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을 지나면서 즐찾이 1200명을 넘어섰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즐찾이 1000명쯤 되는 게 이 서재의 '적정규모'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작에 목표달성은 한 셈이다. 목표? 한 사람에게 연애편지를 쓰는 게 아닌 이상 개인적인 주절거림이라도 '사회적 의미'를 갖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독자층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목표치마저 갖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훨씬 게으른 알라디너가 됐을 것이고(언제부턴가 주간페이퍼의 달인 1위를 고수하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대부분의 페이퍼를 비공개로 돌렸을 것이다.

조촐한 기념거리를 찾다가(그렇다고 이벤트까지 열 생각은 없고) 7년전 이맘때 일기를 들추게 됐다. 모스크바통신에도 가끔씩 일기를 정리해서 (남부끄러운 줄 모르고) 올려놓은 적이 있었는데, 또 그런 생각이 발동한 것이다. 나이테 하나를 그어두기 위해서는 비교거리(과거의 흔적)도 있어야겠기에 정래해놓는다(정리라는 건 몇몇 고유명사를 삭제한 것이다). 마침 알라딘에 처음 리뷰를 올리던 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아의 외투'란 제목을 달고 있던 일기의 타이틀도 '로쟈의 기원'으로 바꾼다. 잠시 기억을 되새기는 이 일기 읽기는 <오! 수정>으로부터 <로스트 하이웨이>까지의 여정이다.

00. 6. 15
정확히는 16일. 2시가 되어 간다. 김대중과 김정일의 만남이 2-3일간의 뉴스를 모두 채우고 있다. 그 틈에 나는 삼성동 코엑스에 있는 멀티플렉스에서 홍상수의 <오! 수정>을 봤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와 다시 본 <부기 나이트>에 이어서. 홍상수의 영화적 작업은 어쩌면, 니체, 프로이트, 맑스가 가져온 정신사적 가치의 전도와 비슷한 맥락에서 평가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글로 쓸 만한 거리가 될 듯하다. 그가 말하는 ‘표면’이란 게 심층이라고 믿어져 온 것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표층 해석학과 유사하지 않나 하는 것.

흑백인 것과도 연관이 되겠지만, 그의 영화 속 세계는 70년대 후반쯤의 정서에 고착되어 있어 보인다. 몇몇 모티브들은 결코 90년대의 것이 아니다. 핸드폰이 그나마 유일하게 동시대와 연결지어주는 매개물인데(그리고 지하철 안산선), 인물들과 정서, 그리고 인사동이라는 배경 모두가 이전 세대의 것에 속한다. 홍상수식 아나크로니즘? 이건 약점은 아니어도 빈틈은 된다.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빈틈.



<매그놀리아>는 소문 대로, 알트만의 <숏컷>을 떠올리게 할 만한 규모와 주제와 긴장을 갖고 있는 영화. 29세에 이미 장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다. 타란티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향에서 그는 이미 믿을 만한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 그건 그가 대가라는 의미이다.

번역 독촉이 온 모양이다. 새로운 적의를 갖고 다시 일손을 모아려 보아야겠다.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를 비교하는 글을 빨리 완성하고도 싶고. 몸과 마음, 그리고 돈이 각기 따로 노는 세상이라니!..

 


00. 6. 18
어제 산 책은 러셀 자코비의 <유토피아의 종말>. 번역본은 ‘무관심 시대의 정치와 문화’란 부제를 달고 있다. 내가 어떤 문제로 무력감과 고민에 빠져 있는지를 이 책은 잘 요약하고 있다.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지 필자의 결론이 궁금하다.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기획은 분명 파산했지만, 그렇다고 유토피아에의 꿈마저 포기하고 살 수는 없다. 그것은 부르주아 유토피아의 야만성과 부도덕성 때문이다.(<부르주아 유토피아>도 사서 볼까?) 월러스틴의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도 읽고 있다. 내가 가진 문제틀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사회적 정의와 (개인에게서) 예술적 창조의 문제. 정의(justice)와 가능성(possibility)의 문제. 사회적 정의와 시적 정의의 문제. 요약하면, 정의의 문제. 

 

그러고 보면, 리자드 로티의 문제틀을 그대로 따온 것 같기도 하다. 이 둘이 매개될 수 있는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아직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문제이다. 여기에 관심을 집중해 보기로 하자.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논문도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 유령들('공산주의라는 유령')의 실체화/현실화. <공산당 선언> 읽기도 병행해야겠다. 1848년. 최초의 유토피아 종언론.(1807년 예나를 제외하면) 그리고 2차 대전 종전 후 1950년대 초반. 이어서 1989년, 1991년. 루카치도 빨리 읽어야겠고...



00. 6. 21
독서대학에 가서 <롤리타> 강의를 들었다. 나보코프 얘기보다는 프로이트 얘기가 더 많이 나왔다. 그래서 프로이트에 대해선 몇 가지 배웠지만, 나보코프와 <롤리타>에 대해서는 기대만큼 얻을 것이 없었다. 일단, 지나치게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작가의 죽음이니 하는 풍문에 의존하여 작품을 미리 재단하는 듯했다. 실재(리얼리티)의 파악 불가능성 하나만으로 작품의 이해를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사랑’이란 주제에 대한 너무 지나친 집착. 이건 일종의 미스리딩이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라는 주제를 잘 짚어내고, 이야기가 몇 차례 굴절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주목하고 있으면서도,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나보코프 대신에 사실주의 작가 퀼티의 죽음을 놓고 작가의 죽음을 얘기한다는 것은 동의하기 힘들다. 내가 더 잘 쓸 수 있는 부분을 더 찾아봐야겠다.

라캉의 정신분석학 입문서 한 권을 그제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요즘 전철에서 읽고 있는 책은 <유토피아의 종말>. 다원주의와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의 복원은 신선해 보인다. 그것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면서도 신선해 보이는 것은, 다들 쉽고 편하게 지나쳐버리는 주제이고 태도이기 때문이다.

보이드의 나보코프 전기 두 권과 데리다와 문학에 대한 연구서 등이 주문해서 사고 싶은 책들이다. 내일은 도서관에 있는 나보코프 자료들을 복사하고 1학기 성적처리를 할 예정이다. 학원일은 학생들이 하나 둘 늘어갈 것 같아 걱정을 조금 덜었다. 다만 문제는 시간이고, 돈이다. 읽어야 할 책은 많지만, 그걸 읽을 시간을 나는 돈버는 데 투자해야 한다. 이걸 계급의 한계라고 부를 수는 없는 걸까?

 



00. 6. 22
학교에서 나보코프와 도스토예프스키 자료들을 복사했다. 나보코프는 분량이 많아서 복사비만 만 오천 원이 더 들었다. 그리고 구내서점에서 문예미학회에서 나온 <해체론과 맑스주의>를 샀다. 주로 대구 지역의 인문학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꾸려나가는 학회인데, 교수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통 굴리기’를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 데리다와 해체주의에 대한 국내 연구자들의 이해 수준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 사들었다. 사실 해체론과 맑스주의란 주제를 처음 부각시킨 마이클 라이언의 책을 이전에 대출해 놓기도 했다. 해체론과 맑시즘, 그리고 정신분석학과 문학사회학, 대략 이런 것들이 문학에 대한 접근방법으로서 나에게 의미있어 보이는 것들이다. 데리다를 읽어야 하고, 맑스와 가라타니 고진을 읽어야 하고, 프로이트와 라캉,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을 읽어야 하며 루카치와 부르디외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들뢰즈까지.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를 다루려는 계획을 어느 정도에서 매듭지어야 할지 고민중이다. 충분히 다룰 수는 없고, 어느 선에서 타협해야 하는데, 그걸 정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유토피아의 종말>에서의 지식인 비판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저자인 자코비의 <사회적 건망증>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주장고 요점을 명확히 하고 비판할 대목에 가선 눈치보지 않는 것이 매력적이다. 마치 미국판 강준만의 글쓰기 같기도 하다.

