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북리뷰에서 눈에 띄는 건 문학관련서들이고, 리뷰 밖에서 내가 주목한 건 영화관련서이지만(이 책들에 대해선 조만간 다룰 예정이다), 리뷰로서 처음 읽어본 건 물리학책에 관한 것이다. '거울 속의 물리학'이란 책제목도 평균점 이상이지만 '물리학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란 리뷰 타이틀은 (따로 참조한 게 없다면) 이 주의 카피로 꼽을 만하다. 이래저래 심란하고 착잡한 일들이 많은 차에 제목만으로도 잠시 위안을 얻게 된다. '거울 속' 세상이 그립다...

한겨레(07. 04. 20) 물리학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그리스의 마그네시아 지방에서 쇳조각을 끌어당기는 이상한 광석이 발견됐고, 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거기에 마그넷(자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인들은 또 모피에 문지른 호박이 목재나 천 조각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힘은 2000년 동안이나 이름이 없었는데, 1600년 영국 과학자 길버트가 호박을 뜻하는 그리스어 엘렉트럼이라 명명했고 그게 오늘날 전기를 뜻하는 일렉트릭이 됐다. 이 보이지 않는 두 힘이 근대 과학혁명과 함께 세상을 바꾸고 인류의 인식 차원을 흔들었고 인간 자체를 바꿨다. 현대문명은 거기서 시작됐다. 물리학 혁명은 곧 철학의 혁명이다.

1786년 이탈리아 과학자 갈바니는 죽은 개구리 다리에 두 개의 금속판을 접촉시키면 다리가 경련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금속판이 개구리 다리에 있던 전기를 방전시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볼타는 전기는 개구리 다리에 있는 게 아니라 두 금속판 접촉으로 생긴 것이고 그것이 개구리 다리를 움직이게 했다는 걸 증명했다. 이것은 전지의 발명으로도 이어졌다. 덴마크 물리학자 외르스테드는 1820년께 전류가 흐르는 도선 가까이에 있는 나침반은 바늘방향이 바뀐다고 밝혔다. 전류가 흐르면 자기가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의 논문은 유럽을 흥분시켰다. 25년 뒤 이 논문이 “굳게 닫혀 어두웠던 과학의 문을 활짝 열어 빛으로 가득차게 했다”고 회상한 영국인 페러데이는 지금까지 상업적 전기생산의 원리가 된 전자기 유도현상을 정립했다. 이런 전자기역학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공식화한 사람은 맥스웰이었다.

맥스웰은 전자기파의 속도가 빛의 속도와 같다는 계산을 해냄으로써 전자기파가 빛 자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전자기의 수학적 형식은 강력과 약력의 신비를 해결할 수 있게 했으며,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4차원 외의 다른 차원이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최초의 중대한 과학적 제안으로 이어졌다. 1910년대에 이뤄진 이런 발견은 아인슈타인과 민코프스키가 제안한 시공간 4차원 연속체 개념의 원동력이 됐다.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중력이라 부르는 힘을 시공간의 곡률로 이해할 수 있다는 놀라운 발견을 해냈으며, 이를 설명하는 일반상대성이론의 등장은 중력과 전자기력의 통합 움직임을 낳았다.

중력이 4차원 공간 곡률에 의한 것이라면 전자기력은 어떤 차원의 곡률이 만들어낸 것일까? 이 두 힘의 통합시도가 중력장에 시간차원이 합쳐진 5차원이론으로 나아갔다. 1960년대에 양성자, 쿼크 등 미립자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한 끈이론이 등장했다. 미립자 세계에선 입자들이 끈으로 존재한다는 끈이론은 끈이 진동하는 방법에 따라 각기 다른 무수한 물리적 성질을 지닌 입자로 나타난다고 보는데, 우리가 사는 4차원 공간에서의 진동만으로는 입자들의 물리적 성질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고차원 공간을 상정하게 된다. 끈이론엔 수십차원까지 등장한다.

‘입자물리학과 우주론을 연결하는 대표적 이론물리학자’라는 로렌스 크라우스의 <거울 속의 물리학(HIDING IN THE MIRROR)>(영림카디널)은 ‘여분의 차원들(extra dimensions)이 내뿜는 신비로운 매력- 플라톤에서 끈이론, 그리고 그 너머까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을 왜 썼나. “나는 우리가 어디어 왔으며 밤의 장막 저쪽에는 무엇이 있는지와 같이, 물리학이 밝혀낸 신비에 대한 인류의 통찰력을 담은 책을 쓰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은 영혼을 통해 위안을 얻지만 어떤 사람들은 지식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요컨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존재를 가능케 한, 극미세계에서 초거대 우주세계까지 관통하는 원리를 알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를 불안과 미망에서 해방시키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겁내지 말고 상상력을 총동원하라.(한승동 기자)

07. 04. 20.

P.S. 저자 크라우스 교수의 책은 <스타트렉의 물리학>(영림카디널, 1996)을 필두로 하여 <스타트렉을 넘어서>(영림카디널, 1998), <외로운 산소 원자의 여행>(이지북, 2005) 등이 번역/소개돼 있다. 지난 2005년에 출간된 <거울 속의 물리학>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스타트렉의 물리학>, <물리학의 공포>, <제5의 원소>등의 책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이자 물리학자인 크라우스는 이 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고차원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인류사에 등장했던 고차원 탐구의 연대기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고차원 세계의 찬란한 유혹'이란 부제답게 고차원 세계와 그에 대한 탐구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한번쯤 또다른 세계로의 '점핑'을 꿈꾸어본 독자들이라면 입맛을 다시며 읽을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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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7-04-20 10:17   좋아요 0 | URL
좋은 책소개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혼을 통해 위안을 얻지만 어떤 사람들은 지식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멋진 말이네요.............공감...공감...

수유 2007-04-20 17:51   좋아요 0 | URL
입맛이 다셔지네요. :) 여분의 차원.

작은앵초꽃 2007-04-25 00:25   좋아요 0 | URL
물리학. 한 때 저의 로망이었는데.. ^^;;; 퍼가겠습니다.
 

그제부터 단연 화제가 되고 있는 뉴스는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사건이다. 볌인이 재미교포 한국인 학생이어서 특히나 충격을 주는데, 그가 언론사에 보낸 '선언문'과 사진, 동영상 등이 오늘(19일) 공개됨으로써 사건의 윤곽이 얼마간 밝혀졌다. 관련기사 두어 가지를 옮겨놓는다.

