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에 대한 기대를 잔뜩 안고서 아이가 늦게 잠이 들었다. 할일이 태산보다도 1센티는 더 높이 쌓여 있건만 아이의 기대를 저버릴 수도 없으니 진퇴양난이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계시라도 받아야겠다. 사실 준비가 없었던 건 아니다. 이번달 <고교 독서평설> 갑론을박 꼭지에 실은 글이 동화작가 안데르센에 관한 것이니까. 다만 문제는 아이가 고등학생이 아니라 아직 초등학생이라는 것. 이런 글로 아이가 만족할 리는 만무하다. 나대로의 알리바이일 뿐이다.   

  

고교 독서평설(09년 5월호) 순수한 동심의 상징 VS. 상처받은 쓸쓸한 영혼  

덴마크의 천재 동화 작가, 안데르센
북유럽의 작은 나라 덴마크가 ‘동화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유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 덕분이다. 구전 설화에서 시작된 동화를 하나의 문학 장르로 만든 사람, 156편에 이르는 많은 이야기를 창작해 냄으로써 ‘동화의 아버지’라는 칭호까지 얻은 사람, 그가 바로 전 세계 어린이에게 가장 사랑받는 동화 작가 안데르센이다.  

동화가 어린이의 삶에 중요한 문화적·정신적 자양분이며,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W. 워즈워스)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작가로서 안데르센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진다. 자신의 특이한 외모를 조롱하던 이들을 향해, “언젠가 저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 성공한 시인에게 경의를 표할 거야. 나는 세계적인 천재로서, 호메로스와 단테, 셰익스피어, 괴테와 함께 파르나소스 산에 오를 거야.”라고 다짐했던 그의 꿈이 과연 사후(死後)의 명성을 통해서 실현된 것일까. 푸르른 5월을 맞아 이달에는 동화 작가 안데르센의 삶과 문학 세계를 살펴보면서, 동화라는 장르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환상 속에 숨겨져 있는 불행한 현실
안데르센의 생애를 다룬 여느 전기나 할리우드 영화들은 흔히 그를 ‘신으로부터 재능을 부여받은 어릿광대’의 이미지로 묘사한다. 하지만 사실 그의 창작은 고치고 또 고친 육필 원고의 흔적들이 보여 주는 대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뼈를 깎는 창작의 고통도, 그가 벗어나고자 했던 현실의 쓰라림보다는 견딜 만한 것이었다.   

안데르센은 1805년 덴마크 오덴세의 가장 궁벽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한스 안데르센은 스물두 살의 구두 수선공이었고, 어머니 안네 마리는 서른 살의 세탁부였다. 안데르센은 자서전에서 아버지를 “재능이 넘치며 순수한 시적 정서를 간직한 남자”로, 어머니를 “사랑으로 가득 찬 분”으로 묘사했지만 이들 부부의 삶은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행복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다만 아들에게 책을 읽어 주거나 가끔 그림으로 연극을 꾸며 보여 줄 때만 행복해 보였다. 편지를 읽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름조차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어머니는 그럼에도 아들은 무척 아꼈으며, 그가 자신에 비해서 얼마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지를 자주 일러 주곤 했다. 홀어머니의 강요 때문에 구걸에 나서야 했고, 구걸을 못하면 다리 밑에 앉아 하루 종일 울곤 했던 것이 어머니 안네 마리의 어린 시절이었다.  

실제로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추운 겨울날 성냥을 팔러 다니던 한 소녀가 성냥 불빛에 의지해 잠시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으려 하다가, 다음 날 아침에 얼어 죽은 채로 발견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렇게만 말하면 ‘아름다운 동화’라기보다는 ‘잔혹 동화’에 가깝다. 이 동화는 이렇게 끝이 난다. “사람들은 소녀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을 보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새해 아침에 할머니와 함께 얼마나 영광스런 나라로 갔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   

이것을 ‘동화적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맨발로 어두운 밤거리를 서성거려야 했던 성냥팔이 소녀의 현실은 분명 냉혹하며 비극적이다. 성냥 불빛으로 밝히기에는 현실이 너무 어둡고, 그 불꽃으로 몸을 데우기에는 한겨울의 추위가 너무 매섭다. 하지만 그녀는 성냥 불빛 속에서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죽은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그 곁으로 가기를 소망하고, 결국 그 소원을 이룬다. 소녀의 환상(판타지)은 분명 현실이 아니지만, 그러한 환상마저 허락되지 않는다면 현실은 너무 무자비할 것이다.  

안데르센은 『성냥팔이 소녀』를 쓰면서 어머니의 어린 시절 모습이 너무도 분명하게 떠올라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잠시 로마에 머물고 있던 때, 그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고향 오덴세에 가지 않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드디어 어머니의 고통이 막을 내렸습니다. 불효자인 저는 어머니의 고통을 조금도 덜어 드리지 못했습니다.”라며 애도의 눈물을 뿌렸지만, 어머니에 대한 애정은 현실에서가 아니라 그의 상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했던 것이다. 이를 ‘동화 작가의 진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안데르센은 언제나 동화나 상상의 세계를 통해서만 외부와 소통했다. 아니, 동화적 상상력을 통해서만 그는 자신의 비천한 출신과 비루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성냥팔이 소녀』는 그의 동화에 대한 동화로도 읽힌다.

