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턴의 <실낙원>을 읽기 위한 첫강의가 있었다. 밀턴의 생애뿐만 아니라 그가 살았던 17세기 영국의 정치-사회사에 대한 조감도 필요했지만 아직은 입에 설었다. 아무려나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한달 후에는 <실낙원>을 완독한 소감도 적을 수 있을 것이다. 고전에 대한 강의를 하려니까 떠올리게 된 글은 '클래식'을 주제로 한 사보에 실은 것이다. 지면에는 약간 축약된 글이 실릴 터인데, 여기에는 초고를 옮겨놓는다. 글의 일부는 예전에 적은 '클래식이란 무엇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1985806)에서 가져왔다.   

클래식(Classic)이란 무엇인가? 서양의 말이나 개념이 국내에 수용되면서 의미의 변형과 굴절이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클래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한국어에서 ‘클래식’이란 말은 이중적이다. 영어사전에서 ‘Classic’은 명사일 분야를 막론하고 ‘일류 작가’나 ‘걸작’을 가리키는 것이 첫 번째 뜻이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작가와 작품을 가리키는 것이 두 번째 뜻이다. 사실은 첫 번째 뜻이 두 번째 뜻에서 파생되어 나왔을 것이다. 서양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는 문화사의 전범이 되는 시기이자 가장 빼어난 시대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똑같이 ‘클래식’으로 옮기지만 복수형 어미를 취한(하지만 단수로 취급하는) ‘Classics’는 보다 한정적으로 그리스․ 로마의 ‘고전’과 이를 연구하는 ‘고전학’을 뜻한다.  

 

한편, 이런 ‘본래적’ 의미와는 다르게 국어사전에서 ‘클래식’은 ‘서양의 고전음악’으로 정의된다. ‘Classic’이 ‘클래식’으로 음역(音譯)되면서 의미의 축소가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언어 현실을 인정하자면 우리말에서 ‘클래식’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해야겠다. 즉, 좁은 의미에서의 클래식은 고전음악을 가리키며, 넓은 의미의 클래식은 ‘고전(古典)’ 일반을 가리킨다. 이 넓은 의미에서의 클래식이 이 글의 테마다. 그래서 ‘클래식이란 무엇인가’는, 다시 ‘고전이란 무엇인가’라고 바꿔 물어도 좋겠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Why read the classics?)’란 질문을 던지면서 고전을 이렇게 정의했다(여기서 칼비노가 말하는 고전은 ‘고전 문학작품’을 뜻한다).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이 정의에 덧붙여 칼비노는 “동사 ‘읽다’ 앞에 붙은 ‘다시’라는 말은 유명 저작을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궁색한 위선을 드러낸다.”고 꼬집었다. 그가 말하는 ‘위선’은 흔히 고전을 “너무도 유명하지만 아무도 안 읽은 책”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상응하는 것이겠다. 모두들 읽었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감히 ‘안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책, 그래서 ‘지금 읽고 있어’가 아니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는 책이 소위 고전이다. 하지만 칼비노의 정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합당한 정의다. 고전은 한번 읽고 마는 책이 아니라 다시 읽는 책이고 반복해서 읽는 책이기에 그렇다. 왜 그런가?  

런던에 있는 대영박물관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물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 선사 시대의 그리스에서부터 기원전 5세기경의 그리스, 바세이 신전, 파르테논 신전 조각,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로마 미술품 등이 15개의 전시실이 나뉘어 배치돼 있으며 요즘은 온라인 투어도 가능하다. 박물관 관람이 대개 그렇듯이 이런 유물들을 들여다보자면 자연스레 이 고대인들과 현재 우리 자신들 사이의 ‘간격’을 생각해보게 된다. 즉, 박물관에서 접할 수 있는 고대 세계의 문학․언어․문화․사고방식이 현재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며, 우리는 이것을 어떤 식으로 읽어낼 수 있을까란 물음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한 ‘클래식’ 입문서의 저자들은 이러한 물음 앞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물․조각․도기․그림 등은 “물질적인 유물 이상의 것”이 된다고 말한다. 옛것(古)이지만 현재를 되새김해보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클래식이고 고전(古典)이다. 따라서 고전을 읽는 것은 ‘그들의 문화’를 읽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화’에 ‘우리의 문화’를 견주는 것이며, ‘우리의 문화’ 속에 아직 숨 쉬고 있는 그들의 ‘살아있는 유산’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클래식 속에는 어떤 의미가 무엇이 새겨져 있으며 무엇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일까? 다시 클래식이란 말의 어원으로 돌아가 보도록 한다. 일본의 인문학자 이마미치 도모노부 교수는 ‘클래식을 공부한다’는 의미가 결국은 ‘클래식에서 배운다’는 뜻이라면서 이 말의 라틴어 어원을 이렇게 풀어준다. 곧 ‘클래식’은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형용사이며 처음부터 ‘고전적’이라는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다. 클라시쿠스는 사실 ‘함대(艦隊)’라는 의미를 가진 ‘클라시스(classis)’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형용사이다. 함대라는 말은 군함이 적어도 두세 척 이상은 있다는 뜻이다. 클라시스는 ‘군함의 집합체’라는 의미였다. ‘클라시쿠스’라는 형용사는 로마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국가를 위해 군함을 그것도 한 척이 아니라 함대(클라시스)를 기부할 수 있는 부호(富豪)를 뜻하는 말로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람을 가리켰다. 다시 말해서 전쟁과 같은 긴급한 어려움에 처한 국가에 큰 도움을 주는 재력가를 가리키는 말이겠다.   