재작년 6월 전방 GP에서의 총기난사 사건에 대한 소감을 적으면서 '엘리펀트에 대하여'란 제목을 단 적이 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696609). 물론 그때의 '엘리펀트'란 말은 지난 1999년 미국 콜럼바인고교의 총기 난사사건을 다룬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엘리펀트>(2003)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같은 사건을 다룬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과 이 영화를 함께 묶어서 이번 사건의 의미를 조명하고 있는 프레시안의 기사를 먼저 옮겨놓았는데, (그 기사보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실제 범인 조승희의 '선언문'에서 콜럼바인 사건의 두 주모자 에릭과 딜란이 '순교자'처럼 언급되고 있다(그 자신은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했다). 그러니 이 두 사건은 동일한 맥락 속에 있는 것이다. 

예단이긴 했지만 그래서 '버지니아 엘리펀트'이다. 이미 너무 많은 말들과 분석들이 이 사건과 관련하에 제시된지라 따로 덧붙일 말은 없다(한가지, 이번 사건을 두고 "9.11 이후의 가장 통쾌한 사건'이라며 오버하는 반응은 한국인으로서 사죄해야 한다는 반응과 마찬가지로 꼴사납고 역겹다. 나 자신 '네티즌'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인터넷과 지적/인격적 성숙은 무관하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다. 내가 존경하는 이들이 대부분 인터넷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프레시안(07. 04. 18) 콜럼바인, 버지니아텍을 미리 보여주다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사건이 일어난지 8년만에, 이번에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교내 총기사건이라 불릴만한 사건이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났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 수만 33명. 게다가 범인은 한국계로 밝혀졌다. 도대체 이러한 비극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어떻게 총기를 난사해 그 많은 사람을 죽일 행동을 한 것인가? 왜 다른 나라 총기 소유 허가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미국에선 그토록 빈번한 것일까? 혹은, 20세 이상의 남자 성인이라면 누구나 군대에 가 사격술을 훈련 받아야 하고 비공식적인 밀수 총기가 퍼져있다고 하는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미국에서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100% 만족할 만한 답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답변을 주는 영화 두 편을 떠올릴 수 있다. 하나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고, 또 하나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이다. 두 영화 모두 둘 다 1999년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모티프로 삼고 있는 영화들로, 다큐멘터리인 <볼링 포 콜럼바인>은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계기로 총기난사 사건을 '부추기는' 미국의 사회 시스템을 분석하고, 극영화인 <엘리펀트>는 외롭고 상처입은 두 10대 소년의 일상을 건조하게 응시한다.

<엘리펀트>에서 구스 반 산트 감독은 분노와 외로움, 상처로 가득찬 두 소년의 황량한 내면과, 표면적으로는 남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이들의 일상을 그려낸다. 우리는 여전히, <엘리펀트>에서 그 평화롭고 따사롭던 오후에 두 주인공이 친구들을 향해 총질을 시작하는 명시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를 발견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상처입은 사람들이 모두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대지는 않는다.
  
마이클 무어가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듯, 미국은 개인의 총기 소유를 법적으로 보장하면서도 이에 대한 관리와 규제에는 매우 허술하며 총기 소지가 매우 쉽다. 물론 마이클 무어가 조롱했던 것처럼 은행에 계좌만 개설하면 사은품으로 총기를 주는 수준은 아니지만(이것은 총기 구입이 그만큼 쉽다는 마이클 무어식 비아냥일 뿐, 사실은 아니다.), 버지니아공대 사건의 범인 역시 학교 근처 총기상에서 신분증 세 개를 보이는 것만으로 아주 쉽게 범행 무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사용 용도가 무엇인지 설명하거나 신고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단순히 총기를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해서 그만큼 총기 난사 사건도 빈번히 일어나는 것일까? 역시 총기 소지가 법적으로 보장된 캐나다에서 연간 일어나는 총기난사 사건은 미국에 비하면 훨씬 적다. 마이클 무어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공포를 확대재생산하면서 공격이 최선의 방어임을 설파하는 시스템이라고 분석한다. 빈부의 격차가 크고 양극화된 사회 현상과 이로 인한 사회적 불만과 불안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약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복지와 이로 인한 최소한의 생활 안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미국 외부의 적을 규정하고 적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재생산함으로써 사회적 불만을 무마하는 것, 그리하여 미국이라는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 자체를 공포와 분노에 두고 있다는 것, 이른바 '공포로 통치하는 사회'라는 사실이 이러한 비극을 계속 발생케 한다는 것이다(*'공포로 통치하는 사회'가 미국에 국한되는 건 아니다).


  
  .
분열되고 파편화된 세상이 문제

만약 이번 사건이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우리는 주인공의 행동에 대한 심리적 개연성이 없다며 비판할 것이고, 혹자들은 하필 범인을 한국인으로 상정한 것에 대해 감독이 혹시 인종차별주의자인지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이것은 영화에 불과하다"며, 더욱이 "바다 건너 먼 나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며 안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이란 이성과 논리에 근거에 행동하려 하고,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우리와는 다른 매우 특수한 사람,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 믿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인간 고유의 의지가 아니라 악마가 들려서, 혹은 귀신이 씌여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라는 등등 수많은 바깥의 이유들을 찾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일지 모르며 내 자신조차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불신과 공포, 불안에 휩싸이기 때문이다(*기자는 '우리 모두가 조승희이다'라는 결론을 암시하려는 듯한데,  그건 과잉 일반화이며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다. 가해자-피해자의 관계를 그저 우연적인 것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조승희도 인간이다'에 나는 동의하지만 '모든 인간/한국인은 조승희다'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좀더 공포를 느끼지만 그것이 '총기 난사' 사건인 경우, 총기 소지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남의 나라 현실이라 믿으며 애써 무관심한 척할 수도 있다. 사실 총기가 엄격히 금지된 한국사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미국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총기난사 사건은 낯설고 두려운,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은 범인이 한국계로 밝혀지고 범행동기가 (누구나 평생 무수히 겪는) 여자친구와의 불화 때문인 듯하다는 잠정 수사결과가 전해지면서, 우리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총기난사 사고'에 무관심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두 번씩은 자신이 저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탈의 경험을 하고, 이에 대한 죄책감 한두 가지씩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일탈이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범죄'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들은 분명히 있다. 이런 비극은 분명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고, 그 사람은 그가 속한 사회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 우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러한 풍요는 모두에게 주어진 것도 아니며, 물질의 풍요로움이 마음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롭고 힘든, 분절되고 파편화된 세상, 각종 통신수단은 눈부시게 발달했지만 여전히 (혹은 오히려 더욱 심화된)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세상을 견디어나가고 있다.
  
