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에서 이청준 문학의 '보편성'에 관한 리뷰를 옮겨온다. 실상 이창동의 <밀양>을 아직 보지 못한 분풀이이다(7월초에도 상영하는지?). 주변에서 볼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본 다음임에도 시간을 못 내는 처지라니! 예전에 읽은 원작 소설 <벌레 이야기>는 얼마전에 단행본으로 나왔고 한 지인으로부터 선물받았다(칸느 영화제 수상직후 이 책의 표지는 곧장 <밀양>으로 바뀌었다). 영화를 보게 되면 다시 읽어볼까 한다. 아래 기사는 문학평론가 방민호 교수의 이청준 문학에 대한 예찬으로 읽힌다... 

한겨레21(07. 06. 21) 이청준, ‘한국적’으론 감당할 수 없어라

전도연씨가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낭보가 들려왔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통해서다. 유럽 영화제에서 한국의 여배우가 여우주연상을 받게 된 것은 강수연씨 이래 20년 만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전도연씨와 <밀양>을 연출한 이창동 감독에 따라다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밀양>의 원작이 이청준씨의 중편소설 <벌레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벌레 이야기>에 없는 이야기들이 첨가되고, 있던 이야기들이 삭제되는 커다란 변용을 겪기는 했지만 결국 <밀양>은 <벌레 이야기>를 모태로 삼은 작품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원작은 원작일 뿐이다. 영화는 원작을 하나의 텍스트로 삼아 여기에 영화가 필요로 하는 숱한 예술적, 기술적 독창성을 발휘해야 하는 고난도 장르다. 그러니 영화의 시대일수록 그 텍스트를 이루는 문학이 중요하다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는 게 좋다. 똑같은 주장을 오스카 와일드는 비평가와 소설의 관계에 대해서 펼쳤었다. 소설을 텍스트 삼아 이야기한다고 해서 비평이 소설에 비해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2년 전에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가서 느낀 것은 한국 문학이 아직 고립된 예술의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황지우씨가 던진 말이 있다. 그곳 유럽에서는 고은도 황석영도 아직 신인이나 다름없는 무명작가일 뿐이라던. 이 두 문학인은 유럽에서 그래도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는 분들이다.

번역될 수 없는 까다로운 미학
물론 몇 년 사이에 문학도 ‘한국’ 문학이라는 고유명사 표지로 만족하는 단계는 확실히 뛰어넘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의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인지도나 인식 수준은 미약한 편이다. 아마 이청준이라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말보다 전도연씨가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밀양>의 원작자라고 소개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당연히 언어 때문이다. 문학에서 언어 문제는 근본적이다. 한국어라는 말, 한글이라는 문자의 고립성이 한국 문학을 왜소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면이 있다. 세계인들은 한국어로 된 소설에 대해서는 존재조차 알지 못하다 그것이 원작이 되어 영화라는 도상적 기호의 맥락 속에서 새롭게 제시되어 ‘보편화되면’ 그때서야 기립박수를 치게 된다.

이청준 문학만큼 이러한 아이러니를 크게 보여주는 작가도 드물다. 최근에 들어와선 문체가 이완된 감도 없지 않지만 이청준씨는 한국어 문장의 아름다움을 고양시켜 보여준 작가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1993)로 옮겨진 그의 연작들,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등은 한국어 문장의 운율미, 리듬감을 충만하게 실현한 것들이다. 이 언어적 요소는 마치 시가 완전하게 번역될 수 없는 것처럼 영화로도, 외국어로도 번역되기 어렵다. 여기에 흔히 한(恨)으로 표상되는 한국적인 정서들이나 문화적 전통들, 고전적 예술과 민속의 세계 같은 것들도 외국인들이 이해한다고 해야 오리엔탈리즘의 수준에서 벗어나기 힘든 측면이 없지 않다. 이청준 문학은 번역될 수 없는 미학적 특질들을 함축하고 있는 까다로운 문학이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원래 영화 <서편제>의 원작은 소설 <서편제> 한 편이 아니라 앞에서 열거한 세 개의 단편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각기 따로 떨어진 작품들이 아니라 <새와 나무> <다시 태어나는 말>이라는 제목의 작품들까지 합해서 모두 다섯 편의 연작으로 꾸며진 연작소설집 <남도사람>(1988)의 일부를 이룬 것들이었다. 임권택 감독은 이 가운데 영화로 ‘번역’하기 쉬운, 다시 말해 자신의 취향에 맞게 가감하기 쉬운 세 편만을 ‘적발’해서 <서편제>라는 화제작을 탄생시켰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보면 이 <남도사람>은 이청준 문학 쪽에서 보면 <언어 사회학 서설>(1977)이라는 또 다른 연작창작집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도 영화가 된 쪽은 <남도사람> 쪽이지 <언어사회학 서설> 쪽이 아니었던 까닭은 아무래도 <남도사람>이 드라마타이즈(dramatize)하기 쉬운 요소들을 다량으로 함유하고 있었던 데 있다.



인간의 노래이자 생활의 노래
이런 사정은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도 예외가 없다. 그 역시 <벌레 이야기>에 상당한 ‘작가적’ 삭감과 첨가를 가했는데 이것은 물론 영화감독의 창조적 권한 사항이다. 아무튼 <벌레 이야기>는 어떤 ‘희생’을 거쳐 영화라는 새로운 창조의 영역에 수용된 것이다.

여기서 한번 제기해볼 만한 문제가 있다.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이청준씨의 소설들만이 이토록 빈번하게 영화화되는 것일까? 김수용 감독의 <병신과 머저리>, 정진우 감독의 <석화촌>,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 이장호 감독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축제> <천년학>, 그리고 이창동의 <밀양>까지. 우리는 작가 이청준의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상당히 긴 목록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이청준 문학이 가진 보편적, 공통적 사상과 감정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옛 작가 이효석은 <화분>(1939)이라는 장편소설에서 하얼빈으로 떠나는 피아니스트 영훈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는 두 개의 웅대한 곡을 작곡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탄생, 싸움, 운명, 죽음”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노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름다운 것, 사랑, 행복, 잔치, 고독, 슬픔, 사상” 등으로 이루어진 ‘생활의 노래’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주제들을 “전 인류의 것” “동양의 것이며 동시에 구라파의 것이요, 구라파의 것이며 동시에 동양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가장 보편적이고 타당한 인류의 감정”에 호소하려고 한다.

이청준 문학이 바로 그렇다. 그의 문학에는 한국적인 표지를 붙여 만족할 수 없고 충당할 수 없는 인류 보편적 가치로 통하는 사상과 감정이 숨쉬고 있음이 인정된다. 우리는 이미 <서편제>나 <축제> 같은 작품에서 이것을 확인한 셈 아니던가?

<밀양>의 원작이 된 <벌레 이야기>는 분량으로 보면 크지 않은 작품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생명과 죽음, 용서나 종교의 의미 같은 근본적인 문제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깊은 작가적 역량이 투여되어 있다.

과연 종교적 믿음이 아들을 잃어버린 엄마의 고통을 거두어들일 수 있을까? 종교를 가진 사람들, 특히 기독교에 심취한 사람들은 단박에는 아닐지라도 이것을 수긍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묻는다. 종교라는 것이 과연 삶의 일회적(一回的) ‘본질’에서 오는 인간의 비애를 가라앉혀줄 수 있는가? 또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실’이 가져다주는 재생의 힘이 될 수 있는가?

기독교적 일원론의 견지에서 보면 삶은 신에게 귀의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신의 의지를 따라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탐구하려는 노예처럼 자비를 갈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된 종교적 세계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 죽음을 당한 아이의 엄마를 향해 신의 은총을 빌면서 사형을 받아들인 유괴범과 고통 속에서 신을 잃어버린 아이 엄마의 비극적인 ‘대결’은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다.

보편과 공통을 향해 비약하다
실로 인간은 태어나 성장하여 사랑하고 죽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청준 문학은 이 근본적인 주제를 인간사 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변주해나간다. 우리의 영화감독들은 비상한 사람들답게 이렇게 보편과 영원으로 통하는 이청준 문학의 가치를 간파한 것이리라.

이청준 문학은 드라마타이즈됨으로써 한국어와 한글이라는 언어문자 체계의 고립적 한계에서 벗어나 영어로 번역되지 않고도 세계에 널리 알려질 수 있는 ‘문학’이 된다. 동시에 언어적 숨결의 독특한 가치는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을 아쉬워만 하지는 않기로 한다. 한국 문학에서도 영화처럼 보편과 공통을 향한 비약이 오래전에 이미 시작되었고 진전되고 있기 때문이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07. 0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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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26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은데로 임하소서 한권밖에 안 읽었지만...
인상깊었습니다. 요즘 소설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이었어요.

로쟈 2007-06-2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배로는 아마 60년대 작가군에 들어가시니까요...
 

