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 번역에 관한 페이퍼를 올려두려고 했으나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도 있고 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다. 그래봐야 두 권의 책 이야기다. 하나는 최근 바짝 붐을 타고 있는(짐작엔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개봉과 함께 바람을 탄 듯하다)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1922- )의 신작 <죽음의 중지>(해냄, 2009)이고, 다른 하나는 퓰리처상 수상작가 어네스트 베커(1924-1974)의 <죽음의 부정>(인간사랑, 2008)이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한국일보(09. 02. 14) 죽음이 사라진 세상… 천국일까? 지옥일까?

장생불사(長生不死)는 인간의 오랜 꿈이었다. 그러나 막상 죽음이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실명하고 단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는 상상력을 발휘, 인류 본성의 밑바닥을 보여줬던 <눈먼 자들의 도시>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87)는 이번에는 '죽음이 소멸된 사회'라는 세계를 가상함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진 사회, 경제, 도덕적 문제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다음날, 아무도 죽지않았다. 삶의 규칙과 절대적인 모순을 이루는 이 사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엄청난, 그리고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이해해줄 만한 불안을 일으켰다"라는 첫 문장이 암시하듯 갑자기 죽음이 소멸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진다. 현세에서 '불멸'의 권리를 얻게 된 사람들, 태초 이래 인류의 가장 큰 꿈이 실현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새 생명은 진실로 아름답다"고 외치며 집단적 환희감에 빠져든다.

하지만 웃는 사람이 있으면 우는 사람이 있는 법. 죽음의 협력 거부라는 난공불락의 벽에 부딪힌 장의업계는 정부에 가축 매장과 화장사업의 독점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죽지 않는 환자들로 만원을 이룬 병원에서는 환자를 복도에 내어놓는다. 돌봐줄 환자가 없는 호스피스들도, 생명보험 해약 요구가 빗발치는 보험사들도 통곡의 벽에 머리를 찧는다. 근본적 존재 위기에 빠진 것은 교회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이 없으며, 부활이 없으면 존재가치가 무의미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죽음의 중지로 인한 사람들의 환호는 '지옥의 종소리'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희망과 절대 죽지 않는다는 공포 사이에 던져진 인간군상의 모습이 한폭의 만다라처럼 그려진다. 정부가 특별한 방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사이, 죽음 직전의 가족을 둔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찾는다. 아직 죽음이 활동하는 국경 너머에 죽을 병에 걸린 환자들을 데려가주는 마피아는 이제 자선조직이 된다.

방송사 사장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면서 혼란의 7개월은 종식된다. 편지의 발신자는 '죽음'. 죽음은 이 실험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건 나를 그렇게 혐오하던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산다는 것, 영원히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맛을 좀 보게 해주려는 것이었어요. 물론 우리끼리 이야기입니다만, 언제까지나라는 말과 영원히라는 말이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것처럼 동의어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걸 솔직히 고백해야겠군요." 

줄 바꾸기와 인용부호 따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은 작가 특유의 문장도 여전하다. 책을 덮고 나면 공자가 던진 '삶을 모르는 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는가'(未知生 焉知死) 하는 무거운 철학적 질문이 한 노대가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 어떻게 형상화했는가를 깨닫고 그 긴 여운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이왕구기자)   

한편, 베커의 유작에 관해선 별다른 리뷰가 올라온 바 없다. 출판사 소개도 고작 넉 줄이 전부다. "현대 저술 중에서 죽음인식에 대한 문제를 심층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저술은 에른스터 베커의 <죽음의 부정>(1973)일 것이다. 이 책은 죽음과 관련된 현대적 고전이다. 죽음의 문제에 대한 심화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할 책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죽음의 부정>은 에른스터 베커 자신이 암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3개월 전에 비문학 작품 분야에서 퓰리처 수상 작품으로 인정을 받은 책이다." 

 

소리 소문도 없이 출간되긴 하지만 "조롱하지 마라, 비탄하지 마라, 저주하지 마라, 단지 이해하려 하라"라는 스피노자의 경구를 에피그라프로 달고 있는 베커의 책은 개인적인 관심사에 잘 들어맞는 책이다('사랑과 가난과 죽음과 언어'가 나의 네 가지 주제다). 비록 36년 전 책이기는 하지만 죽음이란 주제만을 놓고 보자면 그간에 더 나은 진전이 있었는지 얼른 답하기 어렵다. 머리말의 필자는 베커의 주장이 갖는 의의를 이렇게 정리한다. "베커가 내린 근본적인 결론은, 세상을 납골당으로 변하게 하고 모든 개인과 국가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혁명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된 것은 바로 우리의 이타적인 동기들 - 보다 큰 전체와 합병하고, 보다 큰 대의명분을 위해 생명을 바치고, 우주적 힘을 받들고자 한 우리의 욕망 - 에서 비롯된 것들이라는 것이다"(13-14쪽).  

사실 이 책을 서점에서 본 지는 오래됐지만 구입을 미루다가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이유는 번역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아서 방금 인용한 대목부터가 오역이다. 원문은 이렇게 돼 있다. "Becker's radical conclusion that it is our altruistic motives that turn the world into a charnel house - our desire to merge with a larger whole, to dedicate our lives to a higher cause, to serve cosmic powers - poses a disturbing and revolutionary question to every individual and nation."  

번역문은 접속사 that 이하의 전체를 마치 보어절인 것처럼 옮겼는데(Becker's radical conclusion is that- 을 옮긴 것처럼) 이는 물론 전혀 엉뚱한 해석이다. conclusion을 받는 동격절이기 때문이다. 전체 문장의 주어 'Becker's radical conclusion'을 받는 동사는 'poses'이다("베커의 과격한 결론은 개인과 국가 모두에게 불온하면서도 혁명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중학생도 알 만한 구문을 엉뚱하게 파악하고 있으니 나머지 번역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베커 자신은 이 책의 주제를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가 서문의 시작에서 하는 말. "존슨 박사는 죽음에 대한 고찰이 놀랄 만큼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말했다. 이 책의 주요 주제는 죽음에 대한 생각,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인간이라는 동물을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괴롭힌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다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은 인간 행위 - 주로 죽음의 치명성을 피하려고 고안된, 어떤 면에서는 죽음이 인간의 최종 운명이라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려고 고안된 행위 - 의 주요 동기라는 것 이상이다."(29쪽)  

역시나 원문 '이상의' 번역이다. 원문은 이렇기 때문이다. "The prospect of death, Dr. Johnson said, wonderfully concentrates the mind. The main thesis of this book is that it does much more than that: the idea of death, the fear of it, haunts the human animal like nothing else; it is a mainspring of human activity - activity designed largely to avoid the fatality of death, to overcome it by denying in some way that it is the final destiny for man."  

