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아니면 사기꾼'이란 평을 듣는 덴마크의 문제적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이 열린다고 한다. 말은 '특별전'이지만 고작 세 편의 영화를 상영한다고 하니 괜히 나까지 머쓱하긴 하다. 더구나 신작 <오 마이 보스>를 제외하면 이미 DVD 타이틀로까지 다 나와 있는 영화들이어서 '발견'의 새로움을 기대하기도 어려울 듯싶고. 개인적으론 그의 영화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인상적으로 본 기억이 있지만 이후에 나온 영화들을 다 챙겨보진 못했다(<킹덤>이나 <어둠 속의 댄서>, <도그빌> 모두 부분적으로만 보았다). 이번에 나온 신작 <오 마이 보스>는 예기치 않게도 코미디라고 하니까 그 중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도 싶다.

Антон Долин. Ларс фон Триер. Контрольные работы. Анализ, интервью. Ларс фон Триер. Догвилль. Сценарий

개인적인 기억을 하나 더 보태자면, (모스크바 통신에도 적은 바 있지만) 나는 러시아에서 라스 폰 트리에가 갖는 거장으로서의 위상에 좀 놀란 적이 있다(몇 년전 상황이긴 하나, 라스 폰 트리에, 왕가위, 기타노 다케시, 김기덕이 러시아에서 꼽은 '우리시대의 거장'들이었다). 그걸 웅변해주었던 건 지난 2004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키노텍스트'란 영화총서의 첫 권이 라스 폰 트리에에게 바쳐졌다는 점. 작품론과 함께 감독과의 인터뷰, 그리고 <도그빌>의 시나리오 등으로 구성된 책이었다(망설이다가 구입을 미루었던가?). 우리의 '키노텍스트'들도 보다 폼나게 나옴직하지 않을까?.. 

모아놓은 기사들은 <오 마이 보스>에 대한 리뷰와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에 대한 소개이다.

경향신문(07. 06. 29) [영화 가로지르기]‘오 마이 보스’

‘오 마이 보스’(감독 라스 폰 트리에)는 가짜 사장으로 부임한 무명배우의 이야기다. 회사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해고를 책임지고 추진할 악역이 필요했던 진짜 사장은 가짜 사장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도록 한다.

‘오 마이 보스’에는 라스 폰 트리에의 고유한 인장이 찍혀 있다. 도그마 영화에 대한 감독의 신념이 대사에까지 등장하고, 형식미에 있어서도 관객과의 심리적 거리를 확보하는 개성적 편집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영화에 자신의 모습까지 드러내는 감독은 점프 컷(두 장면 사이를 부자연스럽게 단절시키는 편집기법)을 이용하여 관객의 정서적 이입을 적절히 견제한다. 편집의 위력을 생생한 형태로 보여주는 점프 컷에는 영화라는 매체의 독자적 정체성이 간직되어 있다.



‘오 마이 보스’는 전문성의 신화를 재치있게 조롱한다. 첨단 IT기업의 경영자로 행세하는 무명배우 크리스토퍼의 모습은 허상에 의해 미화된 기업가들을 상징한다. 그래서 ‘오 마이 보스’는 단순한 가짜사장 소동이 아니라 능력에 비해 명성과 위신이 턱없이 부풀려져 있는 기업가 모두에 대한 풍자로까지 읽힌다. 가짜 사장을 둘러싼 소동에는 지위와 능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내장되어 있다. 영화는 능력이나 전문성에 대한 일반적 믿음이 일종의 신화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크리스토퍼(젠스 알비누스)는 전통적 의미의 능력 때문에 고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 라운(피터 갠츨러)의 평판관리 혹은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고용되지 않는가.

한편 ‘오 마이 보스’의 직원들은 자본의 모든 대리인들에게 본능적으로 공손하다. 그들은 회사의 냉혹한 조직문화에 거부감을 보이면서도, 실제 소유주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정체불명의 ‘사장님의 사장님’까지 등장하지만, 직원들은 그 익명의 권위마저도 충실히 추종한다. 자본가에게 부여된 지엄한 권위 앞에서, 그들은 권위의 허상을 직시하려는 일체의 노력을 포기한 채 권위가 수반하는 화려한 후광에 현혹되고 만다. 그들이 사장의 비정한 행태에 대해 묵인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면 사장의 정체가 그렇게 오랫동안 은폐될 수 있었을까. 감독은 자신의 앞날을 자본가에게 위탁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반응을 놓치지 않는다.

'오 마이 보스’의 대사처럼, 배우에게 관객은 법이고 무대는 법정이다. 그러나 배우가 단지 현실로부터 격리되어 무대에 유폐된 존재라면, 그가 과연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관객과의 소통이 운명인 배우가 밀폐된 자의식의 세계에 갇힌 은둔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하는 예술지상주의는 자칫 예술가의 나르시시즘에 불과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가 자신의 역할모델로 숭배하는 ‘감비니’는 실존 배우가 아니라 라스 폰 트리에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트럭의 이름이다. 가상의 인물 감비니를 원용하여 자신만의 연기론을 변호하는 크리스토퍼는, 현실에서 유리된 채 예술지상주의의 포로가 되어버린 예술가들을 상징한다.

