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진화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 2008)이란 책이 출간됐다. 원제는 '왜 아름다운 사람들에게는 딸이 더 많을까(Why Beautiful People Have More Daughters)'이고 부제는 '데이트, 쇼핑, 놀이에서 전쟁과 부자 되기까지 숨기고 싶었던 인간 본성에 대한 모든 것'. '모든 것'을 다루지만 분량은 300쪽이 되지 않는다. 인간 본성에 대한 모든 것을 '간추린'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번역본 제목대로 진화심리학에 대한 입문서로 유익해보이는 책(물론 입문서로 가장 간편한 것은 딜런 에반스의 <진화심리학>이다). 리스트를 만들어두려고 '진화심리학'을 검색해봤지만 '다윈의 대답' 시리즈까지 포함해도 몇 권 되지 않아 의외이다. 짐작엔 관련서들이 더 많지만 딱히 '진화심리학'이란 타이틀로는 나오지 않아서인 듯하다. 여기서는 검색되는 책들만을 골라놓는다(데이비드 버스의 책들이 기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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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진화심리학- 데이트, 쇼핑, 놀이에서 전쟁과 부자 되기까지 숨기고 싶었던 인간 본성에 대한 모든 것
앨런 S. 밀러.가나자와 사토시 지음, 박완신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1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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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과학이 발견한 인간 마음의 작동 원리와 진화심리학의 관점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7년 3월
40,000원 → 36,000원(10%할인) / 마일리지 2,0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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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진화
데이비드 버스 지음, 전중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7년 8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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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살인마- 진화 심리학으로 파헤친 인간의 살인 본성
데이비드 버스 지음, 홍승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7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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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대학원신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번역문제와 관련한 에세이를 주문받고 쓴 것이다. 아직 신문을 받아보지 못해서 편집상 수정이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이 글은 초고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은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고 1막 2장에서야 등장한다. 죽은 부왕의 유령이 등장하는 1막 1장에 이어지는 이 궁중 장면에서다. 덴마크의 새 국왕 클로디어스는 선왕의 죽음을 추모하고 형수였던 거트루드를 왕비로 삼는 데 동의해준 신하들을 치하한다. 그리고는 여러 국사를 처리하고 재상 폴로니어스의 아들 레어티즈의 유학을 허락하는 일까지 마무리한 뒤에야 햄릿을 찾는다. “그건 그렇고, 자, 나의 조카 햄릿, 이젠 나의 아들-(But now, my cousin Hamlet, and my son,-)”이 햄릿을 부르는 그의 대사다. 그리고 그 부름에 답하는 햄릿의 방백이 우리가 이 연극에서 듣게 되는 햄릿의 첫 대사다. 햄릿은 이렇게 말한다. “A little more than kin, and less than kind.”

대사로 처리되기도 하고 방백으로 처리되기도 하는 이 문장이 내가 여러 종의 <햄릿> 번역본을 들춰볼 때마다, 그리고 새 번역본이 나올 때마다 한번쯤 확인해보는 대목이다. 다수의 번역본이 있는 만큼 이미 다양한 번역이 제시되었다. 아니 다양하게 ‘연주’되었다. “숙질 이상의 관계가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부자 취급은 싫습니다.”(김재남) “조카보다야 가깝지, 하지만 부자취급은 어림없어.”(여석기) “핏줄은 통한다마는 마음은 구만리 밖이라.”(신정옥) “동족보단 좀 가깝고 동류라긴 좀 멀구나.”(최종철) “친척보단 조금 더 친하고, 자식보단 조금 덜 친한.”(김정환) 등이 그 사례다.

클로디어스는 아버지의 동생이니 햄릿에게는 숙부가 되지만 어머니와 결혼하였으니 새 아버지(계부)이기도 하다. 클로디어스에게 햄릿이 조카이자 아들인 것처럼. 하지만 이 병행적이면서도 이행적인 관계를 햄릿은 선뜻 수용하지 못한다. 햄릿의 kin/kind는 클로디어스의 cousin/son만큼 자연스럽게 양립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정체성은 불확실하며 불확정적이다. 한 노래 가사를 비틀어서 말하자면 “숙질도 아닌 그렇게 부자도 아닌 어색한 사이”가 클로디어스와 햄릿의 관계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몇 가지 번역 사례를 평해 보자면, 김재남역은 ‘숙질’과 ‘부자’를 대비시킴으로써 명료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지만 좀 투박하다. 원문의 간결한 리듬을 살리지 못한 탓이다. 여석기역은 ‘조카’와 ‘부자’를 대비시키고 리듬감도 살렸지만 ‘어림없어’란 말이 좀 걸린다. 왠지 유약하다기보다는 강인한 햄릿이 연상돼서다. 신정옥역은 의역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핏줄’과 ‘마음’의 대비는 정체성에 대한 햄릿의 고민을 전달하지 못한다. 최종철역의 ‘동족’과 ‘동류’는 거꾸로 직역의 최대치를 보여주지만 역시나 햄릿의 고민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김정환역은 두루 만족시키고 있지만 개인적으론 불완전하게 끝난 문장이 마음에 걸린다. ‘자식간’이란 말은 쓸 수 없기에 ‘친척’과 ‘자식’도 정확한 대비는 아니다. 김정환은 클로디어스의 대사에서도 ‘cousin’을 ‘친척’이라고 옮겼는데, 원래의 의미를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좀 부자연스럽다. 물론 이런 평은 주관적인 것이고 독자로선 각자의 취향에 맞는 연주를 고르면 될 터이다.