먼저 'prospect of death'를 '죽음에 대한 고찰'이라고 옮긴 것도 특이하다. 어려운 '고찰'에까지 갈 것도 없이 '죽음에 대한 예상', '죽음에 대한 전망'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저자가 암과 투병하면서 이 책을 썼다는 사실이 상기되는 대목이다. '존슨 박사'는 물론 저명한 영어사전의 편찬자 새뮤얼 존슨을 가리키겠다. 그런데 여기서도 역자는 지시대명사 that을 앞의 나오는 것 이상이 아니라 뒤에 나오는 것 이상으로 잘못 읽었다. "새뮤얼 존슨은 죽음에 대한 전망은 우리의 정신을 놀랄만큼 집중시킨다. 하지만 이 책의 핵심적인 주제는 죽음이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이하의 내용은 왜 그런가에 대한 부연설명이다. "죽음이라는 관념,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 인간이란 동물에 들러붙어 괴롭히는 것은 없다. 죽음은 인간 활동의 핵심적인 동기이다. 모든 인간의 활동은 대부분 죽음이라는 숙명을 피해보고자, 죽음이 인간의 최종적인 운명이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부정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고자 계획된 것이다."    

우리는 번역에 대해서도 원문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경구는 이 경우에도 적절해 보인다. "조롱하지 마라, 비탄하지 마라, 저주하지 마라, 단지 이해하려 하라."(Not to laugh, not to lament, not to curse, but to understand). 언젠가 놀랄 만큼 집중해서 죽음에 대한 책들을 읽게 될 날이 올 것이다...  

09. 02. 16.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팀전 2009-02-16 23:52   좋아요 0 | URL
죽음이 없으면 무간도지요.무한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을 감당할 수도 없을겝니다....그래서 <은하철도 999>의 철이가 엄마의 한을 풀기위해 그 먼나라 별나라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온거 아니겠어요.ㅋㅋㅋ
그러니 <돌아 가야 할 때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라는 거죠.중의적이네요.ㅋㅋ

로쟈 2009-02-17 01:12   좋아요 0 | URL
불멸을 갈망하지만 동시에 불멸을 감당하기 어려운 게 인간이죠...

람혼 2009-02-17 00:49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랑시에르 번역에 관한 페이퍼는 어쩌면 국역본 <미학 안의 불편함>에 대한 글일 거라는 예상이 살짝 드는데요...^^

로쟈 2009-02-17 01:11   좋아요 0 | URL
미리 정해둔 제목은 '랑시에르 안의 불편함'입니다. '미학 혁명과 그 결과'와 함께 다루려고 해요. 시간이 되면...

2009-02-17 0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7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7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8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8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8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유익한 것은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이다. 다루고 있는 주제가 개인적인 관심사와 맞아떨어지기도 하지만 책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 애초에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이나 이종인 외 <번역은 내 운명>(즐거운상상, 2006) 같은 책을 생각했지만 조금 읽은 느낌으로는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2007)에 더 가깝다. 해서 '20여 년간 번역 현장을 지켜 온 최고의 번역가가 절실한 고민을 이론으로 갈무리한 독창적 번역론!'이란 광고문구에서 '최고의 번역가'와 '독창적 번역론'에 괄호를 친다 하더라도 여전히 읽을 만한 책으로 남을 듯싶다.   

어제 책을 구하고 지하철에서 잠깐 읽은 건 직역/의역의 문제를 다룬 1장 '들이밀까, 길들일까'인데, 번역이론이나 독단적인 주장에 기대지 않고 번역사적 성찰을 통해서 접근한 것이 좋았다. "영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이고 한문 고전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주의가 한국에는 아직 강하게 남아 있"다는 진단에서부터 '조리법'이나 '요리법'이란 한국어 대신에 '레시피(recipe)'라고 읽는 것이나 '자유주의'라고 번역하면 될 것을 굳이 '자유주의(liberalism)'이라고 괄호안에 원어를 넣어 번역하는 것 등의 사례 제시도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그러니 "한국의 직역주의는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무작정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과 미국에게 식민지 대접을 받았고 그때마다 그들에 대한 깊은 열등감에 젖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전통을 살리기보다는 앞섰다고 생각하는 나라를 모방하기에 급급했습니다."란 지적에도 전폭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물론 직역이나 의역이나 일장일단이 있는 만큼('부정한 미녀냐, 정숙한 추녀냐'라는 선택지에서처럼)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편들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의 직역 편향이 좀 교정될 필요성은 충분하다. 그래야 균형이 좀 맞겠기 때문이다.  

저자가 사례로 들고 있는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 "영국이나 미국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일본도 이제는 외국어 원문을 자기 말로 길들이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일본은 개항 이후 외국에서 문물을 일방적으로 수입하면서 원문 중심주의와 딱딱한 직역투를 용인했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들어 일본 경제가 확실히 도약하고 자국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커지면서 번역자, 출판사, 독자가 모두 원문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가독성을 높이는 번역을 선호하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것이 번역문이고 어느 것이 창작문인지 일반이이 구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란 지적은 음미해볼 만하다. 직역/의역의 문제가 경제적/문화적 자신감과 연동돼 있다는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아직도 '어륀지' 사대주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우리의 처지를 보라!). 한갓 취향이나 이론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로 저자가 들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정신현상학> 번역이다. 1998년에 어려운 단어를 거의 쓰지 않고 쉬운 말로만 번역한 하세가와 히로시의 번역본이 나오자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네 사정이 달라진 건 또 아니다. 해서 "난해하기로 소문한 헤겔의 저서를 (...)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유려하고 명쾌한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 독자들에게 충격과 감격을 주었"다는 건 여전히 남의 나라 얘기다. 때문에 드는 생각은 <헤겔 사전>(도서출판b, 2009)이 그렇듯이 자체적인 역량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국어본 <정신현상학>을 기다리기보다는 하세가와의 일역본을 중역하는 게 더 낫지/빠르지 않을까 싶다.   

일역본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지만 하세가와의 솜씨를 감상해보면, 그는 "자연적 의식은 자신이 지(知)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실재적 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자증(自證)할 것이다."란 옛날 번역을 "자연 그대로의 의식은, 지(知)는 이런 것이라고 머리에 떠올릴 뿐이지, 실제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옮겼다. 또 "즉자적이며 대자적으로"란 표현은 "완결무결한 모습으로"라고 옮겼다. 명쾌하지 않은가.   

물론 우리의 현실은 아직 이런 사례와는 거리가 멀다. 번역비평에 관한 발표문을 준비하면서 읽은 논문 중의 하나는 '비트겐슈타인 번역의 미학'(박정일)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비트겐슈타인 전공자이자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서광사, 1997)을 번역한 바 있는 필자가 두 가지 종류로 번역돼 나온 <청갈색책> 번역에 대해 비교분석을 시도한 논문이었다. 그 두 종이란 진중권 번역의 <청갈색책>(그린비, 2006)과 이영철 번역의 <청색책. 갈색책>(책세상, 2006)을 말한다. 필자를 따라서 한 대목만 원문과 같이 비교해본다.        

