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한겨레)과 수요일(한국일보)를 제외하면 내가 주로 가판에서 조간으로 집어드는 건 경향신문이다. 아마도 작년 하반기에 연재된 '진보개혁의 위기'란 '특집기사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듯하다. 기획력과 기동력이 있는 신문으로 새롭게 각인된 것이다. 이 연재는 올봄에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후마니타스, 2007)으로 묶여 출간되기도 했다.  

그러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읽히는데,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기획기사가 오늘 아침신문의 특집으로 실렸다(한동안 연재될 듯하다). 민주화 이후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 감소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향이라 '유예돼 왔던' 죽음이라 고 해야 할 텐데, '한국의 사례'로 읽어두고 옮겨놓는다(기사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분기점은 김대중 정부에서의 '신지식인론'이었다. '항소'나 올리는 전통적 지식인상에 '사약'을 내린 격이 아니었을까?).   

경향신문(07. 04. 23) 지식 찍어내는 사회, 지성은 숨쉬는가

서울대 경제학부 김수행 교수는 1989년 3월부터 서울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마르크스 강의였다.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300명 규모의 강의실은 매번 만원이었다. 비좁은 계단을 파고들어 앉아 기어코 강의를 들었다. 91년에 이 강의를 수강했던 신모씨(36)는 “중간·기말 고사 때 1000여명이 모여 시험을 치르느라 건물 한 동을 다 빌릴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로부터 18년이 흐른 지난달 30일 오후 1시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83동) 506호. 김교수는 여전히 마르크스를 가르치고 있었다. “케인스는 상당히 훌륭한 경제학자예요. 자기가 살던 시대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죠.” ‘현대마르크스 경제학’ 과목. 이날 수업은 케인스의 유효 수요 이론과 장기 정체설에 관한 것이다. 210명 규모의 강의실에 40여명의 학생만 앉아 있다.



조교 정상준씨(32)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수업에는 안 들어와도 시험 때 들어와서 밖에서 토론하고 ‘학습’한 가락으로 일필휘지 답을 적고 나가던 ‘고수’들이 있었다. 지금은 강의를 열심히 듣지만 판에 박힌 답안만 제출한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요즘 학생들을 보면 다들 취업에 너무 매달려. 신입생 때부터 그래. 이해는 돼. 대한상공회의소 이런 데서는 성적표에 마르크스 경제학 표시가 돼 있으면 ‘이런 수업을 왜 들었느냐’고 물어본다지”라고 했다.

올해 정년을 맞는 김교수는 요즘 후임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경제학부 교수가 34명인데 미국 박사가 31명이야. 비주류 경제학은 나 하나뿐이야. 올해 내가 정년퇴직하면 비주류 경제학이 없어질지 몰라. 요즘 새로 들어온 경제학과 교수들 대부분이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어. 마르크스 경제학을 둘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가진 젊은 교수들이 많아.” 이 문제는 비주류 경제학자를 뽑을 것인가라는 단순한 임용 문제가 아니라 한국 지식 사회에 비판적 지식인의 재생산 구조가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학부 시절 김교수의 ‘마르크스’ 수업에 열광했던 인문학자 고병권씨는 ‘지식인의 비극적 죽음’을 예감했다고 한다. 그는 “예전에는 김교수 같은 분들의 글이 잡지에 실리면 논쟁에 불이 붙고, 대자보도 붙이고 했는데 지금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제는 대학을 ‘지성의 전당’이라고 말하는 이도 드문 세상이 됐다. 실용과 부가가치 창출은 대학의 최고 목표가 되었다. 일부 대학의 국문학과는 ‘시나리오 학과’로 명칭을 바꿨다. 대학가 인문과학서점은 하나 둘 줄더니 요즘 대부분 문을 닫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걸쳐 전개된 ‘지식기반사회’ ‘지식기반경제’는 우리 사회가 지식을 비판이성의 관점이 아닌, 산업으로 수용하도록 주입시켰다. 교육의 목표는 ‘올바른 시민’의 육성이 아닌, ‘시장반응형 인간’ 양성으로 변했다. 기업은 대학의 진정한 주인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교육부와 전경련이 함께 경제교과서를 만들어 노동을 모욕하고 재벌을 찬양하는 세상이 됐다.

포털사이트 네이버는 ‘지식인’이란 명사를 동사로 만들었다. 지식인에게 묻는다는 것은 ‘지식iN’ 네트워크와 검색툴을 이용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지식은 붕어빵처럼 대량생산되는 복제품이 된 것이다. 한때 시대 정신을 선도했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저술활동은 쓴 사람과 평가하는 사람들만 읽는, 틀에 얽매인 지루한 논문들로 대체되고 있다. 학자는 ‘논문 작성 노동자’로 변모하고 있다. 이것이 지식인의 죽음이 어른거리고 있는 한국사회의 풍경이다.(김종목·손제민기자)

경향신문(07. 04. 23) 2007년 한국 지식인의 풍경

“지식인의 몰락 또는 위기 담론에 동의하는가.” 특별취재팀이 지식인들에게 던진 물음이다. 한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위기’니 ‘몰락’이니 하는 건 그 이전 지식인이 큰 힘을 쓰던 시절이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건데, 과연 그랬던 적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김진애(도시건축가)는 “‘합리적 대안 생산자’ ‘대승적 소통자’로서의 지식인 역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진애는 “‘지식인의 ‘위기’니 ‘몰락’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고 말했다.

87년 이후 민주화 20년을 맞아 등장하고 있는 지식인의 죽음 논쟁은 19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 시절이다. 전상인(서울대 교수)은 “관 주도로 전 국민을 직업과 지위에 관계없이 신지식인으로 만들겠다는 김대중 정부의 발상은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의 개편과 교체를 예고한 서막이었다”고 말한다.

98년 12월4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12차 경제대책조정회의. 김태동 정책기획수석이 학력 위주의 지식인 개념을 독창성·능동성 위주로 확장시킨 ‘신지식인상’을 보고했다. 이듬해 초 신지식인 찾기 운동이 ‘제2의 건국’ 캠페인과 맞물려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용가리’로 272만달러 수출 계약을 성사시킨 심형래씨가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되었다. 그는 신지식인 광고에 나와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당신도 신지식인입니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부가가치 창출의 다른 말이었다. 졸지에 ‘구지식인’으로 몰린 지식인들이 반발했다. 이남호 고려대 교수는 “우리 사회가 지식인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엄격한 비판정신과 사회적 책임감에 있을 것이다. 신지식인은 이러한 지식인의 근본적 의미를 완전히 무시한다(경향신문 99년 4월29일자 칼럼)”고 했다.



지식인은 이제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자’가 되었다. 지식인은 비판적 이성이 거세된 전문가로 대체되고 있다. 권력에 위험하지 않은 지식인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키워지고 있다. 교육부 정식 명칭은 교육‘인적자원부’이다. 사람을 어떻게 효율적인 생산 수단으로 만드는가를 고민한다는 뜻이다. 교육부가 2005년 대통령 보고에서 “다양화·특성화된 ‘시장반응형’ 인력을 양성”하고 “지식기반 경제의 패러다임 변화에 따라 ‘산학연 협력 활성화’를 통해 성장 동력을 창출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시장반응형 인적 자원? 이들이 바로 새 세대의 지식인이 될 것이다.

아직도 수많은 학자들이 있는데 우리 사회가 쉽게 이런 새 세대 지식인들에게 압도당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의심스러워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학자의 세계를 들여다 보자. 한 교수가 말한다. “대학 교수에게 중요한 게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연구 업적이고 또 하나는 연구비를 따오는 거예요.” 그는 자기 학교에서 우수 교수 평가 기준은 ‘연구비 수령 건수와 액수’라고 전했다. 이런 현상은 학계의 ‘빅브라더’ 한국학술진흥재단과 관련이 있다.

이른바 ‘학진’이란 약자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연구 지원 기관은 학계의 거대한 지배자다. 학진의 힘은 연간 1조원 가량을 쓴다는 사실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관의 연구비 지원을 받으려 경쟁하는 체제, 이것이 한국 학술의 레짐(regime·체제)이다.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온 김모씨. “전 에세이식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학진 체제 아래서는 빛을 볼 수 없어요. 학진은 정형화된 논문식 글쓰기밖에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어진 김씨의 말. “이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 마감 맞추는 걸 가리키는 말이에요. 좋은 평가로 연구비 지원을 받아 먹고 사는 ‘논문 작성 노동자’만 수없이 양상되는 거죠.” 그는 “학진 체제 아래 지식인들이 신음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계간지 편집장은 “학술지 또는 계간지에서 그야말로 ‘재미있는’ 글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담론 논쟁을 주도하는 경우도 거의 없어졌다. 모두 학진 등재지에 딱딱하고 재미없는, 심지어는 같은 전공자들도 안 읽어줄 글을 쓰느라 밤 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틀에 박힌 지식을 재생산하는 데는 학진 체제가 유용할지 몰라도, 한 시대를 뛰어 넘는 창의적인 저술, 그 저술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라는 지식사회의 풍경은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느 대학 교수는 “예전에는 권력이 정부에 반대되는 글쓰기를 통제하는 정도였다면 지금 학진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지식인들의 글쓰기를 통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문 성과? 최근 한 문화재단에서는 학술상 심사를 벌였다. 심사위원 5명 중 2명이 추천대상을 내놓지 않았다. ‘사회개혁·발전과 학문업적을 연결시키는 저작’이 수상 요건이었지만 적격자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다수 학술상 주최측이 수상 요건 미흡 때문에 수상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논문의 양은 갈수록 늘지만 ‘성과’라 할만한 결과물은 갈수록 줄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교수들은 이런 체제에서 행복할까? 요즘 교수들은 정치권력, 경제권력과 사귀는 데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어느 방송 진행자는 “최근 모 대선 주자 캠프 소속의 지식인이 참여한 정치 관련 토론을 진행하다, 그 지식인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걸 봤다”고 말했다. 이런 살기어린 토론은 교수와 정치의 관계를 잘 드러낸다. “잘 나가는 대선 주자 캠프에 지식인 수백명이 줄서 있다”는 소문은 터무니없는 과장이 아니다. 어느 대학 교수는 지식인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3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①정·관계에 진출하려면 대학에 사표를 내야 한다. ②대학에 있으면서 특정 정치 집단의 브레인이 되면 그 사실을 공개해야 한다. ③각종 위원회에 참여한 경우 그 활동을 통해 얻은 금전적 수입과 활동내역을 대학에 보고해야 한다.

