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에서 기획기사 '러시아의 20세기'를 옮겨온다. 지난 3월에 출간된 사진집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3 - 러시아의 세기>(북폴리오, 2007)의 자료사진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유익하고 생생하다. 6차례에 걸쳐 소개될 예정이라는 이 기사는 모두 옮겨놓을 계획이다. '러시아 이야기'이니까.

 

한겨레 (07. 04. 30) 러시아의 20세기 ① 로마노프 왕조의 최후

» 네 명의 어린 로마노프 공주들. 왼쪽부터 황녀 올가, 타탸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 사진/K. E. 한 <북폴리오> 제공
네 명의 어린 로마노프 공주들 = 살해되기 전만 해도 공주들은 유럽에서 신붓감으로 첫째 손가락에 꼽혔다. 1906년 9월 페테르고프의 여름 궁전에서 찍은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왼쪽부터 황녀 올가, 타탸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다. 가족에 대한 니콜라이의 헌신은 포로로 사로잡은 로마노프 왕조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 볼셰비키를 빼고 많은 혁명가들의 찬양을 받았다. <북폴리오> 제공

중국과 영국에 이어 지난 20세기 러시아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한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 3-러시아의 세기>(지은이 브라이언 모이나한)를 연재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장무도회에서 1917년 혁명으로, 스탈린의 잔혹한 시대에서 냉전의 시대로, 글라스노스트에서 1993년의 제2차 혁명으로, 그리고 현대 러시아의 혼란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솔제니친,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등 그들의 놀랍고도 극적인 모습들이 실려있다. 여기 대부분의 사진은 공개된 적이 없는 것으로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있다. 이번에도 출판사 ‘북폴리오’의 도움을 받았다.

러시아의 세기는 모두 6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순서는 1. 로마노프 왕조의 나라 2. 붉은 혁명 3. 볼셰비키 4. 예술의 꽃 5. 노동자의 삶 6. 사회주의의 죽음 등이다.

» 황후 알렉산드라. <북폴리오> 제공
황후 알렉산드라 = 1910년 7월 황실 요트 스탄다르트호로 니콜라이와 함께 항해하는 동안 보기 힘든 미소를 짓고 있다. 혁명 지도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니콜라이가 “멋진 푸른 눈말고는 유쾌하고 조금은 어색한, 아주 평범한 근위대 대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자부심이 강하고 자신의 통치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굽힐 줄 모르는 타고난 황후”임을 발견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인 알렉산드라는 영어 억양이 섞인 러시아어로 말했으며, 일관된 목표는 ‘아이’, 즉 황태자를 위해 전제정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황제 부처는 매우 친밀했다. 강한 성적 관심이 알렉산드라의 종교적 열정과 결합했다. <북폴리오> 제공

» 특별 개조한 자전거 위에 올라탄 황태자 알렉세이. <북폴리오> 제공
황태자 알렉세이 = 특별 개조한 자전거 위에 올라탄 황태자 알렉세이. 이 자전거는 알렉세이가 쉬 피로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병 조수 데레벤코가 설계했다. 알렉세이는 혈우병을 앓았으며 체내 출혈은 그를 매우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었다. 충성을 바치기로 되어 있던 데레벤코는 혁명 이후 젊은 혈기에 넘쳐 알렉세이를 조롱하고 새로 획득한 자신의 존엄성을 해친다고 생각하는 어떤 임무도 수행하기를 거부했다. <북폴리오> 제공

» 1912년 황실 사냥터인 벨레베슈 푸샤의 니콜라이와 사촌 드미트리 대공. <북폴리오> 제공
니콜라이와 드미트리 대공 = 1912년 황실 사냥터인 벨레베슈 푸샤의 니콜라이와 사촌 드미트리 대공. 나중에 라스푸틴 살해에 참여하게 되는 드미트리는 차르가 좋아한 몇 안 되는 로마노프 왕가 인사 중 한 명이었다. 사슴, 순록, 곰, 여우 사냥은 부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오락이었다. 몰이꾼 수십 명이 포수들 쪽으로 사냥감을 몰아주었고, 하얀 옷을 입은 이들 포수는 겨울 눈 때문에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북폴리오> 제공

» 간호복을 입은 황후와 알렉세이. <북폴리오> 제공
간호복을 입은 황후 = 옆에는 알렉세이다. 알렉세이의 병에 기반을 둔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니콜라이가 총사령관이 되어 모길료프에 있는 군 본부로 떠나자 더욱 커졌다. ‘독일의 압제’가 러시아인의 영혼에 깃든 반유대주의를 대체하고 다름슈타트 태생의 황후에게 따라붙었다. 카페에서 떠돌아다니는 우스갯소리에 따르면, 어린 황태자가 궁전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궁정을 방문한 장군이 “무슨 일이세요, 알렉세이?” 하고 묻는다. 황태자가 말한다. “러시아군이 지면 아빠가 울고, 독일군이 지면 엄마가 울 거예요. 난 언제 울어야 되요?” <북폴리오> 제공

» 그레고리 라스푸틴. <북폴리오> 제공
그레고리 라스푸틴 = 1916년 가을 러시아 정부를 지배한 사람은 라스푸틴이었다. 머리는 장발에 윤기가 없었고, 턱수염은 기름이 번질번질한 냅킨 같았으며, 이는 돌보지 않아 검게 변색되었다. 발레리나 타마라 카르사비나는 거리에서 라스푸틴을 지나치다가 “농민의 얼굴에, 이상한 눈빛을 지닌, 이해할 수 없는 두 눈을 가진, 바로 광인의 눈을 한”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 불가사의한 치료사를 황실에 소개한 사람은 황후의 절친한 친구이자 “비스킷 반죽의 거품처럼 평범한” 여자 안나 비루보바였다. 라스푸틴은 음탕한 언행으로 예절 바른 숙녀들을 흥분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북폴리오> 제공

