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아침 신문을 미리 훑어보다가 7월 2일이 이탈리아계 미국 소설가 마리오 푸조의 기일이란 걸 알게 됐다. 그걸 빌미로 씌어진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미국 소설가 마리오 푸조가 1999년 7월 2일 79세로 사망했다. 푸조는 <대부>의 작가다. 그는 <대부>의 제사(題詞)로 발자크를 인용하고 있다. “커다란 부의 이면에는 반드시 커다란 범죄가 존재한다.” 발자크의 말은 19세기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이 급성장한 수상한 기원을 지적한 것이었다. 푸조는 이를 <대부>에서 마피아 대부인 비토 코를레오네의 말로 변주한다. “누가 그들의 이해관계에는 도움이 되고 우리에게는 손해가 되는 그런 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물론 코폴라가 만든 <대부> 3부작을 나도 영화로는 보았지만 푸조의 원작소설 <대부>는 읽어보지 못했다. 제대로 된 국역본이 나왔었나, 미심쩍어하며 찾아보니 웬걸 주요 작품이 <마지막 대부>(늘봄)까지 출간돼 있었다(나는 보급판 두 권을 장바구니에 옮겨놓았다). 출간 소식을 접했을 법도 하지만 주의하지 않고 지나쳤던 모양이다. 여하튼 그래서 우리도 '마리오 푸조'를 갖게 된 것.

 

 

 

 

하지만 우리의 마리오 푸조, 우리의 <대부>는?  거기에 걸려 있는 건 “커다란 부의 이면에는 반드시 커다란 범죄가 존재한다.”는 발자크의 명제를 입증해보이고 있는 한국소설이 우리 주변에 있는가, 이다. 한국사회의 '주류'와 그 '악(커다란 범죄)'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이 있던가? 과문하지만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푸조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이탈리아계 이민 2세로 뉴욕에서 태어난 푸조는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이탈리아계 미국 마피아 코를레오네 집안의 이야기로 20세기 미국사회의 폭력과 권력의 역사를 다룬 <대부>는 그가 46세 때 생활비로 출판업자한테서 5,000달러를 선불로 받고 쓴 소설이라 한다. 그것이 세계적으로 2,000만부가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고 1972년 불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말론 브랜도, 알 파치노 등의 놀라운 연기(얼마 전 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을 보고 그 눈부신 여주인공 다이안 키튼이 벌써 61세가 됐으며, 그가 35년 전 ‘대부’에 26세의 나이로 출연했던 걸 생각하고는 새삼 세월을 실감하기도 했다)에 니노 로타의 아름다운 주제곡이 어울린 영화 ‘대부’는 몇번을 다시 봐도 멋진 작품이다(http://www.youtube.com/watch?v=4Y4i7gmP6ac).
 
푸조의 원작소설은 영상이 결코 다 표현하지 못하는, 비토 코를레오네의 저 유명한 말을 빌리자면 “거절할 수 없는” 문자의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화려한 영화의 그늘에서 흔히 원작의 존재가 가려져 버리는 것을 보지만, 진실로 빼어난 원작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하종오 기자) 

1947년 돈 꼴레오네의 호화 저택에서는 막내딸 코니와 카를로와의 초호화판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다. 시실리아에서의 이민과 모진 고생 끝에 미국 암흑가의 보스로 군림하는 마피아의 두목 돈 꼴레오네는 재력과 조직력을 동원, 갖가지 고민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해결해 사람들은 그를 '대부(代夫)'라 부른다.

돈 꼴레오네는 9세때 그의 고향인 시실리아에서 가족 모두가 살해당하는 불행을 겪으며 미국으로 도피하여 밑바닥 범죄 세계를 경험하면서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된다. 세월이 흐른 후 부모의 복수를 위해 시실리로 돌아온 그는 조직적 범죄를 통해 비약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돈 꼴레오네의 라이벌인 탓타리아 페밀리의 마약 밀매인 소롯소가 돈 꼴레오네를 죽이면 천하가 자기 손아귀에 들어온다고 생각해 그를 저격, 중상을 입힌다.

돈 꼴레오네의 막내 아들 마이클은 대학 출신의 인테리어다. 아버지의 저격 사건을 계기로 조직에 개입하여 레스토랑에서 소롯소를 사살하고 시실리로 피신한다. 시실리아에서 시골 아가씨와 결혼하지만 집요한 추적으로 아내를 잃는다.

장남 소니는 자신의 여동생 코니를 학대하던 카를로를 혼내주나 이에 앙심을 품은 카를로는 자신의 패밀리와 소니를 배반하게 되고 이로 인해 소니가 처참하게 암살당한다. 돈 꼴레오네의 일가는 붕괴직전에 직면한다. 돈 꼴레오네 일가를 위해 귀국한 마이클은 대학시절 애인인 케이와 재혼한다. 얼마 후 손자와 뜰에서 놀던 돈 꼴레오네가 심장발작으로 급사, 마이클이 자리를 이어받아 이 집안의 양자로 오른팔 역활을 하는 변호사 톰을 참모로 조직을 단결시켜 적의 격퇴를 해 나간다.(씨네21)

Крестный отец

그 원작은 러시아의 경우에 고전(클래식) 문고본으로도 출간돼 있다(러시아어로는 '마리오 퓨조'이다). 그에 비하면 이 '대중적인' 작가와 작품에 대한 우리의 평가엔 좀 인색한 구석이 있다. 정작 우리시대의 발자크, 우리시대의 마리오 푸조를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걸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우리 주변의 소설 주인공들은 대개 '커다란 부'와 무관한 도바리들이거나 백수들이었다. 자본가가 아닌 노농자들이었다. 그들에게서 '적'들에 대한 비난과 야유는 심심찮게 들어봤지만 정작 그 '적'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엿볼 수 없었다(한국문학은 대저 '피해자들'의 하소연으로 충만하다).   

 

 

 

 

몇년 전 문학교수들과 평론가들의 설문조사에서 20세기 최고의 작가로 꼽힌 황석영. 하지만 나는 그의 <오래된 정원>을 얼마전 읽으면서 싱겁다는 인상을 지우지 못했다. 80년 광주 이후 무려 18년만에 씌어진 이 장편소설이 시대의 벽화를 그려내기보다는 고작 서정적 소묘 정도에 만족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 도바리의 감옥생활과 그를 뒷바라지한 한 여인의 이야기는 부분적으로 감동적이지만 여운을 남기지는 않는다. 1인칭 소설의 한계이겠지만 그들이 왜 그런 삶을 살았는가가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역시 피해자들의 얘기만 늘어놓는 소설의 한계 아닐까(<오래된 정원>은 작가의 고백대로 '손풀기'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그것이 정공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데, 이 작품의 영화화를 앞두고 황석영은 임상수 감독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아이러니컬하게도 <오래된 정원>은 내게 '서사를 잃어버린 소설'로 읽혔다).  

