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문학동네 여름호에 젊은 작가들의 좌담이 실려 눈길을 끄는데, 컬처뉴스에서 리뷰기사를 옮겨온다. 한국문학의 위기 담론을 엄살로 치부하는 태도에서 '젊은 작가들'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다. 객관적 사태와 주관적 결단의 문제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보지만...

컬처뉴스(07. 06. 05) 한국문학 위기? 엄살 떨지 마세요
한국문학은 ‘위기’만 수년째다. 도대체 위기의 끝은 어디쯤에 있는 것인지, 그 끝이 오기는 올 것인지 위기설은 반복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위기’와 ‘종언’의 한 복판에서 작가로 태어난 이들은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번 여름호 『문학동네』(통권51호) 의 좌담 ‘젊은 작가들이 말하는 우리시대의 문학’에 초청된 작가(이기호, 정이현, 박민규, 김애란)들은 이러한 ‘문학의 위기설’에 대해 모두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히려 “한국문학은 번성한 적도 없었고, 이제 진화해나가는 단계”(박민규)이니 “엄살떨지 마세요”(이기호)라고 말한다.
좌담의 사회자로 나선 신형철 평론가가 첫 번째 질문으로 소위 ‘한국소설의 최첨단’(『문학동네』인용)이라 할 만한 네 명의 작가에게 “시장의 위기를 포함해 여러 층위에서 한국소설의 위기가 제기되고 있는데, 도대체 위기라는 것을 실감하고 계시기는 합니까?”라고 위기설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이기호 작가는 “보기에 따라서는 작가들의 엄살인 것 같아요. 뻔히 알고 들어왔고, 누가 작가가 돼서 우리 생계를 책임져라 하면서 등 떠미는 사람도 없었고, 다들 뻔히 알고 들어온 건데 우리가 뭐……다들 살 만하던데……”라며 “근데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던 가요?”라고 오히려 반문했다.
박민규 작가는 “‘한국소설의 위기’하니까 마치 ‘로마제국의 위기’ 같은 느낌인데요. 개폼 잡지 마세요”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반만년 역사 하면서 마치 반만년 동안 소설을 써온 것처럼 위기 하는데 실은 이제 우리 고작 육십년 쓴 거예요. 우리 백년은 더 써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또 최근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문학과 관련해 “지금 일본소설이 그만큼 많이 팔리는 이유는 일본문학이 그만큼 앞서 있기 때문”이라며 “민족의 우수성 그딴 걸 논하는 게 아니고 그 사람들 우리보다 훨씬 오랫동안 써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계화에 이 정도 출혈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면 차라리 돌고래에게 문단을 맡기세요”라고 말한다.
정이현 작가는 “문학의 위기를 진달할 때 다양성의 측면을 살펴봐야 한다”고 운을 뗐다. 그는 “지금 우리 문학이 다양하지 않거나 작가들이 다들 똑같은 얘기만 쓰고 있다면 분명 위기라고 해도 되지만 지금 우리 문단은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여러 작가들이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활발하게 작업을 하고 있고,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는 모색을 하고 있어요”라며 오히려 ‘한국문학의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김애란 작가도 일본문학과 관련해 “일본문학은 이상하게 한국이라는 대상의 앞면에 생기는 그림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걸 비추는 태양이 근대든 아니든, 어쨌든 우리가 밟고 있는 역사적인 과정을 반 박자, 한 박자 먼저 겪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가 어떤 감수성을 요구할 때, 그것을 먼저 얘기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단순한 한일 구분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이 있고, 한국에서도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위기라는 말에 상품성도 큰 기준이 되는 것 같은데 다른 태도까지 혐의를 둔다면 적어도 진정성에 대해서는 동료, 선배 작가들이 떳떳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야기는 ‘한국문학의 위기’에서 ‘근대문학의 위기’를 넘어 자연스럽게 ‘2000년대 문학’으로 이어졌다. 신형철 평론가는 “근대문학의 종언과 관련해 주로 법정에 끌려나오는 것은 소위 ‘2000년대 문학’인데, 2000년대 문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박민규는 “앞서 ‘한국문학’이란 허상에 대해 얘기했던 것처럼 ‘2000년대 문학’ 역시 하나의 허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논쟁은 좋은 것이고, 발전하는 것이고, 또 그런 역할을 하는 분들이 평론가이고, 아주 중요한 거라 생각하지만 창작자로서 전혀 관심 없다”고 말하며 “평론과 창작은 전혀 다른 분야, 다른 세계”라는 결론을 내렸다.
