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별로 눈에 띄는 신간이 없어서 개인적으로는 개운한 한 주였다. 손자들이 놀러와주면 고맙고 돌아가주면 더 고맙다는 우스개가 있잖은가. 읽고 싶은 책들이 나오면 반갑기 짝이 없지만 한편 괴로운 일이기도 한 것이 '애서가'들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최근에 뇌과학에 관한 몇 권의 책이 나온 것 말고는 나를 괴롭게 한 책들이 따로 눈에 띄지 않는다. 뇌과학 관련서로서는 <꿈꾸는 기계의 진화>(북센스, 2007)를 진작에 사두고 있고 조만간 <스피노자의 뇌>(사이언스북, 2007)도 구입을 검토해볼 생각이지만 그래도 좀 여유가 생긴다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도서출판 숲, 2007)을 장서용으로 구입하는 게 폼나지 않을까 한다. 단, 역자 천병희 선생이 욕심을 내어 또 개정판을 낸다면 좀 낭패(?)가 되겠지만. 관련기사를 읽고 신중하게 판단해봐야겠다.  

알라딘의 소개로는 "'로마의 평화'로 표상하는 인류사의 가장 절묘한 한 시대를 증언하면서 인류가 걸어야 할 길을 가리켜 보인 위대한 길잡이로 평가받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완역본. 2004년 첫 출간된 책의 개정판이다. 초판이 번역의 충실함에 있어 딱히 흠잡을 데가 없다고 평가받음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번역을 위해 문장 하나하나 다듬은 옮긴이의 노고가 빛난다. '아이네아스의 노래'라는 뜻의 <아이네이스>는 로마라는 위대한 역사적 현상을 관찰하면서 아이네아스라는 한 인간의 운명을 배경으로 하여 한 국가의 세계사적 의미를 경건하게 노래하고 있다. <성경>,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와 더불어 서양정신세계의 큰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고전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세계일보(07. 05. 08) 디도와 아이네아스의 비극적 사랑 부활했네

서양 사람들이 자신들 문화의 뿌리로 생각하는 로마의 고전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아이네이스'(‘아이네아스의 노래’)다. 동양에서는 '삼국지'가 그만큼의 인기를 누렸을까. '아이네이스'는 이미 '일리아스'에서 몰락하는 트로이아인들을 다스릴 인물로 예언되어 있던 아이네아스가 세계를 문명화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추종자들을 데리고 화염에 휩싸인 트로이를 떠나 정착지를 찾기까지 곳곳을 떠도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이네아스는 제2의 트로이를 건설하라는 신탁을 받았건만, 자신의 사명과 운명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본의 아니게 재난과 죽음을 불러온다.

디도와 아이네아스의 비극적인 사랑은 이 작품에서 가장 사랑받아온 부분으로 디도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최고신은 과업을 일깨우며 디도 곁을 떠나라고 재촉한다. 그가 떠나자 디도는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가 남기고 간 물건들을 태우려고 쌓아둔 장작더미에 올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모른 채 여러 곳을 방랑하고 오랫동안 탐색을 계속한다. 그렇게 방랑에 방랑이 이어지면서 가야 할 곳은 분명해지고, 사명을 향한 그의 의지도 점차 굳건해진다.

당대까지 인류가 경험한 가장 위대한 제국, 로마의 탄생을 노래하는 서사시인 만큼 '아이네이스'에는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활약하고 사라진다. 그렇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시인은 신의 행위나 영웅적인 인간상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건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의에 희생되어 어쩔 수 없이 부서지고 쓰러지는 인간들의 비애와 운명을 조명한다. 이것이 바로 2000년 동안 사랑과 찬탄을 받아온 베르길리우스 시 예술의 탁월함과 보편성이다.

산문으로 초안을 잡은 후 예술적 이상에 맞춰 오랫동안 그 시행들을 운문으로 조탁했다는 시성(詩聖) 베르길리우스의 유언은 11년 간 쓴 '아이네이스'를 불태워버리라는 것이었다. 완벽주의자였던 시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다른 사람에게 마저 다듬게 하여 지금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다.

여기 또 한 명의 완벽주의자가 있으니 번역자 천병희(단국대 명예교수) 교수가 그렇다. 천 교수는 번역의 충실함이나 감동의 깊이에서나 이미 인정받은 '아이네이스'의 개정판을 내놓았다. 천 교수는 그동안 '일리아스'의 세 번째 번역본을, '오뒷세이아'의 두 번째 번역본을 내놓았으며, 이번에 '아이네이스'의 두 번째 번역본을 내놓았다. 30년 동안 50여 종에 가까운 그리스 라틴 고전을 원전 번역했지만, 언어는 늘 바뀌기 때문에 중요 고전 번역은 한 번으로 끝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조정진 기자)

07. 05. 13.

P.S. <아이네이스>의 또다른 번역본으로는 김명복 교수가 영역본을 옮긴 <아이네이드>(문학과의식사, 1998)이다. 저자의 이름 베르길리우스도 영어식으로 '버질'이라고 표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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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3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5-13 08:38   좋아요 0 | URL
이 분 정말 완벽주의자 같습니다. 대단해요. 번역했던 것을 또 번역하고 또 번역하고. 집에도 <오뒷세이아>와 <일리아스>가 있는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제 책꽂이를 빛내고 있을 뿐이죠.

이번주엔 저도 관심가는 책이 하나 정도 밖에 안보이더라구요. 매주 몇 권씩 보관함에 넣다가 하나도 없으니 허전합니다.

로쟈 2007-05-13 10:36   좋아요 0 | URL
**님/ 미처 '확인'을 못했네요. 덕분에 좋은 책 읽겠습니다.^^
아프락사스님/ 저도 <오뒷세이아>를 갖고 있는데 막상 읽을 시간은 잘 안 나네요.^^;

가넷 2007-05-13 16:09   좋아요 0 | URL
숲 출판사들의 책은 값도 만만치 않지만, 책 무게도 왜 그렇게 많이 나가는지... 저는 손목 쪽이 유독(?) 약한 편인데, 등교길에 읽으려고 들고 있으려면 무리가 오더군요. --;;

로쟈 2007-05-14 01:38   좋아요 0 | URL
들고 다니시면서 읽을 책은 아닌 듯한데요. 설사 손목이 유독(!) 강하시더라도요.^^
 

지난 2월인가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 출간의 계기로 불거진 논란이 최근 공식적인 공개토론회로 귀결된 모양이다. 한겨레에 관련기사들이 올라와 있는데(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208785.html), 도올의 발제문만을 옮겨놓는다. 한동안 관련 기사들을 옮겨놓기도 했었기에 AS차원이다.  