상류 사회를 향한 끝없는 욕망
가난한 하층 계급 출신이라는 점을 부끄럽게 생각했고, 성장하면서 ‘타고난 고귀함’이라는 개념에 집착하게 된 안데르센은 작가로 성공한 뒤에는 자신이 속했던 하층 계급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거의 강박 관념에 빠진 사람처럼 자서전을 썼다. 이미 스물일곱 살 때 “내 인생은 멋진 이야기다. 행복하고 온갖 신나는 일로 가득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첫 번째 자서전을 쓰고, 거의 10년마다 새로운 내용을 보탰다. 남의 집 빨래를 해 주면서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간 가난하고 무지한 여인의 아들과, 온 유럽에 명성을 떨치면서 여러 나라의 군주와 사교계 명사들의 친구가 된 작가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커서,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봐야 했다는 것이 전기 작가들의 분석이다.   

안데르센은 ‘시인’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재능은 상류 계급에게 인정받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청년 안데르센이 수도 코펜하겐으로 올라왔을 때 그의 후원자 역할을 해 준 요나스 콜린(Jonas Collin) 같은 인물이 그 상류 계급의 대표적 인사다. 콜린은 그 당시 재정부 장관이자 은행 설립자요, 극단 대표였고 예술가 후원 재단의 사무관이었다. 인자하지만 독재적인 콜린은 곧 안데르센의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안데르센과 콜린의 관계는 안데르센이 자서전에서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지만 나는 아버지(콜린)가 정말로 무서웠다. 그 이유는 내 인생의 행복, 아니 내 온 존재가 그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토로한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콜린은 안데르센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다. “아버지도 아시지요. 제가 아버지께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란 사실을 아버지가 알아주시는 것, 그것이 제게는 가장 큰 자부심이자 기쁨이라는 것을 말입니다.”라는 고백에는 그의 진심이 담겨 있다.  

콜린에게는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고 안데르센은 비슷한 연배의 그들과 자주 어울렸지만, 그들 틈에서 안데르센은 종류가 전혀 다른 생물처럼 보였다. 단단한 체구에 사각형 얼굴, 짙은 색 머리칼을 지닌 콜린 가족에 비해서 비쩍 마르고 길쭉한 몸에 새의 부리처럼 입이 튀어나온 안데르센의 외모는 말 그대로 ‘미운 오리 새끼’를 연상시킨다.   

안데르센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미운 오리 새끼』는 알다시피 정체성에 관한 동화다. 엉뚱하게 오리 둥지에서 깨어난 ‘미운 오리 새끼’는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주변으로부터 차별과 따돌림을 당한다. “내가 못생겨서 모두들 날 싫어하는 거야.”라고 생각한 미운 오리 새끼는 고향을 떠나 온갖 고초를 겪는다. 그렇게 잔인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미운 오리 새끼는 아름다운 백조의 무리를 발견하고 그들에게 헤엄쳐 간다. 오리들에게 쪼이고 닭에게 맞고 겨울에 굶주려 죽느니 차라리 백조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바로 그때 미운 오리 새끼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한 마리 백조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애초부터 그의 참모습은 백조였기 때문에 오리에게서 태어난 것쯤은 아무런 허물도 아니었다.”는 이야기 속 화자의 언급에서 작가의 메시지를 읽어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윽고 ‘백조’가 된 ‘미운 오리 새끼’가 닭장이 아닌 아름다운 정원에서 아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을 만끽하는 것으로 이 동화는 마무리된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자신의 현재 모습에 낙담하지 말고 주변의 냉대와 차별도 잘 견뎌 내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발견하고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동화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리고 반복적인 학교생활이나 직장 생활에 지친 이들이 조금 더 인내를 발휘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준다. ‘혹 내가 미운 오리 새끼는 아닐까?’, ‘백조다운 본질을 되찾으려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고민은 그래도 성냥 불빛보다는 환한 전조등이 되어 줄 수 있다.  

하지만 이 동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계급적·우생학적 전제도 간과하기 어렵다. 일단 고상한 ‘백조’와 평범한 ‘오리’라는 전혀 다른 종의 구분이 있으며, 이들 간의 우열 관계는 이 동화에서 전혀 의심되지 않는다. 이들의 각기 다른 운명은 ‘아름다운 정원’과 ‘농장’이란 공간적 대비에서도 확인된다. 농장에서 태어난 ‘아기 백조’가 열등한 하층 계급 동물들에게 구박받고 쫓겨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아기 백조의 타고난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아기 백조’는 차라리 백조들에게 죽는 게 낫다고까지 여긴다. 여기서 안데르센은 평민들의 운명에 대한 분명한 경멸을 표현한다. 하층 계급 사이에서 고난을 당하느니 상류 계급에게 모욕당하는 것이 더 낫다는 식이다.  

