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창 읽기를 위한 리스트. 물론 일차적인 건 그의 전집과 대담이며, 그밖에 여러 김우창론들을 참조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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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과 사유- 김우창과의 대화
김우창 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7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07년 07월 21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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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집. 모든 주제에 대한 사유의 윤곽을 육성으로 들어볼 수 있다.
자유와 인간적인 삶
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7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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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장 최근의 관심사들에 대한 사색.
풍경과 마음
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2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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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우창 인문학의 깊이.
시대의 흐름에 서서- 김우창 시평집
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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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칼럼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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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7-21 02:03   좋아요 0 | URL
<풍경과 마음>은 2003년에 초판이 나왔을 때ㅡ사실 이 초판의 표지 디자인이 현재의 총서 판본 디자인보다 더 멋지다는 생각인데요^^ㅡ구입해 탐독하면서, 김우창 선생이 어떤 초탈하면서도 허허로운 경지에 살짝 이르셨다는 생각이 들어, 슬쩍 경외감이 일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역시나 감사. 로쟈님의 리스트를 보니 솔출판사에서 1996년 보급판으로 간행되었던 <심미적 이성의 탐구>가 빠져 있는 듯 한데, 이 책은 요즘은 아마도 절판이겠죠? 오랜만에 상기된 기억의 힘을 빌어 서가에서 책을 꺼내 다시 한 번 탐독ㅡ탐욕스럽게 독서ㅡ해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7-21 02:07   좋아요 0 | URL
네, <심미적 이성의 탐구>는 이미지도 뜨지 않습니다.--;

심승보 2007-10-27 00:42   좋아요 0 | URL
김우창도 후학이 반드시 거쳐가야 할 관문이지만, 앞으로 50년 100년 그 이상 갈 수 있는 건 바로 조동일 입니다. 공부다운 공부를 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근 계명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오고 있는 <세계,지방화 시대의 한국학> 1-6권을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7-10-27 00:48   좋아요 0 | URL
심승보님이 먼저 자세하게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심승보 2007-10-28 01:47   좋아요 0 | URL
www.agora.co.kr (서강 아고라)에서 '지성적 책읽기' 코너에 제가 김영건 선생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조동일 교수님의 홈페이지도 언제나 열려 있는 공간이니 많은 분들의 참여가 있었으면 합니다. http://chodongil.x-y.net/ 이 곳에서 업적목록을 잠시 개괄해 본다면 그 분의 학문이 어떤 자취를 그리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조동일로 들어서는 추천도서는 기본적으로 <우리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이 땅에서 학문하기>, 좀 더 찐한 속살을 원할 경우 <세계문학사의 허실> <카타르시스, 라사, 신명풀이>, <동아시아문학사비교론>, <하나이면서 여럿인 동아시아문학>, <공동문어문학과 민족어문학>, <문명권의 동질성과 이질성>, <한국의 문학사와 철학사>, <철학사와 문학사 둘인가 하나인가> 등을 우선 꼽을 수 있겠습니다. 로쟈님은 조동일 교수의 학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궁금합니다. 혹시 아직 별 관심이 없으셨다면, 이번 기회에 한번쯤 꼭 일별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로쟈 2007-10-28 10:33   좋아요 0 | URL
몇몇 책들은 저도 읽은 것이구요(제가 더 많이 읽은 건 보다 젊은 시절의 저작들입니다). 제 관심사가 '거시적'이지 않아서 조동일 선생의 학문을 다 따라가지 못합니다. 보다 관심있는 분들이 글을 올려주시면 홍보가 되겠습니다...

심승보 2007-10-28 23:34   좋아요 0 | URL
네, 이른 시기의 조동일이라면 아무래도 그 번지수가 <한국소설의 이론> <문학연구방법> <한국문학사상사시론>의 초기3부작 부근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넓혀 잡자면 정문연 시절의 <한국문학통사> 태동기 정도까지 볼 수 있을 듯 싶군요. 이 때까지의 저작도 물론 훌륭하지만, 조동일이 본격적으로 국문학자의 범주를 박차고 나간 90년대 이후의 작업들에 전 훨씬 더 큰 의의를 부여하는 쪽입니다. 그 쪽의 매우 풍성한 연구성과들이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평가받고 논의되지 못하는 것은 정말 크나큰 불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꼭 한번 최근의 저작들을 관심있게 읽어주시길 개인적으로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7-10-28 23:51   좋아요 0 | URL
국문학 전공자라면 필독서로 다들 읽는 책들일 텐데,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하신 건 의외입니다. '학술서' 범주로 수용된 탓이 아닐까요? <우리학문이 길> 같은 책은 큰 반향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본적으론 제가 조동일 교수의 '세계문학사'론 같은 거시담론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하기에 관심을 덜 갖는 면이 있습니다. 저보다 더 공감하시는 분들이 후속 작업을 열심히 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심승보 2007-10-29 00:57   좋아요 0 | URL
우선 로쟈님 말씀의 초점이 다소 명료하지 못한 듯 싶습니다. '국문학 전공자라면 다들 필독서로 읽는 책'이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시는 지 우선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제 입장을 좀 더 분명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조동일은 분명 국문학 전공자라면 '다들' 읽게 되는,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럴 수 밖에 없는, 교과서적 권위를 지닌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국문학도 뿐 아니라 그 어떤 전공자들도 거의 읽지 않는 책들 또한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 한쪽 그늘, 굳이 퍼센티지로 따지자면 그의 총저작물의 거의 7-80%를 족히 육박하는 거대한 그늘에 대해 지적한 것입니다. 그것이 안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간단한 부연 설명을 덧붙여 보겠습니다. 우선 <한국문학통사> 정도는 우리나라의 국문과 대다수가 교과서로 택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컨대 자타 공인의 국문학과 필독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문학 전공자에게 말 그대로 읽힙니다. 막상 그 다섯권을 다 읽어 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편의 의구심이 또 한번 솟구치지만, 어쨌든 제목은 아는 사람 참 많습니다. 그리고 말씀해 주신 대로 <우리 학문의 길>은 그나마 사정이 좀 괜찮습니다. 인지도가 꽤 되고, 제목의 도발성 덕인지 어느 정도 사회적 반향도 있었습니다. (그래 봤자 93년에 나온 책이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 290을 달리고 있습니다. 한편 2004년에 번역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어느새 3400포인트를 넘어섰습니다. ) 그럼 '통사'와 '우리학문의 길' 2권을 제한, 다른 책을 가지고 한번 이야기를 해 본다면 다음으로 어떤 책을 꼽을 수 있을까요. 공저까지 합하면 총 70권이 넘는 그의 저작 중에 기껏 10권도, 아니 아마 5권이라 해도 별반 차이는 없는 게 현실입니다, 제대로 책 제목을 아는 사람이 없다면 과연 그 사상가가 제대로 논의되고 있는 형편인 건지 의문입니다.