자신의 취향과 기대에 맞는 번역을 만날 때의 즐거움은 원작을 읽는 즐거움과는 사뭇 다르다. “A little more than kin, and less than kind.”란 셰익스피어의 문장이 ‘주어진 것’으로서 ‘자연’에 해당한다면 번역은 이 자연의 모방이자 재현이다. 각기 다른 번역은 이 모방․재현의 기예를 겨루는 경연이자 모험이며 좋은 번역은 말 그대로 예술이다. 이런 경연의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자. <햄릿>의 2막 2장에서 폴로니어스는 미친 척하는 햄릿의 광기가 자신의 딸 오필리아 때문이 아닌가 떠보기 위해 말을 붙인다. 햄릿은 그에게 딸이 있는가 묻고는 이렇게 충고한다. “Let her not walk in the sun: conception is a blessing: but not as your daughter may conceive. Friend, look to it.”

이 대목에 대한 몇 가지 번역을 소개하면 이렇다. “햇볕을 너무 쬐지 않도록 해. 지혜가 부푸는 건 좋지만 배가 부풀면 큰일이니까, 아주 조심해야 하네 친구.”(신정옥) “딸이 태양 아래 걷지 않도록 하게. 머릿속의 착상은 축복이네만, 자네 딸 몸속의 착상은- 친구여, 조심해.”(최종철) “햇빛 속을 걷게 하지 말게. 생각을 잉태하는 건 축복이지. 하지만 자네 딸은 다른 걸 잉태할지 모르잖아. 친구. 조심하게.”(김정환)

셰익스피어의 원문에서 핵심은 ‘conception(착상)’과 ‘conceive(임신하다)’의 의미연관성이 갖는 말장난이다. 이것을 신정옥역은 ‘지혜가 부푸는 것’과 ‘배가 부푸는 것’으로 풀었고, 최종철역은 ‘머릿속의 착상’과 ‘몸속의 착상’으로 대비시켰다. 그리고 김정환역은 이 말장난을 ‘생각의 잉태’와 ‘다른 것의 잉태’로 변주했다. 이 모두가 저마다의 연주이며 경연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햄릿>은 한번 읽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그것도 여러 번역본으로 읽는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그렇게 여러 번 읽어도 좋을 만한 번역서가 많이 나오고 또 그런 번역서를 독자들이 많이 찾아서 읽는 문화적 풍토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번역비평 또한 오역에 관한 시비로 얼룩지기보다는 훌륭한 번역에 대한 품평으로 채워지는 것이 이상적이라 할 만하다. 예컨대 번역에 대한 평가기준이 ‘맞는 번역 vs 틀린 번역’이 아니라 ‘좋은 번역 vs 더 좋은 번역’이라면 얼마나 바람직할 것인가.

우리 번역문화의 열악한 현실에 대한 비판과 고발은 그동안 적잖게 제기되었다. 중언부언은 피하고자 한다. 대신에 최근에 나온 한 번역서에서 읽은 문장을 인용하고 싶다. “세상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 속에 이미 낙관주의가 존재한다.” 원문은 “There is an optimism that consists in saying that things couldn't be better.”이고 보통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말하는 게 낙관주의다.” 정도로 번역될 듯싶다. 하지만 나는 이 ‘특이한’ 번역 덕분에 우리의 번역문화에 대해 낙관하게 되었다. “이보다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낙관주의도 있는 것이니까.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좋은 낙관주의’다.

08.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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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febvre 2008-11-14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사라 밀즈의 책 같군요...... ^^;;

로쟈 2008-11-14 07:15   좋아요 0 | URL
밀즈의 책은 아닙니다.^^;

lefebvre 2008-11-14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푸코의 문장이 맞는 거 같아서 찍었는데 아니었군요 ^^;;

로쟈 2008-11-14 15:47   좋아요 0 | URL
푸코의 말이 맞을 거 같은데요. 책만 다른 책입니다.^^

파란흙 2008-11-1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를 나누었으되, 종류가 다른...뭐 이런 의미로 느껴집니다만. 그 공교로움과 아니러니컬함, 비애가 전달되지 않고 말이죠. 제각기 번역자들이 왜 저런 글을 동원했는지, 그 심경이 잡히는 듯, 무척 재미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운을 맞출 수 없는 부분은 접고 들어가야 하나요? 동족, 동류가 그 시도로 보이고 제겐 가장 어울리는 번역으로 느껴지네요. 하지만 읽을 땐 그 의미가 씹히지 않는 단점이 있군요. 아, 이래도 저래도 어렵습니다.

