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앙에서 이샤야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애플북스, 2007)에 대한 리뷰 하나를 옮겨놓는다. 나는 책이 나오자 마자 원서와 함께 대조해 가면 절반쯤 읽었더랬다. 그 이상은 다른 일들에 치어 잠시 미뤄졌는데, 번역돼 나온 것이 반갑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좀 무성의한 대목들이 자주 눈에 띄는 번역서이다. 항상 사정권 안에 있던 책이 당장 눈에 띄지 않아서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지적하기로 한다. 미리 말해두자면,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하여'란 부제대로 책은 일단 톨스토이와 그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고급스런 에세이로 읽혀야 한다. 무슨 경영서나 처세서로 포장한 출판사측의 '기획'에 대해서는 거듭 유감을 표하고 싶다(그런다고 책이 더 팔리지도 않는다). 아래 리뷰 또한 그런 지적을 포함하고 있다.    

레디앙(07. 06. 09) "톨스토이, 고슴도치라 생각한 여우"

인간은 크게 보면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에 관련시키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이런 시스템은 모든 것을 조직시키는 하나의 보편 원리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시스템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생각하며 느낀다. 다른 한 부류는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이 목표들은 흔히 서로 관계가 없으며 때로는 모순되기도 한다. 물론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이유에서 사실적인 관계를 갖지만 도덕적이고 미학적 원리에 근거한 관계는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행동지향적이며, 생각의 방향을 좁혀가기보다는 확산시키는 경향을 띤다.”(p.7~8)

이사야 벌린, 우리에게는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로 잘 알려진 저자는 전자를 고슴도치형 인간, 후자를 여우형 인간이라고 명명한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 단테, 파스칼, 헤겔,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입센, 프루스트가 고슴도치형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몽테뉴, 에라스무스, 몰리에르, 괴테, 푸슈킨, 발자크, 조이스는 여우형이다. 그렇다면 톨스토이는 어느 쪽에 속할 것인가? 이사야 벌린은 이 질문으로 『고슴도치와 여우』를 시작한다. 곧 “톨스토이가 일원론자인지 다원론자인지, 결국 톨스토이가 하나의 비전을 추구했는지 다양한 비전을 추구했는지”(p.11)를 묻는 것이다.

이사야 벌린은 톨스토이의 작품 중 가장 논란이 많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과 평화』를 텍스트로 삼는다. 『전쟁과 평화』는 문학적 작품성은 높지만 작가의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언설이 결정적인 흠으로 지적되는 작품이다. 곧 톨스토이의 장점과 단점이 다 담겨져 있는 셈이다. “젊은 지식인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특징답게 설익은 지식으로 가르치려는 (그 결과로 예술적 가치를 손상시키는) 톨스토이의 성향 탓…중략…일탈의 전형적인 예” “톨스토이가 훌륭한 사상가라기보다 훌륭한 작가라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이다” 등등.(p.19) 하지만 이사야 벌린은 접근을 조금 달리한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왜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달리 말한다면 『전쟁과 평화』를 톨스토이의 진정한 작품으로 말하고자 한다. 결론을 줄여 말한다면, 톨스토이는 스스로를 고슴도치라고 믿었던 여우다. 근원적인 질문에 근원적인 대답을 원했지만 그 질문과 대답은 늘 구체적이고도 세부적인 것들 속에서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톨스토이의 모습을 한낱 한계라는 짧은 단어로 규정해 버리면 안 된다. 그것은 자아와 세계에 대한 작가의 정직함이자 성실함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자아와 세계를 묻지 않는 작가가 그 얼마나 많은가?

“톨스토이 식으로 말하면 삶을 만들어가는 진정한 구성 요소인 ‘생각, 지식, 시, 음악, 사랑, 우정, 증오, 열정’을 기록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할까?”(p.45)

그렇다면 톨스토이를 “여우냐 고슴도치냐”라고 묻는 이사야 벌린 자신은 여우일까 고슴도치일까? 책을 번역한 강주헌은 “전통적인 자유주의 지지자였으며, 다원주의를 신봉했다. 사회를 조직하는 문제에 단 하나의 해결책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라는 벌린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며 “여우형에 가깝다”라고 평한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이 책 『고슴도치와 여우』는 어떤 유형의 책일까? 책을 장식하고 있는 붉은 색 띠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방어형의 고슴도치 경영과 공격형인 여우 경영이 적절히 조화되어야 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말씀이시다. 이건희의 멘트가 등장하니 경제경영서? 띠지 뒤쪽에는 “당신은 여우로 살 것인가 아니면, 고슴도치로 살 것인가? 이 책은 톨스토이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당신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쯤이면 자기계발서가 될 노릇이다.

한마디로 『고슴도치와 여우』는 겉과 속이 다르게 포장된 책이다. 카피문구나 책의 장정과 편집 스타일은 경제경영이나 자기계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띄고 있지만 그 속 내용은 톨스토이라는 대작가의 역사관과 내면을 짧지만 깊이 있게 파헤치고 있는 인문서이기 때문이다. 상술이 본질을 압도하고 있음이다. 형식이 내용을 앞지른다. 그것이 책을 읽는 내내 가시가 되어 찌른다. 자본주의라는 고슴도치가 여우를 찌른다.(김용필/ 텍스트)

07. 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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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인연'을 갖고 있고 강의에서도 자주 다루게 된다. 이번 학기에는 특히나 오랫동안 자세히 읽기를 시도했는데, 그렇다고 아직 연구서 한권 낼 만한 형편은 안되기에(석달 정도의 자유시간이 필요하다) 이런저런 읽을 거리들을 참고자료로 제시하곤 한다. 가장 최근 자료로 참고할 만한 것은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웅진지식하우스, 2006)의 저자 김용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통해서 본 ‘죄’와 ‘벌’의 의미'로 얼마전 한겨레에 2회 걸쳐서 분재됐다. 아마도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의 속편에 포함될 듯하다.

 

한겨레(07. 05. 19) 인간의 경계 뛰어넘은 ‘자만의 죄’ 고발

1849년 12월 22일, 러시아 세묘노프스키 광장에서는 사형이 집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의 특사가 내려 사형 직전의 한 청년이 살아났다. 그는 시베리아에 있는 수용소로 보내져 4년간 혹독한 강제노동을 했다. 간질발작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날들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청년이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자신의 신념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수용소에 갇히기 전, 청년은 무신론적 사회주의자과 어울렸다. 그들과 함께 황제를 모독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생각이 변했다. 왠지 사회개혁을 위해 무릎을 세우고 일어서는 혁명가들보다 쓰러진 자들을 일으키려고 허리를 굽히는 사람들이 더 선하게 여겨졌다. 이성과 과학을 숭배하는 합리적 지식인들보다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바보 같은 민중들이 더 지혜롭게 생각되었다. 그는 그 이유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런데 청년은 소설가였다. 그래서 남은 생애동안 바로 이 문제, 오직 이 문제와 싸우며 글을 썼다. 그 결과 위대한 작가가 되었다. 청년의 이름이 도스토예프스키이고, 바로 그 문제를 다룬 첫 장편소설이 <죄와 벌>이다.