이 ‘클라시쿠스’와 ‘클래식’은 어떤 관계인가? 이건 유비적 관계다. 국가적 위기에 함대를 기부할 수 있는 상황을 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인생의 위기에 당면했을 때 정신적인 힘을 주는 책이나 회화, 음악, 연극 등을 통칭하여 ‘클래식’'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고, 이마미치 교수에 따르면 중세의 비교적 이른 시대, 즉 교부시대부터 그러한 의미로 클래식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비유컨대, 위대한 고전은 거대한 ‘항모 선단’쯤 되는 것이다. 더불어 ‘위기’에 직면하고 있지 않다면 ‘고전’은 ‘쇳덩이’나 ‘종이더미’ 이상의 적극적인 의미를 갖기 어렵겠다. 이 클래식이란 말을 동아시아문화권에서는 ‘고전(古典)’이라 옮긴 것인데, 이것은 ‘오래 전부터 소중하게 여겨온 서적’이란 뜻이다. 여기서 ‘典’이란 글자는 상형문자로 다리가 달린 책상 위에 옛 책의 형태인 두루마리를 소중히 올려놓은 모양새를 의미하며, 읽지 않고 쌓아두기만 하는 것이 늘 열심히 읽는다는 뜻이라 한다.  

물론 이 ‘고전’이란 말에는 ‘위기적 상황에서 힘이 되어 준다’는 클래식의 적극적인 어원적 의미는 가미돼 있지 않다. 그리고 ‘고전음악’을 뜻하면서 아울러 ‘고급’이나 ‘걸작’ ‘명품’을 뜻하는 우리말 ‘클래식’에도 그러한 어원적 의미는 결여돼 있다. 지금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불황에 처하여 한갓 ‘고전 나부랭이’를 들먹이는 것은 매우 한가한 노릇이 아닌가라고 혹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클래식이 갖는 본래적 의미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거나 망각한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서 막강한 정신적 힘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클래식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클래식이 ‘나’에게는 아무런 용기도 지혜도 주지 못하며 오히려 힘만 빠지게 한다면 그것은 ‘클래식’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겐 클래식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그러니 억지로 클래식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클래식이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준 작품들을 뜻한다면, 그런 맥락에서 ‘나의 클래식’, ‘나만의 클래식’ 목록도 만들어질 수 있다. ‘나’에게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나만의 클래식’이다.    

물론 클래식이 불어넣어주는 삶의 희망이 단지 ‘생존’만을 의미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으며 고전에서 배워야 하는 삶은 당당한 삶이고 기품 있는 삶이다. 삶의 기품은 부유한 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시 라틴어의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국가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자기 자식(프롤레스)밖에는 내놓을 게 없는 사람 ‘프롤레타리우스(proletarius)’라고 불렀다 한다. 즉 ‘클라시쿠스’가 재산이 있어서 국가를 위해 함대를 기부할 수 있는 부유층을 가리킨데 반해, ‘프롤레타리우스’는 오직 자기 자식을 내놓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을 의미했다. 한국어의 말장난을 갖다 쓰자면 ‘클라시쿠스’는 ‘맨션계급’이고 ‘프롤레타리우스’는 ‘맨손계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클래식의 가치와 효용이 이 두 계급에 모두 가 닿는다는 점이다. 즉 클래식은 ‘고귀한 자’도 읽어야 하고 ‘나약한 자’도 읽어야 한다. ‘고귀한 자’는 고전을 통해서 자신의 의무를 상기할 필요가 있고 ‘나약한 자’는 자신의 처지를 극복할 용기를 얻을 필요가 있다. ‘함대’를 기부할 정도가 못되는 ‘고귀한 자’는 ‘고귀한 척하는 자’일 따름이고, 형편 때문에 고전을 읽을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나약한 자’는 ‘나약함에서 벗어나지 못할 자’이다. 이제 당신에게 클래식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차례다. 