이 고통을 타인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 탓으로 돌릴 때, 그리고 타인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사물'로 여겨질 때, 그 사회는 위험 수위로 가까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건에 정말로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한국사회를 포함해 전세계 거의 모든 사회가 이미 이런 위험 수위에 다달은 현대사회라는 점을 우리가 알고있기 때문이다(*이번 사건의 경우에 범인은 '외톨이'로서 갖는 사회적 적개심을 여러 차례 징후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만사지탄이지만 주변에서 그러한 '신호들'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유사한 '신호들'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친구의 자살을 막지 못했던 기억이 겹쳐진다).

그런 상황에서 오로지 생명을 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주변에 널려 있어 누구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런 비극은 몇번이고 반복해서 발생할 수 있다(*짐작에 한국에서 총기 소지가 허영된다면 미국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총기난사사건'과 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비극을 보며 지나치게 범인을 동정할 필요도, 그럼에도 그저 정신나간 특정인의 소행으로만 돌리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건으로 치부하고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먼 나라에서 벌어진 일일지라도 우리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김숙현 기자) 

경향신문(07. 04. 20) 고립된 자아·폭력문화가 빚은 ‘저주의 복수극’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 새로운 각도에서 주목 받고 있다. 조승희씨(23)가 NBC에 보낸 우편물에서 ‘콜롬바인 총기난사’ 등 과거 참사들과의 유사성이나 영화·게임 등 대중문화의 폭력적 요소들이 곳곳에서 감지되면서다. 미국 언론들은 조씨가 동영상·사진·텍스트 등 다양한 미디어를 동원한 점에서 ‘multimedia manifesto(복합미디어 선언문)’로 이름짓기도 했다. 고립된 자아와 폭력문화가 결합한 ‘병리(病理)적’ 모방범죄일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조씨의 ‘선언문’과 행적에서 드러난 4가지 모방성을 살펴봤다.



◇ 유나보머 테러…범죄 합리화 ‘우편물 발송’유사
조씨의 범행수법이 ‘유나보머(Unabomber) 테러’로 불리는 연쇄 편지폭탄 테러범 시어더 카진스키와 흡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버드대 출신의 수학 천재로 버클리대 교수였던 카진스키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16차례에 걸친 소포폭탄 테러로 3명을 숨지게 하고 23명에게 부상을 입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문명혐오주의자인 그는 ‘유나보머 선언문’으로 명명된 ‘산업 사회와 미래’라는 제목의 편지로 자신의 범행이 현대기술 문명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로 과학기술과 관련 있는 대학(University)과 항공사(Airline)에 폭탄을 보내 ‘유나보머’란 별명이 붙었다(*국내에는 '유나바머'라고 소개됐다).

조씨가 ‘선언문’에서 현대사회의 ‘물질만능’과 ‘탐욕’, ‘쾌락주의’에 대한 징벌을 범행의 명분으로 삼았다. 조씨는 “너는 벤츠로도 부족했지. 속물 덩어리 너는 금목걸이로도 만족하지 못했어. 보드카, 코냑도 충분하지 않았고 그 모든 향락에도 너는 만족하지 않았어. 이 모든 것이 너의 쾌락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거야”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너(You)’는 미국 사회를 지칭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조씨가 범행 전 언론 매체에 범행의 명분을 주장하는 ‘선언문’ 형태의 우편물을 보낸 수법도 유사하다. 그 점에서 전문가들은 “조씨가 오랫동안 고립된 채로 생활하면서 세상을 자신만의 좁은 시각에서 보는 편집증이 있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김광호기자)



◇ 영화 ‘올드보이’…증오찬 표정·망치 사진 흡사
‘복수’를 모티브로 한 한국영화 ‘올드 보이’ 장면들과의 유사성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18일 ‘조씨가 NBC에 보낸 사진 중 가장 불가해한 사진의 영감은 칸영화제 대상을 받은 한국영화에서 온 것 같다’고 전했다. 바로 조씨가 ‘망치’를 들고 위협하는 사진이다. 실제 조씨의 사진과 영화 속 주인공 대수(영화배우 최민식)의 사진은 망치를 치켜든 손의 위치와 방향, 팔의 각도, 증오가 가득 찬 표정 등이 놀랍도록 닮았다. 뉴욕타임스는 “두 사진의 포즈는 유사하고, 영화의 구성(plot)은 더 살펴볼 가치가 있을 만큼 음울하다”고 평가했다.

영화는 평범한 회사원 대수가 납치를 당해 15년간 감금당한 뒤 풀려나, 감금 당한 이유를 더듬어가면서 복수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조씨가 권총 자살을 암시한 사진처럼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 머리 관자놀이 부분에 권총을 쏘아 자살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뉴욕타임스는 평론가 마놀라 다기스의 말을 인용, “영화의 사망자 수와 가학적 폭력은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의 차이를 분간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컬트 영화광들에게 어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NBC는 조씨가 총을 겨누는 장면이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니로를 연상시킨다고 보도하는 등 미국 언론들은 조씨의 사진들이 대부분 각종 영화 장면을 모방한 것으로 분석했다. ‘택시 드라이버’는 외롭고 소외된 주인공이 결국 분노를 폭발시킨다는 내용이다(*조승희는 범행 몇 주 전부터 머리를 짧게 깎고 근육을 단련했다고 한다). 버지니아 공대 폴 해릴 교수는 두 장면의 유사성을 통해 조씨가 32명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도록 한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기를 바랐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김광호기자)



◇ 콜롬바인 총기사건…범행 당일 행동 태연
조씨는 ‘선언문’에서 1999년 4월 발생한 콜롬바인 고교 총기사건의 주범인 에릭 해리스와 딜란 클레볼드를 ‘순교자(martyr)’로 표현했다. 바로 오는 21일이 이 사건의 8주기 추모일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조씨의 범행은 계획적인 것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미국 콜로라도주 콜롬바인 고교에서 일어난 사건 당시 평범한 고교생이던 에릭과 딜란은 도서관에서 900여 발의 총알을 난사,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특별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조씨가 사건 당일 아침 평소처럼 평온한 일상을 시작한 것처럼 에릭과 딜란도 사건 당일 오전 태연하게 볼링 수업을 듣기도 했다.