» 성경해석을 둘러싸고 기독교계와 논쟁을 벌여온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1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교회와 성서‘라는 주제로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을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한겨레(07. 05. 12) 도올 발제문 “종교는 더이상 ‘이해없는 신앙’강요 말라”

‘성서’를 놓고 도올 김용옥 교수와 신학자들 사이에 공개 토론회가 11일 오후 3시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신대 백주년기념관 중강당 3시간여에 걸쳐 열렸다. 조직신학회장 이정배 감신대 교수가 사회를 맡고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와 김광식 전 연세대 교수 등 두 원로와 함께 ‘역사적 예수’ 전문 번역가인 김준우 감신대 교수, 구약성서학자인 김은규 성공회대 교수 등 수준급 신학자들이 토론자로 나섰다. 다음은 토론회에 앞서 미리 나눠준 도올의 발제문 전문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독교 이해방식

1.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공화국이며 민주시민사회의 모든 원칙을 준수한다. 나는 민주사회의 한 시민이며 개인이다. 내가 말하는 기독교는 매우 단순한 이런 전제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의 기독교의 이해방식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이지만 사회적 가치도 거부 안해

2. 그렇다고 나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나 어떤 국적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종교와 국가의 어떠한 유기적 관계도 거부한다. 종교는 오히려 그러한 국가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개체의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사회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이며, 제도적이라기보다는 내면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가 사회적 가치, 즉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한 시민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 대상일뿐

3. 나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는 매우 단순한 나의 실존적 사실, 즉 내가 민주시민사회의 한 시민이라는 원자적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는 어떤 종족이나 국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구속적인 제도가 될 수가 없으며 나 개인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의 대상일 뿐이다. 대한민국이 한 종교의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대한민국사람이 구원을 얻을 뿐이다. 그 사람은 개인이며 시민이다. 시민사회는 인간 개인(individual)의 존엄을 지상의 가치로 삼는다. 개인이 신이라는 존재자에게 복속되는 제도적?법적 권위는 전무하다.

기도는 집단적인 게 아니라 나의 실존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

4. 종교의 초기 제식행위는 대부분이 집단적인 것이었다. 부족집단의 춤(tribal dance) 같은 것이 가장 보편적인 형태였다. 아프리카의 민속춤이나 우리나라의 영고(迎鼓)·무천(舞天)이 모두 그런 류의 것이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의 핵심적 신앙행위는 기도이다. 기도는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며 그것은 나의 내면 속에서 나의 실존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이다. 예수도 기도를 가르쳤다. 기독교는 이미 출발부터 개인적인 것이었다.

기독교가 구약적 율법주의 따른다면 유대교의 아류일뿐

5. 기독교는 민족종교가 아니다. 유대민족의 모든 제식(할례, 절기 준수 등)이나 혈통주의적 관습의 강요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했으며, 이방선교를 통해 초대교회를 구축했다. 그것은 “예수”라는 신념을 선택한 개인들의 공동체운동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출발부터 유대민족의 율법주의를 거부했다. 어떠한 종교도 율법주의를 거부하지 않고서는 위대한 종교가 될 수 없다. 공자도 기존의 의례(儀禮)의 권위를 거부한 사람이었고, 불타도 베다의 권위를 거부했다. 기독교가 이제 와서 구약적 율법주의를 직접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유대교의 아류일 뿐, 기독교가 아니다.

» 성경해석을 둘러싸고 기독교계와 논쟁을 벌여온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1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교회와 성서‘라는 주제로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한국조직신학회 이정배 교수.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교회는 교리가 아닌 사랑 믿음 소망 생존의 공동체운동

6. 나는 교회를 공동체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이 공동체운동의 기본이념은 교리가 아니요, 사랑, 믿음, 소망, 생존과 같은 아주 보편적 정서(emotion)이다. 교회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배타성(exclusiveness)이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교리 이외의 어떠한 종교적 신념도 다 배제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교리라는 것은 대부분 후대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성서적 근거가 박약하다. 이것이 조직신학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독교의 배타성도 유대인의 다이애스포라와 유사한 피박해집단의 역사적 특수상황에서 비롯된 아폴로제틱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이 곧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다.

유교·불교·토속 무교 등 종교신념체계와 공존해야

7.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오늘 여기에서의 나의 실존을 생각할 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공동체는 기독교라는 교리집단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 유교, 불교, 천도교, 원불교, 토속 서낭당 무교, 이슬람, 여타 다양한 종교신념체계와의 공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들 모두가 인간 내면의 고독(solitude)을 해결해가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보유하고 있다. 만약 한국의 기독교가 이러한 공존을 배제하는 독존만을 고집한다면 나는 그러한 기독교에는 일순간도 나의 에너지를 할애할 수 없다.

종교는 나쁜 것이며 악한 것 일 수 있다

» 성경해석을 둘러싸고 기독교계와 논쟁을 벌여온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1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교회와 성서'라는 주제로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을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8. 종교는 반드시 좋은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발상이나 강박관념을 우리는 버려야 한다. 종교는 나쁜 것이며 악한 것일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모든 야만성의 마지막 보루일 수도 있다. 종교가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아름다운 사회일 수가 있다. 단지 우리가 이러한 사회를 꿈꿀 수 없는 이유는 종교를 통하여 형성되어온 인류문명사의 기나긴 관성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종교는 인간세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해가고 있다. 그러한 거대한 추세 속에서 인간세는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고려사회를 장악하고 유교가 조선왕조를 장악하고 기독교가 20세기 우리민족의 식민지역사를 장악한 그러한 강력한 장악성을 21세기부터는 기대할 길이 없다.

어느 한 시점에서의 성서 정본 존재하지 않아

9. 기독교는 2천 년 동안 서서히 형성되어온 것이다. 이 말은 곧 어느 한 시점에서의 기독교의 모습이 기독교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형성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1세기의 기독교, 4세기의 기독교, 16세기의 기독교, 21세기의 기독교가 모두 동등한 자격을 지니는 기독교일 뿐이다. 성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 시점에서의 성서의 정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4세기말에나 모습을 드러낸 27서체제의 성서나 20세기 한글판개역성경은 동일한 자격을 지니는 신약성서의 다른 판본일 뿐이다. 신학도들이 기준으로 삼는 희랍어성서도 19세기말에나 그 모습이 갖추어진 것이다. 희랍어성서 자체가 2천 년 동안 진화해온 것이다. 현재의 27서체제의 성경이 기독교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생각도 매우 유치한 발상이다. 가톨릭은 아직도 성서에 근거가 없는 많은 후대의 추가전승을 교리로 신봉하고 있다.

