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대선 이슈 중 하나는 '3불 정책' 존폐 문제가 될 거라는 전망이 있다. 대학마다 소리 높여서 '3불' 폐지를 외치고 있는데(프레시안의 관련기사들은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section_sub.asp?s_menu=사회&s_sub_menu=교육), 그와는 반대되는 목소리도 한편에는 엄존한다(그리고 내가 보기엔 더 설득력이 있다). 서로 다른 입장들을 대조해놓고 판단할 문제이지만 한국 대학교육의 문제가 '모자란 학생들'에게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부실한 대학' 자체에 있다고 주장하는 두 개의 칼럼을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7. 04. 02) 잘난 대학이 못난 애들 탓?

어린 시절 골목길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장면. 대낮부터 소주 한잔 했는지 얼굴이 불콰하게 물든 어른이 쪼그리고 앉아 애들을 불러 세운다. “너희들, 누가 싸움 잘 해?” 애들은 서로 눈만 멀뚱거린다. 어른은 계속 경쟁심을 북돋운다. “너, 이 친구한테 이길 수 있어?” 결국 몇 명의 애들이 아무 소득도 없는 싸움을 하고, 어른은 이를 보고 즐긴다.

최근 한국의 어른 몇 분이 애들 싸움판을 ‘본격적’으로 키우자는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아 놀랍다. 할일 없는 어른이 골목길에서 심심풀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명문대학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맨정신’으로 하는 말이다. 교육부의 ‘3불(不) 정책’을 폐지하라고 말이다. 삼불정책이란 본고사, 기여입학제, 고교등급제 금지를 말하는 것이니, 상아탑의 선비들이 점잖은 말로 “똑똑한 애, 돈 많은 애들 못 뽑아 대학이 발전 못하니, 금지를 풀어 달라”는 것이다. 결국 전국의 애들 모아 놓고 “너희들 중 누가 공부 젤 잘해?” “부모님 돈 많은 사람 손들어봐!”라고 하고 싶다는 것 아닌가?

한번 따져보자. 한국 대학 신입생의 학력 수준은 세계의 어느 명문 대학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한국 초등학생의 학력은 세계 최고 수준급이고, 중고등학교로 갈수록 학력이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모두 세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학교 급별로 볼 때 가장 ‘부끄러운 성적’을 내는 곳은 대학 아니던가? 대학 들어갈 때는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이었는데, 나올 때는 세계는커녕, 국내 시장에서도 별 쓸모가 없는 부실한 인간이 되어 나온다는 것이 한국의 골칫 거리 아닌가? 그런 대학이 입학생 실력 탓하고 있으니, 정말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그리고 큰 돈보따리를 들고 들어오는 학생을 못 뽑기에 대학이 발전 못한다고? 신입생의 학력문제보다는 돈문제가 세계적인 대학으로 발전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말에는 일정 부분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하지만 과연 선진국 대학의 재정적 측면의 경쟁력이 입학생이 들고 들어오는 돈에서 나오는 것일까? 교수들이 따오는 연구비, 그 연구결과로 취득한 지적재산권이 벌어들이는 돈, 성공한 졸업생들이 모교에 내는 기금, 총장들이 발로 뛰어 기업으로부터 끌어들인 기금 등이 모여 남다른 차이를 만드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결국 돈 버는 어른들이 대학 발전의 밑거름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어른들은 왜 자꾸 ‘애들’ 싸움에 집착하는가? 경쟁이 치열한 국제사회에서 이기는 일이 중요하다면, 어른들이 잘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자면 고등학생들보다 대학생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고, 학생들보다 교사와 교수들이 교육과 연구 ‘시합’에서 더 치열한 경쟁을 벌려야 정상이다. 그리고 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일터에서도 어른들이 열심히 경쟁하고, 자주 평가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어릴 때부터 죽도록(?) 공부하여 실력을 쌓아 나가도, 먼저 자리잡은 어른들이 철밥통 차지하고 앉아, “나는 열외로 하고, 너희들끼리 싸워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의 어린이와 청소년은 이미 세계에서도 가장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에겐 여행을 하고, 명작도 읽고, 남을 돕는 봉사를 하면서 자신의 앞날에 대한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여유를 주어야 한다. 정말로 더 열심히 공부하고 경쟁해야 할 사람은 한국의 애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다.(류재명/서울대 지리교육과 교수)

 

한국일보(07. 03. 31) 서울대가 하버드가 못되는 이유

가끔 어디 어디 선정 세계 대학 순위라는 게 언론에 보도된다. 예를 들어 요전에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발표한 '세계 100대 글로벌 대학'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영국의 더 타임스도 하고, 시사주간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도 한다. 그 때마다 베이징대도 순위에 들었는데 한국 대학은 하나도 못 들었네, 200위권 밖으로 밀렸네 하는 개탄이 나온다. 유달리 등수에 집착하는 한국인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대학 순위를 새삼 거론하는 이유는 최근 서울대를 시작으로 각계에서 "정부의 3불(不) 정책이 대학 경쟁력 확보에 암초다"라는 주장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을 뽑을 때 본고사도 보이지 못하고, 지망생의 출신 고교를 등급화해서 차별대우하지도 하지 못하고, 기여입학제도 못하는 바람에 대학의 경쟁력이 가차없이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대학 자율을 저해하는 규제 조치이니 누가 봐도 바람직할 것은 아니다.

● 경쟁력 약한 게 삼불 탓?

그런데, 대학의 경쟁력이란 게 무엇일까? 그게 뭐길래 3불 정책이 그토록 방해가 될까? 대학의 순위를 매기는 기관들의 기준을 보는 것이 좋겠다. 요약하면 해당 학교 교수나 연구원의 논문이 권위 있는 전문지에 인용된 횟수, 외국인 교수ㆍ학생의 비율, 교수 1인당 논문인용지수, 교수 1인당 학생 비율, 도서관 장서 규모 같은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어디에도 신입생의 우수성이라는 항목은 없다.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정도의 우수성은 기본이므로 특별한 평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낫다는 서울대조차 이런 순위에 별로 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3불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심하게 말해서 신입생이 우수하지 않아서이다. 그리고 국가가 3불이라는 이름으로 우수한 신입생을 뽑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하버드대 총장이나 옥스퍼드대 총장에게 해 주면 뭐라고 할까? 아마 What are you talking about?(무슨 소리요?)이라고 할 것이다.

연구비를 키우고, 우수 교수를 어떻게든 영입하고, 무능 교수와 불량 학생은 쫓아내고, 특화할 분야에 집중하고, 석ㆍ박사 과정 학생의 연구를 독려하고, 기업과의 연계를 극대화하고, 특허를 많이 내고 하는 노력에 전력투구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이제 갓 들어와서 4년 동안 키워야 겨우 써먹을까 말까 한 애기들한테 대학의 경쟁력 책임을 몽땅 갖다 씌우는 것이다. 비유가 약간 부적절하지만 솜씨 없는 목수가 연장 탓하는 격이다. 도편수나 소목장쯤 되면 연장을 스스로 만들어 쓰는 법이다. 하버드대생을 만드는 것은 하버드대인데 우리는 서울대생이 서울대를 만든다.

하기야 미국의 경쟁력 높은 대학들도 우수학생을 뽑는 일을 중시해서 많은 인력과 노력을 투입한다. 그런데 그 방식이 우리와 다르다. 미국 대학에서 입학 전형 일을 했던 재미동포 안젤라 엄씨의 분석에 따르면 대개 하버드대에 응시한 고교 수석 졸업생의 80%가 낙방한다. 우리나라의 수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SAT 만점자가 아이비 리그 대학 입시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숱하다. 본고사 같은 것은 아예 없다. 왜 그럴까? 평범한 우수생이 아니라 특출한 학생을 뽑으려 하기 때문이다.