부수입 올리고 영향력 행사하며 재미는 다 보고, 학생 가르치기는 소홀히 하는데도 ‘업적평가’ 점수를 덤으로 받는 이들이 오늘날 대표적인 지식인의 한 모습이다. 이렇게 정치권력에 종속되거나, 아니면 저항하거나 양 극단 사이에 방황해 온 것이 한국 지식인 사회이다.



기성 지식인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지식인 재생산 메카니즘이 고장난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더 이상 지식인은 막걸리 집의 치열한 토론을 통해, 강의실에서의 논쟁을 통해, 감옥의 사색을 통해 등장하지 않는다. 지식인은 미국이라는 거대 공장에서 대량생산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은 지난달 말 미국을 제외하고 올해 가장 많은 학부 합격생을 배출한 국가는 한국이라고 밝혔다. 35명이다. 불과 두자릿수라서 적다고 여겨진다면, 미국 이민세관국(ICE)의 최근 발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ICE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미국 내 외국인 학생 중 한국 출신이 9만3728명으로 전체(63만998명)의 14.9%를 차지, 국가별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미국 고등교육전문 주간신문 ‘고등교육 연감(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에 따르면 99년에서 2003년 사이 미국 박사 학위 취득자의 학부를 조사한 결과, 서울대가 1655명으로 2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지식인 재생산의 주권을 잃어가고 있다.

오늘날의 지식인은 ‘경제권력’과도 잘 어울린다.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지 못해 안달이고, 산학협동은 ‘산학일체’로 진화중이며 대기업 연구 용역비를 받는 상당수 교수들은 재벌개혁 이야기를 입밖으로 꺼내지도 않는다.(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경향신문(07. 04. 23) 지금 왜 지식인이 문제인가

지식인은 신분적 특권이나 재산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지식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고 힘을 행사한다. 지식인과 그 출신 배경이 반드시 직접적으로 연결될 필요는 없다. 지식인의 지식은 어느 정도 자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지식인의 자유로움에 대한 주장은 이런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지식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독학으로 유명 지식인이 된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지식을 통해 힘을 행사하는 정도의 지식인이 되려면 권위 있는 교육기관에 소속되어 오랫동안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동안 지식의 습득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학(同學) 끼리 유대 관계도 맺어진다. 이른바 학벌(學閥)이라는 것은 이런 친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지식인은 한편으로 신분과 계급으로부터의 상대적인 자유로움과 독립적인 사고를 자랑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집단의 이익을 위해 결속을 하며 문화적인 동질성을 도모한다.



집단으로서의 지식인은 두 가지 다른 집단을 상대한다. 하나는 지배 엘리트로서 정치적, 경제적 지배 집단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피지배 집단인 일반 대중이다. 지식인은 지배 엘리트와 결탁하기도 하고, 피지배 집단에 봉사하기도 한다(*그러한 지식인상의 원조가 러시아 인텔리겐차이다).

전자의 경우 지식인은 기존 체제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며 지배집단의 헤게모니를 정착시킨다. 후자의 경우에 지식인은 현 지배체제의 착취구조를 폭로하며 대중의 혁명의식을 고취시켜 새로운 지배체제를 만들려고 시도한다. 체제 고착이든 체제 전복이든 지식인은 자신의 무기인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어느 경우에나 지식인의 힘은 자신의 이해 타산을 숨기면서 공정하고 보편적인 수사학을 동원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지금의 체제가 강고하게 버티건, 아니면 뒤집어져서 새로운 체제가 되건 그건 아무래도 좋다. 지식인이 지닌 관점을 보편성의 준거로 삼으면서 그의 상징적 권력을 인정해주는 상황이라면 지식인은 어느 쪽이라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어떠한가? 그럴 경우라면 지식인의 위기를 논하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에서 집단으로서의 지식인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가 위기에 처한 한말과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던 일제시대이다. 기존 신분제가 해체되고 새로운 권력 기반이 형성되는 상황에서 지식인은 당시의 위기에 대한 진단과 질곡에서 벗어날 방향을 일반 대중에게 알려주면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했다. 망국의 울분을 토로하고, 독립의 희망을 간절하게 표현하면서 지식인은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선구자로서 인정받았다. 더구나 위기상황 돌파의 유력한 방법으로 교육을 통한 체제 갱생을 강하게 주장함으로써 지식인은 자신의 재생산 기반을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자, 그동안 민족독립의 공통분모 아래 억눌려있던 지식인 집단의 다양한 노선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의 냉전 상황에 따라 좌우의 극단적 대립을 보이면서 지식인은 양극화되었다. 이런 대립은 결국 한국전쟁으로 나타났고, 휴전과 더불어 남쪽과 북쪽의 체제는 각각의 이데올로기를 섬기면서 서로 이질적 이데올로기의 배제와 탄압에 골몰했다. 우파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게 된 남쪽의 경우 지식인 집단은 민족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북쪽과의 경쟁에 적극 참여했다.

좌우의 민족통합 이데올로기가 억압된 상태에서, 1970년대의 지식인들은 한편으로 경제성장을 위한 개발독재의 옹호, 다른 한편으로 보편적 인권과 민주화 지향 노선으로 나뉘어 복무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하여 대부분의 지식인은 우리 사회의 인권과 민주화 노선의 역사적 타당성에 동의하게 되었다.

민주화 노선이 대세를 점하기 시작한 1987년부터 지금에 이르는 20년 동안 많은 지식인들이 인권과 민주화의 명제를 확산시키는 작업에 주도적으로 가담했고, 그 명제의 안정적인 정착과 함께 그동안 상대적으로 억압되었던 민족 통합의 이데올로기도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데올로기와 체제의 차이를 넘어서서 민족 통합을 이루려는 이와 같은 남쪽의 시도는 동유럽과 소련의 해체, 중국의 급속한 개혁으로 위협을 느끼고 있던 북한의 모험주의를 견제하고, 새로운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요청된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이처럼 민주화와 민족 통합을 동시에 이루고자 노력했고, 지식인의 담론도 대체로 이런 방향에 호응했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시기에는 인권 보장과 민주화의 장치가 제도적으로 마련되고 정착되었다. 언론에 대한 권력의 직접적 통제도 사라졌고, 그동안 금기 영역이었던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비판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공적인 자리에서 대통령이 불편함을 토로할 정도였다. 그동안 지식인 현실 참여의 주요 통로였던 민주화 명제는 어느 정도 실현되었고, 민족 통합에 대한 전망도 남북 교류의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부시 정권의 북한 퇴출 압박에 북한이 핵개발로 맞서면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를 계기로 하여 남쪽과 북쪽의 대결을 주장하며, 민족 통합의 지향을 견제하는 담론이 부각되었고, 이른바 ‘신우파’라는 세력이 형성되었다.

민주화의 실현과 정착에 따라 지식인의 민주화 명제는 구호의 단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취를 위한 것으로 변화되었다. 민족 통합의 명제는 정부의 주도 아래 검토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 ‘신우파’의 미미한 견제만 보일 뿐이다. 민주화의 명제가 현실화되고, 민족 통합의 노력이 정부 차원에서 진행되면서, 이를 맹렬하게 요구하던 지식인은 담론의 초점을 잃고 새로운 열정을 찾아 헤매고 있다. 더구나 공산주의가 몰락한 국제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 한국 사회가 강제로 포섭된 사건은 지식인의 위기의식을 첨예하게 만들고 있다.

여러 이데올로기가 각축하는 가운데 스스로 보편성을 구현한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한 지식인이 이제 신자유주의의 나팔수로서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세계적인 ‘투명’ 경쟁 체제의 효율성을 당연하게 선전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관점은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역사의 종말을 외치며 자신이 절대 지존임을 자랑한다. 그 헤게모니 체제에 대항하는 지식인은 대안 없이 허풍만 떠들어대는 자이고, 현실성이 없는 자로 취급 받는다. 지식인의 상상력은 대항 체제를 만들어내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공장 체제 안에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써야 한다고 선전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식인의 전통적 권력도구였던 글쓰기도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바야흐로 문자시대가 가고, 새로운 구술시대와 영상시대가 오고 있는 마당에서 지식인은 자꾸 낯선 곳으로 몰리고 있다. 이전에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었던 자들이 지식인의 독점 영역에 침입하여 ‘신지식인’임을 주장한다. 그에 따라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구지식인’으로 치부되는 형편이 된다. 보편적 지식인의 요새였던 대학의 변신도 현저하다. 대학도 수요와 공급 법칙의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서 대학의 지식인은 상인(商人)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제 지식인은 시대의 방향을 이끄는 선구자가 아니라, 문화상품을 만들어 파는 샐러리맨의 처지가 된 것이다.



지식인은 더 이상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고를 자랑하지 못한다. 그들의 지식은 문화 콘텐츠 개발에 연관될 경우에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화적 동질성도 더 이상 확보될 수 없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기반인 글쓰기의 위상 변화에 보이는 그들의 당혹감일 뿐이다. 그들의 옛 열정은 사그라졌고, 그들의 상징권력은 더 이상 당연시되지 않기 때문에 바야흐로 지식인의 위기가 설왕설래되고 있다.(장석만 충간문화연구소 소장)

07. 04. 23.

P.S. 러시아 인텔리겐챠를 영국의 젠틀맨, 일본의 사무라이에 비교하기도 한다(우리라면 '선비'에 해당할까?). '지식인의 죽음'은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마지막 사무라이' 시대에 견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분명 한때는 그들의 시대였다. 하지만, 시대는 변한다. 해서 지식인의 죽음은 애도할 만한 것이지만 비통한 일은 아니다. 차라리 지식인을 '가장'하는 치들이 더 문제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드팀전 2007-04-23 09:37   좋아요 0 | URL
지난 두어주 정신없이 보내며 감성이-분노에 가까운- 이성을 지배하는 시간을 보냈는데 이번 주부터는 좀 가라앉히고 지내기로 했습니다.^^ 건드리지 말아야될텐데.

안그래도..출근해서 새로운 기획 기사를 읽고...옮겨야지 했는데...이미 로쟈님이 선수를 치셨습니다.^^

"지식인은 이제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자’가 되었다. 지식인은 비판적 이성이 거세된 전문가로 대체되고 있다. 권력에 위험하지 않은 지식인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키워지고 있다."

"교육의 목표는 ‘올바른 시민’의 육성이 아닌, ‘시장반응형 인간’ 양성으로 변했다. 기업은 대학의 진정한 주인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신문을 못볼경우 로쟈님의 페이퍼로 읽어야겠어요.

로쟈 2007-04-23 09:43   좋아요 0 | URL
'지식인의 죽음'은 서구나 일본에선 이미 뉴스거리가 아니라고 하는데, 우리의 경우 잠시 유예됐을 뿐이겠죠. 87년 때문에. 그 후 20년이니까 '약발'이 다 돼 갈 만한 시기이긴 합니다...