종교적 합리화의 재소통 거부하면 사기꾼의 횡포

10. 나는 기독교의 “이해”(Understanding)를 위하여 상기의 책 2권을 썼다.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 “믿음”은 간편하고 또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위태롭다. 그러한 믿음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 역사적 환경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더 이상 핍박받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 기독교를 발생시킨 그러한 절박한 상황의 강도를 계속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제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반복적 제식은 특별한 감정을 수반하며, 그 감정은 신앙을 유발한다. 그리고 제식은 신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신화는 합리화된다. 이 합리화단계에서 우리가 말하는 조직적 종교가 발생한다. 그런데 모든 종교적 합리화(Rationalization)는 인간의 체험에 관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며 그 정보에 대하여 독특한 권위를 부여한다. 나는 이러한 합리화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의 자유로운 지식의 장 속에서 무전제적으로 다시 소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거부하면 그것은 천박한 독단일 뿐이다. 현대시민사회에서 독단을 중세세기방식의 도그마틱스로서 유지하려는 것은 사기꾼들의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촉발제 역할 자부

» 성경해석을 둘러싸고 기독교계와 논쟁을 벌여온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1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교회와 성서‘라는 주제로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을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11. 나의 “이해”의 노력은 한국의 기독교를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촉발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21세기의 종교가 “이해없는 신앙”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양아치적 권위의식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시민사회의 논리에 의하여 무기력하게 될 뿐이다. 나의 “이해”가 많이 대중에게 읽힐수록 21세기의 한국기독교는 희망이 있다. 성서는 이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다. 이해 속에서 우러나오는 믿음만이 21세기를 버텨낼 수 있다.

교회가 신학자의 신념과 언어체계를 콘트롤하면 안돼

12. 나는 기독교에 기웃거리는 이방인이 아니다. 나는 한국기독교의 핵심 인사이더로 살아왔으며 기독교의 가치를 체화한 패밀리 전통 속에서 성장해왔다. 나는 나의 진리탐구가 이 사회의 많은 건강한 기독교운동을 촉발시킬 수 있기를 염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신학계가 자유로운 담론의 장을 확보해야 한다. 교회는 신학자들의 신념이나 언어체계를 콘트롤해서는 안된다. 교회라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 관심이 신학의 자유로운 개화(開花)를 질식시켜서는 아니된다. 모든 교회는 훌륭한 신학자를 양성하는 데 교육장학금으로서 최소한 십일조를 내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 존립의 이유며 양식(良識)이며 의무다. 그리고 교육헌금에 대하여 일체 이념적 클레임을 해서는 아니된다. 한국교계의 생명력은 오직 자격있는 신학자와 수준높은 목회자의 양성에 있다고 나 도올은 굳게 믿는다.

도올 김용옥(2007년 5월 11일 밤 駱閒齋에서 탈고)

07. 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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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3378 2007-05-28 12:01   좋아요 0 | URL
좋은 자료 빌려가겠습니다.
 

한 주 걸러서 '작가와 문학사이'를 옮겨놓는다. 이번주는 소설가 편혜영 편이다. 첫 창작집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을 통해서, 우리문학에서는 좀 낯선 '하드고어 원더래드'의 세계를 펼쳐보인 바 있는 작가이다(첫 창작집의 제사가 '안녕, 시체들'이었다). 개인적으론 그녀의 문장들을 좋아하며(건조한 단문들이다) 그녀의 장편소설이 기대된다(그게 가능한지 궁금하기도 하고). 아래 글에서 평론가는 그녀의 세계를 인간이하(subhuman)의 인간성 탐구로 규정하고 있다. 

경향신문(07. 05. 12) [작가와 문학사이](17)편혜영-인간 이하의 인간성 탐구

여기 죽음의 수용소에서 떼죽음을 당한 유태인과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도살된 가축이 있다. 대개 학살된 유태인은 연민과 공감의 대상이 되지만 도살된 가축은 그렇지 못하다. 왜 그런가? 아니, 어쩌면 인간의 죽음과 동물의 죽음을 비교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존 쿳시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서 노작가의 말을 빌려 우회적으로 이 두 죽음이 다르지 않음을, 다르지 않아야 함을 주장한다.

흔히 공감(sympathy)이나 감정이입(empathy)을 타자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것으로 보지만 사실은 전적으로 주체의 자기 이해에 불과하다. 나는 나를 연상시키는 존재만을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다.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란 상상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물의 마음이란 의인화와 동일시의 과정을 거친 이후의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동물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인간성(humanity)이란 동물의 마음, 혹은 동물됨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감과 감정이입을 불가능하게 하는 속성에 불과한 것이다.



편혜영의 소설에는 바로 그런 인간성이 실종된 존재들, 예컨대 다양한 혐오동물(쥐 바퀴벌레 개구리 구더기 등등)과 썩어가는 시체 혹은 시체나 다름없는 인간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인간적으로’ 참기 어려운 악취(얼마나 지독했으면 “다락의 쥐들조차 미쳐 날뛰게” 할까?)를 풍기고 ‘인간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괴한 모습을 지닌 존재들이다. ‘아오이가든’에서 인간은 고양이를 삼키다가 개구리를 낳다가 급기야 개구리가 된다. 인간과 고양이, 개구리는 뒤섞이면서 인간을 인간 이상이거나 인간 이하가 되게 한다.

그런 지경이니 편혜영의 소설에서 “이성적이고 정당한 것은 내가 아니라 개”(‘만국 박람회’)라는 말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또 “우리는 결국 또 하나의 쓰레기가 되어 소각장에 던져질” 운명(‘맨홀’)이라는 말에 충격받지 말기를. 오히려 편혜영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다른 존재가 될 때까지” 변신을 거듭한다. 급기야 인간은 ‘부패하기 쉬운 단백질 덩어리’인 시체의 자리에 서게 된다. 편혜영의 소설은 그렇게 인간의 지위를 단백질의 자리로까지 끌어내린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역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이 아닌 모든 비루한 것들과의 공감을 위한 제스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른다. 아무리 시체되기, 동물되기 ‘놀이’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진짜 시체가 되기 전에는, 진짜 동물이 되기 전에는 시체와 동물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시체와 동물이 된다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는 시체와 동물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인간은 시체와 동물이 되는 순간 그저 시체와 동물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게다가 시체와 동물은 말이 없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시체와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우리는 나와 다른 존재들, 흔히 타자라고 불리는 존재들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혜영은 시체 동물 사물 등과 같은 비인간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비인간적 존재들의 총체임을, 즉 잡종적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썩어가는 시체의 살조각은 물고기의 밥이 되고 다시 그 물고기는 ‘입맛 다시는 반찬’이 되는 순환구조를 상상해보자(‘시체들’). 그때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시체와 물고기가 뒤섞인 존재가 된다. 우리 인간이 시체와 물고기의 마음이 될 수는 없지만 우리 안에 시체와 물고기가 있다는 자각에서부터 나와 다른 존재와의 불가능한 공감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니 편혜영 소설의 불편함과 불쾌감을 ‘인간적인’ 편함과 쾌감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지 말자. 그 ‘비인간적인’ 불편과 불쾌야말로 ‘너’라는 불가능한 허구(fiction)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심진경|문학평론가)

07. 05. 12.

