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하면 ‘분노를 넘어서‘겠다. 토머스 하빈의 <비욘드 앵거>(교양인). 부제는 ‘분노 폭탄을 안고 사는 이들을 위한 심리 처방‘이다. 저자는 미국의 심리학자(분노 치료 전문가란다). 자연스레 예상되는 내용은 분노 관리나 대처법이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분노 치료 전문가인 저자는 분노 문제로 결혼 생활을 행복하게 꾸리지 못하고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자신의 경험담을 솔직하게 들려준다. 심리 상담과 치료를 하며 만난 화난 남자들의 다양한 사례를 통해 만성적 분노의 구체적인 증상을 알려준다. 

화난 남자들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연인에게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분노 문제의 원인을 찬찬히 따져 분노를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화를 참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남자들과, 그 남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다.˝

비교적 화를 안 내는 성격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생각해보면 ‘화난 남자‘에서 나도 예외는 아니다. 분노를 못 느끼는 게 아니라 표현을 하지 않을 뿐이라면 상태는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다시 보게 된 책이다. 아직은 제목만.

분노와 관련하여 이전의 관심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이었다. 관심도서로 이전에 골라놓았던 판카지 미슈라의 <분노의 시대>(열린책들)나 슬로터다이크의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이야기가있는집) 같은 책이 그런 경우. 그와 비교하면 ‘비욘드 앵거‘는 ‘고작‘ 분노에 관한 책일 수도 있다(‘시대‘나 ‘세상‘에 견주어 그렇다). 그럼에도 때로는 분노를 잘 다스려야 할 때도 있는 법.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는 책장을 넘겨봐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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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7년에 제인 오스틴이 사망하고 유작으로 나란히 나온 책이 <노생거 사원>과 <설득>이다. 현재 조이스의 <율리시스>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번 영문학 강의의 출발점도 이 두 작품이었다. 더불어 개인적 취향으로는 가장 만족스러운 오스틴 소설들인데 그건 이 두 작품이 정태적인 세계 대신에 변화하는 세계를 묘사하고 있어서다. <노생거 사원>에서 그 변화는 고딕소설의 패러디로 나타나고 <설득>에서 젠트리계급에서 해군집단으로 중심이 이동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알려진 대로 <설득>은 오스틴의 마지막 완성작으로 1815년에 시작해서 그 이듬해에 초고를 끝낸 작품이다. 전작들에서 모범적으로 제시된(이상화된 면이 있다) 젠트리계급이 <설득>에서 월터 엘리엇 경처럼 속물로 풍자된다. 외모와 지위에 대한 허영심을 가득 채워진 인물이 월터 경이다. 아버지의 반대와 대모의 설득으로 앤 엘리엇은 열아홉살어 젊은 해군장교 웬트워스의 청혼을 거절한다. 이후 팔년이 지나서 두 사람은 재회하고 이번에는 부와 지위에서 남부럽지 않은 처지가 된 웬트워스와 결혼하게 되누 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설득>에서 변화는 월터 경의 점진적인 몰락과 웬트워스 대령의 신분상승 과정으로 요약된다. 그것이 1810년대 초에 이루어진 영국사회 변화의 축도이기도 하다. 결혼이야기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젠트리계급의 풍속에 대한 유쾌한, 혹은 신랄한 풍자도 제공해온 것이 오스틴 소설이었다면 <설득>에서는 풍자보다 공감이 더 지배적인 정서가 된다. 아마도 오스틴 소설의 주인공들 가운데 오스틴과 가장 근거리에 위치한 인물이 있다면 앤 엘리엇이 아닐까 싶다.

<노생거 사원> 강의때 을유문화사판을 썼는데 이번에 민음사판이 새로 출간되었다. 민음사판으로는 이제 <맨스필드파크>만이 미출간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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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간을 빼놓고 나왔어
우산은 챙기면서 말이야
간은 소중하니까 때로는
냉장고에 보관하기도 하고
때로는 바닥에 떨어진 걸 보기도 해
간 떨어진 걸 본 거야!
간은 소중하니까 들고다녀야 
하지만 어디에 넣는다는 거야?
갈비뼈 안쪽에 잡히게끔
간은 그런 거야?
간이 안 좋아서 안색이 안 좋은 것인가
간이 부어서 안 좋은 것인가
하지만 언제부터 간 생각을 했다고
간은 그냥 거기 어딘가에 있는 거지
빼놓고 나와도 지갑을 놓고 온 것만 못해
간이 계산을 하겠어 전철을 태워주겠어
간이 없다면 안색들이 말이 아니겠지만
아침 지하철에서 관리된 표정들만 봐도
간은 문제없어 빼놓고 다녀도 
간은 간대로 자기 볼 일을 보는 거지
문제는 간이 아닌 거지
간보다 간절한 것은 따로 있는 거지
정작 빼놓지 못해서 마음이 아파
맞아 심장이야
심장은 내가 앉아 있어도 뛰고
내가 자는 동안에도 뛰어
내가 대신 뛰어주려고 해도 막무가내지
언제 심장을 쉬게 해주어야 하는 거야?
언제 심장은 빼놓을 수 있는 거야?
더는 뛰지 않게 너를 보고도
더는 뛰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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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9-06-27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하지 마세요~ㅎㅎ

로쟈 2019-06-27 23:12   좋아요 0 | URL
ㅎㅎ

이파리 2019-07-05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운,과 각운, 이라...
 

