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처갓집에 갔다가 우연히 읽은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장인은 조선일보를 구독하시는지라 내가 가끔 건너가서(아파트 앞동이다) 들여다보는 건 조선일보의 주말판이다. 소설가 김훈과의 장문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안 했던 얘기'만 들어 있는 건 아니지만 신작 소설에 대한 구상은 나로선 처음 접한다(동시대를 다룬 그의 소설에 대한 기대는 http://blog.aladin.co.kr/mramor/1367796 참조). 구체적으로는 내년 겨울에 집필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하니까 그의 '대표작'을 생각보다는 일찍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아래 인터뷰는 <남한산성>을 7-8월의 사회적 독서목록에도 올려놓은지라 '시회적 독서'로 분류한다. 말미에는 후배작가 김연수의 인물평도 붙여놓는다.    

조선일보(07. 07. 21) [광일 기자가 만난 사람] 베스트셀러 ‘남한산성’ 소설가 김훈

김훈은 재작년 세금만 8700 만원을 냈다. 소설로 밥 먹는 한국 작가 중 최고 납세자 그룹에 속한다. 약속 장소는 일산에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김훈은 자전거를 끌고 땀을 흘리며 나타났다. “(이 자전거) 1500만 원짜리야. (기사에) 써도 돼.” 그는 지나치게 솔직했다. 자발적 편집이 필요했다. 3시간 반을 인터뷰하다 다시 옮긴 자리에서 그는 부드러운 사케(청주)를 다소 거칠게 마셨다.

2004년에 인터넷서점 YES24에서 대표작가들 중 ‘지금 노벨문학상을 받을 사람’을 물었다. 1위는 ‘토지’의 박경리였다. ‘앞으로 받을 것 같은 사람’은 1위가 ‘칼의 노래’의 김훈이었다. 요즘 그는 여러 북클럽에서 가장 모시고 싶은 첫 번째 손님이다. 4월 중순에 낸 ‘남한산성’은 갖가지 화제를 뿌리면서 이번 주까지 27만부를 찍었다. 물론 종합 1위다. 현대, 삼성, 금호, 아모레퍼시픽 등등 굴지의 그룹들도 그를 모셔간다. 강의료는 ‘200(만원)안팎’인데, 역사와 김훈에게 배우자는 열풍 같은 것이다. 검사들, 현직 교사들, 대학생들 강의 요청은 수십 개가 쌓여 있고, 틈을 내려고 최선을 다한다. 영화사에서도 3곳에서 접촉이 왔다. TV 드라마 제작사 2곳도 출판사에 의사타진을 했고, 뮤지컬도 2곳에서 오퍼를 넣었다. 심지어 CF 제안도 들어왔다. 요컨대 그는 이 시대 최고 인기작가이고 또한 부자다. 본격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에 한가지 약속을 했다.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안 했던 얘기만 합시다.” “…”



―몇 시에 일어나나?

“7시쯤 일어난다. 술 안 먹으면 6시쯤. 방 청소하고, 옷 입고, 신문 본다.”

―침대에서 자는가?

“장판 방바닥에서 요 깔고 홑이불 덮고 잔다. 나는 어디서든 문 열고 잔다. 문 닫으면 답답하다.”

―해외여행가면 호텔 방문도 열어 놓는가?

“해외여행 별로 안 간다. 작년에 프랑크푸르트에 간 것이 구라파(유럽)에 30년 만에 간 것이다. 나는 비행기도 싫다. 사람 묶어놓고 개밥 주고…. 증오하지. 엄마가 미국에 계셔서 뵈러 갈 때가 있긴 하지만 관광목적으로는 안 간다.”

―신문은 뭘 보는가.

“조선일보와 국민일보다. 내가 국민일보 근무할 때 평생 독자가 됐다.”

―신문은 어떤 면을 주로 보는가.

“뉴스면은 제목만 보고, 사설과 오피니언면을 꼼꼼히 읽는다. 논객들이 미리 설정한 틀 안으로 이 세계를 밀어 넣으려는 안간힘이 보인다. 세상이 그 안으로 들어갈 리가 없는데. 보편적 진리를 말하려는 강박에 빠져서 아무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자들은 이념의 일관성을 과시하기도 해. 이념을 일관되게 해서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나는 그런 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런 논객들을 보면 다 옳아. 틀린 소리 안 해. 그렇지만 세상이 이 지경인 것은 옳은 말이 모자라서 이런 것은 아니란 말이지.”

김훈은 말 밭을 솎아 낸다. 뵈게 나 있는 문장들을 못 참는다. 몇 밤을 공들인 문장도 내 것이 아닌 듯하면 고랑을 뒤엎고 다시 김을 매듯 그 자리에서 버린다. 그래서 더디다. 작가라고 명함 박으면 누군들 안 그럴까 싶지만 그는 참 유난스럽다. 그가 2001년 동인문학상을 받았을 때 심사위원회는 한국 문단에 ‘벼락처럼 내린 축복’이라고 했었다.

―아침은 뭘 먹는가.

“과일, 야채, 된장국, 밥. 마누라가 주는 대로 먹는다. 난 식단과 돈에 대한 권력이 없어.”

―식사 마치면 바로 집필에 들어가나.

“9시쯤 시작되지. 연필 들면 오늘 글이 써지는지 안 써지는지를 알아. 안 되는 날은 종일 앉아 있어도 안 돼. 그런 날은 그냥 나가 놀아. 그러나 아침 9시부터 다음날 새벽2시쯤까지 쓸 때도 있어. 그런데 겨우 5장밖에 안 써지면 환장하지. 그것마저 맘에 안 들어 새벽에 버리기도 해.”

―점심은 어디서 먹나.

“마누라가 집에 있으면 집에 가서 먹고, 외출했으면 근처에서 해결하지. 가장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방법으로 먹어. 김밥과 자장면. 자장면은 인이 박혀서 한동안 안 먹으면 먹고 싶어져. 맛의 근원 정서를 갖고 있어. 그 빌어먹을 찜찜한 게 생각나.”

―술은 무슨 술 먹나.

“소주는 안 먹으려 해. 빚을 내서라도 좋은 술 먹자는 생각이지. 싼 술 먹으면 몸이 부대껴. 요즘 와인을 배웠는데 최근에는 사케로 바꿨어. 와인을 마시면 계통 없이 취해서 너무 로맨틱해져.”

―계통 없이 취한다니?

“술이 뼈 속에 스며 논리의 계통이 무너져. 대신 위스키는 딱, 취하는 계통이 서지. 사케는 양쪽이 다 있어.”

김훈은 성큼성큼 냉장고로 가서 사케 ‘월계관’을 꺼내왔다. 안주는 마른 오징어에 고추장이었다.

―당신은 뭐 하냐고 물으면 ‘논다’고 대답할 때가 많다.

‘논다’는 건 매우 치열한 행위야. 작가에겐 세상을 관찰하는 행위지. 나는 혼자서 잘 놀아. 자전거 타고 나가 바람 쐬고 노을을 본다고. 놀면서 세상을 들여다 보고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구나 하는 것을 알게 돼. 노을이나 바람 속에 있다는 것은 내가 시간 속에 있다는 얘기야. 생애를 스쳐 지나가는 시간을 어떻게 언어로 포착해서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답함이 있는 거지. 결국 할 수 없는 것이고.”

―당신은 세상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쓴다. 감정을 표백해버린, 강시들의 언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죽고, 통치자로서만 기능한 임금의 언어다. 작가의 매혹적인 오만과 전지전능의 시각에서 나올 수 있는 문장만 쓴다. 유머를 혐오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수다를 떨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어. 나는 내 문장이 뼈만 가지고 있으면 좋겠어. 골격만…. 뼈 안에 모든 정서나 정한(情恨)이 저절로 드러나길 바라는 것이야. 나는 내 문장이, 말하자면, ‘귀족의 문체’를 완성하는 것이길 바래. 유머? 나는 뼈대 안에 유머가 있다고 생각해. 드러나는 것은 물론 아니지. 기자 시절에 배운 스트레이트 문장에 대한 편애와 집착이 있는 것이고.”

―당신은 말과 글을 경멸하면서 말을 하고 글을 쓴다. 말은 ‘쓰레기’고 글은 ‘똥’이다. 그래서 꼭 필요한 만큼만 말하고 나머지는 절대로 내뱉지 않는다. ‘…같은’, ‘…처럼’ 같은 비유법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말과 글을 경멸하면서 말과 글로 먹고 사는 것,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밥벌이의 지겨움’인가.

나는 말과 글을 불신하는 사람인데, 경멸까지는 아니야. 혐의를 두는 정도지. 그것들이 소통 가능한 것인지 의심해. 객관적 진실에 도달할 도구인지 불신하는 것이지. 그러나 결국 말을 안 하고는 살 수 없으니 신뢰할 수는 없고 말을 끌고 살아가.”