이제부터 ‘죄’와 ‘벌’ 둘로 나누어 살펴볼 이 작품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사는 법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우연히 알게 된 창녀 소냐의 권고를 받아 자수하게 된다는 게 전부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불후의 명작이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심리학자들마저 격찬할 만큼 뛰어나게 인간의 심리를 그려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에게 죄와 벌이 과연 무엇인가를 신학자들마저 경탄할 만큼 심오하게 파헤쳐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우선 죄를 보자.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인이다. 이견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왜 죄인인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은 달랐다. 그리고 이 다른 생각이 이 작품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기 이전부터 이미 죄인이었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인가 보자.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동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심리적 억압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연구가인 모출스키의 주장처럼,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무더운 날씨, 어머니와 여동생마저 돌보지 못하는 가난한 자신의 처지가 분명 그를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을까? 아니다. 더 중요한 동기가 따로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가 나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을 자신이 인류를 위해 봉사하게끔 학비로 사용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와 같이 <비범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법률을 위반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솔로몬과 마호메트, 그리고 나폴레옹을 예로 들어 자기를 정당화했다. 이들이 그랬듯이 새로운 사회와 법률을 위해서는 낡은 것들을 파괴해야만 하는데,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그것이 당연히 허용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는 한 점 죄의식조차 없이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했다. ‘초인사상’으로 일컬어지는 이런 생각을 도스토예프스키는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이상하고 온전치 못한 사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인간이 이런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범죄 이전의 죄’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사실인즉 <죄와 벌>을 썼다.

그는 ‘범죄 이전의 죄’라는 개념을 기독교 종파인 러시아 정교에서 얻었다. <구약 성서>에 서 아담은 뱀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해서 그것을 따먹었다. 그리고 죄인이 되어 낙원에서 쫓겨났다. 원인은 “하나님같이 되리라”였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신처럼 되려고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자만’이라고 부른다. 자만이 곧 ‘범죄 이전의 죄’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진 죄가 바로 이것이다.

<죄와 벌>에서 ‘죄’라는 의미로 사용된 러시아어 ‘prestuplenie’는 본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뜻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단어를 ‘법률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인간이 자신의 경계를 뛰어넘는 경우 그의 죄에는 죄의식이 없다. 그의 이성이 모든 것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이 무참한 죄를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고발하고 또 경고했다. 그런데 돌아보자. 우리가 그로부터 과연 무엇인가 배웠는가를. 20세기 들어 수백만 명을 학살한 독일 나치나 러시아 공산당이 어땠는가를. 그리고 생각해보자. 21세기인 오늘날에는 이처럼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를.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이상하고 온전치 못한 사상”이 없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자.  

한겨레(07. 06. 02) 죽음보다 끔찍한 벌 벗는 길은 희생

<죄와 벌>은 죄보다 벌에 관한 작품이다. 분량만 보아도 그렇다.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모두 7부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죄는 1부에 다 드러난다. 나머지는 모두 지옥 같은 벌에 대한 설명이다. “단테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지옥의 모든 단계를 통과한다. 그런데 이 지옥은 〈신곡〉의 중세적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 모출스키의 말이다. 돌아보자. 죄가 무엇이었는지. 그래야 벌을 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죄는 자만이었다. 그것은 원초적 죄로서 모든 악행과 범죄가 여기에서 나온다. 기독교적 사변이다. 그럼 벌은 무엇인가? <구약성서>에서 신은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벌로 “정녕 죽으리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막상 선악과를 따먹자 죽이지 않았다. 추방했다. 그럼 성서는 처음부터 신의 거짓말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학자들의 생각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생명이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죽음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빛이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어둠에 속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진리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거짓에 서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선함이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악함에 머무는 것이다. 신은 이러한 벌들로 자신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켰다. 이것이 성서에 나오는,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던 벌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총 6부에 걸쳐 고발한 그 벌이다. 모출스키가 <신곡>의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는 그 지옥 체험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받은 바로 그 벌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벌을 살인이라는 범죄로, 그 범죄에서 오는 심리적 어둠으로, 그 범죄를 숨기려는 거짓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악행을 차례로 체험함으로써 받았다. 그것이 얼마나 무겁고 괴로운지를,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지옥 체험인지를, 오직 그것만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수백 쪽에 걸쳐 묘사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수를 한 것은 결코 양심의 가책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괴로워한 것은 단지 악을 체험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 때문이었다.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 때문이었다. 이 벌의 성격을 예심판사 포르피리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도망가면 어쩌죠?”라고 묻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넨 도망가지 않을 거야. (…) 자네가 도망간다 해도 아마 스스로 되돌아올걸? 자넨 우리 없이 지낼 수 없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단지 이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차라리 자수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에는 같은 벌을 받는 인물이 하나 더 등장한다. 스비드리가일로프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다른 악의 짝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사회주의 이상을 내세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죄를 지었다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유주의 이상을 내세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죄를 짓는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기 부인을 살해하고, 하인을 학대하여 자살하게 하고, 14살 어린 소녀를 능욕하여 자살하게 했다. 그의 범죄는 개인적인 정욕과 쾌락에서 나왔다. 범죄 동기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와 다르지만, 원인은 같다. 그에게도 욕망과 쾌락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만이 있었다.

결국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하다. 개인적 이익과 욕망을 위해서든, 사회적 이익과 개혁을 위해서든,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만이 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지옥보다 더 끔찍한 지옥에 갇힌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라스콜리니코프는 차라리 수용소에 가려고 자수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권총으로 제 머리를 쏘았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미국에 가기 위해서야”였다.

그렇다면 이 죄와 그 벌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는가? 있다. 의외로 간단하다. 자만이 원인이면 겸손이 해법이다. 날 세운 이성이 원인이면 바보 같은 신앙이 해법이다. 타인 희생이 원인이면 자기 희생이 해법이다. 창녀 소냐가 그 일을 맡았다. 그녀는 비참하게 살아가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며 자기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인간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를 ‘유로지비’라고 불렀다. 러시아 정교에서 ‘성스러운 바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죽은 나무에 수년 동안 물을 길어다 부어 마침내 어느 날 푸른 잎을 피워낸 어떤 수도사를 일컬은 말이다. 눈뜬 이기주의와 눈 먼 합리주의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사회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성스러운 자유를 가졌던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소냐가 바로 그다. 소냐는 이 방법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구했다.