P.S. 캐리커쳐와 사진 속의 작가는 너무도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내가 실제로 본 작가는 사진 속 이미지와 같았지만 작가 편혜영의 이미지는 검은 옷을 입은 캐리커처와 가깝다. '편혜영'이란 이름의 두 동거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작년 11월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자 인터뷰('편헤영-정미경'편)를 페이퍼로 옮겨놓은 게 있는데, (링크할 주소가 너무 길어서)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에 관한 대목만을 다시 옮겨놓는다. 그녀의 대표작이면서 작년에 발표된 가장 중요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편혜영, '사육장 쪽으로'

“천성적으로 착하고 교훈적인 얘기엔 흥미가 없어요. 이질적이고 충격적인 이미지를 좋아하다 보니 그로테스크하고 엽기적인 상상력이 발달한 것 같아요.”

작품과 작가의 실제 이미지가 상충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사육장 쪽으로>의 편혜영(33)씨는 그 충돌이 유별나다. 얌전하고 부끄럼 많은 성격을 보면 ‘천상 여자’이지만, 그의 작품은 엽기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을 통해 독자의 청각과 후각에 극한의 공포를 불어넣는다. “제 소설을 보고 집에 혼자 있을 때 뭐하고 지내는지 궁금하다는 분들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쥐 배 가르며 놀아요’라고 농담했어요.(웃음) 제 작품이 저의 인상과 괴리되는 데서 오는 충격효과가 컸던 것 같아요.”

<사육장 쪽으로>는 평화로운 전원주택 마을의 중산층 소시민이 파산 경고장과 마을 사육장 개들의 습격을 동시에 받게 된, 강렬한 위기의 하루를 그린 단편. “처음부터 중산층의 속물성과 깨지기 쉬운 허구를 드러내자는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고, 이미지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제가 생겼어요. 사육되는 개들은 사육장 안에서만 생활하고 삶과 죽음의 방식이 타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도시인과 비슷하기도 하잖아요.”

편씨는 “전에는 문제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 극단으로 이미지를 밀고 나갔는데, 이젠 그런 이미지들에 손이 안 간다”며 요즘의 변화에 대해 말했다. “워낙 강력한 감각이라 중복되면 효과가 체감되게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주인공의 아기가 개한테 물리는 장면도 묘사를 참았는데, 많은 분들이 여전히 잔인하게 느끼시더라구요. 아, 나는 태생이 끔찍해서 이런 걸 너무 천연덕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 자책했어요.”

2000년 등단해 그 이듬해부터 직장생활과 소설쓰기를 병행하고 있는 편씨는 “사무원의 쓸쓸함에 관한 소설은 열 편이라도 쓸 수 있다”며 웃었다(*그런 쓸쓸함에 관한 소설도 읽고 싶다, 사실은). “사실 소설이라는 게 노동으로선 참 형편없는 일이거든요. 하지만 소설을 쓰는 그 시간만큼은 내가 유일하게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 매혹적이에요. 사회적 인간으로 살다 보면 남들 눈에 보이는 내가 진짜 나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가 많은데, 소설을 쓸 때만은 그런 고민이 없으니까요.”

◆ 심사평: 삶의 부조리 감각적 형상화 탁월
<사육장 쪽으로>는 우리 소설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야생의 상상력이 그로테스크하게 빛나는 작품이다. 도시 인근의 전원주택단지를 지배하고 있는 삶의 부조리를 이 소설만큼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소설도 드물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사육장의 개 짖는 소리로 청각화한 이 야만적인 공포는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소시민의 삶을 위협하는 삶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놀라운 메타포라고 할 만하다.

편혜영이 이런 종류의 알레고리에 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상적 삶을 특유의 판타지로 추상화하는 알레고리 작가로서의 편혜영의 독특한 위상을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첫 소설집 <아오이 가든>은 역겹고 끔찍하며 엽기적인 상상력의 창고와도 같았다.

그러나 <사육장 쪽으로>에 이르게 되면 이 작가가 그 기괴한 악몽 아래 하나의 현실적인 밑그림을 살짝 배치해 둠으로써 독자들에게 해몽의 실마리를 제공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실과 판타지가 절묘하게 섞여있다고 할까. 파산 직전에 이른 가장이 치매에 걸린 노모와 개에게 물어뜯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 헤매는 이 소설의 마지막은 우리의 현실이 이 끔찍한 악몽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상상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문학평론가 신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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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 바이지만, 김훈의 신작 <남한산성>(학고재, 2007)이 상반기 한국문학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문학의 전반적인 위기/침체론과 일본문학의 지속적인 강세 속에서 사뭇 이례적인 '스코어'이다. 그와 견주자면 이미 많은 리뷰들이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평단의 미적지근한 모양이다(정말로 그런 기이한 무관심에 의해서 김훈과 공지영은 묶이는 것일까?). 현장 평론가인 이명원씨의 리뷰를 읽어보니 그렇다. 평론가들에게는 이미 '견적'이 다 나와있는 작가인 탓일까?(하지만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평론을 쓸 일 자체가 드문 것 아닐까?) 다른 이유도 있는 것인지는 더 두고봐야겠다... 

한겨레(07. 05. 10) 김훈의 소설은 유령인가?

