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근작 <폭력의 역사>(2005)의 국내상영 소식은 예고된 바 있는데, 곧 상영되는 모양이다(데이비드 린치의 신작 <인랜드 엠파이어>와 함께 최근 가장 주목되는 개봉작이다. 상업적으로가 아니라 영화적으로). 이번주 '씨네21'에서는 이 두 감독의 영화세계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지만 아직 온라인에서는 읽을 수 없기에 대신 '영화평론가 오동진의 동시 상영관'에서 <폭력의 역사>에 대한 리뷰만을 옮겨놓는다. 분량이 읽기에 적합한 것도 옮겨오는 이유이다(기사에는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다).

문화일보(07. 07. 24) 가정을 지키려는 ‘家長의 폭력’

‘비디오드롬’과 ‘플라이’, ‘크래쉬’와 ‘엑시스텐즈’ 등의 영화로 기억되는 캐나다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인간의 육체와 기계가 결합해 이루어지는 하이브리드(hybrid)한 영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영화는 공포와 공상과학(SF)을 오가며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극단적일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인간이 얼마나 혐오스러울 수 있는 존재인가를 파헤친다.

‘비디오드롬’에서는 인간이 텔레비전과 몸을 합치고 ‘크래쉬’에서는 주인공들이 결국 자동차와 섹스를 나누는 식이다. ‘플라이’같은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기계 대신 다른 생명체, 곧 파리의 유전자를 합쳐 결국 파리인간이 되고 만다.

이 해괴망측할 만큼 노골적으로 폭력적인 얘기들을 통해 크로넨버그는 의도적으로 반(反)휴머니즘의 노선으로 자신을 내모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반인간주의의 목표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인간형, 새로운 인간성에 대한 탐구 곧 진짜 휴머니즘에 대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인간다움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야말로 그의 기이한 상상력이 닿으려고 하는 지점이다.



국내에서 뒤늦게 단관상영되는 크로넨버그의 2005년작 ‘폭력의 역사’는 전작들에 비해 에피소드들이 상당히 ‘인간적’이고 ‘구체적’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기계인간이나 파리인간 따위는 이번 작품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크로넨버그는 이제 극단적 사유의 관념론자라는 평가를 벗어나려는 듯 인간 삶의 구체적 행태를 뒤좇는 데 주력한다.



미국 인디애나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소박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톰 스톨(비고 메텐슨)은 변호사인 아내 에디(마리아 벨로), 그리고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중년 가장이다. 하지만 그런 주인공의 평온한 일상은 어느 날 이 식당에 별다른 이유없이 살인을 일삼고 다니는 두 남자가 침입하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두 악당의 이미지는 마치 트루먼 카포티가 쓴 ‘콜드 블러드’의 두 악한들을 연상시킨다) 톰은 여종업원의 목숨을 위협하는 두 악당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자신도 다치게 된다.



이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톰은 사람을 구한 영웅으로 방송을 통해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가 악몽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왔다는, 언뜻 보기에도 마피아로 보이는 칼 포가티(에드 해리스) 일당은 톰 스톨의 식당과 집을 오가며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칼 포가티는 톰이 20년전 필라델피아에서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킬러 조이 리치였다며 그에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강요한다. 자신은 절대 조이 리치가 아니라고 부인하던 톰 스톨은 이들의 집요한 추궁에 조금씩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폭력의 역사’라는 다분히 학술적 분위기의 제목과 달리 이 영화는 폭력에 대한 역사적 이론이나 사회정치적인 거대담론을 내세운 작품이 아니다. 그보다는 폭력의 일상성 혹은 그 순환성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영화는 우리가 얼마나 폭력적인 삶에 노출돼 살아가고 있으며 폭력적인 문제에 얼마나 근접해 살아가고 있는가, 그 굴레에서 자유롭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점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폭력은 결국 폭력으로 계속해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말하려는 폭력의 일상화는 9·11 이후 전세계에 만연돼 있는 테러의 공포와 무관치 않다. 주인공처럼 일단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게 되면 자신이 그동안 지키려 애썼던 현재적 삶의 가치가 무엇이든, 잊고 싶은 과거가 어떻든 그 구별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가 가해자였고 누가 피해자였으며 궁극적으로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가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폭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자기생명력을 가지고 운행되며 그럼으로써 결국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아내 에디는 20년 가까이 과거를 속여 온 남편 톰을 용서하지 않는다. 톰으로 하여금 과거의 킬러, 곧 조이 리치의 삶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건 결국 누구인가. 칼 포가티 같은 마피아 일당인가 아니면 톰에게 마음의 벽을 쌓는 아내 에디인가. 폭력의 공모자는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질문이다.(오동진 영화평론가)

07. 07. 24.

P.S. 폭력에 관한 책 몇 권을 독서목록에 올려놓고 있다. 그러다 공연히 톰의 경우처럼 '폭력적인' 나 자신을 '재발견'하게 될는지도 모르겠지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자꾸때리다 2007-07-24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흐. 이런 영화는 CGV 강남 같은 데에서는 개봉 안하나열?

로쟈 2007-07-25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그런 게 보이지 않는 폭력이지요. 대신에 쓸데없는 영화들만 주변에 널려 있는 현실...

수유 2007-07-28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데이비드의 영화는 즐기진 않으나 봐두어야 할 영화로 분류하고 날짜를 정하는 중입니다..그러고보니 즐겨 달려가 행복하게 봐야 할 영화들과 <폭력의 역사>같은 영화와 여유를 가지고 음미하듯 천천히 걸어가 볼 영화들로 내 방학의 영화들이 나누어지네요..^^

로쟈 2007-07-28 21:27   좋아요 0 | URL
방학의 '여유'가 느껴지네요. 부럽습니다.^^;
 

계절학기 강의가 있어 학교에 나오는 길에 읽은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7월 24일)'은 아이작 싱어의 <행복한 바보들이 사는 마을, 켈름>(두레, 1999)을 다루었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만큼 예전에 많이 소개된 작가인데 요즘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건 주로 그의 동화들인 모양이다. 싱어와 관련한 몇 안되는 기억을 기사를 따라가며 적어본다.