배우의 진정한 임무란 과연 무엇일까. 가짜 사장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배역과 대사에만 관심이 있다. 그가 직원을 해고하는 악역을 맡지 않으려는 것도 배우로서의 자존심 때문이지 해고의 부당성에 대한 확고한 자각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직원들의 해고를 초래할 매각계약서에 마침내 서명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숭배하는 배우 감비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충동적으로 계약서에 서명한다. 해고된 직원들의 운명에는 아랑곳없이 자신만의 예술에 몰두하는 크리스토퍼의 마지막 모습은, 자폐적 순수예술이 결국 자본가와 권력자들의 이익에 복무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준다.

볼테르는 진실보다 평화가 더 소중하다고 충고한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연극의 목적은 자연을 거울에 고스란히 비추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어쩌면 예술가의 숙명은 평화로운 거짓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지 않은 진실을 증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 마이 보스’에는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서글픈 자화상이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권위에 맹종하는 직원들, 가공된 이미지로 자신을 체계적으로 미화하는 자본가, 그리고 자신만의 관념적 예술세계로 도피한 예술가까지. 사람을 진실의 거울에 비추는 것이 예술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의 부속품이 되어 버린 우리들의 초상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몫일 것이다. 그것을 거부하고 ‘순수예술가’라는 호사스러운 칭호만을 탐한다면, 결국 크리스토퍼처럼 힘 있는 자들의 충직한 공모자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황승현 영화평론가)

경향신문(07. 06. 28) 하이퍼텍 나다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

대학로 하이퍼텍나다 극장에서 ‘도그만 선언’으로 유명한 덴마크의 거장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특별전이 28일부터 7월 4일까지열린다. 6월14일 개봉한 그의 최신작 ‘오! 마이 보스!’의 개봉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상영이벤트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독창적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번 특별전은 첫 장편 데뷔작으로 비쥬얼리스트로서의 그의 감성과 단 한번의 NG 없이 2주 동안 모든 촬영을 마무리 지으며 연출력을 선보인 장편 데뷔작 ‘범죄의 요소’(1984) 가 눈에 띈다. 또 2000년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여주인공 비요크에게 칸느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선사했던 2000년작 ‘어둠 속의 댄서’(2000)와 1995년 ‘도그마 선언' 이후 다시 장르영화로 돌아와 관객과의 직접적이고 친밀한 소통을 위해 만든 코미디 영화 ‘오! 마이 보스!’(2006)까지 총 3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상영작 소개-

<범죄의 요소>(1984)

은퇴해 카이로에서 생활하고 있던 피셔 형사는 경찰학교의 스승이었던 오스본과 동기 크레이머의 요청으로 유럽으로 돌아온다. 피셔가 13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것은 3년 전에 종결된 것으로 알았던 연쇄살인사건이 재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의 요소'라는 책을 쓰기도 한 오스본은 복권을 파는 아가씨들만을 골라 토막살인을 저지르는 일명 복권 살인사건의 수사를 포기한 채 현실 감각을 잃은 듯이 행동하기 시작하고, 범인이라고 생각했던 인물 해리 그레이는 차 사고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어둠 속의 댄서>(2000)
공장에서 일하는 셀마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자신을 닮아 역시 눈이 멀어가는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체코에서 이민 온 그녀는 아들이 13살이 되기 전 눈을 고쳐주겠다는 소망 하나로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고된 노동에 몸을 맡긴다. 그녀의 유일한 삶의 기쁨은 뮤지컬 배우를 꿈꾸며 춤과 노래의 상상 속에 빠지는 것. 이 행복한 상상은 늘 고통스런 현실로부터 셀마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된다. 그러나 평온하던 그녀의 일상은 사치스런 아내 때문에 힘겨워하는 집주인인 경찰관 빌과 가까워지면서 예상치 못한 비극을 맞이한다.



<오! 마이 보스!>(2006)

지난 10년간 직원들과 동고동락하며 자신이 회사의 보스라는 정체를 숨기고 평직원처럼 지낸 라운! 회사를 매각하기로 결정을 했지만 동료들을 생각하면 미안해진다. 그래서 그는 엉터리 배우를 섭외해 회사 매각을 위한 가짜 보스를 만들어낸다. 보스를 직접 만난 적이 없는 10년 근속의 직원들은 그가 진짜 보스인줄로만 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 보스, 직원들의 눈엔 무언가 수상해 임무를 다그치는 라운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직원들, 이 사이에서 어설픈 가짜 보스는 과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07. 06. 29.

P.S. 영어권에서도 지난 2005년에 라스 폰 트리에 인터뷰집이 출간됐다(그보다 먼저 2003년에도 비슷한 포맷의 인터뷰집이 출간된 바 있다). 영화학도들에겐 필독서가 됨 직하지만 번역된다면 일반독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읽을 거리가 되지 않을까?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론 잭 스티븐슨의 연구서 <라스 폰 트리에>(2005)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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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제3회 맑스 코뮤날레가 개최된다(아마도 자료집이 곧 출간될 듯하다). 초청된 학자들 중에는 국제헤겔연맹 의장 안드레아스 아른트 교수도 들어 있다. 그 정도면 거물급 인사가 아닌가 싶은데 한겨레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길래 옮겨놓는다. 헤겔에 대한 나의 관심은 거의 전적으로 지젝이 부추긴 것이기에 '로쟈의 지젝'으로 분류해놓고.