» 차르의 후계자, 혁명 러시아의 초대 수상 게오르기 리보프 공. 나이아가라 폭포만큼이나 혁명에 무감각했던 둔한 인물이었다. 그는 말했다. “강물은 흘러 떨어진다. 그것뿐이다.” <북폴리오> 제공
» 전직 차르 니콜라이가 유폐 중인 차르스코예 셀로에서 자녀들의 가정교사인 피에르 질리아르와 함께 나무에 톱질을 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전직 차르 니콜라이 = 유폐 중인 차르스코예 셀로에서 자녀들의 가정교사인 피에르 질리아르와 함께 나무에 톱질을 하고 있다. 니콜라이는 항상 육체노동을 즐겼다. 그와 가족은 유폐되어 있는 동안 자진해서 일했다. 그는 “2시에 우리 모두 정원으로 갔다.”고 일기에 적었다. “다들 아주 열심히, 심지어 즐거워하면서 땅을 파기 시작했고 너무 열심히 일하느라 시계가 5시를 가리키는 줄도 몰랐다.” <북폴리오> 제공

» 1917년 5월 차르스코예 셀로의 정원에서 일을 마친 올가, 타탸나, 아나스타시야, 마리야(왼쪽부터) <북폴리오> 제공
감금당한 공주들 = 1917년 5월 차르스코예 셀로의 정원에서 일을 마친 올가, 타탸나, 아나스타시야, 마리야(왼쪽부터). 2월 쿠데타 이후 그들은 차르스코예 셀로에 감금되었으며 여기서 집안일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10월 쿠데타 후 가택연급은 거의 투옥에 가까웠다. 1918년 4월 그들은 예카테린부르크로 이송되었고, 7월 16일 이곳으로 암호화한 ‘처형 명령서’가 전달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07. 0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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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5-03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되는 시리즈네요. 담아가요.

이름없는괴물 2007-05-03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마노프 황가에 대한 책은 없을까요? 마지막 황가에 대한 낭만 탓에 책을 찾아 보고 싶은데 잘 없더군요.

로쟈 2007-05-03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마노프 황가의 운명>(2003) 같은 책이 있는데(657쪽) 국내에도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올 전주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은 체코 영화의 거장 이리 멘젤이라고 한다. 이미 전주에 와 있다는 그의 대표작 세 편이 서울에서 곧 개봉할 예정이라고. 모처럼 흥미를 끄는 영화 기사이다. 체코 영화인이라면 밀란 쿤데라와 밀로스 포먼 정도만을 아는 처지인지라(그러니까 상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인지라) 그의 방한은 반갑고 그의 영화는 기대된다(시놉시스상으론 내 취향에 딱 맞는 영화들이다). 흠...

한국일보(07. 05. 02) 체코 거장 이리 멘젤감독 대표작 3편 잇따라 개봉

디지털문명의 즉물성에 길들여진 세대에게 ‘고전’ 영화를 소개하는 일은 고통에 가깝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페데리코 펠리니, 프랑수와 드뤼포 같은 클래식 아티스트의 작품에 관한 글을 쓸 때면, 그래서 손가락 끝에서 땀이 솟는다. 그러나 체코의 거장 이리 멘젤(69)의 작품은 좀 다르다. 이미 수 십년 전 영화학사전에 이름을 올린 감독이지만, 이 보헤미안의 능청스러운 영화는 오늘 봐도 유쾌하다. 그의 대표작 <가까이서 본 기차>(1966년) <줄위의 종달새>(1968년) <거지의 오페라>(1991년)가 각각 10일, 17일, 24일 서울에서 개봉한다. 그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을 맡아 지금 전주에 머무르고 있다.



가까이서 본 기차
그가 스물 여덟 살 되던 해에 만든 장편 데뷔작.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며 ‘멘젤’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2차세계대전 말기의 보헤미아의 어느 시골역,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밀로쉬’라는 망측한 이름의 어린 역무원은 여자친구와 ‘한번 하는’ 꿈만 꾸며 산다. 그에겐 엄혹한 세상사보다 자신이 조루라는 사실이 자살을 시도케 할 만큼 절망스럽다. 우여곡절 끝에 ‘남자’로 다시 태어나는데 성공하지만 밀로쉬를 기다리는 것은 뜻밖의 비극. 우쭐해진 마음에 어줍잖은 레지스탕스 흉내를 내다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다. 경쾌한 리듬을 타고 고조되던 행복감이 단번에 전쟁의 용광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서른 살도 안 돼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희극과 비극을 교차하는 멘젤의 농밀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줄 위의 종달새
배경이 된 시대만큼 개봉까지의 사연이 많은 영화다. 멘젤은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맞아 폭압적이었던 공산정권의 기억을 필름에 담았지만, 곧 이은 소련의 침공으로 이 영화는 20년 넘는 동면에 들어간다. 영화가 개봉된 것은 90년 베를린영화제 때. 국제평론가상을 수상하며 시대를 뛰어 넘는 영화의 생명력을 과시했다. 철학교수 예술가 정치범 등 ‘사회주의의 적’들이 노동을 통해 정신개조를 받는 50년대 초 체코의 고철 공장. 밥그릇과 십자가를 녹여 군수품을 만드는 이 금속성의 시공간 속에, 멘젤은 인간의 온도를 담아 낸다. “사라지고 있는 것은 ‘추상’이 아니라 진짜 사람”이라는 철학교수의 대사에 멘젤의 목소리가 포개진다.