09. 03.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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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에게 고전이란 무엇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31 10:08 
    '우리에게 고전이란 무엇인가'는 얼마전에 출간된 <고전의 미래>(길, 2009)의 부제다. 저자는 이탈리아의 고고학자이자 고전학자인 살바토레 세티스. 200쪽 남짓하는 분량이 너무 짧아서 관심에서 제쳐놓고 있었는데, 책을 번역한 김운찬 교수의 소개글이 있기에 일단 스크랩해놓는다. 고전에 대한 나의 생각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에도 들어가 있는 '당신에게 클래식이란 무엇
 
 
2009-03-05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5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의 필요 때문에 존 밀턴의 <실낙원>을 읽는다. <실낙원>을 읽으려고 하니 자연스레 밀턴에 대해서도 읽게 된다. 그다지 많은 책이 나와 있는 건 아니지만, 막상 읽으려고 하면 또 만만치 않은 분량이다. 기본이 되는 책은 박상익 교수의 <밀턴 평전>(푸른역사, 2008). 작년에 '6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2117762)으로 꼽은 적이 있는데, 그때 읽지 못하고 지금 읽는다. 간략히 말하면, "영문학사상 최고의 서사시인이자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대시인이라는 세간의 일반적 평가 외에도 시력 상실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불굴의 의지와 국왕파의 온갖 위협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공화정에 대한 꿈을 견지한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세세하게 짚어주는 전기이다. 밀턴은 <실낙원>의 저자이면서 <아레오파기티카>(소나무, 1999)의 저자이기도 하다. 역시나 박상익 교수에 의해서 옮겨진 바 있는 이 책은 '언론 자유의 경전'으로 불리니 만큼, 가뜩이나 언론이 자유가 위협받고 있는 요즘 한번쯤 손에 들어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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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3-03 23:34   좋아요 0 | URL
짧지만 C. S. Lewis 의 'A Preface to Paradise Lost: Being the Ballard Matthews Lectures Delivered at University College, North Wales, 1941' 도 빼놓을 수 없지요. ^^

로쟈 2009-03-03 23:37   좋아요 0 | URL
나름 고전인가 보군요. 요즘 같아선 <실낙원> 텍스트라도 제대로 읽으면 다행일 거 같습니다.^^;

비로그인 2009-03-04 00:00   좋아요 0 | URL
하긴, 그렇군요. ^^

밀튼의 작의와 시작 그 자체에 대한 길잡이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군더더기가 없이 짧아서 좋습니다. 제가 짧은 책을 좋아하거든요. ^^

로쟈 2009-03-04 21:12   좋아요 0 | URL
짧은 책들이 강의할 땐 요긴하죠.^^
 

알다시피, 인도의 빈민가를 다룬 대니 보일의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지난주에 아카데미 영화상을 석권했다. 관련기사 몇 편을 모아놓는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라는 판타지를 걷어낸 '현실'은 어떤 것인지 한번 더 직시할 필요가 있다. '퀴즈쇼'와는 다른 현실을...

경향신문(09. 02. 28)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본 지구촌 빈민가의 삶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8개부문을 석권한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어린 주인공들이 26일 인도 뭄바이의 슬럼가에 ‘금의환향’해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했다 해서 이 아이들과 슬럼 주민들의 삶이 갑자기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세계 곳곳 슬럼 주민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슬럼은 지구촌 전체에 확산되고 있지만 슬럼가 출신이 ‘밀리어네어(백만장자)’가 되는 것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미 CNN방송은 이날 영화에 출연했던 아자루딘 이스마일(10)과 루비나 알리(9) 두 어린이가 귀환하자 뭄바이 공항에 시민이 몰려들어 환호했다고 보도했다. 시내에서 열린 축제가 끝나자, 두 아이는 철길 옆 판잣집 안의 플라스틱 박스들 밑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이날 ‘더타임스오브인디아’는 다라비 슬럼을 재개발하려는 시 당국의 야심찬 계획이 주민 이주대책 문제로 늦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인도의 경제수도 뭄바이에서는 인구 1400만명 중 1000만명 이상이 슬럼가의 무허가 판잣집에 산다. 당국은 다라비 슬럼을 없애려 하지만 살 곳을 잃게 될 빈민들의 저항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재개발 압력과 그에 맞선 빈민들의 충돌은 비단 인도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동아프리카 최대도시인 케냐 나이로비의 키베라 슬럼도 그중 하나다. 케냐 시골과 주변국들에서 온 빈민 1000만명 이상이 거주하는 이 슬럼은 동물의 낙원을 자랑하는 케냐의 치부다. 케냐 정부는 오는 7월부터 키베라 재개발을 시작할 방침이지만 26일 주민들과 이주대책을 합의하는 데 실패했다.   

멕시코의 광역수도권(ZMVM)에는 신도시들을 따라 슬럼들이 띠처럼 둘러 있다. 이집트 사막에는 맘루크 왕조 시절의 묘지에 사는 빈민이 늘면서 ‘사자(死者)의 도시’라는 기묘한 마을이 생겼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빈민촌’이라는 뜻), 파키스탄 카라치 근교의 오랑기 타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캄풍바루(‘새 마을’), 터키 이스탄불의 게체콘두(‘하룻밤에 지은 집’), 이라크 바그다드의 사드르시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웨토 등 슬럼의 이름은 다양하지만 사는 모양은 비슷하다. 오염된 물과 공기, 에너지난, 질병과 실업, 마약과 범죄, 높은 자살률 등이 슬럼들의 공통분모다.  