자꾸때리다 2007-04-23 12:17   좋아요 0 | URL
암울하네요. 퍼갑니다.

클리오 2007-04-23 14:40   좋아요 0 | URL
휴.. 여러가지 생각들이 왔다갔다 합니다. 제 자신의 입장과 미래를 포함해서요...

yoonta 2007-04-23 14:53   좋아요 0 | URL
"지식인의 죽음"...심각하죠. 그런데 지금의 한국의 상태가 일본혹은 특히 서구(유럽)보다 더 심각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로쟈님은 유예되었을 뿐 서구나 일본이 더 심각하다고 하셨는데..전 잘 모르겠네요. 오히려 국내가 더 심한 것이 아닐지..

로쟈 2007-04-23 16:10   좋아요 0 | URL
yoonta님/ 그쪽이 더 심각하고 자시고 할 건 없는 것 같고요, 그쪽에서 먼저 그런 일이 일어났고 우리도 자연스레 그런 추이를 따르는 거라 생각합니다. 지식인의 발생 자체가 역사적 조건에 따른 것이라면 그 소멸/종말 또한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yoonta 2007-04-23 21:00   좋아요 0 | URL
네..어느쪽이 더 심각한지 따지는것은 큰 의미는 없는데요. 바로 위의 글에서 좀 구분없이 서술된 부분이 뭐냐면 "바야흐로 문자시대가 가고, 새로운 구술시대와 영상시대가 오고 있는 마당에서 지식인은 자꾸 낯선 곳으로 몰리고 있다. "와 같은 것은 사실 20세기 이후의 서구의 역사와 맞물려있는 보편적 현상을 설명하는 대목인 반면 "신자유주의적인 관점은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역사의 종말을 외치며 자신이 절대 지존임을 자랑한다. 그 헤게모니 체제에 대항하는 지식인은 대안 없이 허풍만 떠들어대는 자이고, 현실성이 없는 자로 취급 받는다. 지식인의 상상력은 대항 체제를 만들어내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공장 체제 안에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써야 한다고 선전된다. "와 같은 대목은 다른 나라보다 유독 신자유주의의 이식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한국적 특수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위의 글에는 이것을 구분없이 마치 모든 세계의 지식인들의 보편적 현상인것 마냥 서술하고 있으니 좀 문제라는 것이지요..기왕 "지식인의 상품화"를 이야기하려면 위에서처럼 허술한 얼개로 서술할게 아니라 보다 엄밀하게 서술될 필요가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좀 남네요..

로쟈 2007-04-23 22:47   좋아요 0 | URL
마지막 외부 필자의 기사의 논점엔 저도 유보적입니다. 보다 정치하게 다루어져야 할 사안인데 너무 많은 내용을 짧은 지면에 포개넣으려고 한 탓이 아닌가 싶어요...

pax 2007-04-24 02:36   좋아요 0 | URL
지식인이 죽는 건 상관 없는 데 반지성주의의 득세는 사양??ㄳ

자꾸때리다 2007-04-24 12:02   좋아요 0 | URL
고구려사에 대해 평생을 연구한 학자의 연구 작업보다. 드라마 출연한 연예인들의 말 한마디가 훨씬 영향력을 가진 세상.

웅아 2007-04-24 21:08   좋아요 0 | URL
강의실 좋구만

sb 2007-04-26 01:22   좋아요 0 | URL
로쟈님, 저도 퍼갑니다. ^^

정익원 2007-06-24 21:3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경재권력에 매수된 지식인은 부끄러운줄 모르고 당연시하고 있읍니다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만능사회 고착화 굳히기 하고 있으므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출을 기대합니다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작가 김소진씨의 10주기이다. 지난주에는 이를 기념하는 동료, 선후배 문인들의 문집 <소진의 기억>(문학동네, 2007)이 출간됐다. 지난 겨울 젊은 평론가들이 이 문집과 관련한 원고 얘기를 하는 걸 들었는데 바로 그 책이다. 작가의 신춘문예 데뷔작 '쥐잡기'(1991)가 발표된 지면과 첫 소설집 <열린사회와 그 적들>(솔출판사, 1995)이 기억에 남아 있는데 '63년생 작가군'의 한 축이었던 그가 유명을 달리한 지 어느덧 10년이다. 문단의 유망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그의 소설들을 미처 챙겨읽기도 전이었다. 이번에 추모문집이 나와서 든 생각이지만 김소진의 죽음과 그에 대한 추모는 시인 기형도의 죽음/추모와 겹친다. 장르는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신춘문예로 등단해서 언론사 기자생활을 했던 일까지 공통적이다. 그리고 요절까지. 이들을 추억하는 선배 이경철 (전)기자에 따르면(http://daesan.or.kr/wepzine/2006winter/%BF%EC%B8%AE%B9%AE%C7%D0%C0%C7%BC%F8%B0%A3%B5%E9.htm) 두 사람의 죽음은 한국문단의 한 분기점들을 이룬다. 김소진에 대해 추억하고 있는 대목.

기 시인의 죽음이 젊은 시단의 한 분수령이 됐다면 1997년 4월 22일 소설가 김소진 씨의 34세의 갑작스런 죽음은 젊은 소설계의 한 분수령이 된 상징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온 김 씨는 죽기 한 해 전 잘 다니던 한계레신문 기자직마저 팽개치고 소설에만 전념, 가장 주목받은 작가로 떠오르며 그해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도 수상했다.

스스로도 전업작가로 돌아서길 잘했다며 한 해 세 권의 소설집을 펴낼 정도로 창작욕에 불타오르던 김씨는 이듬해 초 췌장암으로 손 한 번 제대로 못써보고 “형, 먼저 가서 미안해”라는 말만 남기고 숨을 넘기고 말았다. 김 씨를 96년도 가장 주목받은 작가로 선정, 기사도 다루고 본격소설의 위의를 지켜달라고 격려했던 나 역시 그의 죽음이 쓰렸지만 내심 아프고 당혹스러웠을 사람들은 김 씨보다 앞서 전업의 길을 택한 작가들이었을 것이다.

민주화도 눈에 띨 정도로 진척되고 경제도 95년 1만 불 시대로 나아가던 1990대에 접어들자 신예작가들이 ‘이제 글만 써도 먹고 살 수 있겠구나’ 하는 판단에 직장도 팽개치고 하나 둘씩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고 김 씨 또한 그러했다. 본격소설의 위엄을 지키며 한국소설의 대들보로 떠오르던 김 씨는 선배 전업작가의 창작욕을 부추겼을 뿐 아니라 돈 등에 딴눈 팔지 말고 본격소설을 지키게 하는 하나의 항체로 작용했을 것이다.

김 씨의 요절 직후 IMF 외환위기를 맞아 경제가 거덜 나 많은 잡지, 사보 등이 폐간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일간지들의 연재소설 지면과 문예지의 페이지도 줄어들고 원고료도 인하돼 고료수입도 거덜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뒤에서 본격문학의 양심으로 무섭게 추동해대던 김 씨마저 죽고 없는 젊은 전업소설계는 상업화의 유혹을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후에 우리는 뭔가 다른 소설들을 읽게 되었던 듯도 하다. 우리문학이 끝까지 가지 않은 길('80년대 문학')의 한 이정표로 그가 서 있었던 것은 아닐까도 싶고. '푸르른 계절'로 가는 길목에서... 그가 한동안 몸담았던 한겨레신문에서 작가의 10주기 관련기사들을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4. 20) 목마른 한국문학 ‘그리운 김소진’

작가 김소진(1963~1997)이 우리 곁을 떠난 지 22일로 꼭 10년이 된다. 1963년 음력 12월 3일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에서 태어난 김소진은 1997년 양력 4월 22일 새벽 서울 연희동의 한 한방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34의 풋풋한 나이였다.

1991년에 등단해 1997년에 세상을 뜨기까지 불과 6년여의 활동 기간 동안 김소진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글을 썼던 다산의 작가였다. 그 사이 그의 소출은 소설집 네 권, 장편 2편과 미완성 장편 하나, 콩트집 2권, 동화 1권, 산문집 1권에 이른다. 그러나 김소진 소설의 의미와 가치를 양적인 측면에서만 찾아서는 곤란하다. 그의 활동기는 80년대를 풍미했던 공동체적 윤리감각이 90년대의 개인주의에 자리를 내준 시기와 겹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청년기이자 습작기였던 80년대의 문학관을 의연히 작품 속에서 견지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80년대적 교조까지도 답습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민중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결코 민중을 맹목적으로 신격화하지는 않았다. 그는 우리 사회가 더욱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소설 속에 담았지만, 그런 당위에 꿰어 맞추느라 현실의 복합성을 호도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김소진은 80년대적 가치를 90년대적 현실에 적합한 방식으로 구현하고자 애쓴 작가였다. 80년대 문학의 ‘전통’을 지양함과 동시에 90년대 문학의 새로운 ‘주류’와도 분명한 거리를 둔 그는 차라리 2000년대 문학의 선구자로 불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없는 세월이 10년의 두께를 쌓아 가는 동안 ‘김소진’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져만 갔다. 그의 사후에 등장한 젊은 독자들은 물론 그와 동시대를 호흡했던 ‘늙은’ 독자들조차 더 이상 그의 소설을 읽지 않으려는 듯하다. 그가 죽음의 방문을 받고 더는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되자 독자들 역시 그의 소설 읽기를 그만두기로 작정이나 한 듯이.