● 하버드와 다른 점 알아야

100점 만점 시험에서 100점과 90 몇 점은 별 차이가 없다고 보고 학생의 특출한 자질, 열정, 헌신, 성실성, 인간적 성숙도 같은 덕목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대에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 부어도 하버드대처럼 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교육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야 자체가 너무 협소하기 때문이다. 제 못난 것이 3불 때문이라니…. (이광일 논설위원) 

07. 04. 02.

P.S. 최근의 '3불 페지'론과 본고사 논란을 '서울대 엘리뜨들의 퇴행성 본고사주의'로, 보다 구체적으론 '70년대 서울대 출신의 노스탤지어'로 분석하는 시각도 설득력이 있다. 사회학자인 김종엽 한신대 교수의 '창비논평'이다( http://www.changbi.com/weeklyreview/content.asp?pID=106&pPageID=&pPageCnt=&pBlockID=&pBlockCnt=&pDir=&pSearch=&pSearchS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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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4-02 13:36   좋아요 0 | URL
백번 맞는 말이여요.

biosculp 2007-04-03 00:44   좋아요 0 | URL
읽다보니 생각나는게 원동연, 5차원 독서법과 학문의 9단계라는 책의 말미에 나오는 애기인데요. 한국 교육의 약점으로 성적과 실력의 괴리를 애기하더군요.
영어 성적은 높은데 실제로 영어를 잘 사용하지 못한다. 역사 성적은 높은데 역사의식이 없다. 윤리 성적은 높은데 윤리성이 결여되어 있다. 체육성적은 높으나 건강하지 않고 과학성적은 높은데 과학적 사고방식을 갖지 못한 실력없는 사람들이 길러진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다 정말 웃음이 나오면 고개가 끄덕여 지던데, 요즘 초딩들 공부가 가관이거든요. 수학교육전공하시는 분이 같은 문제라도 초딩, 중딩, 고딩때 반복되지만 개념이해에 따라 풀이 방법이 다르기에 섣부른 선행은 기계적인 문제풀이만 암기할 뿐이지 창조력을 말살시켜버린다고 경고하는데 초딩들이 중딩고딩들 풀이 방법으로 문제풀이에 전력하고, 이런 애들이 어딜가나 성적은 좋게 나오고 우리나라 명문대학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되는데, 서울대 어느교수는 0.001%가 차이나도 구별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성적은 참 좋은데 실력은?
이런 웃지못할 상황이 계속 벌어질것 같군요.

로쟈 2007-04-03 15:14   좋아요 0 | URL
0.001% 차이를 식별해내는 게 교육공학인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은 아닌 것이죠. 입시전형만 바꾸면 대학마다 숨겨진 '천재들'을 선발할 수 있다는 것인지. '공학'이란 게 워낙에 놀라운 걸 만들어내긴 하지만...
 

'컬처뉴스'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기획연재는 지난주에 끝난 '디아스포라의 문학'이다. 곧 책으로 묶여도 좋을 만한 분량이 다루어져 있기에 은근히 출간을 기대하고 있다. 그 중 문학평론가 정은경씨가 러시아의 한인 작가 아나톨리 김을 다룬 꼭지를 옮겨놓는다. 아나톨리 김에 대해서는 재작년인가 (삼성이 후원하는) 톨스토이문학상 수상자여서 한 차례 소개했던 기억이 있다. 아나톨리 김은 국내에도 주요 작품들이 번역되고 또 서너 명의 전공자가 있을 정도로 많이 연구되고 있는 작가이다.    

아니톨리 김은 '영원한 한국인'임을 피력해왔지만 그의 전작에서 드러나는 주요한 철학적 사유는 자연예찬 코스모폴리탄적 세계관이다.

컬처뉴스(06. 02. 11) 러시아적 영혼의 한인작가

한 사람의 영혼과 기질, 나아가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세계 문화사의 편의적 가름이 아니더라도 민족성 또는 각국의 문학적 특성을 상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서부터 기원하는 것일까? 이러한 어리석은 질문으로 이 글을 시작하는 것은 아나톨리 김의 문학에서 지극히 러시아적인 영혼을 보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적 영혼, 딱히 규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익숙한 몇몇 예술가의 이름들에서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아우라를 통해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다. 위대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에서부터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화가 샤갈, 칸딘스키, 그리고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예술은 그들이 나고 자란 유라시아 대륙만큼이나 광활하고, 백야만큼 신비로우며, 긴긴 겨울밤과 혹한 만큼이나 심오하고 종교적이다(*이 주제와 관련하여 내가 가장 최근에 복사한 책은 데일 페즈맨의 <러시아와 영혼>(코넬대출판부, 2000)이다).



개인적으로는 언젠가 한번 ‘지형과 풍광, 그리고 날씨가 문학작품에 미치는 영향’이라 제목으로, 과학적(?) 세계문학의 지형도를 그려보겠다는 맹랑한 생각도 품고 있지만, 나는 개개인의 기질과 영혼, 나아가 공동체의 심성을 형성하는데 자연조건이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한 개인의 심성은 그가 매일 마주하는 풍광과 기후를 닮는다. 이를테면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같은 서해와 동해 출신 작가는 같은 바닷가일지라도 기질과 작품 성향에 있어 그 물빛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이 나의 얼치기 ‘문학지리지’이다.

아나톨리 김. 정확히는 아나톨리 안드리에비치 김(Anatoli Andreevich Kim). 이 기다린 러시아식 명명법에 따르면, 아나톨리는 안드리에비치의 아들이자 ‘김’의 후손이다(*약간의 착오인데, '안드레에비치'의 아들이 아니라 '안드레이'의 아들이다). 이름에도 나타나있듯 그는 한국인의 핏줄을 이어받은 한인 3세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김’이라는 유전적, 문화적 형질보다는 러시아로부터 더 많은 자양분을 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러시아적 영혼의 탄생의 연혁은 그의 할아버지 대로 올라간다.

빈농이었던 그의 할아버지는 땅을 잃고 벌이를 위해 1906년경 국경을 넘어 만주를 거쳐 러시아 땅에 당도한다. 한국에 이미 가족을 두었으나, 그는 그곳에서 새 아내를 맞아 아들 삼형제를 두고 살게 되는데,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918년, 그는 뜻밖의 손님을 맞는다. 고향에서 가난과 슬픔에 찌들린 형수와 조카들을 보다 못해 한반도를 가로질러 형을 찾아온 동생. 그의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동생의 설득과 러시아의 가족 사이에서 번민하다가 덜컥 병에 걸려 죽고, 할아버지의 동생은 얼결에 조카 셋을 맡아 키우게 된다.

어린 조카들이 장성하여 정작 고향의 자신의 가족을 찾아가려했을 때는, 이미 험악한 국제정세로 인해 월경이 불가능하게 되어 영영 고향을 등지게 되었다는 그의 가족사는 그 자체로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보여주는 한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김’으로 상징되는 이 한민족의 수난사는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버지 대로 이어지는데, 극동에서 살았던 그의 아버지는 1937년 당시 일본인들이 한인을 스파이로 이용할 가능성을 두려워한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야 했던 것. 그리하여 1939년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또 한 명의 ‘김’이 아나톨리였던 것이다.