『미운 오리 새끼』는 마치 안데르센의 인생 역전을 보여 주는 듯한 동화지만, 현실에서 안데르센의 운명은 ‘미운 오리 새끼’의 운명보다 덜 행복한 편이었다. 자신이 ‘백조’라는 걸 확인한 뒤 “미운 오리 새끼였을 때, 난 이런 큰 행복은 꿈꾸지도 못했어요!”라고 기뻐하는 ‘백조’와 달리, 안데르센은 자신의 재능과 정체성에 대해서 끝까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고향’은 콜린 집안이었지만 그 고향은 그가 끝내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더불어 안데르센은 자신이 선택받은 부류에 속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검증 필요성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가 평생 동안 신경 질환과 정신 장애에 시달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다른 대표작 『인어 공주』에서 왕족과 사랑에 빠진 인어 공주가 ‘높은 분들’과 섞이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초는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인어 공주는 물 밖으로 빠져나와 왕족들 사이로 걸어 다니기 위해 꼬리가 다리로 변형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다리로 걷거나 춤출 때마다 칼날 같은 아픔을 감수한다. 그녀는 자신이 왕자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는데도, 자기 부류, 자신의 계급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부정과 함께 다만 헌신적인 사랑을 실천할 따름이다.   

백조가 되지 못한 미운 오리 새끼
하지만 이런 것이 안데르센이 보여 준 동화적 윤리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에 대한 가장 탁월한 반전은 말년작 『정원사와 주인 나리』를 통해서 제시된다. 주인공 정원사의 일은 코펜하겐 외곽에 있는 오래된 성에서 오만한 귀족 주인의 정원을 돌보는 것이다. 주인은 그의 충고를 듣지도 않고 실력을 인정해 주지도 않는다. 단지 왕실에서만 그의 실력을 최고로 인정해 주는데, 그렇다고 정원사는 잘난 척하거나 자만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이려 한다. 그리하여 결국엔 덴마크 전역에서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주인 부부는 정원사를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하지 않으며 언제든지 내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이기 때문에. 그런데 주인 부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점잖은 사람들’이어서. 이러한 줄거리 속에는 안데르센이 인생의 말년에 도달하게 된 성찰적 아이러니가 반영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정원사는 안데르센 자신이며, 주인 나리는 콜린가(家) 사람들을 비롯한 그의 후견인들이자 덴마크의 상층 계급이다. 그들은 안데르센을 끝내 ‘시인’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다만 괜찮은 ‘대중 작가’ 정도로 치부했다. 안데르센은 그들에게 예속된 상태에서 평생에 걸쳐 상층 계급을 모범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질서를 정당화하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고통과 굴욕, 모멸과 고문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의 동화가 ‘문명화의 도구’로서 기능하면서도 ‘전복을 꿈꾸는 상상’일 수 있는 가능성은 그러한 인식에서 비롯한다. 안데르센은 비록 비굴한 인물이었지만 자신이 우러러보았던 가치를 동시에 혐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의 진정한 천재성은 이것이 아닐까 한다

09.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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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데르센 동화의 불편한 진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10-21 22:59 
    주말 북리뷰를 대충 훑어보다가 발견한 책은 '주석달린'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주석달린 안데르센 동화집>(현대문학, 2011)이다. 안데르센 동화에 대해 예전에 쓴 글을 좀더 증보할 일이 있어서 안 그래도 책을 구하려고 했는데, 마침 최적의 판본이 나온 듯싶어 반갑다. 냉큼 주문을 넣고 소개칼럼은 스크랩해놓는다.한겨레(11. 10. 22) 안데르센 동화에 첨부한 ‘불편한 진실’안데르센 이야기를 빼놓고 어린 날의 ‘도덕’이란 걸 이야기하긴 힘들
 
 
2009-05-05 0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5 0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이] 2009-05-05 1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원밖에 안되는 안데르센 동화전집이 있었다니!!!!!! 정보고맙습니다

로쟈 2009-05-05 13:53   좋아요 0 | URL
네, 현대지성사판은 너무 비싸죠...
 

'1950년대 문화의 자유와 통제'란 부제를 가진 <아프레걸 사상계를 읽다>(동국대출판부, 2005)는 '사상계'란 잡지명을 지우면 이게 한국의 50년대를 다룬 책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프레걸'이란 생소한 조어 때문인데, '아프레'란 불어에 영어 '걸'이 결합됐다. 이런 단어가 50년대에도 쓰였다니 놀랍다. 사실 더 놀라운 건 전후 폐허의 상태에서 불과 몇년 만에 향락적인 문화가 만연했다는 점이지만. '아프레걸'을 ‘자유를 갈망하던 사회적 약자’로 봐야 한다는 필자들의 견해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지만 50년대 사회 문화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익한 문헌이 될 듯싶다.

  

서울신문(09. 05. 01) 격동의 50년대… 댄스에 빠진 ‘자유부인’은 쾌락 때문?