그의 10주기를 맞아 남은 이들이 펴낸 추모문집의 제목이 <소진의 기억>(문학동네 펴냄)이라는 것은 그런 점에서 적절해 보인다. ‘소진(金昭晋)의 기억’은 지금 ‘소진(消盡)의 기억’이 되어 버렸으므로. 그러나 <소진의 기억>의 편자들(안찬수 정홍수 진정석)이 썼다시피 김소진 문학은 오히려 지금 시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중심에서 배제된 주변부적인 것들에 대한 이 작가의 생리적인 애착과 공감은 잘 알려져 있지만, 김소진 소설 역시 문단의 주류나 문학적 평가의 중심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중심에서 한 걸음 비껴나 자기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밀고 나간 김소진의 소설이야말로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어떤 편향과 맹목을 되비쳐주는 하나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2007년 현재 시점에서 김소진을 다시 읽어보는 일은 의례적인 추모 행위를 넘어 한국소설의 좌표를 점검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당대적 실천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편자들이 고인의 대학 친구들이자 절친한 문우들이라서 하는 얘기만은 아니다. <소진의 기억>에 실린 문인 30명의 글들에서 김소진 문학에 대한 그런 평가는 두루 확인된다. 유희석 전남대 영문과 교수는 ‘김소진과 1990년대’라는 제목의 평문에서 △김소진 소설 속의 민중은 1970년대 미아리 산동네 사람만이 아니라 21세기 오늘의 민중이 겪는 희노애락의 표정까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김소진의 ‘후일담’은 이념과 탈이념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반후일담적 후일담’이고 △단편 <열린 사회와 그 적들> 등에서는 변혁운동의 관료화 징후와 기층 민중의 주변화를 감지했으며 △중편 <목마른 뿌리>에서 보다시피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의 한반도 상황에 대한 예측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김소진 문학의 21세기적 의미가 있다고 진단했다. 평론가 김형중씨 역시 ‘비루한 것들의 리얼리즘’이라는 글에서 비루한 존재들의 위계 없는 등장과 발언으로 특징지어지는 김소진 소설의 리얼리즘이야말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이 운위되는 이즈음의 문학 상황을 선구적으로 구현한 형태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래 및 후배 소설가들이 산문과 소설의 형태로 표한 애정 또한 지극하다. 후배 작가 천운영씨는 ‘쥐덫과 쥐잡기’라는 제목의 산문에서 생전에 일면식도 없었던 김소진과의 기묘한 인연을 털어놓는다. 대학을 마치고 다시 입학한 예술대학 문창과에서 그가 생애 처음으로 쓴 소설의 제목이 ‘쥐덫’이었다. “집 안에 득실거리는 쥐를 잡기 위해 곳곳에 쥐덫을 놓으며 시간을 보내는 실직한 가장”과 운동권 아들의 이야기. 스스로 만족해하며 친구에게 보였더니, 그가 읽어 보라며 권한 소설이 김소진의 등단작인 <쥐잡기>였다. 아직 등단하기 전인 후배 작가는 <쥐잡기>를 미처 읽어 보지 못한 상태였거니와, 두 소설은 제목과 설정, 그리고 몇몇 구절까지가 흡사했던 것. “선점이라는 게 이거구나, 더 많이 읽어야 이런 일이 없겠구나, 습작소설과 작가가 쓴 소설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구나.” 복잡다단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씁쓸한 생각과 아울러, 언젠가 등단하게 되면 만나서 할 얘깃거리 하나가 마련되었다는 생각에 재미있어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배는 후배 작가의 등단(2000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절친한 문우였던 시인 안찬수씨는 “동트기 전/새 울음소리를/듣고 있는 게/나 혼자는 아니다”(<블랙마운틴에서>)라는 말로 친구를 그리워했고, 후배 시인 장철문씨는 “동구 밖으로 가듯이 지평선으로 가듯이/멀어져갈 때,/그냥 내버려두었다/잔을 놓는 벗의 겉옷을 집어주듯이/그때 내 상반신이 튀어나와 꺼이꺼이 울며/달아나는/그림자를 따라가 붙잡으려 했다/나는 뒤에서 내 허리를 꽉 껴안았다”(<2005년 4월, 마르세유>)며 애써 슬픔을 다독였다.

후배 작가들이 쓴 헌정 소설들도 흥미롭다. 김중혁씨는 <무방향 버스­리믹스 ‘고아떤 뺑덕어멈’>이라는 단편에서 김소진의 소설 <고아떤 뺑덕어멈>의 첫 두 문장과 마지막 두 문장을 자신의 소설 속 첫 두 문장과 마지막 두 문장으로 써먹는 식으로 선배 작가에 대한 ‘오마주’를 시도했다. 윤성희씨는 김소진 소설들에 구멍을 통해 훔쳐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에 착안해 <구멍>이라는 단편을 썼다. 김중혁 소설에서 어머니가 ‘무방향 버스’를 타고 사라지는 데 비해 윤성희 작품에서는 아버지가 어느 날 문득 생의 블랙홀(구멍)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는 비슷한 설정이 등장한다는 점은 가외의 재미를 준다.

‘그에게 바치는 ‘쐬주’ 한잔’이라는 산문을 기고한 선배 작가 이혜경씨는 생전의 김소진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 그런 그가 추모문집에 글을 보탠 것은 “이 인연으로라도 그의 묘지에 ‘쐬주’ 한잔 올리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이혜경씨는 21일 낮 경기도 용인에 있는 고인의 무덤(김소진의 사후 거처는 용인공원묘원 63번지 5-310이다)에서 바랐던 대로 소주 한잔을 바치게 될 것이다. 이혜경씨말고도 은희경 성석제 김연수 김중혁 윤성희씨 등 50여 명의 문우들이 이날 묘소 참배에 동행할 예정이다. 시인 김정환씨가 추모시 <김소진, 죽은 지 십 년>을 낭송하고, 천운영씨는 문제의 <쥐잡기>의 일부를, 전성태씨와 윤성희씨는 각각 <고아떤 뺑덕어멈>과 <눈사람 속의 항아리>의 일부를 낭독한다.

“혹 지금의 우리는 집단적으로 김소진이라는 이름의 폴더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추모문집에 실린 평론가 이경재씨의 글 ‘아버지의 진실’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추모문집과 추모모임이 이어지면서, “자기 목숨을 앞당겨 글을 씀으로써 소진”(이혜경)한 김소진의 10주기가 아주 쓸쓸하지는 않게 될 모양이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한겨레(07. 04. 23) 소설가 김소진 10주기 추모식

소설가 김소진(1963~1997)의 10주기 추모식이 21일 낮 경기도 용인공원묘원에서 열렸다. 추모식에는 김정환 신현림 박상순 안찬수 장철문(이상 시인) 이혜경 은희경 성석제 김인숙 권여선 박현욱 전성태 김중혁 천운영 윤성희 편혜영(이상 소설가) 류보선 서영채 정홍수 진정석 신수정 김영찬 손정수(이상 평론가)씨를 비롯한 문우들과 학교 후배인 오철우(<한겨레> 기자)씨 등 50여명이 참석해 고인의 삶과 문학을 되새겼다. 진정석씨의 사회로 진행된 추모행사에서는 후배 소설가 전성태 천운영 윤성희씨가 김소진 소설의 일부를 낭독했으며, 김정환씨가 추모시를 읽은 데 이어 추모문집 <소진의 기억>을 무덤 옆에 묻는 의식이 진행됐다.

먼저 낭독에 나선 전성태씨는 “김소진 선배님이 암 투병 중이라는 말을 듣고 병원으로 갔지만, 병실엔 들어가지 못하고 열린 문 틈으로 무릎과 종아리 언저리만 살짝 보고 나온 뒤 몇 시간 만에 부음을 들었다”면서 “살아 계셨다면 글 쓰는 동료로서 서로 외롭지 않았을 것 같다”는 소회를 밝혔다. 전성태씨가 <고아떤 뼁덕어멈> 중 주인공이 아버지의 화대를 대신 지불하는 대목을 낭독하고 나자 진정석씨는 “김소진과 전성태씨는 여러 모로 상통하는 소설 세계를 지니고 있는 작가라서 소진이 살아 있었다면 두 사람이 잘 어울렸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 낭독자인 천운영씨는 자신이 습작기에 처음 썼던 작품 ‘쥐덫’과 김소진의 등단작 <쥐잡기>에 얽힌 사연을 들려줬다. <소진의 기억>에도 실린 이 이야기를 소개한 데 이어 그는 “<쥐잡기>를 읽고서 거기 쓰인 순우리말과 토속어 어휘에 자극 받아 당장 헌책방으로 달려가 두툼한 국어대사전을 사 왔던 기억이 난다”며 “그때 읽었던 김소진의 책을 다시 펼쳐 보니 당시 내가 몰랐던 단어들에 밑줄이 쳐져 있고, 내가 특히 좋아했던 부분에는 네모 표시가 되어 있다”면서 <쥐잡기> 중 자신이 네모 표시를 했던 부분을 읽었다.



마지막으로 윤성희씨가 낭독에 나섰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의 마지막 부분을 읽운 그는 “주인공이 재개발을 앞둔 산동네 빈집에 들어가 똥을 누는 장면인데, 이 장면이 너무 좋아서 한동안 나도 소설을 쓸 때면 꼭 똥을 누는 장면을 포함시키곤 했다”고 소개했다.

추모문집 <소진의 기억>을 무덤 곁에 묻는 것으로 공식 추모 행사를 마무리한 일행은 무덤 주변에 자리를 깔고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으며 고인을 추억했다. 추모 문집과 추모식 행사를 주도적으로 준비한 친구 정홍수씨는 “소풍 치고는 너무도 좋은 소풍”이라며 “매번 올 때마다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게 아무래도 무덤 속 소진이가 힘을 써 주는 덕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7. 04. 22.

P.S. 개인적으로 나도 먼저 보낸 친구가 있어서 해마다 5월이면 그를 추모하는 조촐한 학술발표회의 발표를 맡곤 한다. 올해는 그가 좋아했던 작가 안톤 체홉과 레이몬드 카버의 마지막 단편들에 대해 몇 마디 늘어놓을 참이다. 그렇다고 그런 것이 위안이 될 수는 없다. 아래에서 한 친구의 시한부 삶을 되새김질하는 칼럼의 제목처럼 '오늘에 살라'는 정언명령에 충실할 밖에. 충실? 우리가 실천하고 있지 못한 어떤 것의 이름... 

씨네21(07. 03. 16)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오늘에 살라

내가 그를 처음 안 건 대학 시절 교련 수업 때였다. 학과가 달라 평소 수업을 같이 듣지 않았지만, 교련 수업은 단과대학별로 수강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그를 봤다. 자주 얼굴을 부딪치다 보니 졸업할 때쯤에는 인사말 건네는 정도의 사이가 됐다. 졸업을 하고 신문사에 기자로 취직을 하고 출입처에 나갔는데 다른 신문사의 기자가 된 그를 또 만났다. 그렇게 5년 정도를 같은 출입처를 나갔다. 입사 10년이 지나 내가 사표를 내고 모교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그가 만나자고 해서 다시 만났다. 당시 그는 경찰출입기자들의 우두머리인 시경캡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대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이듬해 그는 나와 같은 대학원에서 한 학기 수업을 같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기자직을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한 건 딱히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있어서도 아니었고, 대단한 사회적 성취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현재의 자리보다 조금 안정적으로 공부하고 글쓰며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를 위해 그는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십수년간 열심히 쌓아온 기자 경력을 버렸고, 물려받은 유산없이 월급으로 모은 재산의 상당 부분을 썼으며, 공부하는 내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싸웠다. 덕분에 5년 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얼마 뒤 한 명문대학에 교수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3년은 재임용을 위해 논문 집필과 강의준비에 매진했다. 지난해 가을 그는 재임용을 통과했다. 그 무렵 오랜만에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제 한시름 놓았다”고 했다. 좀더 안정적인 자리를 위해 불안과 싸우며 7, 8년을 보낸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난해 연말 나와 공동연구를 하던 그는 잦은 두통과 언어장애를 호소했다. 병원진단 결과는 뇌종양 말기였다. 치료를 위한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동안 자신을 돌볼 틈이 없어 보험도 들어놓은 게 없었다. 늦게 낳은 아들은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자신이 꿈꿨던 안정을 누리는가 싶은 순간에 그는 생애 가장 불안한 상황 속으로 미끄러졌다. 그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까지 불과 두어달 사이에 그가 겪은 지옥 같은 마음의 풍경을 내가 다 헤아릴 순 없다.