로쟈 2008-11-15 16:43   좋아요 0 | URL
<햄릿>의 대사들이 시이기도 하지만 무대언어라는 점이 중요한데, 많은 번역본들에서 간과되고 있습니다. 최종철역은 시라는 점은 강조하다 보니 특히 그렇고요...

lefebvre 2008-11-15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 책이 맞군요! 일전에 제본 부탁드렸던 책. 야, 이거 알아맞추기 게임이 은근히 재미 있는데요?! ^^ 그나저나 그 "오래된"(?) 책을 어인 일로 들추셨나요? *^^* 그 책의 개정판이 나왔나보죠?

2008-11-15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16 0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16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8-11-17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정환의 책에서 원문 냄새가 나서 좋았는데, 원문과 함께 보면 더 재밌을 것 같네요.. 지를까 말까 고민됩니다~ 또 ㅎㅎ

로쟈 2008-11-17 21:57   좋아요 0 | URL
어떤 고전이건 같이 보는 게 더 재밌지요.^^

승주나무 2008-11-27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 이 글을 퍼가도 될까요? 출처 밝혀서... 너무 좋네요^^

로쟈 2008-11-27 18:11   좋아요 0 | URL
오픈된 자료인데요 뭐. 한데 위의 댓글과는인터발이 있네요. '열흘' 동안 고민하셨나요?^^

승주나무 2008-11-2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가 좀 소심한 편이라.. 원문+알파로 페이퍼를 만들어보고 싶기도 하구요^^
 

재일 역사학자 이성시 교수의 <만들어진 고대>(삼인, 2001)란 책이 있다. "동아시아 각국이 자신의 근대 민족국가의 '국민'을 형성하기 위한 정치적 의지를 고대사를 투사하고 있고 이것은 고대사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낳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씌어진 책이다. 근현대사라고 다를까? 각국의 이해관계와 감정은 이 경우에도 역사인식의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 장애물을 걷어내기 위한 시도를 담은 책들이 출간되어 눈길을 끈다(한 권은 엊그제 주문한 책이기도 하다). 간단한 소개기사에서 문제의식 정도는 확인해두면 좋겠다.  

 

한국일보(08. 11. 11) "동북아 근현대사 인식, 공통분모를 찾아라"

동북아시아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큰 장벽은 '감정'이다. 피해의식과 편협한 민족주의가 섞인 흥분은 연구자의 토론 공간을 종종 스포츠 중계석 같은 분위기로 몰고 간다. 그런 감정의 과잉을 걷어내고 역사 인식의 공통분모를 모색하는 두 권의 책이 출간됐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나남 발행)과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창비 발행)은 학문적 논리로 무장한 선동이 아니라, 객관적인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한 소통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러일전쟁에서부터 역사교과서 문제에 이르기까지,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 부(負)의 역사를 벗어나기 위하여

현대송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가 엮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은 독도, 야스쿠니, 위안부, 교과서 문제 등에 대한 한ㆍ일 학자 12명의 논문집이다. 현 교수는 머리말에서 "이들 문제에 대해 한국의 사회적 관심이 월등히 높지만, 그렇다고 한국 사회의 이해도가 더 높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일본=악'이라는 고정관념이 진실을 찾는 노력과 깊이있는 성찰의 진전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파악한다. "귀가 먼 사람들끼리의 대화"를 극복하기 위해, 이 책은 '가해자 일본, 피해자 한국'의 일원적 관계 도식을 벗어난 다양한 관점을 보여준다.

호리 카즈오 교토대 교수는 "1905년 다케시마(독도)를 영토에 편입한 것이 정당하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양국의 사료를 근거로 통박한다. <세종실록> <증보문헌비고> 등에 독도가 조선 영토로 표현된 반면, <대일본사>와 메이지 시대의 여러 자료에는 독도를 영토에서 제외하고 있다는 것이 근거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한일합방 100주년이 되는 2010년까지 한일조약(1965)을 보완하는 '역사영토조약'을 체결할 것을 제안한다.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 인정 내용을 조약에 넣고, 대신 한국은 일본 어민의 어업권을 보장할 것을 명기하자"는 것이 그가 구상하는 독도 문제의 해결책이다.

강덕상 시가현립대 명예교수는 최근 5, 6년 새 강화된 일본의 '대한(對韓) 내셔널리즘'의 배경을 짚는다. 그는 한류 바람이 양국의 간극을 좁힐 것이라는 기대에 대해 "한류는 시각과 청각, 미각에 한정된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일본의 젊은이들 가운데는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고, 한국과 북한이 원래 하나의 국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 적다"는 것이 재일동포 2세인 강 교수의 인식이다. 한국인이 멋과 맛의 범주에서 벗어나 독도, 야스쿠니, 교과서 등을 말하면 '한국은 왜 불만을 말하는가, 도대체 몇 번을 사죄하면 좋은가'라는 혐한(嫌韓) 정서가 인다는 것이다. 무지가 온존하는 한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여전할 것이라는 견해다.

이 책을 기획한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독도해양영토연구센터는 해외 학계에 한일 관계의 현안을 균형있게 소개한 책이 부족한 현실을 감안해, 이 책의 영문판을 11월까지 발간할 계획이다.