문학평론가라는 자가 왜 문학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질 때가 있다. 특히 요즘처럼 한국 소설의 침체가 심각하게 운위되는 때는 더욱 그러하다. 대중적인 차원에서 일본 소설 읽기가 선풍인 것처럼 말해질 때, 그 현상에는 동의하지만, 한국 소설도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출판평론가 한기호씨의 견해를 들어보면, 위기의 원인은 명료해 보인다. 가장 우선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비평의 신뢰성 상실이다. 그간의 한국 소설 비평이 작품에 대한 나침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덕담과 주례사로 일관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발언을 신뢰했던 독자들이, 오히려 지금 한국 소설에 대한 불신을 노골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소설의 단편장르에의 집중현상도 위기의 한 요인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한겨레>의 최재봉 문학전문기자나 문학평론가 남진우씨 등에 의해 제기된 바 있는데, 한국 문단과 문학상 제도가 단편소설에 편중됨으로써, 시장에서 독자적으로 생존 가능한 장편소설의 미학적 혁신과 문학성이 취약해졌다는 견해로 요약될 수 있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연초에 몇 차례 페이퍼로 다룬 바 있다). 설득력이 있는 견해인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단편소설이 집중적으로 게재되고 있는 문예지 시장이 침체일로를 겪고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소설 독자층의 변화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 견해도 존재한다. 문학평론가 천정환씨는 현재 한국의 소설 독자층은 대단히 협소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문학지망생 그룹과 20~30대의 여성 독자들은 여전히 한국 소설의 유력한 독자층이지만, 1970∼80년대의 소설시장의 활황을 가능하게 했던 30대 이상의 남성 독자들과 소설에서 ‘재미’ 이상의 것을 추구했던 계몽독자 또는 지식인 독자들이 대거 소설 시장에서 이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인 것이 소설보다는 역사 전기물과 인물평전류가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폭넓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나는 ‘재미’도 중요하고, ‘의미’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미와 의미가 정교하게 결합된 소설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은, 베스트셀러 외국 소설들이 그간 보여주었던 문학시장의 사정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한때 폭발적 독서붐을 일으켰던 쿤데라와 베르베르의 소설들, 쥐스킨트와 하루키, 그리고 에코의 소설들은 재미와 결합된 소설적 의미의 파급력을 잘 보여주었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나는 유독 소설에 대해서는 깊은 실망감을 표출하고 있는 성인남성 독자들을 견인할 수 있는 성숙한 고민을 담은 소설도 더 많이 출현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시장에서 독자들의 이 압도적인 성적 불균형이 얼마간이라도 시정되기 위해서는, 소설 읽기에서 이탈한 성인남성 독자들과 계몽독자들에게, 소설을 읽는 일이 단지 ‘시간 때우기’의 수단만이 아니고 성숙한 인간세계에 대한 심원한 고민의 산물일 수 있다는 기대를 충족시키는 소설의 출현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소설가 김훈의 작품들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독서열에 대해 치밀한 비평적 분석이 가해질 필요가 있다. 김훈의 소설들은 그가 써내려간 에세이들을 포함하여, 산다는 일의 치욕과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구조화된 권력의 냉혹한 질서에 대한 정교한 보고서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무력한 개인이 몰락할 것이 분명한 운명 앞에서조차, 그것과 치열하게 싸우고 또 패배를 끝없이 자기화하는 면모를 드라마틱하게 형성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훈 소설에 대한 비평가들의 무관심은 실로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김훈의 소설은 유령인가?(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07. 05. 11-12.

P.S. 온라인 학술저널 '담비'에서도 김훈에 대한 특집기사를 엊그제부터 연재하고 있다(기사가 회원전용으로 돌려져 있어서 붙여놓았던 링크주소는 지운다. 대신에 무화과나무님이 옮겨놓은 기사를 참조하시길. 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1114273). 기자는 마지막 문단에서 예전에 '로쟈'가 쓴 '김훈론'을 인용하고 있어서 이채롭다.

이처럼 그는 자기에게만큼 타인에게도 애정을 베푸는데 거기서 발생하는 장점이자 단점 중의 하나는 손만 대면 작품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데에 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독특하고 깊이 있는 북 리뷰로 필명을 떨치고 있는 ‘로쟈’라는 분은 김훈의 문체가 기본적으로 에세이스트의 것이고 소설가의 문체는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그 이유는 아름다워도 적당히 아름다워야지 너무 아름다우면 소설이 안 된다는 데 있었다. 평범한 것도 김훈이 묘사하면 평범함의 극단이 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공감이 가는 지적이라 해두고 싶다.

아마도 인용출처는 '문체, 혹은 양파에 대한 생각'(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040596&paperId=841840)인 듯하다. 기자가 참조한 듯한 인용문이 포함돼 있는 원래 문단은 이렇다.

"카뮈와의 논쟁에서 사르트르-장송이 지적했던 바는 카뮈의 아름다운 문체가 ‘앙가주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의 아름다운 문체,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허무주의적 세계관(“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은 소설에 적합하지 않다. 소설가의 문체는 적당히 아름다워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 그것이 ‘산문적 일상’을 묘사/기술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즉 소설가가 자신의 얼굴, 필체, 문체를 갖는 건 바람직하며, 동시에 좋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문체’이어서는 안된다(<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란 프랑스 영화의 문제의식이기도 한데,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아내’로서 적합하지 않다. 결혼생활은 ‘산문적’이기 때문이다)." '독특'하다기보다는 상식을 재확인하는 수준의 내용이다...

P.S. 김훈의 문장에 대한 평 한 가지를 더 옮겨놓는다.

국민일보(07. 05. 18) 김훈 소설의 문장

소설가 김훈은 우리 문단에서 특이한 작가다. 오래 전부터 그는 신문 기사나 산문 등을 통해 문장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오다가, 2000년대 들어 장편소설 '칼의 노래'를 통해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그가 발표하는 작품에는 거의 모든 매체들이 비중있게 지면을 할애할 만큼 그는 스타작가가 됐다. 우리나라의 주요한 문학상도 하나하나 차지하고 있다.

이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근작 장편 '남한산성'을 보면 그가 얼마나 도저하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그 깊고 비장한 인식이 얼마나 촘촘한 문장으로 표현돼 나오는지,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사(私)소설화·여성화돼가는 우리 소설계에서 얼마나 튼실한 웅성(雄性)으로 남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더 뛰어난 소설의 출현을 고대하는 독자로서 한가지 주문을 하고 싶다. 문장을 아끼고 인물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김훈에게서 문장을 버리라는 것은 가혹한 주문일 것이다. 그는 2000년대 우리 문단에 나타난 문장의 검객(劍客)이다. 그의 칼은 유례없이 예리하다.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신속하게 베어버리는 검법으로 강호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는 최근 한겨레 신문에 실린 한 대담에서 "저는 사실 글을 쓴다는 일에 대해서 아주 잔혹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문장에 얼마나 집요한 관심을 갖는지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말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때론 그런 문장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예를 들어보자. 청나라 장수의 역관(譯官)이 되어 병자호란 때 매국행위를 했던 정명수를 묘사하는 문장- "눈치로 단련된 천례(賤隷)의 총기는 예민했다. 정명수는 여진말과 몽고말을 쉽게 배웠다.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정처 없는 말과 사물에서 비롯하는 정처 있는 말이 겹치고 비벼지면서, 정처 있는 말이 정처 없는 말 속에 녹아서 정처를 잃어버리고, 정처 없는 말이 정처 있는 말 속에 스며서 정처에 자리잡는 말의 신기루 속을 정명수는 어려서부터 아전의 매를 맞으며 들여다보고 있었다."(72쪽)

산문으로는 아름다운 글이지만 소설로서는 애매한 표현이다. 이런 문장에 의지하면 소설의 형상화는 힘들게 될 것이다. 반면, 김상헌이 임금의 격서를 대장장이 서날쇠에게 전하는 장면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목 중 하나로 읽혀진다. 떠나는 서날쇠가 눈 위에서 김상헌에게 큰 절을 하고 김상헌이 땅에 엎드려 맞절을 받는 장면은 특히 뛰어나게 다가오는 데, 이 부분에는 김훈 특유의 관념과 유미(唯美)의 극한을 탐색하는 문장이 개입하지 않고 있다.

