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연속이다. '소련 공산당 정치가'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데, 역대 공산당 서기장들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흐루시초프부터 옐친까지인데, 옐친만이 '서기장'이란 타이틀에서 열외이겠다. 대신에 그는 대통령이었다... 

한겨레(07. 05. 14)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③-1 소련 공산당 정치가

» 니키타 흐루시초프. <북폴리오> 제공
» 니키타 흐루시초프. <북폴리오> 제공
니키타 흐루시초프 =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1963년 다차 정원에 앉아 있고 그 옆으로 정치국원들이 보인다. 감성적이고 간혹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 흐루시초프는 1956년 스탈린 체제에 맹공을 가했다. 수백만 명이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나거나 사후에 명예를 회복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소련의 신념체계에 의심을 품지 않았으며, 1956년 봉기에서 공산주의 체제를 제거하려 한 헝가리인들을 야만적으로 진압했다. 1963년 흐루시초프를 대신하게 될 레오니드 브레주네프가 떨어져 걷고 있는 모습이 사진에 보인다. 흐루시초프는 불같이 화를 낼 때도 있었지만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을 지녔고, 예전의 당 지도자들에게는 없었던 대중에 영합하는 재간도 있었다.

» 니키타 흐루시초프. <북폴리오> 제공

» 브레주네프. 사진/V. 무사옐랸. <북폴리오> 제공
브레주네프 = 다차에서 손녀와 함께 있는 가정적인 인물 브레주네프. 농촌과 숲 속에 있는 이런 집들은 노멘클라투라의 큰 특권 중 하나였으며 서열이 높을수록 크기가 더 커졌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외곽에 수수한 목조 다차를 가지고 있었다. 브레주네프는 다섯 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크림에 있는 차르의 리비디야 궁처럼 그루지야의 흑해 연안에 있었다.

» 미하일 고르바초프. 사진/J. 토레가노. <북폴리오> 제공
미하일 고르바초프 = 붉은광장의 레닌 영묘 위에 서 있다. 야심 많고 카리스마가 뛰어났던 고르바초프는 여전히 공산주의자였고 당의 죽음을 주재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관용에서 분출된 힘에 희생당한 마지막 소련 지도자가 되었다.

» 보리스 옐친. 사진/G. 핀하소프. <북폴리오> 제공

보리스 옐친 = 대통령인 그의 권위는 건강 악화와 급작스러운 수상 경질, 불규칙적인 공식 석상 등장 등으로 서서히 무너졌다. 거의 종말에 가까운 경제 몰락, 국내 분리주의자들, 해외 영향력 붕괴 같은, 그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끔찍하였고 비정상적인 대응은 문제들을 더욱 악화시켰다.(<북폴리오> 제공 )

07. 0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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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학교 가는 길에  이번주 필름2.O과 오늘자 경향신문을 사서 읽었는데, 기획연재물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말고 눈길을 끈 기사는 '왜 책을 읽는가'였다. 왠지 답을 달고 싶어하는 것이 아마도 지난주 '독서문답'의 '후유증'이 아닌가 싶다.  

경향신문(07. 05. 14) 왜 책을 읽는가

“50여년 전 이야기이다. 어떤 박문(博文)·다식(多識)으로 자부하는 이가 있었다. 그는 고금의 어떤 저적(著籍)이고 그 내용을 모르는 것이 없다는 듯이 설명했다. 홍명희 벽초옹은 그를 평하여 ‘아무개는 남의 서문만 읽어 행세하는 친구였지’ 하곤 했다. 이는 남의 ‘서(序)’만을 읽고 그 원전을 독파한 듯이 행세하는 얕은 지식의 소유자들에게 일퇴를 내린 것이다.”


7년전 타계한 연민 이가원 선생이 ‘한국의 서발(序跋)’ 머리말에 쓴 글이다. 물론 책의 서문만 읽고 다 읽은 듯이 행세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다. 선생은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완벽한 지식을 획득하려면 ‘서(序)’의 번역이 있기 전에 그 원문이 있고, 원문이 있기 전에 그 원전(原典)이 없지 않음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라며 문집의 서·발문을 번역한 것은 책의 원문 읽기에 나아가기를 권면하기 위한 것임을 밝혔다.