한겨레(07. 06. 28) “최근 영국·미국서 변증법 관심 되살아나”

28일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리는 3회 맑스 코뮤날레에 발표자로 초청된 안드레아스 아른트(58·오른쪽 사진) 독일 베를린자유대 철학부 교수는 헤겔 변증법의 대가로 손꼽힌다. 1992년 이래, 전 세계 진보적인 헤겔(왼쪽 사진) 연구자 500여명이 참여한 국제헤겔연맹 의장을 맡아 왔다. 이 단체는 중도보수 성향의 국제헤겔회의와 함께, 세계 양대 헤겔학회로 꼽힌다. 그는 현실 개념을 파악하는 새로운 형태의 도구로서 헤겔 변증법의 의미를 재정립한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저서 <칼 마르크스:그의 이론의 전체연관에 대한 연구>와 <변증법과 반성:이성개념의 재구성을 위한 연구>는 헤겔 변증법 철학과 변증법 일반에 대한 고전적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다.

26일 고려대에서 만난 아른트 교수는 ‘복합적 구조들의 역사적 발전’을 기술하는 도구로서 헤겔 변증법을 적극 옹호했다. 그는 또 “‘노동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유시간과 관계하는 법을 잊어버렸다”면서 “자유시간을 쓸 수 있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경수 한신대 학술원 연구교수가 인터뷰를 도왔다.


-헤겔 철학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헤겔 이론은 근대의 지반에서 나왔다. 근대를 역사적으로 반성한 것이다. 헤겔 철학의 새로움은 구조에 대한 기술 뿐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항상 같이 사유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새로움은 인권을 새롭게 조명한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추상적 자유가 아니라 사회 정치적 제도를 통해 확보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자유는 빈말이 아니라 구조 즉 시스템으로서 확보해야 한다고 봤다. 헤겔 변증법은 ‘복합적 구조들의 역사적 발전’을 기술하는 데 그 어떤 방법론보다 탁월한 도구이다. 변증법을 통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고 올바르게 보고 기술할 수 있다.

 

-동일성에 대해 차이의 우위를 강조하는 들뢰즈 등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헤겔 변증법을 싫어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

=들뢰즈는 근대적(모던)이란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모던은 계속 발전되어 나가고 또 항상 현재화되는 개념이다. 현재 흐름 속에서의 발전의 개념인데,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모던을 ‘발전이 종결된 하나의 단위’로 오해하고 있다. 변증법은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이 말하는) ‘차이’를 하나의 연관 속에서 고찰하고 총체성 안에서 고찰한다. 이를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간과하고 있다. ‘동일성’에 대해 추상적으로 사고하며 ‘차이’와 대립시키고 있다.

-1990년 이후 한국에서는 데리다, 푸코, 들뢰즈 등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과, 이들과 철학적 영향을 주고 받은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 네그리 등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이론을 어떻게 보나?

=네그리는 대중의 자발성 이론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대중 조직화 등 실천 환경에 대한 분석은 충분하지 않다. 세계화의 대안 이론이 될 수 없다. 대중에게 이미 자발성이 있고 제국이 있으며 항상 대항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은 철학적으로 나이브(순진)하다.

-논문 ‘시간의 경제’에서 ‘자유시간’을 누릴 줄 아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어떤 의미인가?

=사회적으로 노동 시간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는 경제에 중요하다. 유한한 존재가 어떻게 행복한 삶을 가질 것인지, 우리가 가진 시간을 자율적으로 규정하고 구성해나가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노동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유시간과 관계하는 법을 잊어 버렸다. ‘노동형식’이 자유시간 안에 침투해 들어왔다. 자유시간 조차도 노동이나 업적을 위해 쓰이는 휴식이 되었다. 또 여가나 소비 산업을 위해 휘둘리고 있다. 자유시간을 쓸 수 있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좋으면서 행복한 삶이 뭔지 근본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생의 다른 대안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거기서 출발해 정치적 대안을 찾아야 한다. 출발점은 노동시간의 단축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끊임없이 허구적 욕구를 재생산해 낸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사용가치’에 근거한 요구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다시 한번 미래 생을 꿈꾸고 사회적으로 배워야 하고 정치적 대안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정보혁명 시대에 유의미한 변혁적 도구는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국가가 자본주의를 규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본론>의 ‘1일 노동시간’장을 보면, 마르크스는 국가가 잔혹한 아동 노동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단계에서 국가가 자본주의 잔혹성을 누그러뜨리는 기능도 한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국제적 비판적 운동도 중요하다. 고삐풀린 신자유주의 움직임을 제어해줄 수 있다. 유럽연합 등 모든 기관을 이런 식의 비판 운동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 유럽의 경우 노조간 연대 조직이 유럽노동헌장을 제정하려고 한다. 이런 움직임은 유럽의 최소 노동조건을 만드는 운동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지배 철폐만을 외칠 게 아니라 구체적인 경제적 대안을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상품 생산과 분배, 소비를 어떻게 규정하고 계획적 생산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독일 등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동향은?