황석영 | 그래, 그런 의미에서 우리 둘이 잃어버린 서사를 회복하고 담지하자는 선언이라도 하자. 사실 나 같으면 <바람난 가족> 그렇게 안 만들어. <대부>처럼 누아르로 만들지. 그게 천민자본주의 형성사 아냐.

임상수 | 선생님과 같이 하고 싶은 게 강남 형성사입니다. 변방이 어떻게 중심으로 바뀌는가. 천민자본주의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사실, 선생님이 영화감독을 하셔야 되는데.

황석영 | 에이, 무슨. 내가 지금 태어나면 나도 영화감독 하지, 뭐 하러 읽지도 않는 소설 써. 그래 나도 하고 싶다. 내가 구술로 다 불러줄게. 내가 시놉시스도 다 써오고. 삼부작으로 만들자.

마리오 푸조-코폴라의 <대부>란 무엇인가? 미국식 '천민자본주의 형성사' 아닌가? 작가 황석영이 언제라도 소설로 쓰거나 영화로 만들 수 있는! 그것이 '강남 형성사'래도 무관하다. 3부작이어도 좋고, 4부작이어도 좋다(구술로 다 불러준다잖은가?). 한데, 황석영은 에둘러 간다. 심청과 바리데기 이야기로.

곧 출간된다는 신간 <바리데기>는 "중국대륙과 대양을 건너 런던에 정착한 탈북소녀 '바리'의 여정을 통해, 한반도와 전 세계에 닥쳐 있는 절망과 폭력, 전쟁과 테러의 모습을 담아냈다. '바리데기' 신화를 차용,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21세기 현실의 삶을 박진감있게 그려낸 소설."이라는데 시놉시스만으로도 또한번 간난의 삶을 산 '피해자들'의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충분히 제값은 하겠지만 대중성도 감안해서 쓴다는 '최고의 작가'에게서 내가 기대하는 소설은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눈길을 주게 되는 작가가 김훈이다.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일방적인 힘에 의해 바뀌지는 않을 거다. 어느 쪽이 선이고 어느 쪽이 악인 것이 아니다. 가난한 자들이 선이고 부자가 악인 것이 아니다. 그 반대도 아니고. 노동이 선이고 자본이 악인 것이 아니다. 그 반대도 아니고. 자본이 무너지면 노동이 무너진다. 그건 우리가 IMF시절에 직접 본 것이다. 회사가 무너지면 노동자가 잘사나? 천만에, 먼저 죽어 버린다. 결국 같은 거다. 이익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있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생과 사는 서로 같은 거다."

최근 중도를 제창한 과거 '진보적' 작가와 달리 '보수적' 작가 김훈에겐 '어느 쪽이 선이고 어느 쪽이 악인 것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보수적이다. 내가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주 자존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보수와 진보를 가른다는 건 무지몽매한 일이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일단의 구체성만이 중요한 것이다. 나의 보수주의는 구체성을 존중한다는 의미다. 먹고 살고 차가 막히는 걸 해결하고 계층의 문제를 해결하고 쓰레기가 떨어졌으면 주워서 버리고,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따지는 것은 헛된 일이다."  

 

 

 

 

내가 경탄해마지 않는, <남한산성>에서의 젊은 칸의 문장들은 바로 그러한 세계관에서 배태되었을 터이다.

"내가 이미 천자의 자리에 올랐으니, 땅 위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나를 황제로 여김은 천도에 속하는 일이지, 너에게 속하는 일이 아니다. 또 내가 칙으로 명하고 조로 가르치고 스스로 짐을 칭함은 내게 속하는 일이지, 너에게 속하는 일이 아니다."(25쪽)

'너에게 속하지 않는 일'을 가지고 아웅다웅 시비하고 평가하는 일은 가능한 일이긴 하나 헛된 일이다. 그걸 마피아 대부 돈 꼴레오네는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누가 그들의 이해관계에는 도움이 되고 우리에게는 손해가 되는 그런 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일방적인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엥겔스가 말하는 부르주아지도 마찬가지이다.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각각의 발전 단계들에는 그에 걸맞은 정치적 진보가 수반되었다. 부르주아지는 봉건 영주들의 지배 아래에서는 피억압자 신분이었고, 꼬뮌에서는 무장한 자치 연합체였으며, 어떤 곳에서는 독립적인 도시 공화국이었고, 다른 곳에서는 군주국의 납세의무를 지닌 제3신분이었으며, 그 다음에 매뉴팩처 시기에는 신분제 군주국이나 절대 군주국에서 귀족에 대한 평형추였으며, 대군주국 일반의 주요한 토대였다가 마침내 대공업과 세계 시장이 갖추어진 이래로는 현대 대의제 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하였다.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부르주아지는 역사에서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하였다."(<공산당 선언>) 

내가 읽고 싶은 건 그러한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커다란 범죄' 이야기이다(심청과 바리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아니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신경림, '농무')거나 "못난 사람들이라고 그리움과 기다림을 모르겠는가"(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의 세계는 서정시로도 차고 넘친다(젊은 작가들의 소설들에서도 궁상맞고 되바라진 똘마니들의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소설은 뭔가 다른 걸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내 생각에 황석영과 김훈은 그런 걸, 뭔가 어른스러운 걸 보여줄 수 있는 작가이다. 차이라면 황석영은 아직 안 쓰고(못 쓰는 게 아니라) 김훈은 아직 못 쓰고 있다는 것(안 쓰는 게 아니라). 김훈은 이렇게 말한다.

"난 소설가가 됐는데 아직도 당대 사회에 대한 글을 제대로 못 쓰고 있다. 앞으로 쓰려고 한다. 우리 시대의 사회에 대해서. 달라졌다면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을 쓸 수 있다는 정도. 성취와 좌절에 대해 쓰려 하는데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못 쓰면 뭐 할 수 없는 거다. 억지로 할 생각은 없다."

해서 나는 두 사람이 현재로선 동일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은 열심히 해외를 돌아다니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열심히 연필을 깎고 있다. 누가 먼저 '당대 사회'에 대한 기대치의 소설을 써줄지, 우리의 '돈 꼴레오네'가 돼 줄지 더 기다려봐야겠다...

07. 07.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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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 2007-07-01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 내용의 소설들은 주로 대중 작가들이 잘 다루죠. 일본에는 야마자키 도요코 정도가 있겠군요.