■ 한ㆍ중ㆍ일이 함께 읽는 근현대사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은 아사히신문이 2007년 3월부터 올해 3월까지 연재한 특집 기획기사 '역사는 살아 있다: 동아시아의 150년'을 묶은 것이다. 아사히신문 기자들은 2005년 봄 교과서 왜곡과 위안부 문제로 촉발된 한국과 중국의 대규모 반일시위를 계기로 이 기획을 구상하게 됐다. 기획은 동아시아 근현대사 150년의 중대 사건을 10가지 테마로 구성, 현지의 목격자 및 학자들을 직접 인터뷰한 내용을 담았다. 각 장의 끝에는 해당 사안을 다루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 4국의 역사교과서를 비교해 각국의 시각 차를 보여준다.

예컨대 '러일전쟁과 조선의 식민화'(4장)을 재구성하기 위해 취재진은 일본의 마쯔무라 마사요시 러일전쟁연구회 회장, 중국으 리시쒀 난카이대 교수, 한국의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를 각각 인터뷰한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아시아 신흥국이 유럽 강대국에 도전한 전쟁"(마쯔무라)이며 "청나라에 입헌제도 도입에 박차를 가하게 만든 계기"(리시쒀)였고, 동시에 "한반도를 군사상 생명선으로 생각한 일본에 의한 수탈과 억압의 출발점"(정재정)이라는 세 가지 측면이 입체적으로 조명된다. 더불어 일본 교과서에서 이 사건이 국가적 우월감의 근거로 다뤄지는 배경을 짚는다. 반면 한국의 교과서는 '지배와 약탈의 역사'로 이 시기를 51쪽에 걸쳐 상술한다.

저자들은 이 책의 서문에 "기억은 명기(銘記)하는 힘과 환기(喚起)하는 힘의 합력"이며 "기억은 타자와 이야기하고 공유함으로써 비로소 역사가 되는 것"이라고 썼다. 이 책은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출간됐으며, 중국과 대만에서도 곧 간행될 예정이다.(유상호기자)

08.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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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11-12 00:24   좋아요 0 | URL
아 이책들 관심가는 책이네요. 조만간 봐야할 듯...
근데 책표지 넣으실때 알라딘상품넣기 기능좀 해주심 안될까요?
땡스투가 안돼요. ㅠ.ㅠ 이런 책 리뷰도 별로 안올라오기 땜에 로쟈님 외에는 할 사람도 없단 말씀.... ^^;;

로쟈 2008-11-12 00:33   좋아요 0 | URL
펀글을 상품페이지에 노출시키면 저작권에 저촉된다고 합니다.^^;

드팀전 2008-11-12 09:27   좋아요 0 | URL
<만들어진 고대>는 나온지가 좀 되었지요?...저 책이 나왔던 시점이 기억날 듯 한데...당시 신문 책 소개와 서평글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탈근대적 시점으로 '국민국가들의 국사만들기'를 지적한 책으로 기억됩니다.'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라는 것을 거꾸로 짚어가는 책이었겠지요. 당시 학계에서 중국의 동북공정과 관련되서 나왔던 '중국사''한국사'도 아닌 '만주사' 내지는 광의의 '동북 아시아사'라는 개념이 나왔던 것으로 압니다. 이게 당시에 민족주의적 사관에서는 결국 중국의 동북공정에 포섭되어가는 개념으로 비판받기도 했었던 것 같아요. 저 책이 나왔을 때 관심있게 지켜보고 읽지 않았는데..다시 보니 반갑군요.

로쟈 2008-11-12 21:31   좋아요 0 | URL
2001년이니까 꽤 오래전이네요.^^
 

교수신문에서 '최근 미시사의 성과들'을 다룬 서평을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7195). 미시사 관련서 세 권이 서평의 대상이다. 직접 읽을 수 있는 형편은 못 되더라도 '어디에 가면 무엇이 있더라' 정도는 챙겨두어야겠다. 그 또한 교양이므로...

 

교수신문(08. 11. 10) 진실 독점하는 ‘全知的’ 관점 버리니 잊혀진 인간의 얼굴이 보이네

미시사란 비유하자면 줌인(zoom-in)의 역사다. 미시사가 줌인 하고자 하는 것은 實名의 인간 개인 혹은 소집단이 영위해 온 구체적인 삶의 細切이다. 인류학자들이 ‘마을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연구하는 것처럼, 미시사가들 역시 과거를 멀리서 관찰하기보다는 과거 사람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들과 공감하며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고자 애쓴다. 종래의 역사에 비해 미시사가 종종 더 미묘하고도 다층적인 인간 감정과 정서와 욕망들을 분별해 내곤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접근법 덕분이다.

인간의 구체적 삶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지향하는 미시사가 그들을 ‘설명’하기보다는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때로는 그 이야기 속에 역사가 자신도 슬쩍 끼어든다. 미시사는 더 이상 역사적 진실을 독점하는 ‘全知的’ 관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역사 속에서 잊혀져온 수많은 기억과 목소리와 얼굴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할 따름이다.

1960년대 말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약 20년간은 미시사가 새로이 출현한 시기였다. 이 시기 1세대 저작들은 대체로 사회사적 기반 위에 미시사적 관점을 접목한 것으로 미시사회사적 경향이 농후했다. 2세대는 시기상 대략 1990년대 이후의 저작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특징은 우선 양적 팽창인데, 최근 20여 년간 수많은 미시사 저작들이 쏟아졌다. 연구시기도 1세대의 주류였던 근대 초를 벗어나 20세기까지 확장됐다. 연구범위와 주제도 다양해져서 이례적 사건과 반복적 일상을 넘나들며 젠더, 가족, 몸, 경계인,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문화적 요소로 그 관심사를 넓히고 있다. 지방사, 생활사, 여성사, 구술사, 풍속사, 문화사 등도 그 성격상 미시사와 공유하는 점이 많다.