 



00. 6. 25 
돌잔치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간으로 서평에 오른 <미>란 책을 사들었다. 의대 교수가 쓴 진화심리학 계열의 책. 표지 장정이 맘에 안들고, 교정도 불충실하지만, 관심있는 주제여서 일단을 손에 넣었다. 이런 식의 책들은 일주일에 한 권씩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푸코의 '니체, 프로이트, 맑스'를 읽는다. 아니 읽어야겠다. 김상환 교수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란 글에 다시 자극을 받은 것이다. 그 글은 푸코의 글에 대한 상세한 주석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른바 (새로운) 해석학의 문제.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포기할 때 우리가 진리에 대한 점근선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선은 해석학이다. 인식과 들어올림의 문제.  

 

여러 가지 글거리들이 있다. 가령 나보코프와 프로이트, 나보코프와 히치콕. 양손잡이 세계. 그리고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 망명 문학 등등. 그것들의 상당수가 포기되거나 폐기처분 될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논문 준비도 있고. 책을 사거나 복사하는 일에만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고... 내가 과연 무얼 이룰 수 있을까?

 



00. 6. 27 
맬컴 보위의 <라캉>을 그제부터 읽고 있다. 오역은 아니라도 해도 잘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라캉 자신이 쓰는 용어들에 신조어가 많고 또 전․후기의 용례와 강조점이 다른 까닭에 다 따라가기가 힘든 것이다. 일단은 윤곽만 잡을 생각이다. 이후에 벤베뉴토와 아니카 르메르, 마이클 페인, 마단 사럽 등의 입문서를 읽으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힐 것이다. 그의 <에크리>를 짬짬이 읽어가면서.

00. 6. 28
학교에 들러서 몇 권의 책을 반납하고 다시 대출했다. 파스테르나크와 라캉에 관한 책들. 맬컴 보위의 책은 거의 다 읽었다. 김상환 교수의 강의 교재가 데리다의 <우편엽서>와 아니카 르메르의 <자크 라캉>이었다. 다른 책을 한두 권 더 보고, 르메르의 책을 읽을 계획이다. 물론 데리다를 읽는 건 그것보다 늦어질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령>을 읽는 일도 지난 봄에 잡혔었지만 실행되지 못했다. 여러 모로 밀린 책들이 많다.

인터넷을 통해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지젝과 리네츠키(Linetski)의 글을 상당수 프린트로 뽑았다. 지젝은 근래 가장 저명한 헤겔파(혹은 셸링파) 라캉주의자이자, 문화이론가이다. 반면에 바짐 리네츠키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현재 이스라엘의 헤브루대학 교수로 있다고 한다. 러시아 태생인듯한데, <안티-바흐친: 나보코프에 관한 가장 좋은 책>이라는 러시아어 저서까지 갖고 있다. 흥미가 있어서 찾을 수 있는 모든 글을 뽑아놨는데, 간혹 이렇듯 지명도 있는 신예 학자들을 만날 수 있는 건 행운이다. 그의 <안티-바흐친>을 구해보고 싶다.

내일은 다시 국립도서관에 가볼 작정이다. 스프링 제본할 책이 몇 권 있고, 간 김에 라캉 연구서도 한두 권 복사할 계획이다. 라캉의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에크리>의 영어판 색인에는 도스토예프스키란 이름이 딱 한번 나온다. 라캉이 좀 더 여러 번 말했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그걸 내가 대신 말하고 싶어진다.

 

 

 

00. 6. 29
국립도서관에 가서 라캉과 데리다, 그리고 들뢰즈 연구서들을 복사했다. 장 뤽 낭시와 라쿠-라바르트의 라캉 연구서를 챙긴 건 수확이다. <라캉과 정치적인 것>, <하이데거와 데리다>, <안티오이디푸스 입문>, <문자의 타이틀> 등이 제본한 책들이다.

00. 7. 3
마단 사럽의 <알기 쉬운 자크 라캉>을 읽었다. 맬컵 보위의 <라캉>에 이어 읽은 것인데, 보위의 것보다는 읽기가 수월했다. 보다 평이한 문체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라캉의 전보가 손에 잡힌 건 아니다. 아직 개념정리가 확실히 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라캉 사전을 참조해 가며 더 읽어나가야 할 것이다. 라캉 읽기 혹은 라캉 사용하기와 관련해서는 세 가지 유형을 떠올려 본다. 지젝과 제임슨, 그리고 페미니즘(이리가레와 크리스테바)이 그것이다.

지젝의 책들은 대부분은 제본하여 갖고 있고, 인터넷에 떠있는 아티클들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제임슨의 책들은 대부분은 구할 수 있다. 한두 편의 주요 논문 정도만 찾으면 된다. 페미니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셋과 모두 맞물려 있는 것이 영화이다. 영화에서는 무엇보다는 메츠를 읽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앞으로의 독서 계획에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물론 데리다가 있다. 포우에 대한 라캉과 데리다의 읽기를 비교 검토해 보는 것(바버라 존슨이 한 일).

한길사의 로로로 시리즈 중에서 <히치콕>을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자신의 영화에 대해 평가하면서 포우가 문학에서 한 일을 자신은 영화에서 해보고자 했다는 히치콕의 증언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 포우를 중심으로 하여 히치콕은 나보코프와 만난다. 그리고 라캉과도 만난다. 히치콕과 나보코프는 재미있게도 1899년생 동갑내기이다. 이들에 관해서 뭔가 재미있는 글이 씌어질 수도 있을 듯하다. 히치콕의 영화들에 대한 관람 계획도 필요하다.



라캉 읽기와 관련해서는 일단 그의 컨텍스트를 먼저 읽기로 한다. 보위나 사럽의 책들은 약간 어중간한 형태의 전기라 할 수 있겠는데, 아니카 르메르나 마이클 페인, 그리고 데리다의 글들은 라캉의 텍스트를 주의깊게 읽는 작업에 해당한다. 거기에 대하여 라캉의 컨텍스트에 집중하고 있는 책들이 셰리 터클의 <라캉과 정신분석 혁명>, 그리고 스튜어트 슈나이더만의 <자크 라캉, 지적 영웅의 죽음>이다. 새물결에서는 루디네스코의 방대한 라캉 전기가 번역되어 나올 거라고 한다. 

그래서 컨텍스트에 대한 책들을 먼저 읽고, 텍스트에 대한 책들은 직접 <에크리>를 읽는 작업과 병행해 나갈 작정이다. 물론 라캉의 텍스트 읽기는 프로이트 읽기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컨텍스트 읽기와 함께 지젝과 권택영의 책들을 읽어볼 생각이다. 그래서 일단 7월에는 컨텍스트 읽기, 8월에는 텍스트 읽기가 목표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러시아 문학에 대한 적용 가능성은 항상 탐색거리이다. 가령, <우리들>에서의 거울 이미지. 그리고 폰비진의 <미성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 나보코프의 소설들의 경우.



00. 7. 4
강남 동화서적에 들렀다가 시공사에서 다시 번역되어 나온 마틴 제이의 <아도르노>를 샀다. 지성의 샘에서 나온 번역본을 이미 갖고 있는데도, 잠깐 잊었었다. 다행히 새 번역의 가독성이 훨씬 좋다. 물론 아도르노의 이론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들은 여전히 난해하다. 그의 <부정의 변증법>도 마찬가지겠지만, 번역 불가능성의 사례로서 지적될 만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아도르노인 듯하다. 하지만 새 번역을 통해서 프랑크푸르트 학파 연구의 전문가인 마틴 제이의 권위 있는 해설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럽다. 

 

특히 관심있는 부분은 아도르노의 <한줌의 도덕>(혹은 <미니마 모랄리아>). 그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잠시 망명해 있던 시기의 저작이고, 또한 가장 니체적인 책으로 평가된다. “오직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사유만이 참되다.” 음미해 볼 만한 부분이다. 한 가지 새롭게 알게 된 건 모더니즘 작가로서의 베게트에 대한 그의 높은 평가. 그는 자신의 <미학이론>을 베케트에게 바치려고 했단다. 라캉 읽기에 불쑥 끼어든 아도르노 읽기이지만, 나는 곧 라캉으로 다시 돌아가겠다.