거지의 오페라
비교적 최근작으로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이 쓴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벨벳 혁명을 경험한 뒤 만든 작품인 만큼, 정신적 가치보다 물질적 풍요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꼬는 풍자를 담았다.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상케 하는 리드미컬한 전개와 익살스러운 인물 설정이 사회의 부조리를 비트는 해학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이리 멘젤 감독
멘젤은 전주에서 가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코미디를 할 뿐”이라고 했지만, 그의 영화가 코미디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역설적이다. 나치 점령에서 2차 세계대전, 프라하의 봄, 소련 침공, 벨벳혁명까지. 그가 겪어 낸 조국의 현대사는 웃음과는 거리가 멀다. 권터 그라스 등 많은 예술가들이 체코를 떠날 때도 그는 사실상 예술적 ‘연금’ 상황을 감내하며 조국을 지켰다. “누군가는 있어야 하지 않냐”는, 누가 물으면 애써 시니컬하게 대답하는 단답형 이유와 함께.

결코 만만치 않은 세월의 굴곡을 멘젤은 오히려 웃음과 풍자로 보듬는 지혜를 가졌다. 그의 영화에는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해학이 번득이다가 이내 인간에 대한 유머러스한 따스함이 번진다. 아무리 아픈 기억이라도, 사랑스러운 추억과 함께 녹아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면 이질적인 아이템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거대한 콜라주 작품이 연상된다. 인간이란 원래 그렇게 희극과 비극이 뒤섞인 존재가 아닐까.(전주=유상호기자)

07. 05. 02.

P.S. 장편 데뷔작인 <가까이서 본 기차>의 원작은 체코의 국민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엄밀히 감시받는 열차>(버티고, 2006)이다. 작년 가을에 새롭게 나온 이 책에 대해선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소개한 바 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329086&paperId=955833). 그때 영화 스틸사진도 옮겨놓았었는데 감독이 '멘젤'이란 건 알지 못했다. 여건을 만들어서라도 이 달의 영화로 문득 빠져들고 싶은데, 세상 일이란 게 만만하지가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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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5-03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일부터 큐브에서 개봉한다는데 저도 그저 오래 상영하기만을 바랄뿐입니다.
말로만 듣던 '줄 위의 종달새' 네요..

심술 2007-05-03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귄터 그라스 등 많은 예술가들이 체코를 떠날 때도' 이거 밀란 쿤데라를 유상호 기자가 실수한 거죠?

로쟈 2007-05-0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유님/ 단관 개봉이니까 오히려 사정이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심술님/ 다시 보니 그런 거 같네요. 눈이 밝으십니다.^^
 

메이데이에 맞추어 노동자에 관한 칼럼을 하나 옮겨온다. 보다 구체적으론 '연구직 노동자'에 관한 것이다('고학력 전문직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마도 내가 들어갈 만한 분류항일 텐데, 이들에 대한 처우 문제를 다루고 있다(그러니 남의 얘기가 아니다!). 거기에 '학문의 미래'가 걸려 있어서 좀 거창하긴 한데, '학문의 미래'를 염려하게 된다는 것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교수신문의 관련기사는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3495).

한겨레(07. 05. 01) 연구직 노동자와 학문의 미래

지난 19일 비정규직 관련법 시행령에 있는 고학력의 전문직 노동자에 대한 예외조항, 즉 의사, 변호사, 변리사, 회계사 등과 함께 박사학위를 받고 해당 분야에서 일하는 자는 2년 이상 근무해도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는 조항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불안한 고용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연구직들에게는 정규직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한 문제이겠지만, 연구의 질을 생각할 때에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것이 부적절한 종류의 연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교적 표준화된 매뉴얼을 가지고 연구를 할 수 있는 종류는 정규직이거나 혹은 장기간 고용해도 되는 경우이다. 연구자 개개인의 창의성이 상대적으로 덜 요구되며 매일 같은 장소에 출근을 해야 할 정도로 집단적 작업이 필요한 일이다. 이런 일들을 주로 맡는 연구소들은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경험 있는 연구자들을 장기적으로 고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해마다 그런 비슷한 일들이 계속 주어질 것이며, 비슷한 일을 하는 인력은 계속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이 경우 임금을 아끼기 위해 하급직 연구원들은 비정규직으로 채운다.

그에 비해 표준화된 매뉴얼에 따라 수행하는 방식이 아닌, 개인의 창의력이 많이 요구되는 연구는 좀 다르다. 이 경우는 그 연구와 정확하게 짝이 맞는 능력 있는 연구자를 찾아 일을 맡겨야 한다. 이런 연구를 하는 연구소라면 연구자를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것은 전혀 효율적이지 못하다. 한 연구에 능한 연구자가 다른 연구에도 능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 직장에 고용되어 있다는 이유로 연구에 참여하는 경우 연구를 추동할 연구자의 자발성이 생기지 않고 연구의 질은 현격하게 떨어지게 되어 있다.

사실 자신의 영혼의 무게를 실어 머리를 짜내는 창의성 있는 연구에선 한 연구자가 일생 동안 그렇게 많이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영혼의 무게' 같은 표현은 과장이 아닐까? 연구는 '영혼'이 아니라 '정신' 가지고 하는 거 아닌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잘 안다고 다른 주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니, 한 연구자가 능력을 발휘하는 영역은 아주 협소하고 특수한 영역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영역, 그 주제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고, 이 작지만 중요한 성과를 위해 일생을 바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연구는 정규직화가 힘든 대신, 연구에 대한 값을 매우 높게 쳐주어야 한다. 일생의 성과를 파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어차피 정규직화가 힘드니 마음 편하게 사안별로 일을 맡기고, 정규 고용이 아니라는 이유로 매우 싼 가격으로 처리해 버린다. 우리 사회에서 전문적 지식에 대한 가격은 지나치게 싸다. 원고료는 25년 전에 비해 고작 20배 올랐고, 파트타임으로 일을 맡으면 일의 전문성과 무관하게 그저 일용잡급직으로 처리될 뿐이다.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여 알아낸 지식에 대해서도 공짜로 인터뷰하는 것이 상식이다.

