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늦게 TV를 켜니 6.10 항쟁 기념식이 끝나고 있었다. 이게 원래 TV로도 방영된 기념식인지 올해가 20주년이어서 처음 방영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학생의 상당수가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른다는 사건이니만큼 이젠 '기념'할 때도 된 듯하다('6월 혁명'이라고 부르자는 '오버'도 그런 배경에서 나왔을 터이다). 관련기사들이 쏟아지는 틈바구니 속에 선불교의 정수라고 일컬어지는 <벽암록> 완역 소식이 묻혀 있었다. 불교 신자도 아니고 선(禪)에도 평균치 이상의 관심은 갖고 있지 않은 터여서 이 '장서용' 책을 서가에 꽂아놓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생각날 때 도서관에서라도 들춰볼 완역서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책은 각권 500쪽 내외로 전체 12만원이라 한다). 역자인 지현 스님의 10여년의 노고가 온축됐다고 하니까 더욱 기릴 만하다. 관련기사 두 개를 옮겨놓는다. 알라딘에는 아직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문화일보(07. 06. 08) 禪 불교의 정수… 10여년 걸쳐 완역 출간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 원나라 초기(1314~1320), 거사 장명원이 불타 버린 ‘벽암록(碧巖錄)’을 되찾아 복간하면서 책 머리에 붙인 말이다. 여기서 ‘종문’이란 ‘선문(禪門, 禪家)’을, ‘제일서’란 첫 번째로 꼽는 책이란 뜻이다. 그만큼 선불교의 정수가 모여 있는 책이 바로 벽암록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시작한 선불교는, 그러나 언어와 문자를 통한 탐구로 전승될 수밖에 없었다. 이 언어 문자를 통한 탐구는 송나라 때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는데, 선어록(禪語錄)은 이미 당나라 때부터 활발하게 출간되고 있었다. ‘조주록(趙州錄)’, ‘임제록(臨濟錄)’등이 당대에 출간된 책이라면, ‘조당집(祖堂集)’(전20권), ‘전등록(傳燈錄)’(전30권)과 같은 방대한 공안사서(公案史書)는 송대에 출간된 책들이다. 이런 책들이 출간된 뒤 공안에 대한 본격적인 주석서가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 가운데 가장 윗자리에 있는 책이 벽암록이다. 벽암록이 나온 뒤 벽암록만큼 불교 선 수행자와 유교 사대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책은 없었다.

벽암록은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 다시 살아난 부활의 책이기도 하다. 벽암록을 쓴 원오극근(1063∼1135)의 제자 대혜종고(1089∼1163)가 벽암록이 출간된 지 30년쯤 뒤 판각과 잔본을 모두 회수해 소각해 버렸다. 수행자들이 벽암록의 본 뜻을 저버린 채 언어만을 익히고 수행은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벽암록은 불에 타거나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벽암록이 불탄 190년 뒤, 거사 장명원이 벽암록을 되살린 것이다.

벽암록은 100개의 공안(公案), 즉 본칙을 중심으로 일종의 머리말인 수시(垂示), 촌평이라 할 본칙 착어(著語), 해석격인 본칙 평창(評唱), 공안에 대한 깨달음을 예지와 영감에 찬 시로 읊은 송(頌), 송의 착어, 송의 평창 등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된 벽암록치고, 수시에서 송의 평창에 이르기까지를 완전히 번역한 책은 없었다. 본칙은 모두 번역했으되, 수시나 착어, 평창 등은 빼고 번역했다.

이번에 나온 책은 국내 최초의 벽암록 완역 해설본으로, 벽암록 전문의 원문을 수록하고 토를 달았다. 벽암록 네개의 이본(異本)을 대조하고, 100칙 공안 하나하나마다 활구(活句·참선으로 깨달아야 할 부분)와 사구(死句·읽어서 이해할 부분)를 일일이 구분해 제시했다. 역주작업에 10년, 출판에 3년이 걸렸다고 한다. 벽암록, 속어 낱말 사전까지 합쳐 전5권에 이르는 대작이다. 불교출판이 난숙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김종락기자)

동아일보(07. 06. 07) 禪어록의 백미 ‘벽암록’ 완역 출간

“벽암록 번역에 착수하고 나서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긴 했네요. 최선은 다했는데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뤄 낸 일에 비하면 돌아온 답변이 매우 겸손하다. 벽암록(碧巖錄)은 선(禪)에 관심 있는 사람은 물론 출가한 스님들도 완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난해한 선어록의 백미다. 중국에서 나온 이 책의 번역을 시작한 지 9년, 교정과 편집에만 2년 반이 걸린 끝에 총 5권(사전 1권 포함)으로 펴낸 석지현(60·사진) 스님.

벽암록은 선의 문헌 가운데 첫 번째로 꼽는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로 알려져 왔다. 당대 선승들의 선문답과 어록을 담은 ‘조주록’과 ‘임제록’, 송대에 발간된 ‘조당집’ ‘전등록’ 등의 방대한 사서에 대한 주석서가 바로 벽암록이다. 설두중현(980∼1052) 선사가 조당집과 전등록 등의 책에서 가려 뽑은 옛 공안(公案)을 바탕으로 송나라 원오극근(1063∼1135) 선사가 이 책에 수시(垂示·일종의 머리말), 착어(著語·속담과 속어 등으로 이뤄진 촌평), 평창(評唱·본문에 대한 설명과 주석)을 붙인 것이다. 원오의 제자 대혜종고 선사가 “수행은 하지 않고 책만 읽는다”며 나중에 벽암록 판각과 잔본을 모두 회수해 불살라 버렸지만 190년이 지난 뒤 거사 장명원에 의해 전10권으로 부활했다.