영화 ‘화씨 9·11’의 감독 마이클 무어는 2002년 이 점에 착안, 다큐멘터리 영화 ‘볼링 포 콜롬바인’을 만들었다. 사건의 뿌리가 미국 정부의 느슨한 총기 규제에 있다는 점을 정면 비판하면서, 공포를 조장해 권력을 유지하는 미국 정치의 폭력성을 고발했다. 동영상 곳곳에서 조씨가 “너는 내 가슴을 짓밟고 영혼을 능욕했으며, 양심을 불로 지졌다”고 알 수 없는 폭력과 모욕, 고통을 호소한 대목과 묘하게 중첩된다. 따라서 조씨는 에릭과 딜란에 대한 언급을 통해 이들에 대한 정서적 공감을 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물론 영화의 프리즘을 통해 걸러진 관점에서다. 실제 조씨는 ‘선언문’에서 “나는 약자들과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는다”고 스스로를 순교자로 묘사했다.(김광호기자)



◇ 비디어 FPS게임…가상공간의 사격게임 하듯이 몰입

권총 두 자루를 휴대하고 눈에 띄는 대로 상대방을 살해한 조승희씨의 범행 방식은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FPS게임(First Point Shooting, 1인칭 사격 게임)과 유사하다. FPS게임이란 게이머가 주인공이 되어 화면에 나타나는 적을 제거하는 사격 게임의 일종으로 1인칭 시점으로 게임이 진행되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가상공간 안에서 직접 전투를 벌이는 듯한 몰입감이 특징이다.

미 경찰은 16일 오전 7시15분쯤 기숙사에서 두 사람을 살해한 조씨가 600여m 떨어진 노리스 홀(공학부 건물)에서 2차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오전 9시46분쯤 노리스 홀에 들어선 조씨는 206호 강의실을 시작으로 복도와 강의실을 휘저으며 30여분동안 동안 엄청난 양의 탄약을 쏟아부으며 기계적으로 발포했다. 목격자들은 조씨가 “탄창이 주렁주렁 매달린 조끼를 입고 있었으며 시종일관 침착하게 범행을 저질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번 사건이 미로처럼 굽어진 복도와 복잡한 방들을 지나 상대방을 ‘섬멸’하는 것이 목적인 FPS게임과 닮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장갑을 끼고 쉴 새 없이 탄창을 갈아끼워가며 권총을 난사하는 이른바 ‘쌍권총 모드(mode)’다. 공교롭게도 조씨가 범행에 사용한 글록 9㎜ 권총은 FPS게임에서 소(小)화기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모델이기도 하다. 범행 당일 NBC사에 보내진 조씨의 영상과 사진이 공개된 뒤 인터넷에서는 ‘유명 FPS게임의 테러범 복장과 유사하다’는 네티즌들의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이호준기자)

07. 04. 18-19.

P.S. 참고로, 조승희씨의 지도교수는 “그는 내게 너무 외롭다고 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0704/h2007041918355222470.htm). 그리고 한 정신과 의사의 분석은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5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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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7-04-19 00:21   좋아요 0 | URL
좋은 인용글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이 사건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로쟈 2007-04-19 08:21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아침뉴스를 보니까 또 NBC에 보냈다는 편지와 비디오테입 얘기가 나오네요. 사건 전모는 곧 밝혀지겠지만 더 두고봐야겠습니다...

비로그인 2007-04-19 09:16   좋아요 0 | URL
로쟈님, 잘 읽었습니다. 관련한 페이퍼도 더 올려주시길 기대합니다.

이네파벨 2007-04-19 12:00   좋아요 0 | URL
nature vs. nurture 논쟁이 생각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nature...범인이 기질적인 정신병질자(psychopath, sociopath)였다는데 한 표...입니다.
어릴때부터 자폐적인 성향이 있었다고 하고..환경이 아무리 힘들고 불우하다고 해서 정상적인 사람은 이런 행동을 할 수 없다고 믿어요.
사회구조적 문제..환경(크게 보아 nurture)의 문제도 물론 없지 않겠지요.
하지만 환경의 경우 "총기소유허용"이 단독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총기소유가 법적으로 허용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왜 미국에서 유독 이런 사건이 일어나느냐...?를 분석하려면 법적 허용여부뿐만 아니라 유통 상황, 접근의 용이성 여부 등 좀 더 심층적인 분석이 있어야 할 듯 하고요.
빈부격차, 불평등, 소외 등의 문제라면...솔직히 중국의 파렴치한 신흥부자들을 죄다 들고 일어나 처형하지 않는 중국의 가난한 인민들이 오히려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지요.(과장법인거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미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문제, 악덕 등을 모르는 것 아니지만...
지금 이 사건에 그걸 들이대서 마치 범인의 성명서의 주장에 동조하듯 빈부격차 등 "미국"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식으로 몰고가는 것은..
미국인들이 범인이 한국계라는걸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문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시각도 필요하겠지만 수십명이 무고하게 죽은 상황에서 말을 아껴야할 때가 아닌지................

pax 2007-04-19 13:43   좋아요 0 | URL
그렇다고 위 기사가 방정맞게 범인의 성명에 동조하며, 무고하게 죽은 수십명의 고인들에게 누를 끼치는 말을 막 해대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분석의 정확성에는 언제나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겠지만 말입니다.......

로쟈 2007-04-19 23:51   좋아요 0 | URL
체셔고양2님/ 이미 심층분석기사들이 넘쳐나기에 제가 더 보탤 말은 없습니다...
이네파벨님/ 공감합니다. 자폐적 우울증자의 공격성이 밖으로 표출된 게 아닌가 싶어요...
paxwonik님/ 기사의 대체적인 논조에 저는 동의합니다. 다만, 우리의 책임을 '잠재적 가해자'로서의 죄의식/동류의식에서 찾는 건 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부 2007-04-20 03:57   좋아요 0 | URL
음 선뜻 '동의한다' 고 말하기 망설여지는게 있는데요.. 이네파벨님 입장을 읽으니까 이건 마치 데칼코마니적인 난감함이 어지럽게 만드는 군요.
이네파벨님 생각을 반대로 대칭시켜도 똑같이 적용되고 말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기질적인 정신병자들이라고 해서 어느 곳에서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고는 못믿겠습니다.개인적 기질의 문제도 물론 없지 않겠지만, 우울증자가 공격적 성향이 무시무시한 폭력성으로 표출될 가능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사건에 정신병자의 병리적 행위라는 임상적 측면만을 강조해서 비 이성적 개인의 광기가 결정적 원인이라고 몰고가 버리는 것은
역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또한 수십명이 무고하게 죽은 상황에서 우리의 책임은 없고 단지 광기에 빠진 개인때문에 벌어진 비운의 사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 될테니 그런 주장 또한 말을 아껴야 하지 않을까요. 라는,

어부 2007-04-20 03:43   좋아요 0 | URL
이것도 저것도 결국 같은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까 한다는 거죠. 이런 일이 있을때마다 원인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려는 태도가 그렇습니다. 사후에 원인을 규명하려는 매체들의 법석들은 꼭 사건의 생명은 사라진 사체의 고깃점들을 하나씩 물어뜯으며 게걸스럽게 각자 뜯은 부위를 들이미는 까마귀떼들 같습니다. 이런 원인분석의 태도는 결국 말하고 있는 우리들을 괄호치기 위해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정신병자의 비 이성적 광기의 결과라는 식의 결론. 결국 '타자'의 행위라는.. 이곳에 대한 알리바이 들이대기. 뭐, 그렇다고 마이클 무어식의 침튀기기가 뭔가 뾰족한 결론을 불러온다고도 생각 안합니다.