제3세계 대도시의 슬럼들은 대개 1970년대 후반의 채무위기와 80년대 국제통화기금(IMF) 주도하의 구조조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 사회학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제3세계의 슬럼화는 산업이 성장하면서 농촌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밀려들어오면서 일어난 ‘선진국형 슬럼화’와는 다른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오늘날 제3세계 슬럼 주민들은 더 나은 여건을 찾아 도시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농촌에서 삶의 기반을 잃어 등떠밀려 나오게 된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세계 곳곳에서 인구 1000만명 이상의 거대도시, 이른바 ‘메가시티’가 늘어난 것은 슬럼이 커졌기 때문이다. 유엔은 지난해 전 세계 인구 중 도시 거주자가 절반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했다. 그중 10억명 이상이 슬럼에 살고 있다. 2050년이 되면 세계 인구의 70%가 도시에 살 것이며 그중 절반은 슬럼 주민일 것으로 예상된다.

부의 독과점에 맞선 슬럼 빈민들의 저항은 새로운 흐름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부재지주의 집을 차지하는 ‘스쿼팅(squatting·무단점유)’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된 스쿼팅 지지자들은 “재산권보다 생존권이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2005년 남아공 항구도시 더반에서는 ‘아발랄리 운동(AbM)’이라는 무단점유 캠페인이 시작돼 전국으로 퍼졌다. 인도 서벵골에서는 2007년 토지퇴거반대위원회(BUPC)가 결성됐다. 브라질에서는 대농장주들에 맞선 ‘토지 없는 농민운동(MST)’에 이어 ‘집 없는 노동자운동(MTST)’이 일어나 800만채 이상을 점유했다.

반면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들은 주로 슬럼 없애기에 초점을 맞춘다. 유엔 인간거주계획(UN-HABITAT)과 세계은행 등은 2001년부터 ‘슬럼 없는 도시’라는 이름으로 빈민가 주거여건 개선과 교육지원 등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개도국의 구조적 빈곤을 건드리지 못하는 캠페인은 ‘빈민 강제퇴출’이라는 부작용만 낸다는 비판도 많다.(구정은기자)   

아시아경제(09. 02. 28) '슬럼독' 아역배우, 영화 인기로 '일희일비' 

아카데미시상식 8개 부문 수상작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출연한 10세 소년이 영화의 성공으로 일희일비하고 있다. 영국 타블로이드 '더 선'에 따르면 이 영화에 출연한 아자루딘 이스마일은 미국 LA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고 26일(현지시간) 인도 뭄바이로 돌아온 이튿날 아버지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아자루딘의 아버지 모하메드는 이웃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을 발로 차고 뺨을 때렸다.  

모하메드가 아들을 구타한 것은 아자루딘이 장시간 비행과 주위의 관심에 극심한 피로감을 느껴 혼자 있기를 원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더 선'은 모하메드가 아들의 인기를 이용해 뭄바이 다라비 슬럼가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더 선'에 따르면 모하메드는 "아들을 때린 것에 대해 사과한다"며 "아들의 귀국으로 인해 혼란을 겪었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순간 이성을 잃은 것 같다.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하며 아들이 돌아와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26일 영국 BBC 온라인판은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빈민가 아역배우들이 새집으로 이사할 예정이라고 인도 정부관리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인도 정부가 아자루딘과 알리의 가족에게 무상으로 집을 마련해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두 가족은 현재 영화의 실제 배경인 뭄바이의 빈민가에 살고 있다. 지역 주택협회의 아마르지트 싱 회장은 "이 아이들이 국가에 영광을 안겨줬기 때문에 무상으로 집을 받아야 한다"면서 "마하라슈트라 주지사도 이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한편 '트레인스포팅'의 대니 보일 감독이 연출한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인도 뭄바이 빈민가에서 자란 소년이 거액의 상금이 걸린 퀴즈쇼 결승에 진출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고경석 기자) 

경향신문09. 03. 02) [베이징에서]부자 나라, 가난한 국민  

인도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중국에서 적잖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아카데미상 8개 부문을 휩쓴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면에는 아시아영화가 할리우드와의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반오리엔탈리즘도 깔려 있다. ‘중국신문주간’이 이 영화를 두고 ‘아시아’적 요소를 잉태했다고 평가한 것이 그 사례다.

중국 지식인들에게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자국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창(窓)이다. 사회평론가 왕궈창은 ‘우리도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찍을 용기가 있다’라는 칼럼에서 왜 중국에는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가 나오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중국에도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묘사된 경찰의 강압수사, 아동학대, 빈부격차 같은 사회모순이 만연해 있지 않느냐는 우회적인 발언처럼 들린다.

