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이 알게 모르게 쏟아지고 있다. 조르주 소렐의 <폭력에 대한 성찰>(나남, 2007)이 출간되어 잠시 놀랐는데, 어제는 구내서점에서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문예출판사, 2007) 새 번역본이 눈에 띄기에 손에 들 수밖에 없었다(책에 대해서는 조만간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러고 둘러본 내일자 신문에서 박홍규 전집 완간 소식을 접한다(이러다 파산하겠다!). 지난 1995년에 첫 1, 2권이 출간됐을 때부터 완간을 고대해왔었는데, 12년이란 적잖은 세월이 걸린 셈이다. 암튼 올여름에 강독할 책이 하나 더 늘었다. 처음 두 권을 예전에 읽었으니 이번엔 마지막권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강독>(민음사, 2007)부터 거꾸로 읽어볼 참이다. 한겨레의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7. 12) 세계여, 우리에게도 이런 철학자가 있다

“우리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확신합니다.”(윤구병 변산공동체 대표)

“(그의) 데이터(자료)에 충실한 철학은 지금 지구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서양으로 역수출할 수 있다고 봅니다.”(최화 경희대 철학과 교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이 나라에 존재했다니 다소 생소하다. 하지만 윤 대표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에게 사상이라는 게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이 스승에게서 물려받았다고 여긴다.


서양 형이상학의 거목 박홍규(1919~1994) 교수의 유고집 다섯 권(민음사)이 12년 만에 완간됐다. 5권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강독>이 나옴으로써 박 교수 타계 이후 13년 만에 유고집이 완성된 것이다. 1·2권인 <희랍철학논고>와 <형이상학강의1>은 1995년에, 3·4권인 <형이상학강의2>와 <플라톤 후기 철학 강의>는 2004년에 나왔다.

1946년부터 35년 동안 서울대 철학과에 재직한 박 교수는 살아생전 저서를 내지 않았다. “스스로 공부가 모자란다고 생각하셨습니다.”(윤 대표) 박 교수는 논문도 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석·박사 학위는커녕 학사 학위도 없다. 서울대 교수 재직 동안 쓴 7편의 논문도 주로 부교수, 정교수가 되기 위한 ‘요식적인’ 글이었다. 김남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논문도 직접 쓰지 않으시고 선생님은 불러 주고 학생들이 받아 썼습니다.” 논문이나 책을 쓰기에는 생각이 너무 많으셨다고 김 교수는 덧붙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유를 끊어내는 일을 학생들이 맡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제자들이 그의 강의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우리만 들으면 안 될 강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유고집은 이 녹음테이프를 풀어낸 것이다. 지금은 내로라 하는 중진 철학자 이정우 소운서원 원장, 이태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등이 대학원 재학 시절 스승과 함께 철학의 근본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의 철학은 왜 위대한가? “학생 가운데 한 명이 추상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박 교수가 바로 ‘자네 안경을 벗고 그 이론을 가지고 안경을 설명해 보라’고 했습니다.”(윤 대표) 데이터가 뒷받침되지 않은 철학은 의미가 없다는 게 박 교수 사유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실증철학을 높이 평가했다. 수학과 심리학, 생물학 등을 두루 섭렵한 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삼아 사유를 풀어놓는 철학 방식에 높은 점수를 준 것이다.

그가 보기에 ‘코기토’(cogito·나는 생각한다) 개념을 들고 나온 데카르트(1596~1650)는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사람이고,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갈릴레이(1564~1642)는 “개방적이고 비판적”이다. 왜냐하면 ‘데이터’ 없이 생각만 하는 사람은 중세의 수도사처럼 보수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실험을 했다. 변하는 데이터에 맞춰 학설도 계속 수정할 수밖에 없다. ‘보수’에 머무를 수 없는 이유다.

“(박 교수는) 데이터에서 출발한 뒤 추상화 과정을 거쳐 원리로 가는 것이 플라톤 이후 학문 정신이라고 보았습니다.”(최 교수) 윤 대표는 박 교수의 기획을 이렇게 요약했다. “박 교수는 공간과 시간적 사유를 겸한 플라톤(기원전 429?~347)의 사상과, 공간적 사고를 펼친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와 시간적 사고를 펼친 베르그송(1859~1941)의 거대한 사상을 이어받아 이를 종합하려 했습니다.”

최 교수는 박 교수 사상의 또 다른 특질로 “무궁무진한 사유의 유연성과 지칠 줄 모르는 분석력”을 꼽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제대로 읽는 법’ 곧 분석력을 강조했다. 플라톤 저작의 번역이 늦어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공부가 덜 되었다고 판단한 스승이 말렸기 때문이다. 경직성과 습관성도 경계했다. 그 때문에 박 교수가 칸트를 비판하는 중요한 논점 중의 하나가 주관이라는 생명체 기능 속에 범주라는 경직된 틀을 놓았다는 것이라고 최 교수는 밝혔다.

유고집의 마지막 권은 1981년 3월부터 1983년 12월까지 3년에 걸쳐 매주 토요일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대학원생들에게 강독한 내용이다. 박 교수는 베르그송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라고 사유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정태적 형이상학’과 반대 지점에 있었으나, 생물학 등 자연과학의 결과를 토대로 삼아 철학적 사유를 펼친 점 등을 들며 그를 플라톤 철학의 적자로 보았다.

후학들은 유고집을 프랑스어나 영어로 번역해 서양에 박 교수 철학을 역수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오는 10월에는 프랑스의 베르그송 연구자들을 초청해 <창조적 진화> 출간 100년 기념 학술대회도 열기로 했다.(강성만 기자)

07. 07. 12.

P.S. 관련기사로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5/h2007053018503984210.htm 도 참조할 수 있다. 한국일보의 '우리시대의 명저50' 관련기사이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퍼그 2007-07-12 01:28   좋아요 0 | URL
으아 엄청 기다리던 책이 나왔네요! 역시 여기서 정보를 얻게 되는군요.^^ 전집이 다 간행되기도 전에 앞 몇 권은 절판되어서 구할 수 없었는데, 장정이 바뀌어서 모두 새로 나오는가 봅니다. 다행이네요.

로쟈 2007-07-12 09:24   좋아요 0 | URL
나처럼 예전 판본을 사둔 사람에겐 '다행'이 아니지요.^^;

반조 2007-07-12 09:15   좋아요 0 | URL
마침내 완간이군요. 한국일보에서 "우리시대의 명저"로 다룬 기사,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5/h2007053018503984210.htm 도 추천해봅니다.