그럼 생각해보자. 오늘을 사는 라스콜리니코프와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누군가를. 그리고 우리가 속한 시대와 사회를 구할 진정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보자.(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07. 06. 09.

P.S. '유로지비'는 '성스러운 바보'를 뜻하지만 작품에서는 문맥상 '광신도', 곧 '신에 미친 여자'란 뜻도 내포한다.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를 대립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형식논리적이며 이 작품의 역동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감이 있다. '날 세운 이성'뿐만 아니라 '바보 같은 신앙' 또한 인류사에서 많은 죄의 근원이지 않았던가. 이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물론 '새로운 이야기'에 속하는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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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그 2007-06-10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처럼 주 독자층을 청소년으로 생각하고 쓴 글이라 구도가 좀 더 단순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자"도 같은 맥락일 것 같고요.^^

로쟈 2007-06-11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층에 대한 고려도 있겠도 분량 제한도 있겠지요. 한데, 모든 해설이 갖는 함정이지만 작품읽기를 대체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어서요...
 

'작가와 문학사이' 21번째 작가는 사랑 듬뿍 받는 소설가 김애란씨이다. 심진경 평론가에게 바톤을 이어받은 젊은 평론가 차미령씨가 공개적으로 표나는 애정고백을 바치고 있다. 혹은 작업을 걸고 있다. '독자를 세번 매료시키는 힘'이라... 넉다운시킨다는 얘기 아닌가?..  뉴스메이커에 실린 가장 최근의 인터뷰 기사도 후미에 붙여놓는다. 평론가의 애정고백이 영 쑥쓰럽다고 하므로.  

경향신문(07. 06. 09) [작가와 문학사이](21) 김애란-독자를 세번 매료시키는 힘

한 소설가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 양반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작업을 거는구나.’(이기호)

또 한 비평가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이 작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가능한가?”(신형철)

2003년 등단한 작가는 2005년 ‘최연소’라는 타이틀과 함께 유수의 문학상(한국일보 문학상)의 영예를 누렸다. 작금의 한국소설을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남녀노소를 막론한 이 일치단결이 그렇고 그런 안간힘처럼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넘겨짚은 분들은 조만간 출간될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을 꼭 읽어 보기 바란다. 이러한 반응이 예사로 부풀려진 것이 아님을 단박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범한 작가는 누구인가. 김애란이다. 1980년생이다.

현재 김애란은 2000년대 젊은 소설의 대표명사다. 하지만 동년배의 소설들과는 확실히 다르고, 그래서 더 눈에 띈다. 최근 1, 2년 사이 데뷔한 문단의 최신예들은 이상하고 신기하고 난해한 이야기들을 창안하는 데 몰두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김애란은 누구나 겪었을 법한 범속한 일상의 사건들로부터 누구나 쉽사리 포착할 수 없는 그 이면의 진실들을 끌어내서 기어이 독자가 무릎을 치게끔 만든다.

김애란은 세번 독자를 매료시킨다. 한번은 그 활달한 상상력에, 한번은 재치 넘치는 언어감각에, 또 한번은 세상살이를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시선에. 이 세층위가 한데 엉기며 시너지 효과를 빚어내는 것이 김애란 소설이다. 그중 세번째 층위가 유난하다. 그 시선이 비루한 동시에 숭고한 우리네 삶을 다시금 곱씹게 한다.



작가의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에서는 기원에의 탐색, 서울 변두리 자취 남녀들의 삶,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적 탐구가 유머와 페이소스를 등에 업고 촘촘히 펼쳐진다. 각각을 대표하는 소설의 제목을 따와 작품집의 면면을 간략히 스케치해 본다. 불꽃놀이는 자기 생명을 기획하고 재연하는 개체의 첫번째 시나리오(‘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이고, 아무도 노크하지 않는 집은 단절되고 고립된 현대인의 거처(‘노크하지 않는집’)이며, 종이 물고기는 현실의 수면 아래를 찢어질 듯 힘겹게 유영하는 글쓰기의 상징(‘종이 물고기’)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가. 개인의 서사, 개인의 윤리다. 마찬가지로 제목을 빌린다. 우리는 각기 우리 삶의 ‘영원한 화자’다.

두루 환영받은 첫 창작집 이후, 이즈음 김애란 소설은 더 몸을 낮추고 더 낮은 자리로 향하고 있다. 편의점과 원룸은 애당초 댄디들의 세련된 일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근래 발표한 소설들의 공간은 거기서 다시 여인숙(‘성탄특선’)과 반지하방(‘도도한 생활’)으로 옮아간다. 제목부터가 아이러니다. 지상의 방 한칸마저 마땅치 않은 청춘남녀들에게 성탄절은 ‘역병’이나 다름없고, 도도하기는커녕 비애가 뼈아프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그곳에서 김애란의 인물들이 이제 누군가와 맞닥뜨리고 있는 까닭이다. 그 누군가는 동남아시아 출신 외다리청년이기도 하고, 누르스름하고 고르지 않은 이를 가진 사내이기도 하다. ‘영원한 화자’가 마침내 조우하기 시작한 이 타자들에 대한 인식을,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또 어디까지 밀어붙이는가에 따라 앞으로 김애란 소설의 성패가 갈릴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자리에선가 김애란은 말했다. “다만 이 이야기가 나한테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쓸 뿐이라고. 겸사인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영화감독도 했다. “나쁜 영화는 지구의 종말을 걱정하고, 좋은 영화는 나의 내일을 걱정한다.”(차이밍량) ‘나’에게 절실한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소설만이, 안으로는 질문을 내장하고 바깥으로부터 퍼부어지는 질문 역시 끝내 견뎌낸다. 누구나 주목하고 좋아하는 작가를 주목하고 좋아한다고 말하기란 영 쑥스러운 노릇이다. 그러나 그 염치불구를 무릅쓰게 할 만큼 김애란 소설은 동시대 비평가에게는 설레는 기쁨이자 섬세한 자극이다.(차미령|문학평론가)

뉴스메이커(07. 06. 12) ‘달려라 아비’의 김애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쓸뿐이죠”

“젊으니까 뭔가 다르고 새롭게 써야 한다는 의무감보다는 부러 ‘비스듬히’ 보지 않고 ‘오래, 빤히’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출판계와 저널리즘에 이르는 오늘날 문단의 불문율 중 하나는 ‘김애란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한다. 진보적 리얼리스트들에서부터 전위적 모더니스트들에 이르기까지, 젠 체하는 비평가들에서부터 자유분방한 독자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 문학평론가 신형철(계간 ‘문학동네’ 2006년 가을호)

“최근 문학현장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을 준 신인작가로(…) 박민규와 김애란을 꼽을 수 있다” -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계간 ‘창비’ 2006년 봄호)

소설가 김애란(28)에 대한 극찬은 이뿐만이 아니다. 2005년에는 김애란이 창작집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순원문학상 예심을 통과하지 못했을 때 몇몇 심사위원이 “규정을 바꾸라”며 반기를 들고 나서기도 했다. 김애란은 단편 몇 편만으로도 검증이 끝난 작가라는 게 당시 의견이었다.