학기말에다가 밀린 일들이 겹쳐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이럴 때는 머리나 손가락보다 엉덩이가 공부한다는 말이 딱 맞지만 그간에 그쪽으론 살이 붙지 않았나 보다. 진득하게 붙어있질 못하는 걸 보면. 잠시 간식 타임에 뉴스기사들을 읽어보다가 이탈리아 감독 마르코 벨로치오(1939-)의 영화 <굿모닝, 나잇>(2003)에 관한 리뷰를 옮겨온다('벨로키오'라고도 표기돼 있다).

국내에 개봉 예정인 것인지(아니면 개봉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감독도 생소하다) '붉은 여단'이란 말을 오랜만에 접하게 됐다(영화속 사건은 1978년에 일어난 것인데, 따져보면 그때 감독이 지금의 내 나이이다). 한때는 TV에서도 자주 접하던 말이었는데, 어느새 30년이 지난 얘기라고?!.. 

참고로 세계 3대 테러조직으로 불렸던 "붉은여단은 이탈리아의 극좌파 비밀 테러 조직으로 1970년대초 납치·살인·사보타주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들의 목적은 이탈리아란 국가를 서서히 소멸시키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들이 주도하는 마르크스적 대혁명으로의 길을 예비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붉은 여단의 창설자는 레나토 쿠르치오로서, 그는 1967년 트렌토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좌파사상단체를 만들어 카를 마르크스, 마오쩌둥, 체 게바라와 같은 인물들의 사상을 연구했다. 1970년 11월 붉은 여단은 밀라노에 있는 공장과 상점에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그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1971년의 납치테러를 시작으로 1974년 토리노의 반(反)테러대 총지휘관 및 대원들을 살해하기 시작했으며, 1978년 이탈리아의 전(前) 총리 알도 모로를 납치하여 살해했다. 붉은 여단의 총책임자인 쿠르치오는 1974년 체포되었다가 1975년 탈출, 1976년 재생포되었다. 1981년 12월에는 NATO소속 미군인 제임스 도지어 준장이 붉은 여단에 납치되어 42일 동안 감금되는 사태도 벌어졌으나, 후에 그는 파도바의 붉은 여단 은신처를 급습한 이탈리아 경찰에 의해 무사히 구출되었다.

붉은 여단이 최전성기를 누리던 1970년대에는 정회원이 400~500명에 이르렀고, 그밖에 1,000여 명의 회원이 이들을 정기적으로 도와주었으며, 수천 명의 후원자들이 자금과 정보전달의 수단 및 은신처를 제공했다. 조심스럽고 체계적인 경찰의 검거작전에 의해 1970년대 중반부터 붉은 여단의 지도자들과 평회원들이 체포·감금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말에 이르러서는 그 조직이 대단히 약화되었다."

오마이뉴스의 기사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195500 도 참조할 만하다. 

프레시안(07. 06. 24) 영화는 종종 핏빛 역사의 교훈을 들려준다

베니스영화제에 마르코 벨로치오가 새영화를 내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언제 때 마르코 벨로치오래? 베르톨루치와 동시대 사람이잖아. 그 사람, 아직 거기서는 작품을 만드는 모양이네. 근데 무슨 영화라구? 알도 모로? '붉은 여단' 얘기? 웬 '붉은 여단' 얘기래? 30년이나 지난 얘기잖아.
  
70년대 중후반이니 아마도 중학교를 다닐 때쯤이었을 것이다. 정치의식이 전혀 없었던 나이임에도 알도 모로 수상이 참혹하게 살해돼 발견됐다는 뉴스가 꽤나 시선을 사로잡았던 모양이다. 알도 모로와 '붉은 여단'이라는 이름이 각인돼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서일까. '붉은 여단' 얘기라는 벨로치오 감독의 새영화 <굿모닝, 나잇>은 DVD를 받아들고도 그것을 보기까지 사나흘이 걸렸다. 마치 불쾌했던 기억은 다시 들추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영화는 복잡한 구조로 돼있지 않다. 겨우 4명에 불과한 '붉은 여단' 조직원이 알도 모로 전 수상을 유괴,납치해 제멋대로 프롤레타리아 재판을 한 후 50여일간을 억류해 놓고 있다가 결국 살해한다는,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재현하고 있다. 드라마적 구성이라곤 이 얘기 전체를 납치극에 참여한 20살짜리 여성 키아의 시점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것 정도다. 그렇지 않았으면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웠을 만큼 밋밋하고 평면적이다.

당시 사건에 대해 극도로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려는 벨로치오 감독의 태도가 느껴진다. 벨로치오는 이탈리아에서 과거의 잘못에 대해 반성하는 좌파 감독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종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상업영화 감독으로, 다분히 우향우의 자세로 변신을 한 것과 비교되곤 한다. 베르톨루치처럼 우파로 변절하기 보다는 벨로치오처럼 좌파임을 반성하는 것. 어느 쪽이 더 맞고 또 옳은지는 각자가 판단할 문제다.
  
영화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어 신세대 관객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붉은 여단'이 알도 모로를 납치한데는, 그가 유럽 정치인으로서는 거의 최초로 좌우 코아비타숑, 그러니까 좌우 합작정부를 구성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기독민주당 당수로 합리적 우파의 대표주자였던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과 손을 잡고 갈라진 국론을 봉합하려 애썼다. 그래서 일부 우파로부터는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또 일부 좌파로부터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질을 희석시키는 우파기회주의의 전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 '붉은 여단'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여론의 역풍을 맞을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당시 '붉은 여단' 사건은 역설적으로 좌파 맹동주의와 극단적 공산주의자를 솎아내는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운동의 몰락을 재촉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구구절절 이런 얘기는 다 필요없고, 벨로치오는 왜 지금에 와서 케케묵은 당시의 사건을 들춰내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 세상 곳곳에서 지금 갖가지 테러가 자행되고 있고, 그럴 때마다 정치적 이유와 이념적 명분이 앞세워진다. 테러를 자행하는 자들이나 거기에 복수하는 자들이나 모두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을 뿐이다. 벨로치오가 얘기하려고 한 것은 바로 그점이 아닐까.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굿모닝, 나잇>같은 영화가 더 나은 정치인과 지도자를 선택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영화는 종종 과거로의 여행을 안내하며 여행길은 늘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는 법이다.(오동진 편집장) 

07. 06. 25.

P.S. 알고보니 작년 가을 끝자락에 한겨레에도 영화의 리뷰가 실렸었다. 짐작에 영화는 작년 그맘때 개봉됐었나 보다. 한겨레와 씨네21의 기사까지 옮겨놓는다(벨로치오의 영화세계 전반을 정리해주고 있는 씨네21의 기사가 유익하다).

한겨레(06. 11. 29) 흔들리는 레지스탕스의 서글픈 초상

1977년 말 로마의 한 아파트, 어느 신혼부부가 부동산 중개업자의 안내를 받고 있다. 새를 키울 만한 정원이 있고, 적당히 널찍한 침실과 부엌이 있으며, 거실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스며드는 곳. 얼핏 평온한 삶의 안식처처럼 보이나 실은 극좌파 무장세력 ‘붉은 여단’의 아지트가 될 공간이다. 신혼부부로 위장한 남녀는 급진적 혁명노선을 함께 걷는 동지이며, 이들 외에도 두 남자가 더 숨어들어 위험한 미션을 수행한다. 새해가 밝아오고 온 거리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일 때조차 이들에겐 사치스러운 감정을 나눌 여유가 없다. ‘노동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거사(巨事)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본격적인 아지트 역할을 시작한 것은 1978년 3월16일, 붉은 여단 멤버들이 전 총리이자 기독민주당 당수 알도 모로(로베르토 헬리츠카)를 납치하는 데 성공하면서부터다. 이날은 알도 모로가 공산당과 우파 여당 5당을 연합한, 연립내각이 승인되는 날이다. 알도 모로. 시민들에게는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는 여당 당수지만, 붉은 여단에는 보수정치세력을 대변하는 반동주의자이자 수정주의자일 뿐이다. 단원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름으로 처형한다”는 명목하에 모로를 아파트에 감금하고, 정부와 교황을 상대로 요구조건을 제시한다. 그러나 협상에 실패하고 국민의 비난만 거세지자, 그토록 견고했던 신념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굿모닝, 나잇>은 이탈리아의 거장이자 대표적인 좌파 감독 마르코 벨로키오의 2003년작으로, 그해 베니스영화제가 ‘미래의 영화상’과 각본상으로 화답했던 작품이다. 함께 이탈리아 영화계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에 비해 벨로키오는 고집스럽게 계급과 정치를 영화의 중심으로 삼아왔다. <굿모닝, 나잇> 역시 감독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정신분석이라는 화두를 관통한다. 거친 화면의 뉴스릴과 픽션이 교차하는 이 영화는, 1978년 이탈리아 전 총리 알도 모로가 납치됐다가 55일 만에 암살당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이탈리아인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역사적 트라우마지만 감히 입 밖에 내기 어려웠던 민감한 기록들을, 벨로키오는 대담하게 끄집어낸다.