"후자의 경우에는 놀라움이라 불리는 것을 가질 여지가 전혀 없다. 그리하여 나는 내 자신의 움직임을, 누군가가 침대에서 뒤척이는 것을 보고 "이제 일어나려나?"하고 혼잣말을 할 때처럼 보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의지적 행위와 팔이 올라가는 무의지적 행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하지만 소위 의적 행위와 무의지적 행위 사이에는 단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행위'라는 한 가지 요소의 현존과 부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진중권, 274쪽) 

"예를 들면, 후자의 경우에는 이른바 놀람의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 또한 나는 나 자신의 움직임들을, 어떤 사람이 침대에서 방향 전환하는 것을 내가 예를 들어 "그는 일어나려고 하는가?" 하고 나 자신에게 말하면서 바라보듯이 바라보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남이라는 수의적 행위와 내 팔의 불수의적 올가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른바 수의적 행위들과 불수의적 행위들 사이에 하나의 공통적인 차이, 즉 '의지의 작용'이라는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이영철, 250쪽)  

There is, e.g., in this case a perfect absence of what one might call surprise, also I don't look at my own movements as I might look at someone turning about in bed, e.g., saying to myself "Is he going to get up?"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voluntary act of getting out of bed and the involuntary rising of my arm. But there is not one common difference between so-called voluntary acts and involuntary ones, viz, the presence or absence of one element, the 'act of volition'."   

먼저, 두 번역에 대한 비교평에서 필자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먼저 'voluntary acts' 'involuntary ones' 'act of volition' 등의 표현을 '의지적 행위'' '무의지적 행위' 의지 행위'(진중권)라고 옮긴 것이 '수의적 행위' '불수의적 행위' '의지의 작용'(이영철)이라고 옮긴 것에 비해 어색하며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 비트겐슈타인의 'act'가 정신적인 것을 가리킬 때 주로 '활동'이란 개념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근거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see(보다)와 look at(바라보다)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쓰는 데 진중권은 이를 모르거나 놓치고 있다는 것. 이어지는 다수의 사례를 통해서 필자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영철본에 비해서 진중권본은 "번역 요건의 최소한의 정도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비트겐슈타인 철학에 대한 번역자의 학문적 기반을 의심케 하다"고 혹평한다. 그렇지만 진중권본은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을 이해하려고 할 경우 쉽게 오해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어서 반면교사로서는 유용하다는 평을 내린다(진중권본의 문제점을 그대로 지나치면서 읽는다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다는 증거다!).        

한데, 비트겐슈타인 전문가가 아닌 일반독자로서 나의 초점은 좀 다른 데 있다. 대의를 파악하는 데 둘다 별 지장이 없다면 가독성 면에서는 진중권본이 좀 낫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다 지나친 직역투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 <번역의 탄생>의 저자도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한국어는 동적인 언어라서 명사나 명사구보다는 동사구 표현을 선호한다. 해서 "명사가 한국어보다 훨씬 많은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글이 어려워"진다.  

대체 "There is, e.g., in this case a perfect absence of what one might call surprise"란 첫 구절을 어떻게 옮기는 것이 나을까? "후자의 경우에는 이른바 놀람의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 '놀람'이란 명사형도 우리말에서는 어색하지만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는 건 또 뭔가? 뭔가 심오해 보이는, 그래서 시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정작 영어에서 그 표현이 그토록 심오하며 시적인 표현인 것인지? "후자의 경우에는 놀라움이라 불리는 것을 가질 여지가 전혀 없다"고 옮기는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왜 그냥 "이런 경우에는 놀랄 게 전혀 없다"라고 옮길 수 없는 것일까?    

그건 마지막 문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소위 의적 행위와 무의지적 행위 사이에는 단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행위'라는 한 가지 요소의 현존과 부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진중권)와 "그러나 이른바 수의적 행위들과 불수의적 행위들 사이에 하나의 공통적인 차이, 즉 '의지의 작용'이라는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이영철)라는 두 문장에서도 차이보다 더 도드라지는 것은 공통점이다. "the presence or absence of one element"를 '직역'한 것이긴 하나 '현존이 있다'나 '부재가 있다'는 표현은 한국어가 아니다(동어반복이거나 모순어법이다).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옮길 수는 없을까? "하지만 소위 수의적 행위와 불수의적 행위 사이에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작용'이라는 한 가지 요소가 있느냐 없느냐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 같은 문장도 자꾸 읽고 쓰고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으로 수용될 수 있다. 많은 번역투의 문장과 문체가 한국어화된 것처럼. 하지만 한국어의 특성에 맞게 가려쓰고 가급적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옮겨주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번역을 선택할 것인가란 문제가 말 그대로 '선택의 문제'라면 나는 그쪽을 택하고 싶다. 어떤 쪽인가? 아래 문장을 순차적으로 좀더 우리말에 가깝게 바꾸어본다.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voluntary act of getting out of bed and the involuntary rising of my arm.  

침대에서 일어남이라는 수의적 행위와 내 팔의 불수의적 올라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이영철)

침대에서 일어나는 의지적 행위와 팔이 올라가는 무의지적 행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진중권)

침대에서 일어나는 수의적 행위와 나도 모르게 기지개를 켜는 불수의적 행위는 서로 다르다.  

09. 02. 15.


댓글(9) 먼댓글(2) 좋아요(5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번역은 국어를 잘해야 한다
    from Ellie's Professional Software Insight 2009-02-19 00:53 
    원글 쓰신분의 예는 헤겔이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서적을 번역한 예여서 왠지 더 까다롭고 심오한 내용인 것 같지만 ^^ 이런 문제는 기술서적을 번역할 때도 발생한다. 번역할때 같이 공역하던 분들과 계속 토론했었던 것이,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너무나 장황하고 영어 표현의 특성상 우리나라말과 바로 매치되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이것을 원문을 존중할 것인가 우리가 이해한 내용을 바탕으로 의역할 것인가를 많이 논의했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출판사 측에서는 당연히..
  2. 청갈색책의 두 가지 번역본
    from weekly님의 서재 2011-06-14 01:39 
    1. 나는 비트겐쉬타인의 청갈색책의 두 가지 번역본 중 진중권의 것을 샀다. 그 이유는, 1).초반 몇 문장을 읽어보니 이영철 번역본보다 잘 읽혔다. 2). 적당한 분량의 재미있는 해제가 달려 있었다. 3). 이영철 번역본의 표지가 만화책 표지처럼 조잡해 보였다. 2. 나는 철학책을 살 때, 직역을 위주로 했다느니 저자의 문체를 느낄 수 있도록 번역했다느니 하는 역자의 말이 있으면 그 책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런 책은, 요컨대 가독성이 심하게
 