 



TV문화기행 코너에서 토마스 하디 편이 방송되는 걸 봤다. 테스가 겁탈 당하는 장면이 세 차례에 걸쳐 개작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 <무지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바로 <테스>의 계보를 이어받은 작품이라는 게 새로 알게 된 내용이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그의 고향 마을의 농촌 학생들은 그에 대해서 전혀 알고 있지 않았다.

장 주네의 희곡 <하녀들>을 구해봤으면 싶다. 어디 번역되어 있을 것도 같은데, 전혀 검색이 되지 않는다.

 

00. 7. 8
며칠간 인터넷 자료들과 대출한 책들을 인쇄하고 복사했다. 어제 뽑은 것 중에서 제일 흥미로왔던 건 히치콕과 나보코프를 비교한 글. <이미지>란 잡지에 제임스 데이빗슨(비디오 평론가)이 기고한 것인데, 사실 히치콕과 나보코프를 비교해보는 글은 내가 먼저(!) 구상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들고 있는 공통점은 다섯 가지이다. ①게임 이론 ②카메오 출연 ③자기 지시적 기법 ④분신들과 “신빙성 없는 화자” ⑤공통적인 문학적 영향(특히 포우). 어쨌거나 수고가 반 이상 덜어지게 되어 다행이다. 참고문헌을 보면 히치콕과 나보코프를 다룬 글은 이게 거의 유일하지 않나 싶다. ‘최초’라는 자리를 놓치게 되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다.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랄까...

 

00. 7. 11
셰리 터클의 <라캉과 정신분석 혁명>을 다 읽었다. 알라딘에 서평까지 올렸다. 라캉 이론의 테두리를 긋는데 도움이 되는 저작이지만, 이론의 내면까지 들어가지는 않는다. 사실 그걸 목적으로 하지도 않은 책이지만. 정신분석의 사회학이면서 일종의 지성사인데, 프랑스에서 프로이트 혁명이 지니는 의의와 그 변모 과정을 잘 개괄하고 있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 인상적인 대목: “정신분석의 비전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은 우리 내부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며 라캉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과 자신 안에서 대면하도록 끊임없이 촉구한다고 많은 분석가들은 믿는다. 이것이 라캉 세미나의 위력이다.”(304쪽) “정신분석의 핵심은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진실, 즉 인간이 자신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과 대면하는 것이다.”(307쪽) 그런 점에서 미국식의 적응주의적, 실용주의적 정신분석은 일종의 ‘자살 행위’이다. 그 다음. “알튀세르와 라캉에 있어 '과학만이 전복적이다'”(310쪽) 두 이론가가 모두 왜 그렇게 과학(과 수학)에 집착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또 “사람들이 정치와 언어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에 미친 라캉의 영향은 프랑스의 새로운 대중적인 철학(신철학)과 알렉산더 솔제니친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평가에서 나타난다.”(311쪽)는 대목.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1973)가 제일 먼저 출간된 곳은 프랑스였다. 터클의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그래도 미국에서의 라캉을 다룬 에필로그이다. “라캉의 정신분석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자기를 형성하는 인간을 강조한다. 그것은 개인에 대한 일종의 시작(詩作)이다. 라캉에게 시인과 정신분석가는 언어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 의해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332쪽)



“정신병은 엄밀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정신병자라고 말하고 싶다. 항상 엄밀해지고자 노력해 왔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정신병자이다.”(라캉) ‘정신병자’ 라캉의 전략은 과학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는 어렵고 엄밀한 작업을 피하기 위해 시적인 합리화를 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수학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과학적 엄밀함이 시야를 좁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334쪽) 그리하여 “라캉은 정신분석을 과학으로 재발견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시인이다.”(336쪽)

라캉 독서 계획. 슈타이더만의 <자크 라캉, 지적 영웅의 죽음>을 읽으면, 콘텍스트는 끝난다.(루디네츠코의 책이 역간되면 콘텍스트에 포함될 것이다.) 페터 비트머의 <욕망의 정복>이나 아니카 르메르의 <자크 라캉>이 텍스트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

00. 7. 14
어제는 국립도서관에 가서 몇 권의 책을 복사했는데, 그 중 어얼리치의 <모더니즘과 혁명>, 그리고 <사회주의 이후의 러시아 사상>이란 엔솔로지는 전권을 다 복사했다. 그만큼 수지가 맞는 책이었다는 얘기. 특히 어얼리치의 경우는 그렇다. 1994년에 하버드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책이다.

7월도 보름이 후딱 지나갔다. 해야 할 일은 손끝도 대지 않은 채, 아니 손끝만 댄 채. 방향 상실의 세월이 생각보다 더 길어질 듯하다. 불행도 헹복도 말할 수 없는 시간... 



00. 7. 16
로로로 시리즈의 <히치콕>을 마저 읽었다. 대출한 지 보름이 지났다. 너무 밋밋한 전기. 영화감독의 개인사라는 게 그의 작품세계만큼 흥미로울 수는 없는 법이고, 주요 작품들을 자세하게 분석하기에는 분량이 너무 짧다. 그냥 히치콕에 대한 윤곽을 잡는 데 유용한 책. 더 두꺼운 전기나, 대담, 연구서들을 봐야 할 듯하다. 트뤼포와의 대담이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모르겠지만, 도널드 소포토(Donald Spoto)의 저명한 전기는 갖고 있다. 물론 그에 관한 참고문헌은 수백 권을 헤아리지만...

작년, 1999년의 키노 12월호는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에 바쳐지고 있다. 지젝의 책들과 더불어, 라캉과 더불어, 히치콕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으면 싶다. 물론 나보코프와 비교도 해볼 만한 작업일 것이다.  

00. 7. 19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올린 서평 중 <미- 예쁜 유전자만 살아남는다>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평은 아직 올라오지 않았다. 히치콕에 대한 것만 올라와 있었다. <유토피아의 종말>에 관한 것도 한번 더 올려봤는데, 이것도 올라오지 않으면 문의해볼 생각이다. 또 인터넷 카페로 개설한 <도스토예프스키>가 꼭 1년이 되었다. 한 살을 먹은 것. 회원수가 119명. 내일로써 120명이 채워졌으면 싶다. 3일에 한 명 꼴로 회원이 는 것이니까 실적이 모자란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카페나 마찬가지지만 비활동 회원이 많다는 것. 매일 들르는 회원은 10명이 채 못되는 듯하다. 반면에 칼럼은 실족이다. 새로 칼럼을 띄우지 않은 지 두 주가 넘은 듯하고, 회원들도 더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다른쪽으로 업종 전환을 해야 할 듯.

새로 나온 신간 중 몇 권이 눈에 띈다. 마음에 내키는 책들은, 모아둔 것까지 하면 10여 권쯤 될까. 뭐라도 당첨이 되었으면 싶은데... 정말 뭐라도 하고 싶고, 해야 할 것 같다. 번역에 다시 치이고 있다. 막상 시간은 내지 못하면서 부담은 크다. 리포트도 그렇고. 어떻게든 타개책을 마련해야 할 터인데... 정신분석에 요즘 마음이 갈 만한 이유들이 어쨌든 있는 것이다!



00. 7. 23
알라딘에 올리는 서평들은 잘 올라가고 있다. 세 편이 추천서평에 꼽혀 있는데, 우수작으로라도 뽑히면 좋겠다. 10만원 정도면 책가뭄을 얼마간 해갈할 수 있을 듯하기에.