그러나 벽암록은 여전히 어렵고 정복이 힘들었다. “선 수행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이 책이 마지막 관문이지요. 이 이상은 없습니다.” 지현 스님은 13세 때 충남 부여 고란사로 출가했다 명상에 심취해 1970년대 중반 인도를 방랑했다. 인도의 명상가 라즈니시의 서적들을 최초로 한국에 소개한 이도 지현 스님이었다. 그는 명상의 끝이 결국 선에 이를 것이라고 결론짓고 1980년 다시 송광사로 재출가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출가 후 덕산 스님에게서 선어록을 공부한 이래 거의 독학하다시피 해 ‘선시감상사전’ 등을 집필하기도 했다. “벽암록은 모두 당송 시대 평민들의 사투리인 속어로 돼 있습니다. 문장체가 아닌 구어체이고 생활용어들입니다. 속어를 공부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당송 때의 속어사전까지 원전을 구해 공부했지요.”

스님은 벽암록을 번역하면서 아예 ‘벽암록 속어낱말사전’을 출간했다. 책을 발간한 민족사 윤재승 사장은 “책 번역하면서 사전 한 권까지 만들어 냈으니 보통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벽암록이 3, 4종 나왔으나 일부만 번역돼 있거나 해설 없이 출간됐다”며 “돈과는 전혀 관계없는 책이나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윤영찬 기자)

07. 06. 10

P.S. 그간에 <벽암록> 번역으로 가장 많이 읽힌 건 안동림 역주의 <벽암록>(현암사, 1999)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은 아니고 대신에 내가 재미있게 읽은 책은 김용옥의 <화두, 혜능과 셰익스피어>(통나무, 1998)이다. 불교에 문외한이더라도 교양서로 충분히 일독할 만한 책이다. 그밖에 '선'과 관련하여 내가 상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은 스즈키 다이세쓰나 토머스 머튼 같은 학자/명상가들의 이름이다. 찾아보니 스즈키의 <선이란 무엇인가>(이론과실천, 2006)가 작년에 다시 번역돼 나왔고, 머튼의 책은 <신비주의와 선의 대가들>(고려원, 1994) 등이 절판된 듯하다. 가장 최근에 나온 <토머스 머튼과 틱낫한>(두레, 2007)이 소개서로는 유용하겠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달팽이 2007-06-10 21:48   좋아요 0 | URL
잘 읽고 갑니다.
퍼갑니다.

반조 2007-06-10 23:24   좋아요 0 | URL
로쟈 님의 안목을 거쳐 소개되는 글들 고맙습니다. 특히 저는 선어록에 관심이 많은데 무척 흥미로운 기사이군요.

그런데, 문화일보의 "국내에 번역된 벽암록치고, 수시에서 송의 평창에 이르기까지를 완전히 번역한 책은 없었다"는 말은 틀린 듯합니다. 장경각에서 선림고경총서로 번역한 3권짜리 벽암록은 본칙의 수시, 착어, 평창, 그리고 송의 착어, 평창을 전부 번역하였습니다. 번역도 매우 훌륭하다고 봅니다.

"국내 최초의 벽암록 완역 해설본"이란 타이틀은 아마도 "역자의 해설까지 곁들인 완역본"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해설은 정말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완역+해설"은 국내 최초이긴 하지요. (그러나 제 예감으로는 이 "해설"이 한문 자구에 대한 해설이지 내용에 대한 해설이 아닐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해설은 환영할 만하겠지요.) 그러나 국내 최초 완역본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지현스님은 "지금까지 벽암록이 3, 4종 나왔으나 일부만 번역돼 있거나 해설 없이 출간됐다"는 촌평을 했겠지요. 제가 볼 때, 이 완역본의 최대 의의는 5권의 벽암록 속어낱말사전일 것같습니다. 이제까지 누구도 그것을 해내지 못했으니까요.

그리고 언급하신 안동림 번역본은, 제 판단으로는, 인터넷 용어로 '안습'입니다. 아직 구입하지 안으셨다면 구입하지 마세요. 누군가 이 번역본을 제대로 혹평(!)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로쟈 2007-06-10 23:3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쪽으로는 반조님이 정확하시겠습니다. 사실 '해설본'이라거나 '속어낱말사전'만으로 '완역'의 의의를 평가할 수는 없겠고, 기존의 '완역본'과 대조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네요. 안동림 역은 아무래도 '가장 구하기 쉬운 번역본'이라는 게 한몫했을 거 같습니다. 아무도 문제가 많은 번역에 대한 '비평'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 당연해 보이기도 하네요. 다들 수양이 깊으신 탓이겠지요...

테렌티우스 2007-06-11 08:02   좋아요 0 | URL
지금은 아마 절판되었겠지만 정음사에서 이전에 에리히 프롬과 스즈키 다이세쓰, 그리고 리차드 데마르티노라는 세 사람의 논문을 차례로 묶은 '선과 정신분석'(정음사)이라는 책이 있었지요. 마지막 데마르티노라는 사람의 글만을 제외한다면 참으로 훌륭한 선에의 입문서입니다. 절판된 것이 무척 아쉬운데, 그후로 새로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또 물론 번역의 질이 들쑥날쑥 하지만 그럼에도 장경각의 '선림고경총서'(36권?)도 빼놓을 수 없지요.^^

로쟈 2007-06-11 08:44   좋아요 0 | URL
'선과 정신분석'은 저도 생각이 나네요. '선과 푸코' 같은 글도 언제 한번 쓰셔야겠습니다.^^

테렌티우스 2007-06-12 20:26   좋아요 0 | URL
흠 그렇지 않아도 푸코가 1978년의 두번째 일본방문때 한 선방을 방문해서 고승(이름은 생각이 안 나네요...) 및 그 절의 선승들과 대화한 대담이 남아있어요. 제목이 '푸코와 선불교'이지요.

