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이라지만 '생계'에 매달려 있는지라 가족들은 놀러 내보내고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커피나 마실 시간에(잘못 따라놓은 쥬스를 마시면서) 엊저녁에 읽은 리뷰 기사나 옮겨놓는다. 며칠 뒤 어버이날에 더 걸맞는 기사이지만 사정상 어버이날 행사도 다음 주말쯤으로 미뤄놓은지라 이래저래 反가족적적인 아빠와 남편과 아들 노릇을 하는 한 주가 될 듯하다(새삼스러운 건 아니지만!). 칠순의 아들이 아흔의 노모를 모시고 중국 전역을 여행하는 '해외토픽'감의 사연을 담은 첵이 최근에 출간됐고 기사는 그 리뷰이다.

문화일보(07. 05. 04) 中 대륙 울린 ‘칠순 효자’의 사모곡

책을 읽다 몇 번이나 책장을 덮었습니다.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가슴이 먹먹해져 더 이상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었습니다. 하릴없이 서성거리며 한 숨을 돌리고 나서야 다시 책을 집어들 수 있었습니다. 책은, 일흔네살의 아들이 아흔아홉의 노모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중국 전역을 여행하는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부인과 사별하고 자식들까지 분가시킨 왕일민(王一民)씨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홀어머니가 살고 계신 흑룡강(黑龍江)성 탑하(塔河)로 갑니다. 이곳은 중국의 동북에서도 북쪽 끝이지요.



탑하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몇 년을 살던 왕씨는 어느날 어머니에게 여행을 떠나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어머니가 자신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삶의 생채기를 끌어안고 사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어머니, 세상구경 가실래요?” “세상구경? 어떻게?” “제가 어머니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떠나는 거예요.”

이렇게 시작된 여행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최종 목적지인 서장(西藏)을 향합니다. 티베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노모가 무슨 이유에선지 그곳까지 가자고 나선 까닭이지요. 물론 그 거리가 얼마나 먼지 노모는 짐작도 못 합니다. 단지 지도를 보고 “이렇게 쭉 가면 되겠네”하며 마치 이웃집 나들이 가는 마냥 쉽게 여깁니다.



일흔네살 아들은 노모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길가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과 풀잎에도 노모는 즐거워합니다. 갑작스런 소나기를 만나고서야 우비를 준비하고, 가파른 산을 넘어가며 수레를 끌기 위해 밧줄을 마련하는 등 도중에 필요한 것들을 갖춰가면서 이들은 조금씩 여행에 익숙해져 갑니다.

노모는 수레에서 밤을 새우고, 아들은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구들 삼아 이슬을 맞으며 잠을 청합니다. 하루 종일 페달을 밟고, 고갯길에선 밧줄을 어깨에 걸쳐 수레를 끌면서 아들은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어머니를 모십니다. 어머니가 칼국수를 먹고 싶다고 하자 아들은 길가에 수레를 세우고 부랴부랴 준비합니다. 밀가루 반죽을 밀기 위해 땅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조심조심 밀가루를 폅니다. 신문지가 찢어지고 반죽에 흙이 묻지만, 아들은 묻은 흙을 털어내고 정성껏 칼국수를 만듭니다. 그저 소금물에 면만 넣고 끓인 칼국수지만 노모는 맛있다며 더 달라고 합니다.

이들의 사연은 중국 중앙방송, 흑룡강TV 등 30여개 방송사에서 앞다퉈 다뤄 중국 전역에 알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여행길 곳곳에서 모자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이 시대 마지막 효자’라며 아들을 치켜세웁니다. 하지만 아들은 이 같은 세상의 환대를 탐탁지 않아 합니다. 자신은 단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여행길에 나섰을 뿐 세상이 알아주기를 바란 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자신을 높이 치켜세움으로써 효도를 보통사람들이 행할 수 없는 지고지순한 행위인 양 만들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아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아들은 ‘금세기 마지막 효자라는 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당연한 일을 하고 있으면서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평가받는다는 것은 여러 모로 부담되는 일입니다. 무얼 어떻게 하는 것이 불효인지는 잘 압니다. 그저 불효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어머니를 대하고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절강(浙江)성 지나 복건(福建)성 깊숙이 들어선 산골에서 모자는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노모의 끼니는 챙기면서도 비상식량이 모자란다고 생각한 아들은 두 끼를 굶습니다. 꼬박 사흘이 걸려 산에서 빠져나온 모자를 보고, 인근 마을 사람들은 기적이라며 닭과 돼지를 잡아 대접합니다. 이처럼 사연 하나마다 더할 나위 없는 효심이 드러나, 읽는 이를 웃기기도 울리기도 합니다. 노모의 기색을 항상 살피며, 말 한마디 표정 하나라도 거스르지 않으려는 아들의 효심은 새삼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2년여에 걸쳐 3만㎞를 돌아본 이들의 여행길은 서장의 라싸까지 이르지 못하고 중국 최남단 해남(海南)섬에서 꺾입니다. 이미 100세를 넘긴 노모가 점점 기력이 쇠잔해지는 것을 보다 못한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이지요. 하지만 서장까지 가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은 책 2부에서 결국 이뤄집니다. 더욱 감동적인 사연이 펼쳐지지요.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유현민씨는 한국작가입니다. 지난 2002년 중국에서 유적을 답사하고 있던 유씨는 이들 모자의 사연을 듣고 아들을 만나기 위해 2년여에 걸쳐 왕씨를 수소문했습니다. 친구의 집에 머물고 있는 왕씨를 겨우 만난 유씨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왕씨는 “그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을 뿐이지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려 한 일이 아니다”면서 단호히 거절합니다. 이미 숱한 중국 작가들의 똑같은 청도 뿌리쳐 왔던 왕씨였습니다.