소설은 아무래도 등장 인물들의 성격을 만드는 게임이다. 그래서 소설의 도처에서 유미한 문장이 기승을 부리면 등장인물의 성격은 살아나기 어렵다. '남한산성'의 하이라이트는 왕조의 운명을 가르는 주전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논리 대결이다.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의 논쟁은 장엄하다. 그러나 문장에 눌려서 인물이 살아나지 않는 흠이 있다.

요즘 보도되고 있는 이 소설에 관한 많은 기사들을 보면 딱히 삼전도 굴욕의 무엇을 형상화한 내용이라고 자신있게 쓴 내용을 만나기 어렵다. 문장이 작품을 압도하는 데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설의 독자는 작품 속의 등장인물과 연애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소설 독자의 중요한 특권이다. '남한산성'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장대한 인식은 보여주었지만, 연애하고 싶고 두고두고 생각나게 하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데까지도 이른 것인지는 의문이다. 앞으로 김훈 소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더 빛나기 위해서는 이 지점에서 씨름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임순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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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5-11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 스스로 사유의 계통없음을 공시한 이상 비평가의 어떠한 지적도 피해갈 방편을 마련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미당이 스스로를 무당이라 칭했듯 말이죠.

로쟈 2007-05-12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식 허무주의가 어떤 '사상'의 정립과도 거리를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데요, 저는 미당식 초월주의와는 그래도 계보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김훈은 그래도 '전장(戰場)'에 있는 작가라서요...

이비 2007-05-13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비 기사의 말미가 로쟈님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덕분에, 로쟈님의 글도 찾아서 읽게 되었네요(‘진행중’ 꼬리표를 떼기 전이시라 전 본의 아니게 담비 회원가입의 수고를 치러야 하였지요. 아, 그리고 ‘양파’ 페이퍼 너무 길어서 읽다가 눈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옮겨 놓으신 담비 기사, 그리고 기사에서 언급되었던 로쟈님의 글을 연이어 읽고 난 뒤 몇 가지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로쟈님은 김훈이 에세이스트는 될 수 있어도 소설가는 될 수 없는 이유로 그의 문체가 아름답다는 점(즉, 문체가 지저분하지 않다는 점)과 작가가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담비 기사에서는 둘 중 첫 번째 이유만을 옮겨 놓고 있습니다(그리고 그 이유도 ‘지저분하지 않다’는 로쟈님의 부연은 생략하고 ‘적당히 아름다운 게 아니라 너무 아름다워서’ 라고 다소 완곡하게 표현되었네요). 하지만 저는, 문체가 지저분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이 아니다, 소설은 문체가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 라는 단언이 언뜻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저의 이러한 혼란은 아마도, 지저분하다 라는 형용어가 갖는 윤리적 함의 때문일 텐데요, 즉, 지저분하다는 우선 더럽다는 뜻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만들고 그것은 상식의 수준에서는 결코 애호의 요건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담비 기사에서 로쟈님의 글을 언급하면서 그냥 너무 아름다워서 라고만 표현했던 것도 이런 곡해의 가능성을 염려한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1)로쟈님의 표현, 소설은 ‘문체가 지저분해야 한다’도 ‘문체가 너무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는 말의 강조형 정도로 받아 들이고 그 외에 다른 뜻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만약 된다고 말씀하신다면, 전 더 이상 ‘지저분하다’라는 표현에 연연해 하지 않고 이제 ‘문체가 (너무) 아름답다면 왜 소설이 아닌가?’ 라는 한 문장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우선 로쟈님이 사용하신 a이면 b가 아니다 라는 명제에 내포된 의미가 궁금합니다. “어떻게 문체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담! 이래서는 도대체 ‘소설’이라고만 규정하기에는 너무 아까운데 말이야” 이라는 뜻의 찬사는 아니겠지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게 된다’는 로쟈님의 지적을 떠올린다면 김훈의 아름다운 손가락(문체) 때문에 정작 보아야 할 아름다운 주제(달)에는 눈길을 줄 수 없다 로 풀이할 수 있을 터인데 여기서 세 번째 의문이 생깁니다. 3)그럼, 아름다운 손가락과 아름다운 달의 조합은 현실적으로(소설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건가요? 아무리 손가락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어쨌든-달이 아름답기만 하다면-우리는 그 달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손가락이 아름답다면 당장은 손가락에 눈이 먼저 가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영 달을 볼 수 없게 된다는 식의 인과관계는 저로서는 얼른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만약 아름다운 손가락을 가진 것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이 전혀 아름답지 않은 경우일 것입니다. 그건 기만이 될 테지요. 진정 알아보아야 할 아름다운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시선을 아름다운 손가락을 이용하여 현혹시키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혹시 4)로쟈님이 처음에 언급했던 두 번째 이유, 김훈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아름답지 않은 달과 유비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이 결국 허무주의적 세계관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은 소설이 아니다 라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면 과연 소설이 표방해야 마땅할 세계관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의문에 다다릅니다. 이러한 의문은 로쟈님이 샤르트르의 앙가주망을 언급하셔서 더욱 깊어지는 기분이에요. 그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참여를 이야기하며 engage와 embarque를 구분하였지요. 전자는 (사회에) “끌려드는 상태를 능동적, 자의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에 대처해 나가는 태도를 의미”하고 그에 반해 후자는 “수동적, 강제적으로 끌려드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허무주의적 세계관도 나름의 의지표현이 될 수 있지만 샤르트르의 분류대로라면 앙가주망이 될 수는 없겠지요. 제가 파악한 것으로는 샤르트르가 카뮈를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는 1947년 프랑스 라는 특수한 환경 하에서 이루어진 논의인데 이것을 문학(로쟈님의 글에 따른다면, 산문 또는 소설) 전반에 대한 일반론으로 결론내릴 수 있을지요.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앙가주망하지 않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다 라고 말입니다. 5)그럼 사회적 목소리를 내지는 않아도 미학적 성취를 이루내었거나 인간 내면의 성찰을 행한 소설(제가 여기서 들고 있는 이 두가지 예가 특별히 김훈의 작품을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의 거취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의아해집니다.

언젠가 로쟈님이 페이퍼의 덧글에서 ‘김훈은 스스로를 타자화할 수 없는 작가이기 때문에 아무리 소설을 써도 그건 에세이에 불과하다’라는 요지의 말을 하였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니 로쟈님이 알라딘 페이퍼에서 했던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이 했던 말을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영 자신이 없습니다(그 덧글을 찾기 위해 로쟈님의 엄청난 수의 페이퍼를 뒤질까 잠시 망설였지만^^ 그랬다가는 정말로 제 눈알이 제 자리에 가만 있지 않을 같아 포기했습니다). 어쨋거나 개인적으로 저는, 작가가 스스로 타자화가 불가능하면 소설을 쓸 수 없다 라는 단언에 더 고개가 끄덕여지거든요.