아나톨리 김은 작년 톨스토이 문학상을 비롯하여 러시아의 각종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노벨 문학상에도 거론되었을 정도로 러시아는 물론 세계적인 작가로 성공하였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는 그의 가족 수난사만큼이나 굴곡 많은 여정을 거쳐야 했다. 초등학교 노어교사인 그의 아버지를 따라 ‘극동의 캄차카에서 우수리 강 지역, 사할린 등지’로 러시아 각지를 전전하며 다양한 인간 군상을 목격한 그는 모스크바 미술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자퇴한다. 그 뒤 군생활과 크레인 기사, 보일러 공에서 선전 포스터 제작 미술 감독관 등 여러 직업을 거치면서 틈틈이 습작을 하고, 5년제 고리키 문학창작 대학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창작 수업을 받지만 작가의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의 글쓰기는 대학 시절 때부터 스승이었던 단편소설의 대가 블라지미르 리진으로부터도 인정받은 수준이었지만, ‘8년간 단편을 들고 편집부 문턱을 드나들었다’라는 회고에서 볼 수 있듯, 기나긴 절망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그것은 물론, 당시 여전히 공식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옹호하는데 충실했던 소련의 문학적 상황과 밀접히 관련 있는 것으로, 이러한 풍토 속에서 인간의 내면 세계를 탐색하며 환상과 신비주의적 색채를 보여주었던 그의 단편들은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이후 경직된 사실주의적 경향과 엄격한 검열의 빗장을 서서히 열기 시작한 러시아 문단의 변화와 함께 아나톨리 김의 문학 또한 차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1973년『오로라』에 「수채화」와 「묘코의 들장미」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아나톨리 김은 그때까지 축적된 원고와 글쓰기의 저력을 봇물처럼 터뜨렸고, 그의 독특한 미학의 단편들은 독자들과 비평계로부터 큰 호응을 얻는다. 7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 발표된 그의 작품은 대략 90여편의 단편과 9편의 중편, 4편의 장편에 이른다고 하니, 이 방대한 분량만 보더라도 그간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 문학 전공들은 아나톨리 김의 대표작으로 흔히 장편『다람쥐』이나『아버지 숲』혹은 중편 「연꽃」, 「꾀꼬리의 울음소리」 등을 꼽는다. 아마도 러시아의 현대적 환상문학의 대가로 인정받게 된 그의 독특한 서사기법 - 다성악적 화법, 서정성과 환상성, 변신과 변형의 모티브, 비선형적 시간의 병렬구조 등등-과 철학적 사유들이 이들 작품에 중요한 의미망으로, 혹은 총체적으로 구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 번역본들만을 피상적으로 접한 필자의 일천한 독서 경험으로는, 다소 난해한 이 북구적 환상 서사들보다는 초기 대표 단편들을 모은 단편선집『사할린의 방랑자들』이 가장 흥미로웠다.

한국어 번역본『사할린의 방랑자들』은 1983년 러시아에서 출판된 중편집『사할린의 사람들』과는 다른 책이다. 첫 번째 단편집인『푸른섬』(모스크바: 소비에트 작가, 1976)과 두 번째 단편집『동틀녘의 자두맛』(모스크바: 청년근위대, 1985)에 수록된 작품들을 선별하여 번역 출간한 이 단편선집은 문제작『다람쥐』를 내기 이전까지 주로 단편 장르에 천착했던 아나톨리 김의 단편 미학의 진수를 보여줄 뿐 아니라, 중장편 전반에 흐르는 그의 철학적 사유와 환상적 서사 기법의 단초들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가령, 러시아 문단에 비평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작가적 명성을 확고히 했던 장편『다람쥐』의 문제의식-인간 세계와 다람쥐로 상징되는 동물 세계의 대립과 이들의 변형을 통해 보여주는  예술정신의 파탄과 영혼의 구원 문제-이나『아버지 숲』에서 전달하고 있는 ‘자연’을 통한 신화적 시간의 희구와 코스모폴리탄적 세계관,『켄타우로스의 마을』의 문명 비판, 그리고『신의 플루트』의 불멸과 초월에 대한 사유에 이르기까지, 이 매혹적인 단편모음은 다성악적으로 흘러넘치는 슬라브적 휴머니즘의 시원을 담고 있다.

아나톨리 김의 사회문화 평론적 성격이 강한 장편들이 궁극적으로 ‘동양적 신비주의와 자연을 바탕으로 한 ‘전 인류의 합창’이라는 구원의 메시지를 지향하고 있다면, 단편들은 보다 소박한 차원에서 이뤄지는 삶의 비애와 영혼의 고통, 그리고 그들의 ‘세심한 인정과 극진한 사랑’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아나톨리 김의 단편에 대해 러시아 비평가 안드레이 바씰리예프스끼는 “예술가의 사명은 논쟁의 여지가 없도록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삶에 애착을 지니게 해주는 것”이라는 톨스토이의 말을 빌어 고평하고 있는데, 필자 또한 이 작품집의 감동을 매우 적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총 13편의 단편(혹은 엽편)이 수록된 이 단편집은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처럼 ‘사할린’의 한인들의 삶의 애환과 수난사를 그린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그와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강도손’ ‘덕수’ ‘봉기 아범’ 등의 한인들은 사실주의 창작방법론에 의해 형상화된 작품들의 주인공들이 아니라, 한인 공동체가 공유하는 설화, 민담, 신화, 또는 심지어 귀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자 화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단지 이야기 자체의 흥미만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삶의 비애와 비의, 그리고 어떤 진실된 삶의 국면을 환기시키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사할린의 방랑자들」은 사할린의 한 공동묘지 근처의 고갯마루에 출몰하는 유령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남자 혹은 여자, 일본인 혹은 조선 여자로 둔갑하는 괴기담을 통해 이 땅 위에서 벌어졌던 전쟁과 비극적 역사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이밖에도 이 작품에 실린 작품들은 대개 단일한 서사로 요약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인데, 가령 보쌈해간 남자와 벌이는 묘한 애증(「아가씨」), 형제간의 경쟁(「형제」), 친구의 아내를 욕했다가 새벽에 그 여자를 연상시키는 ‘불여우’를 만난다는 이야기 (「불여우의 미소」), 시골로 내려간 작가가 느끼는 평화로움(「동틀녘의 자두맛」) 등 파편적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플롯들은 아나톨리 김의 단편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들은 아니다.

오히려 아나톨리 김의 단편 미학의 핵심은 그의 서정적 문체가 창출하는 독특한 분위기와 어떤 계기들을 통해 보여주는 삶에 대한 통찰, 그리고 무엇보다 러시아적이라 할 수 있는 자기 희생적이며 순결한 영혼으로 가득찬 인물들이다. 예를 들어, 산술적 이익만을 생각하고 갓난 손녀딸을 5일제 탁아소로 보내는 집안 식구들에게 용감하게 맞서는 「사랑」의 주인공 빠벨 이바노비치, 그리고 그토록 마셔대던 술을 어느날 '그냥 마음먹고 끊어버렸다‘는 「동틀녘 자두맛」의 예고르 찌모훼예비치 등은 톨스토이가 그의 민담집에서 제시했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므이스킨’(『백치』)를 통해 보여주었던 숭고한 ‘백치’들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외투」(고골리)에서 나왔다’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백처럼 이들이야말로 ‘아까끼 아까기에위치’들의 진정한 후손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적 휴머니즘과 더불어 아나톨리 김 전작에 나타나는 중요한 철학적 사유의 하나인 자연 예찬과 코스모폴리탄적 세계관을 우리는 「쥐가 우유를 마시다」 「동틀녘의 자두맛」 「도시의 벼락」 「쯔나미」 등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전파 공학 기사인 「쥐가 우유를 마시다」의 주인공 드미뜨리가 도시를 떠나 숲에서 느끼는 다음과 같은 마음의 평화.  