로쟈 2007-07-12 09:2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상기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yoonta 2007-07-12 12:23   좋아요 0 | URL
그러지 않아도 그동안 박홍규선생의 책이 품절이라 못구하고 있었는데 전집이 완간되면서 책도 새로나오는 듯 하네요. 이정우씨를 통해 소문만 들었는데 이제야 실체를 확인할수있게 되었군요. ^^

로쟈 2007-07-12 16:39   좋아요 0 | URL
이 양반들이 다 수강생으로 '등장'하죠. <창조적 진화> 강의는 녹취록에 잡담이 너무 많아서 지체됐다는 '소문'도 있는데, 사실이 어떤지는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작은앵초꽃 2007-07-12 23:42   좋아요 0 | URL
“스스로 공부가 모자란다고 생각하셨습니다.”(윤 대표) 박 교수는 논문도 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석·박사 학위는커녕 학사 학위도 없다.
=>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부분이네요...
 

폭력에 관한 책 모듬


1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폭력의 철학- 지배와 저항의 논리
사카이 다카시 지음, 김은주 옮김 / 산눈 / 2007년 7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07년 10월 07일에 저장
품절
폭력에 대한 성찰
조르주 소렐 지음, 이용재 옮김 / 나남출판 / 2007년 7월
18,000원 → 18,000원(0%할인) / 마일리지 180원(1% 적립)
2007년 07월 11일에 저장
품절
폭력의 세기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2007년 07월 11일에 저장
절판
법의 힘
자크 데리다 지음, 진태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7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7년 10월 07일에 저장



1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연이지만 같은 날짜에 같은 주제에 관한 흥미로운 논평과 기사가 게재되어 있어서 옮겨놓는다(그리고 '사회적 독서'로 분류해놓는다). 먼저 읽은 건 '기러기 아빠'들의 조기유학을 이슈로 한 대담인데, 말 그대로 '생생토크'이다. 그리고 뒤에 읽었지만 앞에 놓은 건 현직 영문과 교수의 대학가 영어강의 붐에 대한 쓴소리이다. 모두가 대한민국의 '영어광풍'과 관련되는 것이어서 제목은 '영어에 미친 나라'라고 붙였다(사실 같은 타이틀의 책이 있다). 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를 따라가노라면 한국사회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아름답지만은 않은 풍경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게 된다. 한국학 키워드에 '영어'도 들어가 있는지?.. 

창비주간논평(07. 07. 10) 대학의 영어강의를 향한 쓴소리

지난달 미국 댈러스에서 이민생활을 하던 한국인 부부가 폭우와 엉터리 표지판 때문에 차가 강에 빠져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그런데 일부 국내 언론은 정확한 취재도 없이 이 사건을 희생자들의 영어가 서툴러 구조요청을 제대로 못한 탓으로 보도하는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 유족의 가슴에 못을 박는 오보는 한국사회가 영어에 얼마나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지난 4월 인터넷 상의 '토플대란'은 미국의 대학(원)에서 공부하기 위한 영어능력을 측정하는 시험 응시자의 80%가 유학 준비생이 아니라 특목고 진학이나 대학입학시의 혜택을 겨냥한 초중고생이며 수험료가 연 160억원에 달한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조기 영어교육과 해외어학연수, 조기유학과 기러기 아빠는 어느덧 한국사회의 낯익은 풍속도로 자리잡았고, 초등학교 영어교육을 3학년 아닌 1학년부터 실시하는 방안이 나오기도 한다. OECD 국가 중 GDP 대비 사교육비 지출이 최고이며 초중등학교까지 포함할 경우 미국 유학생 수가 인도나 중국을 앞질러 당당히 1위인 대한민국의 사교육 영어 시장이 얼마나 큰 규모일지는 가히 짐작할 만하다.    

영어광풍 부추기는 대학 영어강의의 실상

그야말로 영어광풍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그런데 일부 상위권 대학들이 이런 흐름을 바로잡기는커녕 부추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유럽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한 후 갓 대학에 자리잡은 한 신임교수는 학기당 한 과목을 영어로 강의하는 계약서 상의 의무 조항을 어겼다가 낭패를 겪었다. 그는 첫 학기 담당과목을 모두 우리말로 강의하다가 경고를 받았고 다음 학기에 두 과목을 영어로 진행해야 했는데, 그가 유학한 나라는 불행하게도 영국이 아니었다. 선생의 영어능력이 모자란 상황에서 수업진행이 원활할 리 만무하고, 학생들도 영어로 하는 철학수업을 따라갈 능력이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이 어이없는 사례에서 보듯이 요즘 우리 대학의 영어강의 관련 정책이 과연 고등교육기관에 걸맞은 철학 위에 서 있는지 의문스럽다. 한 명문 사립대는 몇년 전에 몇몇 분야를 제외하고 신임교수가 모든 과목을 영어, 혹은 해당 원어로 강의하도록 강제했고, 그럼으로써 앞으로 전체 개설과목의 60%를 영어강의로 바꾸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 대학 외에도 신임교수에게 영어강의를 의무로 부과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기존 교수에게도 영어강의를 의무화하여 영어강의 100% 달성을 목표로 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미국 유학 출신 교수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우리 학문의 편향성은 심화되게 마련이다.

학문의 대미편향과 영어학습에 매몰되는 대학교육

물론 영어강의를 확충하려는 시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현대 세계에서 아직도 달러가 기축통화이듯이 오늘의 국제어는 영어임에 틀림없고, 수준높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인력에 대한 수요는 매우 크다. 이를 위해 영어강의의 양적, 질적 발전은 긴요하며, 실제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교양영어'는 상당수 대학에서 영어강의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대학의 영어강의 정책은 우려할 만하다. 영어강의가 투자 없이 무원칙하게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대학생들에게 사교육으로 영어 실력을 늘리라고 압력을 가하는 꼴이다. 그 결과 영미에서 살아봤거나 특목고나 철저한 사교육 덕분에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갖춘 경우가 아닌 학생은 학원, 해외어학연수 등을 이용해 영어능력―주로 듣고 말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대학생활과 취업전선에서 살아남기 힘들게 되어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수준높은 외국어 텍스트를 읽으며 토론하고 고민하는 일에서 성취될 대학교육의 본모습은 그만 실종되고 만다.

