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칼 포퍼 지음, 이상헌 옮김 / 생각의나무 / 2000년 1월
절판


소비에트가 쇠퇴한 이유들을 알아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일단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야겠습니다.(...) 물론 러시아에서는 권력을 가진 공산주의자들로 말미암아 모든 교육단계에 있는 학생들이 공산주의 교리를 배우는 체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 시대가 되었을 때, 공산주의 지도층에서는 어느 누구도 상황을 현상태로 유지하는 수단만 생각할 뿐, 달리 마르크스주의의 교의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것만 진지하게 취급되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는 틀림없이 붕괴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마르크스 이론의 나머지 부분은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이것만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73-74쪽

그 책(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은 20세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며, 특히 1962년 쿠바 위기로 대표되는 커다란 전환점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소련은 그 시점에서 냉전의 긴장감을 상실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때 소련은 미국을 멸망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건 마르크스 정권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상이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그 시점은 소련이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시초였으며 그후 전반적인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76쪽

소비에트는 러시아의 물리학자인 사하로프 박사가 회고록에서 말한 사하로프 폭탄을 가질 때까지는 역사가 그들에게 부과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희망을 갖지 못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사하로프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게 만든 계기가 된 책이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나는 한때 그에게 형법적 책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하로프의 문제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하로프는 베리아와 함께 합동으로 스탈린 통치하에서 오랫동안 연구를 했으며, 수소폭탄을 제조하는 것과 관련하여 베리아와 반복적으로 사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쨌든 수년간의 실험을 거쳐서 완성품 폭탄이 1961년에 실제로 만들어졌습니다.(...) 흐루시초프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미국이 모르게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할 생각이 떠오른 것은 불가리아를 방문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미국은 이미 때를 놓치게 될 것이었다."-77-79쪽

아인슈타인은 독일이 자체적으로 원자폭탄을 제조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폭탄의 사용을 지지하는 편지에 서명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을 방어하기 위해서 편지에 서명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하로프는,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시기에는, 흐루시초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직 자본주의의 '타파'를 원하는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공격적인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수동적인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그는 자본주의는 반드시 타도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폭탄을 실험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 살이었으며, 함대의 포민 소장을 만나러 갔을 때는 마흔 살이었습니다(*사하로프는 핵어뢰 프로젝트를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86쪽

사하로프는 그가 만든 초강력 폭탄을 실험할 때마다 방사능으로 인해서 수천 명이 암에 걸릴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고, 그래서 실험을 실시하지 않도록 흐루시초프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화를 내며 '정치적인 것'과 '과학적인 이슈'가 섞이게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내 의무를 다하겠습니다"라고 사하로프가 맹세한 것은 그때였습니다. 사하로프에 대해서 말할 것은 그 밖에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의 회고록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87쪽

나는 말년의 사하로프에 대해서는 여전히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꼭 수정되어야 합니다. 나는 그가 전범으로 생각되기 시작했다고 말해야 하며, 그가 말년에 한 일로 인해서 그의 죄가 완전히 용서를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이탈리아의 한 언론인과의 이 대담은 1991년에 이루어졌다.)-88-8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되돌아가기 대 반복하기'는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2006)의 결론이다. '되돌아가기'와 '반복하기'의 목적어로 걸려 있는 것은 '레닌'이다. 즉, 지젝이 대비시키고자 하는 것은 '레닌으로 되돌아가기'와 '레닌을 반복하기'의 차별성이고, '레닌을 반복하기'야말로 지젝 고유의/특유의 정치적 전략 혹은 프로그램을 집약해주는 표현이다.

 

 

 

 