“젊은 기사는 문득 이것이야말로 완전무결한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한 강, 황금빛 태양, 자작나무 숲, 버섯, 한없이 긴 여름의 하루, 처와의 재회에 대한 담담하고도 참기 힘든 때로는 부길처럼 타오르는 기대감, 또한 숨막힐 듯하면서도 차분한 기쁨, 잔잔한 행복감, 확신에 찬 희망의 감미로움...”(97쪽) 

자연에서 느끼는 이러한 생의 기쁨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겪는 인간 영혼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나톨리 김이 삶과 인간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 원천이며, 또한 인류애로 확장되는 고결한 예술혼의 고향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켄타우로스의 마을』로 대변되는 추악한 인간의 욕망과 문명 세계를 급진적으로 풍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급작스러운 비를 피해 키오스크 처마 밑에서 인도 시인과 러시아 노인이 본심과 달리 서로 데면데면해 있다가 벼락 맞은 나무를 보며, 기쁨과 감사의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하게 되는 「도시의 벼락」 같은 작품도 결국은 이러한 대우주적 자연 속에서 하모니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의 공감과 생의 기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나톨리 김은 문학의 첫 번째 역할이 '인간의 삶의 가치 고양시키는 데 있으며’ 그것은 ‘전인류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인물들이 겪는 불행이 얼마나 고결하고, 그들의 인내가 얼마나 감탄할 만한 것인지 보여줄 수 없는 작품들’은 예술이 아니며, 자신의 고독감을 반영하기 위하여 거울을 세워놓는 작가들은 ‘면서기 같은 사람’(257쪽)들이라고 비판한다. ‘주위에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인간은 완전히 행복할 수 없다’(258)고 말하는 이 작가, ‘자신의 진정한 뜻에 대한 의지가 견고하며, 강한 신념 무엇보다 문학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 작가를, 온갖 문학 위기의 담론과 혼탁한 회의의 소음 가운데 놓여있는 나는 불에 덴 듯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이 오래고 낯선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는 여러 지면과 대담을 통해 자신은 ‘영원한 한국인’임을 피력해왔지만, 그 말은 작가로서의 그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가 거듭 강조했듯 그의 진정한 조국은 ‘지구’이며 그가 속한 민족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의 진정한 정체성은 ‘세계 시민’이기 때문이다. 흰 당나귀와 나타샤, 그리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각난다면, 무엇보다 영혼을 적시는 한 권의 책을 갈급한다면, 이 신비와 환상, 사랑으로 가득 찬 아나톨리 김의 단편선을 펼쳐보길 권한다. 
 

*아나톨리 김의 서지와 전기적 사실은 김현택의 글 (「우주를 방황하는 한 예술혼」,『재외한인작가연구』, 고려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2001)과 최건영의 글 (「아나톨리 김은 누구인가」,『사할린의 방랑자들』, 남명문화사, 1987), 그리고 그의 자전적 에세이(『문학사상』1996년 4월호부터 1998년 4월호까지 김현택에 의해 번역 연재)를 참고한 것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아나톨리 김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사할린의 방랑자들』(최건영, 손명곤 역, 남영문화사, 1987),『연꽃』(김대경 역, 한마당, 1988),『페자의 통나무꽃』(김현택 역, 동쪽나라, 1993),『다람쥐』(권철근 역, 문덕사, 1993),『아버지 숲』(김근식 역, 고려원, 1994),『켄타우로스의 마을』(심민자 역, 문학사상사, 2000),『신의 플루트』(이혜경 역, 문학사상사, 2000),『꾀꼬리의 울음소리』(심민자 역, 한국통신돔닷컴, 2004),『해초 따는 사람들』(심민자 역, 한국통신돔닷컴, 2004)


07.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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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4-01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첨 댓글 남겨 봅니다.
로쟈님의 문학지리지 얘길 읽으니 다이아몬드 교수의 총,균,쇠가 생각나네요.
지리적 요인이 역사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해 주는 역작이었죠.

로쟈 2007-04-01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은 자주 남기셔도 됩니다.^^
 

엊저녁에 '4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을 띄워놓는다고 목록을 추슬러놓았었는데, 저녁을 먹은 포만감에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보통 매달 1일에 리스트를 올리곤 헸지만 아무래도 4월은 좀 특별한 달이어서 '만우절'에 뭔가 진지한(?) 일을 꾸미긴 어려운 게 아닌가 생각되어서였다. 하지만 일어난 시각이 이미 자정이 넘은지라 하는 수 없게 되었다(물론 평소 이 서재를 드나드는 분들은 대개 나의 농담도 진지하게 받아주시는 편이지만).

20권 가량의 책을 아래에 꼽아놓았지만 그걸 다 읽는다고 하면 '거짓말'스러운 것이고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다(최소 목표치는 네 권이고 나머지는 '참고문헌'이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책들을 주로 꼽았는데, 내가 고려한 독자층은 대학 신입생들이다. 마침 1학년 전공과목을 맡고 있기도 해서 '프레쉬맨(과 우먼)'들을 강의실에서 자주 보게 되는데, '습관적으로' 눈높이를 못맞추는 일이 발생하곤 한다(20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4월의 목록은 그들에게, 혹은 프레쉬맨의 추억을 갖고 있는 모두에게 바쳐진다. 기본 목록으로 내가 꼽은 책은 강경애의 <인간문제>,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그리고 헤겔의 <정신현상학>(서문)이다.

 

 

 

 

한국문학 작품으로 강경애(1906-1944)의 <인간문제>(문학과지성사, 2006)를 골랐다(전집을 포함해서 강경애의 작품은 여러 출판사의 판본들이 출간돼 있다). 1934년동아일보에 연재됐던 장편소설로서 우리 근대문학사에 드문 여성작가의 대표작이자 최원식 교수에 따르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성과와 한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는 지난 2005년 3월 문화관광부가 정한 '이달의 문화인물'이었고, 작년은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온라인 문학관은 http://koreanliterature.kaist.ac.kr/kangkyungae/). 하지만 내가 대학 1학년일 때에는 읽어볼 수 없었던 작품인데, '믿을 만한 텍스로'로 처음 출간된 게 <인간문제>(창비, 1992)가 처음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해서 '말로만 듣던' 작품을 나로선 이번에 읽어볼 작정이다(이미 한달도 더 전에 작품과 연구서, 그리고 논문 몇 편 등을 구해놓았기 때문에 내가 따로 준비할 건 없다).

강경애의 <인간문제>와 같이 읽어볼 만한 작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효시로 평가받는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어머니>(열린책들, 2006)이다. 지난 80년대 중반쯤에 국역본이 나오기 시작해서 지금은 러시아어 완역본만으로도 두어 종이 나와 있다. 고리키는 강경애가 태어날 무렵에 이 작품을 씌어졌고, <인간문제>가 발표되고 이태쯤 후에 세상을 떠났다. 아래는 1936년판 <어머니>의 표지(러시아 인터넷서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책이다).

Мать

주지하다시피 <어머니>는 러시아 노동계급의 형성과 노동자 의식의 각성과정을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비록 오래전 일이지만) 한때 대학 신입생들의 필독서 목록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었다. 그러한 독서의 사회사까지도 이 작품의 구성소가 아닌가 싶다(영역본은 http://etext.library.adelaide.edu.au/g/gorky/maksim/g66m/).   