로쟈 2007-10-29 01:22   좋아요 0 | URL
안타까워하실 만하지만 안 읽히고 있는 책들로 말하자면 조동일 교수의 책들만은 아니지요. 너무 방대한 분량과 체계가 전공자들을 포함한 독자들의 접근을 가로막는 것일 수도 있겠구요. '학술서' 범주라고 말씀드렸는데, '학문적 업적'으로서 탁월한 성취를 이룩한 학자라는 건 다들 인정하지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한다는 건 무리한 요구가 아닐까요? 일반 독자들이 아니라 '학자들'이 읽고서 논쟁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서재는 제 취향과 관심을 반영할 수밖에 없지만 '학술적' 성격의 논의는 가급적 배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심승보 2007-10-29 01:23   좋아요 0 | URL
참고로, 제가 우리 학계 전반 또는 대학원생, 학부생들에게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아예 읽혀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안타까운 책들을 구체적으로 밝혀보겠습니다.

<동아시아문학사비교론> <제3세계문학연구입문>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세계문학사의 허실> <인문학문의 사명> <카타르시스, 라사, 신명풀이> <동아시아 구비서사시의 양상과 변천>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 1-3> <하나이면서 여럿인 동아시아문학> <공동문어문학과 민족어문학> <문명권의 동질성과 이질성> <세계문학사의 전개>

솔직히 이 중 대다수의 저서는 이미 국내 학계가 수용할 수 있는 주파수를 넘어간 것들입니다. 아마 그것이 제가 안타까워 하는 이유의 가장 큰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승보 2007-10-29 01:30   좋아요 0 | URL
네, 로쟈님 말씀도 맞는 것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남의 안락한 서재에 와서 훼방을 놓은 것 같아 한편 죄송합니다. 혹시나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와 <탐구>들 또한 전형적인 최전선의 이론서, 학술서들 아닌가요. 또한 그러한 어려운 책들을 철학전공자들만 읽는 게 아님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조동일의 책이라고 해서 뭐 그렇게 학술적이라는 이유로 읽혀서 안 될 이유는 없지 않은가요. 로쟈님 말씀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그런 고집이 생깁니다. ^^;

로쟈 2007-10-29 02:31   좋아요 0 | URL
들뢰즈의 독자들이 유행을 타서 좀 많긴 하지만 <그라마톨로지>나 <탐구>를 몇 명이나 읽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냥 들뢰즈 정도가 예외라고 해야겠지요...
 
행동과 사유 - 김우창과의 대화
김우창 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7월
품절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내 마음속에 늘 있었던 것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영문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영문학을 이 질문을 통해서 바라보아온 것이 나의 독특한 문제의식이라면 문제의식이 아닌가 합니다. 영문학은 한국의 전통과 관련이 없고, 우리의 삶의 급박성과도 관련이 없고, 또 어떻게 보면 제국주의적 질서 안에서의 힘의 불균형에서 생겨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 영문학을 하는가 하는 질문이 다른 많은 걸 생각하게 하고 읽고 쓰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16-17쪽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 그리고 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명하게 의식하지는 아니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던 질문들은 철학적인 것들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정치학에서) 문과나 철학으로 바꾸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학에서는 외국문학이 국문학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그래서 영문과를 택하게 되었지요.-18쪽

내가 서울대에 들어간 해에 서울대에 제일 많이 진학한 고등학교가 광주고등학교였어요. 왜 그랬느냐 하면, 서울 사람들, 경상도 사람들은 후퇴하고 전쟁하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광주는 그런 혼란과 고통은 없고 비교적 평화스러웠거든요. 그때 서정주 선생도 조선대학에 와 있었고, 우리 고등학교 선생 중에도 서울대 박홍규 교수가 와서 가르쳤는데, 우리 3학년 담임으로는 이후에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가 되신 나종일 선생이 계셨지요.-22쪽