밤새 술잔을 나눈 두 사람은 그저 이야기만 주고 받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펑펑 쏟아진 함박눈은 떠나려던 한국작가의 발길을 잡고 맙니다. 순간, ‘어머니가 생전에 가보고 싶어하시던 한국에서 책이 나오면 어머니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왕씨는 결국 유씨에게 사연을 털어놓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이후 일주일에 걸쳐 두 사람은 동고동락하며 같이 지냈습니다. 이 책은 그렇게 해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선을 보이게 됐습니다.

사족을 달자면, 책에서 인명과 지명은 모두 한국식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왕씨가 이를 원했다는군요. 굳이 중국식 발음을 피한 것은 그만큼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신문표기법에도 어긋나지만 왕씨의 뜻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기사에서도 이를 따랐습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바랍니다.(김영번 기자)

07. 05. 05.

P.S. 늙은 모자는 처음에 목표했던 티베트의 '서장'에는 가지 못했다. 가도 가도 끝없는 길이' 서장 가는 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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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서 연재되고 있는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의 두번째 편이다. '붉은 혁명'은 물론 1917년의 10월 혁명을 가리킬 텐데, 사진은 1945년 2차 대전의 종전 무렵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러고 보니 다음주면 종전(러시아로서는 승전) 62주년이 되는군...

 

중국과 영국에 이어 지난 20세기 러시아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한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 3-러시아의 세기>(지은이 브라이언 모이나한)를 연재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장무도회에서 1917년 혁명으로, 스탈린의 잔혹한 시대에서 냉전의 시대로, 글라스노스트에서 1993년의 제2차 혁명으로, 그리고 현대 러시아의 혼란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솔제니친,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등 그들의 놀랍고도 극적인 모습들이 실려있다. 여기 대부분의 사진은 공개된 적이 없는 것으로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있다. 이번에도 출판사 ‘북폴리오’의 도움을 받았다. 러시아의 세기는 모두 6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순서는 1. 로마노프 왕조의 나라 2. 붉은 혁명 3. 볼셰비키 4. 예술의 꽃 5. 노동자의 삶 6. 사회주의의 죽음 등이다.

한겨레(07. 05. 04)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② 붉은 혁명

» 정치범들. <북폴리오> 제공
정치범들 = 2월 쿠데타가 시작되고 처음 며칠 동안 페트로그라드의 슐루셀베르크 요새에서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볼셰비키는 유능하지 못한 음모가들이어서 차르의 비밀경찰이 쉽게 침투했다. 혁명 36시간 전에 레닌의 여동생을 포함한 수도의 마지막 대규모 그룹이 체포되었다. 따라서 볼셰비키는 거의 어떠한 역할도 못 했고, 레닌과 트로츠키는 모든 사태가 종결된 뒤 망명지에서 돌아왔을 뿐이었다. 깃발에 적힌 문구는 이렇다. “감옥 문을 연 인민 만세”, “모두 다 인민을 위해 : 공장, 토지, 자유.”

» 제국을 끝장낸 사람들. <북폴리오> 제공
제국을 끝장낸 사람들 =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병사 분과가 국가두마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모든 색깔의 좌파 대표들을 포함한 소비에트는 사진의 플래카드에서 보듯이 아직 볼셰비키의 도구가 아니었다. 제일 위 왼쪽에 있는 플래카드에는 “레닌 타도”라고 쓰여 있다. 또 다른 플래카드에는 “민족의 자유를 위한 전쟁…… 독일 군국주의를 완전히 파괴할 때까지”라고 적혀 있다.

