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뒤늦게 알게 된 것이지만 재미철학자 승계호 텍사스대 석좌교수가 내한하여 강연회를 가졌다. 'T. K. Seung'이름을 저자 혹은 편자로 달고 있는 책을 나는 두어 권 갖고 있는데, 영어명 T. K. Seung이 바로 승계호 교수이다. 기사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김재권, 조가경, 정화열, 이광세 등과 함께 가장 손꼽히는 재미철학자가 아닌가 싶다('한국철학자'라고 분류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의 책은 모두 국내에 한두 권씩은 소개돼 있다. 특별히 더 눈길을 끈 건 이 분이 정치철학뿐만 아니라  문화철학·문화비평 쪽도 다룬다는 것. 이번 석학강연의 주제 중 하나도 '과학과 시의 갈등'이었다. 책으로 묶여 나오길 기대해본다.

조선일보(07. 05. 29) 과학과 詩는 왜 싸웠나

조선일보사와 한국학술협의회, 대우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9회 석학연속강좌’가 오는 31일부터 이틀 동안 열린다. 이번에 초청된 석학은 정치철학과 문화철학·문화비평의 대가로 손꼽히는 승계호(承啓浩·T K Seung·74) 미국 텍사스대 인문학 석좌교수다. 서울 은행회관에서 열리는 그의 공개강연은 ▲31일 오후 3~6시 ‘과학과 시의 갈등’ ▲6월 1일 오후 3~6시 ‘마음과 물질의 신비’를 주제로 두 차례 이뤄진다.

평북 정주 출신인 승 교수는 6·25 전쟁에 국군으로 참전했고, 연세대를 거쳐 1954년 도미(渡美), 예일대에서 공부했다. 대학원 시절 단테를 주제로 한 문학비평서를 써서 명성을 높였으며, 이후 플라톤·칸트·니체 등 서양철학의 거장들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해 미국 지성계에 신선한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직관과 구성(Intuition and Construction·1993)’의 반향은 컸다. 현재 미국에서 명성이 높은 한국계 철학자는 그와 김재권(브라운대), 정화열(모라비아대), 조가경(뉴욕주립대), 이광세(켄트주립대) 교수 등이 있다.

첫 번째 강연에서 승 교수는 서양철학의 정신을 이루는 두 기둥인 ‘과학’과 ‘시(詩)’의 싸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싸움은 고대 그리스철학이 탄생했을 바로 그 때 시작됐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모든 지혜의 샘으로 존중받았으나 그 권위는 새로 등장한 과학(고대의 과학은 자연학 개념)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둘 중에서 어느 쪽이 궁극적 진리를 알 수 있느냐는 싸움이었다. 이 싸움의 중간에 탄생한 것이 바로 철학이었으며, 시나 과학보다 더 높은 수준의 지혜를 보존하고자 했다. 플라톤은 과학과 시 사이 어딘가에 자신의 철학을 구축해 놓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논리학·자연학은 물론 시학·정치학까지 망라한 개별 과학들의 체계였다.

철학과 자연과학을 구별하는 경계선은 데카르트에 가서야 도입됐다. 칸트는 형이상학을 ‘선험적 원리들을 바탕에 둔 과학’으로 건립하려 했다. 하지만 궁극적 진리의 소중함을 보이고자 했던 그의 포부는 현대철학계에서 어느덧 사라져 버렸고 이제 대부분의 철학적 저술은 시시하고 지루한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더 이상 ‘만학(萬學)의 여왕’이 아닌 철학을 현재의 곤경에서 구출하려면 다시 철학에서 ‘과학’과 ‘시’의 역할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강연은 심신(心身)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탐구다. 승 교수는 “나의 마음과 나의 뇌는 같은 것이므로, 뇌가 마음에 작용한다든가 그 역이 성립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현대의 심신 이론 중 정신을 물리적 현상의 하나로 보는 ‘환원론’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세포들이 생물학적이고 유기적으로 연결돼 관계망을 형성함에 따라 생명과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며, 이 관념을 추적한다면 물질세계의 내재적 생명 원리가 바로 영혼이라는 플라톤의 사상에 닿게 된다는 것이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인 정신과 물질은 결국 동일하다는 독특한 이론이다.

지난 2000년 시작한 석학연속강좌는 지금까지 김재권 미국 브라운대 석좌교수(철학),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독일 뮌헨대 명예교수(신학), 다니엘 데넷 미국 터프츠대 교수(인지과학), 모리스 고들리에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원장(경제인류학), 정재식 미국 보스턴대 석좌교수(종교사회학), 마이클 루스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석좌교수(생물학 철학),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영문학), 필립 큔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중국역사학)를 초청해 여덟 차례의 강좌를 열었다.(유석재 기자)

조선일보(07. 05. 30) “철학은 좀 더 시에 가까워져야”

조선일보와 한국학술협의회, 대우재단은 정치철학과 문학비평·문화철학의 세계적 권위자 승계호(承啓浩·T K Seung) 미국 텍사스대 인문학 석좌교수를 초청, ‘2007 제9회 석학 연속강좌’를 갖는다. 지난 2000년 시작한 석학연속강좌는 학문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석학을 초청, 강연과 토론의 장(場)을 통해 세계 첨단의 지식 흐름을 소개해 왔다. 이번 주제는 ‘서양철학의 문화적 배경’이다. 승계호 교수는 플라톤·단테·칸트·괴테·니체와 같은 서양 지성의 거장들에 대해 독특한 해석을 내놓으면서 미국 학계에 신선한 파문을 일으켜 왔다. 첫 번째 강연에선 서양철학의 역사적 흐름에서 나타난 ‘시(詩)’와 ‘과학’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갈등에 대해 말하고, 두 번째 강연에선 심신(心身)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이야기한다. 한국철학회 회장을 지낸 엄정식(嚴廷植) 서강대 교수가 그를 만나 대담을 가졌다(*대담은 원본을 옮겨놓는다).

엄정식 교수=승 교수님 오래간만입니다. 1995년에 열린 '한민족 철학자 대회'때 다녀가신 적이 있지요.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어떠세요?  

승계호 교수=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정말 이번에는 한국이 더 발전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제 철학에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좀 더 다듬어졌다고나 할까요.  

엄정식=우선 선생님이 철학을 공부하신 동기를 말씀해주시지요.  

승계호=저는 평안도 정주에서 남하하여 전쟁에 참전했던 6·25세대입니다. 도미 유학의 기회를 얻었을 때, 무엇보다 이 전쟁의 의미에 관해서 연구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서구인들의 전쟁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서구 문화를 심층적으로 공부해야 그 전쟁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 가운데서도 제일 효과적으로 서양문화를 알려주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학을 전공하게 되면 영문학, 불문학, 독문학과 같은 식으로 공부해야 하는 거예요. 전공을 나누기 전에는 세계 문학에 대해서 배우는데, 공부를 하면서 범위가 점점 좁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철학이었습니다.  

엄정식=6·25 전쟁을 경험하시고 나서, 그런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을 제대로 파악하시기 위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겠군요.  

승계호=그렇지요. 한국을 이해하려면 한국만 보고서는 이해를 못합니다. 세계 문화 전체 속에서 파악을 해야 합니다.  

