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기 전 책을 찾다가(며칠 전부터 찾는 책들이 있다) 다시 손에 든 시집이다. 구영미의 <나무는 하느님이다>(시와실천). 약력으로는 2018년에 등단해서 지난해에 펴낸 첫시집이다. 보통 시집을 읽는 독법은 첫시부터 읽거나 표제시부터 읽는 것이다(무작위로 읽는 걸 독법이라 칠 건 아니므로). 표제시를 찾아보니 이렇게 시작한다.

나무는 식탁이다
나무는 편지다
나무가 하늘 앞에 서 있다
나무에 앉아 있는 하느님을 만난다
하느님이 휘파람을 분다
새가 춤을 춘다
(...)

시상의 전개가 억지스럽지도 않지만 또 놀랍지도 않다. 이렇게 마무리된다.

나무에 기대 편지를 읽는다
나무에 기대 밥을 먹는다
나무에 기대 달을 본다
나무는 하느님이다

마지막 행이 제목이 되었고, 이 은유로 해명되는 시다. 시에서 ‘하느님‘을 호명하는 시로는 김춘수의 ‘나의 하느님‘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 어린
순결이다.
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보통 시작법책에서 은유의 사례로 많이 적시되는 시이기도 하다. 표제시를 건너뛰고 마음이 가는 시를 찾아보았다. 병증(통증, 편도선염, 갑상샘 항저하증, 호스피스 병동)이 제목에 들어가 있는 시들이 눈에 많이 띄는데 시인 자신이 병치레 경험을 많이 갖고 있는 듯싶다. 그 가운데 나의 취향에 맞는 시는 ‘녹턴‘이다. 실제 경험이 실종되다시피 한 요즘시들과 확연히 다른, 실감의 시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오후 열한 시 오 분쯤
대전대학교 부설 한방 병원
육인 실 커튼 사이로 간간
빠져 나오는 밭은기침 소리
운율이 불규칙한 코 고는 소리
화장실에서 들리는 물 내리는 소리
명치를 자박자박 두드리는 소리
스마트폰이 부들거리는 소리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
복도를 오가는 슬리퍼 소리
몇 번이고 돌아눕는 이불 소리
옅은 벽 등을 켜고 따라온 시집 한 권
지문이 빼곡하게 새겨진 페이지마다
그리운 바람소리
수화기 저 편 당신 목소리
힘내자
야간 근무하는 이은미 간호사가
묻는다
좀 어떠세요?

병원 육인 실에 입원해 있는 시인에게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모아 한편의 ‘녹턴‘으로 구성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실감의 시라고 불렀는데 일상의 시이기도 하다. 낯익은 경험과 자연스런 어법이 잘 어우러진 시의 사례다. 추천사를 적은 신달자 시인은 이렇게 평했다. ˝그의 시는 대체적으로 선명한 마음의 굴곡을 잘 따르는 인생론적 테마이며 그것을 바탕삼아 인간의 예술적 본성을 자신만의 언어로 충실히 그려내고 있다.˝

나대로 옮기면, 시인은 일상의 테마를 자신의 언어로 그려내고자 한다. 아직 습작기에 유명 시인들을 사숙한 흔적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나는 구영미 시인의 ‘녹턴들‘을 더 듣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를 석권한 날 ‘바이러스를 삼킨 기생충‘이라고 적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미국 증시도 폭락한 오늘 시점에서 보면 기생충의 득세는 일시적이었다. 다시금 지구는 바이러스가 지배하는 바이러스 행성이라는 것을 지구인들이 깨닫고 있으니까(봉준호 감독의 차차기작이 됨직하다).

경합의 선택지는 무엇인가. 바이러스 행성 vs 기생충 제국? 사실 둘다 과학저술가 칼 짐머의 책인데, 확인해보니 이번 코로나 사태의 수혜자 같지는 않다. 좀더 직접적이고 센 책들이 나와있어서다(출판계에서 최고 수혜자는 카뮈의 <페스트>로 보인다. 코로나 공포시대를 살면서 <페스트>를 읽는 심리는 어떤 심리일까?).

바이러스 관련서들을 훑어보다가 이런 분야의 책 리뷰는 더 적임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욕심을 버렸다. <바이러스 행성>과 <기생충 제국>이 눈에 익지만 구매내역에는 없어서 소장여부는 불확실하다. 대신 발빠르게 개정판이 다시 나온 데이비드 콰먼(쾀멘)의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꿈꿀자유)는 다시 손에 들 수도 있겠다(찾을 수 있을까?) 2017년에 구입할 때는 이런 책의 독자가 희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출판사의 선견지명이여!). 660쪽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현재 가장 주목받는 과학서의 하나다. 알 수 없는 건 야구만이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시적이지만 일상의 루틴을 바꿔서 점심을 먹고 카페에 나가 책을 보고 다른 일정이 없으면 귀가해서 저녁을 먹는다(식대를 줄이는 효과?). 점심을 차려서 먹기 전에 오늘 배송 예고된 책 가운데 하나에 대해 적는다. 심리학자 제롬 케이건의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책세상).