 
2009-02-16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6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열매 2009-02-17 0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라...이런 번역이 아직도 완전히 부재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군요^^
박정일씨는 미드를 보면 놀랄 것 같습니다. '완전히 부재가 존재한다'는 투의 영어식 표현이 미국 중산층 이상의 회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말입니다. 그런 미드 대사를, 영어의 명사위주 표현을 그대로 번역한다면-.,-?
voluntary의 번역인 '수의적隨意的'이란 표현은, 한문을 공부했던 저에게도 한자 표기가 없으면 알아볼 수 없는 낯선 표현인데요. 번역어의 선택을 보면서 이영철교수가 일본어판을 상당수 차용하지 않았나라는 의심과 함께,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의도적으로, 너무 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일본어역을 참조하거나 거의 일본어판으로 번역한 경우, 의미는 대충 헤아려지지만 서양어 원본만 보고 번역에 임할 때는 떠올릴 수 없는 한자조어가 많이 등장하면 의심해 볼만 합니다.

로쟈 2009-02-16 15:06   좋아요 0 | URL
'voluntary'가 영한사전에 '수의적'이라고 나옵니다. 생리학 용어로. 영한사전의 모델이 또 영일사전일 테니까 열매님의 의혹도 자연스럽지요. '수의적 행동'이란 말을 의학쪽에서 쓰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법해서(의학용어도 일어에서 오잖아요) 놔두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명사형 표현을 직역하면 이상하긴 합니다.의사의 재빠른 도착이 그녀의 빠른 회복을 가져왔다...따위인데,의사가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그녀는 회복이 빨랐다로 해야지요.물주구문이 특히 이런 해괴한 번역투 문장을 양산해 냅니다.

로쟈 2009-02-18 22:25   좋아요 0 | URL
수용이란 게, 어느 시점까지는 필요하지만 그 이후엔 '자기화'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해요...

paul 2009-02-1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번역문'이 양산되는 한 가지 이유가, 결국 번역의 '정확성'을 '직역'과 혼동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얼마나 의미를 쉽게 전달할 것인가'보다는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할 것인가에 더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물론 번역의 정확성은 엄밀히 지켜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언어의 무게중심은 번역되는 문장이기 보다는 번역한 문장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말이죠. 번역이 단순하게 말을 옮기는 것이 아닌, 옮겨지는 말의 의미까지 전달할 수 있는 넓은 의미의 창조적 행위라고 보았을 때, 번역의 창조성과 가치는 그런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환에 대한 두려움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직역과 정확한 원뜻에 집착하는 것도 번역(변혁)의 불안에 대한 자기방어적 제스처라는 생각이 듭니다.

로쟈 2009-02-18 22:26   좋아요 0 | URL
제 표현으론 '자신감의 문제'이고 '책임의 문제'인데, '충실성'이라는 이유로 대개는 회피하려고 하지요...

weekly 2011-06-15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먼댓글을 썼다가 바로 지웠는데 시스템에 아직 반영이 되지 않았나 보네요...-.-)

먼댓글보다는 댓글로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위에 비트겐쉬타인의 원문 인용 부분에 한정해서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rising of my arm"과 기지개 켜는 것은 상관없는 얘기입니다. "rising of arm"이 어떤 경우를 의미하는지는 책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2. involuntary를 불수의적이라 번역하면 안됩니다. 예를 들면 심장은 불수의적입니다. 우리 의지대로 움직이거나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런 건 비트겐쉬타인의 논의 대상이 아니죠.

3. 로쟈님께서 "... 놀랄 게 전혀 없다"로 옮기신 부분은 그렇게 옮기시면 안됩니다. 비트겐쉬타인이 의도한 바는 진중권이 번역한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관찰하는 태도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하나로 나중에 다시 언급됩니다. 다시 말해 전혀 일상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4. "... 차이가 있다"를 "... 다르다"로 번역해서도 안됩니다. 바로 뒤에 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로쟈님식대로 하면 '공통의 다름'이라는 정체불명의 말이 생겨날지도 모르겠습니다.

5. 인용된 원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의지 작용이 있으면 의지적 행위가 되고 의지 작용이 없으면 무의지적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점을 진중권 번역본은 잘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반면 이영철 번역은 밋밋합니다. 저 원문의 번역만 놓고 보아서는 박정일이 주장하는 대로 이영철 번역은 "참으로 아름"다운 반면 진중권 번역은 "최소한의 정도"도 지키지 못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진중권이 원문의 맥락을 탁월하게 부각시켜 놓은 노고는 아무도 칭찬을 하지 않는군요. 번역에 있어 최고로 중요한 항목을 말입니다...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이후, 2009)에서 제일 처음 분석하고 있는 사례는 "헨리 밀러의 유명한 소설 <섹서스>"이다. 나는 그의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은 예전에 읽어보았지만 <섹서스>는 챙겨두지 않아서 찾아보았는데, 시중에서는 이미 구할 수 없는 책이었다. 언제나처럼 여러 저자와 여러 주제의 책들을 한꺼번에 읽어야 하는 처지라서 <성 정치학>에 대한 정독은 미래에나 가능한 일이지만, 만약에 읽게 된다면 3부 '문학적 고찰'에서 다루고 있는 네 명의 남성작가(D. H. 로렌스, 헨리 밀러, 노먼 메일러, 장 주네)와 같이 읽는 게 좋을 듯싶다. 리스트는 그래서 만들어둔다(물론 밀렛이 다루고 있는 작품이 모두 소개된 것은 아니며, 또 일부는 도서관 신세를 져야 한다). 


1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성性 정치학
케이트 밀렛 지음, 김전유경 옮김 / 이후 / 2009년 1월
28,000원 → 25,2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00원(5% 적립)
2009년 02월 15일에 저장
구판절판
북회귀선
헨리 밀러 지음, 정영문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12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2009년 02월 15일에 저장
절판
남회귀선
헨리 밀러 지음, 오승아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12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2009년 02월 15일에 저장
절판
무지개 1
D.H. 로렌스 지음, 김정매 옮김 / 민음사 / 2006년 12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12월 29일 (월)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09년 02월 15일에 저장



1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Joule 2009-02-15 19:3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그녀의 <성 정치학>을 잘 읽어보고 싶으면 저 책들을 먼저 다 읽어봐야 한다는 건가요? 나름 만만치 않은 독서로군요.

로쟈 2009-02-15 19:35   좋아요 0 | URL
설마요.^^ 분석대상이 그러하니까 그냥 같이 읽으면 더 좋겠단 뜻입니다. 메일러의 책은 <나자와 사자>를 골라야 하는데, 시중에 없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2-15 22:39   좋아요 0 | URL
나자와 사자가 없군요.첫 출세작인데 오래전 것이라 절판되었나 봐요.저는 박영문고에서 나온 것이 있습니다.예전에는 전집에도 가끔 포함되어 나왔어요.전쟁문학 전집인가 뭐 그런 것도 있었죠.
 