돈과 일자리를 쥐고 있는 것은 연구자가 아닌 고용주와 관리자이니, 이를 개선하기란 매우 힘들다. 일의 속성상 개별화된 연구자들은 단결로 힘을 모으기도 힘들다. 가장 열악한 조건의 피고용자이며 도급제 노동자인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아무리 전문가라도 피고용자가 되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영악한 요즘 젊은이들은, 스스로 고용주가 될 수 있는 의사, 약사, 변호사만 되려고 한다. 똑같이 일하여 똑같이 소중한 전문적 지식을 얻고서도 여전히 불안한 피고용자나 도급제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공 분야나 인문사회 분야 연구자가 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말이다. 이래저래 대한민국의 학문의 미래는 암울하다.(이영미/대중예술 평론가)

07. 05. 01-02.

P.S. 암울한 '학문의 미래' 대신에 전도유망한 '의사, 약사, 변호사'들을 한국사회는 양성하게 될 것이니 딴은 그걸로 만족할 일이다. 어차피 주로 수입에 의존해온 학문이니 학문 바이어들이나 약간 명 키우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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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5-02 20:01   좋아요 0 | URL
이 글과는 전혀 관계없는 질문인데요 악셀이 어느 유명한 소설 주인공인가요? 제가 읽은 문장은 '사랑이 세상에 더럽혀지는 걸 보느니 죽음을 택한 악셀' 뭐 이랬거든요. 어느 소설이죠? 아, 그리고 늦었지만 안정효-복거일 기사에 나왔던 캐주얼한 관계에 대한 로쟈님 번역을 오늘 봤는데 로쟈님 번역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로쟈 2007-05-02 23:31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주인공은 아닌데요.^^;

심술 2007-05-03 19:39   좋아요 0 | URL
로쟈님도 모르신다니 안도가 됩니다.^^

로쟈 2007-05-05 20:26   좋아요 0 | URL
제가 모르는 게 한두 가지겠습니까? '안도'로는 부족하고 '안락사' 수준입니다...
 

지난달 1일은 만우절이어서 '사회적 독서'의 목록을 올리는 일이 멋쩍더니 이달은 또 메이데이(노동자의 날)인지라 이런 노동이 머쓱하다. 하지만 시간강사는 이런 휴무와 무관한 예외적 노동자인지라 5월의 리스트도 올려놓기로 한다(이 또한 예외적 노동인가?).

사실 리스트에는 스스로를 닦달하는 의미도 포함돼 있지만 3월에 학기가 시작된 이후에는 1,2월에 사회적 독서를 처음 구상할 당시에 예기치 않았던 '저항'에 직면하고 있어서 '닦달'의 의미가 무색해지고 있다. 지날달에도 기본 목록으로 내가 꼽은 책은 강경애의 <인간문제>,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그리고 헤겔의 <정신현상학>(서문) 등이었지만 이 책들에 대한 리뷰나 페이퍼를 쓰지 못했다(물론 대학 신입생들을 겨냥한 목록이었지만). 그건 3월의 목록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굳이 (스스로에게) 변명하자면 이 달 안으로 <인간문제>와 <어머니>에 대한 글을 포함해서 몇 가지 아이템에 대한 페이퍼를 쓸 계획이라는 것.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다 보니 아무래도 좀 만만한 책들을 리스트에 올려야겠다는 계산이 선다. 그래서 가정의 달에 꼽은 '사회적 독서'의 목록은 강준만의 <한국인 코드>(인물과사상사, 2006)로부터 시작된다. 사실 '가정의 달'이란 것 자체가 한국적 발상이자 '한국인 코드'에 부합하는 게 아닐까? 여하튼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도 있고, 또 지난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지식인으로 강준만을 빼놓을 수 없겠기에(나는 '강준만의 시대'란 표현에 동의한다) '우리시대의 볼테르'에 대한 예우도 갖출 필요가 있겠다. 내가 굳이 군소리를 붙이지 않아도 그의 책들은 많이 읽히고 있지만서도.

<한국인 코드>와 함께 내가 읽어보려는 책은, 며칠전 경향신문의 설문조사에서도 확인이 됐지만 지난 7-80년대 한국사회를 이끈 대표적인 지식인 리영희 선생을 다룬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개마고원, 2004)이다. 강준만의 편저로 돼 있는 책인데,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된 책이라 미처 눈길을 주지 못한 인연이 있다(눈길을 주지 못한 인연?). 이미 이 책들을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프리'다. 역시나 베스트셀러들인 진중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웅진지식하우스, 2007)나 스콧 버거슨의 <대한민국 사용후기>(갤리온, 2007) 등을 들춰봐도 좋겠다. 요는 이러한 '거울'들을 통해서 한국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좀 들여다보자는 것이니까.  