오래전에 사둔 책을 다시 펼친 것은 ‘책읽기’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서다. 사실 요즘만큼 책읽기가 운위되는 때도 없는 듯하다. 언론사·시민단체 등이 잇따라 캠페인을 벌이고, 그 때문인지 기업체·지자체·관공서에서 독서 열풍이 일고 있다고 한다. 좋은 일이다. ‘개권유익(開卷有益)’. ‘책은 펼치기만 해도 이익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독서 캠페인으로 책읽는 풍토가 확산되고, 나아가 위기에 처한 활자문화까지 일으켜 세운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이쯤에서 물어보자. “왜 읽느냐?”고. ‘책은 마음의 양식이니까’ ‘삶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서’…. 많은 대답이 돌아온다.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모두 틀린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어디에서 많이 듣던 말들이 아닌가.

그렇다. 책읽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신의 것이 아니듯, 지금의 열기는 책읽는 사람 자신이 아닌 외부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읽는 사람의 대부분은 스스로가 필요성을 느끼고, 손수 책을 고르며, 책읽기의 방법을 터득해 가는 게 아니다. 혹시 누군가가 꾸며준 서재에서, 남이 공짜로 보내준 책을 생각없이 읽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너는 얼마전 한 인사가 “기사를 정독하다 보면 한 권을 다 읽은 듯한 효과를 얻을 때도 있다”고 말한 인터뷰를 접하고 의아해 했다. 그 인사는 신문 서평기사를 읽으면 도움이 된다는 뜻에서 한 말이겠지만, 앞서 벽초가 비판했던 ‘서문’만을 읽는다는 ‘아무개’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서문이 고전의 원문을 다 말해주지 않은 것처럼, 어떤 서평기사도 책 전체의 내용과 아우라를 전해줄 수는 없다. 서평은 서평일 뿐, 중요한 것은 책과 씨름하는 일이다.

작금의 독서 캠페인의 열기를 받아들인다고 할 때,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왜 읽는지’에 대한 철학을 갖는 일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 통계에 따르면, 2005년 한해 출협에 납본된 신간은 4만3586종이었다. 하루 평균 120종의 새 책이 쏟아진다는 얘기다.

지천으로 깔려있는 게 책이지만 ‘책읽기’의 철학을 다룬 서적은 찾기 힘들다. 한 독문학자로부터 철학자 볼프강 이저의 ‘읽기 행위’(Der Akt des Lesen)가 책읽기를 철학적으로 논한 책이라고 들었지만,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독서행위를 여러 관점에서 분석한 모티마 아들러의 ‘자유인을 위한 책읽기’(How to Read a Book)는 20년 전에 나온 뒤 절판됐다.



책읽기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저술은 주희의 ‘독서법’이다. 전 140권의 ‘주자어류’ 가운데 제10권·11권으로 들어간 ‘독서법’은 책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 등의 공부와 독서의 철학을 담고 있다. 이이와 이황, 박지원, 이덕무, 정약용 등 조선조 학자들이 설파한 독서론의 뿌리가 바로 주희의 ‘독서법’이다.

주자에게 독서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일도, 시간 때우기 수단도 아니다. 단순히 ‘글을 보는(看文字)’ 것 이상이다. 자기를 돌아보고 세상을 바로 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맥상의 틈새를 읽어야 한다’. 그래서 숙독이 강조된다. 거듭 깊이 생각하며 읽으라는 주문이다. 주자는 현실적 문제의식 없이 행해지는 독서에는 비판적이었다. 그가 독서론을 ‘독서는 배우는 사람의 두번째 일이다(讀書乃學者第二事)’라는 말로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다. 주자에게 독서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답게 사는 일, 그리고 현실을 바로 아는 일이었다. 독서는 그것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조운찬 문화1부장)

07. 05. 14.

P.S.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그리고 현실을 바로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주자의 독서론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겠다. 다만 그런 경우에도 왜 굳이 독서인가, 란 의문은 남는다. 더불어, 인간에겐 얼마 만큼의 책이 필요한가, 란 톨스토이적인 물음도. 나의 독서론이라 할 만한 것은 예전에 '즐거운 도망, 즐거운 저항'이란 페이퍼로 정리해놓은 바 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1216428&paperId=880102). 제목은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에서 따온 것인데, 그 도망과 저항이 결국엔 같은 것이라고,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으로부터의 도망이고, 무엇에 대한 저항인가는 그때그때 다르다손 치더라도 말이다.