종종 그는 억울했해고, 타인과 자신을 비교했다. 더러는 안정을 위해 매진한 자신의 삶을 회한어린 눈길로 쳐다보기도 했다. 병을 물리쳐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 투병의지를 불태우는가 하면 이내 더불어 가야 할 친구로 생각하고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세상 밖으로 나가 있던 시선을 거두어 자기 자신을 조용히 응시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가 한창 진행될 때쯤이었다. 그는 방사선 치료가 끝나면 공기 좋은 조용한 시골에 들어가 마음을 다스리며 지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일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우리 대부분은 미래의 안정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노후를 위해 저축과 연금을 들고, 투병을 위해 암보험을 들고, 더 안정적 직장을 위해 대학원에 등록하고, 자녀의 안락한 삶을 위해 교육에 조기 투자하고…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을 위해 자신의 노동생산성을 쥐어짜야 하고, 거기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음주와 흡연을 하고, 피로를 씻기 위해 헬스클럽에 등록해야 하고… 그렇게 살다보니 주변의 인간관계가 도구적으로 되고, 소통없는 내면은 황폐해지고, 정서적 충족을 위해 불륜까지 몽상하고… 그리하여 다시 회귀하는 불안을 잊기 위해 지속적으로 안정의 고지를 향해 전진하는 이 단성생식의 삶. 2007년 한국사회의 중년, 누가 여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불안을 잊기 위해 안정의 고지를 구축하는 데 매진하는 삶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안정의 고지는 다가가면 멀어지는 신기루이며, 부재의 대상은 욕망할수록 불안이 깊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불안을 극복하는 다른 삶의 방식을 아직은 잘 모른다. 아마도 나눔이 아닐까 하는 심증은 간다. 불안이 내가 가진 것 혹은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상실의 공포에서 비롯된다니, 본인이 먼저 나눠주면 상실의 대상 자체가 없어져버릴 테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형식논리를 우리는 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일까?(남재일/ 문화평론가)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4-23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게요. 책만 사두고 언제쯤 읽을는지...

작은앵초꽃 2007-04-23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벌써 10년이 되었군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도 퍼가겠습니다.

로쟈 2007-04-23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이 이쁘시네요.^^
 

한주 한주가 정말로 쏜살같이 지나가버린다. '작가와 문학사이' 연재를 매주 한번씩 옮겨놓는 것조차도 숨가쁠 정도이니! 써야 할 아이템들은 매주 서너 개씩 쌓이지만 정말 하나도 마무리짓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레이몬드 카버에 대해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도 풀어놓을 말들은 한 보따리씩 되지만 시간을 내는 일은 당분간 어려울 듯이 보인다(미친 척하지 않는 이상). '전업 글쟁이'로 나서지 않는 한 이런 푸념은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궂은 날씨를 핑계로 투덜거려본다. 정현종의 시구를 빌면, 아으 세월이여, 금강역사(金剛力士)여!..(너무 과장했나?)

경향신문(07. 04. 21) [작가와 문학사이](15)정이현-‘과장된 거짓’들춰내기

일찍이 니체는 ‘여성의 위대한 재능은 거짓말이고 최고의 관심사는 외모’라고 말했다. 이 말에는 분명 여성비하적인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모든 비난은 언제나 자기가 비난하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고 있다(*안 그래도 니체의 여성론에 대해서 다시 정리해보려고 최근에 <즐거운 학문>을 군데군데 뒤적거린 적이 있다). 거짓말하기와 외모 꾸미기가 여성의 본질이라는 비난 뒤에 있는 것은, 그래서 도대체 여자들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는 체념 섞인 두려움이다. 여성은 심지어 완전히 발가벗었을 때조차 언제나 무언가를 입고 있다. 그렇다면 그 무언가는 무엇인가? 그 무언가마저 끝내 벗긴다면, 그때 여성은 ‘본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까? 그래서 완전히 이해될 수 있을까?

정이현은 오래 전부터 남성 철학자와 예술가들을 매혹시킨 여성이라는 알 수 없는 물 자체에 대해 말해왔다. “아니, 20, 30대 싱글 여성들의 재치 발랄한 일상을 그린 트렌드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를 쓴 그 정이현이?”하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첫 단편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실린 단편들을 보자.

소설 속 여성인물들은 하나같이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순결한 처녀, 무지하고 가련한 가정주부, 깔끔하고 지적인 커리어우먼, 세련된 프리랜서, 발랄하고 순진한 소녀처럼 보인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녀들은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힌, 속물적 계산법에 철저한 존재들로 판명된다.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거짓말은 당연하고 심지어 살인과 시체유기까지 서슴지 않는다. 겉으로는 가부장제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연기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가장(假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발칙한 여성들. 한 마디로 그녀들은 배우다. 그녀들의 순진함, 순수함, 우아함, 섬약함, 섬세함 등이야말로 가장 그럴듯한 연기이자 가면이다. 그렇다면 여성다움이라는 가면 뒤에 가려진 것은 무엇인가? 거기에는 진실된 본질이라는 것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서둘러 말하면 ‘아니오’다.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찾아본 단서는 다음과 같다. “솔직히 나도 가끔씩 내가 ‘오은수’를 흉내내며 사는 건 아닐까 궁금해요. 내 이름이 오은수가 맞는지, 내 이름과 진짜 나 사이에 뭐가 있는지.” 가면을 벗긴다고 해서 그 속에 맨얼굴의 진실은 없는 것이다. 가면 속에는 또 다른 가면이 끝없이 포개져 있을 뿐이다. 소설 속 ‘오은수’가 평균적인 삼십 초반 싱글녀를 흉내 내며 사는 것처럼, 그러다가 실연한 여주인공을 흉내내기도 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흉내 내며 산다.

그렇다고 해서 어딘가에 본래의, 진실한 ‘오은수’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오은수’의 원본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특히 상품들이 내쏘는 인공조명으로만 간신히 자신을 비추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아란 바로 그렇게 조각난 상품의 그림자들로 이루어진 투명한 그림자일는지도 모른다. 그림자 바깥은 없다. 그러니 실체도 없다. ‘오은수’가 합리적인(?) 계산을 통해 “부유하는 먼지처럼 하찮은 자신을 가장 튼튼하고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줄” ‘기준점’으로 선택한 ‘김영수’가 사실은 실체 없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현실은 가장 진짜 같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정이현의 소설은 그런 진짜 거짓말의 세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컨대 번쩍거리는 상품들로 가득 찬 삼풍백화점이거나(‘삼풍백화점’), 거짓말로 꾸며낸 상품사용 후기로 도배된 인터넷쇼핑몰(‘1979년생’)과 같은 곳 말이다. 과장된 꾸밈과 거짓말로만 이루어진 바로 그곳, 영혼 없이 그림자놀이를 하는 그곳, 아케이드 서울이야말로 우리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달콤한 나의 도시’의 표지에 그려진 붕 뜬 싱글녀는 오늘도 아케이드 서울을 유영한다.(심진경|문학평론가)

07. 04. 21.

P.S. 작가는 한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장편소설을 펴냈다. 나는 단편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어봤지만 대중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이다. 평론가의 지적대로 자신을 가장하고 연출할 줄 아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그런 의미에서 올갈 데 없는 여성작가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남들이 척하는 것도 예리하게 간파해낸다. 일간지나 주간지 지면에 영화평도 자주 쓰는 그녀가 이번주 '씨네21'에서는 최근 개봉작 <우아한 세계>에 대해 꼬집었다: "이상하다. 아저씨는 왜 그렇게 불쌍한 척하는 걸까? 물론 먹고사는 거 힘들고 구차하지. 나도 안다. 나 역시 때론 힘들고 때론 구차하게 밥 벌어먹고 사는 생활인이니까.(...) 그런데 궁금하다. 보통의 중년사내들이 강인구처럼 진짜로 오로지, 처자식 먹여살리기 위해서만 사는 걸까? 손에 피 묻히고 등에 칼 맞고, 서로 물어뜯고 싸우면서. 글쎄다." 아무래도 아가씨를 속이긴 어렵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7-04-22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이현이다. 저 팬이에요. :) 저 사진보다 이쁜거 책 앞날개에 있는데.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4-22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세계>를 그렇게 프랙티컬하게만 보다니, 마지막 장면을 보면 굳이 저런 의문은 가질 필요가 없을 듯도 싶은데, 흠. 확실히 관점의 차이가 크긴 크군요.

2007-04-22 0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22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연재소설의 삽화를 그린 일러스트레이터 권신아씨입니다...
 

최근에 미국의 저명한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의 <영화의 내레이션1>(시각과언어, 2007)이 번역돼 나왔다. 원저는 'Narration in the Fiction Film'(1985)이고, 380여쪽 분량이다. 국역본은 분량상 두 권으로 나뉘어 출간된다고 하며 그 첫권이 얼마전 서점에 깔린 듯하다.

나는 주중에 교보에서 발견하고 바로 계산대로 갔다(러시아 영화이론서를 번역하고 있는 중이라 영화학 서적들을 챙겨두기 때문이다. 번역서는 짐작에 2009년에 나올 듯하다). '전문서'로 분류된 탓인지 이 책에 대해서는 관련리뷰들이 뜨지 않는다. '보드웰'을 검색해보다가 몇 년전 방한시에 홍상수 감독과 나눈 대담을 다시 읽게 되었다('씨네21'의 지면에서 당시에 읽었던 것 같다). 눈에 띈 김에 스크랩해놓는다(이창동, 허진호 감독들의 신작을 올해는 기대하게 되지만 내게 홍상수의 영화들은 언제나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다).