6·25전쟁에서 4·19혁명에 이르는 1950년대는 격동의 혼란기였다. 전쟁의 폐허 복구 과정에서 경제원조 등을 통해 자본주의의 토대가 형성되는 한편으로 반공주의가 지배이데올로기로 사회 전반을 통제했다. 무엇보다 ‘자유’와 ‘민주’, ‘실존주의’ 같은 근대 서구화 사상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유교적 전통과 관습에 기반한 사회문화적 가치관도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아프레걸= 전후(戰後)+girl
‘아프레걸 사상계를 읽다’(동국대 출판부 펴냄)는 무정형의 욕구가 사방으로 분출되던 1950년대 문화 현상의 실체와 내면을 본격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1950년대는 전근대사회로부터의 탈피를 강력히 추동하는 가운데 새로운 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자양분으로 작용했고, 격렬한 지각변동을 거치게 된다. 권보드래 동국대 교수를 비롯한 10명의 필진은 전통적 가치관과 근대적 가치관, 지성적 열망과 퇴폐적 향락이 뒤엉킨 채 공존했던 당대의 문화를 읽는, 나름의 독법을 제시한다. 그 중심에는 미국 문화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복제의 욕구가 놓여 있다.  

저자들이 주목한 키워드는 ‘아프레걸(Apres girl)’이다. 전후(戰後)를 뜻하는 프랑스어 ‘아프레 게르(apres guerre)’에 영어 단어 소녀(girl)를 합성한 이 조어는 향락, 사치, 퇴폐를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분방하고 일체의 도덕적인 관념에 구애되지 않고 구속받기를 잊어 버린 여성들”로 ‘성적 방종’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신상옥 감독의 영화 ‘지옥화’, 이강천 감독의 ‘아름다운 악녀’ 등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육체적 쾌락과 돈에 대한 욕망을 직설적으로 내뿜는다. 1950년대 서울신문에 연재돼 숱한 화제를 뿌렸던 정비석의 ‘자유부인’은 남편의 제자와 춤을 추러 다니는 중산층 ‘아프레 걸’의 모습을 보여 준다. 영화와 소설에 등장하는 이 아프레 걸들은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저자들은 아프레 걸을 ‘자유를 갈망하던 사회적 약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테면 ‘자유부인’의 주인공 선영이 댄스나 계, 자모회 같은 영역에 진출하게 된 것은 사회적 요구가 작용한 것인데 그 책임은 오로지 여성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지적한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아프레걸들의 일탈은 쾌락과 욕망을 위한 값싼 방종이 아니라 잃어 버린 자아를 되찾는 과감한 모험이라는 주장이다.  

●현모양처 여성상 계몽했던 잡지 ‘여원’도 흥미
아프레걸이 미국의 문물을 소비하고, 댄스와 같은 미국식 문화를 향유함으로써 자유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당대의 새로운 여성상을 대변한다면, 1950년대 지적 운동의 한복판에 있었던 잡지 ‘사상계’는 미국식 합리주의와 실용주의에 기반한 지식 엘리트의 문화를 상징한다.  

1950년대 중반 창간된 여성지 ‘여원’을 통해 여성담론의 변화를 읽어 내는 대목도 흥미롭다. 현모양처 여성상의 계몽을 표방했던 ‘여원’은 짧은 기간이지만 독신여성 같은 다양한 여성 담론을 형성해 냈다. 하지만 곧 농촌여성을 중심으로 한 비도시 하층민 여성이 주 독자층으로 형성되면서 ‘여원’의 편집방향은 대중적 통속화의 길을 걷는다.(이순녀기자)  

09. 05. 04. 

P.S. 1950년대 문화읽기에 참고가 될 만한 책들이 뭐가 있을까 둘러보다가 몇 권을 골라놓는다(기본서는 역시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일까). 1950년대 영화를 다룬 책들이 몇 권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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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눈길을 끄는 책에 대한 서평도 없는 김에 미처 챙기지 못했던 책의 서평을 옮겨놓는다. 도미야마 이치로의 <폭력의 예감>(그린비, 2009)이 그것인데, 지난 3월말에 '아이아총서'의 한권으로 출간됐다. 근래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일본에는 아예 '오키나와학'이라는 것이 성립돼 있으며 <전장의 기억>(이산, 2002)의 저자이기도 한 도미야마는 '오키나와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하 후유의 사상을 통해 '폭력'이라는 주제를 새롭게 고찰한다. '폭력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저항'의 출발점이 되어줄 만하다고 하므로 관심을 가져봄 직하다.  

교수신문(09. 04. 27) 죽임에 처한 자들의 ‘지각’을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오키나와’를 다룬 것이다. 그렇지만 이 때 오키나와는 일본열도의 서남부 끝에 위치한 섬들을 지칭하는 단순한 지리적 명칭이 아니다. 도미야마가 말하는 오키나와는 물론 지역명이지만, 이 지역을 그렇게 명명한 폭력을 되묻기 위한 거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오키나와라는 이름은 지구 전체를 분할해 명명해온 지정학적 시선과 힘을 본원적으로 반성하는 계기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 지정학에 대한 되물음은 역사적 시선과 중첩돼있다. 그 시선은 바로 제국일본이라는 과거 통치 권력의 현재적 잔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제국일본은 현재 동아시아라고 불리는 지역을 스스로의 판도 내에 포섭하면서 유지돼온 통치체제이다. 이 역사는 현재 ‘식민통치’ 혹은 ‘침략’이라는 개념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오키나와는 이 식민과 침략이라는 말에 내포된 지역적 분할을 문제 삼게 한다. 식민과 침략으로 이 역사를 정의할 때, 일본(식민자/침략자)과 오키나와·타이완·조선(피식민자/피침략자)을 가르는 지역적 분할은 자명한 것으로 고정된다.  