197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이작 싱어가 1991년 7월 24일 87세로 사망했다. 싱어는 폴란드 태생으로 1935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계 작가다. 그는 헤브라이 문자로 표기하는 동유럽 유대인의 언어인 이디시(Yiddish) 어로 작품활동을 했다.

이 동구권 태생의 유대계 작가에 대한 최초의 인상은 아마도 영화로 만들어진 <적 그리고 사랑이야기>(1989)로부터 비롯되는 게 아닌가 싶다(영어 제목이 'Enemies, a love story'이고 국역본은 <적들, 어느 사랑이야기>). 그 전에도 물론 고려원 등에서 나온 책들을 서점에서 보곤 했지만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두진 않았었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였는데(싱어의 아버지는 랍비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내 기억엔 영화의 예고편 정도만을 본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어쨌거나 <적, 그리고 사랑이야기>라는 제목만은 기억에 각인이 되었다('적들, 어느 사랑이야기'란 제목보다는 낫지 않은지?). 



 

 

 
 
이디시 어는 지금은 사어(死語)화해 이스라엘에서도 사용을 기피하는 언어이지만, 싱어는 고집스럽게 이 언어에 유대인의 전통과 고난, 지혜를 담았다. <적들, 어느 사랑 이야기> 등 그의 몇몇 작품이 번역돼 있는데, <행복한 바보들이 사는 마을, 켈름>은 언제 펼쳐 읽어도 재미있고 마음 훈훈해지는, 타고난 이야기꾼 싱어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책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싱어와 접하게 된 건 친하게 지냈던 한 체코 여자의 추천 덕분이다.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아이작 싱어'라고 답했고 영어로도, 체코어로도 많이 나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읽게 된 게 (체코와의 관련 때문이기도 하고) <카프카의 한 친구>(중앙일보, 1978). '아이작 싱거 단편선'이라고 소개됐던 책인데, 표제작과 몇몇 작품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자세한 독후감은 일기에 적어두었는데,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둘러보니 시중에선 구하기 어려운 책인 듯한데 새단장을 해 출간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싱어는 기본적으로 이야기꾼이다). 그나저나 '행복한 바보들이 사는 마을' 이야기는 이렇다고 한다.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고 무구한 가족을 파괴하는 어리석은 전쟁과 잔인한 박해로 인해 어른이 될 기회를 잃어버린 수많은 아이들에게 바친다”고 싱어는 이 책의 서문에 쓰고 있다. 켈름의 호수에서 잡힌 가장 큰 잉어가 어쩌다 꼬리로 바보 그로남의 얼굴을 후려쳤다. 마을 사람들은 버릇없는 잉어에게 큰 벌을 내리기로 하고 최종판결까지 물통에 가둬 살려둔다. 반 년 후 나온 선고는 ‘잉어를 물에 빠뜨려 익사시킨다’는 것. 그리고 켈름의 현자들은 만일의 경우 그 나쁜 잉어가 물에 빠져 죽기를 거부해 다시 잡힐 때는, 특수한 감옥 즉 나머지 일생 동안 죄수로 지낼 연못을 만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잉어가 받은 최고의 벌, 익사’).

 

 

 

 

추천사로 올라와 있는 뉴욕타임즈의 북리뷰에 따르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아이작 싱어, 찐짜 이야기꾼으로서의 그의 능력은 지극히 매력적이다. 이 점에서 그에 견줄 만한 사람은 우리 시대에 없다." 동화인지 우화인지 헷갈리지만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에 있어서 아마도 헝가리 태생의 이스라엘 작가 에프라임 키숀과 견줄 만하지 않을까 싶다(내가 읽은 건 <개를 위한 스테이크>밖에 없고, 후보로 자주 오르내린다는 키숀 또한 아직 노벨상을 수상하진 못했지만). 기자의 소감은 이렇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 더 권하고 싶은 책이다. 동화이기도 하고 우화이기도 한 스물두 편의 이야기, 그 주인공인 행복한 바보들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무구한 시절을 돌려준다. 세월에 세상에 찌들고 해져버린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유대인 작가들 얘기를 하다보니 얼마전 <나이트>(예담, 2007)이 번역돼 나온 노벨평화상(노벨문학상이 아니라) 수상작가 엘리 위젤이 생각난다. 198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위젤 또한 동구권(루마니아) 태생이고 홀로코스트를 체험한 작가이다. 이번에 나온 책은 "그가 열다섯 살에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에 이송되었다가 가족을 잃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 소설이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빅터 프랭클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와 함께 홀로코스트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고. 요컨대 '대표작'이 번역돼 나온 셈이다(예전에 <흑야>, <밤> 등으로 소개된 것과 같은 작품인 듯하다).

소개를 보태면, "엘리 위젤은 독일군이 자신의 고향 마을 시게트를 점령하면서 운명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부나 수용소,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겪은 일과 이송 도중에 겪은 일을 사실적으로 그려나간다. 1958년 프랑스에서 초판이 나왔고, 2006년 작가의 아내인 매리언 위젤의 새 번역판이 출간되면서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새 번역본도 다시금 주목받을 필요가 있겠다...

07. 07. 24.

P.S. 아이작 싱어의 <적, 그리고 사랑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바뀐 제목은 <원수들, 사랑이야기>(열린책들, 2008). '차별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가? 번역본들도 저마다 원수인 듯하다...