그러나 벨로키오의 관심은 역사의 한 자락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평범한 일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붉은 여단의 흔들리는 표정에 더 주목한다. 그중 유일한 여성 단원 키아라(마야 산사)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인물이다. 자유의 대안은 과연 죽음인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념이 현 이탈리아사회를 구원할 수 있을까? 혹은 혁명이라는 명분으로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을까? 벨로키오는 섣부른 도덕적 판단 대신 이런 질문들을 통해 조용하지만 파장이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제목 ‘굿모닝, 나잇’은 19세기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 <Good Morning… Midnight>에서 가져온 것. 극중 키아라의 동료 엔조(파올로 브리구글리아)가 테러리스트들을 소재로 쓴 시나리오 제목이기도 하다. 엔조는 건조하게 살아가는 키아라를 자극하는 인물로, 일상생활이 전혀 없는 붉은 여단 멤버들을 비난한다. 바깥세상의 사람들 역시 수군댄다. “붉은 여단은 혁명활동을 하지 않을 때 포르노영화를 볼 것”이라고. 이들의 지적은 과장된 말이 아니다. 붉은 여단은 모로를 가두고 감시하는 동시에, 자신들 역시 모로와 함께 감금된 자들이다. 아파트가 그들의 유일한 세상이고,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뉴스만이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가 되는 것이다.

키아라는 “상상력이 현실을 구하진 못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녀가 그토록 굳게 믿었던 이데올로기 역시 현실을 구하지 못했다. 미묘하게도 그녀는 감시 구멍을 통해 모로의 늙고 지친 모습을 목격한다.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는 모로는, 키아라에게 적이기 이전에 인간의 존엄을 일깨워주는 존재로 변모한다. 동시에 ‘혁명’이라는 명분으로 살인을 정당화하려는 자신의 동지들과 ‘그의 동지들’에게 버림받은 모로 사이에서, 키아라는 점점 정신분열에 가까운 판타지에 시달린다. 이를테면 파시스트들에 대항하다 죽은 키아라의 아버지가 등장한다거나, 모로가 감금에서 풀려나 유유히 걸어나가는 장면들이다. 이제 키아라가 꿈꾸는 것은 혁명적 투쟁 이전에, 인간성이 회복된 세상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녀가 꿈꾸는 판타지가 한낱 백일몽에 지나지 않음을, 냉혹하게 보여준다. 총성이나 끔찍한 구타장면 하나 없이 흔들리는 현실을 잡아낸 벨로키오의 연출솜씨는 놀랍다. 이웃집 여자나 지역 사제의 예기치 않은 방문, 좀도둑들의 침입 등은 언뜻 히치콕 스타일의 스릴러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침묵 속에 감도는 긴장감, 서늘한 시선 속에 감지되는 뜨거운 열기는 어떤 장르적 장치만으로 연출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벨로키오는 대사나 동선을 절제하는 대신 이미지와 음악(핑크 플로이드의 터질 듯한 사운드와 슈베르트 협주곡의 대비!)의 절묘한 조합 또는 배우들의 떨리는 눈동자만으로 짙은 후유증을 남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테러리즘에 대한 공포가 극도에 달한 포스트 9·11 시대, 그 후유증은 좀처럼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굿모닝, 나잇>은 철저하게 감성에 호소하는, 기묘한 정치스릴러다.(글 신민경)

씨네21(06. 12. 14) 마르코 벨로키오의 영화세계와 <굿모닝, 나잇>

자유를 염원하는 사형수들의 노래

이탈리아 영화계는 60년대 들어 두명의 ‘천재감독’을 동시에 배출하는 호사를 누린다. 불과 23살의 나이로 <혁명전야>(1964)를 만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 바로 1년 뒤 26살의 나이로 데뷔작 <주머니 속의 주먹>을 발표한 마르코 벨로키오가 그 장본인들이다. 두 사람 모두 당시 유럽의 들끓었던 사회변혁 열기를 대변하는 좌파 경향의 젊은이들이었다.

두 젊은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60년대 정치영화의 수작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이들이 데뷔할 때, 선배 격인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마르코 페레리 등이 이데올로기적 주제가 강한 사회비판영화들을 발표하며 이탈리아 영화계의 좌파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는데, 두 젊은이는 그런 전통을 계속 이어갈 인재들로 인식됐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2차대전이 끝난 뒤, 방송은 우파가, 그리고 영화는 좌파가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는 전례를 남겼고, 이는 지금도 이 나라의 문화전통으로 남아 있다.

정치적 리얼리즘을 고집한 작가

베르톨루치가 <순응주의자>(1970), <거미의 계략>(1970) 등을 발표하며 보수우파의 억압과 허위를 비판했다면, 벨로키오는 <아버지의 이름으로>(1971), <괴물을 1면에 실어라>(1972) 등을 발표하며, 그런 우파의 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 과정에 더욱 주목했다. 다시 말해,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통용되는 가치관들이 도대체 어떻게 생성되고 재생산되는지 세밀하게 관찰하는 식이다.

아마 알튀세르가 살아 있다면, 자신이 주장했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성격을 추적하는 영화로 벨로키오의 작품들에 큰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우리의 가치관을 재생산하는 대표적인 제도가 바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고 불리는 가족, 학교, 교회 등인데 벨로키오는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그런 제도 속의 인간관계를 질문해왔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배타적인 관계 속에 갇혀 있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이 거의 차단된 자기들만의 공간에서 존재의 모순에 빠지는 운명을 갖고 있다. 그런 공간의 상징은 가족이다. 그의 정치영화가 특별히 ‘가족 정치드라마’라고 불리는 까닭도, 바로 그의 영화에 가족관계가 표나는 상징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68년 이후 베르톨루치는 정치적 테마에서 한발 벗어나, 에로티시즘과 정치를 뒤섞는 센세이셔널한 작품들로 자신의 작품 방향을 바꾸었다. 반면에 벨로키오는 여전히 정치적 색깔이 강렬한 작품들에 집착했다. 68년 이후 유럽에서는 이미 ‘잔치는 끝났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는데, 계속해서 정치적 리얼리즘에 주목한 벨로키오는 교조적인 인물로 비치기 쉬웠다. 벨로키오는 이런 전투적인 좌편향 성향 때문에 외국에서는 더욱더 무명으로 남았다. 1987년 베르톨루치가 좌파적 시각에서 보자면 변절에 가까운 <마지막 황제>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전세계적인 스타 감독으로 부상할 때, 벨로키오는 이념에 집착하는 한물간 고집쟁이처럼 비치기도 했다. 바야흐로 두 경쟁자의 승부는 한쪽으로 아주 유리하게 진행됐던 것이다.

유럽 영화계에서 서서히 잊혀져가던 벨로키오가 다시 재발견된 데는, 프랑스 영화인들의 관심이 큰 구실을 했다. 1997년 칸영화제는 <홈부르크의 왕자>를 경쟁부문에 초대, 이탈리아 본국에서도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던 노감독의 건재를 다시 전세계에 알렸다. 딱딱한 정치영화일 것으로 짐작한 영화인들은 벨로키오가 보여준 꿈과 몽유병에 관한 경쾌한 역사 코미디물을 보고 노장의 능란한 솜씨와 품위에 다시 매력을 느끼게 된다. 칸영화제쪽은 이 작품에 이어 연속해서 두 작품을 다시 경쟁부문에 초대한다. 90년대 이탈리아 영화계의 대표주자는 틀림없이 난니 모레티인데, 이때의 분위기로 보자면 이탈리아의 진정한 ‘작가’ 감독은 단연 마르코 벨로키오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 작품은 <유모>(1999)와 <종교시간>(2002)이다.

<굿모닝, 나잇>이 진정성을 확보한 이유

특히 <종교시간>은 죽은 어머니가 바티칸에 의해 성녀로 추대되는 과정을 놓고, 그 가족들이 보여주는 갈등과 가치관의 모순을 마치 명상하는 종교화처럼 묘사해 벨로키오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치에 접근한 작품으로 종종 해석됐다. 다시 돌아온 노장의 발걸음은 더욱 당당해졌고, 또 그를 기다리는 이탈리아 관객의 마음도 자긍심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런 기대감을 충족시켜줄 작품으로 발표된 게 바로 <굿모닝, 나잇>(2003)이다. 제작단계부터 다루는 내용 때문에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알려진 대로 이 영화는 이탈리아인들이 기억에서 영원히 지우고 싶어하는 70년대 테러리즘의 대표적인 사건인 알도 모로 전 총리의 납치와 살인에 관한 이야기다.