1980년생인 소설가 김애란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를 졸업하고, 제1회 대산대학생문학상 소설부문 당선(2003년)을 거쳐, 2005년 11월 단편 ‘달려라, 아비’로 역대 최연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이후 출간한 그녀의 첫 창작집 ‘달려라, 아비’(창비)는 한 달 만에 판매부수 1만 부를 넘기면서 문단은 물론, 새로운 소설에 목마른 독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칭찬만 있는 건 아니다. “김애란 소설의 특징은 개그적 재능이다. 자기 삶을 통일시켜줄 규범이 없는 세대니까, 개그처럼 즉흥과 되풀이가 많은 것이다”(평론가 유종호), “상황 속에서 어떤 말이 태어난 것이 아니고, 말 한마디를 표현하기 위해 상황을 만든다. 장면만 제시하고 지나가는 TV 드라마와 같은 소설이다”(소설가 이청준)가 그것이다.

그러나 문단이든 독자든, 김애란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그녀의 출연에는 ‘한국 소설의 샛별’이라는 평가가 뒤따르고 있다. 질질 끄는 문체와 화려한 수식어, 한 말 또 하고 또 하기를 거듭하는, 지극히 관념적인 기존의 여성 작가들 문장에 질린 독자들에게 김애란의 짧은 호흡, 수미상응의 작법, 군더더기 없는 경쾌한 문장, 세상을 미워하지 않는 쿨한 문장은 신선함과 함께 우리 문단에 대한 기대 수준을 높여 놓았다.

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김애란 작품에서 찾는 ‘소설에의 희망’은 중성(中性)성과 우리 시대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다. 우선 그녀의 인물들은 자신의 성별에 의지하지 않는다.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주어지는 특별한 상황은 없으며, 때문에 슬프거나 노엽거나 좌절하거나 그 처리과정도 중성적이다. 이 중성성이 소설의 명랑성을 만드는 원천이라는 평가다. 이 점이 기존 여성 작가들과의 구별점이기도 하다.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여성보다는 인간에 주력하고자 했다”는 것이 작가의 말이다.

그녀는 많은 작품에서 아버지를 등장시키는데, 봉건사회와 분단시대, 그리고 산업화라는 시대의 질곡 속에서 우리 문학에 등장하는 아버지와는 전혀 딴판이다. ‘달동네 맨 꼭대기에서 오줌 마려운 듯 벌게진 얼굴로, 허겁지겁 달려가다 연탄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장발 휘날리며 콘돔을 사러’ 가는 남자가 김애란 소설 속 ‘아비’의 초상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우리 손자 세대는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던 차에 그 세대의 작가가 쓴 소설이라 반가웠다. 김애란 소설에서 ‘아비’들은 전통적 아버지에 비하면 아버지 같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의 소설에서 젊은이들은 ‘아비’에게 버림받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아비’를 버렸다고 자부하니, 새롭고 재미있다”고 평가했다.

손정수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최근 격주간 ‘기획회의’ 195호에서 “발단부터 결말에 이르는 시간적 과정이 하나의 줄기로 매끈하게 꿰어져 있는 전통적인 단편소설 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소설답지 못한 것으로 비판받을 소지가 있지만 바로 이 점이야말로 김애란의 소설이 기존의 낯익은 소설들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는 뚜렷한 토대”라고 평한다.

한편 김애란은 “지각이 없는 작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글을 쓸 때 나한테 필요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쓸 뿐”이라며 “젊으니까 뭔가 다르고 새롭게 써야 한다는 의무감보다는 부러 ‘비스듬히’ 보지 않고 ‘오래, 빤히’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고 자신의 소설관을 나타냈다.(조득진 기자)

07. 06.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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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출간된 스튜어트 휴즈의 서구 지성사 3부작에 관한 리뷰를 어제 옮겨놓았는데('20세기 서구 지성사의 밑그림') 오늘 학교에 나오다가 잠깐 서점에 들러 3권 <지식인들의 망명>(개마고원, 2007)을 손에 들었다. 1, 2권과는 달리 소장하고 있는 책이 아닌데다가(사실 3권은 기억에도 없던 책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올 무렵엔 이미 절판된 상태가 아니었나 싶다) 3부작 중 개인적으론 가장 흥미를 갖는 시대이기 때문이다(아무래도 가까운 시대에 흥미를 갖게 된다). 게다가 '개역판 역자 후기'를 읽어보니 번역도 다시 손질했고 책의 만듦새도 좋은 편이다.

 

 

 

 

나귀님의 페이퍼에서 봤을 때는 초판이 <지성의 대이동>이었는데, 역자후기를 보니까 <파시즘과 지식인>으로 돼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두번 책을 낸 것인가 해서 도서관 소장도서를 검색해보니 <지성의 대이동>(한울, 1983)과 <파시즘과 지식인: 지성의 대이동, 1930-1965년의 서구사회사상>(한울, 1992)이라고 뜬다. 그러니까 처음 나온 <지성의 대이동>이 '대단히 신통치 않은' 성적으로 일찍 절판된 이후 거의 10년만에 다시 나오면서 한번 '제목 갈이'를 했던 것. 해서, 출판사를 달리하여 이번에 새로 나온 개정판의 제목 <지식인들의 망명>은 세번째 타이틀이 되겠다.  

어제 읽은 경향신문의 리뷰에서도 최근에 나온 <다른 곳을 사유하자>(푸른숲, 2007)와 같이 읽어볼 것을 권유했는데, <지식인들의 망명>의 목차를 보니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이럴 땐 성찬을 앞에 두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는 기분이다). 하지만 책을 통독할 여유는 없기에 서문만 읽어보려다가 저자가 감사를 표하는 이름들에서 또 '걸려들었다'. 또 몇 자 수다를 늘어놓게 된 이유이다(나의 타협안은 경쟁후보였던 '파슨스 vs 밀스'란 페이퍼를 다음으로 연기하는 것이다). 휴즈의 서문을 읽다가 얼핏 떠오른 그 동네의 풍경을 잠시 들여다본다.