=최근 미국과 영국에서 변증법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국에서 마르크스 변증법 이해를 다루는 문헌들이 많이 나오고 있으며 토론도 활발하다. 이런 미국 쪽 움직임이 오히려 유럽 쪽에 영향을 주고 있다. 내가 맡은 대학 강좌를 보면, 최근 몇해 마르크스 철학이나 정치경제학 과목 수강 학생들이 점점 늘고 있다. 1989년 현실 사회주의 붕괴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는 더 이상 정치적 의심을 받지 않으면서 위축되지 않고 마르크스 사상을 있는 그대로 과학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도그마(독단)에 빠질 가능성을 줄이는 긍정적 계기가 됐다.(글 강성만 기자)

07. 06. 28.

P.S. 갑작스런 '헤겔 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주목할 만한 책들이 나오고 있다. 비토리오 회슬레 교수의 주저 <헤겔의 체계>(한길사, 2007)가 번역돼 나오기 시작했고, 헤겔 원저로는 오랜만에 <인륜성의 체계>(울력, 2007)가 우리말 번역본을 얻었다. 그리고 나종석 교수의 <차이와 연대>(길, 2007) 또한 최근에 나온 묵직한 연구서이다. '헤겔의 현재성' 정도는 허언이 아닌 듯싶다...

07.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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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에 읽을 사회적 독서 목록에 올려놓은 책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창비, 2007)에 관한 서평을 옮겨놓는다. 책의 앞부분은 나도 읽어봤는데(마저 읽을 시간을 못내고 있다) 지난 80년대에 관한 것인지라 20대 시절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의미도 있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면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을 다시 회고해보는 의미도 있고. 그래서 한 개인사를 따라가며 복잡한 반성과 성찰에 젖게 된다. 마치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읽을 때처럼. 저자인 황광우씨는 <철학 콘서트>(웅진지식하우스, 2006) 등으로 형 황지우 시인만큼이나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지만(논술교재들도 여러 권 펴냈다) 서평을 읽어보니 현재 병상에 누워있다고 한다. 쾌유를 바란다.   

오마이뉴스(07. 06. 27) 책에서만 보던 혁명이 현실이 되었을 때

사람을 빨아들이는 글쓰기는 황광우가 가진 남다른 재주인가보다. 어제(26일) 저녁을 먹고 펼쳐든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어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단숨에 읽었다. 1985년 대학에 입학해, 가을 무렵에 황광우가 쓴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와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을 단숨에 읽어 내려가며 절망하고 분노하였던 기억이 있다.

이듬해부터 나는 참 많은 후배들에게 그가 쓴 책 '소삶'과 '들역'(우리는 그 때 이렇게 불렀다)을 읽게 했다. 그리고 책을 읽었던 많은 후배들이 나처럼 절망하고 분노하며, 이른바 의식과 교육에 입문하였고, 곧이어 짱돌과 꽃병을 들고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소위 '운동권'이 되었다.

우리 학번은 대학을 졸업하거나 혹은 감옥살이를 하고 나서는 반드시 '노동현장'으로 옮겨 가야 한다는 중압감을 가졌던 마지막 세대였다. 한두 학번 밖에 차이 안 나지만 86학번, 87학번은 이른바 '애국적 사회진출운동' 세대들이다.

현장에 들어갈 준비과정으로 생각하고, 대학 3학년이 되면서부터 노동야학에 참여하였다. 노동야학에서 만났던 100여 명이 넘는 노동자들과 함께 읽었던 입문서 역시 황광우가 쓴 '소삶'과 '들역'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정인이라는 필명으로 밖에 몰랐다. 어쨌든 그가 쓴 두 권의 책은 출간되자마자 소위 의식화교육의 입문서로 자리매김하였다.



철학공부의 입문서였던 <철학에세이>를 쓴 사람도 황광우와 함께 활동하던, 조성오라는 사실도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황광우와 함께 활동하던 이들이 쏟아낸 숱한 번역서를 읽고 공부하였던 이들이 이른바 '386세대'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를 만난 적이 없지만 80년대 후반 사회과학서점을 통해 그가 참여했을 인민노련 기관지 '노길'(노동자의 길, 그때는 이렇게 불렀다)을 꼬박 꼬박 사서 읽었다.

황광우를 통해 만나는 우리시대의 '전사'들

오늘까지 단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지만, 수많은 팸플릿과 정세분석 문건으로 그와 만났으며, 이윽고 어제는 그에게서 그와 함께 빛나는 80년대를 살았던 '전사'들의 무용담을 자정 무렵까지 혼자서 들었다.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는 황광우의 개인사와 같은 책이다. 개인사의 형식을 빌었기 때문에 단숨에 읽어 내릴 수 있을 만큼 편안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읽는 이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단순한 자서전이나 개인사는 아니다.