어부 2007-04-20 03:58   좋아요 0 | URL
<엘리펀트>는 좀 다르게 생각해보려 했던것 같은데요. 진실은 알 수 없다, 뭐 그런 라쇼몽 스토리로 읽는다면 중요한 어떤 것을 놓치지 않을까 싶네요. 이 비극에 대해 윤리적으로 접근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를 붙들고 고민하려는.. 그건 어떤 '원인으로 사태의 전체를 환하게 만들기'를 지양하는게 아닐까 하는 건데요. 그거야말로 그 사건으로부터 우리, 혹은 나를 안전지대로 데리고 오려는 의도일 수도 있을테니까요. 인과논리 뒤에서 실은 그냥 안심하기.
저한테 아직도 정말 서늘하게 남아 있던건 인터넷 초기화면 주요 뉴스에 올라온 조씨의 증명사진 이미지였는데 그건 9.11 테러 무역센터 건물 이미지처럼 늘 본 이미지에 실재가 딱 침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곧바로 그를 드라마틱하게 비일상적 타자로 밝혀 내는 다른 이미지들에 그 구멍은 금방 메꿔지긴 했지만..
이 익숙한 낯섬을 다시 낯선 익숙함으로 되돌리는 태도가 필요한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윤리21>을 좀 다시 읽어 봐야 하겠네요. 중반 이후에 건성으로 읽고 넘어갔는데, 원인과 책임의 윤리에 대해 아주 좋은 지침을 줬던걸로 기억하거든요..-_-

이네파벨 2007-04-20 07:26   좋아요 0 | URL

좋은 논의, 반론 감사합니다.

같은 사건을 보아도...평소 알 던 대로..평소 관심사대로 해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분명 그런 쪽으로 치우쳤을 거구요....

거기에는 예전에 읽은 두 권의 책 (번역자가 지인이라 선물받아 읽은 책이죠.)도 무관치 않을거예요.

  요 두 권의 책을 보면......대량살인이나 연쇄살인 등을 저지른 범인들은 보통사람들과 절대로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행동에 들이대는 잣대를 들이대서 인과관계를 해석할 수 없다는 확신을 주지요.....

저 역시 예전에는 이런 현실에 대해 믿고싶지도 믿지도 않았는데...세상을 살면 살수록 심각한 정신적 불구로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르는 "괴물"같은 사람들이 있다는데 공감하게 됩니다.  예전에 유영철 사건도 그렇구요...

꼭 살인자, 방화자 등 엄청난 파괴와 폭력을 가져오는 범인들뿐만 아니라 (이들은 어쩌면 자기파괴적이라는 면에서 일말의 동정심을 사기도 하지요.) 다른 이들을 교묘하게 착취와 이용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도...정도는 다르지만 기질적 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쿠야마의 이 책을 보면 인간의 여러 특성 (키나 체중 등 신체적 특성, 운동능력, 지능 등등 정도를 따질 수 있는 속성들)을 통계적으로 분석하는 이야기가 나왔던걸로 기억해요. (하도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예컨대 사람의 키를 보자면...성인을 기준으로 2m가 넘는 사람도 있고 140cm가 안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균적인 키의 수치에 분포하겠지요. 이걸 그래프로 나타내자면 종형곡선(벨커브)을 나타내게 될 거구요.

 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속성들도 통계적으로 이런 분포를 나타내겠지요...(벨커브 하니 우생학 논란을 연상시킬까봐 두렵네요. 그 주장의 모순과 무관하다는건 이해하시겠죠? 인종차가 문제의 핵심이었던 것이지요.)

아무튼...겉으로 드러나는 특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적 기질(성격)이나 특성에도 이런 통계적 분포를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감정이입 능력, 공감 능력, 타인에 대한 배려, 이타심 (또는 자기중심성, 폭력성, 이기심...) 등을 가설적으로 수치화해서 그래프로 나타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정도...벨 커브의 불룩한 산 아래 분포하겠지만 일부 사람들은 양끝에 위치할 겁니다. 한쪽 끝에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감정이입이 지나쳐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던 고타마 싯다르타, 시몬느 베이유, 테레사 수녀 등이 있을거고 다른쪽 끝에는 유명한 연쇄살인범들, 히틀러 폴포트 등이 있겠지요. (결국 도덕은 동기나 원인보다는 그 사람의 "행위"와 그 결과로 판단해야 한다는게 제 생각이구요. 그렇지 않다면 판단 자체가 불가능해질거구요...)

이런 통계적 상황은 어쩌면..........환경적인 측면만으로 개선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현대과학이 nature vs, nurture의 논쟁에서 nature쪽으로 무게추가 기울어진다는 느낌을 숨길 수 없고 설사 중간 어느 지점에서 만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기질적, 선천적 문제적 인간들은 존재할 겁니다. 또한 인간의 형성에 환경적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구요............(물론 노력은 해야되겠지요.)

이런 인식이 저만의 것은 아닐진대....저는 오히려 그에 대한 심각한 부작용...이를테면 반사회적 정신병질자(psychopath)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우리가 상상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 (감시의 강화 사생활의 축소 유전자 검사 및 라벨링 등등)를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고민이 떠오릅니다.

제가 너무 앞서가나요? 그럴 수도 있죠. 가장 먼저 해야될, 할 수 있는 조치 (총기규제)도 안이루어지는 판에 말입니다.....^^

아무튼...제가 꼴통같은 얘기를 늘어놓았는지도 모르겠는데요....나이 드니까..애 키우니까..점점 보수적이고 현실적으로 변해가는걸 느낍니다. 이를테면 유괴범들 (이놈들도 양심과 감정이입이 결여된 괴물들이죠.) 어린이 성범죄자들 (ditto) 유영철 등등은 네거리에 잡아놓고 돌팔매질을 해야된다고 생각하는........

벨 커브의 중간쯤에 위치한 평범한 인간인 저로서는 범죄자들에게까지 감정이입이나 동정의 시선을 보낼만한 인격은 안되구요...그저 "tit for tat",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도덕률을 신봉하게 됩니다.


다락방 2007-04-21 23:33   좋아요 0 | URL
이 사건을 접하고 [엘리펀트]를 떠올렸던건 저 뿐만이 아니었군요. 흐음.