중국인들은 <슬럼독 밀리어네어>(빈민굴의 백만장자)를 ‘핀민푸웡(貧民富翁)’이라 부른다. 이 영화 제목은 지식인들이 중국을 얘기할 때 쓰는 ‘푸궈충민(富國窮民:부유한 나라, 가난한 국민)’이라는 말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지난해 중국은 국내총생산(GDP)에서 독일을 제치고 세계 3위로 부상했다. 무역액도 3위이고, 외환보유액은 세계 최고다. 그러나 개인 소득은 최하위권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07년 말 중국의 1인당 GDP는 2485달러로 세계 99위에 그쳤다.

지난 30년간 중국 공산당은 ‘국부(國富)’ 만들기에 주력했다. 파이를 키운 뒤 나누자며 인민들을 다독였다. 그러나 금융위기로 수출과 투자를 통한 경제성장이 한계에 부딪치자 선 성장 후 분배론이 흔들리고 있다. 중국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길은 국민 소비를 통한 내수확대뿐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880조원대의 재정 투자에 나섰다. 전자제품을 사는 농민에게 보조금을 주는 가전하향(家電下鄕) 정책도 시행 중이다.

국부에 대한 분배 구조의 개선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인민들에게 지갑을 열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경제전문가들은 중국 정부가 진정으로 내수진작을 통한 소비 확대에 나서려면 민영화 등을 통해 국부를 국민에게 환원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중국의 국유지와 11만 국영기업체의 보유 자산 총액은 79조위안에 달한다. 이를 민영화하면 국민 한 사람당 6만위안이 돌아간다. 국영기업체 상장 주식만 민간에 돌려도 13억 인민은 각각 5500위안어치의 주식을 소유할 수 있다. 2조달러(약 13조위안) 규모의 외환보유액을 국민에게 분배할 경우에는 각각 1만위안을 손에 쥐게 된다.

그러나 공산당이 영도하는 중국에서 국부가 민간으로 환원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차선책은 의료, 교육, 주거 분야의 사회보장제를 확충하고 노동자의 세금을 줄여주는 일이다. 3일 시작되는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는 경제위기 등 민생 문제가 집중 거론될 것이라고 한다. 이 자리에서 국부(國富)와 민부(民富)의 균형을 이루는 방안도 논의됐으면 한다. 공자도 “없는 것보다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不患寡而患不均)”고 하지 않았던가.(조운찬 특파원)  

09. 0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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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3-03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0년대에 빈민운동가 솔 알린스키가 청계천 판자촌을 방문해서 이런 지옥같은 곳이 있다니...했답니다.

로쟈 2009-03-03 23:38   좋아요 0 | URL
용산 참사도 '지옥'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죠...

노승영 2009-03-04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보고 싶은 영화가 꽤 되네요.
지난번에 말씀하신 『마오쩌둥』 오류는 아래 글에 덧글로 올려주시거나
제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http://cafe.naver.com/translate2meditate/12

로쟈 2009-03-04 21:11   좋아요 0 | URL
네, 알겠습니다. 한데, 4월은 돼야 할 것 같아요. 요즘 마구 쪼들리고 있어서요.--;
 

아마도 내일자 경향신문 지면에 실리는 '책읽는 경향' 코너를 옮겨놓는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11811005&code=960207). 지난주에 청탁을 받았지만 짧은 분량이어서 계속 미루다가 오늘 오전에야 원고를 작성해서 보냈다. 일간지라서 저녁에 벌써 기사로 올라와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새물결, 2008)이 떠올리게 해주는 간단한 단상을 적었다.  

   

경향신문(09. 03. 02) [책읽는 경향]쓰레기가 되는 삶들  

요즘 부모들의 관심은 온통 아이들의 성적과 키에 쏠려 있는 듯하다. 부유층과 서민층을 가리지 않기에 ‘평균적인’ 관심사라고 해야겠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아이들의 평균적인 학력과 키에 대한 관심은 아니다. 중요한 건 ‘내 아이’의 성적이고, 다른 아이와의 성적 ‘차이’다. 키 또한 그렇다. 성장기 아이의 키가 ‘상위 90%’(성장도표 백분위수 기준)라고 하면 부모는 우쭐댄다. 그렇게 아이가 잘 자라기를 바라고 남보다 뛰어나길 열망한다. 그래야지만 성공할 수 있다고 믿어서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우리’와 낙오된 ‘그들’이 나뉜다. 한편에는 성공한 소수로서의 ‘우리’, 곧 ‘대한민국 1%’나 ‘최소한 20%’에 턱걸이한 ‘우리’가 있다면, 다른 편에는 빈곤층과 몰락한 중산층이 구성하는 ‘그들’이 있다. ‘우리’는 항상 ‘그들’의 무능력과 게으름을 질타한다. 그런 ‘그들’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고,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충고도 보탠다. 그렇게 ‘우리’의 특권을 정당화한다. ‘그들’은 ‘쓰레기’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지그문트 바우만·새물결)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우리’와 ‘그들’의 문제를 생각해보게 한다. 부유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우리’이고 빈곤한 저개발 국가들이 ‘그들’이다. 문제는 ‘그들’이 없다면 ‘우리의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없으며 ‘우리’가 존립할 수도 없다는 점. 책상 앞에 앉아 ‘우리’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 우리 임금의 10분의 1만 받으면서 화장실을 청소해주는 ‘그들’이 없다면 ‘우리’의 안락과 품위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그러니 ‘우리’는 기식자다. 성장의 한계를 넘어 거인증에 걸린 지구는 ‘기식자’와 ‘쓰레기’로 넘쳐나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시 묻는다. 