제가 이후에 '푸코의 일본강연'이라는 제명으로 (첫번째 방문인 1971년 그리고 이 1978년의) 약 10여개의 학회발제, 발표, 대담 등을 묶어서 해제와 함께 번역해볼 작정입니다(분량이 아주 꽤 됩니다...).

책이 좀 나갈까요?^^

로쟈 2007-06-12 20:40   좋아요 0 | URL
'아주 꽤' 된다면 흠... <주체의 해석학>도 그다지 안 나가는 듯해서요.^^

yoonta 2007-06-13 03:07   좋아요 0 | URL
앗 재미있겠습니다. 테렌치우스님 책 내신다면 한권 미리 예약합니다. ^^

테렌티우스 2007-06-13 22:34   좋아요 0 | URL
이름을 다시 테렌티우스로 바꾸었습니다. 요즘 라틴어를 배우는데 Terentius는 기원전 2세기의 인물이므로 글 중간의 ti를 중세 라틴어 이후의 발음인 '치'가 아니라 '티'라고 읽어야 한답니다... ㅠㅠ 이름을 자꾸 바꾸고 헛갈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레디앙에서 이샤야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애플북스, 2007)에 대한 리뷰 하나를 옮겨놓는다. 나는 책이 나오자 마자 원서와 함께 대조해 가면 절반쯤 읽었더랬다. 그 이상은 다른 일들에 치어 잠시 미뤄졌는데, 번역돼 나온 것이 반갑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좀 무성의한 대목들이 자주 눈에 띄는 번역서이다. 항상 사정권 안에 있던 책이 당장 눈에 띄지 않아서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지적하기로 한다. 미리 말해두자면,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하여'란 부제대로 책은 일단 톨스토이와 그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고급스런 에세이로 읽혀야 한다. 무슨 경영서나 처세서로 포장한 출판사측의 '기획'에 대해서는 거듭 유감을 표하고 싶다(그런다고 책이 더 팔리지도 않는다). 아래 리뷰 또한 그런 지적을 포함하고 있다.    

레디앙(07. 06. 09) "톨스토이, 고슴도치라 생각한 여우"

인간은 크게 보면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에 관련시키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이런 시스템은 모든 것을 조직시키는 하나의 보편 원리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시스템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생각하며 느낀다. 다른 한 부류는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이 목표들은 흔히 서로 관계가 없으며 때로는 모순되기도 한다. 물론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이유에서 사실적인 관계를 갖지만 도덕적이고 미학적 원리에 근거한 관계는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행동지향적이며, 생각의 방향을 좁혀가기보다는 확산시키는 경향을 띤다.”(p.7~8)

이사야 벌린, 우리에게는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로 잘 알려진 저자는 전자를 고슴도치형 인간, 후자를 여우형 인간이라고 명명한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 단테, 파스칼, 헤겔,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입센, 프루스트가 고슴도치형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몽테뉴, 에라스무스, 몰리에르, 괴테, 푸슈킨, 발자크, 조이스는 여우형이다. 그렇다면 톨스토이는 어느 쪽에 속할 것인가? 이사야 벌린은 이 질문으로 『고슴도치와 여우』를 시작한다. 곧 “톨스토이가 일원론자인지 다원론자인지, 결국 톨스토이가 하나의 비전을 추구했는지 다양한 비전을 추구했는지”(p.11)를 묻는 것이다.

이사야 벌린은 톨스토이의 작품 중 가장 논란이 많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과 평화』를 텍스트로 삼는다. 『전쟁과 평화』는 문학적 작품성은 높지만 작가의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언설이 결정적인 흠으로 지적되는 작품이다. 곧 톨스토이의 장점과 단점이 다 담겨져 있는 셈이다. “젊은 지식인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특징답게 설익은 지식으로 가르치려는 (그 결과로 예술적 가치를 손상시키는) 톨스토이의 성향 탓…중략…일탈의 전형적인 예” “톨스토이가 훌륭한 사상가라기보다 훌륭한 작가라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이다” 등등.(p.19) 하지만 이사야 벌린은 접근을 조금 달리한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왜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달리 말한다면 『전쟁과 평화』를 톨스토이의 진정한 작품으로 말하고자 한다. 결론을 줄여 말한다면, 톨스토이는 스스로를 고슴도치라고 믿었던 여우다. 근원적인 질문에 근원적인 대답을 원했지만 그 질문과 대답은 늘 구체적이고도 세부적인 것들 속에서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톨스토이의 모습을 한낱 한계라는 짧은 단어로 규정해 버리면 안 된다. 그것은 자아와 세계에 대한 작가의 정직함이자 성실함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자아와 세계를 묻지 않는 작가가 그 얼마나 많은가?

“톨스토이 식으로 말하면 삶을 만들어가는 진정한 구성 요소인 ‘생각, 지식, 시, 음악, 사랑, 우정, 증오, 열정’을 기록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할까?”(p.45)

그렇다면 톨스토이를 “여우냐 고슴도치냐”라고 묻는 이사야 벌린 자신은 여우일까 고슴도치일까? 책을 번역한 강주헌은 “전통적인 자유주의 지지자였으며, 다원주의를 신봉했다. 사회를 조직하는 문제에 단 하나의 해결책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라는 벌린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며 “여우형에 가깝다”라고 평한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이 책 『고슴도치와 여우』는 어떤 유형의 책일까? 책을 장식하고 있는 붉은 색 띠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방어형의 고슴도치 경영과 공격형인 여우 경영이 적절히 조화되어야 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말씀이시다. 이건희의 멘트가 등장하니 경제경영서? 띠지 뒤쪽에는 “당신은 여우로 살 것인가 아니면, 고슴도치로 살 것인가? 이 책은 톨스토이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당신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쯤이면 자기계발서가 될 노릇이다.