한편 기사에서 "한 독문학자로부터 철학자 볼프강 이저의 ‘읽기 행위’(Der Akt des Lesen)가 책읽기를 철학적으로 논한 책이라고 들었지만,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고 한 건 오류이다. <독서행위>(신원문화사, 1993)라고 번역돼 나온 게 이미 십몇 년 전이다(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독서의 현상학'에 해당하는 책이다. 나는 국역본과 영역본을 갖고 있다). 국립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을 1분만 검색해봐도 아는 일인데 너무 성급한 단언이었다. 나처럼 "책의 서문만 읽고 다 읽은 듯이 행세하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요긴할 때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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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4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07-05-14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영국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미끼'는 슬라보예 지젝이 던져놓은 것이다. 마침 <맨스필드 파크>의 새 번역본도 출간되었기에 지젝이 그리고 있는 '오스틴 맵'에 대해서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읽을 대목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1)의 115-7쪽이다(인용문의 몇몇 표기와 용어는 수정했다).

 

 

 

 

그가 붙인 절제목은 'Hegel with Austen'인데, 언젠가도 적었지만 국역본은 그걸 '오스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옮기면서,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Austen, not Austin."이라는 첫문장을 "오스(Austen)이 아니라 오스(Austin)임에 주의하자."라고 부주의하게 오역해놓았다('Austen'은 여성작가이고 'Austin'은 남성 철학자이다. 그래서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할 때의 오스틴이 '철학자 존 오스틴'이 아니라 '작가 제인 오스틴'이라는 걸 지젝이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강조가 무색하게 됐지만). 'Austen'이란 이름을 나는 국역본과는 달리 관행대로 '오스틴'이라고 읽겠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문학에서 헤겔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는 아마도 제인 오스틴일 것이다." 이만하면 그럴 듯한 '미끼' 아닌가?

 

 

 

 

지젝 왈 "<오만과 편견>은 <정신현상학>에, <맨스필드 파크>는 <논리학>에, <엠마>는 <백과사전>에 필적한다." 여기서 <논리학>은 <대논리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석진 역, <대논리학1-3>(지학사, 1983)이 출간됐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연구서들만 덩그러니 몇 권 나와 있는데, 그다지 보기좋은 풍경은 아니다). <백과사전>은 <철학강요>(을유문화사, 1976/1998)로 번역된 책인데 아직 시중에 돌아다닌다. 두 책의 서론만을 옮긴 책이 <논리학 서론-철학백과 서론>(책세상, 2002)이다.  

먼저 지젝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서 <오만과 편견>에 대한 해제를 잠시 읽어둔다(지젝은 <오만과 편견>만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서지문 교수(고려대 영문학)의 작품해설이다(원 기사의 편집자가 남자 주인공 '다아씨(Darcy)'를 '다아 씨'라고 표기해놓은 것도 코미디라 할 만하다. 인용문에선 수정했다. 국역본 지젝에서 이 커플은 '달시-엘리자벳'으로 표기되고 있다).

“당신의 청혼 방법이 나의 대답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하신다면 오햅니다. 그저 좀 더 신사적인 태도로 청혼했더라면 거절하면서 느꼈을 나의 미안함을 면제해 주었을 뿐이지요.” 소설 ‘오만과 편견’의 가난한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대지주인 다아씨의 청혼을 보기 좋게 거절하며 하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양가의 규수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오빠나 남동생의 집에 군식구로 얹혀살거나 남의 집에서 지독한 저임금에 무수한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가정교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기댈 남자 형제도 없고 기대할 유산도 전혀 없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같은 여성은 그러니까 조건 좋은 신랑감을 구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러나 예리한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이고 생기발랄한 엘리자베스는 그런 세속적 압력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그 사회의 비굴하고 잘난 체하는 속물적인 군상들을 취미삼아 관찰하는 엘리자베스가 오만하고 비사교적인 대지주 다아씨에게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다아씨도 처음에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시선을 끌 만한 미모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지적인 예리함과 재기에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된다. 그리해서 그녀의 주책망나니 어머니, 책임감이 부족한 아버지 등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누르고 내키지 않는 청혼을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자기 같은 ‘일등 신랑감’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다아씨는 호된 질책과 함께 여지없이 ‘퇴짜’를 맞는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고 곧이어 분개하지만 다아씨는 좋은 ‘조건’만으로는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한 자기성찰을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역시 자기가 다아씨에게 가졌던 반감이 많은 부분 편견에서 왔음을 깨닫고, 자신의 판단력 과신을 깊이 반성하며 다아 씨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게 된다. 다아씨와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의 달라진 모습을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몇 건의 사건이 있은 후 두 번째 청혼에서 다아씨는 성공한다. 이 과정을 제인 오스틴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서 이 책은 한번 손에 들면 내려놓을 수 없다.