<지식인들의 망명>은 <의식과 사회>(1958)과 <막다른 길>(1968)의 후속편으로 1977년에 출간됐는데(10년 터울로 한권씩 낸 셈이군), 서문에서 휴즈는 자신에게 도움을 준 몇 사람의 이름을 들고 있다. "나의 집필 마지막 해에는, 만약 그들이 나의 원고를 읽었더라면 상당히 중요한 지적들을 많이 해주었을 세 명의 인물을 죽음이 앗아가버리고 말았다."(6쪽) 음, 그러니까 '도움을 준' 이들이 아니라 '도움을 줄 뻔했던' 이들이 되겠다. 그 이름들은 리히트하임(1912-1973), 뢰벤슈타인(1891-1973), 그리고 잉게 베르너 노이만 마르쿠제(1913-1972)이다.

 

 

 

 

"그 중 리히트하임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나의 지식을 여러 각도에서 풍요롭게 해준 인물이었으며," 게오르그 리히트하임은 루카치 전문가이기도 한데, 그의 책으로 <루카치>(시공사, 2001) 등 여러 권이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베버 서클의 마지막 중요인물이었던 뢰벤슈타인은 당시 앰허스트 대학 4학년이던 나를 처음으로 독일 사회사상계로 안내해준 사람이었다." 이 뢰벤슈타인의 책으론 <현대헌법론>(교문사, 1975), <비교헌법론>(교육과학사, 1991)이 번역돼 있다. 법학자 칼 뢰벤슈타인이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또한 이 연구의 중요 등장인물들 중의 한 사람(프란츠 노이만)의 미망인이자 또 다른 한 사람(허버트 마르쿠제)의 부인이기도 한 잉게 베르너 노이만 마르쿠제는 내가 그녀의 신념의 생명력을 충분히 표현하는 데에 그녀와 나의 우정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1937년에 찍은 한 사진을 보니 세 커플이 등장하는데, 왼쪽부터 프란츠/잉게 노이만, 골드/레오 뢰벤탈(리오 로웬달), 허버트/소피 마르쿠제 부부이다. 잉게 노이만(왼쪽에서 두번째)이 미망인이 되고 나서 허버트 마르쿠제(오른쪽에서 두번째) 재혼했던 모양이다. 

찾아보니, 프란츠 노이만(1900-1954)은 레오 뢰벤탈(1900-1993), 허버트 마르쿠제(1898-1979)와 함께 망명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으로서 역시나 파시즘 분석으로 잘 알려진 정치학자인데 1954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단행본 저작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듯하며 <정치이론과 이데올로기 입문>(돌베개, 1984)이 공저로 나와 있다. 그리고 프란츠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던 잉게 노이만은 1956년에 마르쿠제와 재혼했다(그녀 또한 <유럽의 전쟁범죄>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참고로, 뢰벤탈(로웬달)의 책으론 <문학과 인간의 이미지>(종로서적, 1983)과 <문학과 인간상>(이화여대출판부, 1984)이 출간됐었다(같은 책의 두 번역서이다).

 

 

 

 

이어지는 휴즈의 감사. "나의 감사하는 마음은 우선, 계속되는 원고를 세심하면서도 항상 유머를 잃지 않고 타이핑해준 도로시 스킬리 양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며, 두번째로는 박사학위 과정 때 나에게 배운 두 학생 제이와 로빈슨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사실 이 대목 때문에 페이퍼 아이템을 잡은 것인데, 여기서 두 학생 제이와 로빈슨은 각가가 마틴 제이와 폴 로빈슨을 가리킨다. "나는 그들의 책 <변증법적 상상력>과 <프로이트 좌파>를 4장과 5장의 각주에서 상당히 많이 활용했다."

인문학 서지에 밝은 이라면 이 두 권의 책이 국내에 번역/소개되었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변증법적 상상력: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와 이론, 1923-1950>(돌베개, 1979)로 나온 책이고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기도 하다(제이의 책으론 <아도르노>가 출간돼 있고, <시각의 헤게모니>에도 그의 논문이 실려 있다). 공역자 중 한 사람인 황재우는 시인 황지우의 본명이었다. 그리고 <프로이트 좌파>는 <프로이트 급진주의>(종로서적, 1981)라고 번역된 책으로, 빌헴름 라이히, 게자 로하임, 허버트 마르쿠제에 대한 유익한 입문서이다.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는데, 마틴 제이의 '20세기 프랑스 사상에서 시선의 절하'란 부제를 갖고 있는 <내려뜬 눈(Downcast Eyes)>(1993)이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다룬 학위논문에 이어서 스승의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 지성사 탐구의 역작이다. 분량이 만만찮지만 마틴 제이의 책들도 재출간/번역되면 좋겠다...

07. 06. 09.

P.S. <지식인들의 망명> 책날개에 실린 저자 소개는 '1961년 뉴욕 출생.'으로 시작한다. 바로 옆에는 붉은 글씨로 'H. Stuart Hughes, 1916-1999'라고 써놓고 말이다. 번듯한 표지에 이런 '깔끔한' 오타라니!..

한편, 오늘자 한겨레에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와 함께 이 3부작에 대해서도 비중 있는 리뷰가 실렸는데(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14691.html), 어인 일인지 저자를 '스튜어트 휴스'라고 표기했다. 물론 'Hughes'를 '휴스'라고 읽는 건 자유이지만 모든 번역본과 다른 언론리뷰들에서 '휴즈'라고 읽는 걸 굳이 독불장군처럼 '휴스'라고 읽는 배짱은 무엇인지?(존경해주어야 할까?) '베냐민'의 경우도 그러하고, 이게 한겨레의 고집인지 고기자의 고집인지 모르겠지만(*한겨레 교열부의 고집이라 한다),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에게 갖다붙인 '삐딱이는 나의 힘!'도 나쁘진 않지만, 보기 흉한 건 어쩔 수 없다(이 리뷰는 '스튜어트 휴즈'로는 검색되지 않는다). '에세이'를 굳이 '에쎄이'라고 적는 창비식 표기를 떠올리게도 하는데, 그런 게 '진보'라면 그건 '당신들의 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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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로 학교에 나왔는데 또 눈에 밟히는 기사들이 있어서 어쩌지 못하고 옮겨놓는다. 그 중 하나는 한국일보의 '100℃ 인터뷰'로 기억에 공지영, 이문열에 이어서 소설가 김훈 편이다. 김훈에 관해서라면 이미 여러 차례 인터뷰들을 옮겨놓았지만 이번에도 소설쓰기와 관련하여 새로운 내용들이 포함돼 있기에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내가 아는/그리는 그의 모습과 크게 다른 대목은 없지만 가령 <칼의 노래>를 쓰면서 이가 8개나 빠졌다는 이야기 등은 과문한 것인지 몰라도 처음 접한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건 소설쓰기의 결과보다도 그런 '과정'이다. 그가 <남한산성>을 쓰기 위해서 눈발로 뒤덮인 산성을 헤매고 다녔다는 얘기들을 나는 '존중'한다. 결과야 기대 이상일 수도 있고, 이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빠지고 눈길을 헤매며 다닌 일들은 '소설'이 아닌 '삶' 자체이다. 그는 드물게도 그 삶을 (매번 패한다손 치더라도) 자신의 문장으로 버틴다는 점에서 존경에 값한다. 스트레이트로 말하자면, "그는 밤새 혼자 글을 쓰고 있었다."