 

 

 

 

<인간문제>와 <어머니>가 모두 한국(식민지 조선)과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달과정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 문제작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고른 책은 이미 대학가에서는 자본주의 입문서로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리오 휴버먼(1903-1968)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책벌레, 2000)이다(하지만 이 또한 내가 대학 1학년때는 읽을 수 없었던 책이다. 그때는 <철학에세이>를 '교재'로 읽었다). 그러니까 굳이 군말이 필요하지 않은 책이지만 '액면 확인'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의 저자 리오 휴버먼은 폴 스위지와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진보 잡지인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를 공동으로 창간한 바 있고, 좌파 지식인치고는 보기 드물게 급진적 사상을 대중적으로 설명하는 데 독보적인 재능을 보였던 인물이다." 아직도 대학가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비결이라 할 만한데, 놀라운 것은 원저가 1936년에 나온 책이라는 것(내가 바로 확인해보지 못하는 것은 박스보관도서이기 때문이다). 강경애의 <인간문제>와 바로 동시대 저작이라는 게 흥미롭다.

개인적인 관심거리 하나는 휴버먼이 스탈린시대 소비에트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하는 것인데(국역본에는 이 대목이 빠져 있다) 국역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동녘, 1986) 외에도 먼슬리 리뷰에서 출간한 <소비에트 권력 50년(50 years of Soviet power)>(1967)을 참조해볼 참이다. 러시아혁명 50주년 기념으로 출간되었던 책이다(다시 상기하자면 올해는 러시아혁명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를 이미 읽으신 분이라면 휴버먼의 또다른 책 <가자, 아메리카로! : 그리고 부자의 문전에 거지 나사로가 함께 살고 있었다>(비봉출판사, 2001)를 이 참에 읽어보시는 것도 좋겠다. <미국의 역사와 민중>(비봉출판사, 1982)라고 출간됐던 책인데, 말 그대로 '부자의 문전에 거지가 함께하는' 미국 자본주의사와 민중사의 풍경을 보여주는 책이겠다. 원제는 'We, the people : the drama of America'. 사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도 원제는 'Man's worldly goods : the story of the wealth of nations'이다. 둘다 국역본에 붙여진 제목이 탁월하달 수밖에.  

덧붙인 책들은 최근에 나온 자본주의 관련서들로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책들이다. 더글러스 다우드 외 6인이 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이해>(필맥, 2007)의 원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 Capitalism)>이고, 마르크스부터 아마르티아 센까지 7명의 경제학자(혹은 경제학파)를 다루고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앞에서 리오 휴버먼과 먼슬리 리뷰를 창간한 경제학자 폴 스위지이다. 대표작은 <자본주의 발전이론>(1942)으로 이 책과 더불어 비로소 미국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전통이 시작되었다고. 국내에는 이 주저 대신에 공저인 <미국 자본주의의 위기>(일월서각, 1986), <자본주의 이행논쟁>(광민사, 1980), <쿠바 혁명사>(지양사, 1984) 등이 소개돼 있는 정도이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동유럽의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다룬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시유시, 2007)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는데(요긴한 서평은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03301533101&code=900308), 저자들은 전통적인 자본주의 이행론과는 다른 '신이행이론'을 제안한다고. 이 "‘신이행이론’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아담 스미스나 칼 마르크스의 고전적 견해-자본주의를 위해서는 자본가 계급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capitalists before capitalism)는 견해-에 대한 강력한 반론인 동시에 ‘영미식 자본주의 모델’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유형의 자본주의 변종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다."라는 평가가 흥미를 끈다. 

그리고, 내주에 출간된다는 <자본주의와 자유>(청어람미디어, 2007)는 "20세기 후반의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1912-2006)의 자본주의 사상을 집약해놓은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경제적 자유를 이룩하기 위한 장치이자, 정치적 자유를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경쟁적 자본주의의 역할에 주목한다." 시카고학파의 대부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저자의 1962년작인데, 1980년대 레이건과 대처 행정부의 경제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면서 또한 중국의 경제체제 전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니까 관심을 가져보게 된다. 내주말이면 출간과 함께 보다 자세한 리뷰들이 나올 듯하다.

 

 

 

 

그리고 세번째 책은 더 소개할 것도 없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2006). 아직 안 읽어보신 분이라면 작년말에 나온 출간 30주년 기념판을 읽는 게 좋겠다. 최근에 나온 책 <리처드 도킨스>(을유문화사, 2007) 또한 원저는 작년에 <이기적 유전자> 출간 3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의 사고를 바꾼 과학자'가 끼친 다양한 영향과 불러일으킨 다양한 반을을 모아놓은 책이다. 휴버먼이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가장 탁월한 대중적 해설자라면 도킨스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가장 뛰어난 대중적 해설자이다.

해서, <자본론> 대신에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를 읽는 식으로 <종의 기원> 대신에 <이기적 유전자>를 읽을 수 있다. 시간이 없으신 분이라면 다이제스트판이라고 할 만한 <에덴의 강>(사이언스북스, 2005)을 읽어보셔도 좋겠다. 개인적으론 <리처드 도킨스>에 실린 글 중 마이클 루즈의 '리처드 도킨스와 진보 문제' 와 '다윈주의 좌파'란 원제를 가진 피터 싱어의 <다윈의 대답1>(이음, 2007)을 읽는 게 이번 달의 목표이다.

 

 

 

 

우리들 육신의 진화사, 즉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에 대해 공부했다면 우리 정신의 역사에 대해서도 공부해두는 게 공정하겠다. 헤겔의 <정신현상학>(한길사, 2005)는 바로 그 '정신의 역사', 혹은 '정신의 오디세이아'를 다룬다. 1807년 5월 예나에서 초판이 나온지라 올해는 출간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독영 대역본은 http://www.gwfhegel.org/PhenText/compare.html 참조). 초판을 낸 조세프 안톤 굅하르트 출판사는 이런 광고문을 냈었다고.

"이 책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 정신을 그것이 순수지나 절대정신에 이르는 단계로 파악한다.(...) 현상된 정신의 불완전성은 이러한 필연성에서 해서되고 보다 놓은 단계의 진리로 이행한다. 정신의 현상은 최종적인 진리를 우선 종교에서 발견하며 그 다음에는 전체의 결과인 학문에서 발견한다."

이러한 여정 전체를 따라가보는 일은 물론 1년 공부로도 턱없이 부족하다. 다만 이달에 할일을 그 문제적인 '서론' 정도를 읽어보는 것이다. 다행히 <정신현상학>의 새 번역본이 재작년에 출간됐고, 작년에는 테리 핀카드의 두툼한 평전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이제이북스, 2006)도 번역돼 나왔기에 여건은 좋은 편이다. 게다가 최신한 교수의 <정신현상학>(살림, 2007)과 강순전 교수의 <진리를 향한 의식의 모험: 헤겔의 정신현상학>(삼성출판사, 2006) 같은 도우미들도 나와 있으며, 인터넷에는 강유원의 헤겔 강의록도 번역과 함께 떠 있다. 거기에 장 이폴리트의 해설서 <헤겔의 정신현상학>(문예출판사, 1989)도 보탤 수 있겠다. 두루 참조하면 인류가 산출해낸 가장 어려운 책 중의 하나인 <정신현상학>의 '문턱'을 이달에는 넘어볼 수 있을까?..

07. 04. 01.

P.S. <인간문제>와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에 대한 '보유'를 달아둔다(일종의 '심화학습'이다). 사실, 노동계급(의식)의 형성이나 자본주의에 관한 책이라면 적잖은 책들이 나와 있다.