어제는 EBS에서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을 보고, 오늘은 비디오로 <로스트 하이웨이>를 다시 봤다. 린치는 정신분석적 접근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감독 중의 한 사람이란 걸 확인하게 된다. <로스트 하이웨이>의 경우는 나보코프와 마찬가지로 두 세계 모델(‘다른 세계’)이 유력한 해석의 방안처럼 보인다. 물론 그 자세한 읽기는 보다 많은 노고를 필요로 할 것이다.

00. 7. 25
김형효 교수의 하이데거 연구서를 손에 들었다.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 주로 초기작인 <존재와 시간>의 ‘소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내년에 속편을 낼 예정이라고. 동서양 철학을 아우르는 박식함과 성실함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글 또한 일정한 수준은 꾸준히 유지하고 있어 반갑고. 다만, 글쓰기의 문턱에 대해서 아직은 가볍게 생각하는 듯하다.  

불교나 노장 사상을 가지고 하이데거나 데리다의 해체론을 읽는 건, 물론 얼마간 성과를 낼 수 있을 터지만, 역시 근원적인 한계를 가질 법하다. 그것은 불교나 노장 모두, 언어를 불가피한 장애물 정도로 다루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다리로 취급하는 것이다. 진리에 도달하면 버려야 하는, 아니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하는. 김 교수의 문체가 진지하되, 유희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겠다. 물론 모처럼 개성적인 하이데거 연구서가 나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올해에 새로 나온 연구서만 세 권쯤 된다. 신상희 박사의 <시간과 존재> 연구서와, 권순홍 교수의 <존재와 탈근거>가 그것이다. 언제나 집중하여 읽을 수 있는 시간과 경제적 여유을 가질 수 있을까?

 



인터텟에서 나보코프에 관한 비평 자료들과 함께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에 관한 글들을 뽑았다. 린치와 지젝을 비교한 장문의 글도 있었는데, 독어여서 입맛만 다셨다. 지젝 자신이 이 영화에 대한 책도 쓰고 한 모양이다. 아무튼 정신분석학자들의 구미에 상당히 잘 들어맞는 감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그의 영화들을 다 챙겨보기도 했다. TV 시리즈 <트윈 픽스>도 거의 본 것 같고, <사구>(듄)도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비디오로 빌려다 본 적이 있다. 그의 필모그라피 중에서 <로스트 하이웨이>가 가장 최신작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와일드 앳 하트>와 <로스트 하이웨이>. 전자는 아마도 가장 먼저 본 영화였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듯하다. <이레이져 헤드>도 좋아할 만한 영화는 아니지만, 생각거리를 주는 영화이다...

07. 07. 16. 


P.S. 여름일기가 7월로 끝난 건 그해 8월에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적어도 나는 그해 여름에 '생물학적 아버지'가 되었다. 애당초 '노아의 외투'란 제목이 붙여진 건 그래서였다). 이후로 정신없었던 건 당연하고 게다가 아이는 한달 동안 병원신세까지 졌었다. 그래도 비교적 건강하게 자랐고, 내가 알라디너 8년차에 들어선 올해 8살이 되어 학교엘 갔다. 쑥쑥 자나라는 아이와 비교해본다면 나의 '지적 성숙'이란 게으르기 짝이 없다(아이는 '또 알라딘!'하면서 서재질을 할 때마다 나에게 주의를 준다!). 릴케라면 '부도덕'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DNA보다 분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노릇인지...

 

P.S.2. 그럼에도 이 정처없는 질주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http://www.youtube.com/watch?v=pD3_9yd72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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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16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회가 새로우시겠어요 :)
1200 즐찾이라 와우...
여튼 축하드리고 갑니다.

로쟈 2007-07-16 15:4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마늘빵 2007-07-16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1200이라... 엄청나군요. 아마도 저 정도 숫자는 바람구두님과 로쟈님 뿐일듯.
그나저나 저 아이가 로쟈님을 많이 닮은거 같은데요? 눈과 볼이 :) 저는 비록 사진으로만 봤지만. 귀엽습니다.

로쟈 2007-07-16 15:41   좋아요 0 | URL
저도 기여분이 있을 텐데, 사실 아이는 엄마의 판박이입니다...

드팀전 2007-07-16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 일단 축하해요.
로쟈님 책은 결코 만만한 책들은 아닌데 이렇게 즐찾이 많은 건 사람들이 그만큼 인문사회분야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반증하나...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하고 ^^(김창렬이 유행시키고 있다는 '같기도' 버전)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올려주시길.

로쟈 2007-07-16 18:25   좋아요 0 | URL
워낙에 댓글들이 없는지라 저는 그 숫자가 다 허수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단 다른 보람이 없기 때문에 그 '허수'에라도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죠.^^;

퍼그 2007-07-16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야 할 책은 많지만, 그걸 읽을 시간을 나는 돈버는 데 투자해야 한다." 저도 항상 시달리는 고민인데, '규모'는 다르더라도 '본질'은 같을 듯합니다. 그리고 아마 허수 아닐 거예요. 말하긴 어렵지만 그... 하여간 댓글 달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사람도 있거든요. 1200 즐찾 축하드립니다!

로쟈 2007-07-16 23:27   좋아요 0 | URL
인문학이 원래 밥벌이 잘 못하는 기생학문이잖아요(그래서 왕후장상의 학문이란 말도 하고). 퍼그님은 능력있는 배우자를 만나길 바랍니다.^^

필라멘트 2007-07-16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이 뜸한 건 달았다간 수준이 들통날까봐 그런거죠. 허수는 아닐겁니다. 댓글을 달고싶어도 웬만한 지적 내공자가 아니고선 왠지 머뭇거려지는.. ㅎㅎ

로쟈 2007-07-16 23:42   좋아요 0 | URL
오히려 제 '바닥'을 드러내는 글들도 많은데요.^^; 게다가 제 딴엔 부러 흰소리도 많이 하는데 잘 먹히지 않네요.--;

작은앵초꽃 2007-07-17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많은 것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아이가 참 예뻐요.

로쟈 2007-07-17 09: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유명인사분들이 오늘은 많이 오셨네요.^^

프레이야 2007-07-17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찾 1200돌파, 축하합니다.
쉽지않은 책들에 읽기만 하거나 채 읽지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았지만
그중 한 사람으로서 계속되는 질주를 기대합니다.
참, 일전에 언젠가 보았던 로쟈님의 사진 속 얼굴이 아이의 얼굴에 그대로
있네요. 참 똘망똘망하니 예쁩니다.^^

로쟈 2007-07-17 09:14   좋아요 0 | URL
똘망똘망한 거라도 절 닮은 거라고 아이에게 주입시켜야겠습니다!^^;

조선인 2007-07-18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경우 2001년 1월 11일에 첫 리뷰를 쓴 전 즐찾 294명. 한편으로는 로쟈님에 비해 부끄럽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적인 블로그를 즐겨찾는 사람이 294명이나 된다는 것에 움찔해버립니다.

조선인 2007-07-18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앗, 축하의 말을 빼먹었네요. 축하드려요. 로쟈님은 그럴만하다구요. ^^

로쟈 2007-07-18 18: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즐찾이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사적인 블로그만은 아닌게 돼 버리죠(사서 고생하기도 하고--;). 한 20명까지는 '사생활'을 만끽할 수 있(었)을 텐데요. 흠...

이매지 2007-07-1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달다가 무식이 탄로날까싶어 조용히 읽고 추천만 하고 간 것도 많은걸요 :)
어쨌거나 로쟈님의 즐찾 1200 축하드립니다 :)

로쟈 2007-07-18 23:24   좋아요 0 | URL
알고 모르고는 몇 걸음 차이나지 않습니다. 앎에 흥미를 느끼느냐가 사실 더 중요하지요.^^
 

인스턴트 커피, 곧 커피믹스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건 상식이다. 하지만 애연가들이 흡연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듯이 커피(믹스) 애호가들 또한 이 '간편한'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요즘은 여름인지라 나는 하루 한 잔 정도의 냉커피를 마시고 두 잔 정도의 커피믹스를 습관처럼 마신다. 이렇듯 "습관적으로 마시게되는 ‘어른들의 불량식품’ 커피믹스를 바로보자"란 취지의 기사가 있어서 옮겨온다(몸으로 느끼게 되는 기사이다!). 이런 기사를 자주 읽어둬야 그래도 커피량을 줄일 수 있을지 모르겠기에(반대로 내성이 생길까?).