로렐 대처 울리히의 『한 산파의 이야기: 자술 일기에 근거한 마서 발라드의 생애, 1785~1812』(1990)는 2세대 미시사의 대표적 저작이라 볼 수 있다. 저자는 여기서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까지 미국 메인 주 케네벡 강가에 위치한 100가구 내외의 작은 마을 할로웰에 살았던 마서 발라드란 산파가 죽을 때까지 무려 30년 가까운 긴 세월에 걸쳐 쓴 비망록식 일기에 기초해그녀의 삶을 되짚어가고 있다(이 책이 일기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산파일기’란 역서명은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녀는 이 기간 동안 겨울에는 얼어붙고 봄에는 범람하는 위험한 강을 오가며 816번이나 주변 마을의 아기를 받아냈다. 마서의 일기는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완고한 일상성으로 점철돼 있지만, 이런 점이야말로 사료로서 일기가 갖는 단점인 동시에 장점이기도 하다. 정확히 9천965일 동안의 일을 기록한  마서의 일기는 그녀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과의 관계망을 엿보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마서의 시대에 산파란 단순한 직업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한 편으로 남편의 부족한 벌이를 보충해 가족을 부양하는 방책이었지만, 동시에 마음 속 깊이 이웃과의 공감을 느끼게 하는 일종의 소명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일기는 당시까지 대학에서 교육받은 (남성)의사가 아니라 (여성)산파가 출산에서 훨씬 더 중심 역할을 했다는 의료사의 중요한 사실도 깨우쳐 준다. 또한 통상적인 장부에는 나와 있지 않은 가계 경제의 이면들, 즉 아마씨를 언제 뿌리고 어떻게 키우고 언제 수확했는지, 그것으로 마서와 그녀의 딸들이 어떻게 실을 잦고 베를 짰는지도 세세히 얘기해준다. 아메리카 동북부의 외진 마을에 살았던 마서와 그 주변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 기억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미시사이다.



이제 1차대전 직전, 제3공화국 시절의 프랑스 파리로 옮겨가 보자. 에드워드 베렌슨이 쓴 『카요부인의 재판』(1992)이 다루고 있는 드라마의 주인공은 전직 총리이자 좌익 급진당 당수였던 조제프 카요의 부인 앙리에트이다. 무대는 보수파 일간지 <르 피가로>의 편집장 가스통 칼메트의 사무실. 시간은 1914년 3월 16일 오후 6시경이다. 당시 칼메트는 근 석 달 동안 온갖 저열한 수단을 동원해 조제프 카요를 비방하는 기사를 게재해오고 있었다. 급기야 3월 13일에는 조제프가 情婦 베르트 게이당(뒤에 그의 첫째 아내가 된다. 앙리에트는 두 번째 아내였다)에게 보낸 비밀 私信까지 공개하면서 그 속에 담긴 그의 도덕적·정치적 위선을 만천하에 공개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3일 뒤 가스통의 사무실을 찾은 앙리에트는 브라우닝 자동권총으로 그를 난사해 절명케 한다. 7월 28일 저녁, 배심원단은 놀랍게도 그녀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이 희대의 사건은 일단 막을 내린다.

프랑스가 전쟁에 참전하기 3일전까지도 거의 모든 신문의 첫머리를 장식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됐던 이 재판은 이른바 ‘벨 에포크’라 불린 세기말 프랑스의 거의 모든 문제점들이 함축돼 있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가족과 사랑, 도덕과 이데올로기, 여성성과 남성성, 섹슈얼리티와 정치에 대한 상반된 가치들이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던 전쟁 직전 프랑스 사회의 단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대는 다시 15세기 후반의 피렌체.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전문가인 마르티네스가 2003년 ‘감독한’ 최신작 『사월의 유혈극: 피렌체와 반 메디치 음모』다. 이 역시 카요 재판처럼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그 강도는 훨씬 더 끔찍하고 엽기적이다. 1478년 4월 26일, 일단의 자객들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으로 들어가던 메디치가의 일명 ‘大人’ 로렌초(번역과는 달리 ‘위대한 로렌초’가 아니다. 원래 그의 ‘위대한’ 행적 때문에 붙은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습격한다.

당시 병색이 짙었던 줄리아노는 칼에 난자당해 죽었으나 로렌초는 운 좋게 달아난다. 이것이 이른바 ‘파치 음모’이다. 이는 신흥 귀족 메디치가에 밀려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던 명문 파치가가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비호 아래 일대 반전을 노린 사건이었다. 하지만 곧 로렌초의 피비린내 나는 무자비한 복수극이 시작된다. 주모자들은 붙잡혀서 처참하게 살해되고 그 시체는 아이들의 놀이감으로 또는 개의 먹잇감으로 던져진다. 심지어 정적의 시체 일부를 먹는 ‘카니발리즘’의 제의가 행해지기까지 한다. 저자는 ‘파치 음모’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전통적인 공화주의 판도를 무력화하려는 메디치가의 또 다른 ‘음모’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는 메디치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최근 서구 학계의 대체적인 경향에 대한 반발이라고도 할 수 있다.

