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비평에서 흥미로운 리뷰 기사 하나를 옮겨놓는다. 이광수와 베르그송의 관계를 다룬 논문에 대한 소개인데, 이광수를 낭만주의자로 이해하는 논문의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이광수에게서 '감상적 계몽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지울 수 있는가?) '이광수와 베르그송'이라는 아이템 자체는 신선해 보인다. 지난 3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으로 <무정>을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그 참고자료로 분류해둔다.  

담비(07. 05. 03) 이광수가 과연 계몽주의자인가

이광수를 계몽주의자가 아닌 낭만주의자로 해석하는 문제적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철호 동국대 강사(국문학)는 최근 ‘비교문학’ 제41집에 발표한 ‘생명으로서의 문학-‘무정’의 생명론과 낭만적 자아의 문제’에서 1920년대에 이루어진 이광수의 베르그송 독서를 통해 이같은 논리를 개진하고 있다.

1920년을 전후해서 이광수는 새로운 문학세대를 준엄하게 설교하는 자로 군림했다. 그는 ‘창조’, ‘폐허’, ‘백조’, ‘영대’ 동인들을 도덕이라는 심판대 위에 불러 퇴폐한 것들이라고 규정해버렸다. 고민, 허무, 죽음, 눈물 등의 문학적 수사에 대해서 이광수는 민족 혹은 민족문학의 발전을 훼손시키는 데카당스의 망국정조일 뿐이라며 일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광수가 이들 동인지세대와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기성의 권위나 억압에서 자아의 해방을 역설하는 데 가장 나섰던 인물은 바로 이광수였다. ‘무정’은 정의 만족이 곧 문학이라는 이광수식 믿음의 산물이다. 이광수는 이형식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것을 실현했으며 복잡한 내적 과정과 자아와 타자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영적 체험을 전경화시키는 등 많은 고민을 보여주고 있다.

이광수가 다이쇼의 생명주의 사상에 기대 자신의 지적 갱생을 도모했다는 것은 그의 자전적 소설들에 암시돼 있다. 교사생활을 청산한 후 쓴 ‘金鏡’의 경우, 일본유학때 까지의 이광수의 내밀한 심경이 토로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난 수년간의 교사생활을 덧없이 반추한다. 이 단편의 중심내용은, 화자가 자기희생으로 일관했던 교사시대와결별하고 새로운 지적 포부를 토로하는 데에 있다. 톨스토이와 바이런을 난생 처음 접한 후 ‘번민’, ‘고통’, ‘죽음’에 시달리던, 그래서 그의 “靈에 폭풍광란에 雷雨까지 더하여 거의 狂할 뻔하였”던 유학시절은 현재의 교사생활에 견주면 오히려 삶의 활력으로 충만했던 시절이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자신의 학식이 턱없이 부족함으로 토로하며 베르그송을 거론하는 부분이다. “벨그손의 철학을 외우다가 이해하지 못할 학리와 술어가 많음을 보고, 비로소 규범과학을 연구함이 연학의 초보임을 깨달아”하는 부분이다.

그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 그러나 도쿄 유학의 실행을 심리적으로 가능케 한 책이란 다이쇼 시기 전반에 걸쳐 널리 애독된 필독서 중 하나였던, 니시기다 요시토미의 ‘베르그송의 철학’(1913)이었다. 이 시기에 일본지식인 사회에 널리 회자한 베르그송의 ‘생의 철학’은 니시다 기타로에게 고스란히 전수되면서 다이쇼기 ‘생명주의’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하지만, 1910년대 후반부터 동인지 세대의 문학 청년들 역시 니시다 기타로가 일본적 맥락에서 번안하고 집성한 베르그송의 생철학 사상에 적잖이 침윤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베르그송 철학을 원전이 아닌 다른 매개, 이를테면 이쿠다 쵸코, 쿠리야가와 하쿠손 등을 통해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에게 직접 영향을 받은 작가들로는 김동인이나 염상섭이 대표적이지만, 그 당시 일본에 유학중이었던 김여제, 주요한, 최승구 등도 시라카바의 이상주의적인 경향을 충분히 의식하면서 창작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광수를 계몽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문학사의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그의 주된 관심이 불합리한 관습과 윤리도덕의 혁신에 있었던 만큼, 이광수의 사회적 위상을 계몽주의의 차원에서 해석할 여지가 없지 않지만, 그는 ‘무정’을 연재했을 때나 데카당스의 미학을 비난하며 민족윤리에 봉사하는 문학의 소임을 강조했을 때나 낭만주의자로서 군림했다(*나로선 지나친 단순화이며 논리적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1920년대 이후의 이광수는 초기의 진보적 성격을 상실해버렸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 시기의 이광수는 비판적 활력을 상실한, 화석화된 낭만주의자의 잔영을 보여줄 따름이라고 이철호 씨는 결론짓는다.(리뷰팀)

07. 05. 03.