바쁘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쳤지만 지난 목요일은 찰스 다윈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뉴스를 검색해보니 "세계적으로 600여 개 기념행사가 펼쳐진 가운데 모국인 영국에서 다양한 이벤트가 개최됐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기념행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번주에 나온(혹은 내주에 나올) <진화론의 유혹>(북스토리, 2009)은 나름대로 그를 기념할 만한 책이다. 아직 아무런 리뷰기사도 올라오지 않아서 출판사 소개를 옮기자면, "이 책은 진화론자인 윌슨 교수의 ‘모두를 위한 진화론Evolution for Everyone’이라는 강좌를 책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 강좌는 매년 생물학은 물론 역사나 경제학, 심지어 법학이나 기계공학 같은 언뜻봐서는 진화론과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다양한 분야의 학생들에게까지 많은 호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 

      

저자가 '윌슨 교수'라고 했는데, 저명한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아니라 데이비드 슬론 윌슨이고 뉴욕 주립대학교의 생물학과 인류학 교수이다. 국내에는 '진화론과 종교, 그리고 사회의 본성'을 다룬 <종교는 진화한다>(아카넷, 2004)로 이미 소개된 바 있다(나는 몇 달 전에야 책의 존재를 알았다. 이 또한 2004년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된 책이었다). 이번에 나온 <모두를 위한 진화론>은 2007년에 나온 책으로 부제는 '다윈의 이론은 삶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어떻게 바꾸는가(How Darwin's Theory Can Change the Way We Think About Our Lives)'이다. 그것이 '가장 과학적으로 세상을 해석하려는 욕망'이란 국역본의 부제로 어떻게 진화한 것인지는 실물을 봐야 알 듯싶지만, 그것도 나쁘진 않다. 소개는 이렇다.   

윌슨 교수는 그동안의 많은 연구자들이 진화론을 명확히 이해하는 순간, 가장 명료한 과학적 논리체계라는 진화론의 강한 매력 때문에 진화론 또는 다윈에 쉽게 빠져들어 왔다고 말한다. 나아가 현대의 진화론자들은 다윈의 강력한 이론 덕택에 그들만의 광활한 사고의 제국을 구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차원적인 지적 논문에서 다뤄지는 인문학적 주제들을 거침없이 넘나들고 있다고 한다.(...) 진화론이 가진 이런 매력은 현대의 모든 학문과 이론 분야에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동식물은 물론 인간과 관련된 모든 연구에서 갈수록 진화론을 활용하는 일이 늘었다. 그들은 주로 우연한 기회에 진화론을 접하게 되었고 진화론이 연구를 주도하는 힘이 될 때까지 조금씩 전문지식을 구축해 나간다고 한다. 또한 그들이 쉽게 스스로를 훈련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은 진화론적 사고의 힘이 대량의 기술적 세부지식이 아니라 누구나 배울 수 있는 매우 단순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요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많은 것을 설명해주는 능력이 진화론적 사고의 힘이라는 얘기다. 가장 단순하게 '구애' 행동에 관한 진화심리학의 설명만 살펴보아도 그렇다.  

 

이번주에 나온 잉겔로레 에버펠트의 <유혹의 역사>(미래의창, 2009)만 하더라도 인간의 구애행동과 남녀의 각기 다른 유혹의 전략에 대해 얼마나 명쾌하게 설명하는가.  

"우리 안에는 다양한 원시적 욕망이 내재되어 있고, 어떻게 보면 인류가 지금까지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바로 그 원시적 욕망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이 발달되면서 원시적 욕망에 고삐를 당겨두기는 했지만 욕망의 목소리를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었다. 다양한 원시적 욕망 중 특히 더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성욕이다. 하지만 인간이 오로지 쾌락 때문에 성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은 거대한 착각이요 순진함의 발로이다. 성욕은 오히려 정반대 쪽에서 접근해야 옳다. 즉, 재미가 있어서 섹스를 즐긴다기보다는 섹스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이유가 자연의 '조작' 때문이라는 것이다. 재미가 있어서 인류의 번식이 보장되기 때문에 자연이 미리 그렇게 장치를 해둔 것이다."(7쪽)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남녀 관계는 한없이 복잡하면서도 한없이 간단하다."(13쪽) 말하자면 이런 것이 진화론적 사고의 힘이다(더불어 진화론은 '꽃보다 남자'에 폭 빠져 있는 딸아이를 이해하게 해준다. '올모스트 패러다이스'라는데 어쩌겠는가).  

또 다른 윌슨, 에드워드 윌슨은 <진화론의 유혹>에 대해서 "놀랍다! 그 어떤 작가도 이렇게 난해한 주제로 이렇듯 흥미롭고 명료하게 인간, 생명체, 사회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를 위한 책이다"라고 평했다. 이 정도면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다(특히나 초코렛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09. 02. 14.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02-15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5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5 17:44   좋아요 0 | URL
김범 얼굴이 다른 사람처럼 나왔네요.

로쟈 2009-02-15 19:38   좋아요 0 | URL
저는 왼쪽 둘밖에 모르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15 22:28   좋아요 1 | URL
세번 째 사진입니다.김범을 검색해서 이 사진과 비교해 보세요.아무래도 이런 지식까지 다 갖추라는 부탁은 무리겠지요? 하하하...

로쟈 2009-02-15 22:32   좋아요 0 | URL
본인이 맞는 거 같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15 22:41   좋아요 0 | URL
이기우나 감우성 비슷하게 나온 것 같아요.김범은 더 이쁘장한 것 같던데...

로쟈 2009-02-15 23:40   좋아요 0 | URL
언니, 오빠들한테 너무 신경을 쓰시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2:47   좋아요 0 | URL
아...이런 곱상한 청춘들이 늙어가야 한다니...세월이 잔인하지요...
 
그 글쓰기의 폐쇄성과 자아도취, 지긋지긋하다.

번역비평학회에서 발표한 글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제목은 '번역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철학/이론서 번역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이며 옮겨놓는 것은 발표문의 서론과 결론 부분이다.  

얼마전 알라딘 블로그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그 글쓰기의 폐쇄성과 자아도취, 지긋지긋하다’란 제목의 페이퍼인데(작성자는 ‘빵가게 재습격’님이다), 프랑스 철학서에 대한 비판을 신랄하게 늘어놓았다. 소위 ‘고급’ 철학/이론서를 읽으며 한번쯤 ‘당해본’ 독자들이라면 공감할 법도 한 내용이어서 잠시 읽어보기로 한다. 이렇게 시작한다.