정이현은 “지금 젊은 작가들이란 고작 책 두어 권 냈을 뿐이며 아직도 계속 변화하고 있고 자기 세계를 찾아가는 길 위에 있는 이들”이라며 “논쟁 자체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작가와 작품에 대해 조금만 더 선입견 없이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00년대 작가군에서 주목받고 있는 김애란은 “그런 말(세대구분)들이 작가에게 특징을 부여해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정짓게 만들기도 한다”며 “개인적인 자질보다 환경 자체가 난쟁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작가들의 논의에 대해 신형철 평론가는 “아까 박민규 씨가 말한 것처럼 작가의 일이 있고 비평가의 일이 있는 건데, 비평가들은 동일하게 꾸준히 지속되는 어떤 것보다는 작지만 차이가 발생하는 부분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면서 “그래야 새로운 담론이 가능해지고 새로운 의제가 생산된다”고 말했다.
또 평론가들의 문단의 ‘지도(地圖) 그리기’와 관련해 “어떤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 지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판을 전체적으로 봐야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물론 전체를 보는 눈과 개별 작가를 섬세하게 읽어내는 눈을 함께 떠야 하는 건데 후자는 생략하고 전자에만 몰두하니 더러 작가들의 비판을 받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번 좌담에는 딱히 결론이랄 것이 없었다. 평단에서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한국문학’의 ‘지금’에 대해 작가들은 오히려 ‘긍정’하고 있었고, 자신들을 포함해 그 가능성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박민규는 그 기대를 이렇게 말했다.
“인류의 역사를 길게 본다면 결국 문학은 언젠가 사라질 거예요. 인간은 분명 어떤 필요에 의해 글자를 만들고 문학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문학이 인간에게 있어 진화의 도구라고 생각해요. 문학이 사라진다는 건, 그건 어마어마하게 황홀한 일이죠. 왜? 그건 문학이 필요 없어진 거니깐……. 문학은 차차 풍성해지고 그럼으로써 차차 간편해지고, 흡수될 것입니다. 인간에게, 말이죠.” (위지혜 기자)
07. 06. 06.

P.S. 좌담 내용을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것으로 알려진 작가 박민규씨가 '오늘의 토크왕'이 될 만한 멘트들을 날린 듯하다. '상품'으로 재작년 <카스테라> 출간 즈음에 나온 인물 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딱 이맘때 나온 기사이군.
한겨레(05. 06. 09) 박민규 전복적 상상력의 문제작가
박민규는 ‘문제 작가’다. 그의 장편소설 <핑퐁>을 연재하기 시작한 계간지 <창작과 비평> 여름호의 광고는 그를 그렇게 규정한다. 광고인 만큼 별도의 설명은 없었지만, 이즈음의 한국 소설에 어느 정도 익숙한 독자라면 그런 규정에 특별히 토를 달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문제 작가’이기 때문이다.
등장부터가 문제적이었다. 2003년 여름, 그는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에 경장편 <지구영웅전설>이, 한겨레문학상에 장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한꺼번에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등단했다. 미국 대중문화의 영웅들이 대거 출현하는 <지구영웅전설>이나, ‘패배의 화신’과도 같았던 초창기 한국 프로야구팀 삼미 슈퍼스타즈가 회고되는 <…마지막 팬클럽>이나 발칙한 발상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대번에 21세기를 여는 한국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주목받았다.
소설과는 무관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긴 생머리에 검은 선글라스가 ‘트레이드 마크’인 그의 외양 역시 눈길을 끌었다. 90년대 중반 귀고리를 한 차림으로 문단에 ‘충격’을 주었던 김영하의 경우를 떠오르게도 했다. 게다가 그는 밴드의 로커로 활동하는 한편 이종격투기와 프로레슬링 따위를 즐긴다고도 알려졌다.
2004년 여름호 계간 <대산문화>에 그는 <좃까라 마이싱이다!>라는 글을 발표했다. 에세이였다. 같은 잡지 봄호에서 선배 문인들이 그 또래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 대한 우려 섞인 조언을 했던 데 대한 ‘대답’이었다. 도무지 선배에 대한 예의라고는 모르는 듯 무엄한 제목부터가 작지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본문 역시 결코 예의바르다고는 하기 어려웠으니, 가령 이러했다. 잡지 편집자가 제시한 네 개의 질문 중 뒤의 두 질문에 대해 답한 부분이다.