영어 공용화론의 맹목과 허구성

경쟁지상주의 담론의 핵심에 자리잡은 영어능력에 대한 강조는 어느새 질적 변화를 일으켜 아예 지적 활동과 사회생활의 수단을 우리말에서 영어로 바꾸려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은 그것을 상징하는 담론이다. 그는 한국의 고등교육 기관들이 지식을 창조하지 못하며 남들이 생산한 지식을 소비만 한다는 어느 미국 학자의 발언을 논거로 들면서, 영어공용화가 한국의 학문과 문화를 발전시킬 것이라고 한다.(《영어를 공용어로 삼자: 복거일의 영어 공용론》, 삼성경제연구소 2003, 46면) 그러나 한국의 고등교육기관들이 지식을 창조하지 못한다는 주장도 현실을 정확히 짚은 것은 결코 아닐뿐더러, 한국 대학의 질적 도약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영어공용화 하나로 달성 가능한 양 주장하는 것은 도무지 진지하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우리는 외국어를 공용어(公用語)로 강요당한 역사적 경험이 있다. 해방 후 3년간 미군정의 공용어는 영어였고, 일제강점기도 처음부터 일본어가 공용어였으며 나중에는 일상생활에서마저 일본어 사용이 강제되었다. 소설가 김동인이 외국문화에 관심을 가진 조선인은 적어도 중등학교 이상 학력이고 일본어를 잘 하는 그들은 외국문물을 우수한 일본어 번역으로 쉽게 접할 수 있으니 우리말 번역을 하려는 노력은 무익하다고 쓴 데에서 그 시절의 실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번역문학〉, 《매일신보》 1935년 8월 31일)

식민지시대의 조선어말살정책과 오늘의 영어광풍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좀 우스꽝스럽지만, 언어의 선택이 인간 생활 전반과 직결된 총체적인 사안이라는 상식을 환기시켜 준다.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는 것이지만, 한국어를 포기하고 영어를 공용어로 택하는 것은 우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영어 공용화는 강남의 중상류층이 상징하는 경제적, 문화적 역량이 전국민에게 주어져야 현실적 가능성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일일 터인데, 이는 자유주의자 복거일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무계급사회의 지상낙원을 당장 건설하겠다는 이데올로기적 선전과 흡사하다. 이 점을 의식한 탓인지 복거일은 영어 공용화를 반대하면 오히려 많은 국민들을 영어의 혜택에서 소외시키는 계급적 자세가 된다는 묘한 논리를 펴기도 한다. 어쨌든 요즘 일부 상위권 대학의 영어강의 정책은 그의 입론을 자발적으로 실행하는 셈이라는 점에서 착잡하기 짝이 없다. 

세계화에 대응하는 문화주체성 세워야

영어로 진행하는 강의는 명확한 목표 설정과 그것을 위한 조건을 제대로 갖춰가며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대학에서 꼭 거쳐야 할 지적 훈련을 제한된 영어구사력 향상을 위해 속절없이 희생할 위험이 크다. 영어강의 도입의 당위성이 큰 영어영문학과에서도 영어강의로만 수업을 편성하면 많은 문제가 따를진대, 학생의 전반적 수준이나 학생간의 편차, 전공 분야의 특수성을 막론하고 영어강의만이 살길인양 밀어붙이는 일만큼은 재고되어야 한다. 충분한 준비와 투자가 없이 영어로 수업을 한다면, 학생들은 영어도 늘지 않고 수업 내용도 못 따라가는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또 일정 수준 이상의 고급 외국어독해력 향상은 수업이 우리말로 진행될 때 종종 더 효과적이라는 것은 경험적으로 입증될뿐더러 상식적으로도 쉽게 납득이 간다.

영어의 문제는 단순히 외국어 습득의 문제가 아니다. 영어를 둘러싼 논란은 우리가 장기적으로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이냐는 전망과 연결된 심각한 사회적 쟁점이다. 명심할 일은 세계화와 개방이라는 대세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면서도 우리 나름의 사회적 통합을 유지하면서 우리 역사에 뿌리박은 학문과 문화를 건설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과 같은 비이성적 영어열풍은 어떤 성격의 세계화에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며 사회적 갈등만을 심화시킬 것이다. 세계화와 공동체의 주체성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김명환/ 서울대 교수)

*이 글의 일부는 필자가 《안과밖: 영미문학연구》(2007년 상반기, 창비)에 게재한 시평 〈대학의 영어강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내용을 가져온 것임을 밝힌다 - 필자. 

경향신문(07. 07. 10) [2007한국인의 자화상](7)조기유학 열병앓는 ‘기러기 아빠’

조기유학 바람은 상류층에서 중산층으로까지 열병처럼 번지고 있다. ‘한 다리 건너면 기러기 아빠’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들은 매년 3만~5만달러의 유학비용은 물론 부부·가족간 생이별을 감내한다. 이런 고통과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해야 하는 이 ‘교육 엑소더스’란 무엇인가. 지난 6월9일 3명의 기러기 아빠가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모여 항상 곁에 두어도 부족한 아이를 이역만리로 떠나 보내게 된 사연을 이야기 했다. 이들은 아이들을 벼랑으로 내모는 우리 사회의 ‘영어 만능주의’와 ‘입시지옥’에 관해 매우 강한 비판을 했다. 경향신문 사회부 최민영 기자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집담회는 참석자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했다.

사회(최민영 기자)=조기유학 보내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김익준(가명·54세)=저는 애가 둘입니다. 내 소신은 애들한테 과외도, 영어공부도 안시키는 것이었어요. 둘째 아이가 영어유치원에 등록해 가방을 받아왔을 때 ‘우리 말부터 배우라’며 아내랑 싸워 결국 가방을 억지로 반납시켰어요. 그런데 애가 초등학교 취학하고는 내가 졌습니다. 학원 안가니까 친구가 없어요. 애가 ‘왕따’를 당해도 학교에서는 관심도 없었어요.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나라는 영어만 잘하면 뭐든 ‘오케이’더라고요. 그래서 조기유학 초창기인 1990년대 후반에 중학생이던 첫째와 둘째를 모두 미국에 보냈죠. 당시 주변의 고위 국가공무원들이 자녀들을 막 조기유학 보내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자기들 자식 편하게 살 수 있게 정책 개발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괘씸하게도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어요. 자기 애들 대학갈 즈음에 국내 대학들이 영어 잘하는 애들을 위한 특별전형을 만들더라고요.

구영찬(가명·48세)=나는 아이 둘과 애엄마를 미국에 보낸 지 4년 됐습니다. 둘째애 때문에 결심했어요.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 갔다가 가방 안이 텅 비어 있는데 집에 와도 ‘그냥 친구들한테 빌려줬다’고만 대답하더라고요. 초등 2년때 선생님들이 미국 가면 ‘왕따’ 없고, 아이도 잘 적응할 것이라고 조언하더군요. 능력이 되든 안되든 우리 애한테 새로운 교육환경을 주자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최세현(가명·50세)=우리 딸애는 중학교 2학년 때 보냈고 지금 고등학교 2학년쯤 됐어요. 애엄마가 먼저 조기유학을 제안했지만 한달가량 “그렇게는 못한다, 월급쟁이가 어떻게 그러냐”고 버텼어요. 그런데 애가 출근하는 내 손에 “아빠, 이거 한번 읽어보세요”라며 편지를 주더라고요. 자기 학교 생활을 적은 것이었어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저녁 학교 끝나고 학원 가서 자정에 돌아오면 또 새벽 2시까지 숙제하고…. 시험 때는 더 심하더라고요. 아이는 “나중에 커서 누가 어린 시절에 뭐 했냐고 물어보면 아무것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고 해요. 그 말에 두손 들었어요. 딸애는 몰라도 늦둥이인 5살배기 아들은 그래도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할 생각입니다.