P.S. 이광수의 계몽적 기획와 <무정>에 관한 이해에 유익한 자료는 김현주의 <이광수와 문화의 기획>(태학사, 2005)이다. 저자의 학위논문을 보완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무정>에서 '정'이 갖는 의미에 관하여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시각에 더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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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5-04 01:32   좋아요 0 | URL
이쪽 분야로는 김현주의 논문도 좋지만 손유경의「한국 근대소설에 나타난 ‘동정’의 윤리와 미학에 관한 연구」(2006), 도 꽤나 자세히 이광수가 보여준 동정의 미학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동정 담론의 기저에 망탈리테가 깔려있다고 보는게 손유경 논문의 핵심인 것 같더군요. 이광수의 계몽은 동정의 공적 발휘이며 상호부조론에 의해 타인의 고통을 개인이 구체적 감각으로 인지하면서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 지위와 계급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동정이 존재할 수 없다며 막연한 연민으로써의 인도주의를 비판하고 동정의 사상, 이념적 연동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광수에 대한 여러 연구자의 새로운 접근은 근대문학의 이분법적 구도를 탈피하는 유효한 접근이자 가능성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기인 2007-05-04 07:10   좋아요 0 | URL
오옷, 소이부답님 역시 부지런하시네요! 저는 아직도 손유경 선생님 논문을 못 읽었는데 -_-;;;; 등잔밑이 어둡다는(말이 되는지? -_-;;; ) 여튼 이광수 주요한 등이 시라카바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도 맞고, 낭만주의적 경향이 있는 것도 긍정할 수 있는데 낭만주의와 계몽주의를 당대 조선의 상황에서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반이성/이성이라는 도식인지요... 당대 조선에서 계몽주의라는 운동이 낭만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도 가능할 듯 한데요 ^^

기인 2007-05-04 07:14   좋아요 0 | URL
뭐 원문 글을 읽어보고 판단해야할 문제이지만, 그래도 이런 도발적(^^) 문제제기들이 활력을 주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국문학 공부하다보면 그래도 2~3년에 한번은 이렇게 재미난(?)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7-05-04 15:08   좋아요 0 | URL
전공자들은 다 모이셨군요.^^ 손유경씨의 논문은 아직 출판이 안된 거지요?(논문 파일은 어제 다운받아놓았습니다). 2-3년에 한번씩 재미난 일이 터진다면, 가물에 콩나는 식인데, 흠...
 

고대하던 이창동의 네번째 영화 <밀양>이 드디어 햇빛을 보게 되는 모양이다. 알다시피 김기덕의 <숨>과 함께 이번에 칸느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된 작품이다. 24일 개봉이라고는 하지만 그에 앞질러 기자 시사회가 열렸던 모양이고 언론 리뷰들이 올라오고 있다. 그 중 하나를 옮겨놓는다. 이달말에는 시간이 좀 나겠지...

한국일보(07. 05. 03) 이창동 감독의 네번째 영화 '밀양'

처음부터 수상했다. 이창동, 이 지독한 리얼리스트가 멜로를 한다는 사실이. 두근두근 몽클한 감정의 조각을 꿰 맞추기엔, 이 작가의 물기 없는 언어는 너무 뻑뻑하지 않은가. 그래서 사건현장의 형사처럼 의구심을 품고 시사회장에 들어섰다. 전도연과 송강호가 나란히 포즈를 취한 포스터를 부비트랩 피하듯 조심스레 돌아서.

의심은 오래지 않아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창동 감독의 네 번째 작품 <밀양>(24일 개봉)은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영화다. 의뭉스레 ‘멜로’라는 카피를 달고 있지만, 감독은 그가 오랫동안 말하고 싶었던 종교와 구원에 관한 얘기를 작심하고 쏟아 놓는다. ‘상실감마저 꺾어버리는 절대적 절망이 닥쳤을 때,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는 남편을 잃은 신애(전도연)가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향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감독은 구질구질한 내러티브 대신 동네 아줌마들을 닮아 가려는 신애의 노력을 통해 그가 겪은 슬픔의 무게와 삶의 의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과 함께 그를 지탱하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진다. 신애가 기독교 신앙을 지팡이 삼아 버티는 건, 그래서 영적이라기보다 물리적이다.

그러나 신애는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아들을 죽인 남자의 입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듣고 만다(*김영현의 한 소설에 나오는 모티브 아닌가? 아니다.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 나온다. 김영현의 소설은 <벌레>이다). 그 순간의 배신감은 물리적 신앙의 지팡이를 분질러 놓기에 충분하다. 그를 일으킨 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밧줄을 붙잡은 신애 자신이었으니까. 용서를 할 권한조차 빼앗아 버린 하나님은 또 하나의 ‘절망’일 뿐이다.