한국일보(07. 06. 08) [100℃ 인터뷰] 소설가 김훈

고독한 무사의 진중일기 <칼의 노래>(2001)로 자신의 문장을 알린 소설가 김훈(59). 그가 이번에는 병자호란을 감당한 다양한 인간군상을 묘파한 <남한산성>을 통해 삶의 영원성을 물었다. <칼의 노래>가 100만부, <남한산성>이 출간 한달 만에 10만부 이상 팔리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는 김훈을 한국일보 문화팀 기자들이 만났다. 극단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허무주의자, 보수주의자, 남근주의자라는 지적을 받아온 김훈은 그가 오랫동안 몸담은 한국일보 후배 기자들에게 높임말과 반말을 적당히 섞어가며 세상과 문학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_<남한산성>에는 인조도, 심지어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의 칸도 정당성 있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왜 그들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습니까.

"서날쇠, 정명수, 뱃사공 같은 민초의 삶에는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화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어요. 대장장이 서날쇠가 임금, 사대부가 남한산성에 들어오자 자신도 살아야겠다며 나가달라고 요구하는데 정당한 삶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역관으로 청나라 군대를 따라온 정명수는 세습 노비의 자식인데 그에게 조국이 있겠습니까. 그가 여자를 노략질하고 깔깔거린 것도 비난할 수 없어요."

_인조 등 병자호란을 초래한 집권세력의 잘못을 제대로 추궁하지 않았는데요.

"47일간 고립무원 상태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성안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지. 싸우자는 자, 투항하자는 자, 오늘은 싸우자 했다가 내일은 투항하자는 자, 오늘은 투항하자고 했다가 내일은 싸우자는 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자, 살아야 겠다고 개구멍으로 성을 빠져나가는 자, 살자고 성 안으로 들어오는 자. 나는 그들에게 개별적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했어요. 누구의 잘못을 따지는 것이 이 소설의 포인트는 아니니까."

_<남한산성>을 역사소설이라고 생각합니까.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 나는 세계의 맨 밑바닥은 악과 폭력이며 그것이 전쟁을 통해 발현된다고 생각합니다.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 같은 소설은, 역사적 전쟁을 소재로 삼은 것이지요. 나는 이 세계가 악과 폭력의 바탕 위에 세워졌다고 보고 있어요."

_세상을 그렇게 보다니, 너무 비극적인 생각 아닙니까.

"그것이 세계의 본디 모습이지요. 인류사의 거듭된 약육강식. 그것이 바로 악과 폭력이 세계의 바탕이란 증거 아닐까. 약육강식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 인간은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어. 내가 소설에 그린 세계도 그런 것이지."

_그럴수록 그 악과 폭력을 극복, 개선해야 하지 않을까요.

"인류 역사가 진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의 바탕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에요. 프랑스혁명, 볼셰비키혁명, 동학혁명은 약육강식의 질서를 부수기 위한 것이지만 모두 실패했어. 어찌 보면 인류사는 실패한 혁명의 역사라고 할 수 있어. 혁명이 소용없다는 게 아니라 지나고 보니까 세상을 개선하는데 별 도움이 안됐다는 뜻이야. 개선하려는 시도는 고귀하지만 많은 고통과 시간을 감내해야 합니다. 세상을 부수는 것이 혁명가의 몫이라면 나는 생활인이므로 죽지말고 살아 남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현세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고. 구원, 초월, 내세를 말하는 작가를 나는 좋아할 수 없어요."

_'현세적'이라는 단어가 달리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현세적이라는 말을 영어로 표현하면 'worldly' 즉 현실적, 세속적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처럼 세속적, 현실적인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도덕이냐 이익이냐의 딜레마에 빠졌을 때, 역시 이익을 추구해야 하겠지요. 이익을 포기하는 국가는 상상할 수 없어. 악과 폭력의 기반 위에 인간다운 가치나 아름다움을 건설하는 것이 미래의 과업이 될 텐데, 나는 그것이 좌파에 의해 실현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아요. 물적 토대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지. 남한산성에서 투항한 것도 물적토대가 없었기 때문이거든."

_김훈 소설의 허무주의는 결국 소설 너머 철학의 문제인 것 같네요.

"내 소설에는 악과 폭력도 나오지만, 세계와 처절히 싸우는 사람들도 등장하는데 왜 그것을 허무주의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소설에 세상의 허무한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온몸을 던져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는 영웅도 함께 그렸는데 그들은 허무의 반대편에 있는 존재들이거든."

_허무주의라는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허무라는 것은 주의가 될 수 없어요. 나는 혁명을 믿지 않고 진화, 전환을 믿는데 병자호란 이후 그 극적인 사례를 발견했습니다. 효종 때 조선은 병자호란의 수모를 갚고 치욕을 씻겠다며 군사력을 모아 청을 정벌하려 했는데 그것은 노론의 정치 기반 강화에 기여한 허구였어요. 대신 조선의 최고 엘리트들은 북벌에서 북학으로 전환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조선의 위대한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전환이 없었다면 우리는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국이 혁명 없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한 것도 역시 역사의 위대한 순간이지요."

_평론가들의 지적은 경청하는 편입니까.

"그들은 틀린 말 하지 않아. 그런데 그것이 내게는 아무 도움이 안돼. 나는 나의 과오 조차 필연성이 있다고 생각해. 내게는 소설을 통해 보편적 진리를 말하고 싶은 허영심도,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_그래서 허무주의자란 지적이 나오는 것 같은데요.

"아니 그럼 당신들은 도덕적 목표를 갖고 있나. 소설가는 그냥 소설 쓰고 안 쓸 때는 시시껄렁하게 살면 되는 거야. 도덕적 인격이 무슨 소용 있겠어."

_<남한산성> 끝낸 뒤 어찌 지냅니까.

"쉬고 있습니다. 나는 책을 내면 살짝 들춰보다가 후딱 덮어버립니다.이렇게 쓰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만 드니까. 책이 꿈에 보일까 무서워. 아예 만지지도 않아."