사회=조기유학, 효과는 있었나요.

최세현=우리 딸은 수수깡처럼 말랐었는데 보낸 지 1년 만에 스트레스를 벗어나서 건강해졌어요. 거기서도 여전히 우리나라 엄마들은 ‘두들겨 패가면서’ 공부시키지만 아이들에게는 여기보다는 여유가 있어요.

김익준=난 얻은 게 있고 잃은 게 있습니다. 얻은 것은 애가 중·고등학생 기간을 무척 행복하게 지냈다는 거예요. 잃은 것은 내가 가족과 몇년간 떨어져 살았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애들을 예뻐하면서 키울 기회를 이 나라 위정자들이 박탈했어요. 내 결단이었지만, 배경을 제공한 것이죠. 꼴보기 싫어요.

최세현=한 예로 우리 회사의 한 분은 재작년에 아이가 강남 8학군의 모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반 남학생 중 1, 2등 하고 여자까지 합치면 8등쯤 했어요. 한달에 과외비가 적게 들 때 400만~500만원, 많이 들 땐 1000만원도 들었다더라고요. 그렇게 돈 많이 들여가지고 등수가 많이 오르냐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라, 그 돈 들여서 등수 유지하는 게 목표라는 겁니다. 목표로 하는 대학이 어디냐고 물어봤어요. 우리 때는 공부 못해도 서울대, 연·고대 반이었고 다른 반은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목표가 서울대 연·고대도 아니고 ‘인(in) 서울’대였습니다. 그것도 불안해 하더라고요. 그렇게 공부를 시키는데도. 그 분은 자정쯤 퇴근할 때 부인한테 전화가 옵니다. 애 과외 중이라 방해될테니 좀 있다 들어오라고요. 좋은 과외선생 잡으려면 12시 넘어서 수업받는 것도 감내해야 된다나. 그 정도 돈이면 미국에서는 웬만한 대학교에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아이 조기유학 보낼 때 아내가 설득하며 하는 얘기가 “당신 유학비 아까워서 그러는데 고교 때 과외비는 뭘로 댈 거냐, 그 돈이면 유학간다” 그러더라고요.

구영찬=이번에 11학년된 딸애는 한국에 들어오고 싶어하는데 다시 한국에서 교육을 받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둘째애는 내가 워낙 예뻐하는지라 지난 3월 미국에 만나러 갔을 때 “여기 안맞지? 아빠랑 같이 한국가자”고 운을 떼봤어요. 그런데 말수도 적은 애가 조그만 목소리로 “아빠가 와요” 이러더라고요. 여기 교육환경이 싫은 겁니다. 그래도 거기는 학교폭력이라는 게 없으니까요.

김익준=내 생각은 좀 달라요. 그쪽 선생은 결코 따뜻하지 않습니다. 폭력사건이 일어나면 어떻게 학생을 퇴학시킬까를 고민하지 봐주는 게 없어요. 체벌도 안합니다. 여차하면 잘라버리면 그만이니까요. 애정이 없어요.

사회=아이들 대학도 미국에서 졸업시킬 계획입니까.

김익준=미국 대학은 도대체 입학사정의 기준이 뭔지 밝히질 않아요. 1등이 떨어지고 10등이 붙어도 저간의 배경을 알 수가 없습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 같은 사람도 예일대를 나옵니다. 학비가 일단 너무 비싸니까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어서 포기하고, 거기에 불만을 안가져요. 우리 국민은 그런 식의 선발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 나라 제도를 꼭 좋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둘째애는 한국에 돌아와서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지금 고3입니다. 애가 죽어요. 아침에 내가 자고 있을 때 애는 나가고, 자정 넘어도 애는 안오고 내가 먼저 잡니다. 주말에나 보고 ‘힘들지?’ 물어보면 ‘괜찮아요’라고 합니다. 내신으로 애를 왜 이리 괴롭힙니까. 미국처럼 돌머리라도 부잣집 애로 뽑는 식이면 차라리 모르겠어요. 애가 고1 때는 과외 안받았는데, 고2 올라가서 과외받게 해달라고 조르면서 “진작 과외받았으면 내신이 더 나았을걸” 얘기하는 모습 보면서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애가 텝스(TEPS) 만점에 가까운데, 학교 내신 영어시험에서는 하나 틀려서 내신 3등급입니다. 말이 됩니까.

미국에 유학갔다 온 박사들이 우리나라 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게 아주 불만입니다. 어느 아프리카 사막 지역 추장이 미국에 갔는데 사막에서 물이 콸콸 나오는 게 너무 좋아서 수도꼭지를 떼서 가져갔답니다. 물이 나오겠나, 안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뭔지도 모르고 무조건 영어 타령입니다. 가까이 지내는, 돈 없는 친구들은 가슴을 칩니다. 내 애가 영어를 못하는 이유가 조기 유학을 못보내줘서 그렇다는 거예요. 국내에서 가르치려니 됩니까. 그런데 정책결정자들, 이 인간들 하는 짓 봐요. 영어 잘한다고 대학 어느 과든지 갈 수 있는 나라가 어딨나요. 정책을 하는 사람들이 제 새끼 챙기느라 국민을 배신했어요. 요즘엔 영어 잘하면 의대도 갑니다. 이렇게 만들어놓고 못가진 사람 가슴 치게 만들어요. 교육부 미국박사 출신들 다 나쁜 놈들이고, 이렇게 만든 정치인들도 나쁜 놈들입니다.

구영찬=대부분 국민들이 공감하는 말입니다. 대학뿐 아니라 입사할 때도 토익, 토플, 텝스 봅니다. 우리도 경제대국인데, 영어를 그렇게 강제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후처럼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을 때가 아니잖아요. 프랑스 봐요. 절대 영어 안씁니다. 영어로 말 걸면 대꾸를 안합니다. 미국애들이 우리나라 오면 걔들이 우리말 공부를 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도 한국말로 ‘안녕하십니까’ 정도라도 말 할 때 수용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러시아어도 배우고, 중국어도 배우고 해서 다원화해야지 끝까지 영어니까 주변나라에서 뭐라 그러겠습니까.