―산성에 갇힌 신하들에게 임금으로부터 적장 칸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글을 쓰라는 명이 떨어진다. 결국 최명길이 그 글을 썼고, 임금은 그 글을 밟고 나가서 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당신은 현실주의자인가. 글을 밟고 지나가 길을 내겠다는 것인데, 그 길은 어디로 뚫려 있는 것인가. 결국 삶을 도모하는 도생(圖生)의 길이 옳은 길인가.

“나는 누구의 편이 아니야. 고립 무원의 성 안에서 양대 담론의 축은 김상헌과 최명길이지. 서로 부딪치고 뒤엉켜 무화(無化)되는 것을 그리려 했던 것이야. 인조가 걸어간 길은 선택해서 간 것이 아니야.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간 것이지. 인조가 서문(西門)에서 삼전도까지 걸어갈 때 비로소 만 백성의 아비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죽더라도 뜻을 남기자는 김상헌과, 임금에게 살길을 열어주려는 최명길, 그들 사이에 임금은 뜻은 양쪽에 다 걸려 있었다. 그러나 대장장이 서날쇠가 결국은 이 땅을 메워간다. 이 작품에서 작가 자신이 가장 많이 투영되어 있는 인간은 임금인가, 최명길인가, 서날쇠인가.

"나는 가령 내가 그 시대에 지식인으로 태어나서 임금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면 어떤 행동으로 47일을 견뎠을까 생각해봤어. 등에서 진땀이 나고 사지가 떨렸어. 글을 못 쓰겠더라고. 짐작컨대 나는 아무 말도 안 하는 자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내 소설 속에 아무 말도 안 하는 자를 그리려 했는데 그릴 수가 없었어. 입 닥치고 있는 지식인을 그리고 싶었는데 못 썼어. 이 놈이 빠졌으니 이번 소설은 미완성인 것이야.”

―일반 독자들이 가장 많이 거론하고 있는 대목은 김상헌이 강을 건넌 다음 뱃사공의 목을 베는 장면이다. 그리고 김상헌은 눈물을 흘린다. ‘김상헌의 칼이 사공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사공은 얼음 위에 쓰러졌다. 쓰러질 때 사공의 몸은 가볍고 온순했다.’ 독자들은 ‘가볍고 온순했다’에서 전율한다.

“사공은 죽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사람이지. 그러나 김상헌은 그 놈을 살려줄 수가 없는 것이야. 사공을 설치하는 것은 그냥은 못 건너는 강, 그만한 고통을 치러야 하는 강이란 점, 사공을 죽여야 한다는 점 등을 그리려 했던 것이야. 마지막에 ‘눈물’을 넣을까 말까 몇 번 망설였지. 그 놈의 두 글자가 들어가서 이것이 뽕짝이 된 거야. 눈물이 들어가야 인간의 냄새가 나긴 하는데. 그참. 괴로웠어. 그 두 글자가 추잡했어. 써야만 독자가 알아 먹는 것인가. 이상해. 나한테 안 맞는 것 같아. 재판 찍을 때 빼버릴까….”

―당신의 작품들은 놀랍게도 ‘서정적 국가주의’를 호흡하고 있다. 국가주의로만 침투하기 힘들 때는 그곳에 ‘허무’를 함께 섞는다. 당신의 이번 작품도 ‘조국의 성’에 바친다고 했다. 그 조국은 운명론적으로 갈 길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허무라고 말한다. 흡사 파울로 코엘료가 자주 쓰는 ‘마크툽’이란 아랍어를 떠올리게 한다. ‘어차피 그렇게 되어 있는 일’이란 뜻인데, 그들의 운명은 ‘마크툽’이었는가.

“서문에 ‘조국의 성’이라고 썼는데, 나는 조국이란 단어를 내 평생 처음 쓴 것이야. 내가 감히 쓸 수 없는 단어였어. 내가 조국을 쓴 뜻은 내 역사적 혈연을 말한다기 보다 삶은 영원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야. 삶은 단념하거나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국가도 마찬가지라 생각해. 개인의 윤리와 국가의 윤리는 다른 것이야. 개인은 치욕을 참지 못해 순국선열처럼 자결할 수 있지. 그러나 국가는 그렇게 할 수 없어. 국가는 그런 윤리의 길을 갈 수 없어. 국가가 자멸의 길을 간다면 죄악이지. 국가는 치욕을 걸머지고 살아 남는 것이 도덕이야.”



김훈은 “지금도 무슨 부대라고 얘기하면 절대 안 되는” 곳에서 37개월 군역을 치렀다. 고려대 영문과를 다니다 군대 갔는데 돈이 없어서 복학을 못했다. 그는 휘문고 졸업이다. 그는 “군대 가니까 정말 좋더구만”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말로 군인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육사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것에 실패해서 기자가 됐고, 지금은 작가다. 사적인 이야기로 잠시 화제를 바꿨다.

―키, 몸무게?

“172㎝, 63㎏”

―시력은? 안경은 언제 쓰는가?

“시력도 청력도 나빠. 귀가 안 들려 병원에 갔더니 노화 현상이라면서 못 고친대. 귀가 나빠져도 괜찮아. 듣고 싶은 것도 없고. 그러나 눈이 안보이면 안 되지. 책을 못 읽잖아.”

―영화 볼 때는 안경을 쓰지 않나.

“영화를 안 봐. 내 생애에 지금까지 5개도 안 봤어. 나이 먹고 가려니 컴컴한데 가기 싫고, 냄새 나고, 껌 씹고…. 영화뿐만 아니라 테레비도 안 봐. 뉴스만 봐. 인이 박힌 것이지, 기자질을 많이 해서. 뉴스는 하루만 안 봐도 큰 일이 벌어져 있더군. 나라가 뒤죽박죽이니까 그렇지. 뭔가 무너져 가고 있어. 뉴스 장사 해먹기가 정말 좋은 나라야.”

―삐뚜름하게 모자를 쓰고 다니는 이유는 무엇인가.

“머리카락이 빠져서 그래. 병원 갔더니 직사광선 받지 마라고 하데. 패션이 아니야. 일종의 노인용품인 게지. 겨울에는 안 써.”



김훈과 이야기하면서 자전거를 빼놓을 수는 없다.

―1500만 원짜리 자전거도 있나.

처음 10만 원짜리는 타다 버렸어. 지금이 네 번째야. 조립품이니까 다국적이지. 내가 원하는 것은 가볍고, 튼튼하고, 고장 안 나고, 세 가지야. 미관은 필요 없어. 4000만 원짜리도 봤어. NASA가 개발한 카본소재로 만든 자전거야. 어떤 놈이 그 자전거를 끌고 왔길래 10분만 타 보자고 해놓고 1시간을 탔지. 진짜 좋더군. NASA는 얼마나 위대해. 나 같은 놈까지 매혹시키니까. ‘남한산성’ 팔아서 그거 살 거야. 귀족 취미라고 비웃는 놈들이 있는데 30년 동안 야근한 끝에 지금 1500만 원짜리 타는데 뭐가 잘못이야.”

―대회에도 나간다는데.

“9월7일부터 8일까지 전남 월출산에서 40㎞코스를 열 번 왕복하는 400㎞ 대회가 열려. 전국 레이서들이 오는데 나도 가서 한판 붙을 거야. 월출산을 넘는 아름다운 코스야. 차밭도 지나고. 꼴등을 하더라도 갈 거야. 지금 체력 강화훈련을 하고 있어. 최소한 20등은 해야 되는데….”

― ‘기록’이 얼마나 되나.

“경기장에서 쟀더니 내리막에서 50㎞가 나오데. 선수들은 평지에서 80㎞쯤 나오고, 나는 평지에서 30㎞수준이야. 그것도 무서워. 30㎞로 10분 이상을 못 달려. 400㎞를 간다면 지구력으로 가는 것인데, 몇 놈 꼬꾸라지겠지. 나중에 스퍼팅해서 따라잡아야지.”

김훈은 자기 이름이 새겨진 원고지에 연필로만 집필한다. 김훈이 팬 사인회를 할 때는 그에게 반한 여성 독자들이 장사진을 친다. 그들 중에는 연필을 선물하는 여성도 많다. 최고급품으로 치는 연필이 독일산 스테드틀러 HB다. 김훈은 자리에 앉자마자 그 연필을 자랑했다. “나 좋아하는 ‘부녀자’가 준 것이야.” 이런 대목에서 그냥 ‘여자’라고 하면 김훈이 아니다.

―방송이든 신문이든 공개 장소에서 대화를 할 때 말을 문어체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족들과도 그런 식으로 대화하는가.

“나는 어문일치에 반대하는 사람이에요. 말과 글은 전혀 다른 것이야. 한글지상주의자들이 한자를 배격하는 것은 야만적 폭거야. 나는 나의 글과 말에 한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다 써.”