 

 

 

 

고전적인 저작은 물론 에드워드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창비, 2000)이다. 장서용으로라도 꽂아둘 만한 책이다. 이 책의 미국 버전이 마이크 데이비스의 <미국의 꿈에 갇히 사람들>(창비, 1994)이며, 한국 버전이 구해근의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창비, 2002)이다.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까치글방, 1997)은 이 주제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논문 모음집이다.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자본주의'는 키워드 중의 키워드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관련서들은 차고 넘친다. 단지 몇 권을 임의로 꼽아본다. 피에르 잘레의 <자본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 2006)은 얇은 책이다. 필자가 리오 휴버먼 등과 같이 '먼슬리 리뷰'의 필자로 활동한 경력이 있기에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와 같이 읽어봄 직하다. 그리고 백승욱 교수의 <자본주의 역사 강의>(그린비, 2006)와 작년에 작고한 경제평론가 정운영의 <자본주의 경제 산책>(웅진지식하우스, 2006)은 국내 필자의 저작이란 점에서 눈에 띈다. 물론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인식틀 자체까지 '우리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에 '현실적인' 대안이 있는가? 영국의 트로츠키주의자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책갈피, 2003)이 그러한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세계화) 대 반자본주의(반세계화)'란 구도로. 소개에 따르면 "오늘날 반세계화 운동의 내부에는 몇가지 쟁점과 상이한 입장이 존재한다. 이 책은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체계적인 답변을 제공하고 있다. 1장은 반자본주의 운동의 배경이 되는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에서 금융불안정과 과잉 생산 위기, 환경 위기가 심화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그리고 "2장은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양한 흐름을 여섯 가지로 분류한 후,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의 입장에서 앞의 다섯 가지 반자본주의 운동 전략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분석한다. 다소 도식적이긴 하지만 반자본주의를 이처럼 유형화하고, 비교.분석한 것은 캘리니코스가 처음이다." 최근에 출간된 <제국이라는 유령>(이매진, 2007)은 바로 그러한 입장에서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제국>(이학사, 2001)을 비판하는 캘리니코스의 글을 포함하고 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99687.html). 이건 덩치가 큰 주제인지라 따로 공부할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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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문학사이' 이번주는 손택수 시인이다. <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과 <목련전차>(창비, 2006), 두 권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이자 기대주이다(연배 자체가 젊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작년에 시집 <목련전차>가 나왔을 때 호의적인 평문을 여럿 보았음에도 시집을 구입해놓지 않았었는데, 올봄 목련이 다 지기 전에 다 읽어봐야겠다. 젊은 평론가 신형철의 리뷰(그는 "손택수는 문태준과 더불어 1970년대산 서정시의 젊은 본령"이라고 평한다)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3. 31) [작가와 문학사이](12)손택수-사연을 품어 마음을 열다

손택수(孫宅洙)라는 이름 안에는 풍경이 있다. 강 흐르는 곳에 집 한 채. 택수야아, 하고 누가 부르는 소리 같은 것도 얼핏 들리는 이름이다. 1970년 전남 담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고 거기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98년에 시인이 되었고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송곳니로 삶을 꽉 물고 놓지 않는, (…) 생동하는 민중서사적 시인”(이시영)이라는 평이 있었다. 저 유년의 기억이 이 시인의 8할을 만들었던가 싶다. 동세대 시인들과 그의 차이가 그 어름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시란 무엇이고 시인이란 무엇인가. 예컨대 이런 식의 대답이 그의 것이다.

눈 내리면 호랑이 발자국 모양의 장갑을 끼고 산간지대를 어슬렁거리며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물정 모르는 이들은 멸종한 호랑이의 출현에 들뜰 것이다. 이것은 썩 유쾌한 파문이 아닌가(‘호랑이 발자국’). 반대 방향으로 박혀 있는 비늘을 역린(逆鱗)이라 한다. 이것은 “제 몸을 거스르는 몸”이자 “은빛 급브레이크” 같은 것일 텐데,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낙향하는 친구로 말하자면 이 역린의 희생자쯤 되지 않겠는가(‘거꾸로 박힌 비늘 하나’). 그렇다면 시인이란 멸종한 호랑이 흉내를 내고 다니는 자일 것이고 시란 저 혼자 세태의 반대방향으로 뻗어 있는 역린 같은 것이겠다. 은빛 급브레이크 한 편 읽는다.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스윽, 제비 한 마리가,/집을 관통했다//그 하얀 아랫배,/내 낯바닥에/닿을 듯 말 듯,/한 순간에,/스쳐지나가 버렸다//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그야말로 무방비로/앞뒤로 뻥/뚫려버린 순간,//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방심(放心)’ 전문)

앞뒤 문을 다 열어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마음을 놓아버리고 드러누워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집도 사람도 모두 방심한 터라 제비가 묘기 한 번 부려보고 싶었겠다. 그 찰나의 체험에서 눈 밝고 몸 예민한 시인들은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도 보고 몸의 숨구멍들이 죄다 열리는 듯한 경이도 느낀다. 이런 시들이 있어서 메트로폴리스의 숨구멍도 가끔씩은 탁탁 열린다. ‘결심’이 아니라 ‘방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편히 내려놓아야 그 틈으로 시도 찾아들어오곤 하는 것이다.

그 방심은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여는 일이기도 하다. 열린 마음속으로 타인들의 곡절이 흘러들어온다. 그의 시들은 사연을 품고 있을 때 특히 아름다워진다. 추석날 고향에도 못 가고 화장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로 흐느껴 우는 안마사 김양 누나의 사연이 있고(‘추석달’), 목련 전차를 타고 간 동래온천에서 신혼 첫날밤을 보낸 어머니 아버지의 사연이 있고(‘목련전차’), 보험서류를 들고 찾아온 여자 후배의 입에서 문득 튀어나온 ‘자기’라는 말이 둘 다를 무안하게 한 사연도 있다(‘자기라는 말에 종신보험을 들다’). ‘작업을 걸면서’ 쓰는 시들이 아니라 ‘작업을 당하면서’ 쓰는 시들이어서 이리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좀 들어야 한다. 네 말이 내 모서리를 갉아먹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너의 사연을 먼저 수락하지 않고서는 내가 네게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서정시가 세상과 연애하는 방식이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너의 사연을 받아 안지 않으면 내 말이 둥글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일 것이다. 손택수는 문태준과 더불어 70년대산 서정시의 젊은 본령이다. 방심한 자가 뜨는 사랑의 눈 덕분에 얻은 성취라고 믿는다. 그는 작업 당하는 데 선수다.(신형철|문학평론가)

두 번째 시집 『목련전차』(창비, 2006) 펴낸 손택수 시인

컬처뉴스(06. 06. 23) "시는 일상에 탁 끼어드는 생명의 박동"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 스윽, 제비 한마리가, / 집을 관통했다 / (…) /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 그야말로 무방비로 / 앞뒤로 뻥 / 뚫려버린 순간,” - 「放心」(『목련전차』, 창비, 2006) 중에서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에서 가족의 서사를 중심으로 깊은 서정을 뿜어냈던 손택수(36) 시인이 두 번째 시집 『목련전차』(창비)를 펴냈다. 이번 두 번째 시집에서는 시인의 가족에서 시작됐던 서정의 시선이 도시문명의 속도에 뒤쳐지는 혹은 그것을 거부하는 남루한 삶들에 대한 연민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19일(월) 홍대 인근 카페에서 고봉준 문학평론가와 함께 만난 시인은 “그것은 자신을 향한 연민이기도 하다”고 털어놓는다. 2년 전 결혼과 함께 30년이란 세월을 함께 했던 ‘부산’을 등지고 일산으로 이사 온 그는 “부산이 내게 줬던 이미지가 근대라는, 도저히 내가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도시공간이었는데, 일산이라는 공간은 더 그렇죠”라고 말한다.

‘부산’이 나에게 준 두 가지

흙냄새 풀풀 나는 전남 담양 ‘봉산’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항구도시 ‘부산’에 살다가 수도권 신도시 ‘일산’으로 주거지를 옮겨온 시인. ‘농경문화적 상상력’이 서정의 근간에 깔려 있는 시인에게 이 같은 공간들이 주는 의미가 적지 않아 보인다.