구원의 가능성은 마지막에 가서야 슬며시 그 얼굴을 내민다. 절망도 믿음도 배신감도 지나간 뒤 스스로 머리를 다듬는 신애 곁으로 햇볕 한 조각이 따스하게 내려비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비밀스러운 햇볕(密陽)’이.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결국 모든 희망과 구원의 출발은 자기 존재의 소중함, 내 귓전에 나의 심장박동이 들린다는 놀라운 사실이 아닐까.” 선불교의 살불살조(殺佛殺祖)를 떠올리게 하는, 이창동식 주체주의 또는 인간주의다.

이창동은 <밀양>이 종교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꺼렸지만, 이 영화는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기독교라는 소재를 지렛대 삼아 진지하게 성찰한다. 이런 진중한 주제를 이창동 특유의 리얼리즘으로 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밀양>은 충분히 빛을 발한다. 삶의 짠내와 비린내를 핍진하게 담아내는 이창동 어법은, 관념 속에서 변색되기 쉬울 법한 이 영화의 주제에 처절한 사실주의의 옷을 입힌다.

그러나 지나치게 기독교를 ‘소재화’하는 감독의 시도가 이 영화에 탁한 분위기를 씌워 놓은 것도 사실이다. ‘리얼리즘’적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라고 하기엔, 기독교에 대한 이 감독의 시선은 결코 편치가 않다. 그 불편함이 이 영화 속의 유일한 과잉이다. 이창동 특유의 절제력이 기독교에서 유독 무너지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어쨌든 <밀양>은 오랜만에 진지하고 깊이 있는 사색을 요구하는 영화다. 랑그와 빠롤 사이의 장난질만 난무하는 21세기 소설만 읽다가(*'랑그'와 '빠롤' 같은 단어도 기사에서 읽을 수 있다니!), 1980년대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나 김성동의 <만다라> 같은 옛 소설을 다시 펴는 감동을 준다. 폭발하는 듯하면서도 결코 넘치지 않는, 대한민국 두 최고배우의 연기를 보는 기쁨도 있다.

사족 하나. 이 지독한 인간주의 영화가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어떤 평을 받을지 궁금하다. 학교에서 십자가와 히잡의 착용도 금지하는, 지구상에서 세속주의(secularism)를 가장 신봉하는 나라 평론가들이 모이는 만큼 <밀양>에 열광할 것 같은 예감이 들기는 한데…(유상호 기자) 

07. 05. 03.

P.S.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이창동의 모든 영화'라고 생각한다(내가 신뢰하는 건 그의 '리얼리즘'이다). 음, 네번째 영화가 제일 마음에 들 것도 같군...

P.S.2. 덧붙이는 기사는 '이창동 컬렉션'에 관한 것이다. 감독 자신의 음성해설을 담고 있다는 게 무엇보다도 큰 매력이겠다.

경향신문(07. 05. 03) [DVD코멘트]이창동 감독 콜렉션

2002년 ‘오아시스’ DVD 출시 당시 이창동 감독이 음성해설을 실었다는 소식에 많은 팬들이 두번 놀란 적이 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언급을 몹시 꺼리는 감독이 코멘터리를 녹음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고, 감독이 이를 녹음하다 말고 더이상은 못하겠다는 듯 영화 중간쯤 스튜디오를 나가버리는 바람에 다른 스태프가 해설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일에 ‘역시나’ 하면서 놀랐던 것이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등 그의 작품 3편을 모아 출시된 이번 타이틀엔 다행스럽게도 전편에 걸쳐 감독이 음성해설에 나서줬다. 여전히 “감독이 자기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금기 같은 일”이라는 감독은 이동진 기자와 함께 문답형식으로 코멘터리를 진행하며 비교적 충실한 작품해설을 들려주고 있다.

‘초록물고기’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하는 감독은 극중 막동이(한석규)의 정체성 탐구를 통해 “365일 공사중인 한국사회”의 풍경을 구현하고 있다. “감독이기 이전에 40대의 한 인간으로서 자기반성의 극점에 달했던 시기에 제 존재를 찾아가던 실존적인 작업이기도 했다”는 ‘박하사탕’과,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한 영화로 인물과 인물, 영화와 관객 등의 관계 사이에서 불안한 경계를 표현하려 했다”는 ‘오아시스’ 모두 감독의 본의를 밝히는 해설을 들으며 두번 세번 감상할 가치가 충분하다. 4장의 디스크로 구성된 이번 타이틀에는 영화 3편 외에도 이들의 제작과정 등을 담은 스페셜 피처 디스크가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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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03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대하고 있는 영화랍니다 :)

이리스 2007-05-03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보려고.. ^^

심술 2007-05-03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이청준의 단편소설 가운데 하나에서도 아이를 잃은 엄마가 기독교적 용서를 강요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스트레스 받다 자살하는 게 있었는데 김영현 작가도 비슷한 주제를 다룬 적이 있나 보군요.