비록 작년 여름에 출간된 책이지만, 그리고 때로 부당한 폄하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나는 <혁명이 다가온다>야말로 지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오늘날의 정치적 상황에서 '혁명'이 갖는 의미와 그 가능성을 질문하는 데 있어서 가장 유익한 책이며(왜냐면 분량이 제일 만만하니까!) 특별히 10월 혁명 90주년이 되는 올해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87년 6월을 기념하는 일은 한 30년쯤 뒤로 미뤄두면 안될까?).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를 좀 훑어보면서 올 여름에 이 두권의 책을 정리해두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거기에 밀린 숙제를 보태자면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와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를 마저 읽어야겠다). 그것이 몇 차례 관련 페이퍼를 쓴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이 책을 손에 든 한 가지 이유이다.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이 책이 생각만큼 널리, 그리고 제대로 읽히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 이면에서 분량만큼 만만치는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읽히고 너무 쉽게 평가되고 너무 쉽게 제쳐놓여진다는 점(그래서 그들은 전진하고 있는가?). 지젝은 비의적인 저자가 아니기에 대단한 수수께끼나 퍼즐, 음모 등을 숨겨놓지 않는다. 때문에 그의 책들은 굳이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읽으면 된다. 물론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상으로는 그냥 읽어나가는 게 대놓고 수월하지만은 않다(수월하게 읽히는 가라타니와 비교해서도 그렇다). 번역이 낳는 예기치 않은 장애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지젝에 대한 오해의 일부는 그러한 장애에 기인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읽어 넘어가기', 혹은 '넘어/너머 읽기'이다. 일단은 '결론'부터 넘어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덕분에 시오랑에 관한 페이퍼가 당분간 미뤄지게 됐다). 혹 몇 분의 독자가 이 책을 좀더 재미있게,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국역본 외에 내가 참조한 건 영어본(2002)과 러시아어본(2003)이다. 이전에 적었지만 국역본은 독어본(2002)을 옮긴 것이며, 이 독어본은 러시아본과 일치한다. 하지만 영어본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영어본은 레닌의 1917년 문건 선집에 지젝인 붙인 후기로 구성돼 있고, 이 후기의 내용이 <혁명이 다가온다>와 대략 일치한다. 하지만 차이가 나는 대목들도 적지는 않다.

"소련의 전체 역사는 프로이트의 로마에 대한 이미지와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로마의 이미지에는 현재가 고고학적 유물의 서로 다른 층위라는 겉모습으로 침전되어 있다. 마치 트로이의 일곱 층위(서로 다른 모델)처럼 새로운 층은 앞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덮고 있어 역사는 더 오래된 시기를 향한 회귀에서 점점 더 깊이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고고학자같이 된다."(265쪽)

프로이트는 생전에 로마를 여러 차례 방문한 것으로 돼 있는데(특히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에 많은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 도시의 역사가 여러 겹의 고고학적 지층이 퇴적돼 있는 걸로 봤다는 것이고 지젝에 따르면 소련사가 바로 딱 그러한 이미지-모델과 비슷한다. 혹은 '또다른 모델(another model)'을 찾자면('서로 다른 모델'이 아니다) '트로이의 일곱 지층'에 비유될 수 있다('층위'보다는 '지층'이 낫겠다). '일곱 지층'이라고 돼 있지만 백과사전의 내용을 참고해보면 전체로는 '아홉 개의 지층'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중 트로이에 해당하는 것만을 카운트한 듯하다.  

슐리만과 되르펠트는 집들이 건설되어 사람들이 살다가 마침내는 파괴되어 버린 아홉 기(紀)를 나타내는 9개 주요지층의 순서를 밝혀냈다. 제1~7기 트로이는 요새, 트로아스의 수도, 왕의 가족·신하·노예들이 살았던 왕의 거주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1~5기는 청동기시대 초기(BC 3000경~1900)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 기간 동안의 주민들이 에게 해 제도, 키클라데스 제도, 미노아 문명의 크레타 섬, 헬라도스 문화기의 그리스 본토에 살던 주민들의 선조였을 것이며, 아나톨리아 남서부 또는 시리아로부터 온 것으로 추정된다. 트로이 제6·7기는 청동기시대 중기와 말기(BC 1900경~1100)에 해당한다. 불과 한 세대 동안 지속되었던 제7a기는 BC 13세기경 발생한 화재로 파괴되었는데, 아마도 이때의 트로이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묘사된 프리아모스 왕의 도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의 파괴 이후 약 400년간 이곳은 사실상 버려졌다. 그리스인이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제8기이며,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의 일리온은 제9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소련사는 어째서 이러한 도시들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가?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 역사는 배제의, 인간의 비인간으로의, 역사의 회고적인 다시 쓰기와 동일한 축적이 아닌가?" 즉, 공식 이데올로기상으로 소련사는 지속적인 배제의 축적이요, 사람들을 비인간으로 내모는 일의 축적이자, 거듭 역사 다시쓰기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탈스탈린화'는 '복권', 즉 당의 과거 정치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반대의 과정이라고 신호되었다." '신호되었다'고 옮겨진 단어는 영어본에서는 '지시되었다(indicated)'로, 러시아어본에서는 '수반되었다'로 옮겨졌다. 내 식으로 다시 옮기면, "'탈스탈린화'가 정반대의 과정, 곧 점차적인 '복권'과 당의 과거 '오류들'에 대한 인정을 통해 표시되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논리적이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것은 '점차적인' 복권의 과정/순서이다.