―‘비호’를 쓴 소설가이자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김광주 선생이 아버지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무엇인가. 문장인가. 정신인가.

나는 유산이라고는 숟가락 하나 받은 게 없어. 우리 집에 장안의 글쟁이들이 다 왔어. 그러나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아버지를 묻고 와 그 묘지 값을 못내 13개월 월부로 갚았어. 제대 후(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는데 첫 월급이 2만5000원이야. 아버지가 장흥에 있는 공원묘지에 묻히셨는데, 외판원이 와서 내 봉급에서 묘지 값으로 7000원씩 떼 갔다고. 월부로 다 갚고 나자 그쪽에서 10평 묘지에 대한 문서를 주데. 이제 네 것이다. 그날 산소 가서 소주 먹고 통곡했어. 그런 아버지야. 허랑방탕하고 술을 엄청 먹었지. 상해에서 김구 캠프에서 한 20년 먹고, 광복된 서울에서 먹고, 6·25때 부산 피난 가서 먹고, 수복 후 명동서 박인환과 먹고…. 나는 지금 술 먹는 것도 아니야. 아버지는 동아시아의 격변기를 따라다니며 술 먹었지. 술의 본류를 따라다니며 먹은 것이지.”

―지금도 아버지 편인가.

“지금도.”



김훈의 소설에는 열렬한 팬들이 많다. 반대로 그의 문장에 대해 안티들도 있다. 문체 미학의 매혹이 너무 강렬해서 금세 피로증세를 느낀다는 독자도 있다. 그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목숨 걸고 쓰는데 하루에 원고지 3장 밖에 못 쓰고, 그나마 갖다 버리는데, 그들이 모르겠다면 난들 어쩌겠어. 헤어질 뿐이지. 사실 나는 독자들을 고문하고 싶었어. 잔혹하게 끝까지 고문하자. 희망은 안 보이는데 고문만 하면 결국 나를 이해하게 될 것이란 생각이었어. 한 문장을 쓸 때마다 독자를 고문해서 사지로 몰아넣듯이 했어. 기름 짜는 압유기에 넣어 독자를 짜려고 했어. 그래야 그들이 정신을 차리는 것이지. 그래야 김훈을 욕하더라도 삶과 역사를 생각할 것 아냐.”

그런 김훈의 책상 위에는 천칭저울이 천장으로부터 걸려 있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한의사였는데 물려 받은 것이다. 김훈은 한의사도 소설가도 시대의 중인(中人)계급이라고 생각한다. 중인만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고 믿는다.

―내년이면 육체적 나이로 ‘환갑’이다. 그러나 당신은 소설을 낼 때마다 ‘나는 신인이다’고 했었다. 이제 세계적으로 이름이 크게 알려지고 있는 마당에 아직도 신인이라고 하겠는가.

“나는 신인으로 살다 죽으려고 해. 신인은 문화의 꽃이지. 전위와 아방가르드라는 점에서. 이류나 삼류더라도 전위가 돼야 해. 그게 안 되면 문학은 망해.”

―대표작을 썼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내년 겨울에 쓰려고 해. 내가 살아온 시대, 아까 말한 희망이 좌절된 시대를 쓰는 것이지. 세상과 부딪쳐 좌충우돌하는 기자를 주인공 삼을 거야. 애인은 도망가고 좌충우돌만 남은 기자. 금방 쓸 수 있을 거야. 당대를 쓰는 것은 소설가로서 치사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어. 우리 청춘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어야지.”

―당신이 살아온 시대의 대부분을 당신은 기자로 살았다. 기자(언론인)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은 무엇이 가장 크게 다른가. 글을 써서 먹고 산다는 점 말고.

작가가 되면 자기가 자기를 통제해. 기자는 육군처럼 삼엄한 기율과 통제가 있잖아. 소설가는 스스로 통제 않으면 날라리 깡패가 되는 것이지. 자기 통제가 어렵고 슬퍼. 나를 통제할 놈은 없고, 대신 욕하고 비판하는 놈은 많아. 그것은 처절하게 외로워. 나는 우리 선배들이 정계, 금융계, 관계로 가는 것 좋다고 생각해. 언론계의 수많은 엘리트가 경륜을 펴고 세상에 발전을 가져오니 좋잖아. 언론계에 뼈를 갈아 바치는 것만이 순수한 언론인이라고는 생각 안 해.

―기자로서의 경력 가운데 한국일보, 시사저널, 국민일보 그리고 한겨레신문으로 옮겨다닌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나는 조직과 후배에 대한 불화가 많았어. 나는 엉기는 것이 싫어. 그들은 자꾸 신문사를 혈연집단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나는 정말 싫었어. 나는 회사를 떠날 때도 앞날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어. 지금도 미래에 대한 공포가 없어. 나의 천부적인 자질이야. 백척간두에 서면 뛰어내리는 거야. 그리고 살아 남아. 나는 낙법을 안다고. 노무현 대통령은 못 뛰어내린 거야. 그래서 지금 저 모양이 된 거지. 1989년12월31일 한국일보에서 나올 때 다시는 언론사에 안 가려고 했어. 80년대를 하도 비굴하게 살았기 때문이지. 굴욕, 치욕, 죄악이 있었지. 90년대 들어 1년을 방랑하니까 쌀이 없어. 그때는 술 많이 먹었어. 남해안을 돌면서 뼈가 삭고 똥물이 나오도록 마셨지.”

김훈은 국가에 감사한다고 했다. 자신의 책을 사고,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교육 받은 독자를 국가가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조국이 수십 년 동안 수백 조의 돈을 투자해서 교육 받은 인간을 만들어 놓았기에 자신이 먹고 산다는 것이다. 국물을 부어주던 단골 어묵집 직원 정혜은 양은 “(김훈 선생이)처음에는 무서웠으나 갈수록 따뜻하고 귀엽다”고 말했다. 김훈은 마지막에 말했다. “ ‘남한산성’에 그 모든 역사의 하중을 걸지 말라고!” 그는 취했다. “민중들이 숫자의 힘으로 덤비면 안돼. 나는 숫자의 힘에 절대 지지 않아. 문체라는 것은 문명을 지배하는 것이야.”

조선일보(07. 07. 21) 소설가 김연수 ‘내가 본 김훈’

그의 작업실 칠판에는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는 말이 적혀 있다. 10년 전쯤, 나는 잡지사 기자, 그는 신문사 기자였을 때 그의 글을 받은 적이 있었다. 책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삼각파도 대처법에 관한 매뉴얼 책을 추천했다. 선원들이 보는 책이었다. 그는 닦고 조이고 기름칠 때,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그의 영혼은 수리공에 가깝다. 공구에 대한 그의 페티시즘적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공구로도, 매뉴얼로도 대처할 수 없는 일에 관해서라면 그의 문장은 그쯤에서 멈춘다.

공구와 매뉴얼이 없다면 아마도 그는 쓰지 못할 것이다. 그건 그가 20여 년 간 몸담았던 직장의 직업윤리였다. 그가 ‘겨우’ 쓰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는 단어의 운용에도 매우 인색한데, 그 역시 공학적으로 한글을 다루기 때문이다. 자음과 모음을 이리저리 연결시켜서 얻어내는 문장이어서 그의 글은 만연체가 불가능하다. 그 글은 또한 언제라도 자음과 모음으로 해체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문장은 허무한 느낌마저 든다. 언젠가 해체될 것을 알면서도 조립해야만 하는 자의 허무다.

조립하고 해체하는 세계 너머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만지는 언어로는 그 세계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 그럴 때 보면 그는 ‘공자(孔子)주의자’다. 매뉴얼대로 공구를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셈이다. 그가 최상의 인간으로 믿고 있는 사람은 육군 대위인데, 그 까닭은 육군 대위야말로 필드 매뉴얼에 가장 근접하게 행동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그에게 육군 대위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음악가다. 그들은 공학적으로 행동한다.

그의 고향은 서울 삼청동이다. 그러므로 그건 사대문 안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 감각이리라. 시정에는 시정을 움직이는 원리가 존재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 원리를 지킬 때, 시정은 즐길 만한 곳이다. 공구와 매뉴얼의 세계를 믿을 때, 그는 세상 안에서 잘 놀 수 있다. 그러니 계속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만 하리라. 그래야만 이 세계를 한 번 더 지독하게 긍정하면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내가 들은 가장 인상적인 말은 “내년 봄까지 술값은 모두 내가 낸다”였다. 어느 해 가을이 한참일 무렵, 들었던 말이다. 적어도 꽃이 필 때까지는 함께 술을 마실 수 있겠구나고 혼자 안도하던 찰나, 그가 덧붙였다. “내년 연말까지는 김연수가 사라.” 다행이다. 그리고 몇 해가 더 흘렀지만, 우린 지금껏 아주 잘 놀고 있다. 술은 거의 대부분 그가 산다. 정말 다행이다.