“도대체 프랑스 지식인이란 자기도취와 자폐적인 난잡함을 지껄이는 존재들에 불과한가? 얼마 전에 알렝 투렌의 <현대성 비판>을 읽어보다가, 짜증스러워서 책을 그냥 덮어버렸다. 그러면서 생각난 김에 집에 있는 프랑스인들의 책들을 몇 권 꺼내서 살펴보았는데, 도대체가 그 ‘난잡함’ 이 그 ‘난잡함’ 수준이었다. 독자를 가정하지 않고, 복잡한 개념을 정의하지 않으며, 접속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기이한 문장구조와 문학적 표현인지 개념적 표현인지 분간할 수 없는 독백을 설사하듯이 지껄여대는 것. 이건 바로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이하 인용문의 강조는 모두 인용자)
 
원서 자체의 난해성과 번역의 난해성을 구별하고 있지 않아서(물론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려운 책이어서 어렵게 옮겨진 경우처럼) “그 난잡함이 그 난잡함 수준”이라는 평에는 전적으로 동감하진 않지만 강조한 대목처럼 “독자를 가정하지 않고, 복잡한 개념을 정의하지 않으며, 접속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기이한 문장구조와 문학적 표현인지 개념적 표현인지 분간할 수 없는 독백”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은 생소하지 않다. 만약 그것이 정말 저자의 화법이고 포지션이라면 번역(자)은 어떻게 말을 받아야 할까?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할까? 일단은 그런 질문들을 던지고 싶다. ‘빵가게 재습격’님의 불평을 조금 더 들어보자.

“세상에는 학자들이나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이론서가 있고, 그 이론서의 서술이 쉽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론서라는 것은 자신의 개념을 남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고,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책들을 참고하고 뒤적이면서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정상이다. 가령 ‘초기 독일 미학은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을 매개하여 감각중추의 세계를 추상에 의해 제거해 버리지 않고 규명해 줄 일종의 구체적인 논리를 가공해 내려는 기획이다.’(<미학이론>) 같은 서술을 보자. 여기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보편적인 것’, ‘특수한 것’, ‘감각중추의 세계’ ‘추상에 의해 제거해 버리지 않고 규명해 줄 (...) 기획’ 같은 것인데, 독일 미학의 전통에서 보편과 특수의 의미, 미적인 것을 규명하려는 기획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대략 이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지식과 서술의 전문성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면 ‘따라갈 수’는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지식인들의 이 서술 꼬락서니를 보라.” 



나는 아도르노의 책이나 독일 미학 서적을 프랑스 철학서들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못되어 유독 프랑스 철학서만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것이 잘 이해되지는 않는다(사실 난해성의 원조라면 칸트나 헤겔을 따라갈 수 있을까?).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책들을 참고하고 뒤적이면서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는 건 프랑스 철학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그래도 끝내 못 따라가는 건 독일 철학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문화적 차이가 낳는 스타일상의 차이는 있겠다. 가령 “독일의 전통적인 변기는 변기 구멍이 앞에 있어서 우리 눈앞에 드러난 똥의 냄새로 병이 있는지 조사할 수 있다. 전형적인 프랑스 변기는 구멍이 뒤에 있어서 물을 내리면 똥은 빨리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변기는 앞의 두 형태의 중간 형태로 변기에 가득 차 있는 물에 똥이 떠 있지만 자세히 조사할 수는 없다.”고 할 때의 세 가지 다른 변기 스타일처럼 말이다(헤겔은 독일-프랑스-영국의 지리적 삼항을 ‘독일의 반성적 철저함’ ‘프랑스의 혁명적 조급함’ ‘영국의 온건한 공리적 실용주의’로 대비시켰다).  

지젝이 인용하고 있는 소설 <날기가 두렵다(Fear of Flying)>에서 에리카 종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의 화장실은 제3제국의 공포를 이해하는 열쇠이며, 그와 같은 화장실을 만든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이걸 “그와 같은 책을 쓴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라고 비틀어서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비틀기가 억지스럽다면, 프랑스 철학자들만이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치켜세워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꼬락서니’는 한번 들여다보는 게 좋겠다.
    
“역사가들의 관심이 특히 장기적인 기간에 돌려진 지도 이제 몇 십 년이 지났다. 그들은, 정치적 돌발사건과 그들의 일화 아래에서, 안정적이고 깨어지기 어려운 평형들과 비가역적인 과정들, 항상적인 조절, 오랫동안의 지속을 거쳐 정상에 달했다가 전복되는 일정한 경향의 현상들, 축적과 느린 포화의 운동들, 전통적인 이야기들의 연쇄가 사건들의 모든 두께로부터 복구해 낸 부동의 그리고 말 없는 커다란 주춧돌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지식의 고고학>) 



미셸 푸코의 ‘이론적’ 저작인 <지식의 고고학>(1969)의 서두 부분이다(내가 갖고 있는 번역서는 <지식의 고고학>(민음사, 1992)이다. 이후 2000년에 신판이 나왔지만 인용문을 보건대 번역은 수정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딱 40년 전 책이니 액면으로도 시차(時差)를 무시할 수 없는 책이다. 어느 정도의 낯설음은 감안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번역문에 대한, 아니 푸코의 ‘꼬락서니’에 대한 ‘빵가게 습격’님의 불만은 이렇다.  

“‘역사가’는 누구인가? E. H. 카의 역사가인가? 아니면 -주석이 말하는 대로- 아날학파인가? 또한 그들의 ‘정치적 돌발사건과 그들의 일화 안에서 안정적이고 깨어지기 어려운 평형들과 비가역적인 과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들의 ‘축적과 느린 포화의 운동’은 도대체 무슨 운동이며 ‘사건들의 두께’는 어떤 형태의 두께인가? 이런 개념들을 역사학 이론서에서 찾아본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도 불명료하기 이를 데 없다. 아마 역사가들이 과거를 재단하고 일정한 이론 혹은 패러다임 속에서 인과적으로 나열하는 작업을 암시하려는 것 같은데, 서술이 불투명해서 이마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역사서술을 이 따위로 신비스럽고 암시적으로 나타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인용된 대목은 역자의 주석대로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아날학파의 관심과 역사서술을 푸코가 정리하고 있는 부분이다(그러니까 ‘역사서술’이 아니라 ‘역사서술에 대한 서술’, 곧 메타-역사서술이다). ‘아날학파’에 대해서 검색해보거나 관련서를 약간만 들추어보아도 전체적인 요지는 따라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나열식 문장의 생경함을 전적으로 제거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보통의 철학/이론서 번역이 그렇듯이 원서의 난해함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번역의 난해함이 더 보태진다(한국어 독자들은 이중의 난해함과 대면해야 한다!).  

