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 책과 생각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의 한 단편 '이블린'에 대해 다루었다.

















한겨레(19. 06. 07) 나는 어딘가에 묶인 짐승은 아닌가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1914)은 작가 조이스의 탄생을 알린 출발점이면서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단편소설집의 모범이다. 작가가 되거나 좋은 독자가 되려고 할 때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한 위상에 맞게 다수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책을 구성하고 있는 15편의 단편 가운데 ‘이블린’을 비교해서 읽어보았다. 어떤 단편을 고르더라도 조이스의 솜씨와 성취를 느낄 수 있지만, ‘이블린’은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가진 유일한 작품이어서 눈길을 끈다(‘에블린’이란 제목으로도 번역되었다).


이 단편은 이블린이 창가에 앉아 생각에 잠긴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녀’라고 지칭되지만 짧은 서술의 대부분이 이블린의 회상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블린은 무능하면서도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생계를 위한 벌이와 살림을 맡아야 했다. “힘든 일이고 힘든 삶이었다.”(창비) 그녀에겐 형제자매가 있었는데 두 어린 동생이 그녀의 몫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어니스트와 해리로 불리는 두 남자 형제는 그녀의 오빠들로 보인다. 어린 시절에 어니스트만 빼고 공터에서 “그녀와 그녀의 남동생, 여동생들”(문학동네)이 놀았던 기억을 떠올리는데, “그녀와 그녀의 형제자매들”(창비)이나 “처녀네 남매들”(민음사) 정도가 타당해 보인다.


어릴 때는 이블린이 여자아이여서 아버지가 해리와 어니스트에게 그랬던 것처럼 손찌검을 하지 않았지만 열아홉 살을 넘긴 지금은 수시로 위협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어니스트는 죽고 해리는 일하러 지방에 가 있기에 그녀를 보호해줄 사람이 집에는 없다.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 외에도 이블린을 괴롭히는 건 돈 실랑이다.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받는 봉급 전부를 아버지에게 내놓고 생활비를 타 쓰고 있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돈을 낭비한다고 비난을 퍼붓는다. 이렇듯 힘들고 피곤한 삶에 지친 이블린에게 프랭크란 남자가 생긴다. “매우 친절하고 남자답고 속이 트인 사람”(창비)이라는 인상은 아버지와 다른 남자라는 뜻이겠다. 둘의 관계를 알게 된 아버지의 반대로 두 사람은 몰래 데이트를 해야 했다. 선원인 프랭크는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나자고 제안하고 이블린도 더블린의 삶에서 도망치고 싶어 한다. “왜 그녀가 불행해야 하나? 그녀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창가에 앉아 고심하던 이블린은 창밖으로 들려오는 손풍금 소리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을 떠올린다. 그녀의 어머니는 광기로 끝나버린 진부한 희생의 삶을 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가 고집스레 되뇌던 말은 “데레본 세론!”으로 대략 ‘쾌락의 끝은 고통’이라는 뜻으로 어림할 수 있는 게일어다. 평생을 희생하며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은 살아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주문 같은 말이 다시금 이블린을 몸서리치게 한다. 어머니에게 약속한 대로 더블린에 계속 남아 있는다면 이블린의 인생 역시 어머니의 삶을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공포감에 질려 프랭크가 기다리는 부두로 간다. 하지만 그녀의 번민은 끝나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에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마비 상태가 된다.


조이스는 마지막 순간에 프랭크와의 탈출을 포기하고 주저앉은 이블린의 모습을 짐승에 비유한다. “묶인 짐승”(창비), “넋을 잃은 짐승”, “수동적이 되어 어찌할 바 모르는 짐승”(민음사), “미약한 한 마리 짐승”(열린책들) 등으로 옮겨졌는데 그녀의 시선에는 더는 사랑이나 이별, 혹은 어떠한 인식도 담겨 있지 않았다. 끝내 더블린을 떠나지 못한 이블린과는 다르게 조이스는 1904년 10월, 장래 아내가 될 노라 바너클과 함께 대륙으로 떠나는 배에 오른다. 아일랜드의 잡지에 ‘이블린’을 실은 다음이었다.