07. 07. 22.

P.S. 김훈의 오랜 독자로서(내가 기억하는 건 한국일보의 '문학기행'을 연재하던 시절부터의 김훈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풍경과 상처>(문학동네, 1994)와 <남한산성>(학고재, 2007)이다(그 사이에 <자전거여행>이 있다). 나는 <남한산성>을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풍경과 상처>는 여러 권의 책을 사서 여러 번 읽었다. <풍경과 상처>에도 윤선도와 관련하여 남한산성이 언급되는 대목이 한 군데 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쫓겨간 임금이 삼전도로 내려와서 청태종에게 투항하자, 해남에 은거해 있던 윤선도(1587-1671)는 지체없이 배를 내어 섬으로 향했다. 윤선도의 배는 치욕의 육지 맨 끝, 토말(土末)에서 출항했고, 육지의 한복판에서 임금은 치욕을 수용하는 용량을 극대화함으로서(*'극대화함으로써'의 오타이다) 창민과 국토를 겨우겨우 보존했다. 임금이 인욕의 붉은 옷을 걸치고 성문을 나설 때 눈덮인 겨울 산성에 통곡소리 가득했으나, 울기는 쉬운 일이었고 살아남기는 어려운 일이었다."(56쪽)

이 대목을 포함하고 있는 글 '낙원의 치욕'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윤선도는 향년 85세로 부용동 낙서재에서 죽었다. 그는 세 차례에 걸쳐 유배되었다. 그의 유배기간은 모두 20년에 달했고 유배지는 함경도 경원, 혹은 삼수갑산 같은 극지였다. 그는 유배와 유배 사이의 19년을 보길도나 해남에서 은둔했다. 은둔과 은둔 사이사이에 그는 또다시 격렬한 언어를 동원하여 당대현실을 공격했고, 그 결과는 또다른 유배였다. 보길도가 윤선도의 낙원인지, 아니면 함경도 경원과 삼수갑산이 윤선도의 낙원인지 보길도에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당대 현실의 양쪽 극지에 보길도와 삼수갑산이 있다. 보길도에서 삼수갑산의 거리는 멀고 멀다. 그의 낙원은 아마도 그가 한번도 발붙일 수 없었던 '당대 현실' 안에 혹시 있다면 있을 터이었다."(59쪽)

그렇게 적은 김훈 또한 소설가로서 바야흐로 '당대 현실'에 밭을 내딛으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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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22 16:27   좋아요 0 | URL
이 글 보고 김훈에게 궁금한거 두 개. 하나는, 한국일보, 시사저널, 국민일보 그리고 한겨레신문. 근데 왜 국민일보에 애착을 가지고, 조선일보를 구독하는지 묻고 싶어요. 두번째는, 시사저널 사태에 대해 묻고픈데 전혀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네요. 이번에 참언론실천연대 지지성명에 김훈과 고종석씨 빠져있었는데... 제게는 관심은 많이 가는 사람이면서 호감도는 마이너스인 작가입니다.

로쟈 2007-07-22 20:08   좋아요 0 | URL
어떤 신문을 보느냐는 그의 취향이죠. 시사저널 사태에 대해서는 이전에 다른 인터뷰들에서 언급한 걸로 기억됩니다. 그가 후배들에게 한 얘기들도 찾아보면 나올 듯한데요...

과객 2007-07-22 22:2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비싼 자전거라 딱 김훈의 포즈와 맞아 떨어지는군요. 누구는 놀라 쳐다볼수도 누구는 그래봤자 자전거지... 나름대로 합치된 몬가를 꾸미는 모양인데 그게 몰지... 그것까지 확인해본 후 판단해도 늦지 않을듯...

바벨의도서관 2007-07-23 19:03   좋아요 0 | URL
왜 국민일보를 -애착이 아니라- 구독하냐면, 필시 수년 전 국민일보 평생구독 운동을 펼칠 때에 국민일보 직원들도 모두 강제로 해야 했기 때문이겠죠(당시에 들어온 엄청난 수입을 조용기 목사의 철없는 아들의 경영 실패로 날려버렸지만 말입니다).

수유 2007-07-23 21:56   좋아요 0 | URL
와인을 마시면 계통 없이 취해서 너무 로맨틱해져..나는 저런 말이 좋습니다. <풍경과 상처>도 좋고. <남한산성>도 좋고. <칼의 노래>도 좋았습니다.


마누스 2007-08-09 16:14   좋아요 0 | URL
김훈 소설이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만, 제가 과문해서 그런지 그의 소설을 '비판'적으로 논한 글(고명섭 기자의 글 정도)을 별로 못 봤습니다. 김훈 소설(및 김훈 소설이 많이 팔리는 현상)을 '좌파'(김훈이 스스로 우파 보수주의자로 자처하므로)의 입장에서 치밀하게 비판하는 글이 하나쯤 나왔으면 좋겠군요.

로쟈 2007-08-09 16:26   좋아요 0 | URL
'좌파소설'과 '우파소설'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해주시면 비판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누스 2007-08-09 16:49   좋아요 0 | URL
저는 '좌파소설'과 '우파소설'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김훈의 소설이 우파소설이라고 한 적도 없는 걸요. 다만, 김훈이 인터뷰에서 스스로 '보수주의자'다, '혁명은 실패했다' 등의 말을 하는 걸로 보아 좌파(적어도 지젝이 말하는 급진적 좌파)는 분명히 아니고, 그렇다면 아직도 '(자본주의를 뒤엎는) 혁명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좌파의 입장에서 뭔가 그럴듯한 비판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마누스 2007-08-09 16:53   좋아요 0 | URL
써놓고 보니, 굳이 '좌파'의 입장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좌파의 입장이 아니라도 괜찮으니 그럴듯한 비판이 좀 나왔으면 합니다. 김훈 소설이 너무 '무비판적'으로 읽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로쟈 2007-08-10 18:39   좋아요 0 | URL
이견을 표시하는 문단의 한 가지 관행은 '침묵'입니다. 김훈은 대중적인 지명도에 비해서는 비평적 주목을 덜 받고 있는 작가입니다(공지영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한 바 있지요). 언제부터인가 '불편함'을 표현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비판'이 아니라 '무시'이며, 이 점은 김훈에 대해서도 충분히 표현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레오 스트라우스 -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박성래 지음 / 김영사 / 2005년 7월
품절


자유주의의 기본단위가 개인이라면 고대 그리스철학을 따르는 스트라우스 이론의 기본단위는 레짐이다. 그리고 스트라우스가 말하는 '정치'는 근대인들이 보통 생각하는 정치보다 훨씬 광범위하며 우리 생활의 곳곳에 스며 있는 '고대적인 정치'이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문화적 상대주의를 지독히도 싫어한다. 스트라우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여러 레짐들을 비교한 뒤 좋은 레짐과 형편없는 레짐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45-46쪽

스트라우스의 입장에서는 이런 근대성과 자유주의, 가치중립주의, 역사주의는 위장된 상대주의, 허무주의에 불과하다. 스트라우스는 근대 이성주의는 그래도 도덕이 유지될 거라는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도덕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고대의 현인들은 '도덕'에는 절대적 근거가 없으며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리석은 대중들에게까지 발설하지 않는 신중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상대주의와 허무주의가 어리석은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을 내팽개칠 것이고 서구문명에는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게 니체의 교의를 따르는 스트라우스의 걱정이다. -70쪽

스트라우스는 단호함의 적절한 대상으로 진리를 내세운다. 스트라우스는 '무엇에 대한 단호함인가?'라고 스스로 물은 후 '진리에 대한 단호함이다'라고 스스로 대답할 것이다. "진리가 없다는 것이 진리"라는 니체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정치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혼란을 막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절대적인 진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75쪽

"인간의 최고 활동인 철학 혹은 과학은 '만물'에 대한 의견을 '만물'에 대한 지식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다. 그런데 의견은 사회의 구성요소다. 그러므로 철학 혹은 과학은 사회가 숨쉬고 있는 기초를 해체하려는 시도다. 따라서 그것들은 사회를 위태롭게 만든다.(...) 철학 혹은 과학과 사회의 관계와 관련하여 이러한 견해를 견지하는 철학자나 과학자들은 사회의 바탕을 이루는 의견들에 대해서 다수가 갖고 있는 무조건적인 신뢰를 위태롭게 만들지 않고도 소수에게는 자신들이 진리라고 간주하는 것을 밝힐 수 있게 하는 특이한 글쓰기 방식을 채택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들은 밀교적(esoteric) 가르침으로서의 진정한 가르침과 공개적(exoteric) 가르침으로서의 사회적으로 유용한 가르침을 구분하게 된다." -86-87쪽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플라톤이 넌지시 혹은 우물쭈물 말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플라톤의 진짜 가르침일 가능성이 높다. '플라톤이 여기서 무엇을 말했나'보다 '플라톤이 여기서 무엇을 말하지 않았느냐'에 더 주목해서 살펴봐야 진짜 가르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여기서 이 말을 했다가 저기서는 저 말을 한다면 둘 중에 하나는 진짜 가르침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97쪽