김익준=강의 듣는 큰애한테 물어보니 한국 대학에서 교수들 영어는 영어가 아니고 ‘콩글리시’랍니다. 귀 버린다고 하더군요. 한국 관련 강의를 하는데 왜 영어로 번역을 해서 가르칩니까. 우리는 백날 해도 미국 대학 못따라갑니다. 교육부가 정신이 나갔어요. 각 대학에 돈을 지원하는데 영어강의 비율에 따라 지원합니다. 미국 유학파가 환상에 젖어서 이 나라를 버려놨어요.

최세현=전염이 돼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이젠 애 친구 대부분이 미국에 가있어요.

김익준=유행병이죠.

최세현=우리 애가 외국 나가기 전에 학교 선생님들께 밥을 사야겠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갔더니 여섯분 정도 와 있더라고요. 아주 잘 보낸다 그래요. 그 중에 2명이 애들 유학을 보냈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가려는 사람들 말려서 국내에서 공부시켜야 할 선생님들이 보내면 어떡하느냐” 했더니 선생님 말씀이 “제 아내도 교사인데 우리나라에 몇년도부터 몇차 교육제도 그러는데 그게 뭘 의미하고 애들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지 자기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고 말해요. 공교육 종사자들부터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신뢰가 안선다는 거예요.

또다른 얘긴데, 우리 딸애 학교친구 하나가 공부를 좀 못했어요. 그런데 아빠 닮아서 음악을 좀 잘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기타를 쳤는데, 김밥집하던 그집 부모들은 고민고민하다가 애를 호주로 유학보냈어요. 음악 전문학교가 있기 때문이죠. 우리나라에서 하면 엄청나게 레슨비가 들텐데 거긴 교육비에 다 포함돼 있다고 해요. 그걸 잘해서 오세아니아 전체 대회에서 1등했고, 미국 대학 입학허가를 받아 장학금 받고 들어갔다고 들었어요. 지금 그집 부부는 뉴질랜드에서 김밥 팔면서 애 뒷바라지 해요. 우리나라에 그 아이 있어봤자 ‘문제아’ 취급밖에 더 받았겠어요.

김익준=사실 미국 문과계통은 좋은 대학 나와봤자 일자리가 없어요. 그러니 도로 한국으로 턴해서 ‘하버드 출신이다. 영어 잘한다’밖에 내세울 게 없습니다. 걔네가 써먹는 건 공대 계통 기술자뿐이지요. 문과는 자기네 지도자를 양성하는 과정인데 한국에 돌아오면 그게 어마어마한 것이 돼요. 그러니 누가 안보내고 싶겠습니까. 김밥 팔아서라도 보내야지.

구영찬=조기유학이라는 네 글자를 놓고 실패냐 아니냐 하는 게 어폐가 있어요. 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여기가 너무 피곤하고 지옥이고 십몇년간을 그러니까 가서 좀 선진문화에서 공부도 해볼 기회를 주는 게 반 이상이지 조기유학 가서 대학입학에 실패했다, 그게 아닙니다.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반면 예술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겁니다. 대학을 못갔다고 해서 조기유학 가서 실패했다고 정의내릴 수는 없어요.

사회=몇년 전 뉴욕타임스가 ‘제 식구한테 손님대우 받는 기러기 아버지’에 관한 기사를 다뤘는데, 실제로 어떻습니까.

구영찬=그 부분(부모자식관계)은 포기했어요. 애가 성장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지 한국 와서 살든 미국 가서 살든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든 기대감은 없습니다. 보내놓고 1년 정도가 힘들었어요. 한 4년 됐는데, 여러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 위해서 보냈으니까 그에 따른 결과를 수용해야지, 내가 못보니까 힘들다고 하는 건 과장이더라고요. 내가 아는 대부분 사람들은 언론에서 보여주는 ‘소주병 끼고 사는 기러기 아빠’ 생활 안합니다.

김익준=첫째 애는 아버지인 나를 과연 사랑할까 싶기도 해요. 가끔 보는 ‘손님’인데. 처음에는 반가워하더니 점점 크고 자기 생활 생기니까, 심지어 아내조차도 자기 생활이 생겨서 잠깐 왔다가는 손님처럼 대하더라고요. 고의로 그러는 건 아닌데 겉도는 느낌이 듭니다.

최세현=난 아직까지는 지낼 만해요. 교회 가서 아빠를 위해 기도도 같이 하고 그런다고 들었어요. 난 퇴근해서 집에 오면 아무도 없으니 할 일이 없어요. 텔레비전 리모컨 갖고 왔다갔다 채널만 바꾸죠. 주말되면 어떻게든 약속 만들어야 하는데, 안되면 소파 주변 반경 1m 안에서 하루종일 뒹굴뒹굴해요. 허리가 2인치 늘더라고요. 통상 집사람이 오면 처음 1주일은 굉장히 좋아요. 사람 사는 거 같고. 그러다 한두달 있으면 싸우고, 돌아가면 또 허전해집디다.

사회=조기유학 실패 걱정을 안하나요.

최세현=아내한테 리스크를 줄이려면 같이 가야 한다고 했어요. 혼자 가면 거의 탈선한다고요. 홈스테이가 많은데, 순전히 돈벌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10년 정도 하면 새집 비용이 빠진다고 그래요. 거기 교포들도 그리 잘해주지 않아요. 애 지옥에서 꺼낸다고 보냈는데 또 지옥으로 보냅니까. 그냥 내가 기러기 아빠 하고 말지.

김익준=여기서는 영어라도 배우라고 홈스테이 보내는데, 처우가 나빠도 한국 애들은 이상하게도 착해서 부모한테 아무 말도 못하고 냉가슴만 앓아요. 우리나라는 부실해도 급식이라도 있지, 미국은 그것도 없어요. 홈스테이 점심을 유학생들은 ‘3초 샌드위치’라고 해요. 빵 하나, 치즈 한장, 양상추 한장, 다시 빵 하나. 그걸 점심 때 앉아서 구겨먹고 있는 겁니다. 자기 자식을 청소년기에 왜 그렇게 불쌍한 인간으로 키웁니까.



구영찬=공부를 하려면 조금 나이가 돼야 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간 애는 영어는 잘하는데 한국어를 못해요. 자꾸 까먹으니까 서머스쿨 때 거꾸로 한국어 교육을 받아요. 국적이 한국인데, 한국어도 잘하고 영어도 잘해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사회=조기유학 문제는 국내 고교평준화 해제 및 특목고 추가설립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김익준=우리나라 애들은 이런 교육환경에서 쇠고기 취급 당합니다. 1등급, 2등급….