이때 식민과 침략의 책임과 피해는 고스란히 현재의 국경을 기준으로 한 국민국가 단위로 승계된다. 그 결과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이 드러냈던 복잡다단한 폭력의 양상은 안정적으로 정리된다. 현존하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략해 통치했던 역사, 이 투명한 인식 안에서 규명될 수 없는 것은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식민지라고 불리던 지역의 경험을 비교 검토해 더 자세한 실상을 드러내 고발하는 일이거나, 제국이라 불리던 침략의 주체가 ‘진출’이라는 말로 스스로의 경험을 여러 경로로 분식하는 일뿐이다. 도미야마는 이런 인식과 사유의 틀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한다.

“내가 지금부터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오키나와 역시 식민지라는 말로 수렵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식민주의라는 개념을 지리적 영역인 오키나와에 적용하고 분석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오키나와는 다른 식민지들과 나란히 놓이게 되고, 상하관계 속에서 서열화되고 비교되면서 공통성이나 이질성으로 표현되기 쉽다. … 다시 말해서 식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경제, 정치, 사회, 문화 그 어떤 문맥을 문제 삼든 간에 먼저 어디가 식민지인가라는 지리적 공간의 문제로 치환되고, 이어서 이 지리적 공간이 이미 설정된 보편적인 식민주의를 체현하는 방법으로 정의되고 분석되며 이해돼 왔다. … 바꿔 말하면 식민주의를 지리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식민주의 혹은 탈식민주의 분석을 가능케 하는 整地 작업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오키나와는 정지되지 않은 빈터로 남겨지게 된다.” 

즉 오키나와는 식민과 침략이라는 타동사적 어법이 전제하고 있는 ‘주/객’ 혹은 ‘능동/수동’의 분할로는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를 드러내는 계기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오키나와는 기존의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의 언어와 개념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잔여의 경험, 결코 언어가 다다를 수 없는 경험을 적시해준다. 그도 그럴 것이 오키나와라는 물음 앞에 역사적으로 형성된 지정학적 분할은 분석과 비판의 힘을 잃는다. 과연 오키나와는 일본인가. 오키나와는 일본의 식민지였는가 미국의 점령지였는가. 이 하나 하나의 물음에 답하다보면 오키나와는 갈기갈기 찢겨진 분열적 역사경험을 고백하게 될 터이고, 이 때 오키나와라는 이름이 하나의 균질적이고 통일된 정체성을 드러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런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식민과 침략이 자행한 폭력이라고 도미야마는 지적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폭력이 결코 철학적이거나 이론적으로 추상화돼 사념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총살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대열”에서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이가 감지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이에 대한 저항은 “살해당한 시체 옆에 있는 자가 획득해야 할”가능성이다. 따라서 이 폭력을 분석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더 나아가 이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폭력이다’라는 식으로 폭력의 범주를 유형적으로 설정하고, 그것에 사례를 환원하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표현상의 절박함이 중요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 폭력을 분석/비판하고 저항하기 위해서는, 말이 더 이상 발화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혹은 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경험을 전달하는 ‘記述’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총살을 기다리는 자는 폭력에 벌거벗은 채 노출돼 있기에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 죽은 것은 아니기에 말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도미야마가 말하는 폭력 비판의 출발점, 그 저항의 거점은 바로 이 순간, 말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지만 아직 상실되지 않은 순간이다.

“압도적인 약세의 위치에서 방어태세를 취하는 누군가를 기지의 폭력으로 압살하는 것이 예정된 어떤 특정 시대나 사회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결말이 나지 않은 현재의 상황에 존재하며, 이런 상황에서 폭력에 대항할 가능성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기술은 예감하는 것에서 재개해야 한다.”『폭력의 예감』은 그래서 폭력이 다가옴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일 따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예측과 대비는 이미 폭력행사의 주체와 객체를 확정하는 지식과 技術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압도적 약세의 위치에서 방어태세를 취하는’ 이들이 결코 지닐 수 없는 사치스러운 도구에 다름 아니다.

도미야마가 말하는 예감은 이미 태생적으로 방어태세를 습득한 이들의 ‘지각’이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저항은 이 지각을 어떻게 ‘언어표현’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 때 언어는 중립적인 척하면서 보편적 시각틀을 제공하는 무시간적 매체이기를 그친다. 이와 달리 도미야마는 “글은 밀폐된 교실에서 사용되는 교과서가 아니라, 버려지는 전단지이며, 팸플릿이라는 사실임을 주지하고 말을 자아낼 때의 긴장감을 생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단지와 팸플릿의 언어, 어찌할 수 없는 폭력 속에서 가까스로 발화하는 자의 언어, 과연 폭력은 이 언어를 통해 어떻게 타격을 입을 것인가. 총살을 기다리는 자의 언어와 저항으로까지 일상속의 스스로를 전락시키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상처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 도미야마는 조심스럽게 경고하고 있다. 이 전락을 성취하는 일, 여기서부터 폭력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저항은 출발해야 할 것이다.(김항 고려대 HK연구교수·문화연구)   

09. 05.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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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jjismy의 생각
    from jjjismy's me2DAY 2009-05-04 12:27 
    바꿔 말하면 식민주의를 지리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식민주의 혹은 탈식민주의 분석을 가능케 하는 整地 작업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오키나와는 정지되지 않은 빈터로 남겨지게 된다.
 