엄정식=철학이라고 간단히 말씀하셨지만, 용어 자체가 너무 넓은거 같군요. 언젠가 콰인(Quaine·1908~2000, 미국의 분석철학자)에게 이런 물음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철학이 뭐냐?” 콰인의 대답으로는 철학은 너무나 넓어서 철학자가 하는 게 철학이고, 본인에게는 논리학이 철학이라는 겁니다. 다른 이에게는 문학이 철학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문화가 철학이고. 선생님에게는 철학이 무엇이고, 왜 그런 철학을 하셨는지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승계호=말씀대로 철학은 굉장히 광범위하지요. 그래서 많이 방황했습니다. 결국 예일대학을 그만두고, 로스쿨을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 로스쿨에 입학신청서를 냈는데 둘 다 합격한 거예요. 고심 끝에 예일대학 로스쿨을 선택했는데, 공부를 해보니 법학은 별로 재미가 없더군요. 법 공부라는 게 단지 직업교육이었어요. 그래서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법관이 되어서 일생을 보낼 수 있을까? 법을 공부해서 내가 하고자 하는 서양 문화를 이해를 하는데 도움이 될까? 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법철학을 하는 노스로프(F.S.C. Northrop)를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그 분이 저에게는 동양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더니, 나보고는 서양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라는 것이었어요. 결국 두 번째 학기에 로스쿨을 그만두고, 다시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도 하버드 대학과 예일대학 철학과에 서류를 냈습니다. 그런데 운 좋게도 하버드 대학에서는 전교에서 한 명에게 주는 유니버시티 장학금을 주겠다고 해요. 그래서 하버드를 가려고 마음먹던 중에, 예일대학 철학과장을 맡고 있던 존 슈뢰더를 만나게 되었어요. 그 분은 칸트학자였는데, 하버드에 가지 말라고 말리는 겁니다. 거기 가봐야 콰인이니 누구니 맨 논리학만 공부할게 뻔한데, 법과 공부가 싫다고 뛰쳐나온 나온 녀석이 하버드에 가면 공부하기 더 싫어질 거라고 하더라구요. 그렇지만 자기와 같이 있으면, 내가 하고 싶은 문화에 대해서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을 거다. 뭐 이렇게 설득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일 대학에 가서 다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엄정식=정말 긴 이야기군요.  

승계호=사실 그 전에 예일 대학 학부를 다니던 1학년 때 문학강좌를 들으면서 서양 문학, 특히 ‘시’는 동양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양의 문학은 서양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때 학기말에, 그 강의를 하셨던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강의가 감명 깊었다는 이야기를 드리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여름방학 3개월 동안 서양 문학과 문화를 더 이해하기 위해서 읽어야 할 작품들을 적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께서 긴 목록을 적어 주셨어요. 받고 나서 제가 물었습니다.적어주신 것이 중요한 작품 모두냐고요.그랬더니 하나가 더 있기는 한데, 어차피 어려워서 읽지 못할 거라 적지 않았다는 거예요. 당연히 나는 그 작품이 뭐냐고 물었더니, 그게 바로 단테의 '신곡'이라는 겁니다. 그 말에 오기가 날 수 밖에요. 그 해 여름방학 내내 다른 것은 제쳐두고, 그것만 읽었는데 정말 어려웠어요. 그 후에 많은 방황을 했던 거지요.

제가 로스쿨 다니면서 그 동안 접어두었던 '신곡'을 여름방학 때 다시 읽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도서관에 가보니 단테의 '신곡'에 관한 책만 수천 권이 있었을 거예요. 그 중에서 몇 권 빌려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니 조금 눈이 뜨이기 시작했는데, 눈이 뜨일수록 '신곡'은참으로 기형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서사시(epic)는 영웅이야기인데, '신곡'은 서사시이지만 영웅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이것을 ‘서사시적 영웅 없는 서사시’(Epic without epic hero)라고 불렀어요. 로스쿨 그만둘 때까지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일대학 철학과 대학원 1학년 1학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공부했어요. 그리고 그 책에 대해서 아퀴나스가 쓴 주석서를 읽었는데, 그게 기가 막히더라구요. 그 주석서를 읽으면서 단테 '신곡'에 대한 해결책이 생각났어요.  

단테의 '신곡'을 보면, 천당이 10군데, 연옥은 7군데, 지옥은 9군데 입니다. 이게 정합성이 있어야 합니다. 지옥에서는 죄 때문에 처벌 받고 연옥에서는 갱생하는 것이니, 지옥의 수와 연옥의 수가 서로 맞아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또 천당하고도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갱생한 사람이 천당으로 가는 건데, 천당의 수와 연옥의 수가 다릅니다. 그런데 내가 보았던 것은 프라이머리 릴리전(primary religion)이 3개였습니다. 지옥도 그렇고 연옥도 그렇고, 그게 성부, 성자, 성신과 연결됩니다. 그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에도 나옵니다. '신곡'에서는 사람의 행위가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것인데, 영웅이 바로 삼위일체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읽으면서, 그것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엄정식=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석서가 아주 중요했군요.  

승계호=그렇지요, 그래서 제가 책을 하나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생각난 것이 가끔 마주칠 때마다 도와줄 것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하시던 예일 대학원의 대학원장님이었습니다. 바로 대학원장님을 찾아가 계획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 당시에 무려 1,000불이라는 거금을 지원해 주셨습니다. 그때 1,000불이면, 지금 돈으로 10,000불 정도가 될겁니다. 그래서 그해 여름에 Fragile Leaves of the Sybyl: Dante's Master Plan(1962)을 썼습니다.  

엄정식=단테를 통해서 철학으로 들어오신 거군요.

승계호=그렇지요. 그리고 그게 바로 ‘주제학' 을 한 것입니다.  

엄정식=선생님의 ‘주제학’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승계호=간단해요. 주제가 뭐냐,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단테의 해석에서 내가 찾아낸 주제가 통하지 않는 것이 없어요.  

엄정식=그럼 정합성과 일관성에 의해서 ‘주제’를 찾아내시는 거군요. 뭘 다루고 의도가 뭔가 등등. 그러나 문학적으로 표현해도 되고, 철학적으로 표현해도 되고,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표현하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군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필요는 없고, 주제에 대한 여러 가지의 해석은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덜질 수 있겠군요. 주제가 여러 가지로 나올 경우,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있을까요?  

승계호=예를 들어 단테의 '신곡'을 얼마나 잘 해석할 수 있느냐, 그것이 기준입니다.  

엄정식=그렇다면 가장 포괄적이고,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택하는 것이로군요.  

승계호=그렇습니다. 광범위하게 가장 포괄적이어야 합니다.  

엄정식=버트란드 러셀(B. Russell)은 철학이 과학과 종교의 중간쯤에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철학이 시와 과학의 중간쯤에 있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아마 선생님의 문학적 배경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러셀이 신화를 읽으면 종교적 측면을 많이 볼 것이고, 선생님께서는 시적인 측면을 많이 보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화에서는 표현 방식에서 시적인 방식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그런 표현 방식에도 더 많은 관심을 가지셔야 하지 않을까요?  

승계호=한국 사람들은 ‘시’(詩), ‘시적’(詩的)이라고 하면 이해를 못합니다. 대개 한국사람들은 ‘시’하면 ‘시조’(時調)를 떠올리는데, 서양에서의 시는 시조와 다릅니다. 우리는 궁극적이라고 하면 과학적이라고 보고, 과학 이상의 것을 더 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과학자 자신은 새로운 이론을 내놓을 때 그것이 시적 작업이고 과학 자체가 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표현 방식보다는 내용과 주제가 더 중요합니다.

엄정식=대체로 선생님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이론학’이나 ‘실천학’과는 다른 ‘포이에티케(poietike·詩作)’와 ‘포에시스(poiesis·詩)’에 대한 견해를 말씀하고 계시는군요. 그럼 선생님의 생각은 넓은 의미로 문학적, 더 넓게는 인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께서는 사실 단테의 '신곡'도 신에 관한 것인데도 시적인 것을 보시더니, 니체를 논의할 때도 그렇고, 또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도 신과의 대결인데도 시적인 요소를 찾아내시는군요. 아주 흥미롭습니다.  

승계호=니체를 그렇게 해석한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대체로 그것을 ‘철학적 경구(Philosophical Aphorism)’로 보았거든요.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엄정식=그러니까 선생님의 철학관은 그런 것이군요. 앞서도 말씀하셨던 콰인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승계호=정반대지요!  