그 내용이 어두운 과거와 시대의 아픔을 기록하고 있지만, 지은이 특유의 '혁명적 낭만주의'가 스며있기 때문인지 패배보다는 작은 승리를 읽으면서 기뻐할 수 있었다. 버스 환기통을 이용해서 유인물을 뿌리는 장면에서, 혹은 수배 중 어렵사리 경찰 검거를 피해나가는 장면에서 그리고 마침내 87년 6월 100만 민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군사독재정권의 항복을 받아내는 승리의 장면들을 읽는 '재미'가 있다.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를 읽으며 우리는, 황광우를 통해서 혹은 황광우의 동지들을 통해서 혹은 그가 찾아낸 역사의 기록물들을 통해서 그 시절 전사들, 운동가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진면목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그가 남긴 시 '전사'처럼 살았던 김남주, 저항의 구심 윤한봉, 그리고 박기순, 박관현, 윤상원, 강용주, 권인숙, 박종철, 전희식과 같은 이들이다. 그들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고, 지금도 치열하게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특히, 윤한봉이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살이를 하면서 읽은 <다산시문선>에서 얻은 깨달음은 지금 읽어도 충격적이다.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어요. 정약용은 식량 증산을 강조하지요. 놀리는 땅 없이 작물을 심고 개간하고, 저수지나 연못 같은 곳도 놀리지 말고 뗏목을 만들어 콩을 심으라고 해요. 그분은 민중들을 위한 생산적인 사고를 한 겁니다."

지난 봄 나온 <희망세상> 5월호를 보면, 그는 지금 폐기종으로 호흡량이 정상인의 11%밖에 안 되는 탓에 하루 15시간씩 산소 호흡기를 끼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미 1978년 무렵부터 그는 동지는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사이여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딱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사는 무소유의 삶을 살고 있다.

기록을 남기지 않는 시대에 대한 '기억'

나는 최근 6·10민주항쟁 20주년을 기념하여, 지역 운동사를 정리하는 작업 중 일부를 맡았었다. '기록'이 '기억'을 이긴다는 말이 있지만, 당시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 시절이었다. 기록은 곧 국가보안법상 범죄의 증거가 되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불과 20년 전의 지역 운동을 정리하는 데도 참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20년 전 활동가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시도하였다. 불과 20년 전의 일이지만, 사람들의 기억이 일치하지 않는 곳이 너무 많았다. 기억하는 과거 중에는 이미 '역사'가 아니라 '서사'가 되어버린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기록물 하나만 발견되어도 그것이 사실을 정확히 기록으로 남기는데 아주 중요한 근거자료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잘 안다. 이 정도 기록을 정리하는 데는 읽는 이들은 알 수 없는 어마 어마한 수고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책을 읽는 이들은 마치 지은이가 소주잔을 마주 놓고 자신의 무용담을 주저리주저리 풀어내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글을 쓴 이는 많은 이들의 실명을 담아서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야하는 많은 부담을 안고 있었으리라.

지은이가 책 쓰기를 마치고 중풍으로 쓰러진 것도 어쩌면 가슴을 짓누르는 중압감으로 가득 찬 시대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부담 없이 읽히는 소설처럼 써내려 가는데, 혼신의 노력을 쏟아 부었기 때문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황광우의 탁월한 기억과 지인들의 증언 그리고 이런 저런 자료를 모아 엮어진 이 책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사, 80년대 한국 노동운동사를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실감나는 문장으로 정리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또 다른 큰 성과라고 생각된다. 탁월한 감각을 지닌 어떤 영화감독이 이 책을 읽는다면, 감동적인 영화로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가 쓴 이 책은 1970년대 어느 때부터 민중의 힘으로 '항복 선언'을 받아 낸 87년 6월 29일, 그날까지의 기록이다. 1970년대와 80년대를 온몸으로 살아온 '전사' 황광우가 전하는 6월 항쟁의 의미는 이렇다.

"1987년 6월 항쟁은 1919년 3.1 만세운동과 맞먹는 거국적 국민 항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1987년 6월은 우리가 꿈꾸는 혁명의 시절이었다. 우리는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책에서만 봤지 현실에서 본 적은 엇었다. 6월 항쟁이 끝나고 나서야 이런 게 혁명적 상황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뒤늦게 하게 된 것이다. 그만큼 엄청났고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날로 기록될 1987년 6월을 뜨겁게 살았던 지은이에게도 고민이 있다.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의 서문을 보면, 1958년생인 지은이와 1985년생인 그의 아들 사이에 역사를 인식하는 간극이 얼마나 큰가에 대하여 밝히고 있다. 80년 광주항쟁과 87년 6월 항쟁을 온몸으로 살았던 아버지와 그 형제들, 이한열을 보내는 시청 앞 노제에서 아버지 어깨위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들사이의 간극 말이다.