"악마처럼 취급되던 볼셰비키 옛 지도자들의 점진적인 '복권'은 아마 소련의 '탈스탈린화'가 어느 정도(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민감한 지표로 기능할 수 있다." 해서 가장 먼저 복권된 사람들이 1937년에 총살당한 (투하체프스키 같은) 군 지도자들이고 맨마지막으로, 그러니까 고르바초프 시기 공산주의 정권 붕괴 직전에 복권된 이가 부하린이었다.

미하일 투하체프스키(1893-1937)는 소련군 최고사령관(1925-28)을 지낸 고위 장성이지만 1936년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을 순방한 것이 빌미가 되어 이듬해 군내 트로츠키파 조직을 건설하고 독일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그리고 저명한 볼셰비키 니콜라이 부하린(1888-1938)은 혁명직후 <프라우다>지의 편집장을 지냈고 여러 권의 사회주의 경제이론서를 집필했다. 1921년 신경제정책(NEP)을 주도적으로 지지하면서 '우파'의 우두머리가 된다. 역시나 1937년 트로츠키파란 혐의를 뒤집어쓰고 비밀리에 체포되어 이듬해에 처형당했다. 국내엔 <과도기 경제학>(백의, 1994) 등이 번역돼 있으며, 단행본 연구서로는 김남국의 <부하린: 혁명과 반혁명 사이>(문학과지성사, 1993)가 유일한 게 아닌가 싶다. 부하린의 복권은 1988년에 이루어졌다.

"이 최후의 복권은 자본주의로 돌아간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복권된 부하린은 1920년대 '부자가 되자!'라는 유명한 구호를 내걸고 노동자와 농민 간의 동맹을 주창했고 강제 집산화에 반대했다."  이 유명한 구호(슬로건)가 영어로는 "Enrich yourselves!"이다. 딱 "부자되세요!". 부하린의 복권과 함께, 그리고 '부자되세요!'란 구호의 부활과 함께 러시아는 다시 자본주의 사회로 돌아가게 된 것.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절대 복권될 수 없는 인물,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반공주의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도 배제되는 한 사람, 레온 트로츠키, 혁명의 '떠돌아다니는 유대인', 진정한 반스탈린주의자, '일국 사회주의 건설'의 아이디어에 대립되는 '영구혁명'을 주창한 철천지원수가 있다."(266쪽)

 

 

 

'철천지원수'란 표현은 영어로는 'arch-enemy'이며 러시아어로는 '저주받은 적'('불구대천의 원수')이라고 옮겨져 있다. 1920년대 권력암투의 트로이카 '부하린(우파)-스탈린(중도파)-트로츠키(좌파)'에서 트로츠키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복권될 수 없는 인물(포지션)로 남아 있는 것(*최근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전기 3부작이 완간되었다 -07. 25.). 

 

 

 

 

"우리는 여기에서 프로이트의 근원적(기초적) 억압과 무의식 속에서의 부차적 억압 사이의 구별과 위험을 무릅쓰고 나란히 다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물론 트로츠키는, 트로츠키의 배제는 '근원적 억압'에 해당한다. "1990년 이전의 현존 사회주의에서뿐 아니라 1990년 이후의 현존 자본주의에서 심지어는 공산주의에 대해 향수를 가지는 경우도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트로츠키는 어떤 자리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아마 '트로츠키'라는 기표는 레닌주의의 유산에서 다시 찾을 가치가 있는 가장 적절한 호칭일 것이다."(266-7쪽)

분량상 레닌주의의 유산으로서의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07. 06. 11.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oonta 2007-06-13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맛만 보다가 만 느낌입니다. 후편도 어서 써주시길 ^^

그런데 소련사가 로마의 지질학적 지층과 같은 여러 겹의 지층을 가지고 있다는 비유가 적절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 공식 이데올로기상으로 소련사는 지속적인 배제의 축적이요, 사람들을 비인간으로 내모는 일의 축적이자, 거듭 역사 다시쓰기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인 것 같은데 트로츠키와 같은 여러 당내인물들의 배제가 축적되어온 역사라는 것을 굳이 고고학적 지층과 연계시키는 이유는? 그냥 문학적 수사인 것인지..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요.