» 내전의 결정적인 해. <북폴리오> 제공
내전의 결정적인 해 = 1919년 서부 러시아에서 부상당한 적군들. 몇몇 전선에서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한 백군은 근거지를 벗어나면서 약해진 반면, 적군은 전선이 압축되어 전선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더욱 강해졌다.

» 내전의 붉은 영웅. <북폴리오> 제공
내전의 붉은 영웅 = 1918년 기관총 사수 안톤 블리즈냐크. 소매의 줄무늬가 보여주듯이 블리즈냐크는 13번 부상당하고 한쪽 눈을 잃었다. 손에 든 시가는 보상이다. 트로츠키의 장갑열차는 내전 기간에 구하기 어려웠던, 특별히 마련한 담배와 시가들을 싣고 다녔고 트로츠키는 이것들을 우수한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 당 활동가. <북폴리오> 제공
당 활동가 = 검은 셔츠를 입은 당 활동가가 추바쉬 공화국에서 농촌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활동가들은 쿨라크, 즉 부농에 대해 일종의 히스테리 상태를 조성한다. “그들은 마술에라도 걸린 양 꼬마들을 ‘쿨라크 짐승들’이라 부르고 ‘흡혈귀’라고 소리치면서 총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곤 했다.”라고 한 목격자는 썼다. “그들은 이른바 쿨라크를 혐오스럽고 역겨운 소, 돼지로 간주했다. 쿨라크는 영혼이 없었다. 쿨라크는 악취가 났다. 쿨라크는 모두 성병에 걸렸다. 쿨라크는 인민의 적이었다.”

» 코러스 라인. <북폴리오> 제공
코러스 라인 = 1936년 선전팀이 투르크메니스탄의 마을들에 당 노선을 보여주고 있다. 당은 끊임없이 선전을 해댔다. 그것은 피할 수 없고 계속 되풀이되었으며 바다 위에 있는 배의 엔진 소리처럼 끊임없이 지속되는, 모든 당 활동의 배경이었다. 깃발과 슬로건 없이는 어떤 추수도 어떤 파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 베를린 상공의 붉은 깃발. 사진/Y. 할데이. <북폴리오> 제공
베를린 상공의 붉은 깃발 = 제국의회 의사당 꼭대기를 오르는 러시아 병사. 1945년 4월 30일 이른 오후 베를린 상공에 붉은 깃발을 내걸기 위해 러시아 병사가 제국의회 의사당 꼭대기에 오르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은 파괴된 도시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살했다. 주검은 러시아군 카츄샤 로켓의 일제 포격으로 쓰레기장에서 불탔다. 이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독일군은 제국 의사당 지하에서 전투를 계속했다. 그들은 5월 2일 새벽까지 버텼다. 러시아군의 총성은 그날 오후 3시에 멈췄다.

07.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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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비평에서 흥미로운 리뷰 기사 하나를 옮겨놓는다. 이광수와 베르그송의 관계를 다룬 논문에 대한 소개인데, 이광수를 낭만주의자로 이해하는 논문의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이광수에게서 '감상적 계몽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지울 수 있는가?) '이광수와 베르그송'이라는 아이템 자체는 신선해 보인다. 지난 3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으로 <무정>을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그 참고자료로 분류해둔다.  

담비(07. 05. 03) 이광수가 과연 계몽주의자인가

이광수를 계몽주의자가 아닌 낭만주의자로 해석하는 문제적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철호 동국대 강사(국문학)는 최근 ‘비교문학’ 제41집에 발표한 ‘생명으로서의 문학-‘무정’의 생명론과 낭만적 자아의 문제’에서 1920년대에 이루어진 이광수의 베르그송 독서를 통해 이같은 논리를 개진하고 있다.

1920년을 전후해서 이광수는 새로운 문학세대를 준엄하게 설교하는 자로 군림했다. 그는 ‘창조’, ‘폐허’, ‘백조’, ‘영대’ 동인들을 도덕이라는 심판대 위에 불러 퇴폐한 것들이라고 규정해버렸다. 고민, 허무, 죽음, 눈물 등의 문학적 수사에 대해서 이광수는 민족 혹은 민족문학의 발전을 훼손시키는 데카당스의 망국정조일 뿐이라며 일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광수가 이들 동인지세대와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기성의 권위나 억압에서 자아의 해방을 역설하는 데 가장 나섰던 인물은 바로 이광수였다. ‘무정’은 정의 만족이 곧 문학이라는 이광수식 믿음의 산물이다. 이광수는 이형식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것을 실현했으며 복잡한 내적 과정과 자아와 타자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영적 체험을 전경화시키는 등 많은 고민을 보여주고 있다.