한마디로 『고슴도치와 여우』는 겉과 속이 다르게 포장된 책이다. 카피문구나 책의 장정과 편집 스타일은 경제경영이나 자기계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띄고 있지만 그 속 내용은 톨스토이라는 대작가의 역사관과 내면을 짧지만 깊이 있게 파헤치고 있는 인문서이기 때문이다. 상술이 본질을 압도하고 있음이다. 형식이 내용을 앞지른다. 그것이 책을 읽는 내내 가시가 되어 찌른다. 자본주의라는 고슴도치가 여우를 찌른다.(김용필/ 텍스트)

07. 06. 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인연'을 갖고 있고 강의에서도 자주 다루게 된다. 이번 학기에는 특히나 오랫동안 자세히 읽기를 시도했는데, 그렇다고 아직 연구서 한권 낼 만한 형편은 안되기에(석달 정도의 자유시간이 필요하다) 이런저런 읽을 거리들을 참고자료로 제시하곤 한다. 가장 최근 자료로 참고할 만한 것은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웅진지식하우스, 2006)의 저자 김용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통해서 본 ‘죄’와 ‘벌’의 의미'로 얼마전 한겨레에 2회 걸쳐서 분재됐다. 아마도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의 속편에 포함될 듯하다.

 

한겨레(07. 05. 19) 인간의 경계 뛰어넘은 ‘자만의 죄’ 고발

1849년 12월 22일, 러시아 세묘노프스키 광장에서는 사형이 집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의 특사가 내려 사형 직전의 한 청년이 살아났다. 그는 시베리아에 있는 수용소로 보내져 4년간 혹독한 강제노동을 했다. 간질발작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날들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청년이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자신의 신념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수용소에 갇히기 전, 청년은 무신론적 사회주의자과 어울렸다. 그들과 함께 황제를 모독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생각이 변했다. 왠지 사회개혁을 위해 무릎을 세우고 일어서는 혁명가들보다 쓰러진 자들을 일으키려고 허리를 굽히는 사람들이 더 선하게 여겨졌다. 이성과 과학을 숭배하는 합리적 지식인들보다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바보 같은 민중들이 더 지혜롭게 생각되었다. 그는 그 이유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런데 청년은 소설가였다. 그래서 남은 생애동안 바로 이 문제, 오직 이 문제와 싸우며 글을 썼다. 그 결과 위대한 작가가 되었다. 청년의 이름이 도스토예프스키이고, 바로 그 문제를 다룬 첫 장편소설이 <죄와 벌>이다.

이제부터 ‘죄’와 ‘벌’ 둘로 나누어 살펴볼 이 작품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사는 법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우연히 알게 된 창녀 소냐의 권고를 받아 자수하게 된다는 게 전부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불후의 명작이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심리학자들마저 격찬할 만큼 뛰어나게 인간의 심리를 그려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에게 죄와 벌이 과연 무엇인가를 신학자들마저 경탄할 만큼 심오하게 파헤쳐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우선 죄를 보자.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인이다. 이견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왜 죄인인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은 달랐다. 그리고 이 다른 생각이 이 작품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기 이전부터 이미 죄인이었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인가 보자.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동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심리적 억압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연구가인 모출스키의 주장처럼,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무더운 날씨, 어머니와 여동생마저 돌보지 못하는 가난한 자신의 처지가 분명 그를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을까? 아니다. 더 중요한 동기가 따로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가 나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을 자신이 인류를 위해 봉사하게끔 학비로 사용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와 같이 <비범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법률을 위반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솔로몬과 마호메트, 그리고 나폴레옹을 예로 들어 자기를 정당화했다. 이들이 그랬듯이 새로운 사회와 법률을 위해서는 낡은 것들을 파괴해야만 하는데,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그것이 당연히 허용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는 한 점 죄의식조차 없이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했다. ‘초인사상’으로 일컬어지는 이런 생각을 도스토예프스키는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이상하고 온전치 못한 사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인간이 이런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범죄 이전의 죄’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사실인즉 <죄와 벌>을 썼다.

그는 ‘범죄 이전의 죄’라는 개념을 기독교 종파인 러시아 정교에서 얻었다. <구약 성서>에 서 아담은 뱀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해서 그것을 따먹었다. 그리고 죄인이 되어 낙원에서 쫓겨났다. 원인은 “하나님같이 되리라”였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신처럼 되려고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자만’이라고 부른다. 자만이 곧 ‘범죄 이전의 죄’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진 죄가 바로 이것이다.

<죄와 벌>에서 ‘죄’라는 의미로 사용된 러시아어 ‘prestuplenie’는 본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뜻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단어를 ‘법률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인간이 자신의 경계를 뛰어넘는 경우 그의 죄에는 죄의식이 없다. 그의 이성이 모든 것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이 무참한 죄를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고발하고 또 경고했다. 그런데 돌아보자. 우리가 그로부터 과연 무엇인가 배웠는가를. 20세기 들어 수백만 명을 학살한 독일 나치나 러시아 공산당이 어땠는가를. 그리고 생각해보자. 21세기인 오늘날에는 이처럼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를.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이상하고 온전치 못한 사상”이 없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자.  