 

 

 

 

두번째 책은 경향신문의 설문 중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 국내저술 목록에서 단독 저작으로는 다섯번째로 꼽힌 임지현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소나무, 1999)이다. '미시적 파시즘'과 '대중독재'라는 화두를 통해서, 그리고 한동안 <당대비평> 지면을 통해서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에 준하는 활동을 펼친 바 있는 저자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백낙청-리영희-최장집-김우창 등의 뒤를 잇는 대표적 지식인의 자기반성적 성찰에 나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이념과 이데올로기의 '속살'을 만지는 게 그의 주특기이다). 개인적으론 그가 민족주의 운동의 전공자이면서 동유럽(특히 폴란드)과 러시아의 사정에 밝다는 점도 호감을 갖게 한다. 사회주의 인텔리겐챠들에 대해서 그보다 더 많이 공부한 사람은 많지 않다.  

 

 

 

 

세번째 책은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 해외저술 가운데 다섯번째를 차지한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나남출판, 2003)이다(강원대출판부본은 절판되었다). 그래도 푸코의 저작들 가운데서는 가장 많이 팔린, 가장 대중적인 책이기도 하다. '푸코'란 이름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먼저 떠올리는 독자라면 먼저 크리스 호록스의 만화책 <푸코>(김영사, 2003)로 몸을 푼 다음에 읽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감시와 처벌> 정도는 이미 독파한 분이라면 미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도서출판b, 2004)과 대결해보는 것도 좋겠고, 벤담-푸코의 판옵티콘의 응용이라고 할 홍성욱의 <파놉티콘 - 정보사회, 정보감옥>(책세상, 2002)을 디저트 삼아 읽어볼 수도 있겠다.

 

 

 

 

끝으로 네번째 책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엮어낸 <소설 이천년대>(생각의나무, 2007)이다. 영화 <박하사탕>에서처럼 '나 다시 돌아갈래!'를 속으로 외치면서 <소설 구십년대>, <소설 팔십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되겠다(80년대에서 끝난다면 지옥일 테지만). 가정의 달 '5월'이 갖는 또다른 의미를 되새기기에 적합한 여정이 아닐까 싶다.

<소설 이천년대>에 대응할 만한 시집으로는 '젊은 시인 49인 자선 대표작' 모음집인 <21세기 우리 시의 미래>(실천문학사, 2007)가 눈에 띈다. 아무리 문학판이 '일류(日流)' 일색이라고 하지만 아직까지의 시의 영토는 보전되고 있다. 그 영토에서 젊은 시인들이 각자 무슨 구멍들을 파고 있는지 잠시 엿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만한 계절이다. 5월은...

07. 05. 01.   

 

 

 

 

P.S. 이런저런 사정으로 5월의 사회적 독서를 6월까지 연장한다. 내가 따로 고려했던 몇 권의 책은 최상천의 개정판 <알몸 박정희>(인물과사상사, 2007), 그리고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창비, 2000)과 황광우의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창비, 2007)이다. 지난 년대에 대한 기억으로 며칠쯤은 채워져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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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theme 2007-05-01 16:31   좋아요 0 | URL
이중에서 한권정도는 꼭 읽어보고 싶네요.

로쟈 2007-05-01 16:40   좋아요 0 | URL
두어 권 읽으셔도 됩니다.^^

antitheme 2007-05-01 20:06   좋아요 0 | URL
제가 소화할 수 있는만큼만 읽어야죠..^^

기인 2007-05-01 21:57   좋아요 0 | URL
오오;; 아직 2007년인데 소설이천년대는 쫌 그렇네요 ^^;;
메이데이에 공익은 쉬지 않습니다 ㅜㅠ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5-01 23:13   좋아요 0 | URL
강준만의 두 권 다 작년에 읽었던 책이라 왠지 으쓱하군요. ㅎ
아, 사진을 보니 이창동 감독 신작 <밀양> 기대되는군요.

로쟈 2007-05-01 23:16   좋아요 0 | URL
antitheme님/ 물론이죠.^^
기인님/ 공익을 위해서라면!^^
연랑님/ 아, '프리'시네요.^^ <밀양>은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나비80 2007-05-02 02:21   좋아요 0 | URL
다행스럽게 몇 권은 가지고 있네요.^^
생각의 나무 판 소설 시리즈는 얼마 전에 구입해 봤습니다. 소장 비평가들의 안목이 얼마나 새로운지 검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괜찮은 것 같습니다. 널리 알려진 작가의 이름난 작품은 최대한 배제하고 작품을 선정했다는 점에서 일단 기존의 컴필레이션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네요.

로쟈 2007-05-02 22:2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는 얼마전 서점에 가서 들었다가 생각보다 비싼 책이어서 도로 놓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동대장 2007-05-03 15:38   좋아요 0 | URL
항상 좋은 리스트에 감사 드립니다. 이번달에도 한권 골라 봐야겠네요......

로쟈 2007-05-04 18:16   좋아요 0 | URL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경향신문의 기획기사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을 그만 옮겨올 생각이었지만 내일자 조간에 실리는 내용은 그런 생각을 접어두게 한다. 무엇보다도 설문조사에 근거한 데이터이기에 '한국을 바꾼 지식인'이란 타이틀만큼이나 흥미를 끌고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 저술들의 목록도 일별해 볼 만하다. 지난 2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군...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3. 한국을 바꾼 지식인

지식인들 사이에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 지식인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최장집 고려대 교수 세 사람이다.