씨네21(02. 12.14) 보드웰, 홍상수를 만나다

<영화예술> <세계 영화사> <영화스타일의 역사> 등 영화 연구 입문서를 비롯한 다양한 저서를 내놓은 미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 교수가 한국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씨네21>은 모종의 ‘공작’에 착수했다. 그것은 보드웰 교수와 홍상수 감독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이었다. 영화의 언어구조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온 ‘구조주의자’ 보드웰 교수가 남달리 눈여겨본 영화인 목록에 홍상수 감독이 자리해 있다는 사실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는 홍상수 감독의 내러티브와 비주얼이 보여주는 미학적 특성이 허우샤오시엔과 차이밍량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미니멀리즘 유파에 속해 있는 동시에 그 이상의 개성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세계 영화사>의 개정판과 그의 새로운 저서에 이러한 연구내용을 담아낸 바 있다. 지난 9월 공항 검색 강화로 비행기를 놓쳐 USC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불참한 보드웰 교수가 발표하려던 주제 또한 “홍상수: 아시아의 미니멀리즘을 넘어서”였다. 세밀한 분석가로 이름난 세계적인 영화학자, 그로부터 ‘사랑의 메스’를 받은 감독은, 따라서 늦게나마 서로 만나야 하고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었다.

부산영화제가 한창이던 지난 11월17일, 서울에 이어 부산에서도 강연이 예정돼 있던 보드웰 교수, 그리고 뉴커런츠 부문의 심사위원을 맡은 홍상수 감독을 어렵사리 한자리에 모셨다. 마침 이들은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고, 이 사실을 먼저 알았던 보드웰 교수가 자신의 새 저서 <세계 영화사> 개정판을 홍 감독 방에 선물로 남긴 뒤였다. 이에 홍상수 감독은 조선시대 화가들의 그림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담긴 두권짜리 <화인열전>을 답례 선물로 준비해 들고 나타났다. 그는 보드웰 교수에게 자신이 특별히 좋아한다는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을 펼쳐 보여주며, 영화의 영감, 그 원천에 대한 힌트를 흘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한 시간 남짓 얼굴을 마주한 이들은 엄청난 속도와 밀도로, 영화 만들기와 영화 분석에 대한 속깊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보드웰 | 어제 강연에서 나는 ‘아시안 미니멀리즘’을 이야기했다. 롱테이크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이뤄진 어떤 미학적 경향은 아시아영화에서 매우 보편화돼 있다.당신 영화의 미니멀리즘적인 특성으로 <오! 수정>의 무대화 방식을 예로 들어보면, 한 여자와 두 남자가 함께 앉아 술 마시는 장면이 있다.재훈이 자리를 뜬 다음 수정이 그 자리로 옮겨 앉고 나서, 옆에 있던 두 남녀가 화면의 전면에 자리잡게 되는 상황부터가 흥미롭다. 그 남자와 여자는 메인 캐릭터들의 메아리처럼 그들의 행동을 모방해 보이고 있다.영수가 수정에게 술 마시기를 강권하고 있을 때 앞에 앉은 여자가 코냑병을 기울인다.난 늘 궁금했다.이런 장면을 구상할 때 사전에 얼마나 계획하고 또 얼마나 우연에 의존하는지.

홍상수 | 신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 중 몇개는 촬영 전에 이미 결정되고 나머지는 촬영 중에 현장에서 만들어진다.그리고 그렇게 의식적으로 선택된 요소와는 다른 종류의 요소들이 촬영 중에 만들어져 영화 속에서 어떤 일관성을 갖고 존재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은 촬영 직후에 모니터링과 편집 중에 발견하게 되고,그때 그곳에 놔두느냐 아니면 버리느냐, 하는 선택의 과정을 거친다. 이런 무의식적으로 컨트롤되는 요소들이 신 안으로 들어와 자기 자리를 잡게 되는 과정은 언제나 내게 약간은 신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그것은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우연보다 훨씬 많은 우연의 중첩과 깊은 저층에서 어떤 목적을 가진 힘이 요소들간의 연결을 의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현상이다. 어쩌면 이런 요소들이 의식적으로 집어넣는 요소들보다 내가 더 비밀스럽게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특히 배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런 종류의 요소들은 가장 가치있게 받아들여진다.

보드웰 | 숏을 어떤 순서로 구성하는지도 궁금하다.배우들의 위치를 정한 뒤에 카메라 포지션을 정하는 것인가, 아님 카메라 포지션을 정한 다음에 배우들의 위치를 정하는 것인가.

홍상수 | 카메라 포지션을 먼저 정하는 편이다.그런 다음에 연출부들이나 스탭들을 대역으로 해서 정확한 움직임을 결정한다.배우들은 다른 곳에서 리허설을 거의 마치고 마지막 순간에 카메라 앞으로 데리고 나온다.배우들이 카메라 앞에 섰을 때는 이 테이크가 단 한번의 테이크라는 느낌을 갖도록 최대한 배려하려고 한다.

보드웰 | 그러려면 테이크를 많이 가진 않겠다.두세 테이크 정도.

홍상수 | 일반적으로 서너번 정도의 테이크를 가고, 어떤 경우는 열번 넘게도 가는 것 같다.연기의 선도는 테이크가 갈수록 당연히 떨어진다.그러나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다른 요소들, 꼭 타이밍이 맞아야만 맛이 나는 요소들, 연기의 신선도와 상관없는 이런 요소들 때문에 테이크가 많아지는 경우가 꽤 많다.

보드웰 | 차이밍량이나 허우샤오시엔처럼 당신과 비슷한 감독들의 경우, 모두가 작은 디테일에 충실한 것 같다.이런 방식의 장점은 신을 리얼타임으로 전개해 나간다는 것인데, 그러고는 배우의 작은 제스처와 사물의 작은 디테일을 통해 이야기를 채워나간다.<강원도의 힘>의 금붕어 장면이나 서로 술을 따라주는 장면이 그렇다.당신은 캐릭터들의 상호관계를 통해 디테일을 풍부하게 발전시켜 나가는데, 그런 부분들은 아까 말한 리허설의 연장과도 같은 촬영 방식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인가.

홍상수 | 영화 만들기의 전 과정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작은 발견들이 이루어지고, 그것들이 계속 전체라는 구조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과정인 것 같다.

보드웰 | 당신은 배우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카메라를 고정해놓고 촬영하는 경우가 많다.이런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들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세밀히 관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교육적이라고 생각한다.미국영화, 심지어 유럽영화를 둘러봐도, 그렇게 배우들이 자신을 드러내도록 기다려줄 만큼의 인내심이 엿보이는 예는 없다.

홍상수 | 한신에 10가지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그중 적어도 3∼4가지는 모든 관객이 관람 중에 꼭 알아차려야 하는 요소일 것이다. 나머지는 관객이 누구냐, 그 한 관객의 그 순간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그러나 이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도 그런 관객의 의식의 필터를 피해서 스며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은 3∼4가지보다 많은 요소들이 다수의 관객에게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드웰 | 맞는 얘기다.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감독들은 모두가 알아볼 수 있도록 중요한 포인트는 명시하는 동시에 일부는 이해하고 또 다른 일부는 그렇지 못할 작은 디테일들을 함께 배치한다.내가 당신의 영화나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서너번씩 반복해 보길 즐기는 이유는 처음 볼 때 모르던 것들이 다시 볼 때는 보이기 때문이다.나는 이것이 시야를 넓게 잡은 화면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숏 속에 많은 것들을 담아내 단번에 볼 수 없는 요소들도 다시 보면 보이게 하는 그런 장치 말이다.

보드웰 | 당신의 영화는 많은 요소들로 꽉 차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매우 생략적이기도 하다.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부 보여주지 않으면서, 드라마틱 포인트를 넌지시 알려주는 식이다.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가 이런 갭을 채워주고 있다고 생각한다.최근의 아시아영화를 보면 미니멀리즘적 스타일로 접근하면서도 기본적인 것들을 채우지 않는다.당신 영화에서 보이는 것 같은 조밀함은 없다.

홍상수 | 언뜻 보면 단순한 이야기이고 어떻게 보면 단순한 상황 속에 다른 종류의 요소들이 중첩되고, 그런 요소들이 시간상의 연결을 만들어내는 것이 내가 스스로에게서 발견한 영화의 형태였던 것 같다. 맨 처음 영화를 만들 때 첫 촬영날부터 이런 식의 형태가 마치 내 속에 오래 존재했던 것처럼 나의 모든 영화적 결정들을 지배해왔다.

보드웰 | 영화학교 출신인 걸로 알고 있는데, 학교에서 콘티 그리는 법이나 스토리보드 작성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나.그리고 학교에서 만든 습작들은 어떤가. 장편영화와 유사한가.

홍상수 | 학교에서 실험영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스토리보드 같은 건 만들어본 적이 없다. (웃음) 2편인가 장편을 만들고 나서, 학교 때 만든 습작들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내가 장편에서 시도했던 거의 모든 것이 이미 그 단편들 속에 존재했다는 걸 알고 무척 놀랐다.

보드웰 | 그 작품들을 DVD에 넣을 생각은 없는지.

홍상수 |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다.(웃음)

보드웰 | 한국에 돌아와서 장편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홍상수 | 돌아왔을 때 나는 일단 생활을 위한 돈을 벌고 여유가 생기면 16mm 카메라를 사고, 그래서 최소한의 경비를 쓰는 단출한 독립적 형태로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다 4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그때 갑자기 충무로 안이건 밖이건 힘들 테니 일단 충무로쪽부터 시도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영화사를 찾아갔다.

“당신의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인터랙티브’하다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 게임처럼. 관객은 스토리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주어진 요소들을 통해 ‘문제 해결’에 도전하는 게이머의 자세를 갖추게 된다. 그런 효과는 다른 아시아영화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다.당신이 이런 문제를 다루기에 가장 적절한 모더니스트인 것 같다. 표면적인 장치들이 거대한 전체 구조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 둘 사이의 밸런스가 기막히다. ”

보드웰 | 매우 인상적인 데뷔였다.내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본 것이 96년 홍콩영화제에서였을 거다.그러니까 그뒤로 2년에 한편씩 작품을 만들어온 셈인데, 최근 <생활의 발견>을 보고 좀 놀랐다. 놀림당한 기분이랄까. (웃음) 이전 세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어떤 트릭 같은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그런데 이 영화는 뭐랄까, 소설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홍상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 교차 시점이 동원된 지점은 호수에서 오리배 타면서 라이터 빌리던 남자와 골목길에서 다시 마주치는 장면 정도인 것 같다.나머지 부분에선 다중 시점을 동원하진 않았다.이전 세 작품에서 당신은 다중 시점을 동원했고 시점의 변화 형태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했다.늘 궁금했는데, 당신은 왜 그런 방식에 관심을 갖는가.