한겨레21(07. 07. 12) 커피믹스, 오늘 몇 잔째?

하루에 1100만 개, 한 해에 43억 개를 마신다?
논술 잡지 <월간 논>을 만드는 신관식(32)씨는 지난 7년간 하루 평균 7봉의 커피믹스를 위에 들이부었다. 군대 시절, 힘들 때마다 자판기에서 밀크커피를 뽑아 먹던 습관이 제대 뒤에도 계속됐다. 하루 활동 시간을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로 보면 2시간에 한 봉씩 조제해 마신 셈이다. 사무실마다 신씨와 같은 이들이 많아서일까. 커피믹스 시장은 지난 5년 사이 3배 가까이 성장했다. 2001년만 해도 2128억원이었던 커피믹스 시장 규모는 매년 늘어 지난해에는 6047억원에 이르렀다. 커피믹스 한 봉당 가격을 140원(20개들이 2800원)으로 계산하면 연간 43억 개의 커피믹스가 팔려나갔다는 얘기다. 커피믹스가 ‘기호식품’을 넘어 대다수 직장인들의 ‘생필품’이 된 것이다.

“지방·화학첨가물을 위에 들이붓는 셈”
커피믹스 커피 제조 과정은 간단하다. ‘커피 스틱 포장 귀퉁이를 뜯는다 → 내용물을 컵에 확 붓는다 → 정수기 물을 받는다 → 휘휘 젓는다.’ 수십만 명의 대한민국 커피믹스 애호가들은 아침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회사원 배진옥(27)씨는 “아침에 졸릴 때 먹으면 잠이 깨는 느낌이라서, 아침마다 먹는다”고 말했다. “깜빡하고 안 먹은 날은 ‘오늘 안 먹었지’ 생각하고 일부러 타 먹는다”고 덧붙였다.

저마다 조제의 비법도 있다. 산업디자인 전문회사 디자이너 김남연(36)씨는 “스테인리스 스푼으로 휘저으면 열이 뺏겨 맛이 떨어지기 때문에 꼭 내용물을 비운 포장지로 저어야 한다”며 “휘젓는 재미로 믹스커피를 마신다”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한 봉지의 커피는 한 잔의 소화제다. 주부 김경례(42)씨는 “밥 먹고 나서 속이 더부룩할 때 마시면 느끼한 느낌이 가신다”고 말한다. 등산 가는 이들도 배낭에 한두 개씩 꼭 커피믹스를 꼽아 가고, 술 먹은 다음날은 입 안을 개운하게 하려고 또 한 잔 타 먹는다. 커피믹스는 이렇게 다양한 용처를 갖고 많은 이들을 중독자로 만들고 있다.

한국은 인스턴트 커피 공화국이다. 커피 소비량은 세계 11위지만, 인스턴트 커피 소비량은 세계 정상이다. 서유럽, 미국 등은 원두커피가 커피 시장의 80%를 차지한다. 일본도 60%가 원두커피 몫이다. 반면에 한국은 인스턴트 커피가 78%를 차지한다. 지난해 9512억원 커피시장에서 원두커피 판매액은 372억원으로 입지가 미미하다. 대신 인스턴트 커피는 7452억원, 그중에서도 커피믹스가 6047억원이다. 집이든 사무실이든 유리병에 담긴 커피, 설탕, 프림을 티스푼으로 떠서 저어 먹던 모습은 이제 ‘추억’이 됐다. 지금은 가로 2cm, 세로 15cm의 막대형 포장이 병커피와 티스푼을 대체해버렸다.

그렇다면 커피믹스에는 맛뿐만 아니라 건강도 ‘믹스’돼 있는 것일까. 날마다 마시는 커피믹스에는 과연 어떤 성분이 믹스돼 있을까.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의 저자 안병수씨는 “커피믹스를 컵에 붓는 것은 지방과 화학첨가물들을 위 속에 들이붓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안씨는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

문제는 ‘프리마’라고 불리는 커피 크리머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커피 크리머가 우유나 유제품으로 만들어졌다고 오해하고 있다. “주로 원두커피를 마시지만, 각성이 필요할 때는 꼭 커피믹스를 집어든다”는 회사원 윤민혜(28)씨도 커피 크리머 성분을 묻자 “우유로 만든 것 아닌가요?”라고 되물었다. 짙은 갈색빛의 커피가 프림을 넣으면 ‘부드러운 밀크빛’으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맛도 부드러워져 왠지 우유 맛 같다.



별 생각 없이 꾸준히 먹어서 문제
하지만 짐작은 사실과 다르다. 커피 크리머에서 커피 색깔을 묽게 만들어주는 주성분은 우유가 아니라 기름이다. 식물성 유지(기름)를 물에 섞고, 물과 기름이 잘 섞이도록 식품첨가물 유화제를 넣으면 커피 크리머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물에 기름을 섞어 만든다고 해서 아베 쓰카사(<인간이 만든 위대한 속임수, 식품첨가물> 저자)는 커피 크리머를 ‘밀크맛 샐러드유’라고 부르기도 했다.

안병수씨는 이 기름덩어리에 각종 식품첨가물들이 추가된 것이 커피 크리머라고 설명한다. 맛과 향이 부드러운 커피 크리머를 만들기 위해 카제인나트륨, 인산이칼륨, 폴리인산칼륨 같은 각종 식품첨가물들이 추가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사용되는 첨가물들은 식품의약품안전청이 공인한 것들이다. 안씨는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식품첨가물들을 자기도 모르는 채 하나씩 먹게 되면 하루에도 수십 가지 첨가물을 섭취하게 된다. 커피믹스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3~4잔씩 별 생각 없이 꾸준히 먹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다.”

커피 크리머에는 예상과 달리 트랜스지방은 없다. 대신 100% 포화지방산이다. 포화지방도 다량으로 섭취할 경우는 건강에 해롭다. 한진숙 동의과학대 식품과학과 교수는 “포화지방을 많이 섭취할 경우 심혈관계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지난해 오스트레일리아 아델레이드대 심장전문의 스티븐 니콜스 박사는 “포화지방인 코코넛 기름으로 만든 당근케이크와 밀크셰이크를 먹은 사람의 경우, 3시간 만에 동맥 내막 기능이 저하되고, 6시간 뒤에는 혈전으로 인한 염증을 억제하는 고밀도지단백질(HDL)이 감소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포화지방이 혈중 콜레스테롤 농도를 높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커피믹스 뒤의 영양분석표에는 콜레스테롤 함량이 0mg이라고 쓰여 있다. 크리머의 포화지방이 콜레스테롤 함량을 높인다면야, 콜레스테롤 함량이 0mg이라는 건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다.

김지영 식약청 전문위원은 “포화지방을 하루 섭취 열량의 10%까지 섭취하는 것은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평소에 동물성 지방을 많이 섭취하는 사람이 커피믹스 커피를 통해 추가로 포화지방을 섭취할 경우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커피믹스를 통해 섭취하게 되는 당분의 양도 적지 않다. 12g 커피믹스 한 봉에 담겨 있는 설탕은 5~6g이다. 하루에 커피믹스 다섯 봉을 먹는 사람은 설탕만 40g을 집어먹은 셈이다. 지난해 여성이 하루에 열량을 많이 섭취하는 식품 4위가 커피믹스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김초일 한국보건산업진흥연구원 박사는 “이렇게 커피믹스 섭취량이 늘다가는, 언젠가 한국인이 섭취하는 당분이 죄다 커피믹스에서 온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할지도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합성 착향료 추가하고서 ‘웰빙 커피’?
최근에는 이런 커피 프리머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안과 ‘좋은 먹을거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감안해 ‘웰빙 커피’가 출시됐다. 하지만 이 웰빙도 미심쩍다. 특히 한국네슬레가 대니얼 헤니를 내세워 선전하고 있는 ‘웰빙 밀크커피’는 일반 커피에 없는 칼슘을 보강하기 위해 탈지분유를 첨가했다.