09. 03. 01.  

P.S. "책상 앞에 앉아 ‘우리’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 우리 임금의 10분의 1만 받으면서 화장실을 청소해주는 ‘그들’이 없다면 ‘우리’의 안락과 품위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란 구절은 바우만(<쓰레기가 되는 삶들>, 90쪽)에게서 간접 인용한 것이고, 바우만은 리처드 로티(<철학과 사회적 희망>)에게서 인용한 것이니까 일종의 간접 재인용이다.   

바우만이 이 인용문의 앞뒤에서 하고 있는 얘기는 '그들'의 과잉에 대한 부국들의 대처다. 1994년 카이로에서 열린 '인구와 개발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20개년 계획의 '인구와 건강 프로그램'이 출범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그들'(개발도상국)이 비용의 2/3를 부담하고, '기증자' 국가들이 나머지를 부담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우리'(부유한 국가)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1994-200년 사이에 1억 2천2백만 명의 여성이 임신을 하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를 걱정시키는 '그들'의 과도한 출산에 맞서는 싸움에 예기치 않은 동맹군이 등장했는데, 다름아닌 에이즈이다. 예컨대 보츠와나에서는 같은 기간에 기대수명이 70세에서 36세로 떨어졌고, 2015년 예상 인구는 28%나 떨어졌다. '우리'의 제약회사들은 '지적 재산권'을 수호한다는 이유로 필요한 약을 적절한 가격에 공급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과잉을 억제하는 것이 또 다른 일면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단지 '우리의 생활방식'을 현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더 적은 수가 아니라 더 많은 수의 '그들'을 수입해야 한다는 냉엄한 전망"이 그것이다.  

"인간 쓰레기, 특히 부유한 땅에 발을 디디는 데 성공한 인간 쓰레기를 써먹을 새로운 용도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전망이 그렇게 소름끼치지는 - 경비가 철저한 회사의 이사회의실과 지루함을 자아내는 학술회의장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그렇게 느껴지는 경향이 있듯이 - 않았을 것이다."(91쪽)  

인용문에 착오가 있어서 겸사겸사 지적을 해둔다. 삽입절을 빼면 "인간 쓰레기, 특히 부유한 땅에 발을 디디는 데 성공한 인간 쓰레기를 써먹을 새로운 용도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전망이 그렇게 소름끼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가정법 문장이고, 원문은 이렇다. "That prospect would not be so frightening were it not for a new use to which wasted humans, and particularly the wasted humans who hve managed to land on affluent shores, have been put."(46쪽) 즉, 현재 사실의 반대를 나타내는 '가정법 과거' 문장이다. 따라서 번역문이 '가정법 과거완료'로 옮겨진 것은 시제상의 오류이다. <유동하는 공포>에서도 그렇고, 바우만의 가정법 문장이 자주 착오를 유발하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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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3-02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이익과 안락한 삶을 위해서는 타자의 인권이나 생명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 동정이니 뭐니 하는것도 결국 나의 이익을 침범하지 않는한에서만 허용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오늘의 세계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가 싶어 무섭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로쟈 2009-03-03 00:03   좋아요 0 | URL
사람들의 '자연스런' 욕망이 모여 결국엔 '쓰레기'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죠. 말 그대로 '유동하는 공포'입니다.--;

[해이] 2009-03-02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우만의 글들은 술술 읽혀서 좋은것 같습니다. 내용도 알차면서 크게 난해하지 않게 글을 쓰는거 같아서 원추이죠 ㅋ

로쟈 2009-03-03 00:03   좋아요 0 | URL
그래도 별로 반응을 못 얻고 있는 듯해서 안타깝습니다...

다락방 2009-03-03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쟈님.
안그래도 어젯밤에 경향신문 읽으면서 책을 메모해 놓았거든요. 이거 한번 봐야지, 쓰레기라니, 하면서요. 그리고 이름을 보고 로쟈님과 이름이 같구나, 했는데 옆에 로쟈님이라고 쓰여있더군요. 하핫.