한겨레(07. 06. 02) 죽음보다 끔찍한 벌 벗는 길은 희생

<죄와 벌>은 죄보다 벌에 관한 작품이다. 분량만 보아도 그렇다.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모두 7부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죄는 1부에 다 드러난다. 나머지는 모두 지옥 같은 벌에 대한 설명이다. “단테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지옥의 모든 단계를 통과한다. 그런데 이 지옥은 〈신곡〉의 중세적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 모출스키의 말이다. 돌아보자. 죄가 무엇이었는지. 그래야 벌을 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죄는 자만이었다. 그것은 원초적 죄로서 모든 악행과 범죄가 여기에서 나온다. 기독교적 사변이다. 그럼 벌은 무엇인가? <구약성서>에서 신은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벌로 “정녕 죽으리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막상 선악과를 따먹자 죽이지 않았다. 추방했다. 그럼 성서는 처음부터 신의 거짓말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학자들의 생각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생명이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죽음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빛이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어둠에 속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진리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거짓에 서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선함이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악함에 머무는 것이다. 신은 이러한 벌들로 자신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켰다. 이것이 성서에 나오는,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던 벌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총 6부에 걸쳐 고발한 그 벌이다. 모출스키가 <신곡>의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는 그 지옥 체험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받은 바로 그 벌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벌을 살인이라는 범죄로, 그 범죄에서 오는 심리적 어둠으로, 그 범죄를 숨기려는 거짓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악행을 차례로 체험함으로써 받았다. 그것이 얼마나 무겁고 괴로운지를,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지옥 체험인지를, 오직 그것만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수백 쪽에 걸쳐 묘사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수를 한 것은 결코 양심의 가책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괴로워한 것은 단지 악을 체험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 때문이었다.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 때문이었다. 이 벌의 성격을 예심판사 포르피리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도망가면 어쩌죠?”라고 묻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넨 도망가지 않을 거야. (…) 자네가 도망간다 해도 아마 스스로 되돌아올걸? 자넨 우리 없이 지낼 수 없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단지 이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차라리 자수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에는 같은 벌을 받는 인물이 하나 더 등장한다. 스비드리가일로프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다른 악의 짝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사회주의 이상을 내세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죄를 지었다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유주의 이상을 내세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죄를 짓는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기 부인을 살해하고, 하인을 학대하여 자살하게 하고, 14살 어린 소녀를 능욕하여 자살하게 했다. 그의 범죄는 개인적인 정욕과 쾌락에서 나왔다. 범죄 동기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와 다르지만, 원인은 같다. 그에게도 욕망과 쾌락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만이 있었다.

결국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하다. 개인적 이익과 욕망을 위해서든, 사회적 이익과 개혁을 위해서든,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만이 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지옥보다 더 끔찍한 지옥에 갇힌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라스콜리니코프는 차라리 수용소에 가려고 자수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권총으로 제 머리를 쏘았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미국에 가기 위해서야”였다.

그렇다면 이 죄와 그 벌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는가? 있다. 의외로 간단하다. 자만이 원인이면 겸손이 해법이다. 날 세운 이성이 원인이면 바보 같은 신앙이 해법이다. 타인 희생이 원인이면 자기 희생이 해법이다. 창녀 소냐가 그 일을 맡았다. 그녀는 비참하게 살아가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며 자기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인간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를 ‘유로지비’라고 불렀다. 러시아 정교에서 ‘성스러운 바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죽은 나무에 수년 동안 물을 길어다 부어 마침내 어느 날 푸른 잎을 피워낸 어떤 수도사를 일컬은 말이다. 눈뜬 이기주의와 눈 먼 합리주의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사회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성스러운 자유를 가졌던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소냐가 바로 그다. 소냐는 이 방법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구했다.

그럼 생각해보자. 오늘을 사는 라스콜리니코프와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누군가를. 그리고 우리가 속한 시대와 사회를 구할 진정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보자.(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07. 06. 09.

P.S. '유로지비'는 '성스러운 바보'를 뜻하지만 작품에서는 문맥상 '광신도', 곧 '신에 미친 여자'란 뜻도 내포한다.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를 대립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형식논리적이며 이 작품의 역동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감이 있다. '날 세운 이성'뿐만 아니라 '바보 같은 신앙' 또한 인류사에서 많은 죄의 근원이지 않았던가. 이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물론 '새로운 이야기'에 속하는 것이겠지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퍼그 2007-06-10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처럼 주 독자층을 청소년으로 생각하고 쓴 글이라 구도가 좀 더 단순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자"도 같은 맥락일 것 같고요.^^

로쟈 2007-06-11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층에 대한 고려도 있겠도 분량 제한도 있겠지요. 한데, 모든 해설이 갖는 함정이지만 작품읽기를 대체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어서요...
 

'작가와 문학사이' 21번째 작가는 사랑 듬뿍 받는 소설가 김애란씨이다. 심진경 평론가에게 바톤을 이어받은 젊은 평론가 차미령씨가 공개적으로 표나는 애정고백을 바치고 있다. 혹은 작업을 걸고 있다. '독자를 세번 매료시키는 힘'이라... 넉다운시킨다는 얘기 아닌가?..  뉴스메이커에 실린 가장 최근의 인터뷰 기사도 후미에 붙여놓는다. 평론가의 애정고백이 영 쑥쓰럽다고 하므로.  

경향신문(07. 06. 09) [작가와 문학사이](21) 김애란-독자를 세번 매료시키는 힘

한 소설가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 양반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작업을 거는구나.’(이기호)

또 한 비평가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이 작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가능한가?”(신형철)

2003년 등단한 작가는 2005년 ‘최연소’라는 타이틀과 함께 유수의 문학상(한국일보 문학상)의 영예를 누렸다. 작금의 한국소설을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남녀노소를 막론한 이 일치단결이 그렇고 그런 안간힘처럼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넘겨짚은 분들은 조만간 출간될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을 꼭 읽어 보기 바란다. 이러한 반응이 예사로 부풀려진 것이 아님을 단박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범한 작가는 누구인가. 김애란이다. 1980년생이다.