로쟈 2007-04-21 23:51   좋아요 0 | URL
사실 조승희 자신이 떠올린 것이니까요...
 

밤참을 먹으면서 잠시 여유를 부린다고 새로 나온 책들을 검색해보다가 대번에 '필을 받은 책'은 마투라나/바렐라의 <앎의 나무>(갈무리, 2007). 작년 바로 이맘때 <있음에서 함으로>(갈무리, 2006)가 출간된 바 있어서 벚꽃소식과 함께 '최근에 나온 책들'로 소개한 바 있는데(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857338) 다시 1년만에 그들의 주저라고 할 <앎의 나무>가 마저 출간된 것.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 예전에 <인식의 나무>(자작아카데미, 1995)로 출간된 바 있어서 '오래된 새책'에 해당한다. 역자도 같은 것으로 보아 약간 손질해서 다시 낸 듯하다. 물론 제목은 '앎의 나무'로 바뀌었고.

 

 

 

 

소개에 따르면, "칠레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구성주의적 관점의 생물학 책"으로 "지은이들은 이 책에서 삶과 앎의 근본과정에 관한 자신들의 체계관을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선보이고 있다. 다윈주의의 영향아래 생물을 객관적인 바깥세계에 얽매여 있는 일종의 '노예'로 보는 종래의 관점과는 달리 이들은 생물의 '자유함'을 다양한 생물학적 지식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거기서 핵심적인 개념이 '오토포이에시스'이다. 나는 작년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칠레 출신의 인지생물학자이자 철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움베르또 마뚜라나; 1928- )의 대담집 <있음에서 함으로>(갈무리, 2006)이다. 책은 독일어 원저가 2002년에 나오고, 대본이 된 영역본이 2004년에 나왔다고 하니까, 따끈한 책이다. 마투라나는 흔히 동료인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찍지어서 불리는 이름인데, autopoiesis, 즉 '자기생산' 혹은 '자가생산'의 개념을 창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국내에는 이미 <인식의 나무>(자작아카데미, 1995)란 책이 오래전에 소개됐었는데(나도 그 책을 통해서 이름을 처음 접했다), 마투라나는 자기조직 체계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함께 최근에 인문학에서는 부쩍 자주 눈에 띄는 이름이 되었다."

독어판은 영어판과 마찬가지로 1987년에 출간됐고, 영역본의 경우엔 지난 1992년에 개정 3판이 출간됐다. 이번에 나온 국역본 갈무리판은 자작아카데미판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인식의 나무>는 내가 따로 원서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 전작인 <오토포이에시스와 인지>(1980)는 오래전에 복사해둔 책이다. 추세로 보아 이 책은 내년 이맘때 번역본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07.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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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4-18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있음에서 함으로...
니콜라스 루만 언급되는 부분부터 어려워서 포기했어요.ㅜ.ㅜ

로쟈 2007-04-18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역본을 도서관에 주문했었는데, 구하게 되면 읽어볼 참입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몇 년전부터 예고돼 온 그리스 원전 번역 '플라톤 전집'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우선은 지난주에 1차분 세 권이 출간됐고, 나는 그 중 한권을 주문해 놓은 상태이다. 수고한 역자들(정암학당 연구원)들과의 인터뷰 기사가 마침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서양철학사 전체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화이트헤드의 말을 문자 그대로 접수하지는 않더라도 이 서양철학의 '시초'에 대해서 그간에 우리말로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은 이래저래 갑갑한 노릇이 아니었을까? 비로소 숨통이 좀 트이는 듯한 느낌을 가져도 좋을 법한데, 사실 손가락, 발가락까지 다 움직이는 지경을 거쳐서 '말문'이 트이는 경지까지는 아직도 장구한 여정을 남겨놓은 듯하다. 구두끈을 다시 묶어야겠다. 이제 각주도 제대로 달아가면서... 

경향신문(07. 04. 17) 그리스어 원전 ‘플라톤 번역판’ 나왔다

다들 알지만 제대로 읽지 못한, 아니 읽을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서양철학의 주축을 이루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대화편’이 그러하다. ‘국가론’ ‘향연’ ‘파이돈’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의 ‘대화편’은 일부만 한글로 번역됐을 뿐더러 그나마도 그리스어 원전이 아니라 영어판, 일어판 등을 바탕으로 한 중역본이다.

서울 대학로에 자리한 정암학당에서 지난 13일 연구원들이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고 토론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이창연, 김재홍, 정준영, 김주일 연구원. 박재찬기자

때문에 지난주 나온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이제이북스)’ 1차분 ‘뤼시스(강철웅 옮김)’ ‘알키비아데스 I·II(김주일·정준영 옮김)’ ‘크리티아스(이정호 옮김)’의 출간은 반갑고 값지다. 이 책은 국내 최초로 그리스어 원전을 저본으로 하여 정암학당을 중심으로 뭉친 국내 학자들이 오랜 기간의 세미나와 연구를 바탕으로 펴낸 플라톤 번역서다.

앞으로 플라톤이 쓴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위서를 포함해 플라톤의 저작 43편이 5년간 순차적으로 번역돼 나올 예정이다. 이는 정암학당 김재홍 박사의 말대로 “한국 인문학사의 일대 사건”이다. “우리나라에 서양철학이 유입된 것이 길게 잡아봤자 1세기가 안됩니다. 그간 늘 일본어 혹은 영어로 된 번역본을 쫓아가기에 급급했지요. 텍스트로 삼을 한글 번역본도 없었고, 상호검증하기도 어려워 서양고대철학사 연구가 사상누각인 상태였지요.”



플라톤 역주사업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가 2000년 설립한 정암학당에서 주도하고 있다. 20여명에 달하는 연구원들은 철학을 전공한 석·박사들로 지난 7년간 고대 그리스 철학의 주요 저작들을 읽어왔다. 이들은 플라톤이 운영하던 ‘아카데미아’의 교수법처럼, 그리스어 원전과 발제자가 준비해온 한글 번역문을 한 줄 한 줄 읽으며 엄격한 토론을 통해 검증을 하는 방식으로 세미나를 진행해왔다.

독자 대상은 고교생 이상으로 삼았다. 이정호 교수는 “총기 있는 고등학생이 앉아서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했다. 정암학당 정준영 연구원은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플라톤의 ‘대화편’ 자체가 전문용어가 아니라 당시의 일상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풍부한 함의를 담고 있지요. 철학적 사고의 밑바탕이 되는 책입니다.”