로쟈 2007-07-0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도 아예 '기업소설'이란 게 있지요. 제가 기대하는 건 최소한 마리오 푸조 수준의 '클래식'입니다...

비로그인 2007-07-02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보급판을 가지고 있는데요,책은 일단 분권 안하고 두껍게 낸 것만으로도..값어치는 합니다.^^

로쟈 2007-07-02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이번에 주문했습니다. 의외로 안 팔리는 책이네요.^^;

castrato 2007-07-04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사람이 현재로선 동일 선상에 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래도 저로선) 김훈보단 황석영이 '한건' 해줄 거란 기대를 하게 됩니다. <대부>.. 저도 사봐야겠네요.

로쟈 2007-07-04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굳이 걸자면, '거북이'쪽입니다.^^
 

7, 8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을 작성한다. 한달 단위로 목록을 뽑았었지만, 지난 6월에 사정이 좋지 않아 5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을 연장했었고, 여름이 실질적인 '독서의 계절'이라곤 하지만 책만 읽을 수 있는 계절은 아니기에 기한을 넉넉하게 잡기로 했다. '새로 나온 책'들에 대한 편애 때문에 미리 이런 리스트를 뽑는 게 취향에 맞지는 않지만 여하튼 다섯 가지 주제에 따라 다섯 권의 목록을 만들어본다. 이를테면 오지선다인 셈이며 주제별로 한 권 정도씩을 읽어보자는 게 나의 제안이다(빠져나갈 구멍들도 만들어놓았다). 이런 사회적 독서의 제안 취지는 소위 '상식'을 공유하고 공통감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첫번째 주제는 지난 6월의 '후일담' 같은 것인데, 실질적으로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무의식은 '97년 체제'처럼 보이지만 여하튼 공식적으로 더 많이 공론화되고 있는 것은 '87년 체제'이며 그 '민주화'의 열망과 절망이 연말 대선을 앞둔 올해의 화두이다. 최근에 출간된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웅진지식하우스, 2007)은 지난봄에 나온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후마니타스, 2007)과 짝을 지어 읽어볼 만하다. 후자는 경향신문의 기획특집이었고 전자는 현재는 휴간중인 당대비평의 편집위원회가 엮은 것으로 '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사회에 대한 성찰'이란 화두를 붙들고 있다. 다양한 필자들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지난 20년을 돌이켜 보고 앞으로의 전망을 모색해보고 있다. 우리의 사회적/정치적 현실을 되새겨보는 데 유익한 자료가 되어줄 듯하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이 창간 5주년 기념으로 기획했던 것은 문제의 진단보다는 해법이었는데, 우리시대의 명망가 '다섯 지식인이 말하는 소통과 공존의 해법'을 담은 <여럿이 함께>(프레시안북, 2007)는 '부교재' 정도로 읽어봄 직하다(지면이 아닌 온라인으로도 읽어볼 수 있다). 그리고 최근 몇년 동안 부쩍 언론 노출 빈도가 잦아진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2/2005)는 '한국 민주주의' 담론 유포에 도화선이 된 책이다. 넓은 의미의 '정치적인 것'이 아닌 좁은 의미의 '정치' 영역에서 지난 20년을 회고하고 문제를 진단하며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한겨레출판, 2007)는 우리의 시야를 동아시아로 넓혀주는 책. 한국적으로 '행동'하기 이전에 동아시아적으로 '사고'해볼 필요성을 깨닫게 해준다.   

 

 

 

 

두번째 주제는 한반도와 북미관계이다. 새로운 화제는 아니지만 일부러 이 주제의 책들을 검색해본 일은 드물었다. 최근 BDA 문제가 타결되어 북핵문제를 둘러싼 한반도와 주변국들간의 긴장관계가 일단은 해결국면으로 접어든 양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통일을 향한 로드맵이 앞으로 탄탄대로일 거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욱식의 <동맹의 덫>(삼인, 2005)의 표현을 빌면 우리에게 가로놓여 있는 건 '동맹의 덫'과 지정학적인 '지독한 역설' 관계이기 때문이다.

아주 따끈한 신간들은 아니지만 개번 맥코맥의 <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이카루스미디어, 2006), 브루스 커밍스 등의 <악의 축의 말명: 미국의 북한 이란 시리아 때리기>(지식의풍경, 2005), 마이크 모치주키 등의 <대타협: 북한 vs 미국, 평화를 위한 로드맵>(삼인, 2004) 등이 모두 관련서들도 눈길을 끄는 책들이다. 거기에 백낙청 교수의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창비, 2006)이 최근 국내에서 나온 책으로는 독보적이다.

소개에 따르면 "통일을 지금의 분단체제보다 국민들이 더 나은 체제에서 살게 만드는 작업이라는 인식 하에서, 국가연합 형태의 점진적인 분단체제 극복을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보는 지은이는 이른바 '6.15 시대'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전쟁 같은 불가피한 파국을 전제로 하는 일회성 사건으로서의 통일이 아니라면, 통일은 어느 순간 '도둑같이' 찾아올 것이라는 시각이다." 그만큼 사전대비가 필요하다는 얘기이다(여름 휴가중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겠다).  

 

 

 

 

다소 무거운 주제들을 나열한 듯싶은데 스트레이트로 하나 더 보태자면 '인문학 문제' 또한 이 여름의 읽을 거리이다. '인문학 위기'는 이미 지난 2-3년간 학술 저널리즘의 최대 유행어가 되었고, 최근에는 급기야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인문학 진흥 기본계획'이란 것까지 발표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인문학 IMF'라고도 할 만한데(생각해보면 경제파탄 10년후에 정신파탄이 수반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덕분에 인문학-인문주의-인문정신의 가치와 위상과 정체성에 대한 물음들이 간단없이 제기되었던 건 나름대로 소득이라 할 만하다.  

최근에 한국학술협의회에서 펴낸 <인문정신과 인문학>(아카넷, 2007)은 한국 인문학의 현재를 가늠해보는 데 유익한 참조가 될 만한 글들을 다수 싣고 있다. 대담 코너에서는 김우창 교수와 최근 타계한 리처드 로티의 서신대담이 연재돼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것만으로는 책에 손길이 간다. 그런 대담 꼭지에서도 시사되는 바이지만 한국 인문학의 간판급 지식인으로 자주 거론되는 이는 김우창 교수이다(가령, '김우창 vs 리처드 로티', '김우창 vs 가라타니 고진' 등등). 알려진 대로 문광훈 교수의 여러 저작들이 인문학자 김우창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김우창의 인문주의>(한길사, 2006)은 대표적이다. 내친 김에 5권으로 묶인 김우창 전집에 이 여름에 독파해볼 수도 있겠다(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더불어 이미 많은 화제를 모았던 책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 또한 시세에 둔감한 분들을 위해 다시금 거명해둔다. 앞서 언급한 교육부의 인문학 진흥 기본계획에 보면 "인문학은 자기와 주변의 이해를 돕고 품위 있는 삶을 유도하는 학문"이라고 규정돼 있는데, 이는 "인문학을 배움으로써 자기 자신을 존중하게 되고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얼 쇼리스의 주장을 참고한 것이다(라고 부언해놓았다). 그 정도면 '한국을 움직인 책' 후보감이다.     