08. 03. 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자 & 노자 : 道에 딴지걸기 지식인마을 6
강신주 지음 / 김영사 / 2013년 4월
장바구니담기


여기서 우리는 노자도 어쩔 수 없이 전국시대(BC 403-221)를 살다간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전국시대에는 춘추시대(BC 770-403)보다 갈등과 대립이 더 심했다. 어떤 제후도 천하 통일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언제까지 국가를 통치할지 장담하지 못하던 시대였다. 이때 노자가 혜성같이 나타나서 국가를 오랫동안 통치하는 방법과 천하를 통일하는 방법을 제안했던 것이다.-92쪽

국가는 기본적으로 통치자(군주)와 피통치차(민중)로 나뉘는 위계적 체계다. 국가가 원활하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일종의 교환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국가라는 체계를 지탱하는 이 교환관계의 고유한 특성이다. '교환'은 기본적으로 A에게 B로 무엇인가 전달되면 B에서 A로도 무엇인가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원활히 기능하려면 통치자가 피통치자에게 무엇을 받았을 때, 통치자도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어야만 한다. -94쪽

국가 체계를 유지하는 교환의 논리를 어긴 사람은 통치자의 자리에 있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은 통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도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오직 수탈만을 일삼지 그것을 재분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노자는 통치자인 군주가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인 재분배의 도를 외면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97쪽

노자철학은 분명 영원한 진리의 철학이다. 그렇지만 그가 영원하다고 본 것은 '국가'와 '천하'라는 정치구조에 관한 것이었다. 결코 정치구조를 넘어서는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가 아니었다.(...) 그의 철학은 국가의 형식적 작동원리를 규명하고 정당화함으로써 어떻게 하면 '군주'가 이 원리에 따라 '올바른' 통치자가 될 수 있을지에 집중되어 있다. 결국 노자는 '국가'의 존재 이유에 근본적으로 반성하지 못한 사상가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104-105쪽

사회민주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노자철학도 기본적으로 현존하는 체제를 극복하는 전략일 수 없다. 다만 현존하는 체제를 안정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들어 영속화하려는 고도의 전략일 뿐이다.(...) 노자철학이 기본적으로 남음이 있는 사람에게서 출발한다는 사실과 남음의 혜택을 받을 부족한 사람이 다수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다시 말해 노자철학의 재분배는 '남음'과 '부족'이라는 위계성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논의될 수 있다. -109-110쪽

노자에게 진정한 통치자는 '남는 것이 있는데도 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그것을 부족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와중에 휘말려 있는 국가를 통일할 진정한 큰 국가는, '작은 국가의 아래에 있게 되면 작은 국가를 취할 수 있는' 국가다. 작은 국가의 아래에 있다는 것은 작은 국가를 수탈하기에 앞서 작은 국가를 보호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키아벨리가 말한 사랑의 방식을 적용한다는 말이다.-125쪽

노자의 '소국과민'이라는 정치이념에는 통치자의 강력한 지배의지가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노자가 통치자에게 권한 정책의 결과는 물론 겉으로 보면 평안하고 질박하기까지 한 시골 마을의 풍경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것에 현혹되어 노자의 정치이념이 목가적 공동체, 원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그러나 평안하고 질박한 풍경 뒤에는 통치자의 강력한 통치권 행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피통치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고 문자를 통한 반성적 사유와 이론적 대화능력을 근본적으로 없애려는 정책이 어떻게 문명에 저항하는 '작은 정부'나 '유토피아적 원시공동체'와 들어맞을 수 있을까?-130쪽

노자는 대가를 바라는 뇌물(수탈)을 마치 선물인 것처럼 포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오직 이럴 때에만 피통치자는 통치자에게 알아서 자발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통치자는 통치자에게 자신이 알아서 복종한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무위자연'이라는 노자의 유명한 주장의 실제 의미다. 통치자는 '수탈이나 억압이 아니라는 직접적인 통치 행위', 즉 유위의 정치가 아니라 '재분배나 자애로움이라는 간접적인 통치 행위', 즉 무위의 정치를 수행해야 한다. 오직 이런 무위의 정치만이 피통치자가 통치자에게 '알아서 스스로(自然)' 복종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172쪽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7-07-24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죠? :) 쉬우면서 깊이도 있고 재미도 있고. 참 괜찮았던 책입니다. 저자의 생김새와는 달리;;;

가넷 2007-07-24 09:28   좋아요 0 | URL
하하;;; 저자분이 살짝 산적같기는 하지만 ...-_-;;

로쟈 2007-07-24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파격적인 노장론이라고 생각하는데('노장철학은 없다'는 것이니까요!) 학계에서도 '이단'으로 내몰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영업비밀을 그렇게 다 누설해놓아서)...

마늘빵 2007-07-25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이 분의 관련 책이 꽤 많은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 다른건 못봤습니다. 관심 많이 가는 철학자입니다.

로쟈 2007-08-29 19:35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론 좀더 정치한 연구서가 나왔으면 하는 생각도 갖게 됩니다.

비공개 2007-08-29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사에서 이분을 초대하여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의를 듣고 파격적인 언사때문에 언짢아 하시는 분들도 있으셨지만, 무정부주의자다워서, 그리고 철학자다워서 반가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책도 한번 읽어보아야 겠네요.

로쟈 2007-08-29 19:35   좋아요 0 | URL
'파격적인 언사'의 수위가 궁금하네요.^^

심승보 2007-10-28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오래 전에 출간되었던 박이문 교수의 <노장사상>과 김형효 교수의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이 가장 유명하면서도 깊이있는 대표적 연구서가 아닐까 합니다. 또한 김용옥의 관련서 <노자철학 이것이다> <노자와 21세기> 등을 역시 빼놓을 순 없겠구요. 책세상 문고판으로 나온 김시천의 <철학에서 이야기로 - 우리시대의 노장 읽기>는 비교적 최근까지 이루어진 국내외 노장사상 연구사 검토에 유용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로쟈 2007-10-28 10:34   좋아요 0 | URL
'노자 읽기'목록을 예전에 이미 작성해 놓았습니다. 심승보님의 읽기를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심승보 2007-10-28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확인해 보았습니다. 박이문 교수의 <노장사상>과 김형효 교수의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이 빠진 것이 다소 아쉽지만 유용히 참고하였습니다. 저도 내년부터 시간이 좀 나게 되면, 제 나름의 리스트들을 작성해 보겠습니다.