아마 벨로키오가 좌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이 영화의 진정성을 믿지 못할 것이다. 당시 모로 전 총리를 죽인 인물들은, 별 모양으로 상징되는 극좌파 테러리스트 ‘붉은 여단’의 멤버였기 때문이다. 사건의 가해자가 어쨌든 좌파인데, 좌파의 대표적인 감독인 벨로키오가 그 사건을 다룬다고 하니 자기 성찰의 엄숙한 분위기마저 느끼게 된 것이다.

모로는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최초로 좌우합작의 연정을 이끌어낸 탁월한 협상가였다. 우파인 기독교민주당 리더인 그는 당시 엔리코 베르링게르가 이끄는 제2의 정당 이탈리아공산당에 권력의 일부를 양도하여 좌우가 함께 정부를 책임지는, 대단한 정치실험을 단행했다. 그래서 그는 노련한 정치가로 추앙받기도 했고, 동시에 우파로부터는 빨갱이와 놀아난 배신자로, 좌파로부터는 무산계급을 현혹하는 악마와 같은 존재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가 총리에서 물러나 기독교민주당의 리더로서만 활동하고 있을 때, 그는 납치됐고, 또 2개월 뒤 살해됐던 사건이 바로 이 영화의 주요 내용이다.

이탈리아 영화계는 이런 민감한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리얼리스트 감독이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감독 본인이 그 시절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아남은 장본인이 아닌가. 그래서 벨로키오의 리얼리즘은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고, 요즘은 이런 감독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2001년의 뉴욕 사건 이후 세계의 관심은 테러리즘에 쏠려 있었는데, 모로 사건을 다루는 테러리즘 영화가 발표되어 이탈리아 좌파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도 없지는 않았다. 좌파들은 붉은 여단과 자신들과의 관계를 시종일관 부정하지만, 시민들은 반드시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모로의 납치와 살해에 이르는 약 두달간에 한정돼 있다. 붉은 여단의 네 멤버 중 여성인 키아라(마야 산사)와 에르네스토(감독의 아들인 피에르 조르지오 벨로키오)는 부부로 가장하여 아파트를 하나 빌린다. 다른 두 멤버는 리더인 마리아노(루이지 로 카시오)와 행동대원 프리모(조반니 칼카뇨)이다. 1978년 3월16일 이들은 로마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인 끝에 5명의 경찰과 경호원을 살해하며 알도 모로 전 총리를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름으로 부르주아의 상징인 전 총리를 납치했으며, 프롤레타리아의 재판에 따라 모로에겐 사형이 언도됐다. 이들은 자신들이 빌린 아파트에 밀실을 만들어 모로를 감금한다. 단, 감옥에 갇혀 있는 붉은 여단의 동료들을 석방한다면, 전 총리의 목숨도 협상 가능하다는 여지는 남겨둔다. 전세계의 자유국가가 경악했던 납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자신들의 신념에 갇힌 죄수들

자그마한 노인으로 나온 알도 모로(로베르토 헤를리츠카)가 화면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 이탈리아의 관객은 경악했다. 모습도 그렇지만, 분위기가 죽은 모로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바싹 마르고, 지적이며 예민하고 불안한 눈빛 등 과거의 그를 떠오르게 하기에 충분한 배우였다.

납치범들은 여전히 그를 ‘총리’(이탈리아어 대사로는 ‘프레지덴테’인데 영어의 President에 해당하는 말로, 이탈리아에선 총리를 그렇게 부른다. 말 그대로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이므로)로 부르고 예우하며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하나씩 공개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뭔가 어긋나기 시작하는 게, 이들 납치범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시민 대중에 의해 찬양받을 줄 알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신문, TV를 보니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거사’에 기뻐하지 않으며,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지지 성명서를 발표하는 단체 하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이탈리아공산당 당수 베를링게르가 나와, 이들의 행동을 테러리즘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멍청한 살인자라고 비난하는 대목에선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들기도 한다. 극단주의 좌파들은 베르링게르를 우파와 타협한 변절자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좌파들은 그를 자신들의 친구이자 영웅으로 대접했다. 다시 말해, 좌파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베르링게르에게 비판받는다면 이들은 고립된 소영웅주의자로 몰리기 십상인 것이다. 벨로키오의 인물들이 늘 그렇듯 붉은 여단 멤버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맹신하며, 불행하게도 타인의 다른 생각에는 별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테러리스트 리더인 마리아노는 “우리는 신념에 따라 항상 죽을 준비가 돼 있다”고도 말한다. 모로는 “당신들 코뮤니스트들 이전에 기독교인들이 그랬지(신념에 따라 죽었지)”라고 답하며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감지한다.



신념에 의해 혹은 대의에 의해 자신들의 목표를 행동에 옮겼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 한구석에선 모순의 갈등이 밀려오는 것으로 영화는 전환점을 맞는다. 그 모순의 상처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은 유일한 여성대원인 키아라다. 레지스탕스의 딸로, 그녀의 아버지도 극우 파시스트들에게 죽음의 공포에 늘 위협받으며 살았다. 아버지가 딸에게 읽어주던 책이 하나 있었는데, 파시스트들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빨치산 대원들이 아내와 연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들이다.

붉은 여단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알도 모로도 아내에게 마지막이 될지 모를 편지를 쓰고 있고, 키아라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빨치산 활동을 하다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남긴 편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키아라는 모르긴 몰라도 그 슬픈 편지들을 읽으며 수없이 눈물을 흘렸을 테고, 우파 파시스트들의 잔인함과 완고함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결과적으로는 과거의 파시스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순을 느낄 때면 키아라는 환상을 보곤 한다. 흑백의 환상은 레닌 시절과 스탈린 시절의 민중의 모습, 그리고 바다 위에서 사형집행을 당하는 빨치산 대원들의 비참한 모습들로 이어진다. 핑크 플로이드의 <샤인 온 유 크레이지 다이아몬드> 연주에 맞춰 보여지는 잔인한 다큐멘터리풍 화면들은 붉은 여단의 행위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며, 저들 파시스트들은 더욱더 악질적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키아라는 자신의 행위에 자긍심을 느끼기는커녕 더욱더 도덕적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천부의 자유에 대한 염원

어쨌든 영화는 테러리스트의 입장에서 서술됐다. 이들은 명백히 한 정치가를 납치하고 살해했는데, 그들의 행위를 파시스트들의 원죄와 연결하여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우파들이 불편해하는 점이 바로 여기다. 감독이 좌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폭력분자들에게 동정심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을 의식해서인지, 감독은 붉은 여단의 신념을 완고한 어리석음이라고 (자기)비판을 하며 일정한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그럼에도 <굿모닝, 나잇>은 좌파의 시각에서 서술한 최고의 정치드라마로 남을 것 같다. 감독은 쉬쉬하며 감추고 있던 부끄러운 부분을 과감히 드러내어 자신들의 과거도 한때는 맹신주의로 치달을 때가 있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키아라의 눈물은 자기반성에서 나온 연민의 결과물로 보인다. 그녀의 환상 속에서, 죽은 알도 모로가 유령처럼 밀실에서 빠져나와 슈베르트의 <악흥의 순간>에 맞춰 발걸음도 가볍게 거리를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 모두의 ‘천부의 자유’에 대한 염원으로 해석해도 괜찮을 것 같다.(한창호 영화평론가)

P.S.2.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붉은 여단 T셔츠를 판매하는 사이트도 눈에 띈다(여성용과 아동용까지 있다). 혁명뿐만 아니라 테러도 판매된다는 건 더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새로운 지향보다도 먼저 필요한 것은 새로운 반성이 아닐까 싶다...

P.S.3. 붉은 여단과 관련하여 떠올릴 수 있는 또 다른 이름은 안토니오 네그리이다. 작년에 출간된 그의 자전적 대담 <귀환>(이학사, 2006)은 "붉은 여단이 저지른 이탈리아 전 수상 알도 모로의 납치ㆍ살해를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1979년 체포수감된 이후, 1983년 프랑스로 망명해 1997년 이탈리아로 돌아오기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경력을 웅변"하는 책이기에 그러하다. 실제 대담에서 네그리는 자신이 붉은 여단에 깊이 공감했지만 암살활동에는 반대했다고 말한다. 붉은 여단 내부에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었다는 얘기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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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자님과의 댓글
    from to be immortal 2007-06-27 01:28 
    알도 모로, 몇 년 전, 이 사건의 내막을 정리해 본 일이 있는지라 좀 재있는 논쟁을 헤보고 싶었으나 잘 안된다. 가설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nbs...
 
 
퍼그 2007-06-25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추천하신 <<사랑의 지혜>>에도 붉은 여단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로쟈 2007-06-25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8년 이후의 좌파를 다룬 책들에서도 심심찮게 언급은 됩니다. <사랑의 지혜>는 이미 8-9년전에 읽은 책이 돼 버렸네요...

쿠자누스 2007-06-27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도 모로> 납치극이 벌어질 때 로마 시내의 전화 통화는 두절되었습니다. 모로가 납치된 곳을 알리는 수많은 제보가 있었으나 무시되었고요. 붉은 여단의 핵심에는 나토 비밀 부대 요원들이 침투해 있었음을 붉은 여단 생존자가 폭로했고 그 비밀 부대의 존재는 1990년 안드레오티 총리가 이탈리아 국회에서 증언한 바 있습니다.