엄정식=하긴 콰인에게 왜 논리학만 하고, 종교나 예술이나 이런 쪽은 관심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논리학만 하기에도 바쁘다고 하더군요. 선생님의 철학관을 이해하지 않으면, 선생님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군요. 흥미로운 것은 선생님의 철학관이 있지만, 다른 철학에 대해서 그 철학관을 가지고 평가하는 대목이 있더군요. 세미나에서 다루셨던 ‘프레게의 논리혁명’과 ‘콰인의 형이상학 혁명’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언어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관심을 보이시면서도, 언어철학에서 말하는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이라는 표현은 잘 쓰지 않으시더군요. 특징적으로 말해서 신화 시대부터 플라톤의 등장으로 ‘존재론적 전환(Existential Turn)’, 그 후부터 데카르트에 이르면서 ‘인식론적 전환(Epistemic Turn)’으로, 그리고 현대철학에서는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이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즉 현대철학에서는 언어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그거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생각으로 보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죠.  

승계호=제가 보기에 프레게의 철학을 논의하면서, 데카르트와 칸트의 논의를 연결시켜서 생각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데카르트 이후 모든 것은 객관적이어야 했고, 더 나아가 프레게는 모든 논의에서 심리학주의를 배제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프레게는 새로운 논리학을 내세웠고, 이것이 논리혁명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언어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단순히 ‘언어적 전환’이라고 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언어 자체가 대상을 보증해주지 않습니다.  

논리혁명이라면, 정말 논리가 있다면, 데카르트의 이론을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데카르트-칸트-프레게에 이르기까지 핵심은 철학을 과학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그 생각을 실현 못했지만, 데카르트 자신은 수학을 진짜 과학으로 보았습니다. 또칸트는 이 수학을 이용해서 진정한 과학을 한다고 보았고, 더 나아가 철학도 결국 순수하게 아 프리오리(a priori)하게(=선험적으로) 과학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을 생각해 보세요.  

프레게는 칸트가 희망하고 꿈꾸던 철학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만드느냐는 문제에 대해 고민했던 것이죠. 외연 논리로 칸트의 선험적 세계를 분석한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선험적 직관을 가지고 했는데, 프레게는 선험적인 것 없이 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실패했습니다. 그 이후에 카르납이나 콰인이 했던 작업은 칸트가 하려는 것을 러셀이나 프레게가 실패했다고 해서 포기할 수 없다는 거지요. 정말로 철학을 과학화할 수 있는 더 좋은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철학을 자연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어적 전회와 같은 것보다 어떻게 해야 철학이 진정한 과학으로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더 중요합니다.  

엄정식=선생님께서는 철학을 넓은 의미의 시와 과학의 중간쯤에 있다고 보시고 있습니다. 서양의 철학은 어떻게 보면 시적인 측면에서 과학적인 측면으로 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언어적 전환은 별 의미 없고, 철학은 끊임없이 과학화의 과정을 밟았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승계호=콰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형이상학적으로 해결 못한 문제들은 과학화 되면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엄정식=근데 그 해석은 제가 볼 때는 분석철학 안에서의 해석이고, 그 중에서 특히 과학화의 경향을 쫓아가는 해석 같아요. 칸트의 '프롤레고메나'에서 “과학을 의식하지 않는 형이상학은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경향은 이제 프레게와 콰인한테 이어졌고, 전부 과학화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현대 철학의 과정을 보면 후설과 사르트르와 데리다로 이어지는 그런 흐름도 있습니다. 그것도 중요한 흐름이었고, 그것은 한마디로 반과학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분석철학 내에서도 과학을 의식했지만, 철학은 과학과 다르다는 논의도 있습니다. 논리학을 형식과학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자연과학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또 비트겐슈타인도 어떤 의미에서든 철학은 과학과 다르다고 했는데, 선생님은 그런 흐름을 과소평가 하는 것이 아닐까요?  

승계호=재미난 질문입니다. 현상학은 원래가 반-과학이 아닙니다.  

엄정식=그것을 넘어서고자 한 것이죠.  

승계호=그게 중요합니다. 사실은 데리다가 나온 이유가 과학주의를 추구하면서 나왔습니다. 과학화를 의식한 것이지요.

엄정식=그러면 앞으로 현대철학은 어느 방향으로 갈 것으로 생각하세요?

승계호= 실천적이라는 것은 어떤 철학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은 완전한 이론을 추구하지는 않고 가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완벽한 설명은 형이상학이지 과학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엄정식=참, 공개강연에서 다루실 심신(心身) 문제와 관련해서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은데요. 저는 오랫동안 인격체적 ‘자아’의 문제에 고심해 왔습니다. 그런데 특히 지난 10여 년 동안 이른바 ‘공동체적 자아’의 가능성에 관해 연구해왔습니다. 인격적 자아를 담론에 끌어 들였을 때 인격체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듯이 여기서도 공동체를 더 잘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승계호=저도 엄 교수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동합니다. 인격체는 어떤 의미로 하나의 공동체이고 그러한 관점에서 가족이나 민족, 국가 같은 공동체에 자아를 담론의 전제로 도입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엄정식=사실 저는 이 개념은 현대 한국의 역사적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에는 ‘민족적 자아’의 마멸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고 지금의 분단시대는 이 자아의 분열을 획책한다고, 그리고 통일은 바로 이 자아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해석 할 수 있지요.

승계호=흥미 있는 발상입니다. 그러한 발상과 개념의 구체화는 조국의 현실을 철학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데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엄정식=선생님을 비롯해서 외국에서 철학을 하는 분들은 대부분 한국적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한반도에서는, 특히 남한에서는 동서와 고금이 심층적으로 만나고 있기 때문에 철학하기에는 최적의 풍토를 조성한 셈이거든요.

승계호=그러면 한국에서 훌륭한 철학자가 나타나기를 기대해도 좋겠군요.

엄정식=긴 시간 동안 감사합니다. 내년에 서울에서 개최될 ‘세계 철학자 대회’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입니다. 많이 지원해 주십시오. 자주 오셔서 현대 한국 철학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기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승계호=감사합니다.

엄정식=우리 이야기들이 많은 분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07. 06. 13.

P.S. 승계호 교수의 책으론 정치철학서로 분류되는 <직관과 구성>(나남, 1999)이 진작에 번역돼 있다(분량 때문에 미뤄둔 책이었지만 나는 저자의 이번 방한을 계기로 구입했다). 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동명사, 1999)와 함께 지난 1993년에 출간된 이 분야의 '문제작'이란 평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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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6-13 17:55   좋아요 0 | URL
엇 이 분의 책의 주제가 그럼 정의론, 자유 이런 쪽이란 말씀인가요? 음.

로쟈 2007-06-14 13:34   좋아요 0 | URL
예, 정치철학을 다룹니다. 롤즈와 '맞장'을 떴다고 소개돼 있습니다...
 

교육관련 기사를 옮겨놓는다(얼핏 사회학자 부르디외를 떠올리게 한다). 제목의 '계급탈출'은 시사하는 바가 있는데, 그것이 막바로 연상시키는 대척점의 구호가 '계급철폐'이기 때문이다.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의 '무늬만 계급철폐'에 상응하는 것이 요즘 자본주의 체제하의 '무늬만 계급탈출'이 아닐까도 싶고. 교육이 신분상승의 기회로 작용하던 지난 년대에 비하면 어느덧 신분유지의 수단으로 더 기운 듯한 세태이기에 교육에 관한 자본주의적 신화('To Sir, with Love'의 신화)의 유효성에 대해서 질문하게끔 한다. 다른 대안은 무엇인가?   

한겨레(07. 06. 13) "맛있게 먹었니?” 물으면 중산층

기생의 딸 춘향이는 변사또의 유혹을 뿌리치고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이몽룡과 결혼한 천민 성춘향은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이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의 옥중생활은 오히려 신분을 깎아내릴 가능성이 더 크다. 현대판 계급탈출은 어떻게 가능할까?

미국 텍사스의 교육 전문가 루비 페인(56·) 박사는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사회 계급을 부유층·중산층·빈곤층으로 나눴을 때 각 계급은 고유의 생활 양식과 특성을 지니는데, 이를 이해함으로써 보다 높은 계급의 특성을 배우고 익히면 계급탈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생활의 모습과 그 의미가 사회적 계급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한다(*그러니까 페인 박사의 연구는 '계급의 문화적 코드'에 관한 연구이기도 하다).