19. 06.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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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9-06-09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동으로 가지고 있는데 창비 표지 넘 맘에 드네요. 지루한 이야기 표지와 비슷하네요 ㅎㅎ

로쟈 2019-06-09 21:21   좋아요 1 | URL
네, 색깔마다 느낌이 다르네요.~

초딩 2021-06-09 19:34   좋아요 0 | URL
ㅎㅎㅎ 미미님 라이크 하셔서 왔는데
댓글 연도 보고놀랬습니다
느린 알림 인줄 ㅎㅎㅎ

페넬로페 2021-06-09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쟈님께서 한 권을 선택하신다면 어떤 책을 고르실까요?
 

강의 공지다. 개포도서관에서 7월 2일부터 30일까지 매주 화요일 저녁에 '한여름밤 현대시 산책'이란 강의를 진행한다. 한국의 현대시인 5명의 시세계를 살펴보면서 한국 현대시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려고 한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한여름밤 현대시 산책


1강 7월 02일_ 김소월, <진달래꽃>



2강 7월 09일_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3강 7월 16일_ 김수영, <풀>



4강 7월 23일_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5강 7월 30일_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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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영국문학기행을 앞두고 오리엔테이션을 가졌다. 더블린으로 들어가서 런던에서 빠져나오는 8박10일간의 일정인데, 그 기간에 둘러봐야 하는 주요 작가만 하더라도 여덞 명 이상이어서 준비하려고 하면 매우 빡빡하다. 이번 여름에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과 <율리시스>를 여러 번 강의해야 하고 8월과 9월에는 정리판으로 ‘영국문학클럽강의‘도 진행할 예정이다. 계획대로 내년가을에 프랑스문학기행, 그리고 후년가을에 다시 러시아문학기행을 진행하면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문학기행은 하나의 사이클을 완성하게 된다(스페인과 포르투갈, 중부유럽, 그리스와 터키 등이 거기에 더해질 수 있는 선택지다).

자연스레 영국과 관련한 책들이 관심거리가 되는데 최근에 나온 책들로는 <옥스퍼드 과학사>(반니)와 <옥스퍼드 튜토리얼>(바다출판사)이 눈길을 끈다. <옥스퍼드 과학사>는 일러스트판이어서 부제도 ‘사진과 함께 보는, 과학이 빚어낸 거의 모든 것의 역사‘다. 공저인데 ˝20세기 중반에 많이 등장했던 큰 그림을 지향하는 과학사 책들과 달리, 13명의 과학사학자들이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해 과거부터 현재까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파고들어 한 권으로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책에 대한 신뢰는 근대 과학혁명을 선도한 나라가 영국이어서다. 그런 면에서는 빌 브라이슨이 엮은 <거인들의 생각과 힘>(까치)도 같이 읽어볼 수 있겠다. 영국 왕립회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옥스퍼드 튜토리얼> 역시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한 다수의 학자들이 참여한 공저인데 옥스퍼드 대학의 독특한 교수법을 소개하는 책이다. ˝튜토리얼은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 기반을 둔 교수법으로, 옥스퍼드 대학교가 시작되기 전인 11세기부터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튜토리얼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 교수법이 옥스퍼드를 명문으로 만든 핵심 교육법이자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라고 말한다. 이 책은 옥스퍼드에서 튜토리얼을 경험했고, 이제는 튜터가 되어 학생들을 지도하는 각 분야의 경험 많은 옥스퍼드 거장들이 튜토리얼에 관해 피력한 신념과 주장을 담았다.˝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교육‘이라고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데 우리의 교육방식 혹은 교수법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봐도 좋겠다. 물론 비교로 끝낼 일은 아니고, 특별한 비결이라고 생각된다면 우리 현실에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도 궁리해봐야겠다. 옥스퍼드 모델이라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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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 고전극장'의 올해 프로그램은 러시아연극이다. 6월12일부터 9월 1일까지 러시아문학작품을 새롭게 각색한 여섯 편의 공연이 무대에 올려진다(이들 작품에 대해서는 세 차례에 걸쳐서 강의할 예정인데, 구체적인 일정은 추후에 공지하겠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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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글 2019-06-06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번 여름에는 연극이랑 소설로 충만할 것 같습니다.^^