그러나 일반 믹스커피에는 들어가지 않는 합성 착향료가 0.2% 첨가됐다. 안병수씨는 “커피에 들어가는 첨가물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유화제와 향료, 색소 등인데 기존 커피믹스에도 안 들어가는 합성 착향료를 쓰고서는 ‘웰빙’이라 이름 붙이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의혹과 의심, 우려들에도 불구하고 커피믹스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안경호 동서식품 홍보실장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이후 커피 심부름을 하던 여직원들이 크게 줄면서 스스로 커피를 타서 마시는 문화가 정착된데다 냉·온수기 보급이 확대되면서 커피믹스 시장이 성장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 실장은 “커피믹스가 커피 시장에서 점점 확대되는 분위기가 마냥 반가운 건 아니다”고 말했다. 커피믹스 판매가 증가하는 것은 곧 ‘경기가 좋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것. 안 실장은 “사람들이 일하면서 빨리 털어 빨리 먹는 믹스 커피를 마시는 건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모두가 똑같은 커피를 먹는 데 대한 안타까움도 있다. 커피는 농도의 높낮이에 따른 무게감, 커피를 끓일 때 나는 향기, 얼얼한 맛에서부터 달콤한 맛까지를 결정하는 산도 등에 따라 수천 가지 맛을 가지고 있다. 브라질, 케냐, 예멘 등 커피가 나는 나라에 따라 맛도 다양하고 기후, 재배 조건, 볶는 방법 등에 따라서도 맛이 천차만별이다. 커피 로스팅 전문가 전광수씨는 “이렇게 다양한 맛을 모른 채 모두 똑같은 커피 맛을 즐기는 모습이 슬프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월간 논>의 신관식씨는 7년의 커피믹스 생활을 접고 지금은 원두커피로 바꿨다. 신씨의 주장으로 지난해부터 사무실에 원두커피 기계를 들여놓은 것이다. 덕분에 사무실 식구들도 주로 원두커피를 마시고 가끔 커피믹스를 애용한다. 신씨는 “7봉씩 7년간 지속된 커피믹스 생활 동안 계속해서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었다. 지금은 속이 깔끔하다”고 말했다.

커피믹스에 천인공노할 ‘나쁜’ 성분이 들어 있는 건 아니다. 가끔 한 잔씩 즐기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기도 하다. 다만 아무 생각 없이 하루 몇 개씩 믹스 껍데기를 까다 보면, 배 언저리에 치유할 수 없는 포화지방을 두르고 다녀야 할 게 뻔하다. 어른들의 불량식품, 커피믹스. 무심코 뜯기 전에 ‘이 안에 뭐가 들었나’ ‘오늘 몇 잔 먹었나’ 의심을 찬양해보자.(박수진 기자)

07. 0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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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15 11:46   좋아요 0 | URL
뭐든지 스트레스 안받고 잘 먹고 잘 소화시키는게 건강의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하루에 커피 석잔 정도는 기본인데... 그것마저 끊으라면
이 답답한 인생 무슨 낙으로 사나요? ㅋ~
글 고맙습니다 로쟈님 :)

로쟈 2007-07-15 15:31   좋아요 0 | URL
습관이란 게 길들이기 나름이어서 이왕이면 좋은 습관을 기르는 게 더 낙이 되겠죠.^^

마노아 2007-07-15 20:29   좋아요 0 | URL
하루 한잔은 애교로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봅니다. 전 여름 겨울에만 마셔요(>_<)여름엔 더워서, 겨울엔 추워서..;;;;

로쟈 2007-07-15 21:13   좋아요 0 | URL
좀 문제가 되려면 매일 4-5잔 이상은 마셔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Mephistopheles 2007-07-15 21:53   좋아요 0 | URL
커피는 여간해선 한 잔도 안먹는데..그게...야근이 일상이다 보니 반사적으로 마셔주고 있는 현실이 조금은 두려워지는군요..^^

오월의시 2007-07-15 22:56   좋아요 0 | URL
칼로리 높다는 사실을 알아도 어쩔 수가 없네요^^;;

몽당연필 2007-07-16 11:03   좋아요 0 | URL
저도 하루에 1~잔은 마시는데...^^;;

로쟈 2007-07-16 15:50   좋아요 0 | URL
하루에 3잔까지는 괜찮은 걸로 중지를 모으도록 합시다!..
 

벌써 재작년 일이 돼 버렸는데, "2005년 10월 27일부터 11월 18일까지 프랑스 전역 274개 방리유(도시 외곽)에서 발생한 ‘방리유 사건’의 의미와 원인을 철학, 역사학, 정치학, 사회학 등 각 분야의 젊은 국내 연구자들이 다각도에서 추적한 책"이 출간됐다.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이란 부제를 단 <공존의 기술>(그린비, 2007)이 그것이다(그 이면이야말로 공화주의의 구성소가 아닌지 궁금하다). 당장 손길이 가지는 않을 책이지만 공저자들과의 인터뷰 기사 정도는 챙겨두도록 한다.

한겨레(07. 07. 14) 우리 안의 이방인, ‘통치’ 아닌 ‘공존’ 필요

“방리유는 명목상으론 프랑스에 포함돼 있으나 실질적으론 각종 권리와 지위 등에서 배제되는, 더 정확하게는 배제를 조건으로 해서만 포함되는 사회적 장소를 지칭하는 유적(類的) 이름이다. 이 역설적 공간에 거주하는 주변인, 소수자, 이방인 등에 대한 포함·배제의 통치술이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첫번째 과제다.”

프랑스를 흔들고 세계를 놀라게 한 2005년 10월 말의 ‘68혁명 이후 최대 소요사태’가 일어난 지 2년 가까이 지난 지금 아주 특별한 ‘현장 보고서’가 한국에서 출간됐다. <공존의 기술-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그린비). “방리유자르(방리유 주민들)에 대한 표상, 치안불안과 그것을 활용하는 권력메커니즘, 여성학적 접근, 새로운 저항형태로서의 재조명, 정책 차원의 비판, 그리고 프랑스 이민역사와 노동시장 및 이민노동” 등 다각적으로 사태의 본질에 접근하는 450쪽짜리의 방대한 보고서다. ‘진짜 전문가’들이 만든 21세기형 ‘대안언론’일 수 있다.

필자는 모두 9명. 그들은 1만대에 가까운 자동차들이 불타고 3천여명이 체포된,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 공화주의의 치부와 민주주의 위기 징후의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태 당시 현장에 있었고 지금도 거기에 있다. 8명은 한국의 프랑스 유학생, 한 명은 에티엔 발리바르 파리10대학, 캘리포니아대 어바인캠퍼스 교수. 지난 11~12일 <공존의 기술> 출간작업을 이끈 이기라(35·파리4대학 정치학·유학 6년차·왼쪽)씨, 양창렬(29·파리1대학 철학·유학 5년차·오른쪽)씨와 통화하고 전자메일로 접속했다.

“우리의 작업은 소요 발생 전인 2005년 초에 이미 시작됐다. 그때 철학공부모임, 재불 사회과학회, 라빌레트 건축학교 한인학생회를 주축으로 재불 유학생단체협의회가 결성됐고, 가장 중요한 연간사업으로 연합학술회의를 기획했다. 이때 채택된 학술행사 주제가 바로 ‘공존의 기술: 포함/배제의 동학’이었다. 다양한 인종 및 국적자들이 모여 사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봉합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른바 ‘시테’(게토, 방리유의 또다른 이름)의 문제를 이방인에 대한 표상과 공간적 배치 등과의 연관 속에서 고찰해 보려 했다.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던 10월 말에 전국적인 소요가 발생했고 이 주제는 현실적으로 더욱 중요성을 갖게 됐다.” “부유하는 이방인의 정체성”을 지닌 그들에게도 사태의 조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완연했던 모양이다.