최세현=대학교 들어가기까지 너무 애들을 혹사시켜요. 우리나라 입시 유아 때부터 시작입니다. 5살짜리 늦둥이가 있는데, 방학 때에만 한국에서 유치원에 다닙다. 그런데 놀이기구도 방안에 있고, 거의 하루 종일 공부시키더라고요. 그 어린 것을 공부시켜 뭐합니까. 노는 게 공부죠. 우리나라 학부모는 애들이 유치원에서 논다고 하면 아마 당장 다른 데로 옮길 것입니다. 전반적인 교육시스템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구영찬=자율성을 부여해서 대학이 입시기준을 결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1등이 서울대 못가도 5등은 갈 수 있도록 생활기록부랑 연계해서 입학사정관제를 정착시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명문고를 늘리기보다 한국에서 공부하고 싶도록 구조 자체를 바꿔줘야 됩니다. 교육이라는 게 학교와 부모 간에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져서 ‘얘는 공부는 아닌 것 같다, 음악쪽에 소질이 있다’ 이렇게 이뤄져야지, ‘얘는 몇점 나와서 3등급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됩니까?

최세현=미국은 학생 뽑을 때 성적 외에 과외활동도 봐요. 미국에서 우리나라 여학생이 SAT 만점 받고 전학년 올 A받았는데 아이비리그 여러 대학 넣어서 다 떨어졌다고 인종차별로 소송 거는 기사를 봤어요. 공부만 한 애들은 당연히 떨어집니다. 학교에서 공부 외에 학생회라든가, 자기 특기활동한 걸 중요시 여깁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노는 것도 커리어가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그런 과외활동으로 대학간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김익준=일단 내신부터 없애야 합니다. 내신을 점수화해서 애를 왜 잡아요. 그것만 없애도 떠나는 비율 확 떨어집니다. 고교평준화 하든 말든 큰 상관 없어요. 특목고 만들어도 조기유학 갈 사람 다 갑니다.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에 따른 일체의 특혜를 없애야 합니다. 공적 영역이든 사적 영역이든 공채를 표방하면서 영어 성적에 의해 결정하는 것은 아예 형사처벌해야 해요.

사회=요즘 고민은 뭡니까.

김익준=지금의 40~50대는 유례없이 쓸쓸한 노년을 보내는 세대가 될 것입니다. 있는 사람들은 있는 대로, 없는 사람들은 없는 대로 쓸쓸할 거예요. 있는 집의 잘 나가는 자녀들은 외국 나가 있어서 부모가 못봅니다. 임종이나 지켜볼까. 없는 집의 못나가는 자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체결 이후 노동시장이 급격히 유연화되면서 먹고살기 더 힘들어질 겁니다. 그러니 부모 봉양도 제대로 못할 테고.

최세현=그래도 조기유학은 잘 보낸 것 같아요.

김익준=대신 아빠는 ‘꽝’됐지. 화상으로 가족 메일 본다고 해도 직접 애 한번 안아보는 것만 하겠습니까.(정리|박영흠기자)

P.S. 좌담 내용 가운데는 상식적인 대목도 있고 다소 과장(오버)된 부분들도 눈에 띄지만 인상적인 건 "공교육 종사자들부터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신뢰가 안선다는 거예요"란 지적.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는 교사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실감할 수 있는 지적이다. '공교육에 대한 신뢰'란 말이 이미 허사(虛辭)가 된 지 오래인 것 아닌가? "당시 주변의 고위 국가공무원들이 자녀들을 막 조기유학 보내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자기들 자식 편하게 살 수 있게 정책 개발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괘씸하게도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어요. 자기 애들 대학갈 즈음에 국내 대학들이 영어 잘하는 애들을 위한 특별전형을 만들더라고요." That's the way things go!..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biosculp 2007-07-11 16:44   좋아요 0 | URL
유학보낼돈이면 한국에서 제대로 교육시킬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들어보면 미국에서도 과외받을것 다받고있고, 영주권이 없으면 나와도 취직이 제대로 안되는 상황인데.
아는분 2년에 1억 쓸 예산하고 캐나다 가셨는데. 그돈으로 책집에 쌓아놓고 읽어나가면 그게 더 남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거든요. 공상인가요.

로쟈 2007-07-12 09:17   좋아요 0 | URL
아마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공상'이라고 생각할 거 같습니다.^^;

마늘빵 2007-07-11 21:16   좋아요 0 | URL
영어에 미친 나라가 되어가는게 확실합니다. 그럴수록 저는 점점 영어를 못하고 싶어져요. 아예 싹 다 까먹어버렸으면 좋겠어요. 근데 그럼 안되는데. -_- 공부하려면.

로쟈 2007-07-12 09:19   좋아요 0 | URL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무너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각자가 자력갱생하라는...

여형사 2007-07-12 16:3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어떤 사회를 건설한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무너진 것 같다는 말씀이 너무 와닿네요. 씁슬해 집니다.
 

중앙일보의 '손민호의 문학터치'(http://news.joins.com/issue/star/200601/4394/) 100회 기념(?) 칼럼을 옮겨놓는다. 얼마전 칼럼이긴 하나 말 그대로 문단의 재미있는 '뒷얘기'를 담고 있다.

중앙일보(07. 07. 03) 세상 물정 모르는 문단 … 미워할 수 없어

문학터치가 100회를 맞았다. 2005년 6월 4일 첫 ‘터치’ 이후 이태가 넘도록 부지런히 ‘터치질’(소설가 은희경의 표현)을 했다. 스스로 용하다 싶어 내처 특집을 기획했다. 문학터치가 본 21세기 문단 풍경이다.

한국 문단은, 아마도 전 세계에서 유일한 집단(모임? 제도는 어떨까? 권력은 심한 것 같고, 여하튼…)이다. 이는 온전히, 취재원을 바라보는 기자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출입처와 비교했을 때 문단은 전혀 새로운 세상이다.

문학 기자로서 가장 난감했던 건 기사 반응이었다. 기사가 마음에 안들 때의 일반적인 대응 절차는 다음과 같다. 언론사에 정정보도를 요청하거나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거나, 나아가 명예훼손 소송을 걸 수도 있다. 그러나 문단은 다르다. 논쟁을 건다. “너는 왜 이렇게 읽었느냐, 술 마시며 토론하자.” 이런 식이다. “잘 몰라서 그랬나 본데…”라며 제자 다루듯이 가르치려는 경우도 당했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기사와 상관없는 제 3자의 다음과 같은 반응이었다. “너처럼 이렇게 밖에 못 읽어내는 기자는 내 작품을 써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안 썼다.