“공간이란 것은 제가 구체적 실존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예요. 때문에 흙을 만져보고 흙을 먹어봤던 저로서는 대지라는 공간이 최초로 세계와 밀착감을 느낀 곳이라 할 수 있는데요. 그곳을 벗어나 부산이라는 공간에 왔을 때 순환적인 시간 속에 있다가 탁하고 끊어져버린 듯한 공포감이 들었어요.”

부산역에 다다랐을 때 산꼭대기에 다닥다닥 모여 있는 집들을 보면서 ‘뭐 이따위 도시가 다 있나’라고 생각했다는 시인은 “근대적 시간이 굉장히 폭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시인은 ‘촌놈근성’이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시인에게 ‘공간’이라는 것은 시인이 화두로 삼고 있는 근대라는 ‘시간’과 맞물려 있다. 때문에 근대적 공간으로서의 ‘부산’은 시인에게 근대라는 시간을 함께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시인에게 ‘부산’이 부정적인 공간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시인은 부산을 통해 “근대 도시공간이 놓쳐버린 신화체험과 오래된 미래, 가치적 미래를 향한 역방향으로의 진화와 더불어 시원을 향해 끝없이 퇴보하고 싶은 적극적인 퇴행의 욕망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흙에만 있었다면 미처 지나치고 말았을지도 모를 시원에 대한 지향점을 ‘부산’이 발견하게 해준 것이다. 시인이 이번 시집의 끝 시로 「미조항」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다. 부산은 시인에게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준 공간이기 때문이다.

“철길이 바다로 들어간다 // 19번 국도의 출발점, 표지판 속의 0km / 0을 갓 낳은 물새알처럼 품고 있는 어항 // 나는 길을 통해 늘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길은 나를 통해 매번 바다에 이르고자 했다 / (…)” - 「미조항」(『목련전차』, 창비, 2006) 중에서

달빛이 화장지를 들고 제비에게 쉬러오다

90년대 이후 전통적인 서정의 문법이 변하기 시작했다. 신서정 또는 서정의 진화라는 이름 하에 탄생한 이른바 미래파 시인들의 낯선 화법과 종잡을 수 없는 파격이 그것인데. 이러한 동시대 문학의 변화 속에서 재래적인 시 문법을 고집하며 일각의 흐름을 거스르는 지점에 손 시인이 있다.

“제 시의 근간을 ‘농경문화적 상상력’이라고 흔히 말하는데요. 그것이 정말 퇴행적이고 복고적인 것이 될 수 있지만 그런 형식을 통해서나마 지금의 질서, 지금의 속도에 대한 반성의 기제가 됐으면 하는 소박한 믿음이 저 나름대로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시집은 이러한 시인의 소박한 마음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결코 소박하지만은 않다. 시인은 삶의 근간인 ‘집’과 ‘땅’을 통해 사람과 우주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는 단칸집이다 / 시름시름 기울어가던 처마 끝이다 // 진흙둥지 되바르며 보수공사에 여념이 없는 제비 한쌍 / 신접살림을 차렸다 (…) 이 허름한 적산가옥에 세를 들러 온 두 내외 / 덕분에 가난한 나도 / 이제는 어엿한 집주인이 된 셈인가 / (…) / 달빛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와서 하룻밤 묶었다 간 뒤다” - 「제비에게 세를 주다」(『목련전차』, 창비, 2006) 중에서
 
제비가 세를 든 ‘집’은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제비 덕에 집주인이 된 ‘화자’와 광활한 우주의 한 지점에 있는 ‘달빛’을 연결하는 하나의 통로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열림은 모든 세계를 향해 “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 / 환하게 뚫려”(「화엄일박」)있는 ‘구멍’과도 연결된다.

오늘이 그날 같고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신의 생명감을 잃고 살기 쉬운데, 그 일상의 흐름의 중간에 탁 끼어들어서 순간적으로 생명의 박동음에 가 닿게 하는 시적 순간이 있잖아요. 아마도 저에게는 신화적 관심이 바로 그것의 기제가 되는 것 같은데, 그것을 집과 몸과 우주와 연결시켜 얘기한 것 같아요.”

 

 

 

 

 

 

 

 

 

 

잘 쓴 시가 아닌 나의 시 쓰고 싶어

시인에게 향후 계획을 물었더니 굉장한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저도 몰라요”라는 말이 되돌아온다. “시 한편을 쓸 때도 이 시가 어떻게 끝맺음을 할지 모르거든요. 그러니 제 시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더더욱 모를 일이죠”라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답변이 내심 미안했는지 “다만 모험을 향해, 황무지를 향해 유배를 내리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하얀 종이 앞에 서면 늘 막막하거든요. 그 막막함이 나를 깨어있게 하고 살아있게 하는 것 같아요”라고 덧붙인다. 

시인에게 문학은 “스스로를 버티게 하는 힘”이라고 했다. 그것은 일상적인 삶의 방편으로서의 힘이 아니라 그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근거로서의 힘이다. 때문에 시인은 “시를 잘 쓰고자 하는 욕망은 버리고 나의 시를 쓰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마음을 다잡는다.(위지혜 기자)

07. 0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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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31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이 발자국은 정말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 목련 전차도 읽는다 읽는다 해놓고 못 읽고 있네요 ㅎㅎ 가장 좋은 것은 아껴두는 심정이랄까요. 아직 읽을 좋은 시집이 남았다는 ^^;

나비80 2007-04-01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손택수는 제가 요즘 가장 아끼는 시인입니다. 이번에도 시집 하나 구매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기인 님! 좋은 건 빨리빨리 드셔야지요.^^
 

강의준비를 하는 틈에 잠시 짬을 내어 들어가본 담론비평 사이트에서 리뷰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문학평론가이자 계간 황해문화 주간이기도 한 김명인의 한국근현대 문학사에 대한 '시론적 소묘'를 요약정리하고 있는 리뷰이다. '가족로망스'라는 구도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닌데, 국문학계에서는 아직 이러한 시도가 없었던 모양이다. 완결된 '문학사'가 기대된다.

담비(07. 03. 29) 평론가 김명인의 야심찬 '문학사 기획'

시인 김수영을 통해서 근대를 향한 성찰적 개인의 위대한 모험을, 평론가 조연현을 통해서 근대에 투항하는 복잡한 현대인의 내면을 짚어보았던 문학평론가 김명인의 문학사 쓰기가 새로운 국면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것은 한국 근대문학 1백년을 '가족'이라는 주제로 꿰뚫는 자못 거시적인 작업이어서 주목을 끈다.

김명인은 '민족문학사연구' 최근호(32호)에 발표한 '한국 근현대소설과 가족로망스'에서 자신의 이러한 과업의 "시론적 소묘"를 펼쳐보였다. 그 아이디어의 시발은 바로 프로이트다. 프로이트가 1908년에 쓴 '신경증환자의 가족 로망스'는 어린아이들이 아버지에 대한 모방과 동일시가 충족되지 않을때 상상의 아버지를 갈망하게 되는 신경증을 분석했다. 로버트 단턴(*린 헌트)은 이 가족로망스 이론을 프랑스혁명에 적용했다.

이런 견해를 근대소설에 적용하면 근대소설의 문제적 개인들은 신이 사라진 시대(=아버지가 부정된 시대)에 새로운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자발적 고아들이다. 특히 성장소설이 그렇다. 내발적 경로를 통해 주체적으로 자본주의적 근대를 이룬 서구사회의 경우, 봉건체제의 부정과 자본주의 체제의 성립이 자기사회 내의 논리에 따라 계기적으로 일어남으로 해서 비교적 낡은 아버지 부정과 새 아버지 긍정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하지만 식민지라는 경로를 통해 외재적으로 자본주의적 근대의 길로 들어선 비서구 지역에서는 이것이 자연스러울 리가 없다.