우리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나 대학에 다닐 때에는 책이 많았어요. 학교 공부는 적고 책은 많은 때였습니다.(...)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질문은 내가 흔히 받는 질문인데, 나한텐 독일 철학과 독문학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반드시 영향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고 또 그 무렵에 그것을 많이 공부했기 때문은 아니지만, 독일의 관념철학 또는 이상주의, 서양어로는 결국 같은 말이 되는데, 그것에 대하여 늘 친화감을 가져왔던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23-24쪽

헌책방 얘기를 하였지만, 어떤 미국사람이 "아이들은 책 많은 환경에 두면 호기심 때문에 책을 보게 되는 것이니 학생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할 필요가 없다"라고 했죠. 우리도 길바닥에 책이 많으니까 저절로 보게 된 거죠. 그리고 오늘날처럼 산업화, 능률화된 사회가 아니라서 책방 주인이 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책방 주인하고 이야기를 많이 했죠. -24쪽

손창섭이나 장용학, 이범선의 소설을 대학교 다닐 때 보고 비참함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년 전에 다시 보니까 그 시대가 '얼마나 인간적인 시대냐'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직장에서 잘려 먹을 것도 없는데 의사인 친구의 치과 사무실에 나가 아침부터 앉아 있다가 의사가 점심 먹으러 가면 따라가서 먹는 얘기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능률화되고 경영 합리화가 되어 있는 치과에 가서 그러기 힘들죠. 대학 입학 시험에서도 가령 독일어 시험문제 같은 것은 등사된 것이었는데, 출제 교수가 직접 나와서 읽고 설명하고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허술하다고 할까, 인간적이랄까 그런 면도 있었지요. -28-29쪽

가장 중요했던 건 자유로웠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대학에서도 그러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도 많지 않고 요구도 적으니까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40년째 가르치면서 출석 점검을 별로 하지 않았어요. -33쪽

대학 시절 그리고 그 후에도 사르트르, 키르케고르, 하이데거가 유행했는데, 김동리 선생까지 실존주의를 논했으니까 전쟁과 관계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실존철학은 내게 중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돌아보건대, 단순화하여 말하기는 어렵지만, 하이데거는 나에게 추상적 관념이나 체계 또는 이데올로기로써 단순화될 수 없는 세계의 현존에 대한 느낌을 심어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공리적인 조작, 과학기술적인 조작은 물론이고 관념으로 운산으로 조작되지 않는 신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그에게 있습니다. 사르트르하면 실존, 자유, 책임, 현실참여 등등을 그의 주된 개념들로 생각할 수 있지만, 되돌아보건대,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인간의 주체적 자유에 대한 독특한 이해, 독일의 관념철학에 연유하면서도 그가 살았던 현실 속에서 특히 강조하게 된 주제척 자유에 대한 이해가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41-42쪽

전라도 사람이라고 해서 대학 입학하고 취직하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하는 데 문제가 있었으면 몰라도 인생에서 전라도 사람이냐 경삼도 사람이냐에 따른 중요한 고비나 계기에 부딪히지 않았기 대문에, 편한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여전히 전라도 사람이라는 범주가 중요한 사회적-구조적 범주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민주적이고 평등한 질서의 확보라는 보다 일반적 과제의 수행으로써 해결되지 않을 문제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50-51쪽

모든 사람이 작은 개체에 불과하고 또 그 개체가 주어진 사회의 조건에 의하여 현실적으로 또 지적으로 제한된다는 것을 반성하는 것은 바로 보다 큰 보편적 진리로 나아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이지만, 그러한 제한 조건이 모든 정당성의 기준에서의 사실 인식을 불가능하게 한다면, 비판 자체도 부정되는 것이죠.(...) 실존적 상황에 의하여 생각이 제한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입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사회 내의 의사소통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적인 작업은 자기 변명과 자기 이익의 옹호를 위한 수단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정치 기획 그리고 노동자가 아닌 지식인으로서의 마르크스의 관계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되지요.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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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7-21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4년에 이 책이 <사유의 공간>과 함께 출간되었을 때 바로 구입해 탐독하면서 김우창 선생의 학문 세계에 새삼스레 탄복하고 감복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오랜만에 기억을 상기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07-07-21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책으로채우리 2009-12-01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인터넷 기사를 읽다 알라딘 가입에 이어 이 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예쓰모모 서점만 줄곧 이용하다 알라딘에 발을 붙이려니 낯설 달까요..여긴 방문객이 이렇게 많은 블로그도 있구나 싶고..암튼 책 선택에 편식증이 있는 저에게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행동과 사유가 눈에 띄어서 클릭했어요..왜인지 읽고 싶어집니다. 읽고 나면 유식해질 것 같은 느낌까지 드는데..ㅎ 품절이네요........ ㅡㅡ; 예쓰모모로 가야하나여.....ㅎ여하간 꼭 읽어보겠어요.그런데,로쟈님의 모습은 검정티 청바지 저 모습이신가요. 설마.......어떤 유명한 작가나 석학은 아니겠지요..전 모르게는게 많아요.아.궁금해.
 