현재 김애란은 2000년대 젊은 소설의 대표명사다. 하지만 동년배의 소설들과는 확실히 다르고, 그래서 더 눈에 띈다. 최근 1, 2년 사이 데뷔한 문단의 최신예들은 이상하고 신기하고 난해한 이야기들을 창안하는 데 몰두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김애란은 누구나 겪었을 법한 범속한 일상의 사건들로부터 누구나 쉽사리 포착할 수 없는 그 이면의 진실들을 끌어내서 기어이 독자가 무릎을 치게끔 만든다.

김애란은 세번 독자를 매료시킨다. 한번은 그 활달한 상상력에, 한번은 재치 넘치는 언어감각에, 또 한번은 세상살이를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시선에. 이 세층위가 한데 엉기며 시너지 효과를 빚어내는 것이 김애란 소설이다. 그중 세번째 층위가 유난하다. 그 시선이 비루한 동시에 숭고한 우리네 삶을 다시금 곱씹게 한다.



작가의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에서는 기원에의 탐색, 서울 변두리 자취 남녀들의 삶,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적 탐구가 유머와 페이소스를 등에 업고 촘촘히 펼쳐진다. 각각을 대표하는 소설의 제목을 따와 작품집의 면면을 간략히 스케치해 본다. 불꽃놀이는 자기 생명을 기획하고 재연하는 개체의 첫번째 시나리오(‘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이고, 아무도 노크하지 않는 집은 단절되고 고립된 현대인의 거처(‘노크하지 않는집’)이며, 종이 물고기는 현실의 수면 아래를 찢어질 듯 힘겹게 유영하는 글쓰기의 상징(‘종이 물고기’)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가. 개인의 서사, 개인의 윤리다. 마찬가지로 제목을 빌린다. 우리는 각기 우리 삶의 ‘영원한 화자’다.

두루 환영받은 첫 창작집 이후, 이즈음 김애란 소설은 더 몸을 낮추고 더 낮은 자리로 향하고 있다. 편의점과 원룸은 애당초 댄디들의 세련된 일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근래 발표한 소설들의 공간은 거기서 다시 여인숙(‘성탄특선’)과 반지하방(‘도도한 생활’)으로 옮아간다. 제목부터가 아이러니다. 지상의 방 한칸마저 마땅치 않은 청춘남녀들에게 성탄절은 ‘역병’이나 다름없고, 도도하기는커녕 비애가 뼈아프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그곳에서 김애란의 인물들이 이제 누군가와 맞닥뜨리고 있는 까닭이다. 그 누군가는 동남아시아 출신 외다리청년이기도 하고, 누르스름하고 고르지 않은 이를 가진 사내이기도 하다. ‘영원한 화자’가 마침내 조우하기 시작한 이 타자들에 대한 인식을,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또 어디까지 밀어붙이는가에 따라 앞으로 김애란 소설의 성패가 갈릴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자리에선가 김애란은 말했다. “다만 이 이야기가 나한테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쓸 뿐이라고. 겸사인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영화감독도 했다. “나쁜 영화는 지구의 종말을 걱정하고, 좋은 영화는 나의 내일을 걱정한다.”(차이밍량) ‘나’에게 절실한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소설만이, 안으로는 질문을 내장하고 바깥으로부터 퍼부어지는 질문 역시 끝내 견뎌낸다. 누구나 주목하고 좋아하는 작가를 주목하고 좋아한다고 말하기란 영 쑥스러운 노릇이다. 그러나 그 염치불구를 무릅쓰게 할 만큼 김애란 소설은 동시대 비평가에게는 설레는 기쁨이자 섬세한 자극이다.(차미령|문학평론가)

뉴스메이커(07. 06. 12) ‘달려라 아비’의 김애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쓸뿐이죠”

“젊으니까 뭔가 다르고 새롭게 써야 한다는 의무감보다는 부러 ‘비스듬히’ 보지 않고 ‘오래, 빤히’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출판계와 저널리즘에 이르는 오늘날 문단의 불문율 중 하나는 ‘김애란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한다. 진보적 리얼리스트들에서부터 전위적 모더니스트들에 이르기까지, 젠 체하는 비평가들에서부터 자유분방한 독자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 문학평론가 신형철(계간 ‘문학동네’ 2006년 가을호)

“최근 문학현장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을 준 신인작가로(…) 박민규와 김애란을 꼽을 수 있다” -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계간 ‘창비’ 2006년 봄호)

소설가 김애란(28)에 대한 극찬은 이뿐만이 아니다. 2005년에는 김애란이 창작집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순원문학상 예심을 통과하지 못했을 때 몇몇 심사위원이 “규정을 바꾸라”며 반기를 들고 나서기도 했다. 김애란은 단편 몇 편만으로도 검증이 끝난 작가라는 게 당시 의견이었다.

1980년생인 소설가 김애란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를 졸업하고, 제1회 대산대학생문학상 소설부문 당선(2003년)을 거쳐, 2005년 11월 단편 ‘달려라, 아비’로 역대 최연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이후 출간한 그녀의 첫 창작집 ‘달려라, 아비’(창비)는 한 달 만에 판매부수 1만 부를 넘기면서 문단은 물론, 새로운 소설에 목마른 독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칭찬만 있는 건 아니다. “김애란 소설의 특징은 개그적 재능이다. 자기 삶을 통일시켜줄 규범이 없는 세대니까, 개그처럼 즉흥과 되풀이가 많은 것이다”(평론가 유종호), “상황 속에서 어떤 말이 태어난 것이 아니고, 말 한마디를 표현하기 위해 상황을 만든다. 장면만 제시하고 지나가는 TV 드라마와 같은 소설이다”(소설가 이청준)가 그것이다.