리뷰 기사는 본래 홍보의 성격을 띠게 마련이어서 어지간하면 반응이 무난하다. 그러나 문학은 꼭 그렇지 않다. 문인들 사이에선 종종 기사 품평회가 열리곤 한다. 기껏해야 술자리 안줏감이겠지만 분위기는 자못 심각하다. 우선은 어느 작품을 골랐느냐를 놓고 우열을 가리고 다음엔 어떻게 썼느냐를 따진다. 몇몇 표현을 둘러싼 갑론을박도 벌어진다. 문학터치는 ‘하여’란 부사가 도마에 올랐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문단에서 속보(速報)는 무의미하다. 첫 보도는 기자로서 당연한 영광이지만, 문학 기자로서는 문화부장 앞에서만 자랑스럽다. 근자의 예로 김훈의 『남한산성』을 들 수 있다. 누가 맨 먼저 보도했느냐는 심지어 작가도 관심이 없었다. 문단은 이 풍성한 텍스트로부터 기원하는 담론 형성의 과정을 기사에서 찾아내려 했다. 그러니까 문학 기사는, 보도된 순간부터 메타비평의 텍스트로 자동 전환한다.

아무래도 문단은, 문학 기자를 문단에 소속된 구성원으로 여기는 듯싶다. 기자도 ‘선생’으로 통하고 있어 하는 소리다. 호칭만 따졌을 때 문단은 ‘선생님’ 세상이다. 하물며 기자도 선생이니, 너도나도 다 선생인 셈이다. 여기서 나이는 상관없다. 문단 막내 격인 김애란(80년생·소설가)도 엄연한 선생이다.

문학 종사자 대부분이 실제로 강의를 맡고 있는 까닭도 있겠지만, 이는 아마도 문학수업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제자가 글을 써오면 선생이 시뻘겋게 빗금을 긋거나, 악명 자자한 중진 K시인처럼 “이거 왜 썼어?”라며 제자의 기를 죽이곤 했다는 도제수업 말이다.

그래서인지 문단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위계적이었다. 문단 바깥에서 보면 문단만큼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곳이 없다. 기자 입장에서도 문인 한 명 한 명이 낱개의 출입처이고, 하나의 정부(政府)다. 더욱이 우리 현대사에서 문단만큼 진보적인 예술가 단체는 없었다. 그런데도 문단에선 거대한 기계음이 들린다. 때때로 삐걱대는 소음이 새나오긴 하지만, 척척척…, 컨베이어는 늘 일정한 속도로 일사불란하게 돌아간다. 문단은 의외로 잠잠하다. 시끄러운 곳은 술자리뿐이다.

문단은 배타적이기도 했다. 문단 진입장벽이 높은 건 익히 알려져 있다. 그네들만의 문화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문단은 의외로 세상 물정에 어둡다. 문단 내부에서 한국 문학은 위기가 아니다. 문단은 좀처럼 위기를 말하지 않는다. 한국 독자가 한국 소설을 안 읽는 건 한국 작가의 잘못이 아니며, 한국 시가 고사 직전에 놓인 건 오로지 저 얄팍한 세상 탓이다.

그렇다고 문단을 미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단엔 여전히 낭만이 흐른다. 춥고 배고프다고 문학이 내팽개쳐지는 광경을, 문학터치는 목격한 바 없다. 20년 가까이 대기업에 다닌 김기택 시인은 “한 번도 사무실에서 시를 쓴 적이 없다”고 소주잔을 앞에 두고 말했다. 조연호 시인은 십 년간 공무원으로 번 돈으로 지금 전업시인을 만끽하며 산다. 먹고사는 문제와 문학이란 행위는, 문단에선 섬뜩할 만치 무관하다.

문단엔 오늘도 술이 넘친다. 일전에 고은 시인이 “요즘 젊은 시인들은 술을 안 마신다”고 꾸짖기도 했지만, 글쎄다, 예전처럼 3박4일 마시는 일은 줄었다 해도, 문단은 변함없이 술과 더불어 산다. 정오에 시작한 점심 자리가 저녁을 지나고 자정을 넘기는 불상사가 수시로 발발한다. 20시간 가까이 마시다 해뜰 녘 귀가할 때의 기분은, 음 그러니까…, 만감이 교차한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인에게 문학은 요원한 꿈이다. 중앙 신인문학상엔 해마다 2000명이 넘는 응모자가 몰린다. 담당자로서 기가 찰 따름이다. 무엇이 문학을 동경하게끔 하는가. 왜 무수한 이들이 들끓는 밤을 보내는가. 문단 안과 밖에 한 발씩 걸친 처지에서 이 글이 비롯됐다. 오롯이, 문학을 바라는 자들을 위해서였다. 하니 문단은 오해 마시라.(손민호 기자)

07. 07. 11.

 

P.S. 지난 세기의 문단 풍경을 다룬 책으론 역시나 기자 출신인 평론가 김병익의 <한국문단사 1908-1970)를 참조해볼 수 있다. 재미있는 책인데, 후속작도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댓글(5) 먼댓글(1)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멀고 먼 댓글
    from 목록들 2007-07-20 11:39 
    로쟈님 스크랩보고, 해당 기사에 대해 네이버에 썼던 글을 옮깁니다.     에...또, 참 <인순이와 리듬터치>도 아니고 자꾸 왜 그러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보낸 메일이 그렇게 당혹스러웠을까? 내가 생각하기엔 상당히 곡진한 표현을 썼는데, 마치 내 작품을 읽을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를 했네. 뭐 뜻은 대충 올바르게 이해한 건 사실이다. 제발 기사화하지 말아달라고 그랬다. 그런데 그건 자격의 문제가 아니지 않
 
 
비로그인 2007-07-11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로쟈님.

로쟈 2007-07-13 08:28   좋아요 0 | URL
댓글까지 남기시다니!^^

루팡 2007-07-15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올블로그에서 링크타고 알라딘 서재에까지 왔습니다

로쟈 2007-07-15 21:12   좋아요 0 | URL
'루팡'님이 흔적을 남기시니까 의외입니다.^^

니브리티 2007-07-20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코멘트가 없는 거 보니까 손민호 기자의 문단 뒷얘기들(내가 보기엔 문단과 문학의 경계가 없으신 거 같지만)과 문학의 낭만(혹은 대중화)에 한표를 던지시는 것 같군요. 손기자가 제일 '당황'했던 사건의 장본인이라 댓글 달아봤습니다..ㅋㅋ
 

프랑스의 사회사상가 조르주 소렐(1847-1922)의 <폭력에 대한 성찰>(나남, 2007)이 번역돼 나왔다. 낮에 잠시 신간도서들을 검색해보다가 알게 된 것인데, 이 책의 번역을 안면이 있는 출판사들에 제안하고 싶었을 만큼 평소 궁금하던 책들 중의 하나이다(아마도 지젝의 책에서 소렐이 언급되는 걸 읽었을 듯하다).