파당성이 강한 이탈리아 학계의 풍토에서 이러한 시도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저자가 지금까지 이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진짜’ 역사가는 없었다고 단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르티네스는 이 사건을 하나의 창으로 삼아 당시 피렌체에서의 이념 투쟁, 정략적 혼인 정책, 정적을 말살하는 ‘창의적인’ 갖가지 방법, 후원자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자유’의 한계 등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층위들을 상세히 전해준다. 하지만 성벽으로 둘러싸인 최대 인구 7~8만의 당시 피렌체에서는 이 모든 측면이 정치라는 용광로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또 다른 주장이다.

이 세 저작들의 공통점은 마서의 일기든, 카요의 재판이든, 혹은 파치의 음모든 간에, 모두가 그것을 하나의 창으로 삼아 그것을 둘러싼 더 넓은 컨텍스트와 더 깊은 층위들을 판별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각자의 변용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이것이야말로 미시사를 가로지르는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곽차섭 부산대·서양사)

08.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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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노바바 2008-11-12 01:46   좋아요 0 | URL
필자가 서양사학자라서 최근 번역된 책 세권만 소개한거 같은데, 사실 비슷한 방법론으로 한국사를 들여다본 저서들도 상당히 많은거 같습니다. 이제 시작이겟지만요. 특히 최근에 나온 (아직 살펴보지는 못한) '양반의 사생활'이 이런 접근법으로서 좋은 예가 아닌가 싶군요.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510787
사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위의 세권 중 두번째와 세번째는 미시사 책을 몇권 읽어보면 느낄 수 잇는 '소재주의'가 감지되는데요, 물론 읽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얘기하는게 편견이겟지만요.

로쟈 2008-11-12 21:30   좋아요 0 | URL
흥미로운 소재를 찾아내는 것도 능력일 듯싶은데요.^^

반딧불이 2008-11-12 23:44   좋아요 0 | URL
최근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를 재미있고 읽고 미시사를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로쟈님 덕분에 새로운 책들을 알게 되었네요. 감사드립니다.

로쟈 2008-11-13 06:56   좋아요 0 | URL
이후엔 '긴즈부르그'로 표기됩니다. 저도 옮겨놓았을 뿐인 걸요.^^;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기사 몇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지난 주말에 한국학술단체협의회 창립 20주년 기념 학술행사가 개최되었는데, 이와 관련한 기사가 두 편이고, 거기에 덧붙인 건 피아니스트 강충모 교수의 인터뷰 기사이다. 학단협 20년에 대한 회고의 주조음이 '뼈저린 반성'인 것이 이채롭다(관심을 끄는 발표주제들이 있어서 홈피의 자료실을 찾았더니 고작 서너 편의 발표문만 덩그러니 올려져 있다. 역시나 반성은 말뿐인 듯싶다). 대저 학문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더불어, 이 학문/예술과 삶, 그리고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본다. 개인적인 스크랩이지만 혹여 관심을 갖고 있는 분이 더 계실까봐 '공개'로 해놓는다...  

한국일보(08. 11. 06) 2008년 한국사회 진보의 자기반성

2008년 한국 사회에서 '진보'란 어떤 목소리일까. 한국학술단체협의회가 창립 20주년을 맞아 '21세기 진보와 진보학술운동의 과제'를 주제로 연합 학술대회를 7, 8일 건국대에서 연다. 학단협은 6월항쟁의 열기가 남아 있던 1988년 진보적 학술단체들이 결성한 협의회로, 현재 26개 단체 5,000여명의 회원들이 '학술활동을 통한 사회 민주화'를 목표로 각종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번 대회는 신자유주의의 전지구적 확산과 국내 보수정권 출현이라는 환경 속에서 진보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마련됐다. 두 편의 발표 논문을 통해 2008년 오늘, 진보의 목소리를 미리 들어본다.

김범춘 건국대 강사(철학)의 발표문 '지연되는 미래와 진보 철학'은 진보의 뼈저린 자기반성을 담고 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진보는 때때로 악수를 두는 멍청한 보수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갖고 있는 '저항'이라는 낡은 콘텐츠마저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다. 해방적 콘텐츠로서 진보가 행사하던 이론적 우위가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진보는 진보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콘텐츠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는 진단했다. 그는 "이 처참한 현실을 메우기 위해 이론의 과잉은 불가피"하지만 그렇게 끌어들인 레비나스, 로티, 벤야민, 들뢰즈도 제대로 소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현실에 맞는 레시피(조리법)도 없이 그저 번역하고 세미나하고 논문 쓰고 토론한 결과, 진보적 지식인은 새로운 지식의 홍보전문가이거나 출판전문가로 변신했다"고 통렬히 비판했다.

