 단어를 분석해 단어와 그 단어를 사용한 사람의 심리적 연관성에 대해 분석한 책으로, 일종의 '단어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심리학자로서 글쓰기를 통한 치유 효과를 연구해오던 중 '단어의 비밀'을 발견하게 된 저자는 사람들은 모두 말과 글을 통해 자신만의 '언어의 지문'을 남기며, 따라서 단어라는 단서만 있으면 그 단어를 사용한 사람의 '정체성, 성격, 심리 상태, 학교 성적, 회사 생활, 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지금껏 살아온 배경, 미래의 행동'도 파악할 수 있음을 밝혀냈다."


찾아보니 원제는 '대명사의 사생활'이다. 단어 가운데서도 대명사 분석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모양. 저자에 따르면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나'는 적게 쓰고 '우리'는 많이 쓴다고 하는데, 한국어에서도 그런지는 따져봐야겠다(글쓰기에 관한 저자의 책은 진작 소개되었다. <글쓰기 치료>와 <털어놓기와 건강> 같은 책이 보인다). 


각자가 자기의 말을 녹음하여 분석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지만 당장은 정치 지도자의 말(연설) 분석에 적용해볼 수도 있겠다. 비교 거리가 되는 책들도 나와 있는데, 윤태영의 <대통령의 말하기>(위즈덤하우스, 2016)와 최종희의 <박근혜의 말>(원더박스, 2016) 등이다. 아직 자세한 소개는 뜨지 않지만, <박근혜의 말>의 부제는 '언어와 심리의 창으로 들여다본 한 문제적 정치인의 초상'이다. '언어의 지문을 통해서 들여다본 한 문제 많은 정치인의 사생활'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16. 12. 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