최근 중국 소설들이 대거 번역/소개되고 있지만 중국 관련서들 또한 쏟아지고 있고, 그 중에는 눈독을 들일 만한 책들도 많다(내가 중국 전공자가 아닌 게 다행이다 싶다). 생소한 저자인 줄리아 로벨의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07) 또한 만만찮은 분량이긴 하나 탐나는 책이다. '문명과 야만으로 본 중국사 3천 년'이 부제인데, 원제는 말 그대로 '만리장성(The Great Wall)'이고 작년에 나온 책이다. 아래 리뷰기사를 읽다 보니 손에 집어들지 않고는 못배기겠다. 러시아사도 이런 책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문화일보(07. 07. 20) 신화의 덧칠 아래… 보라, 중국의 오만을

‘만리장성(萬里長城·the Great Wall)’. 흔히 2000년 전 진 시황 때 축조됐다고 알려진 성벽, 장성을 둘러싼 신화는 많고도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은 1893년 작가 로버트 리플리가 퍼뜨린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조물”이라는 말이리라. 여기서 한발 나아가 조지프 니덤은 중국의 과학·기술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술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화성의 천문학자들이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업적”이라고까지 호들갑을 떨었다.

작가와 학자들이 이렇게 나서니 허풍이 전문인 정치가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장성에 가보지 못한 사람은 대장부가 아니다.” 1935년 장제스에게 쫓기던 마오쩌둥(毛澤東)이 공산혁명가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보낸 호소문 중 일부다. 이로부터 약 40년 뒤 죽의 장막을 헤치고, 중국의 만리장성을 찾은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화답했다. “장성은 위대한 성벽이며, 위대한 민족이라야 이런 것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만리장성을 둘러싼 이런 호들갑을 증폭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와 정반대다. 장성을 둘러싼 신화의 지층을 벗겨내고, 장성이라는 거대한 메타포로 중국을 제대로 읽으려는 것이 목표다. 신화 벗겨내기는 여러 가지 방향에서 진행된다.

우선 과녁은 ‘위대한’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허세적 분위기다. 만리장성에 부여된 최초의 신화는 그것이 수천년 전부터 하나로 건설되었다는 것이나, 그것부터가 오해라는 것이다. 이르게는 기원전 1000년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왕조들이 여러 곳에 ‘하나로 이어지지 않은’ 성벽을 건설했으나 그 대부분은 사라지고 없다. 오늘날 수백만의 관광객이 찾는 베이징 북쪽의 말끔한 성벽은 20세기 후반 공산주의 노동력으로 복원되고 단장된 것일 뿐이다.

책의 더 큰 목표는 이런 물질로 된 장성의 허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표상으로서의 장성이다. 후대의 역사적 낭만주의자에 의해 은폐된 성벽을 제대로 살피며 중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읽어내자는 것이다. 장성을 뒤덮은 신화의 지층만 제대로 벗겨내면, 사실 그 성벽은 중국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완벽한 표지다.

책의 처음은 ‘왜 성벽을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중국인들의 전형적인 답은 흉노·몽골·만주·훈 족 등으로부터 변경을 지키기 위한 방어목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장성의 역사와 흔적을 살피며, 장성의 축조 목적이 방어가 아니라 영토 획득이라고 말한다. 방어가 목적이라면 자국의 거주지를 수천리나 벗어난 곳의 사막을 가로지르며, 장벽을 건설할 필요가 없었다.

저자가 성벽이란 창을 통해 읽으려는 보다 근원적인 것은 성벽 축조의 근저에 깔린 중국인의 정체성과 세계관이다. 기원전 2000~1000년대에 이르는 동안, 중국인들은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잡고, 다른 민족을 벌레나 ‘날짐승이나 길짐승’(금수·禽獸)으로 보는 뻔뻔스러운 세계관을 완성한다. 중국인이 아닌 민족은 ‘외양은 인간이지만, 내면은 짐승인 종족’, 혹은 ‘관용을 베풀 필요가 없는 늑대’일 뿐이었다.

요컨대 성벽은 더불어 상종할 수 없는 이민족들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책은 춘추전국 시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왕조와 시기에 걸쳐 중국을 관통한 호전적인 외국인 혐오증과 문화적 우월주의와 패쇄성을, 장성이란 표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문제는 중국의 이런 노력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목민이 강성할 때마다 장성은 유린됐고, 때로 유목민들은 중국의 한복판에 그들의 제국을 세웠다. 그럼에도 중국의 역대 왕조는 성벽 건설과 유지에 계속 매달렸다. 그때마다 죽어난 것은 성벽 건설에 동원된 민중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저자는 이를 단순히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어리석은 왕조의 탓으로만 돌리지는 않는다. 그 전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장성을 쑨원(孫文), 마오쩌둥 등의 지도자들이 되살려내는 것을 보며 이런 의구심은 더욱 깊어진다. 말하자면 장성으로 은유되는 중국의 호전적 외국인 혐오증과 우월주의, 패쇄성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중국 정부가 인터넷 공간에 세우는 방화벽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앞으로의 중국을 어떻게 볼까.