 
람혼 2009-05-03 01:08   좋아요 0 | URL
김항 선생의 글이군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폭력의 예감>은 저도 정말 우연한 기회에 구입하게 되어 낮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읽은 책입니다. 특히나 '겁쟁이들'이라고 하는 '문제적' 정체성으로부터 폭력의 '지각'과 '예감' 문제를 들고 나오는 데에서는 짜릿한 전류까지 맛보기도 했습니다. 근대성과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 향후 반드시 참고해야 할 문헌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Guattari와 Poulantzas에 다시금 주목하게 해준 것도 이 책의 '공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로쟈 2009-05-03 11:00   좋아요 0 | URL
아, 벌써 읽으셨군요! 폭력에 대해서 뭔가 쓰시는 건가요?^^

람혼 2009-05-03 13:17   좋아요 0 | URL
^^

2009-05-03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3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3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9-05-05 08:32   좋아요 0 | URL
'미리'가 안되는 일이죠.^^;

게슴츠레 2009-05-03 13:09   좋아요 0 | URL
서구의 이론들을 가지고 또는 그에 기초해 만든 독자적인 이론틀을 가지고 나름대로 일본의 문제나 동아시아의 문제를 해석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일본의 학계를 보면 부러운 마음이 일단 먼저 듭니다. 최근 들어 제 자신이 어떤 위치, 특히 어떤 '지리적 위치'에서 공부를 하게 되는지 느끼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책들에 관심이 이래저래 쏠리게 되는군요.

로쟈 2009-05-05 08:32   좋아요 0 | URL
대담집 <세계사의 해쳬>를 읽으면서도 그런 인상을 받습니다...
 
제국러시아의 코레야 견문록

이번주에 내가 관심도서로 분류한 인문서는 대담집 두 권이나 아직 언론리뷰가 뜨지 않는다. 내주로 넘어간 모양이다. 덕분에 일이 헐거워졌는데, 가뜩이나 일이 많은 터라 다행이긴 하다. 대담집 대신에 잠시 눈길이 간 책은 프랑스인 고고학자가 쓴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글항아리, 2009). 기사에서 언급된 대로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한국 관련서가 유럽에서 다수 쏟아져나왔는데, 이 책은 내용이 충실해서 당시 베스트셀러가 됐다고도 한다. 그게 어떤 수준인지 호기심을 가져봄 직하다.

경향신문(09. 05. 02) 프랑스인 눈에 비친 몰락앞둔 제국의 흔적 

“흥미로운 일이다. 이 정부에서는 항상 큰 개혁은 옷으로 하려니 말이다. 과거에는 주민에게 담뱃대 길이를 줄이라고 강요한 적이 있었다. 그 다음에는 옷소매를, 모자챙을 줄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고고학자이자 철도와 광산개발에 관련된 기술자문을 했던 에밀 부르다레는 대한제국을 이렇게 비판한다. 그런가 하면 오래된 왕조의 완숙한 예술과 장인들의 숨결, 직물·도자·그림·조각 등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에 탄복한다. 1904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원제 ‘En Core’e’)은 1900년대 초반 몇해의 한국을 세심하고도 애정 어린 눈길로 그려냈다.  

1882년 미국인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가 <은자의 나라 조선>을 펴낸 이후 1910년까지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이탈리아어 등으로 된 한국 관련 서적은 50종에 이른다. 그러나 한국에 관한 인상기나 견문기 수준에 머무는 게 대부분이다. 그에 비해 4년여의 체류에서 나온 부르다레의 책은 충실성 덕분에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필자는 고종이 이끈 대한제국이 변화하려는 노력에도, 스스로의 명백한 한계와 일본의 간교한 식민지 포섭활동으로 인해 무너질 수 없었던 슬픈 현실을 증언한다. 그는 앞선 인용문처럼 조선 정부나 관료들의 형식적인 개혁을 비판하는가 하면, 위조화폐로 조선의 쌀을 사들여 일본으로 가져간 뒤 비싼 값에 되파는 제국주의의 만행을 고발한다. ‘불결’하고 ‘악취’나는 조선의 근대화 필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조선의 문화에 대한 세밀한 관찰도 돋보인다. 시내를 활보하고 극장에서 배우에게 추파를 던지는 양반의 거들먹거리는 모습, 강한 식탐으로 먹고 마시고 취하는 장면, 손님이 가격을 물어봐도 대꾸 않는 행상, 아무데나 쓰러져 자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건축에 대해서는 “건물은 풍경을 강조하는 기분을 자아내며 풍경은 건물의 개성을 의도적으로 부추긴다”면서 후한 점수를 준다.