얼마 전 마산에서 열린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기념하는 한 토론회에서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로부터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과제는 하나는 세대를 잇는 일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나는 87년 6월 항쟁 당시 네 살배기 꼬마였던 후배와 함께 토론회에 참석하였다. 그 후배는 토론회를 마치고 나오며 "솔직히 모르는 이야기가 더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이 책은 1958년생인 지은이와 1985년생인 그의 아들 사이에 있는 역사인식 간극을 메울 뿐만 아니라 나와 후배 사이, 세대간 간극을 메우는 책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세대간 간극을 메우는 첫 시도로 내가 읽은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를 후배에게 권해볼 생각이다. 20~30여 년 전 그날, 그 사람들에게로 확 빨려 들어가 불과 서너 시간 만에 읽었던 책을 네 살배기 꼬마였던 후배는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다.

역사 속에서 호흡하는 실천가가 쓴 '역사'

중풍으로 병상에 누운 황광우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전하고 있다.

"독자들이 우리의 젊은 날 이야기를 들으며 소설처럼 삶의 호흡을 느끼면서, 철학처럼 삶의 근본을 사유하는 뜻있는 기회를 만난다면 더 바랄게 없겠다."

이 말에는 자신들의 젊은 날 이야기를 통해 세대간 간극을 메워보고자 하는 지은이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있다. 그래도 다행 아닌가? 우리는 우리의 우리 손으로 역사를 기록할 수 있으니. 지은이의 말처럼 "역사가는 역사 밖에서 역사를 보지만 실천가는 역사 속에서 역사를 만진다." 마오쩌둥은 대장정을 함께 한 작가 에드거 스노우가 그들의 호흡과 냄새를 기록하여 주었고, 김산은 님 웨일즈를 통해 <아리랑>을 남겼다는 그의 지적은 옳다.

이 책은 역사 속에서 역사를 만지는 실천가의 눈과 가슴으로 씌어진 책이다. 소설 같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지만, 이 시대 실천가로서 역사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만나게 된다.(이윤기 기자)

07. 0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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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7-06-28 10:57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옛날 '소사'와 '들역'을 읽었던 기억은 나네요.
내용은 거의 기억이 안나지만...
저도 황광우님의 쾌유를 빕니다. 비까지 와서 그런지 맘이 더 짠하네요.

마늘빵 2007-06-28 16:11   좋아요 0 | URL
조성오의 철학에세이 고 2때 샀는데 뭣모르고 재밌게 읽었던 기억 납니다. :)
황광우씨는 몇달전 철학콘서트로 만났죠.

Koni 2007-06-28 16:4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지난해 황광우 씨의 <철학콘서트>를 읽었는데,아프시다니 마음이 안 좋네요. 이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iamtext 2007-06-28 18:0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형제가 나란히 블로그에 올라오네요^^ 소삶뿌와 들녁(우리는 이렇게 불렀습니다)에 대해서는 저역시 아련합니다. 한참 후 황광우의 이름으로 나온 '뗏목'도 있었죠.

로쟈 2007-06-28 19:50   좋아요 0 | URL
역시나 독자들이 많군요.^^
 

제목 때문에 이 페이퍼를 들여다보실 분들이 많을 텐데, 얼마간 고의적이긴 하지만 내 탓은 아니다. 돌아가신 김현 선생 탓이다. 그의 비평집 제목이 <책읽기의 괴로움>(문학과지성사, 1993)이기 때문이다. 1992년에 나온 건 전집판이고 나는 80년대에 나온 민음사판을 갖고 있다(이 책과 관련한 얘기는 http://blog.aladin.co.kr/mramor/880102 참조).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에 이 책이 올라와 있는데, 다름 아니라 오늘이 지난 1990년 세상을 떠난 저자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바쁜 와중에 잠시 17년전 그날을 떠올려본다.

한국일보(07. 06. 27) [오늘의 책<6월 27일>] 책읽기의 괴로움

문학평론가 김현이 1990년 6월 27일 48세로 사망했다. 시인 황지우(55)를 1999년 인터뷰했을 때 했던 말이 생각난다. “김현 선생 돌아가시고 나서는 (문학이) 재미가 없어졌어요. 문학판이 구심점도 없고 이슈도 없는 요즘, 새삼 그 분이 그립습니다.”

황지우의 말처럼 김현은 한 시대 한국문학의 구심점이자 이슈의 창출자였다. 1960년 그가 김승옥 김치수 최하림 등과 만든 동인지 <산문시대>는 한글세대의 신화였고, 그것은 1970년 김병익 김주연 등과의 <문학과지성> 창간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그는 우리 문인들의 호명자였다.

자신보다 20년이 젊은 세대의 무협지적 상상력까지 한국문학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을 정확히 호명해준 것이야말로 김현의 가장 큰 공이었다. 시기적으로 묘하게도 그의 사망 이후 1990년대부터 한국문학은, 역시 황지우의 표현으로라면 “초라한 주변부 장르나 언더그라운드 꼴이” 돼버린 것도 사실이다. 그의 부재가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책읽기의 괴로움>은 폭력의 연대였던 1984년 나온 김현의 평론집이다. 표제 평론은 최인훈의 소설 <회색인>을 통해 그런 세상에서의 ‘책읽기’라는 문제를 다룬 글이다. 다시 읽어본다.