철학/이론서 번역을 대할 때 ‘전문독자’가 아니라 그저 ‘평균보다 조금 나은 독자’로서 나는 그런 난해함과 접할 경우, 영역본이나 (간혹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을 참조하게 되는데, <지식의 고고학> 영역본(1972)은 서두의 “역사가들의 관심이 특히 장기적인 기간에 돌려진 지도 이제 몇 십 년이 지났다.”를 이렇게 옮겼다. “For many years now historians have preferred to turn their attention to long periods,(...)” 계속 이어지는 영역문은 인용문 전체가 한 문장이다. 짐작엔 불어 원문도 그러할 듯싶은데, 한국어본은 이를 두 문장으로 나누었다(이왕 나누는 거라면 세 문장으로 나누는 건 무리였을까?). ‘long periods’를 ‘장기적인 기간’이라 옮긴 것이 (비록 중복이긴 해도) 무리는 아니지만, ‘장기간의 역사’나 ‘장기지속’ 혹은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라고 ‘의역’할 수는 없었을까?

인용문의 후반부는 어떤가. “전통적인 이야기들의 연쇄가 사건들의 모든 두께로부터 복구해낸 부동의 그리고 말 없는 커다란 주춧돌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 대목의 영역은 이렇다: “[they were trying to reveal] the great silent, motionless bases that traditional history has covered with a thick layer of events.” 영역본만을 옮기면 “그들은 전통적인 역사서술이 사건들의 두꺼운 층으로 덮어버린, 거대한 무언의, 부동의 토대를 드러내고자 했다.” 정도이겠다. 여기서 먼저 대비되는 것은 ‘전통적인 이야기들’과 ‘전통적인 역사서술’이다. 이건 짐작에 불어의 ‘histoire’가 갖는 중의성에 기인하는 듯싶다(크리스테바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말로는 <사랑의 역사>라고 옮겨질 때처럼). 하지만 그런 중의성을 갖고 있지 않은 영어에서는 역자가 ‘story(tale)’나 ‘history’ 가운데 문맥에 맞게 선택을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이야기들’보다는 ‘전통적인 역사서술’을 아날학파의 ‘새로운 역사서술’과 대비시키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운 게 아닌가 한다. 참고로, 역시나 불어처럼 ‘이스토리야(istorija)’란 말이 중의적인 러시아어본(2004)에서는 ‘전통적인 서사(내러티브)들’이라고 옮겼다. 한데 문제는 ‘이야기들’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사건들의 모든 두께로부터 복구해낸”이란 번역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영역본에서 “전통적인 역사가 사건들의 두꺼운 층으로 덮어버린”이라고 옮긴 대목이고, 러시아어본에 따르더라도 “전통적인 내러티브의 어지럽고 두꺼운 사건들 아래 숨겨진” 정도이다. 그렇게 사건들의 더미에 덮인/숨겨진 ‘주춧돌’(초석)을 드러낸 것은 전통적인 역사서술이 아니라 아날학파의 새로운 역사서술 아닌가? 바로 그런 맥락에서 국역본의 번역은 명쾌하지 않다. “신비스럽고 암시적”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오역’이다(불어본 원서로 치자면 바로 첫 문장인데, 한국어본의 오역은 초판이 나온 지 17년이 지난 지금도 교정되지 않았다. 불어본을 찾아보니 'recouvrir'를 옮긴 것인데, 영어의 'cover'와 같은 뜻이다. 역자는 'recover'와 혼동한 것일까?).  



사실 아쉬운 대목은 연이어 나온다(그렇다고 해서 <지식의 고고학>의 예외적인 사례는 아니다).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를 분석하기 위해 아날의 역사학자들이 동원하고 있는 자료들을 푸코는 나열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풍토와 그의 진동에 관한 연구”이다. 영어로는 “the study of climate and its long-term changes”이다. “기후와 그 장기적인 변화에 관한 연구”라고 옮겨질 수 있는 부분이다. 러시아어에서도 그런데, ‘기후’라는 단어가 불어에서는 ‘풍토’를 뜻하기도 하는 듯하다(찾아보니 불어의 'climat'를 옮긴 것이고. 기후와 풍토를 모두 뜻할 수 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풍토가 어떻게 ‘진동’할 수 있는가?(역자는 ‘지진’과 같은 것을 연상한 것일까?) 러시아어본에 쓰인 단어는 ‘kolebanie’인데 ‘진동’이란 뜻도 갖지만 이런 경우에는 ‘변동’이라고 옮겨준다. 그래서 “기후와 그 변동에 관한 연구”라고 옮길 수 있다. 아무려나 “풍토와 그의 진동”즘 되면 문제는 불어나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다. ‘엎친 데 덮친 격’의 소재가 되는 것은 대부분 따로 있지 않다.  

‘빵가게 재습격’님은 이밖에도 몇 가지 사례를 더 인용한 뒤에 평균적인 독자가 가질 법한 실감을 토로한다. “아니, 프랑스인들이란 이런 난해하고, 암시적이며, 정신병자의 헛소리 같은 문구를 암송하며 즐기는 족속들이란 말인가? 고작 100년 전에 쥘 베른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머리박고 읽어댔던 것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다. 이런 자폐적인 소리를 지껄이며 ‘68혁명’을 언급하고, 모더니즘의 비인간화와 파괴성을 공격하고, 탈근대로 가자는 주장을 한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가? 내 눈에는 지나친 엘리트주의와 자기도취적인 만족감에 허우적거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책을 읽으며, 의미를 고구하고 의의를 찾아내는 일이 훌륭할지는 모르겠으나, 이건 한없이 시간이 남아 머릿속의 개념을 탐구하면서 무한정 탐닉하는 종교인에게나 어울리는 일로 보인다. (...) 그러니까, 이렇게 결론 내리는 수밖에 없다. 프랑스인. 심오함인지 자폐적인 난잡함인지 신나게 니네끼리만 지절대라. 그리고 책으로 내지마라. 지긋지긋하다.”  

물론 이러한 불평에는 어떤 전도 혹은 전치가 있다. 거론된 책들은 프랑스인이 저자이지만 한국인이 번역해서 한국의 출판사에서 낸 책이니만큼 곧바로 동일시하기는 어렵고, 설사 비난을 하더라도 “이런 거 번역해서 책으로 내지마라. 지긋지긋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겠다(프랑스인들이 자기네 책을 내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한). 즉 문제의 출처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이고 우리의 번역 현실이다. ‘번역가게’는 ‘우리가게’인 것이다.    