‘중국이 설령 180도 변신해 서구식의 개방적 민주자유국가가 된다고 해도, 그들은 수천년 묵은 행동 양식을 포기하거나 정치적, 문화적 독자성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또는 밀물처럼 들어오는 방문객들을 감시하는 수단인 심리적·물리적 축출과 엄격한 국경 통제라는 노선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그들의 역사와 역사 지식이 너무 많다.’



이렇게 정리하면 책의 문제제기와 결론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러나 책에서 저자가 드러내는 해박함과 이야기 솜씨는 눈을 비비게 하기에 충분하다. 책을 읽다 자주 저자 프로필에 눈이 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줄리아 로벨, 영국에서 태어난 저자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중국사로 학위를 받은 뒤 중국사와 중국문학을 가르쳤단다. 한동안 중국에 살다 케임브리지 퀸스칼리지의 연구원으로 있다는 젊고 가냘픈 미모의 여성이 이 정도의 책을 쓴 것은 정말 뜻밖이다.

번역도 재창작에 가까울 정도로 공을 들였다. 책에 나오는 수많은 지명과 인명을 우리에게 익숙한 한자명으로 옮긴 것부터가 그렇다. 한시를 옮기며 영어 원서에서 중국어 원문과 맛이 달라진 부분도 일일이 원문을 기준으로 고쳤다. 책이 최근 쏟아지는 중국 관련 책 가운데 빼어난 봉우리가 된 것에는 저자의 역량 못지 않게 번역자의 공이 큰 것으로 보인다.(김종락기자)

07. 07. 20.

P.S. 최근에 나온 중국사 관련서로 두 권을 더 거명하고 싶다. 먼저 이중텐의 <제국의 슬픔>(에버리치홀딩스, 2007). 이중텐은 <삼국지 강의>(김영사, 2007)로 중국 관련서쪽으로는 올해 가장 유명해진 저자라 할 만한데(중국에서도 '역사 대중화'로 유명하다고), 이 책에서는 "전제주의 지배하의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알력 다툼과 음모, 비리들이 낱낱이 공개되는 한편, 정치 활동의 주체인 정치인, 지식인들의 이중적 삶과 애환, 갈등, 숙명 등을 지은이 특유의 필치로 드러낸다" 한다. 일독의 가치가 있어 보인다.

두번째는 앞의 두 책에 비하면 좀 얄팍한데 국내 필자들이 쓴 <아틀라스 중국사>(사계절출판사, 2007). 경향신문의 간략한 소개에 따르면, "약 1만여년 전 고대 신석기 문명의 탄생부터 20세기말 개혁·개방에 이르기까지를 다룬 책은 중국 시대사별 전문가 5명이 3년여 동안 매달려 만든 중국사 개설서다. 중국사를 시대별로 96개의 주제로 엮었으며, 저자들 각자의 역사관을 투영하면서도 통사적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양면에 걸쳐 한 주제씩이 펼쳐지는 책은 입체적인 역사지도를 중심으로 텍스트와 연표, 다이어그램, 사진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정리되고 압축된 텍스트와 도판은 사전의 역할도 가능할 듯하다." 그러니까 일종의 역사부도이다.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와 <제국의 슬픔>을 읽다가 그때그때 참조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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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교수의 신작 <자유와 인간적인 삶>(생각의나무)과 함께 내가 이번주에 장바구니에 넣은 책은 '21세기 새로운 담론코드'란 부제를 달고 나온 위잉스 교수의 <동양적 가치의 재발견>(동아시아, 2007)이다. 이 책 또한 200쪽이 안되는 분량이어서 만만하다는 장점이 있다. 타이틀 자체는 흥미를 끌지 않지만(이 또한 유행을 탔던 제목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저자는 눈길을 끈다.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 3개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2006년 인문학 분야에서 독보적 업적을 쌓은 사람에게 수여하는 인문학의 노벨상인 ‘클러지(Kluge)상’을 수상해 그 학문적 권위를 공인받았다. 동서고금을 망라하는 폭넓은 지적 식견으로 동양과 서양에서 고루 사랑을 받는 대석학"이라고 하니까 말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한번 들어볼 용의는 생기는 것이다(찾아보니 레이 황의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이산, 2001)의 서문을 위잉스가 썼다). 리뷰기사를 하나 미리 읽어둔다.

경향신문(07. 07. 21) 진보적 서양문명의 충격 흡수

동양적 가치’는 지난 세기부터 서구 문명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담론과 함께 언제나 돌파구로 얘기되어 온 다소 진부한 화두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동양적 가치가 무엇이라고 자신있게 규정하기는 쉽지 않으며 여전히 많은 논자들이 거론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중국 출신 역사학자로 현재 미국 프린스턴대 명예교수로 있는 이 책의 저자는 이 논의에 대한 권위자다. “5·4운동 이래 있었던 중국 내 모든 문화 논쟁은 서구 현대문화가 동양의 전통문화에 준 충격과 도전”이라고 보는 그는 1983년 강연을 바탕으로 쓴 이 책에서 중국 고전에 나타난 가치체계를 중심으로 동양적 가치의 현대적 의미를 풀어낸다. 우선 서양적 개념인 ‘진보’의 한계를 지적하며 ‘대학(大學)’ 1장의 구절을 인용하는 부분이 눈길을 끈다.