책읽기가 고통스러운 것은 책읽기처럼 세계를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계가 책 속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분명하게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다만 방황할 따름이다. 그 방황을 단순히 책상물림의 지적 놀음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근본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나도 최인훈의 회색인에 가깝다. 나는 내 자신이 불행이고 결핍이다.”

07. 06. 27.

P.S. 하지만 그의 <책읽기의 괴로움>을 구한 것도, 읽은 것도 모두 큰 즐거움이었다는 걸 고백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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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현..
    from 한사의 서재 2007-06-27 12:05 
    “책읽기가 고통스러운 것은 책읽기처럼 세계를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계가 책 속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푸른괭이 2007-06-27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릴 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 사진 속 김현 선생이 너무 젊군요....

마늘빵 2007-06-27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현 책은 딱 한개 봤는데 제목이 기억이 안나는군요. 수필집 비슷한 성격이었는데. 책읽기가 괴롭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 요새 그래요. 읽고픈건 많은데 의욕이 나지 않을 때.

비로그인 2007-06-27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현씨의 글 좋습니다.
제가 한 부 먼댓글로 엮어 얻어갑니다.
고맙습니다. 로쟈님


수유 2007-06-27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옮겨가요~~ 저도 즐거움이었어요.
 

한겨레21에서 이청준 문학의 '보편성'에 관한 리뷰를 옮겨온다. 실상 이창동의 <밀양>을 아직 보지 못한 분풀이이다(7월초에도 상영하는지?). 주변에서 볼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본 다음임에도 시간을 못 내는 처지라니! 예전에 읽은 원작 소설 <벌레 이야기>는 얼마전에 단행본으로 나왔고 한 지인으로부터 선물받았다(칸느 영화제 수상직후 이 책의 표지는 곧장 <밀양>으로 바뀌었다). 영화를 보게 되면 다시 읽어볼까 한다. 아래 기사는 문학평론가 방민호 교수의 이청준 문학에 대한 예찬으로 읽힌다... 

한겨레21(07. 06. 21) 이청준, ‘한국적’으론 감당할 수 없어라

전도연씨가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낭보가 들려왔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통해서다. 유럽 영화제에서 한국의 여배우가 여우주연상을 받게 된 것은 강수연씨 이래 20년 만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전도연씨와 <밀양>을 연출한 이창동 감독에 따라다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밀양>의 원작이 이청준씨의 중편소설 <벌레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벌레 이야기>에 없는 이야기들이 첨가되고, 있던 이야기들이 삭제되는 커다란 변용을 겪기는 했지만 결국 <밀양>은 <벌레 이야기>를 모태로 삼은 작품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원작은 원작일 뿐이다. 영화는 원작을 하나의 텍스트로 삼아 여기에 영화가 필요로 하는 숱한 예술적, 기술적 독창성을 발휘해야 하는 고난도 장르다. 그러니 영화의 시대일수록 그 텍스트를 이루는 문학이 중요하다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는 게 좋다. 똑같은 주장을 오스카 와일드는 비평가와 소설의 관계에 대해서 펼쳤었다. 소설을 텍스트 삼아 이야기한다고 해서 비평이 소설에 비해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2년 전에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가서 느낀 것은 한국 문학이 아직 고립된 예술의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황지우씨가 던진 말이 있다. 그곳 유럽에서는 고은도 황석영도 아직 신인이나 다름없는 무명작가일 뿐이라던. 이 두 문학인은 유럽에서 그래도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는 분들이다.

번역될 수 없는 까다로운 미학
물론 몇 년 사이에 문학도 ‘한국’ 문학이라는 고유명사 표지로 만족하는 단계는 확실히 뛰어넘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의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인지도나 인식 수준은 미약한 편이다. 아마 이청준이라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말보다 전도연씨가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밀양>의 원작자라고 소개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당연히 언어 때문이다. 문학에서 언어 문제는 근본적이다. 한국어라는 말, 한글이라는 문자의 고립성이 한국 문학을 왜소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면이 있다. 세계인들은 한국어로 된 소설에 대해서는 존재조차 알지 못하다 그것이 원작이 되어 영화라는 도상적 기호의 맥락 속에서 새롭게 제시되어 ‘보편화되면’ 그때서야 기립박수를 치게 된다.