강의차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리시올)을 읽었다. 피셔는 영국에서 2000년대 이후 가장 주목받은 비평가였다는데 ‘K-punk‘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블로그 지식인이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2009)이 그가 펴낸 첫 책이고 이후 <내 삶의 유령들>(2014)와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2016) 등을 펴냈다. 2017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유작으로 <K-PUNK>가 나왔다. 이 책들을 모두 주문했으니 나로선 ‘전작 작가‘의 한 명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피셔는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상상마저 봉쇄한 자본주의의 위세를 인정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 그렇지만 19세기에 마르크스가 그랬듯이 그는 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한 체제라고 보지 않는다. 포스트자본주의에 대한 상상과 모색은 그래서 필연적인 과제가 되지만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기 어렵다. 슬라보예 지젝과 마찬가지로 먼저 요구되는 것은 현 시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피셔는 이 인식을 문화비평의 형태로 제시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좋은 문화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서 의미가 있다. 그의 작업 전반을 따라가 보려고 나머지 책들도 주문한 것인데 마침 지난주에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구픽)도 출간되었다.

원저에는 들어있지 않은데 한국어판 <자본주의 리얼리즘>에는 부록으로 조디 딘과의 대담이 실려있다. <지젝의 정치학>이란 책의 저자로 접했는데 여러 권의 흥미로운 책을 더 썼고 최근에 <공산주의의 지평>(현실문화)이 번역돼 나왔다. 피셔는 ‘포스트자본주의‘라고 부르지만 딘은 전통적인 용어로 공산주의란 말을 계속 쓴다. 그렇지만 슬라보예 지젝에게서도 그렇듯이 이 공산주의는 새롭게 발명되어야 할 공산주의다. 딘의 책도 이번에 몇 권 주문했다. 지젝 이후 좌파이론의 향방에 대해서 두 저자를 참고해보려 한다...

PS. <자본주의 리얼리즘> 80쪽에서 ˝이것이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소비에트 국가의 실패를 ‘인정했던‘ 1965년 연설이 그토록 중대했던 이유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연도 표기가 잘못되었다. 확인해보니 원저에서부터 1965라고 잘못 표기되었다. 흐루쇼프(요즘 표기)의 유명한 연설은 1956년 제20차 전당대회에서의 비밀연설을 가리킨다. 1964년에 실각한 그가 1965년에 무슨 연설을 했다는 것부터가 상식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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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332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강의에서 읽은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에 대해서 적었다. 대략 2000년대 이후 2012년 절필하기까지의 작품들이 그의 말년작으로 분류되지 않을까 싶다. 케페시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죽어가는 짐승>(2001)부터가 되는지. 그의 마지막 작품은 <네메시스>다...



 













주간경향(19. 06. 24) 죽음을 앞둔 보통사람의 보편적 운명


지난해 세상을 떠난 필립 로스는 생전에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간판 작가였다. 2016년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오히려 문학독자들의 시선은 필립 로스를 항하기도 했다. 밥 딜런이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수상자였다면 필립 로스는 누구라도 동의할 만한 수상 후보였다. 미국 최고의 작가라는 평판과 30여편의 소설을 발표한 다작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필립 로스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오래되지 않는다. 처음 정식 판권계약을 맺고 출간된 <에브리맨>(2006)이 신호탄이었다. 2012년 절필을 선언한 그에게는 말년작의 하나다.

노년에 이른 작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필립 로스의 말년작들은 노년과 죽음을 주제로 다룬다. <에브리맨>도 마찬가지다. ‘보통사람’을 뜻하는 ‘에브리맨’은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보석가게의 이름이지만 죽음을 주제로 다룬 이 작품에서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의 주어를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 구체적인 한 인물의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 운명을 환기시켜준다는 점에서는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과도 비교하게끔 만든다(‘이반’이라는 이름 역시 러시아에서는 가장 흔한 이름이다). 

이반 일리치의 부고와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에브리맨>도 이름 대신에 ‘그’라고만 지칭되는 주인공의 장례식으로 시작해 그가 살아온 생애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으로 따라간다. 광고회사의 아트디렉터로서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삶을 산 축에 속하지만 그는 사생활에서는 그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세 번의 결혼과 이혼 끝에 혼자서 은퇴자 마을에 살다가 심장수술 중에 사망한다. 그렇지만 공적인 경력에서나 사생활에서 그의 삶이 특별하거나 도드라진 것은 아니다. 가족과 일부 지인만 참석한 장례식도 일상적이고 지극히 평범하게 치러진다. 오히려 인상적인 것은 그런 평범함이다.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라는 토로는 작가의 육성으로 들린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일리치는 의문의 병으로 죽어가면서 마지막까지 죽음에 대한 의식으로 고통받는다. 죽음이 그가 살아온 삶과 성취를 무효로 만들 것이라는 생각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중시킨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자신의 삶 전체가 기만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는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주인공 일리치는 죽으면서 죽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란 존재가 부정된다면 그의 죽음이란 사건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에브리맨>에서는 그러한 회심과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부정하는 이반 일리치와 달리 <에브리맨>의 주인공은 ‘현실을 다시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을 좌우명으로 여긴다. 비록 후회할 만한 짓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것을 되물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는 수용적 태도만 가능한 것일까. 소설의 결론은 아니지만 필립 로스는 젊은 시절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주인공의 생각에 슬쩍 끼워넣는다. 그것은 죽음의 부당성에 대한 생각이다. ‘사람이 일단 삶을 맛보고 나면 죽음은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필멸적 존재가 갖는 반항의 최대치다. <에브리맨>은 그 반항을 주제로 삼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보통사람들을 위한 ‘보통사람’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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