로쟈 2007-10-28 23:53   좋아요 0 | URL
두 책 모두 저도 읽어본 책들입니다. '노자 읽기' 목록이어서 '노장' 연구서는 배제한 기억이 있습니다. 강신주에 따르면 '노자 & 장자'가 아니라 '노자 vs 장자'의 구도이기도 하구요...
 

컬처뉴스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에 대한 서평기사를 옮겨온다. 온라인에서 읽을 수 있는 가장 자세한, 그리고 가장 유익한 기사이다. 고진의 책은 책상에 쌓여 있는 40여 권의 책들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맨 위에!) 놓여 있는데, 다른 책들에 치이다 보니 나는 뜨문뜨문 듬성듬성 읽게 된다. 고진의 '가장 쉬운 책'이라고도 하니까 보다 많은 분들이 일독해 보시길 권한다.

컬처뉴스(07. 07. 20)  GO진! 다시 "맑스로 돌아가자!"

미국의 평론가 고(故) 수전 손택은 자신만의 위대한 작가 분류법을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위대한 작가는 남편 아니면 애인, 둘 중 하나다.” 이런 구분법에 따르면 내게 가라타니 고진(1941~   )은 애인이었다.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1978)에서부터 『유머로서의 유물론』(1993)까지 근 16여 년간이었다. 이 기간은 그가 나쓰메 소세키에서부터 자크 데리다까지, 동서고금의 복잡다단한 사상을 쉼 없이 넘나들면서 깔끔히 정리해내 ‘생각하는 기계’(Thinking Machine)라는 별명을 얻게 된 시기와 겹친다.

그랬던 고진이 언젠가부터 남편이 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내 기억으로는 지역화폐체제(Local Exchange Trading System, LETS)에서 힌트를 얻어 ‘새로운 연대자 운동’(New Associationist Movement, NAM)을 주장한 2000년경부터였다. 그 해 2월과 11월 그는 『윤리21』과 『NAM-원리』를 출간했고, 2004년 5월과 7월에는 앞선 두 저작의 내용을 확장시켰다고 할 만한(또는 앞선 두 저작의 ‘심화’라고 할 만한) 『네이션과 미학』과 『역사와 반복』을 ‘가라타니 고진 저작집’(定本柄谷行人集)의 4권과 5권으로 출간했다.

얼마 전 번역되어 나온 『세계공화국으로』(조영일 옮김)는 이른바 ‘고진의 남편-되기’의 정점에 해당하는 책이다. 우리는 이제 여러 사상들을 현기증 날 만큼 빠르게 넘나드는 솜씨를 과시하는 연인으로서의 고진을 더 이상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때로는 변덕스러워 보이고, 때로는 신뢰할 수 없어 보이지만, 그만큼 위험해 짜릿한 느낌을 맛보여주는 연인으로서의 모습을.

『세계공화국으로』의 고진이 남편처럼 보이는 이유, 그러니까 믿음직함, 이해할 수 있음, 관대함, 점잖음 같은 안정감을 주는 이유는 본인 스스로 서문에서 밝혔다시피, 과거와 미래의 독자들을 위해 자신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제시하려고 애쓰며 지금까지 자신이 써온 곳을 콤팩트하고 알기 쉽게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제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드러내며, 그만큼 자신의 의견에 책임을 지려고 한다.

그러나 ‘놀던 가락’이 어디 가지는 않는 법, 『세계공화국으로』의 고진 역시 짜릿한 느낌을 선사해 준다. 다만 그 느낌이 위험함이 아니라 대범함에서 온다는 게 다르다. 그리고 그 대범함의 핵심에는 “맑스로 돌아가자”라는 구호가 놓여 있다. 이런 점에서 『세계공화국으로』의 고진은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를 떠올리게 만든다. 알튀세르 역시 “맑스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자로서의 알튀세르와 NAM 운동가로서의 고진은 다르며,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알튀세르가 맑스로 돌아가려 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 이후 서구 공산당에까지 불어닥친 ‘탈스탈린주의’의 경향 속에서, 맑스주의에 대한 경제주의적 해석(사회의 모든 문제를 토대-상부구조의 문제로 환원해 설명하려는 조류), 인간주의적 해석(인간의 자유 의지나 의도 따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조류), 역사주의적 해석(흔히 맑스-레닌주의의 역사발전론 5단계로 대표되는 사회구성체의 변증법적‧선형적 발전을 신봉하는 조류)과 삼중의 투쟁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그가 보기에 이 세 가지 조류의 해석은 진정한 혁명적 실천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고진은 자본주의의 세계화로 인해 국가사회주의(공산주의)와 복지국가자본주의(사회민주주의)가 소멸되거나 쇠퇴한 신자유주의 주도의 세계라는 맥락에서 다시 맑스로 돌아가려고 한다. 즉,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실패로 인해 대안체계를 둘러싼 이념과 상상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시대, 그래서 더 이상 혁명이 아니라 ‘저항’만이 운위되는 시대에서 다시 맑스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당시로서 파격적으로 보였을지언정 어쨌든 맑스주의의 ‘내부’에서 맑스로 돌아가려고 했다. 과학사가인 가스통 바슐라르의 개념(인식론적 단절)을 빌려와 청년 맑스와 장년 맑스를 구분하고,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의 개념(거울 단계)을 빌려와 이데올로기론을 갱신하고 생산양식의 재생산을 문제삼았지만, 어쨌든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의 언어로 이들을 소화하려고 했다. 그래서 훗날 알튀세르는 다른 전통의 사유를 맑스주의에 끌어온 자신의 시도를 일종의 ‘불장난’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게다.