“그칠 곳을 알아야 마음이 정해지고, 마음이 정해져야 마음이 고요해지며, 마음이 고요해져야 편안해지며, 편안해진 뒤에야 사려할 수 있고,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고(慮), 원하는 바를 얻기(得) 위해서는 ‘그침(止)’ ‘정함(定)’ ‘고요함(靜)’ ‘편안함(安)’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 과정들이 개인의 심리상태를 가리키는 말이긴 하지만 동양문화의 일반적 현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프랑스혁명 이래 서양 근대의 핵심 키워드가 된 ‘진보’ 개념에서 보자면 편안함, 정함, 고요함, 그침 등에서는 당연히 취할 것이 하나도 없다. 헤겔이 중국 문화를 무시한 중요한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이 예부터 진보한 적이 없다는 점이었고, 5·4운동 이후 중국 지식인들의 자아비판 역시 이런 생각에 바탕해 있었다.

이에 저자는 “오늘날 서양의 위기는 동적이면서 정적이지 못하고, 발전은 있지만 그침이 없고, 부유하지만 편안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안정됨이 없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럴 때 동양적 가치는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 같은 서양문명에 대한 ‘충격 흡수기’다.

그러면 동양적 가치는 그 자체로 완전한가. 저자는 동양인들의 현대생활은 이미 서양문화 없이 성립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일부 분야에서는 동양이 반드시 ‘서구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다만 “전반적으로 동양의 가치체계는 근대화 및 탈근대의 도전을 견뎌낼 수 있었으며 앞으로도 자신의 존재 근거를 상실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특히 그는 동양적 가치가 민주주의와 친연성이 없었다는 점을 아쉬워 한다. 하지만 박식한 중국 고전 지식 속에서 동양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모든 사람은 요순이 될 수 있다”(人皆可以爲堯舜)는 ‘맹자’의 내용이나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성인이다”(滿街皆是聖人)는 평등의식, “자기 자신부터 인(仁)하게 되는”(爲仁由己)이라는 ‘논어’의 내용 등이 그것이다. 그는 동양 민주주의의 정신적 원천으로 현대적으로 법률제도화돼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봤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동양 민주주의를 위해 몇몇 요소를 제공하기에 족한 중요한 보증수표”라는 것이다.

그 실례를 그는 싱가포르에서 찾는다. 책의 곳곳에서 저자는 싱가포르를 이상적인 사례로 보고 있다. 싱가포르라는 나라를 이루는 주체들은 중국 본토에 사는 중국인들과 다를 바 없지만 이들은 영국법 체계를 들여와 성공적으로 정착시켰으며, 싱가포르에서 제창되고 있는 ‘유가 윤리’는 정치를 인륜질서에서 분리해낼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보았다.

저자는 서구문화와 동양문화의 차이를 초월세계와 현상세계의 관계를 통해 규명한다. 초월세계, 신의 영역, 이데아의 세계, 이상과 현실세계, 인간의 세계, 경험세계가 분리되거나 끝없는 긴장관계에 있는 문화가 서구문화이며, 초월세계와 현상세계가 융합적이고 연결돼 있는 문화가 동양문화라고 보았다. 이는 각각 ‘외재 초월형 문화’ ‘내향 초월형 문화’로 개념화됐다. 이 책의 원제는 ‘가치체계로 본 중국문화의 현대적 의의’로 저자가 1983년 강연했던 것을 3년 뒤 증보하여 책으로 낸 것이다. 저자의 책이 한국에 번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손제민기자)

07. 07. 20.

P.S. 기사를 읽다 보니까 지난주에 나온 책 <진보의 역설>(에코리브르, 2007)이 떠오른다. 이건 부피가 좀 되는 책이지만 서구식 진보의 한계를 짚어본다는 의미에서 같이 읽어볼 수도 있겠다. 역시나 경향신문의 리뷰기사를 읽어본다.

경향신문(07. 07. 14) 100년 전보다 잘사는데 왜 우리는 우울할까요

‘진보의 역설’이란 제목만 보면 진보 비판서쯤으로 착각하기 쉽다. 실제로 총 415쪽 가운데 100쪽을 읽는 동안 한 보수주의자의 진보이데올로기 비판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현실낙관론과 그 사례들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여기에다 서로 다른 목적으로 자기 나라 때리기에 여념이 없는 미국과 유럽 지식인들이나 시민단체, 정치인들에 대한 공격이 이어지는 걸 보면 책을 잘못 집어든 게 아닐까 하는 염려가 잠시 밀려든다. 그렇지만 이는 반전(反轉)을 노리는 전술이다.

핵심은 ‘우리는 왜 더 잘 살게 되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가’라고 묻는 부제가 웅변한다. 그렇다고 단순 행복론이나 긍정 심리학 전도서라고만 치부하기도 어렵다. 그걸 다루지만 다양한 식단이 함께 짜여 있기 때문이다. 언론인이자 학자인 저자 그레그 이스터브룩은 머리말의 들머리에서 400년 전에 살았던 우리의 고조부모가 오늘날 미국에 나타났다고 가정해 보자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나간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평가하는 미국인의 비율이 1950년대 이후 한치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전제한다. 그 기간 동안 실질소득이 두 배 이상 증가했음에도 그렇다는 것이다. 근본 원인은 번영과 행복 사이의 단절이다. 평균적인 미국인과 유럽인은 여태까지 살았던 인류의 99퍼센트보다 더 잘 살 뿐만 아니라 역사에 기록된 대부분의 왕족보다도 더 화려하게 사는 데도 그렇다.