Runa 2007-05-03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몇 자 답니다. 저도 이 영화가 무척 기다려지는군요.
음악도 좋다더군요. 이런 내용과 음악이 어떻게 만나는지도 듣고 싶네요.
<밀양>의 영화음악을 맡았다는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앙 바소의 음악 추천합니다.
http://www.christianbasso.com/pro01.html
날씨의 차이일까요?
남미의 정서에는 어떤 끈적한 슬픔같은 것이 담겨있는 듯 합니다.

푸른괭이 2007-05-04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술님/ [벌레 이야기]입니다. 이창동 감독님께서 직접, 이 소설과 [밀양]의 연관성을 얘기하셨지요.

로쟈 2007-05-03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술님/ <벌레 이야기>가 맞습니다. 김영현의 <벌레>와 잠시 혼동했습니다.
Horsain님/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알려주셔서 감사.^^

심술 2007-05-04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거 제목이 '벌레이야기'였구나. 고맙습니다, 푸른괭이님. 이창동 감독님도 연관성을 얘기하셨군요.

코스모폴리스 2007-05-04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무척 기대됩니다만, 요즘 한국영화 포스터들이 다 비슷해 보여요.
 

지난주에 세상을 떠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에 관한 기사를 하나 더 옮겨온다(지난주에는 주로 부고기사들이었다). 프레시안의 이 기사에서는 현대 러시아의 '최악의 지도자'였던 옐친의 과오들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적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고르바초프의 사회주의 개혁노선이 쿠데타와 뒤이은 옐친의 급진주의 노선에 의해 좌초당한 사실을 항상 유감스럽게 생각해왔는데, 기사에 따르면 미국의 시사주간지 <네이션>은 지난달 러시아 민주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는 보리스 옐친이 아니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정당하게 평가했다고. 사실 그런 대목이 눈에 들어서 스크랩해놓는 기사이다.

프레시안(07. 05. 01) 옐친이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옐친은 정녕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인가? 지난 달 23일 사망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서방 언론, 특히 미국 언론들의 과장된 평가가 줄을 잇고 있다. 언론들은 옐친을 '소련을 붕괴시키고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가져온 인물'이라고 치켜세우며 그의 생애를 반추하고 있다. 한국의 언론들의 평가도 미국적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경제 개혁은 실패했다' 혹은 '영욕의 삶을 살았다'며 균형을 잡긴 했지만, 그가 1991년 강경 공산주의 군부 쿠데타 당시 탱크에 직접 올라갔던 일에 대해서는 '맨주먹으로 쿠데타를 저지했다'며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지난번 페이퍼에서도 지적했지만, 옐친은 이 이미지 하나로 10년을 집권했다).


  
옐친 전 대통령이 러시아 정치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1991년 6월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1999년 블라디미르 푸틴 현 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하기까지, 의회를 포격하고 알짜배기 국유기업들을 마구잡이로 민영화하는 등 9년여 동안 옐친이 보여줬던 소위 '충격 정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옐친의 정치의 1991년 12월 소비에트 연방 해체 결정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의회와의 협의는커녕 법적 절차도 제대로 밟지 않은 채 소련 해체를 선언해버렸다. 소련의 해체가 아무리 역사의 대세였다고 할지라도 절차적 정당성을 결여한 독단적 결정은 국민들을 아연케 하는 것이었고 이후 보여준 비민주적인 정치행태의 시발점이 됐다.
  
소련의 해체 과정에 대해 미국의 정치평론가 스티븐 코헨은 지난해 시사잡지 <네이션>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사회적 합의 및 헌법 중시 태도로부터 이탈한 것"이라며 '위로부터의 변화'라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짜르식 전제정치와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고 혹평했다. 옐친의 그같은 조치는 또한 그에 앞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해 6년간 실시된 글라스노스찌(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과정에서 이룩한 민주개혁을 뒤흔드는 것으로 대중들의 분노를 샀다.
  
1992년 초부터 시작된 옐친의 이른바 '충격 요법' 정책도 러시아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이었다. 미국의 경제학자들, 특히 하버드대 경제학자들에 의해 사실상 강요되고 클린턴 미 행정부에 의해 지원을 받은 이 정책은 물가 통제 장치를 없애는 동시에 대규모 국유기업들을 민영화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옐친 주변의 '젊은 개혁가'들에 의해 의욕적으로 추진된 이 정책은 그러나 결과적으로 러시아 경제에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또 서민들의 화폐 자산의 가치를 추락시켜 러시아 국민들의 절반 가량을 빈곤선 아래로 떨어지게 했다. 그러나 서구의 언론들은 이를 가리켜 '개혁'이라고 선전했다.