이광수가 다이쇼의 생명주의 사상에 기대 자신의 지적 갱생을 도모했다는 것은 그의 자전적 소설들에 암시돼 있다. 교사생활을 청산한 후 쓴 ‘金鏡’의 경우, 일본유학때 까지의 이광수의 내밀한 심경이 토로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난 수년간의 교사생활을 덧없이 반추한다. 이 단편의 중심내용은, 화자가 자기희생으로 일관했던 교사시대와결별하고 새로운 지적 포부를 토로하는 데에 있다. 톨스토이와 바이런을 난생 처음 접한 후 ‘번민’, ‘고통’, ‘죽음’에 시달리던, 그래서 그의 “靈에 폭풍광란에 雷雨까지 더하여 거의 狂할 뻔하였”던 유학시절은 현재의 교사생활에 견주면 오히려 삶의 활력으로 충만했던 시절이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자신의 학식이 턱없이 부족함으로 토로하며 베르그송을 거론하는 부분이다. “벨그손의 철학을 외우다가 이해하지 못할 학리와 술어가 많음을 보고, 비로소 규범과학을 연구함이 연학의 초보임을 깨달아”하는 부분이다.

그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 그러나 도쿄 유학의 실행을 심리적으로 가능케 한 책이란 다이쇼 시기 전반에 걸쳐 널리 애독된 필독서 중 하나였던, 니시기다 요시토미의 ‘베르그송의 철학’(1913)이었다. 이 시기에 일본지식인 사회에 널리 회자한 베르그송의 ‘생의 철학’은 니시다 기타로에게 고스란히 전수되면서 다이쇼기 ‘생명주의’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하지만, 1910년대 후반부터 동인지 세대의 문학 청년들 역시 니시다 기타로가 일본적 맥락에서 번안하고 집성한 베르그송의 생철학 사상에 적잖이 침윤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베르그송 철학을 원전이 아닌 다른 매개, 이를테면 이쿠다 쵸코, 쿠리야가와 하쿠손 등을 통해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에게 직접 영향을 받은 작가들로는 김동인이나 염상섭이 대표적이지만, 그 당시 일본에 유학중이었던 김여제, 주요한, 최승구 등도 시라카바의 이상주의적인 경향을 충분히 의식하면서 창작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광수를 계몽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문학사의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그의 주된 관심이 불합리한 관습과 윤리도덕의 혁신에 있었던 만큼, 이광수의 사회적 위상을 계몽주의의 차원에서 해석할 여지가 없지 않지만, 그는 ‘무정’을 연재했을 때나 데카당스의 미학을 비난하며 민족윤리에 봉사하는 문학의 소임을 강조했을 때나 낭만주의자로서 군림했다(*나로선 지나친 단순화이며 논리적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1920년대 이후의 이광수는 초기의 진보적 성격을 상실해버렸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 시기의 이광수는 비판적 활력을 상실한, 화석화된 낭만주의자의 잔영을 보여줄 따름이라고 이철호 씨는 결론짓는다.(리뷰팀)

07. 05. 03.

P.S. 이광수의 계몽적 기획와 <무정>에 관한 이해에 유익한 자료는 김현주의 <이광수와 문화의 기획>(태학사, 2005)이다. 저자의 학위논문을 보완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무정>에서 '정'이 갖는 의미에 관하여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시각에 더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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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5-04 01:32   좋아요 0 | URL
이쪽 분야로는 김현주의 논문도 좋지만 손유경의「한국 근대소설에 나타난 ‘동정’의 윤리와 미학에 관한 연구」(2006), 도 꽤나 자세히 이광수가 보여준 동정의 미학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동정 담론의 기저에 망탈리테가 깔려있다고 보는게 손유경 논문의 핵심인 것 같더군요. 이광수의 계몽은 동정의 공적 발휘이며 상호부조론에 의해 타인의 고통을 개인이 구체적 감각으로 인지하면서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 지위와 계급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동정이 존재할 수 없다며 막연한 연민으로써의 인도주의를 비판하고 동정의 사상, 이념적 연동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광수에 대한 여러 연구자의 새로운 접근은 근대문학의 이분법적 구도를 탈피하는 유효한 접근이자 가능성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기인 2007-05-04 07:10   좋아요 0 | URL
오옷, 소이부답님 역시 부지런하시네요! 저는 아직도 손유경 선생님 논문을 못 읽었는데 -_-;;;; 등잔밑이 어둡다는(말이 되는지? -_-;;; ) 여튼 이광수 주요한 등이 시라카바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도 맞고, 낭만주의적 경향이 있는 것도 긍정할 수 있는데 낭만주의와 계몽주의를 당대 조선의 상황에서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반이성/이성이라는 도식인지요... 당대 조선에서 계몽주의라는 운동이 낭만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도 가능할 듯 한데요 ^^