홍상수 | 내게는 어떤 상황이나 아주 구체적인 대사나 신이 먼저 떠오르고 그것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영화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의 과정이 뒤따랐다. 그건 보통의 형태나 논리로는 끼워넣어지지 않는 것들이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 형태가 만들어진 것 같다. 그러나 어쩌면 그런 형태가 먼저 내 속에 존재해 있었고, 그런 형태가 그런 상황이나 대사나 신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생활의 발견>에서는 그전의 영화 속에서 구조가 하던 기능을 인물 행위 속의 작은 디테일을 통해서, 그러니까 반복과 모방의 모티브를 통해서 나타내려고 했다.

보드웰 | 요즘 아시아영화들은 지나치게 생략적이라 때론 그 스토리가 공허하게 느껴질 정도다. 드라마의 단계를 무시하고, 캐릭터의 백그라운드에 침묵하며, 개개의 에피소드가 자기충족적이다. 결정적인 문제는 내러티브의 역할이 적다는 것이다. 당신의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인터랙티브’하다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 게임처럼. (웃음) 관객은 스토리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주어진 요소들을 통해 ‘문제 해결’에 도전하는 게이머의 자세를 갖추게 된다. 그런 효과는 다른 아시아영화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다.당신이 이런 문제를 다루기에 가장 적절한 모더니스트인 것 같다. 표면적인 장치들이 거대한 전체 구조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 둘 사이의 밸런스가 기막히다. 개개의 신에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찾아내게 할 뿐 아니라, 신과 신 사이의 연결점도 생각하게 한다. 이런 식의 영화 만들기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매우 신선하다. 그런데 혹시 <생활의 발견>을 만들 때 관객이 당신의 전작들을 다 봤을 거라는 가정을 했나.

홍상수 | 그런 가정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하지 않는다. 매번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에 내게는 다른 종류의 동기가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아주 막연한 영화에 대한 느낌과 구체적인 형식에 대한 실험 욕구 같은 것이다. 인물 전반에 대한 느낌도 나이가 들수록 천천히 변해가는 것 같다. 전작보다 가벼운 느낌을 생각했던 것 같고, 좀전에 말한 구성의 기능을 모티브화한다는 것 정도가 처음에 있었던 것 같다.

보드웰 | 당신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캐릭터들이 미디어와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생활의 발견>의 남자 주인공은 영화배우이고, <오! 수정>의 인물들은 TV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나는 이것이 당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 영화 만들기의 자기 반영적 작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홍상수 | 지금까지는,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공간이건 상황이건 직업이건 간에,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선택한 것 같다. 그것은 영화를 만들면서 해야 하는 수많은 결정들이 어떻게 잘못돼 갈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익숙함이 판단에 어떤 직감적 레퍼런스로 존재하길 바랐기 때문인 것 같다.

보드웰 | 혹시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옛날 문화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역사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아님 다른 장르영화라도.

홍상수 | 많은 다른 가능성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지금까지 내 안의 영화적 욕망은 두 가지로 나뉜다.한쪽 욕망은 지금까지 해온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 어떤 정수에 도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머티리얼(material)이나 틀 속에 나를 집어넣고 어떤 것이 나올까를 보고 싶은 욕망이다.이 두 욕망은 계속해서 공존해왔다.

보드웰 | 당신 세대 감독들의 작품을 보면, 다른 영화를 참조하거나 언급하는 경향들이 있다. 그런데 당신 영화는 그렇지 않다.시네필적인 요소나 분위기가 없다고 할까.

홍상수 |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영화 중 그대로 따라하고 싶은 영화는 거의 없는 것 같다.내가 대가들로부터 따라하고 싶고 실제로 배웠으면 하는 것은 그들의 밸런스 감각이고, 어떤 최선의 의미의 진정성이고, 자신의 삶과 영화, 그리고 영화 작업의 현실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능력이었던 것 같다.대가의 영화에서 어느 부분을 선호하게 되는 건, 거기서 바로 그런 능력을 확인했거나 아니면 내 속에 이미 있는 어떤 경향을 표현해내는 훌륭한 예가 되었기 때문인데, 그런 선호가 나를 틀로서 기억으로서 억압하게 하지는 않았다.

보드웰 | 브라이언 드 팔마의 <팜므파탈>을 보면, 자신의 영화를 비롯한 다른 영화에 대한 인용으로 가득하다.흥미롭긴 하지만, 섞어놓기 게임 같다고나 할까. 다른 영화를 인용하지만 정작 자기 이야기가 없는 영화들이, 이젠 지겹다.당신이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 건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홍상수식 영화구조와 보드웰식 영화 분석 ‥‥‥‥‥‥‥‥‥‥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영화 중 그대로 따라하고 싶은 영화는 거의 없는 것 같다.내가 대가들로부터 따라하고 싶고 실제로 배웠으면 하는 것은 그들의 밸런스 감각이고, 어떤 최선의 의미의 진정성이고, 자신의 삶과 영화, 그리고 영화 작업의 현실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능력이었던 것 같다.”

홍상수 | 내 영화 속의 여러 요소 중 특히 집중하는 요소들이 있고, 다른 요소들은 따라오게만 하는 식인데, 그런 다른 요소들이 어떤 때는 집중해온 요소들을 질적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그런 변화가 일어날 때 가장 큰 만족감을 느낀다.나는 모르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 같고, 호기심만이 진정한 진정성의 근거라고 생각한다.나는 영화작업의 과정에서 많은 것을 모른 채 시작하고 미리 정해두지 않는다.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보드웰 | 사람들은 일정 부분은 의식적으로, 또 일정 부분은 직관을 통해 영화를 만든다.계획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섞여 있게 마련이고, 이들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이런 것들이 결국엔 영화‘구조’라는 결과물로 나타난다.무엇이 계획된 바고 무엇이 우연한 결과인지 정확히 가를 순 없겠지만, 내가 영화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이것이 하나의 패턴으로서 관객에게 매우 강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홍상수 |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것이 일어나건 그건 결국 나의 선택인 것이다.그것이 계획을 통해서 일어났건 발견을 통해서 일어났건.그리고 그런 두 종류의 선택이 내 영화의 두 동력을 이루는 것 같다.

보드웰 | 영화를 컨트롤하는 일은 꽤 다층적이다.이거냐 아니냐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들을 끊임없이 마주치게 된다.그 선택의 결과가 풍부한 구조로 형상화되고 분석할 수 있는 것이 된다.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다고 해도, 우연히 얻은 효과라고 해도, 어쨌든 자의에 의해 선택됐고 영화로 남겨졌기 때문이다.

홍상수 | 어떤 영화감독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내가 영화를 만들기 전에 모든 걸 계획하고 준비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면, 더이상 영화를 만들고 싶어지지 않을 것 같다.

보드웰 | 흥미로운 생각이다. 히치콕은 스크립트와 스토리보드를 준비하는 것이 한편의 영화에 대한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에 멍청한 배우들이 대사를 버벅거리고 카메라가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촬영 현장이 지겨워진다고 말하곤 했다.그는 완벽한 통제를 원했고 그런 욕망을 과장한 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당신 생각에 동의한다.많은 영화감독들이 영화 만드는 과정을 ‘계획’은 물론 ‘발견’에도 비유한다.

홍상수 | 그 두 단어를 좋아한다.나는 영화 만들기의 모든 단계에서 ‘과정’을 믿고, ‘발견’을 믿는다.

보드웰 | <오! 수정>을 흑백으로 찍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

홍상수 | 무엇보다 내가 흑백 시절의 고전영화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꼭 한번은 흑백을 찍고 싶었고, 촬영 시간대인 겨울과 흑백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또 다른 이유는 흑백이라는, 컬러보다 조금 더 단순한 자극체 속에서 영화 속에서 필요로 하는 작은 디테일간의 비교가 좀더 쉽게 이루어졌으면 했다.

보드웰 | 당신의 영화를 보면 매번 전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는 네 사람의 시점을 서로 다르게 교차시키고 있고, <강원도의 힘>에서는 두 사람의 시점으로 전개하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는 점에서 좀더 복잡한 시도를 하고 있다.<오! 수정>은 또 다르다. 두 사람이 겪은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르게 표현해낸 것이다.한 버전은 마일드하게 또 다른 버전은 터프하게 담아냈는데, 관객은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워진다.양립 불가능한 신을 통해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 저의는 무엇이었나.

홍상수 | 그런 혼란을 통해서 관객을 매혹시키는 동시에 그 혼란이 바로 영화가 중심으로 삼은 질문을 관객에게 체험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드웰 | 경이로운 시도라고 생각한다.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혹시 릴을 잘못 끼운 건 아닌지, 아까 제대로 못 본 것인지, 못 볼 걸 본 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둘 중 어느 것이 맞는 버전이라고 단정하지 않은 것 또한 신선한 시도였다.40년대 미국영화를 보면 이른바 착각을 유도하는 플래시백이 유행했었다.플래시백을 두어번 동원하는데, 대개 나중 버전이 ‘맞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장치였다.유명한 예로 <크로스 파이어>를 들 수 있다.살인 용의자의 증언에 따라 상황이 재연되고 나서 같은 상황을 다른 시점으로 다시 보여주는데, 이전과는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라쇼몽>도 마찬가지다.플래시백이 동원될 때마다 이전 버전을 수정하는 경향이 있고, 결국엔 마지막 버전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곤 하는 것이다.당신의 영화에선 플래시백이 아니라 시점의 교차라고 해야 맞겠지만 말이다.

홍상수 | 기억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그 상황에 따라그 사람의 욕망에 따라 변질되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따라서 의문을 남기는 것이어야지, 무엇이 ‘진실’인지를 판정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보드웰 | <롤라 런>의 경우는 서로 다른 미래 상황들을 나열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SF적이라고 볼 수 있다.그 작품에선 앞의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버전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에피소드간의 상관관계가 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반면 당신의 영화는 두 상황이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모호한 느낌을 준다.그런 의미에서 매우 소설적이라고 느껴지는데, 혹시 문학 작품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나.

홍상수 | 영화만큼이나 문학과 미술 작품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문학이나 미술을 정식으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많이 좋아하니까,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는 것 같다.