1993년 10월 옐친이 의회 건물에 탱크로 발포했던 일은 철권통치를 방불케 했다. 옐친은 자신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1991년 쿠데타 당시 자신을 비호했던 의회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반대파를 제거한다는 명목이었다. 이 사건으로 187명이 목숨을 잃었고 5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더 중요한 것은 합법적 선거에 의해 선출돼 행정부로부터 독립적 자세를 견지했던 러시아 의회가 이후 정부의 시녀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형성된 러시아의 헌법적 질서는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러시아 대통령이 정당하고 독립적인 선거를 통해 수립된 의회에 대포를 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와 대부분의 미국 언론들은 옐친의 '치어리더'로 활약했다. 당시 미국의 한 고위 관리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클린턴 행정부는 옐친이 더 폭력적이더라도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1994년부터 시작된 체첸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공격을 멈췄던 1996년까지 수만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헌법에 보장된 연방주의는 공공연히 조롱당했다. 또 핵무기를 가진 국가에서 일어난 첫 번째 내전이라는 위험천만한 전쟁으로도 기록됐다. 러시아의 전투기와 탱크가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에 폭격을 퍼부을 때 클린턴 대통령은 옐친을 링컨 대통령과 비교하며 찬사를 쏟아냈다.
  
영국에 망명한 러시아 억만장자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등 소수의 올리가르히(과두재벌)에 의해 자금을 조달받고 친(親) 옐친 언론의 도움을 받아 치른 1996년 대통령 선거 운동은 불법과 탈법으로 점철됐다. 옐친은 "배당을 위한 융자"라는 악명높은 합의를 통해 자신에게 선거자금을 대주는 올리가르히들에게 러시아의 중요한 경제적 자산 통제권을 나눠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미국 언론들은 이를 '시장개혁'이라고 불렀으나 러시아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범죄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그같은 조치는 또 러시아의 올리가르히를 재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러시아의 한 저널리스트는 이를 두고 옐친은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가 아니라 '올리가르히의 아버지'라고 비난했다.


  
1998년 8월 실시한 루블화 평가 절하와 채무 상환 유예(디폴트), 은행 계좌 동결 조치 등의 정책은 서민들의 저축을 또다시 몰수한 셈이 됐고 1991년 이후 형성된 중산층을 몰락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옐친 치하의 러시아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만을 가져오는 반동적인 정치에 불과했다. 러시아인들의 70% 가까이가 권위주의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답했던 지난해 여론조사는 옐친의 유산이 러시아 민주주의에 얼마나 해로운 것이었는지를 반증한다.
  
올리가르히에게 러시아의 재산을 독점토록 한 '경제개혁' 역시 씻을 수 없는 실정이다. 유엔개발계획(UNDP)는 1999년 보고서에서 "구 소련에는 현재 사상 유례 없는 위기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으나 미국을 위시한 서방 언론들은 이를 깡그리 무시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대다수 국민이 고등교육을 받은 주요 산업국가가 이룩한 수십년간의 경제 개발 결과를 해체하는 현상이 현대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평가했으나 미국의 언론들은 옐친과 그의 '젊은 개혁가들'을 찬양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이에 대해 <로이터> 통신의 한 기자는 "고통이 편집됐다"고 촌평했다.
  
일각에서는 옐친의 충격요법적 경제개혁 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옐친이 무모한 정책을 추진하던 당시에도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러시아의 경제학자들은 옐친의 정책이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며 시장경제로의 보다 점진적인 이행을 목표로 하는 '제3의 길'을 주장했다. 시간은 그들의 주장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옐친의 유산을 물려받은 푸틴에 의해 러시아는 더 가난해졌고 양극화는 더 심각해 졌다(*양극화가 심각해진 건 사실이지만 더 가난해졌다?). 푸틴이 권좌에 오르자마자 했던 일은 옐친을 부패 혐의로 기소하지 말라는 포고령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네이션>은 지난달 27일 "언론의 건망증이 심한 건 알겠지만 1985년 소련의 지도자가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진정한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기억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며 "옐친은 언론 검열 철폐, 시장 개혁, 자유선거를 실시한 고르바초프 개혁의 최대 수혜자였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역사상 최초로 도입된 자유선거에서 옐친이 러시아 대통령으로 당선된 반면, 옐친은 자신의 부패에 따른 징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심복인 푸틴을 후계자로 지명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언론이 옐친을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극찬하는 것은 그가 서방의 입맛대로 행동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관측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고르바초프에 대한 인색한 평가, 나아가 푸틴에 대한 적개심은 민주주의보다는 러시아의 이익을 지키려는 이들의 독립적인 태도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옐친의 비민주적인 정치행태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행정부가 '옐친 개혁'의 후원자가 됐던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를 대세로 굳히려 했던 미국의 조바심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옐친 사후 나타난 미국 언론, 그리고 우리 언론의 태도는 그같은 서구우월적 시각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황준호 기자) 

07. 0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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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5-03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쇼군'이 대표작인 제임스 클라벨의 다른 장편소설 노블 하우스를 읽다가 소설 안 소련사람이 -참고로 노블 하우스의 시공간적 배경은 1963년 홍콩입니다- Matyeryebytz란 욕을 하는 걸 봤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죠? 짐작으로는 개새끼 내지는 18놈 같은데. 어떻게 소리내는지도 궁금합니다. 마톄례빗츠 쯤 될까요?