_이제 어떤 소설 씁니까.

"당대의 일을 쓰려고 그럽니다. 이승만 시대부터 내가 살아온 이 시대의 이야기."

_어떤 내용인데요.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가다가 자꾸 같은 자리에서 자빠지는데 그 문제 다루고 싶어요. 노사 문제라든지, 사교육 문제라든지. 사교육 문제는 박정희가 과외 하는 사람 감옥에 보내고도 해결하지 못했어요."

_우리 교육의 근본적 문제가 뭐라고 봅니까.

"평준화는 진짜 웃기는 수작 아닌가. 똑같은 사람 만들자는 것인데 그것이 국가의 정책 목표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서울대만 해도 세계 100위 권 밖의 대학인데 예산을 들여 일류 대학으로 만드는 것이 국가 목표가 돼야지 거꾸로 해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어."

_평준화를 폐지한다고 해서 교육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일류 대학 만들어야지. 평준화는 최소한의 정책이어야지 마지막 목표가 돼서는 안돼. 아이들이 고생을 하겠지만 청소년기에 경험하는 경쟁도 훌륭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_불평등의 원인이 타인이나 환경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럼 그럴 때 세상을 부수어야 하나. 그러나 세상은 부숴지지 않아."

_새로 쓰는 작품의 배경이 현대라면 불평등 문제를 다루지 않고는 리얼리티를 살릴 수 없을 텐데…

"불평등보다 부자유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아. 근대의 평등은 결국 법 앞의 평등이기 때문에 재벌 회장도 폭력을 행사했다면 처벌을 받아야 하고 그런 점에서 나는 법치주의 신봉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정말 무법천지라고 할 수 밖에 없어요. 시위대가 폴리스라인을 침범하고 경찰차를 불지르고. 그런데도 처벌하지 않고. 이것이 관용이고 민주주의인가…광화문 다니는 사람은 다들 자기 밥 벌어 먹으러 바삐 움직이는데 그 거리 막아 놓고 시위하면 그들의 생업이 마비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 놓고 자기 주장하고 경찰은 방치하고. 그래서 무법천지가 되는 것이겠지."

_법치주의의 동요 외에 통탄할 만한 일은 또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역시 양극화의 문제지. 경제 뿐 아니라 교육, 의료, 이념 등 광범위한 양극화.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잘한 것을 나는 한미FTA 체결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FTA 체결하고 나니까 많은 언론이 이념적 일관성을 상실했다고 공격하던데 나는 그런 언론 정신병자라고 생각해요. 이념의 일관성이 대체 무슨 소용 있나. 밥 먹여주는 것도, 미래를 열어주는 것도 아닌데. FTA로 농민이 희생되는 것이 답답하고 가슴 아프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미래를 관리하는 태도가 아니지. 열강이 세계의 악을 대표한다 해도 그들과 싸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_문장이 너무 미문이라 삶의 비루함을 적은 글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나지 않다고 한 평론가가 지적했는데.

"<칼의 노래>를 수사적 장치를 전혀 동원하지 않고 주어와 동사, 문장의 뼈다귀만 갖고 썼어요. 그랬는데도 수사적이라고 하더군. 나는 스트레이트 문체로 글을 쓰려고 사력을 다하는데 그것 보고 수사적이라고 하니 나보고 어쩌라는 말인지."

_그런데 왜 세간에서 그런 반응이 나올까요.

"스트레이트 문장이 오히려 탐미적으로 보였던 모양이에요. 나는 스트레이트 문장이 제일 좋아.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 멋진 스트레이트 문장이 나옵니다. 전령이 와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5만 명이 전사했다고 보고하자 이순신은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지.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정말 '죽이는' 스트레이트 문장을 쓴 것이지. 만 마디 주절거리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

_습작기의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칼의 노래>가 습작이라면 습작인데 그것 쓰면서 정말 힘들었어. 난방이 안 되는 후배의 작업실 지하에 책상 하나 놓고 썼는데 어찌나 고생했는지 이가 쑥 빠졌어. 아무 통증 없이 바람이 새 나가듯 하나하나 빠져 침 뱉듯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썼어. 소설 다 쓰고 나니까 8개가 빠졌더라고. 턱이 내려앉아 사람 몰골이 안될 것 같아 동인문학상 상금으로 임플란트 8개 하고 남은 돈으로 빚을 약간 갚고 술 먹었지."

_가족에게 미안한 생각은 없습니까.

"제 처는 남편이 하는 일에 감히 가타부타하지 않습니다. 좋은 덕성, 훌륭한 전통이지요. (인터뷰에 참가한 여기자를 향해) 그걸 배워."

_그렇게 말하면 반페미니즘 입니다.

"나를 남근주의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자가 여근주의 하면 페미니즘이고, 남자가 남근주의 하면 잔혹하게 매도되잖아. 나는 여자를 존중하지, 결코 학대하는 사람이 아니야. 여자를 보호하고 어려운 일 시키지 않는 것이 가부장적 덕성이지. 여자를 학대하는 남자는 가부장이 아니라 건달이야. 가부장적 제도 안에서 딸이나 이모들이 참 행복하게 살았어."

_여성이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지요.

"수천 년 동안 하등하게 대접받았고 교육과 세상에 대한 경험,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능력, 수렵 기술 같은 것이 남자 위주로 전수돼 왔으니까 여성의 지위가 유전적으로 저열하게 평가됐지. 인류의 거대한 비극 중 하나입니다."

_여성 독자로부터 항의받은 적 있지요?

"단편 <화장>을 쓰면서 젊은 여자의 아름다움을 묘사했는데 그러다 보니 기능이나 역할은 없고 인격도 잘 드러나지 않았어. 그 글을 읽은 여성 독자가 왜 여성을 그 따위로 그리냐고 항의하더군. 그렇다고 그 때문에 내가 마초인 것은 아니잖아."

_아니오. 마초라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마초가 아니야. 남들이 마초라고 그러는데 그냥 내버려둡니다. 해명하거나 항의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Let it be."

_<언니의 폐경> 같은 소설을 보면 여성 심리를 매우 잘 그린 것 같은데요.

"그 소설에는 생리대, 헤어스타일, 패션, 화장품 등 여자에게 필요한 온갖 자질구레한 것이 다 나와. <알루아> <코스탄폴리탄> 같은 여성 잡지 보면 신제품 설명 자세하게 나오는데 빨간 줄 치면서 몇 달 동안 밤새 읽었어. 마누라가 한심하다고 했지만 내겐 매우 소중한 정보였어요. TV 홈쇼핑의 란제리광고를 메모하면서 본 적도 있어. 예컨데 브래지어를 보면 컵이 있고 와이어가 있는데 컵에서 중요한 것은 위의 봉긋한 데가 들뜨면 안되고 조금이라도 뜨면 팔 수 없다는 것이지. 그걸 메모하면서 소설은 나 같은 선비가 할 짓이 아니구나 싶었지."