기인 2007-05-04 07:14   좋아요 0 | URL
뭐 원문 글을 읽어보고 판단해야할 문제이지만, 그래도 이런 도발적(^^) 문제제기들이 활력을 주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국문학 공부하다보면 그래도 2~3년에 한번은 이렇게 재미난(?)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7-05-04 15:08   좋아요 0 | URL
전공자들은 다 모이셨군요.^^ 손유경씨의 논문은 아직 출판이 안된 거지요?(논문 파일은 어제 다운받아놓았습니다). 2-3년에 한번씩 재미난 일이 터진다면, 가물에 콩나는 식인데, 흠...
 

고대하던 이창동의 네번째 영화 <밀양>이 드디어 햇빛을 보게 되는 모양이다. 알다시피 김기덕의 <숨>과 함께 이번에 칸느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된 작품이다. 24일 개봉이라고는 하지만 그에 앞질러 기자 시사회가 열렸던 모양이고 언론 리뷰들이 올라오고 있다. 그 중 하나를 옮겨놓는다. 이달말에는 시간이 좀 나겠지...

한국일보(07. 05. 03) 이창동 감독의 네번째 영화 '밀양'

처음부터 수상했다. 이창동, 이 지독한 리얼리스트가 멜로를 한다는 사실이. 두근두근 몽클한 감정의 조각을 꿰 맞추기엔, 이 작가의 물기 없는 언어는 너무 뻑뻑하지 않은가. 그래서 사건현장의 형사처럼 의구심을 품고 시사회장에 들어섰다. 전도연과 송강호가 나란히 포즈를 취한 포스터를 부비트랩 피하듯 조심스레 돌아서.

의심은 오래지 않아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창동 감독의 네 번째 작품 <밀양>(24일 개봉)은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영화다. 의뭉스레 ‘멜로’라는 카피를 달고 있지만, 감독은 그가 오랫동안 말하고 싶었던 종교와 구원에 관한 얘기를 작심하고 쏟아 놓는다. ‘상실감마저 꺾어버리는 절대적 절망이 닥쳤을 때,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는 남편을 잃은 신애(전도연)가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향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감독은 구질구질한 내러티브 대신 동네 아줌마들을 닮아 가려는 신애의 노력을 통해 그가 겪은 슬픔의 무게와 삶의 의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과 함께 그를 지탱하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진다. 신애가 기독교 신앙을 지팡이 삼아 버티는 건, 그래서 영적이라기보다 물리적이다.

그러나 신애는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아들을 죽인 남자의 입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듣고 만다(*김영현의 한 소설에 나오는 모티브 아닌가? 아니다.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 나온다. 김영현의 소설은 <벌레>이다). 그 순간의 배신감은 물리적 신앙의 지팡이를 분질러 놓기에 충분하다. 그를 일으킨 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밧줄을 붙잡은 신애 자신이었으니까. 용서를 할 권한조차 빼앗아 버린 하나님은 또 하나의 ‘절망’일 뿐이다.

구원의 가능성은 마지막에 가서야 슬며시 그 얼굴을 내민다. 절망도 믿음도 배신감도 지나간 뒤 스스로 머리를 다듬는 신애 곁으로 햇볕 한 조각이 따스하게 내려비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비밀스러운 햇볕(密陽)’이.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결국 모든 희망과 구원의 출발은 자기 존재의 소중함, 내 귓전에 나의 심장박동이 들린다는 놀라운 사실이 아닐까.” 선불교의 살불살조(殺佛殺祖)를 떠올리게 하는, 이창동식 주체주의 또는 인간주의다.

이창동은 <밀양>이 종교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꺼렸지만, 이 영화는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기독교라는 소재를 지렛대 삼아 진지하게 성찰한다. 이런 진중한 주제를 이창동 특유의 리얼리즘으로 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밀양>은 충분히 빛을 발한다. 삶의 짠내와 비린내를 핍진하게 담아내는 이창동 어법은, 관념 속에서 변색되기 쉬울 법한 이 영화의 주제에 처절한 사실주의의 옷을 입힌다.