낡은 아버지는 부정되어야 할 존재이면서 동시에 지켜야할 존재이며, 새로운 아버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동시에 부정해야 마땅할 존재이다. 가족로망스는 시작부터 길을 잃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버려진 존재인 식민지 고아들은 낡은 아버지를 부정할 겨를도 없이 그를 부양해야 하며, 새로운 아버지를 찾을 겨를도 없이 가짜 새 아버지와 대결해야 한다. 그들은 문제적 개인이지만, 행로가 단순하지 않고, 가족로망스는 늘 지연되고 그 자리엔 다른 악몽이 시도 때도 없이 개입해 들어온다. '피식민주체의 서사시'가 시작된 것이다. 김명인은 이런 문제의식 아래 한국 근현대소설을 개관한다.

제1기(19세기말~1920년대 초반)는 봉건체제의 붕괴와 식민체제의 형성이 동시적으로 진행된 시기이자, 넓은 의미의 '계몽주의 시대'와 엇비슷이 일치하는 시기로서 가족로망스에서 이른바 '고아의식'과 '업둥이의식'이 발생하는 시기이다.

제2기(1920년대 중반~1945년)는 '식민지 근대'가 본격적으로 작동하는 시기로서 부정된 아버지에 대한 복합심리와 새로운 가족에 대한 동경, 대안으로서의 형제애 등이 복잡하게 착종하는 시기이다.

제3기(해방기~1950년대)는 분단체제 형성기다. 새로운 아버지에 대한 동경이 다시 한번 좌절하고 1기의 고아 혹은 업둥이들은 아버지로서 다시 부정되거나 실종되고 2기의 소년들은 재차 더 극심한 시련 속으로 내던져진다.

제4기(1960년대~1980년대)는 한국 자본주의의 본격적 발전기이자 권위주의적 군부독재기로서 가짜 아버지에 의한 전체주의적 가족국가와 진짜 아버지의 복원열망이 충동하는 시기이다.

제5기(1990년대~현재)는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시기로서 제4기의 새로운 세대가 다시 아버지가 되고 가족로망스 자체가 붕괴되어가는 시기이다.

김명인은 이런 시기구분 하에 이광수, 염상섭, 이상, 김남천, 채만식, 최인훈, 김원일, 조세희, 방현석, 신경숙, 배수아 등의 작품이 이런 특징들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지 간단간단히 짚어나간다. 이광수의 '무정'은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만든 무정한 세계에 대한 한탄과,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가짜 선구자의 곤혹스러움이 서로 용해되지 못한채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양립해있는 형국을 보여준다.(제1기)

제2기에는 카프 계열 작가들이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평등한 가족체계를 꿈꾸며 '고향', '황혼' 등의 작업을 보여주는가 하면, 그 반대편의 국민문학파가 그에 반발하며 옛날 아버지를 불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다소 단순한 반응이었고 보다 복잡한 심리는 이상과 김남천, 채만식에게서 나타난다는 게 김명인의 판단이다. 이상은 첨단의 모더니티를 향해 냅다 달렸지만, 그에게 더 절실했던 것은 어떠한 봉건적 관계의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로우면서도 그의 애정결핍을 충족시켜 줄 사적인 가족 형태였으며, 그것은 곧 성적, 정서적 동반자로서의 여성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김명인은 남매애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상의 여성집착은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차라리 손위 누이를 감싸 안는 김남천이나, 손아래 누이를 지키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소년 주체가 제시되는 채만식을 주목한다.

하지만 제3기에서 김남천과 채만식이 남겨놓은 씩씩한 소년들은 타락하지 않은 시원의 아버지를 만났는가. 아니면 스스로 좋은 아버지가 됐는가. 최인훈의 '광장'에서 이명준이라는 청년은 남북 양쪽의 아버지들이 가짜라는 눈치를 챘지만, 새로운 아버지에 대한 열망보다는 가짜 아버지들에 대한 절망이 더 커서 전도된 남매애로서의 여성에 대한 성적 집착의 길을 걷다가 결국 이 땅에서 탈주했다.

제4기에 들어서면 가짜 아버지에 대한 부정과 그가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가족국가에 대한 거부가 두 방향으로 본격화된다. 하나는 '분단소설'들로서 가족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지워진 아버지를 되살리려는 노력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소설에서 보여지는 형제애에 기초한 가족의 형성욕망이다. 김원일이 '노을', '어둠의 혼'에서 분단동이들은 자기 손으로 아버지를 부정하기도 전에, 더 큰 외부의 힘이 아버지를 부정해버린 제1기의 고아들과 비슷한 형국인데, 이들에게 미래의 가족로망스는 곧 과거의 아버지를 되살려내는 것이라는 역설적 상황이 주어진다. 발전의 서사와 대비하여 '복원의 서사'라 부를 만한 이런 경향은 비극적 식민지를 겪은 제3세계 문학의 공통된 경향이라고 김명인은 말한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자본주의체제의 형성과정에서 눌려서 난장이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위한 복수의 서사다. 이 작품은 80년대의 급진화하는 가족로망스를 예비하는 성격을 가지면서도, 봉건시대로 거슬로 올라가는 노예적 가족사의 사슬을 끊고자 하는 비원도 담고 있다. 방현석의 '내일을 여는 집'은 노동계급운동의 미증유의 활성화라는 분위기와 맞물려 본격적인 사회주의적 형제애에 기초한 가족로망스를 구가하였으나, 희망태에 불과했고, 지금 돌아보면 어딘가 허망하고 고립된, 1980년대적으로 특수화된 것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정리한다.

90년대에 들어오면 가족로망스는 현격히 쇠퇴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집단무의식의 문제로는 포착하기가 힘들게 되어 버렸다. 부-모-자녀로 이루어지던 최소단위도 유지하기가 힘들게 돼 구성원들은 단자로 내몰렸다. 불륜소설이 붐을 이뤘고, 신경숙, 조경란, 공선옥 등이 예외적으로 가족이라는 굴레로부터의 이탈과 가족을 추수려 세우려는 노력을 보여 예외적 현상으로 남았다.

김명인은 이상의 가족로망스에서 그 주체가 '아버지-아들'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식민지의 이 기구한 가족로망스 속에서조차 여전히 타자이자 또다른 식민지였던 여성의 역사를 겹쳐놓는다. 나혜석, 강경애, 박완서, 신경숙, 배수아의 소설로 계보를 이어가는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여성의 삶'은 때론 비극적이고 적나라하고 지그재그적 행보를 보여준다. 배수아의 소설집 '바람인형'에 오면 여성으로서 성장한다는 것은 곧 그 여성-인간을 살해하는 것이라는 극단적인 명제를 입증하는데 바쳐진다.

김명인은 이러한 여성 주체의 근대적, 혹은 탈근대적 해방이라는 주제야말로 주목할한만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자체가 세계사적 보편성과 당대적 폭발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근대/식민지 근대가 낳은 사회체제, 문화, 이데올로기 전반의 문제들을 가로지르고 재구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근본적(radical) 거대주제라는 점에서 가족로망스의 악순환과 근대적 삶에 편만한 식민성을 동시에 넘어설 수 있는 잠재력을 내장하고 있다고 말한다.(리뷰팀)

07. 03. 29.

P.S. 가장 최근에 낸 김명인의 평론집은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6)이다. 책에 관해서는 프레시안의 관련기사가 유익하다(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6092917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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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04-01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버트 단턴은 이 가족로망스 이론을 프랑스혁명에 적용했다<---린 헌트 아닌가요?

로쟈 2007-04-01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필자나 리뷰팀의 착오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