인문학 알레르기가 있으신 분들은 이 여름에 통섭에 빠져보는 것도 좋겠다. 최재천 교수의 '작명'이지만 어느새 입에 익숙한 단어가 돼버린 통섭은 개별 학문의 경계를 넘어 폭넓게 사유하는 것을 뜻하는데, 사실 기원으로 소급해 올라갈 수록 현재의 허다한 학문들은 몇몇 교차점과 공통의 근원에 가닿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찌보면 학문의 '오래된 미래'를 다시 회복해보자는 취지로도 들린다. 에드먼드 윌슨의 <통섭>(사이언스북스, 2005)이 소개된 이후 올해엔 아예 통섭원총서 제1권으로 <지식의 통섭>(이음, 2007)까지 출간됐다. 개인적으론 책들을 구해놓은 지는 꽤 되는데, 이번 여름에나 읽어볼 수 있을 듯하다. 더불어 읽어도 좋겠다. 통섭 본래의 아이디어도 그러하고.    

 

 

 

 

드디어 좀 가벼운 분야로 와서 올 여름에 읽을 문학이다. 일단은 <올해의 좋은 소설>(현대문학, 2007), <올해의 좋은 시>(현대문학, 2007)을 꼽아둔다. 물론 '좋은 소설'에 선정된 작품들은 대개 문예지들에 발표되었던 중단편들이다. 장편소설들이야 독자들이 알아서 챙겨읽지만 문예지들이 거의 읽히지 않는 상황에서 아깝게 묻히게 되는 문제작/수작들이 적지 않다. 그런 작품들을 좀 챙겨두자는 취지이고 최소한 동시대 작가들이 어떤 고민거리를 안고 있으며 어떤 성취에 도달하고 있는가 정도는 가늠해볼 수 있겠다. 그리고 고른 장편들은 동아시아 삼국의 문제작들을 꼽았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를 거론하는 건 새삼스럽지만 지난 1967년에 씌어진 그의 대표작 <만년원년의 풋볼>(웅진지식하우스, 2007)이 이번에 재출간됐으므로 핑계가 없지는 않다. 이전에 나온 고려원 전집판은 절판된 상태였고 나도 따로 구해두지 않았던 터라 이참에 게획을 잡은 것. 그리고 중국 소설로는 본토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이 된 작가 위화의 최신작 <형제>(휴머니스트, 2007)이다. 3권짜리로 종횡무진 중국 현대사와 그 시대를 살아간 군상들의 삶을 대표작가의 입담을 통해서 들어볼 수 있겠다.

그리고 올 상반기 최대 베스트셀러이자 문제작인 김훈의 <남한산성>(학고재, 2007)은 따로 거론할 필요가 없는데, 동아시아 3국의 소설을 비교해보려니 다른 작품을 얼른 떠올리기 어려웠다. 이미 읽으신 분들은 한번 더 읽으시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여름 휴가때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하라면 교양과학서를 일순위로 꼽는다. 일반독자들에게 추리소설이나 SF소설에 해당하는 것이 내겐 교양과학서들인 셈인데, 지난 2-3년간 휴가다운 휴가를 다녀온 적이 없어서 스스로는 실행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밀린 책들이 많지만 이 여름에 읽을 책들도 부지런히 사두었다. '한국 최고의 과학지성들이 현대과학의 난제에 도전한다'는 부제의 <우주와 인간 사이에 질문들 던지다>(해나무, 2007)은 국내 필자들의 책이어서 거명은 하지만 270쪽의 얄팍한 책이다. 휴가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닥날.

아미르 아젤의 <데카르트의 비밀노트>(한겨레출판, 2007), 도널 오셔의 <푸앵카레의 추측>(까치글방, 2007) 모두 수학(기하학)에 관한 책들이다. 올해가 18세기의 수학자 오일러 탄생 300주년이라고 하여 그에 관한 책을 찾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국내에는 변변한 책이 소개돼 있지 않다(오일러는 주로 러시아에서 활동한 수학자이다).

<핀치의 부리>의 저자 조더던 와이너의 <초파리의 기억>(이끌리오, 2007) 또한 소설에 못지 않은 재미와 이야기를 들려줄 것으로 기대된다(원제는 보다 고급스럽다. <시간, 사랑, 기억>). "행동도 당연히 유전자에 적혀 다음 세대로 전달되어 마땅하다 믿고 그 증거를 찾아낸 생물학자 시모어 벤저와 그의 연구과정을 풀어낸 책. 진화학, 동물행독학, 분자생물학등 생물학의 다양한 파노라마가 한 곳에서 펼쳐진다"고. 그리고 '의사들은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는가?'란 부제의 <의학의 진실>(마티, 2007)은 교양서를 거의 읽지 않는 동생들에게 선물을 할까 생각중이다(그들은 의사이다)...

07. 07. 01.

 

 

 

 

P.S. '사회적 독서'만 늘어놓고 보니 약한 허전한 듯하여 '개인적 독서' 목록도 적어둔다. 현재 읽고 있거나 조만간 읽어볼 생각인 책들이다(주로 에세이들이다). <다른 곳을 사유하자>(푸른숲, 2007)와 <브레이크 없는 문화>(이카루스미디어, 2007)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소개한 바 있고, 미셀 포쉐의 <행복의 역사>(열린터, 2007)는 프랑스 역자학자의 행복을 주제로 한 대중적인 에세이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해왔던가를 돌이켜보노라면 행복에 대한 강박에서 약간은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그리고 프랑스 미술사가인 다니엘 아라스의 <디테일: 가까이에서 본 미술사를 위하여>(도서출판 숲, 2007)는 기이하게도 별로 주목받지 못한 책이다. "이 저작은 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연다. 그것은 디테일이다. 우연하게 보여졌거나 차츰차츰 발견된, 식별되고 고립되고 전체에서 분리된 디테일은 '멀리서' 성립된 것처럼 보이는 미술사의 범주들에 의문을 던진다. 프랑스의 미술사가 다니엘 아라스는 그림 속 디테일의 서로 다른 지위를 연구함으로써 또 다른 미술사를 제안한다. 그것은 붓과 시선의 실천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미술사다."란 소개가 머쓱한데, 경제력 때문에 아직 구입한 책은 아니지만 충분히 관심을 끄는 책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1902-1977)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갈라파고스, 2007)는 어제 퇴근길에 손에 든 책인데, '한 기억술사의 삶으로 본 기억의 심리학'이 부제이다. 저자인 루리야는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신경심리학자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올리버 색스의 책들에서 그의 이름이 종종 언급되면서 미국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러시아에서는 그의 <일반심리학 강의> 등이 아직도 교재로 나오고 있다(아래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된 <신경심리학의 기초>).