“③독자나 평론가들이 자신의 소설에 대해 오해, 오독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답: 누구에게나, 꼴린 대로 생각할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④자신을 비롯한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 대한 선배 문인들의 평가(<대산문화> 2004년 봄호)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답: 수고하셨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나도, 열심히 하겠다.”
박민규의 이런 거침없는 발언은 작가로서 나름의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터이다. 같은 글에서 그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시간이, 없다”고도 밝혔다. 아닌 게 아니라 등단 이후 그는 부지런히 쓰고 또 썼다. 일단의 소설가와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한 어떤 조사에서는 그의 단편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가 지난해의 최고 소설로 뽑히기도 했다. 소설집 <카스테라>(문학동네)는 2년 전의 화려한 등단 이후 박민규가 내놓는 첫 책이다.
책에는 10개의 단편이 묶였다. 지미 헨드릭스의 데뷔 앨범 <너 해봤니?(Are You Experienced?)>와 같은 열 개의 트랙으로 구성되었노라고 그는 설명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박민규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백수거나 ‘알바’거나 인턴 사원이거나 대학생처럼 유예된 신분의 사람들이다. 유예되었다는 건 다른 말로 경계선상에 놓였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들은 그러니까 순수와 미경험의 세계에서 경험과 타락의 세계로 옮겨 가는 도정에 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편의점 점원과 지하철 푸시맨 같은 아르바이트에 종사해야 하는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고교생, 아버지의 부도 여파로 열악한 고시원에 기거하는 <갑을고시원 체류기>의 대학생, 학교 근처 원룸에서 요란한 소음을 내는 냉장고와 ‘동거’해야 했던 <카스테라>의 대학생, 전문대를 졸업한 뒤 일흔세 곳에 이력서를 넣었어도 끝내 취직에 실패한 뒤 한적한 유원지를 임시 직장으로 택한 <아, 하세요 펠리컨>의 주인공, ‘인턴’ 사원의 꼬리표를 떼기 위해서라면 동성인 직장 상사의 성 노리개 노릇도 마다 않는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의 주인공 등이 한결같이 그러하다.
안정된 직장과 충분한 보수를 확보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젊은이들의 면모는 ‘청년실업’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당대 현실의 정직한 반영으로 볼 수 있겠다. 그들이 순수의 세계에서 경험의 세계로 입문하는 과정은 세계의 냉혹성과 자신의 열악한 상황에 대한 쓰라린 확인을 수반한다. “나이 마흔다섯에 시간당 삼천오백원”(72쪽)이라는 ‘아버지의 산수’를 확인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주인공은 “이상하게 그날 이후(…)조용한 소년이 되어버렸다.”(72쪽) 비슷한 상황에서 <갑을고시원 체류기>의 대학생 역시 “갑자기 어른이 된 느낌이었고, 왠지 이 세계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281쪽)
그들이 알게 된 세계란 어떤 것이었나. 한마디로 “세상은 엉망이다.”(47쪽) “인간이 너구리로 변하는 세상”(52쪽)이니 말 다 한 것 아닌가. 너구리로 변하다니? 이런 말이다: 너구리가 주인공인 게임이 있다. ‘스테이지 23’까지는 문제 없이 나아간다. 바로 그곳, 스테이지 23에서 막힌다. 대부분의 우리에게 그곳에서 더 이상 나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스테이지 23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자들은 죄다 너구리가 되어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니 ‘스테이지 23’이야말로 “이 세상의 실제 이름”(49쪽)이라는 말이다. 스테이지 23으로서의 세상의 본질을 알게 된 인턴 사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사회란 무서운 것이구나.”(54쪽) 푸시맨 소년은 같은 상황을 이렇게도 표현한다: “세상은 하나의 열차다. 한 량의 정원은 180명, 그러나 실은 400명이 타야만 한다”(84쪽).
순수에서 경험의 문턱을 넘어선 입사자들은 비로소 세상의 무서운 속성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곳에서…왜 고작 이 따위로 사는 걸까”(87쪽) 또는 “왜, 이 열차는/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가”(91쪽)와 같은 회의와 반성의 순간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이 모종의 적극적 실천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는 데에 박민규 소설의 문제적 성격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그것은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아니었으며, 누구를 원망할 성질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72쪽)고 짐짓 ‘쿨한’ 태도를 취하며, “열심히 사는 거 외엔 달리 방법이 없는 게 아닌가”(88쪽) 체념하고 물러 앉는다. 요는 “세계의 거대한 톱니”(177쪽)를 벗어난 ‘바깥’이란 없다는 것이다.