로쟈 2007-06-13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은 그냥 읽어보셔도 될 거 같은데요.^^

yoonta 2007-06-13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다..산다 하고 계속 뒤로 밀리게 되네요. 로쟈님 페이퍼때문이라도 어서 한권 사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

2007-06-28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6-28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지젝의 레닌론이 많은 도움이 되실 거 같습니다. 주객분리론에 대해서도. 제 생각은 7월로 넘어가야 보탤 수 있을 거 같고요.^^;

노승영 2008-10-29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트로츠키 론(『Terrorism and Communism』 서문)을 번역하는 중에
프로이트의 로마 이미지를 검색해 보니 로쟈 님 블로그로 연결되더군요.
지젝이 레닌에게 써먹은 표현을 많이 차용하고 있어서 이 블로그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번역 비평 글이 있길래 마감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도 다 찾아 읽었습니다.
답례(?)로 제 번역을 올립니다.
혹시 출간 전 원고를 읽어보실 의향이 있으면 연락 주세요.
ⓞ①⑧⑤⑤③①①①③@paran.com

소 비에트 연방의 전체 역사는 프로이트가 로마를 표현한 유명한 이미지와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로마 역사는 여러 겹의 고고학적 지층이라는 형태로 저마다의 현재에 퇴적되어 있다. (또 다른 모델인) 트로이의 일곱 지층과 마찬가지로 새 지층이 이전 지층을 차례로 덮고 있다. 따라서 역사는--앞선 시대를 향해 퇴행하며--고고학자가 깊숙이 더 깊숙이 땅을 파헤치며 새 지층을 발견하듯 나아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 이데올로기적) 역사는, 배제하고 인간을 비(非)인간으로 전락시키고 역사를 소급하여 다시 쓰는 행위가 누적된 것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복권’ 과정, 즉 당의 과거 정책에서 ‘오류’를 인정하는 정반대의 과정이 탈(脫)스탈린화의 신호탄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The entire history of the Soviet Union can be comprehended as homologous with Freud’s famous image of Rome, a city whose history is deposited in its present in the guise of the different layers of the archaeological remainders, each new level covering up the preceding one, like (another model) the seven layers of Troy, so that history, in its regression towards ever older epochs, proceeds like the archaeologist, discovering new layers by probing deeper and deeper into the ground. Was the (official ideological) history of the Soviet Union not the same accumulation of exclusions, of turning persons into non-persons, of the retroactive rewriting of history?Quite logically, ‘de-Stalinization’ was signalled by the opposite process of ‘rehabilitation’, of admitting ‘errors’ in the past policies of the party.
 
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품절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는 아나키스트와 대립되는 국가사회주의자로 생각됩니다. 마르크스주의자 중에 그런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마르크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회주의이념은 명확히 프루동의 것입니다.(...) 프루동은 경제적 계급 대립을 해소하면, 그리고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면 국가는 소멸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 그 자체가 자립성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사고도 계승했습니다. 그가 일시적으로 국가권력을 잡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자본제경제와 계급사회를 지양한다는 블랑키의 전략을 승인했던 것은 국가주의적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결함은 국가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자립성을 보지 않은 아나키즘에 있는 것입니다. -24-25쪽

(1990년 이후) 국가사회주의가 쇠퇴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리버테리언 사회주의도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어소시에이션이즘)가 단순히 이념적이어서 현실적이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거기에 자본, 네이션,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소시에이션이즘은 자본, 네이션, 국가를 거절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만, 왜 그것이 존재하는가를 충분히 사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결국 그것들에 걸려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가령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와 같은 종류가 부활한다고 해도 자본, 네이션, 국가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입니다.-27쪽

내가 이 책에서 생각하고 싶은 것은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는 길, 바꿔 말하면 '세계공화국'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 네이션, 국가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 네이션, 국가는 각기 간단히 부정할 수 없는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지양하려고 한다면 먼저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인식해야 합니다. 단순히 그것들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자본이나 국가의 현실성을 승인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이념'을 조소하게 될 뿐입니다.-27-28쪽