Основы нейропсихологии

책은 솔로몬 셰르셉스키라는 러시아 출신의 언론인 겸 기억술사에 관한 루리야의 임상기록을 토대로 하고 있다. 국역본은 영역판의 중역이지만 1930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나 같은 러시아문학 전공자의 관심 또한 충분히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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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01 21:40   좋아요 0 | URL
로쟈님 페이퍼를 오면 제가 읽고프지만 부담가서 못읽고 있는 책들을 자주 접합니다. 그 책이 지니는 무게감 때문에 주제별로 줄줄이 엮어 볼 수 없는. 언제쯤이면 로쟈님 같이 독서를 할 수 있으려나...

로쟈 2007-07-01 23:55   좋아요 0 | URL
'사회적 독서'에 올려놓는 책들은 대부분 내용 자체가 '부담'스러운 책들은 아닌데요.^^; 줄줄이 읽으려면 경제적인 부담이 될 듯하나...

동대장 2007-07-10 09:07   좋아요 0 | URL
경제적 부담에 한표 던지고 갑니다.
 

주말판 경향신문에서 옮겨온 연재이다. 문광훈 교수의 '천천히 사유하기'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인데, 문학/예술의 종언론이 횡행하는 시대에 아직도 문학/예술에 뭔가를 기대한다면 그건 '세계시민적 공동체'(혹은 '세계공화국')에 대한 기여 지분과 관련해서가 아닐까 싶다. 너무 점잖은 글이긴 하나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그림도 구경할 겸 스크랩해놓는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얼음바다’(1823년경)는 얼음덩이 아래 가라앉은 배의 잔해를 보여준다. 칼날처럼 치솟은 얼음조각이 보여주듯, 인간의 노력은 자연의 위력 앞에 쉽게 좌초되고 만다. 그러나 가없는 수평선은 지금의 좌절이 한 때의 일일수도 있음을, 그리하여 더 나은 세계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국가적 단위 속에서 이 국가를 넘어 서로 교류하는 이상적 상태-세계시민적 공동체는 이 ‘더 나은 세계’의 한 예가 될지도 모른다.

경향신문(07. 06. 30) [천천히 사유하기]예술과 세계시민적 공동체

거창한 제목은 날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망설이게 된다. 그러나 길을 가면서도 때로는 주위를 살펴야 하듯, 한 주제도 그 맥락을 고려할 때 온전해진다. 이 지면을 통해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다루건 그 밑에는 늘 심미적 경험의 가능성이 자리했지만, 예술의 좌표를 제대로 짚으려면 그 환경-내외적 현실조건을 살펴야 한다.

2007년 6월의 한국은 몹시 불안정해 보인다. 흔히 말하듯 그것은 지난 40여년에 걸친 압축성장의 결과겠지만, 그래서 그동안 억눌려온 많은 것들이 하나씩 곪아터져 나오는 까닭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더 길게 보면 우리 사회가 정상화되어 가는 징표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단계에서 간과되거나 희생되는 면을 어떻게 최소화하느냐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 치러야 할 소모와 낭비는 너무 커 보인다. 여전히 불안정한 부동산 가격이나 대선을 앞둔 정파들의 이전투구, 아이들의 지옥같은 학교생활, 가계부채의 증가는 그 몇가지 예일 뿐. 사람들의 눈빛은 우리가 전투하듯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고, 그 어깨는 누군가가 만든 대열 속에 이 다음의 전선으로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런 불안정은 나라 밖에도 있다.

전쟁과 테러, 미국의 일방주의, 국제기관의 무능, 불공정한 노동조건, 종교분쟁과 문화갈등, 그리고 환경오염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당면 문제는 어느 것 하나 간단치 않아 보인다. 다국적 자본은 후진국의 값싼 노동력으로 이윤을 늘리지만, 일하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정당한 몫을 나눠갖지 못한다. 이 불안은 물가상승과 구조조정으로 더 가중되고 있다. 모두가 불안하다면 중간층이라도 튼튼해야 하는데, 이들 역시 허약하다. 이런 상태에서 많은 잠재된 문제는 ‘불균등하게 작용할’ 공산이 크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U. Beck)은 새로운 유토피아-신자유적이거나 복고적이지 않은 ‘세계시민적인 좌파’가 필요하다고 최근에 말했다. 그에 의하면, 이전에는 권력의 획득이 유토피아의 포기로써 가능했다면, 이젠 유토피아의 포기란 곧 권력포기가 된다. 따라서 이 이상을 실행할 새로운 사회민주주의적 시대가 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독일 사민당 당수의 ‘사회적 세계화’를 언급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한편의 과제일 수는 없다. 그것이 진보정당이나 시민단체에서 더 본격적으로 논의되겠지만, 보수당이나 일반대중에게도 열려 있다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이런 개방성조차 변질될 수 있다. ‘구조조정’이나 ‘노동유연화’에서 드러나듯, 오늘날의 많은 언어는 원래의 함의를 잃어버렸다. 구조조정이란 이름 아래 이 땅의 비정규직은 노동인구의 절반을 넘어섰고, 힘겹게 쟁취한 노동권은 ‘개혁’의 기치 아래 다시 박탈되고 있다. ‘유연화’가 노동권과 인권을 얼마나 경색시키는 것인지 우리는 잘 안다. 위험사회적 조건은, 벡이 지적하듯 오늘날엔 국내외를 막론하고 더욱 철저히 실현되고 있다. 많은 사상적 종교적 문화적 가치들은, 정부의 것이건 민간단체나 세계기관의 것이건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편재화된 ‘정당성 결손(Legitimationsdefizit)’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시작하여야 하는가? 예술의 방법은 무엇일까? 시를 읽고 그림을 보며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무엇보다 ‘느낀다’. 이전에는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 글로 쓰여 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지금껏 눈여겨보지 못한 것이 화면 위에 그려져 있음을 보게 되고, 무덤덤했던 가슴이 어떤 선율로 울렁댐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듯 어떤 건축물에서는 사람 사는 공간이 이렇게 구획되고 구성될 수도 있음을 새삼 겪는다. 예술은 그 나름으로 심정을 어루만지며 감각에 호소한다. 그것은 정서적 인습을 뒤흔들어 세계를 더 본래의 모습으로 느끼게 한다. 이런 감각적 진동은 사고의 변화로 이어진다. 심미적 경험은 삶의 넓이와 깊이를 다시 느끼게 한다.