경향신문이 최근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특집을 위해 각계 지식인 7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복수응답) 조사 결과, 24명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백교수를 뽑았다. 이어 21명이 리전교수, 17명이 최교수, 10명이 강준만 전북대 교수를 꼽았다. 여기에 ‘대중적 글쓰기’로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깨는 도전적 작업을 해온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90년대 이후 등장한 지식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77)는 지난해 9월 “지적 활동을 중단한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사상의 은사’로 기억되고 있음이 확인됐다. “시대의 흐름을 이끈 70~80년대 학번들의 이념적·사상적 출발점”(강맑실 사계절 출판사 대표)이나 “한국사회에 보기 드문 보편주의, 국제주의자로 ‘지적 거인과 같은 존재’”(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왜 아직도 리영희인가.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는 “87년 민주화의 분수령 이후 한국사회는 새 변화를 추동할 세력을 창출하지 못했다”며 “이것이 리영희 선생의 주 활동기가 87년 이전인데도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꼽게 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리영희는 1929년 평북 운산에서 지방 말단직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때 혼자 서울의 공업학교로 유학했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해방된 사회에서 동창생이 없다는 것은 나의 삶에 있어서 만사에 불편하였다”고 되뇌곤 했던 그는 평생 누구와 무리지어 세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 강준만(전북대 교수)은 리영희 서재에 걸려 있는 백범의 휘호로 리영희의 꼿꼿함을 설명한다.

“踏雪夜中去 / 不須胡亂行 / 今日我行跡 / 遂作後人程 (눈길을 걸을 때 / 흐트러지게 걷지 말라 / 내가 걷는 발자국이 /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

중국전문가로서의 리영희는 외신부 기자생활을 하며 단련됐다. 합동통신·조선일보에서 해·복직을 거듭하면서도 굵직한 특종들을 남겼다. 특히 그는 베트남전쟁으로 상징되는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함과 중국 사회주의의 인본주의적 모습을 서구 지식인들의 입을 빌려 소개하는 방식으로 반공주의에 맞섰다. 리영희는 기자직과 교수직에 있는 동안 다섯 차례 구속되고 모두 1012일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자신의 몫을 주장하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독재의 시대에 그의 글들은 “아무리 작게 잡아도 몽롱한 의식에 끼얹는 찬물 한 바가지”(강준만)였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그가 갖는 힘은 사회적 발언의 중단을 선언할 만큼 스스로 자신의 육체적, 지적 한계를 인정할 때까지 그가 의미있는 비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이 “비체계적인 인본적 사회주의가 한국사회를 ‘시장맹(盲)’ ‘북한맹(盲)’으로 만들었다”고 리영희를 본격 비판한 것은 불과 4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계간 ‘비평’을 통해서 였다. 그러나 윤평중은 이번 경향신문 설문에서 영향을 미친 지식인으로 리영희를 꼽았다. 그는 말했다.

“리영희 선생은 민주화운동 시기의 젊은 세대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시대적 패러다임을 형성했고 그 여파는 87년 체제 이후에도 지속됨으로써 현대사의 한 축을 형성했다. 보수진영이나 우파에서는 그 특유의 이론적 빈곤이나 도덕적 결함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응할 만한 인물이 전혀 부재하다.”

리영희는 민주화 이후 자신의 책들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계속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왜일까. 그 대답은 백낙청, 최장집 등 후배지식인들의 왕성한 지적, 실천적 활동이 요구되는 현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말해준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69)이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지식인 1위로 꼽힌 것은 40년 창비 역사와 함께 해온 그의 실천적 글쓰기 덕분이다. 차병직(법무법인 한결 변호사)은 “한반도 특유의 정치 상황에 대해 민족 문제를 고려하면서 지속적으로 분석해 왔으며 현재와 미래의 대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모색한 지식인”이라고 했고, 박명림(연세대 교수)은 “언제나 시대정신에 맞는 화두를 잘 던지며, 그것을 대중들에게 맛깔나는 문체로 풀어내는 데 탁월하다”고 말했다.



백낙청은 55년 경기고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인제대 백병원을 세운 백인제·백붕제가 각각 그의 백부·친부이고, 현 인제대 이사장인 백낙환이 형이다. 스스로 ‘변칙적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말한 바 있는 백낙청은 28세 때인 66년 계간 ‘창작과 비평’을 창간하며 한국 사회의 분단현실을 실천적으로 극복하는 데 투신했다. 창비는 정간, 폐간, 판금 처분을 반복하면서도 “지난 40년간 비판적 연구자-문인-저술가 그룹을 한데 묶은 ‘비판지성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유지해오며”(조효제) 백낙청의 실천적 지성 활동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백낙청의 담론 주도력 뒤에는 “유일하게 시장에서 성공한 비판적 지식인 미디어인 창비”(류준필 성균관대 연구교수)가 있었던 것이다.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에 문학이 기여해야 한다는 ‘민족문학론’을 펴온 백낙청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최근 그 이름에서 ‘민족’을 떼느냐 마느냐 문제로 논란을 벌일 때 민족의 삭제에 찬성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뿌리는 여전히 민족과 통일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최근 이명원(문학평론가)과의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2825).


“상당수의 진보적 학자들이 어떤 면에서는 보수 논객이나 학자보다 분단문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당수 학자들은 마치 이 사회가 분단과는 기본적으로 특별한 관계가 없고, 분단이라는 것이 하나의 부수적인 사실로 있는 것처럼 전제를 깔고, 분단 안된 사회의 척도로 진보 보수를 따지는 경향이 많아요. 최장집 교수도 그런 예의 하나이고, 손호철 교수도 그런 경향이 강하고, 그런 분들이 많아요.”