김재현 경남대 교수(철학)는 '민주주의의 심화와 확장을 위하여'라는 발표문을 "민주주의가 갖는 문제에 대한 처방은 더 많은 민주주의다"라는 존 듀이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시대정신이 따로 있고, 진보진영의 시대정신이 따로 있는가"라고 물은 뒤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미성숙한 것"이라고 스스로 답한다. 그리고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사회권, 인정투쟁, 민주주의 등의 개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 교수는 '진보, 개혁의 위기는 민생의 위기이고 민생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문제의식은 민주주의의 확장을 통해 해결 가능한 것으로 본다. 비정규직, 소수자 인권, 실업자 생존권 등의 문제를 들며 이것이 아직 남아 있는 '반민주 대 민주'의 전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한국사회는 민주화의 과제를 안고 있다"는 최장집 교수의 말을 다시 인용하며 끝을 맺었다.(유상호 기자)

한겨레(08. 11. 06) 학단협 20돌 ‘학술운동 제도권화’ 자성 목소리

국내 진보적 인문사회과학 연구단체의 협의기구인 학술단체협의회(학단협)가 창립 20년을 맞았다. 1988년 11월 한국산업사회연구회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정치연구회 등 10개의 진보적 학술단체가 모여 출범한 학단협은 “연구와 학술 활동을 통해 사회 민주화에 이바지한다”는 정관이 말해주듯 학술 ‘운동’ 단체로서 실천적 지향이 뚜렷했다. 이론을 매개로 현실을 비판하는 ‘이론적 실천’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변혁을 위한 ‘실천적 이론’을 안출하려 했고, 일부는 그 이론을 들고 현실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지금 학단협 안팎에선 “학술운동이 제도권 내부의 ‘교수운동’이 되어버렸다”거나 “운동의 정체성을 잃고 국가기관의 ‘협치’(governance) 파트너로 전락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서유석 학단협 상임대표도 “학술운동이 상당 부분 ‘제도권 학회’의 연합운동으로 축소된 측면이 있다”고 인정한다. 핵심 회원단체들이 정부 지원을 받는 제도권 학회로 자리매김되고, 연구활동 역시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SSCI)이나 학술진흥재단(학진)의 등재지 기준에 따라 규율되면서 지식생산 역시 특정 방향으로 구조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88년 문학예술연구소 회원으로 학단협 창립에도 참여했던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만드는 사람)는 이런 현상을 ‘학문의 국가종속’이란 관점에서 비판한다. 그는 “종속은 두 가지 형태로 이뤄졌는데, 하나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연구자들 일부가 통치시스템에 적극 가담하는 형태였다면, 다른 하나는 학술진흥기금을 매개로 학술활동이 정부 통제체제에 편입되는 방식이었다”며 “두 가지 모두 학문 자율성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진단했다.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활동하는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학술운동’이란 명칭 자체에 회의적이다. 이 교수는 “연구자 대부분 대학에 자리를 얻고, 단체들 역시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 학단협은 제도권 안에서 공식 지분을 가진 ‘좌파 학계’가 됐다”며 “특히 학술지를 운영하거나 학진의 심사에 참여하는 좌파 연구자들의 행태는 과거 그들이 비판했던 우파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꼬집었다.

90년대 중반 산업사회연구회 활동을 통해 학단협과 인연을 맺은 신진욱 중앙대 교수도 “진보 학술지들이 학진의 등재(후보)지가 되면서 연구자들에게 표준화·획일화된 글쓰기가 강요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게재 기준을 충족시키려다 보니 대중과의 소통 지점은 좁아지고, 운동에 대한 실천적 고민도 약화되는 문제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학단협 안에서도 자성과 쇄신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2003년 상임대표를 지낸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학술운동이 외부 권력과의 싸움은 중시하면서도 내부의 제도·문화·관행을 개혁하는 데는 소홀했던 게 사실”이라며 “우리 스스로를 권력대상으로 성찰하지 않는 한 운동의 발전은 없다”고 진단했다. 조 교수는 8일 열리는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와 함께 △탈국가·생태·여성주의 시각의 내재화 △복합적 신계급담론의 정교화 △제도권·비제도권의 경계 허물기 △학벌주의·학진 질서 타파 △신자유주의적 지식생산 규칙의 극복 등을 진보 학술운동의 과제로 의제화할 계획이다.

80년대 초반 김진균·변형윤 등 해직교수들을 중심으로 분과학문별 소규모 연구그룹이 생겨난 뒤 대학원생·사회운동가를 주축으로 세를 규합해간 학술운동은 88년 6월 서관모 충북대 교수의 논문에 대한 검찰조사에 공동 대응하는 과정에서 상설 협의체인 학단협을 탄생시켰다. 현재 26개 단체 5000여명의 연구자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매년 한 차례의 연합 심포지엄을 열며, 수시로 사회 쟁점과 관련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다.(이세영 기자)



경향신문(08. 11. 10) 피아니스트 강충모 “클래식의 대중화? 그건 난센스”

피아니스트 강충모(48·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참 ‘미련한’ 사람이다. 서울이 월드컵 열기로 한창 뜨겁던 2002년 초여름, 그는 바흐의 피아노 음악을 암보(暗譜)로 연주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바흐의 느리고 차분한 음악을 연주하면서 “월드컵도 중요하지만 나같은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었다.