 

 

 

 

오스틴의 소설들은 너무너무 재미있고, 모든 인물이 그의 자격에 꼭 합당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만 오스틴의 진수는 그의 엄격한 도덕관,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문명사회의 유지, 발전과 가치 있고 품위 있는 삶에 대한 비전에 있다. 영국 남부 농경사회의 조그만 읍을 무대로 조용한 일상사와 함께 전개되는 이 소설은 오로지 당돌하면서 재기발랄한 여주인공과 카리스마 넘치는 남주인공, 그리고 군더더기 한마디 없고 허술한 구절도 전혀 없는 완벽한 구성으로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오스틴은 이성과 분별력과 절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영국의 전통적 사회구조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으나 그것은 상류층이 경직되고 배타적이지 않고 겸허함과 열린 마음을 지님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사람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서 성장하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찾고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동아일보, 05. 08. 19)

다시 지젝: "따라서 <오만과 편견>에서 오인으로부터 유래하는 진리의 변증법에 관한 완벽한 시례를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엘리자벳과 달시는 각자 상이한 사회적 계급에(남자는 부유한 귀족 가문에, 여자는 빈곤한 중산층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오만 때문에 그의 사랑은 엘리자벳에게 가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엘리자벳에게 청혼을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그녀가 속한 세상에 대한 경멸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의 프로포즈를 전례 없는 영광으로 받아들이길 기대한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녀의 편견 때문에 그를 거만하고 허영심에 가득 차서 우쭐대는 인물로 바라본다. 그의 오만한 프로포즈는 그녀에게 모멸감을 주고 그녀는 그를 거절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인 실패, 이 상호적인 오인은 의사소통의 이중적인 운동구조를 갖고 있다. 각각의 주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되돌려 받는다. 엘리자벳은 달시에게 자신이 교양 있고 재치로 가득 찬 숙녀로 비춰지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로부터 '당신은 단지 그릇된 기교들로 가득 찬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한편 달시는 그녀에게 자신이 자긍심 있는 신사로 보이길 원했다. 그런 그는 그녀로부터 '당신의 자긍심은 경멸스러운 거만함에 불과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들의 관계가 결렬된 후 그들은 각자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결혼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까지는 그냥 줄거리라고 해야겠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면 엘리자벳이 받은 메시지에서 '그릇된 기교들'은 'false finesse'의 번역이고 'finess'는 '연애의 기교' 혹은 술책을 가리킨다. 그리고,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a poor empty-minded creature)'은 너무 적나라한 직역인데, '가련한데다 머리는 텅빈 아가씨'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이러한 줄거리를 가진 오스틴의 소설이 헤겔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이 이야기가 지닌 이론적인 흥미는 첫번째 만남의 실패, 타인의 실재적인 특성에 대한 이중적인 오인이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으로서 작용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진리에 곧바로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만약 처음부터 그들이 서로의 실제 성격을 알았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곧장 결혼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 텐데.' 미래의 연인들의 첫 만남이 성공하게 된다는, 즉 엘리자벳이 달시의 첫 구애를 받아들인다는 희극적인 전제를 세워보자.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은 진정한 사랑에 빠지는 대신 흔하디 흔한 통속적인 연인이 될 것이다. 오만하고 부유한 남자와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로서 말이다."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a positive condition of the final outcome)'은 '최종결과의 긍정적인 조건'으로 읽는 게 더 낫겠다.

때문에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오인을 통한 고통스런 우회로를 피해가길 원한다면 우리는 진리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타인의 본성에 도달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만 달시는 그릇된 오만으로부터 벗어나고, 엘리자벳은 자신의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는 대문자(Truth)로 강조돼 있고, '통해서만'은 'working-through'의 번역이다.