그러나 지나치게 기독교를 ‘소재화’하는 감독의 시도가 이 영화에 탁한 분위기를 씌워 놓은 것도 사실이다. ‘리얼리즘’적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라고 하기엔, 기독교에 대한 이 감독의 시선은 결코 편치가 않다. 그 불편함이 이 영화 속의 유일한 과잉이다. 이창동 특유의 절제력이 기독교에서 유독 무너지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어쨌든 <밀양>은 오랜만에 진지하고 깊이 있는 사색을 요구하는 영화다. 랑그와 빠롤 사이의 장난질만 난무하는 21세기 소설만 읽다가(*'랑그'와 '빠롤' 같은 단어도 기사에서 읽을 수 있다니!), 1980년대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나 김성동의 <만다라> 같은 옛 소설을 다시 펴는 감동을 준다. 폭발하는 듯하면서도 결코 넘치지 않는, 대한민국 두 최고배우의 연기를 보는 기쁨도 있다.

사족 하나. 이 지독한 인간주의 영화가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어떤 평을 받을지 궁금하다. 학교에서 십자가와 히잡의 착용도 금지하는, 지구상에서 세속주의(secularism)를 가장 신봉하는 나라 평론가들이 모이는 만큼 <밀양>에 열광할 것 같은 예감이 들기는 한데…(유상호 기자) 

07. 05. 03.

P.S.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이창동의 모든 영화'라고 생각한다(내가 신뢰하는 건 그의 '리얼리즘'이다). 음, 네번째 영화가 제일 마음에 들 것도 같군...

P.S.2. 덧붙이는 기사는 '이창동 컬렉션'에 관한 것이다. 감독 자신의 음성해설을 담고 있다는 게 무엇보다도 큰 매력이겠다.

경향신문(07. 05. 03) [DVD코멘트]이창동 감독 콜렉션

2002년 ‘오아시스’ DVD 출시 당시 이창동 감독이 음성해설을 실었다는 소식에 많은 팬들이 두번 놀란 적이 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언급을 몹시 꺼리는 감독이 코멘터리를 녹음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고, 감독이 이를 녹음하다 말고 더이상은 못하겠다는 듯 영화 중간쯤 스튜디오를 나가버리는 바람에 다른 스태프가 해설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일에 ‘역시나’ 하면서 놀랐던 것이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등 그의 작품 3편을 모아 출시된 이번 타이틀엔 다행스럽게도 전편에 걸쳐 감독이 음성해설에 나서줬다. 여전히 “감독이 자기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금기 같은 일”이라는 감독은 이동진 기자와 함께 문답형식으로 코멘터리를 진행하며 비교적 충실한 작품해설을 들려주고 있다.

‘초록물고기’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하는 감독은 극중 막동이(한석규)의 정체성 탐구를 통해 “365일 공사중인 한국사회”의 풍경을 구현하고 있다. “감독이기 이전에 40대의 한 인간으로서 자기반성의 극점에 달했던 시기에 제 존재를 찾아가던 실존적인 작업이기도 했다”는 ‘박하사탕’과,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한 영화로 인물과 인물, 영화와 관객 등의 관계 사이에서 불안한 경계를 표현하려 했다”는 ‘오아시스’ 모두 감독의 본의를 밝히는 해설을 들으며 두번 세번 감상할 가치가 충분하다. 4장의 디스크로 구성된 이번 타이틀에는 영화 3편 외에도 이들의 제작과정 등을 담은 스페셜 피처 디스크가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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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03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대하고 있는 영화랍니다 :)

이리스 2007-05-03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보려고.. ^^

심술 2007-05-03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이청준의 단편소설 가운데 하나에서도 아이를 잃은 엄마가 기독교적 용서를 강요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스트레스 받다 자살하는 게 있었는데 김영현 작가도 비슷한 주제를 다룬 적이 있나 보군요.

Runa 2007-05-03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몇 자 답니다. 저도 이 영화가 무척 기다려지는군요.
음악도 좋다더군요. 이런 내용과 음악이 어떻게 만나는지도 듣고 싶네요.
<밀양>의 영화음악을 맡았다는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앙 바소의 음악 추천합니다.
http://www.christianbasso.com/pro01.html
날씨의 차이일까요?
남미의 정서에는 어떤 끈적한 슬픔같은 것이 담겨있는 듯 합니다.

푸른괭이 2007-05-04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술님/ [벌레 이야기]입니다. 이창동 감독님께서 직접, 이 소설과 [밀양]의 연관성을 얘기하셨지요.

로쟈 2007-05-03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술님/ <벌레 이야기>가 맞습니다. 김영현의 <벌레>와 잠시 혼동했습니다.
Horsain님/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알려주셔서 감사.^^

심술 2007-05-04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거 제목이 '벌레이야기'였구나. 고맙습니다, 푸른괭이님. 이창동 감독님도 연관성을 얘기하셨군요.

코스모폴리스 2007-05-04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무척 기대됩니다만, 요즘 한국영화 포스터들이 다 비슷해 보여요.
 