반면 미국과 유럽에서 단극성 우울증 환자가 50년 전보다 10배나 더 많아졌다는 통계적 사실에 저자는 먼저 우울해 한다. 그리고 나선 풍요와 자유가 넘쳐나는 데도 우울증과 회의주의가 만연하는 현실은 불평하기 좋아하는 인간 본성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서구 제도의 두 가지 심각한 결함으로 모든 사람이 지나치게 많이 사서 소비한다는 점과 부유층의 극단적인 탐욕을 든다.

그는 생활이 윤택해지는 데도 더 나빠진다고 느끼는 이유로 몇 가지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다. 선택 불안, 풍요 부정, 붕괴 불안, 충족된 기대의 혁명 등이 그것이다. 선택 불안은 사회적 힘에 구속된 나머지 선택해야 할 것이 지나치게 많아 선택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 되는 상황이다. 풍요 부정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교묘한 정신적 논리를 꾸며내고 그렇게 믿음으로써 스스로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붕괴 불안은 경제 불황, 환경 오염, 자원 고갈, 테러리즘, 인구 증가 등으로 인해 세상이 붕괴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현재의 풍요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현상이다. 충족된 기대의 혁명은 꿈꾸고 간절히 원했던 것들을 실제로 얻게 된 현실에 동반되는 불안한 감정을 뜻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현재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앞으로 주변환경과 소득이 얼마나 좋아질 것이냐를 근거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최근의 심리학 연구 주제인 긍정심리학 분야에 상당 분량을 할애한다. 특히 ‘용서’와 ‘감사’가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적 폭넓고 밀도 있게 조명하고 있다. 용서하고 감사하며 낙천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상대방보다 ‘자신에게 유익하다’는 게 요체다. 이타적인 행동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긴요하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예화로 든 ‘용서’는 올해 칸 영화제에서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밀양’에서 다루는 바로 그 ‘용서’만큼이나 충격적인 구조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유학을 가 반(反)인종분리정책 운동을 돕던 딸을 죽인 두 흑인 청년들을 용서하는 미국 백인 부부의 얘기가 줄거리다. 자식을 살해한 범인을 용서한 뒤 부부는 더욱 행복하고 큰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용서하고 감사하는 태도가 분노하는 것보다 훨씬 이롭다는 점을 증명하는 연구 결과는 살을 빼는 게 건강에 좋다는 논문처럼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용서가 말로는 쉽지만 실천으로 옮기기는 힘든 걸 부인할 수 없다. 용서를 잘하는 사람은 우울증에 덜 걸리고 더 훌륭한 사회후원자를 얻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도 소개하고 있다.

저자의 행복에 대한 관심 영역은 개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인류 전체의 행복론으로 이어진다. 한때 세계적으로 추앙받았던 잭 웰치 전 GE 회장을 비롯한 최고경영자(CEO)들의 탐욕과 부도덕을 생생하고 예리하게 파헤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책무)’가 인류 전체의 행복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역설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저개발국의 빈곤 참상의 해결책도 나름의 방식으로 제안한다.

유토피아에서조차 사람들은 행복을 말하기보다 여전히 불평하려들겠지만 그것이 유토피아로 더 가까이 가려는 노력을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저자는 결론 삼아 강조한다. 우리가 긍정적 자세를 갖더라도 빈곤, 온실가스 등 전지구적 문제를 쉽게 풀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나 그런 노력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읽고 나서 명실이 상부하지 않아 허탈감이 드는 책이 적지 않지만, 이 책은 돈과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 같다. 다양한 이론과 예화, 오밀조밀한 지식이 짜임새 있게 교직돼 있어서다. 취향에 따라 다를 수야 있겠지만 웬만한 독자라면 ‘마음의 양식’으로 한번쯤 포만감을 느낄 듯하다.(김학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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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는 왜 더 잘살게 되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가?
    from Next Key 2009-08-04 18:24 
    진보의 역설 저자 그레그 이스터브룩 지음 | 박정숙 옮김 출판사 에코리브르 펴냄 | 2007.07.15 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진보의 역설』은 현대 문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원하는 행복을 얻...

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몇 권 정도는 눈길을 끄는데, 그 중 하나는 김우창 교수의 신작 <자유와 인간적인 삶>(생각의나무, 2007)이다. 요즘 읽고 있는 <풍경과 마음>(생각의나무, 2006)에 바로 이어지는 책이다. 실물은 어제 구내서점에서 보았는데, 200쪽이 안되는 얇은 분량의 책을 굳이 하드카바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책이 고급한 장서용이라기보다는 보다 저렴한 보급용으로 읽힐 수는 없는 것일까? 한겨레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7. 21) "비판적 공동체 꾸려 살며 자기 자유 제대로 써야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인문학자인 김우창(사진) 고려대 명예교수는 새로 펴낸 책 <자유와 인간적인 삶>(생각의 나무)에서 ‘자유를 기초로 한 인간적인 삶’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가치를 결여한 신자유주의적 삶이나 가치를 강요하는 마르크시즘도 그에겐 대안이 아니다.