가령 지금 막 끝낸 저녁식사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따라 자신이 속한 사회적 계급이 드러난다. 빈곤층은 ‘배불리 먹었니?’라고 묻는다면, 중산층은 ‘맛있게 먹었니?’라고 묻는다. 부유층의 질문 방식은 ‘차려진 음식이 보기 좋게 나왔니?’다. 어떤 옷을 좋아하는지를 물어도 계급은 드러난다. 빈곤층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나만의 스타일’을 강조하지만, 중산층은 ‘브랜드’를 따진다. 부유층에겐 ‘예술성’이 중요하다.

각 계급은 돈의 목적에 대해서도 다른 관점을 가진다. 빈곤층은 돈을 ’소비’하지만, 중산층은 돈을 ‘관리’하고, 부유층은 돈을 ‘저축하거나 투자’한다. 또 빈곤층은 미래의 결과보다는 현재를 중시하지만, 중산층은 앞날이 어떻게 될지에 관심이 많다. 부유층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전통·역사 등 과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빈곤층에게 삶은 운명이다. 해도 안 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중산층에게 삶은 선택이다. 잘만 고르면 좋은 일이 생긴다. 그러나 부유층에게는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운명이다. 가족 구성도 다르다. 빈곤층 가족은 모계 중심인 반면, 중산층 가족은 부계 중심이다. 부유층 가족은 돈 있는 쪽을 중심으로 꾸려진다. 그리고 빈곤층의 재산은 ‘사람’이지만, 중산층의 재산은 ‘물건’들이다. 부유층의 재산은 ‘골동품처럼 희소성을 갖는 것들’이다.

원래 교사 출신으로 30년동안 사회계급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페인 박사는 10년 전부터 미국 전역의 교사들을 대상으로 ‘계급 속에 숨어있는 규칙’이라는 계급성 교육을 진행해왔다. 그녀의 강의는 꽤나 인기가 있어서 <뉴욕타임스>는 2005년에 교육을 신청한 조지아주 글린카운티의 교육이 2년이 지난 뒤에야 열렸으나, 1400여명의 교사들이 참여해 호황을 이뤘다고 보도했다. 더욱이 이 교육 프로그램 덕분에 많은 교사들이 학생들, 특히 빈곤층 학생들을 잘 이해하게 됐다며 고마워하고 있기도 하다.

대부분 중산층 출신인 교사들은 빈곤층 학생들의 의지부족·능력부족·태도불량 등을 이해할 수 없다며 ‘속수무책’을 하소연한다. 그러나 페인은 이것 역시 ‘계급적 특성’의 일종으로 교사들은 반드시 계급의 사회적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저소득층 학생들이 싸움을 일삼는 것은 싸움이 그들에겐 중요한 생존기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싸움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교사의 역할은 이들에게 ‘빈곤층을 벗어나 중산층이 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하는지’의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얻고 화이트칼라 직업을 얻고 싶으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용하는 언어 습관을 익히고 △물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버리는 등의 습관을 익히도록 교육하라는 얘기다.

10년동안 이같은 내용으로 교육을 해오며 페인은 많은 교사들을 변화시켰다. 고등학교 과학교사인 스티브 킵은 5년 전만 해도 빈곤층 학생들의 ‘불성실’에 많이 좌절했다. 그러나 계급의 사회적 특성을 이해한 뒤로는 중산층 출신인 자신이 유년시절 가졌던 ‘풍부한 경험’의 기회가 이 아이들에게는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업시간에 보다 많은 현장학습과 실습·실험의 기회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페인이 정의하는 ‘규칙’들이 미국의 빈곤층을 오히려 모욕적으로 묘사해 계급주의와 선입견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페인과 반대편에 서있는 이들은 미국사회가 이젠 고정돼버려서 대다수 빈곤층이 무슨 일을 해도 계속 가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2002년 부시 정부의 낙제학생방지(No Child Left Behind)법안 도입으로 미국 학교들은 전체 성적 외에 특정 하위집단의 성적을 별도로 보고한다. 예컨대 인종적 소수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이나, 극빈층 자녀들의 성적은 전체성적에도 포함되지만 별도로 산출돼 보고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전체 성적이 아무리 좋더라도 이들 집단의 성적이 좋지 않으면, 학교의 평가는 좋을 수 없다. 결국 미국 학교들은 학내 성적의 ‘불평등’을 해소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두루두루 빈곤층 학생의 ‘구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김외현 기자)

07. 06. 13-15.

P.S. 기사가 떠올려주는 건 부르디외의 <재생산>(동문선, 2000) 같은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학교는 독립성과 중립성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지만 현실의 학교는 기존 질서의 재생산이라는 원리를 따른다고 말한다. 이 외에도 저자는 문화자본의 분배 구조를 재생산하는 법칙에 대한 해명을 시도한다. 이 책은 단순히 교육사회학에 국한되지 않고 교육과 사회, 개인행위와 사회질서, 미시사회학과 거시사회학의 상관성을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단, 이러한 구조가 산출해낸 아비투스는 구조보다는 유연하며 얼마간 변화가능하다. 그리고 이 변화된 아비투스는 거꾸로 구조에 영향을 끼친다. 교육의 대안적 가능성이 그나마 비벼댈 수 있는 이론적 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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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theme 2007-06-13 08:41   좋아요 0 | URL
저도 뉴스기사로 봤는데 현상에 대한 분석은 잘 한 것 같더군요. 우리나라도 청소년문제를 고민하면서 한번 참고를 해야하지 않을지..

수유 2007-06-13 20:34   좋아요 0 | URL
나는 자주 "많이 먹었니?" 라고 상대방에게 묻고 가끔 "맛있었니?" 하고 묻습니다. 또 예전에는 메이커를 찾았고 지금은 그저 내게 맞는 스타일을 찾을뿐입니다. 대한민국의 소위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믿는 계층은 이제 '맛있었니?' 라고 물어야 된다는 강박을 지닐지도 모릅니다.(:>)

제 주위의 거의 모든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우는 나라에서 소외되는 계층의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2007-06-13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6-14 00:26   좋아요 0 | URL
z님/ 마지막에 law-copyist는 붙어 있는 것 아닌가요? 왠지 바틀비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네요. 직업상 이상한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게 되었고, 이들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씌어진 게 없다, 는 요지면 될 거 같습니다...
s님/ 저도 왠지 이상한 나라에 온 기분입니다.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요.--;

2007-06-14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6-14 01:01   좋아요 0 | URL
z님/ '법을 의미하는데- 필경사'라고 띄워놓으셨길래요. '법률문서 필경사'인 거겠죠...
 

일요일에 한 모임에 갔다가 우연히 폴 틸리히(1886-1965)를 전공하신 분과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저명한 신학자 정도로 알고 있는 내게 덕분에 '지적 거인'이란 이미지 하나가 더 보태졌다. 마침 레디앙에 틸리히의 종교사회주의를 다룬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참고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레디앙(07. 06. 09) 인간소외 극복 사명 띤 두개 공동체, 종교사회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자본주의체제만 종교를 인정한다? 어떤 자리에서 ‘체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펴는 것이 그 나라의 ‘바른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이야기하곤 한다. 내가 목사라는 것을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감출 것도 아니기에 나랑 서너 번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예의 ‘체제’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될 때 예외 없이 말한다.

목사님이 왜 사회주의를?

“목사님인데... 사회주의에 호의적이신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한 나라가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또 대외적으로 인정되는 ‘체제’가 자본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그 나라에서 펼치는 각종 정책이 ‘사회주의적’일 수 있다는 것, 특히 ‘속세 국가’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빈부 격차를 좁히려는 정책들은 ‘사회주의적 정신’에 기초하여 입안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 그들은 다시 말한다.