책을 낸 의도는? “한국에서도 크게 보도됐지만, 저간의 사정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한국에 사건의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진 못했다고 봤다. 그래서 작업을 더 발전시켜 한국에 좀더 풍부한 고민과 논쟁거리들을 던져주자는 생각으로 기획했다.” “때늦은 책일 수 있지만, 한국 상황에서 보면 ‘때이르게’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양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이주 노동자도 40만을 헤아리지 않는가. 배제당하고 싸우는 광범한 비정규직들을 보라.

방리유란? 사전적 의미는 “대도시를 둘러싼 (외곽의) 밀집지역 전체”를 가리키지만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배제를 조건으로 해서만 포함되는” 역설적 공간 방리유 주민 대다수는 2차대전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의 ‘제3기 이민물결’을 탄 프랑스의 옛 식민지 출신들.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마그리브 지역 무슬림과 서부 아프리카 세네갈, 코트디부아르, 말리 출신과 프랑스 국적의 2, 3세 자손들이다. 호경기로 노동력이 부족할 때 환영받았던 그들은 불경기 때마다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 “프랑스를 프랑스인에게!” 따위의 구호들이 상징하는 극우담론 속에 실업 등 모든 불행의 원인 제공자로 낙인찍혔다.

“이민 1, 2세대는 경기침체 뒤 은퇴하거나 실직한 상태고, 3세는 청년실업에 처했으니 거의 유폐된 공간이다. 이들이 모여 살면서 박탈감은 더욱 확산된다. 이전의 아프리카 식민지 도시 하나를 그대로 옮겨 놓은 형국이라 할까?”

지난 20여년간 권력자들은 저항하는 그들을 범죄자로 몰았다. “사회적 갈등 해결에 대한 (자신들의) 정치적 무능력이 낳은 불안, 공포, 두려움 등을 역으로 반대자, 나아가 ‘내부의 적’을 제조해서 그런 정치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했다.” 공화국 보호를 내건 치안담론은 “빈곤, 실업, 불평등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불안요소들을 감추고, 그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들 개인 책임으로.


이민자들은 “이전에 프랑스 노동자와 식민지 대중이 담당했던 최하층 계급의 역할을 떠맡게 됐다. 결국 계급문제가 인종문제와 중첩되면서 문제의 본질이 전이되는 과정을 겪게 된 것이다.” 이민자 문제가 아니라 “내부의 이질적인 자들, 즉 내부의 이방인으로 바라봐야 문제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더 풍성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얘기와 상통한다. 중심부-주변부 관계 해체를 둘러싼 식민지 쟁점과도 겹친다.

그렇다면 ‘공존의 기술’은? “방리유 청년들이 보여준 반란의 형태, 자생적 사회운동, 히잡 착용을 통한 주체성의 정치화 등은 기존 통치방식의 틈새를 벌려 새로운 공존의 기술을 세우기 위한 단초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말로도 바꿔 놓을 수 있다. “궁극적인 사회 안전은 결코 치안강화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자유·평등·박애가 조화를 이루는 진정한 혁명정신의 회복과 사회안전망의 재구축을 통한 온전한 사회통합 없이는 불가능하다.” 공존 아닌 통치 기술은 문제를 심화시킬 뿐이다.(한승동 선임기자)

07. 07. 15.

P.S.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재작년 소요사태 때 누구나 마티유 카소비츠의 영화 <증오>(1995)를 떠올렸을 것이다. '방리유'란 말을 아마도 처음으로, 그리고 대중적으로 우리에게 각인시켜준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왠지 현실이 실제 다큐처럼 찍은 그 영화를 뒤늦게 '모방'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이다. 조금 특이해 보이는 건 저자들이 '공존의 정치' 대신에 '공존의 기술'이란 화두를 고른 것. 하지만 "궁극적인 사회 안전은 결코 치안강화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자유·평등·박애가 조화를 이루는 진정한 혁명정신의 회복과 사회안전망의 재구축을 통한 온전한 사회통합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공존의 기술'보다는 '공존의 정치'에 더 많이 해당하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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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깜짝 눈길을 끈 책은 에드워드 윌슨과 베르트 횔도블러의 <개미 세계영여행>(범양사, 2007)이다. 나는 잠시 '긴장'했었는데, 혹 두 사람의 대작 <개미>가 번역된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확인해보니 <개미들>의 다이제스트판으로 지난 96년에 번역출간된 책 의 개정판이다(그러니까 나도 갖고 있는 책이다. 박스보관도서이긴 하나). 즉, "곤충학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받는 베르트 휠도블러와 에드워드 윌슨의 <개미들>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든책"이며 "개미학 개론서이자 개미에 대한 자신들의 연구 과정을 보다 쉽게 이야기화해서 만든 책"이다. 약간의 아쉬움을 달래면서 문화일보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7. 07. 13) '개미’ 통해 본 인간 세계의 성찰

이 책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책이 아니다. 1996년 같은 내용과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는 책이다. 절판됐던 책이 10여년 만에 그대로 재출간됐는데도, 이렇게 정색하고 지면을 할애하는 것에는 물론 이유가 있다. 개미학 개론서이자, 저자들의 연구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의 탁월함과 감동이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기 때문이다(*96년판은 원서의 표지를 그대로 쓰고 있다).



알려지다시피 저자들은 개미와 사회 생물학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적인 권위자다. 독일 뷔르츠부르크대와 하버드대를 오가며 연구한 베르트 횔도블러나 하버드대 생물학교수인 에드워드 윌슨은, 현존하는 가장 걸출한 과학저술가다.



우선 이들의 공동저작인 ‘개미(The Ants)’는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의해 ‘모든 곤충학 저서 중 가장 훌륭한 책’으로 선정됐을 뿐 아니라, 과학도서로서는 드물게 퓰리처상을 받았다(*지난 1990년에 출간됐고, 746쪽 분량이다). 이들이 체계를 세운 사회생물학은 20세기 생물학뿐 아니라, 인문·사회학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국내에서 학문간의 통섭을 주장하는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도 하버드대에서 에드워드 윌슨에게 배운 학자 중 한 사람이다(*이젠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재천 교수의 <개미제국의 발견>(사이언스북스, 1999)는 다이제스트의 다이제스트 버전이라 할 만하다).



이들의 기념비적인 저작인 ‘개미’가 전문 생물학자를 겨냥한 전문서적이면서, 개미의 백과사전이라면 ‘개미 세계 여행’은 일반인을 위한 책이다. 그렇다고 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처음 대하는 이들에겐 경이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개미에 대한 모든 것이 풍부한 도판과 함께 매력적인 문장으로 펼쳐져 있다.

개미는 우리가 사람 다음으로 흔히 볼 수 있는, 대수롭잖은 생명체다. 그러나 개미만큼 인간과 비슷한 사회 구조를 가진 생물은 어디에도 없다. 고도의 의사소통이 전제돼야 가능한 각종 합동 작전을 비롯해, 군체(群體) 구성원들의 조직화는 복잡하고 긴밀해서 경이에 가깝다. 일개미의 충성은 거의 완벽하다. 개미의 군체간 싸움도 인간의 전쟁보다 더 자주 일어난다. 종에 따라 개미들은 선전, 기만, 고도의 감시, 대규모 공격 따위를 단독이나 연합으로 수행한다.

개미 세계에서 조화와 충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난소를 가진 일개미들은 더러 여왕과 경쟁을 벌이기도 하고, 순위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군체에 대해 몸을 던져 충성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군체 안에서 다른 개체와 투쟁하는 모습이 인간에 다름 아니다.