핸드폰에 메모해놓았어요. 어제 경향의 책소개, 정말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로쟈 2009-03-03 22:31   좋아요 0 | URL
네, 한번 읽어보시길.^^
 

지난주 한겨레21에서 핀란드의 교육현장 취재기사를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4428.html). 언제부턴가 교육 선진국의 모델로 부쩍 자주 언급되는 나라가 핀란드인데, 아래 기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으며 또 배워야 할지 생각해보게 한다.  

» 라토카르타노종합학교 어린이들이 점심식사를 마친 뒤 식판을 정리하고 있다.

한겨레21(09. 02. 27) 가장 약한 학생을 지원하라

“우리나라에 영재교육은 없다. 아주 똑똑한 천재를 키우는 것보다 뒤처진 아이들을 함께 이끌고 가야 한다는 게 우리의 정책이고 원칙이다.”(마리아 타우라 핀란드 미래위원회 위원장)

“뛰어난 학생이 아니라 가장 약한 학생을 지원하는 것과 같은, 근본적 의미의 평등과 형평성이 핀란드 교육의 가장 중요한 가치다. 평등이란 어떤 지역에 살더라도 동등한 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요우니 발리예르비 핀란드 이베스퀼라대학 교수)  

집 같은 분위기, 이주 학생엔 모국어 교육

실제로 그랬다. 우리가 방문한 핀란드종합학교(초·중등학교)에서 이런 핀란드의 교육적 특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방문한 헬싱키 라토카르타노종합학교는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친환경 학교다. 학생 친화적인 건물을 짓기 위해 디자인 공모전까지 거쳤다는 목조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어두운 북유럽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고 안온한 느낌이 들었다. “건물 디자인의 핵심 목표는 가정 같은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사투 혼칼라 교장은 설명한다. ‘돌봄과 공동체를 위한 공간으로서의 학교’라는 이 학교의 교육관을 디자인에 반영해달라는 교사들의 요구에 따른 건물이라는 것이다. 유치원에서부터 9학년까지 모두 420명의 학생들이 있는 이 학교에서 눈에 띄는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다. 학습장애를 가진 어린이들과 외국인 어린이들이 함께 공부하는 이 학교에선 장애아나 외국인 또는 뒤떨어진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  

핀란드에선 1970년대 이래 장애아와 비장애아 등 모든 차이를 가진 아이들을 통합해 교육하는 게 교육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잡았다. “학생들이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인격적 자존감과 학습을 위한 흥미와 동기, 앞서는 학생과 뒤지는 학생 간의 인격적 교류가 교수나 학습의 효율성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확고한 교육학적 관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안승문 웁살라대학 객원연구원은 지적한다. 그러나 장애아와 비장애아의 완전한 통합으로 가기까지 아이들의 상황을 섬세하게 살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참관했던 7∼9살 집중장애아들을 위한 수업에는 장애아 10명을 위해 정규교사 1명과 보조교사 2명이 배치돼 있었다. 이 반 아이들은 30분간 수업을 하고, 나머지는 블록 쌓기 등 집중훈련에 좋은 놀이를 한다.  

장애아를 위한 교실에는 아이들이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도를 낮추기 위해 전등에 가림막을 씌워놓았다. “아이들의 집중도가 향상되면 정규반에 보내기 시작해 점차 수업 시간을 늘려간다”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특수반 담임 교사는 설명했다. 이 반의 미러는 상태가 좋아져 하루 5시간씩 정규반에 가서 수업을 듣는다. 정규반으로 가는 것은 아이들의 상태를 봐서 교사가 부모와 상의해 결정한다. 특수교육 대상자 역시 교사가 학부모와 협의해 정하지만, 중증 장애가 있는 학생이라면 병원의 진단을 받아 지방자치단체에 추가예산을 요구할 수 있다.

외국인 학생들에 대한 배려 또한 남달랐다. 8∼9살 아이들이 수학을 공부하는 한쪽에서 탄자니아 출신인 토미는 모국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은 교육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정신에 따라 핀란드에선 외국계 학생들에게 모국어 수업을 제공하도록 돼 있다. 일반적으론 각 자치단체 교육청에 등록된 모국어 교사들이 학교를 방문해 수업을 하지만, 학생 수가 아주 적은 경우엔 학생들이 다른 학교에 가서 수업을 받기도 한다고 혼칼라 교장은 설명했다.   