“어떻든 사회주의국가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잖습니까?” 왼쪽 가슴에 손수건 달고 다닐 때부터 들었던 말이다. 이론적으로 사회주의체제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도 어이없는 말이려니와 자본주의체제가 종교를 인정한다는 말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이다. 세상 어느 ‘체제’가 종교를 인정하나?

주지하는 대로, 이 나라에서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 것’과 ‘미국을 모국으로 삼는 것’을 동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집회에는 예외 없이 성조기가 등장한다. 미국을 반대하는 것은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빨갱이일 수는 없을 터, 그네들 입장에선 당연한 행동일 수 있겠다.

그러나 과연 기독교 신앙은 친미적이어야 하는지(그게 꼭 미국이래서 뿐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특정한 나라를 추종하는 것이 가능한지), 인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인지 돌이켜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대단한 이론가들의 주장을 빌지 않더라도 내가 남을 짓밟아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체제,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뒤처지는 체제가 성경의 여러 ‘말씀’들과 맞아 떨어지는지 그 정도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나라에서 신앙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할 겨를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유럽에 있는 ‘신앙인’들은 그런 고민을 심각하게 했던 것 같다. 교회를 다닌다면, 성경에 쓰여 있는 ‘말씀’을 믿는다면, 그래서 이 땅을 이끄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삶이 윤택해지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기독교사회주의와 종교사회주의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연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사회주의’를 떠올린다. 그러나 기독교사회주의와 종교사회주의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이론이다. 기독교사회주의는 19세기 중엽에 자본주의 사회의 악마적 착취와 그에 따른 위기의 장기화 등을 타개하려고 영국의 킹슬리(Charles Kingsley), 모리스(F.D.Maurice), 루드로(J.N.Ludlow) 등이 주창한 운동이다. 1850년에 ‘기독교사회주의’라 불린 이 운동은 신자들이 사회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배격하고, 경제적 사회악에 대해 도전하는 것을 기독인의 의무이자 하느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미국, 일본 등으로 번진 이 운동은 본질적으로 ‘교회를 위한 운동’이며 교회의 신앙 부흥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곧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예언자적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가난한 자, 눌린 자, 학대받는 자, 약한 자들을 위한 교회의 저항 운동이었으며, ‘전투적 교회’라는 모델을 채택했다. 반면 패배와 절망의 궁지에서 헤매는 자들에게는 적극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임으로 그들을 그 상황에서 구출해 내는 것, 곧 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와 달리 종교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운동이 아니고, 교회와 사회의 벽을 허무는 운동이었다. 교회가 되었든 세계가 되었든 모두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교회와 세계를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없으며, 오히려 ‘주권’ 아래에 있다고 인정되는 교회보다 교회 밖, 속세에서 ‘주권’을 더 많이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교회 밖의 여러 ‘운동’, ‘현상’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찾자면 어떤 ‘이론’이 가장 ‘성경적’인지 따지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사회주의는 사회 현상을 유지하려는 보수적 전통교회보다 세계 혁명을 부르짖는 사회주의의 실천적 역동성 속에서 종교적 의의를 찾았다. 그러므로 종교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사회주의자들처럼 마르크스주의를 교회에 반하는 이론으로 생각하지 않고 포용하려 했다. 마르크스주의가 갖는 반종교성이나 무신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더 특별한 하느님의 경륜과 손길이 있다고 믿었다.

종교사회주의의 발흥

자본주의가 전성하던 시대에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을 목도한 요한 블룸하르트(John Blumhart)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교에서 종교사회주의의 불씨를 지폈고, 그의 아들인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t)는 ‘하느님의 사랑’이 교회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으며, 종교가 없는 사회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영역이고, 그렇다면 마땅히 사회주의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곳으로 생각했다.(세계의 사회주의자 28-"예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참조) 하느님의 사랑은 그만큼 깊고 넓다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당시 유일한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되고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영향으로 나중에 종교사회주의의 지도자가 된 요(Joh), 뮬러(Mueller), 로츠키(Lhotzky), 쿠터(Kutter), 라가츠(Ragaz), 젊은 시절의 칼 바르트(Karl Barth),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틸리히(Tillich), 하이만(Heimann), 멘니케(Mennicke), 덴(Dehn) 등이 뒤따랐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한 사회민주당을 적극 지지했다는 점이다. 라가츠나 쿠터는 사회민주당이 사회 정의에 아무런 관심도 영향력도 없는 기성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가차 없는 채찍질”이라고 했다. 특히 라가츠는 사회주의를 “장차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빛”이라고 했다.

물론 이들이 모두 같은 생각과 행동 방식을 취했던 것은 아니다. 혹은 정치 일선에 직접 나서기도 했고, 혹은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만 했다. 나중 모습도 모두 같진 않았는데, 라가츠의 경우, 1차대전 이후 러시아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 운동에 환멸을 느끼고 종교사회주의를 종교적 의미로만 국한했다. 칼 바르트도 후에 “하느님의 의지를 특정한 정치적 지향점과 동일하게 볼 수 없다”면서 종교사회주의를 떠났다.



종교사회주의자 틸리히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년 8월 20일 ~ 1965년 10월 22일)는 1918년 독일혁명 이후, 여러 교수들을 규합하여 ‘종교사회주의신문’을 발간하면서 종교사회주의와 관계를 맺었다. 틸리히가 종교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이유는, 첫째, 그를 둘러싼 사회적 여건이 있다. 1차대전 중 틸리히는 국민들이 계급적으로 분열되고 적대적인 관계로 대립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상황을 수수방관하며 오히려 지배계급과 결탁하였다. 틸리히는 기성 교회가 무산자의 인권에 무관심한 것을 개탄하였다.

둘째, 그는 1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으로, 사회주의 혁명만이 제국주의의 ‘계급 분화’를 타파할 것으로 믿었다. 혼돈과 전쟁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아침은 밝아오고 있었다. 부르주아 시대는 가고 프롤레타리아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초월적 메시지와 사회주의 혁명을 연결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음을 알았고, 그것이 종교사회주의였다. 틸리히는 이러한 ‘시대의 징표’를 ‘제2의 카이로스(kairos)’라고 했다. 틸리히에 따르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어느 순간에 이르면 하느님 나라의 핵심적인 현시가 역사 안으로 임하는데, 바로 이런 성숙한 시간을 신약에서 ‘시간의 성취’ 곧 카이로스라고 한다. 이 두 번째 카이로스는 새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창조적인 시간이었다. 틸리히는 카이로스라는 개념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진가를 평가하려 했다.

틸리히가 본 마르크스주의

틸리히는 세계적 위기상황에서 종교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이것만이 부르주아 문화, 사회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인간소외를 극복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틸리히는 사회주의 운동을 외적인 경제적 제도의 변혁이나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그치지 않고 노동자의 자기 소외를 철폐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사회주의는 사회주의 운동의 본래적인 사명을 자각시키며 인간소외를 치유하는 처방이었다. 사회주의가 외적 혁명만 아니라 부르주아로 인해 발생한 인간소외, 더 구체적으로 비인간화에 대한 항거로 발생한 것이라면 종교와 반목될 수 없으며 적대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종교란 인간소외에 대한 해방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틸리히에겐 종교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인간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 최대의 사명을 띤 공동체”였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가 계급이기주의를 강화하고 지나치게 적의를 발산할 때, 종교사회주의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부도덕한 과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며 공동운명을 개척하는 역할을 한다고 봤다.

틸리히의 종교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실존이 본래 가져야 할 위치에서 빗나갔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외형은 인간이나 인간으로 누릴 자유가 없는 사물이나 다름없다고 봤다. 곧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생산과 교환이라는 경제적 메커니즘에 의해 노동자들은 ‘인간 상실’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를 두고 틸리히는 ‘프롤레타리아의 상황’이라고 했다.

틸리히는,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유일한 도구인 노동력마저 위협받게 되며 상시적으로 실업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불안정’하며, ‘고독’하다고 봤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절망’에 빠져 있다고 봤다. 그렇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는 이 ‘상황’을 극복하려고 노동력의 사유화를 반대하며 생산이 공유되는 사회의 확립을 추구하게 된다.