특히 양반의 모습, 문화유적, 축제 등을 찍은 흑백사진 30장과 극장 ‘협률사’ 내부구조 및 공연장면, 궁중연회 식순, 전차를 타고 교외로 놀러가는 젊은이들의 유람문화 등은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한윤정기자) 

09. 05. 02.  

P.S. 외국인들이 견문록은 집문당에서 '한말 외국인 기록'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완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사에서 언급된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집문당, 1999)도 그 시리즈의 책이다(번역 수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러시아인의 견문록으로는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의 <코레야 1903년 가을>(개마고원, 2006)과 곤차로프의 <러시아인, 조선을 거닐다>(한국학술정보, 2006) 등이 있다.   

이 주제에 대한 연구서도 나옴 직한데, '한말 외국인 기록' 시리즈를 기획한 신복룡 교수의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풀빛, 2002) 외 다른 책이 있었던가 싶다.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비롯해서 당시의 대표적인 한국 관련서들의 내용과 영향 등은 짚어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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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5-02 15:43   좋아요 0 | URL
주머니 사정만 허락된다면 이런 책들을 모조리 사서 읽고 싶습니다만...신복룡 씨 저 책은 상당히 재미있더군요.스웨덴의 구스타브 왕자가 일제 시대 때 우리나라에 와서 조선 총독부 후원하에 우리나라 야생동물을 왕창 잡아서 박제로 만들어 자기 나라로 가져간 사연이 있는데...나라를 빼앗기니 동물도 수난이죠.

로쟈 2009-05-02 18:19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이 관심을 가지실 줄 알았습니다. 헌책방에 아직 안 나온 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09-05-03 16:35   좋아요 0 | URL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한 것 몇권은 저도 있어요. 헌책방에서 구한 게 대부분이죠.비숍 것은 이인화 번역본이에요.집문당에서 나온 시리즈는 도서관에 있더라구요.우리나라 동식물 연구서가 몇권 나와서 관심있게 본 적이 있습니다.혹시 관심 있으시면 얀코프스키에 대해 알아보세요.일제시대 때 부자가 북한에서 조선 호랑이 사냥하던 폴란드 계 러시아인입니다.작가는 아니라서 바이코프만큼 알려지지는 않았는데 최근에 북한에서 맹수사냥하던 이야기를 회고록으로 남겼다는 말이 있더라구요.

로쟈 2009-05-05 09:04   좋아요 0 | URL
특이하게도 폴란드 계 러시아인이 많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5-05 15:56   좋아요 0 | URL
예.제가 소수민족으로 유명해진 사람들에 관심이 많아서요.바이코프도 우크라이나 사람이죠.그런데 고골리는 우크라이나 사람인가요,아니면 우크라이나에 산 러시아 사람인가요?

로쟈 2009-05-05 16:50   좋아요 0 | URL
고골은 우크라이나 태생입니다. 스무살에 페테르부르크로 상경합니다. 한데, 러시아어로만 작품을 썼습니다. 우크라이나인이란 정체성은 거의 없었던 듯싶어요. '러시아인'으로서 사고하고 작품을 썼습니다. '소수민족으로 유명해진' 경우는 아닌 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5-05 17:0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2009-05-03 00:28   좋아요 0 | URL
집문당에서 나온 '한말 외국인 기록' 시리즈의 번역은 '논란이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학생들한테 과제로 번역을 나눠 맡기고 모아서 책으로 펴낸 모양인데, 정말 비양심이랄 밖에...-_-^

노이에자이트 2009-05-03 16:36   좋아요 0 | URL
음...우리나라 학문이 발전하려면 제발 위계질서 속에서 일어나는 찢어쓰기 번역을 중단해야 합니다.
 
사르트르의 죽음과 철학
'지식인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는가

'지식인의 지식인'을 다룬 기사를 옮겨놓고 나니 20세기 '원조' 지식인이라고 할 사르트르에 관한 평전 소식도 빼놓을 수 없겠다. 사르트르 세대 이후 가장 '대중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쓴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 2009). 역자는 사르트르 전문가인 변광배 교수다. 968쪽에 달하니까 얼추 안니 코헨 솔랄의 세 권짜리 평전 <사르트르>(창, 1993)에 이어서 가장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는 게 아닌가 싶다. 시간만 된다면 작년말에 나온 박홍규 교수의 <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열린시선, 2008)와 함께 묶어서 읽어보고 싶다. 20대로 다시 돌아간 듯한 느낌이 좀 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가 되기도 하고. 초심자라면 사르트르의 <지식인이란 무엇인가>(이학사, 2007)와 함께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을유문화사, 2005)을 같이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레비를 당혹하게 만든 사르트르의 '선'과 '악'을 미리 만나볼 수 있다.