그러나 문단이든 독자든, 김애란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그녀의 출연에는 ‘한국 소설의 샛별’이라는 평가가 뒤따르고 있다. 질질 끄는 문체와 화려한 수식어, 한 말 또 하고 또 하기를 거듭하는, 지극히 관념적인 기존의 여성 작가들 문장에 질린 독자들에게 김애란의 짧은 호흡, 수미상응의 작법, 군더더기 없는 경쾌한 문장, 세상을 미워하지 않는 쿨한 문장은 신선함과 함께 우리 문단에 대한 기대 수준을 높여 놓았다.

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김애란 작품에서 찾는 ‘소설에의 희망’은 중성(中性)성과 우리 시대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다. 우선 그녀의 인물들은 자신의 성별에 의지하지 않는다.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주어지는 특별한 상황은 없으며, 때문에 슬프거나 노엽거나 좌절하거나 그 처리과정도 중성적이다. 이 중성성이 소설의 명랑성을 만드는 원천이라는 평가다. 이 점이 기존 여성 작가들과의 구별점이기도 하다.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여성보다는 인간에 주력하고자 했다”는 것이 작가의 말이다.

그녀는 많은 작품에서 아버지를 등장시키는데, 봉건사회와 분단시대, 그리고 산업화라는 시대의 질곡 속에서 우리 문학에 등장하는 아버지와는 전혀 딴판이다. ‘달동네 맨 꼭대기에서 오줌 마려운 듯 벌게진 얼굴로, 허겁지겁 달려가다 연탄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장발 휘날리며 콘돔을 사러’ 가는 남자가 김애란 소설 속 ‘아비’의 초상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우리 손자 세대는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던 차에 그 세대의 작가가 쓴 소설이라 반가웠다. 김애란 소설에서 ‘아비’들은 전통적 아버지에 비하면 아버지 같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의 소설에서 젊은이들은 ‘아비’에게 버림받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아비’를 버렸다고 자부하니, 새롭고 재미있다”고 평가했다.

손정수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최근 격주간 ‘기획회의’ 195호에서 “발단부터 결말에 이르는 시간적 과정이 하나의 줄기로 매끈하게 꿰어져 있는 전통적인 단편소설 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소설답지 못한 것으로 비판받을 소지가 있지만 바로 이 점이야말로 김애란의 소설이 기존의 낯익은 소설들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는 뚜렷한 토대”라고 평한다.

한편 김애란은 “지각이 없는 작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글을 쓸 때 나한테 필요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쓸 뿐”이라며 “젊으니까 뭔가 다르고 새롭게 써야 한다는 의무감보다는 부러 ‘비스듬히’ 보지 않고 ‘오래, 빤히’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고 자신의 소설관을 나타냈다.(조득진 기자)

07. 06. 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재출간된 스튜어트 휴즈의 서구 지성사 3부작에 관한 리뷰를 어제 옮겨놓았는데('20세기 서구 지성사의 밑그림') 오늘 학교에 나오다가 잠깐 서점에 들러 3권 <지식인들의 망명>(개마고원, 2007)을 손에 들었다. 1, 2권과는 달리 소장하고 있는 책이 아닌데다가(사실 3권은 기억에도 없던 책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올 무렵엔 이미 절판된 상태가 아니었나 싶다) 3부작 중 개인적으론 가장 흥미를 갖는 시대이기 때문이다(아무래도 가까운 시대에 흥미를 갖게 된다). 게다가 '개역판 역자 후기'를 읽어보니 번역도 다시 손질했고 책의 만듦새도 좋은 편이다.

 

 

 

 

나귀님의 페이퍼에서 봤을 때는 초판이 <지성의 대이동>이었는데, 역자후기를 보니까 <파시즘과 지식인>으로 돼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두번 책을 낸 것인가 해서 도서관 소장도서를 검색해보니 <지성의 대이동>(한울, 1983)과 <파시즘과 지식인: 지성의 대이동, 1930-1965년의 서구사회사상>(한울, 1992)이라고 뜬다. 그러니까 처음 나온 <지성의 대이동>이 '대단히 신통치 않은' 성적으로 일찍 절판된 이후 거의 10년만에 다시 나오면서 한번 '제목 갈이'를 했던 것. 해서, 출판사를 달리하여 이번에 새로 나온 개정판의 제목 <지식인들의 망명>은 세번째 타이틀이 되겠다.  

어제 읽은 경향신문의 리뷰에서도 최근에 나온 <다른 곳을 사유하자>(푸른숲, 2007)와 같이 읽어볼 것을 권유했는데, <지식인들의 망명>의 목차를 보니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이럴 땐 성찬을 앞에 두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는 기분이다). 하지만 책을 통독할 여유는 없기에 서문만 읽어보려다가 저자가 감사를 표하는 이름들에서 또 '걸려들었다'. 또 몇 자 수다를 늘어놓게 된 이유이다(나의 타협안은 경쟁후보였던 '파슨스 vs 밀스'란 페이퍼를 다음으로 연기하는 것이다). 휴즈의 서문을 읽다가 얼핏 떠오른 그 동네의 풍경을 잠시 들여다본다.

<지식인들의 망명>은 <의식과 사회>(1958)과 <막다른 길>(1968)의 후속편으로 1977년에 출간됐는데(10년 터울로 한권씩 낸 셈이군), 서문에서 휴즈는 자신에게 도움을 준 몇 사람의 이름을 들고 있다. "나의 집필 마지막 해에는, 만약 그들이 나의 원고를 읽었더라면 상당히 중요한 지적들을 많이 해주었을 세 명의 인물을 죽음이 앗아가버리고 말았다."(6쪽) 음, 그러니까 '도움을 준' 이들이 아니라 '도움을 줄 뻔했던' 이들이 되겠다. 그 이름들은 리히트하임(1912-1973), 뢰벤슈타인(1891-1973), 그리고 잉게 베르너 노이만 마르쿠제(1913-1972)이다.