이런 이유로 역자들은 최대한 쉽고 자연스럽게 번역하는 데 역점을 뒀다. 동시에 작품 해설과 주석에 신경써 전문연구자들을 배려했다. 실제로 ‘뤼시스’ 편을 보면 에로스와 필로스의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 애썼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랑을 뜻하지만 육체적 관계를 포함하는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와 상호성을 기반으로 사랑·우정을 주고 받는다는 의미의 필로스를 구분하기 위해 역자는 이 단어가 나올 때마다 주석을 달아 설명을 더했다.

숱한 토론을 거치며 뜻을 다듬었지만 정리는 역자의 몫. 이 과정에서 번역어의 선택이나 복잡한 그리스어 문법에 맞춰 의미를 살리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고교생 독자 수준으로 맞추려고 하는데 번역투의 문장이 자꾸 나오고 그리스어의 의미를 살리려고 하다보면 우리말 같지 않은 겁니다. 그러다 우리말에 맞추다보면 원래의 의미가 퇴색되더라고요. 그 중도를 가는 게 어려웠습니다.”(김주일 연구원)



플라톤 전집은 한글로 소개되지 않은 작품부터 출간된다. ‘뤼시스’는 소크라테스와 뤼시스라는 청년의 대화로, 우정 혹은 사랑으로 번역되는 필리아(philia)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크리티아스’는 환상의 섬 아틀란티스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문서로 이상향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역자들은 인문학 연구의 1차 자료가 되는 원전번역이 활발한 해외의 사례를 부러워하면서 “앞으로 이 전집이 어린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지 않을까 기대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윤민용기자)

07. 04. 16.

Платон. Избранное

P.S. 참고로, 러시아어 플라톤은 3권 짜리 전집 외에 다양한 형태의 선집들이 출간돼 있다. 내가 갖고 있는 건 그 중 <국가> 등이 포함된 책과 15개의 대화편이 수록된 저럼한 선집 등이다(비교적 널리 알려진 대화편들을 수록하고 있어서 이번에 나온 국역본 대화편들 가운데서 <뤼시스>와 <알키비아데스>는 빠져 있다).

Наследники Платона 

관련서들을 검색하다 보니까 존 딜론의 <플라톤의 유산>(2005) 번역본이 눈에 띈다. 원서는 2003년에 나왔고 250여쪽이니까 만만한 분량이다(원제는 'The Heirs of Plato: A Study of the Old Academy (347-274 BC)' 그러니까 플라톤의 제자들 얘기인 듯). 러시아어판까지 나온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인정받는 책인 듯하다.

플라톤 전집도 출간되는 김에 우리의 독자적 시각에 따른 연구/주석서들도 속속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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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4-16 23:12   좋아요 0 | URL
지난주 교보에 깔렸더군요. 저도 한 권만 택한다면 <뤼시스>. :D

biosculp 2007-04-16 23:20   좋아요 0 | URL
깔리자 마자 3권 다 구입했는데, 가독성은 좋더군요.
제일 좋은것은 일단 표지가 마음에 들고, 책을 읽으면서 페이지를 넘길때 그리고 꽉 잡을 때 뽀드득 소리가 첫눈 밟는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로쟈 2007-04-16 23:24   좋아요 0 | URL
수유님/ 저는 <알키비아데스>를 먼저 골랐습니다.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 때문에...
biosculp님/ 서평은 좀 기다려봐야겠지만, 고전 번역의 모범적인 사례로 기록되면 좋겠네요...

나비80 2007-04-16 23:31   좋아요 0 | URL
<국가-정체>만 아주 예전에 통독해둔 형편이라 욕심이 생깁니다.
이런 책들은 어디 진득하니 입원하기 전에는 읽기 힘들다는 자조섞인 농담들도 하더라구요. 이것도 로쟈 님 페이퍼에서 본 말인것 같기도 하고. ^^

2007-04-17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7 01:20   좋아요 0 | URL
**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목에 제가 좀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네요.^^;

자꾸때리다 2007-04-17 06:35   좋아요 0 | URL
호옷 나왔군요.

코스모폴리스 2007-04-17 11:00   좋아요 0 | URL
"‘국가론’ ‘향연’ ‘파이돈’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의 ‘대화편’은 일부만 한글로 번역됐을 뿐더러 그나마도 그리스어 원전이 아니라 영어판, 일어판 등을 바탕으로 한 중역본이다."라는 평가는 서광사에서 나온 박종현 등의 번역에도 해당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군요.

마늘빵 2007-04-17 11:17   좋아요 0 | URL
오홋. 이런 것두. 음...

biosculp 2007-04-17 11:17   좋아요 0 | URL
기자가 확인안하고 쓴것 같군요. 지금 원전 번역된것이 박종현번역본들과
한길사에서 나온 소피스테스, 정치가(김태경역), 철학과 현실사에서 나온 송영진번역의 파르메니데스(책이름은 플라톤의 변증법), 문지에서 나온 향연등이 있을텐데요.

코스모폴리스 2007-04-17 12:28   좋아요 0 | URL
biosculp / 한겨례 서평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나왔습니다. "<국가〉를 비롯해 그의 저작 몇 편이 우리말로 번역됐지만, 파편적·단속적이었을뿐더러 대개는 일어판의 중역이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02870.html

로쟈 2007-04-17 15:01   좋아요 0 | URL
그리스어 원전 번역이 전무했던 건 물론 아니지요. 몇 권 나와있습니다. 이번 '전집'의 차별성을 좀 내세우려다가 보니까 약간 오버성 멘트가 들어간 듯한데, 저는 '전집'에 방점을 두고 싶습니다(언제 다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biosculp 2007-04-19 18:44   좋아요 0 | URL
정암학당 운영자가 쓴 글인데요.
"전집 출간과 관련한 일부 언론의 보도내용 중 학당 전집 출간이전에 플라톤 대화편 원전번역본이 없는 양 보도 된 것은 전혀 잘못된 사실입니다. 발간사에서 밝힌 것 처럼 이미 우리나라에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박종현 선생님 등의 노력으로 상당수 번역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분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성취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전집 발간계획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대화편들의 원전 역본 출간 자체가 처음인 것으로 기자들이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에 따라 학당에서는 해당 일부 언론에 유감을 표하였습니다."


로쟈 2007-04-19 19:07   좋아요 0 | URL
역시나 기자들의 '게으름'이 문제였군요...
 

'비극의 탄생을 읽기 위하여'란 페이퍼에 이어지는 또다른 워밍업이다. 지난 주말 경향신문에 게재되었던, '헤르메스의 빛으로' 연재 중에서 '니체 vs 빌라모비츠' 편을 옮겨놓는다. 안 그래도 어제 <비극의 탄생>과 함께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을 잠시 뒤적거렸는데, 조만간 몇 마디 쓰게 될 듯하다(도서반납 기한 때문에라도). 분량은 많지 않으므로, 출간 당시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던 이 문제적 텍스트를 이 참에 한번 읽어보시는 건 어떨지...  