_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고 자료를 모으고 메모를 합니까.

"나는 계통 없이 책을 읽습니다. 남들이 보면 왜 읽나 하는 책들도 읽어요. <화장>을 쓸 때는 해부학 책도 읽었지. 거기에 여자의 신체를 부위별로 해부한 사진이 있었어. 교보문고 기술서적 코너에 가서 용접공, 정비공, 연판, 배관, 항공기 조정, 선박 조정, 항해술, 비행술 같은 책도 보는데 아주 좋은 자료들이지. 요즘은 항해술 책을 보는데 반 정도 이해할까."

_항해술 책은 작품을 쓰기 위해 읽습니까.

"응. 거친 파도가 칠 때 인간이 그걸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는지를 써놓았어. 사나운 밤바다를 헤쳐나가는 한 사나이의 근육이 떠오른다고. 그러니까 내게 항해술 책은 문학책보다 더 문학적인 것이지. 죽을 때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그런 것도 문학이지만 그런 건 미성년자들이 하는 것이고.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게 뭐야. (웃음) 어떻게 인간이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랄 수 있나. 좀 부끄러움도 있고 그런 것이지."

_벌써 여러 권 히트를 쳤는데 인세 수입이 꽤 되지요?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돈을 매우 좋아해. 돈을 경멸하는 사람을 나는 경멸해. 돈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그 돈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 글을 써서 수입이 생기면 다음 소설을 쓸 때까지 살 수 있어요.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교육 받은 사람을 많이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걸 바탕으로 내 책이 팔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금도 많이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독자를 길러내 준 사회에 대한 보답이지요."

_우리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데 운하, 그건 안했으면 좋겠더라. 그 분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것만은 안 했으면 좋겠어. 그 분은 왜 항상 토목공사를 얘기할까. 통일을 어떻게 하겠다 이런 얘기는 안하고. 나는 먼지 나는 거 싫어. 물은 다 제 길이 있는 건데. 지금 많은 건축토목학자, 지리학자, 수리학자들이 입다물고 언론도 운하 얘기만 쓰고 있어. 얼마 전 부산에서 어린 아이가 굶어죽었는데, 먹을 것이 넘쳐 나는 이 시대에 이런 일이 왜 생겨난 것인지. 신문에서 운하 이야기 그만 쓰고 이런 것을 써야지."

_소설 쓰는 것 말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여자 구두만 전문적으로 고치는 수선공이 되고 싶어요. 그 구두, 꽃 같기도 하고 나비 같기도 하고. 너무 예쁠 것 같아.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구두 낡으면 버리고 새것 사니까. 우리나라에서는 힘들 것 같아."

07. 06. 09.

P.S. 윤동주의 '서시'에 대한 평가에는 나도 공감한다. 그 시 자체가 모자란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세상엔 순수한 만큼 유치한 시인도 한두 명은 있기 마련이고 그마저 없느니보다는 낫다. 한데, (미성년자도 아닌) 어떤 정치인이 자신이 가장 애송하는 시가 '윤동주의 서시'다 이러면, 좀 곤란하다는 것이다(정치를 애송이들이 하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인간이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랄 수 있나. 좀 부끄러움도 있고 그런 것이지." 나는 그런 태도를 김훈식의 '허무주의'라고 부른다. 그건 "성안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지.(...) 나는 그들에게 개별적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했어요."라고 말할 때 그 기저에 놓이는 태도를 지칭한다(일차적으로 그것은 '말에 대한' 허무주의이다). "소설가는 그냥 소설 쓰고 안 쓸 때는 시시껄렁하게 살면 되는 거야. 도덕적 인격이 무슨 소용 있겠어."라는 반문은 그러한 태도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런 지적이 그에게 도움이 될리는 만무하다(다만 나를 위한 것이다). 김훈을 위한 것이라면 오늘 아침에 한겨레에서 본 아래의 사진 같은 게 좋겠다.

사진의 타이틀은 '울먹이는 소년'으로 돼 있고, "한 아프가니스탄 소년이 깨진 달걀 앞에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다. 달걀을 파는 이 소년은 “넘어지는 바람에 갖고 있던 달걀이 모두 깨졌다”며 “어머니가 나를 죽일 것”이라고 울먹였다. 유엔아동기금 조사를 보면, 아프간 수도 카불에선 5만~6만명의 소년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다.(5월20일 촬영. 카불/AFP 연합)"란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 소년과 그의 가족에게 이 달걀들이 얼마나 큰 값어치를 갖고 있을지는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이건 먹는, 먹을 달걀이 아니라 파는, 팔아야 하는 달걀이다). '어머니가 나를 죽일 것'이란 그의 울먹임이 공연한 엄살은 아닐 터. 그래서 슬프다. 넘어진 것도 슬프고(나도 잘 넘어졌었다) 달걀이 모두 깨진 것도 슬프다. 어떠한 위로의 말도 보태줄 수 없기에 또한 슬프다.

사진을 오래 쳐다볼 수 없어 바로 다음 지면으로 넘기고 신문지는 전철에 두고 내렸는데, 이 소년의 이미지와 함께 내게 바로 떠오른 장면은 소년 김훈이 새벽에 해장국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넘어져 엎지르는 바람에 통곡하던 모습이다(예전에 그의 문체를 말하면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때의 '절망'이 이 '울먹이는 소년'의 그것과 닮지 않았을까?(이 '울먹이는 소년' 또한 글을 깨친다면 나중에 소설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생각의 끄트머리에서 우연찮게도 이런 문장을 읽는다.

"얼마 전 부산에서 어린 아이가 굶어죽었는데, 먹을 것이 넘쳐 나는 이 시대에 이런 일이 왜 생겨난 것인지. 신문에서 운하 이야기 그만 쓰고 이런 것을 써야지."

다른 것들은 크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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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사스 2007-06-09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의 노래> 쓰며 이가 빠졌다는 얘기는 전에도 여러 번 했습니다. 해장국 사건이 어쩐지 김훈씨의 '밥벌이론'의 원형적 기억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

로쟈 2007-06-09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제가 과문한 건 <칼의 노래>가 한창 베스트셀러가 될 때 제가 국내에 없었던 탓인 듯합니다. '원형적 기억'이란 얘기를 섣불리 할 수는 없겠지만 김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에피소드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수유 2007-06-10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져갑니다.

마노아 2007-06-10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만큼이나 덧붙인 글들이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