또 하나의 일치된 지점은 ‘돈’에 대한 입장이다. 돈 때문에 인간관계가 왜곡되고 결국 인간의 소외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틸리히와 마르크스는 일치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노동력을 파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그로 인해 인간성이 파괴되고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를 박탈당했다는 점에서 둘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공통점이 있었고, 실제로 틸리히가 마르크스주의에서 받은 영향도 크지만 최종 해결점은 차이가 있다.



인간소외를 극복하는 신률(神律)

틸리히가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했던 것은 “인간의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하는 점이었다. 소련에서 시도한 공산세계 건설도 인간을 소외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봤다. 틸리히는 공산주의를 자율에 반하는 타율적 체제로 규정하였고, 그 타율이 절대화되어 인간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것을 개탄하였다. 그는 타율적인 ‘제도’, 곧 전체주의, 공산주의로는 인간의 소외를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종교사회주의를 통해 인간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봤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사회주의 운동 속에 불어 넣음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자율도 타율도 아닌 ‘신률’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신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자율의 현상들인 자기 만족성, 개인주의 등이 종적을 감출 것이며, 타율에 의한 비인간화, 물건화(物件化), 도구화 등이 극복될 것으로 확신했다.

이런 이론을 기초로 틸리히는 그런 신률이 지배하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의 '거룩한 공백기론(Sacred Void)'이다. 그러나 그 날은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오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처지를 보면 조만간 그 날이 올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사회의 문제에 대해 인식하면서 소외되고 착취 받는 사람들에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고민한다면, 틸리히의 사상이 꽤 중요한 교과서가 될 듯하다.(서민식/ 목사, 대전이주노동자연대 대표)

07.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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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6-12 07:09   좋아요 0 | URL
관심의 끝이 어디이십니까. 하핫. 이 사람은 전 처음 들어보는군요.

바벨의도서관 2007-06-15 07:38   좋아요 0 | URL
그날 담소를 나누었던, 틸리히 전공자인 관계로 댓글 좀 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 신학자를 제게 나열하라고 시킨다면,
그런데 딱 네 명만 들라면, 바르트/틸리히/불트만/본회퍼를,
그리고 이를 셋로 줄이라면 바르트/틸리히/불트만이고,
다시 둘만 남기라면 바르트/틸리히로 제시할 것입니다.

틸리히는 바르트와 더불어 종교사회주의자였고, 종교사회주의 모임인 카리로스 서클의 이론적 정초를 담당했지요. 프랑크푸르트 연구소의 소장으로 유대인인 호르크하이머를 추천하면서 보증인이 되었고, 코르넬리우스가 거절한 아도르노의 교수자격(Habilitation) 취득논문(Kierkegaard: Konstruktion der Ästhetischen)을 대신 받아주었습니다. 논문 지도를 통한 아도르노의 교육보다는 그의 교수자격 취득을 목적으로 말입니다(아도르노의 논문을 사실상 형식적으로 심사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였지요). 소위 아리안 계통으로서는 최초로 독일 교수직을 박탈당했는데, 이는 유대인 제자를 보호했기 때문입니다.

로쟈 2007-06-12 08:25   좋아요 0 | URL
손에 꼽히는 신학자인 걸요...

바벨의도서관 2007-06-15 07:36   좋아요 0 | URL
여러 분야에 있어서 그가 처음에 해당한다는, 그 날 드린 말씀의 의미는 대충 이런 것입니다(그가 패러다임을 바꾸었던 다른 영역들은 제외하고, 오직 창시자/창조자로서의 틸리히에 국한해서 말입니다).

문화신학을 창시했고, 그 결과 한국에도 '한국문화신학회'가 생겨났습니다.
신학방법론으로 상관관계 방법을 정립했는데, -'비판적' 상관관계 방법을 사용하는- 시카고 학파가 이를 통해 탄생했습니다(신학 측 시카고 학파를 다른 영역의 시카고 학파와 동일시하시진 말기 바랍니다). 20세기 후반 미국 신학계는 시카고 학파와 예일 학파의 대립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예일 학파는 바르트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아울러 '궁극적 관심'이라는 광의적 종교 개념을 확립했는데, 이는 john hick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전개하는 이들에게 틸리히의 종교 개념은 대단히 유용한 개념이기에, 그들이 틸리히의 영향을 피하기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끝으로 자유주의 신학에 기반한 설교의 한 전형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린드벡의 구분에 따르면 자유주의 신학 유형에 해당하는- '경험적-표현적' 입장 안에서 가장 뛰어난 설교자입니다. 강원용 목사가 추천하는 단 한 권의 책이 바로 그의 첫 설교집, [흔들리는 터전]입니다(이제는 새로운 번역이 나올 때가 되고도 남았습니다만).

로쟈 2007-06-15 08:15   좋아요 0 | URL
완벽한 AS군요.^^

전자인간 2007-06-12 13:33   좋아요 0 | URL
본회퍼와 함께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몇 안되는 신학자 중 하나인 틸리히에 관한 글이네요. 저는 신학(특히 기독교적인)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만, 종교스러운(광신적이라는 말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의미에서) 사회주의를 꿈꾸어 보기는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틸리히는 충분히 매력적이군요.

바벨의도서관 2007-06-15 06:50   좋아요 0 | URL
20세기 기독교 신학을 대표하는 두 사상가인 바르트와 틸리히는 모두 종교 사회주의자였습니다(이 점은 20세기 유럽의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자꾸때리다 2007-06-12 18:57   좋아요 0 | URL
폴 틸리히는 아주 일급의 플레이보이라고 하던데요.ㅋㅋㅋ 그 사람 설교 한 번이면 유부녀도 아주 깜빡 넘어갔다던데.ㅎㅎㅎ

바벨의도서관 2007-06-15 07:42   좋아요 0 | URL
틸리히는 분명 바람을 폈습니다(첫 아내가 틸리히의 친구와 바람핀 영향이 컸던 듯 합니다).

그러나 그가 플레이보이인 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습니다. 잘 알려진 심리학자인 롤로 메이Rollo May가 심층심리학적 견지에서 틸리히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Paulus, A Personal Portrait of Paul Tillich]에서 이 부분에 관해 변호한 것으로 기억합니다(번역판은 나온 바 없지만, 원서의 문체가 선명하여 쉽게 읽히니 함 읽어보세요). 그리고 설교로 유부녀 꼬셨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신 것인지 모르나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더불어 틸리히가 바람둥이라는 주장은 그의 아내, 한나Hannah 틸리히가 쓴 틸리히 전기, [From time to time]에 기인한다고 봐야할 것입니다(틸리히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신뢰하기 어려운 전기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남편이 바람핀 것에 대한 분노가 이미 죽어버려 항변할 수 없는 남편을 호색한으로 몰게 된 원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책 또한 번역은 되지 않았으나 안드레아 드워킨의 [포르노그래피]에 이 전기의 아주 유명한 장면을 수록하고 있으니 읽어보세요. 아마 깜짝 놀랄 겁니다.

parioli 2007-06-12 23:25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주말에 종종 한동대에 가는데, 한동대가 기독교 재단이라 그런지 서점에 본 회퍼, 폴 틸리히 등이 많이 보이더라구요.
종교사회주의로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사회주의만으로는 역시 부족한 걸까요?
자료 잘 읽겠습니다.

바벨의도서관 2007-06-15 07:38   좋아요 0 | URL
반대로, 종교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냐라는 말도 가능하겠지요. 어쨌든 틸리히의 종교사회주의 사상에 대해서는, 국내에 좀 더 소개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신학계가 주로 문화신학자로서만 그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지요(물론 미국 신학계의 영향입니다).

로쟈 2007-06-13 08:30   좋아요 0 | URL
한국에서 널리 회자되는 신학자로 다섯 손가락에 꼽힐 거 같습니다. 관심분야가 아니어서 제쳐놓긴 했는데, 살림에서 나온 책 정도는 읽어볼 생각입니다...

