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로 상당수 강의 일정이 취소되거나 연기돼 갑작스레 무급휴가를 갖게 되었다. 강의와는 별도로 써야 할 원고와 교정거리가 쌓여 있으니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원래는 거기에 더해서 매주 10개 안팎의 강의가 있었다. 갑작스레 주어진 시간에 할 만한 생산적인 활동을 궁리해보다가(한시적 실직이기도 하므로)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1353)을 이 참에 읽기로 했다. 정색하고 읽은 적은 없어서다.

오래전에 단테의 <신곡>(1321)은 강의에서 읽었지만 <데카메론>은 다룰 기회가 없었다. 근대소설의 전조로서 <데카메론>과 <캔터베리 이야기> 등을 언젠가 강의에서 다루려고 했지만 무산됐었다. 이래저래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 문학강의가 숙제처럼 남았었는데 코로나 사태를 핑계로 <데카메론>을 읽으려는 것. 1348년 페스트의 참상을 목도하고 구상한 작품으로 알려지기에 ‘코로나 시절‘과 조응하는 면도 있다. 안 그래도 카뮈의 <페스트>(1947)가 이즈음 독자들이 많이 찾는 소설이 되었는데, 그런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데카메론>도 독서목록에 올릴 만하다.

<데카메론>은 열흘간 10명의 화자가 들려주는 100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에 맞추기 위해 나도 열흘간 읽으며 소감을 남기려 한다(작품에서는 평일만 계산하기에 날짜로는 두주간이다). ‘코로나 시절의 독서‘라고나 할까. 강의경력으로 치면 24년차에 이런 일도 겪는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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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20-02-29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와 강의 24년차라니 대단하십니다. 강의 8년차인 저도 요즘 강의가 다 없어져서 아내가 대리운전이라도 하라고 타박합니다 ㅠㅠ 데카메론은 제가 고3 때 너무 공부하기 싫어서 이것저것 뒤지다 읽은 책이어요. 의외로 재미있어서, 고전도 재밌구나를 느끼게 해줬습니다. 암튼 빨리 코로나가 종식돼서 로쟈님과 제가 강의를 할 수 있게 되길 빕니다.

로쟈 2020-02-29 14:11   좋아요 0 | URL
아 개강이 연기된거죠? 유급휴가도 눈치보이시나요?^^

마태우스 2020-03-01 22:25   좋아요 0 | URL
그, 그게 아니고요 저도 외부강의로 먹고 살잖습니까. 근데 그게 다 취소됐습니다. ㅜㅜ

로쟈 2020-03-01 23:36   좋아요 1 | URL
부업 말씀인 걸로.^^

오지 2020-02-29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천일야화가 떠오르네요. 천일야화는
열린책들판으로? 건강 보살피시길.

로쟈 2020-02-29 14:12   좋아요 0 | URL
천일야화까지는 다시 손댈 계획이 없지만 중세문학까지 올라가다보면 그리될수도.~
 
 전출처 : 로쟈 > '지구화 시대의 영문학'에 대한 단상

무려 16년 전에 쓴 글이다. <지구화시대의 영문학>(창비)이란 책의 출간에 즈음하여 백낙청 문학론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을 적었다.
코로나 사태로 시절이 하수상하다. 총선 같은 정치적 일정은 나중 문제이고 당장 일상의 루틴 자체가 타격을 받고 있다. 앞으로 고비가 될 한달간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궁리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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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글이 2020-02-28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부분 강의가 취소되셨을 듯..
다들 힘내고 잘 버팁시다~~~

로쟈 2020-02-29 14:09   좋아요 0 | URL
네 다들 어려운 시기입니다.^^;
 
 전출처 : 로쟈 > 20세기와 잃어버린 마르크스주의

14년 전의 독서메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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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저자 나호선의 <젊은 생각, 오래된 지혜를 만나다>(여문책)를 아침에 가방에 넣었다. 목차만 보면 세 가지 주제(평등, 권력, 혐오)에 관한 열두권의 책을 읽고 적은 독후감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이다. 제목의 ‘오래된 지혜‘는 얼핏 고전을 떠올리게 하는데 고전이라고 부르기엔 어색한 책들도 포함돼 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한병철의 <피로사회>, 신현준의 <레논 평전> 등은 고전이 되기까지 좀더 숙성기간을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이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고전이라기보다는 고약한 책이다.

나의 관심은 일단 <공산당선언>에 대한 독후감에 한정되는데, 나대로 해제를 써야 하는 게 있어서 ‘젊은 생각‘을 참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자가 서문에서 기대한 것과 달리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만한 건 눈에 띄지 않았다. 짐작에는 이런 견해를 새로운 해석이라고 생각했을까?

˝분명 마르크스는 사람에 관한 무엇인가를 놓친 게 틀림없다. 나는 그의 큰 붓이 역사의 큰 그림을 디자인하는 데는 능했어도 가난한 대중의 복잡다단한 심리구조를 소묘하는 데는 너무 서툴렀다고 생각한다. 빈민과 서민, 노동자와 실업자, 이들은 뭉쳐야 할 때 제대로 뭉치지 못했고, ‘바닥을 향한 경쟁‘을 벌이며 서로를 질투했다.˝

그래서 꺼내든 게 빈민과 서민의 ‘복잡다단한 심리구조‘다. 그런데 실제로는 복잡다단하지 않다. 아주 단순하게도 빈자는 부자를 감히 넘보지 못하고 그냥 현실적으로 서민이 되고자 할 뿐이다(저자는 ‘서민‘을 ‘상대적 빈곤층‘, ‘빈민‘을 ‘절대적 빈곤층‘으로 구별한다). 그래서 벌어지는 게 서민과 빈민의 자리 뺐기 경쟁이다. 이 자리싸움이 계급투쟁을 대신한다는 것. 따라서 마르크스가 예견한 공산주의의 도래는 무망한 것이 된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자본가계급에게 결코 위협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략 저자의 견해는 그렇게 정리될 성싶다. 이러한 사정을 마르크스는 간과했다는 것.