스트라우스가 정치철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계기[는] 서구와 근대성의 위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정치철학의 역사를 연구했다.(...) 스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가 고대 정치철학의 전통을 파괴하고 정치와 도덕을 분리시킨 근대 정치철학의 시조라고 본다. 그에게 마키아벨리는 도덕적 혼란이라는 근대성의 위기, 서구문명의 위기를 불러온 장본인이다. -108-112쪽

스트라우스는 판단을 내리기를, 인간본성과 인간사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관찰은 올바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트라우스 자신도 마키아벨리에 동의한다는 말이다. 다만 플라톤처럼 몰래 속삭이면서 말해야지 마키아벨리처럼 그렇게 큰소리로 떠들어대면 곤란하다는 얘기다. 결국 스트라우스가 마키아벨리를 비난하는 진짜 이유는 마키아벨리가 너무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순진하기 때문이다. -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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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avinsky 2007-07-22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저 책이 나왔을 때 서점에서 잠시 읽어본 적이 있는데 니체 철학이 저런 정치철학을 나았다는 것에 뒤통수를 얻어 맞았다는...

로쟈 2007-07-22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시즘으로 전용되는 것과 비교하면 약소한 듯한데요. 책은 약간 선정적이지만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저자가 자신한 대로 적절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스트라우스 정치철학에 다들 입문해야 하는 건 아닐 테지만...
 

찾는 책이 눈에 띄지 않아(방안에 있는 책들이 거의 포화상태에 도달하고 있다) 해야 할일을 미뤄두고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러시아 관련서 두 권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 권은 전설적인 무기상 자하로프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한권은 러시아 혁명기의 테러리스트 사빈코프의 자전적 소설이다... 

문화일보(07. 07. 20) 전설의 무기상 자하로프의 생애

많은 사람들이 책을 훑는 버릇 중의 하나는 책 속의 도판부터 보는 것이다. 20세기 초 전설의 무기상으로 알려진 바실 자하로프의 생애와 시대를 다룬 이 책에도 몇 컷의 사진이 있다. 수염을 기른, 20세기 초반의 전형적인 인물 사진에서 다른 인물과 구별되는 점은 차갑게 빛나는 눈빛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죽음의 상인’이란 제목 못지않게 바실 자하로프의 눈빛에 흥미를 느껴서였다.



10대 시절 매음굴의 문지기 등으로 일하며, 사람 심리 읽기를 배운 그가 무기상으로, 가상적국인 그리스와 터키에 잠수함을 판매한 것은 1877년이었다. 그가 무기를 파는 방식은 이랬다. 먼저 그리스에 가서 터키의 위협을 과장하며 잠수함 한 척을 판매한 뒤, 이번에는 터키에 가서 그리스의 위협을 강조하며 두 척을 팔았다. 그리고 계약이 성사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네 척을 팔았다.

“터키는 두 척의 잠수함을 구입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터키 해군은 이 잠수함 덕분에 흑해에서 귀국의 함정을 위협하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터키 같은 약소국은 두 척이면 충분하지만, 강대국인 귀국의 안보를 위해서는 네 척은 필요할 것입니다.”

바실 자하로프가 러시아에 잠수함 네 척을 팔기 위해 보낸 편지다. 그의 정세 분석은 예리하고도 정확했지만, 세일즈 법칙은 간단했다.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예리한 정세분석에 더해 불안을 부추기는 그의 기법은 성공률이 매우 높았다. 1894년에는 영국의 최대 무기제조회사로 자리를 옮겨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전함 4척, 순양함 3척, 잠수함 54척, 항공기 5500대, 중포 2328문을 팔아치우는 괴력을 발휘한다.

그가 개입한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뿐만이 아니었다. 1890년대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보어전쟁을 비롯해 러일전쟁, 발칸전쟁 등의 교전국에도 무기를 공급했다. 1차 대전 뒤 그는 그리스 터키 전쟁을 다시 일으켜 전쟁 경기를 부추기려 했으나 실패하고 은퇴, 몬테카를로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다 1936년 사망했다. 그는 전쟁 무기상으로서뿐만 아니라, 장 조레스와 로자 룩셈부르크 등 평화주의자 살해사건의 유력한 배후로도 지목된다.

‘죽음의 슈퍼 세일즈맨’이라 불리며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까지 활약한 바실 자하로프의 생애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한다. 책은 베일에 싸인 바실 자하로프의 생애를 복원하기 위해 방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퍼즐 맞추기를 계속해 나간다. 이런 과정에 점차 뚜렷해지는 그의 모습과 함께 드러나는 것은 역시 베일에 가려있는 동시대의 역사다. 그가 활약한 지 10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각종의 명분으로 계속되는 시대, 지금은 어떤 뛰어난 상인이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김종락기자)

연합신문(07. 07. 18) 어느 테러리스트의 테러 일기

"나는 사는 것이 지겹다. 하루가, 일주일이, 일년이 단조롭게 늘어진다. 어제는 오늘과 같고, 오늘은 내일과 같다. 똑같은 우윳빛 안개이고, 똑같은 잿빛 평일이다. 사랑도 똑같고, 죽음도 똑같다. 삶은 좁은 길 같다."(191쪽)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 직전 테러리스트로 활동했던 소설가 보리스 사빈코프(1879-1925)의 자전소설 '창백한 말'은 소설이라기보다 한 개인의 내면적 기록이자,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읽히는 작품이다. 사빈코프가 테러리스트로 활동했던 1904-1905년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뿌리부터 흔들렸고,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정치에 반발한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궐기했다.

당시 사회혁명당원으로 활동했던 사빈코프는 1904년 러시아 내무장관이던 바체슬라프 플레베를 암살하고 1905년에는 모스크바 통치자였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르비치 대공을 살해했다. '창백한 말'의 무대 역시 러시아 혁명 직전의 모스크바다. 작가는 사회혁명당에서 활동하는 조지 오브라이언이라는 테러리스트의 세 차례에 걸친 총독 테러 과정을 통해 자신이 저질렀던 테러의 이유와 목적, 그리고 테러의 정당성을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주인공은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테러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뇌는 "왜 테러의 길을 가고 있는지 모른다"고 중얼거린다. 총독에 대한 1차 테러시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광장에 운집한 사람들을 보며 "전부 폭탄을 먹여줘야해"라며 알 수 없는 분노를 터트리기도 한다. 그러나 주인공이 끝까지 기대려 했던 '테러의 정당성'은 질투심 끝에 연인의 남편을 살해하면서 산산조각나고 만다. 그것은 전혀 "명분 없는" 테러였다. 이윽고 그는 장관을 테러하라는 상부 지시에 이렇게 반문한다. "어째서 살인을 합니까?"



또 다른 장편 '검은 말'은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 녹색군 등으로 신분을 바꿔가며 적극적인 반 볼셰비키 투쟁을 전개했던 시기를 담은 작가의 마지막 유작이다. 1917년 혁명 이후 조국으로 돌아온 작가는 케렌스키 임시정부 하에서 국방차관까지 지냈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로 제명되자 러시아 장교들을 이끌고 볼셰비키 정부에 대항했다. 1924년 체포돼 이듬해 감옥에서 삶을 마감했다.

"내가 이 땅에 발 딛고 서 있는 한 볼셰비키와 끝까지 투쟁하리라"고 선언했던 작가의 볼셰비키 정부와의 투쟁사가 소설 형식을 빌려 자세히 담겨있다.(이준삼 기자)

07. 07. 21-22.

P.S. '보리스 사빈코프'란 이름이 생소하면서도 왠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주는데, 내가 스쳐지나갔던 책들의 저자이어서인 듯하다. 위의 이미지는 '한 테러리스트의 회고록'이란 제목의 책으로 '나의 20세기'란 시리즈의 한 권이다(모스크바에서 내가 탐내던 시리즈였다). 그리고 그의 두 자전적 소설은 내가 러시아에 있던 2004년에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로 영화화되었다(내가 소장하고 있는 영화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Савинков Б. - Всадник по имени Смерть: Конь бледный; Конь вороно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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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서 기획특집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에서 지난주부터 '우리사회의 담론 풍경'을 다루고 있다. '지식인의 죽음'과 직접 관련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도적인 담론의 변화과정이 한국사회사의 축도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한번쯤 읽어봄 직하다. 이번주 '동아시아론'까지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7. 14)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Ⅳ-(1)우리사회의 담론 풍경:총론

2007년 여름, 새로운 밀레니엄이 열린 지 오래이건만 우리 사회에서 이제 한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민주화시대 20년과 이를 결산하는 12월 대통령 선거가 주는 함의 때문인 듯하다. 해방 이후 60여년간 숨가쁘게 달려온 건국, 산업화, 민주화가 이렇게 한 순환을 마감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실존적 거점과 전략적 방향에 대한 질문에 지식 사회는 어떤 응답을 하고 있는가.