일관되게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학문적, 실천적 역량을 쏟았다는 점에서 최장집(고려대 교수·63)은 백낙청에 비견된다. 최장집은 강릉의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고려대 재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주도한 4·19 세대다. 그는 고려대 정외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후 박정희 대통령의 공보비서실 행정관으로 1년여 일하기도 했으며 잡지 ‘세대’에서 기자생활을 거친 뒤 미국 유학을 떠났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만개했던 각종 변혁이론들이 91년 소련 붕괴로 몇 년 못가 시들해졌을 때 최장집은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1983년 40세 늦깎이 박사를 받고 돌아온 최장집은 한국산업사회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80년대 초 대학을 다녔던 이른바 ‘제3세대 학자군’을 이끌며 그람시류의 네오마르크시즘을 비롯한 비판이론을 소개했다. 김호기(연세대 교수)는 “서구의 눈을 빌려오되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왔던 흐름을 꿰뚫어보고 현실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최교수 정치학의 근간”이라고 말했다.

최장집은 외형적 자유화가 아닌 실질적 민주화를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국 민주주의 이론’(1993) 때부터 피력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으로 일하다 조선일보의 사상검증에 휘말려 1년 만에 학교로 돌아온 뒤로 그의 공부는 더욱 깊어졌다.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이 책 제목이 하나의 관용어로 정착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학문적 천착보다는 사회적 활동으로 유명해진 학자도 아니고, 순수한 학문의 세계에 갇혀 있는 교수도 아닌, 이 둘을 아우르는 이론적 실천가라는 점에서 독특한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 리영희

1929년 12월 평북 운산 출신. ‘삭주 대관국민학교 개교 이래 몇 천재 중 하나’였다. 42년 경성공립공업학교에 진학하며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학비면제, 숙식·제복 국가부담’에 이끌려 한국해양대를 다녔다. 외신부 기자생활을 거쳐 72년부터 한양대 신방과 교수를 지냈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최근 저작 활동을 접었다.

◇ 백낙청
1938년 1월 대구 출신. 남들보다 2년 일찍 학교에 다녔다. 경기고 졸업 후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에서 영문학 학사,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고 귀국했다. 66년 ‘창작과비평’을 창간한 뒤 72년 미국작가 DH 로렌스 연구로 뒤늦게 박사학위를 받았다.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 최장집

1943년 5월 강릉에서 태어나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같은 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한 후 청와대 공보비서실과 잡지사 ‘세대’에 잠시 몸 담았으며 이후 미국 시카고대에 유학했다. DJ 시절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았다가 조선일보의 사상검증 때문에 물러났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90년대 강준만 등장

전통적 지식인이랄 수 있는 세 지식인의 틈새에서 90년대에 등장한 전북대 교수 강준만(51)의 약진은 변화된 지식인 지형의 일면을 보여준다. 10명의 응답자가 그를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꼽았으며 그가 글을 쓰는 잡지 ‘인물과 사상’은 6명이 영향력 있는 저술로 꼽았다.



강준만은 ‘지역주의 비판’ ‘서울대 망국론’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등의 민감 이슈를 도발적인 문체로 제기한 ‘게릴라 지식인’이었다. 모든 ‘금기와 성역에 도전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인물과 사상’은 강준만 1인이 글을 쓰고 출판하는 독특한 체제도 관심을 끌었지만, 거침없이 실명을 거론하는 전방위적 비판으로 이른바 ‘강준만식 글쓰기’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박상훈(후마니타스 주간)은 “다작의 교양도서 작가로서의 현재 모습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차치하고라도 민주화 이후 기성체제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날카로운 시각과 직설적 논쟁화법으로 비판해 ‘강준만식 글쓰기’ 양식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강교수가 남긴 사회문화적 영향은 매우 컸다”고 강조했다.

강준만은 “진의가 왜곡되기 쉽다”며 기자들의 전화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팩스 또는 e메일로만 외부와 소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회적 개입은 책 쓰고 신문에 기고하는 것으로만 한정된다. 강준만은 언젠가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하는 등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만큼 스스로의 행동에 조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강준만의 칼날 화법은 어느 순간 많이 순화된 것이 사실이다. 1인 출판으로서의 인물과 사상은 지난 2005년 막을 내리고 지금은 다수 필자가 참여하는 잡지로 성격이 바뀌었다. 전상인(서울대 교수)은 “강준만으로 대표되는 게릴라 지식인들은 몇 년 못가서 초기의 기개와 전의를 크게 상실했는데 이는 기존 제도권 지식인 사회의 무응답과 외면에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보수 지식인으로는 송복(연세대 명예교수) 안병직(서울대 명예교수) 박세일(서울대 교수) 김대중(조선일보 고문) 복거일(소설가) 이문열(소설가) 등이 이름을 올렸다. 자연과학자로는 임지순(서울대 교수)과 황우석(전 서울대 교수)이 거명됐으며 김대중(전 대통령), 기업인 황창규(삼성전자 사장)를 선택한 이도 있었다. 영향을 준 지식인을 국내·외 구분 없이 물었기 때문에 해외 지식인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카를 마르크스,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새뮤얼 헌팅턴, 에드워드 사이드 등이 꼽혔다.(손제민기자)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한국의 지성 ‘금서’가 키웠다

◇ 국내서적

지식인들이 뽑은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외 저술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이른바 ‘금서목록’에 올랐던 책들이 주류였다. ‘해방전후사의 인식’(23명)과 ‘자본론’(18명), ‘전환시대의 논리’(15명)는 대표적인 금서였으며 ‘태백산맥’(10명)은 불과 2년 전까지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계류돼 있었다. 79년 10·26 사태를 열흘 앞두고 한길사에서 출간됐던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은 70~80년대 대학생들에게 한국현대사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선물해준 교과서였다.

송건호·오익환·백기완·진덕규 등이 참여해 ▲해방의 민족사적 의미 ▲분단의 배경과 과정 ▲친일파 문제를 다뤘다. 대다수 응답자들이 “대학시절 지하 이념서클의 의식화 교재로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현 시점에서 보면 이 책 내용은 상식적이다. 그러나 발간 당시는 상식이 불온하던 시절이었다.

