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하던 이창동의 네번째 영화 <밀양>이 드디어 햇빛을 보게 되는 모양이다. 알다시피 김기덕의 <숨>과 함께 이번에 칸느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된 작품이다. 24일 개봉이라고는 하지만 그에 앞질러 기자 시사회가 열렸던 모양이고 언론 리뷰들이 올라오고 있다. 그 중 하나를 옮겨놓는다. 이달말에는 시간이 좀 나겠지...

한국일보(07. 05. 03) 이창동 감독의 네번째 영화 '밀양'
처음부터 수상했다. 이창동, 이 지독한 리얼리스트가 멜로를 한다는 사실이. 두근두근 몽클한 감정의 조각을 꿰 맞추기엔, 이 작가의 물기 없는 언어는 너무 뻑뻑하지 않은가. 그래서 사건현장의 형사처럼 의구심을 품고 시사회장에 들어섰다. 전도연과 송강호가 나란히 포즈를 취한 포스터를 부비트랩 피하듯 조심스레 돌아서.
의심은 오래지 않아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창동 감독의 네 번째 작품 <밀양>(24일 개봉)은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영화다. 의뭉스레 ‘멜로’라는 카피를 달고 있지만, 감독은 그가 오랫동안 말하고 싶었던 종교와 구원에 관한 얘기를 작심하고 쏟아 놓는다. ‘상실감마저 꺾어버리는 절대적 절망이 닥쳤을 때,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는 남편을 잃은 신애(전도연)가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향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감독은 구질구질한 내러티브 대신 동네 아줌마들을 닮아 가려는 신애의 노력을 통해 그가 겪은 슬픔의 무게와 삶의 의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과 함께 그를 지탱하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진다. 신애가 기독교 신앙을 지팡이 삼아 버티는 건, 그래서 영적이라기보다 물리적이다.
그러나 신애는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아들을 죽인 남자의 입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듣고 만다(*김영현의 한 소설에 나오는 모티브 아닌가? 아니다.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 나온다. 김영현의 소설은 <벌레>이다). 그 순간의 배신감은 물리적 신앙의 지팡이를 분질러 놓기에 충분하다. 그를 일으킨 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밧줄을 붙잡은 신애 자신이었으니까. 용서를 할 권한조차 빼앗아 버린 하나님은 또 하나의 ‘절망’일 뿐이다.
구원의 가능성은 마지막에 가서야 슬며시 그 얼굴을 내민다. 절망도 믿음도 배신감도 지나간 뒤 스스로 머리를 다듬는 신애 곁으로 햇볕 한 조각이 따스하게 내려비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비밀스러운 햇볕(密陽)’이.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결국 모든 희망과 구원의 출발은 자기 존재의 소중함, 내 귓전에 나의 심장박동이 들린다는 놀라운 사실이 아닐까.” 선불교의 살불살조(殺佛殺祖)를 떠올리게 하는, 이창동식 주체주의 또는 인간주의다.
이창동은 <밀양>이 종교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꺼렸지만, 이 영화는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기독교라는 소재를 지렛대 삼아 진지하게 성찰한다. 이런 진중한 주제를 이창동 특유의 리얼리즘으로 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밀양>은 충분히 빛을 발한다. 삶의 짠내와 비린내를 핍진하게 담아내는 이창동 어법은, 관념 속에서 변색되기 쉬울 법한 이 영화의 주제에 처절한 사실주의의 옷을 입힌다.
그러나 지나치게 기독교를 ‘소재화’하는 감독의 시도가 이 영화에 탁한 분위기를 씌워 놓은 것도 사실이다. ‘리얼리즘’적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라고 하기엔, 기독교에 대한 이 감독의 시선은 결코 편치가 않다. 그 불편함이 이 영화 속의 유일한 과잉이다. 이창동 특유의 절제력이 기독교에서 유독 무너지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어쨌든 <밀양>은 오랜만에 진지하고 깊이 있는 사색을 요구하는 영화다. 랑그와 빠롤 사이의 장난질만 난무하는 21세기 소설만 읽다가(*'랑그'와 '빠롤' 같은 단어도 기사에서 읽을 수 있다니!), 1980년대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나 김성동의 <만다라> 같은 옛 소설을 다시 펴는 감동을 준다. 폭발하는 듯하면서도 결코 넘치지 않는, 대한민국 두 최고배우의 연기를 보는 기쁨도 있다.
사족 하나. 이 지독한 인간주의 영화가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어떤 평을 받을지 궁금하다. 학교에서 십자가와 히잡의 착용도 금지하는, 지구상에서 세속주의(secularism)를 가장 신봉하는 나라 평론가들이 모이는 만큼 <밀양>에 열광할 것 같은 예감이 들기는 한데…(유상호 기자)
07. 05. 03.
P.S.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이창동의 모든 영화'라고 생각한다(내가 신뢰하는 건 그의 '리얼리즘'이다). 음, 네번째 영화가 제일 마음에 들 것도 같군...
P.S.2. 덧붙이는 기사는 '이창동 컬렉션'에 관한 것이다. 감독 자신의 음성해설을 담고 있다는 게 무엇보다도 큰 매력이겠다.
경향신문(07. 05. 03) [DVD코멘트]이창동 감독 콜렉션
2002년 ‘오아시스’ DVD 출시 당시 이창동 감독이 음성해설을 실었다는 소식에 많은 팬들이 두번 놀란 적이 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언급을 몹시 꺼리는 감독이 코멘터리를 녹음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고, 감독이 이를 녹음하다 말고 더이상은 못하겠다는 듯 영화 중간쯤 스튜디오를 나가버리는 바람에 다른 스태프가 해설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일에 ‘역시나’ 하면서 놀랐던 것이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등 그의 작품 3편을 모아 출시된 이번 타이틀엔 다행스럽게도 전편에 걸쳐 감독이 음성해설에 나서줬다. 여전히 “감독이 자기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금기 같은 일”이라는 감독은 이동진 기자와 함께 문답형식으로 코멘터리를 진행하며 비교적 충실한 작품해설을 들려주고 있다.

‘초록물고기’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하는 감독은 극중 막동이(한석규)의 정체성 탐구를 통해 “365일 공사중인 한국사회”의 풍경을 구현하고 있다. “감독이기 이전에 40대의 한 인간으로서 자기반성의 극점에 달했던 시기에 제 존재를 찾아가던 실존적인 작업이기도 했다”는 ‘박하사탕’과,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한 영화로 인물과 인물, 영화와 관객 등의 관계 사이에서 불안한 경계를 표현하려 했다”는 ‘오아시스’ 모두 감독의 본의를 밝히는 해설을 들으며 두번 세번 감상할 가치가 충분하다. 4장의 디스크로 구성된 이번 타이틀에는 영화 3편 외에도 이들의 제작과정 등을 담은 스페셜 피처 디스크가 포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