앞서 두권의 책이 소개돠 있기에 구면의 저자이지만 내게는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가 첫책이다. 부제는 ‘인간을 완성시키는 12가지 요소‘. 저자는 하버드대학 심리학과의 석좌교수로 발달심리학의 권위자. 책소개는 이렇다.

˝무엇이 인간을 이토록 발달시켜 왔을까?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까? 칼 융과 파블로프의 뒤를 잇는 현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 제롬 케이건이 이 질문에 대해 답하며, 그간 사회과학적 연구 방법의 모순을 지적하고, 60년간 인간 발달에 관해 연구해오면서 느끼고 생각한 인간을 완성시키는 12가지 요소에 대해 분석한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교양소설(형성소설)과 관련해 ‘경험‘과 ‘교육‘의 의미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심리학의 설명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새로운 통찰을 읽게 될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젝을 다시 손에 들면서(안 쓰던 뇌근육을 다시 쓰는 기분이다) 책들을 다시 소집하고 있는데(필요한 몇권의 책은 서가에서 못찾고 있다. 짐작에 나는 50권 이상의 지젝 책을 갖고 있다) 켈시 우드의 <한권으로 읽는 지젝>(인간사랑)도 그중 하나다. 번역본보다 원서를 먼저 구입했던 책.

미국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한 것으로만 소개되는데 특별히 이름있는 저자는 아니다. 다만 ‘리더스 가이드‘라는 원서 부제에 충실하게도 지젝의 전체 저작(2012년까지)의 개요를 잘 정리해주고 있는 책이다. 일종의 지도라고 할까. 게다가 원서의 문장도 아주 평이하고 그에 따라 번역본의 가독성도 좋다. 지젝이라면 난해함을 떠올리는 독자들에게는(부당한 이미지이긴 하다.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지젝이 난해하다면 그가 해설하는 헤겔과 라캉이 난해해서다. 그럼에도 지젝은 그들을 이해하게끔 해준다) 맞춤한 입문서다(물론 지젝을 얼마간 읽은 독자, 철학에 대한 얼마간의 배경지식을 갖고 있는 독자에게 맞춤하다).

다만 번역어 선택이 특이할 때가 있는데 정신분석의 transference를 ‘이심전심‘으로 옮기는 식이다. 통상 ‘전이‘라고 옮겨지므로 원어를 병기해주거나 각주에서 번역어 선택에 대해 해명해주었으면 좋았겠다. 설마 심리학계에서 ‘이심전심‘을 개념어로 쓰지는 않을 듯하기에.

역자는 철학박사로 이력이 소개되는데 제이슨 포웰의 <데리다 평전>(인간사랑)과 이 책이 번역서다. <데리다 평전>은 기억에 영어권에서 나온 최초의 평전이었다. 이후에 데리다 브누아 페터스의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그린비)가 추가되는데, 이 책의 원서도 너무 일찍 구해놓는 정작 필요할 때는 행방을 찾지 못해 독서가 지연되었다. 하는 수없이 원서의 보급판을 다시 주문해서(그렇게 하드카바와 소프트카바, 두종을 갖고 있는 책들이 몇권 된다) 내일 배송받을 예정이다. 이 가이드북과 평전들도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간수해야겠다. 그래야 끝까지 읽을 테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전히 저자의 출신지를 관심의 계기로 삼는 건 드문 일이지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라면 그럴 만하다. 최근에 나온 두 책의 저자의 출신지가 바로 1990년대 내전으로 기억되는 보스니아다. 1964년생 알렉산다르 헤몬과 1978년생 사샤 스타니시치.

헤몬은 27세에 미국 시카고를 방문했다가 내전의 발발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천신만고 끝에 미국에 안착하여 현재는 대학의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가와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나의 삶이라는 책>(은행나무)는 그의 회고록.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록산 게이 등의 작가들이 강추하고 있다.

헤몬보다 한 세대 아래인 스타니시치는 14살 무렵에 내전과 만났고 부모와 함께 탈출해 독일로 이주한 경우다. 2006년에 첫장편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를 발표하면서 등단했고(놀랍게도 번역됐던 작품이다. 현재는 절판된 상태이지만) 지난해에 자전적 장편소설 <출신>(은행나무)를 출간했다. 독일 문단의 대표작가로 우뚝서고 있다고.

반년 정도의 터울이 있지만 두 작가의 책이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걸로 보아 의도적인 계획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나로선 보스니아 내전기의 삶에 대한 기록으로 관심을 갖게 된다. 구유고연방의 영화감독 에밀(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영화들이 그간에 내가 접해본 전부였다. 책이 더 나와있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