김언호(한길사 사장)는 “애초 송건호 선생과 책을 기획할 때는 ‘한 5000권 나가려나’ 예상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40여만권이 나간 초특급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책에 실린 생각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였어요. 진덕규, 임종국 같은 필자들도 대부분 이데올로기와 관계 없는 분들이었죠. 그런 책인데도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1차적으로 독자들이, 즉 시대가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땐 정말 대단했어요. 10·26이 터져 책이 판금될 때까지 열흘 만에 4000권이 나갔으니…. 판금됐다고 그 책을 안 읽었겠어요. 판금시키면 오히려 복사본이 더 많이 나돌던 때였죠.”



해전사가 한국현대사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 줬다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1974)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깨우쳐 준 책이다. 이 책은 베트남 전쟁으로 드러난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한 본질을 폭로하고, 중국사회주의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렸다. 냉전 이데올로기 교육을 받았던 대학생 김동춘(성공회대 교수)으로 하여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줬으며 김세균(서울대 교수)이 “밤 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던” 그 책이다.

이 책은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의 ‘우상과 이성’(2명)과 함께 “사회과학도로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 준 고마운 책”(신광영 중앙대 교수)으로 기억되고 있다. 신광영은 “이 저술로 인해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이 가능함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조정래(소설가)의 ‘태백산맥’에 대해 이광일(성공회대 교수)은 “지식인 사회를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준 책은 태백산맥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1950년대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던 냉전의 족쇄를 깨는 데 일조했다”고 평했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소련에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항한 우파-전통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 보편성을 획득한 솔제니친이 있다면, 한국에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한 좌파-민족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한 조정래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복거일(소설가·미래문화포럼 대표)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태백산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2000년대에 나온 책으로는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임지현(한양대 교수)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3명), 임지현·권혁범·박노자·임은실 등이 함께 쓴 ‘우리 안의 파시즘’(2명)은 민족주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문제 제기였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 해외서적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해외 저술로 가장 많은 지식인들이 꼽은 ‘자본론’(18명)은 1980년대 후반 과학적인 변혁이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 첫 한글 번역본이 나온 87~89년 이전에도 일본어 번역본 등의 형태로 은밀하게 유통됐지만 본격적으로 학생들 손에 쥐어진 것은 87년과 89년 강신준(동아대 교수)과 김수행(서울대 교수)이 잇달아 번역본을 내면서부터이다. 고병권(수유+너머 대표)은 “87년 이후 첫 10년간이 지식사회가 마르크스주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그 후 10년간은 마르크스주의에 회의하거나 그것을 전환시키려 시도했던 과정이 아니었나 한다”고 말했다.

87년 민주화 직후 서울대 교수 김수행을 통해 자본론 1~3권을 번역해낸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자본론은 지금도 해마다 1000여권씩 나가는 스테디셀러”라며 “다만 책의 결론에만 줄 치는 운동권식 독법보다는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논리를 따라가는 자본론 읽기가 더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81년 미국에서 출간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6명)은 번역도 되기 전에 널리 읽히며 냉전체제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다. 현대사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 중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하종문(한신대 교수)은 “우리를 옥죄어 온 냉전체제를 뒤집어보게 해 준 의미를 높이 살만하다”고 했다. 김원(서강대 연구교수)은 “냉전적 시각, 빈약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한국현대사 해석을 하던 한국학계에 ‘지적인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8명)은 98년 서울대 교수인 한상진·박찬욱에 의해 번역돼 한국 사회에 ‘실용주의’와 ‘중도론’뿐만 아니라 ‘사회적 민주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됐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얘기되며 대안적 진보이념을 갈구하던 시점에 소개돼 큰 영향을 미쳤다. 진보진영은 공개적으로는 기든스를 비판하면서, 자기 방에서는 몰래 정독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책이 소개된 90년대 후반을 거쳐 최근 와서 대안적 진보이념으로 사회국가, 사회투자 국가, 사회서비스 국가, 사회연대 국가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거의 모두 기든스식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일종의 ‘거명되지 않는 영향력, ‘스텔스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조효제는 “푸코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저술은 권력과 담론에 관한 인식 전환의 계기를 줬다”면서 “한국에 소개된 시점이 한국적 문제의식의 지형에 맞지 않았음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설적”이라고 지적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로마인 이야기’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등 대중 서적들이다. 김만흠(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대중사회 수준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소설, 성공학 번역서들이 미치는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전영평(대구대 교수)은 “지식인 집단보다는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측면으로 파악한다면 해리포터가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일 것”이라고 말했다.(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07. 0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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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30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30 00:35   좋아요 0 | URL
바람구두님/ 이런 건 먼저 날라주셔도 됩니다!..
**님/ '오랜만에'는 저도 '?'입니다...

마늘빵 2007-04-30 00:47   좋아요 0 | URL
저도 가져갑니다. :)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7-04-30 01:06   좋아요 0 | URL
저두요!(오랜만에 인사드려요.^^;;)

드팀전 2007-04-30 07:50   좋아요 0 | URL

 예전에 봤던 이 책이 생각납니다.^^...

생활하는 지식인이 많아지면 좋을텐데,,,


향기로운 2007-04-30 12:14   좋아요 0 | URL
저도 갖고 갈게요^^

yoonta 2007-04-30 15:59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는 강준만씨나 진중권씨같은 도발적인 "게릴라 지식인"이 좀더 많이 나와주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서로 치고 받고 해야 좀더 생산적인 논의도 활발해지고 지식인 사회의 담론들도 대중화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