예술경험에서 중심은 주체-자아-개인이고, 이 개인의 변화 가능성이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조용하고 미묘한 움직임이다. 예술에는 자연의 원형상(Urbild)-본래적 형식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형식은 지금의 많은 것이 화석으로 남을 거라고 말한다. 반대로 버림받는 어떤 것은 언젠가 존중될 것임을 알려준다. 생성의 맥락을 잇는 가운데 그것은 이미 비판적 이미지를 담는다. 예술과 만나면서 자아는 “섬세하게 조율된 영혼”(쉴러)으로 주형될 계기를 얻는 것이다. 이 계기는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것도 아니고, 강제로 해야 될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느끼는 한’ 하는, 느끼지 않으면 안 해도 되는 무엇이다. 심미적 각성은 철저히 개인의 의사에 맡겨진다. 이 점에서 도덕이나 윤리 또는 법률의 구속과는 다르다. 예술에서 나는 나 밖에 선다.

예나 지금이나 물질적 토대는 더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가 그렇듯이, 증가된 재화가 조화된 세계를 보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시대에서도 왜곡과 폭력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현실에의 항소가 멈출 수는 없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감각의 신선함이고, 이 신선함으로 유지되는 깨어있는 의식이다. 예술은 바로 이 신선함을 불러일으킨다. 예술에는 상투성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이다. 상투성이 타성의 반복이라면 예술은 타성의 경계를 넘어 경험의 배후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다시 물러나자. 예술의 새로움도 오늘날에는 대개 오염되어 있다. 시장과 자본의 개입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과 다르게 느낀다면 우리의 자유는 좀더 넓어지고, 새로 생각하는 만큼 더 깊어질 수도 있다. 이 에너지로 우리는 생활세계 안에서 조금 다르게-편견을 줄이고 거짓을 삼가며 서로를 더 배려할 수 있게 될까? 미시적 실천 속에서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예술은 자유와 자율, 그리고 관용을 연습하게 한다. 생기를 잃지 않은 영혼만이 부당함에도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나와 세계 사이에 조율된 심성이 있다면, 예술을 통한 이 길은 이렇듯 에둘러 있다.(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07.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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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자적하게 '파도타기와 공잡기'란 페이퍼를 쓰고 있다가 문득 오늘이 마감인 보고서 파일을 저장해오지 않은 걸 알게 됐다. 부랴부랴 학교에 나올 수밖에(이런 게 '파도타기'다!). 오는 길에 경향신문에서 '작가와 문학사이' 마지막회를 읽었다. 덩달아 6개월 또한 이 연재를 '문학의 뒷계단'에 옮겨놓았으니 나로서도 감회가 없지 않다. 안면이 없지 않은 두 문학평론가의 얼굴을 지면에서 보니 반갑기도 하고, 매주 하던 일 한 가지가 줄어서 기쁘기도 하다. 기꺼이 마저 옮겨놓도록 한다.  

심진경(왼쪽)·신형철씨가 신세대 문학에 대해 대담하고 있다. 80년대, 90년대 학번인 두 사람은 작가적 자의식, 젊은 독자들의 수용태도 등에 대해 일부 이견을 보였으나 계몽과 교양의 손을 떠난 문학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경향신문(07. 06. 30) [작가와 문학 사이]시리즈 결산… 새로운 한국문학을 논하다

지난 1월6일부터 매주 연재됐던 ‘작가와 문학 사이’가 막을 내린다. 김연수부터 한유주까지 13명의 소설가, 문태준부터 김경주까지 10명의 시인을 다룬 이 시리즈는 현재 우리 문학계의 주역으로 떠오른 1970년대 생 이후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심층 조명해 호평을 받았다. 필자로 참여한 문학평론가 심진경씨(소설)와 신형철씨(시)의 대담을 통해 새로운 한국문학을 진단했다.

▲ 수록작가

시인: 문태준 황병승 진은영 김선우 강정 손택수 김민정 이장욱 이병률 김경주
소설가: 김연수 박민규 강영숙 윤성희 김중혁 이기호 천운영 정이현 편혜영 박형서 김애란 백가흠 한유주

# 자신만의 방언같은 소문자 문학

신형철:전통적인 스타일의 시인과 새롭고 전위적인 시인을 교대로 다뤘다. 이장욱 황병승 김민정 김경주 등 젊은 시인들의 특징은 서정시라고 하는 것에 대한 자의식이다. 시적인 것이라는 큰 범주가 있다면 서정적인 것은 하위 범주이면서 가장 유력한 범주다. 그러나 그것 사이에는 틈이 있다. 90년대에 워낙 서정시가 주류였기 때문에 2000년대 시인들은 대개 그에 대한 반작용을 보인다. 문태준이나 손택수 같은 시인도 서정시를 쓰지만 서정적인 것의 상투성, 그 메커니즘의 위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한다.

심진경:김연수와 한유주는 10살 차이가 나고 문학의 색깔도 많이 다르다. 그러나 이들을 아우르는 특징이라면 문학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방언 같은 문학, 소문자 문학, 개별 문학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김연수는 역사를 다루지만 그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끊임없이 회의한다. 이기호도 기존 소설 관습을 뒤집고 비트는 시도를 한다. 박민규나 편혜영을 보면 기존의 인간이란 종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새로운 인종의 출현을 기대한다. 개별 지도를 만들어가는 영세업자들이 오늘의 작가다.

# 포스트모더니즘의 육화(肉化)

신형철:2000년대 문학의 변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육화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초반의 전위적 시는 대중문화를 끌어들이건, 패러디를 하건 정치적·계몽적 요소가 있고 문학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보수적인 사람들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계몽적 자의식이 없다. 시에 대해 숭고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시인이 드물고 여러 예술 장르의 하나로 받아들인다. 90년대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머리로 받아들인 근대적 인간들의 시대였다면 지금 작가들에게는 포스트모던 문화가 그대로 들어와 있다. 장르 문학과 본격 문학의 경계 흐리기, 무국적, 젠더적 혼란, 인류와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기 등이 자연스럽다.