로쟈 2019-06-06 19:55   좋아요 0 | URL
네, 연극은 저도 보게 될 듯.~

붕붕툐툐 2019-06-06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눈이 번쩍 뜨이는 정보네요~ 연극 모든 작품 다 보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로쟈 2019-06-06 22:13   좋아요 0 | URL
^^

카스피 2019-06-0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죄와벌은 장편이라 다 읽지 못했지만 스페이드의 여왕은 단편이라 쉬이 읽은 기억이 나네요^^

로쟈 2019-06-08 23:17   좋아요 0 | URL
^^
 

이번주 주간경향(1330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최근에 강의에서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다시 다룬 김에, 마침 발표 70주년이 된 작품이기도 해서 작품의 주제를 다시 생각해본 글이다. 


















주간경향(19. 06. 10) '아메리칸 드림의 죽음' 혹은 '아버지의 죽음'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1949)을 읽기 위하여 특별한 명분이 필요하지는 않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1953)와 함께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온 가장 유명한 극작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도 매년 공연되고 있는 만큼 여전히 현재적이다. 발표 70주년을 맞으면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세일즈맨의 죽음>을 다시 읽으며 그 현재성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알려진 대로 <세일즈맨의 죽음>은 늙은 세일즈맨 월리 로먼의 애환과 죽음을 다룬 작품이다. 윌리는 아내와 두 아들을 식구로 거느린 가장이다. 과거에 전성기가 없지는 않았지만 예순을 넘긴 현재는 30년을 넘긴 영업직 생활에 지쳤고 수입은 점점 줄어들어 허탕을 치는 날도 잦다. 윌리가 귀가하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날까지 만 하루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지만 작가는 윌리의 회상과 환상 장면들이 무대에 동시에 제시될 수 있도록 했다. 소설에서는 ‘의식의 흐름’으로 불리는 모더니즘의 기법이 희곡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용된 사례가 아닐까. 덕분에 관객은 세일즈맨 윌리의 하루뿐 아니라 그의 전 생애를 압축적으로 보게 된다. 

윌리의 회상과 환상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은 그의 형 벤이다. 윌리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벤은 알래스카로 떠난 아버지를 찾으러 나섰다가 엉뚱하게도 아프리카로 가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고 부자가 되었다는 인물이다. “나는 열일곱의 나이에 정글 속으로 걸어들어가 스물한 살에 걸어나왔지. 부자가 되어서 말이야”라고 자랑을 늘어놓는 벤은 조카들에게 처세훈도 남긴다. “모르는 사람과는 절대 공정하게 싸우지 마라, 얘야. 그래서는 절대 정글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부자가 되었다는 주장이 사실이든 허세이든 벤은 윌리의 모델이 되며 윌리는 그를 닮고자 한다. 그렇지만 정글처럼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직 인정에 호소하려는 윌리의 모습은 그가 세일즈맨으로서 왜 낙오하게 되었는가를 시사한다. 아들에게 남겨줄 보험금을 노리고 자동차에 오르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가 의지하는 것은 환각을 통해 불러낸 벤이다. 벤이 소위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라면 윌리가 마지막까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상이다. 때문에 한 세일즈맨의 죽음은 아메리칸 드림의 죽음으로도 읽힌다. 한때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가능하지 않은 꿈을 평생 추구한 인물이 윌리 로먼이라고 해도 좋겠다.

윌리의 죽음과 장례식으로 마무리되는 작품에서 그렇지만 희망의 단초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 희망은 장남 비프가 보여주는 것인데, 작품에서 다른 식구들과 달리 유일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인물이 비프다. 아버지의 과도한 기대에 부응하려고 헛되게 부유하며 젊은 시절을 낭비한 비프는 “네 인생의 문은 활짝 열려 있어!”라고 독려하는 아버지 윌리에게 맞서며 “아버지! 전 1달러짜리 싸구려 인생이고 아버지도 그래요!”라고 폭로한다. 그런 비프가 흐느끼는 것을 보고서도 감동하여 “저 애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라는 기대를 놓지 않는 게 아버지 월리의 부정이다. 구제불능이라고 할 만한데, <세일즈맨의 죽음>의 또 다른 주제는 그 ‘아버지의 죽음’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19.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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