이청준 문학만큼 이러한 아이러니를 크게 보여주는 작가도 드물다. 최근에 들어와선 문체가 이완된 감도 없지 않지만 이청준씨는 한국어 문장의 아름다움을 고양시켜 보여준 작가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1993)로 옮겨진 그의 연작들,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등은 한국어 문장의 운율미, 리듬감을 충만하게 실현한 것들이다. 이 언어적 요소는 마치 시가 완전하게 번역될 수 없는 것처럼 영화로도, 외국어로도 번역되기 어렵다. 여기에 흔히 한(恨)으로 표상되는 한국적인 정서들이나 문화적 전통들, 고전적 예술과 민속의 세계 같은 것들도 외국인들이 이해한다고 해야 오리엔탈리즘의 수준에서 벗어나기 힘든 측면이 없지 않다. 이청준 문학은 번역될 수 없는 미학적 특질들을 함축하고 있는 까다로운 문학이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원래 영화 <서편제>의 원작은 소설 <서편제> 한 편이 아니라 앞에서 열거한 세 개의 단편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각기 따로 떨어진 작품들이 아니라 <새와 나무> <다시 태어나는 말>이라는 제목의 작품들까지 합해서 모두 다섯 편의 연작으로 꾸며진 연작소설집 <남도사람>(1988)의 일부를 이룬 것들이었다. 임권택 감독은 이 가운데 영화로 ‘번역’하기 쉬운, 다시 말해 자신의 취향에 맞게 가감하기 쉬운 세 편만을 ‘적발’해서 <서편제>라는 화제작을 탄생시켰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보면 이 <남도사람>은 이청준 문학 쪽에서 보면 <언어 사회학 서설>(1977)이라는 또 다른 연작창작집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도 영화가 된 쪽은 <남도사람> 쪽이지 <언어사회학 서설> 쪽이 아니었던 까닭은 아무래도 <남도사람>이 드라마타이즈(dramatize)하기 쉬운 요소들을 다량으로 함유하고 있었던 데 있다.



인간의 노래이자 생활의 노래
이런 사정은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도 예외가 없다. 그 역시 <벌레 이야기>에 상당한 ‘작가적’ 삭감과 첨가를 가했는데 이것은 물론 영화감독의 창조적 권한 사항이다. 아무튼 <벌레 이야기>는 어떤 ‘희생’을 거쳐 영화라는 새로운 창조의 영역에 수용된 것이다.

여기서 한번 제기해볼 만한 문제가 있다.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이청준씨의 소설들만이 이토록 빈번하게 영화화되는 것일까? 김수용 감독의 <병신과 머저리>, 정진우 감독의 <석화촌>,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 이장호 감독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축제> <천년학>, 그리고 이창동의 <밀양>까지. 우리는 작가 이청준의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상당히 긴 목록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이청준 문학이 가진 보편적, 공통적 사상과 감정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옛 작가 이효석은 <화분>(1939)이라는 장편소설에서 하얼빈으로 떠나는 피아니스트 영훈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는 두 개의 웅대한 곡을 작곡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탄생, 싸움, 운명, 죽음”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노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름다운 것, 사랑, 행복, 잔치, 고독, 슬픔, 사상” 등으로 이루어진 ‘생활의 노래’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주제들을 “전 인류의 것” “동양의 것이며 동시에 구라파의 것이요, 구라파의 것이며 동시에 동양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가장 보편적이고 타당한 인류의 감정”에 호소하려고 한다.

이청준 문학이 바로 그렇다. 그의 문학에는 한국적인 표지를 붙여 만족할 수 없고 충당할 수 없는 인류 보편적 가치로 통하는 사상과 감정이 숨쉬고 있음이 인정된다. 우리는 이미 <서편제>나 <축제> 같은 작품에서 이것을 확인한 셈 아니던가?

<밀양>의 원작이 된 <벌레 이야기>는 분량으로 보면 크지 않은 작품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생명과 죽음, 용서나 종교의 의미 같은 근본적인 문제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깊은 작가적 역량이 투여되어 있다.

과연 종교적 믿음이 아들을 잃어버린 엄마의 고통을 거두어들일 수 있을까? 종교를 가진 사람들, 특히 기독교에 심취한 사람들은 단박에는 아닐지라도 이것을 수긍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묻는다. 종교라는 것이 과연 삶의 일회적(一回的) ‘본질’에서 오는 인간의 비애를 가라앉혀줄 수 있는가? 또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실’이 가져다주는 재생의 힘이 될 수 있는가?

기독교적 일원론의 견지에서 보면 삶은 신에게 귀의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신의 의지를 따라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탐구하려는 노예처럼 자비를 갈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된 종교적 세계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 죽음을 당한 아이의 엄마를 향해 신의 은총을 빌면서 사형을 받아들인 유괴범과 고통 속에서 신을 잃어버린 아이 엄마의 비극적인 ‘대결’은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다.

보편과 공통을 향해 비약하다
실로 인간은 태어나 성장하여 사랑하고 죽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청준 문학은 이 근본적인 주제를 인간사 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변주해나간다. 우리의 영화감독들은 비상한 사람들답게 이렇게 보편과 영원으로 통하는 이청준 문학의 가치를 간파한 것이리라.

이청준 문학은 드라마타이즈됨으로써 한국어와 한글이라는 언어문자 체계의 고립적 한계에서 벗어나 영어로 번역되지 않고도 세계에 널리 알려질 수 있는 ‘문학’이 된다. 동시에 언어적 숨결의 독특한 가치는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을 아쉬워만 하지는 않기로 한다. 한국 문학에서도 영화처럼 보편과 공통을 향한 비약이 오래전에 이미 시작되었고 진전되고 있기 때문이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07. 0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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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26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은데로 임하소서 한권밖에 안 읽었지만...
인상깊었습니다. 요즘 소설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이었어요.

로쟈 2007-06-2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배로는 아마 60년대 작가군에 들어가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