"이 두 계기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 속에서 자신의 편견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고, 달시는 엘리자벳의 허영 속에서 자신의 그릇된 오만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달시의 오만은 엘리자벳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단순한 실증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의 본성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녀의 편견의 시점으로부터만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스런 시점 속에서만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가 될 뿐이다."

'이 두 계기들(These two movements)'는 '이 두 운동'의 착오이다. 어쨌든 이 두 운동은 상호 교차적이다. 달시의 오만과 엘리자벳의 편견은 서로의 시점에서 봐줄 때만 나타나는 무엇이다. 즉, 달시가 오만하기에 엘리자벳이 편견을 가진 여자로 보이는 것이고, 엘리자벳이 편견을 갖고 있기에 달시가 오만하게 보이는 것이다. "헤겔의 용어로 말하자면, 타인의 결점이라고 인식된 것 속에서 각자는 (그것을 모른 채) 자신의 주체적인 위치의 허위성을 인식한다. 타인의 결점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왜곡을 객관화한 것이니까 말이다." 고로 타인의 결점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허위성(왜곡) 또한 인지할 수 없게 되는 것(고로 진리는 오인으로부터 온다!). 이런 게 변증법 아닌가?..

07.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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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5-14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요것 재밌습니다. 헤겔과 오스틴이라...요즘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를 영문판과 비교해서 읽고있는데 어찌 영 진도가 안나가는군요..허접한 나의 영어실력때문에..ㅜ.ㅜ

로쟈 2007-05-14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살을 부리시는 게 재밌습니다.^^ 독어가 더 편하신 건가요?..

yoonta 2007-05-15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어라고 별수있겠습니까..그래도 영어가 쪼금 낫습니다.-_- 요즘 헤겔 정신현상학도 한번 독해해보려고 워밍업중인데요.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정신현상학에서의 변증법적 과정은 특정 인식의 한계성(엘리자벳)을 특정대상(달시)의 대상화과정을 통해서 드러내고 또 그럼으로써 보다 상승된 인식으로 '지양'(엘리자벳과 달시의 결혼 혹은 양자의 오인의 해소)되는 방식으로 즉 변증법적으로 서술되어 있더군요. 이런 주체의 한계 내지는 공백을 드러내는 헤겔 철학의 변증법적 특성때문에 지젝이 헤겔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지젝은 그렇다면 정신현상학에서의 결론인 헤겔의 절대지 혹은 절대정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요? 맑스는 헤겔철학의 이러한 결론때문에 그것은 "거꾸로 서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젝도 맑스처럼 이런 관점으로서만 헤겔철학을 승인하는 것인가요?

로쟈 2007-05-15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고난도의 질문이십니다.^^; 지젝의 책 어딘가를 참조하면 자세히 나올 거 같은데, 제가 아는 지젝은 헤겔을 에누리 없이 승인하고 수용합니다. 단, 기존의 독해와는 다른 방식으로. 맑스의 헤겔 독해도 불충분하다고 보는 걸로 저는 이해합니다(저도 공부해야 합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같은 경우 제3부를 참조하시면 시사점을 얻으실 수 있을 거 같구요, 물론 <그들은 자기가...>가 보다 주된 '교재'가 될 거 같습니다...
 

마이클 부라보이라는 미국의 거물급 사회학자가 방한했다고 한다. '공공사회학'을 주창한 학자라는데, 요즘 사회학 책들을 별로 안 읽은 탓인지 '공공사회학'이란 말 자체가 생소하다(저자는 <생산의 정치>(박종철출판사, 1999)로 이미 오래전에 소개됐다). 설명에는 '전문(professional) 사회학’과 대비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강단사회학의 두 조류가 되는 것인가?(뒤집어 생각해보면, 공공사회학은 가장 실제적/실천적인 학문이어야 할 '사회학'이 그간에 얼마나 폐쇄적으로 전문화되었던가에 대한 반증이자 반성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공공사회학보다는 그가 러시아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자본주의 이행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데 두어진다. 그 방면의 책들이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세계의 책'으로 분류해놓는다.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건 차베스에 대한 평가이다. 말발만 앞세운 사회학자들과는 좀 다르다는 인상을 준다.