지난주에 세상을 떠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에 관한 기사를 하나 더 옮겨온다(지난주에는 주로 부고기사들이었다). 프레시안의 이 기사에서는 현대 러시아의 '최악의 지도자'였던 옐친의 과오들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적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고르바초프의 사회주의 개혁노선이 쿠데타와 뒤이은 옐친의 급진주의 노선에 의해 좌초당한 사실을 항상 유감스럽게 생각해왔는데, 기사에 따르면 미국의 시사주간지 <네이션>은 지난달 러시아 민주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는 보리스 옐친이 아니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정당하게 평가했다고. 사실 그런 대목이 눈에 들어서 스크랩해놓는 기사이다.

프레시안(07. 05. 01) 옐친이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옐친은 정녕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인가? 지난 달 23일 사망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서방 언론, 특히 미국 언론들의 과장된 평가가 줄을 잇고 있다. 언론들은 옐친을 '소련을 붕괴시키고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가져온 인물'이라고 치켜세우며 그의 생애를 반추하고 있다. 한국의 언론들의 평가도 미국적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경제 개혁은 실패했다' 혹은 '영욕의 삶을 살았다'며 균형을 잡긴 했지만, 그가 1991년 강경 공산주의 군부 쿠데타 당시 탱크에 직접 올라갔던 일에 대해서는 '맨주먹으로 쿠데타를 저지했다'며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지난번 페이퍼에서도 지적했지만, 옐친은 이 이미지 하나로 10년을 집권했다).


  
옐친 전 대통령이 러시아 정치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1991년 6월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1999년 블라디미르 푸틴 현 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하기까지, 의회를 포격하고 알짜배기 국유기업들을 마구잡이로 민영화하는 등 9년여 동안 옐친이 보여줬던 소위 '충격 정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옐친의 정치의 1991년 12월 소비에트 연방 해체 결정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의회와의 협의는커녕 법적 절차도 제대로 밟지 않은 채 소련 해체를 선언해버렸다. 소련의 해체가 아무리 역사의 대세였다고 할지라도 절차적 정당성을 결여한 독단적 결정은 국민들을 아연케 하는 것이었고 이후 보여준 비민주적인 정치행태의 시발점이 됐다.
  
소련의 해체 과정에 대해 미국의 정치평론가 스티븐 코헨은 지난해 시사잡지 <네이션>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사회적 합의 및 헌법 중시 태도로부터 이탈한 것"이라며 '위로부터의 변화'라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짜르식 전제정치와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고 혹평했다. 옐친의 그같은 조치는 또한 그에 앞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해 6년간 실시된 글라스노스찌(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과정에서 이룩한 민주개혁을 뒤흔드는 것으로 대중들의 분노를 샀다.
  
1992년 초부터 시작된 옐친의 이른바 '충격 요법' 정책도 러시아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이었다. 미국의 경제학자들, 특히 하버드대 경제학자들에 의해 사실상 강요되고 클린턴 미 행정부에 의해 지원을 받은 이 정책은 물가 통제 장치를 없애는 동시에 대규모 국유기업들을 민영화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옐친 주변의 '젊은 개혁가'들에 의해 의욕적으로 추진된 이 정책은 그러나 결과적으로 러시아 경제에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또 서민들의 화폐 자산의 가치를 추락시켜 러시아 국민들의 절반 가량을 빈곤선 아래로 떨어지게 했다. 그러나 서구의 언론들은 이를 가리켜 '개혁'이라고 선전했다.

1993년 10월 옐친이 의회 건물에 탱크로 발포했던 일은 철권통치를 방불케 했다. 옐친은 자신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1991년 쿠데타 당시 자신을 비호했던 의회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반대파를 제거한다는 명목이었다. 이 사건으로 187명이 목숨을 잃었고 5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더 중요한 것은 합법적 선거에 의해 선출돼 행정부로부터 독립적 자세를 견지했던 러시아 의회가 이후 정부의 시녀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형성된 러시아의 헌법적 질서는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러시아 대통령이 정당하고 독립적인 선거를 통해 수립된 의회에 대포를 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와 대부분의 미국 언론들은 옐친의 '치어리더'로 활약했다. 당시 미국의 한 고위 관리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클린턴 행정부는 옐친이 더 폭력적이더라도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1994년부터 시작된 체첸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공격을 멈췄던 1996년까지 수만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헌법에 보장된 연방주의는 공공연히 조롱당했다. 또 핵무기를 가진 국가에서 일어난 첫 번째 내전이라는 위험천만한 전쟁으로도 기록됐다. 러시아의 전투기와 탱크가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에 폭격을 퍼부을 때 클린턴 대통령은 옐친을 링컨 대통령과 비교하며 찬사를 쏟아냈다.
  