로쟈 2007-05-03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질문만 하시는데요.^^; 한국어도 그렇지만 제가 욕에는 과문해서 실제로 러시아 욕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흔히 하는 욕은 아닌 거 같고. 앞부분은 '어머니'란 뜻이 맞습니다). 스펠링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구요...

심술 2007-05-04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작컨데 로쟈님은 몹시 건전한(?) 삶을 살아오신 거 같네요.^^
 

한겨레에서 기획기사 '러시아의 20세기'를 옮겨온다. 지난 3월에 출간된 사진집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3 - 러시아의 세기>(북폴리오, 2007)의 자료사진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유익하고 생생하다. 6차례에 걸쳐 소개될 예정이라는 이 기사는 모두 옮겨놓을 계획이다. '러시아 이야기'이니까.

 

한겨레 (07. 04. 30) 러시아의 20세기 ① 로마노프 왕조의 최후

» 네 명의 어린 로마노프 공주들. 왼쪽부터 황녀 올가, 타탸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 사진/K. E. 한 <북폴리오> 제공
네 명의 어린 로마노프 공주들 = 살해되기 전만 해도 공주들은 유럽에서 신붓감으로 첫째 손가락에 꼽혔다. 1906년 9월 페테르고프의 여름 궁전에서 찍은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왼쪽부터 황녀 올가, 타탸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다. 가족에 대한 니콜라이의 헌신은 포로로 사로잡은 로마노프 왕조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 볼셰비키를 빼고 많은 혁명가들의 찬양을 받았다. <북폴리오> 제공

중국과 영국에 이어 지난 20세기 러시아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한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 3-러시아의 세기>(지은이 브라이언 모이나한)를 연재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장무도회에서 1917년 혁명으로, 스탈린의 잔혹한 시대에서 냉전의 시대로, 글라스노스트에서 1993년의 제2차 혁명으로, 그리고 현대 러시아의 혼란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솔제니친,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등 그들의 놀랍고도 극적인 모습들이 실려있다. 여기 대부분의 사진은 공개된 적이 없는 것으로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있다. 이번에도 출판사 ‘북폴리오’의 도움을 받았다.

러시아의 세기는 모두 6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순서는 1. 로마노프 왕조의 나라 2. 붉은 혁명 3. 볼셰비키 4. 예술의 꽃 5. 노동자의 삶 6. 사회주의의 죽음 등이다.

» 황후 알렉산드라. <북폴리오> 제공
황후 알렉산드라 = 1910년 7월 황실 요트 스탄다르트호로 니콜라이와 함께 항해하는 동안 보기 힘든 미소를 짓고 있다. 혁명 지도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니콜라이가 “멋진 푸른 눈말고는 유쾌하고 조금은 어색한, 아주 평범한 근위대 대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자부심이 강하고 자신의 통치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굽힐 줄 모르는 타고난 황후”임을 발견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인 알렉산드라는 영어 억양이 섞인 러시아어로 말했으며, 일관된 목표는 ‘아이’, 즉 황태자를 위해 전제정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황제 부처는 매우 친밀했다. 강한 성적 관심이 알렉산드라의 종교적 열정과 결합했다. <북폴리오> 제공

» 특별 개조한 자전거 위에 올라탄 황태자 알렉세이. <북폴리오> 제공
황태자 알렉세이 = 특별 개조한 자전거 위에 올라탄 황태자 알렉세이. 이 자전거는 알렉세이가 쉬 피로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병 조수 데레벤코가 설계했다. 알렉세이는 혈우병을 앓았으며 체내 출혈은 그를 매우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었다. 충성을 바치기로 되어 있던 데레벤코는 혁명 이후 젊은 혈기에 넘쳐 알렉세이를 조롱하고 새로 획득한 자신의 존엄성을 해친다고 생각하는 어떤 임무도 수행하기를 거부했다. <북폴리오> 제공

» 1912년 황실 사냥터인 벨레베슈 푸샤의 니콜라이와 사촌 드미트리 대공. <북폴리오> 제공
니콜라이와 드미트리 대공 = 1912년 황실 사냥터인 벨레베슈 푸샤의 니콜라이와 사촌 드미트리 대공. 나중에 라스푸틴 살해에 참여하게 되는 드미트리는 차르가 좋아한 몇 안 되는 로마노프 왕가 인사 중 한 명이었다. 사슴, 순록, 곰, 여우 사냥은 부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오락이었다. 몰이꾼 수십 명이 포수들 쪽으로 사냥감을 몰아주었고, 하얀 옷을 입은 이들 포수는 겨울 눈 때문에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북폴리오> 제공