그는 생각하는 사회, 즉 ‘비판적 공동체’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공동체가 비록 개인을 도덕 규범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비판이 허용된다면 보편적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인간성 실현을 위한 매개로서의 ‘심미적 체험’도 강조했다. 심미적 요소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공감 능력을 확대시키는 등 개체로서의 자기 내면의 개발로 이끈다. 김 교수는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글을 따, 심미적 요소는 자연스러운 사회적 인간관계의 매체가 됨으로써 진정한 정치적 자유의 구성을 가능하게 한다고 밝혔다. 김 교수를 18일 서울 평창동 자택 부근 커피숍에서 만났다.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 동안 자유가 확대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종류의 자유인지를 물어야 한다. 요즘 정신질환자나 알코올 중독자,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할 지를 모른다. 무엇이 자유인가? 서울대 가겠다고 아우성이지만 이유를 물어보면 ‘주변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라고 답한다. 미국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가서 주변 환경이나 건물 다 보여준다. 그리고 ‘좋으냐’라고 묻는다. 이건 자기 자유를 제대로 쓰는 것이다. 진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한번 생각해보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우리 사회는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명품도 정말 좋아해서 산다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별 이해 없이 사는 것, 우리 사회에서 특히 심하다.

-신자유주의를 ‘목적이 없는 체제’라고 썼다. 그렇다면 ‘목적이 있는 체제’는 어떤가?

신자유주의에 대해 비판만 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할 것인지 연구해야 한다. 생각하는 사회, 비판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여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목적으로부터 삶이 해방된 사회이다. 사회는 수단을 마련하는 경기장이 되었다. 돈 벌어서 네가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를 ‘자기 욕심만 차리는 세상’이라고 비판하면서 ‘남에게 봉사하라’고 말한다. 남에게 봉사를 강요해도 괴로운 사회다. ‘나의 자유의사로써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가 과제의 하나다. 금욕적 혁명가인 레닌은 자기를 억제한 사람이다. 그래서 남을 억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래서 살벌해진다.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네루가 다스린 인도는 제3세계에서 가장 앞선 민주 체제였으나 특권계급의 권리가 많았다. (혁명가들에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억압을 주저하지 않고, 자신들이 스스로 특권세력이 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나 이념의 속박을 넘어 인간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상을 그려 달라.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 힘든 사회가 나쁜 사회다. 작은 공동체에서 살아야 한다. 이런 곳에선 거짓말하면 못 배긴다. 세계화의 장점은 우리 생각이 넓어지는 것이다. 넓어지는 세계에서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새도시도 자급자족도시로 만들어야 한다. 좋은 학교에 직장도 가급적 있고 가게도 있어야 한다. 도시계획이 굉장히 핵심적인 문제다. 하지만 우리 도시는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 장사가 되지 않으니까.

(학교 내신도) ‘우리 동네에서 이 학생 우수하다’는 기준으로 해야 한다. 수십만 명 가운데 우수하다는 그런 의미를 넘어야 한다. (속한 집단의 크기는) 작은데 똑똑하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교육부 원칙이 맞다. 선생도 세계적인 1등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학교가 (그 교사를) 존중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교사도 동네 속에 있어야 한다. 좋은 선생이라고 하는 (동네의) 막연한 평가가 중요하다.

-심미적 체험을 통한 인간적 삶의 형성에서 음악을 특히 강조했다. 하지만 요즘은 시각예술의 시대가 아닌가?

음악은 시간 속에 지속하는 것이다. 시각은 보고 지나는 것이다. 음악은 굉장히 엄격한 구조를 가졌다. 감각적이고 지속적이면서도 엄격한 규칙이 있다. 규칙 속의 자유로운 변조가 이뤄지는 것이다. 음악적 훈련은 학생들이 절제하고 자유롭게 살도록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미술 작품도 두고두고 생각해야 한다.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 위해 자기 노력을 들여야 한다. 물질적 세계와 자기 노력 그리고 감각이 섞여 들어가는 것이 인간 형성에 중요하다. 미술도 (휙 일람하는 것보다) 걸어놓고 보는 것이나 직접 그려보는 것이 더 좋다.

-심미적 체험은 특권적 체험이라고 썼다. 모두가 체험할 수 있는 길은?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은 하기 어렵다. 하지만 벗어난 사람도 있다. 금욕주의자나 스님들이 그런 예다. 영국에선 미술관을 가장 많이 가는 계층이 노동자들이다. 여러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미술을 이곳저곳 옮겨 전시해야 한다. 자동차에 싣고 다니면서 보여줘야 한다. 가야금 연주나 서양 고전음악은 정신적 훈련을 시켜 준다. 시골 초등학교를 지을 때 연주가 가능한 강당을 지을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또 음악 전공 미취업자들이 시골에서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자연스런 인간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아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괴롭다. (우리 학생들은) 자연을 과학 공부를 위한 재료로 생각한다. 공부하는 데 도움 받기 위해 자연을 공부한다. 거꾸로 자연을 더 잘 알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자연이 얼마나 신비로운가, 경이로운가 이걸 알기 위해 자연 공부를 시켜야 한다. 공부를 통해 인생의 경이로움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 반대로 인생을 희생해 공부한다.(강성만 기자)

07.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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