경향신문(07. 04. 14) [헤르메스의 빛으로](14) 니체 vs 빌라모비츠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가 ‘비극의 탄생’을 출판한 해는 1871~1872년이었다. 이 작품에서 니체는 비극의 탄생이 아니라, 비극의 죽음을 논의한다. 그는 예술은 원래 아폴론적인 요소와 디오니소스적인 요소의 이중적 결합을 통해서 발전한다고 한다. 본래 두 요소는 지속적으로 투쟁하는 사이인데, 주기적으로 화해의 기간을 갖는다고 한다. 이 화해의 기간에 탄생한 것이 그리스 비극이라는 것.

따라서 비극은 아폴론적인 힘과 디오니소스적인 힘이 서로 어울려 하나의 혼연일체(渾然一體)인 무엇이다. 이 혼연일체의 무엇에 소크라테스라는 소피스트가 나타나 논리와 이성이라는 칼을 들이대는 바람에, 그리고 에우리피데스라는 내부 배신자가 등장해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비극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았다는 것이 ‘비극의 탄생’의 핵심이다.

그러면 비극의 사망에 대해서 니체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자. “디오니소스는 비극의 무대에서 이미 사라져 버렸다. 다름 아닌 에우리피데스를 통해서 흘러 나오는 신들린 힘(Daimon)에 의해서 말이다. 에우리피데스도 아니다. 그도 실은 가면에 불과하다. 이 신들린 힘, 그것은 아폴론도, 디오니소스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이 탄생한 다이몬이다. 이름하여 소크라테스다. 그리스 비극에 사망에 이르게 한 자가 바로(‘비극의 탄생’ 제12장)” 이 자, 곧 소크라테스가 저 술취한 디오니소스의 광기와 광란의 굿판을 무대에서 추방하고, 이성과 지성을 통해서 펼쳐지는 세계를 무대 위에 올리고자 시도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라는 미친 괴물”이 나타나자, 그리스 비극엔 아폴론적인 힘만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다고 니체는 천명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이 바로 그 아폴론적 예술의 전형적인 파편이라 한다. “(…)지난 수세기 동안 철학이 신학에게 (시녀로)봉사했듯이, 문학을 변증론에 입각해서 전개되는 철학의 시녀로 만드는 이가 바로 플라톤이었다. 소크라테스라는 다이몬의 압력에 눌려서 말이다.”(‘비극의 탄생’ 제14장)



‘비극의 탄생’이 출간되자 가장 심하게 반발한 사람은 니체와 동학이었고, 실은 4년 후배였던 빌라모비츠 묄렌도르프(1848~1931)라는 고전문헌학자였다. ‘(고전)문헌학의 미래(Zukunft der Philologie)’라는 문건을 통해서 그는 “(그런 의미에서라면)나는 기꺼이 디오니시우스의 제물이 되겠다. ‘소크라테스를 모범으로 삼는 인간’이 욕의 대명사라 한다면, 나는 그 욕을 기꺼이 듣겠다”고 선언한다.

소크라테스를 위해선, 니체가 뭐라 하든 워낙 든든한 후손들을 두었기에, 굳이 빌라모비츠의 말을 인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졸지에 비극의 살해 하수인으로 몰린 에우리피데스일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사로, 곧 에우리피데스의 구원자로서 빌라모비츠는 자처한다. “에우리피데스는 세계를 자신이 본 그대로 재현한 작가이다. 거기에는 어떤 수치도(aidos)와 원한(nemesis)도 없다.” 세계 묘사 혹은 세계 재현에 있어서 ‘쿨’한 에우리피데스의 태도야말로 진정으로 “혁명적”이라고 그는 평가한다. 이런 의미에서 에우리피데스는 “현대적 사유 방식의 예시자”이며, “구시대적 사고와 전통을 흔들고 일소하는데, 어떤 소피스트도 못해낸 일을 그가 해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실제 작품을 통해서 살펴보자. 메데이아라는 여인은 한 남자의 아내이면서 두 아이의 엄마였다. 어느 날 남편이 새 장가를 가겠다고 한다. 배신이다. 이 여인은 아이들을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기로 한다. 복수의 다른 수단도 있는데, 왜 아이들을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하냐고? 복수의 극대화를 위해서다. 남편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희생시키는 것이 가장 큰 복수이므로. 단순 원한 치정극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에우리피데스를 통해 비극으로 탄생한다. 비극인 이유는 다음에 있다. 곧, 남편에 대한 사랑과 자식에 대한 사랑이 저울질 된다면, 그중 어떤 것이 더 힘있고 강한가에 대한 물음이 작품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동가의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때, 동가의 규범들이 부딪힐 때, 예컨대 사랑과 의무가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작품은 던지고 있다.



이렇게 누구나 겪을 법한 모순적 상황, 딜레마의 배경에서 작용하고 있는 보편적 가치와 규범들 간의 충돌이 이야기 전개(플롯)의 중핵이라는 점에서,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는 비극임에 틀림없다. 물론 비극의 전경(前景)은 메데이아와 이아손이라는 특정 인물들의 갈등이지만, 배경에서는 남편에 대한 사랑의 가치와 자식에 대한 사랑의 가치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으므로. 그러니까 이 힘겨루기가 인물 간의 적당한 타협과 화해를 통해서 해결되는 싸움이 아니라, 규범들의 전쟁이고, 이 전쟁의 끝에서 어떤 가치가 어떤 필연적 강제(Ananke)의 힘을 얻어 승리하는지와 이러한 종류의 싸움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를 한 번 살펴 보자는 점에서 비극인 셈이다.

이런 종류의 고급 싸움을 한 번 지켜보자는 것이다. 이 싸움은 때때로 우리의 삶 안에 투영되어 서로 부딪히며, 우리를 힘들고 괴롭게 하니까. 그래서 싸움이 어디까지 가는지, 그 충돌의 끝점을 한 번 지켜보자는 것이다. 다행히 이런 싸움을 직접 겪는 것이 아니므로, 한 걸음 물러나서 관조(theorein)해봄으로써, 사태를 객관적으로 한 번 통찰해 보자는 것이다.

‘쿨’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그대로 재현해 보고, 그 사태의 배경에 작동하고 있는 가치와 규범들의 줄다리기를 ‘쿨’하게 지켜보자는 것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의 핵심이다. 이렇게 에우리피데스는 관객을 혼연일체의 현장에서 보편의 관객으로 끌고 올라간다. 이에 대해서 에우리피데스를 비극의 살해 하수인이라 보는 니체의 견해에 대해서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07.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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