» 간호복을 입은 황후와 알렉세이. <북폴리오> 제공
간호복을 입은 황후 = 옆에는 알렉세이다. 알렉세이의 병에 기반을 둔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니콜라이가 총사령관이 되어 모길료프에 있는 군 본부로 떠나자 더욱 커졌다. ‘독일의 압제’가 러시아인의 영혼에 깃든 반유대주의를 대체하고 다름슈타트 태생의 황후에게 따라붙었다. 카페에서 떠돌아다니는 우스갯소리에 따르면, 어린 황태자가 궁전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궁정을 방문한 장군이 “무슨 일이세요, 알렉세이?” 하고 묻는다. 황태자가 말한다. “러시아군이 지면 아빠가 울고, 독일군이 지면 엄마가 울 거예요. 난 언제 울어야 되요?” <북폴리오> 제공

» 그레고리 라스푸틴. <북폴리오> 제공
그레고리 라스푸틴 = 1916년 가을 러시아 정부를 지배한 사람은 라스푸틴이었다. 머리는 장발에 윤기가 없었고, 턱수염은 기름이 번질번질한 냅킨 같았으며, 이는 돌보지 않아 검게 변색되었다. 발레리나 타마라 카르사비나는 거리에서 라스푸틴을 지나치다가 “농민의 얼굴에, 이상한 눈빛을 지닌, 이해할 수 없는 두 눈을 가진, 바로 광인의 눈을 한”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 불가사의한 치료사를 황실에 소개한 사람은 황후의 절친한 친구이자 “비스킷 반죽의 거품처럼 평범한” 여자 안나 비루보바였다. 라스푸틴은 음탕한 언행으로 예절 바른 숙녀들을 흥분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북폴리오> 제공

» 차르의 후계자, 혁명 러시아의 초대 수상 게오르기 리보프 공. 나이아가라 폭포만큼이나 혁명에 무감각했던 둔한 인물이었다. 그는 말했다. “강물은 흘러 떨어진다. 그것뿐이다.” <북폴리오> 제공
» 전직 차르 니콜라이가 유폐 중인 차르스코예 셀로에서 자녀들의 가정교사인 피에르 질리아르와 함께 나무에 톱질을 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전직 차르 니콜라이 = 유폐 중인 차르스코예 셀로에서 자녀들의 가정교사인 피에르 질리아르와 함께 나무에 톱질을 하고 있다. 니콜라이는 항상 육체노동을 즐겼다. 그와 가족은 유폐되어 있는 동안 자진해서 일했다. 그는 “2시에 우리 모두 정원으로 갔다.”고 일기에 적었다. “다들 아주 열심히, 심지어 즐거워하면서 땅을 파기 시작했고 너무 열심히 일하느라 시계가 5시를 가리키는 줄도 몰랐다.” <북폴리오> 제공

» 1917년 5월 차르스코예 셀로의 정원에서 일을 마친 올가, 타탸나, 아나스타시야, 마리야(왼쪽부터) <북폴리오> 제공
감금당한 공주들 = 1917년 5월 차르스코예 셀로의 정원에서 일을 마친 올가, 타탸나, 아나스타시야, 마리야(왼쪽부터). 2월 쿠데타 이후 그들은 차르스코예 셀로에 감금되었으며 여기서 집안일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10월 쿠데타 후 가택연급은 거의 투옥에 가까웠다. 1918년 4월 그들은 예카테린부르크로 이송되었고, 7월 16일 이곳으로 암호화한 ‘처형 명령서’가 전달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07. 0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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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5-03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되는 시리즈네요. 담아가요.

이름없는괴물 2007-05-03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마노프 황가에 대한 책은 없을까요? 마지막 황가에 대한 낭만 탓에 책을 찾아 보고 싶은데 잘 없더군요.

로쟈 2007-05-03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마노프 황가의 운명>(2003) 같은 책이 있는데(657쪽) 국내에도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올 전주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은 체코 영화의 거장 이리 멘젤이라고 한다. 이미 전주에 와 있다는 그의 대표작 세 편이 서울에서 곧 개봉할 예정이라고. 모처럼 흥미를 끄는 영화 기사이다. 체코 영화인이라면 밀란 쿤데라와 밀로스 포먼 정도만을 아는 처지인지라(그러니까 상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인지라) 그의 방한은 반갑고 그의 영화는 기대된다(시놉시스상으론 내 취향에 딱 맞는 영화들이다). 흠...

한국일보(07. 05. 02) 체코 거장 이리 멘젤감독 대표작 3편 잇따라 개봉

디지털문명의 즉물성에 길들여진 세대에게 ‘고전’ 영화를 소개하는 일은 고통에 가깝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페데리코 펠리니, 프랑수와 드뤼포 같은 클래식 아티스트의 작품에 관한 글을 쓸 때면, 그래서 손가락 끝에서 땀이 솟는다. 그러나 체코의 거장 이리 멘젤(69)의 작품은 좀 다르다. 이미 수 십년 전 영화학사전에 이름을 올린 감독이지만, 이 보헤미안의 능청스러운 영화는 오늘 봐도 유쾌하다. 그의 대표작 <가까이서 본 기차>(1966년) <줄위의 종달새>(1968년) <거지의 오페라>(1991년)가 각각 10일, 17일, 24일 서울에서 개봉한다. 그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을 맡아 지금 전주에 머무르고 있다.