영국에 망명한 러시아 억만장자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등 소수의 올리가르히(과두재벌)에 의해 자금을 조달받고 친(親) 옐친 언론의 도움을 받아 치른 1996년 대통령 선거 운동은 불법과 탈법으로 점철됐다. 옐친은 "배당을 위한 융자"라는 악명높은 합의를 통해 자신에게 선거자금을 대주는 올리가르히들에게 러시아의 중요한 경제적 자산 통제권을 나눠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미국 언론들은 이를 '시장개혁'이라고 불렀으나 러시아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범죄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그같은 조치는 또 러시아의 올리가르히를 재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러시아의 한 저널리스트는 이를 두고 옐친은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가 아니라 '올리가르히의 아버지'라고 비난했다.


  
1998년 8월 실시한 루블화 평가 절하와 채무 상환 유예(디폴트), 은행 계좌 동결 조치 등의 정책은 서민들의 저축을 또다시 몰수한 셈이 됐고 1991년 이후 형성된 중산층을 몰락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옐친 치하의 러시아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만을 가져오는 반동적인 정치에 불과했다. 러시아인들의 70% 가까이가 권위주의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답했던 지난해 여론조사는 옐친의 유산이 러시아 민주주의에 얼마나 해로운 것이었는지를 반증한다.
  
올리가르히에게 러시아의 재산을 독점토록 한 '경제개혁' 역시 씻을 수 없는 실정이다. 유엔개발계획(UNDP)는 1999년 보고서에서 "구 소련에는 현재 사상 유례 없는 위기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으나 미국을 위시한 서방 언론들은 이를 깡그리 무시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대다수 국민이 고등교육을 받은 주요 산업국가가 이룩한 수십년간의 경제 개발 결과를 해체하는 현상이 현대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평가했으나 미국의 언론들은 옐친과 그의 '젊은 개혁가들'을 찬양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이에 대해 <로이터> 통신의 한 기자는 "고통이 편집됐다"고 촌평했다.
  
일각에서는 옐친의 충격요법적 경제개혁 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옐친이 무모한 정책을 추진하던 당시에도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러시아의 경제학자들은 옐친의 정책이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며 시장경제로의 보다 점진적인 이행을 목표로 하는 '제3의 길'을 주장했다. 시간은 그들의 주장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옐친의 유산을 물려받은 푸틴에 의해 러시아는 더 가난해졌고 양극화는 더 심각해 졌다(*양극화가 심각해진 건 사실이지만 더 가난해졌다?). 푸틴이 권좌에 오르자마자 했던 일은 옐친을 부패 혐의로 기소하지 말라는 포고령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네이션>은 지난달 27일 "언론의 건망증이 심한 건 알겠지만 1985년 소련의 지도자가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진정한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기억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며 "옐친은 언론 검열 철폐, 시장 개혁, 자유선거를 실시한 고르바초프 개혁의 최대 수혜자였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역사상 최초로 도입된 자유선거에서 옐친이 러시아 대통령으로 당선된 반면, 옐친은 자신의 부패에 따른 징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심복인 푸틴을 후계자로 지명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언론이 옐친을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극찬하는 것은 그가 서방의 입맛대로 행동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관측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고르바초프에 대한 인색한 평가, 나아가 푸틴에 대한 적개심은 민주주의보다는 러시아의 이익을 지키려는 이들의 독립적인 태도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옐친의 비민주적인 정치행태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행정부가 '옐친 개혁'의 후원자가 됐던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를 대세로 굳히려 했던 미국의 조바심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옐친 사후 나타난 미국 언론, 그리고 우리 언론의 태도는 그같은 서구우월적 시각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황준호 기자) 

07. 0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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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5-03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쇼군'이 대표작인 제임스 클라벨의 다른 장편소설 노블 하우스를 읽다가 소설 안 소련사람이 -참고로 노블 하우스의 시공간적 배경은 1963년 홍콩입니다- Matyeryebytz란 욕을 하는 걸 봤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죠? 짐작으로는 개새끼 내지는 18놈 같은데. 어떻게 소리내는지도 궁금합니다. 마톄례빗츠 쯤 될까요?

로쟈 2007-05-03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질문만 하시는데요.^^; 한국어도 그렇지만 제가 욕에는 과문해서 실제로 러시아 욕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흔히 하는 욕은 아닌 거 같고. 앞부분은 '어머니'란 뜻이 맞습니다). 스펠링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구요...

심술 2007-05-04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작컨데 로쟈님은 몹시 건전한(?) 삶을 살아오신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