이비 2007-05-13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길어서 잘렸습니다)타자화 되지 못한 혹은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데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 작가라면 그 사람이 쓴 소설은 자전적 수기의 알레고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자전적 수기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자신의 과거에 대한 미화 혹은 변명 혹은 자기 도취 등 지극히 개인사적 진단에 머무르고 말 테니까요.

몇 가지 물어본다고 해놓고 어처구니없이 긴 덧글이 되었습니다. 조용한 서재에 들어와서 괜히 분위기만 산만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약간 걱정이 되는군요. 너무 산뜻한 봄날이네요. 남은 일요일 오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아, 저는 왜 안부메일 식의 인사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로쟈 2007-05-14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우 드문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진지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길게 질문을 주셨지만 여건상 간략하게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로쟈님의 표현, 소설은 ‘문체가 지저분해야 한다’도 ‘문체가 너무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는 말의 강조형 정도로 받아 들이고 그 외에 다른 뜻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 다른 뜻이라고 하면 '시장의 언어' 정도의 뜻이 포함된 것으로 보시면 좋겠습니다.

2) 문체가 너무 아름다우면 소설이 되지 않는다, 라는 제 주장은 시적인 것과 산문적인 것(소설적인 것) 사이의 구별에 근거한 것입니다. 김훈의 경우엔 에세이적인 것과의 구별일 텐데, 시적인 것을 무엇보다도 자기지시적인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시적 기능'에 관한 야콥슨의 정의를 따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더 주목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죠(미모의 여성운동가 스타이넘의 사례도 같은 맥락에서 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주장을 '호소'하는 것이므로 '공감'하지 않으신다면 할 수 없는 것이고요.

3)그럼, 아름다운 손가락과 아름다운 달의 조합은 현실적으로(소설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건가요? ->2)와 연계해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가능하지만(카뮈의 소설이나 김훈의 소설처럼), '소설'로서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조세희의 소설에 대해서 황순원 선생이 '문체'는 쳐줄만하다고, 했는데 작가에 대한 상찬임에는 분명하지만 '소설가'에 대한 멘트로서도 그러한가는 좀 다른 문제라고 봐요.

4)로쟈님이 처음에 언급했던 두 번째 이유, 김훈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아름답지 않은 달과 유비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이 결국 허무주의적 세계관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은 소설이 아니다 라는? -> '아름답지 않은 달'과 관련된 말씀은 제 취지와는 무관합니다. 김훈의 세계관과 소설양식의 관계는 좀더 자세하게 다뤄줘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그럼에도 아웃라인 정도는 제시했다고 생각하고요).

5)그럼 사회적 목소리를 내지는 않아도 미학적 성취를 이루내었거나 인간 내면의 성찰을 행한 소설(제가 여기서 들고 있는 이 두가지 예가 특별히 김훈의 작품을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의 거취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의아해집니다. -> 저는 그것이 긴장관계에 놓인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문학작품으론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같은 소설이 문제적인데, 저는 기본적으로 그 작품이 '소설로 씌어진 서정시'라고 생각합니다. 해서, 뛰어난 작품이긴 하나 '소설'이라는 기준으로 봤을 땐 불만족스럽다는 것이죠(이건 제 의견만은 아닙니다). 김훈의 '소설들'도 저는 뛰어난 '에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설'로는 아니라는 것이구요.

끝으로, 김훈은 스스로를 타자화할 수 없는 작가이기 때문에 아무리 소설을 써도 그건 에세이에 불과하다, 같은 진술은 김훈 자신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3인칭으로는 소설을 쓰지 못하겠다고 고백한 바 있으니까요. 김훈도 그렇겠지만, 본격적인 소설이란 건 '3인칭'의 세계입니다... 부족하다 싶은 대목들에 대해서는 다시 질문해주시면 저도 보충하겠습니다...

이비 2007-05-14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잘 읽었습니다. 처음 로쟈님에게 질문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제 마음 속에 떠오른 문제는 사실 4번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앞에 드린 세 가지 질문은 4번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과정이었고요. 1번에서 3번까지의 질문에 대한 로쟈님의 답변 또한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리면 너무 외람될까요? 관점의 문제고 취향의 차이라고 결론내린다면 앞의 세 가지 문제는 어쩌면 '사소한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평론가 입장에서는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요). 사실, 소설이면 어떻고 에세이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4번의 문제는 반드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이라는 느낌입니다.

김훈의 작품을 두고 마치 기정 사실처럼 말해지고 있는 아름다운 문체라는 세간의 평에 저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의 오독의 결과인지 아니면 제가 과문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문장이 조성하는 비장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제를 이미지로 형상화시키려고 부단하게 애쓴 흔적이 역력한, 절차탁마된 비장함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거든요. 조금 노골적으로 말해볼까요? 그것은 무협지의 정제된 환영을 불러일으킵니다(적어도 소설에서는 그렇습니다. 그의 에세이는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수는 없군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문체가 따로 뚝 떨어져서 이야기되어진다는 현재의 담론방향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문학이 그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예쁜 옷은 아니니까요. 주제의식과 내용에 걸맞는 문체일 경우에만 아름다운 문체라는 어구가 칭찬이 되는 게 아닐까요. 문체가 아름답다 혹은 문체는 아름답다 라고만 말해지는 것은 문학이 임자 없는 예쁜 옷에 불과하다는 혹평에 다름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김훈이 아름다운 문체 운운하는 말 때문에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 애석하기 그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매체에서 다루어지는 '김훈론'이 핵식을 비껴가고 있다는 지적을 하고 싶었습니다. 문체의 화려함이나 작품 바깥에서 조명되는 작가 개인의 행보에 지나치게 많은 무게가 실린다는 느낌이에요. 로쟈님의 말처럼, 김훈의 세계관과 소설양식의 관계가 앞으로 좀더 자세하게 다뤄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아웃라인만으로는 조금 부족해요^^)


로쟈 2007-05-14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에세이를 읽어보지 않으셨다니까 좀 의외이면서 왜 그런 의문을 가지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의 소설의 문체는 곧바로 그의 에세이의 문체였습니다(에세이스트였을 때부터 그는 최고의 미문가였습니다). 소설이란 장르로 이동하면서 '절차탁마'한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허무주의자가 미문가가 되는 것은 염세주의자가 미식가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됩니다. 특별히 독창적인 생각도 아니기에 자세히 다루지 않는 것인데요, 나중에 본격적인 김훈론이라도 쓰게 된다면 보완해볼 계획입니다...

주니다 2007-05-14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고재가 이번에 대박이 났겠네요. 어쩌다 학고재에서 책이 나오게 됐을까요? ^^

로쟈 2007-05-14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와 무슨 인연이 있었겠지요.^^ 책도 잘 뽑았더군요. 몇 십만 부는 나갈 거 같습니다...