비슷한 사건이 독일에도 있습니다.독일이 통일되던 무렵, 도이체방크 총재 <헤어하우젠>이 피살되고 독일 극좌테러단 '적군파'가 '3세계 민중의 착취차'를 징벌하는 차원에서 암살했다는 편지를 남겼는데 그는 암살되기 직전 독일과 소련이 손잡은
'동구 경제 부흥', '제3세계 채무 면제'를 주장하여 IMF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었지요.

이 두 사람의 프로젝트가 실현되었다면, 냉전 이후 유럽 한복판 발칸에서의 전쟁도
10년 전 러시아, 아시아, 남미를 흽쓸은'외환 위기'도,
<유럽연합>이 카지노 자본의 독재기구로 굳어지는 오늘의 사태도 없었을 겁니다.

유럽의 극좌 테러단이란 앵글로 색슨 헤게모니, 카지노 자본주의에 반기를 든 정치, 경제 요인들을 제거하고 좌파 사회 세력을 분쇄하는 비밀공작을 위장하는 데 이용된 별동부대 (유령 조직)입니다. 21세기 '반테러 전쟁'의 구실이 된 '알 카에다'는 그 후발 조직이라 보면 될 것입니다.


로쟈 2007-06-26 0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그리도 몰랐던 내용이군요...

쿠자누스 2007-06-26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그리가 몰랐을까요?

납치극의 미스테리를 추적한 저널리스트는 1979년 암살되었고
국가헌병 장군 Chiesa는 모로가 잡혀 있던 곳을 파악, 내무장관에게 보고했으나
'작전 불가'라는 명령을 받은 후 1982년 암살되었고
모로는 <붉은 여단>에게 잡혀 있을 때 나토의 비밀 작전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

Investigative journalist Mino Pecorelli thought that Aldo Moro's kidnapping had been organised by a "lucid superpower" and was inspired by the "logic of Yalta".

He painted the figure of General Carlo Alberto Dalla Chiesa
as "general Amen", [...] that

it was him that, during Aldo Moro's kidnap, had informed Interior Minister Francesco Cossiga of the localization of the cave where Moro was detained.

But he would have been ordered not to act on his information,
because of the opposition of a "lodge of the Christ in Paradise."

Pecorelli then wrote that Dalla Chiesa was in danger and would be assassinated (Dalla Chiesa was murdered four years later).

After Aldo Moro's assassination, Mino Pecorelli published some confidential documents, mainly Moro's letters to his family.
In a cryptic article published in May 1978, wrote The Guardian
in May 2003,

Pecorelli drew a connection between Gladio, NATO's stay-behind anti-communist organisation (which existence was publicly acknowledged
by Prime Minister Giulio Andreotti in October 1990) and Moro's death.

During his interrogation, Aldo Moro had referred to "NATO's anti-guerrilla activities."

Mino Pecorelli, who was on Licio Gelli's list of P2 members
discovered in 1980, was assassinated on March 20, 1979.

The ammunitions used for Pecorelli's assassination, a very rare type, where the same as discovered in the Banda della Magliana 's weapons
stock hidden in the Health Minister's basement.


-> http://www.guardian.co.uk/print/0,,4665179-105806,00.html

로쟈 2007-06-26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대로라면, Fasanella 등이 모로 사건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유럽의 극좌 테러단이란 앵글로 색슨 헤게모니, 카지노 자본주의에 반기를 든 정치, 경제 요인들을 제거하고 좌파 세력을 분쇄하는 비밀공작을 위장하는 데 이용된 별동부대입니다"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인가요? 네그리는 또 거기에 한몫하구요? 모두가 다 아는 '음모'도 여전히 '음모'인가요?..

쿠자누스 2007-06-27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BC가 1992년에 방송한 기록 영화를 보셨나요? ->
http://www.youtube.com/watch?v=l2MOpkriXb4&mode=related&search=

여기서 보시다시피 단순한 의혹이 아니라 '극좌파 테러'의 '공식 버전'을 100 % 뒤집는 증언과 증거가 나왔기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이지요. 네그리가 거기에 한몫을 했느냐 하는 건 그 자체로 흥미로운 질문이 되겠지요. BBC가 아는 걸 네그리가 모른다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1974년 육영수 저격 사건이라든가 1987년 KAL기 실종 사건이라든가 2001년 9.11 테러라든가 2003년 앵글로 색슨의 이라크 침공이라든가 2005년 7.7 런던 테러라든가 2007년 4.16 버지니아 공과 대학 사건이라든가 모두가 다 아는 음모는 음모가 아닌가요 ?

로쟈 2007-06-26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겠습니다. 전부 4.16사건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네요...

쿠자누스 2007-06-27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히 납치현장의 정황이 4.16과 비슷합니다.

버지니아에서는 아무런 증거가 없지만 정신병자 하나가 강의실 다섯 군데를 돌아다니며 순식간에 30명을 죽이고 28명을 부상시키고 자살했다는게 공식 버전입니다. -> http://cafe.naver.com/416911/284

로마에선 <붉은 여단>에 유별난 저격수가 없었고 심지어 누구는 방아쇠 당기는 것도 벌벌 떨었다는데 자동차 안의 모로는 부상도 당하지 않고 나머지 다섯 명만 즉사했지요. 그 정도 정밀 사격은 불가능하다고 <붉은 여단> 두목이 증언했구요.

현장에서 수거된 탄피 93 개 중에 절반쯤은 나토 군에서 사용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 Fünf Leute im Auto wurden getroffen. Moro selber blieb unverletzt: Der BR-Chef Moretti gab Jahre später im Wortlaut zu Protokoll, dass es „mit der militärischen Präzision der BR nie weit her gewesen ist“, bei dem Aktionsablauf seien „keine hervorragenden Schützen“ gewesen. Bei einem habe die Maschinenpistole gar Ladehemmungen gehabt. Trotzdem wurden, auch das wird erst Jahre später bekannt, am Tatort 93 Patronenhülsen gefunden. Knapp die Hälfte war mit militärischem Speziallack überzogen, der nur bei den Gladio-/NATO-Truppen verwendet wurde. Munition mit diesem Lacküberzug konnte man für einen längeren Zeitraum vergraben. (http://de.wikipedia.org/wiki/Rote_Brigaden)



로쟈 2007-06-26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 여단 사건과 조승희 사건을 동일선상에 놓으시는 건 음모론이라기보다는 음모신학으로 여겨집니다. 만약에 그런 진실이 따로 있고, 그걸 확신하신다면 이런 댓글을 다시는 건 넌센스입니다. 다른 행동을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쿠자누스 2007-06-27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 여단에 대한 저의 진술은 그럴 듯 하나 버지니아 사건과 등치하는 건 황당하다는 말씀이신가요? 두 사건의 본질, 핵심은 다르지 않다는 저의 가설을 입증하는 증거와 단서는 제가 소개한 카페에서 보실 수 있읍니다. -> http://cafe.naver.com/416911/467

진실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진실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요?
님에게 진실과 허구(넌센스)를 분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님의 블로그에 이런저런 정보나 저의 주장(가설)을 올려 님과 논쟁(소통)을 하는 것도 제게는 재밌고 의미있는 행동입니다.

로쟈 2007-06-27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여러 정치적 사건들이 음모/공작의 결과였다는 사실이 차후에 밝혀지곤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의혹이 음모설을 정당화하는 건 아니며, 버지니아 사건의 경우에도 '가설을 입증한는 증거와 단서'는 설득력이 부족해 보이네요. 사실 기독교신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의 시나리오도 믿는 자의 진실이죠. 저는 맨정신으로 부활을 말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신앙과 일상생활의 양립에 대해서도 의아하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음모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쿠자누스 2007-06-2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양'을 보면서 속이 후련했던 게, 모두가 은혜를 받아 '믿습니다'를 외치며 아우성을 치는 순간, "거짓말이야"(김 추자)가 울려 퍼질 때 였지요. '기획 테러'가 터지면 언제나 뒤따르는 '공식버전'이 활개칠 때 마다 이 노래를 퍼뜨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정보를 독점하고 왜곡하는 권력과 미디어가 퍼뜨리는 '공식버전' 치고 사실로 입증된 게 없는데도 이 터무니 없는 '공식버전'을 음모라고 부르면 '음모론자'가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Aldo Moro를 입력해서 해외 사이트를 검색하다 보니 별별 괴담이 다 나옵니다. 이렇게 모르고 살았나 하는 한숨밖에 나오질 않네요.버지니아 사건도 <알도 모로> 사건 처럼 국회 차원의 조사가 들어가고 내부 증언이 쏟아져 나오면 진상이 드러날텐데 아직까지는 로마에서처럼, 초기 진압 작전을 사보타지했다는 증언 하나 밖에 없네요. ( http://cafe.naver.com/416911/2 )

쿠자누스 2007-11-25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파' 감독이 만든 영화,
1986년 전 영화(원제: Il Caso Moro/감독: 주세페 페라라)에 비하면 완전 초딩 버전이네여.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을 모르는 시청자들에겐 스릴러 영화처럼 느껴질 만한 영화다...주세페 페라라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 당시 이탈리아 정치인들이나 비밀경찰, CIA까지 모두 모로가 죽기를 바랐다고 주장했다"
http://www.ebs.co.kr/Info/CyberPR/Board/HighLight_list.asp?paramdate=2007-11-25#h8156

 

작년 이맘때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http://blog.aladin.co.kr/mramor/902111)과 관련한 페이퍼를 올려놓은 게 있다. 그걸 보충하는 의미에서 오마이뉴스의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러시아측 자료사진들을 소개하고 있다. 러시아정부 소장 북학관련 영상자료(http://blog.aladin.co.kr/mramor/969837)도 관련페이퍼를 참조할 수 있다.   