˝마르크스는 역사의 운동방식에 너무나 고무된 나머지 인간의 작동방식을 오판했다. 그가 허위의식으로 치부해버린 인간의 원초적 감정들이 못사는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말았다. 그는 구조가 사람을 만들지만, 단결된 사람들이 구조를 깨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간은 때로는 위대한 선택을 일궈내면서도 종종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리기도 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는 그것을 간과했다.˝

고로 ˝이기심을 사회적으로 박멸하려고 했던˝ 마르크스의 시도는 ˝위대하면서도 바보 같았던 것˝이라는 결론. 나로선 이러한 ‘양다리 걸치기‘가 ‘젊은 생각‘인지 궁금하다. 인간이 저지르는 바보 같은 결정이 위대한 선택을 무력화한다면, 바보 같은 마르크스 역시 위대한 마르크스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말미에 가서 저자는 다시금 마르크스를 소환한다. ˝마르크스는 실패했어도 그가 추구했던 가치는 인류가 풀지 못한 오래된 소망이었다. 마르크스는 죽었어도 그의 영혼은 그가 사랑했던 가치와 함께 영원히 살아있다.˝ 흠, 그가 추구했던 가치(평등?)가 아무리 위대하고 고상하다 하더라도 저자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인간의 작동방식을 오판했고, 인간의 원초적 감정, 복잡다단한 심리구조를 이해하지 못해서 결국 실패한 사상가가 아니던가. 그렇지만 그는 계속 살아있다고?

나로선 저자가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것인지 기리고자 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위대한 바보‘이기에 둘다인가? 너무 두루뭉술하게 여겨진다. 마지막 단락.

˝피는 붉다. 열정도 붉다. 심장이 뛴다. 오늘도 내일도, 역사는 알게 모르게 전진할 것이다. 미래는 희극으로 재현될 수 있기를 바란다. 흑백의 자본주의, 적색의 공산주의를 넘어 새로운 역사는 다채로운 빛깔의 수채화이기를 꿈꾼다.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매우 시적이다. 그렇지만 심장이 뛰게 하지는 않는다. 미래가 희극으로 재현된다? ˝역사는 두번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 희극으로.˝ 같은 마르크스의 경구를 기억한다면 저자의 의도와 달리 희극(소극)이란 말이 얼마나 코믹하게 들리는지 가늠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마르크스가 너무 ‘큰 붓‘으로 역사의 그림을 그렸다고 할 때 눈치챘어야 하는데 저자는 비유에 너무 고무된 것 같다. ˝흑백의 자본주의, 적색의 공산주의를 넘어 새로운 역사는 다채로운 빛깔의 수채화이기를 꿈꾼다˝라니!

독후감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할 건 아니다. 다만, 나이가 그 자체로 ‘젊은 생각‘을 보장해주는 건 아니며, 특히나 ‘수채화‘ 같은 비유로는 역사에 대한 진지한 인식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조언 정도만을 덧붙이고 싶다. 아, 청년 마르크스도 서른살에 <공산당선언>(1848)을 발표하면서(엥겔스는 저자와 같은 스물여덟 살이었다) 공산주의를 유령에 비유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마지막 문장에 이르는 여정의 첫 문장이었다. 하나의 비유를 서툰 비유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노고가 필요하다. 냉철한 이지와 열정과 분노와 희망이 총동원되어야 하는 것.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는 첫 문장이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적어도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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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0-06-0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로쟈님의 이 글을 꼭 읽어줬으면 하네요...^^
 

다시 나온 책이라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한다. 로잘린드 마일스의 <세계 여성의 역사>(파피에)다. 앞서는 지난 2005년에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동녘)란 제목으로 나왔었는데, 원제가 그렇고 '세계 여성의 역사'가 부제다. 이번에는 부제를 제목으로 바꿔서 다시 펴낸 것. 15년만의 재출간인데, 아무래도 그때보다는 좀더 주목을 받을 성싶다. 부제는 '인류를 지탱해온 '위대한 절반'의 사라진 흔적을 찾아서'.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세계 여성의 역사>는 다소 엉뚱한 질문으로 이야기의 막을 연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그림자 노동'을 한 투명인간 같은 존재를 향한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했던 지은이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만일 남자 요리사가 차렸다면 열광하는 추종자를 잔뜩 거느린 성인이 되어 그를 기념하는 축일이 생기지 않았을까?"라고. 우리가 배웠던 역사는 정확히 말하면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남성'의 역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남녀의 성비는 비슷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역사책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의 성비는 이토록 불균형할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명쾌하고 선명한 답을 제시한다. 여성은 세계사 속에서 가장 학대받고 지워진 존재였다고 말이다."


책은 어제 크르즈나릭의 <원더박스>(원더박스)를 읽다가 참고문헌으로 검색하여 재발견하게 되었다. 무려 이번주에 다시 나왔다!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도 갖고 있지만(물론 행방은 알지 못한다) 다시 주문하고 배송을 기다리는 중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여성의 역사를 다룬 책이 처음은 아니다. 국내서도 좀 나와 있고, 최근에는 <신석기시대 세계여성사>도 출간되었다. 독어권 책으로 재작년에 나온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어크로스)가 <세계 여성의 역사>와 기본서 자리를 놓고 경합할 수 있을 듯싶다...


20. 0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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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7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