한겨레(07. 05. 12) 사회학자여, 강단을 넘어 대중과 만나라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 사회학과 교수인 마이클 부라보이는 ‘공공사회학(public sociology)의 전도사’로 불린다.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 사회학자인 그는 사회학이 사회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믿는다. 사회학이 지향하는 가치가 강단을 넘어 대중과 직접 만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학자는 강단에서 학문적 엄밀성만 추구할 게 아니라 그들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직접 대중과 만나고 토론해야 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우리 학계에 널리 퍼졌던 실천적 경향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 사회학회 회장(2003~2004년) 시절 공공사회학을 주제로 미국사회학회 연례회의를 주재했으며, 지금도 각국을 돌며 공공사회학의 이념 전파에 주력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권 붕괴 이전 헝가리 철강 공장에 직접 취업해 노동과정을 연구하는 등 현장 체험에 바탕을 둔 실증적인 노동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지난 3일 중앙대·연세대 두뇌한국(BK)21 사업단 초청으로 한국을 첫 방문한 부라보이 교수를 4일 연세대 사회학과 원재연 교수 연구실에서 만났다.

-사회학자들이 왜 대중과 직접 만나야 하나.

=시민들이 그들의 존립에 물질적 지원을 하고 있다.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학자들이 봉급을 받고 있다. 학자들은 시민사회에 뭔가를 돌려줘야 한다. 사회를 위한 의무다. 사회 역시 사회학자들의 가치에 대한 통찰을 필요로 한다. 자본과 국가로부터 시민사회를 지켜내는 데 학자들이 적극 기여해야 한다.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공공사회학의 가치는 무엇인가.

=공공사회학은 사회 문제에 직접 관여해 이슈들을 토론하는 것을 강조한다. 지향해야 하는 가치에 대한 단일한 정의는 없다. 다양한 정의가 가능할 것이다. 공공사회학계에서는 사회정의와 평등의 가치가 점차 중요성을 얻고 있다. 내게는 ‘사회정의’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 가치를 어떻게 대중들에게 전달할 것인지 궁금하다.

=제도권 언론들이 보수적이라고 하지만 모두 단일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같은 미디어 안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가치가 혼재한다. 예컨대 <뉴욕타임스>나 <월스트리트저널>과 같은 유력지에서도 진보적 칼럼을 찾을 수 있다. 미국에선 ‘공공 라디오’들이 훨씬 개방적이다. 사회학계 주최의 여러 행사에 언론인들을 초청해 교육시키는 데도 비중을 두고 있다. 중간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대중과 직접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노조와 각종 시민·지역 단체 회원들과 수시로 만나 토론한다.

-한국 학자들은 1980년대 이후 강단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영향이 크다. 미국의 사회학은 과도한 전문주의 경향을 띠고 있다. 아울러 시민사회의 조직화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학문적 지배권을 가진 미국의 이런 경향을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미국 중심의 국제학술지 논문 게재가 갈수록 강단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도 주요한 이유다.

-일각에선 세계화가 정점에 도달했다는 지적도 내놓고 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어디를 가도 세계화 파고가 높아지고 있는 것을 본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전기·수도 등 공공서비스가 민영화되고 있고, 중국과 인도 농민들은 각종 토목 공사 때문에 땅에서 쫓겨나고 있다. 아직 정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시장화는 그 반대세력을 키우고 있다.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 브라질 우루과이 등 남미에서 이런 기류가 확연하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세계화에 반대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대안 모델이 될 수 있나.

=그가 세계에서 미국 지배권에 도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석유다. 그는 너무나 많은 ‘오일머니’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이유가 없다.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타협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대토지 소유자로부터 땅을 사버린다. 그들을 추방하지 않는다. 금융과 은행 제도와도 타협하고 있다. 너무 돈이 많아 자본주의와 타협하는 게 가능하다. 나는 그를 ‘민족적 대중주의자(national populist)’로 본다. 그가 도시 변두리 주민들의 빈곤을 개선하기 위해 일종의 재분배를 한 것은 인정한다.