지난 20년 동안 우리 사회 담론의 역사는 민주화 과정에 못지않게 드라마틱하다. 1980년대가 사회 구성체 논쟁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주의와 민족해방주의의 분출로 특징지어진다면, 1990년대는 ‘문화의 시대’의 도래와 외환위기의 충격에 대한 대응이 담론의 흐름을 주도해 왔다. 2000년대에 들어와 우리 사회 담론의 지형은 이제까지 제출된 이론적 테제와 경험적 분석들이 심화되고 분화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주목할 것은 최근 우리 사회 담론의 지형이 좌파 대 우파, 보수 대 진보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 복합 구도를 형성해 왔다는 점이다. 그것에는 이념적 구도와 탈이념적 구도가 혼재하며, 서구주의와 비서구주의가 공존한다. 세계주의 대 민족주의, 현대 대 탈현대, 시장주의 대 국가주의, 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 개발주의 대 생태주의 등 복합 구도가 현재 우리 인문·사회과학 담론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



# 세계주의 대 민족주의

세계주의와 민족주의의 충돌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인문·사회과학 전반을 이끌어온 구도다. 오늘날 세계화가 우리 삶과 사회를 송두리째 변화시키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주의 담론은 이중적 속성을 갖는다. 한 편에서 그것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표현되는 보편주의를 강조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서구 제도 및 가치를 특권화하는 오리엔탈리즘, 다시 말해 서구중심주의를 내포한다.



민족주의는 세계주의에 맞서는 담론이다. 우리 민족주의 담론은 서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에게 민족주의는 이른바 ‘근대의 발명품’ 이상의 것이며, 무엇보다 제국주의에 맞서는 민족해방주의의 전통을 이어 왔다. 문제는 민족주의에 내재된 집단주의 성향과 과잉 애국주의 경향이다. 이 점에서 ‘민족주의는 없다’는 일각의 주장은 예각적이지만 여전히 음미할 만하다.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충돌에서 주목할 것은 동아시아(또는 동북아시아) 담론이다. 민족국가와 세계체제 사이에 존재하는 지역체제로서의 동아시아의 역사와 사회를 새롭게 이론화하려는 동아시아론은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의 21세기 버전이자,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대항 담론이다. 동아시아론은 우리 안의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현대주의와 전통주의,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의 모순적 공존과 새로운 화해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 현대 대 탈현대

현대와 탈현대 사이의 논쟁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돌아보면 90년대 초반 문화의 시대와 더불어 촉발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토론만큼 격렬한 논쟁은 없었다. 한편에서는 한국적 특수성을 주목해 포스트모던 논의들을 가치 없는 발상이라고 비판해 왔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국적 적용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그 결과 ‘미완의 과제’로서의 현대성을 옹호하려는 흐름과 ‘총체성의 폭력’에 저항하려는 흐름이 팽팽히 맞서 왔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론의 등장은 시기상조였던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90년대 중반 외환위기의 충격은 담론의 중심을 문화에서 경제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세계화, 정보사회와 결합된 포스트모던 현상은 꾸준히 증가해 왔으며 영화, 음악, 미술 영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늘려 왔다. 제도는 여전히 현대적 질서 안에 있되, 의식 및 문화는 빠른 속도로 포스트모던화되는 ‘제2의 현대’ 또는 ‘성찰적 현대’가 우리 사회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 시장주의 대 국가주의

지난 40년간 우리 사회 산업화를 지탱해 온 패러다임은 발전국가론이다. 추격산업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부각시킨 발전국가론은 시장, 시민사회보다는 국가를 중시하는 이론을 유포시켰다. 전통적 유교 사상과도 잇닿아 있는 국가주의는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일견 타당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산업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민주화의 요구가 분출하는, 이른바 자본주의에 내재한 ‘민주주의 효과’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담론이기도 했다.



시장주의가 부상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시장주의는 시장에서의 경쟁 메커니즘이 경쟁력 및 효율성을 높임으로써 합리성을 제고한다고 주장한다. 세계화 시대가 무한경쟁의 시대인 한 시장주의는 거부하기 쉽지 않은 패러다임이다. 하지만 시장주의는 결과적으로 공공성을 훼손하고 사회적 연대를 위협하게 되는 자기파괴적 속성을 안고 있다. 오늘날 이런 신자유주의 논리는 기업과 대학은 물론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등 우리 사회 전 영역에서 지배집단의 새로운 담론의 정전(正典)으로 자리잡고 있다.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시장의 효율성과 국가의 공공성을 결합하려는 담론이다. 김대중 정부의 국정철학으로 제시된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사회민주주의를 갱신하고자 한 서유럽 ‘제3의 길’의 한국적 버전이라 할 만하다. 문제는 민주적 시장경제론이 최근 새로운 시험대 위에 올라 서 있다는 점이다. 세계화 시대 점증하는 사회적 양극화를 어떻게 해소하고 훼손된 사회적 연대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에 대해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응답해야 한다.

# 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

개인과 공동체 가운데 무엇을 더 중시할 것인가는 오랜 철학적 질문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한 우리 내부에는 개인적 정체성과 공동체적 정체성이 공존한다. 개인주의가 양도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율과 책임에 기반한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져왔다면, 공동체주의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사상적 지반을 제공해 왔다. 문제는 개인주의든 공동체주의든 과잉에 있다. 개인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하면 사회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빠지게 되며, 공동체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하면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권위주의가 강화된다.



이른바 ‘공동체 자유주의’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출된 담론이다. 서구적 자유주의와 동아시아적 공동체주의를 결합한다는 점에서 이 담론은 80년대 이후 서구 신보수주의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담론 역시 문제가 없지 않다. 개인주의를 실현해야 할 영역에 권위주의 통치로 돌아가고 공동체주의를 구현해야 할 영역에 시장적 경쟁을 강제하는 모순적 혼합물이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개인적 자율과 사회적 연대를 어떤 생산적인 방식으로 결합할 것인가는 여전히 중대한 철학적 숙제이자 사회과학적 과제다.

# 개발주의 대 생태주의

개발주의와 생태주의의 충돌은 민주화 과정에서 형성된 또 하나의 구도다. 생태주의는 인간과 자연, 사회와 자연간의 새로운 공존을 모색하려는 패러다임이다. 생태주의는 근대 문명에 의한 환경의 의식적, 무의식적 파괴가 현재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음을 경고한다.



우리 사회에서 추진된 압축적 산업화 과정을 돌아볼 때 생태주의의 진단과 경고는 지극히 타당하다. 하지만 문제가 간단치 않은 것은, 생태 위기를 가져온 개발주의가 여전히 적잖은 국민들에게 친화적이며, 특히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성장주의 내지 물질주의 전략이 다수 시민들에게 호소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개발주의와 생태주의 사이에 어떤 가교를 놓을 수 있을지에 대해 우리 인문·사회과학은 새로운 모색을 요구 받고 있다.

# 담론의 탄생을 기대하며

지식사회 담론은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통로다. 담론의 영역에서 다양한 구도가 공존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복합사회 또는 다원사회로 변화돼 왔음을 증거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화되는 추세 속에서도 이에 맞서는 다양한 이론과 대안들이 담론의 경쟁 및 투쟁을 펼치고 있다.



문제는 대안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마감하는 현재, 우리 사회는 새로운 사상적·담론적·정책적 거점과 전략을 요구한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 사회 담론들은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다. 첫째, 성찰적 사유와 상상력을 좀더 발휘해야 한다. 성찰성은 타자의 논리를 통해 자신의 논리를 돌아봄으로써 설명력과 설득력을 높일 수 있다. 둘째, 지속가능하고 실현가능한 미래에 대해 좀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새로운 정책은 새로운 비전에서 비롯되며, 새로운 비전은 새로운 담론에서 태어날 수 있다.(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

경향신문(07. 07. 21)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Ⅳ-(2) 동아시아론

# 담론과 현실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갭’

주식 좀 한다는 사람치고 최근 중국 증시의 활황과 관련해서 차이나펀드에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골프를 좋아한다면 저렴한 가격의 중국이나 동남아 골프투어 패키지가, 쇼핑에 관심이 많다면 도쿄나 홍콩으로의 쇼핑여행이 괜찮은 여름 휴가의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오늘날 동아시아는 지식인들의 고담준론 속에서보다 평균적 한국인의 일상적 경험 속에 더 빠른 속도로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오늘날 동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자본이 축적되고 순환되는 곳이며 그런 의미에서 발전과 성장의 자본주의적 시간이 가장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곳이기도 하다. 동아시아를 이 폭발적 변화 속에서 다루는 한 담론은 늘 현실에 뒤처지게 마련이며, 지식은 현실에 대한 스스로의 무능력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동아시아 담론이 생생한 현실의 필요에서 출발하는 한 이 주제는 논의성과와는 별도로 쉽사리 도외시되거나 도태될 수 없다. 동아시아 담론의 ‘긴 생명력’과 지지부진한 ‘아웃풋’이 공존할 수 있는 비밀은 여기에 있는 셈이다.