 오마이뉴스(07. 06. 24) 러시아 눈으로 본 한국전쟁

 
▲ 소련군이 작성한 38도선
 
ⓒ 러시아 사진영상 기록보존소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 조종사 토머스 패러비가 조종하는 B-29 전폭기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어 8월 9일 커미트 비한에 의하여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투하되자, 일본은 8월 10일 일본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일본의 전후처리문제를 연구 검토하던 미 국방성은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러시아군이 남쪽은 미군이 점령하여 한반도 주둔 일본군 항복과 무장해제를 받아내자고 제의했고, 이는 9월 2일 연합국 사령부 고시 제1호로 채택된다. 이 작업에 참여한 미 국방성 인사는 본스틸 대령과 러스크 중령이다.

나는 38도선 탄생의 '목격자'이었으므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일본의 항복에 의해 국무성과 군 당국은 일본항복에 관해 맥아더 장군에게 보내야 할 지령 및 기타 연합국 정부와의 협정에 대해 긴급히 검토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8월 10일부터 11일 사이, 국무성의 던(James C. Dunn), 육군성의 맥크로이(John J. McCloy), 해군성의 버드(Ralph Bard) 등 세 명이 펜타곤의 맥크로이 집무실에서 SWNCC 철야회의를 열었다. 그날 회의는 밤을 새며 계속되었다. 의제는 일본항복 수리에 관한 협정이었다.

맥크로이는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대령과 본인에게 옆방에 가서 미군이 가능한 한 북쪽에서 항복을 수리해야 한다는 정치적 희망과 미군 진주 능력의 명백한 한계를 조화시키는 안을 작성해 오도록 요청했다. 우리는 미군 점령지역 내에 수도를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38도선을 제안했던 것이다. - '러스크 회고록'

아래 사진은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 사진영상 기록보존소'에서 소장하고 있던 영상물들로, 국가기록원은 지난 2006년 9월 정부종합청사에서 관련 시사회를 열었다.


 
▲ 북한 주민의 환영을 받으며 진주하는 소련군
 
ⓒ 러시아 사진영상 기록보존소
 

 
▲ 북한 지역에 있던 일본군 항복과 관리를 체포하는 소련군
 
ⓒ 러시아 사진영상 기록보존소
 

 
▲ 북한 주민에게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 러시아 사진영상 기록보존소
 

 
▲ 대한민국이 5.10선거를 통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하자 북한도 선거를 실시했다.
 
ⓒ 러시아 사진영상 기록보존소
 

 
▲ 투표하는 김일성. 북한 정권이 수립되기 전이라 태극기가 있다.
 
ⓒ 러시아 사진영상 기록보존소
 

 
▲ 한국전쟁 직전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이 소련군 수뇌부의 영접을 받았다.
 
ⓒ 러시아 사진영상 기록보존소
 

 
▲ 김일성 방문을 수행한 북측 인사들
 
ⓒ 러시아 사진영상 기록보존소
 

 
▲ 서울에 입성한 북한군
 
ⓒ 러시아 사진영상 기록보존소
 

 
▲ 파괴된 한강철교를 복구하여 남하하는 북한군
 
ⓒ 러시아 사진영상 기록보존소

07. 0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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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대학원신문(제154호)에서 한나 아렌트에 관한 기사를 옮겨온다(직접적으로는 담비에서 옮겨온 것이다). 아렌트 번역자 중 한 사람인 홍원표 교수가 전반적인 개요를 잡아주고 있어서 길잡이로서 참고할 만하다.  

연세대 대학원신문(07. 06. 24) 20세기의 영원한 국외자

혁명과 폭력의 세기 한가운데 서있던 아렌트의 저작들은 글로벌 시대 우리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적실성을 갖고 있는가? 궁금한 문제이다. 아렌트는 자서전을 결코 집필하지 않았지만, 제자인 영-브륄은 이야기하기 형식의 ‘철학적’ 전기에서 아렌트의 삶을 세계사랑으로 특징화하였다. 그의 저작들은 냉정하면서도 헌신적인 ‘인간사랑’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다른 시대와 세계를 반영한 저작들에서 인간다운 삶의 지혜를 찾으려는 노력은 값진 것이다. 국내에서 번역·출판한 저작들을 중심으로 아렌트의 삶과 사유 궤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렌트는 인간의 삶에서 말과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언어행위 가운데 이야기하기(story-telling) 역시 인간 관계망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그는 전통적인 분석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인간의 삶, 특히 정치적 삶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특이하게도, 그는 정치적 삶의 심오한 의미를 찾고자 정치영역 자체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의 저작들에서는 정치영역과 다른 영역들(철학, 문학, 역사, 종교 등) 사이의 끊임없는 ‘왕래’가 이루어진다. 아렌트는 이러한 왕래의 수단으로 이야기하기를 활용하였다.

이야기하기로 전개된 아렌트 저서들을 이해하는 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저서들의 구성 틀은 주로 3벌 구조(triptychs)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첫째, 인간의 삶을 활동적 삶(vita activa)과 정신의 삶으로 구분하고, 전자를 노동·작업·행위로, 후자를 사유·의지·판단으로 범주화하였다. 둘째, 인간의 특이한 경험인 시작(탄생)과 끝(죽음)을 대비시키고 있지만, 시간적 맥락에서 인간의 삶을 과거·현재·미래와 연계시키고 있다. 그는 단선적 시간 개념과 역사이론을 거부하고 있다. 셋째, 공간적인 맥락에서 사적·사회적·공적 영역과 활동유형을, 그리고 윤리적 차이를 언급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의 저작들은 시간적·공간적·행위적 맥락이라는 3벌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몇 가지 기준에 기초하여 주요 저작들의 흐름을 고찰하기로 한다.


 
정치이론가로서 성찰하던 시기(1951~1965)
1951년에 출간된 『전체주의의 기원』(박미애 옮김, 2006, 한길사)은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전체주의」로 구성되어 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로 결정화(結晶化)되는 요소들(인구과잉, 팽창과 경제적 과잉, 사회적 불안정과 정치적 삶의 악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근본적 악의 등장을 해명하였다.

전체주의 지배는 역사상 전례 없는 정치적 악이다. 인간의 시작 능력(power to begin)을 박탈함으로써 인간을 ‘파블로프의 개’로 전락시켜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집단수용소(즉, 인간도살장)는 지옥, 즉 지구에 존재하는 정치적 실재이다. 전체주의 체제는 죽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아렌트는 이에 대한 이론적 거부로 새로운 시작(삶)을 정치적 개념으로 전환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삶에 대한 그의 이론적 입장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역사적 사건이 되기 이전 시작은 인간의 최고능력이었다. 정치적으로 시작은 자유와 동일하다.”

『전체주의의 기원』 출간 이후 아렌트는 서구의 ‘위대한’ 사회적·정치적 전통을 규명하면서 전체주의의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들을 탐구하는 데 전념하던 중 새로운 정치학의 기초를 확립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인간의 조건』(1958), 『과거와 미래 사이』(1961), 그리고 『혁명론』(1963)이 바로 그 결실이다.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에 대한 비판에서 발전한 『인간의 조건』은 노동·작업·행위의 의미를 현상학적으로 조명하였다. 이 활동들은 인간의 삶을 제약하는 조건(수명, 세계성, 다원성)과 연계된다. 공간적 차원에서 볼 때, 세 가지 활동은 사적·사회적·공적 영역에서 진행된다. 행위와 공적 영역의 활성화를 통한 인간다운 삶을 강조한 이 책은 세계사랑에 대한 아렌트의 정치적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전통에 대한 성찰은 『과거와 미래 사이』로 발전하였다. 과거와 미래 사이의 틈새(시간의 공간화)는 바로 현재(nunc stans)이다. ‘이곳에서’ 아렌트는 사유 실험으로 중요한 정치적 개념들의 정신을 밝히고 있다. 근대와 전통의 단절, 역사 개념에 대한 비판, 권위와 자유의 진정한 의미, 교육과 문화 위기의 정치적 함의가 조명되고 있다. 1968년판에는 「진리와 정치」라는 주제의 중요 논문이 추가되었다.