저자들은 개미에 대한 이같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하는 사소한 관찰에서 시작해 개미라는 개체의 삶과 죽음, 사회 조직, 환경과 세세한 생활, 그리고 성공적인 진화에 이르기까지를 흥미진진한 드라마처럼 풀어나간다. 책을 따라 개미 세계를 여행하다 보면, 독자는 사회의 기생자에서 아이를 기르는 양육자, 군대, 사냥꾼, 건축가들을 만난다.

인간 세계의 또 다른 모습이자, 축소판이다. 사회생물학이라는 학문이 세계를 통틀어 500명 밖에 안되는 개미 연구가 사이에서 체계화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비단 개미 세계를 돌아보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특이한 방법으로 인간 세계를 성찰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김종락기자)

07. 07. 14.

P.S. 저자인 에드워드 윌슨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명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개인적으론 '에드워드 윌슨과 나'(http://blog.aladin.co.kr/mramor/267854)란 제목의 리뷰도 쓴 적이 있는데, 최근 몇 년간 출간된 책들은 다 챙기질 못했다. <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바다출판사, 2005)나 <생명의 미래>(사이언스북스, 2005) 같은 책들이 그렇다.

'에드워드 윌슨'과 '개미'라고 하니까 개인적으론 두 권의 책이 떠오른다. 하나는 '개미'와 관련된 것으로 데이비드 아텐보로의 <생명의 신비>(학원사, 1985)이다. BBC의 자연다큐로도 만들어진 듯한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주우, 1982; 사이언스북스, 2006)와 함께 고등학교 시절 내가 소장하고 있던 '가장 고급스런 교양서'였다. 특히 <생명의 신비>의 경우는 주로 개미에 관한 얘기를 독후감으로 써서 교육감상을 받은 기억이 있다(언젠가 재출간된 걸 본 듯한데 검색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에드워드 윌슨'과 관련해서는 <도덕적 동물>(사이언스북스, 2003)의 저자 로버트 라이트가 쓴 <3인의 과학자와 그들의 신>(정신세계사, 1991). 여기서 3인의 과학자는 에드워드 프레드킨, 에드워드 윌슨, 그리고 케네스 볼딩 세 사람인데, 에드워드 윌슨이란 독특한 과학자에 대해서 처음 접하게 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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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7-14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개미하면 떠오르는게 중학교 때 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인적으로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게 봤던...)이네요/

로쟈 2007-07-14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르베르의 <개미>는 저도 읽었었는데, 그래도 소설보다는 과학책이 더 재미있습니다...

가넷 2007-07-14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든책'이라는데 가격은 그렇게 쉽게 접근할 만하지는 않군요...--;

로쟈 2007-07-15 10:4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이 책 같은 건 사정이 나은 편이죠. 화보도 없는 200여쪽짜리가 만원이 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마늘빵 2007-07-14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빈스키 님과 같이 개미는 중학교 때 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요즘엔 세 권짜리로 나오는거 같던데. 이쁘게 양장본으로. 전 이거 재밌었어요.

로쟈 2007-07-15 10:42   좋아요 0 | URL
베르베르야 그 자신이 놀랄 정도로 한국에서 가장 많이 읽혔으니까요...
 

알라디너라면 알겠지만 페이퍼를 다 마무리하고 등록을 누르자 로그인 화면이 뜨는 것만큼 황당한 일도 없다. '영어 광풍'에 관한 페이퍼와 함께 이 '시베리아'에 관한 페이퍼가 어제 연이어 그렇게 골탕을 먹게 했는데(마음 같아선 '시베리아 유형'을 보내고 싶다!), 홧김에 방치해둘까 하다가 간단히 마무리한다.

시베리아에 관한 책들이 종종 출간된다. 바이칼호 관광을 다녀온 분들이 주변에 드물지 않은 것처럼 시베리아나 시베리아 횡단열차 또한 아주 먼나라 얘기만은 아니게 됐다. 아, 올렉 멘쉬코프 주연의 <러브 오브 시베리아>(원제는 <시베리아의 이발사>) 같은 영화도 대번에 떠올려 볼 수 있겠다. 왠지 친근한 자작나무숲이 지평선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동토의 땅. 유형지. 거기에 요즘엔 석유, 가스 매장지란 이미지가 들러붙은 땅 시베리아에 대한 책이 한권 더 출간됐는데, 이번엔 러시아 정치사 전공자의 저작이라 좀더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저자 인터뷰 기사를 읽어둔다.   

경향신문(07. 07. 14) [이사람]“문화·야생의 인프라 넘쳐납니다”

김창진 성공회대 교수는 2000년부터 매년 한번씩 시베리아에 다녀왔다. 총 7번이다. 올해에도 지인들과 곧 시베리아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매년 찾을 만큼 시베리아는 그에게 매력적이다. 그래서 책도 쓰게 됐다. ‘시베리아 예찬’(이룸). 하지만 단순한 여행서는 아니다. “시베리아를 소재로 근대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적으로 보고자 했다. 시베리아는 자본주의 문명의 대안적 공간이자 상징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김교수가 러시아, 그 속의 시베리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어쩌면 88서울올림픽 때문이다. “냉전으로 80년, 84년 올림픽이 모두 반쪽으로 치러졌습니다. 88올림픽은 오랜만에 전 세계가 참여했죠. 북한과 함께 적대국가로 여겨졌던 (당시) 소련의 선수들이 서울에 와 경기를 하면서 소련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이어져 90년 한국과 소련은 수교했다.

일반인은 방문조차 할 수 없었던 소련 사회에도 틈이 생기면서 모스크바대학 유학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한국정치(현대사)로 국내에서 석사를 마치고 영국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던 그에게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체제라고 자부한 소련이 왜 붕괴하고 있는지 구체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학문적 관심으로 소련을 택했고 91년 모스크바로 갔다. 하지만 그 곳에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에 매료당하게 됐다. 러시아문화였다.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을 하면서 문화예술을 즐기는 건 용납이 안됐죠. 대학 때 세종문화회관 한번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곳곳에서는 고급문화를 일상적으로 즐기고 있었어요.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발레공연을 봤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연을 우리 돈 단돈 몇 백 원으로 볼 수 있었어요.” 모든 인민이 예술을 저렴하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주의 이념 정책으로 예술은 생활 곳곳에 넘쳐났다. 그의 딸이 매일 보던 TV 만화영화도 “그렇게 서정적이고 자연친화적일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것이 96년. 시베리아에 처음 간 것은 한·소 수교 10주년을 기념해 간 2000년도의 연구여행 때였다. 유학 당시에는 돈과 시간이 없어서 가지 못했다고 한다. 유학 시절에는 러시아 문화에 매료당했다면, 시베리아 여행에서는 자연에 감탄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이어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가면서 중간중간에 다섯 개 도시에서 내렸습니다. 공장, 농장 등에 들러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변해가는 모습을 현장조사했어요. 17박18일 동안 이어진 일정에서 바이칼호수 등 시베리아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됐습니다.”

그가 꼽는 장소는 알혼섬. “바이칼호수의 진면목을 보려면 호수 안에 있는 알혼섬에 가 봐야 합니다. 정답고 아름다운 풀밭, 바다 같은 호수, 원주민의 성소. 그 속에 있으면 도시생활의 각박함에서 벗어나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돌아볼 수 있고, 우주에 대해 성찰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부족한 문화 인프라, 자연친화적·영적인 환경 등을 갖고 있기에 러시아, 또 시베리아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김교수는 강조한다. 책의 부제가 ‘야생의 숲, 문명의 영혼’인 이유다. 그는 “러시아라고 하면 ‘마피아’나 ‘가난한 나라’를 떠올리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책은 시베리아의 자연·사람·문학·사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임영주 기자)

07. 07. 14.

P.S. 시베리아 하면 또 떠오로는 책은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에프의 <데르수 우잘라>(갈라파고스, 2005)이다(관련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897491). 사둔 지는 꽤 됐지만 읽을 짬을 못내고 있는 책인데 당장 시베리아로 '피서'를 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닌 김에 관련서들과 함께 그냥 미친 척하고 한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베리아가 좀더 실감나지 않을까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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