# 동아시아 담론의 대두와 그 배경

한국의 지식지형에서 동아시아 담론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초중반의 일이다. 87년 민주화 항쟁 및 ‘북방정책’의 성과로 사회주의권 국가와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지식인 사회를 옥죄었던 이념 콤플렉스가 해소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사회주의는 우리 앞에 맨 얼굴을 드러내기 무섭게 스스로 간판을 내리게 된다. 레닌의 동상이 끌어내려지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사태 속에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해 왔던 냉전은 종식을 선언한다.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된 이 새로운 변화에 대해 기존의 비판적 진영이 주목하고 대응해야 할 필요가 비판적 지식집단에서 제기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미국,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하는 보다 넓은 주변의 지정학적 구도 속에서 한국과 한반도의 위상을 다시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요청되었다.



# ‘창비 그룹’과 동아시아 담론의 제기

이 문제를 하나의 화두로서 비판적 지식계에 제시한 것은 ‘창비 그룹’의 지식인들을 첫 손에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분단체제와 세계체제’라는 패러다임을 빌려 한반도의 현실을 설명하고자 했다.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온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더 큰 틀의 부분적 구성요소에 불과하다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사회주의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좋은 이론적 탈출구이자 역사발전이 종착점에 도달했다는 후쿠야마식의 역사 허무주의를 반박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냉전구도의 세계적 해체에도 불구하고 냉전에 기댄 한국사회의 억압적 질서는 여전히 건재했다. 비판적 지식인의 근본 과제를 분단체제의 극복으로 보는 백낙청을 위시한 ‘창비 그룹’ 지식인들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보편성과 한반도 분단현실의 특수성이라는 양자 간의 거리와 차이를 넘어설 가능성을 찾는 작업이 시급했다. ‘동아시아’는 양자를 매개하는 ‘중간수준’의 범주로서 제기되었다.



# 탈근대적 상상력과 문명적 대안으로서의 동아시아

그러나 이들이 제기한 동아시아론은 ‘과학적 사회주의’와 ‘운동’에 익숙했던 진보적 지식진영의 ‘본류’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했다. 동아시아론이 갖는 진보 담론의 자기쇄신이라는 측면은 묻히게 되고, 반응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잡지 ‘상상’은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력의 원천으로 동아시아를 진지하게 문제 삼았다. 서구 중심적 사유로는 포착될 수 없는 동아시아 고유의 가치관과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발견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여기서 동아시아론은 근대적 가치에 대한 회의와 그 극복방안을 모색하는 일종의 ‘탈근대 담론’으로서 다루어진다. 창비의 문제제기에 전제되었던 정치적 성격은 탈각되면서 문화론, 문명론적 접근이 이를 대체하였다. 이러한 이면에는 보수적 입장의 문화 민족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 전통적 가치와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의 상관성

동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의 경제적 성공 원인을 유교의 전통적 가치관에서 찾는 유교자본주의론은 서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동아시아의 지속적 경제성장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동아시아 유교 전통의 계승과 현대사회에서의 창조적 활용을 내세우는 ‘신유가(新儒家, New Confucianism)’의 철학 및 윤리관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사상체계로서의 신유가 혹은 현실에 대한 설명모델로서의 유교자본주의론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그 속에 함축된 보수주의적 현실관이다. 유교자본주의론의 한국적 수용 또한 현실에 대한 보수적 긍정에서 출발한다. 예컨대 유석춘은 정경유착과 연고주의 등 유교전통에서 파생된 문화적 토양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경제의 발전에 장애요소가 되기보다 오히려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에는 어떤 발전이 바람직한가를 따지는 ‘가치의 문제’ 이전에 경제적 성공이라는 ‘사실의 문제’로 논의의 초점을 이동하자는 현실에 대한 보수적 긍정론이 전제되어 있었다.



# 외환위기와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발흥

그러나 이러한 보수주의적 현실긍정론은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거래비용을 줄이고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고 높이 평가되었던 ‘아시아적 가치’가 한국경제를 나락에 빠뜨리는 주범으로 일순간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 담론 또한 시스템의 총체적 위기상황과 긴밀히 연동된다. 서구의 금융 패권 앞에 동아시아는 공동의 운명에 놓여있음을 자각하게 되면서 ‘아시아통화기금’ 같은 금융협력체 구상도 등장하게 된다. 이같은 경험의 축적을 통해 지역 내부의 연대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으며 이는 동아시아 담론이 문화적 공동유산에서 국가의 생존과 발전의 전략적 비전과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경제의 글로벌한 통합과 더불어 경제의 지역화·블록화 경향의 동시적 진행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파도는 동아시아에서의 지역주의의 전진에 걸림돌이 되기보다 촉진제가 되었다.



# 국가와 기업, 동아시아 담론의 새로운 생산자

외환위기 이후의 동아시아 지역통합론은 국가의 주도 아래 진행되었다. 그러나 다국적기업 역시 이 문제에 관한 한 국외자일 수 없었다. 특히 지역경제의 성장엔진으로서 중국 경제가 갖는 막강한 파워는 동아시아에 대한 기업의 관심에 촉매제로 작용하였다. 국책연구소와 더불어 대기업 산하의 경제연구소가 동아시아 담론의 새로운 생산주체로 등장하였다. 막대하게 쏟아져 나오는 보고서들은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국가와 기업의 시각을 우리에게 생생히 전달해 준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이 주도하는 공공적 담론영역의 의제는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거버넌스와 무관할 수 없으며, 국민경제에 미치는 거대기업의 영향력이 증대되어감에 따라 개별 기업의 문제가 공적 담론장의 중심에 놓이는 일도 빈번하다. 한국 경제의 현주소를 일본과 중국 사이에 낀 신세로 갈파한 어느 재벌 그룹 회장의 세칭 샌드위치 위기론은 그 타당성 여부와 무관하게 어떤 지식인의 담론보다 강력한 권위와 대중적 파급력을 가진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에게 동아시아 담론이 더 이상 지식인 사회 내부에서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방식으로 생산·유통될 수 없게 된 담론 생태의 변화를 보여준다.



# 비판적 지식담론으로서 동아시아론의 열린 가능성

동아시아 담론은 유행 담론이 급속이 교체되는 한국 지식사회의 풍토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참여정부의 ‘동북아중심국가론’은 국가적 아젠다로까지 확산된 동아시아 담론의 현주소를 보여준 사례이다. 그렇다면 정작 오늘날 여전히 비판적 입장에 서고자 하는 지식인에게 동아시아 담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책임감 있게 다루어 ‘창비 그룹’의 지식인들은 ‘동아시아적 시각’(최원식)에 대한 강조에서 한 걸음 나아가 지식과 사유를 반추하는 ‘지적 실험으로서의 동아시아’(백영서)를 제창한다. 국가나 기업의 ‘현실주의적’ 동아시아 담론과 구분되는 지식인 고유의 성찰적 면모가 두드러진다.

그런데 최근 이들의 지적 행보에는 미묘한 중심이동이 감지된다. 비판적 싱크탱크 집단의 형성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동아시아를 ‘한반도의 미래구상’이라는 전략적 목표와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국가 및 시장(기업)에 대해 취해온 ‘비판적’ 거리의 소멸에 대한 우려가 없을 수 없다. 진보 개혁 담론의 위기가 운위되는 오늘, 동아시아라는 화두는 비판적 지식인들로 하여금 현실에의 적극적 개입과 고유의 비판적 입지의 확보라는 어려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밀고 나가는 중요한 시험대가 아닐 수 없다. 향후 이 논의에 세대와 입장을 달리하는 다양한 주체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동아시아 담론이 갖는 현실적 의미가 보다 풍부하게 드러나기를 기대해 본다.(이정훈|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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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21 09:25   좋아요 0 | URL
로쟈님 말씀대로 오늘 집을 나서면서는, 한겨레와 더불어 경향신문도 사보려고요. 한국일보는 아침에 집으로 배달되고. 경향에도 읽어볼 게 많은거 같군요.