그러나 고진은 맑스주의의 ‘외부’에서 맑스로 돌아가려고 한다. 고진은 자신이 동반자로 삼은 대표적 두 인물, 독일의 역사학자 칼 비트포겔과 헝가리의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의 논의를 맑스주의의 언어로 윤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계공화국으로』에서 고진이 제시하려고 하는 주장은 더 이상 맑스의 텍스트 ‘내’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맑스를 비판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주장은 도대체 무엇일까? 고진은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는 길, 바꿔 말하면 ‘세계공화국’에 이르는 길”을 사유하려고 하며, 이를 위해서 “자본, 네이션, 국가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를 명확히 하려고 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자본의 존재양식은 맑스에 의해 어느 정도 밝혀졌다. 그러나 네이션과 국가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그는 맑스가 『자본』에서 한 작업을 국가나 네이션에 대해서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런 맥락에서 비트포겔과 폴라니의 논의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또 한번 그렇다면, 맑스가 『자본』에서 한 작업은 무엇일까? 고진은 맑스가 상품교환이라는 기초적인 ‘교환양식’에서 시작해 복잡한 자본주의 체제의 총체를 해명하려고 했다고 본다. 따라서 맑스가 『자본』에서 한 작업을 국가나 네이션에 대해서도 해야 한다는 말은 국가나 네이션에도 그 기초가 되는 ‘교환양식’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교환양식의 역사적 변형과 접합을 추적해 국가와 네이션의 총체를 해명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요컨대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가 고진표 “맑스로 돌아가자”의 핵심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세계공화국으로』의 고진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고 말한 자크 라캉과 오히려 더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라캉에 따르면 사람들의 흔한 오해와는 달리 프로이트의 업적은 무의식의 발견에 있지 않다. 프로이트의 위대함은 무의식 자체가 오직 자신의 문법과 논리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을, 더 간단히 말하면 무의식은 비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그 자체로 또 다른 논리의 영역이라는 것을 밝혀냈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라캉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의 외부에서 프로이트로 돌아가려고 했으며, 그래서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와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를 벗삼은 것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맑스주의의 생산양식 개념을 교환양식 개념으로 다시 쓰는 고진의 작업은 프로이트에게서 생리학의 마지막 자취를 제거한 라캉의 작업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생리학의 자취를 제거함으로써 라캉이 프로이트의 이론을 단순한 심리치료 기법이 아니라 주체(인간 존재)에 대한 일반 이론으로 승화시켰듯이, 생산양식을 교환양식으로 치환함으로써 고진은 맑스의 이론을 단순한 자본주의 분석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다루는” 일반 이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려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고진의 시도는 성공했는가? 일단 그의 시도는 짜릿할 만큼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던져준다. 무엇보다도 교환양식의 네 가지 형태(네이션의 교환원리로서의 증여-답례, 국가의 교환원리로서의 탈취-재분배, 자본의 교환원리로서의 상품교환,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뒷받침할 이념형으로서의 교환 X)라는 개념은 국가와 네이션의 기원을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해주며, 더 나아가서는 이 네 가지 교환양식의 상이한 접합이라는 관점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구성 자체를 다시 볼 수 있도록 해준다. 특히 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고진 자신이 폭넓은 일반 독자들을 위해 작정하고 쉽게 썼다는 책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쓰는 것이 적잖이 뻘쭘해 대략 고진의 시도가 갖는 이론적 의의에 초점을 맞춰 글을 쓰다보니 더 많은 내용소개를 담지 못했는데, 『세계공화국으로』에는 앞서 말한 생각할 거리들말고도 다른 방향으로 훨씬 더 뻗어나갈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수없이 많다. 이 책은 정말로 쉬우니 꼭 읽어보시라는 당부를 전하며, 이쯤에서 총평으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혼인빙자 사기죄로 고소당할 일은 없을 것 같으니 고진 선생, 계속 정진(GO)하시길! 그리고 독자분들도 남편으로서의 고진을 한번 믿어보시길! 다만 인생에서처럼 사유에서도 남편과 연인 둘 다 필요한데,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 심히 애석할 뿐!(이재원 그린비 편집장)

07. 07. 23.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드팀전 2007-07-23 12:51   좋아요 0 | URL
지금 제 책상에서도 이 책이 기다리고 있는데...호기심을 자극하는 리뷰네요.알라딘에는 아직 리뷰가 없었지요? 아마?

로쟈 2007-07-23 13:09   좋아요 0 | URL
두 건이 올라와 있는데요.^^

yoonta 2007-07-23 13:21   좋아요 0 | URL
고진 말대로 이 책은 정말 수월하게 페이지가 넘어가네요. 알라딘 리뷰로는 allnaru님의 페이퍼가 있더군요. 로쟈님과 드팀전님의 리뷰나 페이퍼도 기대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람혼 2007-07-23 14:13   좋아요 0 | URL
알튀세르와 라캉 각각의 'retour' 테마를 가라타니의 작업과 연결시키는 논의가 '남편-애인론'보다 더욱 흥미로운 글이군요.^^ 기사 잘 읽었습니다. '맑스를 넘어선 맑스'의 이른바 가라타니식 판본이라고 할까요, <윤리 21>, <트랜스크리틱> 이후 그의 행보는 사람을 신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듯 하지만... 어쨌든 맑스 '외부'에서의 맑스로의 접근도 물론 가라타니의 중요한 '기여부분' 중의 하나이겠지만,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서부터 <은유로서의 건축>을 지나 <세계공화국으로>에 이르기까지 그가 끈질기게 천착하고 있는 맑스의 저 'Verkehr' 개념에 관한 강조와 (재)해석 역시 가라타니의 주요 작업이라는 사실도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맑스[-가라타니]의 'Verkehr' 개념이야말로 가라타니가 맑스 '내부'에서 맑스에게로 접근해간 또 하나의 중요한 통로일 테니까요.