보드웰 | 최근에 롱테이크를 즐겨 쓰고 화면의 심도를 중요시하는 감독들에 대한 연구서를 집필했다.루이 푀이야드, 미조구치 겐지, 테오 앙겔로풀로스, 허우샤오시엔 등이 주된 연구 대상이다.당신도 해당되는데, 첫 번째 챕터에서 <오! 수정>의 화면 구성을 분석했고, 마지막 챕터에서 <생활의 발견>에 대해 썼다.다른 유럽 감독들과 비교해 보이기도 했다. 오타르 요셀리아니(<월요일 아침>) 같은 감독.요셀리아니가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건 유감이다.그 역시 롱테이크를 좋아하고 독특한 코미디를 구사한다.캐릭터도 당신 맘에 들 거다.만날 술 마시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웃음)사회의 낙오자들이랄까.그를 비롯한 몇몇 유럽 감독들을 당신과 비교해봤는데, 모두 느리고 사려 깊고 심미적인 영화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이 저서는 말하자면, 최근의 영화들이 무작정 컷 수를 늘려가고 있는 데 대한 저항인 셈이다. 당신도 당분간은 갑자기 컷 수를 엄청나게 늘린다든지 하는 변화는 시도하지 않길 바란다. (웃음) 당신의 영화를 언급할 수 있어서 기뻤다.특히 나는 <오! 수정>의 먹는 신을 언급했는데, 당신 영화엔 특히 먹고 마시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그것은 다른 아시아영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허우샤오시엔도 그렇고, 홍콩영화를 봐도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오지만, 감독 개인의 스타일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재미난 것은 기타노 다케시의 예다.그의 영화엔 먹고 마시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데, 그건 그가 그런 장면들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이란다.<하나비>에서 사내의 눈에 젓가락을 꽂는 장면은, 먹고 마시는 장면에 대한 혐오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웃음)세상엔 두 종류의 감독이 있는 것 같다.오즈나 브레송처럼 비슷한 걸 시도하면서 그 안에서 정련의 과정을 거치는 쪽과 오시마 나기사처럼 매번 전혀 다른 작품을 내놓는 쪽.당신은 어느 쪽을 지향한다고 생각하나.

홍상수 | 막연하게 느끼는 것은 한시적으로는 당신이 말한 오즈 식의 파고듦과 정련을 해나갈 것 같다.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만든 틀이라고 생각드는 것이 억압적으로 작용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그런 경우를 사실 많이 상상하곤 한다.서서히, 그렇지만 같은 강도를 가진 움직임으로 변해나가고 싶다.

보드웰 | 오즈는 닫힌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영화를 다듬었지만, 서서히 벗어나는 것 역시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아주 좋은 생각이다.

07. 04. 21.

P.S. 번역돼 나온 보드웰의 책을 나는 모두 갖고 있는데, 이번에 나온 <영화의 내레이션> 외에도 몇 권의 책이 더 번역/소개됨 직하다.

그 중에서도 현대 영화에서의 이야기와 스타일을 다룬 <헐리우드가 말하는 방법(The Way Hollywood Tells It)>(2006)이 가장 최신작이면서 가장 흥미를 끄는 책이다(<제리 맥과이어>의 한 장면이 표지로 쓰였군). 번역을 기다리느니 그냥 원서를 읽는 게 더 빠른 길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막간에 잠시 읽어본 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버지니아대 총기난사 사건의 의미를 일본만화 <몬스터>의 내용과 연관지어 좇고 있다. 기사가 눈에 띈 건 이 만화 때문. 그렇다고 내가 읽은 건 아니고(나는 만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강풀 만화조차도 읽은 적이 없다), 다만 이 만화를 좋아하는 한 후배가 한동안 만날 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적이 있어서 친숙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조승희는 '몬스터'인가?... 

오마이뉴스(07. 04. 20) 우리 안에 똬리 튼 '버지니아 몬스터'

일본 만화 가운데 <몬스터>라는 작품이 있다. <마스터 키튼> 등으로 우리나라에도 상당수의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우라사와 나오키(浦澤直樹)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일본에서만 2000만부 이상 팔렸으며,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인터넷을 뒤지면 몬스터 마니아 클럽을 꽤 찾아볼 수 있다(*관련기사는 http://payopen.scout.co.kr/bookclub/review/SN056/default.asp?action=view&id=2222&page=1&field=1&keyword=).

<몬스터>는 만화 제목 그대로 '절대 악'의 화신과 같은 '요한'이라는 몬스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스릴러물이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양부와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준 의료진들을 살해한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의 심리와 약점을 꿰뚫어 보고 이를 이용해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 특별한 능력을 유감없이 활용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이 만화는 그러나 몬스터의 '연쇄 살인'이나 '대량 학살'이 주된 줄거리가 아니다. 작가 우라사와 나오키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고 줄곧 쫓고 있는 것은 냉혈한 살인마 요한, 즉 몬스터의 뿌리와 그 본성에 관한 탐사다. 그 추적을 통해 놀라운 사실들이 하나 둘 드러난다.

몬스터의 살인 권능은 '상처'에서 싹튼다

구동독 시절 특별한 능력이 있어 보이는 고아들을 모아놓고 실시한 '인간병기' 프로젝트에서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본인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몬스터가 돼 버린 요한. 쌍둥이 자매 가운데 한 명의 아이만 남기도록 강요당한 어머니한테서 결국 버림받은 요한.

자신의 쌍둥이 남매인 '안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는 절대 고독한 존재로서의 요한. 결국 안나에게 자신을 쏘도록 해 죽음을 선택한 요한, 그러나 만화 '몬스터'의 또 다른 주인공인 '닥터 덴마'에 의해 기적적으로 살아나 청년 몬스터가 된 요한….

유럽 전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짜임새 있는 긴박한 이야기 전개와 독특하고 다양한 캐릭터 이외에도 만화 <몬스터>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내 안의 몬스터'에 대한 깊이있는 천착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이 살려놓은 몬스터를 없애기 위해 요한을 쫓는 닥터 덴마,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쌍둥이 오빠 요한을 죽이기 위해 역시 그를 쫓는 안나를 통해서 작가는 몬스터가 이 세상과는 물론 바로 이들 추적자들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요한이라는 몬스터의 탄생도 그렇지만 그가 초인적인 '살인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들 내면의 '깊은 상처'나 '공포' 혹은 '끝없는 욕망'의 뇌관을 적시에 조작할 수 있었기 때문임을 장면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선과 악이 교차하고,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말한다.

"몬스터는 바로 당신, 그리고 우리 안에 있다."

만화 <몬스터>의 가장 큰 미덕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연쇄 살인마 요한을 쫓아가면서 닥터 덴마나 그의 쌍둥이 누이 안나는 몬스터 요한에 대한 연민을 버리지 못한다. 몬스터의 뿌리와 그의 실체에 접근할수록 이 두 사람의 연민은 더욱 커진다. 끝내는 치명상을 입은 몬스터를 닥터 덴마가 살리기 위해 다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몬스터에 대한 공포와 증오, 적대는 연민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용서까지는 아닐지언정, 어느 정도는 화해하는 것으로 이 만화는 대미를 장식한다.



버지니아 몬스터는 결말이 달랐다

어디까지나 만화 이야기다. 버지니아 공대의 '몬스터'는 결코 그런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없었다. 피의 살육이라는 끔찍한 최후를 선택한 버지니아 몬스터는 숨가쁜 언어와 공격적인 포즈, 혹은 절망적인 제스처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지만 그것은 제정신이 아닌 외톨이의 '광기어린 독백'이 되고 말았다.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미국 사회에 있어서 그는 진즉 격리됐어야 했을 '미친 놈(mad man)'에 불과할 뿐이다.

그를 미치도록 외롭게 하거나 혹은 좌절케 했을지 모를 '한국인'이라는 핏줄과 국적마저 몬스터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무늬만 '한국인'일 뿐이다. 미국에서 자라 '사실상 미국인'인 그는 '미국판 몬스터'일 수는 있어도, 한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게들 믿고 싶어한다. 그가 한국 핏줄이어서, 한국인이어서, 동양인이어서, 백인이 아니어서 미국 사회에서 겪었을 갈등과 좌절, 혹은 분노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 아니, 그런 몬스터가 '내 안'에, 혹은 '우리 안'에 똬리 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니까.(백병규 기자)

07. 04. 20.

P.S. "그가 한국 핏줄이어서, 한국인이어서, 동양인이어서, 백인이 아니어서 미국 사회에서 겪었을 갈등과 좌절, 혹은 분노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란 대목은 이해되지 않는다(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의 '순교자'들은 백인 학생들이었다). 버지니아 공대에는 수백 명의 한국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다. 그들 모두가 "한국인이어서, 동양인이어서, 백인이 아니어서 미국 사회에서 겪었을 갈등과 좌절, 혹은 분노"로 인하여 제2, 제3의 '버지니아 몬스터'가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인가? 아무래도 '만화적인' 결론이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04-20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20 21:04   좋아요 0 | URL
**님/ 음주시에만 댓글을 다시는 건 아니구요?^^

소경 2007-04-21 13:55   좋아요 0 | URL
두건의 페이퍼 잘 참고했어요..^^. 반면 에드게인이나 찰스맨슨과 같은 이들과 함께 두는 '한국인'이라 기분이 묘하군요. 결코 이 반도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라고는 생각했는데.....그리고 이 나라에 따를 총기허용시 반향에 대해서 숙고하신 점은 서득력있게 들리네요. 그러한 사람(살인자)들은 결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 생각한다면 생각은 달라지겠지만요.

딸기 2007-04-21 22:13   좋아요 0 | URL
제가 보기엔 조승희는 정신분열 같습니다. 우울증 같은 거랑은 전혀 다르지요;;
문제는 그것이 치료가 되지 않고 방치됐다는 점, 그리고 총을 손에 넣었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로쟈 2007-04-22 10:08   좋아요 0 | URL
소경님/ 다른 선택은 없다고 스스로를 몰아가는 '성향'과 '과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이죠...
딸기님/ 경계성 장애니, 자기애 장애니 하는 진단들도 나오더군요. 우울증보다는 증상이 더 악화된 경우겠지요...

딸기 2007-04-23 16:41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조승희 같은 경우에 대해 진단을 잘 내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우울증이라고 해버리면-- '우리 모두 다 죄인' '이민 1.5세대의 비극'이 되어버려요. 그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이 문제는 '정신병자가 총을 살 수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미국 사회의 병리라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고요. 누군가가 옆에서 좀 잘 다독여줬더라면? 그렇다면 약물을 투입해 폭력성을 좀 억누를 수 있었겠지요.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거기까지... 암튼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로쟈 2007-04-23 16:53   좋아요 0 | URL
가해자-피해자를 전치시키는 논리에 대해서는 저도 반대합니다. 범행동기에 대해서는 그쪽 경찰에서 실마리를 잡았다고 하니까 곧 발표될 수도 있겠지요. 총기는 보도에 따르면 2억 5천만정이 퍼져 있다고 하니까 '근절'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고, 자체적으로 '제한' 정도가 시도될 수 있지 않을까(그것도 잘해야)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