박민규 소설에 자주 출몰하는 외계인과 우주선, 괴물 같은 동물들의 환상은 그가 세계를 상대로 한 싸움을 주관적 회피와 위안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왕년의 ‘운동권’ 출신으로 지금은 농촌 공동체 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코리언 스텐더즈>(‘스탠더즈’가 맞는 표기 아닐까?)의 주인공 ‘기하 형’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인과 유에프오의 습격 때문에 농사를 망치며, <대왕오징어의 기습>에는 “모두가 무방비인 채 그들의 습격을 받아야 했다”(232쪽)는 표현이 나온다. 유에프오와 대왕오징어를 우리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것은 혹시 ‘패배주의’가 아닐까.
박민규 소설의 문제적 성격을 이렇게 내용의 측면에 국한해서 설명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대부분의 좋은 소설들이 그러하듯 박민규의 소설에서도 형식적 특성이 내용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방법적 갱신을 향한 모색과 시도는 박민규 소설에서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낳는다(*그것이 '성공적'인가에 대해서 나는 유보적이다). 우선, 그는 문단별로 한 행씩을 띄우는 인터넷 글쓰기 방식을 일관되게 사용한다. 때로는 한 문장이나 구절, 하나의 단어가 독립적으로 하나의 ‘연(聯)’을 이루기도 한다. 실제로 박민규 소설의 어떤 대목은 내용에서나 형식에서나 1980년대 장정일의 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22쪽, 34~5쪽, 304쪽 등). 인터넷 카페의 ‘펌글’이나 잡다한 정보를 통째로 들어다 놓은 듯한 부분도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런 형식적 특성은 가독성을 높인다는 점에서는 일단 긍정적이다. 컴퓨터 모니터 상의 글 읽기에 익숙한 젊은 독자들에게 박민규 소설은 종이 텍스트라는 이질감을 최소화하는 효과를 지닌다.
반면, 수시로 한 행씩을 띄우고 쉼표를 박아 넣는 과정에 작동하는 단절과 비약의 기제는 논리적이며 유기적인 서사를 불가능케 한다는 문제점을 낳는다. 박민규 소설의 주인공들이 상황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환상 속으로 도피하곤 하는 버릇이 이런 형식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일자리보다 보수가 높은 푸시맨 아르바이트를 소개 받은 소년이 “내 주변에 그런 고부가가치 산업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제의를 받은 사실만으로도, 갑자기 확 고도산업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한 느낌이었다”(71쪽)고 감격한다거나 유원지에서 하릴없는 청춘의 나날을 보내는 젊은이가 “간혹 외로운 밤이면, 심야전기처럼 저렴한 내 청춘이 흐린 전구처럼 못내 밤을 밝히기도 했다”(129쪽)고 토로할 때 박민규의 유머러스한 문장은 짙은 페이소스를 수반하며 독자의 가슴에 아련히 스며든다.
그러나 작가가 즐겨 구사하는 ‘곁가지의 글쓰기’와 몽상의 자가발전은 때로 통제불능의 상태로 빠져들면서 의미 없는 말의 유희로 떨어지기도 한다. ‘뭐랄까’라는 허두가 그의 구어투 글쓰기를 특징짓는 요소라면, ‘모쪼록’이라는 부사는 아무래도 문맥에 안 어울리게 쓰인 게 아닌가 싶다(69쪽, 184쪽, 263쪽, 287쪽 등). “그리고 이 년 전의 일이, 즉 LA의 8번가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253쪽)거나 “뭔가 몸이 붕 뜬 느낌이었고, 나는 정신없이 매트를 향해 머리를 추락했다”(260쪽)와 같은 비문과 어색한 문장도 정비가 필요해 보인다.
박민규 소설에 대한 기대 8, 불만 2의 이 글을 그가 읽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짐작되지 않는 건 아니다: 수고하셨다. 그리고, 좃까라 마이싱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한국문학의 현실에 대한 엄살과 푸념의 담론들에 대해서 '젊은' 작가들은 '좃까라 마이싱이다!'라고 한방 먹일 수 있다. 대체로 '백수들'에겐 그럴 권리가 충분하며 그마저 없다면 세상은 더 '좃같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