로쟈 2007-07-21 09:46   좋아요 0 | URL
주말판은 북리뷰들도 들어있기 때문에 본전 이상을 뽑지요.^^
 

김우창 읽기를 위한 리스트. 물론 일차적인 건 그의 전집과 대담이며, 그밖에 여러 김우창론들을 참조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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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7-21 02:03   좋아요 0 | URL
<풍경과 마음>은 2003년에 초판이 나왔을 때ㅡ사실 이 초판의 표지 디자인이 현재의 총서 판본 디자인보다 더 멋지다는 생각인데요^^ㅡ구입해 탐독하면서, 김우창 선생이 어떤 초탈하면서도 허허로운 경지에 살짝 이르셨다는 생각이 들어, 슬쩍 경외감이 일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역시나 감사. 로쟈님의 리스트를 보니 솔출판사에서 1996년 보급판으로 간행되었던 <심미적 이성의 탐구>가 빠져 있는 듯 한데, 이 책은 요즘은 아마도 절판이겠죠? 오랜만에 상기된 기억의 힘을 빌어 서가에서 책을 꺼내 다시 한 번 탐독ㅡ탐욕스럽게 독서ㅡ해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7-21 02:07   좋아요 0 | URL
네, <심미적 이성의 탐구>는 이미지도 뜨지 않습니다.--;

심승보 2007-10-27 00:42   좋아요 0 | URL
김우창도 후학이 반드시 거쳐가야 할 관문이지만, 앞으로 50년 100년 그 이상 갈 수 있는 건 바로 조동일 입니다. 공부다운 공부를 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근 계명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오고 있는 <세계,지방화 시대의 한국학> 1-6권을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7-10-27 00:48   좋아요 0 | URL
심승보님이 먼저 자세하게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심승보 2007-10-28 01:47   좋아요 0 | URL
www.agora.co.kr (서강 아고라)에서 '지성적 책읽기' 코너에 제가 김영건 선생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조동일 교수님의 홈페이지도 언제나 열려 있는 공간이니 많은 분들의 참여가 있었으면 합니다. http://chodongil.x-y.net/ 이 곳에서 업적목록을 잠시 개괄해 본다면 그 분의 학문이 어떤 자취를 그리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조동일로 들어서는 추천도서는 기본적으로 <우리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이 땅에서 학문하기>, 좀 더 찐한 속살을 원할 경우 <세계문학사의 허실> <카타르시스, 라사, 신명풀이>, <동아시아문학사비교론>, <하나이면서 여럿인 동아시아문학>, <공동문어문학과 민족어문학>, <문명권의 동질성과 이질성>, <한국의 문학사와 철학사>, <철학사와 문학사 둘인가 하나인가> 등을 우선 꼽을 수 있겠습니다. 로쟈님은 조동일 교수의 학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궁금합니다. 혹시 아직 별 관심이 없으셨다면, 이번 기회에 한번쯤 꼭 일별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로쟈 2007-10-28 10:33   좋아요 0 | URL
몇몇 책들은 저도 읽은 것이구요(제가 더 많이 읽은 건 보다 젊은 시절의 저작들입니다). 제 관심사가 '거시적'이지 않아서 조동일 선생의 학문을 다 따라가지 못합니다. 보다 관심있는 분들이 글을 올려주시면 홍보가 되겠습니다...

심승보 2007-10-28 23:34   좋아요 0 | URL
네, 이른 시기의 조동일이라면 아무래도 그 번지수가 <한국소설의 이론> <문학연구방법> <한국문학사상사시론>의 초기3부작 부근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넓혀 잡자면 정문연 시절의 <한국문학통사> 태동기 정도까지 볼 수 있을 듯 싶군요. 이 때까지의 저작도 물론 훌륭하지만, 조동일이 본격적으로 국문학자의 범주를 박차고 나간 90년대 이후의 작업들에 전 훨씬 더 큰 의의를 부여하는 쪽입니다. 그 쪽의 매우 풍성한 연구성과들이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평가받고 논의되지 못하는 것은 정말 크나큰 불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꼭 한번 최근의 저작들을 관심있게 읽어주시길 개인적으로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7-10-28 23:51   좋아요 0 | URL
국문학 전공자라면 필독서로 다들 읽는 책들일 텐데,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하신 건 의외입니다. '학술서' 범주로 수용된 탓이 아닐까요? <우리학문이 길> 같은 책은 큰 반향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본적으론 제가 조동일 교수의 '세계문학사'론 같은 거시담론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하기에 관심을 덜 갖는 면이 있습니다. 저보다 더 공감하시는 분들이 후속 작업을 열심히 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심승보 2007-10-29 00:57   좋아요 0 | URL
우선 로쟈님 말씀의 초점이 다소 명료하지 못한 듯 싶습니다. '국문학 전공자라면 다들 필독서로 읽는 책'이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시는 지 우선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제 입장을 좀 더 분명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조동일은 분명 국문학 전공자라면 '다들' 읽게 되는,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럴 수 밖에 없는, 교과서적 권위를 지닌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국문학도 뿐 아니라 그 어떤 전공자들도 거의 읽지 않는 책들 또한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 한쪽 그늘, 굳이 퍼센티지로 따지자면 그의 총저작물의 거의 7-80%를 족히 육박하는 거대한 그늘에 대해 지적한 것입니다. 그것이 안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간단한 부연 설명을 덧붙여 보겠습니다. 우선 <한국문학통사> 정도는 우리나라의 국문과 대다수가 교과서로 택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컨대 자타 공인의 국문학과 필독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문학 전공자에게 말 그대로 읽힙니다. 막상 그 다섯권을 다 읽어 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편의 의구심이 또 한번 솟구치지만, 어쨌든 제목은 아는 사람 참 많습니다. 그리고 말씀해 주신 대로 <우리 학문의 길>은 그나마 사정이 좀 괜찮습니다. 인지도가 꽤 되고, 제목의 도발성 덕인지 어느 정도 사회적 반향도 있었습니다. (그래 봤자 93년에 나온 책이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 290을 달리고 있습니다. 한편 2004년에 번역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어느새 3400포인트를 넘어섰습니다. ) 그럼 '통사'와 '우리학문의 길' 2권을 제한, 다른 책을 가지고 한번 이야기를 해 본다면 다음으로 어떤 책을 꼽을 수 있을까요. 공저까지 합하면 총 70권이 넘는 그의 저작 중에 기껏 10권도, 아니 아마 5권이라 해도 별반 차이는 없는 게 현실입니다, 제대로 책 제목을 아는 사람이 없다면 과연 그 사상가가 제대로 논의되고 있는 형편인 건지 의문입니다.

로쟈 2007-10-29 01:22   좋아요 0 | URL
안타까워하실 만하지만 안 읽히고 있는 책들로 말하자면 조동일 교수의 책들만은 아니지요. 너무 방대한 분량과 체계가 전공자들을 포함한 독자들의 접근을 가로막는 것일 수도 있겠구요. '학술서' 범주라고 말씀드렸는데, '학문적 업적'으로서 탁월한 성취를 이룩한 학자라는 건 다들 인정하지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한다는 건 무리한 요구가 아닐까요? 일반 독자들이 아니라 '학자들'이 읽고서 논쟁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서재는 제 취향과 관심을 반영할 수밖에 없지만 '학술적' 성격의 논의는 가급적 배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심승보 2007-10-29 01:23   좋아요 0 | URL
참고로, 제가 우리 학계 전반 또는 대학원생, 학부생들에게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아예 읽혀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안타까운 책들을 구체적으로 밝혀보겠습니다.

<동아시아문학사비교론> <제3세계문학연구입문>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세계문학사의 허실> <인문학문의 사명> <카타르시스, 라사, 신명풀이> <동아시아 구비서사시의 양상과 변천>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 1-3> <하나이면서 여럿인 동아시아문학> <공동문어문학과 민족어문학> <문명권의 동질성과 이질성> <세계문학사의 전개>

솔직히 이 중 대다수의 저서는 이미 국내 학계가 수용할 수 있는 주파수를 넘어간 것들입니다. 아마 그것이 제가 안타까워 하는 이유의 가장 큰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승보 2007-10-29 01:30   좋아요 0 | URL
네, 로쟈님 말씀도 맞는 것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남의 안락한 서재에 와서 훼방을 놓은 것 같아 한편 죄송합니다. 혹시나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와 <탐구>들 또한 전형적인 최전선의 이론서, 학술서들 아닌가요. 또한 그러한 어려운 책들을 철학전공자들만 읽는 게 아님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조동일의 책이라고 해서 뭐 그렇게 학술적이라는 이유로 읽혀서 안 될 이유는 없지 않은가요. 로쟈님 말씀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그런 고집이 생깁니다. ^^;

로쟈 2007-10-29 02:31   좋아요 0 | URL
들뢰즈의 독자들이 유행을 타서 좀 많긴 하지만 <그라마톨로지>나 <탐구>를 몇 명이나 읽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냥 들뢰즈 정도가 예외라고 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