무학년제·집중학습으로 ‘속도 조절’

특별한 배려를 받는 것은 장애아나 외국인 어린이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연령대 정규반 수학 시간. 교실에는 듬성듬성 빈자리가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담당 선생님은 일부 뒤처진 아이들을 다른 선생님이 집중지도를 하러 데리고 나갔다고 설명했다. 교실 밖을 나오니 특수교육 담당 선생님이 아이 4명에게 열심히 동전으로 수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렇게 뒤처지는 아이를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니 국제학생평가에서 하위 수준의 성적을 거둔 학생의 비율이 가장 낮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학생들의 처지를 배려하는 유연한 대응이 가능한 이유는 교사들에게 주어진 자율성 때문이다. “우리는 국가가 정한 교과과정을 따라야 하지만 학교는 자체 교육 내용을 조직할 자유가 있다”고 혼칼라 교장은 설명한다. 이에 따라 이 학교가 학생들에게 최상의 학습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무학년제도다. 각 학생은 자신의 학습 내용과 학습 속도를 선택할 자유를 갖는다. 다만 그런 선택을 통해 9학년을 마칠 때에는 국가가 정한 교육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교사 2~3명이 팀으로 수업

“무학년제도란 핀란드의 발명품이 아니라 이미 1930년대 미국과 스웨덴에서 시작됐다. 모든 아이들은 배울 능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전진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게 이 제도의 철학”이라고 설명한 혼칼라 교장은 핀란드에선 1990년대 이래 이 제도가 확산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무학년제도에 따라 학생들은 각각 개별화된 학습목표를 갖게 되며, 그 목표는 교사와 학생 그리고 부모의 3자 대화에서 결정된다. 교사와 학생은 수시로 합의한 목표에 도달했는지 스스로 평가하고, 목표에 미달했다고 판단하면 새로운 학습 방식을 적용하는 등 다시 목표 달성을 위한 도전에 나선다.

무학년제의 유연한 학습이 가능하려면 교사들의 협력이 긴요하다. 라토카르타노종합학교에서 우리가 참관한 어느 교실에도 선생님 혼자 있는 곳은 없었다. 늘 두세 사람이 함께 팀을 구성해 가르쳤다. 정규교사 외에 별도로 뽑은 보조교사들이 있지만, 정규교사가 다른 교사의 수업에 보조교사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교실에는 혼자 뒤처진 아이는 없다. 한 교실 안에서 대부분의 아이가 수학을 공부하더라도 한쪽에서 탄자니아 출신의 어린이가 모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것 역시 이런 팀 티칭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 학교에서는 팀 티칭을 통한 선생님들 사이의 협력 못지않게 교사와 학생 사이, 학생과 학생 사이의 협력을 중시한다. 학습그룹을 서로 도와주는 방식으로 구성하도록 한다. 이 학교가 중시하는 학습 방식이 모둠 수업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 따라 학습 속도는 빠르기도 하고 늦기도 한다. 그렇지만 모든 아이들이 함께 갈 수 있게 배려하는 게 교육이다. 우리는 개별 학생이 아닌 모둠을 학습의 기본 단위로 삼는다. 모둠 속에서 서로 도와가며 배우는 일은 사회화 과정에서도 긴요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혼칼라 교장은 설명했다. 이 학교가 유치원생과 초등 1·2학년생들을 한 건물에 배치한 것도 같은 뜻에서다. 유치원생들은 초등학생들과 함께 지냄으로써 자연스레 학교생활에 적응하게 되고, 초등학생들은 동생들을 돌보는 등 공동체적 삶을 배우게 된다.  

» 산수 과목에서 뒤처진 아이들을 특수교사가 따로 데리고 나와 가르치고 있다.

“선행학습은 금물, 괜히 산만해지죠”

모둠을 중시하는 핀란드에선 선행학습을 금물로 여긴다. 헬싱키에 사는 한국 동포 곽수현씨는 선행학습을 시켰다가 학교에 가서 골칫거리로 전락했던 한 동포의 아이를 예로 들었다. “다른 핀란드 아이들은 1시간 걸려 푸는 문제를 5분 안에 다 풀곤 나머지 시간에 친구를 괴롭히고 산만해져 결국 문제학생으로 지목됐다”는 것이다. 선행학습이 아이의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모둠의 분위기를 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핀란드종합학교의 저학년 단계에선 언어 교육만큼이나 집중력 교육을 중시한다. 집중력이 미래의 학습 능력을 좌우한다고 보아서다. 라토카르타노가 집중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에게 특별 배려라 할 만큼 신경을 쏟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고 집중장애 담당 특수교사는 설명한다. 그런 교육이 아이뿐 아니라 앞으로 핀란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것이다.(헬싱키(핀란드)=글·사진 권태선 한겨레 논설위원)  

09. 03.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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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겨레] 가장 약한 학생을 지원하라 / 권태선 (한겨레 논설위원)
    from 자기치유 : I am NOT such a person. 2009-03-02 07:39 
    “우리나라에 영재교육은 없다. 아주 똑똑한 천재를 키우는 것보다 뒤처진 아이들을 함께 이끌고 가야 한다는 게 우리의 정책이고 원칙이다.”(마리아 타우라 핀란드 미래위원회 위원장) “뛰어난 학생이 아니라 가장 약한 학생을 지원하는 것과 같은, 근본적 의미의 평등과 형평성이 핀란드 교육의 가장 중요한 가치다. 평등이란 어떤 지역에 살더라도 동등한 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요우니 발리예르비 핀란드 이베스퀼라대학 교수) 집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