내가 가장 공감하는 사람은 칸트와 프로이트다. <실천이성비판>이든 <쾌락원칙을 넘어서>든 모두 60살이 지나서 이루어진 훌륭한 작업들이다. 나도 내 생각이 정리된 것은 60살을 먹은 이후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극이 된다. 그들은 80살 정도까지 살았다. 나는 100살까지 하고 싶다. 내 작업은 이제부터다.('옮긴이 후기'에서 재인용)-235-23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침 늦게 TV를 켜니 6.10 항쟁 기념식이 끝나고 있었다. 이게 원래 TV로도 방영된 기념식인지 올해가 20주년이어서 처음 방영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학생의 상당수가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른다는 사건이니만큼 이젠 '기념'할 때도 된 듯하다('6월 혁명'이라고 부르자는 '오버'도 그런 배경에서 나왔을 터이다). 관련기사들이 쏟아지는 틈바구니 속에 선불교의 정수라고 일컬어지는 <벽암록> 완역 소식이 묻혀 있었다. 불교 신자도 아니고 선(禪)에도 평균치 이상의 관심은 갖고 있지 않은 터여서 이 '장서용' 책을 서가에 꽂아놓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생각날 때 도서관에서라도 들춰볼 완역서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책은 각권 500쪽 내외로 전체 12만원이라 한다). 역자인 지현 스님의 10여년의 노고가 온축됐다고 하니까 더욱 기릴 만하다. 관련기사 두 개를 옮겨놓는다. 알라딘에는 아직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문화일보(07. 06. 08) 禪 불교의 정수… 10여년 걸쳐 완역 출간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 원나라 초기(1314~1320), 거사 장명원이 불타 버린 ‘벽암록(碧巖錄)’을 되찾아 복간하면서 책 머리에 붙인 말이다. 여기서 ‘종문’이란 ‘선문(禪門, 禪家)’을, ‘제일서’란 첫 번째로 꼽는 책이란 뜻이다. 그만큼 선불교의 정수가 모여 있는 책이 바로 벽암록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시작한 선불교는, 그러나 언어와 문자를 통한 탐구로 전승될 수밖에 없었다. 이 언어 문자를 통한 탐구는 송나라 때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는데, 선어록(禪語錄)은 이미 당나라 때부터 활발하게 출간되고 있었다. ‘조주록(趙州錄)’, ‘임제록(臨濟錄)’등이 당대에 출간된 책이라면, ‘조당집(祖堂集)’(전20권), ‘전등록(傳燈錄)’(전30권)과 같은 방대한 공안사서(公案史書)는 송대에 출간된 책들이다. 이런 책들이 출간된 뒤 공안에 대한 본격적인 주석서가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 가운데 가장 윗자리에 있는 책이 벽암록이다. 벽암록이 나온 뒤 벽암록만큼 불교 선 수행자와 유교 사대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책은 없었다.

벽암록은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 다시 살아난 부활의 책이기도 하다. 벽암록을 쓴 원오극근(1063∼1135)의 제자 대혜종고(1089∼1163)가 벽암록이 출간된 지 30년쯤 뒤 판각과 잔본을 모두 회수해 소각해 버렸다. 수행자들이 벽암록의 본 뜻을 저버린 채 언어만을 익히고 수행은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벽암록은 불에 타거나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벽암록이 불탄 190년 뒤, 거사 장명원이 벽암록을 되살린 것이다.

벽암록은 100개의 공안(公案), 즉 본칙을 중심으로 일종의 머리말인 수시(垂示), 촌평이라 할 본칙 착어(著語), 해석격인 본칙 평창(評唱), 공안에 대한 깨달음을 예지와 영감에 찬 시로 읊은 송(頌), 송의 착어, 송의 평창 등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된 벽암록치고, 수시에서 송의 평창에 이르기까지를 완전히 번역한 책은 없었다. 본칙은 모두 번역했으되, 수시나 착어, 평창 등은 빼고 번역했다.

이번에 나온 책은 국내 최초의 벽암록 완역 해설본으로, 벽암록 전문의 원문을 수록하고 토를 달았다. 벽암록 네개의 이본(異本)을 대조하고, 100칙 공안 하나하나마다 활구(活句·참선으로 깨달아야 할 부분)와 사구(死句·읽어서 이해할 부분)를 일일이 구분해 제시했다. 역주작업에 10년, 출판에 3년이 걸렸다고 한다. 벽암록, 속어 낱말 사전까지 합쳐 전5권에 이르는 대작이다. 불교출판이 난숙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김종락기자)

동아일보(07. 06. 07) 禪어록의 백미 ‘벽암록’ 완역 출간

“벽암록 번역에 착수하고 나서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긴 했네요. 최선은 다했는데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뤄 낸 일에 비하면 돌아온 답변이 매우 겸손하다. 벽암록(碧巖錄)은 선(禪)에 관심 있는 사람은 물론 출가한 스님들도 완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난해한 선어록의 백미다. 중국에서 나온 이 책의 번역을 시작한 지 9년, 교정과 편집에만 2년 반이 걸린 끝에 총 5권(사전 1권 포함)으로 펴낸 석지현(60·사진) 스님.