 

 

 

 

"그 중 리히트하임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나의 지식을 여러 각도에서 풍요롭게 해준 인물이었으며," 게오르그 리히트하임은 루카치 전문가이기도 한데, 그의 책으로 <루카치>(시공사, 2001) 등 여러 권이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베버 서클의 마지막 중요인물이었던 뢰벤슈타인은 당시 앰허스트 대학 4학년이던 나를 처음으로 독일 사회사상계로 안내해준 사람이었다." 이 뢰벤슈타인의 책으론 <현대헌법론>(교문사, 1975), <비교헌법론>(교육과학사, 1991)이 번역돼 있다. 법학자 칼 뢰벤슈타인이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또한 이 연구의 중요 등장인물들 중의 한 사람(프란츠 노이만)의 미망인이자 또 다른 한 사람(허버트 마르쿠제)의 부인이기도 한 잉게 베르너 노이만 마르쿠제는 내가 그녀의 신념의 생명력을 충분히 표현하는 데에 그녀와 나의 우정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1937년에 찍은 한 사진을 보니 세 커플이 등장하는데, 왼쪽부터 프란츠/잉게 노이만, 골드/레오 뢰벤탈(리오 로웬달), 허버트/소피 마르쿠제 부부이다. 잉게 노이만(왼쪽에서 두번째)이 미망인이 되고 나서 허버트 마르쿠제(오른쪽에서 두번째) 재혼했던 모양이다. 

찾아보니, 프란츠 노이만(1900-1954)은 레오 뢰벤탈(1900-1993), 허버트 마르쿠제(1898-1979)와 함께 망명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으로서 역시나 파시즘 분석으로 잘 알려진 정치학자인데 1954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단행본 저작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듯하며 <정치이론과 이데올로기 입문>(돌베개, 1984)이 공저로 나와 있다. 그리고 프란츠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던 잉게 노이만은 1956년에 마르쿠제와 재혼했다(그녀 또한 <유럽의 전쟁범죄>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참고로, 뢰벤탈(로웬달)의 책으론 <문학과 인간의 이미지>(종로서적, 1983)과 <문학과 인간상>(이화여대출판부, 1984)이 출간됐었다(같은 책의 두 번역서이다).

 

 

 

 

이어지는 휴즈의 감사. "나의 감사하는 마음은 우선, 계속되는 원고를 세심하면서도 항상 유머를 잃지 않고 타이핑해준 도로시 스킬리 양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며, 두번째로는 박사학위 과정 때 나에게 배운 두 학생 제이와 로빈슨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사실 이 대목 때문에 페이퍼 아이템을 잡은 것인데, 여기서 두 학생 제이와 로빈슨은 각가가 마틴 제이와 폴 로빈슨을 가리킨다. "나는 그들의 책 <변증법적 상상력>과 <프로이트 좌파>를 4장과 5장의 각주에서 상당히 많이 활용했다."

인문학 서지에 밝은 이라면 이 두 권의 책이 국내에 번역/소개되었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변증법적 상상력: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와 이론, 1923-1950>(돌베개, 1979)로 나온 책이고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기도 하다(제이의 책으론 <아도르노>가 출간돼 있고, <시각의 헤게모니>에도 그의 논문이 실려 있다). 공역자 중 한 사람인 황재우는 시인 황지우의 본명이었다. 그리고 <프로이트 좌파>는 <프로이트 급진주의>(종로서적, 1981)라고 번역된 책으로, 빌헴름 라이히, 게자 로하임, 허버트 마르쿠제에 대한 유익한 입문서이다.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는데, 마틴 제이의 '20세기 프랑스 사상에서 시선의 절하'란 부제를 갖고 있는 <내려뜬 눈(Downcast Eyes)>(1993)이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다룬 학위논문에 이어서 스승의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 지성사 탐구의 역작이다. 분량이 만만찮지만 마틴 제이의 책들도 재출간/번역되면 좋겠다...

07. 06. 09.

P.S. <지식인들의 망명> 책날개에 실린 저자 소개는 '1961년 뉴욕 출생.'으로 시작한다. 바로 옆에는 붉은 글씨로 'H. Stuart Hughes, 1916-1999'라고 써놓고 말이다. 번듯한 표지에 이런 '깔끔한' 오타라니!..

한편, 오늘자 한겨레에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와 함께 이 3부작에 대해서도 비중 있는 리뷰가 실렸는데(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14691.html), 어인 일인지 저자를 '스튜어트 휴스'라고 표기했다. 물론 'Hughes'를 '휴스'라고 읽는 건 자유이지만 모든 번역본과 다른 언론리뷰들에서 '휴즈'라고 읽는 걸 굳이 독불장군처럼 '휴스'라고 읽는 배짱은 무엇인지?(존경해주어야 할까?) '베냐민'의 경우도 그러하고, 이게 한겨레의 고집인지 고기자의 고집인지 모르겠지만(*한겨레 교열부의 고집이라 한다),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에게 갖다붙인 '삐딱이는 나의 힘!'도 나쁘진 않지만, 보기 흉한 건 어쩔 수 없다(이 리뷰는 '스튜어트 휴즈'로는 검색되지 않는다). '에세이'를 굳이 '에쎄이'라고 적는 창비식 표기를 떠올리게도 하는데, 그런 게 '진보'라면 그건 '당신들의 진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