문화일보(09. 05. 01) '진리의 화신’ 사르트르를 발가벗기다 

“사르트르는 그저 국가원수처럼 환영받고 신망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의 국가였다. 그는 진리의 화신이었다. 그는 전 지구적 차원의 도덕적 권위를 가진 자였으며 사람들은 그의 면죄부를 먼저 획득하고자 서로 다투었다. 실제로 1950년대는 물론 1960년대에도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에게 밀사를 파견하지 않은 민족해방운동, 혁명집단, 소수과격파, 압제의 피해자들, 같은 정신 신조를 가진 자들, 반란을 일으키고, 총살당하고, 박해당하던 학생들의 연합은 거의 없었다.”

책이 프랑스 철학자 클로드 란츠만의 저작을 인용, 장 폴 사르트르를 설명한 말이다. 책에 따르면 사르트르는 한 사람의 철학자나 문학가가 아니라 하나의 브랜드였다. 어떤 철학적, 정치적, 문학적 사유로 그는 소란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20세기를 그처럼 완벽하게 그 자신 속에 구현할 수 있었을까.  



책은 제목 그대로 사르트르 평전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40세였다”라는 책의 첫 문장에서 보이듯 그의 전 생애가 오롯이 담긴 평전은 아니다. ‘세기의 인간’으로서 사르트르의 삶을 다루되, 사르트르의 사상과 문학의 공정한 평가에 무게 중심을 두고 내적 일관성과 모순을 파헤치는 데 치중했다. 문제는 잣대다.

책의 저자는 프랑스 신철학의 기수이자 대표적인 참여 지식인으로 꼽히는 베르나르 앙리 레비. 처녀작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에서 스탈린 독재와 집단수용소의 존재를 묵인한 서구 좌파를 통렬히 비판, 프랑스 지성계를 들쑤신 이력에서 보이듯 사르트르를 보는 눈은 착잡하다. 어떻게 ‘존재와 무’, ‘구토’로 대표되는 절대 자유를 추구하며 니체주의적 경향을 가진 인물이 모택동주의자의 기관지 ‘인민의 대의’를 지지하고,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의 전체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인 사르트르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한 사람이 이것을 하고, 또 저것을 할 수 있는가.

책이 출간되기 20년 전, 레비가 사르트르의 장례식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책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감한 이유다. 당연히 책은 사르트르가 두 인간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 중에서 한 사르트르는 ‘선(善)’이고, 또 다른 사르트르는 ‘악(惡)’이다. 현존 프랑스 최고 지성이자 작가인 레비는 20년 동안 “가슴에 안고 지내며 꿈을 꾸고 되새김질하다” 쓴 책에 걸맞게 책은 풍성한 전거(典據)에 바탕해 바람몰이하듯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 자체가 한 국가였던 사르트르의 면모는 보부아르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 편력에서 그의 문학과 사상, 그리고 만년의 건강에 이르기까지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특히 2차세계대전을 계기로 완전히 바뀌고 어느 순간 철학적인 실패를 예감하다 끝내는 과거의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는 사르트르 사상의 여정은 보다 적나라하게 파헤쳐진다. 레비가 이 책에 ‘철학적 탐구’라는 부제를 붙인 배경이다. 



약 1000페이지에 이르는 책은 묵직하고, 다루는 내용 또한 20세기 지성사를 종횡무진하지만 책을 읽기는 의외로 경쾌하다. ‘아메리칸 버티고’에서 보여준 예리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문체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사르트르의 삶과 사상의 단절, 이중성에 주목한 책은 그 후 적잖은 반박을 불러왔다지만 평전으로서 근래 보기 드문 수작임에 틀림없다. 쉽잖은 내용을 우리말로 옮기면서도 책의 내용은 물론, 레비 특유의 문체와 책읽는 재미까지 고스란히 살려 놓은 번역자의 역량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김종락 기자) 

09. 05.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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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르트르가 만난 사람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6-24 18:34 
    두어달 전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묵직한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 2009)이 출가된 데 이어 이번엔 사르트르 자신의 묵직한 책이 출간됐다. <시대의 초상>(생각의나무, 2009)이란 제목이 붙은 그의 <상황4>가 우리말로 번역된 것. 그의 다양한 시론(時論)들이 <상황> 시리즈에 묶인 건 알고 있었고, 그 중 <상황2>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8)이란 것도 알고
 
 
merci 2009-05-02 08:59   좋아요 0 | URL
오, 관심 가는 책이 또 하나 나왔군요! 어서 보아야겠네요. ㅋㅋ
그런데 위에서 추천해주신 <지식인의 두 얼굴>은 사르트르 부분만 관심이 있어서 예전에 봤었는데, (제 기억이 맞다면) 지극히 사적인 여성편력에 대한 비난만으로 - 심지어 비판도 아니고 - 가득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요?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노이에자이트 2009-05-02 15:46   좋아요 0 | URL
폴 존슨이 원래 진보파였다가 70년대에 전향한 뒤로 그런 책들을 많이 썼지요.특히 진보파들의 추문을 많이 파헤쳤구요.전향자들은 그런 심리가 있는 모양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5-02 15:45   좋아요 0 | URL
앙리 레비<자유의 모험>에도 사르트르를 많이 비난했더라구요.그렇다고 우익계열을 칭찬한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우상파괴 작업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아요.