벽암록은 선의 문헌 가운데 첫 번째로 꼽는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로 알려져 왔다. 당대 선승들의 선문답과 어록을 담은 ‘조주록’과 ‘임제록’, 송대에 발간된 ‘조당집’ ‘전등록’ 등의 방대한 사서에 대한 주석서가 바로 벽암록이다. 설두중현(980∼1052) 선사가 조당집과 전등록 등의 책에서 가려 뽑은 옛 공안(公案)을 바탕으로 송나라 원오극근(1063∼1135) 선사가 이 책에 수시(垂示·일종의 머리말), 착어(著語·속담과 속어 등으로 이뤄진 촌평), 평창(評唱·본문에 대한 설명과 주석)을 붙인 것이다. 원오의 제자 대혜종고 선사가 “수행은 하지 않고 책만 읽는다”며 나중에 벽암록 판각과 잔본을 모두 회수해 불살라 버렸지만 190년이 지난 뒤 거사 장명원에 의해 전10권으로 부활했다.

그러나 벽암록은 여전히 어렵고 정복이 힘들었다. “선 수행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이 책이 마지막 관문이지요. 이 이상은 없습니다.” 지현 스님은 13세 때 충남 부여 고란사로 출가했다 명상에 심취해 1970년대 중반 인도를 방랑했다. 인도의 명상가 라즈니시의 서적들을 최초로 한국에 소개한 이도 지현 스님이었다. 그는 명상의 끝이 결국 선에 이를 것이라고 결론짓고 1980년 다시 송광사로 재출가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출가 후 덕산 스님에게서 선어록을 공부한 이래 거의 독학하다시피 해 ‘선시감상사전’ 등을 집필하기도 했다. “벽암록은 모두 당송 시대 평민들의 사투리인 속어로 돼 있습니다. 문장체가 아닌 구어체이고 생활용어들입니다. 속어를 공부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당송 때의 속어사전까지 원전을 구해 공부했지요.”

스님은 벽암록을 번역하면서 아예 ‘벽암록 속어낱말사전’을 출간했다. 책을 발간한 민족사 윤재승 사장은 “책 번역하면서 사전 한 권까지 만들어 냈으니 보통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벽암록이 3, 4종 나왔으나 일부만 번역돼 있거나 해설 없이 출간됐다”며 “돈과는 전혀 관계없는 책이나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윤영찬 기자)

07. 06. 10

P.S. 그간에 <벽암록> 번역으로 가장 많이 읽힌 건 안동림 역주의 <벽암록>(현암사, 1999)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은 아니고 대신에 내가 재미있게 읽은 책은 김용옥의 <화두, 혜능과 셰익스피어>(통나무, 1998)이다. 불교에 문외한이더라도 교양서로 충분히 일독할 만한 책이다. 그밖에 '선'과 관련하여 내가 상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은 스즈키 다이세쓰나 토머스 머튼 같은 학자/명상가들의 이름이다. 찾아보니 스즈키의 <선이란 무엇인가>(이론과실천, 2006)가 작년에 다시 번역돼 나왔고, 머튼의 책은 <신비주의와 선의 대가들>(고려원, 1994) 등이 절판된 듯하다. 가장 최근에 나온 <토머스 머튼과 틱낫한>(두레, 2007)이 소개서로는 유용하겠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달팽이 2007-06-10 21:48   좋아요 0 | URL
잘 읽고 갑니다.
퍼갑니다.

반조 2007-06-10 23:24   좋아요 0 | URL
로쟈 님의 안목을 거쳐 소개되는 글들 고맙습니다. 특히 저는 선어록에 관심이 많은데 무척 흥미로운 기사이군요.

그런데, 문화일보의 "국내에 번역된 벽암록치고, 수시에서 송의 평창에 이르기까지를 완전히 번역한 책은 없었다"는 말은 틀린 듯합니다. 장경각에서 선림고경총서로 번역한 3권짜리 벽암록은 본칙의 수시, 착어, 평창, 그리고 송의 착어, 평창을 전부 번역하였습니다. 번역도 매우 훌륭하다고 봅니다.