드팀전 2007-07-23 16:24   좋아요 0 | URL
^-^ 그렇군요..ㅋㅋ 저야 그냥 교양차원에서 읽는거니까.학문적인 리뷰는 나오기 힘들어요.^^ 대신...평범한 사람들한테..이 책 읽어봐라 나도 하는데..정도의 소구력은 갖지 않을까해요.

로쟈 2007-07-24 15:59   좋아요 0 | URL
리뷰를 쓰실 분들이 여럿 계시군요.^^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마케팅 전문가들이 쓴 <럭스플로전>(가야북스, 2007)에 관한 리뷰들을 훑어보다가 '명품'이란 키워드를 검색해보았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명품백'이란 기사를 그렇게 해서 읽은 기사이며 뒤에는 <럭스플로전>에 대한 한겨레의 리뷰기사를 붙여놓았다. '명품'에 대한 욕구나 소비욕망의 작동 메카니즘은 더이상 새로울 게 없다(하지만 그런 소비욕구가 '이해'되는 건 아니다. '책소비'에나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럭스플로전>의 저자들도 그걸 모를 리 없다. 문제는 그것을 '비판하느냐, 아니면 이용하느냐'로 보인다(여기서 한 수 위인 건 물론 후자이다. 작년 여름에 화제가 되었던 명품시계 사건에서처럼. 이에 대해서는 '청담동 필립과 치치코프'란 페이퍼(http://blog.aladin.co.kr/mramor/931002) 참조). '아시아 명품 열풍에 대한 보고서'는 우리 소비문화의 자화상으로 걸어둘 만하다.

해럴드경제(07. 07. 20) 욕망이라는 이름의 ‘명품백’

한낮의 거리. 젊고 매력적인 여성이 다가온다. 남자들은 그녀의 얼굴과 몸매에 시선을 꽂지만, 여성들은 재빨리 옷과 핸드백부터 살핀다. ‘앗, 역시 루이비통!’ 여자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떡인다. 남자들은 모른다. 그러나 여성들은 안다. 왜 3초마다 마주칠 정도로 흔해 빠진 루이비통의 ‘모노그램백’을 사기 위해 오늘도 그 많은 이들이 목을 매는지…. 한국에선 이제 무슨 백을 들고, 무슨 구두를 신느냐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대변하는 증명서가 됐으니 이 도도한 흐름을 누가 막을 것인가.



▶여성에겐 설명이 필요 없는 3초백, 5초백, 7초백=지하철이나 버스, 거리 곳곳에서 3초, 5초, 7초마다 마주친다고 해서 요즘 젊은층 사이에선 “루이비통은 ‘3초백’, 구찌는 ‘5초백’, 에트로는 ‘7초백’”이란 말이 나돌고 있다. 물론 정확한 조사를 거친 게 아니어서 이견이 분분할 순 있지만 루이비통, 구찌의 백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 땅을 휩쓰는 것은 사실이다. 이들 명품 백은 한국 여성(일부 남성도!)들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명품 욕망을 한껏 부채질하며, ‘나도 이젠 명품족’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상징물이 되고 있다.

요즘 서울시내 면세점의 루이비통 매장은 열기가 매우 뜨겁다. 해외여행길에 오르며 루이비통 백을 싼값에 사려는 이들로 북새통이다. 그중에서도 ‘스피디(Speedy)’는 면세점마다 하루 약 10~30개씩 팔려나갈 정도로 가히 폭발적이다. 일명 ‘보스톤백’이라 불리는 이 백은 루이비통 핸드백 중 가장 값이 저렴(가로 25.30.35.40㎝별로 52만~59만원)한 데다, 매우 가볍고 아무 옷에나 무난하게 어울려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백화점 매장에서도 마찬가지. 면세점보다 20%쯤 비싸지만 역시 잘 팔린다. 그러다 보니 ‘스피디’는 3초마다 마주치는 ‘3초백’이 됐다.

물론 ‘루이비통 왕국’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이다. 도쿄의 20대 여성 94%가 루이비통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교지로 하타 루이비통재팬 사장은 “일본에서 워낙 강세다 보니 일본 브랜드로 착각될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도 만만치 않다. 아시아명품마켓 연구가인 라다 차다는 “20대 서울 여성의 50%가 루이비통을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이 중에는 ‘짝퉁’도 적지 않겠지만 최근 들어 한국도 명품 소비의 5단계(정복→경제성장→과시→동조→일상화) 중 4단계인 ‘동조’ 단계에 진입했기 때문에 루이비통, 구찌 같은 대표 명품 백들이 더욱 거리를 도배할 것으로 전망했다.

아닌 게 아니라 명품 소비의 최종 단계(일상화 단계)에 접어든 일본에선 초등학생까지 루이비통 지갑을 쓰고, 생선가게 상인들조차 루이비통 가방에 영수증을 보관할 정도니 한국에서는 좀더 갈 것이란 관측이 가능하다. 즉 일본에서 루이비통이 스시나 녹차처럼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 필수품이 된 것처럼 한국에서도 자판기 커피처럼 흔해질 날이 머지않았다.



▶유니폼이면 어때요? 명품 대열 진입이 더 중요하죠=얼마 전 어머니와 함께 면세점을 찾은 대학생 김지은(22) 씨는 에트로 백을 사려는 어머니와 입씨름을 벌어야 했다. 지은 씨는 “루이비통을 사서 같이 쓰자”고 고집했고, 결국은 루이비통 백을 구입했다. 지은 씨는 “우리 같은 명품 입문자에게 루이비통 ‘스피디’는 딱 맞는 백이다. 또 전 연령대가 쓸 수 있는 백”이라며 “친구 4명과 일본에 갔는데 모두 ‘스피디’여서 가방이 수시로 바뀌곤 했다”고 들려줬다. 또 “지난해까지도 ‘짝퉁’이 꽤 있었지만 올 들어서는 ‘짝퉁’은 졸업하고, 오리지널을 구입하는 게 대세”라고 귀띔했다.