-세계화 흐름 이후 양극화 경향이 거세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최근의 사회운동은 일종의 수세적인 방어 운동이다. 공공영역의 민영화가 계속 확장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 역시 마찬가지다. 당장의 미래에 대해선 비관적이다. 하지만 남미를 비롯해 세계화에 저항하는 많은 대안 찾기가 시도되고 있다. 시장화에 반대하는 조직화가 여러 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대안은 이런 사회운동에 있다고 본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중국과 러시아의 행로에 대해 어떻게 보나.

=1991년 이후 러시아 경제는 하강했으나 중국은 반대로 상승하고 있다. 러시아는 조직적으로 국가 전복을 시도했다. 혁명적인 방식으로 시장자본주의로 이행했다. 충격요법을 썼지만 치유책은 내놓지 못했다. 중국은 국가의 후원 아래 시장경제가 발전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는 국가가 필요하다.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가치로서 언제든 의미가 있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매우 다층적이고 비동질적인 사유체계이다. 자본주의에 대항한 사회운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구실을 할 것이다.

-미국에서도 ‘인문학의 위기’를 체감하는지.

=내가 재직 중인 대학의 사회학과는 지금까지 계속 그 규모가 늘어나고 있다. 학문의 인기는 일자리의 수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의 물질적 매력에 기반한 지배력이 학문의 세계에서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도 한 영향이다. 미국의 힘은 자신들의 교육 체계나 지식·이데올로기에 권위를 부여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남미가 저항 아이디어로 맞서듯, 유럽 등 다른 대륙도 미국과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공공사회학 = 학문이 강단을 넘어 대중과 만나 지향하는 가치를 전파하고 토론해야 한다고 믿는 사회학의 한 분야. 1988년 미국에서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됐다. 동료 전문 학자들과 이론적 논의에 그치는 강단사회학인 ‘전문(professional) 사회학’과 대비되는 개념이다.(강성만 기자) 

07. 05. 13.

P.S. 부라보이 교수의 홈피(http://sociology.berkeley.edu/faculty/burawoy/workingpapers.htm)에는 그의 '워킹 페이퍼'들이 링크돼 있다. 러시아의 자본주의 이행에 관한 논문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를 기대해본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론 편저인 <세계화와 새로운 정체성들>(2007)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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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에 연재되고 있는 '강유원의 Book소리' 중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옮겨놓는다.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1>(리젬, 2007)이 부분 번역되었고, 믿을 만한 번역서인가 궁금했었는데 우연히 이 번역서의 고유명사 표기가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관행'과 '상식'이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학문적 소통을 위해서는 존중될 필요가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그렇다고 '오디세이아'를 '오뒷세이아'로만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에까지 내가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오늘(07. 05. 11)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화이트헤드의 말을 들으면 서양 학문에 끼친 플라톤의 영향이 엄청나리라 짐작할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영향이 아리스토텔레스만은 못할 것이다.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다고는 하나 아테네는 작은 폴리스였고, 플라톤은 그곳의 철학자였다. 반면,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기는 했어도 사실상 제국의 철학자였던 만큼 학문의 범위도 플라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은 서양의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학문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는 단테의 서사시 <신곡>이다. 중세 말에서 르네상스로 넘어오는 시기에 쓰여진 이 서사시에는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요소들이 녹아들어 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로 알려진 호메로스의 서사시 전통,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의 전통이 들어가 있는가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중세 신학의 결정판을 만들어낸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신곡>을 읽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조금이라도 이해해야 하며, 이쯤 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전공자의 기본 지식이 아니라 서양학문을 하는 모든 이의 기본이라는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2007년 현재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신곡> 번역본은 여러 판이 있다. 대구가톨릭대의 김운찬 교수는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한형곤 번역의 <신곡>이 권장할 만하지만 더욱 충실한 새로운 번역이 필요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사실 <신곡> 번역은 역자인 한형곤 교수도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본문은 물론이고 “주석이 본문의 70% 이상”이나 되는 지난한 작업이다. 그런데 그 주석 중에 너무나 당연한 것에 대한 실수가 있으면 다른 주석까지도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신곡> 지옥편 제11곡에 이런 구절이 있다. “또한 네가 물리학을 잘 관찰한다면.”이 구절에는 주석이 달려있는데, 그것은 이러하다. “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Physica> 제2권.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

최근 불어판을 중역해서 나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도서출판 리젬) 번역본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그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몇몇의 명칭이 다음과 같이 쓰였다. ‘대도덕론’이 ‘위대한 도덕론’으로, ‘자연학’이 ‘물리학’으로, ‘소피스트적 논박’이 ‘궤변적 반론’으로, ‘분석론 전서’가 ‘제1분석법’으로, ‘분석론 후서’가 ‘제2분석법’으로 표기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전문적으로 읽을 필요도 없이, 철학관련 기본 도서를 읽어보기만 해도 ‘물리학’이 아니라 ‘자연학’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철학의 상식이 아니라 서양학문의 상식인 것이다.