"국내 최초의 벽암록 완역 해설본"이란 타이틀은 아마도 "역자의 해설까지 곁들인 완역본"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해설은 정말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완역+해설"은 국내 최초이긴 하지요. (그러나 제 예감으로는 이 "해설"이 한문 자구에 대한 해설이지 내용에 대한 해설이 아닐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해설은 환영할 만하겠지요.) 그러나 국내 최초 완역본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지현스님은 "지금까지 벽암록이 3, 4종 나왔으나 일부만 번역돼 있거나 해설 없이 출간됐다"는 촌평을 했겠지요. 제가 볼 때, 이 완역본의 최대 의의는 5권의 벽암록 속어낱말사전일 것같습니다. 이제까지 누구도 그것을 해내지 못했으니까요.

그리고 언급하신 안동림 번역본은, 제 판단으로는, 인터넷 용어로 '안습'입니다. 아직 구입하지 안으셨다면 구입하지 마세요. 누군가 이 번역본을 제대로 혹평(!)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로쟈 2007-06-10 23:3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쪽으로는 반조님이 정확하시겠습니다. 사실 '해설본'이라거나 '속어낱말사전'만으로 '완역'의 의의를 평가할 수는 없겠고, 기존의 '완역본'과 대조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네요. 안동림 역은 아무래도 '가장 구하기 쉬운 번역본'이라는 게 한몫했을 거 같습니다. 아무도 문제가 많은 번역에 대한 '비평'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 당연해 보이기도 하네요. 다들 수양이 깊으신 탓이겠지요...

테렌티우스 2007-06-11 08:02   좋아요 0 | URL
지금은 아마 절판되었겠지만 정음사에서 이전에 에리히 프롬과 스즈키 다이세쓰, 그리고 리차드 데마르티노라는 세 사람의 논문을 차례로 묶은 '선과 정신분석'(정음사)이라는 책이 있었지요. 마지막 데마르티노라는 사람의 글만을 제외한다면 참으로 훌륭한 선에의 입문서입니다. 절판된 것이 무척 아쉬운데, 그후로 새로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또 물론 번역의 질이 들쑥날쑥 하지만 그럼에도 장경각의 '선림고경총서'(36권?)도 빼놓을 수 없지요.^^

로쟈 2007-06-11 08:44   좋아요 0 | URL
'선과 정신분석'은 저도 생각이 나네요. '선과 푸코' 같은 글도 언제 한번 쓰셔야겠습니다.^^

테렌티우스 2007-06-12 20:26   좋아요 0 | URL
흠 그렇지 않아도 푸코가 1978년의 두번째 일본방문때 한 선방을 방문해서 고승(이름은 생각이 안 나네요...) 및 그 절의 선승들과 대화한 대담이 남아있어요. 제목이 '푸코와 선불교'이지요.

제가 이후에 '푸코의 일본강연'이라는 제명으로 (첫번째 방문인 1971년 그리고 이 1978년의) 약 10여개의 학회발제, 발표, 대담 등을 묶어서 해제와 함께 번역해볼 작정입니다(분량이 아주 꽤 됩니다...).

책이 좀 나갈까요?^^

로쟈 2007-06-12 20:40   좋아요 0 | URL
'아주 꽤' 된다면 흠... <주체의 해석학>도 그다지 안 나가는 듯해서요.^^

yoonta 2007-06-13 03:07   좋아요 0 | URL
앗 재미있겠습니다. 테렌치우스님 책 내신다면 한권 미리 예약합니다. ^^

테렌티우스 2007-06-13 22:34   좋아요 0 | URL
이름을 다시 테렌티우스로 바꾸었습니다. 요즘 라틴어를 배우는데 Terentius는 기원전 2세기의 인물이므로 글 중간의 ti를 중세 라틴어 이후의 발음인 '치'가 아니라 '티'라고 읽어야 한답니다... ㅠㅠ 이름을 자꾸 바꾸고 헛갈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레디앙에서 이샤야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애플북스, 2007)에 대한 리뷰 하나를 옮겨놓는다. 나는 책이 나오자 마자 원서와 함께 대조해 가면 절반쯤 읽었더랬다. 그 이상은 다른 일들에 치어 잠시 미뤄졌는데, 번역돼 나온 것이 반갑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좀 무성의한 대목들이 자주 눈에 띄는 번역서이다. 항상 사정권 안에 있던 책이 당장 눈에 띄지 않아서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지적하기로 한다. 미리 말해두자면,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하여'란 부제대로 책은 일단 톨스토이와 그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고급스런 에세이로 읽혀야 한다. 무슨 경영서나 처세서로 포장한 출판사측의 '기획'에 대해서는 거듭 유감을 표하고 싶다(그런다고 책이 더 팔리지도 않는다). 아래 리뷰 또한 그런 지적을 포함하고 있다.    