심진경:김중혁의 작가의 말(펭귄뉴스)을 보면 자기는 무수한 사람과 사물이 혼합된 레고블록이며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한 조각의 레고블록이 되고 싶다고 한다. 이런 식의 자기 이미지가 이전과 달라진 점이다. 작가가 이 정도는 알고 이 정도 음악은 듣고 이 정도 예술 영화는 봐야 한다는 자기검열, 교양인의 상은 사라졌다. 무작위로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만들어지는 존재이다. 90년대 백민석이 비트음악과 록음악을 말할 때에는 고급문학과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 표지로 소비했으나 지금의 박민규는 저항하기 위해 끌어온다든가 하는 자의식이 없다. 자기가 즐기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농민이 농업사회의 주체이고 노동자가 산업사회의 주체라면 후기 산업사회의 주체는 기계다. 자기를 단일한 주체로 호명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아바타로 분열, 해체시키고 다시 합칠 수 있는 기계로 보는 상상력이 자연스러워졌다.

# 교양속물 vs 자기전시

신형철:소설은 이래야 한다, 시는 저래야 한다는 숭고한 이미지에서 벗어난 문학은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훨씬 스타일에 대한 압박을 덜 느끼고 자유롭게 한다. 수용자 층의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워서 젊은 세대의 독자는 말 많은 젊은 시인들을 편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의 작품이 이질적이라는 건 윗세대의 담론 아닐까.

심진경:황병승의 시와 한유주의 소설은 책의 형태가 아니라 인터넷을 떠돌고 각자의 블로그에 퍼가는 형태로 소비된다. 대신 이 세대는 칙릿이나 일본소설을 산다. 자신을 현학적으로 포장하고 과시하기 위해 문학을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대중적인 시, 연애시가 아니라 황병승의 시를 알고 있다는 식의 자기자랑, 내지는 개성의 표현방식으로 사용된다.

신형철:소비하는 방식이 바뀐 건 맞는데 외적인 방식이 바뀌었을지언정 자기세대의 문학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수용한다는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황병승의 시를 읽는다면 단순히 좋아하기 때문이지, 이전 세대처럼 이만큼은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그러는 건 아니다.

심진경:이들은 물론 황석영 책 정도는 읽어줘야 한국 현실을 안다는 이전의 교양 속물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나름의 리스트가 있는데 이는 자기 전시적인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필독서 목록이 버지니아 울프에서 폴 오스터로 바뀌었으며 고급음악에 대한 느낌도 바흐나 모차르트에서 ‘라디오헤드’의 록음악으로 변했다. 개별적인 문화소비로 보이지만 그들만의 장(場)이 있다는 뜻이다.

# 후광 사라진 시대의 작가의식

신형철:문학적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작가 역시 그 위계질서의 위를 차지하려는 입신양명적인 욕망을 버렸다. 문학이 다른 예술 장르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거나 소설가가 기타리스트 나부랭이와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더 이상 아니다. 이기호가 말한대로 소설가는 소설을 써서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이다. 작가의 후광이 사라졌기 때문에 ‘너는 구두를 닦냐, 나는 소설을 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 역시 옛날처럼 비평가가 권위있는 이름의 시대라면 말 못했을 것 같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비평가라고 말한다.

심진경:이전 선배들이 보여주는 리더의식, 작가가 보통 사람과 다른 지성인이라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지금의 문학적 환경이 예전보다 비천해지면서 일종의 자기보호 본능이 작동한다고 본다. 예컨대 윤성희나 김애란이 비천한 삶을 그리는 것, 김중혁이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박민규가 전직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하는 것 등에는 소설가라는 이름에 따른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이는 제스처가 있지 않을까.

신형철:그런 자의식이 너무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라고 생각한다.

심진경:김중혁의 말처럼 누군가의 레고블록이라도 되고 싶다면 그게 작가적 자의식일 것이다. 그런 자의식 없이는 문학이 성립하지 않는다. 단 80년대에 비대해진 문학의 권력화, 제도화와 상관없는 게 오늘의 작가들이라면 오히려 60~70년대와 맥이 닿을 것이다.

# 신세대 문학, 예술 아니면 유령

신형철:근대문학이 했던 역할이나 위상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시인, 소설가들이 거꾸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문학은 점점 주변화, 소수화, 취미화의 길을 갈 것이다. 이 현상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이야기하면 너무 갑갑하다. 오히려 너무 많은 걸 해야 했기에 왜곡되고 비대해졌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문학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자의식이 치열해졌으면 좋겠다. 그런 면에서 소설은 아직 모르겠다는 느낌이 많고 시에 대해 호의적이다. 지금 독자에게는 한국문학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이 있다. 90년대 시와 소설이 남긴 부정적 효과 중 하나인데 서정시 일변도나 여성문학의 영향으로 인한 내면과 성찰의 이미지다. 특이한 시와 소설이 동시대 독자들에게 재미있네, 다르네, 우리 이야기를 하네, 그런 느낌을 준다면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 기성 독자와 평론가들이 선입견을 자꾸 고착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심진경:문학의 전문화, 세분화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일반인들이 더 접근하기 어려운 클래식, 하이모더니즘이 될 것이다. 전문적인 독해능력, 지루함과 낯섦을 견딜 수 있는 고급 취향의 영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처럼 현실이 있고 문학이 그걸 재현한다는 사고 대신,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사라짐으로써 현실에 대한 사유가 훨씬 탄력적으로 변한 건 신세대 문학의 장점이다. 단 상상할 수 없었던 여러가지를 미디어를 통해 경험하면서 모방의 모방이 거듭되고 사유없는 사유, 경험없는 경험이 떠다니는 것을 경계한다면. 자칫 유령이 될 수도 있다.

# 다루지 못한 작가들

신형철:시인 김행숙을 언급하고 싶다. 서정적인 것에 대한 자의식, 긴장이란 면에서 2000년대 시인의 등장 이전에 독보적인 자기 목소리를 냈고 직관이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쓰는 시인이다. 소설가 전성태는 타자를 재현할 수 있는가라는 논란의 중심에 선 작가다. 빠트려서 죄송하다는 멘트가 들어가야 할 듯하다.

심진경:동의한다. 김숨도 다뤘으면 좋았을 것이다. 장편 ‘백치들’, 단편집 ‘침대’를 냈는데 같은 이야기를 아주 낯설게 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중동에서 일하다 돌아온 아버지를 방 안에 모래바람을 몰고 온 백치로 묘사한다든지, 현실적 이야기를 믿을 수 없게 한다. 권여선은 나이로 보면 젊은 작가가 아니지만 굉장히 특이한 인간형을 제시한다. 홍상수(영화감독)식의 자기비하가 우월감의 다른 표현이라면 권여선은 자기우월감 없이 바닥으로 추락시키는 자의식을 보여준다. 매우 공감가는 캐릭터이다.(진행·정리|한윤정기자)

07. 06. 30.