그의 고집스러운 행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바흐 전곡 연주’를 펼친 그는, 곧바로 해설과 연주를 병행하는 ‘렉처 콘서트’를 시작했다. 이 또한 5년 계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이달 15일에 마침내 마지막 방점을 찍는다. 6일 서초동에서 만난 강충모는 “이제 좀 지쳤다. 앞으로 4~5년 연주를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두 가지 문제를 풀어보려고 렉처 콘서트를 시작했지요. 피아노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악보만 들여다보는 게 답답했어요. 음악은 오선지 속에만 들어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작곡가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해야 하고, 왜 그 곡을 작곡했는가, 담겨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등등, 악보의 이면(裏面)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죠. 또 하나의 동기는 ‘클래식 대중화’라는 구호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죠. 제가 9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당시 한창 인기있던 <열린 음악회>를 보면서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클래식을 ‘대중화’한다는 발상 자체가 난센스 아닙니까? 대중화라는 말만 앞세우면서, 오히려 사람들을 클래식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방식이죠.”

그는 “한국의 음악문화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했다. “외국 연주자들이 내한해 한국 청중을 우습게 보는 연주를 펼치는 걸 심심찮게 본다”면서 “그 무성의한 연주를 지켜보노라면 같은 연주자로서 분노가 치민다”고 했다. 또 “허명(虛名)뿐인 연주에 청중이 열렬히 기립박수를 치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고도 했다.

제가 한창 바흐를 연주하고 있을 때, 외국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한 분이 내한했어요. 저도 그 콘서트에 갔었지요. 그 사람이 연주할 곡도 바흐였거든요.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이었어요. 상당히 기대를 하고 갔었는데, 연주가 아주 무성의한 겁니다. 심지어 펼쳐놓은 악보를 군데군데 건너뛰면서, 그야말로 ‘대충’ 하더라고요. 한국 청중을 너무 ‘쉽게’ 본 거죠. 또 어떤 연주회에서는 중간에 그냥 나와버린 적도 있어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문제 많았던 연주에 청중이 열광하더라고요.”

한국의 연주회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일부 청중의 키치(Kitsch)적 태도. 강충모는 신분이나 교양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음악회장을 찾아오는, 속물적인 ‘문화 귀족’들에게도 일침을 놨다. 그는 “입장료가 비싼 연주회일수록 그런 청중이 많다”며 “콘서트홀이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사교장으로 변질돼선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연주자를 꿈꾸는 후학들에게는 ‘해석의 깊이’를, 콘서트홀을 찾는 청중에겐 음악에 대한 ‘이해와 견해’를 갖게 해주고 싶어서 5년간 렉처 콘서트를 이끌어왔다는 강충모. 그는 ‘인투 더 클래식’이라고 이름붙인 이 장기 프로젝트를 1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마감하면서 세 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한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대곡(大曲)으로 꼽히는 ‘21번 B플랫장조 D.960’, 베토벤 후기의 초탈한 음악성을 대변하는 ‘소나타 32번 c단조’, 쇼팽이 작곡한 3곡의 소나타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받는 ‘3번 b단조’ 등이다. 3곡의 공통점은 세 작곡가의 마지막 소나타라는 점. 그래서 연주회 이름도 ‘마지막 소나타’로 붙였다. 특히 베토벤의 소나타 32번은 강충모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이라며 애착을 표하는 곡이다.

그는 “죽을 때 가져가고 싶은 음악이 있는가?”라는 마지막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있다”고 답했다. “어떤 곡이냐?”고 묻자, “베토벤의 32번, 말러의 ‘대지의 노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2악장”이라고 답했다.(글·문학수 선임기자)

08.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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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1-11 09:20   좋아요 0 | URL
^^ 콘서트홀이야말로 '과시적소비'를 가장 세련된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 공간 중에 하나일겝니다. 강충모가 좋아하는 곡은 저도 좋아하는 음악들이네요. 가을 요맘때는 중국 한시에 곡을 붙인 말러의 '대지의 노래'가 귀에 잘 들립니다.

로쟈 2008-11-12 00:53   좋아요 0 | URL
청중들의 키치적 태도 못지 않게 문제인 건 공연비평 같습니다. 좋은 공연과 부실한 공연을 가려주는 비평문화가 제대로 자리잡고 있다면 허술한 공연이 발붙이기 어려울 듯싶은데, 사정은 그렇지 못한 듯해서요...

수유 2008-11-11 09:44   좋아요 0 | URL
슈베르트 D.960은 이 계절하고도 아주 잘 어울리죠..저도 좋아하는 곡들입니다.
나이들면서 슈베르트의 곡들의 어떤 진정성들이 와닿아요..
별 관련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콘서트홀의 '키치적 행태'야 익히 보아온 것들이고..그래도 요즘 많이 나아진것 같기도 한데
뭐 그렇습니다.

로쟈 2008-11-12 00:56   좋아요 0 | URL
공짜표 청중과 '문화 귀족' 없이도 고급 공연문화가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1-11 16:35   좋아요 0 | URL
학단협...가물가물 기억나는 단체...한나라당이 재집권했으니 예전 군사정권 때처럼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을까요.

로쟈 2008-11-12 00:51   좋아요 0 | URL
별로 기대가 가지는 않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