레디앙(07. 06. 09) "톨스토이, 고슴도치라 생각한 여우"

인간은 크게 보면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에 관련시키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이런 시스템은 모든 것을 조직시키는 하나의 보편 원리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시스템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생각하며 느낀다. 다른 한 부류는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이 목표들은 흔히 서로 관계가 없으며 때로는 모순되기도 한다. 물론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이유에서 사실적인 관계를 갖지만 도덕적이고 미학적 원리에 근거한 관계는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행동지향적이며, 생각의 방향을 좁혀가기보다는 확산시키는 경향을 띤다.”(p.7~8)

이사야 벌린, 우리에게는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로 잘 알려진 저자는 전자를 고슴도치형 인간, 후자를 여우형 인간이라고 명명한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 단테, 파스칼, 헤겔,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입센, 프루스트가 고슴도치형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몽테뉴, 에라스무스, 몰리에르, 괴테, 푸슈킨, 발자크, 조이스는 여우형이다. 그렇다면 톨스토이는 어느 쪽에 속할 것인가? 이사야 벌린은 이 질문으로 『고슴도치와 여우』를 시작한다. 곧 “톨스토이가 일원론자인지 다원론자인지, 결국 톨스토이가 하나의 비전을 추구했는지 다양한 비전을 추구했는지”(p.11)를 묻는 것이다.

이사야 벌린은 톨스토이의 작품 중 가장 논란이 많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과 평화』를 텍스트로 삼는다. 『전쟁과 평화』는 문학적 작품성은 높지만 작가의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언설이 결정적인 흠으로 지적되는 작품이다. 곧 톨스토이의 장점과 단점이 다 담겨져 있는 셈이다. “젊은 지식인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특징답게 설익은 지식으로 가르치려는 (그 결과로 예술적 가치를 손상시키는) 톨스토이의 성향 탓…중략…일탈의 전형적인 예” “톨스토이가 훌륭한 사상가라기보다 훌륭한 작가라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이다” 등등.(p.19) 하지만 이사야 벌린은 접근을 조금 달리한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왜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달리 말한다면 『전쟁과 평화』를 톨스토이의 진정한 작품으로 말하고자 한다. 결론을 줄여 말한다면, 톨스토이는 스스로를 고슴도치라고 믿었던 여우다. 근원적인 질문에 근원적인 대답을 원했지만 그 질문과 대답은 늘 구체적이고도 세부적인 것들 속에서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톨스토이의 모습을 한낱 한계라는 짧은 단어로 규정해 버리면 안 된다. 그것은 자아와 세계에 대한 작가의 정직함이자 성실함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자아와 세계를 묻지 않는 작가가 그 얼마나 많은가?

“톨스토이 식으로 말하면 삶을 만들어가는 진정한 구성 요소인 ‘생각, 지식, 시, 음악, 사랑, 우정, 증오, 열정’을 기록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할까?”(p.45)

그렇다면 톨스토이를 “여우냐 고슴도치냐”라고 묻는 이사야 벌린 자신은 여우일까 고슴도치일까? 책을 번역한 강주헌은 “전통적인 자유주의 지지자였으며, 다원주의를 신봉했다. 사회를 조직하는 문제에 단 하나의 해결책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라는 벌린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며 “여우형에 가깝다”라고 평한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이 책 『고슴도치와 여우』는 어떤 유형의 책일까? 책을 장식하고 있는 붉은 색 띠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방어형의 고슴도치 경영과 공격형인 여우 경영이 적절히 조화되어야 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말씀이시다. 이건희의 멘트가 등장하니 경제경영서? 띠지 뒤쪽에는 “당신은 여우로 살 것인가 아니면, 고슴도치로 살 것인가? 이 책은 톨스토이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당신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쯤이면 자기계발서가 될 노릇이다.

한마디로 『고슴도치와 여우』는 겉과 속이 다르게 포장된 책이다. 카피문구나 책의 장정과 편집 스타일은 경제경영이나 자기계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띄고 있지만 그 속 내용은 톨스토이라는 대작가의 역사관과 내면을 짧지만 깊이 있게 파헤치고 있는 인문서이기 때문이다. 상술이 본질을 압도하고 있음이다. 형식이 내용을 앞지른다. 그것이 책을 읽는 내내 가시가 되어 찌른다. 자본주의라는 고슴도치가 여우를 찌른다.(김용필/ 텍스트)

07. 06. 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