바벨의도서관 2007-06-15 07:44   좋아요 0 | URL
살림에서 나온 평전인 [폴 틸리히]는, -특정 부분을 더 깊이 다루지 않고, 전반적으로 고른 수준을 유지하는- 매우 유용한 평전입니다.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칼 포퍼 지음, 이상헌 옮김 / 생각의나무 / 2000년 1월
절판


소비에트가 쇠퇴한 이유들을 알아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일단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야겠습니다.(...) 물론 러시아에서는 권력을 가진 공산주의자들로 말미암아 모든 교육단계에 있는 학생들이 공산주의 교리를 배우는 체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 시대가 되었을 때, 공산주의 지도층에서는 어느 누구도 상황을 현상태로 유지하는 수단만 생각할 뿐, 달리 마르크스주의의 교의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것만 진지하게 취급되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는 틀림없이 붕괴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마르크스 이론의 나머지 부분은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이것만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73-74쪽

그 책(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은 20세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며, 특히 1962년 쿠바 위기로 대표되는 커다란 전환점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소련은 그 시점에서 냉전의 긴장감을 상실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때 소련은 미국을 멸망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건 마르크스 정권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상이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그 시점은 소련이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시초였으며 그후 전반적인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76쪽

소비에트는 러시아의 물리학자인 사하로프 박사가 회고록에서 말한 사하로프 폭탄을 가질 때까지는 역사가 그들에게 부과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희망을 갖지 못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사하로프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게 만든 계기가 된 책이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나는 한때 그에게 형법적 책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하로프의 문제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하로프는 베리아와 함께 합동으로 스탈린 통치하에서 오랫동안 연구를 했으며, 수소폭탄을 제조하는 것과 관련하여 베리아와 반복적으로 사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쨌든 수년간의 실험을 거쳐서 완성품 폭탄이 1961년에 실제로 만들어졌습니다.(...) 흐루시초프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미국이 모르게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할 생각이 떠오른 것은 불가리아를 방문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미국은 이미 때를 놓치게 될 것이었다."-77-79쪽

아인슈타인은 독일이 자체적으로 원자폭탄을 제조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폭탄의 사용을 지지하는 편지에 서명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을 방어하기 위해서 편지에 서명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하로프는,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시기에는, 흐루시초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직 자본주의의 '타파'를 원하는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공격적인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수동적인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그는 자본주의는 반드시 타도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폭탄을 실험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 살이었으며, 함대의 포민 소장을 만나러 갔을 때는 마흔 살이었습니다(*사하로프는 핵어뢰 프로젝트를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86쪽

사하로프는 그가 만든 초강력 폭탄을 실험할 때마다 방사능으로 인해서 수천 명이 암에 걸릴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고, 그래서 실험을 실시하지 않도록 흐루시초프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화를 내며 '정치적인 것'과 '과학적인 이슈'가 섞이게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내 의무를 다하겠습니다"라고 사하로프가 맹세한 것은 그때였습니다. 사하로프에 대해서 말할 것은 그 밖에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의 회고록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87쪽

나는 말년의 사하로프에 대해서는 여전히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꼭 수정되어야 합니다. 나는 그가 전범으로 생각되기 시작했다고 말해야 하며, 그가 말년에 한 일로 인해서 그의 죄가 완전히 용서를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이탈리아의 한 언론인과의 이 대담은 1991년에 이루어졌다.)-88-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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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가기 대 반복하기'는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2006)의 결론이다. '되돌아가기'와 '반복하기'의 목적어로 걸려 있는 것은 '레닌'이다. 즉, 지젝이 대비시키고자 하는 것은 '레닌으로 되돌아가기'와 '레닌을 반복하기'의 차별성이고, '레닌을 반복하기'야말로 지젝 고유의/특유의 정치적 전략 혹은 프로그램을 집약해주는 표현이다.

 

 

 

 

비록 작년 여름에 출간된 책이지만, 그리고 때로 부당한 폄하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나는 <혁명이 다가온다>야말로 지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오늘날의 정치적 상황에서 '혁명'이 갖는 의미와 그 가능성을 질문하는 데 있어서 가장 유익한 책이며(왜냐면 분량이 제일 만만하니까!) 특별히 10월 혁명 90주년이 되는 올해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87년 6월을 기념하는 일은 한 30년쯤 뒤로 미뤄두면 안될까?).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를 좀 훑어보면서 올 여름에 이 두권의 책을 정리해두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거기에 밀린 숙제를 보태자면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와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를 마저 읽어야겠다). 그것이 몇 차례 관련 페이퍼를 쓴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이 책을 손에 든 한 가지 이유이다.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이 책이 생각만큼 널리, 그리고 제대로 읽히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 이면에서 분량만큼 만만치는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읽히고 너무 쉽게 평가되고 너무 쉽게 제쳐놓여진다는 점(그래서 그들은 전진하고 있는가?). 지젝은 비의적인 저자가 아니기에 대단한 수수께끼나 퍼즐, 음모 등을 숨겨놓지 않는다. 때문에 그의 책들은 굳이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읽으면 된다. 물론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상으로는 그냥 읽어나가는 게 대놓고 수월하지만은 않다(수월하게 읽히는 가라타니와 비교해서도 그렇다). 번역이 낳는 예기치 않은 장애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지젝에 대한 오해의 일부는 그러한 장애에 기인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읽어 넘어가기', 혹은 '넘어/너머 읽기'이다. 일단은 '결론'부터 넘어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덕분에 시오랑에 관한 페이퍼가 당분간 미뤄지게 됐다). 혹 몇 분의 독자가 이 책을 좀더 재미있게,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국역본 외에 내가 참조한 건 영어본(2002)과 러시아어본(2003)이다. 이전에 적었지만 국역본은 독어본(2002)을 옮긴 것이며, 이 독어본은 러시아본과 일치한다. 하지만 영어본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영어본은 레닌의 1917년 문건 선집에 지젝인 붙인 후기로 구성돼 있고, 이 후기의 내용이 <혁명이 다가온다>와 대략 일치한다. 하지만 차이가 나는 대목들도 적지는 않다.

"소련의 전체 역사는 프로이트의 로마에 대한 이미지와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로마의 이미지에는 현재가 고고학적 유물의 서로 다른 층위라는 겉모습으로 침전되어 있다. 마치 트로이의 일곱 층위(서로 다른 모델)처럼 새로운 층은 앞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덮고 있어 역사는 더 오래된 시기를 향한 회귀에서 점점 더 깊이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고고학자같이 된다."(265쪽)

프로이트는 생전에 로마를 여러 차례 방문한 것으로 돼 있는데(특히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에 많은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 도시의 역사가 여러 겹의 고고학적 지층이 퇴적돼 있는 걸로 봤다는 것이고 지젝에 따르면 소련사가 바로 딱 그러한 이미지-모델과 비슷한다. 혹은 '또다른 모델(another model)'을 찾자면('서로 다른 모델'이 아니다) '트로이의 일곱 지층'에 비유될 수 있다('층위'보다는 '지층'이 낫겠다). '일곱 지층'이라고 돼 있지만 백과사전의 내용을 참고해보면 전체로는 '아홉 개의 지층'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중 트로이에 해당하는 것만을 카운트한 듯하다.  