아렌트는 1956년 헝가리혁명 소식을 들고 혁명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959년 ‘미국과 혁명정신’이란 주제의 프린스턴 대학교 세미나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혁명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책이야말로 아렌트 ‘정치’사상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조건』(이진우 옮김, 한길사, 1996)에서는 행위가, 『혁명론』에서는 ‘혁명’과 ‘건국’이 핵심 개념어다. 이들은 모두 새로운 시작의 개념적 변형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혁명을 단지 폭력이나 전제정과 연상시키는 기존의 선입견에서 벗어나 희망의 빛을 찾았다.



1960년 아이히만 재판은 선악문제에 대한 아렌트의 사유에 새로운 계기를 제공하였다. 『혁명론』을 한창 집필하던 때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잔재인 아이히만 재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자청하여 《뉴욕커 신문》의 재판 취재 특파원으로 활동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고자 하였으며, 이때 5부작 연재 기사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으로 출간하였다.

이때 다수의 유대인들은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용서하고 유대인들의 잘못을 부각시켰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반유대주의자나 친나치주의자라며 혹평하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아렌트는 자신의 주장을 결코 철회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악행은 사유하지 않음과 판단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행적을 통해 우리 삶을 왜곡시킬 수 있는 무사유의 위력(Force)을 부각시켰다. 따라서 이 저서는 분주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여유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다.



어두운 시대와 투쟁하는 삶(1965~1970)
1960년 후반 아렌트는 다양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폭력현상을 목격하였다. 이에 관한 아렌트의 정치적 성찰은 우리 독자들에게는 『폭력의 세기』(1968)(김정한 옮김, 이후, 2000)로 소개되었다. 이 책은 권력과 폭력의 관계를 독특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의 경우, 권력은 ‘공동으로 활동하는 능력’으로서 언어행위를 통해서 나타나는 진정한 정치현상이지만, 폭력은 언어행위가 중단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한계적인 정치현상이다. 얇은 분량의 이 책은 『혁명론』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 가운데 폭력의 본질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Люди в темные времена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1968)은 아렌트 저서들 가운데 우리 독자들에게 가장 먼저  소개되었다(*하지만 이미 절판되었다. 러시아아본의 이미지를 대신 띄워놓는다). 이 전기는 아렌트의 자서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브레히트의 시 「후손들에게」(첫 구절, “나는 참으로 어두운 시대에 살았구나!”)에서 차용하였다. 물론 아렌트의 저서에서 이 시어는 정치언어로 바뀌었다. 그는 공사(公私) 구분이 무너져 정신적으로 혼돈된 어두운 시대에 공적 세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사람들을 칭송하고 있다.



‘정신의 삶’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만년(1970~1975)

아렌트는 블뤼허와 야스퍼스의 사망으로 혼자 있게 되었을 때 『정신의 삶』(홍원표 옮김, 푸른숲, 2004) 이란 3부작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저서는 1970년대 초반 「칸트의 정치철학」 강의로 시작되어 1973~4년 에버딘대학교 기포드강의를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사유’와 ‘의지’에 관한 저서는 기포드 강의안 원고로 마련되었지만, 1975년 심근경색으로 인한 사망으로 ‘판단’에 관한 저서를 완결시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뉴스쿨 강의안으로 구성된 『칸트 정치철학 강의』(김선욱 옮김, 푸른숲, 2002)를 통해 그의 판단이론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활동적 삶은 현상세계에서 이루어지지만, 정신의 삶은 현상세계로부터 이탈한 순간 진행된다. ‘사유’는 나와 자아 사이의 소리 없는 대화로서 현재‘시제’와 연계된다. 우연성과 자유를 기본 속성으로 하는 ‘의지’는 의도를 시작하는 능력이며 행위의 근원으로서 미래시제와 연계된다. 반면에, ‘판단’은 상상속의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이며 사건의 종결 이후 작동되는 활동으로서 사유와 의지의 결과를 외재화하는 가장 정치적인 정신활동이다.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정신영역의 세 행위자(사유·의지·판단)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공조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세 행위자는 종종 국가를 구성하는 3부(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로 비유된다. 아렌트는 사적인 정신활동과 정신영역에서 공적 영역의 특성을 도출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신의 삶』 3부작은 아렌트 정치철학의 완결이다. 제2권의 한국어판은 아쉽게도 미출간 상태이지만, 곧 출간 예정이다.



다행스럽게도 아렌트의 주요 저작들이 우리 독자들에게 소개되었고 일부는 곧 소개될 예정이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과 일부 소개되지 않은 저서들 역시 출판을 기다리고 있다. 아렌트의 삶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영-브륄의 전기는 6월말 소개될 예정이다. 아울러 국내 연구자들의 저서 몇 권도 아렌트 이해에 많은 도움일 될 것이다.

‘사막화된’ 세계를 비옥한 옥토로 전환하려는 열정이 깔려 있는 아렌트의 저작들은 정치적 삶을 포함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풍부한 지혜를 담고 있다. 그의 저작들에서 정치적 악과의 투쟁, 세계에 대한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투쟁하는 것이며, 또한 사랑하는 것이다(vivere est militare, vivere est amare).”(홍원표 한국외대 교수-정치철학)

07. 06. 24.

P.S. 기사의 서두에서 '이야기하기'를 아렌트가 강조했다고 언급돼 있는데, 그와 관련하여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아렌트 연구서 <한나 아렌트: 삶은 하나의 이야기이다>(2000)도 소개됨 직하다.

물론 그보다 먼저 소개됨 직한 책은 거의 결정판 전기라 할 수 있는 엘리자베스 영-브륄의 <한나 아렌트: 세계사랑을 위하여>(2판 2004)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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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년, 당신에게 최고의 문장은 무엇이었나요?
    from Namyc.com 2007-12-17 02:28 
    photography: Books - bookcase top shelf by fil himself어느 덧 2007년도 저물어 갑니다. 2007년도 여느 해와 다름 없이 수 많은 문장들이 여러분의 망막위를 즈려밟고 지나갔을 텐데요. 그중에서 하나를 혹은 몇가지를 꼽아본다면 어떤 것들 인가요?2007년 마무리 겸 이런 주제가 생각이 나서 한번 포스팅 해봅니다. Namyc의 2007년 최고의 문장 보기"최고" 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내게는 "감동"이라...

미술교양서로서는 드물게도 국내 필자에 의한 단독 저작이 나왔다. 다루는 시기도 현대미술이 아니라 16-17세기 서양미술, 종교개혁 시기의 '시각문화'다(전문저술가인 노성두씨의 책들을 참고해볼 수 있지만 대부분이 입문서나 소개서이다). 신준형 교수의 <천상의 미술과 지상의 투쟁>(사회평론, 2007)이 그것이고 '가톨릭 개혁의 시각문화'가 그 부제이다. 알고보니 나도 갖고 있는 책 <파노프스키와 뒤러>(시공사, 2004)의 저자이다. 드물게도 장문의 리뷰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세계일보(07. 06. 23) 르네상스, 바로크 명화를 읽는 또 하나의 눈!

‘천상의 미술과 지상의 투쟁’은 개신교와 가톨릭이 벌였던 이념투쟁의 역사가 당시의 시각문화를 어떻게 형성했는지 묻고 있다. 16세기는 르네상스의 시기이자 또한 종교개혁의 시기였다. 종교개혁이 1500년 교회의 전통에 중대한 의문을 제기한 이후 두 세기 동안 가톨릭미술은 자신이 그려내는 천상과 지상의 모습을 재확립하고 교회의 의식과 신도들의 신앙수행에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기능함으로써 결국 가톨릭의 교세를 복구하는 사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것이 이 책의 주제다. 종교개혁의 도전 이후 가톨릭미술이 전개되어 나간 방향과 양상, 즉 가톨릭개혁의 미술사인 것이다.

종교미술은 양식분석이나 도상해석보다는 종교문화의 시각적 분야로서 그 기능의 측면에 주목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모든 종교는 시각체험의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시각체험은 영성에 도달하기 위한 강력한 방법론으로 흔히 사용된다. 바로 이러한 종교의 시각 영역이 가장 잘 표현되는 곳이 종교미술이다. 따라서 가톨릭개혁의 미술도 사실 미술이라는 말보다는 가톨릭의 시각체험, 시각문화라는 용어로 불러야 더 적합하다.