이비 2007-05-14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기대하겠습니다 ^^.

그 사이 몇 가지 의문이 또 생기기는 하였지만 로쟈님에게 질문하는 것은 그리 적절한 것 같지 않아서 제 서재에서 혼자 독백하는 걸로 대충 마무리하였습니다. ^^ 덕분에, 알라딘 인터페이스에도 많이 적응하게 된 의외의 수확이 있었군요.
 

멜기세덱님과 stella09님의 주문에 따라, 요 며칠전부터 알라딘에 '다단계'로 퍼져나가고 있는 독서문답에 답을 단다. 대부분 평이한 질문들이라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는 점과 애써 호명해주신 분들의 체면이 내가 고려한 사항들이다. 대신에 다른 분들께 바톤을 넘기는 일은 생략할 작정이다(나는 다단계를 좋아하지 않는다).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의례적인 안부인사에 대한 의례적인 답변을 다는 수밖에. "예, 그럭저럭.^^;" 

독서 좋아하시는지요?
'무릎팍도사'에서의 분류를 따르자면 '식상한 질문'이다. 질문자를 한 대 때려주던가?

그 이유를 물어 보아도 되겠지요?
왜 때리느냐고?


한 달에 책을 얼마나 읽나요? 
평균적으로 한달에 30권 이상의 책을 구입하니까 많이 읽어봐야 30권 이내이다(목차와 서론, 혹은 후기 등은 읽어둔다), 라고만 적으면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냥 3권 이상 읽는다고 해둔다. 
 
주로 읽는 책은 어떤 것인가요?
알라딘의 분류대로 하면 가정/건강/요리 범주의 책들을 거의 읽기 않는다. 만화를 읽지 않는다. 수험서/자격증도 읽지 않고, 자기계발, 좋은부모, 청소년도 읽지 않는다. 참고서/학습서 안 읽고, 컴퓨터 안 읽는다. 나머지는 대충 읽는다(무슨 식성 얘기 같군)...  
 
당신은 책을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책은 전부이다. 그런데 이 전부인 책들은 책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책의 패러독스이다.
 
당신은 독서를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이 또한 '식상한 질문'이다. 당신은 삶이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만큼이나.
 
 
한국은 독서율이 상당히 낮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더 재미있는 게 많아서가 아닐까? 많은 이들이 재미있다는 만화를 나는 읽지 않는다. 나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굳이 읽으라고 강권하지 않는다. 책읽기는 행복과 비례하지 않는다.
 
책을 하나만 추천 하시죠? 무엇이든 상관 없습니다.
지금 책상머리에 가장 가까이 있는 책은 <에이젠슈테인 100년>(러트거스대학출판부, 2002)이란 책이다. 오늘 강의한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다. 우연이긴 하지만, 에이젠슈테인은 <죄와 벌>을 영화화하려고도 했다(그의 강의노트를 읽은 기억이 난다).
 
 
그 책을 추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냥 눈앞에 있어서이다. 물론 눈앞에 있는 책들이 얼추 수백 권은 되지만...
 
만화책도 책이라고 여기시나요?
이것도 '식상한 질문'이다('만화책'이라고 적어놓지 않았나?). 나는 만화는 좀처럼 읽지 않지만 <만화의 이해>(시공사, 2002) 같은 책은 읽는다. 
 
 
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비 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나는 문학과 비문학의 구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판타지와 무협지는 '소비문학'이라는 장르로 분류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판타지와 무협지를 잘 손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소비문학'이란 말은 처음 들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아무 생각 없는 게 당연하다. 
 
당신은 한 번이라도 책의 작가가 되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작가'가 아니라 '저자'이겠지. '자가출판'한 책까지 포함하면 그래도 꽤 된다.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그때의 기분은 어떻던가요?
반나절쯤 우쭐거리게 된다.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누구입니까? 
많다(적어도 두 손으로는 다 꼽지 못할 정도로). 오늘은 <죄와 벌>을 읽었으니까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해두자.
 

좋아하는 작가에게 한 말씀 하시죠?
나는 감정표현에 서툴다. 그냥 차나 한잔 권하고 싶다...

이제 이 문답의 바톤을 넘기실 분들을 선택하지 않겠다. 당신의 독서를 잠시 방해해서 미안하다...

07. 0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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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5-10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도 문답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주 잘 읽었습니다. 역시 책 좋아 하시는 분은 뭐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시다니까요.

마늘빵 2007-05-10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로쟈님도 걸려드셨군요. 이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로쟈님 책이 뭔지 궁금합니다. 알려주세요.

로쟈 2007-05-10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가출판'(러시아식으론 '사미즈다트')이란 게 책형태로 만들어서 주변사람들에게 나눠줬다는 얘깁니다. 그런 책이 6-7권 됐다는 얘기고 논문에다 공동번역서도 있고... 해서 궁금증에 부합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보다 '멀쩡한' 책들이 나오면 알려드리죠.^^;

비로그인 2007-05-10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
실례입니다만 되게 근엄하실 거라고만 막연히 상상했던 로쟈님이
이렇게 유머가 있으신 분인줄 미처 몰랐네요?
정말*100 재밌게 읽었습니다. :)

마늘빵 2007-05-10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쟈님 그럼 접할 수 없겠군요. 서점에 깔리는 책이 나오면 알려주십시오. :)

stella.K 2007-05-10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시니컬하면서도 썰렁하지만 춥지 않은 건 저 이미지들 때문인가요? 킥킥대고 웃다 갑니다.^^

수유 2007-05-10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문답까지 하시다니...그러고 보면 없는--;; 유머도 보이시고. 블로깅의 미덕일까? 아닐까 요?

필라멘트 2007-05-10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픞팍도사"가 아니라 "책도사"이신 로쟈님의 답변이 재미있습니다.^^*

우주돌이 2007-05-10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너무 재미있습니다. 전 재미있는 분이 좋아요. 로쟈님 만세!

다락방 2007-05-11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정말로 재미있게 읽었어요. :)

멜기세덱 2007-05-11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시리 로쟈님의 "독서를 잠시 방해"한 것 같은 죄송스런 마음에 댓글을 다는게 쪼께 송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유머와 재치, 그리고 솔직 담백을 맛보게 해주신 로쟈님....짱~! 이세요...ㅎㅎ

로쟈 2007-05-1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어들 하셔서 다행이네요. 별 내용이 없는 문답인지라 '무릎팍'의 힘을 좀 빌린 것뿐인데요...

yoonta 2007-05-12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평소 글쓰시는 쎈스를 볼 때 이정도 유머감각은 저로선 실망 쫌 인데요..^^;;

로쟈 2007-05-12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yoonta님에게 맞는 유머는 또 따로 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