강대진은 최근 저작 <고전은 서사시다>(안티쿠스)에서 헤시오도스의 ‘일들과 날들’에 관한 황당한 번역어들을 발견한 사례를 적어두고 있기도 하다. “ ‘일들과 날들’이라는 제목은… 희랍어 제목 ‘Erga kai Hemerai’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우리식 제목을 잡자면 ‘농사법과 택일법’ 정도라고나 할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쓰여온 제목은 ‘노동과 나날’인데… 좀더 놀라운 제목들로는 ‘사업과 시대’, ‘작품과 생애’ 따위가 발견된다.”



이런 상황을 놓고 인문학의 영역에서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을 대상으로 서양학의 기본 저작들, 이를테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저작 명칭에 관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라도 실시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학자여서 더 이상 배울 게 없으니 참여할 수 없다고 버틴다면, 출판사 편집자들에게라도 그러한 교육을 좀 할 수는 없을까. ‘한국출판인회의’나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한번쯤 이런 기회를 마련했으면 싶다. 독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물리학’이 있었다고 우길 수는 없지 않은가.

07. 05. 13.

P.S. 역자 나름의 변이 없지는 않으나 '피지카(Physica)'를 '물리학'이라고 옮기는 수준이면 독자를 설득하기엔 역부족이 아닌가 싶다. 고유명사 표기 문제에 대해서는 이전에 두어 차례 페이퍼를 띄운 적이 있다. 최근에 읽은 못마땅한 책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을 내어 다시 다룰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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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5-13 08:35   좋아요 0 | URL
안내 감사합니다. 살 계획은 없었으니 다행이지만, 사게 되더라도 피해야겠군요. 기본적인 학문적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지요. 번역자가 누구인가 봤더니 전공자는 아니군요. 이런 전문서 같은 경우에는 이쪽 관련 서적들을 두루 접한 전문가들이 번역하는게 훨씬 낫지 싶습니다. 한국어로 얼마나 자연스럽게 옮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기존에 쌓아왔던 것들을 염두에 두고서 번역을 하느냐죠. 기본적 명칭조차 어긋나버린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로쟈 2007-05-13 10:31   좋아요 0 | URL
국내에 나온 관련서들을 한권도 참조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번역은 많은 부분 '한국어'의 문제라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영어/불어/희랍어 등에 능통한 이들은 적지 않음에도 오역은 줄지 않는 것으로 보아...

2007-05-14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5-14 23:11   좋아요 0 | URL
**님/ 기본적으론 한국에 능통해야 하겠죠. '능통'이란 게 물론 어학적인 차원에 국한되는 건 아니구요, 한국어의 번역 용례와 의미맥락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물론 많은 부분 노력으로 카바할 수 있습니다. 자문을 구할 수도 있구요). 한국어 자체의 핸디캡은 늘어놓아봐야 비생산적일 거 같구요. 물론 말씀대로 두루 능통하신 분이 번역하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런 능력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체득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번역자이지만 번역을 하지 않는 사람'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번역도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실천지'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2007-05-14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5-14 23:36   좋아요 0 | URL
'한국어 자체의 문제점'이라고 하는 건 어폐가 좀 있겠구요, 개념어들의 발달이 상대적으로 미흡하기 때문에 갖는 난점 정도라고 봐야겠지요. 한데, 실제 번역에서 애를 먹이는 건 반대로 한국어가 너무 조밀해서 발생합니다. 가령, 'truth'란 단어가 나오면, 문맥에 따라 '진실'이나 '진리'로 구별해주어야 하는데, 이런 게 번거로우면서도 실상은 더 어려운 일이죠. 번역학쪽 책들까지 챙기는 건 아니어서 '관련도서'까지는 모르겠습니다.^^;

2007-05-14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