▲명화(名畵)라는 단어에서 악센트는 이름에 있을까 아니면 그 그림에 있을까?
르네상스와 바로크는 흔히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점의 시기로 생각된다. 따라서 미술사를 배우지 않은 사람들도 라파엘, 카라바조, 티치아노, 루벤스 같은 거장들의 이름쯤은 상식으로 안다. 또한 이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에는 ‘미술’이 아니라 ‘이름’을 보려고 찾아온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르네상스 바로크 미술은 박물관이라는 일종의 보물창고에서 삼엄한 경비와 보안장치의 호위를 받으며 절대적 미의 상징이자 값을 매길 수 없는 문화재로서 군림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와 장치들은 르네상스 바로크 미술을 무언가 고귀한 것, 초월적인 것으로 만든다. 박물관은 신전이며 이 작품들은 시공을 초월한 미의 신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기독교 주제의 작품들을 박물관의 보안장치와 인공조명의 무대에서 떼어내 당시의 시대로, 원래의 장소로 돌려놓고 바라본다. 16-17세기, 종교투쟁의 시기에 만들어진 이 작품들은 미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들이 말해주는 것은 천상의 구원을 향한 열망과 투쟁으로 점철된 인간의 삶이다. 구원과 투쟁, 천상과 지상이라는 양극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공존하는 패러독스의 세계,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 바로크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당시의 세계이고 삶이다.

▲천상의 구원을 향한 열망과 투쟁으로 점철된 인간의 삶
이 시기 미술가들은 예술가라는 자의식과 종교투쟁의 사회가 부과하는 요구 사이에서 저항하기도 했고 타협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와 티치아노는 교회와 세속 군주라는 거대 권력을 업고 예술적 성취와 세속적 출세 두 가지를 함께 추구했던 화가들이다. 이들에게 권력의 요구는 기회를 의미했다. 루벤스는 교회와 세속 권력 모두로부터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던 행운아였지만 그가 경탄해 마지않았던 천재 카라바조는 어느 쪽에서도 환대 받지 못한 채 피로와 고독 속에 떠돌다 생을 마쳤다. 미술의 자연주의적 호소력을 추구했던 베로네제는 종교재판의 권위 앞에서 자신의 그림 제목을 바꾸어야 했지만, 그러나 그림은 지켜냈다.

한편 엘 그레코와 보로미니처럼 종교적 열정에 영감을 받아 극단의 환영주의를 추구했던 보다 ‘예술가적인’ 인물들도 있었다. 이처럼 명화의 판테온에서 지상으로 내려진 작품들에서 우리는 당시의 삶을, 당시의 고통과 희열을, 좌절과 성취를 읽는다. 결국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거장의 ‘이름’들이 아니라 이들의 그림으로 결정(結晶)화된 당시의 삶이다. 이들의 그림을 통해 우리도 당시의 고통과 희열을 시각으로 체험하려는 것이다.

▲국내에서 처음 출판된 종교개혁▪가톨릭개혁의 미술사
16-17세기 가톨릭개혁의 미술사는 우리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는 유럽이 제3세계로 뻗어나가던 시기였고, 특히 남미와 동양으로 진출했던 이들이 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가톨릭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제3세계 전도의 첨병은 예수회였으며, 이들은 이미 16세기에 중국과 일본에 왔다.

예수회는 작은 나라인 조선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18세기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가톨릭을 서학이라는 이름하에 중국에서 들여왔다. 이로써 조선은 전 세계에서 자발적으로 가톨릭을 받아들인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18세기에 가톨릭이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개신교에게 유럽의 상당 부분을 잠식당한 가톨릭이 제3세계에 영토를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중국 선교에 엄청난 노력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가톨릭이 들어왔고, 개신교의 유입은 더욱 늦었으나, 현재 동양에서 기독교가 확고히 자리 잡은 나라는 중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다. 도대체 왜 한국에서 기독교(개신교와 가톨릭 모두)가 그토록 번성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역사적․사회학적 해석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학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구원의 메시지가 이 땅의 문화에 결여되어 있던 그 무엇인가를 채워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기독교가 유럽을 떠나 전 세계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던 종교개혁과 가톨릭개혁의 문제, 또 그와 결부된 미술의 문제는 기독교가 이미 18세기에 들어와 굳건히 자리 잡은 한국의 역사나 문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뿌리내리고 존재하는 한 종교개혁, 가톨릭개혁의 시각문화는 ‘서양인’, ‘타인’들의 문화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역사와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우리의 현재로 이어지는 보편적인 유산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보편적 유산으로서의 16-17세기 유럽 기독교미술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천상의 황홀경과 지상의 투쟁 사이에 너무나 먼 간극이 존재하듯이 르네상스 이래로 이들이 품게 된 예술가라는 자존의식과 혼란의 사회가 부과했던 요구 사이에도 화해하기 힘든 거리가 있었다. 이들이 져야 했던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무게는 이들에게 짐과 멍에이면서 동시에 성공과 출세의 기회이기도 했다. 실제로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베르니니, 루벤스 같은 이들은 이 기회를 영리하게 붙잡아 미술사에서 전무후무한 지위와 권력을 누렸다. 자신의 공방에 들어온 12살 소년 틴토레토를 열흘 만에 쫓아낸 거장 티치아노의 비정함, 소년의 재주와 천재성에 경악한 티치아노는 호랑이 새끼를 기를 수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구원의 약속과 세속적 성취가 공존할 수 있었던 시기, 성공과 명성을 향한 인간의 욕망과 예술의 이상이 공존할 수 있었던 패러독스의 시기가 바로 르네상스였고 바로크였다.

이 책이 출발하고 있는 시점인 하이-르네상스는 전통적인 미술사에서 너무나 이상화되어 있는 시기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가라는 자의식이 깨어나고, 인문주의의 부흥으로 인간 존재의 존엄과 아름다움이 글과 그림으로 표현되고, 결국 인류 문명의 최고 정점으로서 이후의 온갖 세대와 제 민족들이 본받을 영원불멸의 규준canon으로 남게 된 이상의 시기가 르네상스라는 것이 고전적 이론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르네상스는 자본주의와 식민주의, 유럽중심주의의 시작이며 무한경쟁과 물질적 성취가 긍정되었던 매우 냉혹한 시기이다. 화가들 개개인의 삶도 리얼리즘의 극치다.

이 책은 신비화된 르네상스를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이상의 시대라기보다는 투쟁의 시대로서의 르네상스를 조명하고 있다. 르네상스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종교개혁과 가톨릭개혁의 미술사를, 종교투쟁의 시각체험을 글로 재현한 것이다.

저자 신준형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에서 미술사 석사학위를, 위스콘신 주립대학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미술사학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조정진 기자)

국민일보(07. 06. 23) ’천상의 미술과 지상의 투쟁’낸 신준형 교수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서양 미술 관련서는 대부분 초보자용 교양서다. 좀더 깊이 있는 책을 보려면 번역서밖에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신준형(38·사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가 ‘천상의 미술과 지상의 투쟁’(사회평론)을 내놓았다. 16세기 르네상스와 17세기 바로크의 미술사를 추적한 이 책은 이상화된 당시의 미술을 종교문화, 종교체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르네상스 하면 인문주의나 인본주의를 떠올리게 되는데요, 사실 이 시기는 종교개혁의 시기입니다. 당시 그림들의 70% 이상은 종교화거든요. 인간에 대한 재발견이 이뤄지고 인체의 묘사가 자유로워졌다지만 이들 그림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신앙심을 호소하는 선전선동용입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는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점의 시기로 생각된다. 미술사를 배우지 않은 사람들도 미켈란젤로, 라파엘, 카라바조, 티치아노, 베르니니, 루벤스 등 거장의 이름은 상식으로 알 정도. 또한 이들의 작품은 지금도 수많은 박물관에서 문화재로 우대받는다. 하지만 저자는 이 작품들은 ‘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천상의 구원’을 향한 인간의 열망과 투쟁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루터로 시작된 종교개혁 이후의 가톨릭 미술이 바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벌였던 이념투쟁의 역사가 당시 시각문화를 어떻게 형성했는지 초점을 두었어요. 종교화라고 하면 중세시대의 아이콘(성상화)을 떠올리지만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역시 그 앞에서 기도하거나 명상하기 위해 그렸어요. 이것이야말로 당시 그림의 본질을 이해하는 길입니다.”

이 시기의 화가(조각가)들은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가진 인물들로 미켈란젤로 등 몇몇 인물들은 불굴의 의지를 지닌 천재로 묘사된다. 하지만 저자는 당시 예술가들이야말로 교회와 군주라는 거대 권력을 업고 세속적 출세를 추구했던 부류하고 역설한다.

당시 예술가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게 되면서 무한경쟁의 시대로 들어갔습니다. 그 경쟁에서 살아남은 예술가들이 지금 우리가 아는 거장들입니다.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루벤스 등의 일생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정치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기독교가 굳건히 자리잡은 한국에서 르네상스와 비로크 미술은 더 이상 이질적인 문화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서양인(타인)들의 문화가 아니라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우리의 현재로 이어지는 보편적 유산입니다.”(장지영 기자)

07. 0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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