귀가길에 한 서점에 들렀다가 마침 들어와 있길래 단번에 손에 들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의 학술명저번역총서의 한 권으로 출간된 것이니까 저작권이 말료된 책이라 하더라도 또 다른 번역을 시도했다면 공연한 수고를 보탤 뻔했다. 프랑스 생디칼리즘이 전공인 역자가 생디칼리즘 사상가의 책을 옮긴 것이므로 믿어봄 직한 번역이 아닐까 싶어서이다. 책소개를 위해 조르주 소렐을 검색해봤더니 바로 뜨는 게 진중권의 칼럼이다. 무려 8년전의 칼럼. 짐작엔 <폭력과 상스러움>(푸른숲, 2002)에 포함돼 있을 법하다(<폭력과 상스러움>은 오래전에 읽고 어디에 방치해놓은 책이라서 바로 확인이 되지는 않는다). '참을 수 없는 권력의 폭력'이란 타이틀이지만 부제는 사회주의는 '폭력에 고도의 도덕성을 부여한다 (조르주 소렐 <폭력에 관하여>)'이다. 소렐의 <폭력에 대한 성찰>은 <폭력에 관하여>, <폭력론> 등으로도 표기된다.

 

한겨레21(99. 02. 04) 참을 수 없는 권력의 폭력

“(노조는) 시장의 근본적 기능을 방해(하므로)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법률을 정비하고 사회보장의 망을 확충(하는 대신) 노동조합의 독점적 권력을 회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에세이스트 고종석의 말이다. 여기서 ‘독점적 권력’이란 곧 파업권을 말할 게다. 노동조합이 어렵게 쟁취한 이 ‘권력’을 과연 ‘법률’이나 ‘사회보장’과 맞바꿀 수 있는가.

이 견해의 반대편에 소렐의 혁명적 조합주의가 있다. 소렐은 노조의 ‘권력’에 열광한다. 이 힘을 ‘사회보장’과 맞바꾸러 의회에 간 사회주의를 ‘계급의 적’이라 비난하며 그는 ‘폭력의 이념’을 선전한다. “의회? 노동자여, 부르주아를 닮지 말라. 폭력은 도덕적이다. 민주주의를 타도하라!” 이 맹목적 힘이 세계에 가져올 ‘구원’은 어떤 것일까? 공산주의 아니면 파시즘일 게다. 가령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시자 그람시, 파시즘의 창시자 무솔리니는 둘다 소렐의 추종자였다.

오늘날 소렐이나 벤야민처럼 총파업에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 노조는 왜? ‘권익옹호’와 ‘사회보장’은 노동자의 개인적 정당활동을 통해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잖은가. 고종석의 말마따나 노조는 “노동의 질을 낮추고(…) 물가에 나쁜 영향을 끼치며 궁극적으로 실업을 늘”리지 않는가. 글쎄? 먼저 난 “현대 시장경제에서 노동조합이 단 하나 남은 권력”이라는 그의 말에 찬성할 수 없다. 왜? 노조는 유일한 권력이 아니다. 실은 또 하나의 권력이 있다. ‘국가.’ 난 국가가 총자본의 이익만 대변한다는 고전적 견해엔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 그게 만인의 이해를 공정하게 대변한다고도 믿지 않는다. 국가란 제도화된 폭력이다.

합의와 타협은 투명한 논리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성적 대화 뒤엔 늘 끈적끈적 물질적 ‘이해’와 뭉클뭉클 ‘힘’이 숨어 있다. ‘힘’ 없는 ‘대화’는 공허하다. 소렐은 옳다. ‘대화’ 없는 ‘힘’은 맹목이다. 그래서 소렐은 틀렸다. ‘힘’의 맹목적 찬미. 이게 좌우익 파시즘이다. 그래서 난 벌거벗은 ‘힘’의 충돌을 이성적 ‘대화’로 바꾸는 기제로서 의회를 옹호한다. 하나 ‘대화’를 위해 ‘힘’을 거세하는 데엔 반대한다. 왜? 거세당한 자는 ‘대화’ 상대로 인정받지 못하니까. 노조는 국가라는 ‘독점적 권력’을 견제하는 ‘힘’으로 남아야 한다. 왜?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

그래서 난 노조의 ‘권력’을 국가에 반납하자는 제안에 반대한다. 폴란드와 중국의 자유노조운동을 보라. 거기엔 합법적 폭력을 분쇄하는 자유의 기운이 있잖은가. ‘한국 노동자, 세계 노동자계급의 전위.’ 재작년 노동자총파업을 어느 독일신문은 이렇게 평했다. 세계자본의 일방적 공세 속에서 터져나온 이 ‘힘’이 기자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때 한국 노동자들, 멋있었다. 싸가지 없는 국가에 본때를 보여주었다.

총파업은 메시아다. 국가라는 리바이어던과 마주선 잠재적 메시아. 단 우리는 이 메시아를 탈신학화해야 하고, 그 ‘힘’의 행사가 맹목으로 흐르지 않게 늘 감시하고 비판하며 그 정당성을 물어야 한다. ‘이성’의 포장지로 ‘힘’을 감추는 근대 자유주의의 위선, ‘힘’의 망치로 ‘이성’을 두들기는 좌우익 탈근대의 악마성. 근대와 탈근대를 모두 넘어서려는 나의 유물론은 그래서 힘의 비판, 폭력비판이 되어야 했던 거다.(진중권)

07. 07. 10.

P.S. 본문에서 언급된 벤야민의 폭력론과 그에 대한 데리다의 읽기는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을 참조할 수 있다. 더불어 이에 대한 나의 읽기는 http://blog.aladin.co.kr/mramor/810363 참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yoonta 2007-07-11 02:50   좋아요 0 | URL
앗 조르주 소렐의 책이 번역이 되었군요. 어서 한권 구입해야겠네요. 그런데 고종석씨가 정말로 노조의 '힘'을 반납해야한다고 했다면 정말 실망이군요. 진중권의 말대로 대화를 위해서라도 힘은 있어야 하는 법인데. 고종석씨는 자유주의자라기보다는 온건한 부르주아지식인이라고 보면 적당할듯 하네요. 그가 말하는 자유도 힘이 없이는 누릴수 없는 법인데 그는 이마저도 헌납하라고 하고 있는것이나 마찬가지인듯.

로쟈 2007-07-11 08:25   좋아요 0 | URL
그러한 '가능한 포지션'일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