가까이서 본 기차
그가 스물 여덟 살 되던 해에 만든 장편 데뷔작.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며 ‘멘젤’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2차세계대전 말기의 보헤미아의 어느 시골역,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밀로쉬’라는 망측한 이름의 어린 역무원은 여자친구와 ‘한번 하는’ 꿈만 꾸며 산다. 그에겐 엄혹한 세상사보다 자신이 조루라는 사실이 자살을 시도케 할 만큼 절망스럽다. 우여곡절 끝에 ‘남자’로 다시 태어나는데 성공하지만 밀로쉬를 기다리는 것은 뜻밖의 비극. 우쭐해진 마음에 어줍잖은 레지스탕스 흉내를 내다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다. 경쾌한 리듬을 타고 고조되던 행복감이 단번에 전쟁의 용광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서른 살도 안 돼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희극과 비극을 교차하는 멘젤의 농밀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줄 위의 종달새
배경이 된 시대만큼 개봉까지의 사연이 많은 영화다. 멘젤은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맞아 폭압적이었던 공산정권의 기억을 필름에 담았지만, 곧 이은 소련의 침공으로 이 영화는 20년 넘는 동면에 들어간다. 영화가 개봉된 것은 90년 베를린영화제 때. 국제평론가상을 수상하며 시대를 뛰어 넘는 영화의 생명력을 과시했다. 철학교수 예술가 정치범 등 ‘사회주의의 적’들이 노동을 통해 정신개조를 받는 50년대 초 체코의 고철 공장. 밥그릇과 십자가를 녹여 군수품을 만드는 이 금속성의 시공간 속에, 멘젤은 인간의 온도를 담아 낸다. “사라지고 있는 것은 ‘추상’이 아니라 진짜 사람”이라는 철학교수의 대사에 멘젤의 목소리가 포개진다.



거지의 오페라
비교적 최근작으로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이 쓴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벨벳 혁명을 경험한 뒤 만든 작품인 만큼, 정신적 가치보다 물질적 풍요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꼬는 풍자를 담았다.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상케 하는 리드미컬한 전개와 익살스러운 인물 설정이 사회의 부조리를 비트는 해학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이리 멘젤 감독
멘젤은 전주에서 가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코미디를 할 뿐”이라고 했지만, 그의 영화가 코미디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역설적이다. 나치 점령에서 2차 세계대전, 프라하의 봄, 소련 침공, 벨벳혁명까지. 그가 겪어 낸 조국의 현대사는 웃음과는 거리가 멀다. 권터 그라스 등 많은 예술가들이 체코를 떠날 때도 그는 사실상 예술적 ‘연금’ 상황을 감내하며 조국을 지켰다. “누군가는 있어야 하지 않냐”는, 누가 물으면 애써 시니컬하게 대답하는 단답형 이유와 함께.

결코 만만치 않은 세월의 굴곡을 멘젤은 오히려 웃음과 풍자로 보듬는 지혜를 가졌다. 그의 영화에는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해학이 번득이다가 이내 인간에 대한 유머러스한 따스함이 번진다. 아무리 아픈 기억이라도, 사랑스러운 추억과 함께 녹아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면 이질적인 아이템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거대한 콜라주 작품이 연상된다. 인간이란 원래 그렇게 희극과 비극이 뒤섞인 존재가 아닐까.(전주=유상호기자)

07. 05. 02.

P.S. 장편 데뷔작인 <가까이서 본 기차>의 원작은 체코의 국민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엄밀히 감시받는 열차>(버티고, 2006)이다. 작년 가을에 새롭게 나온 이 책에 대해선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소개한 바 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329086&paperId=955833). 그때 영화 스틸사진도 옮겨놓았었는데 감독이 '멘젤'이란 건 알지 못했다. 여건을 만들어서라도 이 달의 영화로 문득 빠져들고 싶은데, 세상 일이란 게 만만하지가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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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5-03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일부터 큐브에서 개봉한다는데 저도 그저 오래 상영하기만을 바랄뿐입니다.
말로만 듣던 '줄 위의 종달새' 네요..

심술 2007-05-03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귄터 그라스 등 많은 예술가들이 체코를 떠날 때도' 이거 밀란 쿤데라를 유상호 기자가 실수한 거죠?

로쟈 2007-05-0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유님/ 단관 개봉이니까 오히려 사정이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심술님/ 다시 보니 그런 거 같네요. 눈이 밝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