모 특급호텔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유혜영(26) 씨도 얼마 전 ‘스피디 35’(가로 35㎝ 크기)를 샀다. 유씨는 “나도 너무 흔해서 고개를 저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명품치고는 너무 싸고, 쓰임새가 많아 개의치 않게 됐다”며 “당신 같으면 수많은 브랜드 중 하나만 고르라면 무얼 고르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상반된 의견도 적지 않다. 회사원 최은경(33) 씨는 “몇 년 전 ‘모노그램’을 샀는데 요즘은 옷장 속에 처박아 놓았다. 여고생 책가방도 아니고 너무 하지 않느냐?”며 “학창 시절엔 그렇게 똑같은 걸 싫어하더니 죄다 같은 가방을 끼고 명품족입네 하는 건 소가 웃을 일”이라고 비판했다.

파리에서 10년 넘게 활동했던 패션컨설턴트 심우찬 씨도 “프랑스인들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루이비통을 유니폼처럼 들고다니는 것을 ‘몰개성의 극치’로 본다”며 “50만~60만원짜리 백 하나 샀다고 명품 대열에 진입했다고 판단하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루이비통에 비하면 구찌는 디자인이 다양해 ‘5초백’으로 꼽히긴 해도 ‘이거다’ 하는 대표 아이템은 없다. 구찌의 ‘G’로고가 새겨진 사각 자카드백이 5초백 후보로 가장 유력하지만 G로고의 구찌 백 전체를 5초백이라 보는 게 맞을 것이다.

7초백으로 지목되는 에트로는 페이즐리 무늬의 갈색 백이 베스트셀러 백. 주로 40~50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러나 ‘C’로고가 프린트된 셀린느 백과 프라다 백, 체크무늬가 도드라지는 버버리 백이 7초백에 더 가깝다는 설도 있다. 다양한 명품 백 디자인 중에서도 효자상품은 역시 로고가 반복적으로 찍혀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로고피케이션 백’이어서 역시 명품 구입 시 ‘타인의 시선’이 가장 중요함을 입증해주고 있다.

▶강박에 가까운 명품 집착, 누가 막으랴=한국의 명품에 대한 집착은 세계에서도 알아준다. 이미 꼭짓점을 찍은 일본과는 달리, 한국 명품시장은 해마다 10~15%씩 성장하고 있어 럭셔리 브랜드들은 이 탐나는 시장에서 더 많은 제품을 팔기 위해 거의 필사적이다. 게다가 남과 똑같이 보이기 위해 명품을 구입하는 일본인과는 달리, 한국의 젊은층은 ‘같으면서도 튀기 위해’ 명품을 구입한다. 또한 한국 여성들의 ‘외모 및 세련된 패션에 대한 욕망’은 세계적으로도 알아준다. 외국 명품업체의 CEO들은 “한국 젊은 여성들의 미적 센스와 명품 소화능력은 정말 놀랍다. 단연 최고 수준”이라고 혀를 내두른다. 거의 강박에 가까운 외모와 패션에 대한 집착은 “루이비통과 구찌는 거의 홍역이다. 누가 이를 막겠는가”라는 자조 섞인 탄식도 낳고 있다. 부작용도 많지만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다.



얼마 전 ‘럭셔리 코리아’를 펴낸 김난도 교수(서울대 소비자학과)는 “기성세대 시각에선 명품 백에 목을 매는 젊은층이 이해가 안 되겠지만 그들에게 물질주의를 버리라고 강변할 순 없다”며 “들로 산으로 나가 놀던 기성세대와는 달리, 요즘의 20대는 소비문화가 놀이문화를 대체한 첫 세대”라고 지적했다. 즉 쇼핑몰 누비기가 최고의 놀이라는 것.

사치의 유형을 ▷과시형 ▷질시형 ▷환상형 ▷동조형 등으로 분류한 김 교수는 최근과 같은 ‘덩달아 명품 백 구입’은 남과 똑같아지길 원하는 동조형 사치에 해당된다고 분류했다. 또 20대 여성의 경우는 ‘질시형 사치’로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명품이 남들의 무시를 막아주는 ‘갑옷’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에 흔하디 흔해도 그 대열에 끼어든다고 분석했다.

한편 명품 백이 대중에게 파급되는 과정도 흥미롭다. 명품업체가 스타 등 트렌드세터에게 백을 제공하는 걸 시작으로 ‘버즈(buzz.열광)’가 생성되면 VIP고객으로 이어지고 마지막 단계에 도시 전체가 떠들썩해질 정도로 버즈가 창출되는 것이다. 일반대중은 결국 이 시끌벅적한 버즈를 좇아 행동하며, 지갑을 열고 명품을 구매하며 열풍을 만든다. 그로 인해 똑같은 백들이 사방에 쫘르르 깔리는 것이다.

“이 땅의 소비자들은 세상에 태어나 엄마, 아빠 다음으로 명품을 자각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명품의 유혹은 참으로 강력하다. 파고드는 연령층도 날로 어려진다. 제대로 된 경제관념을 갖기도 전에 무차별 소비에 노출되는 젊은이들에게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의 명품 백 사재기가 팽배하는 건 자명한 일.