이런 식의 오역 뒤지기는 아마도 한동안(어쩌면 끝없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번역서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좋은 번역자/번역가가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시대가 온다면, 물론 사정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 부르디외가 매번 강조하듯이 오역의 문제도 어쩌면 사회구조적인 문제일는지 모른다. 그 구조는 아마 금방 바뀌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지/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오역들을 양산해내는 현재의 번역/출판관행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결론적인 제안은 이렇다. 자기가 이해한 것을 이해한 만큼 번역할 것.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번역에 대해서는 두 눈 부릅뜨고 따져볼 것. 오역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지적할/수정할 것(이런 ‘행위자’들의 노력에 대해서 ‘구조’도 언젠가는 감복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래야 번역서가 나와도 읽지 않고, 읽어도 문제를 알지 못하고, 알아도 지적하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선가는 끊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우리 ‘번역’의 현황과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많은 진단과 제언이 제시돼 왔다. 하지만 ‘번역의 문제’를 ‘번역가게의 문제’로 치환해서 보면 아직도 덜 주목받고 있는 성싶은 문제가 있다. 누구를 위한 번역이고, 번역비평인가 하는 점. 번역비평은 그 성격상 번역에 대한 이견과 오역에 대한 지적/교정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작업의 시시비비를 번역자와 비평자간의 의견차 문제로 환원하게 되면 자칫 감정적인 문제로 전화될 소지가 있다(실상 많은 경우에 번역비평은 감정적인 대응만을 유발하곤 한다. 심지어는 법적인 대응까지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번역자나 비평자나 일차적으론 책의 독자이며, 독자로서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것, 그것도 더 정확하게, 더 잘 읽는 것이다. 즉, 독자는 번역자-독자와 비평자-독자의 제3항이자 공통항이다. 번역비평은 바로 그 ‘독자’를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는 두 가지 인문서의 사례를 들고 싶다. 먼저,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 붐을 일으켰던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의 한 대목을 읽어본다.

“프로타고라스는 사람들에게 정치 기술을 가르치고 좋은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자기의 목적이라는 주장을 반복했는데, 언뜻 생각하기에 애국심에 불타는 우파라면 이런 목적을 소중히 여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플라톤이 이상 국가에서는 잘 살아가는 좋은 시민들, 민주적인 시민들 속에 박혀 있는 파괴분자일 뿐이다.”(190-1쪽)

‘급진적 인문학’(원제는 ‘Radical Humanism’)이란 장에서 저자는 줄곧 프로타고라스와 플라톤을 대비시키면서 프로타고라스를 ‘인문학의 스승’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플라톤은 시인들을 ‘파괴분자’로 낙인을 찍어 추방한 귀족주의자(엘리트주의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온 문단이라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좀 어색하다. ‘민주적인 시민들’과 ‘파괴분자(프로타고라스)’를 대립시키고 있어서다. 원문을 찾아보니 “Protagoras is a subversive among the good citizens of Plato's idea of a republic, a democrat."(110쪽)이다.  

번역문은 ‘좋은 시민들(good citizens)’과 ‘민주적인 시민들(a democrat)’을 동일시했지만, ‘민주적인 시민들’과 ‘a democrat’는 일단 수(數)가 다르기에 문법적으로 그렇게 보기 어렵다. 문법적으로 보자면 이 ‘민주주의자(a democrat)’는 앞에 나오는 ‘파괴 분자(a subversive)’를 다시 받은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설명이지만, 프로타고라스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민주주의 법전 편찬자’이다. 그는 ‘민주적인 시민들’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로 ‘민주주의자’였다. 여기서 번역비평자의 자리는 독자를 위한 ‘교정자’의 그것이다. 모두가 서로 고쳐가면서 같이 읽는 것, 그것이 ‘희망의 인문학’이 아닐까. 



얼 쇼리스와 시카고대학의 동창이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는(쇼리스의 표현을 빌면, “레오 스트라우스는 불룸 교수를 우파로 끌어들였고, 이 세상은 나를 좌파로 인도했다.”) 앨런 블룸의 <미국 정신의 종말>(범양사, 1989)에서도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이 공평하겠다. “사회과학 분야에 고전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들에게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해석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사실이 사회 과학자들에게 불편함을 야기시킨다. 유명한 사학자로서 대학원 과정의 사회과학 방법론 개론을 가르치던 교수가 투키디데스에 대해 내가 천진하게 ‘투키디데스는 바보였어’라는 질문을 던지자 화를 내며 멸시조로 반응하던 일이 기억난다.”(396-7쪽)  

엘리트 고전주의자인 앨런 블룸이 ‘투키디데스는 바보였어’란 말을 한 것인지 미심쩍어서 찾아보니 이 대목도 잘못 번역되었다. 두 번째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I remember the professor who taught the introductory graduate courses in social science methodology, a famous historian, responding scornfully and angrily to a question I naively put to him about Thucydides with "Thucydides was a fool!"”(펭귄판, 346쪽) 역자는 ‘유명한 사학자’의 반응(responding)에 걸리는 "Thucydides was a fool!"을 불룸의 순진한 질문(question)에 걸리는 것으로 잘못 보았다. 단순한 착오이지만 결과는 좀 중하다. 발언자를 바꾸어놓은 셈이니까. ‘독자를 위한 번역비평’의 취지는 (전문가가 아닌)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을 위하여(우리는 모두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일반인’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품앗이를 동원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번역비평에 관한 ‘대중지성’의 역할이다...   

09. 02. 13.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02-13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3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럴만두하군 2009-02-14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출판사 이매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희망의 인문학> 개정판을 준비중입니다.
지적해주신 부분 꼭 반영하겠습니다.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꼼꼼히 봐야겠습니다.
늘 관심 가져주셔서 로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로쟈 2009-02-14 15:08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계속 업그레이드 되면서 저자의 문제의식이 많이 공유되면 좋겠네요...

2009-02-14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5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프로타고라스나 투키디데스가 나오는 문장에서는 역시 콤마의 용법을 잘 모르니까 오역이 나오지 않나 생각합니다.영어의 구두점은 우리나라 구두점과 다르기 때문에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데 학교현장에선 다루지 않으니까 문제지요.

로쟈 2009-02-14 15:06   좋아요 0 | URL
문법을 간과해서 빚어지는 실수도 있고, 문맥을 잘못 이해해서(혹은 무시해서) 벌어지는 착오도 있는 듯해요. 실수야 다 할 수 있는 거지만, 그게 교정으로 걸러지지 않는 것도 문제죠...

2009-02-14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콩세알 2009-02-14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의 문제가 더 큰가요? 작년에 복이 많아(?) 지인들과 '순수이성비판'과 '정신현상학'을 공부했었는데요 어렵다 어렵다 하긴 했지만 프랑스 철학책을 대했을때처럼 황당한 느낌은 들지 않았기 때문에 '빵가게'님의 글이 좀 공감이 갑니다. 번역이 더 큰 문제라면 정말 곤란하네요. 불어를 할 줄 몰라서..그렇다고 영어로 철학책 읽는 것이 쉬운 것도 아니고 제대로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데..-.-;;

로쟈 2009-02-15 00:44   좋아요 0 | URL
<정신현상학>을 독파할 정도면 못 읽을 책은 없으실 듯싶은데요. 안 읽힌다면 십중팔구 번역이 문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