P.S. 두 평론가의 '일부 이견'에 대해서는 노랗게 색칠해놓았다. 8년 정도의 연배/세대 차이가 이견을 낳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소설(심진경)과 시(신형철)라는 장르적 관심(이해관계)의 차이가 작용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두 장르가 공동운명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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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장마철이지만 서재의 스크린을 여름 휴가 모드로 미리 바꾸고(휴가를 갈 일이 없을 듯해서 기분만 내본다) 서핑하는 사진도 갖다 붙여놓는다. 보기에 제법 시원하군... 

6월 한달을 거의 파도타기로 보낸 듯하다. 서핑 수준의 그런 폼나는 파도타기가 아니라 바닥에 발들 딛고 있다가 파도가 밀려오면 살짝 발을 떼어 균형을 잡는 '파도타기' 말이다. 재미를 제외한다면 그런 파도타기의 목적은 순전히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보전하는 것이다(소위 물먹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해수욕장에 나가 그런 파도타기를 해본 건 10년도 더 전의 일 같지만 여하튼 그 '실감'을 오랜만에 느끼던 와중에 한달이 훌쩍 다 지나가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밀린 잠을 보충하고 일어나니 밀린 책들이 수십 권이다. 이런 경우에 순서를 따지는 건 무의미해서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을 몇 페이지 읽다가 벨르이의 소설 <페테르부르크>를 몇 페이지 들춰보고(읽어야 하는 러시아어본이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다시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문학동네, 2000)에도 손길이 갔다. 아직 국역본이 완간되지 않은 '이 빠진' 번역서와 함께 영역본을 빼놓고(내겐 러시아어본도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뜻으로 오늘은 서론을 읽어두기로 했다. 예전에 얼마간 읽었지만 따로 정리는 해두지 않았다는 게 이유이다(그땐 구 영역본을 참조했는데, 지난 2004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파도타기 말고 진짜 공부를 위한 자세도 가다듬을 겸. 

  

책에서 먼저 읽게 되는 건 가다머가 제사로 쓴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시구이다. 제목이 따로 붙어 있지 않은 한 후기시의 전반부라는데, 우리말 번역은 이렇다.

그대가 스스로 던진 공을 받아 잡는 동안은
모든 것이 그대의 솜씨요, 그대 노력의 대가이지만;
영원한 공연자(共演者)가 그대에게
그대의 중심으로 정확하고 민활한 스윙 동작으로
신이 만든 거대한 다리의
저 곡선들 중의 한 곡선을 따라 던진 공을
그대가 불시에 잡게 되는 경우
그때 공을 잡을 수 있음은 그대가 아닌
세상의 능력이라오.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에는 이 시에 대한 해설이 따로 붙어 있지 않지만 국역본에는 간략한 해제가 달려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시는 "만년의 스위스 시절에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돌보아준 나니 분덜리-폴카르트 부인에게 헌정된 시이며, 전집 제2권에 실려 있다." 이어지는 해설. 

"'중심'이란 말이 이 시의 요체이다. '중심'은 개인적인 중심과 영원성 혹은 신의 '중심'으로 구별되고 있다. 여기서 '중심'은 공간적인 중심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힘으로서 타자로부터 다가오는 중심을 말한다. '영원한 공연자'가 '그대의 중심'을 향해 공을 던질 때, 다시 말해 우리가 협소한 중심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중심을 상대할 때, 비로소 '공을 잡을 수 있음'은 그대만의 것이 아닌 '세상의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다머는 이 시에서 공을 잡는 행위를 해석 행위로 풀이하고 있는 듯하다."

중심의 형이상학이 이 시의 요체인가는 좀더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눈대중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에서 두 가지 공잡기가 대비되고 있다는 것. 그 하나는 자기 스스로가 던진 공을 받는 것이다. 즉 자가-포구(self-catching)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그러니까 부메랑처럼 자기가 던지고 자기가 받는 것인데, 그건 (당연한 말이지만) 순전히 "그대의 솜씨요, 그대 노력의 대가"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자가-포구는 혼자서 하는 파도타기에 가깝겠다.

다른 하나는 좀 다른 종류의 공잡기이다. 그건 공을 던진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영원한 공연자'이기 때문이다. 영역본에서는 '영원한 공연자'를 'eternal partner'라고 옮겼다(러시아어본에서는 이를 여성명사로 받았다). '영원한 파트너'라고 해도 무방할 텐데, 문제는 이 공연자/파트너가 '그대의 중심'을 향하여 정확하고 민활한 스윙 동작으로 던진 공,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공을 받는/잡는 것이다. 그럴 경우 "why catching then becomes a power -/ not yours, a world's." 즉, 그때 공을 잡는 것은 그대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세상의 능력이라는 것. 왜 아니겠는가? 

"가다머는 이 시에서 공을 잡는 행위를 해석 행위로 풀이하고 있는 듯하다"라고 해설에도 적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해석행위' 혹은 그것을 중심적으로 다루는 해석학이란 게 텍스트의 이해와 해석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는 점. 가다머가 서론에서 주장하고 있다시피 "텍스트의 이해와 해석은 학문의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명백히 인간의 세계 경험 전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 경우 '인간의 세계 경험 전체'는 '공잡기'의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내가 써놓은 걸 읽는 게 아니라 누군가(혹은 영원한 파트너가!) 써놓은 걸 읽고 이해하는 일이 곧 우리 '세계 경험'의 요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와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고 구성하고 축적하는 행위로서의 공부는 공을 제대로 잘 잡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다. 제대로 된 프로텍터와 미트도 준비해서 다양한 투구폼과 구속과 구질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영원한 파트너께서 던지는 공은 사인도 없이 날아올 때가 많기에 밥 먹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미트를 벗어서는 안될 터이다...  

서문을 읽겠다고 해놓고 잠시 딴전을 피웠다. 다시 가다머의 묵직한 공을 받기 위해 책상머리로 가야겠다(그는 영원의 나라에서도 현란하게 공을 뿌려대는군!). 이건 혼자서 파도타는 것과는, 자리만 보전하는 것과는 양상이 좀 다르다. 이 여름에도 중무장을 하고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내가 공을 잡게 되더라도 그건 세상의 능력 덕분이고, 밥상을 차려준 사람들의 노고 덕분이라는 것. 결코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그런 생각을 하는 놈들은 공부가 부족한 것인바 곧장 'X카바'로 들어가야 한다). 이크, 공이 벌써 날아오고 있다!..

07.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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