게다가 명품 백은 이제 더는 ‘백’만이 아니다. 개인의 정체성과 신분을 증명하는 증명서요, 프로토콜(규약)인 것이다. “적금통장 없인 살아도 명품 백 없이는 못 산다”고 외치는 젊은층이 늘면서 명품시장은 오늘도 브레이크 없는 기관처럼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명품은 가질 때는 황홀하지만, 가질수록 더 배고파지게 마련이다. 지갑은 얇게 하고, 욕망은 더욱 두껍게 만드는 명품. 이 홍역을 누가 피할 수 있단 말인가.(이영란 기자)

한겨레(07. 07. 21) 한국의 명품 열풍은 ‘남 따라하기’

미국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근래 아시아의 명품 열풍을 보면 고개를 갸웃거릴 만하다. 베블런은 상층 계급이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소비를 하기 때문에 가격이 오를수록 수요도 증가하는 ‘베블런 효과’가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상층 계급도 아니고 사회적 지위를 과시할 필요도 딱히 없는 한국 여대생과 일본 여고생이 명품을 사기 위해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원조교제를 마다않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명품 시장은 800억 달러 규모의 세계적인 산업이다. 이 가운데 아시아 시장은 전체 시장 매출액의 37%를 차지한다. <럭스플로전>은 아시아 지역 마케팅 전문가와 아시아 유통망 기획·개발 컨설턴트가 만나 아시아의 명품 열풍 현상을 분석한 책이다. ‘럭스플로전’은 ‘럭셔리(명품)’와 ‘익스플로전(폭발)’을 합성한 단어다. 책은 아시아에서 어떻게, 왜 명품 열풍이 뿌리 내렸는지를 짚어보고 아시아 각국의 유통 현장을 점검한 뒤, 명품 열풍의 미래를 점친다.

우선 지은이는 일부 유럽 귀족들의 사치품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대중화되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차는 있지만 공통된 단계를 밟아 왔고, 또 밟고 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전반 전쟁과 식민통치, 빈곤을 공통적으로 경험한 아시아 국가들은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한다. 이때부터 엘리트층이 명품을 사기 시작했고, 경제 발전이 계속되면서 명품을 통해 부유함을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과시’ 현상이 나타난다(*아래 도표는 조선일보 리뷰에서 인용).

여기에 아시아 국가들 특유의 집단주의 문화가 더해진다. 다른 사람이 사면 나도 따라 사는 ‘동조’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시간이 지나 명품 소비가 계속 확산되면 눈이 높아질 만큼 높아져 평생 명품을 구입하는 단계인 ‘일상화’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일본과 홍콩, 싱가포르는 이미 ‘일상화’ 단계에, 한국과 대만은 ‘동조’ 단계에 중국은 ‘과시’ 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책은 분석한다.

아시아의 명품 유행은 명품 기업들이 전통적인 가족 기업 정신에서 벗어나 복합 그룹을 형성하고, 아시아 시장으로 눈을 돌려 시장을 개척하는 과정과도 맞물린다. “부동산 투자나 호화 여행, 요트 문화를 비롯해 이미 오래 전 소비 스타일이 정립된 선진국에 비해 현재 성장을 이루고 있는 국가들은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틈을 파고 들어가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루이뷔통 전무이사를 거쳐 셀린느의 시이오로 있는 세르주 브룬슈위그의 말은 럭셔리 브랜드들이 아시아에서 어떻게 소비 규범을 주도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들의 시장 진출에 맞춰 아시아의 유통망이 백화점과 명품 브랜드 독립 매장으로 재편됐다. 럭셔리 브랜드는 핸드백 전체를 반복적 패턴의 로고로 가득 채우는 ‘로고피케이션’ 전략으로 신분상승의 대리만족을 안겨줬고, 나아가 핸드폰, 레저 용품 등 소비자의 삶 전체를 명품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통틀어, 지은이는 명품 열풍의 핵심을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럭셔리 브랜드는 동양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위치를 재정립하기 위한 현대적 방식의 상징물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명품의 대중화가 아시아 국가들의 미래이며, 명품이 일상화되어 포화상태에 이른 일본이 밟아간 모든 단계를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도 차례차례 밟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아시아에서 명품 산업은 머지않아 ‘엄청난 잔치’를 벌일 것이라고 그는 내다본다. 특히, 중국과 인도는 이를 이끌어 갈 ‘거대한 엔진’이다.

아시아 명품 시장의 장밋빛 미래를 치밀하게 예견해가는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의문 하나. 우리는 재빨리 움직여 이 엄청난 잔치에 숟가락 하나 올리기 위해 유럽 명품 브랜드들을 인수해야 하는 걸까, 아시아 국가들의 문화식민주의를 개탄해야 하는 걸까.(김일주 기자)

07. 07. 22.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mravinsky 2007-07-22 23:3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저는 루이비통 좋아하는 여자는 질색입니다. 음악 좋아하는 여자(비,이효리 부류 빼고)가 좋습니다.

로쟈 2007-07-22 23:49   좋아요 0 | URL
남성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왠지 mravinsky님을 자꾸 여자로 착각하게 됩니다.^^;

Joule 2007-07-23 01:01   좋아요 0 | URL
저는 지금도 마빈스키님이 여자인 줄 알고 있어요.

Joule 2007-07-23 01:02   좋아요 0 | URL
마빈스키님, 이박사 좋아하는 여자는 어때요?

yoonta 2007-07-23 01:50   좋아요 0 | URL
Mravinsky 즉 므라빈스키는 러시아의 유명한 지휘자인것 같네요. 고로 므라빈스키님이 좋아하는 여자는 클래식을 좋아하는 여자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심술 2007-07-23 20:17   좋아요 0 | URL
므라빈스키란 이름은 꼭 Mr.아빈스키인 거 같아서 듣거나 볼 때마다 남성성을 뿜어내는데 로쟈님은 어떻게 여성으로 생각하실까요? 궁금해집니다.^^

로쟈 2007-07-23 20:31   좋아요 0 | URL
아마도 주로 여성 이미지를 쓰셔서 그렇게 각인이 된 거 같습니다...

Joule 2007-07-24 03:11   좋아요 0 | URL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요. 이건...흠... 그러니까 말이죠. 제 자신의 입장에선 말이죠. MRA를 왜 언제나 MAR로 읽었느냐의 문제인데. 그건 제가 골똘히 생각해 본 결과 로쟈님께 어떤 여성성이 더이상 접근하길 원하지 않았던 저의 내심의 발로가 아니었나,라고 결론내리면 제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저희 프로이트 오빠가 무척 기뻐하실 것 같은데...흐음.

로쟈 2007-07-24 12:42   좋아요 0 | URL
오랜만의 **댓글이네요.^^

2007-07-24 0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