슐리만과 되르펠트는 집들이 건설되어 사람들이 살다가 마침내는 파괴되어 버린 아홉 기(紀)를 나타내는 9개 주요지층의 순서를 밝혀냈다. 제1~7기 트로이는 요새, 트로아스의 수도, 왕의 가족·신하·노예들이 살았던 왕의 거주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1~5기는 청동기시대 초기(BC 3000경~1900)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 기간 동안의 주민들이 에게 해 제도, 키클라데스 제도, 미노아 문명의 크레타 섬, 헬라도스 문화기의 그리스 본토에 살던 주민들의 선조였을 것이며, 아나톨리아 남서부 또는 시리아로부터 온 것으로 추정된다. 트로이 제6·7기는 청동기시대 중기와 말기(BC 1900경~1100)에 해당한다. 불과 한 세대 동안 지속되었던 제7a기는 BC 13세기경 발생한 화재로 파괴되었는데, 아마도 이때의 트로이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묘사된 프리아모스 왕의 도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의 파괴 이후 약 400년간 이곳은 사실상 버려졌다. 그리스인이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제8기이며,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의 일리온은 제9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소련사는 어째서 이러한 도시들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가?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 역사는 배제의, 인간의 비인간으로의, 역사의 회고적인 다시 쓰기와 동일한 축적이 아닌가?" 즉, 공식 이데올로기상으로 소련사는 지속적인 배제의 축적이요, 사람들을 비인간으로 내모는 일의 축적이자, 거듭 역사 다시쓰기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탈스탈린화'는 '복권', 즉 당의 과거 정치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반대의 과정이라고 신호되었다." '신호되었다'고 옮겨진 단어는 영어본에서는 '지시되었다(indicated)'로, 러시아어본에서는 '수반되었다'로 옮겨졌다. 내 식으로 다시 옮기면, "'탈스탈린화'가 정반대의 과정, 곧 점차적인 '복권'과 당의 과거 '오류들'에 대한 인정을 통해 표시되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논리적이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것은 '점차적인' 복권의 과정/순서이다.

"악마처럼 취급되던 볼셰비키 옛 지도자들의 점진적인 '복권'은 아마 소련의 '탈스탈린화'가 어느 정도(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민감한 지표로 기능할 수 있다." 해서 가장 먼저 복권된 사람들이 1937년에 총살당한 (투하체프스키 같은) 군 지도자들이고 맨마지막으로, 그러니까 고르바초프 시기 공산주의 정권 붕괴 직전에 복권된 이가 부하린이었다.

미하일 투하체프스키(1893-1937)는 소련군 최고사령관(1925-28)을 지낸 고위 장성이지만 1936년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을 순방한 것이 빌미가 되어 이듬해 군내 트로츠키파 조직을 건설하고 독일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그리고 저명한 볼셰비키 니콜라이 부하린(1888-1938)은 혁명직후 <프라우다>지의 편집장을 지냈고 여러 권의 사회주의 경제이론서를 집필했다. 1921년 신경제정책(NEP)을 주도적으로 지지하면서 '우파'의 우두머리가 된다. 역시나 1937년 트로츠키파란 혐의를 뒤집어쓰고 비밀리에 체포되어 이듬해에 처형당했다. 국내엔 <과도기 경제학>(백의, 1994) 등이 번역돼 있으며, 단행본 연구서로는 김남국의 <부하린: 혁명과 반혁명 사이>(문학과지성사, 1993)가 유일한 게 아닌가 싶다. 부하린의 복권은 1988년에 이루어졌다.

"이 최후의 복권은 자본주의로 돌아간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복권된 부하린은 1920년대 '부자가 되자!'라는 유명한 구호를 내걸고 노동자와 농민 간의 동맹을 주창했고 강제 집산화에 반대했다."  이 유명한 구호(슬로건)가 영어로는 "Enrich yourselves!"이다. 딱 "부자되세요!". 부하린의 복권과 함께, 그리고 '부자되세요!'란 구호의 부활과 함께 러시아는 다시 자본주의 사회로 돌아가게 된 것.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절대 복권될 수 없는 인물,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반공주의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도 배제되는 한 사람, 레온 트로츠키, 혁명의 '떠돌아다니는 유대인', 진정한 반스탈린주의자, '일국 사회주의 건설'의 아이디어에 대립되는 '영구혁명'을 주창한 철천지원수가 있다."(266쪽)

 

 

 

'철천지원수'란 표현은 영어로는 'arch-enemy'이며 러시아어로는 '저주받은 적'('불구대천의 원수')이라고 옮겨져 있다. 1920년대 권력암투의 트로이카 '부하린(우파)-스탈린(중도파)-트로츠키(좌파)'에서 트로츠키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복권될 수 없는 인물(포지션)로 남아 있는 것(*최근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전기 3부작이 완간되었다 -07. 25.). 

 

 

 

 

"우리는 여기에서 프로이트의 근원적(기초적) 억압과 무의식 속에서의 부차적 억압 사이의 구별과 위험을 무릅쓰고 나란히 다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물론 트로츠키는, 트로츠키의 배제는 '근원적 억압'에 해당한다. "1990년 이전의 현존 사회주의에서뿐 아니라 1990년 이후의 현존 자본주의에서 심지어는 공산주의에 대해 향수를 가지는 경우도 트로츠키의 영구 혁명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트로츠키는 어떤 자리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아마 '트로츠키'라는 기표는 레닌주의의 유산에서 다시 찾을 가치가 있는 가장 적절한 호칭일 것이다."(266-7쪽)

분량상 레닌주의의 유산으로서의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07. 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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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6-13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맛만 보다가 만 느낌입니다. 후편도 어서 써주시길 ^^

그런데 소련사가 로마의 지질학적 지층과 같은 여러 겹의 지층을 가지고 있다는 비유가 적절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 공식 이데올로기상으로 소련사는 지속적인 배제의 축적이요, 사람들을 비인간으로 내모는 일의 축적이자, 거듭 역사 다시쓰기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인 것 같은데 트로츠키와 같은 여러 당내인물들의 배제가 축적되어온 역사라는 것을 굳이 고고학적 지층과 연계시키는 이유는? 그냥 문학적 수사인 것인지..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요.

로쟈 2007-06-13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은 그냥 읽어보셔도 될 거 같은데요.^^

yoonta 2007-06-13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다..산다 하고 계속 뒤로 밀리게 되네요. 로쟈님 페이퍼때문이라도 어서 한권 사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

2007-06-28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6-28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지젝의 레닌론이 많은 도움이 되실 거 같습니다. 주객분리론에 대해서도. 제 생각은 7월로 넘어가야 보탤 수 있을 거 같고요.^^;

노승영 2008-10-29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트로츠키 론(『Terrorism and Communism』 서문)을 번역하는 중에
프로이트의 로마 이미지를 검색해 보니 로쟈 님 블로그로 연결되더군요.
지젝이 레닌에게 써먹은 표현을 많이 차용하고 있어서 이 블로그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번역 비평 글이 있길래 마감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도 다 찾아 읽었습니다.
답례(?)로 제 번역을 올립니다.
혹시 출간 전 원고를 읽어보실 의향이 있으면 연락 주세요.
ⓞ①⑧⑤⑤③①①①③@paran.com

소 비에트 연방의 전체 역사는 프로이트가 로마를 표현한 유명한 이미지와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로마 역사는 여러 겹의 고고학적 지층이라는 형태로 저마다의 현재에 퇴적되어 있다. (또 다른 모델인) 트로이의 일곱 지층과 마찬가지로 새 지층이 이전 지층을 차례로 덮고 있다. 따라서 역사는--앞선 시대를 향해 퇴행하며--고고학자가 깊숙이 더 깊숙이 땅을 파헤치며 새 지층을 발견하듯 나아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 이데올로기적) 역사는, 배제하고 인간을 비(非)인간으로 전락시키고 역사를 소급하여 다시 쓰는 행위가 누적된 것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복권’ 과정, 즉 당의 과거 정책에서 ‘오류’를 인정하는 정반대의 과정이 탈(脫)스탈린화의 신호탄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The entire history of the Soviet Union can be comprehended as homologous with Freud’s famous image of Rome, a city whose history is deposited in its present in the guise of the different layers of the archaeological remainders, each new level covering up the preceding one, like (another model) the seven layers of Troy, so that history, in its regression towards ever older epochs, proceeds like the archaeologist, discovering new layers by probing deeper and deeper into the ground. Was the (official ideological) history of the Soviet Union not the same accumulation of exclusions, of turning persons into non-persons, of the retroactive rewriting of history?Quite logically, ‘de-Stalinization’ was signalled by the opposite process of ‘rehabilitation’, of admitting ‘errors’ in the past policies of the par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